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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창작과비평 | 2024년 겨울호(제206호)

인간적인 것을 향한 (부)적절한 인카운터 : 김기태 소설 속 ‘두 사람’들

권영빈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한국 현대문학 연구자. 비평전문계간지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2023년 창비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전하영의 소설들」, 「가상-현실을 만드는 리얼리티와의 조우: VR 서사를 위한 시론」, 「인간적인 것을 향한 (부)적절한 인카운터: 김기태 소설 속 ‘두 사람’들」, 「포스트 한일 관계 서사를 향한 마음의 지리학: 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창비, 2024)」가, 공저로『연결 (불)가능한 신체의 역사』, 『교차하는 페미니즘』, 『가족커뮤니티 내 복수의 시공간과 도래할 가족커뮤니티』가 있다. 현재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 인간이라는 규모와 만남의 정치

  오늘날 인간이라는 생태적·담론적 구성물을 재고하게 하는 관점으로 ‘인류세’를 빼놓을 수 없다. 대기권과 생물권의 구성, 유기체의 거주 환경과 생태계 전반이 획기적으로 달라진 현시대를 기술하고 이를 촉발한 요인으로 인류를 지목하는 인류세는 지구 생명체의 심각한 실존적 위기로 말미암아 종(種)으로서의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과 전환을 전방위적으로 요청하는 문제틀로 자리 잡고 있다.
  인류세를 둘러싼 논쟁은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규모(scale)를 다시 생각하는 일과 관련된다. 인류세라는 말은 행성 차원의 행위자로 급격히 부상한 인간의 규모를 표시할 따름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 정치적·윤리적 주체로서 자신에 무심한 지구시스템과 얽혀 어떻게 스스로의 규모를 (재)조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핵심으로 들어서 있다. 그러한 조정은 인간이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폐기하거나 변용함으로써 인간이라는 규모와 그 행성적 힘을 직접적으로 축소하는 것이기도 하고, 인간이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현하고 소망해야 할 것들을 재론함으로써 인간성, 인간적인 것의 규모를 재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 실재이면서도 인식론적인 공간의 메타포이자 존재의 현상학적 범주인 ‘규모’는 언제나 다른 규모, 다른 존재와의 연결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는바, 그토록 크고도 작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규모를 재구축하고 다른 규모들과의 관계를 재편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것은 인간에 관한 앎과 서사를 재구성하는 데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가령 단 ‘두 사람’이 빚어내는 인간이라는 규모와 인간의 대안적 초상에 관한 구상은 어떨까.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은 발표하는 소설마다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가의 첫 소설집답게 큰 주목을 받았다. 소설이 포착하는 세태와 그것을 그리는 방식이 차별화된 감각적 재미를 창출한다는 점, 그 속에서도 통렬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이 김기태 소설이 회자되는 요인일 것이다. 고도로 원자화된 삶, 각종 관계 속 부침이나 이데올로기적 억압으로 인해 침잠해 있는 존재들의 담담한 말들을 포착하고 조심스레 건져올리는 최근 소설들의 경향과 다르게, 그의 소설은 그러한 소외감을 다루면서도 세계의 구성원리가 단방향적인 침식의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활달하게 펼쳐낸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소설은 「세상 모든 바다」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상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그리고 「일렉트릭 픽션」(『릿터』 2024년 6-7월호)이다. 앞선 두 소설이 작가의 본격적인 활동을 알리며 그의 주제적·형식적 관심사를 두루 엿볼 수 있게 한다면, 근작은 그러한 작가적 표명이 하나의 사례로 집약되어 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소설에서 ‘두 사람’의 만남과 관계는 인류세가 문제 삼는 인간이라는 규모를 성찰하게 한다. (비)의도적으로 고립된 개별 존재들이 교차·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관계가 다른 삶을 구성하게 하는 토대로 모델링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예기치 않은 두 사람의 ‘마주침’(encounter)은 이른바 취약성을 동력으로 하는 관계적 주체의 의미나 중요성에 관한 논의로 직진하지 않는다. 소설이 그들의 관계를 미래에 관해 무엇도 약속하거나 전망하지 않는 일시적 열림인 채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만남은 그들이 다다를 수 있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관계의 지평을 좀더 멀리, 넓게 조망할 수 있게 한다.1) 어쩔 수 없이, 또는 우발적으로, 때로는 자족적인 시도로 조성되는 두 사람의 만남이 부적절한 정동을 내포하거나 단지 잠정적 알맞음(적절함)의 상태를 표시할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이라는 규모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행위일 수 있음을 김기태의 소설은 보여준다.


2. 두 사람 몫으로 다시 보는 세계: 「세상 모든 바다」

  「세상 모든 바다」는 ‘ K’라는 접두어가 불필요할 만큼 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아이돌 걸그룹 ‘세상 모든 바다’(이하 세모바)의 콘서트에 간 두 사람, 하쿠와 백영록의 이야기이다2). 소설에서 생생하게 재현되는 아이돌과 팬덤의 존재방식, 글로벌 스케일에서 작동하는 문화정치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속에 담긴 여러 힘들의 길항으로 소설의 화두를 결집시킨다.3) 그러나 「세상 모든 바다」는 그런 내용에 앞서 타인이 당한 비극에 대한 연루의 감각, 죄의식 같은 다소 익숙한 주제를 다루는 소설이기도 하다. 중심인물 하쿠가 당면한 설명책임과 그 실패를 형상화하는 방식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이라는 규모에 관한 탐색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탐색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로 소설이 활용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문법에 주목할 수 있다. 글로벌 문화시장에서 인정받는 케이팝의 중심에 있을 뿐 아니라 반전(反戰)이나 차별금지법 제정, 기후위기 같은 지구적 화제들을 거느리는 세모바는 소설 속 표현대로 아름답고, 유능하며, 옳음으로써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자기를 대입함직한 정체성의 표상이 된다. 반면 재일교포 신분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 하쿠의 외국인 또는 ‘외부인’이라는 기표는 그가 자기에 관한 설명을 계속 유보하게 만든다. 예컨대 한국어과에 진학하거나 한국 유학을 위한 면접에서 그의 까다로운 정체성은 서로 다른 문화를 잇는 “가교”(20면)로 의미화되지만, 백영록과의 만남에서는 그저 “외국인”(13면)이 되는 근거로 쓰인다. 대학원 환영회에서 하쿠는 케이팝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K’ 바깥의 외국인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 행동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선배의 푸념을 듣고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는 걸 감추고 싶”(21면)어 한다. 이 소설이 글로벌 아이돌의 행보에 자기 정체성과 욕망을 투사하는 많은 이들 중에서도 하쿠의 입장에 착목한 이유는 그러한 외부인 ‘다움’은 어떤 부적절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설명할 책임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한편 소설에서 오리엔탈리즘은 하쿠가 자기 또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을 규정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세모바의 존재양태를 지배하는 질서이기도 하다. 정체성이 집단 고유의 속성을 부정하거나 은폐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는 점과 그것이 식민화된 문화의 재현은 물론 식민자/피식민자 모두의 주체적 입장이 형성되는 데 중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 사이드( E. Said)의 요체인바, 하쿠는 케이팝 걸그룹을 좋아하면서도 소위 “열렬한 ‘덕후’”(13면)처럼 보이는 것과 엄격한 거리를 두면서 백영록의 외형만으로 그를 “오타쿠”(14면)로 규정하는가 하면, 트위터를 모르는 백영록이 과연 “그룹을 지지하는 온전한 방식”(17면)을 취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이러한 타자화는 스스로 아름답고 유능한 세모바와는 언뜻 무관해 보이는 기제지만, 사실 세모바 또한 아이돌 산업이 추구하는 어린-아시안-여성이라는 차별적 정체성을 근간으로 한다. 이들의 정의로운 운동들도 타 지역이나 역사에 대한 단편적 이해에 따른 이슈몰이일 수 있다는 점이 하쿠의 해진 탐방 대목에서 드러난다(원전도시 해진은 백영록의 고향이자 세모바의 팬들이 탈원전 캠페인을 벌인 곳으로, 원전이 지역 타자화와 식민화의 상징이라는 점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결국 세모바로 만들어지는 통합된 자아와 정체성은 세모바가 대리하는 타자화에 의탁해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이어져 있다”는 하쿠의 “실감”(12면)도 환상과 다름없다.
