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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 2024년 봄호

문학의 경제학 ― 문학적 ‘배움’과 ‘세대’에 관한 이론적 검토

강동호 문학평론

1984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같은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 취득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이후 평론 활동 시작.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으로 활동. 젊은평론가상, 대한민국 예술원 젊은예술가상 등 수상. 저서로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 - 문학의 동시대성과 비평의 정치』(문학과지성사, 2022) 등이 있음.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로 재직중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
—자크 데리다, 「더블 세션」1)


하지만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주길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거의 없음ce peu입니다.
—미셸 푸코, 「문학과 언어」2)



1. 도입


  문학성이라는 어휘는 동시대 비평 담론에서 그다지 환영받는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성을 탐구하고, 그것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는 모종의 보편성 또는 고유한 본질을 향한 의심스러운 집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확실히 문학성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시공을 초월한 실체적 가치라는 시대착오적 표상을 가리키며, 과거에 대한 퇴행적 노스탤지어를 떠올리게 한다. 보편성에 대한 동시대적 의혹은 문학성이라는 개념이 권력을 지닌 소수의 통치 엘리트들의 관념화된 믿음과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이라는 주장에 이를 때 극적으로 정당화된다. 현재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게 될 때, 우리가 문학성을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탈신비화해야 할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지목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결과적으로 문학의 본질에 대한 논의 필요성은 사라지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역시 최종적으로 극복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문학의 본질은 없다’는 결론에 대부분 흔쾌히 합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라는 기호를 매개로 특정한 텍스트들을 지시하는 담론적 실천들은 여전히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혹은 이론적으로) 우리는 문학의 본질(문학성)을 해체해야 한다고 선언하지만, 경험 세계에서는 문학과 문학이 아닌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고, 특정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비평적 식별 체제는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중이다. 이것은 문학성에 대한 역사주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들의 문학적 가치를 사유하는 과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는 않음을 말해준다. 문제는 이 둘을 혼동해버리면, 문학의 본질이 해체되었다는 확신 속에서, ‘문학’이 일종의 물신화된 텅 빈 기표처럼 담론 바깥에 배치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일찍이 강보원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정확히 짚은 바 있다.


문학성을 상대화한다는 것은 문학을 상대화하는 것과 다르다. 문학성이 상대적인 것일 때 우리는 원칙적으로 모든 종류의 글쓰기를 잠재적인 문학적 텍스트로, 그러므로 그것의 바깥이 없는 그러한 글쓰기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상대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대화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작용한다. [……] 이 지점에서 문학이란 무엇으로든 채워질 수 있는 텅 빈 기표로, 이제까지는 존재한 적 없던 광활한 영토로, 자신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만큼은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3)


  문학성을 상대화하는 것과 문학을 상대화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문학이 ‘역사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산물’이라는 결론에서 멈춘다면, 문학이라는 언표가 현재에도 양산하는 다양한 실정적 힘들, 그리고 그것이 은연중에 의존하고 있는 부정신학적 신비주의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4)

  물론 대안적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문학’을 변화하는 현실과 사회적 기대를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이며 문학에 대한 정의 역시 그러한 시대적 요구를 표현하고 대의하는 잠정적 기호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문학’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생성되는 허구적 텍스트들을 지시하는 일시적 언표이자 제도적 협약의 결과에 가까워진다. 일종의 유명론nominalism에 가까운 이러한 시각의 한계는 문학적 담론과 그것이 실천하는 가치 평가의 유일한 근거로 ‘현실’이 채택된다는 데 있다. 현실이 문학의 유일한 근원으로 지목될 때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문학과 현실’ 중 무엇을 중요시할 것인가라는 이분법을 강요한다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문학과 현실을 둘러싼 강화된 이분법은, 내가 일전에 재현 체제representative system라고 불렀던 대의제 정치representative politics 모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5) ‘어떤 것이 좋은 문학이냐’라는 실제적 물음 앞에서 대답은 ‘누가 현실의 문제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재현/대변하는가’로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텅 빈 기표처럼 물신화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이라는 기호이다. 재현/대의를 둘러싼 주체의 정당성 문제로 논의가 좁아진다면, 비평적 논쟁은 국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적대적 분열을 가속화하는 오늘날의 망가진 정당정치와 유사해질지도 모른다.

  문학이 현실을 재현하지 않거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서는 안 된다는 비상식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문학과 현실 사이의 일원화된 관계 속에서 텍스트를 읽게 되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갈등적이고 비생산적인 권력 게임으로부터 초점을 이동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질문과 탐구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의 관심은 문학의 역사성과 문학의 내재적 원리라는, 겉으로는 이율배반적인 두 원리를 매개할 수 있는 이론적 방법론을 다시 고민하는 일이다. 어쩌면 문학의 본질(문학성)은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원리의 양립 가능성을 지시하는 메커니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보원의 글이다.


현실의 변화에 따라 문학성은 물론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문학은 시장과 제도와 권력 등의 수많은 요소에 영향을 받고 그것들과 함께 형성되는 담론이다. 다만 우리가 총체로서의 문학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서 문학의 내재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글을 쓰는 이가 하필 문학이라는 장르를 선택해 무엇인가를 표현할 때 문학이 그 표현의 내용과 그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주체 자신을 변화시킨다고 전혀 생각할 수 없다면, 문학이란 담론은 그 어떤 대화도 생성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문학은 단순히 자신을 생성하는 현실과 현실적 주체를 단순히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이란 다른 어떤 것이라기보다 단지 그러한 직접적 반영에 저항하는 작인을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본질은 대상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총체성이 아니며, 단지 총체로서의 대상을 이루는 하나일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학을 이루는 많은 요소 중 그러한 의미의 본질도 아주 조금 있다는 것이다.6)


  최근 강보원은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는 데리다의 명제를 변주하며, 역사적 해체와 재구성의 시간 속에서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 문학의 ‘본질’을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급진적 제안을 ‘선험적이고도 고정불변하는 문학이 있다’라는 비역사적인 주장으로 오해하지 않는 것이다. ‘아주 조금 있는 문학’(데리다), 혹은 ‘거의 없는 문학’(푸코)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문학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은, 역사와 현실의 압력 속에서도 완전히 소진되지 않는 잔여로서의 문학을 지시하며,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문학의 자체적 역량을 증언하는 말로 읽혀야 한다. 관건은 이처럼 거의 보이지 않는 문학의 존재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만의 고유한 역량이 활성화되고 확산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관측하는 방법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 글이 제안하는 ‘문학의 경제학’은 이를 시도하기 위한 일종의 시론적 모델이다. 경제와 문학을 이론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오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경제라는 비유적 모델을 채택하는 이유는 문학적 가치(문학성)가 생산, 소비, 인식, 측정, 평가, 해석되는 과정을 교환의 메커니즘으로 조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상품이 거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경제라는 독특한 문화적 장에서 문학적 가치에 관한 교환 행위가 발생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교환은 상품을 둘러싼 교환 행위와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교환의 원리를 바탕으로 문학의 가치를 탐구하는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를 중시하는 실증주의적 모델과 구분된다.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의 가치를 대상(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실체적 요소로 전제하는 대신, 작품과 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순환과 교류,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체계 속에서 창발되는 것으로 가정한다. 기존의 전통적 문학 이론에서 문학성은 창조되고 발견되어야 할 것이지만, 문학의 경제학에서 문학의 가치는 문학적 교환을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어야 하는 것에 가깝다.

  문학의 경제학이 독단주의적 관념론을 경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의 본질에 대한 주관주의적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를 결론으로 삼는 것 역시 아니다. 문학의 경제학에서는 여전히 문학의 가치를 생산/소비할 수 있도록 만드는 남다른 교환의 원리와 체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문학적 가치의 성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학이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관계주의적 모델이다. 문학성은 이러한 문학의 교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독특한 화폐의 성격을 지니며, 문학의 자율성은 이 화폐를 매개로 문학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특수한 담론적 네트워크를 지시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것이다. 우리가 문학의 본질, 혹은 어떤 텍스트의 문학성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와 같은 체계와 원리의 특수하고도 내재적인 성격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 이때 이 글에 주어진 화두로서의 ‘배움’과 ‘세대’는 문학의 경제적 교환 관계를 이론적으로 스케치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2. 경제적 가치란 무엇인가


문학의 경제에 대한 이론적 가설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라는 용어에 대한 몇 가지 개념적 재규정이 시도되어야 한다. 오늘날 경제라는 어휘는 일반적으로 상품, 시장, 화폐, 기업 등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단어 목록을 즉각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경제를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 그러나 경제라는 개념이 재화, 상품, 용역, 서비스 등 시장 안에서 거래되는 품목으로 한정되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을 통과하며 나타난 이데올로기적 현상일 뿐이다.7) 경제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는 그보다 더 넓다. 가령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경제적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발화자와 수신자의 커뮤니케이션 관계로서, 기호화와 해독에 기초하는, 즉 코드 또는 언어생성 능력의 사용에 기초하는 언어의 교환은 경제적 교환이기도 하다.”8) 우리는 언어적 대화 국면 속에서 무언가(그것을 통상 ‘메시지’라고 부른다)를 주고받으며, 이러한 언어적 교환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메시지를 둘러싼 코드와 규약, 즉 사회적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9) 일상의 커뮤니케이션을 경제로 묘사하는 것의 이점은, 언어적 교환 행위 속에서 생산, 소비, 유통되는 메시지의 가치에 내포된 사회적 성격을 규명하고, 그것을 근거 짓는 사회적 질서의 토대를 가시화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경제라는 어휘를 시장의 경제와 조금 다른 지평에서, 좀더 포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경제란 특정한 가치 위계 내부의 가치들을 거래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 삶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는 그중 한 부분이다. [……] 여기서 말하는 경제는 시장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경제는 시장보다 더 오래되고 더 포괄적이다. 시장은 특정한 경제의 혁신적 특성 중 하나일 뿐이며 그렇기에 아무 조건 없이 그 자체로 규정될 수 있는 혁신의 원천으로 기능할 순 없다. 상품 교환의 경제뿐 아니라 희생, 탕진, 폭력, 점령의 경제도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0)


  보리스 그로이스의 지적처럼, 경제적 교환은 특정한 ‘가치’들의 거래 현상을 가리키며, 이러한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체제와 원리(“가치 위계 내부”)를 지시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시장경제는 수많은 경제적 체제의 유력한 하나를 나타낼 뿐이지,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물론 최근에는 사회 전체를 점령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가치가 생산·소비되고, 그것을 교환·유통시킬 수 있는 체제가 정비된 곳이라면 어김없이 경제적 논리가 작동한다. 상품의 경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경제, 혹은 더 좁게는 문학의 가치가 거래되고 교환되는 시공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경제학에서 이론적 탐구와 분석의 대상이 되는 핵심 문제는 가치value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다. 경제적 가치는 교환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욕망의 원천이자,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이해관계의 토대를 구성한다. 가치가 전혀 없는 대상을 원하고 거래하는 경우를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다.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면서 특정한 상품이나 재화를 구매한다면, 그 대상에 자기가 생각하는 쓸모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그러한 소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메시지 교환이 의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굳이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면서까지 어떤 작품을 읽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을 통해 모종의 보람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거래 대상이 일정 수준의 기대치를 충족해주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구매, 대화, 읽기는 즉각 중단되고, 동일한 대상을 매개로 한 교환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는다.

