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제60호)
비평의 감정 —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은 어떻게 가능할까
보잘것없는 애정을 숨기려는 그런 과장된 말들은 감안해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충만한 마음이라도 때로는 고작 공허한 비유로나 표현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망이나 관념, 고통의 정도를 결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사람의 말이란 금 간 냄비와도 같아서 별을 감동시키고자 하지만 곰을 춤추게 하는 가락을 내는 데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중에서1)
분열의 감정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장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최근 들어 비평가들 간의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평장을 가리키는 관례적인 표현이 대화의 부족, 논쟁의 결핍, 비판의 실종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근의 변화된 풍경은 이색적이고 주목할 만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데 이 글이 실릴 『자음과모음』의 역할은 분명 작지 않아 보인다. 작년 여름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라는 슬로건을 앞세우며, 잡지의 전반적인 기조를 새롭게 정립한 『자음과모음』이 주력하고 있는 것은 ‘문학에 대한 대화와 성찰의 장치로서의 문예지를 설계’하는 것, 이를 위해 비평들의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모색하는 일인 것 같다. 당시 발표된 권두언의 일부이다.
비평은 본래 대화가 아니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글쓰기 양식이기도 하고, 이전부터 문예지라는 장치에 주요한 작동 원리로 기능했던 선례도 있다. 이 지나간 비평 주도 시대의 계간지라는 장치가 계속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비평이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착시가 있고, 때로는 눈총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의 비평은 어쩌면 조금 더 힘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그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이 문학의 권력과 위계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화 그 자체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대화를 통해 읽고 쓰는 이들이 함께하는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과 참여, 그리고 삶의 감각과 문학의 경험에 대한 질문과 인식을 불러오는 것이다.2)
비평의 존재 방식이 근본적으로 대화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대화가 단지 작품과 비평 사이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문학 전반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선언과 다짐에 동의하지 않기란 어렵다. 물론 이러한 편집진의 기획 의도에 대한 의문과 비판, 그리고 얼마간의 반감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제도적 호명에 의해 (이 글이 처하게 될 상황도 유사한데) 강제적으로 대화의 장에 불려 나오게 된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 동료 비평가의 글에 대한 직접적 논평을 수행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글쓰기 행위가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을 위해 소모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과 결부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시간 속에서 문학의 현재를 고민하고, 비평적 의제를 생산하는 장치를 구성하려는 잡지의 새로운 방향과 노력에 나는 지지를 보내고 싶은 쪽에 가깝다.3) 비평이 오늘날 작동하는 문학적 통치 시스템에 온전히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새로운 비평적 정치의 시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비평 간 대화는 권장되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이후 『자음과모음』 기획에 응답하는 많은 글들이 발표되었고, 이러한 추세가 다른 매체들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걸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비평 간의 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대화에 대한 요청이 반드시 제도적 기획의 산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각각의 대화의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비판적 의제는 동시대 한국문학과 비평에 대한 동료 비평가들의 고민의 깊이와 스펙트럼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주제와 현안들이 제기되는 가운데, 열띤 토론과 논쟁 그리고 긴장감도 조성되는 것 같다. 이 글에 요구되는 것 역시 이러한 비판적 분위기에로의 동참일 것이다. 동료 비평가들의 글을 세밀하게 검토하고 그에 대한 나의 입장과 주장을 비판적 논리와 함께 제시하는 것, 그리하여 연속적 대화를 위한 새로운 의제를 생산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그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할 것 같다. 최근의 비평적 대화를 따라가는 내내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비평장과 문학 제도를 둘러싼 여러 비판적 논의와 쟁투 속에서 (비록 구체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지만) 의심, 적대, 원한, 분열의 분위기를 감지하며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직면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도대체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내가 느낀 감정이 최근의 비판적 대화와 논쟁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특정 독자군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한다고 믿지 않는다. 