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계간 현대비평 | 2024년 여름호(제19호)

신성과 세속의 길항, 죄/참회, 인유-몽타주-역설 — 육호수 시의 구조화 원리, 모티프, 미학적 방법론

오형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비평전문 계간지 [현대비평] 주간.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 주간. 1994년 『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당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음. 평론집으로 『신체와 문체』(문학과지성사, 2001), 『주름과 기억』(작가, 2004), 『환상과 실재』(문학과지성사, 2012), 『알레고리와 숭고』(문학과지성사, 2021) 등이 있고, 연구서로 『한국 근대시와 시론의 구조적 연구』(태학사, 1999), 『현대시의 지형과 맥락』(작가, 2004), 『현대문학의 구조와 계보』(작가, 2010), 『문학과 수사학』(소명출판, 2011), 『한국 모더니즘 시의 반복과 변주』(소명출판, 2015)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이성의 수사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제3회 젊은 평론가상(2002), 제6회 애지문학상 평론부문(2008), 제21회 편운문학상 평론부문(2011), 제24회 김달진문학상 평론부문(2013), 제32회 팔봉비평문학상(2021)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6년 대산대학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한 육호수는 첫 시집 『나 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아침달, 2018)에서 천사·빛으로 대 변되는 신성과 소년·바다로 대변되는 유년을 접속하면서 그것이 세 속적 현실과 부딪히며 겪는 상실·좌절·상처를 잠과 꿈속에서 발화되 는 내적 고백의 화법으로 형상화함으로써 2010년대 새로운 시 쓰기 의 한 방향을 보여 주었다. 이후 그는 두 번째 시집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문학동네, 2023)를 통해 이러한 경향의 시 쓰기를 지속 하는 동시에 내용과 기법의 양 측면에서 다양한 질적 변화를 시도한 다. 내용적 측면에서는 기도·기다림을 통해 신성·원형에 대한 갈망을 유지하는 방향과 그 대척점에서 회의·절망을 통해 죽음·공백과 대면 하는 방향이 혼재하면서 큰 틀에서 후자 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여 준다. 기법적 측면에서는 기존의 모호하고 은밀한 내적 고백의 화법을 유지하는 한편 이야기를 통한 서사적 진술, 1인칭과 3인칭을 중첩 하는 혼재적 주체, 필연과 우연을 가로지르는 기표의 놀이, 여백과 공 란을 통한 독자의 해석 가능성 제시 등을 보여준다.1)

     육호수의 시에 대한 중요한 선행 비평으로 최선교, 김준현, 박다 솜 등의 평론을 들 수 있다. 최선교는 육호수의 시를 꿈의 아이러니 와 나르시시즘적 속성, ‘사랑’이나 ‘미움’과 같이 대립적인 단어들도 쉽 게 자리를 바꾸는 발화, 형식이 아니라 자세이자 태도로 설정된 ‘꿈’, 전지적 작가 시점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하는 3인칭 인물인 ‘철수’와 ‘영희’,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기인하는 시점의 전환, 명확한 의미 전달보다는 ‘■’에 나열된 상상의 집합체에 가까운 언어 등의 관점으로 해석한다.2) 김준현은 두 번째 시집의 해설에서 육호수 의 시를 시제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세계의 파편들을 연결하여 영속 성을 부여하려는 노력, 완전한 원형의 복원을 위해 부서진 상태를 있 는 그대로 보여주기, 시 안에 타자를 능동적으로 초대하는 방식, 현 실보다 꿈·무의식·천국·죽음의 세계에서 획득 가능한 언어의 육체성, 망가진 꿈의 기억을 관찰하고 훼손된 꿈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하기, 영원·소년·천사의 세계에 대한 단호한 결별의 의사, ‘꿈’을 뒷받침하 는 세계를 유희의 차원으로 변주하는 태도 등의 관점으로 해명한다.3) 한편 박다솜은 두 번째 시집의 서평에서 육호수의 시를 무(無)장소 혹 은 ‘장소-없음’을 바라보며 쓴 시, 시집 전체에서 다양한 양태로 반복되는 도저한 ‘없음’, 공백을 정시(正視)하고 형상화하는 예술의 한 존재 방식, 빈 어항·백지·상자 안의 상자·검은 네모 도형(■)·빈칸에 밑줄을 긋는 취소선 등으로 ‘없음’을 포착하려는 노력 등의 관점으로 분석한 다.4) 최선교는 두 번째 시집의 서평에서 앞에서 언급한 평론의 연장 선에서 육호수의 시를 적절한 재현을 위해 단어들이 자리를 바꾸는 꿈-공간, ‘■’의 빈 공간을 타인에게 선물하는 한 장의 편지, 독자가 채 워야 하는 (좋은 의미의) 성긴 공간들, 꿈-공간과 ‘쓰는 화자’가 공존하 여 ‘시’와 ‘삶’과 ‘꿈’이 구분되지 않고 상호 대체되는 특성 등의 관점으 로 조명한다.5)

     이러한 선행 비평들의 견해는 전체적인 시적 추구와 지향성의 측 면, 세부적인 시적 발화와 형상화 방식의 측면, 독자 수용적 측면 등 에서 육호수 시의 중요한 특성들을 유효 적절히 해명했다고 볼 수 있 다. 필자는 이러한 선행 비평의 관점들이 육호수의 시 세계를 섬세 하게 분석한다고 간주하면서 세 가지 층위에서 이를 보완하는 해석 적 관점이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층위는 선행 비평들이 주로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대상으로 시적 특성을 해명하는데, 육호 수 시에서 두 번째 시집은 첫 시집의 연장선에서 질적 변화를 모색 하고 있으므로 우선 첫 시집의 시들을 중점적으로 해명해야 두 번째 시집의 특성이 전체적 구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 둘째 층 위는 육호수 시 세계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체계들은 일정한 질서 를 가지고 구조화 원리를 형성하면서 특정한 모티프와 미학적 방법론을 파생시키는 복합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복수의 상징체 계들에 대해 비중을 고려하여 우선순위를 가지고 분석 및 해석을 시 도할 때 육호수 시의 중심부에 근접할 수 있다. 셋째 층위는 주로 잠 과 꿈속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육호수 시의 특성상 징후발견적 독해 (symptomatic heuristic reading)를 통해 무의식의 비밀을 포착하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인 해석 방법이 될 수 있다. 시의 표면뿐만 아니라 심층에 숨어 있는 무의식의 은밀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육호수 시의 이미지 들을 감응(affect)이나 파토스(pathos)가 은폐된 징후로 간주하고 그 속 에 내재된 심리적 메커니즘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선행 비평의 성과들을 존중하면서 부분과 전체, 주변과 중심, 표면과 심층 등의 상호 연관적 고찰을 염두에 두고 육호 수의 첫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를 중점적으로 분 석하고자 한다. 여기서 필자는 징후발견적 독해를 통해 육호수 시의 다양한 상징체계들 중에서 큰 비중을 가지는 상징체계를 포착하고 그 체계들의 질서를 이루는 구조화 원리를 파악하며 이것이 파생하 는 중심 모티프와 미학적 방법론을 상관적으로 고찰하는 방식을 채 택하려 한다.

     육호수의 첫 시집에서 서시로 등장하는 다음 작품에는 시 세계의 중심부에 있는 상징체계, 구조화 원리, 모티프, 미학적 방법론 등의 원형질이 배태되어 있다.