  주목할 것은 이때 가치는 욕망의 대상이지만, 교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가치는 교환의 필요조건이지만, 그 자체로 충분조건은 아니다. 가치가 교환과 거래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주고받는 상품, 담화, 작품의 가치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평가 기준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학은 가치의 측정 가능성(혹은 인지 가능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거래 대상 사이의 대체 가능성이라는 ‘동일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이때 ‘가치’와 ‘측정’의 문제는 동시적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는데, 측정 불가능한 가치는 교환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저해할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거래 불가능한 가치, 존재하지 않는 가치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관계를 분석하는 데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대상의 ‘가치’ 유무를 판별하는 것이고 그것을 측정 가능한 단위로 환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합의가 과연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관한 탐구 과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경제적 교환의 성격에 관한 최초의 고찰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돈을 일종의 척도(metron)로서, 물품들을 같은 척도로 잴 수 있게 만들어 그것들을 동등하게 만든다. 교환이 없었다면 공동체도 없었을 것이며, 동등성이 없었다면 교환도 없었을 것이고, 같은 척도에 의해 측정 가능성(symmetria)이 없었더라면 동등성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큰 차이를 가진 것들을 같은 척도로 잴 수 있다는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필요와 관련해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11)


  ‘정의dikaisoynē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 가운데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12)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시장market’에서 실현되어야 할 정의(‘교환의 정의’)의 문제를 짧게 다룬다. 교환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교환되는 대상의 가치가 측정되어야 하고, 서로 다른 재화 사이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원리가 설명되어야 한다. 이때 ‘돈’은 그것을 가늠케 하는 척도이자, 거래 품목 사이의 동등성을 기초하는 사회적 합의의 징표에 다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교환의 정의는 바로 이러한 동등성이 실현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동등성의 원리 속에서 누군가가 부당한 편익을 취하지는 않는지를 따지는 ‘비례성의 준칙’을 뜻한다. 문제는 엄연히 질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 서로 다른 재화들 사이의 동등성을 설명하는 것이 지극히 까다롭다는 사실이다. 가령 사과 한 개와 책상 한 개의 실질적 가치를 어떤 기준으로 정확히 측정하고 비교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둘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다만 사회적 필요(“우리의 필요”)일 뿐이라고 전제하며 자신의 분석을 매듭짓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13)


  최초의 경제학이 형성되는 데 있어 이 가치의 측정 가능성 문제가 가장 중요하면서도 일차적인 화두가 되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다이아몬드와 물의 역설’14)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유명한 문제 제기에서부터 시작해 데이비드 리카르도, 카를 마르크스 등 근대 경제학의 위대한 창시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가치척도의 기초를 정립하고, 그를 바탕으로 경제적 교환의 원리를 도출하는 데에서 자신의 경제학적 이론을 펼친다.



3. 가치의 두 패러다임


가치value는 오직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카를 마르크스15)


경제 법칙 또는 경제적 경향에 대한 연구는 주로 화폐의 가격money price으로 측정될 수 있는 동기들motives의 강도와 관련된 행동들을 다루는 사회 법칙이다.
—앨프리드 마셜16)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멈춘 지점에서 이를 재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본론』 1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재는 바로 그가 상품의 가치표현에서 하나의 동등 관계를 발견한 데서 훌륭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만, 그가 살고 있던 사회의 역사적 한계 때문에 바로 이 동등 관계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해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17) 마르크스가 지적하고 있는 ‘사회의 역사적 한계’란 무엇일까. 여기서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상품 사이의 동등관계를 형성하는 토대로서의 사회적 관계, 즉 분업과 협업을 통한 생산 시스템으로서의 생산 관계이다.18) 특정한 생산 관계가 역사적으로 출현한 이후에야 상품의 가치를 결정짓고 측정하기 위한 본질적 요소가 추출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것이 바로 인간의 노동이다. “상품의 가치의 크기는 어떻게 측정하는가? 그 물건에 들어 있는 ‘가치를 형성하는 실체’인 노동의 양에 의해 측정된다.”19) 상품과 상품 사이의 교환을 매개하는 동일성의 원리는 각각의 상품들이 생산되는 데 투여되었던 추상화된 인간 노동abstract human labour의 양(시간)으로 환산될 수 있다. 상품의 유용성(사용가치)은 그것의 물리적 가치를 나타낼 뿐, 그 자체로 상품의 성격을 충분히 담지하지 못한다.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그것들의 이중적인 성격, 즉 사용의 대상임과 동시에 가치의 담지자”20)라는 사실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흔히 교환가치라고 불리는 ‘표현 양식form of appearance’이 상품을 대변represent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21) 만들어야 한다. A라는 상품이 B라는 상품에 비해 더 비싼 이유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여되었던 노동의 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의 노동가치설은 후대의 경제학 이론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글의 관심사는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의 타당성을 논하는 데 있지 않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정립한 가치 측정 모델에서 전개되는 분석적 관점은 문학의 경제학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비교항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상품의 가치를 구성하고 측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체적 단위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품들 간 가치의 우열을 판단할 수 있다는 본질주의적 환원론을 대변한다. 이 글에서는 이를 잠정적으로 가치의 객관주의objectivism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르자.

  한편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재화22)의 가치에 접근하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를테면, 앨프리드 마셜에 의해 정초된 가격 이론은 마르크스가 제안한 노동가치설의 객관주의적 패러다임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전혀 다른 방법론 속에서 재화의 가치가 결정되는 메커니즘을 조명한다. “어떤 물건의 가격은 일반적인 물건에 대한 상대적인 교환가치, 즉 일반적인 구매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23)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주류 관점에서 재화의 교환가치(가격)를 결정하는 것은 상품의 사용가치도 혹은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여되었던 노동력도 아닌, ‘구매력’이다. 요컨대 재화의 가치는 그것을 수요자가 얼마나 원하는지, 해당 재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에 달려 있다. 특정 재화의 본질적인 유용성(사용가치)을 해명하는 것, 나아가 그것을 산출하는 데 동원되었던 인간의 노동을 분석하는 작업은 수요자의 주관적인 만족도를 가늠하는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처럼 수요의 측면에서 관측(혹은 전제)될 수 있는 만족도를 지시하는 경제학적 개념이 ‘효용utility’이다.24)

  마르크스 경제학이 주장하고 있는 객관주의적 패러다임과 신고전학파 경제의 결정적인 차이는 가치의 실질적 본질에 대한 철저한 이론적 무관심성에 있다. 재화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가 없으며, 가격은 단지 시장에 참여하는 수요자들의 주관적 효용을 반영할 뿐이다. 어째서 소비자는 특정 재화에 더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까지 그것을 얻고자 원하는가? 실제 원인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단지 그로부터 그만큼의 효용을 느낀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A라는 재화가 B라는 재화에 비해 비싼 이유는, 그것에 그만큼의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만족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이 아닐까?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이 지닌 이론적 설득력은 재화의 가치를 규정하는 실질적인 법칙은 없지만, 소비자의 효용을 설명하는 일정한 법칙(한계효용의 법칙)은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수요 곡선을 도출할 수 있다는 데에서 마련된다. 이른바 시장에서 형성되는 재화의 가격은, 시장에 참여하는 두 주체(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의 합리적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균형점equilibrium을 가리킨다. 따라서 경제학의 학문적 목표는 다양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이 균형의 역동성을 분석하는 일이다. 이처럼 대상의 본질적 가치보다는 교환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효용과 이득에 집중하는 관점을, 이 글에서는 잠정적으로 가치의 주관주의subjectivism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과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각각 대표하는 가치의 두 패러다임은 문학의 경제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참조항이다.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문학의 경제에서 가치가 산출되는 특수한 양상을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최소한으로 얻을 수 있는 첫번째 결론은, 가치에 대한 두 패러다임 모두 문학의 가치를 측정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객관주의적 패러다임에 따르면 다양한 상품들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게 하는 실체적 요소가 있어야 하지만, 문학의 경제에서는 작품의 가치를 지표화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가령 노동시간 같은)를 지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과거의 러시아형식주의처럼 그에 대응되는 이론적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문학 이론의 역사는 그러한 실증적 환원이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마르크스가 전제하고 있는 단일한 사회적 관계(생산관계)를 전제할수 없기에, 문학의 경제에서는 작품의 생산 층위에서 ‘동등성의 원리’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주관주의적 패러다임은 어떨까? 대상의 실체적 가치보다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의 만족도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주관주의적 패러다임은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문학 이론의 역사 역시 저자의 의도나 작품에 내재된 가치보다, 독자의 해석과 수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그러나 주관주의적 패러다임을 적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한계는, 수용자의 주관적 만족을 ‘표현’할 수 있는 공통의 척도가 부재한다는 점에 있다. 요컨대 문학의 경제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점으로서의 역동적 ‘가격’이라고 하는 재현의 기호가 존재하지 않는다. 유명하고 인기 있는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최소한 그것이 동일한 장르에 속한다고 여겨질 경우(유적 동일성이 가정되는 경우), 신인 작가의 작품과 동일한 가격이 부여되는 것이 현실이다. 문학–책은 그것의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거의 무차별하다.25) 문학–책의 가격적 무차별성은 평소 인지하지 못할 만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지만, 의외로 이것은 문학의 가치와 관련된 특수성을 밝히는 일과 관련하여 유용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먼저 그것은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과 문학적 가치 사이의 임의성, 마르크스라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무관계성이라고 파악했을 특수한 관계를 보여준다. 엄연히 존재하는 작품들 사이의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동일한 가격의 규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시장의 가격이 문학의 가치를 대변하는 ‘표현 양식form of appearance’으로 전혀 유용하지 않다는 뜻을 내포한다. 문학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계측, 측정, 지표화할 수 있는 단일한 화폐 같은 것이 현실의 층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가격은 무차별하지만 그것에 대한 수요량에 있어서는, 즉 판매량과 관련해서는 차이가 있지 않은가. 실제로 출판 시장에서 어떤 문학작품은 많이 팔리고, 또 어떤 문학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즉각적인 반론, 경험에 기초한 반론은 판매량이 문학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반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말은 다소 엘리트적인 뉘앙스를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소수적인 문학의 특권과 우위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적게 팔린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문학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역도 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문학의 경제에서 나타나는 가격의 고정성과 무차별성은 여타 예술 장르와의 비교를 통해 좀더 흥미롭게 조명될 수 있는 특징이다. 왜냐하면 다른 예술 장르에서는 실제로 가격의 변동성과 차별성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독려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미술 시장에서는 특정 작가의 작품은 더 비싸게 팔리고, 심지어 경매 제도를 통해 가격의 변동성을 극대화함에 따라 해당 작품에 대해 최대의 효용을 느끼는 수요자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변동성으로 인해 미술 작품은 경제적 투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음악은 어떨까? 유명 가수나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티켓 가격은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의 것보다 훨씬 비싸게 거래된다. 영화 티켓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동일하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가 상업 예술을 대표하는 장르로 여겨질 수 있는 이유는, 손익분기점이라는 경제적 기준점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영화는 그 생산의 특수한 메커니즘으로 인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소요되는 생산 비용을 구체적으로 계산할 수 있고, 그 비용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과 실패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다.26)

  이러한 사실은 문학이라는 장르가 특별히 반상업주의를 표방하거나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을 함축하지 않는다. 나아가 문학이 상품이 아니라는 비상식적인 주장을 제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문학–책이 지닌 특별한 매체적 성격으로 인한 어떤 결핍, 가령 ‘원본성, 일회성, 소유 가능성’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고유한 경제적 현상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품과 재화의 가치를 측정하는 경제학적 교환의 원리가 문학의 가치를 온전하게 대변할 수 없는 이유의 근간을 구성한다. 주류 경제학이든 마르크스 경제학이든 가치에 접근하는 패러다임은 다르지만, 그것을 측정 가능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짧게나마 이러한 이론적 모델과의 비교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의 가치를 측정하는 데 객관주의적 패러다임이나 주관주의적 패러다임 모두 불충분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문학의 경제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가격이 말하는 재현 논리에 의해 표상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교환·거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김없이 ‘문학의 가치’가 있다는 믿음, 신뢰, 욕망, 환상,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협약이 작동해야 한다. 관련하여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서사의 기원은 욕망이다. 그러나 서사를 생산하기 위해 그 욕망은 다양하게 변주되어야 하고, 등가와 환유의 체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는 서사가 생산되기 위해서는 ‘교환’의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해야 하며, 경제적 체계를 따라야 한다.”27) 관건은 문학의 가치를 규정하고, 측정하고, 그것을 유통시키는 경제적 체계, 문학의 경제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것이고, 그것을 시장경제와의 비교 속에서 해명하는 일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가설은 문학적 가치가 상품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형성 원리를 통해 규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앞서 강조한 문학적 가치의 계측 불가능성, 환산 불가능성은 이를 탐색하기 위한 이론적 전제이자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제부터 우리는 ‘교환’이라는 개념을 마르크스나 주류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교환’이라는 단어와 조금 다른 맥락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상품(또는 재화)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시장에서의 교환은 대상에 이미 실재하거나(객관주의적 패러다임) 주관에 의해 미리 기대되는(주관주의적 패러다임) 가치가 표현되는 과정, 즉 대상의 객관성/주관성을 현실로 외화Aeusserung시키는 매개적 단계로 파악된다. 어떤 경우든 생산과 소비는 분리되어 있고, 교환은 양자의 만남을 중개하는 일시적 과정을 묘사하는 말에 불과하다. 상품에 대한 구매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 교환이라는 관계는 사실상 끝나버린다.

