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겨울호
읽히고 버려질 글
읽히고 버려지기에 앞서
최근 정지돈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지면을 채우기 위해 나는 읽히고 버려질 글을 쓰기로 했다. 이러한 이슈에 응답하는 것이 평론가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는 하지만 평론가에게‘만’ 부여되는 과제이거나 평론가‘만’ 응답할 수 있는 과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슈에 대해서는 문단의 모든 구성원을 포함하여 문단 바깥의 사회 구성원까지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어야 마땅하다. 나아가 이 글이 제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구겨서 버린 뒤에 다음 논의를 이어갈 수 있게 될 때일 테니 조금이라도 그럴 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글을 쓰고 싶다. 이러한 태도는 여러 평론가가 이미 실천해온 것이고 나는 그것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따름으로써 동의를 표하려 한다.
오래전 후장사실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썼던 것이 참작되어 이번 사태와 정지돈의 문학적 방법론 간의 상관성에 대한 점검을 요청받았지만, 이 글에서 정지돈의 문학적 방법론에 내재한 문제들을 짚어본다고 해서 그것들이 최근의 사태에 대한 잠재적 원인이었다는 식으로 관심법을 쓰려는 것이 아님을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러한 관심법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는 식의 억지 주장, 성폭력 피해자를 향해 옷을 그렇게 입었으니 그런 일을 당한 거라고 손가락질하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정지돈의 문학이 그간 이루어온 나름의 성취와 독보적인 입지에 비하면 이 글에서 제기하는 의혹들은 차라리 작은 물음표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정지돈의 작품을 딱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의혹들을 오래전부터 가져볼 수 있었지만, 딱히 싫어하지도 않으므로 그러한 의혹들을 제공한 그의 방법론이 문제적이라거나 위험하다는 식의 주장을 할 생각은 없다. 사실 이번 사태와 정지돈 특유의 작법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그의 잘못이라면 논란이 된 작품들의 세목을 가공함에 있어 지나치게 부주의했던 점, 그러한 부주의함으로 인해 맨 처음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점이 전부다. 물론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을 고수해온 그의 글쓰기가 이번 사안과 유관해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정지돈과 전혀 다른 작법을 구사하는 작가의 작품에서도 유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므로 그의 작법으로부터 어떤 잠재적 혐의를 도출하려는 시도는 부적절하다.
그럼에도 정지돈은 이번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독자는 정지돈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이번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의 작품을 그와 결부시키지 않고 읽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될 필요도 없다. 최근의 논란과 이를 둘러싼 갈등 및 논의들이 그의 작품을 독해할 때 일정한 위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해당 작품의 완성도나 성취도를 따져 묻는 것과 피해자가 주장하는 피해의 정도를 측량하는 것을 연관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피해 사실 여부를 묻는 분리의 감각을 예리하게 보존했을 때에야 해당 작품이 특정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러한 논란과 별개로 일정한 가치를 갖고 있음을 승인할 수 있다. 그랬을 때 작품의 성취 여부에 따라 피해자가 겪은 피해의 경중을 판가름하는 오류 또한 피할 수 있다. 여기에는 피해자를 피해 자체로 환원하고픈 욕망, 가해자를 죄 자체와 동일시하고픈 욕망에 저항하는 데 드는 것과 동일한 노력이 요청될 것이다. 이러한 정교한 분할의 작업은 그저 몇몇 사람들을 통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간이 축적되어야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제기하는 물음표들은 정지돈의 작품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지돈의 모든 작품을 아우르지는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정지돈의 작품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이 제시하는 물음표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생각해볼 법한 지점들을 환기할 수는 있을 것이며, 그로부터 독자들 각각의 입장과 관심에 따라 형상을 조금씩 달리하며 모호하게 또는 구체적으로 잡히는 또 다른 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거리의 무가지나 팸플릿을 대충 읽고 버리듯이 심상하게 읽어달라. 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다 있군,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네, 하고. 그러나 읽고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고 다시 제 갈 길을 가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들은 찢거나 구기지 말아달라.
