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여름호
장르적인 것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구해내기 — 장르물의 체제 종속성과 자율성에 대하여
1. 우리 시대에 가능한 미적 체험
국내에서 지난 3월 27일 개봉한 「고질라×콩: 뉴 엠파이어」(이하 「고질라×콩」)는 「고지라」(혼다 이시로 감독, 1954)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과 일본이 합작하여 제작한 영화 「고질라」(가렛 에드워즈 감독, 2014)의 네번째 시리즈이다. 원자폭탄에 대한 일본의 집단적 두려움의 상상적 반영물인 고질라와, 아프리카 탐험물에 심취했던 메리언 콜드웰 쿠퍼 감독이 1930년대에 영화로 제작한 이래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해온 킹콩의 결합은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악에 맞서 싸운다’는 단순한 서사를 제외하고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오직 오락성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고질라는 지구 최강 생물인 자신을 위협하는 신호를 포착하여 제거하기 위해 어쩐 일인지 대도시만 골라 파괴시키며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콩은 원작에서 거주하던 가상의 섬 스컬 아일랜드를 떠나 그 모체로 간주되는 지구 속의 지구에 거주하며 ‘지구공동설(地球空洞說)’의 실체적 진실로 기능함으로써 인류 이전의 생명체로 설정된 거대괴수의 원시성과 야만성을 신비화하고 구체화한다. 콩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자 거의 마술에 가까운 하이테크를 구사하는 원주민 이위족은 ‘백인 문명을 제외한 나머지’로 맥락 없이 짜집기되어 있어 <인디아나 존스>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 사회가 오리엔탈리즘을 대중적으로 소비할 때 동원하는 온갖 요소들을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애초에 거대 괴수물이라는 장르는 인간의 감각 지평을 뛰어넘는 규모의 파괴를 목격할 때 동반되는 숭고한 쾌감의 오락적 재현 외에는 기대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 지평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관 속에 존재하는 두 괴수를 하나의 서사 속에 엉뚱하지만 그럴듯한 논리로 꿰어내 함께 등장시킬 때, 여기에는 인위적이기는 하나 미적 체험 비슷한 것이 작동하게 된다. 고질라와 콩 각각의 세계관에 대한 기대 지평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새로운, 그러나 나름의 정합성을 갖춘 논리(지구공동설과 괴수의 상관성)로 구성된 「고질라×콩」의 서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그것이 기존의 기대 지평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경험의 불일치, 경험의 어긋남에 놓이게 된다. 흥미롭게도 이는 아도르노가 미적 체험의 원리로 제시했었던, 주체와 객체의 비동일적 미메시스 체험에 상응하는 것이다. “예술은 경험적 현실과 분리됨으로써 자체의 필요에 따라 전체와 부분들의 관계를 형상화할 수 있”지만 예술 작품 또한 “인공물, 즉 사회적 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에 경험 세계를 거부하면서도 이와 커뮤니케이션을 가지며 이 경험 세계로부터 자체의 내용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관객이 이미 학습해온 고질라와 콩 각각의 세계를 ‘경험적 현실’에, 「고질라×콩」의 세계를 이 경험적 현실에 대한 인공물로서의 ‘예술’에 대입해볼 수 있다. 「고질라×콩」은 고질라와 콩 각각의 서사와 유사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은, 그와 분리되는 동시에 통합되는 변증법적인 운동을 수행한다.
물론 이는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라는, 아도르노가 그토록 비판했던 바로 그 ‘문화 산업’의 첨단물이라는 점에서 예술의 자율성과 사용가치가 상품의 시장 종속성과 교환가치로 대체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미적인 가상에 대한 파로디[parodie]”에 불과할 것이다. 예술 작품과 감상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은 영화 상품과 소비자 사이에서는 그저 사이비적으로 되풀이될 뿐이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문화 산업이 예술의 자율성을 물신화하고 퇴행시켰다고 비판하면서도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의 개념에 대해 본질 구성적이지만, 그것도 형성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가령 중세의 예술 작품들이 종교적 예배를 목적으로 주문 제작되었으나 그러한 가치를 초월한 내적 자율성을 사후적으로 획득하게 되었듯이 말이다. 예술이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과 무관하게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종속되면서도 독립된 ‘제한적’ 자율성을 구성적으로 획득할 뿐이라면, 즉 예술의 속성 자체가 특정한 현실과의 변증법적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라면 예술, 나아가 예술에 대한 체험이 어떠해야 한다는 신성불가침의 원칙 같은 것 또한 없어야 마땅하다. 종교적 진리를 가상으로 재현하기 위해 무수한 성물을 제작했던 중세의 종교 ‘산업’으로부터 예술이 분화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의 대중문화 산업으로부터도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질라×콩」의 관객이 겪는 미적 체험이 그저 사이비적인 것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고질라×콩」을 통해 살펴보았던, 작금의 영화 산업 내에서 작동하는 예술의 ‘제한적’ 자율성은 실제 경험 세계와는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을까? 다시 말해 오늘날의 경제 논리는 어떠한 형식의 예술을 가공하기를 선호하며 이로부터 어떤 유형의 미적 체험이 분화되는가? <고질라> 시리즈가 보여주듯이 최근 유니버스라는 형태로 기존의 콘텐츠를 재가공한 뒤 이를 다시금 시리즈물이라는 형태로 제작하는 것이 각광받게 된 계기에는 자본을 끊임없이 순환시킴으로써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거대 영화 자본의 논리가 ‘선험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영화 자본의 입장에서는 고질라와 콩이라는 시효가 지난 두 서사를 단지 접붙이는 것만으로 기존의 이윤 체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새로운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고질라가 등장하는 영화나 콩이 등장하는 영화 각각에 지불하는 것과 동일한 가격으로 ‘고질라×콩’이라는 신선한 조합을 경험함으로써, 해당 가격을 지불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얻을 수 있다. 흔히 ‘가성비’로 표현되는, 지불한 가격과 구매 대상의 가치 사이의 불일치가 이윤의 형태로 소비자에게 체감되는 현상은 구매를 계속해서 부추긴다. 나아가 생산과 소비의 합리성이라는 현실의 경제적 원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현실의 논리를 벗어난 비합리적 체험을 일시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어긋남, 즉 구매 형식과 구매 내용 간의 불일치로부터 상업적인 장르물이 거듭해서 소비될 수 있는 계기가 발생한다. 즉 기대되는 것뿐만 아니라 기대 이상의 것 또한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구매를 촉진하며, 이러한 수요를 촉발하기 위해 영화 산업은 장르물의 기존 서사를 변형하고 조합하여 나열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2. 장르적 영토라는 유사 현실