문 앞에서 자꾸 죽지 마

밖에 나서지 못하고 불 꺼진 식탁에 앉아
콩 조림을 세었다
콩알만큼의 어둠을 방 안에 심었다

더 나빠져야지 내일은
조금도 비켜 가지 말아야지

입술에 돋은 보풀을 뜯다가
빨래 세제를 삼키는 남자와
변기통에 새를 토하는 감옥에 대하여

창밖은 매일 저녁
철문 내리는 소리

오지 않을 수 있다

상한 반찬을 두고 고민하다
별 모양 꽃 모양
사료를 먹었다
심장 모양 뼈다귀 모양이 먹음직해 보였다
식탁에서 쫓겨나 내 발을 핥는 개의 체온이
두렵고 자랑스러운 날들

오지 않을 수 있다

불을 지피기 위해 몸에 너무 오래 머물렀구나
내가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개에게 쫓겼구나
툭, 툭,
부드럽게 부러지는 성냥들

창밖은 매일 아침
철문 올라가는 소리

문 앞에 죽어 있던 몸들은
밤사이 누군가 제 집으로 물고 갔다
집을 집에 두고
가까스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오지 않을 수 있다

어디로 자꾸 사라지는 거니 문 앞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가 깬 유리병을 대신 치우는 사람에게
용서를 빌 뻔 했다

-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다」 전문(1 : 10-12)



     이 시는 잠과 꿈속의 세계를 주로 형상화하는 육호수 시의 무의식 적 비밀을 엿볼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되는 작품이다. 따라서 징후발 견적 독해를 시도하여 시의 심층에 숨어 있는 은밀한 내면의 양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전체적 구도는 “방”, “문”, “창” 등의 이 미지가 시적 주체의 내면 공간과 중첩되면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 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화자가 외적 상황에 대한 묘사 및 진술과 내 면적 감응에 대한 고백을 번갈아 교차적으로 제시한다. 먼저 외적 상 황에 대한 묘사 및 진술을 살펴보자. 화자는 “문”과 “창”으로 경계 지 워진 “방”의 안쪽에서 평범한 일상적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 고독과 불행이 내재하고 있음을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형상으로 묘사한 다. 이러한 시적 형상화 방식의 중심에 있는 것은 ‘언캐니(uncanny)’하 거나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 묘사 방법을 통 해 화자가 2연에서 “불 꺼진 식탁에 앉아/콩 조림을 세”는 모습이 “콩 알만큼의 어둠을 방 안에 심”는 상황으로 연결되는 것은 내면 무의식 의 고독과 암울함을 암시하고, 4연에서 “입술에 돋은 보풀을 뜯다가/ 빨래 세제를 삼키는 남자”의 모습 이후에 “변기통에 새를 토하는 감 옥”이 제시되는 것은 내면 무의식의 죽음과도 같은 감시 및 폐쇄성을 암시한다.

     시적 화자가 7연에서 “심장 모양 뼈다귀 모양이 먹음직해 보였다” 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개”의 존재성과 동일시하는 언캐니한 장면 인데, “식탁에서 쫓겨나 내 발을 핥는 개의 체온이/두렵고 자랑스러 운 날들”에서는 동일시 이후의 혼재적 주체가 가지는 모순적 심리가 “두”려움과 “자랑스러”움의 공존을 통해 노출된다. 이어서 9연의 “불 을 지피기 위해 몸에 너무 오래 머물렀구나/내가 이렇게 작고 사랑스 러운 개에게 쫓겼구나”에서는 자기 존재의 내적 양상과 외적 상황에 대해 섬광처럼 스치는 각성을 표출한다. “툭, 툭,/부드럽게 부러지는 성냥들”은 “불”-“몸”-“개”-“쫓김”으로 이어지는 파편적 이미지들의 연쇄가 “부러지는 성냥들”로 귀결되면서 어떤 목표를 추구하던 열정의 상실이나 좌절이라는 은밀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시적 형상 화 방식의 중심에 있는 것은 파편적 이미지들의 충돌과 연결을 통해 충격 효과를 발생시키는 ‘몽타주’이다.

     다음으로 내면적 감응에 대한 고백을 살펴보자. 시적 화자는 “방” 의 안쪽에서 경계 지점인 “문앞”의 사건에 대해 염려하고 경계 바깥 쪽인 “창밖”의 상황에 대해 주시하면서 ‘불안’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 는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감응을 드러낸다. 여기서 화자의 내면 적 감응으로 ‘불안’과 ‘안도’가 공존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모순된 감응 이 때로는 불행과의 ‘대결 의지’로 나아가고 때로는 상황에 대한 ‘참회 의식’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화자가 1연에서 “문 앞에서 자 꾸 죽지 마 ”라고 말하는 것은 “문앞”에서 폭력이나 사고에 의한 죽음 이 빈번히 발생해 왔음을 암시하면서 ‘불안’을 드러낸다. 4연의 “변기 통에 새를 토하는 감옥”과 11연의 “문 앞에 죽어 있던 몸들은/밤사이 누군가 제 집으로 물고 갔다”를 미루어 볼 때 죽은 존재는 “새”이고 물 고 가는 존재는 “개”라고 짐작된다. 주목할 부분은 화자가 “새”의 죽음 과 “사라”짐에 대해 염려하고 불안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6연, 8연, 12 연에 반복되는 “오지 않을 수 있다”라는 화자의 감응은 ‘불안’과 공존 하는 ‘안도’를 표현하지만 이러한 모순적 감응의 반복이 아이러니하 게도 ‘불안’을 더 가중시킨다. “오지 않을 수 있다”라는 문장이 3회나 반복되는 과정에서 점층적 효과를 통해 ‘불안’이 누적되면서 강도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점층되는 화자의 ‘불안’은 “새”가 “문”과 “창”이라는 경계에서 내부 로 진입하지 못하고 외부 현실의 억압이나 폭력에 의해 압살되기 때 문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새”의 의미와 정체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 다. “새”에 대한 징후발견적 독해는 이후에 진행하기로 하고, ‘불안’과 ‘안도’가 공존하는 모순적 감응이 3연의 “더 나빠져야지 내일은/조금 도 비켜 가지 말아야지”에서 능동적인 불행과의 대면이나 대결 의지 로 나아가는 부분과, 14연의 “내가 깬 유리병을 대신 치우는 사람에 게/용서를 빌 뻔 했다”에서 참회 혹은 속죄 의식으로 나아가는 부분 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내가 깬 유리병”은 일단 “내일은/조금도 비 켜 가지 말아야지”라는 불행과의 대결 의지를 행동으로 실천한 결과 물로 이해할 수 있다. 대결 의지의 실천이 파괴적 결과를 낳고 불의 의 피해자를 발생시키므로 화자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응으로서 ‘죄책 감’을 느끼게 되는 듯이 보인다. “용서를 빌 뻔 했다”라는 표현은 용서 를 빌어야 한다는 강박감과 용서를 빌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순간적 으로 교차하는 복합적인 심리의 갈등을 노출하면서 원초적 죄의식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이 부분에 대해 징후발견적 독해를 시도하면 육 호수 시의 다양한 상징체계들의 질서가 파생시키는 복수의 모티프들 중에서 ‘죄/참회(속죄, 용서)’의 모티프가 중심부를 차지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죄/참회’의 모티프는 시적 주체가 “문앞”에서 일어나는 외부 현실의 억압이나 폭력에 대해 심리적으로 연루되어 있거나 방 임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더 나아가 “내일은/조금도 비켜 가지 말아 야지”라는 불행과의 ‘대결 의지’를 현실적으로 실천한 결과물인 “내가 깬 유리병”에 의해서도 억압이나 폭력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죄/참회’ 의 모티프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양가성을 여러 겹 껴안은 채 육호 수 시에 잠재된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이루는 중심적 요소가 된다.

     한 가지 덧붙여야 할 부분은 제목인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 다」에서 노출되는 화자의 자기 정체성 고백이 육호수 시의 무의식 적 비밀을 포착하는 또 하나의 퍼즐이 된다는 점이다. 화자는 자신이 “방”의 안쪽에 해당하는 무의식의 양상이나 비밀을 드러내기보다는 은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단도직입적으로 고백한다. 이 심리 적 태도는 앞에서 분석한 불안과 안도, 억압·폭력과 연루·방임, 가학 과 피학, 불행과 대결 등의 다양한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양가성들이 ‘죄/참회’의 중심 모티프로 수렴되고 결집되어 나타남으로써 ‘죄책감’ 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육호수 시의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해명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그 비밀을 감추거나 은폐하 려는 화자의 심리적 태도에서도 기인하는데, 시의 미학적 측면에서 는 이로 인해 오히려 베일 효과가 발생하면서 시적 애매성과 모호성 이 어우러져 매력적인 아우라가 발생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러한 무의식적 비밀과 메커니즘을 기본 토대로 육호수의 첫 시 집에서 중심부에 있는 상징체계, 구조화 원리, 모티프, 미학적 방법론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작품을 살펴볼 필 요가 있다.



