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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 2024년 여름호(제146호)

영향과 그림자 : 전하영, 『시차와 시대착오』(문학동네, 2024) _이선진, 『밤의 반만이라도』(자음과모음, 2024)

박민아 문학평론

2024년부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1. 미치거나 죽지 않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열대병」(2004)을 보고 실험영화를 공부하던 감독이 유현목 감독의 소설을 읽고, 그 소설 속 인상적인 문구를 제목으로 한 소설(「숙희가 만든 실험영화」)을 쓴다. 전하영은 한 인터뷰에서 유현목 감독에 대해 「손」(1967)이라는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소개하는데, 이때 두 사람 사이를 매개하는 ‘실험영화’ 혹은 ‘실험성’이라는 키워드는 꽤 중요해 보인다. 전하영이 밝힌 것처럼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에서의 ‘실험’이란 “정상성 규범에 잘 맞아들어가지 않는 한 개인이 자기 삶을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간다는 의미”1)로 규정된다고 할 때, 이 실험은 당대 콘텍스트 내에서 환영받기보다는 여러 차원에서의 저항에 부딪히기 십상일 것이다. 때문에 정상성 밖의 삶을 살아가는 숙희의 선택은 매 순간 실험성을 담보로 한다. 물론 이때 그것의 성공이냐, 실패냐에 대한 규정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실험의 과정 자체가 발생시키는 특별한 결과물, 즉 특별한 ‘이야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실험영화의 실험성은 그 성공과 실패 여부와 상관 없이 당대 혹은 후대 영화계에 특별한 영감을 제공하며, 그 실험 양식은 사후 승인의 과정을 통해 지배적 양식이 될 때 더 이상 ‘실험’이 아닌 ‘보편’적 양식이 된다. 특정 젠더의 삶에 있어 특정한 몇몇 선택이 더 이상 실험의 양식으로 무대 위에 오르지 않으려면, 이 실험 양식의 수를 확산시켜 그것이 보편이 되는 순간까지 극대화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실험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래서 바로 하나의 ‘실험’이자 하나의 ‘이야기’인 셈이다. 숙희가 실험하고자 하는 이야기이자 전하영의 첫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의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 전하영은 소설이 작가와 독자 간 어떠한 ‘증여’로서 오갈 수 있다는 아이디어2)를 언급하는데, 전하영이 작품을 둘러싼 맥락을 ‘증여’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증여’는 타인에게 물품 따위를 선물로 주는 행위를 말한다. 당연하게도 이때 증여의 대상은 자본 혹은 물질적 실체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터뷰에서 전하영이 언급한 아니 에르노의 소설 『젊은 남자』의 ‘옮긴이의 말’ 중 ‘증여’의 맥락을 따라가보면, 아니 에르노는 증여를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생성된 어떤 것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되돌려주는’ 행위로 인식함을 알 수 있는데,3) 이때 기록된 ‘증여품’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다른 독자, 다른 글쓰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증여가 작동하는 원리를 상기해본다면, 증여는 주로 앞 세대가 남겨놓은 유산 — 유·무형의 자산 및 권력 혹은 문화 등 다음 세대로 승계하고자 하는 지배적 가치 체계를 포함해—을 다음 세대가 상속받는 개념으로 통용되어왔고, 증여의 체계는 주로 친족이나 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증여의 대상은 개인적 층위에서는 친족 내 재산의 소유나 축적과 관계할 것이며, 사회적 층위에서 보자면 부계 중심의 사회·역사적 산물로서 승계된다. 「시차와 시대착오」의 아버지(이명식)가 존재하지도 않는 아들 ‘이근수’에게 보이는 증여에의 욕망은 부계로 전승되는 증여의 대상이 단순히 물리적 실체 그 이상의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반면 이 미루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가진 유산을 온전히 상속받을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으며, 오히려 ‘미친 여자’로 대변되는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유산이 끊임없이 괴롭힌다. 전하영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작동 원리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미치거나 죽지 않고 살아남은 여자의 이야기인 셈이다. 때문에 「영향」의 마지막 장면에서 난희의 “내 멋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라는 담담한 선언이자 예고 후에, 내일은 카메라를 들고 산책을 나갈 것이라는 결심과 함께 그동안 예속되어 있던 언어적 구속에서도 탈피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산책하면서, 내게도 뭔가 팔 게 있을지 생각해봐야지. 그리고…… 난희는 오로지 한국어로 생각했고, 영어로 반복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았다”(p. 115).

  여성의 글쓰기는 자신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언어로 사고하고 바로 그 언어를 수단으로 삼아, 동일한 원리로 자신을 억압하는 작동 기제로부터의 전회 혹은 해방을 서술해야 한다는 문제적 상황에 놓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대의 여성 작가들은 “자신을 감염 시켰던 문장 (판결 )을 쫓아내”4)기 위해 ‘미친 여자’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작가의 분신이기도 했던 이러한 ‘미친’ 인물은 대체로 매우 충동적이며, 분열적이고, 때때로 자기 파멸적이다. 전하영 소설 속 인물은 이 분노에 찬 모계 전통을 승인하지도, 답습하지도, 배제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응한다. 가령 「시차와 시대착오」의 ‘나’는 ‘미친 여자’인 어머니와 자신을 분리하고, 이를 계승해야 할 전통으로 인식하지 않으면서(“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그것. 바로 어머니의 세계에 속해버리는 것”, 「시차와 시대착오」, p. 205), 한편으로는 자신 역시 매 순간 어머니를 ‘미친 여자’로 판결 내렸던 구조와 그 언어 안에서 살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어머니’ 혹은 이전의 여성들을 규정하고 감금했던 그 언어로 그들을 서술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지만, 미치거나 죽지 않고도 그들을 서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 중에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검은 일기」의 ‘나’는 문학평론가 C로부터 죽은 사람의 일기를 소설로 써줄 것을 의뢰받는다. ‘나’가 이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결국 수락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이 일기의 주인공은 「시대와 시대착오」의 감금된 어머니를 연상시키는데, 결국 ‘내’가 죽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수순인 셈이지만, 전하영의 소설에서 저택(혹은 정신병원 )에 유폐되어 있는 유령 같은 존재 혹은 미친 여자는 작가의 분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유령이 출몰하는, “아름답지만 역겨운 히스토리가 숨겨져 있”(「검은 일기」, p. 39)는 저택에 사는 사람은 ‘내’가 되었다가 ‘나’의 분신이랄 수 있는 ‘엘리슨’으로, 이 ‘검은 일기’의 주인공인 ‘젊은 여성 작가’로, 다시 「시차와 시대착오」의 감금된 ‘어머니’로 끊임없이 환유적으로 미끌어진다. 이것이 ‘내’가 쓰게 될 소설이라면, ‘내’가 읽고 싶은 소설은 헌책방에서 발견한 “검은 바다”(「남쪽에서」)라는 제목의 소설일 것이다.