이처럼 오늘날 자본의 요구와 장르적 특성이 결탁하게 된 계기는 소위 장르라고 불리는 것의 태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셜록 홈스>와 같이 생생하고 구체적인 외양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장르로서의 시효를 유지하고 있는 추리소설의 경우, 양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자본이 신흥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이들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범법 행위를 악마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의사, 학자와 같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상류계급의 남성이 탐정으로 등장하여 하류 노동계급 남성으로 기정사실화된 범법자를 추적하는 일관된 서사는 “지배계급의 규범을 거스른 자는 체포되어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범죄는 패배가 예정된 계급적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 이데올로기와의 상관성과 다소 무관하게 추리소설은 당시 산업 노동의 점증하는 스트레스를 누그러뜨리는 여가를 목적으로 도심의 거리에서 저가 문학 잡지의 형태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보급되면서 다수의 흥미를 유발하는 ‘추리’라는 요소를 중심으로 무한히 확대 재생산될 수 있었다. 추리는 부르주아 계급의 합리성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소설 내의 장르적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는 자체적으로 분화됨으로써 그러한 기원으로부터 어느 정도 탈각된다. 즉 장르로서의 추리는 계급 합리성을 반영하기도 하고 반영하지 않기도 한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추리소설의 대명사 격인 홈스는 그 비상한 추리력이 지나치게 비사교적이어서 때로는 무례하게 비쳐지기도 하고, 독자의 대리인으로 등장하는 왓슨의 상대적으로 범상한 추리력과의 대비를 통해 상식적으로 블가능한 추리력의 소유자로 정의되곤 한다. 말하자면 홈스의 추리력은 부르주아적 합리성을 비합리적으로, 마치 그 자체 독자적으로 견고하게 가공될 수 있는 사물과 같이 다룬 결과물이다.
추리소설의 애호가이면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에르네스트 만델은 이를 “물신화된 합리성”으로 설명한다. 비상한 추론 능력을 갖춘 탐정 개인이 범죄의 유형 및 범행의 동기를 범죄자 개인의 심리에 근거하여 분석한다는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플롯은 범죄를 둘러싼 인간 및 사회의 조건을 인위적이고 제한적인 요소로 분리하고 범주화함으로써 이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사회 집단과 계층 간의 갈등을 개인들 간의 갈등으로 대체”하는 “부분적이고 파편화된 합리성”에 힘입어 일관된 형식하의 무수한 세부적인 변주가 가능하게 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추리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실제 현실의 이데올로기적 반영이 근원적인 목적이었을지라도 그러한 현실과의 상관성으로부터 독립됨으로써 자체적인 문법과 규칙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즐거운 살인”이라는 만델의 저서 제목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살인’과 ‘즐거움’은 현실에서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삶의 층위를 초월하는 숭고한 것이며 살인, 즉 타인에 의한 죽음이란 그에 결부된 사회적 맥락과 복잡한 감정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살인은 이러한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떨어져나온 텅 빈 기호가 됨으로써 서사 내에서 그저 추리라는 유흥의 다양한 양태로 전유될 수 있다. 이처럼 추리소설은 실제 현실, 나아가 현실에 속한 독자 자신과의 논리적 연관성을 고찰하거나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수고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현실로부터 유래한 요소들을 현실과 무관하게 재맥락화한 ‘장르’라는 영토하에서 자율적으로 확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살인의 다양한 기법과 이를 추리하는 과정상의 다채로움을 읽는 일은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즉 살인은 물신화됨으로써 비로소 즐거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경제학자이자 추리소설 독자로서 만델이 추리소설을 부르주아적 합리성의 물신화, 살인의 물신화로 설명하고 있다면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는 추리소설을 ‘수수께끼의 서사화’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추리소설은 “소설의 형태로 정교하게 확장된 퍼즐”과 같으며 십자말풀이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과제를 분석하는 정신적 활동의 유희를 동반하는 것이다. 독자는 수수께끼를 풀 때와 같은 자세로 작가가 제시한 소설 속의 문제를 푸는 데 참여한다. 이처럼 라이트가 추리소설이라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 만델과 정반대의 접근을 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합리성이 물신화된 것, 즉 사물과 같게 된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나 십자말퍼즐과 같이 사회적 연관이 없는 사물이 서사와 같게 된 것으로 추리소설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은 어떤 사물이 서사가 되기 전에 갖춘 기존의 속성을 얼마나 비상하고 참신하게 재해석하는지 여부에, 즉 독자가 각각의 추리소설에 직접적으로 기대하는 장르적 미덕에 자연스럽게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신문의 맨 뒷면에 실리는 수수께끼가 매번 새로운 과제를 제시해야만 하듯이 추리소설 또한 기존의 작품과 다른 유형의 과제를 매번 선보여야만 한다. 만델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이 추리소설의 애호가이기도 했던 라이트는 당대의 추리소설에 등장한 다양한 기법과 장치 들을 상세히 언급하며 “이들을 다시 우려먹는 작가는 독자들에게 애정은커녕 존중조차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엄포를 놓는다.