첫 음성을 들었다

그는 천국에서 온 간첩이었다
나는 그를 숨겨주었다

천사는 천국의 기쁨을 가지고 오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알 릴까 고민하다. 나는 어디에서든 방심하게 되다. 좀 더 포괄적 의미 205 비평가의 시각 의 인간이 되어가다. 잠옷 입은 아이들과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 려다보다. 풍선에 빛을 담아 창밖으로 던지다. 세계를 구하다 보면 세계와 사랑에 빠지나 봐. 모기가 모기를 잊고 바닥을 기어 다니다. 달걀은 무사히 늙어 죽는 닭의 꿈을 꾸다. 이젠 너도 나를 아주 불신 하진 않는 거야. 천사들과 농담하다. 부흥. 우리는 죽음과 믿음 사이 에 경계가 없다. 새를 쫓다. 새가 아닐까 봐서

*
너무 많은 빛이 방에 쏟아 들어와 꿈에서 깨다

이런 일들을 정말 견딜 수 없었다면 이미 죽었겠지

오늘, 늙음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다가, 이젠, 사랑에 천착할 수 있 을 거라 생각하다가, 오늘 아침 어쩌면 빛이 나를 완전히 통과할 수 도 있었다고 생각하다. 빛을 의심할 이유를 잃어가다 마침 개가 숨 을 멈추다. 너도 날 더 핥을 순 없는 거야. 개와 숨을 나누다. 개가 개 를 버리고 날아가다. 창문을 닫고 어깨를 움츠리다

*
천사에게 침을 뱉다 꿈에서 내쳐지다
베개 위로 침이 마저 떨어지다

오늘은 수치를 배워볼까

상처가 살 속으로 잠기다. 인형들을 벽 쪽으로 돌려 앉히다. 어제 죽은 개가 창가에 와 울다. 농담을 생각하다. 이곳은 당신 사는 곳이 아닙니다. 꿈에 들어가 난장 피우다. 인형에게 영혼을 구걸하다. 미 안해, 난 널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어. 언젠가 꼭 한번 빨아줄게.* · 뻔 한 일을 두려워하다. 종일 방바닥에 침을 뱉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 람이 되다. 오늘은 수치를 배워볼까. 벽에 맨 등을 기대어 창밖을 내 려다보다. 가죽.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야.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거라면 죽음은 영원이 아닌 거야. 매일 시계에 새 건전지를 갈아 끼 우다. 영원. 인형이 내 말을 듣고 웃다. 영원. 어깨에 귀를 대고 더 작 게 말하다

*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 13 : 8)

- 「포교」 전문1 : 34-35



     이 시는 제목인 「포교」에서부터 ‘종교적 신성’의 소재 및 주제 의식 이 강하게 노출되는 작품이다. 육호수의 첫 시집에는 이 시 이외에도 「철야」, 「고해 전일」, 「고해 당일」, 「소돔의 밤」, 「맛체바」, 「나의 어린 신이 집을 나간 날」, 「건망증이 심한 천사」 등의 작품들이 제목에서 부터 ‘종교적 신성’의 소재 및 주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제목뿐 만 아니라 작품의 본문까지 포함한다면 ‘종교적 신성’은 육호수 첫 시 집에서 가장 지배적인 상징체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적 신 성’의 상징체계는 그 대척점에 있는 ‘세속적 욕망’의 상징체계와 대립 적 구도를 이루면서 ‘신성과 세속의 길항’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파생 시킨다. 그리고 이 구조화 원리는 상징체계들의 질서 속에서 각 계열 별로 이미지들을 접속시키면서 복수의 모티프들 중에서 ‘죄/참회(속 죄, 용서)’라는 중심 모티프를 파생시키고 고유한 미학적 방법론을 발 생시킨다.

     인용한 시에서 ‘종교적 신성’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대표적 이미지 인 “천사”는 “천국”, “빛”, “새” 등의 이미지를 연쇄적으로 접속시킨다. “천사” 이미지는 1연에서 3연의 초반부까지 그 은유인 “첫 음성”, “천 국에서 온 간첩”, “천국의 기쁨” 등으로 이어지면서 ‘종교적 신성’의 본 래적 의미가 유지되는 듯하지만, 3연의 초반부 이후에는 화자가 “고 민”하고 “방심”하며 “좀 더 포괄적 의미의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 서 ‘세속적 욕망’의 상징체계와 만나 퇴색되거나 변질되는 모습을 보 여준다. 여기서 ‘세속적 욕망’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대표적 이미지인 “세계”가 연쇄적으로 접속하는 이미지는 “모기”, “달걀”, “닭” 등인데, 화자가 말하는 “포괄적 의미의 인간”은 이러한 ‘세속적 욕망’의 대상 들과 연결되거나 연루되는 존재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빛” 이미지는 3연에서 5연까지 ‘종교적 신성’의 의미 맥락을 유지 하면서 화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3연에서 화자는 “풍선에 빛을 담아 창밖으로 던지”는데, 이어지는 “세계를 구하다 보면 세계와 사랑에 빠 지나 봐.”에서는 “빛”이 구원의 의미를 동반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화 자가 세속의 영역과 절충하거나 타협하는 경과도 암시된다. 이 과정 이후 3연의 시상 전개는 ‘종교적 신성’과 ‘세속적 욕망’의 의미 맥락이 절충하거나 타협한 결과를 보여주는 듯하다. 화자가 “너도 나를 아주 불신하진 않는 거야”라며 “천사들과 농담하”는 모습과 “부흥. 우리는 죽음과 믿음 사이에 경계가 없다”라는 문장 등에서 ‘신성과 세속의 길 항’이라는 육호수 시의 구조화 원리가 모종의 변주를 일으킨다는 점 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속의 영역과 절충하거나 타협하는 존재는 “빛”이 아니라 화자이다. 4-5연에서 “빛”은 “너무 많”이 “방에 쏟아 들 어와” 화자를 “꿈에서 깨”어나게 하지만, 화자는 “빛이 나를 완전히 통 과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며 “빛을 의심할 이유를 잃어가”는 데서 보이듯 “빛”에 대한 순응과 모반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이 진동 이 후에 등장하는 “개” 이미지는 ‘세속적 욕망’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시 상 전개를 강하게 견인하고 있다.

     한편 3연의 “새를 쫓다. 새가 아닐까 봐서”에서 잠시 등장하는 “새” 는 ‘종교적 신성’의 상징체계에 속하면서 육호수의 시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중심 이미지이다.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다」를 분석 하면서 이후에 진행하기로 한 “새”에 대한 징후발견적 독해는 그 대 척점에서 “개”가 함축하는 ‘세속적 욕망’의 의미 맥락과 대비함으로 써 시도할 수 있다.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다」와 「포교」에는 공 통적으로 “새”와 “개”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상호 대립적인 의미 구조 를 형성한다.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다」의 “문 앞에서 자꾸 죽 지 마”, “변기통에 새를 토하는 감옥”, “문 앞에 죽어 있던 몸들은/밤사 이 누군가 제 집으로 물고 갔다” 등의 문장에서 “새”가 함축하는 ‘종교 적 신성’과 “개”가 함축하는 ‘세속적 욕망’ 간의 대립적 위상이 유추된 다. 「포교」에서는 ‘종교적 신성’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천사” 이미지가 “빛”과 “새” 이미지를 접속하는 과정에서 “개” 이미지가 ‘세속적 욕망’ 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시상을 견인한다는 점에서 작품 내부에 이러 한 대립적 구도가 잠재되어 있다.