죽은 자는 소송을 걸지 않는다
이 글을 쓰기로 결정한 이유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여기서 꼭 언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은 대단히 단순하고도 간명한 것이지만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하나의 중요한 시선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내가 외국 문학을 공부하면서 글을 쓸 때 대상으로 삼거나 참조하게 되는 사람들은 대개 아주 오래전에 죽었거나, 머나먼 타국에 있어 사실상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이나 저서를 인용하면서, 혹은 그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의 심사를 거스르거나 명예를 훼손하지 않을까 조심하게 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가령 내가 발터 벤야민이 교수 자격 논문 통과에 실패하고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해 중년의 나이에 이르도록 아버지에게 용돈을 타 썼던 루저 중의 루저라고(그래서 그런 벤야민을 지겨워하면서도 아쉬울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곤 하는 나를 한심해하면서) 신랄한 글을 써봤자 죽은 벤야민이 나를 단죄하기 위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대양을 헤엄쳐 건너오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 ‘벤야민 찌질한 놈’이라고 쓴다 한들 벤야민이 입에 거품을 물고 좀비처럼 뛰쳐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무심함이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최초로 학습하게 된 것은 문단에서였다. 등단 초기에 나는 어느 지면에 어느 소설가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리뷰를 쓴 적이 있었고, 비판을 ‘잘’ 하는 것에만 매몰되어 글을 썼다. 그 글은 결코 좋은 글이 아니었고 당시의 나는 많은 한국인이 대개 그렇듯이 비판과 비난을 자주 혼동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주로 다루는 공부를 하면서 종종 신랄한 비난을 그럴듯한 비판으로 인정받기도 해온 터였다. 그해 연말 어느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를 바라보던 그 소설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를 보지 못한 척 다른 곳을 보며 웃고 있었지만 뒤통수에는 그야말로 식은땀이 흘렀고 입꼬리는 얼어붙었다. 그의 눈빛은 나를 한 덩어리의 죄의식으로 만들었고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했다(물론 그 다짐이 잘 실현되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런 다짐을 하기 전과 후의 간극을 떠올리는 것은 먼 나라의 죽은 자를 인용하는 것과 지금 여기의 산 자를 인용하는 것의 간극을 헤아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나는 정지돈의 작품 또한 먼 나라의 죽은 자를 자유롭고 분방하게 인용하는 데서 오는 효과를 영리하게 구사했을 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가 방대한 역사적 사료와 기록 들을 바탕으로 창조한 허구의 서사가 (제아무리 꼼꼼히 구성됐다 한들) 순 날조이고 허위라며 정웰링턴이 무덤에서 뛰쳐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장-뤽 고다르와 존 케이지가 산 자의 육신에 빙의하여 그에게 찾아와 왜 나를 그런 식으로 써먹었느냐고 멱살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사태는 그가 죽은 자를 인용한 데서 연유한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죽은 자를 글에 불러들이는 윤리와 산 자를 글에 불러들이는 윤리가 판이해야 하는 이유, 혹은 죽은 자를 글에 불러들일 때는 더 소략한 윤리를 요청하는 것으로 충분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죽은 자는 자신의 서사를 예술적으로, 혹은 마음대로 가공했다고 해서 명예훼손 소송을 걸지 않을 것이고 해당 작품에 대해 자신의 몫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육신이 죽음으로 인해 ‘텍스트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수분이 증발하고 백골이 풍화되거나 화장되어 납작하고 평평해졌다. 죽음 이후에는 텍스트가 곧 그의 피륙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자유롭게, 혹은 창조적으로 갖다 쓸 수 있다. 바로 그랬을 때만 텍스트로 남은 그의 피륙이 숨을 쉬고 혈액이 따뜻하게 순환되고 이 텍스트에서 저 텍스트로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다. 묻히고 잊히기 십상인 죽은 자를 텍스트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 그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니라 그를 향한 경의의 표현이 될 수도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지돈의 작품에 불러 세워진 산 자가 죽은 자 못지않게 자유로운 텍스트로 기능하는 경우는 다름 아닌 ‘정지돈’이 등장할 때이다. 