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월간 악스트 2024년 11-12월호(제57호)
픽션과 현실
1. 가짜 딜레마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까? 지난여름 소설가 정지돈을 둘러싼 논란이 제기된 이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을 찾는 것이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최초 폭로부터 정지돈의 2차 입장문이 나오기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내 나름의 입장과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는 이 혼란스러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번 사안을 바라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간 사회적으로 합의되었던 규범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상이 벌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미학적 규범과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규범 사이의 충돌. 모든 문학 작품에는 작가뿐 아니라 타인의 현실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는 창작의 기본 원리와 타인의 삶을 동의 없이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기준 사이의 대립. 특히 이번 사례처럼 고통과 피해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당사자가 등장하고, 그것이 자신의 실제 삶과 연동되어 있다고 증언할 경우 사안은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워진다.
문제는 특정한 규범을 선택 지지하게 될 경우 자연스럽게 반대 의견을 부정하게 되고, 양자가 마치 양립 불가능한 입장처럼 인식된다는 점이다. 창작의 자유라는 미학적 규범을 절대적 준칙으로 삼아버리면 현실에서 주장하는 고통의 목소리가 비가시화될 우려가 발생한다. 반면 현실에서 통용되는 도덕적 규범을 무조건적으로 적용하게 된다면, 예술 작품의 근본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자유가 붕괴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창작상의 허구적 변형과 관련된 규범적 기준들을 고안하려 노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에 대한 분명한 준칙을 세부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논란의 초기 시점에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은 두 규범의 대립이 야기할 수 있는 회색지대의 복잡성과 불투명성을 인정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외면받는다면, 특히 각자의 정의를 내세우며 논쟁이 속도전으로 비화된다면, 우리가 목도해왔듯 담론장은 둘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강요하고, 반대 입장을 제압해야만 내 의견의 정당성이 확인되는 극심한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결국 '문학 작품은 무한한 자유를 행사할 권리가 있다', '현실의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기는 문학 작품은 사라져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원론들, 겉으로는 명료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 텅빈 명제들만 남게 될 뿐이다.
나는 두 원론적 목소리를 중재하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단일한 '규범' 같은 것을 상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과 원칙 같은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책임한 상대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창작의 자유와 재현의 윤리 사이의 대립', '작가의 권리와 독자의 권리 사이의 충돌'이라는 이항 대립적 국면이 모종의 착시에 기반하고 있으며, 지금과 같은 인정 투쟁과 비생산적 갈등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고 사실이다.
요컨대 우리의 과제는 창작의 자유와 독자의 권리 사이의 충돌이라는 이분법적 딜레마의 허상을 넘어서는 일이다. 표면상 둘은 모순적이며 현재는 공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둘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토대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가의 권한과 수용자의 권리', '창작의 자유와 재현의 윤리'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는 이 토대가 밝혀지지 않는다.
따라서 문제의 틀을 바꿔야 한다. 문학 작품(예술 작품)에 대한 규범적 기준을 정립하는 것에서 문학이 문학으로서 지각될 수 있는 인식적 원리를 해명하는 것,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실존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보편적 토대와 조건을 밝히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것은 문학을 다시 현실과 유리된 시공간에 가두는 일일까, 나는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문학 작품이라는 가상적 대상이 실제 현실과 연관을 맺을 수 있는 이유는, 문학의 근본적 토대를 현실의 인간 역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잠정적으로 '픽션적인 것' (The Fictional)이라고 부를 예정이다. 픽션적인 것은 문학(예술)과 현실을 구분하는 원리라기보다 문학과 현실을 매개하고, 양자가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드는 보편적 가교에 가깝다. 그러나 이 말이 문학과 현실이 동일한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 역시 문학이 아니다. 이를 혼동할 때 우리는 문학과 현실 중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가와 같은 잘못된 물음 앞에 언제든지 내몰릴 수 있다.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난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 시점에, 이 글이 우선적으로 시도해보고자 하는 일은 문학적 허구와 실제 현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인식적 모델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번 사안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입장과 관점, 그리고 규범적 주장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도록 만드는 밑바탕에는, 예술가에 의해 가공된 허구적 창작물과 그것에 상응한다고 여겨지는 실제 현실 사이의 중첩(Overlap) 및 교차(Intersect) 가능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굳이 중첩과 교차라는 낯선 용어를 제시하는 이유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논할 때 익숙하게 사용되었던 모방·지시·재현·표현 등의 개념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문학 작품과 현실 사이의 동일성 및 유사성을 전제하고, 양자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반영·변형의 정도와 그 적절성을 따져 묻는 문제로 논의를 좁힌다. 어떤 경우든 현실이라고 불리는 대상이 선재하고, 문학 작품은 그것에 대한 2차적 변형의 결과라는 대전제가 작동하는 셈이다. 나는 이런 접근법이 이번 사태를 파악하는 데 그리 생산적이지 않으며,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지각 경험 전반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 두 패러다임 - 객관주의적 반영론과 주관주의적 표현론
일반적으로 우리는 문학 작품을 작가의 의도에 의해 가공된 가상의 세계로, 현실을 무수히 많은 사실들로 축적된 실재의 세계로 엄격히 구분한다. 물리적 층위에서 이러한 구분은 분명 타당하다. 문학은 특정 저자에 의해 인공적으로 창작된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현실은 우리가 감각·지각·경험할 수 있는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를 가리킨다. 문학 작품으로 구현된 세계와 실제 세계가 혼동되지 않는 이유는 '허구'라는 지표를 매개로 양자가 명확히 식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감나게, 살아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소설 속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 인물이 물리적 현실에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문학의 현실과 우리가 근거하고 있는 실제 현실이 일치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문학 이론의 역사는 이처럼 자명해 보이는 문학의 본질적 허구성, 혹은 가상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속성을 해명하고 그것과 현실의 관계를 모색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했다. 수많은 이론적 탐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두 가지 모델 또는 패러다임으로 단순하게 범주화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범주화를 제안하는 이유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 앞에 놓인 가짜 딜레마의 발생 원인을 파악하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극단적 폐해들을 기술하기 위해서이다.