이러한 경고가 가능한 이유는 추리소설의 장르적 갱신이 어디까지나 독자와의 협업하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현실과의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연관을 포기한 대신 범죄나 추리에 동원되는 장치의 독창적인 발명을 동력으로 생명력을 유지한다. 이를 오랜 시간 꾸준히 탐독해온 독자들은 “작품의 기법과 수단을 예리한 눈으로 파악하는 평론가 수준”에 도달한 “일종의 전문가”로서 각각의 소설이 얼마나 창의적으로 추리 기법을 쇄신했는지를 판별해낸다. 라이트에 따르면 이러한 독자와 작가 간의 상호신뢰는 추리소설이 성립하기 위한 “필연적인 관계 정립”이자 일종의 “신사 협약 gentleman’s agreement”과 같다. “독자는 가만히 기대하기만 할 게 아니라, 복선과 원칙을 따르는 공정한 자세를 작가에게 요구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 이를 무시하고, 함께 범죄를 해결해야 할 독자를 기만하려 드는 작가가 존재한다. 이렇듯 상호 신뢰를 이용해 먹으려는 작가는, 독자의 배려를 기대할 자격도 없다.” 작가와 독자 간의 관계 역전으로까지 비쳐지는 이러한 상황을 대만 출신의 인문학자이자 마찬가지로 추리소설 애호가인 양자오는 “소설에 무엇이 쓰였느냐”와 “독자가 소설에서 무엇을 읽을 준비가 되었는가”의 차이로 설명한다. 추리소설의 독자는 추리소설에서 무엇을 읽게 될지 이미 알고 있으며, 추리소설 작가는 독자가 “어떤 예상과 기대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가늠해야” 한다. 추리는 소설 내부의 탐정과 범죄자 사이에서뿐 아니라 소설 외부의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와 독자 간의 상호 협약을 양자오는 “묵계”로 표현한다.
3. 상호주체라는 유사 주체
규칙, 문법, 관습, 협약, 신사협정, 묵계…… 장르문학이 정해진 공식 내에서 끊임없이 자기 갱신함으로써 생명력을 유지하는 현상을 일컫는 저 무수한 표현은, 당대의 본격문학에서는 아직 기대할 수 없었던 ‘상호 주체성’을 선취하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판본을 관통하는 장르의 기본 원칙은 애초에 다수의 독자가 공통으로 열광하며 ‘애독’하게 하는 지점을 성문화한 것이다. 독자를 통해 마련된 이 성문법을 바탕으로 씌어졌을지라도 애독할 만한 조건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한 작품은 외면받고 파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추리소설의 장르적 원칙을 각자의 방식으로 분석하고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추리소설의 애독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지만 지식인이자 예술 평론가였던 라이트가 자신이 예술계에서 쌓아온 명성이 실추될까 두려워 ‘S. S. 밴 다인’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추리소설들이 세계적인 인기와 부를 가져다주었다는 뒷이야기는 같은 맥락에서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그의 행보는 장르문학의 성취란 작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것임을, 애독자 다수의 호응을 통한 흥행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칠게 표현하면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에서만 장르문학은 씌어질 수 있다. 이는 독자의 호응도와 무관하게 작가 개인의 노력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와 성패가 좌우되는 본격문학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최근 10년 사이 웹 기반 플랫폼을 통해 대중문화의 중요한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 웹소설은 이처럼 작가와 독자의 협업을 통해 성취와 갱신을 거듭하는 장르문학의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웹소설 비평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융희 또한 이러한 웹소설의 특징에 주목한다. 회당 5천 자라는 한정된 분량으로 수백 회 가까이 연재되는 웹소설은 매회 독자들이 해당 회차에 대한 감상과 품평을 자유롭게 댓글로 달 수 있고, 그중에서도 다수 독자의 공감을 얻은 ‘베스트 댓글’은 해당 작품을 읽은 불특정 다수의 “군중심리”를 형성하며 그 자체로 “소설 속에서 공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는 앞으로 연재될 서사의 방향이나 세부적인 분위기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작가가 댓글이 달린 해당 회차의 내용까지도 독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후 수정하도록 지시할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을 행사한다. 