혹은 그와 문학적 뜻을 공유하는 후장사실주의자들이 등장할 때이다. 정지돈이 ‘정지돈’을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그가 바로 그 소설가 정지돈이라는, 소설 속 ‘정지돈’의 말과 행동과 결단 들이 소설 밖 정지돈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내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혹은 품고 있기에 소설 속 ‘정지돈’이 소설적으로 읽히는 것을 입증하고 확정하는 과정으로서의 마술적 독서에 참여한다. 즉 소설 속 ‘정지돈’이 소설적일 수 있게 되는 데는 일종의 ‘하얀 거짓말’과 같은 독자와의 상호 규약이 작동한다. 이 암묵적인 규칙의 자장 안에서는 멀쩡히 살아 있는 정지돈이라도 얼마든지 텍스트의 피륙을 뒤집어쓸 수 있다. 정지돈의 작품에서 산 자의 육신이 텍스트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지돈이 ‘정지돈’을 갖다 쓰는 데 한해서이다. 그는 그 자신의 주권자이고, 자기가 자기를 인용했다고 해서 그의 의식 일부가 떨어져 나와 그를 단죄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과 현실의 경계는 대체로 소설 밖에 있다
정지돈의 작품은 주로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거나 그것을 허무는 데서 오는 서사적 효과’를 근거로 작품성을 인정받아왔다. 그간 정지돈이 써왔던, 수많은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역사 속 인물들의 허구적 연대기는 분명 그러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 와중에도 정지돈의 작품에서 위와 같은 평가에 값하는 대목은 앞서 말했듯이 ‘정지돈’이 등장할 때이다. ‘정지돈’이 등장하는 정지돈의 소설이야말로 소설과 현실의 경계 위에 서서 그 경계를 무너뜨리며 재현의 체계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실제로 소설 속 ‘정지돈’ 또한 이러한 고민을 일관적으로 견지한다. 그럼에도 언제나 다음과 같은 의문은 남는다. 위와 같은 의도를 본질로 삼는 형식 속에 그는 은연중 자신을 전시하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 ‘정지돈’은 언제나 무언가를 향한 자유로운 지적 탐구를 하고 있고, 그저 지명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아시아인의 무의식에 내재한 옥시덴탈리즘을 즉각 자극하기 마련인 제1세계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고 있으며,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한다. 소설 속 ‘정지돈’은 부끄럽거나 추잡한 짓을 하지 않고 아무도 욕망하지 않는 지명의 도시에는 가지 않으며 설거지를 하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정지돈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는 화자들의 경우에도 정지돈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 방식으로 느슨하게 변형되어 처리됨으로써 유사한 패턴을 반복한다.
정지돈의 소설 속 ‘정지돈’이 반드시 하는 것과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의 경계가 선명한 가운데, 그가 자신을 전시하려는 의도가 매우 부수적이고 하찮은 비중을 차지할지라도 아주 없지는 않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이 하찮은 비율로 자리하고 있는 부수적인 의도가 주된 의도를 해치기도 한다. 그가 소설 속에 자신을 전시하는 순간만큼은 소설이 현실에 봉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설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고 또 사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소설 속 ‘정지돈’이 소설 밖 정지돈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소설 속 ‘정지돈’을 읽으며 소설 밖 정지돈을 내다보게 만드는 일관된 흐름 속에서 소설은 현실의 장식으로 변모한다. 물론 이 장식적 기능은 그의 소설이 견지하는 본래적 의도에 비하면 말그대로 ‘장식적’일 뿐이지만, 우리는 장신구가 어떤 아우라적인 광채를 발휘하여 때때로 대상을 향한 인식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장신구가 그토록 비싼 값에 팔려나가지도 않을 것이다. 단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동시에 장식적이기 때문에, 혹은 장식적으로 부차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혀 부차적이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착시 속에서 그의 소설은 때때로 관음하는 욕망에 관대해진다. 전시되는 욕망과 전시된 것을 관음하는 욕망의 상호 교환 체제로 소설이 작동하는 것에 관대해진다. 그러한 관대함 속에서 소설에 대한 현실의 우위가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에 관대해진다.