  그런데 하쿠는 백영록을 만나고 그의 죽음을 경험하며 더이상 외부인이라는 위치를 고수할 수 없게 된다. 케이팝 걸그룹 또는 세모바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당사자성을, 소설은 그가 백영록에게 소문을 전한 행위의 확실성으로 구성한다. 자신이 ‘하쿠’라는 것마저 “부분적으로는 거짓”(9면)이고 그날 잠실 콘서트장에 밀집된 십삼만의 인원에 자기가 집계되어 있다는 것도 “완전한 사실은 아닐”(25면) 수 있지만, 그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백영록을 만나 그에게 게릴라 콘서트에 관한 정보를 전한 것만은 “어떻게 보아도 사실”(9면), “틀림없는 사실”(31면)이다. 그러한 확실성은 하쿠로 하여금 백영록을 해석해야만 하는 위치로 내몬다. 조각나고 해체되어 소셜 미디어 속을 떠도는 사망자 백영록이 아닌, 소설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당신은 ‘세상 모든 바다’의 팬입니까”(9면)(또는 좋아합니까)라는 물음을 둘러싼 백영록의 고유성을 알고 있는 자로 하쿠의 정체성이 돌연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영록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하쿠의 노력을 통해 오히려 뚜렷해지는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성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망설임 없는 진심을 보여주는 백영록과, 케이팝 걸그룹에 자아를 부분적으로 의탁하면서도 좋아하는 행위에서 감지되는 위계(또는 위기)의 문제를 자신의 외부인 지향으로 숨기는 하쿠 사이에는 바다같이 넓은 거리가 있다. 이로 인해 둘 사이에서 돌이킬 수 없는 거래가 발생한다. 백영록은 하쿠를 일본에서 잠실까지 온 사람으로 인식하여 굿즈 숍에서 하나 남은 세계지도 플래그를 양보하고, 하쿠는 세모바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백영록에게 그가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한 트위터 속 소문을 건넨다. 이 여파가 백영록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은 하쿠가 그가 가진 세계지도에 세계가 그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해진행을 통해) 알아차리게 하면서, ‘좋아한다’는 마음의 댓가가 죽음일 수 있다는 점 또한 하쿠에게 인식시킨다.
  하지만 여기서 소설은 타인과의 만남이란 리스크를 짊어진 연루를 지향해야 한다는 당위, 또는 그 당위를 실현하기 위한 주체의 행위성을 묻기보다 ‘두 사람’이 낳은 탐문의 자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하쿠의 실패를 의미화한다.
  바다를 통하지 않고 만났음에도 서로를 “파 파 플레이스”(14면)에서 온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이격은 마치 아프리카 기아나 아랍권의 내전과 같은 난해한 문제를 굿즈 숍에서 판매하는 세계지도 플래그에 욱여넣듯 기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글로벌 아이돌이 구가하는 정치적·윤리적 행위를 안온한 위치에서 자신의 것인 양 누리며 ‘세계’를 유영하던 하쿠는 백영록과의 만남과 그의 죽음을 계기로 갑자기 구석자리로 포획된다. 그러나 내몰려 다다른 지점이 마냥 궁벽한 곳은 아니다. 그곳은 글로벌-로컬-개별 존재의 관계를 다시 보게 하는, 불편하면서도 희망적인 시야를 생성해주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해진 해안가의 산포하는 파도 앞에서 하쿠가 취하는 뒷걸음질은 지하아이돌에 열광하는 ‘오타쿠’들의 “근시의 사랑”(37면)을 그리워하는 그의 상념과 상통하지만, 백영록과의 ‘재회’라는 해진행의 본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됐다는 점 또한 말해준다. 궁지로 보이지만 바다와 면해 있는 곳에서, 그러한 바다를 두려워하며 간격을 벌리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비로소 실질적 거리감이 갖춰졌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바다가 연결되어 있다는 당연한 이치와 그것이 실체적 진실이 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죽음’은 너무나 큰 리스크이지만, 두 사람의 만남이 만든 탐문의 자리는 인간이라는 최소한의 규모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그것을 이루었을 때 그 안에 자연스레 밀려들어오는 ‘세상 모든 바다’의 존재를 역설한다.


3. ‘두 사람’이라는 결속의 패러다임: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의 또다른 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첨예한 자본주의 속을 살아가는 두 사람을 조명한다. 주인공 권진주와 김니콜라이는 각자의 계급적·지역적 한계 속에서 그 외부를 향하는 욕망을 반성적으로 잠재우고 형편대로 삶을 꾸려나간다. 개인의 삶을 틀 지우는 구조의 문제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이들에게 중차대한 과업은 일상을 가성비 높게 설계하는 일이다.