매일 업로드되는 엄청난 양의 작품들 속에서 단순히 호기심만으로 독자가 유입될 수 있는 초기의 무료 연재 회차를 넘어 유료 연재 회차까지 ‘생존’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설정이나 개연성에 대한 댓글의 불만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경우 독자들이 등을 돌리면서 연재가 조기 종결되기도 하고, 반대로 재미와 완성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경우 연재가 중단되지 않도록 독자가 직접 해당 작품을 ‘영업’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독자가 작품에 대한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차적인 이유는 이들이 웹소설을 오랫동안 탐독해오며 웹소설의 자체적인 문법과 흥행 요소 등을 꾸준히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축적한 기존 문법의 갱신 여부가 새로운 작품을 계속해서 읽게 하는 요인인 만큼 작가들은 스스로 그러한 요소를 연구 개발하는 한편 이에 대한 독자의 피드백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창작의 진입 장벽이 낮은 웹소설의 특성상 충분한 기량을 갖추지 못한 작가가 작품을 업로드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웹소설 작가로서의 실력이 충분하지 않음에도 서사의 세부에 대한 독자 다수의 지적을 무시하고 자기 원칙대로만 집필을 이어가는 경우 ‘작가병에 걸렸다’는 비난을 받는다는 사실은 작품의 완성도가 온전히 작가 개인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 웹소설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웹소설이 ‘회당 백 원’이라는 표준화된 상호 계약하에 창작 및 소비되기 때문이다. 독자의 호응 여부뿐만 아니라 작가의 컨디션이나 역량에 따라 연재 분량도 연재 속도도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웹소설의 특성상 무수한 작품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매회 결제한다는 것은 대단한 충성도와 팬덤을 요구한다. 이때 독자가 작가에게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주는 심리의 이면에는 백 원을 지불한 소비자의 요구에 작가가 응답하는 것이 곧 웹소설의 미덕이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깔려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의 창작물에 의견을 제시하면 이를 작가가 다시 받아들여 수정하는 상호 협업이 얼마나 성공적이냐에 따라 작품이 회당 지불된 백 원의 가치에 부응할 수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독자가 많이 유입될수록 더 많은 금전적 대가를 보상받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회당 백 원이라는 합의를 둘러싸고 작가와 독자 간에 벌어지는 이러한 상호작용은 “독자의 만족이 소비의 핵심 동력으로 변환”된 웹소설의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백 원이 갖는 가격 합리성은 분량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한정된 분량 내에서 세부적인 갱신을 통해 새로운 흥미를 얼마나 유발하는가를 측정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가격 합리성과 장르적 합리성을 동시에 빠르게 충족해가는 과정에서 장르적 요소 또한 보다 경제적인 ‘코드’로 변환된다. “장르는 일종의 계보학적 개념이고 팬덤을 형성하는 마니아 문화”이기 때문에 장르적 요소를 숙지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데 반해 코드는 “문화적・사회적・작품적 맥락이 제거된 공공재”와 같은 것이어서 “이미 기호만으로 법칙을 떠올릴 수 있으니, 그 외적인 맥락이 필요 없어진”다. 따라서 장르적 요소를 오랫동안 학습하지 않고도 코드화된 형태로 어디선가 접해본 적이 있다면 해당 요소를 변용하여 구사하는 웹소설에 작가로서든 독자로서든 어렵지 않게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웹소설을 형성하는 코드는 이융희의 설명처럼 PC 통신 시절부터 유통되어온 무협, 판타지, SF 등을 통해 구축된 장르적 요소들부터 일본의 라이트 노벨과 같은 오타쿠적 장르물로부터 유입된 장르적 관습들, 웹을 통해 대중이 유통 및 소비하는 각종 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즉 웹소설을 구성하는 코드는 ‘대중적인 모든 것’의 총화와 같다.
웹소설이 대중적이고 친숙한 코드를 최대한 활용하여 독자의 욕망을 어떻게 자극하고 해소할지에 대한 작가와 다수 독자의 상호 협상 및 합의를 거친 결과물이라는 점은 그 자체로 웹소설이 구현하는 욕망의 ‘사회적’ 성격을 가리킨다. 여기에 동원되는, 극도로 축약되고 추상화된 장르적 코드는 추리소설이 구사하는 살인과 같이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여 물신화된 것이다. 현실과의 이해관계로부터 유래했으나 이로부터 분리된 비현실적 요소들을 통해 현실을 반영하는 웹소설의 영토는 일종의 유사 현실로 기능한다. 웹소설이라는 유사 현실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 현실을 사물화한 여러 판본 중 하나이다. 독자는 현실과 유사 현실 간에 일치하는 것과 불일치하는 것의 변증법적 독해 속에서 재미를 느끼게 된다. 나아가 웹소설의 주인공이 유사 현실과 맺는 관계와 독자 자신이 현실과 맺는 관계 간의 불일치 또한 가늠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원칙에 동일시된 자아를 강요받는 과정에서 억압되어온 욕망을 ‘외화’된 형태로 달리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외화된 욕망의 객관성은 작가와 다수 독자의 피드백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집단적 작업을 통해 보강된다. 이들이 ‘불특정’ 다수라는 점 또한 중요한데 웹소설 플랫폼의 철저한 익명성은 작가와 독자의 계층이 생각 이상으로 광범위할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계층, 세대, 가치관 등을 불문하고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욕망의 객관적 상관물을 제시해준다는 점은 웹소설의 가장 큰 강점이다.