비단 그의 소설뿐 아니라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흥미롭게 읽히는 원천은 대개 소설이 아닌 현실에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놀라운 이야기가 끝나고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분, 이 이야기가 논픽션인 것 같지만 사실은 철저히 픽션입니다’ 하고 끼얹는 찬물 한 컵이 강렬한 이유는 모두가 그 이야기를 논픽션으로 열렬히 믿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축조되어온 믿음의 구조가 한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비슷한데 ‘이 이야기가 픽션인 것 같지만 사실은 논픽션입니다’ 했을 때 픽션 같은 논픽션을 향해 응집되는 시선의 강렬도는 사뭇 달라진다. 같은 맥락에서 정지돈이 동일한 플롯의 소설을 그 어떤 실제적 기록이나 자료에도 바탕하지 않고, 실존했던 인물이 아닌 완전히 창조된 인물을 앞세워 창작했다면 그의 이야기는 훨씬 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에 생명력을,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아닌 듯한 매력을 공급하는 원천은 현실의 영역에 있다. 정확히는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염려가 없는 이들에 대한 현실의 영역에. 확실히 그의 작품들은 지금은 무덤에 얌전히 누워 있는 실존 인물들의 장구하고 기구하며, 때로는 요란했던 실제 삶으로부터 유래하는 광휘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가 시작하기에 앞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관은 허구입니다’라는 안내문을 읽으면서 관객은 그것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그러한 안내문을 고지하는 것은 불필요한 소송으로 인한 손실을 피하기 위한 것, 예컨대 하드 포장지에 ‘먹고 난 스틱을 삼키면 안 됩니다’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안내문을 굳이 명시해놓듯이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것임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해당 작품이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자각 속에 그것이 폭로하거나 풍자하는 대상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픽션입니다, 여러분’ 하는 고지를 진실로 믿는 척하며 픽션을 흉내 내는 논픽션을 안락하게 소비할 수 있다. 그러한 안내문을 사전에 내세우는 작품들이 대개 사회 고발적이거나 세태 풍자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논픽션을 픽션으로 만드는 가상의 규약이란 픽션의 형식을 빌어 논픽션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규약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일정 부분 실천적인 규약이고, 우리는 그러한 규약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픽션이 논픽션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지, 픽션이 얼마만큼 경계적일 수 있고 또 자기 지시적일 수 있을지 등을 결정하는 것은 픽션의 몫이 아니다. 그러한 결정은 가상의 규약이 체결됨으로써 발생하는 한시적인 효과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때 이 규약의 영토는 언제나 픽션 바깥에 있다. 위와 같은 고지가 영화나 드라마가 시작하기 ‘직전’에 자리하지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 영토야말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지대에 가깝다. 달리 말해 어떤 이야기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위치시키는 것, 어떤 이야기로부터 그러한 경계를 생성하고 사유하는 것은 작가의 권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른 이들이 하얀 거짓말이라는 상호적인 약속에 동참함으로써만 발생한다. 그리고 하얀 거짓말의 규약을 앞세워 현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환기하도록 구조화된 재현물이 사회 고발적이거나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 경우에 이는 불가피하게 관음의 체제로 미끄러질 위험을 안고 있다.
사유재산으로서의 지식, 지식 노동이라는 인클로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효과에 대한 합의를 구할 수 있는 영역, 즉 작품 자체를 마련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만 그러한 합의에 참여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어떤 가상의 규약을 토대로 읽혀야만 하는 작품, 현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라고, 혹은 소설의 형상을 하고 있음에도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속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를 통해서만 의도를 달성할 수 있는 작품이 오롯이 작가 개인의 사적 소유물이 되는 것은 얼마만큼 정당한가? 가령 정지돈의 소설에서 건축가 이구,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와 같은 실제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목을 읽으며 독자들은 그들을 검색해보게 마련이고 그들의 외양이나 이력이 서사에 곧이곧대로 녹아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으로서의 사실과 허구로서의 소설이 같은 듯 다르다는 것을, 그리하여 때로는 아주 다른 것이 되기도 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두 영역을 부단히 확인하고 대조하는 독자의 경험 속에서 정지돈의 소설은 그 가치를 비로소 승인받는다.