대화의 밀도나 깊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련의 대화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지극히 날카롭고 정확한 것이었으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깨우쳐주는 대목도 적지 않았다. 갈등과 분쟁이 없는 대화의 풍경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대화에 갈등이 없을 수 없고, 특히 서로 다른 입장이 경합을 버리는 담론의 장에서라면 그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이 비판적 대화의 수준이나 정합성에 있지 않다는 사실부터 전제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해명하고 싶은 것은 최근의 메타비평을 읽으면서 내가 겪은 분열, 혹은 그러한 분열이 야기하는 주관적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 이 감정은 개별적인 것이고, 글에서 직접 언급할 수 없는 개인적 체험에 기반한 주관적 반응에 가깝다. 따라서 이 감정은 그 어떤 것도 대변하지도 못하고, 보편성을 결여한 나이브한 반응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동료 비평가들의 글(혹은 그들의 감정)을 읽고 인용하며 글이 전개되겠지만, 이 글은 기본적으로 연속적 대화를 추구하기보다 그저 단편적 독백에 머무를 예정이다. 그래서 이 글은 불가피하게 최근 논란이 되기도 했던 ‘비평의 에세이적 경향’에 합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최소한의 무언가에 대한 (대표하지 않는 차원에서) 부분적 반영뿐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메타비평에 할애했던 비평가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에 강하게 결착되어 있는 비평가로서 내가 통과해야만 했던 위선과 모순, 그리고 그것에 수반되는 모종의 불가해한 무력감 같은 것 말이다.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
우선 분열에 관해 말하기 위해, 언젠가 폴 벤느가 회의주의자로서의 푸코의 초상을 묘사하면서 제시한 ‘어항의 비유’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회의주의자는 이중의 존재다. 사유하는 한 그는 어항 바깥에서 어항 안을 맴도는 금붕어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역시 살아가야 하기에, 그 자신 또한 한 마리 금붕어로 어항 속에서 다음번 선거에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지 결정한다(자기 선택에 대단한 진릿값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회의주의자는 어항 바깥에서 어항을 의심하는 한 명의 관찰자인 동시에 금붕어 가운데 한 마리다. 분열이 있지만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이다.4)
우리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의 한계를 탐구할 때 정신의 주체는 바깥에서 안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비판적 정신이 외부에 있을 때에도, 주체의 진짜 현실은 여전히 어항 안에 있다. 사유에 있어서 이상주의자이지만, 구체적 삶에 있어서 지극한 현실주의자라는 이중성 속에서 회의주의자는 분열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사유의 이상과 현실의 경험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적 사유와 현실적 실천 사이의 간극. 자칫 이러한 간극과 괴리가 야기하는 분열은 누군가에 의해 조롱거리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비판을 통해 바뀌는 게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변화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여전히 살아간다는 사실은, 회의주의자가 모종의 자발적 위선과 모순, 심지어는 유체 이탈 화법을 감수해야 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판적 주체의 실패를 뜻하는 것일까. 폴 벤느는 이러한 분열이 불가피한 것이고, 심지어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이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현실과의 간극을 내포하지 않는 비판적 사유를 기대하는 것이 순진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간극을 수용하면서도, 구체화된 실천의 방법을 모색하고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이어가는 태도에 달려 있다.
비평장이라는 글쓰기 제도를 어항에 비유한다면, 비평가의 실존적 위치는 세 가지로 일별될 수 있을 것이다. 어항 안에 있거나, 어항 밖에 있거나, 아니면 안팎에서 이중적으로 존재하거나. 평소 우리는 어항 안의 금붕어로서 글쓰기를 이어가고, 제도 안에서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다양한 활동들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비평가가 늘 어항 안의 금붕어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수행하는 글쓰기가 중요한지, 정의로운 일인지, 어떤 문제가 없는지, 그것을 강제하는 제도와 시스템은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비평은 종종 어항 바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여러 제도적 한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글쓰기 역시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배태된 것임을 자각했다고 해서, 비평가가 온전히 어항 바깥으로 탈출하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가 실제 비평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다시 어항 속으로 들어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아의 이중화, 즉 분열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내가 답답함을 느꼈다면, 아마도 이러한 분열이 언제부턴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선사하고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히 ‘비극적’일 것까지는 없지만, 비평장의 안팎을 오가는 정체성의 변동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그 분열이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감정, 이를테면 피로, 냉소, 무기력, 답답함, 죄책감, 수치심 등을 체험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말해 어항 바깥의 나와 어항 속의 나를 매개할 수 있는 방법과 원리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느낀다.