(1) 객관주의적 반영론(Objective Reflectionism)
문학과 현실이 허구를 매개로 연결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가장 오래된 가설적 대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사성이다. 꾸며낸 이야기로서의 문학은 비록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유사성 덕분에 현실을 향한 지시적 성격을 갖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방(Mimesis)에 관한 플라톤의 사유는 가상의 문학 작품이 현실에 대해 갖는 지시적 성격을 문제 삼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문학의 모방은 어디까지나 현실(나아가 이데아)에 대한 불완전한 모방일 수밖에 없다. 이때 허구성은 문학 작품과 현실 사이의 간극·괴리·격차를 가시화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뜻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허구이기에 늘 세계의 진실에 미달하며, 문학과 예술은 현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허구는 위험하다. 허구는 늘 실제 현실에 대한 왜곡과 변형을 수반하는 가운데, 수용자의 감정을 선동하고 이성을 마비시킴으로써 실제 현실을 오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자신이 구상한 이상적 국가로부터 과감히 시인을 추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론은 플라톤에게 폄하되었던 허구의 위상을 복원하는 것, 그리하여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이론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문학이 모방의 산물이며, 실재하지 않는 가상들을 제작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가 실제 현실에서의 삶보다 더욱 '보편적'이고 '철학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역사가는 물리적으로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고, 시인은 일어나지 않는 가상의 사건을 구상한다. 그러나 시인이 만든 허구의 세계는 현실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하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종의 '가능 세계'일 수 있다. 무수히 많은 우연적 계기와 우발적 사건으로 가득하기에 역사적 현실에서는 도덕·윤리·정의라는 가치가 충분히 실현되지 않는다. 반면 개연성과 필연성의 원리에 의해 구축되는 문학은 이러한 가치들이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의 시공간으로 거듭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방의 결과(문학적 허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을 어떤 진실에 대한 반영이어야 한다는 제약 조건과 규제의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진짜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문학은 여전히 현실의 그림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림자를 통해 현실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인간과 세계에 관한 더욱 진실한 인식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편의상 두 고전적 사례를 가져왔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초된 허구 이론은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며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거듭났다. 이를테면 사실주의, 자연주의, 리얼리즘, 마르크스적 리얼리즘 등의 다양한 현대적 사조들은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인식하는 데 있어 어떤 공통의 패러다임에 속한다고 범주화될 수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따르면 세계는 우리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자 현실에 해당하고, 문학은 그에 대한 정교한 모방·변형·인용으로 빚어진 허구적 결과물로서의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원본으로서의 현실과 이차적 복제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명료한 이분법, 자연스럽게 문학의 발생학적 원천, 그리고 문학의 허구성을 정당화하는 토대와 근거는 문학 바깥의 현실에서 탐색되며, 현실이라는 객관적 대상과 문학적 허구 사이의 지시적 관계가 중요한 평가 척도로 작용한다. 요컨대 관건은 문학에 반영되는 현실이 얼마나 정확히 반영되는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진실되게 재현되는지 여부이다. 허구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은 허구성 그 자체가 아니라, 허구에 함축되어 있는 현실의 진실성이어야 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구 바깥의 현실이 객관적 대상처럼 존재하고 문학적 허구를 그것을 되비추는 거울로 간주하는 시각, 현실을 재현되어야 할 객관적 세계로, 그리고 문학을 그것을 지시하는 허구적 가상으로 구분하는 패러다임을 객관주의적 반영론이라고 불러보자.
(2) 주관주의적 표현론(Subjective Expressionism)
문학과 예술의 역사는 이러한 객관주의적 반영론이라는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형태의 이견들을 제출하며 전개되어왔다. 만약 문학과 예술의 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외부의 현실에서 발견해야만 한다면 모든 작품은 유사성과 동일성의 원리에 지배되어버리며, 결국 문학과 예술은 현실의 복제에 불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이 현실과 세계로부터 해방되고 독자적인 자율성의 영역을 구축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칸트의 예술론일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의 아름다움은 모방의 결과가 아니라, 천재적 영감의 산물이다. 예술가는 무질서하기만 한 경험적 현실에 어떤 보편적 형식과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현실과는 구분되는 미적인 세계를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 지칭될 수 있는 이러한 전환을 기점으로 문학과 예술의 정당성이 외부의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창작의 주체, 나아가 예술 작품 그 자체라는 주관적 영역에서 탐색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칸트가 예술과 현실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을 의도했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공존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칸트가 시도한 전화로 인해 예술적 허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들이 촉발되고, '예술-현실'의 관계에 관한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태동했다는 사실이다.
아브람스(M. H. Abrams)의 고전적인 선언처럼, 예술은 외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램프가 되어야 한다. '예술의 자율성', '예술가의 독립성',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의 진정성' 등 흔히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대변한다고 알려진 오래된 명제들은, 객관주의적 반영론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확보된 일종의 이념적 전리품들이다. 이로 인해 예술가의 사회적·제도적 지위의 급격한 상승이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제 예술가들은 더 이상 현실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자신에게 부여된 창조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주관적 존재로 표현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러한 태도를 이념화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에 따르면 예술가의 임무는 현실이나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오래된 거짓말의 기술을 되살리는 것이다."1)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보다 삶이 예술을 훨씬 더 많이 모방하는 게 사실"2)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술 지상주의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러한 '예술-현실'론은 현대의 다양한 형태의 미학 이론의 토대로 작용해왔다. 심리주의, 표현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속하는 작품과 미학 이론의 계열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외부의 현실로부터 진실의 정당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찰스 테일러의 개념을 빌리자면) 일종의 반토대주의(Anti-Foundationalism)적 주장이다. 예술의 본질은 창작자, 또는 그 정신이 외화된 작품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예술 내부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허구적 표현만이 진정한 주관적 진실이라는 이념이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예술적 허구를 사회적 규범이 침투할 수 없는, 철저히 자율적인 내적 영역으로 구획하려는 패러다임을 잠정적으로 주관주의적 표현론이라고 불러보자.
3. 한계들 - 윤리의 미학화와 미학의 윤리화
앞에서 내가 간략하게 제시한 구분법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기나긴 예술사의 복잡하고도 다층적인 계열 전부를 개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두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예술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관계 속에서 '허구적인 것'에 위상을 부여하는 다양한 입장들을 보다 심플하게 범주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에 내포된 인식론적 함정이 무엇인지를 가시화하는 데, 나아가 이와 관련하여 파생될 수 있는 여러 폐해들을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두 패러다임은 문학적 허구와 현실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파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일한 전제 하나를 공유하고 있다. 두 패러다임은 문학적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는 가운데, 현실을 문학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 세계로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차이는 이러한 명료한 이항 대립적 원리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규범적 정당성을 어디에 부여하느냐에 따라 발생할 뿐이다. 허구성이라는 속성을 척도로 현실(객관주의적 외부)과 문학(주관주의적 내부)을 나누는 구분법은 직관적 상식에 부합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특히 이번과 유사한 사례들처럼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경우, 그리하여 현실의 규범과 미학의 규약이 충돌한다고 오인되는 경우, 둘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와 같은 그릇된 물음에 내몰리고, 그에 따라 많은 부정적인 효과가 초래될 수 있다.
가령 객관주의적 반영론에 의거하게 된다면 현실 사회에서 준용되는 여러 기준들, 이를테면 도덕·윤리·법을 바탕으로 허구를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허구를 객관적 현실에 대한 반영으로 규정해버림으로써 허구적 반영에 있어서의 대상 및 정도와 관련된 규범이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극단화 될 때 나타나는 것은 (미학의 윤리화가 아니라) 윤리의 미학화이다. 윤리의 미학화를 통해 실제로 선하고 정의로운 허구적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실제 현실이 그러하듯, 도덕과 정의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데 있어서 상이한 입장들이 공존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들이 유발하는 갈등과 적대는 문학과 예술을 정치적 투쟁의 무대로 전환시킨다. 윤리의 미학화가 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의 군림이 아니라, 윤리들 사이의 인정 투쟁으로 점철된 극심한 내전 상태이다.