4. 즐거운 잉여를 추수하기
따라서 웹소설이 현실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켜 견고화한다는 항간의 비판을 뒤집어서, 현실에서는 정교하게 은폐된 이데올로기가 웹소설에서는 현실과 유사한 듯 상이한 요소들의 조합과 구성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웹소설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철저히 이데올로기적인지, 나아가 이를 서사적으로 구현하는 형식과 내용 또한 얼마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고 있는지, 그러한 서사에 열광하는 메커니즘이나 그것을 비판하는 논리 또한 이데올로기와 얼마나 연동되어 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웹소설이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현실로부터 분리된 객관적 사물의 형태로 관찰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동반되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그에 대항하는 힘이 될 수도 있는 미적 체험을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핵심 원리인 교환가치를 통해 유통 및 재생산한다는 사실이다. 흡사 트로이의 목마에 숨어 적진에 입성했던 그리스 병사들처럼 말이다. 여기서 “가장 본질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이데올로기와 혼합되어 있는 예술 작품에서조차도 진리 내용은 타당성을 지닐 수 있다”는 아도르노의 지적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예술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규정하는 원리들을 자체 내적인 법칙으로 환원하여 반영함으로써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있기도 종속되어 있기도 한 이중적인 양태를 보인다. 이때 예술 내부의 세계는 사회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예술 내부의 일관된 통일성이 전달하는 진리는 가상이자 허위이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예술은 오직 허위를 통해서만 진리가 담지될 수 있다는 보다 상위의 진리, 즉 “허위와 진리 사이의 이율배반”을 통해서만 예술이 예술일 수 있다는 진리를 가리킨다.
허위의 등 뒤에 매달린 채로만 운신할 수 있는 이 제한적인 진리를 구출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품과 감상자 간에 순수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적 체험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표면적인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욕망의 교환이 교환가치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 및 학습되고 있다는 사실에 보다 주목해야 한다. 시장 원리가 지배하는 경쟁 사회의 순수한 반영물에 불과해 보이는 웹소설이 가격 합리성에 의거하면서도 가격 합리성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체험을 발생시키는 아이러니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는 비단 웹소설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적 코드를 바탕으로 최대 다수의 소비를 유인하며 무한 재생산되고 있는 오늘날의 대중문화 전반에 적용될 수 있다. 누구나 친숙하게 소비할 수 있게 하는 대중문화의 계급 초월적 보편성은 한계일 수도 있고 가능성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대중문화의 낮은 진입 장벽은 양적인 유입에 기반한 질적인 상향, 즉 양질 전환을 통해 그것의 소비가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것에 못지않다는 집단적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기만적인 측면을 분명 갖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나 소비할 수 있기 위해, 즉 환금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중문화의 상품이 자신의 서사 체계를 끊임없이 세부적으로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계급과 무관한 혹은 계급을 모두 아우르는 감상 포인트를 발견해낸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진리의 측면 또한 갖는다. 물론 이때의 진리는 유사 진리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최대 다수를 무목적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자본의 이해라는 대원칙이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가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대종이라는 최대 다수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교한 이윤 체계에 따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중문화가 허위로라도 집단적 주체라는 진리의 계기를 만인에게 심어준다는 점은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허위일지라도 플라세보효과처럼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효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 잉여와 같다. 독자와 상호 합의된 통일적 원칙하에 세부적인 변주를 통해 무한 증식하는 장르물의 장르적 합리성은 매번 갱신된 세부마다 가치가 매겨져 교환됨으로써 경제적 합리성에도 부합하는, 즉 이윤과 교환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이데올로기와 친화적인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친화적이면서도 이데올로기의 발원지인 사회의 구성 요소들을 그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객관적 사물과 같이 가공하여 장르 내부의 자체적인 문법을 재구성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다수에 공통된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기대하지 않은 효과 또한 발생시킨다. 이 지점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이데올로기를 ‘반성적’으로 직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현실을 거스를지도 모를 어떤 잉여가 현실을 거스르지 않는 즐거움의 형태로 제공되는 장르물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넋 놓고 키득거리는 어느 순간에, 교환가치의 꼬리에 매달린 채 미처 교환되지 않는 무엇을, 소비 주체이지만 동시에 소비자로만 설명되지 않는 누군가가, 줍는다.
- 1) 아도르노(홍승용 옮김), 『미학 이론』, 문학과지성사 1997, p. 17.
- 2) 같은 책, p. 37.
- 3) 같은 책, p. 38.
- ‘안전가옥’에서 장르물을 발굴 및 제작하는 실무를 담당하는 수석 스토리 프로듀서 이지향은 『세계관 만드는 법』에서 ‘세계관’이라는 표현이 국내에 대중적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성공을 꼽고 있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마블 코믹스는 보유한 만화 속 히어로들 중 영상화하기에 적합한 캐릭터들을 발굴하여 솔로 무비로 시리즈화하는 한편, 서로 조금씩 어긋나는 세계관에 속한 이들이 한데 모여 절대악에 맞서 싸우는 <어벤져스> 시리즈를 흥행에 성공시킨다. 2023년 3월 기준 글로벌 흥행 10위 안에 마블 영화가 무려 네 편이나 올라와 있다는 사실은 마블 유니버스의 대중적 영향력을 가늠하게 해준다. 이지향, 『세계관 만드는 법』, 유유 2023, p. 54.