  소설에서 집중적으로 묘사되는 ‘밈’은 이들이 이러한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정 순간을 빠르게 해석하고 맥락화한 뒤 휘발시켜버리는 밈은 단순하고 일시적이며 ‘복붙’만 해도 되는 완제품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범용성과 기동력은 밈이 원본과의 관계에서 자유롭다는 것과 관련된다. 밈의 원본성은 사용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깎이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것을 풍미( flavor)로 취급하거나 본래의 맥락을 소거 또는 과장해야만 밈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해석의 기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밈은 ‘수행성’이나 ‘행위자성’과 같은 긍정적 개념과 어울리는 듯하다. 그러나 소설에서 밈은 그 자체로 전복적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두 인물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특정한 피드백루프를 만들어주는 고효율의 물자로 우선 동원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가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134면)라는 의문과 회한에 빠질 때 느닷없이 김정은과 추노꾼 장혁, 아마존 짤이 대답의 자리를 메운다. 살기 위한 끝없는 분투에 괴로울 때는 “네가 선택했잖아”(120면)라는 시대의 정언명령이 나타나 인물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밈은 생활세계에서 일종의 자극 -반응체제로 패턴화되어 있다. 삶의 모순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그것이 드러날 법한 자리는 순간적이고 단순한, 댓가(책임)는 없지만 해석의 기능은 있는 밈으로 채워진다. 그들의 동창인 ‘앙맨’은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린 후 그가 가진 경박한 별명과 다르게 두문불출하게 되지만 그러한 모순은 다뤄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밈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귀속된 인간의 적응기제를 보여주는 것에서 다른 방식의 쓰임으로 옮아가는 것은 ‘두 사람’이라는 역사를 (다시) 쓰는 도구로 그것이 활용되면서부터이다.4)
  소설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밈은 비선형적이고 유희적이며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일시적 교감이기에 만남의 ‘역사’를 쓰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특성 덕에 ‘두 사람’이라는 새로운 규모가 싹튼다. 평범하지만 초라한, 당장의 생활은 있지만 미래는 불확실한 이들의 삶을 찰나라도 빛내주는 밈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 각자의 삶을 ‘두 사람’의 것으로 다시 새기는 기술로 절묘하게 전유된다. ‘인터내셔널가(歌)’라는 밈은 시스템을 둘러싼 포획/저항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넘어서 적응 속에서 적응을 내파하는 방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새롭게 역사화하고 이들의 삶이 밈들의 절합 이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노래는 “기립하시오 당신도!”(135면)라고 외치는 양갈래 머리 소녀의 이미지로 온라인에서 소비되고, 두 사람도 알고리즘을 통해 그것을 접하고 향유한다. 만사가 귀찮아 누워 있는 상대에게 말 그대로 ‘기립’을 재촉하기 위해 이미지를 전송하거나, 일터에서의 불합리를 보면서 “이거는 기립이네, 기립해야겠네”(138면)와 같은 뼈있는 농담으로 응용하거나, 함께 살기로 한 두 사람이 가재도구를 정리하면서 이 노래를 ‘노동요’로 틀어놓는 것 사이에는 언뜻 유의미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밈은 단 한문장만 되풀이하며 제자리걸음 하는 태엽인형에 빗대어지지만, “어쨌든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들은 계속 있”(137면)다는 인식은 그것이 패턴 속의 차이, 차이를 가진 패턴으로 존재할 여지를 남긴다. 이들이 규정하는 “친한 사이”(142면)라는 말이 그것이다.
  ‘친한 사이’라는 결속은 ‘인터내셔널가’가 내포하는 집단적 믿음의 구조를 모방하면서도 그러한 집단성을 계급적·지역적 한계와 자본주의 질서하에서 억압을 겪는 개인들이 ‘두 사람’의 형태로 취할 수 있도록 재조정한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들의 존재방식,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과거 사회주의 국제조직의 축소판이 아니라 매순간 서로를 소외된 두 사람의 형식으로 발견하게 하는 일종의 밈이자 패러다임이 된다. 이러한 규정(력)은 밈처럼 두 사람의 역사에 틈입하거나, 둘만의 관계를 넘어 주변인들을 향한 애정으로 퍼져나가는 기동성을 보인다.5) 예컨대 졸업앨범 단체사진의 양 끝에 서 있던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에게 “둘이 친하게 지내”(114면)라는 교사의 말은 무성의하고 무의미한 것이었지만, ‘친한 사이’라는 ‘두 사람’만의 자의적이고 자율적인 규정은 그 말을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예언”(143면)으로 만든다.
   “중국인 혹은 중국인이 아닌 누군가”(141면)가 만들었을 식탁과 그가 먹는 국수에 대한 상상, ‘피자나라 치킨공주’라는 황당한 ‘인터내셔널’이 접속하고 공존하는 가운데 이제 해방의 꿈은 밈의 리듬으로 돌아다닌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이라는 규모는 그 외롭고 한정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패배주의적인 색채를 띠거나 기존의 고립감을 강화하지 않는다. ‘인터내셔널가’와 양갈래 머리 소녀가 ‘일어나시오!’라고 말할 때, 그럼으로써 그것이 오랜 시간 상징해온 메시지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칠 때 세계 속에서 오직 둘만 일어나 단결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라는 ‘친한 사이’가 매번 탄생되는 역사적 장면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한 연결이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버림”(143면)과 같은 두 사람만의 언어로 재차 번역될 때 ‘두 사람’은 어느새 두 사람의 형식을 면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두 사람’이라는 결속을 인간이 구체적 삶 속에서 새롭게 성취해야 할 질서로 내놓으면서, 그것을 고정된 약속이나 지향점으로서가 아닌 반복운동하는 무언가로 제안하고 있다.


4. 유폐된 곳에서 만나는 기술 : 「일렉트릭 픽션」 그리고 「갱도에서」

  「세상 모든 바다」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두 사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초상은 로컬-내셔널-글로벌이라는 현시대의 다중스케일적 공간구조와 질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시) 만나 다른 삶을 구성할 수 있을지 타진하게 하는 가늠쇠이다. 이들 소설에서 ‘두 사람’이라는 의미작용의 범위가 둘만의 협소한 관계만이 아닌 바다처럼 가없는 바깥을 향해 있다는 점이 그러한 가능성을 말해준다. 쉽게 약속하거나 전망하지 않기에 오히려 열어젖힘의 정동으로 더 먼 곳을 바라보게 하는 ‘두 사람’이라는 규모와 존재방식을 김기태 문학성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이해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근작 「일렉트릭 픽션」에도 이러한 관심이 뚜렷하다.