  반면 문학의 경제에서 교환은 매개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문학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은 책을 구매한다고 해서 종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의 물리적인 습득 이후 그것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향유하는 읽기라는 단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교환은 저자–텍스트–독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독특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지시하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의 경제학이 추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계주의relationism적 패러다임이다. 문학적 가치는 단지 작품이라는 개체에 귀속되는 것도, 독자의 주관적 만족으로 한정되는 것도 아닌, 양자 사이의 동시적 참여 속에서 발생하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경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독특한 교환 관계의 상호 텍스트성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문학적 가치의 생산과 소비가 자주 중첩되며, 심지어는 구분이 불가능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비식별의 시공간에서 문학적 가치는 시장에서의 교환가치와 상관성이 대단히 낮고, 오히려 자율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며, 재현될 수 없는 특이한 가치를 지칭하게 될 것이다. 문학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표상 불가능하고, 환원 불가능한 독특한 가치를 생산·소비·측정·유통하려는 문화적 관계를, 시장경제와 구분되는 특수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리킨다. 문학에의 입문은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고유한 언어 게임에 대한 참가를, 자율적 경제 공동체로의 참여를 나타낼 것이다.



4. 문학적 교환의 특수성


  문학적 가치의 계측/재현 불가능성은 문학적 교환에 내포된 독특한 성격과도 연동되어 있다. 문학의 경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의 양상과 관련된 특수성은, 그것이 시간을 비용으로 치르는 거래라는 점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이한 두 층위의 경제적 교환이 문학의 경제에 중첩되어 나타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장에 던져진 상품으로서 문학–책은 일정한(그러나 대단히 비탄력적이면서, 무차별적인) 가격을 매개로 교환된다. 그러나 돈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교환 관계가 문학적 경제의 본질을 장악하지는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인류가 도서관이라는 훌륭한 문화적 제도를 구축했기에, 원칙적으로 우리는 돈 없이도 문학의 경제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문학의 경제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특별한 이론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경험적 상식에 해당한다. 문학–책을 구입하고 소유하는 행위와 문학을 소비하는 행위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구체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독서라고 불리는 시간적 비용 투자가 요구된다. 때문에, 문학의 경제에서 어떤 작품의 실패를 표현하는 결정적인 선언은 ‘돈이 아깝다’가 아니라 ‘시간이 아깝다’이다.

시간이라는 요소는 (그것이 적든 많든) 문학의 경제와 상품의 경제를 구분시켜주는 핵심적인 차이로 고려될 수 있다. ‘시간에의 요구’는 교환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마르셀 모스의 ‘선물의 경제’는 좋은 참고 사례이다. 잘 알려져 있듯 모스의 『증여론』은 ‘호혜성’에 기반을 둔 선물의 주고받음을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원리로 분석한 중요한 인류학적 연구 사례이다. 여기서 증여와 교환의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에 의해서도 가시화될 수 있다. 상품의 교환은 시간이 단축된 증여, 가속화된 증여 속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삭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28)

  마찬가지로 ‘시간에의 요구’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과 문학을 소비하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를 부각하는 데에도 유용해 보인다. 상품의 소비자로서 우리는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그 상품의 사용가치를 즉각적으로 인식하고, 활성화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을 사용할 때 내가 느낀 주관적인 만족감(효용)이 즉시 확인되고, 그 효용이 내가 지불한 돈에 비해 높다고 생각할 때 그 교환은 성공적이었다고 판단될 것이다. 이 과정이 길어질수록, 시간이 많이 지체될수록 상품의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시장경제에서 시간은 상품의 현재적 가치와 관련하여 대체로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문학의 경우는 다르다. 문학의 가치가 확인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개인 독자의 시간이 요청된다. 이때 독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자원으로서의 시간을 다른 어떤 행동 대신 독서라는 행위에 배분하기로 선택한 주체로 그려질 수 있다. 교환 즉시 그 자신의 현실적 가치(사용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상품의 처지와 달리, 작품의 가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소요된 시간에 따라, 독자에 의해 경험적으로 판명된다.29) 이러한 시간에의 요구는 상품의 교환과 문학의 교환을 근본적으로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내가 들인 비용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 즉 작품의 사용가치의 실제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역시 일정 기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독서라는 교환 행위는 모스가 말한 ‘선물의 경제’에 좀더 가까워진다.

  흥미로운 것은 시간이 상품과 제로섬 관계를 맺는 것과 달리 작품의 가치는 오히려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혹적인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이 빨리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에 대해 더 자주 오래 생각하는 데 시간을 쓰고, 심지어는 그것의 가치를 해명하는 행위(비평)에 다시 자신의 시간을 재투자한다. 문학의 경제에서 의미 있는 교환 행위는 시간을 많이 요구하고, 급기야 교환의 완수를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또 다른 시간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가장 극단적인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거래 품목은 주식 등의 금융 상품일 것이다. 사용가치가 없고 오직 교환가치밖에 없는 주식에 시간은 자신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최후의 적이다. 반면 문학은 교환가치로 표현될 수 없는 작품의 사용가치를 활성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의 투자, 시간의 극단적 사용을 통해 그 가치가 사후적으로 증언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문학의 경제에서 거래되는 비용으로 시간을 지목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기대 효과가 있다. 첫번째는 그것이 문학 생산의 측면에도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작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비용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종의 공급 비용이기도 하다. 문학적 생산의 시간은 작품을 쓰는 데 소요되는 물리적인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 작품이 배태되는 데 저자에게 작용했던 의미 있는 과거의 기억, 어떤 결정적이고도 강렬한 감각적 체험, 그리고 무엇보다 독서를 통해 구축되었던 시간적 경험 전체를 포괄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작품 생산의 시간은 마르크스가 파악한 것처럼 추상화된 양으로 환원될 수도 없고, 또 투여된 시간의 양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적인 시간에 가깝다. 이것은 문학 생산의 노동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피에르 마슈레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이제 예술은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라, 그것의 생산물이다(여기서 생산자는 창조의 중심을 차지하는 주체가 아니다. 생산자는 상황이나 시스템의 요소를 이룬다). 생산의 관점에서 예술은 종교와 다르다. 종교는 자발성에 대한 자발적 환영들 가운데에서 그 자신의 거주지를 찾는데, 그것이 창조의 의미를 구성한다. 인간은 예술을 생산해야 한다. 마법이 아니라, 생산의 노동으로 말이다.”30)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보충해야 할 것은 예술의 생산, 특히 그중에서도 문학의 생산에 있어 투여되는 노동의 대단히 특수한 성질이다. 문학은 추상화된 양적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질적 노동을 통해 산출된다. 분업화/공장화될 수 없고,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학의 생산양식은 근본적으로 가내수공업에 가깝다.

  문학적 시간 개념의 두번째 기대 효과는 문학의 경제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작품 쓰기가 시간으로 표상될 수밖에 없는 어떤 자원을 투여한 생산 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에 대한 독서는 시간을 비용으로 지불하는 소비 행위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두 행위를 매개하는 것은 책의 가격이 아니라 시간이다. 시간은 문학의 경제에서 일종의 금본위제이다. 문학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시간의 교환 행위는 교환가치(가격)로 계측될 수 없는 작품의 독특한 사용가치를 증언하는 수행적 활동이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은 문학의 소비에 함축된 ‘노동’으로서의 성격이다. 작품을 읽는 행위도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상한 비유처럼 들린다. 문학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서 임금이 제공되는 경우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작품을 읽는 행위가 작품의 물리적 생산에 기여한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다. 그러나 작품의 가치 층위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교환가치로는 지시될 수 없는, 작품의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는 문학의 사용가치는 시간이 소요되는 독자의 실제 사용을 통해서만 증명되고, 산출되고, 활성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경제에서 발생하는 교환이 서로 상이한 두 노동 시간 사이의 교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와 같다.

  현대의 수많은 독자 중심 이론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독자반응비평이라고도 불리는 다양한 분파들은 작품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음을 입증하고, 수용자가 창조적으로 그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독려했던 이론적 노력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의도치 않게 ‘작품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주권자는 누구인가’라는 잘못된 질문을 낳기도 했고, 저자와 독자의 관계를 특정 영토를 두고 권력투쟁을 벌이는 사이로 오해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문학의 경제학에서는 문학적 가치의 생산 층위에서 저자와 독자를 사실상 동업자로 바라본다. 문학의 가치를 단순히 물리적 작품의 생산(저자)이나 소비(독자)에 일임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의 경제가 가시화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생산과 소비라는 이분화된 틀로 식별될 수 없는 어떤 공통의 토대이다. 저자의 노동과 독자의 노동은 작품의 가치, 문학의 가치를 산출하는 생산의 두 핵심 축이다. 반대로도 말할 수 있다. 저자의 소비와 독자의 소비는 작품의 사용가치, 문학의 사용가치를 향유하는 소비의 두 핵심 축이다. 문학의 가치를 생산하는 데 있어, 저자와 독자의 정체성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소비가 엄격히 구분된다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은 분명 문학의 경제에서 벌어지는 고유의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의 가치가, 결국 그것의 독특한 사용가치의 특수한 사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위대함에 대해 설명하며 강조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위대한 시인은 자기 작품에 대해 결코 단순히 생산자 〈의〉 관계에 있지 않다. 그는 동시에 소비자 〈이기〉도 하다. 물론 그는 대중과 반대로 그것을 자극이 아니라 도구로 소비한다. 이러한 도구적 성격은 교환가치에는 좀처럼 포함되지 않는 사용가치를 대변한다.31)


  “교환가치에는 좀처럼 종속되지 않는 사용가치.” 이것을 가시화할 때 우리는 ‘문학의 가치’가 지닌 특별한 성질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배움’이라는 키워드는 벤야민이 발견한 사용가치, 교환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문학의 가치를 조명하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은 문학의 효용 가치가 특수한 배움의 시간에 결부되어 있다고, 앎에 대한 특별한 사용으로부터 확인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5. 배움의 경제: 지식과 쾌락의 경제 너머


  최근 평론가 이희우는 동시대 예술과 비평 담론이 봉착한 교착 상태를 분석하는 글에서 그 유력한 원인의 하나로 ‘비판’을 지목한 바 있다. 제도권 내 비평장을 포함하여, 우리의 일상과 SNS 전반에 확산되어 있는 ‘비판적 분위기’가 담론의 내전 상태를 초래하고 있으며, 이것이 산출하고 있는 죄책감과 원한 감정이 결과적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다소 단순하게 요약한 감이 있지만) 이러한 이희우의 논쟁적인 분석은 적지 않은 반론과 비판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나 역시 ‘동시대의 비판’에 대한 그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략적으로 의도된 ‘비판’의 이분법적 형상화가 유효했는지 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주목될 수 있는 것은, 비판 이론의 과잉된 실정화 현상을 타개하고 예술적 경험의 가능성을 재조명하기 위한 이론적 대안으로 ‘배움’이 제시된다는 점이다. “나는 비평의 축을 ‘비판’도 ‘무비판적 위로’도 아닌 ‘배움’ 쪽으로 이동시켜보자고 제안한다.”32) 이희우의 ‘비판에 대한 비판’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정작 그의 글에서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배움’이라는 야심 찬 문제 제기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인상이다. 나는 배움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배움의 경제가 이 글의 주제인 문학의 경제를 작동시키고, 문학의 가치(문학성)가 어떻게 생산·소비될 수 있는지를 해명해줄 수 있는 이론적 방법론으로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희우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문학을 통한 배움이 교육, 훈육, 훈련 등으로 묘사될 수 있을 여타의 배움과 차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33)