  차례에 나열된 스무 편이 조금 넘는 소설 중에 ‘검은 바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와 그것을 읽었다. 젊은 여자와 나이든 여자의 이야기였다. 선후배인 두 사람이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두런두런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그 짧은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몸속에 흩어진 조각들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여자가 있었다. 내가 모르게. 무언가를 쓰고,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 나를 닮았지만, 전혀 닮지 않은 그녀가 성큼 다가왔다. 시간을 거슬러. 작은 상자 안에 몸을 싣고 중력을 거스르던 순간처럼, 나는 나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찌그러지고 멍해졌다. (「남쪽에서」, pp. 75~76)


  서술자 ‘나’는 “사라진 여자들”을 ‘나’와 닮았으면서도 전혀 닮지 않은 존재로 인식한다. ‘나’는 결국 이 “사라진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쓰게’ 되겠지만, 그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분명 내 “몸속에 흩어진 조각들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면서 ‘나’와 ‘나’를 둘러싼 존재 방식을 이해하게끔 하고 이를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전하영이 ‘증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여성 인물들이 형성해온 이야기의 전통 혹은 규율의 외부에 있고자 한다. 이처럼 전하영의 소설에서 이루어지는 실험 양식과 변칙적 증여의 방식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이야기로서 후대에 전수되고자 한다.


  2. ‘있음’의 그림자


  밤의 반을 어떻게 가늠해야 할까. 이선진의 첫 소설집 『밤의 반만이라도』에 실린 표제작 「밤의 반만이라도」의 제목에 관한 이야기다. 보기에 따라 반은 무언가에는 충분한 것일 수도, 다른 무언가에는 부족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온전한 반은 어떤가. ‘반’의 최대치가 반이라면 이때의 반은 전부인가, 부분에 불과한가. 게다가 그 반의 대상이 밤이나 그림자처럼 무형의 것이라면?

  이 ‘반’에 대한 사유는 이선진의 소설 속 퀴어 인물들이 세계와 연루되는 방식이자, ‘나’가 타인을 감각하고 매개하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혼자서는 절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외롭고 소란한 동물”(「밤의 반만이라도」, p. 198)들인 ‘우리’는 소설 속 맹꽁이처럼 “맹꽁” 하고 온전히 울기 위해 무엇보다 서로의 울음과 침묵이 필요하다. 온전한 ‘반’은 ‘우리’의 온전한 ‘밤’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면서, 거부할 수 없는 내밀한 ‘각자의 밤’과 관계할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때의 ‘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밤의 반만이라도」에서 전맹인 미수 씨의 이야기를 따라가보면 ‘밤’은 선택받은 자들만이 품을 수 있는 신비로운 어떤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거 아니? 사람들은 누구나 밤을 갖고 태어나. 갓난아이 속에 갓 난 어둠이 있는 셈이지. 그런데 사람의 몸속에 밤이 심겨 있는 건 아주 잠깐뿐이야. 보통 사람들은 탯줄처럼 밤과 연결되어 있다가 밤에게 버림받아. 너도 그렇고. 그런데 나랑 내 딸은 버림받지 않았단다. 밤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기를 선택했고, 내가 계속 밤을 품고 있기를 선택한거야.” (「밤의 반만이라도」, pp. 203~204)