유사한 사례로, 오늘날의 현대 미술이 갖는 막대한 금전적 가치 또한 그것을 제대로 봐주는 이들의 승인을 통해서만 지탱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가치 있게 봐주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현대 미술은 어린아이의 낙서나 쓰레기장의 플라스틱 무더기와 구분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러한 착오 속에 작품이 실수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같은 미술 평론가가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았다면 잭슨 폴록의 그림 또한 쓰레기통에 처박혔을지 모를 일이다. 여기서 생각을 좀더 밀고 나가면 다음과 같은 물음에 도달할 수 있다. 작품의 가치가 그만큼 상호적인 것이라면 왜 그 가치는 온전히 작가만의 몫이 되는가? 작품의 가치를 알아봐준 이들 또한 그 가치에 대해 일정 부분의 몫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생각을 또 한 번 밀고 나가면 다음과 같은 물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로지 소비자가 사용해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기업의 이익은 어디까지 기업의 몫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늘날 기업이 많든 적든 사회적 환원을 실천하려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떠올려볼 수 있는 것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나, ‘네가 지금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다른 누군가가 생각하고 있거나 이미 생각한 것’이라는 말과 같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전언들이다. 때로 저 말들은 그 생각을 먼저 끄집어내서 요령껏 써먹는 자가 ‘임자’라는, 더 정확히는 ‘승자’라는 말을 향해 직행한다. 우리 시대 지식 노동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자 진리와 같이 공기 중에 암약하다가 때때로 결정화되어 실체를 드러내곤 하는, 일종의 도시 전설과 같은 저 말들의 승자는 누구일까? 분명한 것은 경쟁적인 속도전으로서의 지적 재산권에 대한 세속의 지혜와도 같은 저 말들이 우리 시대와 아주 가까운 과거로부터 유래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그 시기는 우리의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과 입속에 맴도는 말들을 잠재적 사유재산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유재산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판본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그중 선한 판본은 다음과 같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그때그때 식량을 조달하던 시기를 거쳐 도자기가 발명되고 농업기술이 등장하여 수확하고 남은 곡식을 저장하면서부터 재산의 개념이 형성되었으며, 각자의 재산을 필요에 따라 가치 대 가치로 맞바꾸는 교환 행위가 발생하였다. 그런가 하면 사유재산의 기원에 대한 악한 판본은 다음과 같다: 만인이 평화롭게 공유하며 경작하던 들판에 어느 날 갑자기 모리배들이 나타나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세우더니 여기는 이제부터 사유지라고 주장하며 없던 권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예술 노동을 비롯한 지식 노동의 양태는 두 번째 판본과 불가피하게 공명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지식 노동, 예술 노동의 사적 소유권은 지켜져야 마땅하며 그것이 여전히 침해되거나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불온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처럼 오늘날 자연스럽게 굳어져 있는, 혹은 확립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예술에 대한 사적 소유권의 일방향적 성격은 이번 사안이 처한 딜레마와 무관하지 않다. 가령 작가가 특정인의 사생활이나 사적 서사를 무단으로 도용했을 때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무단으로 도용한 요소가 포함된 작품이 작가의 사적 소유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해당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인세 수익이나 작가로서의 명성, 예술적 자질과 같은 유무형의 이익을 취할 수 있지만 작품 속 요소의 실제 당사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작품이 끌어들이는 요소들이 단순히 현실로부터 허구의 영역으로 탈바꿈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상에서 재산의 한 형태로 귀속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유사한 사안들을 논의할 때 반드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가령 정지돈의 작품들이 일반적인 관행에 따른 사적 소유의 형태가 아니라 공공재와 같은 오픈 소스의 형태로 공개되었다면 (나아가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 플랫폼과 같이 다수가 