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파란 2024년 겨울호(제35호)
환한 어스름 ― 성명진, 『몰래 환했다』, 파란, 2024
멀찍이 다정한
성명진의 시집 『몰래 환했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리’를 두는 감각이다. 시의 화자는 마당의 강아지를, 오랜 지기를, 자신의 가족을 언제나 한 뼘쯤 떨어져 지켜본다. 이 거리감은 대상을 관찰하거나 관조하기보다는 자신과의 ‘관계’ 속에 오래 두기 위함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이들을 두루 챙기고 보살피기 위해, 그들에게 와락 달려들거나 슬쩍 끼어들고픈 마음을 화자는 꾹꾹 접어둔다. 아비의 마음으로도 요약될 수 있을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의/든든한 바탕이 되어” 주는 동시에 “평화로운 풍경도 되어” 주자는 “산과 들”(「마을」)의 순순하고 선한 마음가짐을 닮았다. 마음 가는 이들을 바탕이자 풍경으로 남겨둠으로써 그들에게 자신 또한 바탕이자 풍경이 되고자 하는,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바탕이자 풍경으로 오래 머물고자 하는 끈질긴 거리 두기로서의 사랑이 그의 시마다 진풍경을 이룬다.
거리를 두기란 말 그대로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기에, 너무 가까워지지도 않아야 하지만 아주 멀어지지도 않아야 하는 퍽 까다로운 일이다. 단순히 연필이나 접시 따위를 멀리 두는 것과 달리 마음을 써야 하는 일,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가다듬어야 하는 일이다. “이따금 연락을 해” 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때론 겪는 슬픔을 서로 보여 주기도” 하는, “이 길 어디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오래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성공한 사람이 아닌 데다//마음 씀씀이가 나쁘지는 않아”서이다. 그런 사람이기를 져버리고 “이 길을 버리고//다른 길로 건너 뛰어가” 버린다면 그와의 관계도 망가질 테다(「길 너머」). 노상 그런 사람인 채로 그가 어디쯤 서 있는 이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 같은 길 위에 멀찍이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화자는 잘 알고 있다.
같은 길 위에 멀찍이 서 있는 이들 사이의 거리감이란 한 송이에 함께 매달린 포도알들이 서로를 향해 갖는 거리감과도 같다. 포도알이 가득 영글 수 있는 것은 한 송이 안에서 저들끼리 부대끼지 않는 만큼만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상으로 몸을 부풀린다면 포도알들은 뭉개지거나 충분히 자라지 못할 것이다. 「겨울 포도밭」의 화자는 포도나무 가지를 손질하는 일을 마치고 가지를 태우는 불에 “무거운 등”을 쬐며 “지그시/닿는 누군가의 등”을 실감한다. 고된 일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분명할 이들은 등을 기댐으로써 서로를 알아차린다. 그들은 “뒷등으로/서로를 알아”보고 “한 송이에서 애써 살아간다”. 사는 일이 각박해 손발이 바쁜 와중에도 등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손발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지지해주려는 마음 씀이 확보하는 거리 덕분일 것이다. 몸을 부딪지 않아도, 마음의 기척만으로 충분하다.
너무 가까워지지 않으려는 것이 그저 손발이 바쁘기만 해서일까. 지나치게 가까이 닿은 채로는 각자의 고단함을 풀어줄 수도 없다. “금방까지 일한 손으로 강아지 쓰다듬”으면서도 “너무 힘주어 쓰다듬지 않으려” 하는 까닭은 “등 뼈다귀 (…)//머리빡 해골 만져지”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보드라운 털에 가려진 생명의 고된 속까지 건드리지 않기 위함이다. 생명은 저마다 주어진 만큼 뼈마디를 앓으며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 “삶을 가볍게 쓰다듬어 준 뒤 저리 가서 놀도록 놓아주면 되는 거다”(「쓰다듬다」). 그리고 시인이 보기에 이러한 ‘놓아줌’의 미덕은 인간만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스름 녘
희미하게 염소 몇과 노인이
언덕길에서 내려
마을 길로 들어오고 있다
천천히 걸어오다가
노인이 누구와 만나 한동안 얘기할 때
염소 지들끼리만 온다
노인을 거기 그냥 놓아두고
저녁에게 주고
어스름에 덮여
슬며시 잊히게 두고
― 「순명」 전문
무르고 단단한
놓아주고 내버려 두는 풍경이 시인의 눈에는 자꾸만 밟힌다. 거리 두기로서의 사랑이 아비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했듯이, 성명진의 화자는 위의 시와 같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아비됨을 체득하고자 한다.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머리에 담는다. 아비됨을 체득하는 것 또한 그렇게 담아두는 것만으로 충분한 듯하다. 굳이 더 나아가지 않는 것, 뻗으려던 손을 애써 거두는 것이 아비됨의 미덕이라는 듯이. 아비라는 존재는 무언가를 행하지 않아도 그저 ‘있는’ 것으로 충분할 테다. 정신없이 살아가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맨 밑에 놓이게 되었”기에 “위에 포개진 접시들을/팔 벌려 깊이 안아 주지는 못하”는 “딱딱한 아버지”지만, “자식의 뒤/미처 닦이지 않은 자국이 있다면/그것을 내 가슴팍에 받아”낼 수 있을 테다(「밑접시」).