  결국 ‘밤’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났지만 이제는 잃어버리고 없는 근원적인 ‘무엇’이면서, 선택받은 몇몇의 존재는 아직 간직하고 있는 ‘무엇’인 셈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이선진은 이 ‘밤’에 대해 장애와의 연결성을 강조하고 싶었다기보다는, “불완전한 삶의 면면에서 기인하는 ‘밤’을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무엇이 아니라, 저마다의 고유한 어둠으로서 얼마든지 삶을 긍정으로 비출 수 있는 일종의 ‘보물’처럼 그려내고 싶었”5)다고 밝힌 바 있다. ‘밤’을 자신의 딸 다운에게 물려줄 유산으로 인식하는 미수 씨는, 때문에 그녀가 보기에 “너무 환”한 ‘나’에게 “다운이 옆에서 얼쩡거리는 건 이제 그만”하라고 종용하지만, ‘나’는 나에게도 그 “나만의 밤”이 있으므로 다운이 옆에서 “딱 반만 같이 있”겠다고 응수한다 (pp. 204~206). 이처럼 ‘나’가 더 온전한 ‘밤’을 위해 서로의 ‘밤의 반’을 나누고자 하는 방식은 ‘밝음’보다는 ‘어둠’에 그 존재의 정수가 있다는 작가의 믿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선진은 존재가 근본적으로 내재한 이 ‘밤’의 겹침을 통한 소통이야말로 타인과 관계 맺는 진실한 방식이라고 여기는 듯한데, 때로는 ‘밤’이 내포한 이러한 소통 가능성에 더해, ‘반’이라는 어정쩡함이, ‘반’만 공유한다는 공통의 감각이, 존재의 ‘살아 있음’과 ‘살아없음’(「생사람들」, p. 271)의 양극단을 왕래하게 하는 수단이 되어주기도 한다. ‘있음’과 ‘없음’에 대한 사유는 이선진의 소설집을 가로 지르는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없음’을 추동하는 힘은 퀴어 존재로서의 ‘부끄러움’이다. 앞서 살펴본 「밤의 반만이라도」에서 “내 안이 온통 너로 꽉 차 있”(p. 215)음을 인식한 그 순간 가장 명백한 ‘나’의 반응은 ‘무서움’이었다. 이선진 소설 속의 퀴어 인물들은 대체로 이러한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나 상황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자 하는 특징을 보인다. ‘나’를 구성하는 무엇이 ‘나’를 구성하는 또 다른 외재적 조건이나 규범으로부터의 승인을 거절당하게 하거나, 그로부터 거절될 가능성이 농후해질 때, ‘나’는 존재론적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가령 「부나, 나」에서 ‘부나’와의 관계 맺기에 실패한 ‘나’에게, “며칠 동안 가슴 한 구석이 아파 병가”(p. 44)를 낸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남아 있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며, 「망종」에서 아홉 살 무렵의 ‘나’가 살면서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낀 계기는 가족들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라고 한 할머니의 고백이었다.


  이 자식들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할머니의 고백에 이 자식들은 이 자식이 되었다. 수창과 수만이 떠나고 수철만 남았다. 남았다고 하기엔 너무 멀고 무심했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더는 찌그러뜨릴 게 없다는 것. 더는 파괴하고 손상할 무언가가 없다는 것. 그건 내가 살면서 처음 느낀 부끄러움이었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망종」, p. 122)


  이러한 종류의 부끄러움은 동성 연인인 ‘미진’과의 관계 맺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남남이고 법적으로 가족도 연인도 아니고 냉정하게 말해서 언제든 갈라설 수 있는 사인데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p. 142). 어떤 경우에는 ‘나’ 아닌 타자의 부끄러움 또한 ‘내’가 떠맡게되는데(“엄마는 뚱뚱한 데다가 남자를 좋아할 수 없는 딸을 부끄러워했으니까”, 「무관한 겨울」, p. 159), ‘나’로부터 비롯된 ‘나’에 대한 타자의 이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어 ‘나’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하지만 앞서 「밤의 반만이라도」의 사회적 규범이나 관습 속에서 ‘불완전함’으로 규정되어왔던 존재의 어떠한 특징이 수치나 부끄러움이 아닌 그 존재의 고유한 잠재성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처럼, 또한 미수와 다운 모녀가 그 밤의 영역을 ‘비밀’로서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노출하기의 전략을 택했던 것처럼, 밤은 어둠을 대변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밤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이는 또 다른 특성을 지닌다. 밤은 깊어질수록 어두워지는데, 이것이야말로 더해질수록 존재의 온전함을 드러내는 밤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차원에서라면 각자의 ‘밤’은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주고받으면서 공명할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이것이 이선진의 소설 속 인물들이 ‘각자의 밤’을 ‘우리의 밤’으로 조율하는 방식이다.

  엘스페스 프로빈에 의하면 ‘수치의 쓰기’는 수치를 근본적으로 탈인격화하면서 수치의 경험이 가지는 의미를 재작업·재서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6) 가령 모계로 전승되는 미수 씨의 ‘밤’과 관련한 ‘이야기’나 밤의 영역에 있을 ‘비밀’과 ‘보물’을 “무방비하게 노출”(p. 220)된 영역에 두고자 하는 다운의 경우처럼, 오히려 수치를 상품화하거나 물화해버림으로써 수치를 기존의 맥락에서 이탈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밤의 반만이라도」를 비롯해 소설집에 수록된 다수 작품은 ‘너’라는 존재와의 온전한 관계 맺기에 실패한 ‘나’의 ‘실패의 기록’이자, 자신에게 존재하는 퀴어로서의 욕망 혹은 아이덴티티를 수락하지 못하는 비겁함에 대한‘수치의 쓰기’인 셈이다. 하지만 수치를 기록하는 행위는 그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맥락을 함께 고려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결국 이선진은 퀴어 인물들의 ‘실패담’을 통해 역으로 타인과의 관계 맺기, 그 ‘반’의 가능성과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선진의 소설 속 퀴어 인물들이 ‘(존재)없음nonbeing’에서 ‘(함께 ) 있음’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방법은 쉬운 화해나 섣부른 봉합이 아니라, 서로의 ‘밤’을 ‘반’만 겹쳐보는 것, 서로의 그림자를 조심스레 포개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침묵 위에 쌓이는 침묵처럼, 함부로 내 그림자에 몸을 포갠다. 그렇게 나는 잠시 삼면이 슬픔 한면이 너인 사람이 된다”(「망종」, p. 151).