여기서 나는 비판에 대한 냉소적 응답의 일환으로 흔히 거론되는 대안 부재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현재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비판적 대화의 분위기, 분명 환영할 만한 변화 속에서도 비평가의 글이 어떻게 소비/소모될 수 있는지, 나아가 그러한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비평가의 실존을 분열시키고 소외시키는 기제가 없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비평과 비평가의 분리
이 분열이 야기되는 다양한 기제와 구조적 배경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좀 더 긴 글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바꿔보고 싶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전혀 거창하지 않고, 오히려 지나치게 소박한 것이다. 그것은 비평의 분열과 (비)자발적 이중화가 야기하는 비판의 감정, 비평가의 위태로운 실존이다.
이러한 제안은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른다. 비판과 감정은 양립할 수 없는 단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판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감정은 일차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판을 구성하는 것은 철저한 논리와 세련된 이론, 그리고 시대를 진단하는 번뜩이는 현실 인식이어야 한다. 반면, 감정은 비판에 있어 우선적으로 제압되어야 할 이질적인 이방인에 다를 바 없다. 비판 주체가 감정적일 때 우리는 그 비판으로부터 논리적 일관성을 기대할 수 없고, 의도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없다. 감정적 비판은 상대방에 대한 원한과 증오, 그리고 비합리적 적대 의식을 보여주는 징표에 불과하다. 즉, 감정은 비판에 있어 일종의 금기어와 다를 바가 없으며, 지금까지 비평의 감정이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은 정당성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비판은 크든 작든 참여하는 주체에게 감정의 흔적을 남긴다. 나의 의견이 부정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도 하고, 때로는 논쟁의 적을 멋지게 쓰러뜨려보겠다는 열정의 근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 주장과 입장이 부당하게 곡해되고 있다고 여길 경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처와 억울함으로 인해 괴로움에 빠질 수도 있다. 대화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 비판에 대한 합당한 응답을 받지 못할 때 상처받고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냉정을 유지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판적 대화의 시간 속에서 감정은 생산되기 마련이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비가시화된 비판 또는 비평의 감정. 내가 비평의 감정이라는 이 애매모호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 직접적 계기를 제공한 글은 이은지의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5)였다. 나는 그의 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과거의 논쟁 속에서 이은지가 비평가로서 겪어야 했던 곤경, 그리고 그에 대한 그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고백이 비평장에 놓여 있는 비평 주체의 구조적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시기를 통과했던 과거의 나를 반추하도록 요구했다.
철저하게 ‘나’라는 화자의 개인적 층위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비평의 오물」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단순히 사적인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어 보인다. 그것은 오늘날 비평장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주체들에게 야기될 수 있는 담론의 힘, 즉 사적인 형태(감정)로 발휘되는 시스템의 강력한 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비평적 주체들에게도 언제든지 가해질 수 있는 폭력이기도 하다.
이은지의 논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의제가 설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비평가를 재생산하는 시스템의 원리와 메커니즘이다.
평론가가 평론가이기 위해서는 문예지라는 한정된 지면에 불러 세워지는 ‘호명’의 절차가 일차적으로 필요하며, 그렇게 호명된 자리에서 발화한 것이 다른 평론가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언급’의 과정이 이차적으로 요구된다. (……) 한정된 자원, 즉 지면을 확보해야 하므로 평론가는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자유가 없을 뿐 아니라 언제나 호명을 기다리는 ‘잠재 주체’로서의 불안을 견뎌야 한다.(77쪽)
이은지가 밝히고 있듯 이러한 지적은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이 아니며, 비평계만의 제도적 특수성을 가리키지도 않을 것이다. 관건은 호명, 언급, 인용이라는 인정의 메커니즘 안에서 비평가가 불안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발적 모색과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비평가의 불안은 자유와 억압이라는 이분법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비식별적 경계를, 비평장이라는 제도 안에서 생산되는 비평 주체의 복잡하고도 분열적 실존을 표상한다.