맨 밑에 놓인 접시와 같은 아비의 존재는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가지를 지탱해주는 뿌리와 같기도 하다. 가지와 뿌리 사이의 거리는 대개 서울로 떠나게 되는 자식의 독립 이후 부모만 남은 본가와 자식의 거처 간의 물리적인 거리와도 상응한다. 가지의 자식이 다치면 “뿌리의 아비”는 “첫차를 타고/헐레벌떡 외지의 자식에게” 찾아가 버럭 화도 내고, 어르고 달래도 본다. “사는 게 나아지길 원했다며 고개를 꺾”는 자식을 향해 아비는 “괜찮다 웃어 준 후 밥을 먹이고/방바닥에 얼마 정도 용돈을 내놓은 후/뿌리로 돌아왔을 터”이다. 그러나 가지와 뿌리는 아무리 멀어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기에, “담벼락을 못 넘고 다친 가지 하나/그 통증이 내려와 캄캄히 쌓이는” 것이 “뿌리의 속”이다(「가지가 다쳤을 때」). 뿌리의 통증이 가지까지 오르기는 만무하지만 가지의 통증은 뿌리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뿌리는 그 통증을 단지 견디는 것으로 뿌리의 역할을 다한다. 가지가 그 사실을 영영 모를지라도.
맨 밑, 맨 뒤, 맨 나중을 자처하는 것이 아비됨이라면 아비의 노릇을 알아차리기란 영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명진의 화자들은 누구도 알아차려주지 않아도 좋다고 순순하게 물러난다. 그들은 자신의 위치에 ‘순명’한다. 강아지들이 태어나 어미가 젖을 물리는 경이로운 순간에도 “아이가 그걸 들여다보고 (…) 아이의 엄마도 나보다는 앞에 있”지만 “아비인 나는 멀찍한 데에 있”다. 모두가 갓 태어난 생명을 향해 집중하고 있는 순간에 화자는 그 풍경이 이루고 있는 순서를 가늠하며 그것이 “천사와 가까운 순서”라고 짐작해본다(「오늘의 순서」). 젖 물릴 새끼들 찾아 “걸음 부산”히 앞서가는 “어미 개를 앞지르려는 속셈”을 부렸다가 “오히려 속도를 줄이는 건/(…)/어쩐지 뒤처져 가야/미안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같은 슬픔」). 미안하지 않으려, 앞서 있는 이들을 앞지르지 않으려 아무도 모르게 속도를 줄이는 이들이 있기에 누군가는 천사에 더 가까이 닿을 수 있다.
야위고 환한
그러나 천사를 닮은 이들이 천사에 가까이 닿을 수 있게 자리를 무르는 기꺼움 속에 천사로부터 먼 곳까지도 밝히 드러나곤 한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 가까운 곳과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하나의 바탕으로 지켜보는 묵묵함은 그늘로부터 말갛게 빛이 퍼져 나가게 한다. 주변을 너르게 두루 살피는 시의 지평으로부터 어두운 와중에 밝은, 그늘진 와중에 맑은 것들이 피어오른다. 눈부시게 밝지는 않아도 해사하게 환한 것들이 가느다란 빛줄기를 이루며 시로 옮겨진다.