  고만고만한 계층의 1인가구나 영세한 가족이 모여 있을 법한 빌라에 거주 중인 주인공 ‘그’는 문안/문밖으로 철저히 구분된 생활을 견지하면서 “진짜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문 안에 있”(116면)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우연히 흥미를 갖게 된 일렉트릭 기타 덕에 그는 돌봄의 성격이 있는 취미 공동체를 찾아 나가거나 벽 너머의 사람들을 향해 자기 존재를 알리게 된다. (비)자발적으로 유폐되어 고립에 족하며 살던 그가 서서히 달라지는 모습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하는 소설로서 그것을 읽히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전기’라는 소재와 은유는 인간의 연결과 유대를 마치 인프라처럼 간주하도록 만들기에 효과적이다. 그 점을 가장 쉽게 전해주는 것은 단연 일렉트릭 기타이다. 악기는 혼자서도 소리를 내지만 언제나 합주나 협연 같은 다른 규모의 소리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가 애플리케이션의 AI 교사 ‘조니’가 아닌 현실의 교사 ‘재니스’를 만나게 되는 것도 서사적으로 시간문제이다. 셔플 리듬을 직접 가르쳐주려는 재니스가 손을 덥석 잡자 “전기가 통한 듯 솜털이 오스스”(126면) 돋은 그는 이제 그러한 감전이 부재하는 ‘비밀스러운’ 연주와 결별한다.
  일렉트릭 기타를 둘러싼 이야기 배면에서 찾을 수 있는 전기의 의미는 또 있다. 8년째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그는 단 한 사람의 동료도 없다. 각종 잡일을 도맡는, 계약직이라는 그의 불안정한 위치는 인간 삶의 필수 에너지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와 닮은 구석이 있다. ‘지원’이나 ‘보조’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그의 노동은 돌봄노동처럼 필수불가결하지만 쉽게 잊히거나 공적 인정체계에서 소외되곤 한다. 단체사진 촬영날, 몇벌 되지 않는 정장을 고심해 골라 입고 출근한 그가 사진 속에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어떤 느낌”(119면) 탓에 홀로 사무실에 남는 장면은 「일렉트릭 픽션」이라는 소설의 제목에 값하게 가슴을 찌릿하게 한다.
  소설에서 ‘전기’로 표현되는 연결의 의미는 또다른 중심인물인 ‘나’로부터도 연유한다. 소설은 ‘그’가 자발적으로 구분한 문안의 생활과 문밖의 질서가 일렉트릭 기타로 인해 바뀌어나가는 과정을 전지적 시점으로 보여주면서, 그렇게 낱낱이 조명된 그가 소설의 결말에서 ‘나’라는 일인칭 화자에 의해 주목된 인물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의 변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소감은 부름과 대답의 모양새를 띠기에 두 사람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만남을 이룬다.
  요컨대 만남은 하쿠와 백영록의 재회처럼 실물과의 진실한 접촉을 전제하거나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관계처럼 상호규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고백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서로를 발견해주는 방식으로도 꾸려진다.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을 다하는”(128면) 폐쇄된 연립주택에서 기타를 연주한다는 그의 자못 당당한 고백이 만들어낸 작은 틈은 ‘나’가 웅얼거리듯 연습해온 핀란드어 인사말을 비로소 누군가 들을 수 있는 안부의 말로 만든다. 인간을 존립하게 하는 전기적 네트워크의 시작점으로 ‘여기 있음’을 알리는 것은 ‘두 사람’과 그 너머로 향하는 규모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충분하다.
  김기태의 소설세계가 추구하는 이러한 만남의 기술과 인간성에 대한 희구는 소설 속 ‘두 사람’들에게서만 엿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의미는 ‘문학’의 이름으로 마주해야 할 것에 관한 그의 또다른 글에서도 분명히 전해진다.
  세월호 참사 10주기의 의미를 담은 산문 「갱도에서」(『문학동네』 2024년 봄호)는 폭발의 전조인 무색무취의 가스를 가장 먼저 탐지하는 갱도의 작은 새 카나리아를 문학에 비유한다. 각종 참사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유가족 공동체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현실에서, 문학은 때로 ‘차마 말할 수 없음’을 이유로 문제를 방기하거나 문학(화)의 권력을 의식해 지향점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의 (불)가능한 정체화에 앞서는, 문학의 최소한의/최대한의 존재 의의는 갱도의 카나리아가 그렇듯 위험을 알리는 데 있다. 그것은 ‘동료’를 부르기 위해 내는 소리이기도 하다.

  가스 냄새가 진동하는 갱도 안에서 문학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지금 나는 그 예민하고 연약한 새뿐만 아니라 믿음직한 동료 광부도 필요하다고 느낀다. 가끔 객기로 변질되더라도 얼마간의 낙관과 용기를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상황을 침착하게 점검하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할, 곡괭이로 바위에 흠집이라도 내서 그것이 영원불멸은 아니며 언젠가 쪼개지리라는 희망을 주는 동료 광부 말이다. (…)
  지난한 탐구와 논의와 곡괭이질 끝에 발견한 모든 사실이 명백한 멸망을 지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동료라면, 그때조차 어떻게 최소한의 존엄을 품고 평등하게 망할지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게 각자 죽는 것보다는 낫다. (15면)


  갱도는 서로 접촉하고 땀 흘리며 목숨을 건 밭은 호흡을 나누는 곳이다. 그처럼 폐쇄된 공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그 안에 담긴 절실함으로 서로를 크게 북돋울 수 있다. 김기태의 소설은 때로 인물들이 지닌 자기충족적인 태도와 그것을 마치 문화비평의 대상으로 삼아 속사하듯 펼쳐내는 글쓰기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소설을 ‘가능성’이나 ‘실험’에 국한된 서사 모델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카나리아의 경보가 목적하는 바가 당장의 탈출만이 아닌 ‘동료 광부’를 부르는 일이라면,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존엄하고 평등한 연대를 이루고자 함이라면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실험해보는 것만으로도 온전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가 첫번째 소설집을 발표한 작가라는 점도 새삼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갱도 내부가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일지라도 그저 비관적이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김기태는 어둡고 좁은 곳일수록 더욱 요긴해지는 부름-응답이라는 인카운터의 기술로 보여준다. 그러한 만남이 단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일지라도 말이다.
  • 1) 즉 이 글에서 인카운터(encounter)는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 알 수 없는 대상과의 접촉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일한 인과성이나 논리를 따르지 않는 만남에 담긴 정치적 효과에 방점을 두기 위한 것으로 쓰인다. 인카운터는 서로를 침윤하면서 새로운 감각체계를 발굴해나가는 만남의 의미로 정동 이론에서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 2) 그러나 사실은 하쿠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스치듯 만난 후 백영록이 이내 사망한다는 사실, 또 그것이 하쿠에게 미치는 영향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세상 모든 바다」는 후술할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다르게 두 사람의 만남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수록작 대부분이 삼인칭인 데 비해 이 소설에서는 일인칭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한 내용과 관련된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이 두 사람의 만남에 기반해 변화해간다는 점에서 일인칭은 그저 단독적인 성격만 갖고 있지는 않다.