- 5) 계정민, 『범죄소설의 계보학』, 소나무 2018, p. 130.
- 6) 계정민은 위의 책에서 뉴게이트 소설, 추리소설, 하드보일드 소설을 중심으로 범죄를 다루는 장르 소설의 계급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에서 등장한 뉴게이트 소설은 하류계급의 범죄자를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시킴으로써 사유재산 침해를 사법적으로 과도하게 처벌하는
- 당시 영국 사회를 비판하고 범죄의 사회경제적 요인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반면 추리소설은 범죄의 원인이 아닌 결과에만 주목하고 범죄자를 추적하는 탐정을 영웅화함으로써 뉴게이트 소설과 정반대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1920년대 미국에서 성행했던 하드보일드 소설은 공장식 분업이 도입되며 전통
- 적인 노동자 계급의 자율성이 통제되는 현실에 맞서 노동계급 남성의 위기의식, 좌절감 등을 마초적인 남성성을 통해 표현하려 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 7) 계정민이 위의 책에서 주장하듯이 추리소설의 주인공이 백인 남성으로 고착화되어 있음은 중요한 비판적 지점이지만 그럼에도 당시 추리소설을 집필하는 작가가 남성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많은 여성 작가들 또한 인기리에 활약했다는 점, 연애소설이나 외설적인 잡지와 달리 얕잡아 보이거나 창피를 당
- 할 염려 없이 남녀 모두가 공공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르였다는 점이 중요하게 언급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도널드 서순(오숙은 외 옮김), 『유럽문화사 Ⅳ』, 뿌리와이파리 2012, pp. 313~14 참조. 또한 추리소설이 노동의 수고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오락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상
- 기하면 당시 독자들은 소설 속 백인 남성 주인공을 그저 보편적 인간의 형상으로 ‘무심하게’ 소비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 또한 부르주아 남성을 보편적 인간으로 치환하는 이데올로기적 작업이라는 지적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설령 이데올로기적일지라도 보편성이라는 환상하에 계급과 젠더의 차이
- 를 막론하고 소비 대중을 광범위하게 규합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장르물의 정치적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 8) 에르네스트 만델, 『즐거운 살인』, 이동연 옮김, 이후 2001, p. 83.
- 9) 같은 책, pp. 90~91.
- 10)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 『위대한 탐정 소설』, 송기철 옮김, 북스피어 2011, pp. 30~33.
- 11) 같은 책, pp. 89~93.
- 12) 양자오, 『추리소설 읽는 법』, 이경민 옮김, 유유 2017, p. 36.
- 13) 노태훈・이융희, 「인터뷰: 웹이라는 매체, 소설이라는 서사」, 『자음과모음』 2023 여름호, p. 378.
- 14) 웹소설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젠더별로 플랫폼이 나뉘어 있다는 점인데 그러다보니 가령 여성향 플랫폼에 업로드된 로맨스 소설의 만듦새가 형편 없을 경우 ‘남자가 쓴 것 같다’는 의심 섞인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융희, 『웹소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다 2023, p. 39 참조. 반대로 남성향 플랫폼에서도 ‘여자가 쓴 것 아니냐’는 악플이 존재한다. 하위 범주로 무수히 세분화되어 독자의 욕망에 최대한 부합하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려 하는 웹소설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러한 젠더별 분류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는 젠더적 차이가 그만큼 본원적이고 결정적임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계급 격차가 사회 전반에 은폐되면서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각각의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독자의 성별 분포가 실제로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남성향과 여성향의 구분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는 듯하다.
- 15) 이융희, 같은 책, p. 43.
- 16) 같은 책, p. 29.
- 17) 아도르노, 위의 책, p. 360.
- 18) 같은 책, p. 267.