  • 1) 「전하영×소유정 인터뷰」, 『소설 보다: 가을 2023』, p. 176.
  • 2) 같은 책, p. 170,
  • 3) 아니 에르노, 『젊은 남자』, 윤석헌 옮김, 레모, 2023, p. 90 참조.
  • 4) 샌드라 길버트·수잔 구바, 『다락방의 미친 여자』, 박오복 옮김, 북하우스, 2022, p. 187.
  • 5) 「이선진×이소 인터뷰」, 『소설 보다: 봄 2024』, pp. 112~13.
  • 6) 엘스페스 프로빈, 「수치의 쓰기」, 『정동 이론』, 최성희 외 옮김, 갈무리, 2015, pp. 1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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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자리한 윤리의 잠정을 감각적으로 표상하는 작품이다. 두 시에서 시인은 익숙함이나 표면적 친밀 속에서도 오히려 더 깊이 체감되는 거리·결핍의 정동, 그리고 자기소외의 아이러니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먼저 「빈속」에서 화자는 “나를 미워하는 친구의 집”에 초대받는다. 이 집은 “창문이 많았고 식물이 많았고 나무 빛깔의 가구들이 많”지만 “진짜 나무는 하나도 없”고, 온통 “나무 무늬를 흉내 낸” 것뿐이다. 친구의 집은 외관상 충만해 보이나 본질적 결여가 깃든 장소로, 친구 또한 소외와 결핍의 구조 안에 있으며 화자는 호두의 텅 빈 속에 자신의 존재를 포갠다. 이는 우정과 인정,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결국 실패로 전환되는 심리적 역학을 드러낸다. “나는 친구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친구가 주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일 것만 같은데”, “중요한 건 전부 친구에게 있는 것 같다”는 화자의 고백은, 타인과의 관계가 항시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자신을 차라리 결핍의 자리로 위치시킴으로써 관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것이다.  「귀갓길」은 「빈속」과 달리, “집에 가지 않”는 화자가 익명의 타자인 아저씨와 마주치면서 관계의 또 다른 층위를 탐구한다. 아저씨가 “정말 하수구 덮개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어깨까지 접어 넣어 손을 휘젓더니 내 지갑을 꺼”내는 행위는, 화자가 처음부터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과 교차하며 극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자신의 곁에서 “땡볕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힘을 다하는 “교과서에서 배운 좋은 사람”을 실제로 마주한 화자는 오히려 그 초월적 선의와 헌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놀라움과 낯섦을 경험한다. 이 만남은 타인과의 관계가 단순한 연대나 지속적 돌봄의 형태로만 해명되지 않더라도 사회적 선의가 분명히 세계 속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비둘기가 됐네. 아저씨가 말한다./그 말이 재밌어서 나는 웃는다.”는 구절이 상징하듯, 이런 일시적 돌봄과 선의가 완결이나 해결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관계의 의미와 삶의 풍요로움을 증명한다. 시인은 이 과정을 통해 현대인의 관계 맺기가 미완성과 불확정성의 상태에 머무르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과 순간성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윤리적 언덕이 된다는 통찰을 환기한다.  「빈속」과 「귀갓길」 전편을 관통하는 관계의 구조는, 친밀에 대한 열망이 궁극적으로 결핍, 소외,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완전한 결속이 아닌 잠정적 윤리가 성립된다는 데 있다. 친구, 그리고 익명 아저씨와의 관계 산물은 완전한 소유나 영속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두 시는 현대적 인간관계의 지속 불가능성과 일시성을 드러내며, 타자와의 만남의 현장이 언제든 실패와 결핍, 잠정성과 불안을 품을 수 있음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익숙하거나 친밀한 공간, 예상치 못한 우연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정동을 세밀하게 그려내어, 오늘날 존재·윤리적 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선사한다. 이수빈의 시는 어떠한 교훈이나 모범답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담백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완전한 의미나 지속적 소유에 도달할 수 없는 현대적 관계성의 본질, 그리고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불완전한 시도와 실패,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연결, 끊임없는 불확실성의 미학을 포착한다. 감각적 이미지와 절제된 서사, 미묘한 정동의 떨림을 통해, 관계의 좌절·틈새 윤리·결핍의 정서를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오늘날 실존적 현실에 대한 현대시의 성찰적 깊이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현아의 「거절」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부정의 표명이라기보다, 존재론적 함수처럼 읽혀야 한다. 이 시에서 ‘거절’은 행위의 단절이나 의사의 미수(未遂)를 넘어, 근본적인 내부적 불일치,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합일이 불가능하다는 윤리적·존재적 통찰의 알레고리다. 또한 메타시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동일시를 통한 묘사나 모방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면서도, 주체가 대상을 자기 안에 온전히 흡수하거나, 대상을 자신과 동등하게 체험하려는 시적 의지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일치가 불가능함을 전제하며, 이는 서정시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동일시의 전략, 곧 주체와 대상을 하나로 묶으려는 욕망의 실패를 현대시적 자의식으로 재구성한다.  