  • 3) 남상욱, 「‘K’가 만들어가는 ‘보편’의 향방」,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류수연, 「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문장웹진』 2024년 9월호.
  • 4) ‘두 사람’들의 역사로 시작하는 소설의 도입부가 그 점을 암시하고 있다. 김건형은 이 대목이 밈의 화법에 가깝게 구성되어 있다고 적절하게 지적한다. 맑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두 사람’들의 역사를 계보화하는 원리가 역사적 인과에 대한 분석에 의거하지 않고 ‘두 사람’ 자체를 기호화하여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즐거움의 문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김건형, 「김기태의 즐거운 시민들」,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 5) 그래서 ‘친한 사이’는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친밀감을 뜻한다기보다 비인칭적이고 비언어적인 형태로 세상에 넘실거리는 역량으로 인식된다. 백지은은 이러한 ‘친한 사이’의 의미를 그것이 행위하는 주체가 아닌 “이 세계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객체”로 묘사된다는 점을 통해 설명한다. 소설이 제3자의 화자를 설정해 두 사람의 역사를 동등하게 병렬시켜 묘사한다는 점, 그럼으로써 재현의 가시성이 화자의 위치가 아닌 “말해진 것들의 동등(평평/평등)한 평면”으로부터 발생된다는 것이다.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3)」, 『문장웹진』 202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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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희 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계간 딩아돌하 황선희 한국현대시시계간평광장정치연대공동체정동걱정 2025
황규관 ‘니’와 인간의 공동체 : 김해자의 시를 중심으로

1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광장에서 들었다. 친위쿠데타를 획책한 대통령의 파면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 부러 광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윤석열이 일으킨 쿠데타는 대한민국 사회에 꽤 긴 감정의 침전상태를 초래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으며 그것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쿠데타 주도세력을 통해 그동안 은폐된 채 현존해 있던 충격적인 우리 사회의 일면이 드러난 사태는, ‘윤석열의 시간’이 ‘박근혜의 시간’과도 또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깊게 각인시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동의 그림자가 넓고 깊었다는 사실 앞에서 적잖은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비구름처럼 몰려오기도 했다. 예컨대 현실로 존재하는 윤석열 지지세력 혹은 극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물으면서 적대시를 경계하고 ‘대화’나 ‘공존’을 주장한 글들1)과 그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갈피없이 치솟아오른 실례가 된다. 이것이 ‘박근혜 때’와 다른 지점이다. ‘박근혜 때’는 나름대로 한뜻을 모아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었지만, ‘윤석열 때’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중국인’이나 ‘이재명’이라는 적대적 타자를 만들어 나타나는 착시 같지만, 아마도 이번 현상의 뿌리는 깊은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현상이라는 이파리는 쉬 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쿠데타와 동시에 떠오른 현상에 대한 상당한 지적 분석과 그 역사적 계보와 관념의 토대를 찾아나서는 정신적 노고를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껏 우리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공부와 실천들이 부족했기에 이런 사태와 현상이 터졌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우리의 자세와 수련에 따라 천우신조의 ‘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특히 시는 인간의 감정을 일차적인 출발지이자 도착지로 하는 장르인바 ‘사회적 감정’의 출렁임에 예민할 수밖에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감정이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전제가 어느새 성립된다. 그런데 여기서 감정이란 무엇일까? 스피노자(B. Spinoza)는 『에티카』(1677)에서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한 다음 “정서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 자체나 신체의 어떤 부분이 가지는 활동력이나 존재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했다.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나 정서에 대한 신체(몸)의 우선성이다. 즉, 감정이란 것은 신체에 의존적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칸트를 읽으며 ‘직관’과 ‘사유’를 인식의 요소로 파악하면서 사유는 직관에 의존한다고 말한다.3) 직관의 능력은 마음이 가지는데 사유가 마음의 작용으로서의 감정에 의존적이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스피노자처럼 그 중간에 신체가 개념적으로 자리잡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에게 있어 감정, 즉 마음의 작용을 우선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공동체라는 것이 몸과 몸의 연결이라는 차원을 갖는다면, 마음 차원에서도 그 연결을 유추하는 일에 논리적 하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클리셰나 혹은 지적 나태로 읽힐 수 있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논파당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윤석열‘들’이 기도한 쿠데타로 인해 깊은 감정의 공동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물론 ‘감정의 공동체’라는 말은 모두가 갖는 감정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공동체’는 무차별적인 동일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차별적인 동일성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강압이 일으킨 환영일 뿐이며, 민주적인 공동체를 상상할 때는 도리어 비추는 빛에 따라 반사되는 빛이 다른, 즉 내적 구조와 밀도가 다른 구슬들이 한데 모여 통일된 색조를 띠는 것 같은 이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연합적인 조화를 건강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당연히 이 조화는 부단히 해체되려는 힘과 서로 곁이 되려는 힘이 공존하는 관계양식을 말한다. 여기서 ‘구슬’이 환기하는 것에는 감정이 제외될 수도, 제외될 리도 없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에서 집단의 감정을 재구성하는 시의 역량과 책무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물론 시의 역량과 책무가 어떻게 발현되고 또 발현되어야 하는지는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냉정한 조건을 통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설령 현실적 조건이 시의 역량과 책무를 축소시키거나 은폐한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시 자체의 위의와 본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현실적 조건의 변화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할수록 시가 공동체의 감정에 대해 져야 할 십자가는 무거워진다고 봐야 옳다. 하지만 작품의 현실성은 어디까지나 시인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되어 개인인 독자의 감정을 변화시킨다는 평범한 진리를 놓쳐서도 안 된다. 2  김해자의 여섯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창비 2023)은 사람의 삶에서 사람 아닌 존재의 삶까지, 구체적인 생활의 세목에서 역사적 상황과 우주적 영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김해자의 시에 독자의 감정이 움직이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인의 감정의 동요가 고스란히 작품에 전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동요라는 것이 좋은 시에서는 항용 그렇듯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동요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김해자의 시에는 집단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 집단적인 감정이란 추상적이고 평균화된 전체의 감정이 아니라 시인의 감정 자체가 집단적인 관계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김해자의 시는 어쩔 수 없이 복수인 그 감정‘들’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된다. 