우리 집에는
꽃에서 나온 여자가 살고 있다
서러운 남자를 만나
새끼들을 낳아 밥해 먹이고
옷을 수선하면서 늙어 있다
이따금 목을 기울여 발갛게 웃고
이따금 목을 살랑여 발갛게 웃는다
― 「작약」 부분
“꽃에서 나온 여자”는 새끼들을 먹이고 살리느라 늙어가는 와중에도 “꽃 속에 살 때 익힌” 습관을 간직하고 있다. 새끼들 보살피느라 꽃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쳐 “영영 꽃 속으로 못 돌아가게 된/야윈 여자”(「작약」)가 그럼에도 꽃처럼 살아가고 있는 양을 화자는 곁에서 지켜본다. 지켜보는 것으로 지켜준다. 시들어가면서도 바스라지지 않고 끝까지 꽃의 형상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시인은 주변 모든 것들이 깜깜한 생을 헤매는 와중에도 환하게 드러내는 부분들을 시에 담는다. 임종을 앞둔 이가 “평생을 고생한 (…) 다른 곳들은 이미 굳었으나/끝까지 눈매는 잔잔하고 시”어 앞으로 천천히 해독해야 할 “무슨 말”을 흘려 보내고 있는 “흐린 눈망울”(「포도알」)을, “고양이가 어느 집에서/먹을 것 한 덩이를 물고 나”오며 “제때 밥을 구해 다행인 몸”(「얼룩 고양이」)을 세상에 부려놓는 것을, “얼마 전 사랑하는 이를 여읜 사람”이 국을 뜰 때마다 “그의 입에 들어갔다 나오며/한결 맑아진 슬픔을 내오는”(「나물국」) 숟가락을 담는다.
성명진의 시는 어떤 어둠은 멀리서 보면 밝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찬찬히 증명해 보인다. 어떤 순함은 너무 가까이서는 포착할 수 없기도 하다는 것을 선선히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아주 붙들지도, 아주 밀어내지도 않은 채 지켜보기란 또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붙들려면 그저 꽉 움켜쥐면 될 일이고 밀어내려면 그저 훌훌 떠나보내면 될 일이지만 그 중간을 오래도록 한결같이 유지하기란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가. 그 가늠할 수 없는 노고를 상상으로나마 헤아려본 뒤에야, 단정하지만 결코 쉽게 쓰이지 않았을 그의 시들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게 된다. “젖은 햇빛 뒤에 숨어/조용히 이울”듯이(「무지개」) 밝은지 어두운지 모르게 조용히 깜박거리는 그의 시들이 오래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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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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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1 2024년 여름 『계간 파란』 통권 33호 ‘문질빈빈(文質彬彬)’ 항목에서 제시된 「“지평선”의 아름다움」에서 이미 암시했듯, 김수영의 「바뀌어진 지평선」은 『주역』과 『중용』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고전의 영향 관계라는 문제틀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어야만 한다. 이 시편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래된 미래’로 자리할 수밖에 없을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이라는 방법론과 의제의 초점화를 통해서만 적확하게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시와 산문 텍스트의 상관성을 심층적으로 탐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고전의 충실한 이해 및 참조가 필수 불가결의 조건을 이룬다고 하겠다. 김수영의 초기작 「공자(孔子)의 생활난」에서부터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유발한 도피 행각과 귀가 이후의 실존적 격투가 고스란히 배어든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 그리고 말년에 창작된 「미역국」이나 「사랑의 변주곡」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수한 시편들에선 동아시아 고전의 수용 및 변용의 맥락이 일관된 지속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김수영의 시에서 동아시아 고전의 이름이 거죽 위로 솟아오른 텍스트로는 「술과 어린 고양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는 中庸의 술잔” “여기에 있는 것은 中庸이 아니다” 같은 구절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시의 本髓」 같은 산문 텍스트에서 활용된 “양극의 긴장” “대극” 같은 용어들 역시. 동아시아 문명사의 주축을 이루는 ‘주역 철학사’에서 부단히 제시되었던 ‘대대(對待)’ ‘순환(循環)’ 같은 어휘들을 수용・변형한 것이다. 김수영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설움”과 “긍지”, “생활”과 “자유” 같은 대립적 심상들이 상호 보완적인 “대극”의 지력선을 이루는 것처럼, “대극”과 “양극의 긴장”으로 표상되는 산문 텍스트의 핵심 원리 역시,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중용』의 ‘신독(愼獨)’으로 대변되는 근본적 ‘자기성찰’을 수미일관한 실존적 태도로 “이행(履行)”하려 했을뿐더러, “생활”과 “뮤즈”가 “일자(一字)”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실천의 기반으로서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끊임없이 견지하려 했으며 이를 당대의 “서정시인”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시중(時中)’이란 말은 『중용』 제2장에서 등장하는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君子가 中庸을 함은 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小人이 中庸에 반대함은 小人이면서 忌憚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을 통해, 그 어휘적 관련 맥락과 구체적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주희(朱熹)의 주석으로 나타난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君子가 中庸을 하는 까닭은 君子의 德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中에 처하기 때문이요)’라는 구절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시중’이 인격 수양의 정점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맥락을 좀 더 생생하게 감득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시중(時中)’이란 ‘고시조지의야(故時措之宜也)’라는 말에 담긴 실질적 의미, ‘그러므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행함에 의(宜), 적합하면 된다’(우응순, 『친절한 중용 강의』)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상황과 시간의 구체적 마디들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더불어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마땅함(宜)을 매번 다시 살피고 수행해야 한다는 숨겨진 맥락을 명료하게 풀이해주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에서 부단히 등장하는 부끄러움의 형상들이나 보잘것없음을 반성하는 자기성찰적 시구들은 한결같이 ‘시중’의 윤리학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김수영의 여러 시작품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시각성’의 이미지들 역시 좀 더 심층적인 차원의 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위시한 동아시아 고전에서 유래하는 ‘신독(愼獨)’ ‘권도(權度)’ 등과 같은 성찰성과 관련된 어휘들과 더불어 ‘중용’ 및 ‘시중’의 사유 맥락에 대한 섬세한 이해 및 본격적 탐구가 필수 불가결하다. 