반면 주관주의적 표현론이 극단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외부 현실과의 단절을 당연시하고, 허구 자체의 무제한적인 자율성과 독립성을 용인하는 흐름이 전면화되는 순간 도덕·정의·정치·과학 등 역사적으로 인류가 힘겹게 합의해왔던 가치·규범·지식들은 예술적 허구의 무한한 자유 앞에서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허구를 판별하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허구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극단화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윤리의 미학화와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미학의 윤리화이다. 이를 통해 예술을 현실로부터 완벽히 고립시킬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미학의 윤리화는 예술적 허구의 현실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현실에 대한 예술의 역설적 침범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의 윤리화는 예술을 자율적인 공간에 가두는 대신 예술과 현실, 미학과 윤리 사이의 빗장을 해제한다. 미학이 공동체의 도덕적·윤리적·사실적 규범들을 파괴하고 현실을 점령하는 결과를 막지 못하며, 때로는 그런 상황을 독려하고 정당화하기도 한다. 벤야민이 사례로 들었던 파시즘의 미학(정치의 미학화)이 그와 무관하지 않으며, 오늘날 문제시되었던 예술가들의 수많은 (예술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 행각들이 그와 관련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탈진실'(Post-Truth)이라는 동시대적 국면들이야말로, 예술적 허구가 현실과 일치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사태의 세속화(Secularization)된 버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관건은 둘 중 어떤 것으로도 현재 우리가 당면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술의 입장에서 현실을 잠식해버리는 극단적 상황(미학의 윤리화)이 발생할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허구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인식론적 상대주의 또는 무정부 상태이다. 반면 현실의 입장에서 예술을 장악해버리고 허구적인 것에 내포된 자유의 계기를 제거해버리면, 결국 맞이하게 되는 것은 현실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이념적 전제 국가들 사이의 전쟁, 즉 예술의 종말이다. 이 사실이 간과될 때 우리는 또다시 '예술 작품(예술가)은 현실로부터 자유롭다', '문학은 현실을 억압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작품은 사라져야 한다', '예술을 삶보다 우선시할 수 없다', '문학보다 현실이 더 중요하다' 등과 같은 동의하기 어려운 원론들 사이에서 무의미하게 방황하게 된다.
4. 중첩과 교차
이와 같은 비생산적인 내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학과 현실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를 재인식할 수 있는 다른 프레임이 제시되어야 하며, 특히 양자를 구별 짓는 요소로 지목되는 '허구'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 왜냐하면 허구는 문학과 현실을 분리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론적 요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첩과 교차의 방식으로) 양자의 만남과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론적 조건으로 재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글에서 '픽션적인 것'이라고 부르게 될 이것은 문학(예술)과 현실(세계)이 공유하는 어떤 근본 토대로서, 객관주의적 반영론으로도 주관주의적 표현론으로도 온전히 인지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강조될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허구는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허구로서의 이야기는 만들어진·상상된·꾸며낸 서사로서 우리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구분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학적 허구라는 가상적 세계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다고 느끼고, 대단히 유사하기도 하며,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훌륭한 문학 작품을 읽은 경우, 텍스트가 보여주는 허구적 인물과 허구적 삶이 물리적 현실의 그것보다 더 '진실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이 감각을 토대로 현실에 대한 이해를 재조정하기도 한다. 물론 늘 긍정적인 효과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문학 작품이 전개하는 세계관과 대면하여 불쾌감을 느낄 수 있고, 나와 유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물들이 부당하게 다뤄진다고 여겨져 상처 입을 수도 있다. 때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누군가에게 나쁜 평가를 받고 비난받을 때, 마치 나 자신의 일부가 모욕당한 것 같은 기분을 체험하기도 한다.
문학 작품이라는 가상 세계가 실제 현실에 미치는 이러한 영향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간이 단지 물리적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Sinn)의 장들 속에서 모종의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미가 없다면, '현실' 또는 '세계'라는 말은 무수히 많은 물리적 사실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죽은 기호에 불과할 뿐이다. 의미는 문학 작품이라는 가상 세계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를 이어주는 '실재론적' 교두보이다. 의미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의미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숨겨진 선험적 진리 같은 것이 아니다. 의미는 그것을 상상하고, 감각하고, 추구하고, 보존하려는 인간의 적극적 역량에 의해 부여되고 재구성되는, 보이지 않는 가치이다. 의미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의미는 아니다. 인간이 아직 상상하고, 구성하지 못한 의미가 우리의 의미장 바깥에서 영원히 잠재적인 형태로 비가시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허구와 그 바깥의 물리적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의미를 매개로 어떤 교집합이 형성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들로 구성된 장(Field) 위에서 직간접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때 상호작용이 단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양방향적이며 지속적으로, 때로는 무한히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상식적인 이야기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미의 사태는 전혀 새로운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터에서, 문학 작품을 읽는 서재 등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지각 경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동안의 문학 이론은 이처럼 당연하고 사소해 보이는 실재적 현상에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이라는 이유로) 주목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까지 우리가 목도했던 극심한 대립도,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설명하는 기존의 이론적 패러다임들도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의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대상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떠올려보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마들렌'과 마들렌을 통해서 출현하는 '의미'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마들렌의 '맛'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감각한 프루스트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추억·상상·이미지화하는 과정을 통해 적극적으로 마들렌의 의미를 출현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마들렌의 의미를 엄밀한 뜻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의미에 대응되는 외부의 대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들렌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그것을 망상과 착각의 산물이라고 폄훼하지는 않는다. 프루스트에게는 마들렌의 '존재'보다 그것을 통해 출현한 의미의 현전성과 진실됨이 더욱 중요하게 지각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마들렌이 '존재한다'고 규정하고, 마들렌이 촉발한 의미가 '실재한다'고 구분 지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짚을 수 있다. 방금 나는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관련한 구체적인 배경 지식이나 맥락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실제 프루스트가 아닌) 주인공이 맛보는 그 '마들렌'임을 지각했을 것이고, 문학사적으로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특정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처럼 '마들렌'을 함께 지각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이유는 '마들렌'이 현실에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의미의 장 속에서 '프루스트의 마들렌'으로 지칭될 수 있을 특정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떠올리고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프루스트의 마들렌은 허구적인 가상 세계에서 제시된 일종의 기호에 불과한 것 아닐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떠올린 마들렌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떠올린 마들렌은 완벽히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마들렌을 상상하고 이미지화할 때 그 재료가 되었을 현실에서의 지각 경험이 상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들렌의 실재는 그것을 떠올린 사람들의 이미지 상만큼 복수적일 수밖에 없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사건·배경·대상·장면들은 그것에 대응되는 물리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다. 허구적인 대상을 실재한다고 규정하는 이러한 주장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거나 이상한 궤변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라고 하는 시공간도 이처럼 '존재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신실재론을 이끌고 있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방대하면서도 논쟁적인 철학적·인식론·존재론·윤리학을 소개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도 아니고 이 글이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의미 실재론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문화적 교착 상태를 해결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특히 최근 한국어로도 번역된 『허구의 철학』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폄훼했던 '허구적인 것'이 실제 현실을 지각하는 데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나아가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보다 상식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 같다.