  돌이켜보면 배움이 문학의 가치를 해명하는 문제와 함께 거론되는 것은 대단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문학의 가치를 옹호하는 최초의 본격적 문학 이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배움’은 시의 가치를 논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전제를 구성한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의 모습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도 매우 정확하게 그려놓았을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
그럴 것이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다른 사람들에게도—비록 그들의 배움의 능력이 적다고 하더라도—최상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34)

 

  인간은 모방 행위에서 확인되는 대상과 재현 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할 때 “쾌감을 느낀다”. 이때의 쾌감은 배움의 즐거움과 관련이 있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에 해당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 발생하는 배움의 사건이 대상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의 모습”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배움의 즐거움은 배움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닌, 인간의 탁월한 본성 가운데 하나인 ‘배움의 능력’과 연동되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35)라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던 근거도 거기에 있다. 『시학』의 진정한 핵심은 ‘참/거짓’이라는 인식론적 기준이나, ‘선/악’이라는 도덕적 판단 기제로 식별되지 않는 ‘허구fiction’의 가치, 탁월한 허구가 유발하는 독특한 배움의 경제를 통해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문학과 배움을 연결할 때 제기될 수 있는 화두는 ‘문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다양한 문학 이론이 수행해온 자기 정당화 작업은 ‘문학을 통한 배움’의 가능성과 그 가치를 해명하는 일에 집중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학의 경제학에서도 배움은 작품과 독자 사이의 교환 행위 위에서 창출되는 사용가치, 그 안에서 순환되는 욕망과 즐거움의 가치를 분석하는 방법을 이룰 것이다. 독자가 굳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면서까지 작품을 읽는다면 그로부터 독특한 형태의 경험, 즉 ‘문학적 경험’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남다른 배움의 경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제부터는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유력한 가설을 제기하고, 이를 조금씩 반박·조정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겠다.

  첫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가설은 문학이 ‘앎’을 제공한다는 주장이다. ‘앎’에 집중하는 입장은 문학과 배움을 연결하려는 시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에 속한다.36) 문학은 인간, 현실, 세계에 대한 앎의 영역을 확장하고, 심지어는 새로운 앎의 영역을 발견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추가되어야 한다. 우리가 새삼 강조할 수 있는 단순한 사실은 문학을 통한 배움이 다른 지식 담론을 매개로 얻을 수 있는 배움과 미묘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문학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지 않는 담론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전제를 떠올려보자. 이 말이 문학이 정보를 전달하거나 지식을 확산하는 일과 무관하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텍스트에는 분명 지식이 담겨있고, 특히 역사적 사실이나 현재적 진실에 관한 텍스트의 앎을 수반하고 있다. 정보이론을 토대로 한 기호학 이론이 주장하고 있듯, 문학작품 자체도 하나의 메타적인 차원의 정보값으로 환원될 수 있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과거를 이해할 수 있으며, 현실의 문제에 대해 좀더 날카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지식’과 ‘정보’는 특정한 문학 텍스트를 더욱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조건 위에서는 문학이 모종의 지식을 확산시키는 정치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 확산의 최전선에 설 수도 있다. 근대문학이 형성되는 시기에 일었던 계몽주의적 경향은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식과 앎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그것이 특수한 방식으로 배치·조직·서사화되는 양상에 대한 관심이 다르다는 것이다. 문학적 가치와 문학에 담겨 있는 지식의 가치는 반드시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반비례 관계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문학적 배움이 여타의 지식 담론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의 양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임을 알려준다.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 이론을 다룬 물리학 교과서와 아인슈타인의 삶을 다룬 문학 텍스트를 평가하는 기준과 척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전자의 경우 관건은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을 정확하게,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는가이다. 지식 담론에서 작동되는 배움의 경제에서는, 정확성과 효율성이 담론의 가치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이다. 전문적인 담론서를 읽는 데 투여된 시간의 가치는 그것이 전달해주는 지식의 양과 질에 따라 그 효용을 입증할 수 있다. 일반적인 지식 담론의 경제에서 교환되는 앎은 확인되고, 축적되고, 활용될 수 있으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기 위한 자원으로 재투자될 수 있다. 그리하여 지식 담론의 교환경제에서 앎의 가치는 이러한 축적, 활용, 재투자 가능성, 즉 앎의 대상에 따라 결정된다. 결국 지식의 배움의 경제에서 유통되는 가치는 지식의 쓸모, 즉 사용가치에 결부된다. 상품경제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양상과 아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문학적 배움의 경제에서는 배움의 사건이 지식의 쓸모(사용가치), 그리고 그것을 교환하는 데 지불해야 하는 시간의 양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문학의 경제에서 정확성과 효율성의 기준은 잘 적용되지 않는데, 대상으로서의 앎이 문학적 경험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그것이 문학의 태생적 본질이라기보다, 글쓰기의 역사에서 일어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전환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적 글쓰기의 승리를 구가했던 전체적인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는 형식은 사유와 동일한 가격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형식의 간명함과 질서 잡힘, 그리고 표현의 우아함에 주목했다. 그러나 형식의 가격은 대단히 낮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작가들에게 형식은 새로움에 대한 강박도 없이 그저 변하지 않은 채 전수되는 것, 이미 존재하는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형식은 소유물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전적인 언어의 보편성은 언어가 공유 자산이라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사유만이 다른 것이라고 여겨졌다. 우리는 이 시기 동안 형식에 사용가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1850년경에 이르러, 문학이 자기 정당화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이제 문학은 자기 자신의 존재근거에 대한 알리바이를 추구해야 했다. 그리고 정확히, 문학의 사용 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자신들의 전통에 어떤 책임감을 부여하려 했던 일련의 작가들은 글쓰기의 사용-가치를 노동-가치로 대체하려고 애썼다. 이때를 기점으로 글쓰기는 그것이 존재하는 목적의 가치가 아니라, 그것이 지불한 비용(노동)에 의해 구제받기에 이르렀다.37)

 

  바르트는 문학이 담지하고 있는 가치의 역사적 층위 이동 속에서 근대문학의 출현을 설명한다. 문학의 형식이 명확히 쓸모(사용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시기, “부르주아적 글쓰기의 승리를 구가했던” 시기에 작품의 가치를 차등화하는 요소는 다름 아닌 ‘사유’, 즉 문학이 담고 있는 내용적 지식과 주장이었다. 문학의 도구적 성격이 부각될 수 있었던 시기는 문학 담론이 그러한 첨단의 지식과 주장을 전달하는 교환의 매개로 받아들여졌던 시기와 중첩된다. 문제는 “문학의 사용 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역사적 시기에 직면하면서 발생한다. (비록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있지만) 이러한 역사적 전환의 시기는 문학 담론이 전통적으로 담당했던 지식 전달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담론들이 출현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문학이 해명해야 하는 “자기 정당화의 문제”는 지식의 경제에 있어서 교환적 기능의 상대적 하락 현상과 연동되어 있는데, 몇몇 위대한 작가(이를테면 고티에, 플로베르, 발레리 등)들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글쓰기의 사용-가치를 노동-가치로 대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38)

  여기서 주의할 것은, 바르트가 주목한 노동-가치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가치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독창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작품의 노동-가치는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지불한 비용이면서, (앞에서 강조했듯)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 투여되어야하는 독서라는 노동의 비용을 동시에 포괄한다. 문학의 가치가 교환되는 데 요구되는 두 층위의 노동가치라는 분석틀은, 문학의 사용가치가 지식이라는 담론의 사용가치와 구별되는, 자율적 가치일 수 있다는 이 글의 주장과 정확히 공명한다. 다만 바르트의 위 지적은 내용(사유)과 형식의 오래된 이분법적 갈등을 환기시키는 측면이 있고, 그것을 오직 미학적 형식에 대한 탐닉에 한정시키는 뉘앙스가 있다. 바르트가 말한 형식 개념을 좀더 넓게 확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서의 형식, 혹은 형식을 반영하는 것으로서의 내용으로 파악하는 캐롤라인 레빈의 관점을 참고할 수 있다.39) 두 개념의 구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둘을 엄격히 구분하려는 이론적 노력을 통해 얻게 되는 편익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적 배움의 원천이 담론의 쓸모, 즉 지식의 사용가치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일까? 두번째로 제안해볼 수 있는 가설은 배움에서 동반되는 즐거움, 즉 쾌락이다. 문학적 배움의 근원에 지식의 사용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으로부터 얻는 주관적 만족, 즉 쾌락이 설명되지 않고는 문학의 매혹,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응답이 해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을 향유하는 경험은 분명 즐거워야 하며, 남다른 재미를 선사해야 한다. 쾌락이라는 대안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종의 대리 보충이 필요해 보인다. 문학을 통해 얻는 쾌락은 정신분석학에서 흔히 언급되는 ‘쾌락의 경제’를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쾌락의 경제란 무엇인가?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이트는 인간의 욕망과 정신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 관점’을 도입한 선구자 중 하나이다.40) 욕망의 경제학적 제1원리에 해당하는 쾌락 원칙에 따르면, 인간은 불편한 긴장의 완화 상태를 추구하고, 자신을 괴롭게 하는 흥분의 양을 낮추기를 추구하는 ‘항상성의 원칙Konstanzprinzip’에 지배받는다.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쾌락의 경제와 대립되는 ‘현실 원칙Realitätsprinzip’ 속에서 마련된 중재와 타협의 산물이다. 문제는 이러한 쾌락의 경제를 거스르는 인간의 욕망이 빈번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가 각별히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도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본능적 삶에서 마조히즘적 경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당연히 신비스러운 것으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 만약 고통과 불쾌가 단순히 경고가 아니라 실제로 목표가 된다면, 쾌락 원칙은 마비되고 말 것이다.”41)

  굳이 이론적인 설명을 보태지 않더라도, 우리는 문학을 체험하는 시간이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의 경제와 배치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문학은 우리 자신에게 어떤 부정적인 감정, 불쾌에 가까운 시간을 선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로 문학은 우리에게 즐거움·쾌락의 증진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슬픔·자책·죄의식·수치 그리고 이해 불가능성을 가중시키기 위한 마조히즘적 도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42)

  그렇다면 우리가 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만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식과 쾌락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효용이 있다면, 문학적 배움이라는 교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사건은 과연 무엇일까?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를 변주하며 바르트는 쾌락 원칙 너머의 다른 만족, 즉 문학의 주이상스에 접근한다.