「거절」 시의 주체는 대통령, 영부인, 수행원, 그리고 귀신으로서의 화자라는 다층적 관찰자와 중개자의 시선에서 이 비일치의 조건을 반복적으로 마주한다. 영부인의 반지를 대통령에게 건네는 장면, 수행원이 죽어서도 그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초월적 설정, 그리고 내밀한 공간인 침실에서조차 타자의 감정과 내면은 이해 불가능함인 “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으로 남는다. 여기서 ‘거절’은 소유와 일치, 결정적 진실에 대한 모든 요구에 부드럽지만 냉철하게 선을 긋는다. 어떤 친밀함과 접근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남기며, 타자의 고유성, 내부적 비밀에는 끝내 도달할 수 없음이 시 전면에 놓인다. 익숙한 동일시의 미학이 동질적 교감·일치로 수렴했던 것과 달리, 현대시에서 ‘거절’은 반대로 불일치, 미끄러짐, 간극의 미학을 긍정한다.  「망상과 착각」은 이현아 시의 존재론적 간극과 동일시 불가능의 미학을 한층 더 섬세하게 확장한다. 반려견을 둘러싼 고독사의 이야기와 “그 개가 남긴 망설임의 흔적”은 타자의 실존, 감정, 본능마저도 끝내 전적으로 포개지지 않는 비일치의 조건을 상징한다. 화자는 빨래 건조대 양 끝에서 “점점 멀어지는” 두 존재의 행위를 반복하며, 동일시의 실패와 존재론적 거리, 미끄러짐을 일상적 장면으로 그려낸다. “그 사람이 거기서 진짜 빨래를 너는지, 혼자 집으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라는 고백은, 실재와 상상 사이, 나와 타자, 기억과 현재 사이의 확인 불가능과 불확정성이 상상력의 출발점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일시와 이해, 행위의 의미가 결여와 불확정성의 지점에서만 반복되는 윤리를 지시한다. 이 시에서 상상과 미끄러짐은 채울 수 없는 거리를 감각하며, 결국 이러한 틈과 거리의 자각에서만 현대적인 시와 존재의 미학적·윤리적 가능성이 살아난다. 바르트가 텍스트의 미학은 끊임없이 미끄러져 가는 해석의 복수성과, 완전한 합일에 도달할 수 없음 그 자체에 있다고 했듯, 시의 읽기도 언제나 ‘마지막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무한한 해석, 다양한 감정·경험 간의 에너지 위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이현아의 「거절」과 「망상과 착각」은 동일화의 불가능성, 완결과 단일성의 유예를 담담하면서도 치밀하게 수락하는 현대시의 윤리적·미학적 혁신으로 자리한다. 시의 목표는 더 이상 단일함이나 일치가 아니라, 열린 장 속에서 실패와 미끄러짐,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시적 전략은 독자의 읽기도 정적 재현이 아닌 무한히 개방된 해석과 자기성찰, 그리고 주체와 타자, 이미지와 기억이 과정적으로 겹쳐지는 창조적 소통의 현장임을 강하게 환기한다.  임어지니의 「있음과 있었음」과 「모델 하우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이 시적으로 펼쳐지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자인(Sein)은 ‘얼음’이나 ‘집’처럼 물질적이고 세계에 놓인 단순한 ‘있음’의 상태다. 이런 사물들은 자신의 변화나 소멸, 의미를 자각하지 않는다. 「있음과 있었음」에서 사물로 제시되는 얼음은 자연의 섭리와 순환성의 법칙을 따르며, 그 자체로 시적 주체가 되지 않는다. 집 역시 「모델 하우스」의 서두에서 경제적 표상, 사회적 기호, 공간에 한정된다. 시의 화자는 이와 같은 ‘자인’적 사물과의 작용에서 시적인 의미를 확장한다. 얼음의 녹음과 소멸, 집의 존재와 이동이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닌 자기 인식의 계기가 된다. “얼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에서 시작해, 사라짐과 흔적, 남겨짐 앞에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주체는 집에 대해서도 “집을 사기로 했다 살 것이다”라는 주체의 인식에서 시작해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 건너려고 신호 기다릴 때” 등 모든 공간과 장소를 초월해 존재의 사유를 채움을 보여준다. 이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다자인(Dasein)’의 인식이 풍요로워짐을 말한다. 다자인의 관계성은 ‘자인’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하는 것이다. 주체는 사물 자체의 운명과 자기 경험의 흔적, 결핍, 해석의 운동을 실존적으로 배치한다. “글러브 박스”의 비어 있던 자리, 얼음의 흔적을 집요하게 감각하고 환기하는 과정은 세계 내 던져진 존재인 다자인의 실존적 태도를 소환한다. 주체는 시간과 부재, 흔적과 상상의 교차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며, 항상 세계와 사물, 시간적 가능성의 긴장 안에 존재한다.  「모델 하우스」는 집이라는 사물이 단순한 경제적 혹은 사회적 표상을 넘어 의미와 기억, 내면적 진동이 축적되는 복합적 장소로 전환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시의 화자는 집을 단순한 정주의 공간이나 투자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일상 속 크고 작은 경험, 가족과의 삶, 소유와 결여, 귀속과 떠남의 감정이 집에 층위별로 배어든다. “집에 살았다, 집에 살 것이다”라는 시제의 중첩은 주체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축 위에서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정체성의 진동을 감각함을 의미한다. 집이 일상의 반복적 경험에 내면적으로 녹아들면서, 어느 순간 과거의 긴 시간에 편입된 현재가 존재의 가장 큰 불안의 근원이 된다. 이 시에서 집 자체는 원래 하나의 기의, 단순한 본질에 가둘 수 없는 존재다. 집은 한때의 경험이기도 하며, 불확정한 미래의 가능성, 소망 혹은 결여의 상징으로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띤다. 시적 주체는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라는 엄청난 입에 삼켜지듯, 항상 어딘가로 쓸려가는 자신의 존립 조건을 예민하게 인식한다. 단어와 장소, 기표와 의미의 관계는 하나의 본질에 고정되지 않고 풀려나가며, 그것이 곧 언어의 연약함과 해석의 불완전함, 나아가 존재의 덧없음과 상실의 미학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임어지니의 시는 실존적 경험에 귀속된 사물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이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며 내면적 지각의 장으로 소환하는 주체의 감각을 정교하게 교차시킨다. 