수시로 참여하여 수정과 번복, 확장을 거듭하는 서사 형태를 취했다면) 이번 사태의 지형 또한 어떤 식으로든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느슨한 제안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이 글은 정지돈의 작품뿐만 아니라 재현 예술 전반이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곤경들에 대한 작은 물음표를 성기게 던져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 물음표들은 이 글이 호출된 계기가 된 사안과 명쾌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른 여러 물음표를 무수히 파생시킬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안에 대한 정밀한 접근 못지않게 그것을 둘러싸며 부유하고 있는, 모호하지만 다루어져야 마땅한 문제들을 표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면 또한 그러한 문제의식하에 꾸려졌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지돈과 김현지가 겪어야 했던, 겪고 있을 곤경과 고통을 내가 정확하게 이해할 길은 없다. 나는 정지돈의 입장에 정확하게 서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내 글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았음을 알아차린 적은 있다. 나는 김현지의 입장에도 정확하게 서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는 아무개임이 분명한 인물이 희화적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읽은 뒤에 심하게 불쾌했던 적은 있다. 그랬던 경험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현재적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겠지만 짐작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짐작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이것저것 짚어보는 것이 무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림짐작으로나마 무언가를 짚어보고 두드려보는 정도의 책무는 평론가에게 요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평론가에게 그 이상을 과도하게 요구하거나 평론가가 스스로 나서서 그 이상을 과도하게 짊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요 이상의 책임을 지려 하는 것은 때로 무책임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어떤 문제적 사태가 문단에 발생할 때마다 마치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이 평론가들에게 있는 것처럼 몰아세우는 분위기, 평론가들에게 뭐라도 맡겨놓은 것처럼 다그치고 심문하고픈 대중적 욕망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갖게 된다. 평론가에게 책임을 촉구하고 실천적 행동을 조급하게 강제하는 태도야말로 평론가의 권위를 거꾸로 가공해내는 원동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평론가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감각, 이를테면 평론가가 ‘문학 공무원’이라도 되는 듯이, 혹은 고객 불만 접수센터의 ‘상담원’이라도 되는 듯이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우리는 별도로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태도를 구사하기에 이른 동기보다도 그러한 태도가 어떤 타성에 젖어 있을 때 발현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는 좋은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것도 아니고 신중한 것도 아니며 그저 우리 사회가 은밀하게 권하고 부여해온 것을 스펀지처럼 흠뻑 머금은 채로 발휘하게 되는 습관적인 것일 뿐이다. 대상 자체보다도 그 대상에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따라 효과와 성취를 달리하는 것이 문학이고, 그런 문학이 염원하는 것은 그것을 읽고 체득한 감각을 따라 세계를 바라보고 적절한 행위를 취하는 것, 즉 세계를 ‘문학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임을 상기했을 때, 평론가를 다그치는 감각은 문학적이지 않다. 그리고 문학계에 매번 유사하게 반복되는 사태에 대해서도 우리가 얼마나 문학적으로 접근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범속하게 말하자면 이런 때일수록 그간 문학을 읽으며 갈고닦은 구력을 써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평론가만의 몫이 아닌 것이다.
그 와중에 우려스러운 것은 찻잔 속의 태풍이라는 표현조차 궁색할 정도로 이 사안에 무관심한, 무한히 광활한 현실 세계가 아주 빠르게 면적을 넓혀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의 이슈라는 것은 점점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 이제는 찻잔도 아닌 티스푼 속의 태풍이 되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래도 여전히 태풍은 태풍이라는 사실뿐인 듯하다. 이 태풍을 용기 있게 직면하려는 평론가, 작가, 독자 들에게 지지의 목소리를 보낸다.