쾌락과 주이상스의 차이는 분명 실재적입니다. 저 혼자만이 그걸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쾌락은 자아와 주체의 일관성과 관련되며, 그것은 안락함, 완화, 편안함의 가치 속에서 추구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고전 작품을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그에 해당합니다. 반면, 주이상스는 일종의 독서 및 발화의 체계로서, 자아를 정립하는 대신 주체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 그 자체가 주이상스라고 부를 수 있는 소모의 경험을 말합니다. [……] 텍스트의 주이상스는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하고, 모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섬광 같은 순간, 일시적으로나마 당신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키며, 자아의 상실이라는 소비/지출/소모를 경험하도록 영향을 줍니다.43)


  쾌락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텍스트의 주이상스는 “안락함, 완화, 편안함” 등으로 인해 유지될 수 있는 주체의 일관성과 차별화된다. 텍스트의 쾌락이 어떤 지식, 통찰, 감정, 교훈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의 일관성을 지칭한다면, 텍스트의 주이상스는 고통, 모욕, 불편함, 이해 불가능성으로 인해 촉발되는 주체의 상실을 지시한다. 주이상스는 탈주체화라고도 부를 수 있는 모종의 파괴적 경험을 주체에게 강제하는데,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탈주체화의 시간이 고조되고 고양될 때 비로소 ‘변화와 변형’의 기회가, 즉 새로운 주체화의 계기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쾌락’의 관점에서 보자면 문학과 독자 사이의 교환 관계는 지극히 비경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이상스의 층위에서 그것은 바타유가 말했던 일반경제l’économie générale의 원리에 좀더 근접해 있다.44)

  바르트는 이러한 주이상스를 선사하는 텍스트가 극소수이며, 주로 그것을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적인 작품들에 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가 강조하는 자아의 상실, 고통, 파괴 그리고 그것이 추동하는 주체의 변화와 변형이라는 사건은 생각보다 다양한 국면과 층위에서,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는 경험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적 배움의 경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 변형의 계기를 좀더 넓은 부문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적 배움은 문학이라는 이름의 기호와의 마주침 속에서 이루어지는 낯선 단어, 표현, 문장에 대한 놀라움,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고통스러운 대면, 나아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일어날 수 있다. ‘자아의 상실’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새로운 주체화의 기제를 스스로에게 제공하는 일. 이러한 특별한 배움과 연동된 주이상스가 문학의 경제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6. 문학적 경험: 변화로서의 주체성


우리는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주이상스에 의해 고양된 의심을 가르쳐야 한다.
—롤랑 바르트45)


  문학의 경제 안에서 배움(변화를 통한 새로운 주체화)이 지닌 결정적인 특징은 배움의 대상이 곧 배움의 주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학적 배움의 관계 안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문학을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배움의 스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문학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으로서의 문학은 교육할 수 있지만, 경험으로서의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문학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이론을 설명할 수 있고, 특정 작품이 씌어지게 된 문화사적 배경과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앎을 전달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텍스트에 대한 나의 분석을 예시 답안으로 제공할 수도 있다. 학생들은 그 지식을 외우고, 이해하고,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험을 치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 안에서 실행되는 문학 교육을 지칭하는 것이지, 문학적 경험의 전달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문학작품에 대한 경험과 관련하여 문학 선생은 그것을 위한 조건과 환경을 제공하는 것에 그칠 뿐, 결국 그 경험이 발생했는지의 여부, 의미 있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배우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문학적 배움에 있어 선생은 언제나 배움의 타자이다. 문학적 경험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선택한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주체적 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의 가치가 산출되는 과정에서 생산과 소비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앞서의 주장과도 공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학적 배움이 결국 배움의 주체화를 요구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배움의 주체화가 배움의 주권자와 같은 것은 아니다. 문학적 경험의 주이상스를 통해 발생하는 변화와 변형이라고 하는 탈/주체화의 계기는 단순히 어떤 지식과 정보의 ‘능동적’ 습득으로 규명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과 테크닉이 요구되며, 무엇보다도 매 순간 문학에 입문하려는 주체의 결단이 필요하다. 문학을 통한 변화와 변형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주체가 배움을 의도하고 계획할 때, 배움의 방향과 목표를 미리 설정함으로써 변화라는 사건의 주권자로 나설 때, 배움의 탈주체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탈주체화는 불가피하게 자기 자신에게 가해진 어떤 강제적인 힘, 때로는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어떤 타자적인 힘을 수용하는 일이다. 이때 주체가 할 수 있는 일의 최대치는 배움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환경과 조건을 자신에게 마련하는 일이다. 항간에 유행하는 ‘무해한 문학’이라는 말은 최소한 문학적 배움의 현장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표현이다.

  문학적 배움이 오늘날의 시장경제와 불화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오늘날 대학에서 문학 관련 전공, 학과, 수업 들이 퇴출되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것은 부당하지만(시장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특별히 반자본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학적 배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교육 목표와 분명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자원화, 인간이 지닌 역량의 최대치를 뽑아내는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배움의 과제는 휴먼 리소스로서 잠재성을 최대한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그것을 대변하는 상징적 재현 기호로서의 높은 몸값을 획득하는 것이다. 흔히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몰아세움(Ge-stell, 하이데거)의 배움은 끊임없이 우리를 어떤 주체로 거듭나도록 닦달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주체화가 도달하게 되는 사태는 주체적 역량의 고갈과 탈진, 즉 주체의 최종적 탈주체화일 수밖에 없다.

  반면 문학의 경제에서 배움은 탈주체화를 위한 연습이자 자기에 대한 실험을 뜻한다. 시장의 배움과 문학의 배움은 주체화와 탈주체화 사이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유사해 보이지만, 각각의 과정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에 따라 명확히 구별될 수 있다. 문학적 배움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독특한 탈주체화의 역량을 사용하려는 것, 예속화에 대해 저항하면서 자신의 잠재성을 보존하려는 능력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배움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배움과의 전도적 관계 속에서 형상화될 수 있다. 탈주체화를 유발하는 주체화가 아니라, 새로운 주체성의 창조를 향한 탈주체화. 파울 첼란은 그 과정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 “예술을 눈앞에 또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사람은, [……] 그는 스스로를 잊어버립니다. 예술은 자아와의—거리를 만들어냅니다.”46) 그리고 예술이 만들어낸 “자아와의—거리”는 또 다른 나, 새로운 나와 연계되어 있다.

  문학적 배움과 시장의 배움 사이의 차이는 서로의 영역에 속해 있는 각각의 배움들끼리 맺는 관계의 차이로도 설명될 수 있다.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식의 배움은 기본적으로 축적될 수 있고, 우열이 존재하며, 새로운 배움으로의 투자로 연결된다. 시장의 배움은 가산(加算)의 논리를 따른다. 이때 새로운 지식의 추가는 과거의 지식을 낡은 것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된 것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이와 달리 문학적 배움들이 맺는 관계는 가산적인 것도, 단계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배움의 경험들 사이의 차이와 비교는 가능하며, 그 안에서 모종의 위계와 서열 관계가 형성될 수는 있다. 텍스트가 일으키는 배움의 강도와 지속성이 작품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움의 장에서 각각의 배움은 서로 다른 배움을 위한 자원이자 동기이자 터전이다. 문학적 배움 체계에서는 선수 과목이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배움이 과거의 배움을 온전하게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에 감동적으로 읽었던 작품이 지금 동일한 감동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를 언제든지 경험할 수 있다. 때로는 그 작품에 대한 실망이, 과거에 감동을 느꼈던 한때의 나에 대한 부정과 실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현재의 경험이 과거의 배움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배움을 위한 또 다른 배움의 경로를 열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배움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계몽과 분기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인간과 세계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계몽은 문학의 배움을 설명하는 유사 개념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무지에서의 지로의 이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계몽은 이 무지의 상태를 어둠, 꿈, 어린아이 등 이성의 부재 또는 미성숙으로 간주한다는 면에서 과거를 배척하는 뉘앙스가 있다. 계몽은 앎의 부재를 타개하고, 장악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계몽의 현재적 주체에게 무지는 부정되어야 할 과거에 불과하다. 과거와 부정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계몽적 주체의 가장 극단화된 원리주의적 형상화는 정치적 전향이나 종교적 개종이라 할 수 있다.

  문학적 배움은 계몽주의와는 반대의 경로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문학을 배우면서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전향이나 개종이 아니라,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새로운 앎을 통해 추동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지식으로 충분히 타개·장악·정복될 수 없는 어떤 것, 무지의 형식으로 증언될 수밖에 없는 어떤 특별한 앎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를 겪는 주체는 종결이 없고,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예측하지 못한다. 관련하여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주체성은 부정되거나, 권리를 상실하거나,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성은 유동적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점들의 직조로, 그것들의 망으로 말입니다. 니체의 인용문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주체성)의 개념입니다. 하나의 강, 심지어 변화하는 강으로서의 주체성, 그러나 여러 장소들의 불연속적인(그리고 부딪치는) 변화로서의 주체성입니다.”47) 이 변화의 사태 속에서 현재의 주체는 과거의 주체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 속에서 과거의 주체와 현재의 주체가 서로 중첩된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푸코는 문학이 일으킬 수 있는 변화의 창조적 역량에 집중하면서, 계몽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접근한다.


보들레르에게서 동시대인은 자기 자신, 자신의 비밀, 자신의 숨겨진 진실 따위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다. 동시대인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현대성은 ‘인간을 자기 자신의 존재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 현대성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생산하라는 과업을 떠맡긴다.48)


  따라서 문학적 배움을 통해 생산되는 진실은 숨겨진 비밀, 적나라한 사실, 또는 이념적 어젠다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주체성의 실험이자 생산으로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적 진실은 현실에서 수행되는 언어, 시장의 경제로 포섭될 수 없는 어떤 잔여, 현실과 등치될 수 없고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모종의 가상 세계, 현실태(energia, 아리스토텔레스)로 온전히 흡수될 수 없는 역량의 지대로서의 잠재성의 픽션, 그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증언을 말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문학의 본질 같은 것이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아주 약간의 문학이 존재한다’고 말한 이유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그 어떠한 내부적 평가기준도 이 필수적 텍스트의 “문학적인 것”을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문학의 확실한 본질 또는 존재라는 것은 없으니까요. [……] 한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현상들의 문학적 지위를 결정하는 관습조차도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언제나 바뀔 여지가 있습니다. “아주 약간의 문학만 있을 뿐”이란 말은 이런 관습을 겨냥한 것이었고, 아주 작은 이상적 서재를 지칭한다기보다는 텍스트 안에서 찾을 수 없는 허구라는 주제의 허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아무것도 아닌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중요한 아무것도 아닌 것, 상당히 중요한 그런 것이겠죠.49)


  문학의 경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중요한 그런 것’의 가치에 매혹당한 사람들, 그것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자신의 삶을 증언의 재료로 삼는 사람들, 그것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결단함으로써 변화를 체험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문학의 본질, 혹은 문학성이라고 하는 개념은 이러한 경제체제 안에서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화폐, 그러나 실제로는 무엇도 대리하지 않고, 참/거짓/선/악 등의 식별 체제로 그 정체가 밝혀질 수 없는 화폐, 다시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위조화폐counterfeit money에 가깝다.50) 그런 의미에서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테제는 교조화된 문학주의가 가르치듯 사회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문학, 현실의 영향을 초월한 문학의 가치를 의미할 수 없다. 문학의 자율성은 그런 것들의 시스템과 교환 법칙의 독특성을 조명하고, 그 경제 공동체의 가치를 보호하고 사수하기 위한 수행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슬로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7. 새로움의 경제: 문학의 경제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문학적 경제의 자율적 체제를 주장하고, 배움을 통해 생산되는 문학의 가치를 강조하는 이 글은 여러 익숙한 반론과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문학의 경제와 시장의 경제를 구분하고 문학과 상품의 가치를 다르게 조명하는 이 글은, 결국 의심스러운 문학주의를 복권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문학이 상업주의에 대항하고, 모든 현실적 목적(이를테면 정치적 어젠다)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무용성의 테제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관점은 문학이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가 투사되고, 교차되고, 경합하는 이데올로기적 상징 권력의 장소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부르디외는 문학의 자율적 경제에 관해 위와 유사한 비판들을 제기한 가장 저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르디외에게 문학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구사하는 언어를 규범화하고, 불평등한 가치 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별 짓기의 대표적인 사례에 가깝다. 문학장에서 생산, 유통되는 문학성이라는 상징 자본은 언어의 위계화, 서열화, 불평등화를 조장하는 분리, 은폐, 차별의 재생산 기제이다.51) 비록 시장에서 대단한 부를 쌓을 수는 없더라도, 문학적 명성과 권위라는 엘리트주의적 상징 자본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문학을 현실의 이해관계를 초탈한 무언가로 간주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따라서 부르디외는 이렇게 역설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하게 언어적인 질서를 자율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방식들 전체에 대항하여, 모든 말하기는 시장을 위해, 그리고 시장을 통해 생산되며, 말하기는 자신의 존재와 그 가장 특징적인 속성들을 시장에 빚지고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52)

  문학의 경제를 시장의 경제와 동일시하는 부르디외의 급진적인 주장은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 같다. 문학 역시 상징 자본을 유통하는 시장에서의 거래 품목에 지나지 않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구별 짓기의 경제라고도 지칭할 수 있는 그의 이론적 모델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경제적 원리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문학장 이론과 관련하여 대중에게 가장 알려진 저서는 『구별짓기』(1979)이지만, 이 글이 보다 주목하는 것은 그의 경제학적 관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가격형성과 이윤의 예측」의 한 대목이다.