집이나 얼음 같은 물질적 대상은 자인(Sein)의 차원에 머물지만, 주체가 자신의 기억, 상상, 소망, 상실, 불안, 내면의 흔적을 그 위에 겹쳐 올릴 때 다자인(Dasein)의 자기성찰과 해석의 운동이 비로소 시작된다. 이 층위에서 시는 단순한 사물의 존재를 넘어, 실존의 불안과 정체성, 상상과 결여, 시간과 흔적이 교차하는 해석의 장 역할을 하며,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 존재의 불확정성과 생성, 상실의 미학을 현대적 감각과 깊이로 펼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임어지니의 시는 자인과 다자인이 교차하는 시적 현장에서 언어와 세계, 주체와 의미의 긴장과 개방성을 유기적으로 드러낸다. 임어지니의 시들은 일상적 사물과 내면적 세계, 정체성과 시간의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현대적 존재의 진동과 경험의 의미를 담담하면서도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사물의 나열이나 감정의 표출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와 의미화, 언어와 세계의 복합적 긴장을 정교하게 펼치는 현대시의 한 실천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장희수의 「싱크대」와 「적설」은 일상적 경험과 자연의 이미지를 감각적이며 서정적으로 조직하여, 존재의 온도와 따스함을 정교하게 그려낸다. 두 시 모두 홀로 선 주체라기보다는 타자와의 교감, 일상과 공동체적 체온이 작품 세계를 따뜻하게 감싼다는 믿음을 바탕에 둔다. 「싱크대」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생활 사물과 신체적 경험을 극대화하면서 감각과 정서, 시간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너의 옆구리가 젖은 건, 설거지를 마친 손을 허리춤에 슥슥 문질렀기 때문”과 같은 동작은 “덕분에 네 옆구리에서는 오후 내/세제향이 났다”로 이어지며, 손목, 바람, 식물과 같은 일상의 요소들이 신체적 교감과 감정적 유대를 촘촘하게 확장한다. 손목이 옆구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로 연상되고, 서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긁고 오랫동안 함께 웃는 모습은, 일상적인 순간조차 관계의 친밀성, 촉각적 유대, 공동의 정서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장희수의 시에서 실현되는 미학적 방법은 반복과 일상의 평범함이 결코 낡은 것, 시적 소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의 시편은 시간과 수많은 사물,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시적 해방과 미학적 자유의 가능성을 실감나게 입증한다. 구체적 손길, 바람, 미묘한 향, 일상의 움직임과 그 감정의 변동, 타자와의 촉각적 교감은 모두 언어와 이미지의 층위에서 섬세하게 조율된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일상적 순간과 신체 감각의 자연스러운 연계를 통해 ‘평범함’ 자체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그의 작품은 반복의 세계에서도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며, 사물과 시간, 타자와의 접촉이 곧 미학적 존재의 시작점이자 메타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출발점이 됨을 증명한다.  「적설」의 첫 부분은 ‘너’가 “떠날 사람처럼” 화자를 “꼭 안아준” 장면에서 시작한다. 화자는 그 체온을 간직하고 있다. 눈은 “끝나버린 세상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세상이 얼어붙을 것 같아도, “마지막에 껴안은 사람과는/영원히 붙어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에, 화자는 그 믿음을 간직한다. 화자는 “어떤 말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자꾸만 믿고 싶어”하고, 언젠가는 “끝나버릴 것 같”아도, ‘너’의 포옹에 남겨진 가능성을 “희게 쌓는다.” 시는 처음부터 따스함과 이별,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남는 온기와 만남, 신뢰와 관계의 지속성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종말적 상상, 관계의 소멸과 재생, 윤리적 가능성을 끝까지 탐색한다.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면 하얀색일 것”, “끝이 날 것이라고//누구에게 말하는지 몰라도/누군가에게 말하는 목소리가//희게 쌓이고 있었다”와 같은 구절에서 시인은 세계의 거짓과 희망, 종말과 만남, 현실과 상상, 영화와 눈이 교차하는 미학을 그린다.  이 두 시는 일상성과 감각, 시간성, 정체성, 관계, 흔적, 소멸, 애도라는 현대시의 주요 의제를 집요하게 탐색한 셈이다. 평범한 사물과 신체적 행위, 작은 몸짓과 자연의 미묘한 변화가 모두 언어와 이미지로 실존의 결, 감정의 파장, 시간의 불확정성을 유기적으로 직조한다. 장희수의 시세계는 언어, 세부적 감각, 상상력, 공동체적 연대가 만나는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과 자기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는 ‘돌’처럼 “정지한 사고”와 언어,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상상력과 “움직이는 시간”이 “삐걱대”(「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면서 직조해내는 우리의 상상력의 현실적 질감, 텍스트의 탈장소적 특질, 해체적 실험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현대시의 모범적 성취를 보여준다. 시의 첫 구절 “나: 보이는 순간 끝을 예견한다”는 시적 객체가 등장하자마자 곧 상상력이 소진되는 불확정성과 파편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꺾였다/다채로워서... 유복해서”, “나: 차라리 망쳐 보라 했다”와 같은 파편화된 장면과 파괴적 명령을 통해 시는 감각과 인식의 경계를 흔들며, 독자가 하나의 알레고리나 고정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항상 새로운 체험적 해석의 장을 만들도록 한다. 이러한 해체적 실험정신은 바르트가 강조한 “텍스트는 기호에 비해 접근하거나 체험되는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기의로 닫혀진다.”