2 뮤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 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콜맨의 신작품(新作品)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賣春婦)의 생활(生活)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神經質)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卑怯)하다고 경멸(輕蔑)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라크 케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노력(勞力) 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영국인(英國人)들은 호스피탈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 - 「바뀌어진 지평선」 전문 3 「바뀌어진 지평선」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 텍스트를 넘어서 그의 실존적 태도와 세계관의 중핵을 구성하는 ‘중(中)’의 사유와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 시는 상당히 긴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라는 예술 장르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되어 온 의미의 압축성과 리듬의 암시성을 충실하게 확보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특이점과 미학적 자질이 온전하게 작품 내부에 응축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 역시, 김수영 특유의 “대극”의 사유 방식 또는 “양극의 긴장”에 대한 그의 첨예한 통찰력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1연에 나타난 “뮤즈”와 “생활”이란 이미지는 명시적인 차원에서 이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극”의 의미 계열을 구축한다. 양자의 사이 공간에 들어박힌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시구와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라는 시간적 심상은 “대극”이 반복・변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이란 “생활”에서 파생된 것이며, “너”는 “뮤즈”를 대명사로 바꾸어놓은 대체 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매듭이 나날의 범속한 생활이 만드는 온갖 우여곡절들을 암시한다면, “뮤즈”와 “너”가 함께 이루는 연속적인 이미지 지력선은 시인의 포에지(poesie), 곧 시인의 예술적 이상으로 이루어진 예술혼을 표상한다. 나아가 시작(詩作)의 ‘내재적 과정’에서 체감하게 되는 ‘신독(愼獨)’의 실천적 태도와 ‘시중’의 윤리학의 절실한 자각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위에서 풀이한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측면 또는 상반된 계기를 품고 있다는 의심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을 중용의 관점과 문제틀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긍지의 날」에서 상반된 위상을 차지하는 “설움”과 “긍지”라는 심상을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로 통합시키는 “대극”의 사유 원리를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사랑」에서 등장하는 “변치 않는”과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이라는 시구의 상반성, 그리고 「사랑의 변주곡」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사랑의 도시”와 “개미”라는 대극적 이미지 구성원리에서도 또렷한 되풀이의 모양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만한 경박성”이란 작은 무늬는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이상적 질서’, 곧 ‘중용’의 사유 및 실천 원리이자 ‘대대(對待)’라는 말로 집약되는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점에서 감수되고 해석되어야만 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이 품은 사유의 보석이란 어쩌면 정반대 상황에 놓인 사태들을 “대극”의 원리로 포괄하면서, 이들을 그저 대립하는 것만이 아닌 상호 보완하는 것이라고 사유했던 지점에서 최고 순도의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요만한 경박성”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덧씌워진 속물성이나 천박성을 껴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나의 가족」)를 예감하면서 “긍지”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상반된 “대극”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잠재적 포석을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에는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예감하는 사유의 밀알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내적 “성장”을 성취하려는 시인의 웅대한 미래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2연을 구성하는 “대극”의 짜임새는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정(靜)의 심상과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동(動)의 표현이 상반된 지력선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양자의 이미지 계열을 한층 더 풍성하면서도 복합적인 일상의 다면성을 담을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간다. 양자는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상반된 이미지 지력선을 각각 계승한다. 따라서 그저 단순한 ‘정(靜)/동(動)’의 “대극” 현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도리어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요약되는 역동적 상호 침투의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나아가 중층적 “대극”의 무늬들을 2연 마디마디의 모서리로 틔워 올리면서 그야말로 풍요로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주요 동인으로 기능한다. 2연의 “다소곳한 분위기”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심상들 역시,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구절들을 각각 잇따르는 것이기에, ‘정(靜)/동(動)’의 단순한 “대극” 현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표현되는 상호 침투의 역동적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그야말로 다면적인 “대극”의 무늬들을 아로새긴다. 