따라서 이 불안을 제도의 검열과 강제의 메커니즘으로 묘사하는 것은 단순하고 순진한 일이다. 이은지가 비평계가 유지되는 재생산 시스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주니어 시스템’으로 규정하려는 일각의 주장에 비판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주니어 시스템론은 “신진 평론가들을 지나치게 유아화하고 그들이 몇몇 문예지를 통해 온순하게 길러질 것으로 단정”(78~79쪽)한다. 주니어 시스템론은 비평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자유롭지 못한, 어항 속의 금붕어로만 간주한다. 실상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비평가는 자신이 어항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기능과 역할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오히려 정확히 이해한다. 따라서 비평가의 실질적 글쓰기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갓 등단한 평론가로 하여금 갓 등단한 게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처신하도록 만드는 암묵적인 분위기”, 비평가로 하여금 “한 사람의 평론가로 온전히 기능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80쪽)하도록 독려하는 모종의 힘이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강제하지 않지만, 비평 주체는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기대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자유로운 주체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유가 비평가에게는 오히려 불안의 원인이자, 시스템 안에서 더욱 취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은지가 오늘날 문예지들에서 나타나는 “플랫폼”적 성격의 강화가 “평론가들의 원자화를 가속”(79쪽)화시키고 있다고 판단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비평가는 단순히 억압된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자유가 제공되며, 심지어 자유를 행사하기를 권유받는다. 그러나 시스템 안에서 발휘될 수 있는 이 불완전한 자유는 비평가의 글쓰기를, 그리고 비평가가 감내해야 할 실존적 정서를 철저히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킨다.
문제는 이 장에서 주체가 실제로 그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모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플랫폼 내의 어떤 분위기를 거스르고 역행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은지가 제기한 두 번째 문제가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문학3』, 2017)를 발표했을 당시 “페미니즘 리부트와 시기적으로 맞물리며 뭇매를 맞아야 했던”(79쪽) 체험을 상기하며 과거에 벌어졌던 상황을 현시점에서 재검토한다. 당시의 비평계 전반에 조성된 어떤 흐름과 분위기에 반했던 그의 글은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러한 글들을 읽으며 이은지는 자신이 쓴 글과 스스로의 실존 사이에 형성된 과도하고도 부당한 동일시를 경험했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속화됨에 따라, 그의 글이 어떤 담론을 형성하는 매개로 활용됨에 따라, 비평 담론과 자신 사이에서 발생한 근본적 분열을 목도하게 된다.
나의 글을 둘러싼 비판들이 나의 상처를 악화시키는 한편으로 비평의 담론을 어딘가로 서서히 밀고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비평이 평론가를 소외시킨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 물론 그것이 비평장이 활력을 얻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를 뒤집어보면 비평장이 얻는 몫만큼 평론가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줄어든다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격론 뒤에 평론가 개인에게 남는 감정적 앙금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가 문제로 남는다. 자신의 몫을 알뜰하게 삼킨 비평장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주저함과 머뭇거림, 열패감이나 모멸감, 분노와 적의 따위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할 몫으로, 그러나 격론 이후에 생성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선명하게 평론가에게 남는다. 평론가의 감정은 평론가 개인이 처리해야 할 몫으로 남겨둔 채 비평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81-82쪽)
이은지는 자신의 글에 대한 비판들이 “비평의 담론을 어딘가로 서서히 밀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비평과 평론가 사이의 분리를 경험한다. 마르크스의 개념을 빌리자면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고 규정할 수 있을 이러한 사태를 촉발한 주체는 누구일까. 문제의 복잡성은 그것에 대한 명확한 책임 주체를 지시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그 누구도 그러한 결과를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한층 가중될 것이다. 관련하여 우리가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당시의 이러한 흐름이 어떤 단합과 의결에 의해 이루어진 억압과 배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담론적 통치성의 장에서 주체는 검열되거나 탄압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재배치되고 망각된다. 이은지가 과거를 회고하며 특정 비평가나 구체적인 글을 거론하는 대신 추상화된 인격으로서 ‘비평’을, 나아가 ‘비평’과 ‘비평가’ 사이의 분열을 지적하는 이유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비평가’와 분리된 ‘비평’ 혹은 ‘비평’으로부터 분리된 ‘비평가’라는 형상은, 통치의 장에서 비평가가 생존의 주체로 거듭나듯, 비평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권력의 힘 역시 철저하게 원자화된 평론가 개인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은지가 촉구하는 ‘비평가의 감정’이라는 의제는, 이와 같은 비평적 담론의 재생산 속에서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는 비평가의 실존적 지반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고민해왔는지를 되묻게 한다. “나의 지난 상처로부터 나의 실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그의 제언 앞에서, 한때 그의 글을 비판적으로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 이력이 있던 과거의 ‘나’는, 그리고 현재의 ‘비평’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감정의 생산
누군가에게 비평의 감정은 근본적이라기보다는 표면적이고, 보편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상대적인 문제로 수렴될지도 모른다. 감정은 주체마다 다르기에, 그 안에서 어떤 보편적인 무언가를 도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감정의 내용에 있어 동일한 것은 없지만 그 감정이 생산되고, 관리되고, 처리되는 방식에 있어서는 어떤 공통적 기반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의 감정은 비평장을 가로지르는 모종의 힘을 반영하고, 증언하는 분석적 징후로 여겨질 수 있다. 비평가가 비평장 안에서 기능적으로 참여하면서 동시에 배제되는 메커니즘, 때로는 구성적 외부로 배치되는 과정에서 남게 되는 담론의 잔여, 그러나 결코 소거될 수 없는 비평가의 실존적 징표가 감정이다.