     인용한 시에서 “개” 이미지가 등장한 6연 이후의 시상은 ‘세속적 욕 망’의 영역으로 무게중심이 기울며 전개된다. 7연에서 “천사에게 침을 뱉다 꿈에서 내쳐지다”에 이어지는 “오늘은 수치를 배워볼까”라는 문 장은 꿈속 무의식의 세계에서 “천사”와의 관계가 불화와 파멸로 치닫 자 현실로 추방되면서 “수치”를 경험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9연에 서 “상처가 살 속으로 잠기”고 “인형들을 벽 쪽으로 돌려 앉히”며 “어 제 죽은 개가 창가에 와”서 우는 장면들도 유사한 의미 맥락을 형성한 다. 이 상황에서 화자가 “생각하”는 “농담”은 중요한 징후발견적 독해 의 대상이 된다. 육호수 첫 시집의 핵심적 구조화 원리인 ‘신성과 세 속의 길항’에서 ‘종교적 신성’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천사”-“천국”-“빛” “새”의 이미지 계열이 ‘세속적 욕망’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개” 이미지 로 무게중심을 이동하면서 “침”-“수치”-“상처” 등의 연결고리를 거쳐 “인형”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 시적 주체가 떠올리는 것이 “농담”이라 는 점에 주목해 보자. “농담”에는 새로운 시적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시도뿐만 아니라 자기포기적 좌절감과 자책적 죄의식도 내재되어 있 다고 볼 수 있다.

     시적 화자는 “농담을 생각”한 이후에 “이곳은 당신 사는 곳이 아닙 니다.”라고 거부되어 “꿈에 들어가 난장 피우”기도 하고 “인형에게 영 혼을 구걸하”기도 하는 등 현실과 꿈의 공간을 왕복하면서 심리적 갈 등을 겪으며 방황한다. ‘세속적 욕망’의 영역으로 무게중심이 기운 상 황에서 ‘신성과 세속의 길항’이라는 여진이 계속되는 형국이다. 이 상 황에서 화자가 “인형”에게 “난 널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어. 언젠가 꼭 한번 빨아줄게.”라고 말하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한복음 13장 8절)라고 말한 것을 인유하 는 데서 출발한다. ‘인유’에서 출발한 이 표현은 인형을 베드로의 위 치에 두고 화자 자신을 ‘예수’의 위치에 두는 ‘패러디’를 거쳐 죄책감 을 자조적이고 자학적으로 굴절시키는 ‘역설’에 도달한다. 필자는 ‘인 유’로부터 ‘패러디’나 ‘몽타주’를 경유하여 ‘역설’로 전이되는 방식을 육 호수 첫 시집의 고유한 미학적 방법론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앞에서 분석한 ‘농담’의 차원과 ‘인유’로부터 ‘패러디’나 ‘몽타주’를 거쳐 도달 하는 ‘역설’의 차원은 향후 육호수 시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이정 표이자 질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결절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육호수 첫 시집의 구조화 원리인 ‘신성과 세속의 길항’은 중심 모티프 인 ‘죄/참회(속죄, 용서)’를 파생하면서 ‘인유-몽타주-역설’이라는 미학 적 방법론을 연쇄적으로 발생시킨다. 육호수의 첫 시집을 전체적으 로 지배하면서 관통하는 이러한 미학적 특이성들은 ‘종교적 신성’과 ‘세속적 욕망’이라는 대립적 양극의 상징체계가 가지는 간극을 충돌 시켜 그 낙차로부터 시적 긴장을 얻어냄으로써 강한 시적 밀도와 강 도를 발생시킨다.

     인용한 시로 돌아가서 “농담” 및 ‘인유’와 ‘역설’ 이후의 시적 전개 를 살펴보자. 화자는 “뻔한 일을 두려워하”고 “종일 방바닥에 침을 뱉”으며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면서 이러한 모습을 “수치”라 고 간주한다. 이어서 화자는 “벽에 맨 등을 기대어 창밖을 내려다보” 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거라면 죽음은 영원이 아닌 거”라고 말한 다. 화자는 “죽음”이 대변하는 유한한 시간인 ‘순간’과 “영원” 사이에 서 심리적 갈등을 지속하는 듯이 보인다. “매일 시계에 새 건전지를 갈아 끼우”는 태도는 ‘순간’과 “영원”을 충돌시켜 시적 긴장을 발생시 키는 모습을 연상시키지만, 화자는 이미 ‘세속적 욕망’의 영역에 깊이 몸을 담고 있어서 어딘가 무기력해 보인다. “영원. 인형이 내 말을 듣 고 웃다. 영원. 어깨에 귀를 대고 더 작게 말하다”라는 마지막 문장에 서 “영원”을 견지하려는 화자와 ‘세속적 욕망’의 영역에 속하는 “인형” 이 대면한 결과로 “웃”음이라는 ‘냉소적 유머’의 차원이 생겨난다. ‘냉 소적 유머’는 미학적 방법론의 측면에서 자기포기적 좌절감과 자책적 죄의식을 내포하는 “농담”의 차원과 모종의 연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육호수 시의 미학적 방법론을 좀 더 심층적으 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역설’에 대한 징후발견적 독해가 필요하다.



거울에 이마를 대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거울에 이마를 댄 채
턱을 좌우로 흔들 수는 있다
차가운 두부 속으로 파고드는 미꾸라지처럼
무리 속으로 파고드는 어린 양의 엉덩이처럼

거울에 비벼대는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소년은
자신의 선함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나는
칭찬을 받기 위해
고의적으로 실패하는 아이같이 굴었다

우리 둘 중 누군가 먼저 몸을 돌려 달아난다면
등을 바라보는 사람은 맹수가 되어야 한다고

가지 말아달라고
누군가 애원하고 있다

역설 없는 곳에서
긴 잠을 잘 수 있다면
우리가 같은 주머니 속이라면

*
심해어에게 어둠은 무엇일까
빛이 없던 시절
신의 불면에 대해 생각하며 뒤척일 때

불 꺼진 방

누군가 거울 속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다

어둠을 향해 개가 짖을 때
개의 적개심은 어디에서 생겨난 걸까
그러나 나는 어둠 속에서
무엇도 지켜낸 적 없다

목자의 아들 혹은 독사의 자식

어둠 속에서
맹수의 노란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둠의 뒤를 노려본 적 없다

목자의 아들
독사의 자식

나의 적(敵)은 천국에 있다
나는 천국에 가야 한다

꿈에서도 내가 싸우길 바라며
꿈속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응원했다

그러나 꿈속에
그 많은 개를 풀어놓은 건 누구였을까

- 「나의 어린 신이 집을 나간 날」 전문(1 : 56-58)



     이 시는 제목인 「나의 어린 신이 집을 나간 날」에서부터 ‘종교적 신 성’의 세계에서 이탈하고 모반하는 주제 의식이 나타나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중요한 부분은 핵심 이미지로 등장하는 “거울”과 육호수 시의 미학적 방법론인 ‘역설’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전반부는 전 체적으로 시적 화자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상황을 묘사한 다. 1-2연에서 화자는 “거울에 이마를 대”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상황과 “턱을 좌우로 흔들 수는 있”는 상황을 묘사한다. 3연 이후에 “거울”에 비치는 “소년”은 화자의 내면적 자아로서 유년의 자신이라 고 간주할 수 있다. “자신의 선함을 의심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은 ‘선/악’ 및 ‘믿음/의심’의 기준을 통해, “칭찬을 받기 위해/고의적으로 실패하는 아이같이” 구는 모습은 ‘위선/위악’의 기준을 통해 ‘죄/참회’ 라는 중심 모티프를 변주시킨다. 이 두 문장에서 화자는 공통적으로 종교적·윤리적 기준이 전제하는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적 화자가 ‘선/악’, ‘믿음/의심’, ‘위선/위악’ 등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도달하는 곳은 “역설”의 지점인데, 흥미로운 부분 은 화자가 다시 이 “역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4-5연에서 “우리 둘”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화자와 “소 년”인데, “우리 둘 중 누군가 먼저 몸을 돌려 달아난다면/등을 바라보 는 사람은 맹수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 간 에 불화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불화는 화자가 ‘선/악’, ‘믿음/ 의심’, ‘위선/위악’ 등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지점에서 만나는 이율배반 적인 모순의 “역설”과 긴밀히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가지 말아달라 고/누군가 애원하”는 이유도 잠재된 “역설”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 때문이고, 화자가 “역설 없는 곳에서/긴 잠을 잘 수 있다면/우리가 같 은 주머니 속이라면”이라고 소망하는 말에도 “역설”에 대한 두려움이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필자는 “거울” 이미지와 “역설”이 긴밀 한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는데, 시의 후반부를 분석하면서 이 점을 해명해 보기로 하자.