달리 말해,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라는 심상이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고요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느낌을 함축하는 것이라면,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심상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고양된 충만감으로 솟아오르는 역동적 개방성의 이미지와 “대극”을 이루면서 고립된 폐쇄성의 감각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무거운 일기”와 “우울”이라는 형상이 둔중하면서도 정적인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이와 상반되는 “걸어가기 위하여”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라는 구절들은 예민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의 원환 운동을 표현한다. 4연에 나타난 “생활”->“비겁”->“나의 원죄와 회한”의 계열이 함축하는 세속적 “타락”이라는 의미 매듭과 더불어, “뮤즈”->“경멸”->“너의 생리”로 이어지는 형상의 연속선이 이루는 신성한 “지혜”라는 의미 계열 역시, 앞서 살핀 연과 같은 “대극”의 구도에서 발원한다. “생활”의 이미지 계열이 발산하는 ‘세속-현실-일상’이라는 하나의 “극”과 더불어, “뮤즈”라는 형상의 계열체로 수렴되는 ‘신성-이상-예술’이라는 또 다른 “극”이 함께 이루는 “힘”과 “긴장”의 미학이 생생한 느낌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뮤즈”의 “대극”을 형상화하면서, 김수영은 나날을 살아가는 “온몸”에 “타락”과 “지혜”를 동시에 포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나날의 “생활” 속에서는 “뮤즈”로 표상되는 시의 예술혼이 끝끝내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와 “대극”을 이루는 “뮤즈” 속에서는 “생활”과의 공분모를 형상화하려 했던, 시인의 실존적 “싸움”을 주도 모티프로 삼는다. 달리 말해, 시인의 몸과 마음에서 수시로 엇갈리는 무수한 “대극” 운동이 「바뀌어진 지평선」을 구성하는 전체 이미지의 주도소(主導素)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5연과 6연에서도 이와 같은 “대극”의 이미지들은 수미일관한 연속선으로 구축되지만, 좀 더 본원적인 차원으로 진화한다. 곧 상호 모순에 가까운 ‘극단적 아이러니’의 어법과 구조를 새롭게 펼쳐놓는다. 특히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5연), “뮤즈여/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6연) 같은 대목들은 표면적인 통사 구조만을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의 적확한 해석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에 내포된 그 복잡다단한 의미론적 계기와 극단적 아이러니 구조에 관한 섬세한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7연의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를 비롯하여, 8연에서 등장하는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같은 구절들 역시 상호 “대극”의 이미지 계열을 구성한다. 전자(前者)가 바로 앞에 놓인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에서 이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면, “타락한”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또한 “기자”의 직무상의 윤리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해가는 세속의 풍습과 인심을 “정시”하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이라는 시어와는 결합할 수 없는 상반된 의미 지향성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7연에서 도드라진 모양새로 등장하는 “타락한”은 기자”의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발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상태이자, “이 어지러운 세상”이 강제하는 온갖 “탈”, 곧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다. 이처럼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앞뒤로 연속된 시구들은 서로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어긋나는 모양새를 띤다. 이들은 “뮤즈”와 “생활”, 곧 ‘신성과 세속’, ‘이상과 현실’ ‘예술과 일상’ 등등의 상반 항들이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구도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시인의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의 사유를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이 품은 그 형상의 진의(眞義)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가치 전도의 의미를 거느린 이 형상은, “뮤즈”와 “생활”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오히려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상호 전환의 융합 관계에 놓여있다는 이면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중(中)’의 시간적 궤적을 표상하는 형상인 동시에 ‘역동적 균형’의 운동 및 이행 과정을 지속하는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암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8연의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 역시, “바뀌어진 지평선”으로 빗대어진 ‘신성’과 ‘세속’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상호 전환 과정 및 ‘역동적 균형’의 상호 이행 운동을 역설 어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 바로 앞에 놓인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와 더불어, 그 뒤를 잇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는 이미지 매듭을 오랜 시간 동안 숙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을 곰곰이 되살피면,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은 비단 “타락한”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풍자를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 