5. 허구적인 것의 실재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이 지닌 주요 문제의식을 표현해줄 수 있는 간략한 명제는 이것이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허구는 실재한다.' 이러한 명제를 포스트모더니즘적 구성주의나 인식론적 회의주의로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가브리엘의 철학적 작업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무수히 많은 허구들로 가득하지만, 그러한 허구들 덕분에 보편적인 층위에서의 의미가 출현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메시지에 접근해보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계'나 그와 유사한 계열의 단어들, 이를테면 현실·사회·삶 등의 기호를 사용할 때 어떤 일이 수행적으로 일어날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세계'라는 기호를 발화할 때 그것에 대응되는 대상이 명징하게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계'라는 기호가 가리킬 수 있는 총체적인 세계상은 있을 수 없으며, 늘 그 기호를 사용하는 주체에 의한 의미론적 선택과 배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가령 물리적인 장소로서의 '서울'을 떠올릴 때를 생각해보자. 서울이라는 기호의 경우에도 내가 마음속에서 표상하는 서울과 다른 사람이 표상하는 서울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서울이라는 기호를 사용할 때 그것은 행정구역으로서의 서울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 속에서 축적된 서울에 대한 기억과 생각, 이미지들이 종합적으로 재구성된 결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모종의 선택과 배제, 그리고 편집과 상상이라는 프로세스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서울에 대한 특정한 경험적 국면들이 재료로 활용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지시·지각·감각할 때, 반드시 인간의 허구적 역량이 작동해야 함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허구란 단순히 비실존하는 어떤 가상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허구란 우리가 우리 삶의 장면들 안에 놓인 대상들과 관련 맺는 사이사이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사건들이다. 우리는 의식적 삶의 매 순간에 우리를 장면 안에 놓는다.3)
사람들마다 떠올리는 서울의 상이 다른 이유는 서울을 떠올릴 때 동원되는 현실적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그와 같은 적극적 의미 부여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허구적 상상의 양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서울은 존재하지만, 의미의 층위에서 서울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허구라는 정신적 사건의 발생 때문에 서울 그 자체를 허구적인 것으로 단언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허구가 개입한다고 해서, 서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섣불리 메트릭스적 환상이나 환영으로 간주해버리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의 말을 인용하며, 가브리엘은 허구적 환영에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환상을 실재와 분리된 세계로, 자신의 비실재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세계로 간주하는 것은 환상에 대한 매우 궁핍한 견해다. 실재가 변경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환상이 있기 때문이다. 실재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환상을 통해 형성된다. 우리의 환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와 세계 사이의 접촉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4)
각자의 서울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울에 관해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서울'이라는 기호 속에 서울은 존재하지 않지만, 각자의 의미장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서울이라는 공통의 의미가 실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한 의미의 장들이 서로 중첩·교차될 수 있는 허구적 영역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의미론적 토대임을 말해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처럼 상상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의 의미장들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에 분명한 실재론적 권위와 믿음을 부여하고 그로부터 보편적인 규범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허구적 실재이다. 국가, 공동체, 도덕, 윤리, 정의, 법 등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 사례들이다. 여기서 가브리엘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허구는 실재한다고 주장한 진의를 찾을 수 있다. 허구적인 것은 인간이 의미를 발견하고, 구성하고, 부여하려는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며, 우리는 허구적 상상을 토대로 세계를 파악하고, 인지하고, 감각하면서 의미의 실재를 출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허구란 우리에게 우리 삶의 장면으로서 감각적 직관에 단박에 나타나는 놈의 틀을 벗어난 사정에 대한 묘사다. 따라서 허구는 텍스트 유형의 유적 특징도 아니고 예술 작품의 정의에만 특유하게 등장하는 개념도 아니다. 허구는 법률 안에도 있고 자연 과학, 신학, 철학, 또 우리의 지극히 일상적인 몽상 안에도 있다. 거의 모든 진술과 모든 사실 보고는 허구적 성분을 지녔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여기 있지 않은, 참인 진술의 모든 대상이 허구적이거나 꾸며낸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제안은 문학적 허구성 범주를 토대로 삼은 과도한 일반화가 아니라 거꾸로 문학적 허구성을 정신적 생물의 자기 이해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무언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론의 첫걸음이다.5)
그의 말처럼 허구는 문학이나 예술에만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고자 한다면 모든 곳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는 지각적·상상적 역량을 뜻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허구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의미를 지닌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자기 규정적 욕망이 있는 정신적 존재이다. 둘째, 그러나 나는,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현실은 총체적으로 완벽하게 파악될 수 없는 대단히 불투명한 시공간이다. 인간은 그런 불투명한 시공간 속에서 불투명하기만 한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규정하기 위해 애쓰는 정신적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인간의 자유가 활성화되는 장소이다.
허구들의 범위를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허구들은 우리의 정신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표현이며, 그 삶의 역사적이고 가변적인 자기 규정을 최종적으로 한눈에 굽어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구들의 발생에 관여하는, 역사화할 수 없는 형식적 불변항은 인간의 자화상 그리기 능력으로서의 정신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 혹은 무엇인지에 관한 견해에 비추어 삶을 꾸려 간다.6)
우리가 흔히 '자아'라고 부르는 어떤 것은 이러한 허구적 산물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우리는 날마다 자서전을 서사적으로, 따라서 허구적으로 써나간다."7) 인간은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나날이 인식·감각·상상하며 내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다양한 허구적 실천을 전개한다. 물론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허구적 상상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으면, 인간이 실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삶의 역동성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아라는 허구적 구성물은 단지 나에게서만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허구적 상상 속에서도 공유되는 것이다. 흔히 타인의 인식·시선·평가에 의해 구축되는 사회적 자아가 그런 경우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자아의 실재성을 확인받기 위해 타인의 지각 속에서 형성되는 나의 이미지를 궁금해하고 신경 쓴다. 때로는 내가 그리는 자아상과 타인의 정신 속에서 구현되는 자아상 사이의 간극과 차이로 인해 고통받기도 하고, 나 자신이 오인·오해받고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나의 이미지는 진실이 아닌 허구이며, 사람들에게 영원히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나 자신의 진실을 강력히 주장한다고 해서, 타인의 정신 속에서 상상되는 나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규제할 수 있는 근거나 권한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가 일치하는 경우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의 실재성은 나에 의해 독단적으로 점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나와 얽힌) 의미장들의 중첩과 교차 속에서 다원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 대한 타인들의 사회적 상상을 무제한적으로 용인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는 내가 물리적으로 행하지 않은 사실들, 즉 순전한 거짓이라고 불리는 잘못된 정보에 의해 나의 자아가 구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개인의 삶을 위협하는·위험한·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짓들, 명백히 수정되고 정정되어야 할 사실들이다. 자아를 허구적 실재로 정립한다고 해서, 거짓 정보들이 그 자아를 구성하도록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한편 이러한 물리적 거짓과 다른 층위에서의 거짓들, 사회적으로 만연해 있지만 규범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허구적 실재들이 있다. 이를테면 인종 차별·여성 혐오·퀴어 혐오·장애인 혐오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에는 인지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보편적으로 실재하게 된 이러한 폭력 앞에 인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받아들일 수 있는 실재와 그렇지 않은 실재를 구별해야 할 명백한 도덕적·정치적 책무가 있으며, 인간 사회는 그것을 명료하게 구분하기 위한 다양한 지적·제도적·문화적 질서와 장치들을 마련해왔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이라고 부른다.