최가은의 「비평의 조건-예속과 애착」6)은 이러한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비평가가 처해 있는 담론적 생산 조건을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로 읽힌다. 이 글은 문예지에 메타비평을 쓰면서 활동을 시작한 비평가가 반복적으로 직면하게 된 침묵, 즉 응답 없음이 선사한 감정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실망, 소외, 분노, 열패감, 회의, 수치 등으로 묘사될 수 있을 자기 부정적 감정은, 메타비평에 참여했던 비평 주체들에게서 흔히 발생될 수 있는 감정의 계열들이다. 그러나 최가은의 글이 단지 이러한 감정의 개인적 토로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응답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타비평에 대한 요구와 기회가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된다는 것은, 이러한 부정적 감정의 생산을 대가로 담론장이 무언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비평(장)의 끊임없는 자기 동일적 재구성 과정에서 동화되지 못한 잔여, 그 잔여를 향한 비평(가)의 멜랑콜리한 흔적 같은 것”(314쪽)이다. 다시 말해 “비평이 놓인 현재의 특수한 조건과 맥락을 두루 살피며, ‘비판 의식’이라고 하는 비평의 근본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제 미덕으로 삼는”(316쪽) 메타비평은 비판의 결핍을 대리하거나, 비평의 부재하는 윤리·정치적 역량을 대리 보충하려는 일종의 알리바이 같은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비평의 자기 동일적 재생산의 메커니즘 속에서 정작 그것을 수행하는 (혹은 수행해야만 하는) 주체의 생산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가은이 자신이 느낀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비평의 재생산 기제, 즉 “메타비평 지면의 구조적 형식이 누락하는 지점에 관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316쪽)에 응답함으로써, 동시대 비평가들을 가로지르는 주체화/예속화의 기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스스로의 경험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최가은의 자기 분석과, 이은지가 경험했던 ‘비평과 비평가의 분리’ 현상을 겹쳐 읽을 때, 우리는 동시대 비평 주체들이 통과해야만 하는 분열을 가시화할 수 있을 것이다.
최가은이 직접 밝히고 있듯, 그의 글은 문예지-장치의 분명한 의도 속에서 기획된 대화의 장에서 쓰였다.7) “‘대화’를 강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향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에 사후적으로 응답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목적은, ‘비평의 에세이적 경향’에 대한 최근의 비판이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영역을 보다 전면화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비평하는-나’ 쓰기의 연장”(316쪽)이라는 패러디적 전유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비평 활동을 묘사한다.