구절은 언뜻 “가벼워서”, “배반”, “간악” 같은 시어들로 이어지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꼴 짓는 이미지의 핵심 매듭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앞뒤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정반대 의미 계열을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서만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이 “생활”에 있을뿐더러 “경박성”이란 그것의 필수 요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표면”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날아갈” 수 있는 “정신”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은폐된 측면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이라는 적확한 은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저 이미지들은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 “물”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 “위를 날아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단히 유지할 수 있는 실천의 벡터를 암시적 문법으로 개진한다. 이 실천의 원리를 ‘시중’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 철학자가 제시한 ‘인간의 모든 “중中”은 “시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時”라는 것은 객관적・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라는 언급은, 이 맥락 전체를 좀 더 명확한 철학적 범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4 이와 같은 ‘시중(時中)’의 사유 맥락은 8연 마지막 대목을 이루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같은 형상들이나, 9연의 “너의 육체는/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1연의 “뮤즈여/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같은 심상들로 변형되면서 점층적 확산의 의미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이 “뮤즈”에게 “표면에 살아라”라고 말하면서,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시중’의 윤리학에서 기원한다. “표면”은 “생활”의 의미 계열로 수렴되며,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뮤즈”의 이상적 예술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자기 신념을 은은한 뉘앙스로 드러내는 역설 어법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9연과 11연의 이미지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의 범주에서 감수되는 것이 합당하다. “뮤즈”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육체”의 차원에서 호명하는 이미지 매듭(9연)이나, “시인”과 “시”를 “대극”의 차원으로 설정하면서 “뮤즈”와 “시”를 의미론적 연속체의 범주로 설정하는 구절(11연)은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생활”과 “뮤즈”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계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이 구절들은 “생활”과 “뮤즈”를 끊임없는 상호 전환 및 상호 이행이라는 융합・횡단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김수영 특유의 ‘중(中)’의 사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는 또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라는 실천 원리와 가치 지향성을 내포한다. 9연과 11연이 연속적인 의미 계열을 이루면서 개진하려는 바는, 각각의 상황과 국면에 따라 “생활”과 “뮤즈”가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관계이자 최적의 방향성, 곧 매 순간 ‘시중(時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궁극적 전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과 “뮤즈”가 12연에서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양자의 상호 이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달라지는 ‘시중(時中)’의 위상과 내용을 신중하게 사유하고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해, 시인은 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최적의 방향을 모색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는 실천의 ‘내재적 과정’,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나날의 실존적 태도로 견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라는 구절로 표상되는 세계의 모든 영역이 “일자(一字)”를 이루는 “지평선의 대열”을 구축할 수 있는 궁극적 화합의 미래 비전을 상상하고 선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수영이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무리 대목에서 “뮤즈”에게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12연), “앞장을 서지 마라”(13연),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13연)라고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점을 이룬다. 시인은 “생활”과 “뮤즈”의 “대극”이 함께 이루어가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이행 과정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로 소묘함으로써, ‘세속/신성’, 현실/이상’, ‘예술/일상’이라는 대립 구도의 고정성을 부단히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동시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권유하려 했던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라는 대목은 “서정시인”으로 비유된 당대의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모두 “모더니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혁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전언을 간곡한 명령 어법으로 권고하는 내용을 품는다. 이렇듯 “지평선의 대열”이 그야말로 “일자(一字)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매리지/하우스펠 에어리어” 같은 어휘들로 표상되는 서구 기계산업문명의 선진성과 그 문화적 세련성을 무작정 동경하고 추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으리라. 