- 19) 만델 또한 추리소설이 계급을 초월하여 대중적으로 읽힐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맥락을 지적하고 있다. 대중화, 정확히는 대중의 탈문맹화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이득이라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하층계급과 상층계급이 “서로 아주 상이한 어휘”를 구사하였던 19세기와 달
- 리 탈문맹화가 일어난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특정한 지시 언어(어휘)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전부 이해하게” 되는 현상, 즉 추리소설과 같은 통속적인 대중소설의 출현이 가능해졌다. (에르네스트 만델, 같은 책,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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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범행의 수법과 실현 가능성을 정밀하게 따지는 사람과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 동기에 연연하는 사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그 모두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추리소설’ 독자겠지만……. 나의 경우는 명백하게 후자다. 동생과 투니버스에서 주말 밤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탐정학원q」, 「명탐정 코난」을 챙겨 보던 어린 시절, 동생은 진지하게 알리바이와 단서를 따져 가며 범인을 추리했던 반면 나는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 위태로운 분위기의 현장감과 용의자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 범인이 밝혀진 후 ‘왜’를 이야기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었다. 범죄물에서 하이라이트는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전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이야기를 건축물로 봤을 때, 살인의 방법과 시신 발견 현장이 스타일라면 동기와 대과거의 사건은 초석이다. 잘 설계된 추리물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독자를 능숙하게 건물 내부로 끌어들여 순식간에 지하의 초석, 핵심에 도달하게 한다. 이 책도 그렇다. 추리물 마니아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히키코모리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한다. 신고자는 그의 어머니이다. 무려 20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그의 방에서 스물다섯 개의 표본병에 든 토막 시신 두 구가 발견된다. 부검 결과 시신은 사망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CCTV와 동네 토박이들의 눈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해체한 시신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셰바이천은 어떻게 방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그가 정말 이 두 명을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이 맞을까? 한편 그의 옆집에는 셰바이천의 오랜 친구이자 추리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산다. 형사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초기작 속 시신과 표본병 안의 토막 시신 자세가 유사하다는 걸 알아챈다. 이 친구는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피해자 두 명의 신원은 무엇이고, 이 작가와 셰바이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작가는 황량한 밭에 씨앗을 뿌리듯 여러 개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던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며 전개를 따라가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난다. 추리소설 읽기에서 오답은 반길 만한 것이다. 틀리는 순간에 쾌감이 있다. 굳게 믿었던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이 이 과정에는 흔하게 발생한다. 추리소설에서만큼은 독자도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휘둘리기를, 가지고 놀아지기를 바란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은 500쪽이 넘는 두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작가가 뿌려 놓은 미스터리는 여러 오답과 오답에서 얻은 힌트를 엮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셰바이천은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이다. 책에는 셰바이천이 남긴 유서와 작가 친구의 미공개작 일부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셰바이천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 학생을 친구와 함께 가차 없이 응징한 기억을 꽤나 아름답게 회상한다. 이는 얼핏 그가 오랫동안 변태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읽힌다. 곧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 친구의 최신 소설은 히키코모리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렌탈 애인’ 여성과 친해진다. 이 역시 살인 사건에 꽤나 지저분한 정황이 얽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작가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에 있다. 당장에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당신의 믿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마지막 장까지 가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어쨌든 본사건과 유서, 소설 속 소설로 나뉘는 세 개의 텍스트는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이어진다. 굽이치는 자잘한 물줄기가 결국 커다란 강으로 모이는 순간에 단지 재미를 넘어서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어가 촘촘한, 잘 짜인 이야기를 완독하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꼭대기에 오른 듯한 고양감과 충만함을 느낀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한 발을 내딛는 것, 오답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작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홍콩이라는 배경을 무척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보통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물의 경우, 고증의 오류를 줄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나 배경을 설정하곤 하는데 이 작가의 경우는 그 반대다. 덕분에 분명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사건임에도 마치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의 실제 사건을 대하듯 실감 나는 독서가 가능하다. 지명과 도로명 등이 전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니, 홍콩 여행 일정이 있다면 추리소설과 함께하며 도시의 분위기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초반에 작가는 홍콩을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한 인구밀도와 실적주의, 정상성의 압박 등은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소설로 끌어온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똑같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문제를 끌어들인 범죄소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장 흔한 살인 동기는 돈과 욕정이다.” 작가가 형사 쉬유이의 입을 빌어 소설의 초입에 적은 문장이다. 반면 중후반인 332쪽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현실은 소설이 아닙니다. 독자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때때로 진실이 더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도 해요.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죠.” 비정한 돈과 욕정의 도시에서 진실이란 허무맹랑하고 황당할망정 낭만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의 미덕이니까.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를 파고들어 사건의 이면을 만들고 끝내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 『고독한 용의자』의 용의자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스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범인의 정체나 살인 수법에만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반전이 될 수 있다.