(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2002, 41쪽)라는 원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정태인은 단일한 해석이나 알레고리에 저항하며, 각 행과 단어·이미지를 독자 몸에 밀착시키며, 독자가 읽는 순간마다 “내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도록 이끈다. 이로써 ‘목이 긴 나무’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독자가 진입하는 열림의 장이자, 매번 흔들리는 사건의 연속체로 기능하게 된다. 특히 “시계 침이 뾰족해지고/서정은 유리 공예에 갇히면/나는 너와 너를 사랑한 적 없다”와 같은 구절은 ‘목이 긴 나무’와 ‘시계’라는 시간성과 경직성을 병치함으로써, 단일한 기호에 의미를 환원하지 않고 시간의 연장, 멎음, 서정의 경직 등 다양한 감각적 층위를 활성화한다. 이어지는 “모방은 창조를 학대/구체는 모방의 미끈함을 덮고”, “유복함이 가짜일 때/목덜미에서 살냄새가 난다”, “딸기씨가 때론 딸기를 벗어나 종이에 우글거린다” 등에서 실체와 모방, 감각과 추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유희하며, 독자에게 언어의 돌발적 감각과 의미의 미끄러짐을 선사한다. “유복함”이라는 표현은 시 창작에서 모방이 과잉되면 ‘가짜’가 되기에 십상이고, 그것이 “유복함이 가짜일 때” 느끼는 “살냄새”를 통해 진짜 시적 실재의 감각을 드러낸다. 우글거리는 기의들 속에서 하나의 기의를 찾으려는 독서 행위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바르트적 “텍스트의 체험성” 원리를 재확인하게 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정태인은 각 행, 어휘, 이미지를 독자 경험에 침잠시키며, 닫힌 작품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체험되는 텍스트의 본질을 구현한다. 독자는 시를 읽는 순간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의미를 발명하고, 새로운 감각적 사건과 해석의 여정을 실현하는 텍스트의 자유와 해체적 실험정신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와의 교차적 맥락을 통해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의 밀도는 더욱 강화된다. “멎음;/부둣가에 달려가 해를 잡으면 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다/내려간다?”와 같은 구절은, 사유의 지점이 미끄러지고, 실체처럼 굳어진 사고와 움직이는 시간 사이에서 자주 삐걱대는 현존을 고스란히 포착한다. 결국, 정태인의 시는 닫힌 작품, 해석의 최종성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접근하고 체험되는 ‘텍스트’로서의 공간을 창출한다. 돌처럼 굳어진 사고, 용암이 굳은 자리, 흐르는 시간과 붉은 해, 썩어가는 나무, 비옥하지 않은 땅 등 다양한 사물과 현상을 통해 시인은 실체 없는 실체, 멈추고 흔들리는 삶의 흔적을 복합적으로 상상한다. 이렇게 시와 독자는 서로 병치 되고, 결과적으로 바르트적 해석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텍스트의 본질, 의미의 창출과 사유의 미끄러짐이 정태인의 시 안에서 가장 섬세하게 실현된다.  두 시에서 드러나는 제목의 배열과 라틴어와 한자, 영어(외국어)의 사용은 미학적으로 ‘열림’, ‘다성’, 그리고 경계의 유연함을 구현하는 전략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우리 고유 언어와 문화의 소중함은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크지만, 다양한 언어와 표현 방식을 단절하고 배척하는 폐쇄적 태도는 결국 ‘돌’처럼 굳어버린 사고, 무관심적·기계적 반복, 혹은 철학적 질문 없는 ‘비사유’에 머무를 위험성을 내포한다. 정태인의 시적 구도에서 ‘돌’은 의미를 경직시키는 사고를 상징하며, “이매진(Imagine)”과 같은 흐르는 영어 동사는 의식과 감각의 흐름을 동적인 사유의 힘으로 전환한다. 시인은 고정적 해석에 안주하지 않고, 낯설고 열린 체험을 지속적으로 유도함으로써 정동적 힘, 곧 주체와 언어·이미지의 역동적 재배치를 구현한다. 많은 시인들이 상상력의 융합, 이질적 감각, 독특한 형식 실험을 펼쳐왔던 흐름과 달리, 정태인은 언뜻 파편적으로 보이는 시상의 흐름을 각 이미지를 통해 유기적으로 직조해내며 결과적으로 명확한 사유와 체험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의 시는 바르트의 텍스트는 접근하고 체험되는 것이라는 미학을 적극적으로 설계해, 단일한 알레고리와 저자 중심 해석을 철저히 거부하고 시적 언어와 감각을 독자 신체와 경험으로 촘촘히 전달한다.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에서 “목이 긴 나무”라는 이미지는 특정 의미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이미지는 독자가 텍스트 안을 걷고 감각하며, 흔들리고, 다시 일어나는 해체적 사건의 연속으로 기능한다. 독자는 그 열린 공간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자유롭게 발명하며, 언어·상상력·사유의 무한한 변주를 직접 체험한다. 바르트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닫힌 ‘작품’의 형식이 아니라 독자와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능동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로 작동한다.  여기에 정태인의 시적 축제의 장(場)에는 연극적 요소가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연극은 현실의 경계를 해체하며, 공연마다 새롭게 변형되는 극적 힘을 품고 있다. 알프레드 시몽이 『기호와 몽상』(박형섭 역, 동문선, 1999)에서 말하는 축제와 연극의 파편적·전복적 구조, 그리고 몽상가의 세계가 고독 속에서 우주적 상상과 평형(아니마)의 정동적 열림으로 나아간다는 점은, 정태인 시의 파편적 이미지·공간의 단절·대화와 소리의 겹침·물질의 초월·멎음·윤리적 감정 등과 긴밀히 맞닿는다. 한편 시몽은 인간의 삶을 연극과 축제에 비유하며, 축제와 연극 모두 민중 삶의 조건과 비극성에서 태어난 문화적 산물로 해석한다. 정태인의 시작품은 시적 조건과 비극적 현실에서 발현되는 환희와, ‘사리자’의 목소리로 상징되는 지혜와 질문, 감정 구조를 동시에 담아낸다. 정태인의 시는 주체와 기호, 현실과 환상, 언어와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해체·재배치되는 역동적 현장이다. 