담론은 하나의 시장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는데, 이 시장의 특징은 특수한 가격형성 법칙을 갖는다는 것이다. 담론의 가치는 화자들의 언어능력 사이에 구체적으로 확립된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때 언어능력은 생산능력뿐 아니라 전유 및 평가의 능력, 다시 말해 언어적 교환에 참여하는 여러 행위자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생산물에 가장 유리한 평가기준을 관철시키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러한 능력은 언어학적 관점에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언어능력은, 사회적으로 등급화된 생산력으로서, 사회적으로 등급화된 언어생산의 단위들에 특징을 부여하고, 전유와 평가의 능력으로서, 그 자체 사회적으로 등급화된 시장들을 규정하는데, 이 언어능력들 간의 관계가 특정한 교환에서 관철되는 가격형성 법칙을 결정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53)


  부르디외가 묘사하는 담론 시장이 지닌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확인해야 하는 것은 그가 언급하고 있는 ‘가격형성 법칙’이 주류 경제학의 방법론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즉 완전경쟁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뜻하는 시장가격과 달리, 부르디외의 담론 시장에서 담론의 가격은 주어지고 결정된 일종의 고정점이다.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의 경제에서 담론 시장은, 몇몇 소수의 공급자들의 타협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일종의 독과점 경제 모델 혹은 담합 시장에 가까운 것 같다. 그 가격에 투사되고, 반영되어 있는 것은 언어능력에 대한 평가를 수행할 수 있는 지배계급의 힘이며, 담론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은 그러한 권력의 효과에 다름 아니다. 가격(담론의 가치)은 지배계급에 의해 강제되며, 통치 엘리트의 취향, 에토스, 의례, 감각을 순환적으로 재생산, 재강화하는 차별과 검열의 기제일 뿐이다.

  언뜻 보면 부르디외의 명쾌하고 선명한 논지는 문학의 경제가 작동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외부 효과externality를 비판적으로 조감하고, 그것의 사회학적 성격을 폭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담화 시장 안에서 발생하는 차별화된 위계가 사회적 계급의 불평등을 반영한다는 그의 주장도 강한 설득력이 있다. 문학적 가치의 재현/계측 불가능성이 가치의 동등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제도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개인의 독서 이력 안에서도 작품들은 차별적인 가치의 위계 서열 안에 배치되어 있다. 어떤 작품은 나에게 의미가 있고 또 어떤 작품은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이러한 차별화의 기제가 제도의 수준에 적용될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느냐이다.  

문학의 경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차별화의 기제가 낳을 수 있는 상징 자본 혹은 상징 권력의 효과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정할 필요가 있다. 모든 문학작품이 가치에 있어서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주장은 아름답게 들리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관념화된 목표에 가깝다. 우리는 이러한 불가능한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에 가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학의 경제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는, 좀더 냉정하고 현실적인 그림이다.

  관련하여 부르디외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문제를 짚을 수 있다. 첫째는 담화의 가격을 결정짓는 구체적인 논리가 전혀 설명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담화 시장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담론 가운데, 구체적으로 특정 담론이 더 가치 있게 평가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내적 설명 원리가 결여되어 있다. 어떤 작품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지배 엘리트가 그것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지배 엘리트가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 작품이 가치가 높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두 개의 거울이 맞서 있는 형국처럼, 작품과 권력 사이의 무매개적 반영성으로 인해 가격 평가의 대상과 주체 사이의 순환적 참조 관계만 드러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르디외의 담화 시장 모델이 일종의 끝없는 동어반복적 교환만을 야기하는 관념적 비유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둘째, 담론 시장에서의 가격 변동 가능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째서 특정 작품이 과거에는 높게 평가되다가 현재에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는지,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초래되는지에 대한 관심이 부재한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담론 시장에서 작품의 가치는 유동적이며, 시대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할 수도 있다. 예술의 경제에서는 그 변화가 오히려 핵심이라고 말이다. 현대의 예술 담론장에서는 전통과 규범에 순응하는 작품일수록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명된다. 예술 담론 시장은 이미 형성된 기존 가격에 관한 이의 제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저항, 경쟁, 혁신, 분투의 현장이다. 이것은 비단 개별 작품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장을 규제하는 장르에 대한 개념적 파괴와 재정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에 따라 가격 설정의 방식과 기준 자체의 변동을 가져오기도 한다. 만약 예술이나 문학의 가치를 사회적 계급과 이해관계의 직접적 반영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끝없이 변화하는 가치의 역동성을 설명할 수 있는 내적인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유일한 외적 가능성은 사회적 지배계급의 세력 교체로 그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현실적인 진단이다. 우리는 현실 사회의 권력 교체가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부르디외가 제시하는 가격 모델이 대단히 관념적이고, 비탄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가 설명되기 위해서는 구체성과 역사적 탄력성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만약 부르디외가 강조하고 있듯, 문학과 예술이 상징 권력과 위계 및 불평등한 가치의 질서를 낳는 측면이 있다면, 이 역시 이러한 이론적 구체성과 역사적 탄력성 속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예술 작품이 지배계급의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는 속물적 욕망의 무대로 소비되는 경우, 그리하여 대중과의 구별을 실천하기 위한 차별의 지표로 향유되는 경우는 분명 빈번히 발생한다. 그러나 부르디외가 사용하는 이 구별이라는 개념은 좀더 세심하게 전유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영속화된 분리,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위계에 따른 영원한 단절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경제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구별은 단순히 서로 다른 두 권력 체제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내에 속해 있는 다양한 작품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예술의 경제에서는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 구별la distinction 대신 차이la différence라는 단어를 선호하며, 이러한 차이들 사이의 분쟁différend을 독려하고, 그것의 긍정적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새로움’이라는 가치는 그것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방법론적 어휘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좀더 설득력 있는 모델은 보리스 그로이스의 문화경제학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문화의 장은 ‘새로움’을 둘러싼 끊임없는 혁신 경쟁의 무대이다.


혁신적 예술작품의 근원은 문화적 전통에 대한 저항에서도 사태 자체를 향한 의지에서도 연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를 주재하고 전통에 대한 긍정적 순응과 부정적 순응의 전략적 조합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문화 경제적 논리에서 연유한다. 그 목표는 현재의 중요성을 산출해내는 것이다. 문화적 전범에 따라 깔끔하게 완성된 예술작품은 가치화된 전통을 현재와 미래로 지속시키지 않는다. 그런 예술작품은 가치화된 전통에 의해서도 아류적인 것으로 비판된다. 가치화된 전통 스스로가 독창성, 세속성, 그리고 혁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속적 공간 역시 혁신적 예술에 의해 대변될 수 없다. 모든 예술작품은 세속적 사물을 가치화된 전통과 대조되는 관계를 맺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속적 공간 그 자체와 급진적으로 구별되기 때문이다.54)

혁신은 기본적으로 교환이라는 문화경제적 형태로 행해진다. 이 교환은 세속적 공간과 가치화된 문화적 기억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문화적 기억은 미술관, 도서관 및 다른 아카이브에 보존되어 있는 문화적 가치들의 총체와 이 아카이브와 관계하는 관습, 제의, 전통으로 구성된다. 모든 혁신은 세속적 공간의 특정한 사물을 가치화해 문화적 아카이브에 도달하게 하고, 반면 특정한 문화의 가치는 가치절하하여 세속적 공간에 도달하게 한다. 혁신을 교환으로 이해하기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통상 창조적 행위의 산물들은 특정한 가치를 갖지 않는, 절대적으로 비교 불가능하고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되어온 때문이다. 혁신에 대한 이와 같은 전통적 표상은, 예술작품이나 이론적 담론은 문화와 세속적 공간 너머에 있는 숨겨진 현실을 재현한다는 믿음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가치화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경계가 어떤 식으로든 지속되는 한,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은 둘 사이의 경계의 지양이나 구분된 두 영역의 최종적 융합이 아니라 교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55)


  새로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로이스의 문화경제학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해준다. 첫째, 우선 그것은 문화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가치 평가의 역사적 메커니즘을 가시화한다. 문학적 생산물의 가치가 독립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쟁적 차이 속에서 측정되는 것으로 시각을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과 연동된 문화적 가치는 독자적인 것, 실체적인 것, 고정적인 것,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로 인해 새로움은 언제나 재평가(가치 절상과 가치 절하)의 운명에 놓여 있다.  

  둘째, 새로움은 문화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변동이지만, 현실의 직접적 반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움은 문화적 아카이브와 현실(세속적 공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이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치의 재배치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문화의 역사에서 과거에 가치 있다고 평가되던 것이 돌연 낡은 것으로 느껴지고, 그전까지는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했던 세속의 사물과 언어가 문화의 아카이브 안으로 침입해 혁신의 이름으로 평가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새로움은 창조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와 현실 사이 경계의 교란, 그리고 그 결과 발생하는 가치의 재배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이렇게 재배치된 가치의 측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세속적 공간과 구별되는 문화적 기억이 필요하다. 어떤 작품의 새로움이 발견될 수 있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기억의 역사 안의 비교 체계 속에서 그 새로움이 인지되기 때문이다. 그로이스가 말한 아카이브는 그러한 문화적 기억을 유지하는 데 동원되었던 모든 제도적 관습과 기구를 가리킨다. 따라서 문화적 제도는 단순히 지배계급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투영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만 간주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제도의 운영이 공정하지 않고, 그 시스템이 정의롭지 않다고 항의할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문학적 가치가 특정한 제도적 결함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충분히 평가되지 않음을 증명할 수도 있다. 새로움에 대해 말하고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이 특정 집단의 주체(인종, 계급, 젠더 등)에 편중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것도 가능하다. 부르디외의 비판적 통찰은 이러한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그러나 제도에 대한 비판과 제도의 부재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제도와 아카이브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 초래되는 상황은, 문화적 가치의 평등이 아니라 그것의 소멸 혹은 시장경제에 의한 완벽한 장악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어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 환경은, 문학의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는 문화의 공장이자 은행이며 학교이다. 문학의 역사는 바로 문학적 기억이라는 제도적 아카이브 내에서 이루어졌던 문학적 가치 측정 기준의 변동의 역사이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에서 아카이브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혁신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넷째, 새로움을 문화와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혁신적 교환의 결과로 파악하게 되면, 새로움을 연속적 발전의 내러티브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유동적이며, 그 사이의 위계도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문학의 경제에서 과거에 대한 배움의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지 않다. 과거의 작품이 일시적으로 세속의 공간으로 떨어지더라도, 그것은 언제든지 문화의 아카이브 안으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품의 새로움과 문화의 새로움을 구별시켜주는 주요 차이점이기도 하다. 새로운 상품은 더 나은 기능, 더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면서 과거의 상품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상품의 새로움은 연속적 발전의 내러티브 속에서 언젠가 소멸할 수밖에 없는, 미래의 예정된 낡음이다. 반면 문화의 경제에서 과거는 현재의 새로움과 언제든지 교환될 수 있는, 과거의 잠재적 새로움이다.