     후반부는 전체적으로 “거울”을 사이에 두고 ‘시선’과 ‘응시’가 상충 하는 상황을 제시하고 “개”가 등장한 이후에 “역설”의 중심 내용이 등장한다. 1-2연에서 화자가 “빛이 없던 시절/ 신의 불면에 대해 생 각하”는 대목에서 “빛”과 “신”의 연관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불 꺼진 방//누군가 거울 속에서/나를 빤히 보고 있다”에서는 “거울”이 화자의 ‘시선’과 “누군가”의 ‘응시’가 충돌하는 지점으로 등장한다. 라캉은 주 체가 세계를 보는 눈인 ‘시선’과 구별하여 주체를 바라보는 세계 혹은 타자의 눈을 ‘응시’라고 개념화한다. 라캉에 의하면 ‘응시’는 주체의 시선보다 앞서 존재하는데 이로 인해 주체는 모든 방향으로부터 보 이는 자로서 세계의 스펙트럼 속에서 하나의 얼룩으로 존재할 따름 이다. 이 개념을 차용하면 육호수 시에서 “거울”은 ‘주체의 시선’과 ‘초 자아의 응시’가 상충하면서 “역설”을 발생시키는 지점이 된다. 여기서 육호수 첫 시집의 구조화 원리인 ‘신성과 세속의 길항’이 미학적 방법 론을 파생시킬 때 ‘인유’에서 출발하여 ‘몽타주’를 거쳐 ‘역설’에 도달 하는 과정 중에 ‘주체의 시선’과 ‘세계의 응시’의 충돌이 내밀하게 개입 된다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의 비밀이 드러난다.

     화자는 4연의 “어둠을 향해” “짖”는 “개”의 “적개심”과 “어둠 속에 서/무엇도 지켜낸 적 없”는 “나”의 죄책감이 충돌할 때 “거울”이 발생 시키는 “역설”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목자의 아들 혹은 독 사의 자식”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으로 표출한다. 6연에서 “어둠 속에서/맹수의 노란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은 주체를 응시하 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 “맹수”라는 점에서 화자가 “노려본 적 없”는 “어둠”의 정체가 “역설”을 발생시킨다. 7-8연에서 반복되는 “목자의 아들/독사의 자식”이라는 역설은 화자가 “천국에 있”는 “적(敵)”과 싸 우기 위해 “천국에 가야”하고 “꿈에서도 내가 싸우길 바라며/꿈속으 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응원”하는 대결의 의지로 귀결됨으로써 정점 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 시도 육호수 첫 시집의 구조화 원리인 ‘신성 과 세속의 길항’이 대립적 양극의 간극을 충돌시켜 그 낙차로부터 얻 어지는 시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시적 밀도와 강도를 확보하게 된다.

     이 글은 육호수의 첫 시집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징체계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종교적 신성’과 ‘세속적 욕망’이라고 간 주하고, 이 두 상징체계의 대립적 구도가 형성하는 ‘신성과 욕망의 길 항’을 육호수 시의 구조화 원리로 도출했다. 그리고 이것이 파생하는 복수의 모티프들 중에서 ‘죄/참회(속죄, 용서)’를 중심적 모티프로 간주 하고, 이것과 접속하면서 시적 추동력을 부여하는 핵심적인 미학적 방법론을 ‘인유-몽타주-역설’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또한 미학적 방법 론이 ‘인유’에서 출발하여 ‘몽타주’를 거쳐 ‘역설’에 도달하는 과정 중 에 ‘주체의 시선’과 ‘세계의 응시’의 충돌이 내밀하게 개입된다는 무의 식적 메커니즘을 해명하고, ‘농담-냉소적 유머’의 차원과 ‘인유-몽타 주-역설’의 차원이 향후 육호수 시의 향방을 좌우하는 이정표이자 질 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결절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시 집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이후의 육호수 시가 상징체계, 구 조화 원리, 모티프, 미학적 방법론 등의 측면에서 어떤 질적 변화를 보여주는지 살피는 것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자 한다.

  • 1) 육호수의 시집은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아침달, 2018),『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문학동네, 2023) 등이 있다. 이 글에서 육호수의 시는 여기서 인용하되 시집은 출간된 순으로 번호를 달아 ‘(시집 번호 : 쪽수)’로 출처를 표시한다.
  • 2) 최선교, 「시 쓰기/꿈 쓰기」, 《문예바다》 2023년 봄호, 123-133쪽.
  • 3) 김준현, 「낮은 밤의 꿈」,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해설, 문학동네, 2023, 150-173쪽.
  • 4) 박다솜, 「낡은 장소와 없는 장소」, 《현대시》 2023. 6, 181-192쪽.
  • 5) 최선교, 「친절한 편지」, 《포지션》 2023년 여름호, 81-85쪽.

추천 콘텐츠

송현지 대화의 기술 — 이혜원, 『고백의 파동』 (파란, 2024)

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계간 현대비평 송현지 이혜원고백의파동대화경청지형학적비평 2025
송현지 맺히는 시간 ― 정호승, 『편의점에서 잠깐』 외 4편