축제적 해방, 연극적 전환, 몽상적 상상력, 그리고 유연한 경계의 감각은 실험적 언어와 구체적인 체험 구조로 귀결되며, 현대시 해체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최경민의 「안내원」과 「라스굴라」는 현대시가 부조리의 미학과 해체적 언어 전략을 어떻게 갱신하는지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두 시는 현대사회에 널리 퍼진 “사람의 말이 차가운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언어와 제도, 관리 절차가 인간 고유의 감정·고통·기억·죽음을 어떻게 표면적이고 소외된 대상으로 환원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안내원」은 반복적·무표정한 안내 언어로 구성된 시스템 안에서, “너무 누르지 마세요. 쉽게 터질 수도 있습니다. 터지면 저희가 치워야 해요.”, “실족사는 누구의 기억도 아니어서 복원할 수 없습니다. 대신 깔끔한 가족을 써드릴게요.”, “번호가 불리면 나아가세요. 끝나면 힘껏 돌아오세요.” 등 절차적 언표가 일상적 사건, 개인의 상실, 심지어 죽음조차 데이터로, 복원 불가한 에러로 치환한다. 이는 의미 없는 반복과 객체화, 존재적 공허의 심화로, 소통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라스굴라」는 인도 디저트 캔이라는 사물에 ‘예언’과 ‘유산’을 덧씌운다. “콜카타에서 가져온 예언이었다.”, “당신은 세 개의 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입구가 찌그러진 제품은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같은 구절을 통해, 신화적 내러티브와 산업사회의 경고와 공지, 소비와 관리의 언어가 구체 사물(캔)의 표면에 동시에 아로새겨진다. 이처럼 언어는 단순 정보 혹은 경고를 넘어, 인간 경험의 현실과 신화적 상상, 관리사회의 절차가 겹겹이 작동하는 복합적 층위를 형성한다. 남자의 신체 “둔부가 사실 거대한 종기…흘러내”리고, 들개의 상상적 파트너십과 반복적 언어는 결국 모든 것이 관리·절차·소비의 공허 속에 미끄러지는 인간 실존의 우울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곧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이 보여준 미학과 맞닿는다. 『엔드게임』에서 넬과 네그가 깡통(쓰레기통)에 갇혀 기억, 신체, 생의 잔여물로만 존재하는 것과 같이, 「라스굴라」의 남자와 들개는 캔 속에서 ‘예언’의 의미도, 유산의 실체도 다 소진된 채로 반복과 공허, 아이러니와 우울 속 부조리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예언이 텅 비고 말았군”, “유산은 달콤한 맛이 나는군”과 같은 반복적 대사는, 삶의 의미 생성 실패와 현대적 소외·결핍의 심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두 작품은 이 세계가 소통 불능, 맹목적 반복, 파편화·객체화·공허, 그리고 시스템 언어와 관리·경고·소비 코드가 인간 조건을 조직함을 밀도 있게 드러낸다. 그 핵심은, 현대 존재가 결핍과 부조리·불확정성과 아이러니로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그 경계에서 해체적 언어와 블랙코미디 미학만이 진실로 인간 실존을 감각하게 한다는 통찰에 있다. 이를 통해 두 시는 해체미학의 실천적 성취를 드러낸다.  올해 등단한 이수빈, 이현아, 임어지니, 장희수, 정태인, 최경민 등 여섯 신인의 시편들은 단순한 개성 표현이나 언어실험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대 청년 세대가 겪는 세계의 깊은 변화와 복합적 결핍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이들은 관계의 불안과 결핍을 연대의 가능성, 타자와의 접촉, 아이러니와 부조리, 파격적 상상력과 시적 실험을 통해 깊이 탐색한다. ‘관계’의 불안정성은 피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언어, 일상적 감각, 상상력, 존재 인식 층위로 확장·해체되어 작동하며, 이는 단순한 시의성을 넘어 세계와 존재의 분리 불가능한 틈 사이에서만 생성되는 독특한 감각과 사유, 윤리·상상력의 책임까지 묻는다. 이러한 결핍은 고립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이 충돌·포개지는 현장으로 성립되고, 시적 언어는 해체와 실험, 평범한 일상을 뒤흔드는 감각의 진동, 정체성과 타자성, 세계와 자신 사이의 긴밀한 긴장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이 신인들은 구체적 경험과 내면의 리듬,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을 미감으로 끌어들여, 한국시의 서사적 확장과 일상에서 새로운 언어적 감수성을 착취하며, 시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넓히고 있다. 현실과 내면, 언어와 침묵, 소외와 감각이 교직된 이들의 시는 결코 완성과 합일로 안착하지 않으며, 손이 닿지 않는 영역, 불안정의 운동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특히 이들의 시적 작업은 메타시의 상상력과 존재 미학의 구현, 언어의 자기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존재의 다양한 양태를 시적으로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로 이해된다. 시는 언어적 표현을 넘어 존재와 현실의 틈새, 그곳에서만 드러나는 감각과 상상력, 윤리를 길어 올리고, 이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주체적 활동이 된다. 올해 신인 시인들의 작품은 그렇게 오늘날 한국시의 중대한 미학·문학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시단의 방향성과 역할에 대해 깊은 통찰을 낳게 하는 의미 있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 믿는다.

계간 현대시 염선옥 진리 담론과 형식의 해체불확실성의 감각다양한 연대 가능성존재의 진동해체적 실험성이질적 요소의 혼융 2025
김효숙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배옥주,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 ·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

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월간 현대시 김효숙 문화 보충물문화 텍스트문화 감수성그림기후 위기남성-언어성 착취몸의 식민지다중 감각시의 비판적 기능 2025
노태훈 픽션의 용기와 멀리 가는 퀴어 ― 김병운론

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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