6. 해석학적 실재-문학의 자율성
인간이 삶과 현실에 의미를 부여할 때 본원적 역량으로서의 허구적인 것(정신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한다는 사실은 문학과 현실 사이의 접촉과 만남이 발생하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규범적 가치의 문제이기에 앞서, 지각 경험과 관련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일종의 실존적 조건 같은 것이다. 문학에서 구현되는 가상 세계가 어떠한 사실들에 대한 허구적 편집·변용·조작·배열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이나 우리의 일상적 삶 역시 사실에 기반한(이것이 중요하다) 기억·체험·경험 등의 상상적 조합을 바탕으로 시뮬레이션된 의미화의 결과이다. 하지만 문학과 현실을 구성하는 허구적 원리의 동일성을 양자의 존재론적 동일성으로 오해하게 되면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학(예술)적 허구와 현실(세계)을 구성하는 허구적인 것은 같은 범주로 인식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의 불가피한 중첩의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 중첩을 매개로 양자를 구별하는 원리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해야 할 것은 광의의 허구와 그러한 허구들로 구성된 문학(예술) 작품의 허구를 분리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여러 차이들이 있지만, 이 글의 논의와 관련하여 가브리엘은 대단히 간명한 원리 하나를 제시한다. 가브리엘이 비존재론적 격리주의라고 명명한 그것을, 내 나름대로 변주해보면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 허구는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이 꾸며 낸 놀이라 함은 대상이 본질적으로 해서 가능하다는 , 바뀌 말해 대상이 누군가가 그 대상을 가지고 미적 경험을 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곧 보겠지만, 이 생각은 꾸며 낸 대상들이 아예 실존하지 않는 대상들의 부분 집합이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허구적 대상들도 그렇고, 거기에 상응하는 꾸며 낸 대상들도 그렇고, 이것들은 제각각 자신의 의미장 안에서 실존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꾸며 낸 대상들은 우리의 의미장과 충분히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적 카오스는 발생하지 않는다.8)
이것은 허구적 상상의 역량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가령 인간이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것을 생각할 때 상상은 그 대상의 의미를 구성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대상의 물리적 현존 자체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가령 어떤 공동체에서 내가 대단히 부당한 방식으로 평가되고, 오해로 가득한 이미지로 유통된다면 나는 심대한 실존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심지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인지되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고립되고 배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 대한 타인의 인지·상상이 부당하다고 해서, 전혀 상상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존재' 자체가 무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나 예술과 같이 가공된 허구의 세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세계와의 존재론적 대응점을 갖지 않는 문학적 허구의 세계는 철저히, 사람들이 생성하는 의미장에서만 출현하고 실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언대로 그의 모든 작품을 불태웠다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요제프 K., 그레고르 잠자 등은 더 이상 실재할 수 없는 대상들이 된다. 비록 그들을 지시하는 기호가 적힌 문헌들이 과거에 물리적으로 잠깐 존재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중요한 결론 중 하나는 특정 작가에 의해 성립된 가공의 세계와 그 속에서 배치되어 있는 인물들의 실재성이 온전히 수용자의 상상에 의존적이라는 점이다.
문학적 허구는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 구현되는 세계의 실재성이 독자가 구성하는 의미장의 영역에서만 출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문학 작품이 허구적으로 의도된 가상적 현실을 독자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독자는 눈앞에 구현된 허구적 세계를 단순히 수용하고 관람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문학 텍스트를 지각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독자는 자신의 다양한 인간관계, 사회생활, 지적·예술적 경험을 통해 구성된 의미장을 활용하고, 상상적 허구의 역량을 동원하여 능동적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로서의 세계를 스스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일컬어 미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다. 미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라는 어떤 가상적 세계와 직면하면서, 독자가 활성화하는 의미장의 상상적 구축을 가리키는 것이다. 내가 문학과 현실이 지시·재현·모방·표현의 관계로 엮여 있는 것이 아니라 중첩과 교차의 형태로 공존한다고 말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독자의 능동적이고도 자유로운 역할과 관련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역량의 자유로운 사용의 과정을 일컬어 해석이라고 부른다.
해석은 미적 가상이라고 지칭되는 예술 작품들을 실재하게 만드는 의미론적 장의 건립을 뜻한다. "예술 작품을 해석한다는 건 그것을 지각하거나 그것에 관해 생각한다는 뜻이다."9) 따라서 독자가 없다면, 의미론적 장을 구성하는 능동적 주체들의 해석적 실천이 부재하게 된다면 예술 작품이 구현하는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새삼 강조해야 할 것은 독자의 복수성이 곧 의미장의 복수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즉, 중첩과 교차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독자들이 구축한 무수히 많은 의미장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한 의미장들이 다원적으로 공존하는 현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다는 것, 바로 거기에 문학과 예술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문학적 허구에 대한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해석의 무제한성과 혼동할 필요는 없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사례로 들어보자. 독자들의 『햄릿』 읽기가 계속되는 한 햄릿이라는 허구적 인물은 각각의 의미장들의 수만큼 복수적으로 실재할 수 있다. 이러한 실재의 복수성은 그 자체로 문학 연구에 있어서 흥미로운 분석 대상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상상되었던 햄릿의 이미지와 현재 상상되는 햄릿의 이미지의 차이를 분별하고, 그 차이로부터 현실 세계를 가로지르는 사회적·역사적 변화의 실재를 추정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이 재구축되는 만큼 실재의 역사에서 햄릿은 지속적으로 변화된 형상으로 출현한다. 물론 햄릿의 실재는 무한하지만, 무제약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햄릿을 실재하게 만드는 조건과 제약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문헌학적 조건들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햄릿』을 읽고 햄릿이 덴마크의 공주라고 인지할 경우, 그와 같은 주장은 단박에 거짓으로 기각될 것이다. 문학적 허구에 대한 해석 역시 (물리적 현실에서의 존재론적 사실에 상응하는) 문헌학적 사실에 제약받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해석학적 조건이다. 가령 누군가가 『햄릿』을 읽고 햄릿이 실은 오필리어를 내심 증오하고 있었고,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섬약한 그녀를 자살에 이르게 하기 위해 폴로니어스를 살해했으며, 『햄릿』의 진정한 메시지는 오필리어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햄릿의 복수담이라고 주장한다고 가정해보자. 파격적이고 신선해 보이겠지만, 이러한 해석이 광범위한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햄릿의 숨은 의도를 그런 방식으로 상상하기에는 주어진 해석학적 정보가 많지 않으며, 그것을 받아들일 경우 '오필리어의 죽음'이라는 에피소드 외에 너무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야기들의 실재가 외면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엉뚱한 상상을 가로막을 근본적인 규범 같은 것은 없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독자는 텍스트에 대해 자유롭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문학의 세계에서 특정한 상상의 방식을 강요할 수 있는 규범은 없지만, 의미 있는 상상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과 원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모든 해석은 텍스트에 참여하는 다른 독자들의 해석과 경합을 벌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의미장들이 중첩되고 교차되는 해석적 투쟁의 장에서, 어떤 해석은 인정받고 또 어떤 해석은 인정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해석은 독자가 텍스트에 대해 벌이는 허구적 상상이지만, 이러한 해석 역시 해석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처럼 독자의 해석을 전면화하는 시각 속에서 허구적 실재의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면 작가의 역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앞선 예를 조금 더 이어나가보자. 만약 누군가가 '오필리어의 죽음'이라는 장면을 두고 그것이 햄릿의 남성적 내면과 고뇌, 그리고 그의 영웅주의적 비극성을 전면화하기 위해 벌이는 희생양적 제의라고 해석하고, 여성 인물이 다뤄지는 전형적인 방식의 이데올로기성을 비판했다 가정해보자. 셰익스피어가 살아서 그러한 해석을 접하면 대단히 억울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며 오필리어라는 인물을 통해 구현하려는 진실은 다른 데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저자의 의도가 다른 데 있었다고 해서, 『햄릿』에 대한 비판적 해석보다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독자와 동일한 입장에서 자신이 창작한 작품의 의미론적 장에 동참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분명한 허구적 현실을 제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독자가 문학적 허구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도록 문헌학적 재료와 환경을 디자인하는 존재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에 대한 저자의 의도가 전혀 실재하지 않고,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자의 의도는 우리가 작품을 경험하고 해석할 때, 가정되고 상상되는 하나의 실재론적 지표 같은 것이다. 저자는 작품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자 가운데 하나이다. 저자가 작품의 허구적 실재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허구적 실재가 특정한 방향으로 출현할 수 있도록 가장 오랜 시간 고민한 장본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 역시 해석적 실재라는 점에서 독자의 해석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며, 그에 따라 그 누구도 작품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고 전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해석학적 실재의 의미장 위에서는 저자의 의도 역시 다른 독자들의 해석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합을 벌인다.