다음의 시를 보자. 물은 안 되겄고, 눈 감고 뛰어내리믄 괜찮을 거 같어 저짝에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죽을 맛이더라고. 이제 죽으나 저제 죽으나 죽을라고 올라가는디, 허리가 아파 죽겄어. 나는 모르겄지만 흉한 꼴 볼 사람들 떠올리니께 도저히 못 뛰어내리겄데. 별이 저리 많아도 달 하나 못 구하나 별이 아무리 여럿이 박힜어도 달 하나만 못혀 하이고야, 저 하늘 좀 봐 목화송이마냥 훤혀 물에 처박힜다 꽃이 되었구마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 어디까정 갈지 모르겄지만 살다보믄 무슨 수가 있겄지. 그냥 살기로 혔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으니께 살아야지. 나 죽네 나 죽네 하믄서도 세상은 돌아가잖여. 야아 달이 살아났네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 —「월식」 부분  인용 부분(4~7연)은 작품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여기서 시의 화자는 “자식 놓쳐불고 죽을라고” 했던 여인이다. 작품은 전체가 화자의 입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1, 3, 5, 7연은 제목인 ‘월식’에 걸맞게 달이 사라졌다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화자가 혼잣말처럼 내뱉고 있지만 청자가 숨어 있는 구조를 취하는 서정시의 형식이다. 반면 그 사이의 2, 4, 6연은 행의 구분 없이 화자에게 실제 있었던 사건을 진술하는 이야기시의 형식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특성을 활용하여 서정시의 깊이를 확보하고 그 외연을 넓히는 방식은 김해자 시인이 자주 활용하는 형식구조다. 이는 아마도 이야기와 노래 둘 다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시는 자발적으로 죽음 가까이 다가갔다가 서서히 삶의 영역 쪽으로 옮겨오는 화자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자식을 앞세운 여인이 처음에는 자살의 장소로 강을 택했다가 “맴만 젖”고 만다. 물이 “허리까지 차니께 몸이 붕 뜨”고 말아서 죽으러 갔다가 도리어 삶의 부력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죽어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역설적이게도 몸의 고통을 통해서 삶을 느끼게 된다. 결정적으로 남에게 자신이 죽어서 보일 “흉한 꼴”을 포기함으로써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며 죽음으로 난 쪽문을 닫아버린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몸의 역할이다. 2연에서는 물에 들어간 몸이 수면 위로 붕 뜨고, 4연에서는 아픈 허리를 붙잡고 옥상 꼭대기로 올라가는 게 “죽을 맛”이다. 몸이 고단해진 것이다. 그 몸의 실감을 통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다는 구체적 진실을 깨달으면서 삶의 방향 쪽으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른바 ‘객관적인 눈’은 화자의 증언에서 과장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증언을 작품으로 빚어내면서 녹아 들어간 시인의 진실한 마음이—설령 화자의 증언이 과장일지라도 그것마저 넘어선—삶의 의지를 부활시키고 있다.  1, 3, 5, 7연은 달의 사라짐(죽음)에서 다시 나타남(부활)까지 노래의 형식으로 독자의 감정에 물결침으로써 더욱더 화자의 증언이 진실임을 밀어올린다. 특히나 마지막 7연의 “야아 달이 살아났네 /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는 개인의 경험을 훌쩍 넘어서는 자연의 본질, 즉 은폐와 생성(poiesis)의 반복이라는 진리의 영역에 해당된다. 이 진리의 영역이 가능했던 것은 화자의 변화하는 마음과 몸의 작용을 시인이 세밀하게, 하지만 과잉되지 않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화자의 마음 변화, 즉 죽음에 기울었던 비탄에서 삶을 향한 자기보존(혹은 극복)의 감정으로 전환하는 운동은 일면 화자 개인의 것인 듯하지만, 이 시의 이면에 흐르는 것은 개인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운동하는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민중의 마음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김해자가 파악한 민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관념적인 자의식을 벗어나 자신의 몸이 다른 몸과 연결돼 있다는 실감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된 긍정의 감정이다. 달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월식현상을 어떤 부활로 노래하는 짝수 연은 홀수 연에서 도드라지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고대 그리스 비극양식에 비유하자면 디티람보스(dithyrambos)의 역할을 한다. 디티람보스는 본래 고대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축제기간 중 마지막 행사로 벌이는 비극 경연대회에서 각 부족 대표로 참가하는 민중 합창단을 뜻하지만, 니체(F. Nietzsche)는 디티람보스가 비극 전체에서 “자연의 가장 숭고한 표현, 즉 자연의 디오니소스적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즉 디티람보스는 “함께 고통을 겪는 자로서 동시에 현자이며, 세상의 심장으로부터 널리 진리를 전하는 자다.”4)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수의 목소리라 하더라도 그 목소리에 복수의 감정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개별자라 하더라도 감정은 복수의 갈래가 뒤엉켜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까운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 개인의 감정은 집단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에 의해 입증되기도 하지만 감정이 의존하는 몸 자체가 이해(利害)를 떠난 여러 생명의 복합체라는 과학적 사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민중의 아픔과 설움을 “대신 울어주러”(「버버리 곡꾼」, 『집에 가자』, 삶창 2023) 온 경우에서 보듯, 김해자의 시는 시인 자신의 감정과 민중의 감정이 동시적으로 울리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그의 시세계에서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반적인 경향이다. 한 몸에서 한 감정의 노래만 흘러나오는 전통적인 서정시나 혹은 단수의 감정인데 복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기획’하는 이른바 현대시의 ‘다성성’은 몸과 마음의 관계망이 존재론적으로 앞선다는 차원에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다.  「월식」이 시적 화자의 삶을 통해 민중의 삶에 대한 긍정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니들의 시간」은 한참 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차원을 확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 자신의 몸이 귀속돼 있는 시간과 공간과 차원에 그것을 초월하는 상상력이 들어오면서 시의 선형적 구조는 흐트러지고 만다. 즉 작품에 다른 기(氣)가 내유(內有)함으로써 「월식」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는다. 3 1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도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삵이 마을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밤 창문을 닫으려다 흠칫 놀랐어요 누군가 여태껏 훔쳐보기라도 한 듯 뻣뻣한 털들이 돋아난 유리창은 거대한 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찔릴 것 같았지요 수상쩍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이상스러운 생물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죠 봄이 오긴 온 건가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안전해지긴 할까요 이끼 낀 계단이 노려보았어요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 모서리가 너무 많아요 2 비늘구름 속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어요 인형 속에 인형, 탄두 속에 탄두, 아이 손에서 터지는 탄두 속 작은 집속탄, 밀밭은 보고 있었죠 무너진 담벼락과 흩어진 살점들, 폭격에 쓰러진 나무가 가리키고 있었죠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떨어진 토치카-U 로켓에 쓰인 흰 글씨, ‘어린이를 위해서’ 겨우내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친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 남몰래 사그라진 화장장의 연기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살아도 죽어도 제로가 되는 수치 한낮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군요 소금을 바가지로 뿌려대다 영구 엄니는 옥수수밭에 서 있는 발 없는 귀신들에게 넙죽 절했다죠 한잔 받으시오, 고수레 술 가득 부어, 고수레 삭삭 빌었다죠 손가락 넣고 휘휘 저어 석 잔 대접하고야 놓여났다죠 발 붙들고 놓지 않는 산 그림자 (…) 5 니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산이 공들여 ✕자를 붙였어도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창에 비치던 너와 나의 얼굴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앞으로 올 니들을 니들의 시간을 —「니들의 시간」 부분  먼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이 부른다는 “니”에 당연히 주목해야 한다. 