근래 나의 비평 활동은, 소영현의 표현대로 하자면 ‘작가-비평가’ 모델의 어떤 귀결인 ‘기획자 비평가’이자 ‘리뷰어’, 나아가 ‘큐레이터’로서의 작업으로 분류될 수 있다. 나는 계간지 지면에 리뷰와 비평을 쓰고 ‘주례사 비평’의 근원이라는 작품 해설에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큐레이터로서 북 클럽을 기획하고 북 토크를 진행하며 작가와 독자를 ‘매개’한다. 더불어 이 모든 활동을 내 개인 SNS를 비롯한 각종 플랫폼을 경유해 전시 및 축적하는데, 이런 나의 활동은 기존의 문학장이라는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제도 비평인 동시에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이라는 다른 “제도이자 장치”를 두루 거치는 비-제도적인 비평이다. 나는 그 흔한 자기 관리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일종의 ‘피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으로 비평 활동에 임하는 중인 것이다. 이는 평균적인 ‘젊은’ 문학평론가들의 초상이기도 할 텐데,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비평(가)은 확실히 권위의 담지자랄 수 없다. (……) 그런데 이 비평 주체의 ‘책임’이 ‘비평하는 나’와 관련해 강조될 때, 내게 이것은 어딘가 과잉된 문제 설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비평 활동을 통해 내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어떤 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 혹은 그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믿음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개인화된 모순들이기 때문이다.(316-317쪽)
인용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기 진술은, 어찌 보면 앞서 토로한 메타비평적 주체의 실존과는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형태의 비/제도적 비평장 속에서 그는 ‘기획자-비평가’로서 비평가에게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기능과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고, 그러한 활동들이 “자기 관리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일종의 ‘피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평균적인 ‘젊은’ 문학평론가들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는 비평적 실천이 비평적 주체성을 온전하게 규정할 수 없는 계기도 그 메타적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어항 안의 금붕어(큐레이션 비평가)는 어항 바깥의 금붕어(메타비평가)이기도 하다. 담론적 자기 인식 속에서 비평 주체는 이중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비평 주체는 어항 안의 금붕어이자 어항 바깥의 금붕어라는 서로 다른 위치를 분주히 오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분열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분열이 단지 비평가를 위선적인 존재로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비평 주체의 새로운 주체성을 활성화하는 생산의 원리라는 데 있다. “비평 활동에서 매 순간 마주하게 되는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분열된 감각이 있는데, 그것으로 구성되는 ‘비평하는-나’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316쪽)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비평의 에세이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 온당하면서도 “과잉된 문제 설정”인 이유는, 그것만으로는 이러한 이중적 분열로 인해 양산되는 모순들, ‘개인화된 모순’이라는 형식으로 원자화된 비평 주체에게 전가되는 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대 비평 주체들이 단지 ‘어항 안의 금붕어’로 억압되고 관리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비판 정신을 바탕으로 온전히 ‘어항 바깥’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평가는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인화된 모순들을 감수하면서,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동시대 비평 주체는 어항 안의 금붕어이면서 동시에 어항 바깥의 금붕어라는 분열의 동시적 종합 속에서 생산되는 중이다. 오늘날의 비평의 감정은 이러한 주체화/예속화의 기제 속에서 생산되는 담론의 부산물이다.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실제 맥락은 그보다 더 복잡해 보인다. 그것은 작품 해석과 배치에 수반되는 ‘제도 비평가로서의 책임’으로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비평하는 나’의 ‘자유’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통한 자유의 감각은 발생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훼손된다. 혹은 훼손됨으로써 발생한다. 이 손쓸 수 없는 간극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비평하는-나’의 긴장과 책임감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불안과 수치심이다. 대다수의 비평가의 입을 통해, 언제나 완결된 글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식의 개인적 수치로 표현되곤 하는 이 ‘취약성’은 그러나 그 자체로 분석의 대상이 될 필요와 가능성이 있다. ‘비평하는 나’의 속출은 이 ‘비평하는 나’라는 ‘인지’에 관여하는 믿음 의심 확실성이라는 삼중의 메커니즘을 세세히 살핌으로써 구체적으로 다르게 배치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된 감각은 보다 근원적인데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318-319쪽)
우리가 흔히 ‘수치심’ 등으로 형언하곤 하는 비참한 기분, 멜랑콜리함, 혹은 내가 일전의 한 메타비평에서 주목하고자 했던 바에 따르면 ‘비평(장) 전반의 불안’으로 나타난다. 비평의 비참함은, 말하자면 예속화된 비평 주체들의 사회적 변용을 표상하는 것이다.(322쪽)