  문화의 아카이브를 관통하는 새로움의 경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세대’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자 분석적 개념으로 활용될 수 있다. 우선 세대는 문화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작품들, 문화적 가치들 사이의 물리적 시간 관계를 가시화하는 구별적 개념이다. 여기에서 새로움은 과거 세대의 작품과 현재 세대의 작품의 차이를 가시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현재 세대에 속하는 작품은 새로움에 대한 호소 속에서 과거 세대의 작품을 일시적으로나마 오래된 것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물론 여기서도 우리는 새로움이 어떤 가치의 영원한 우열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 세대는 현실(세속의 공간)의 재생산 원리와 문화의 원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 교환, 또는 침투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현실의 장에서 계급, 통치 등의 사회적, 구조적 권력관계의 변동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할 신체적, 사회적 노화 현상은 아직 그러한 단계를 거치지 않는 새로운 주체들에게 주도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연의 법칙이다. 예술 작품은 늙지 않지만, 모든 예술가는 늙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세대는 세속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적/사회적 권력 교체의 원리가 문화의 아카이브에 적용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인식적 개념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세대와 결부된 ‘새로움’의 가치는 문화의 원리와 세속의 원리 사이의 교환을 증명하는 일종의 논리적 연결 고리의 징표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문화의 원리 안에서 자주 언급되는 세대 개념을 특정한 현실, 혹은 일부 사회집단의 실재를 반영하는 사회학적 개념과 혼동하지 않는 일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현실의 실재를 탐구하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세대론이 유효한 방법론인지와 관련하여 많은 논쟁이 있다. 그러나 문화의 경제에서 사용되는 세대라는 기호는 실제 현실, 특정한 인구 집단을 반영하기 위한 분석적 개념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움이 문화적 기억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가격에 해당될 수 있다면 세대는 그러한 가격의 역동적 변동을, 나아가서는 가격 형성 법칙의 재편까지도 초래하는 새로운 공급자와 수요자를 가시화하기 위한 방법적 기호일 뿐이다. 문화의 경제에서 세대라는 기호의 수행적 효력이 사회학적 세대론의 현실적 정합성에 따라 판별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것이 간과될 때, 문화의 아카이브에서 발생되는 것은 세대는 무용하다라는 인식론적 허무주의 또는 세대를 기치로 내세우는 비생산적 권력투쟁이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 층위에서 새로움을 틀에 박힌 슬로건, 무의미한 수사로 간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움과 젊음이라는 단어의 남용을 지적하는 일과 새로움의 사건을 알아보려는 노력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새로움을 자본과 상품의 논리로 치부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이 둘은 자주 혼동되고, 실제로 엄밀하게 구별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우리는 최첨단 상품들의 (가령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전혀 특별하지 않는 차이를 새로움으로 포장하고, 그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거대 기업들을 빈번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움의 가치에 대한 오리지널리티를 사업가들에게 넘겨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새로움이라는 문화의 논리가 상품경제에 침투한 긍정적 현상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의 논리가 문화의 논리를 전용한 부정적 결과일 수 있다. 문제는 상품경제에 의해 변용된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물리적·기능적 새로움을 중시하는 현재주의적 태도에 의해 문화의 경제가 잠식되는 경우다.56)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로움의 역사적 저작권이 문화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저작권을 관철시키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다. 동시대 비평에 부과되는 새로운 과제는, 문화의 새로움과 상품의 새로움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방법과 원리를 사유하는 일이다. 이것은 대단히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이지만 문학의 자율적 경제를 사수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전해볼 만한 과제이다. 이 글은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다만 이 글에서 부각한 ‘새로움’–‘세대’–‘배움’이라는 용어들의 특정한 결합 양상에 대한 고찰이 그것을 위한 하나의 방법적 시도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다음에 시도해보고자 한다.



8. 마무리


  마무리하자. 이 글은 ‘문학의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적 틀을 시도하고 있지만,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주장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이 글의 목적은 문학에 관해 제출되었던 기존의 이론적 사유들을 다른 방식으로 재배치해보는 데 있고, 이를 바탕으로 문학을 통해 공유될 수 있는 유의미한 가치들을 긍정적으로 종합하는 데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동안 문학 속에서 경험되었던 다양한 배움의 실제에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다음의 네 가지 특수성을 도출하고자 했다.


  1. 문학적 가치의 특수성 :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적 가치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방식과 원리를 분석함으로써, 문학적 가치가 지닌 고유한 정체성을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학적 가치는 문학의 경제라고 불리는 독특한 언어 게임 속에서 구성되는 내재적 가치 개념에 가깝다. 이러한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고 측정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게 되면, 우리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상품의 아이덴티티, 즉 상품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가격price과 문학의 가치value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가치는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불화하는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문학이 특별히 시장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문학의 가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교환의 내재적 양태로 인해 빚어지는 차별적 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적 가치에 내포된 특수한 성격을 강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2. 문학적 생산과 소비의 특수성 :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적 교환을 담당하는 두 축, 즉 생산과 소비의 독특한 양태에 주목함으로써 양자 사이에 형성된 특수한 관계를 규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에 상품의 생산과 소비는 행위의 측면에서 엄격히 구분되며, 그 목적에 있어서도 분명히 구별된다. 판매자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상품을 생산하고, 구매자는 주관적 만족의 효용을 추구하기 위해 상품을 구매한다. 교환은 서로 다른 두 행위를 일시적으로 매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끝마친다. 그러나 문학적 교환 행위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일어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이 둘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작품을 물리적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어 생산과 소비는 구분되지만, 문학적 가치의 산출이라는 층위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우위는 고정될 수 없다. 문학의 경제에서는 생산자가 소비하고, 소비자 역시 생산한다.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의 특수한 성격을 전면화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3. 문학적 효용의 특수성: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 즉 문학의 효용적 가치와 관련된 특수한 성격을 해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구태여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다른 장르도 아닌 문학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 제작하고, 산출하고, 그것을 읽고 향유한다면, 거기에는 모종의 남다른 ‘즐거움jouissance의 경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문학적 경험이 야기하는 이 즐거움은 문학적 생산과 소비의 공통(공동) 목적이며,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행위와는 전혀 다른 만족감을 제공한다. ‘배움’은 그러한 문학이 야기하는 쾌, 고통, 분노, 슬픔, 우울 등과 그것이 유발하는 효과로서의 어떤 ‘문학적 경험’을 좀더 긍정적인 뉘앙스로 전면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4. 문학적 역사의 특수성 :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의 내재적 가치가 산출하는 역사적 시간성의 특수한 성격을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학의 경제에서 문학의 가치는 시공을 초월하여 결정되어 있는, 일종의 주어진 가격이 아니다. 문학에 대한 가치 평가가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의 가치는 역사적으로 재구성되는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변동이 단지 현실의 변화, 새로운 외부적 시간의 산출에 의해 일방향적으로 결정되는 것 역시 아닙니다. 문학의 역사는 이 서로 다른 시간성 사이의 대화를 규제하는 원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우연적인 사건, 상황, 조건에 의해 문학에 대한(제도를 포함한) 가치 평가의 기제가 언제든지 변동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함을 의미한다. ‘새로움’과 ‘세대’는 이러한 가치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분석적 요인이자 문화적 원리로 다시 활용될 수 있다. 문학의 역사는 이러한 체제의 변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이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학의 경제가 시장경제처럼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선험적이고 독립적인 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의 경제는 사회, 시장, 정치의 질서 속에서 문학을 문학으로서 사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발견되는, 일종의 수행적 체제이다. 시장경제의 이면, 표면, 중간, 주변 등의 국지적인 시공간에서 작동되는, 대단히 취약한 시스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장경제 부근에서 창발하는 가운데, 상품의 교환 관계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문학의 경제는 미셸 세르가 말한 기생parasitism의 경제에 비유될 수도 있다.


누가 이 관계를 훔쳐 가는가? 어쩌면 이 관계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우회로가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제3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비단 논리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관계의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돈, 금덩이, 상품, 심지어는 음식, 즉 물질적 재화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재화들이 항상 자신들의 목적지에 쉽게 당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경로를 따라 운반되는 재화들을 가로채려 애쓰는 방해자들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기생parasitism이란 이 수많은 다양한 활동들에 가장 자주 부여되는 이름이다. 나는 기생이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평범하고 흔한 활동이 아닌가 생각한다.57)


  상품의 경제적 교환 경로의 방해, 이탈, 교란을 일으키는 이들은 언제나 시장의 잠재적 박멸 대상이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을 향해 점차 고조되는 동시대적 위협과 장악의 힘에 대항하려는 정치적 독트린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 독트린이 표방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문학 속에서 교환되는 특별한 배움에 의해, 문학의 경제는 누구에게서나 언제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출현할 것이다.