1.  1968년 6월 김수영이 세상을 떠나기 전 「풀」을 탈고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 몇 편의 유고작이 더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중 한 편인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 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磁器) 스탠드가 울린다 - 김수영,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1연  집에 의자와 테이블이 많아 거기에 계속 걸린다는 화자의 고백에 대해 지난 연구는 어느덧 집 안에 자리하게 된 많은 물건에 집중하며, 현실의 번화함이 집 안까지 밀고 들어온 상황과 그 번다함이 소리의 증폭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주로 논의해왔다. 그런데 이 시가 김수영이 죽기 두 달 전에 썼던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나는 이 시에서 시간이 흘러간 흔적을 본다. 의자와 테이블이 하나씩 집 안으로 들어오고, 테이블 밑에 있는 "엮음대"가 그러하듯 '나'가 점차 많은 것과 얽히고 얽히는 동안 흘러갔던 시간. 그래서 '나'가 의자와 테이블에 걸리는 사건은 지난 세월 동안 그가 맺게 된 관계들로 인해 머물던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지연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김수영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였기에 자신의 생이 곧 끝날 것임을 그가 짐작했을 리는 없지만, 마치 사십육 년 동안 그러모은 것인 양 집 안에 놓인 수많은 물건을 열거한 이 시를 읽으며 그의 전(全) 생애가 압축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미제", "삼팔선", "탱크", "관청"과 같은, 시에 적힌 다분히 정치적으로 해석 가능한 단어들조차 잊을 만큼. 그것은 이 시가 다음과 같이 끝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닥이 없는 집이 되고 있다 소리만 남은 집이 되고 있다 모서리만 남은 돌음길만 남은 난삽한 집으로 기꺼이 기꺼이 변해 가고 있다 - 김수영,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9연  물건들로 가득하여 "바닥이 없는 집", 집 안을 돌아다닐 때에도, 가만히 있을 때에도 소리가 울려("소리만 남은 집")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집. 이것이 적지 않은 세월을 지나는 동안 자신의 안에 많은 것을 들여오고 그것들과 관계를 맺은 '나'의 생에 대한 비유라고 한다면, 저 소리들을 눈에 보이는 선으로 '나'와 이어지게 그어볼 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이란 해마다 복잡한 연결선들이 더해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오래 생을 산 자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매번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아무것도 없는 방에 머물렀던 젊은 시절과는 또 다른 맥락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고 김수영은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반세기가 조금 지난 지금, 살아가는 일이란 어딘가에 '걸리는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정호승의 시에서 다시 마주한다. 2. 나는 거미줄에 걸린 거미 먼동이 틀 때까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 사이로 거미줄을 만들어놓고 내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린다 버둥거릴수록 거미줄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동안 내 거미줄에 걸려 죽어간 각다귀야 모기야 하루살이야 미안하다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남을 사랑할 줄 몰랐던 나를 용서해다오 이제 내가 거미줄에 걸려 맞이한 이 고죄의 차디찬 새벽 거미줄에 걸린 새벽이슬만은 살아야 한다 당신이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환승해서 저 멀리 인간을 벗어나 살아가듯 거미줄에 걸린 아침이슬도 저 멀리 절망의 거미줄을 벗어나야 한다 거미줄에 걸린 오늘의 세계는 죽음뿐이나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은 햇살을 찬미하고 햇살은 아침이슬을 찬송한다 - 「거미줄에 걸린 거미」 전문  지금껏 다른 이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쳤던 거미줄에 이제는 스스로가 걸려버린 거미의 상황을 다룬 이 시에서 앞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생의 끝에서 이 시의 화자가 깨달은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로부터 시작해보자. 파국은 결국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한다. 그의 뉘우침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생을 시작하는 누군가에게 시선을 돌리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거미줄에 걸린 새벽이슬만은 살아야 한다") 정호승이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반성과 연민의 태도를 가질 것을 말하고 있다고 정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정호승의 시가 지금껏 보여주었던 성찰과 윤리라는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그리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정호승의 시적 갱신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어서 조금은 냉정한 눈으로 이 시를 다시 살펴보게 한다. 기실 아침햇살을 받은 거미줄의 아름다움 역시 「거미줄」(『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창비, 1999)과 같은 작품에서 이미 한차례 이야기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러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가 오랫동안 정호승의 시를 읽어왔으며, 그의 시적 문법과 사유에 익숙해진 상태임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 익숙함과 그의 작품이 갖는 대중성을 빌미로 언젠가부터 우리는 김수영의 시와 같은 전위적인 시를 읽을 때와는 달리, 그의 시를 세밀하게 읽기보다는 그에 담긴 메시지만을 뭉뚱그려 말해왔던 것은 아닐까. 이 반성은 물론 나의 것인데, 여기서 새삼 그의 시를 읽어온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는 것은 이 시의 아주 사소한 언술에서 지나온 시간만큼 그의 시에 더해진 깊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미와 이슬이 거미줄에 얽히는 사태를 그가 '걸리다'와 '맺히다'라는 두 가지 동사를 사용하여 적는다는 것. 거미줄에 '걸린' "오늘의 세계"와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을 그가 분명히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걸리다'와 '맺히다'라는 서술어는 둘 다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지만 '걸리다'의 경우 (앞서 김수영의 시에서 보았듯) 대상과 보다 결속된 상태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며 대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를 거느린다는 점을 유념해보자. 이렇게 「거미줄에 걸린 거미」에서 정호승이 사용한 두 동사를 구분해볼 때, 이번 작품들에 담긴 사유의 새로움은 보다 선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생(生)에 걸려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맺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오랜 숙고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이다. 늦은 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당신을 만나다니 당신은 맥주를 사러 왔고 나는 라면을 사러 왔는데 편의점에 계산대 앞에 줄을 서서 죽기 전에 잠깐 당신을 만날 수 있다니 [……] 이미 우리의 계산은 다 끝났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다가 돌아서서 결국 무엇이 순익(純益)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 죽음이 되는 시간은 흘러 오늘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다시 만났으나 당신이 산 캔맥주는 당신이 계산하고 내가 산 컵라면은 내가 계산한다 편의점에서 사랑을 판매한다 해도 할인가(割引價)로 사랑을 살 수 있다 해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없는 불량품 오늘 밤 편의점의 흐린 불빛은 우리가 함께 거닐었던 항구의 불빛처럼 쓸쓸하다 잘 가라 우리가 비록 편의점에서 잠깐 만났다 할지라도 부둣가를 밝히는 검은 불빛을 따라 또다시 밤배는 떠나간다 - 「편의점에서 잠깐」 부분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과의 우연한 만남을 다룬 이 시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시인이 마련한 공고한 이분법적 구도다. 시인은 '나'와 '당신'을 중심으로 "맥주"와 "라면", "사랑"과 "미움", "교만의 손"과 "겸손의 손"을 나누어 적고, "오늘 밤 편의점"과 과거의 "항구"라는 시공간 역시 구분한다. 이와 같은 구도는 각자 계산이 끝난 맥주와 라면처럼 서로의 관계에 대한 계산 역시 오래전 끝났으며, 이제는 각자 분리되어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상황을 강조한다. 오래전 연인이었던 그들은 잠시 서로의 삶에 맺혔던 것일 뿐 그 만남은 영원하지 않았고, 헤어진 후에 시간이 흘렀듯 지금의 짧은 해후 후에도 또다시 시간은 지나갈 것임을 화자는 담담히 적는다. 지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부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서로가 다시 멀어진다는 점에 대해서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할 수 없는 생의 이치라는 것을 알아버린 자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길을 가다가 공중전화 부스를 만나면 얼른 들어가 부스 품에 안긴다 따스하다 설거지하시던 어머니 냄새가 난다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건다 그리운 수화기를 들고 예전에 집에 계신 어머니한테 전화를 하듯 어머니 접니다 전화를 건다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부스 밖에 보름달은 떠 있는데 나는 달을 가리키던 내 손가락을 자른다 누가 지옥으로 떨어지듯 갑자기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신호음이 툭 끊어진다 어머니 접니다 전화 받으세요 밤길을 가다가 만나는 공중전화 부스 그리운 어머니 - 「공중전화 부스」 전문  이 시는 일차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지만, 어머니와의 상상적 만남이 지금은 쉽게 보기 어려운 "공중전화 부스"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연결된 전화가("갑자기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곧장 끊어진다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이 작품 역시 우리의 생에서 이루어지는 우연적이고 순간적인 관계를 그리는 데 치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아늑한 품을 떠올린 화자가 끝내 마주하는 것은 어머니의 생이, 그리고 이승에서 어머니와 다시 만날 가능성이 전화 "신호음이 툭 끊어"지듯 끊어졌다는 참담한 사실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에 한때 맺혔다가 떠났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특별한 관계조차도 시간의 흐름 안에서는 실제적으로 영원히 이어가지 못한다는 것. 거미줄에 잠시 맺혀 있다 사라지는 아침이슬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란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에, 누군가에게 잠깐 맺혀 있는 일이라는 것. 이것이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정호승이 알게 된 생의 비밀이자 우리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아닐까. 3.  일흔이 되던 해 정호승은 어느 산문에서 "시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그 무엇이라면, 죽음 또한 이해하게 하는 그 무엇"이라고 적었다.1) 그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그의 시를 통해 삶은 물론 죽음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발견한 이 진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어떤 삶의 방향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거미줄에 걸린 거미」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맺히다'와 '걸리다'를 구분하여 읽어보자. 그는 시의 말미에 "거미줄에 걸린 아침이슬도 / 저 멀리 절망의 거미줄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며 "거미줄에 걸린 오늘의 세계는 죽음뿐이나 /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은" 그렇지 않다고 적어두었다. '걸려 있는 일'보다는 '맺혀 있는 일'이 우리의 삶을 죽음의 반대 방향으로 이끈다는 이 서술은 생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 것을 권하는 말로 들린다. '거미줄'이 사실상 생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할 때, 그는 거미가 그 자신을 옭아매어 죽음에 다다랐음을 보여줌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를 우리에게 제안하는 셈이다. 우리의 삶이 어딘가에 잠시 맺혔다 사라지는 것이라면, 생에 대해, 그리고 관계에 대해 조금은 덜 전전긍긍하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라고.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면서도 우리에게만은 자신과 같은 일이 벌어지길 바라지 않는다는 듯 그가 건넨 이와 같은 조언에서 나는 그가 지나온 시간의 깊이와 진정성을 읽는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순간과 우연의 산물이라는 점을 알아버린 정호승의 화자에게서 우리는 삶에 대한 욕망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낙엽을 쓰는 사람」에서 그가 되고 싶은 사람이 "낙엽을 쓸면서 마지막으로 가을이 되는 사람"이나 "낙엽을 태우다가 그만 불타는 낙엽이 되는 사람"인 것을 보자. 그러나 삶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인식이 허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마지막으로 짚어두고 싶다. 이것은 그가 생에서 발견한 또 다른 맺힘의 시간들 때문이라는 것도. 나는 빈 술병만 보면 꽃을 꽂는다 빈 술병에 꽃을 꽂으면 죽은 꽃이 살아난다 죽은 모든 꽃이 살아나 향기롭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꽃을 보면서 나는 빈 술병에 가득 든 술을 마신다 밤새도록 마신다 마시면 마실수록 빈 술병에는 술이 가득하다 부디 말리지 마라 나를 사랑한다고 걱정하지 마라 나에게도 만취의 순간이 나의 일생일 때가 있다 죽은 꽃이 계속 피어날 때가 있다 - 「빈 술병」 전문  이 시의 비유에 기댄다면 우리의 삶은 술병에 담긴 술을 마시는 것, 그리하여 술이 점차 사라지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다면 "빈 술병"에 가득 든 술을 마시는 행위란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일과 같다. 이러한 비유는 술을 다 마신 술병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란 사라지는 것임을 앞선 시에 이어 다시 강조하는 것이겠지만, 지나온 "일생"에 만취한 '나'를 두고 "죽은 꽃이 계속 피어난"고 시인이 적었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리운 어머니는 더 이상 이 생에서 '나'와 함께 할 수 없지만 그를 떠올릴 때만큼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지나온 날들을 떠올릴 때 시간을 함께했던 각별했던 누군가는 마치 꽃봉오리가 맺히는 것처럼 우리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맺히다 환하게 피어난다. 이런 순간이 시간의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그는 적어둔다. 우리가 생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더라도 누군가의 기억에 잠깐 맺힌다면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향해간다는 사실은 그리 쓸쓸한 일만은 아닐지 모른다. 이것이 그의 시에 잠시 맺혀있는 지난 계절 동안 내가 알게 된 또 하나의 생의 비밀이다. 1) 정호승, 「일흔에 생각하는 인간의 시」, 『계간 시작』, 2019년 여름호.