우데게족에게 ‘니’는 형체가 있든 없든 모든 존재자들을 부르는 명칭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절된 시간을 초월해 “깃든 모든 영혼”이다. 그러니까 ‘니’는 시간과 공간, 유형과 무형을 떠나서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지금 자신도 그런 ‘니’에 둘러싸여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니들의 세계’는 이미 깨어졌다. 1절에서 그런 징후를 드러내다가 2, 3, 4절에서 시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니’가 사라진 세계 또는 ‘니’의 의미가 타락한 현실에 대해 마치 “고수레”하듯 읊조린다. 그런데 ‘고수레’의 의미와도 연관되는 것이지만, 마치 혼자만의 넋들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체 작품의 복판격인 2절과 3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고수레’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2절 1연의 (우끄라이나)전쟁 상황과 2연의 원망과 미움에 가득 찬 현실은 이어져 있는 인과관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시인은 어디까지나 조각보를 기우는 듯한 방식을 쓰고 있기에 전쟁과 미움의 연관관계는 읽는 독자마다 다르게 경험되기도 한다. 그 뒤 이어지는 3절 2연에서도 역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현실이 지금 시인의 마음을 치고 있음이 충분히 느껴진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든가 “니는 대체 왜 그래”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숱하게 뱉어내고 또 듣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런 원망의 언어 “없이”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라고 묻지만, 이미 현실에서는 “연해주에 사는 우데게족”의 “니”는 다 파괴되었다. 물론 우데게족의 ‘니’와 한국어 ‘니’의 실제 의미는 다르지만 소리를 빌려와 동일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가 가진 특권의 문제이며 시인은 그것을 근사하게 해냈다.  그런데 “니가 나와 섞”이지 못하는 현실과 ‘니’를 향한 원망과 미움은 막연한 심리적 뒤틀림이 아니라 우리의 근대가 차곡차곡 쌓아온 업(karma)에 다름 아니다. 4절 2연의 “니가 깎여 나가는 동안 허리가 묶인 물고기들처럼 / 아무리 헤엄쳐 가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우리는 우리가 아니야)”에서 그 일면을 제시하면서 시인은 그 업에 무릎 꿇고 비는 대속(代贖)행위를 한다. 누구에게? “한낮에도” 출몰하는 귀신—다름 아닌 ‘니’들—에게. 우리는 지금 귀신마저 원망에 차 “안전 안내 문자”처럼 출몰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게 귀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귀신의 목소리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이 대신 빌고 있는 것이다.  근대가 자신의 업을 고쳐보겠다고 더 쌓고야 만 업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의 “고수레”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절인 5절에서 다시 무너지듯 내뱉는 탄식은 그런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우린 어쩌다 앞으로 올 존재들과 그들의 시간을 다 먹어치워버렸나. 그렇다면 ‘고수레의 마음’은 죽었다 살아나는 달(「월식」) 같은 자기치유와 닮은 마음 아닐까. 귀신에게 비는 마음이 일종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 지낼 때 조상의 신위를 벽이 아니라 ‘나’로 향하게 함)’라면 결국 자기 마음에 비는 행위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월식」과 「니들의 시간」은 그려내는 시공간의 폭이나 그 형식은 다른 작품이지만,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민중의 자기치유를 통한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통치만이 결국 ‘니’(타자)에 대한 성찰과 ‘니’(귀신)에 대한 기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죽임과 좌절, 원망과 혐오로 얼룩진 우리의 세계가 나아가야 할 근원을 가리키지 않는가?  동학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경신년(1860) 4월 종교체험을 할 때 들은 첫 말은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吾心卽汝心)”였다. 최제우는 가뜩이나 세상이 어지럽고 민심이 좋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서양 제국주의가 괴이한 언어(기독교)를 앞장세워 무력까지도 불사하며 밀어닥치고 있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려는 바람과 기도가 깊고도 깊었던 것일까. 급기야 신다전한(身多戰寒), 즉 몸이 심하게 떨리고 춥더니 새로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순간적인 깨달음인 확연대오(廓然大悟)가 찾아왔다. 이때 들려온 말이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다”였고, 이어서 “사람들이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한다(知天地而無知鬼神)”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서 ‘귀신’은 도올 김용옥의 번역으로는 “천지의 또 다른 영묘한 이름”이라 했거니와 최제우가 몸으로 접한 새로운 기운(接靈之氣, 신령과 맞닿아 합일하는 기운)을 일컬을 것이다.5) 그런데 최제우의 ‘귀신’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의 “니”와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해자의 시는 ‘니’로서의 ‘귀신’이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산산이 부서지면 “안전 안내 문자”같은 악귀(惡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사유에서 기(氣)는 뭉쳤다 흩어졌다 하면서 영원회귀하는 실체로서, 그 기의 운동에 괴변이 생기면 기에 감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과 마음도 헝클어지고 만다. “인간 안에 있는 것은 신령이요 인간 밖에는 기의 운동”(「동학론」, 『동경대전』)이라는 말은, 기(氣)와 영(靈)은 내재적으로 같은 것이며 그래서 함께 운동하고 함께 변화하는데 그중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영은 신령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인간을 일러 최령자(最靈者, 가장 신령한 존재)라고 했던가. 따라서 우주 전체 혹은 우리가 사는 지구나 지역의 기에 문제가 생기면 그 안의 모든 생명·사물에 깃든 영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인간 안에 모셔져 있는 ‘신령’도 위태로워진다.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를 강조한 것은 이런 상태일수록 우리 안의 신령을 배신 혹은 불신하지 말고 마음을 닦고 기를 바로 하라는(修心正氣) 바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언어의 타락과 타자를 혐오하는 영혼이 절정에 달해 있는 오늘날에 비춰 볼 때, 기의 운동 변화에 심대한 차질이 생겼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일단 기후변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당연히 기후변화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생태계를 교란·파괴한 탓이라는 것에 이제 다른 토를 달 수가 없게 됐다. 생태계의 교란·파괴라는 것은 결국 “니들의 시간을” 먹어치워버린 것과 같은 의미다. 다른 사물과 타자 또한 기의 형체이고 그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영, 즉 ‘니’가 깃들어 있는데 그것들을, 아니 “앞으로 올 니들”까지 먹어치웠으니 그 ‘니’가 다른 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게 바로 ‘악귀’이고 그 악귀의 파토스는 원한과 혐오이며, 그 파토스의 로고스 형태가 언어의 타락인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존재의 목자’이고 시인이 ‘언어의 파수꾼’이라면, 김해자의 「니들의 시간」은 목자의 역할과 파수꾼의 임무에 응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4  오늘날 ‘민주주의’는 너무도 지당한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은 점점 더럽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재자도 자본가도 관료들도 그리고 파시스트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어찌 보면 현대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증명 방식 같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주인된 민중이 스스로 정치의 방식을 계발해 나아가면서 그 방식에 따라 스스로 정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체제가 과연 ‘주인된 민중’을 어떻게 괴롭혀왔는지에 대해서는 묻기를 주저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저는 자연과 신성(神聖)의 파괴와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자연과 신성이 곧 민중의 삶의 거처이며 존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신성을 파괴하면서 자연과 사물을 지배받아야 할 대상으로 격하시킨 근대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물은 상품생산을 위한 원료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적 경제관념을 제공했으며, 이 비도덕적 경제관념이 수탈과 식민, 착취와 파괴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논리로 이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역사는 과거지사일 뿐이고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집단무의식이 혹 형성되었던 것일까. 