최가은이 “참을 수 없는 불안과 수치심”을 거듭 피력하는 것은 이러한 감정이 비평장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혹은 우리가 영원히 비평적 담론의 생산 기제에 장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아닐 것이다. 나는 그의 주장을 질문의 초점을 이동하자는 제언으로 이해하고 싶다. 왜냐하면 담론의 생산적 경제에서 지속적으로 누락되고, 비가시화되고 있는 비평의 감정이야말로 ‘예속화된 비평 주체들의 사회적 변용을 표상’으로 탐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평하는-나’의 속출이 현재를 설명할 수 있는 유효한 설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부정적 현상으로 비판하거나 혹은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으로 긍정하는 대신, 그 자체로 비평가의 자기 분석의 대상이자 방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최가은이 버틀러의 이론적 시각을 토대로 그 전환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유 역시 그러한 자기 분석적 글쓰기가 발휘할 수 있는 수행적 정치성을 작동시키는 방법, 그것을 위한 자산으로서의 역사적 경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하는-나’뿐만 아니라 이 모든 비/자기 이론적인 글쓰기들을 통해 ‘사회적 삶에 강력하게 노출된 정신적 삶’을 분석할 수 있는 자산이 말이다.”(322쪽)
비판적 대화의 이면
감정에 대한 고찰은 비판적 대화 이면에 관한 일반적 기분 묘사에 불과할까, 확실히 프로페셔널한 담론장에서 감정은 사적이고 주관적인 문제, 자기 스스로가 처리해야 할 지극히 개인적인 기분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담론의 ‘생산’이라는 차원에서는 문제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감정은 비판이 이뤄지는 데 있어서 (비)가시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담론의 경제적 외부 효과externality처럼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나는, 담론의 경제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계속해서 생산되는 비평의 감정(혹은 비평가의 감정)이라는 화두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활발한 이론적 결투와 비평적 논쟁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대 담론장에서 생산되는 비평의 감정은 단순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사적인 형식으로 감지되지만, 그것은 내면의 형식이라는 자생적 출현의 원리로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 비평가 내부를 가로지르고 생산하는 분열, 나아가 비평과 비평가 사이의 분리를 가속화시키는 담론의 힘에 의한 비평가의 소외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판적 대화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폴 벤느가 언급한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이것은 타인의 감정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결론에 불과할까. 분명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비판적 대화의 국면 속에서 비평의 감정을 인식하고 배려epimeleia하는 일은 별도의 방법과 테크닉을 요구하며, 고도의 배움과 훈련의 과정을 동반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비평가에게 냉정을 주문하고 비판 정신을 촉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늘날처럼 비평가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라고 닦달하는 담론적 장치들의 몰아세움(Ge-Stell, 하이데거)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이자 솔직한 심정이다. 각각의 비평가들에 의해 생산되는 비평의 감정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근 들어 조금씩 고조되어가는 비판적 대화의 분위기가 낳을 수 있는 적대, 분열, 증오, 원한, 의심, 조롱의 정치에 의해 ‘나’라는 주체성이 내가 쓴 글, 생각, 주장, 발화의 위치에 부당하게 종속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비평은 저 멀리 만끽하며, 우리를 향해 조소의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 1)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 2021, 272쪽.
- 2) 안서현,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작은 혁신호를 열며」, 『자음과모음』 2023 여름호, 5~6쪽.
- 3)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문제의식 위에서, 내가 편집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문학과사회 하이픈』에서도 작년 가을과 겨울 ‘비평-대화’라는 주제로 연속 기획을 마련했었다.
- 4) 폴 벤느, 『푸코-그의 사유, 그의 인격』, 이상길 옮김, 리시올, 2023, 12쪽.
- 5) 이은지,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 겨울호, 이하 인용 출처는 괄호 안에 표기.
- 6) 최가은, 「비평의 조건-예속과 애착」 『자음과모음』 2023 가을호, 이하 인용 출처는 괄호 안에 표기.
- 7) 이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최가은 선생님은 구체적으로 지난 호에 실렸던 소영현의 글 「비평을 찾아서-'K-'시대의 비평」과 김미정의 글 「비평, 플러스알파-얽힘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관점에 대해」에 대한 응답에 해당하는 비평문을 써주셨으면 합니다."(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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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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