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에너미 마인』과의 만남은 뭐랄까…… 운명적이었다. 때는 전 국민을 잠 못 들게 한 12월 3일로부터 열흘가량이 지난 어느 평일 저녁. 나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니 늘 눈이 피로했고, 집중력도 떨어져 독서는커녕 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매일매일 현실의 뉴스에 압도되어 실핏줄이 바짝 선 눈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봤더랬다. 가장 나를 괴롭혔던 건 ‘지금 소설 같은 걸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프리랜서인 나에게는 정해진 마감 날짜가 있었다. 도저히 가상 세계에 몰입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시시각각 디데이는 다가왔다. 나는 점차 초조함과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글을 써야 한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돼!’ 일단 잃어버린 텍스트의 감각부터 되찾을 목적으로 독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집 소파 옆에는 사거나 선물 받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한참을 살펴봤는데도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내 신경은 계속 휴대폰과 그날 이후 ASMR처럼 틀어 놓는 뉴스 채널으로만 쏠렸다. 이러다가는 또 한 줄도 못 읽겠다 싶어서, 일단 눈을 감고 책탑을 더듬다가 아무 책이나 붙잡았다. 그게 바로 이 샛노란 표지의 『에너미 마인』. 무려 1979년에 쓰인 SF이다. 처음엔 내 손으로 골랐지만 우려스러웠다. 하필 지금, 급한 작업에조차 집중을 못 하는데 가상의 시대, 미지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 외계인 소설에 몰입할 수 있을까? 나중에 좀 더 심적 여유가 있을 때 읽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보드라운 표지의 감촉에 이끌려 책을 펼쳤고, 단숨에 몰입해 그날 새벽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지금은 세상의 어떤 신묘한 흐름이 나에게 이 책을 만나게 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가 동생 시험 날에 예수님이 상장을 하사하는 꿈을 꿨던 것처럼……. 난 아직 종교가 없지만. 소설이 공개된 1979년은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냉전 시기다. 그런 국제 정세를 비유하듯 소설 안의 두 종족, 드랙과 인간 사이에도 긴 전쟁이 진행 중이다. 드랙은 손가락이 세 개에 노란 피부를 가진 외계 종족이다. 우리의 주인공 군인 윌리스 데이비지는 전투 중 적군인 제리바 쉬간과 함께 무인 행성 ‘파이린 4호’에 조난 당한다. 시대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대입해 보자면, 데스 매치 중이던 미군과 소련군이 함께 무인도에 불시착한 셈이다. 행성에서 눈을 뜬 두 존재는 서로를 인식하자마자 다시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곧 괜한 짓이라는 걸 깨닫는다. 중요한 건 적을 죽이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제 두 종족 간의 원한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인간과 드랙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동굴을 아늑하게 꾸민다. 낮의 노동 후에는 긴 밤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즐길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무료함을 달래 줄 만한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무인도와 달라 파도에 떠밀려 오는 새로운 아이템조차 없다. 날씨 변화 이외의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에,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허한 공간에서 오로지 두 존재의 회상만이 지루함을 달래 준다. 우리의 인간 주인공 데이비지는 외로움에 취약하다. 적군이었던 쉬간마저 없었으면 분명 미치거나 자살했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쉬간 역시 마찬가지다. 두 종족은 완전히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세월도 다르지만 절대적인 고립은 양극단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제리바는 데이비지의 언어(영어)와 그의 농담을 이해하게 되고, 데이비지는 제리바의 족보와 드랙의 역사를 매일 밤 경청한다. 핏줄의 기록을 달달 외는 게 이 드랙이라는 종족의 특성이므로, 다행히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극 초반부 전개이다.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아 있다. 고난은 계속된다. 드랙의 또 다른 특성은 스스로 번식이 가능한 양성체라는 점이다. 제리바는 삭막한 행성에서 임신을 하고, 결국 출산 중 사망한다. 데이비지는 쉬간의 부탁으로 적이자 친구인 그의 배를 찢는다. 그렇게 샛노란 드랙 아기 자미스가 태어난다. 데이비지는 친구에게 섣불리 약속한 대가로 이 외계인 아기를 키워야 한다. 생존기에 육아가 더해진 것도 고달픈데, 자미스는 어마어마하게 발육이 빠르고 호기심도 왕성하다. 자미스는 데이비지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제 예정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난 인간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지.” 나는 그때 어린애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 “삼촌, 어른이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생기나요?” 나는 앉아서 자미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다른 두 손가락이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데이비지는 너와 내가 어떻게, 왜 다른지 설명해야 한다. 왜 이 행성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는지도 알려 주어야 한다. 쉬간과의 전투와 전쟁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그 모든 갈등과 유리된 행성에서 태어난 자미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이 행성 밖에서도 ‘삼촌’인 데이비지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 자미스는 언젠가 행성을 떠나면 통역사가 되어 전쟁을 끝내게 돕고 싶다고 말한다. 두 존재의 애절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성인 인간과 드랙 아이, 대척점의 존재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소설은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안에서 개인과 개인이 공유한 시간은 상황이 급변한다 해도 동영상 파일처럼 간단히 삭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은 결말이 도달하도록 두 종족의 평화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종족 안에서도 깊어 가는 혐오와 차별의 현상을 짚어 낸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홍보 문구에 적혀 있듯이, 『에너미 마인』은 무려 ‘전 세계 최초로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동시에 석권한 소프트sf의 걸작’이다. 이렇게 요란하게 상을 휩쓸면 기대감보다는 ‘어디 한번 보자.’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집중력 부족에 더불어 조금 삐뚤어진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결국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SF라는 장르와 외계 종족과의 전쟁이라는 오락적인 배경으로 작가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의 가치, 공존에 대해 말한다. 호불호 없이 흥미로운 전개는 다른 종족의 캐릭터에도 쉽게 이입하게 하고, 매력적인 대화와 문체는 독서에 속도감을 더한다. 나에게 SF는 정말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어려운 장르다. 스스로도 정확히 취향을 가늠할 수 없다. 어렸을 땐 스페이스 오페라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마블 시리즈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가장 좋은 걸 보니 아닌 것 같다. 절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작품에 심장이 직격타를 맞을 때도 있고, 분명 내 취향일 거라 생각하고 접했는데 그저 한편의 과학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작품도 있었다. 복불복이 크다보니 주변의 추천을 받은 게 아니면 선뜻 시작하기 꺼려진다. 그런 와중에 만난 『에너미 마인』은 쓰는 욕망을 되찾아 주는 것은 물론 어지러운 세계에서 소설이 가지는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sf 장르에 장벽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한다. 그렇게 한밤의 독서가 끝나고……. 나는 다음 날 이제 다시 힘내서 쓰자, 하고 의지를 다지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과연 마감을 지킬 수 있을까? tmi. 이 리뷰 원고도 지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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