반연간 한국문학 송현지 정호승걸림맺힘시간의역설생의비밀 2025
남기택 타자의 외연 ― 이형권론

1. 비평의 입지 문학 용어로서 비평은 작품의 뜻, 작가의 기능, 어느 작가 또는 작품의 가치를 논의하는 작업이라 정의된다. 범박하게는 문학에 관련된 일체의 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두루 쓰인다. 그 밖에 방법론에 따라 기술비평, 실천비평, 이론비평, 인상비평 등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고, 에이브럼즈의 입론대로 모방론, 존재론, 표현론, 효용론 등 관점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웰렉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으로 그 양상을 대별하였다. 요컨대 문학비평의 중요한 과제는 내재적 요소와 외재적 구조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한 후 서술 및 평가하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면밀하고도 편견 없는 관찰이 어떤 종류의 비평에서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렇다면 비평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은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비평이란 위 기준에 의거해 접근된 하나의 결과이기에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전제한다. 전제된 기준은 중층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성과 수행성을 담보하기에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메타 담론적 성격이 지닌 자체의 곤란도 분명해 보인다. 비평 행위에 내재된 ‘평가’란 한 작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인식하거나 그 가치의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20세기 이래의 이론적 지평에 따르면 어느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활동과 사회적·제도적 관행을 통한 지속적 작용이다. 평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 활동과 관행에 의해 생산되는 효과에 가깝다. 어떤 문학작품의 해석과 그 가치에 대한 경험은 상호 의존적이며, 양자는 특정한 가정 혹은 기대를 따른다.(프랭크 랜트리키아·토마스 맥로린 공편, 『문학 연구를 위한 비평용어』) 결국 비평 행위의 관건은 텍스트 구조는 물론 이를 둘러싼 문학사회학적 관계를 수렴하는 평론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느 비평세계에 대한 판단은 그 평론가의 입지 기반에 대한 재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형권 비평세계는 1998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에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 경기도 안성 출신인 그는 충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때 지역의 중등 강단에 몸담았다. 이어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년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과정 중 평론 쓰기를 병행하던 그였기에 제도적 등단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제출한 원고는 충분한 내공을 체현하고 있었다. 당시 심사평은 세기말 위기의식에 빠진 시가 영상문화에 대응하는 현장을 균형적 감각으로 다가선 비평적 시각에 주목하였다.(『현대시』 1998년 7월호)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은 1990년대 이후 일군의 시인들을 다룬다. 이형권은 장르 의식의 확산과 초월, 도시적 일상성, 우울한 내면세계의 고백, 대중문화의 수용 등이 전통적 시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이라고 보았다. 그중 영상예술의 수용 및 변주를 시적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우로 이승하의 사진시, 하재봉의 컴퓨터시, 유하의 영화시 등을 꼽고, 그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였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개척하려는 이들 노력은 향후 시적 긴장의 영역을 개방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반면 대상에 대한 내적 인식의 진정성 차원은 경계의 대상이다. 이들이 예증하는 영상매체의 시적 전유가 문화사적 의미나 역사적 전망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은 향후 지난하게 펼쳐질 장르의 길항을 전조하기에 충분한 비전이었다. 이처럼 이형권은 문학의 본령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그 외부, 어쩌면 문학 장르의 타자성에 대한 시대적 응전 감각을 출발 단계부터 벼리어 온 비평가에 해당된다. 대개 이러한―문학의 장르론에 관한―입장이 취하는 포즈는 이론적 언어로의 무장이다. 문학이라는 범주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한 모더니티의 공재성(共在性)이 한국문학 연구에 있어서 주된 관성으로 작동되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 영역을 포함하여 문학은 ‘literature’의 역어이자 제도적 산물로 생성된 것이었고, 이론적 내면화는 한국문학의 정체성 설정을 위한 필연의 수순이기도 했다. 한편 이형권 비평의 경우 이론에의 경사로부터 의도적 거리를 취한다. 이는 여러 지면에서 반복되어 온 비평적 입장을 통해 확인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은 시의 정서적 깊이와 높이를 확보하여 시적 감동을 전문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넓히는 일”(『공감의 시학』 서문)이라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에게는 문학의 타자라는 분명한 성찰 대상이, 그리고 그 존재 의미를 구명하는 언어는 현학적 외장이 아닌 문학 본연의 공감과 소통 기제라는 입지가 초기 비평 단계로부터 각인되어 있었다. 2. 문학의 타자, 타자의 문학 이형권 비평세계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2006), 『발명되는 감각들』(2011), 『공감의 시학』(2017) 등의 평론집으로 집약되어 왔다. 대학 강단에서의 교육을 병행하고 있기에 연구서 성격의 다양한 성과물이 평론집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예지 『너머』, 『시와 시학』, 『시작』, 『애지』 등의 편집위원 역할이 주요한 문단 경력으로 꼽힌다. 꾸준한 연구 작업과 더불어 실천적 문단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외현이다. 오늘날 비평 행위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역학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구조는 비단 한국문단만의 실정이 아니다. 일부 비평가는 대학 교원으로 정착한 이후 평단의 참여에는 소원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형권은 중부권 거점 대학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서울과 지역을 넘나들며 문단 활동을 이어 온 실천적 사례라 평가할 만하다. 제도적 성과도 다양하다. 그의 저술 중 『공감의 시학』은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상의 대상 평론집이 되었다. 당시 심사평은 이형권 평론이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며, 한국 시문학이 마주하는 핵심 문제에 대해 정공법의 언어로 다가서는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그는 이때 자신의 문학 여정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자전을 적었다. 나의 대표적인 평론집은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평론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독자와의 공감을 지향해 온 글쓰기의 결과물들이다. 가능하면 관념이나 이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혹은 관념과 이론마저도 문학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다. 나는 지금도 가장 어려운 작품도 가장 쉽게 비평할 수 있는 평론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무엇보다도 다른 비평가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평 언어, 나만의 비평 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물음표로 출발하여 느낌표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심미적 개성과 인간적 진실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안성천에서 자란, 내 영혼의 자서전」, 『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이 회고에서도 비평적 입지의 방법론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표제로 내건 공감의 가치가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강조되었다. 독자적 언어와 이론을 향한 포부는 일견 무모하게도 들린다. 어느 장르보다 기존 시학적 지평을 전제로 성립되는 비평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와 이론의 신생은 비평보다는 또 다른 창작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형권 비평의 시각이 이른바 비평과 창작의 이분법에 근거하지 않은, 양방향적 이해를 위한 의사소통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형권의 시학적 탐구는 『미주 한인 시문학사 : 1905∼1999』(2020)라는 중요한 성과이자 비평적 변곡점을 낳았다. 그는 이 연구서로 인해 2021년 김준오시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형권 비평은 출발 단계부터 시 장르의 타자성 문제를 다루었다. 타자라는 주제는 이형권 비평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로 어어져 왔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서울 이외의 주변부 지역 문학도 일종의 타자”이며 “국외의 한인 문학도 타자의 문학”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곧 “다양성의 문학과 확장성의 문학”을 의미하기에 앞으로도 추구해 나갈 것이라 다짐하였다.