  • 1) Dissemination, trans. Barbara Johnson, The Athlone Press, 1981, p. 223.
  • 2) 『문학의 고고학』, 허경 옮김, 인간사랑, 2015, p. 123.
  • 3) 강보원, 「아주 조금 있는 문학」, 〈웹진 크리틱-칼〉, 2020(www.critic-al.org/?p=5905).
  • 4) 이와 관련하여 최근 비판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는 과거의 비평 담론 중 그 어떤 것도 문학의 본질을 노골적으로 정의하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문학의 역사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징후적이다. 이를테면, ‘문학주의’ 담론의 유력한 주창자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1990년대 비평 담론의 전제 역시 문학의 역사성, 그리고 그에 따른 규정 불가능성이다. “문학적인 것에 대한 질문, 왜 문학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적 규정의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규정하는 순간 이미 문학은 문학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문학주의는 선언되는 그 순간 문학주의가 아닌 것이 된다”(서영채, 「왜 문학인가: 문학주의를 위한 변명」, 『문학동네』 2000년 여름호, p. 359).
  • 5) 이에 대한 분석과 비판으로는 강동호, 「문학의 정치: 재현·잠재성·민주주의」,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 문학의 동시대성과 비평의 정치』, 문학과지성사, 2022 참조.
  • 6) 강보원, 「자가진단으로서의 비평」,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pp. 12~13.
  • 7) 경제economy의 어원학적 기원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것에 내포되어 있는 철학적·정치적·신학적 의미를 통치성의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한 사례로는 푸코(‘영혼의 관리술’)와 아감벤(‘삼위일체론’)의 연구가 있다. 이들의 지적이 이 글에 준 영향이 적지 않지만, 여러 정치신학적 계보와 맥락을 지니고 있는 이 의심스러운 개념의 복잡성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나는 경제라는 개념을 통해 부각될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 그림을 스케치하고 싶다. 오이코노미아 개념의 정치철학적 함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저서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오이코노미아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학을 향하여』, 박진우·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6.
  • 8) 피에르 부르디외, 「가격형성과 이윤의 예측」, 『언어와 상징권력』, 김현경 옮김, 나남, 2020, p. 75.
  • 9)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연구 사례로는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에 대한 로만 야콥슨의 입체적 분석이 있었다(로만 야콥슨, 「언어학과 시학」, 『문학 속의 언어학』, 신문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9).
  • 10) 보리스 그로이스, 『새로움에 대하여: 문화경제학 시론』, 김남시 옮김, 현실문화, 2017, pp. 20~23.
  • 11)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김재홍 외 옮김, 길, 2011, p. 179.
  • 12) 같은 책, p. 175.
  • 13) 아리스토텔레스는 교환경제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이러한 가치의 규정 불가능성을 타개할 수 있는 해법을 법, 제도, 통치에서 찾는다. 즉 교환의 정의가 유지되기 위해서 는 그 누구도 부당한 이익을 얻지 않도록 다스리고 규제하는 외부의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통치의 주체가 ‘교환의 정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원리가 ‘정의’라는 개념에 내포되어 있고, 이러한 ‘정의’의 실현을 통해 통치 주체가 어떤 보상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존경과 영예라고 파악한다. “다스리는 사람은 그가 정의로운 사람인 한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 대해 합당한 비례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단적으로 좋은 것을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이 배분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까닭에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사람들이 정의가 ‘타인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어떤 보수가 주어져야만 하며 이것이 존경과 영예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은 참주가 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책, pp. 182~83).
  • 14)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제기된 ‘다이아몬드와 물의 역설’은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경제학의 고전적 난제이다. 그것은 생존에 있어 거의 쓸모가 없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사치재가 ‘물’이 대표하는 필수재에 비해 비싼 이유를 해명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했다. 애덤 스미스는 이 역설을 ‘희소성scarcity’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는데, 경제학설사에서는 이 난제가 백 년 후 등장한 한계 효용 학파marginal utility school에 의해 비로소 해결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 15) 『자본론 1(상): 정치경제학 비판』,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1, p. 60.
  • 16) Principle of Economics(8th ed.), Macmillan and Co., 1920, pp. 43~44.
  • 17) 카를 마르크스, 같은 책, p. 77.
  • 18)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은 그들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그들의 물적 생산제력의 일정한 발전수준에 조응하는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제관계, 생산관계(Produktionsverhältnisse)를 맺는다”(카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김호균 옮김, 중원문화, 1988, p. 7).
  • 19)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1(상): 정치경제학 비판』, p. 48.
  • 20) 같은 책, p. 59.
  • 21) 같은 책, p. 93.
  • 22) 주류 경제학에서는 마르크스와 달리 상품product이라는 용어 대신, 재화goods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이 글에서도 신고전학파 이후의 경제학에 관해 설명할 때에는 재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외에는 상품이라는 단어를 더 빈번하게 사용할 것이다.
  • 23) Alfred Marshall, Ibid., pp. 43~44.
  • 24) 주류 경제학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효용에 대한 마샬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효용은 욕망 또는 욕구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욕망은 직접적으로 측정될 수 없고, 단지 욕망의 원인이 되는 외적 현상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경제학이 가장 중요하게 관심을 갖는 척도는, 사람들이 욕망의 충족이나 만족을 위해 기꺼이 지불하는 가격이다. 물론 어떤 만족도 제공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욕망과 열망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인간의 만족에 부합하는 행위에 최우선의 관심을 둔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구매를 했을 때 기대되는 만족이 실제의 만족과 결과적으로 잘 일치한다고 가정할 것이다”(Alfred Marshall, Ibid., p. 61).
  • 25) 문학이 점차 경량화되고, 독자들의 재미를 자극하는 형태로 변해버렸다는 일각의 주장(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쩌면 부차적인 현상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문학이 시장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후는 작품별 가격이 차등적으로 매겨질 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종의 상상이지만, 결코 상상하기 싫은 미래이다.
  • 26) 그렇다고 해서 해당 예술 장르들이 본질적으로 상업 예술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동시대의 많은 작품은,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러한 가격 형성 원리에 저항하기 위해 다양한 미학적 모색과 정치적 실험을 수행하고 있고, 그때 각 작품들을 지시하는 장르적 기호(‘음악’ ‘미술’ ‘영화’ 등)는 자본으로 환산될 수 없는 해당 작품들만의 고유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수행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 27) Roland Barthes, S/Z, trans. Richard Miller, Blackwell Publishing, 1990, p. 88.
  • 28) 마르셀 모스의 사유에서 시간은 증여와 교환을 구별하는 원리로 작용하지만, 이러한 시간의 모호성으로 인해 모스의 증여론은 후대의 많은 학자에 의해 비판받았다. 가령, 레비스트로스는 모스가 간과하고 있는 교환의 메커니즘으로 그의 구조주의적 사유를 완성할 수 있었고, 데리다는 모스의 『증여론』을 해체적으로 독해함으로써, 선물의 역설적인 불가능성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 박정호·박세진 옮김, 파이돈, 2023; Jacques Derrida, Given Time: I. Counterfeit Money, trans. Peggy Kamuf,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 29) 물론 이 독서가 온전히 독립적인 행위인 것은 아니다. 작가의 명성, 평론가의 평가, 출판사에 대한 신뢰, 인플루언서의 활동, 상업 광고 등 다양한 주변 텍스트paratext들이 독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가치 평가가 합당한지, 그 진실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독자의 시간이 투여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30) Pierre Macherey, A Theory of Literary Production, trans. Geoffrey Wall, Routledge, 2006, p. 77.
  • 31)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파리』,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8, p. 292.
  • 32)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년 하권, p. 87. 이희우가 새롭게 제시하는 배움의 정의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나는 비판이 사용하는 설명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배움의 이야기 구조를 제안하고 싶다. 즉 비판 이론이 동원하는 서사적 틀—물신·우상·징벌·파국·우상파괴·의식화·탈신비화·모순·부인—을 배움의 이론이 만들어가는 서사적 구조—기호·매혹·실망·승화·세속화·깨달음·되찾기—로 대체하고 싶다. 이것은 비판을 금지하거나 한물간 것 취급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비판적 가르침(계몽하기·일깨우기·의식화하기·상대화하기)과 배움의 역량(추구하기·실망하기·되찾기·연결하기)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 하는 주체적 결단의 문제다. [……] 배움은 변증법적이지도 않고 모순을 동력으로 삼지도 않는다. 배움은 횡단적이고 또한 구성적이다. 비판은 위에서(지식인으로부터) 오거나 아래에서(소외된 자들로부터) 오지만 배움은 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아래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오직 가로지름과 연결의 실천 속에서만 오기 때문에 배움은 장르나 장들, 영역들의 위계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해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배움은 자신의 실천 속에서 그러한 위계와 분리를 해체한다”(같은 글, pp. 103~104).
  • 33) 덧붙이자면, 내가 배운 것은 ‘배움’이라는 화두의 중요성 외에 다른 것도 있다. 가령 배움이 실제 텍스트에서 어떻게 촉발되고 있는가를 분석한 그의 글 「배움의 단계들: 손보미, 「불장난」 읽기」(『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에서 제시되고 있는 ‘매력의 경제’라는 표현을 읽고, 나는 ‘경제’라는 단어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 3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2002, pp. 37~38. 강조는 인용자.
  • 35) 같은 책, p. 62.
  • 36) 위에서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시학』은 탁월한 비극들이 선보이는 훌륭한 플롯이 인과관계 등 개연성의 감각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과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서두에서 지나가듯이 언급한 ‘배움의 능력’을 강조하는 데 좀더 집중할 것이다.
  • 37) Roland Barthes, “Style as Craftmanship”, Writing Degree Zero, trans. Annette Lavers·Colin Smith, Hill and Wang, 1970, pp. 62~63.
  • 38) 문학이 요구하는 자기 정당화의 역사는 바르트의 지적보다 더 오래된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근대 이전에도 문학에 대한 비난·증오·혐오·비판은 적지 않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비난들에 맞서 문학을 옹호하려는 사유들에 의해 문학에 대한 정당화가 촉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초의 문학 이론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국가』에서 플라톤이 역설한 ‘시인추방론’이라는 사실은 징후적이다.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한 사례로는 Williiam Marx, The Hatred of Literature, trans. Nicholas Elliot, Harvard University Press, 2018 참조.
  • 39) 문학이론가 캐롤라인 레빈이 정의하고 있는 형식이란 문학을 구성하는 “모든 형태들과 배치들, 모든 질서화의 원리들, 모든 반복과 차이의 패턴들”(p. 30)을 의미한다. 형식 개념을 이처럼 폭넓게 재정의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이점은 내용과 형식, 또는 문학과 현실 사이의 이분법으로부터 탈피하여, 양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 긴장 속에서 문학 텍스트의 의미를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형식주의의 입장에서 과제는 “감추어진 형식의 내용을 추적하기보다, 내용의 형식들, 즉 문학 텍스트의 안팎에서 서로 만나는 조직들의 원리를 추적”(p. 58)하는 일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캐롤라인 레빈, 『형식들』, 백준걸·황수경 옮김, 앨피, 2021 참조.
  • 40) 이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분석학의 이론에 따라 우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신적 사건이 취하는 진로가 쾌락 원칙Lustprinzip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규제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러한 사건의 진로가 항상 불쾌한 긴장에 의해서 작동되고, 그것의 최종 결과는 긴장의 완화—즉, 불쾌를 피하고 쾌락을 얻는 것과 일치하도록 방향을 잡는다고 믿는다. 그러한 진로를 우리의 연구 주제인 정신 과정의 고려 속에서 논한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작업 속에 <경제적> 관점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20, p. 271).
  • 41)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같은 책, p. 423.
  • 42) 흥미로운 것은 프로이트도 이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예술이 선사할 수 있는 독특한 불쾌의 문제를 설명해야 했는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 그것 역시 최종적으로는 쾌락을 산출한다고 보면서, 예술의 의도적 불쾌를 ‘쾌락의 경제’에 복속시킨다. “어른들에 의해서 수행되는 예술적 놀이와 예술적 모방은—이것은 어린아이들의 경우와는 달리 관객을 목표로 한다—관중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면제해 주지는 않지만(예컨대 비극에서), 그들은 그것을 고도로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한 사항으로 덧붙이고 싶다. 이것은, 심지어는 쾌락 원칙이 지배적인 상황하에서도 그 자체로는 불쾌한 것을 마음속에서 상기해 보고 작업해볼 주제로 만들기에 충분한 수단과 방법이 존재한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최종적 결과로서는 쾌락을 산출하는 이러한 사례와 상황을 고려해 보는 일이 그 주제에 대한 경제론적 접근법과 더불어 어떤 미학 체계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쾌락 원칙의 존재와 지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들은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경향, 즉 이 원칙보다 더 원시적이고 독립되어 있는 어떤 경향의 운용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같은 책, pp. 285~86). 이러한 프로이트의 견해에 대해 들뢰즈는 그가 마조히즘의 진정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론을 펼치면서, 이 쾌락으로 전환될 수 없는 불쾌 그 자체가 예술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매저키즘』, 이강훈 옮김, 인간사랑, 2007 참조.
  • 43) Roland Barthes, “Twenty Key Words for Roland Barthes”, The Grain of the Voice: Interviews 1962~1980, trans. Linda Coverdale, Hill and Wang, 1991, pp. 206~207.
  • 44) 이에 대해 바타유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멈출 줄 모르는 생명체의 누출(낭비)이라는 일반적 운동에 의해 활성화되는 존재이다. 심지어 인간은 생물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주권souveraineté에서 이러한 누출/낭비의 운동과 동일시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권이 특권적인 방식으로 바로 인간을 영광스러운 작용l’opération glorieuse에, 곧 무용한 소비la consommation inutile에 바치는 것이다”(조르주 바타이유, 『저주받은 몫: 일반경제 시론—소진/소모』, 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p. 33).
  • 45) “Literature/Teaching”, The Grain of the Voice: Interviews 1962~1980, p. 242.
  • 46) 파울 첼란, 「자오선」, 『파울 첼란 전집 3』, 허수경 옮김, 문학동네, 2022, p. 247.
  • 47)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p. 92.
  • 48) 미셸 푸코, 「계몽이란 무엇인가?」,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욕망: 푸코–하버마스 논쟁 재론』, 정일준 옮김, 새물결, 1999, p. 190.
  • 49) 자크 데리다, 「“문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제도”: 자크 데리다와의 인터뷰」, 『문학의 행위』, 정승훈·진주영 옮김, 2013, 문학과지성사, pp. 99~100. 강조는 인용자.
  • 50) 데리다는 『파리의 우울』에 실린 보들레르의 시 「위조화폐」를 해체적으로 독해하면서 증여의 불가능성에 대한 매력적인 분석을 수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진행되는 ‘위조화폐’를 둘러싼 역설적 기제, 그것의 판별 불가능성은 그 자체로 시적(문학적) 허구의 판별 불가능성과 대응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Jacques Derrida, Given Time: I. Counterfeit Money, trans. Peggy Kamuf,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참조.
  • 51) 이에 대해 부르디외는 이렇게 규정한다. “문학 장 안에서 완수된 작업은 독창적 언어의 외관을 생산한다. 가장 흔한 용법, 즉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속된’ 용법과의 격차를 원리로 하는 파생어법들의 총체를 만들어내면서 말이다”(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책, p. 66).
  • 52) 같은 책, p. 91.
  • 53) 같은 책, p. 76.
  • 54) 보리스 그로이스, 같은 책, pp. 136~37.
  • 55) 같은 책, p. 177.
  • 56) 새로움과 관련한 동시대 한국문학장의 시스템적 한계도 이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대 문학장에서 각광받는 새로움의 가치는 주로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작품에 한정되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을 가속화하는 시스템이 정착된 지도 오래이다. 문학의 물리적 새로움을 재생산하는 데 몰두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작가와 작품은 망각이나 극복의 대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말하는 문학장의 상업화/자본화와 무관할 수 없겠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새로움’이라는 어휘가 특정한 역사적 순간을 거치며 협애화 되는 개념사적/지성사적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분석은 차후에 시도하고자 한다.
  • 57) Michel Serres, The Parasite, trans. Lawrence R. Schehr,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p. 11. 이에 대한 국내의 연구로는 이승철, 「불가능한 증여, 기생의 사회: 자크 데리다와 미셸 세르의 상호성 비판」, 『비교문화연구』 제25집 제2호, 20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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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혁진 말을 잃은 아버지들 ―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을 중심으로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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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정원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계간 파란 정원 단속정체성시선타자고맥락저맥락윤혜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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