나는 이처럼 문학과 예술에 대한 무한한 해석 가능성이야말로 문학과 예술의 자율성을 증언하는 가장 분명하고도 명확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자율성은 문학이 현실보다 우월하고 더 가치 있다는 식의 규범을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문학의 이름과 더불어 창작자가 그 어떤 도덕적·윤리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일컫지도 않는다. 우리는 주관주의적 표현론으로부터 유래된 낡은 자율성의 신화를 세속화하고, 더욱 급진화시켜야 한다. 문학의 자율성은 창작자의 권리나 문학 작품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무한한 참여 가능성, 그에 따라 끝없이 펼쳐질 수 있는 의미장들의 잠재적 무한성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술적 허구를 지속적으로 생성시킬 수 있는, 무한히 많은 현실의 허구들이 보편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자율성은 문학을 문학으로 지각될 수 있게 하는 실재론적 조건과 토대를 나타낼 뿐, 그 어떤 도덕적·윤리적·정치적 규범도 함축하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적으로 구축해온 규범적 정의들은, 최소한 내용적 차원에서는 아무런 직접적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건은 문학(예술)적 허구와 현실 사이의 중첩·교차를 가능하게 하는 이 자율성의 영역을 제한하거나 특정한 규범적 가치를 바탕으로 섣불리 봉쇄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술 작품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우리는 예술 작품에 대한 경험 속에서 상상된 모종의 메시지, 작품의 이념 등에 관해 토론할 수 있고, 그 한계를 비판할 수 있다. 동시대에 통용되는 사회적·문화적 상식과 규범을 파괴한다고 판단될 때, 그것의 적절성 여부에 관해 따져 물을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창작자의 인격과 세계관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적 실천 역시 독자가 해당 작품에 대한 허구적 실재의 의미장을 출현시킴으로써 실천되는, 일종의 또 다른 해석 행위로 인식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그러한 해석적 실천 속에서 문학과 예술 작품을 규범적으로 비판할 수 있지만, 문학 작품과 실제 현실이 교차할 수 있게 하는 원리(픽션적인 것의 무한성) 자체에 어떤 규범적 제재를 가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이 실재할 수 있도록 하는 기초적 토대와 기반의 완전한 붕괴를 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일종의 필요조건에 가까울 뿐,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은 독자의 자유가 실재적으로 행사될 때이다. 그러나 독자의 자유는 무조건적인 권한의 남용이 아니기에, 오히려 더욱 무거운 의무와 책임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작품이 구현할 수 있는 실재의 세계와 그 운명이 독자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의 극단적 주장처럼, 논란이 되는 특정 작품들을 공적 세계에서 배제시킬 수 있는 독점적 권리 같은 것이 독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을 벌일 경우, 독자는 자신의 실재론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읽기의 자유를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창작자의 자유와 독자의 자유는 서로 이율배반적인 대립항이 아니며, 독자가 단순히 창작자의 대척점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독자는 하나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늘 어떤 특정한 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매순간 '출현'하고 '실재'하는 무한한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정반대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만약 어떤 작품에 접근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작품만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나타날 수 있는 독자의 무한한 잠재성을 '실재로' 잃어버린다.
7. 폐허 너머의 세계
끝으로, 조심스럽게나마 이번에 제기된 사안에 대한 의견을 짧게나마 밝혀둔다. 지난 계절 흔히 '공론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공간에서 거칠게 오갔던 수많은 주장·의견·비판·비난·증오·혐오의 목소리를 지켜보면서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모종의 지적·윤리적·문화적 폐허 상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했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합리적이고 건강한 공론장을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실과 의견이 무책임하게 뒤섞이고 거짓 정보와 풍문, 그리고 사안과 무관한 사생활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이 무분별하게 혼재되는 가운데, 무언가를 제거해야만 나의 옳음이 증명될 수 있다는 식의 태도가 공론장을 장악해나가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한없이 큰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더 크게 절망한 것은, 사안의 복잡성과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단호하고 빠른 조치와 처벌이 감행되어야 한다는 태도가 힘을 얻고, 과거 사례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 힘이 일부 실현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일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도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는 일들을 바라보며,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가 힘겹게 쌓아올렸던 지적·윤리적·문화적 토대가 동일한 이름의 명분으로 무너져 내려가는 과정을 무력하게 목격해야만 했다. 텍스트의 진실은 하나일 수 없으며, 다양한 진실의 얼굴들이 공존하고 실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픽션적인 것의 본질이자 의무라는 보편적 규범이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 시대에 진입했다 느끼기도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개인적으로 나는 김현지 씨가 정지돈 작가의 일부 작품을 읽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그로부터 어떤 당혹스러움과 충격을 넘어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텍스트 경험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권리와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아울러 그와 같은 실재론적 상상이 발생하는 데 있어 창작자로서 정지돈에게 귀책사유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미 입장문에서 밝히고 스스로의 부주의함에 사과했듯, 텍스트에 존재하는 어떤 요소들이 김현지 씨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상상적 경험을 촉발하게 하는 데 개연성 있는 계기를 제공한 측면을 온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저자의 의도가 '실재로' 그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현지 씨가 경험하고 상상한 허구적 진실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야 한다는 '규범적' 원칙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가령 『브레이브 뉴 휴먼』의 독자로서 나는 '권정현지=김현지'라는 주장의 실재성이 성립할 수 있는 구체적 개연성이 현재로서는 좀처럼 상상이 안 되고, 해당 텍스트가 권정현지를 불행한 인물로 모욕하고 있다는 해석적 실재에 동의하기 어렵다.10) 김현지 씨의 주장처럼 공개할 수 없는 어떤 사적인 과거와 기억, 또는 인연을 알게 되면 상황이 바뀔 수 있을까.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여하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브레이브 뉴 휴먼』을 읽고 그것을 유추·상상·추정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그것이 『브레이브 뉴 휴먼』을 읽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나의 의미장에 관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그 구체적 사실을 알고도 『브레이브 뉴 휴먼』에 대한 나의 해석적 경험에 변화가 없다고 해서, (당연한 말이지만) 김현지 씨가 재구성한 실재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규범적으로 강요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가 느꼈을 것으로 짐작되는 혼란·충격·놀라움·고통·고립감 등을 하나의 의미장으로 존중하는 것과 그것을 텍스트에 대한 유일한 독점적 실재라고 주장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나는 그것이 정지돈이 김현지 씨에 대한 개인적 사과와 별개로 구체적인 요구 조건을 들어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권정현지=김현지'라고 확정하고, 미학적 실패를 자인할 수 있는 권한은 저자 자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부여될 수 없는 권한이다. 