(『신생』 2021년 겨울호) 『미주 한인 시문학사』는 한국문단 내부의 타자성 영역을 최대 이민국이자 패권국이라는 외부로 확장하여 모색한 결과물이라 하겠다. 2012년 상반기 LA에서의 방문교수 경험은 이형권 시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문학의 경계에 관한 비평적 모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평론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이 주목된다. 이 글은 디아스포라의 맥락 속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시의 형상화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문학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과 심상지리를 구성하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주 한인에게 모국어는 도구가 아닌 생존을 환기하는 의사소통적 매개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현전하는 물성이자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에 비견된다. 이 글에서 주요 논거로 제시된 김병현, 배정웅, 오문강 등의 작품들은 디아스포라의 난관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의 동일시 욕망, 이주국 지리 환경과의 정서적 공감, 새로운 삶의 개척 의지 등을 재현한다. 이들 작품에 사용된 모국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실존의 영역을 증거하는 시적 형상인 것이다. 이 같은 논의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쟁점 역시 분명하다. 대표적 문제가 이주국 한인문단의 분파적 속성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포함하여, 서정적 언어 구성물로서의 시작 경향이 주류 흐름으로 반복되는 현상은 경계의 대상이다. 치밀한 제도적 기반이 전제되기 어렵다는 게 난관이다. 긴장 없는 자족적 시스템이 매너리즘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실정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살아가는 후속 세대의 중층적 문학 환경 역시 문제적이다. 이런 배경 위에 모국어의 소멸 위기이자 새로운 문학 언어의 개방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이 양립한다. 이형권은 이중언어의 문제 혹은 현지어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국문학의 매개로서 한국어라는 기능적 판단 외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전제로서의 언어관에 입각한 견해로 보인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언으로 마무리된다. 한인이 현지어로 창작한 문학작품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인 문학은 한글 표기를 전제로 하여 그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한인 문학에서 한글 표현과 현지어 표현을 모두 용인하는 것이다. 곤혹스럽지만, 이에 대한 선택의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국외에서 뿌린 한인 문학의 씨앗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인 혹은 한인의 문화가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나가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훗날 그것이 비록 과거형이 될지라도, 발해의 역사가 분명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한인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 『시작』 2022년 여름호) 물리적 경계 간의 거리가 해체된 오늘날에 있어서 ‘영어’로 상징되는 글로벌 의사소통 기호는 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의 위상은 선험적 가치가 되었다. 모국어라는 숙주의 해체는 디아스포라 같은 문학적 타자가 변주하는 또 다른 생성의 선을 개방할 것이다. 이형권 평론은 디아스포라 시인이 모국어를 통해 존재를 형상화하는 양상을 분류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그의 제언은 문학의 타자성을 제도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방안, 다양한 언어와 한국문학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3. 또 다른 감각 혹은 환상 이형권이 조명하는 비평적 타자의 영역은 장르적 다양성이나 문단 경계의 확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학적 상상력의 기반을 재고하려는 이론적 모색 역시 초기 단계부터 지속되어 온 탐구 분야였다. 이와 관련하여 부각되는 주제가 이른바 환상의 역학이다. 환상의 상상력을 집중해서 다룬 평론으로 「발명되는 감각들―현대시와 환상시학」(『발명되는 감각들』)이 있다. 이 글은 비평가 스스로에게도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자리한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지면에서 자신의 대표 평론으로 이 글을 꼽았다. 「발명되는 감각들」은 현대시의 또 다른 주류 범주에 환상의 시를 올려놓은 동력으로 21세기 초의 젊은 시인군을 예시한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혹은 자의식적 시 쓰기에서 벗어나, 환상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표출하는 동시에 시적 형식의 재구를 시도하였다. 환상은 단순한 도피나 유희가 아닌, 미적 전복과 시적 실험의 전략적 기제인 것이다. 이형권은 환상이 현실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요 결 다른 감각을 창조하는 에너지라고 보았다. 김행숙(귀신), 문혜진(메두사), 김민정(아이), 유형진(모니터), 장석원(낙타), 이민하(마네팅) 등의 도발적 이미지를 대표적인 환상의 장치로 거론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환상들이 현실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미적 전유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감동으로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면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된 시편들의 수용적 거리감은 실험적 외장의 포즈에 비례한다. 일부 작품의 경우 감각의 발명보다는 소재주의적 실험 경향이 짙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이형권 역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나 문학적 진정성의 결여를 경계하였다. 이는 환상의 시학이 진정한 문학적 성취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파격에 수반되는 사유의 깊이를 구조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어서 이 글은 환상의 상상력이 폐쇄성과 섹트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역설한다. 환상은 기호로 재현될 수 없는 실재에 다가서기 위한 언어적 우회로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서정성이나 진정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독자의 기대지평에 어떻게 관계되고 소통하는지의 문제이다. 문학의 경계를 재구성하려는 이형권의 비평적 모색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최근 사례로서 「리진: 로씨아 땅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하늘」(『시작』 2024년 겨울호)은 재러 시인 리진의 경우를 조명한다. 북한 정권에 저항하며 무국적자로 소련에서 살아가게 된 배경, 그의 시가 조국과 언어 정체성을 고수했던 흔적을 개관해 주었다. 이형권은 리진 시의 본질을 우리 언어에 대한 사랑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체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리진의 시적 형상이 재러 고려인들의 보편적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관찰을 담고 있으며, 언어가 곧 민족을 잇는 정신적 뿌리라는 기존의 모국어 인식과도 연동된다.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실존의 기반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모국어는 실체 없는 상징에 머물 수도 있다. 리진의 시가 제한된 독자층에만 읽혔다는 사실은 언어의 고립성과 함께 시적 단절을 지시한다. 이형권 비평이 집중적으로 수렴해 온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현황 속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형권 비평을 포함한 한국문학의 제도는 보다 정치한 장르론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또 다른 환상의 영역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 이형권 비평이 전유하고 있는 시학적 개념으로서의 환상은 우리 시대의 자유를 사유하는 철학적 기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젝의 현학적 분석에 따르면 환상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그 논리를 보면, 무의식은 매끄러운 인과적 연결이 아니라 트라우마적 침입에서 비롯된 충격과 잔여이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증상(symptoms)’은 트라우마적 단절에 대처하는 방식이요, 그런 단절을 가리기 위한 형성물로 ‘환상(fantasy)’이 작동한다. 이처럼 지젝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자유 의지를 분석하는 기제로서 환상을 전유하고 있다. 현대의 이성은 실재와 같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의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자유가 존재 방식의 근원적 가능성일 때에도, 자아는 결정된 존재일지언정 우리는 자유로운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타자의 균열에 공명하는 무언가로서 미친 도박이자 자기 자신에 선행하는 위태로운 도약이 된다.(지젝, 『자유, 치유할 수 없는 질병』) 결국 주체는 그 자체가 객관화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 간극을 지양하고, 필연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환상은 비롯된다. 동일성의 장르로서 시 역시 동종의 운명 위에 놓여 있다. 이 위태로운 서정시의 미래를 보듬어 공동체의 담론으로 이끈 양태가 곧 이형권 비평이 천착해 온 타자의 외연이기도 할 것이다.

계간 현대비평 남기택 이형권감각공감타자환상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