나아가 이와 같은 서구의 문화적 특질을 “뮤즈” 곧 “시”의 이상적 본질이자 예술혼의 정수로 추구하거나 숭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대 서구의 문화는 우리의 “생활”과 엄청난 격차로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진 지평선」에서 시인이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라는 사회・역사적 상황과 이에 대한 신중한 고민 및 극복의 비전을 여타의 “서정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권고하려 했던 맥락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이 권고에 깃든 속도의 담론과 비전이란 우리 사회 전체의 “모더니티” 수준과 밀도에 대한 시인의 근본적인 염려와 신중한 고민의 깊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것은 『중용』 제2장의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과 그대로 맞닿는다, 『중용』의 이 구절에 따르면, 군자의 ‘시중(時中)’은 소인의 ‘무기탄(無忌憚)’과 상반된 방향과 내용을 지니는 ‘기탄(忌憚)’, 곧 ‘거리낌’을 심사숙고하는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낌이란 신중함’이며, ‘거리낌은 인간에게 “거리”와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기에 실수의 가능성을 줄인다’(김용옥, 『인간의 맛』)라는 깊은 안목의 풀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거리낌은 겸손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강함’일뿐더러, ‘시중(時中)’의 근거이자 그 실천적 이행의 원천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지막 연에서 극단적 역설을 표현하는 반어법을 동반하면서, 우리 “모더니티”에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울”과 “경박”을 반추하도록 강제한다. 마지막 13연에서 “앞장을 서지 마라” “낮추어라” 같은 말들로 표현된 제한과 금지의 명령어들을 “뮤즈”에게 덧씌울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은 김수영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1950-60년대 한국 시단에서 “모더니티”의 첨단을 맹종(盲從)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각별한 어조와 리듬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여타의 시인들이나 예술가에게 권고하고 공유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3연은 두 매듭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뮤즈여/앞장을 서지 마라/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낮추어라”라는 부분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마지막 대목으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는 “뮤즈”에게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 풍조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님을 권고한다. 또한 우리가 나가야 할 최적의 선택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기를 간곡하게 요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고민과 성찰의 자리가 바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 펼쳐지는 구체적 실천의 무대일 것이다. 이는 또한 후자(後者)의 지극한 역설로 이루어진 반어법을 낳는 토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의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맨 마지막 무늬들은 김수영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를 비유적 차원에서 집약하는 구절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 없이는 충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 구절과의 통사론적 맥락에서 보면 지극한 역설을 내포한 아이러니의 수사학일 터이지만,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은 “우울”과 “경박”이라는 시어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우리 “모더니티”의 낙후된 수준과 후진적 형성 과정을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그것과 ‘사랑하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그 복잡다단한 속사정을 비교적 명징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모더니티의 문제」에 나타난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김수영의 “이상한 역설”이란 현대 한국인에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을 “우울”과 “경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말하는 “긍지”란 우리 모두의 “우울”과 “경박”을 껴안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뿐더러. 이른바 ‘중용’의 미덕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김수영에게 “긍지”란 ‘시중’의 윤리학에 깃든 ‘실천적 원근법’과 ‘역동적 균형’의 부단한 “이행”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에서 발원하는 “우울”과 “경박”을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 터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열어가려는 수미일관한 실천의 자리, ‘시중(時中)’의 충실한 이행 과정을 통해서만 체화될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아랫자리에서 인용되는 작은 무늬들이 넌지시 말해주듯. 오오 환희(歡喜)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구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退溪)든 정다산(丁茶山)이든 수염난 영감이든 복덕방(福德房) 사기꾼도 도적놈지주(地主)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 자칭(自稱) 예술파시인(藝術派詩人)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能辯)을 욕해도-이것이 환희(歡喜)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人生)도 인생(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 - 「미역국」 부분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학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 - - 「모더니티의 문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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