그것은 정지돈이 말하는 진실만이 믿을 수 있는 실재여서가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의 실재가 작품을 둘러싼 의미상 전체를 전유하고 장악하도록 방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김현지 씨의 실재적 고통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과 그것이 텍스트 전체를 독점할 수 없도록 막는 일은 별개의 사안이며, 충분히 양립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양립 가능성이 무너질 때, 단지 정지돈의 텍스트만 사라지는 것에서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텍스트의 실재에 대한 권한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만연하게 된다면, 문학과 예술을 실재할 수 있게 하는 근간 토대를 파괴할 수 있는 길이 언제든,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문학이나 예술보다 우리의 실제 현실이 중요하고, 삶보다 우선시되는 문학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그 의견을 존중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은 정확히 정반대의 형식으로도 적용되어야 한다. 문학이 삶보다 우선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 역시 문학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다. 우열을 가리는 문제로는 둘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은 내가 '픽션적인 것'이라고 부른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사해 보이지만,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삶이 아니고, 삶 또한 문학이 아니다. 양자를 규제할 수 있는 규범적 원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문학과 예술과 관련하여 우리가 목도했던 다양한 범죄에 가까운 폐해들이 양자의 우위 관계를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의 경계를 혼동하고, 심지어는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했던 지난날의 (앞에서 미학의 윤리화라고 설명했던) 잘못된 인식들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누군가는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며, 문학이나 예술 따위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문학과 현실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현실적 정의에 관해 문학이 말해줄 수 있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고, 이 모든 논의가 무의미하고 무용하며, 현학적이라 느껴질 수도 있다. 문학과 예술의 근본 토대와 본질에 관해 고민하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 일들이 우리의 실제 현실에 관해 그 어떤 규범적 당위와 실용적 지침들을 제시해주지 못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문학과 현실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픽션적인 것', '허구적인 것'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역량, 즉 자유에 대한 감각이다. 이것이 붕괴되면, 문학과 삶 모두가 무너져버린다. 문학과 예술은 바로 그것을 보존하고 기록하는 실재의 의미장이자,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유의 역량이 고도의 방식으로 연습되고 실천되는 제도적 장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학과 예술에서 실험되었던 자유가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허용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문학과 현실이 공유하는 영역에서 감각되는 자유가 실재하기에, 우리는 현실을 조금은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현실적 실재에 안주하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권력적 통제와 검열, 억압적 폭력과 부조리한 차별에 항거하고, 존재하는 현실 너머의 새로운 실재를 상상하고 희망하며 현실을 재구성해나간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이 실재하기에 현실이 조금씩 달라지고, 생각·사유·사상·이념·정체성의 자유를 지속적으로 넓혀가며 어딘가를 향해 실재로 나아가게 된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이 진보의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앞서 나는 지난 계절 동안 구성되었던 공론장의 양태를 '폐허'라고 묘사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과거에 내가 목격했던 현실적 국면들에 지나치게 영향받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과거 유사한 사례를 경험할 때 우리가 행했던 잘못된 판단과 조치가 동일하게 반복된다고 느꼈고, 그 어떤 합리적 대화도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자행했던 수많은 오류들이 빠르게 망각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윤리적 혐의의 실재와 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구체적 검토 없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들을 외면하면서 사태를 무마하려는 습성이 규칙과 질서로 내면화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붕괴 현상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 이르러서야, 내가 상황을 오인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 하게 된다. 다시 한번 돌이켜보면, 미세하지만 이번 사태가 과거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적지 않고, 이 일을 관음증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독자들 또한 존재했으며, 비록 침묵의 형식으로나마 우리 앞에 놓인 불투명한 지대를 힘겹게 응시하려는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차이들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잠재적 차이들을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 출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손쉽게 결론 내렸던 일 모두를 재검토하고, 토론과 대화의 과정을 통해 그간 외면했던 수많은 오류들, 잘못된 판단들을 정정해나가야 한다. 과거의 실수와 한계를 탓하거나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무언가를 함께 모색하고 상상해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시대의 문학 작품과 작가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제도적 장치들을 찾아나가야 한다. 문단이라는 공고한 성채를 지키는 일을 반복하자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작가의 비위를 비호하는 과거의 악습과, 오늘날의 현실적 국면에서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보호하는 일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둘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동시대 매체와 플랫폼들 사이에서 픽션적인 것의 토대는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한 현실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사실과 거짓이 무분별하게 뒤섞이는 동시대적 현실을 무력하게 승인하고, 진실의 이름으로 픽션적인 것의 무한한 진실들을 지배해버리는 장면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문학 작품이 개시할 수 있는 진실들의 무한한 잠재성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현실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키는 일이고, 결국은 독자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경험, 그리고 용기가 요구되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하는 동료들, 독자들이 실재할 것이라 믿는다.
여기서 나는 앞서 내가 한 말을 정정해야 할 것이다. 현실은 아직 폐허가 아니다. 현실은 폐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폐허로 믿어버리는 데에서 멈출 때, 비로소 현실은 폐허로 '실재'하게 된다. 폐허 너머의, 다른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
- 1) 『오스카 와일드: 거짓의 쇠락』, 박명숙 옮김, 은행나무, 2015, 71쪽.
- 2) 위의 책 53쪽.
- 3) 『허구의 철학』, 마르쿠스 가브리엘, 전대호 옮김, 열린책들, 2024, 25~26쪽.
- 4) 위의 책, 26쪽.
- 5) 위의 책, 107쪽.
- 6) 위의 책, 32쪽.
- 7) 위의 책, 28쪽.
- 8) 위의 책, 60쪽.
- 9) 『예술의 힘』, 마르쿠스 가브리엘, 김남시 옮김, 이비, 2022, 54쪽.