그래서 웬만한 신생독립국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그 반대쪽의 암흑은 모르쇠해왔는지도 모른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의 상태, 즉 여타의 활동력과 존재력에 따른 것이라면, 다른 신체로서의 사물, 그리고 그것들의 연합이자 존재 근거인 자연상태가 변질되면서 우리의 신체와 감정에도 비례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여러 병증(病症)을 통해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 우리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뒤틀린 감정을 만들었을지 모르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주인된 민중의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락한 교의와 정치이념에 맹종하는 노예의 감정을 퍼뜨렸을 것이다.  시가 감정의 변화 속에서 시작돼 다른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해서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계몽에 몰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 감정을 절대시하는 감정의 독재를 낳을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시대의 감정‘들’의 결을 섬세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의 연원을 제대로 사유하는 일의 동시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현대의 철학적 경향에는 대체적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또다른 기계로 보려는 관점이 강한데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의 결여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 대한 사유 자체가 ‘근대인’에 한정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역사의 국면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왔으며 시대적 국면과 어떻게 조응해왔는지 종합적인 인식이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직관도 풍성해질 것이다. 이는 사유와 인식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는 게 아니다. 인식의 새로움은 다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은 다시 자유로운 사유의 촉발로 되먹임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과 정신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몸과 마음과 정신이라는 구분법은 인간이 가진 언어의 한계에 따른 것이며, 어쩌면 한계 자체가 인간 존재의 본질에 해당될지 모른다.  다만 민주주의에 대한 랑씨에르(J. Rancière)의 말마따나 시가 꿈꾸는 민주주의가 “행태들을 갱신하는” 일이나 “주체의 새로운 출현”6) 등에 머문다면 어딘가 미진해 보인다. 주체의 ‘분할’이나 감성의 ‘분배’ 같은 것에 치중하는, 인간 ‘주체’로 꽉 찬 민주주의는 기계적 평등과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권리의 횡행을 가능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인간 ‘주체’의 범람으로 ‘니들’의 세계인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다)의 공동체, 인간만이 아닌 모든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몸과 마음의 공동체가 깨진 상태다.  근대적 주체, 곧 ‘나’는 서구의 근대 정신사에서 신과 ‘능산적 자연’(스피노자)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관념의 토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의 강조가 인간을 위하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주체 개념을 다른 존재자에게까지 확장하는 현대의 철학적 경향은 사실 인간 아닌 존재를 의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인간중심주의의 변종에 가깝다.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 점점 납작해져가는 상황은 인간이 ‘니들’을 먹어치운 상황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시가, ‘니’의 회복을 어떻게,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그 감당을 회피하기 위함도 아니고 회피를 위한 알리바이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는 주어진 현실을 통과하며 넘어서기 위한 ‘신다전한(身多戰寒)’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신다전한이란 결국 자기 시대의 토양, 공기, 귀신, 욕망, 꿈과 한몸이 되면서 맞는 고통일 것이다. 시에 가르침의 임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 먼저 시가 ‘니’와 한몸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 몸에서 나온 작품이 현실의 집단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감정이 생성되는 창조적 순간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순간의 다중공유가 가능해진다면, 이때를 새로운 시운(時運)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1)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박권일 「윤석열의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한겨레 2025.3.24; 정희진 「내전과 공존」, 경향신문 2025.3.18. 2) B.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202~203면. 3) 마르틴 하이데거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1, 127면. 4)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74면. 니체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부정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중우화(衆愚化)되면서 비극이 몰락하는 계기가 됨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를 비극을 몰락시킨 구체적인 인물로 지목하며 ‘그리스의 명랑성’(“어려운 것을 책임지지 않고 원대한 꿈을 추구하지 않으며, 지나간 것이나 미래에 올 것을 현재 있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는 노예들의 명랑성”, 92면)에 대한 부박함을 비판한다. 이때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그 건강성을 잃은 시기이기도 했다. 신화와 음악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비극이 합리적 이성이 지배적이었던 아테네 민주정 시기에 번성했던 것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비합리의 세계(운명, moira)에 대한 의식이 아테네 시민들의 시민적 덕성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가 확보해준 문화가 토양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 기대 말하자면, 예술이 종교(철학)와 정치를 이어주는 동시에 그 둘을 통합하는 교각이 되어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을 (오늘날의 경우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그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이 다시 예술이 샘물이 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말이다. 5) 이상 원문과 번역은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2』, 통나무 2021, 118~19면 참조. 6)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 110~11면.

계간 창작과비평 황규관 민주주의동학창조김해자하이데거 2025
하혁진 말을 잃은 아버지들 ―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을 중심으로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계간 창작과비평 하혁진 광장아버지이미상성혜령예소연세대젠더부녀서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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