벤야민을 향한 학문적 관심이 그야말로 풍년이던 시기를 거쳐서인지 벤야민이라면 지긋지긋하지만 그럼에도 얼마 전 그에 대한 훌륭한 연구서를 읽다가 발견한, 그가 한 서신에 남긴 주옥같은 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푹 자고 일어난 사람이 하루 일과를 계획하듯이 인류의 장래에 대한 ‘느슨한 구상’을 하자는 말이 바로 그것인데 이 말을 참조하여 우리 또한 문학에 대한, 창작에 대한 느슨한 구상을 다 같이 해보면 어떨까. 아침에 일어난 사람은 의자에 걸터앉아 그날 해야 할 일을 종이 쪼가리에 대충 끄적여보곤 한다. 빨래 개기. 책 읽기. 냉장고에 있는 두부는 가급적 오늘 내로 먹을 것. 기타 등등. 그 누구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은 세상을 바꿔보겠다거나, 오늘이야말로 영혼까지 불태워 필생의 역작을 써보겠다고 외치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지는 않는다. 갈급하거나 다급하게 말고 산책을 하듯이, 느긋하고 느슨하게, 그러기에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장래에 대해 다 같이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오늘의 할 일을 끄적이듯이 몇 가지 제안을 던지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1. 출판 제도의 측면에서: 출판사와 저자가 일정한 지분의 권리를 독과점하는 현재의 소유 형태를 벗어나 해당 저작물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모든 이가 저마다의 몫을 저마다의 비율로 행사하는, 주주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주식회사와 같은 책, 혹은 여러 사람이 한 명의 가상의 저자로 세워지는 법인 공동체와 같은 책을 상상해보는 것. 이때 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이들을 정하고 각자의 몫을 어떻게 나눌지를 고민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별도의 예술적 행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그들 중에서 창작의 근본 주체인 작가가 지분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새로운 소유 형태로서의 책은 이윤 배분의 정밀함을 극대화함으로써, 즉 자본주의적인 원리를 첨예하게 적용함으로써 역으로 자본주의를 내파(內破)하는 사유 실험체로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문학 제도의 측면에서: 학계의 연구 윤리 강령과 같이 창작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 강령을 만들어보는 것. 등단자에 대한 창작 윤리 강령을 채택 및 적용하는 것. 이와 관련해서는 문학계 바깥에서 통용되는 유사한 원칙을 얼마든지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임상 심리 분야의 경우 상담자는 내담자의 상담 내용을 절대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상담자가 이를 연구 자료로 활용할 때는 내담자를 특정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각색해야만 하며, 이를 준수하지 않은 상담자는 자격을 박탈당한다. 문학계 또한 필요에 따라 이러한 유형의 원칙을 도입해보는 식으로, 문단이라는 기왕의 주어진 ‘제도’를 가능성으로 전유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최소한’의 강령이라는 점이 중요할 텐데, 이는 그러한 강령이 창작에 대한 대단한 구속이나 검열이 아니라 현실을 가공함에 있어 기존의 작가 대다수가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을 성문화함으로써 윤리적 실천을 이행하는 일임을, 작가 개개인의 도의적 책임으로 문제를 떠맡기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을 집단적으로 명시하는 행위임을 의미한다.
이 제안들을 읽고 누군가는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황당해하며 이 글을 당장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 누군가는 며칠 뒤 이 제안들이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쓰레기통을 뒤질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제안들이 터무니없어 보일 수는 있어도 마냥 터무니없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구체적인 제안을 상상하고 실천할 궁리를 해보는 것이야말로 매번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소방관 부르듯이 평론가를 소환하는 사후약방문식 대응을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계가 이미 경험해왔듯이 이번 사안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앞으로도 유사한 다른 문제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염두에 두었을 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비평의 언어가 아니라 약속과 실천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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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에 앞서 그간 정지돈이 발표한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일별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의 작품들이 대단히 구체적인 변화의 노정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영영 사라진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영원히 무너진 과거로서의 공산주의를 회고하는 것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미래로서의 공산주의를 희구하는 것과 겹쳐 보이던, 지독한 (혹은 달콤한) 자가당착으로서의 노스탤지어를 끝없이 생성하던 초창기의 작업으로부터, 이동성·편재성에 대한 사유를 거쳐, 보다 명료하게 현재화하는 미래로서의 SF적인 기획을 향해 작가가 서서히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음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었을 때 나는 이번 사태가 그의 문학적 지평에서 그가 추구하던 과거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미래가 충돌한 사건으로 요약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충돌의 잔여물을 극복하는 것만큼은 온전히 그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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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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