- 10)작품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개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실재적 해석 경험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이번 공론장에서(그리고 유사한 사례와 관련한 과거의 공론장에서) 나타났던 일부 외설적 특징은,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작품과 작가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들이 실재로 만연해 있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 글의 목적상 나 역시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해석적 실천을 전개하지 않았기에, 나의 주장 역시 불완전한 상태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다만, 『야간 경비원의 일기』와 『브레이브 뉴 휴먼』에 대한 해석적 실재에 있어서 강보원, 전승민 평론가의 해석적 경험과 중첩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밝혀 둔다. 이에 대해서는 강보원의 블로그에 게재된 세 편의 글([https://m.blog.naver.com/lians)과](https://www.google.com/search?q=https://m.blog.naver.com/lians)과) 전승민,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 - 정지돈론」, 『문학들』 2024년 가을호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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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소설가는 계엄 소식을 접하고 “지금 쓰고 있는 단편을 실을 지면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日記」,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봄호, 192쪽)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가까스로 발표된 그의 소설은 어딘가 다르게 읽힌다. 작가가 담아내려 한 문제의식을 소설 속 인물들이 직접 발화하는 방식은 충분히 미학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모든 출판을 통제하겠다는 상식 밖의 포고령이 발표되기도 하는 현시점에서는 불가피한 문학적 대응으로 느껴진다. ‘영인’에게 ‘인범’은 늘 “무언가를 향해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이다. 영인이 쇼핑 앱으로 세제를 주문해주면 인범은 “사람 죽이는 기업”을 이용하지 말라고 만류하고, 전쟁에 관해 말하면 팔만 톤의 폭탄을 퍼부어 군인이 아닌 아이까지 분별없이 죽이는 일을 어떻게 학살이 아닌 전쟁이라고 부르느냐고 다그친다. 인범은 얼핏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분노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하여 마음이 아픈 상태를 뜻하는 ‘분통’은 ‘괴로워하다’라는 의미로도 활용되는 ‘憤(분)’과 아플 ‘통(痛)’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어 자체가 통증을 지칭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인범은 자기가 겪지도 않은 일에 원통해하는, 타자의 고통에 취약한 사람이기도 하다. 인범은 자신에게도 “사람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일들”을 말하면 “시답잖은 일”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자신을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 취급한다고, 그러한 반응이 자기를 “죽이고 있”다고 말한다. 주어진 일상을 살아내는 것도 벅찬 영인은 “타인의 삶에 일어난 일”에 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이 자신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인범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한다. 영인은 고통을 호소하는 인범에게 당사자도 아닌 “너는 그 일들로 죽을 수 없어”라고 가혹하게 말해주고 싶어한다. 영인이 인범을 그처럼 못 견뎌 했던 이유는 인범이 줄곧 너무나 극심해서 낯설기까지 한 악(惡)을 힐난하는 일에 몰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범이 영인의 회사에서 판매중인 음료가 “점령과 학살로 뒤덮인 땅에서 자란” 과일로 만든 것임을 고발하는 SNS 게시물을 올렸을 때, 영인은 그것이 자기를 향한 일종의 보복이라고 느낀다. 그가 어렴풋한 이해에 이르는 때는 인범이 하려 했던 일이 악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나 사악한 사람들에 대한 단죄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다. 영인은 오랜만에 조우한 인범에게 요즘 “평범하게 있는” 악(惡)에 대해서, “네가 말한 악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 같은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인범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와 사뭇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인범은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개펄에서 호미로 칠게를 캔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때 한 친구가 새끼 낙지를 발견하여 칠게를 모아둔 양동이에 떨구자, 혼란한 게들이 순식간에 낙지를 찢어발겼다고.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인범은 몸을 떨었지만,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칠게를 캐고 그것을 사이좋게 튀겨 먹었다. 인범은 그들에게 악의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자신은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음”, 그 무감한 상태에 매몰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인범이 하려던 것은 선한 자신과 악한 타인을 구분 짓고 악인에게 분개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과는 무관해 보이는 고통에 무감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마음을 다쳐왔던 것이다. 우리는 인범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영인을 따라, 별다른 악의 없이도 벌어지는 세계의 폭력에 민감해지도록 마음을 벼린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고통에 감응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더 지겹게 분통을 터뜨려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그러지 않을 방법은 더더욱 알지 못한 채로. 열렬히 아파할 때만 비로소 ‘문제없는 하루’로 보이는 매끈한 일상에 잠깐의 휴지(休止)를 만들 수 있다. 쉬이 지나치는 폭력과 통증을 살피게 하는, 아주 작은 돌부리 같은 쉼표를.
매체론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월터 옹Walter J. Ong은 자신의 글 「The Writer's Audience Is Always a Fiction」에서, 낭독자에 의해 구술되는 소설을 듣고 향유하던 이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서술된 소설을 묵독하게 된 독자는 지속적으로 허구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독자가 인물의 시선을 따라, 작품을 읽을 때 머무는 실제 공간과 무관한 소설의 시공간에 자기를 위치시키며, 작가가 맡긴 역할을 스스로 연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다지 어려운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 소설 읽기란 실상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복합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렇다면 쓰기-읽기의 과정이 보편화된 현시대에서의 소설은 독자가 인물에게 온전히 이입하여 그의 몸으로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지금의 문학장에서 소설에 기대하는 바는 변화하는 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의미화하고 다양한 인문학적 질문을 창출하는 것일 테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소설이 갖춰야 할 근본적인 미덕은 내가 아닌 타자의 삶에 몰입하게 하여 이해의 폭을 넓힐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좋은 소설은 독자 한 명 한 명에게로 다가가서 그들을 각자가 감응의 기쁨으로 충만히 개화(開花)한 상태인 '에파누이스망(épanouissement)'으로 이끈다. 이주란의 「겨울 정원」은 그 역할을 너끈히 해낸다. 촘촘한 의미화의 그물로부터 매끈히 달아나는 이 소설은 따라 읽는 이들이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중심인물인 '혜숙'으로 머물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진정으로 허구적인 독자가 되게 한다. 화자인 혜숙은 육십 세 여성이자 칠 년 차 청소 노동자이며 소설가인 '미래'의 엄마다. 중졸인 그는 교양 있고 자기 취향이 확고한 이들을 선망하지만, 자기 일을 성실히 해내는 데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때때로 주눅 들기도 하나 결코 비참해지지는 않는 혜숙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풍부한 지식과 균열을 포착하는 섬세함을 지닌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꿋꿋이 살아간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혜숙의 태도는 단순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욕을 주고받는 사회에서도 따스한 시선을 유지하고 주어진 일상을 정성스레 살아낼 수 있게 하는 든든한 토대이기도 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혜숙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간결한 문체이다. 이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조화를 이룬다. 혜숙이 내뱉을 만한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조합된 문장은 그와 완전히 일치된 채로 사건을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게 돕는다. 청소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가 소설에 등장할 때면 계급성과 고용의 불안정성, 젠더 위계의 문제가 두드러지곤 하는 데 반해, 이주란의 소설은 그러한 문제들이 도식적으로 나뉘지 않는 현실의 다면성을 담담히 그려낸다. 그렇다고 부당한 고용 방식을 낭만화하지는 않는다. 고용 당사자가 재계약 여부를 알 수 없는 "뉴스에 나올 법한" 불합리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계획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와 진짜. 와 세상에"와 같은 외마디 감탄사로 반응할 수밖에 없음을 핍진하게 그린다. 이주란은 다양한 직군과 직함을 지닌 이들이 갈등하는 자극적인 모습을 전시하는 대신, "전부 똑같은 계약직"이기에 서로 도우려고 하는 이들 틈에서 혜숙이 자기 일을 잘해내기 위해 성실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쓰레기장에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버려놓을 때도, 혜숙은 참는다. 어디다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단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매일을 살아내려면 매번 분노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녹록지 않은 삶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독자들은 그녀가 단순하다기보다는 "단순함이라는 개념에 성실"하려고 노력해온 사람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엇이든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라며 복잡성을 강조하는 딸 미래 역시 "자주 충분히 단순하다"는, 그 입체적인 모습까지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는 혜숙을 따라, 우리는 꽃이 지고 애인이었던 '인환'마저 떠난 텅 빈 정원을 쓸쓸히 바라보게 된다. 혜숙만의 만개(滿開)를 바라는 심정으로.
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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