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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인 | 2024년 가을호(제15호)

흙벽에 씌어진 유서 : 안회남의 「농민의 비애」 읽기

임세화 문학평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성균관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교양 없는 시대의 교양: 이념이 사라진 시대의 교육 기계들과 교실 이데아」 등의 평론을 발표함.

흙벽에 씌어진 유서

안회남의 농민의 비애」(문학, 1948) 읽기

 

임세화

 

1. 다시, 역사전쟁의 한복판에서

영화 <건국전쟁>(2024)을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해방건국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쟁점임을 보여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건국전쟁>은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경유한 시간을 무도한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기 위한 쟁투의 역사로 서사화한다. 그 장엄한 역사의 중심에는 국부(國父)’ 이승만이 있다. 제주4·3, 여순사건, 보도연맹 등의 민간인 학살은 남로당에 의해 조직된 선동에 맞선 빨갱이소탕으로 묘사되고, ‘독재자라는 역사의 날인은 좌파들에 의한 왜곡으로 부정된다. 1948년의 단정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칭하는 관점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 다시 쓰기를 두고 벌어지는 이러한 갈등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민주화운동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현대사의 복잡다단한 흐름과 국면을 좌우대립의 프레임으로 고착화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한계를 노정한다. 더불어 이승만이 국부였나 독재자였나를 논쟁하는 과정에서, 학살당한 양민들과 비참한 역사를 살아낸 민중들의 삶은 반공을 위해 희생된 제물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건국의 빛나는 신화 뒤에서 이러한 희생은 비약적인 경제적 성장을 이룩한 자유 대한민국의 밑거름이자 그림자로서 암묵적인 은폐의 영역으로 퇴출되는 것이다.

<건국전쟁>은 필리핀의 독재와 이승만의 독재를 그 의도와 질적 수준이 다른 것으로 비교하며, 결과론적으로 현재 두 나라의 GDP와 경제적 상황이 그 차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반공-자유주의의 이념적 우월성은 곧 경제적 부()라는 가시적 지표로 환치된다. /(功過)론의 프레임 속에서 독재와 학살과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불가피했던 선택이자 좌파의 악의적 왜곡이라는 이념론 속으로 봉인되어버린다. 이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친일협력자, 독립운동가를 둘러싼 배상-처벌-기록이라는 문제를 여전히 미제의 난맥에 놓이게 하는 중대한 원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의 근간을 형성한 해방기라는 중요한 시기를 좌우 대립이라는 이념의 프레임에 가둬버리는 것은 양각으로 튀어나온 반쪽의 역사만을 재차 찍어내는(screening) 것과 다를 바 없다. 남한의 공적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나머지 반쪽의 영역을 역사의 음각이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목소리를 빼앗기거나 존재를 부정당했던 사람들의 욕망과 흔적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역사 전쟁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그 음각의 영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남한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 북한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긴 월북문인들의 경우 체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감각 속에서 남·북한의 제도 정립과 경제·생활상의 문제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식민 통치하에 구축된 검열 체제가 가혹하게 재작동하기 시작한 남한사회에서 사건/사태/범죄로 낙인찍히거나 공적으로 기록되지 못한 현실들을 남한에 거주하던 작가들은 각자의 체험과 취재를 통해 그려냈던 것이다. 안회남은 그 대표적 작가 중 한 명이다.

안회남(安懷南, 1909∼)1931년 등단한 이래 소설과 평론 등을 꾸준히 발표하며 활동했지만, 해방 전까지는 흔히 신변소설을 쓰는 작가로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지배와 해방은 그의 삶에도 큰 결절을 가져오게 된다. 서울에서 잡지사와 상사회사 등에 다니던 안회남은 퇴사 후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이 있는 충남 연기군 전의면으로 이사하여 문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1944년 마을의 농민들에게 징용장이 대거 발부되며 안회남 역시 징용장을 받아들게 된다.

징용자 명단에서 이름을 빼기 위해 안회남은 급히 상경하여 조선문인보국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징용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1944926일 충남 연기군 주민 133명과 함께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탄광으로 끌려간다. 조선의 문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탄광에 징용을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 년 만인 1945926일 안회남은 해방된 고국에 돌아오게 된다.

조선으로 귀환한 뒤 안회남은 탄광에서의 징용 체험을 서사화한 」, 「」, 「탄갱등의 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일제 청산과 더불어 민족성 회복의 글쓰기가 긴요한 과업으로 요청되던 상황에서 작가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징용의 서사와 그 자신이 징용자였던 작가의 정체성은 중요한 문학적 위상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이후 안회남의 문학적 관심은 사변적인 것으로부터 조선사회의 현실적 문제들로 확장되며 작가로서의 전성기를 맞는다.

19193·1운동과 1946년의 대구 10월 항쟁을 연계하여 서사화한 소설 폭풍의 역사」(문학평론, 1947.4)는 임화로부터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애매하게 처리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8·15이후 틀림없는 역작”1)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가난과 부조리에 허덕이는 농민의 비극을 그린 소설 농민의 비애」(문학, 1948.4)는 김동석으로부터 “8·15 후 조선문단의 최대의 수확”2)라는 평을 이끌어냈다. 백철 역시 농민의 비애에 대해 일부에서 이 작품을 선전 포스터에까지 끌어 내리고 있으나 이 작품은 그 점에선 작가가 상당한 경계를 한 작품이며, “강렬한 정치적 주제에 응한 것이면서도 그 주제가 노골적으로 독자에게 강요되지 않은 점은 실로 이 작품이 성공한 점”3)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안회남의 문학적 전환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창작 테제를 일견 수용한 것이면서도 조선의 현실적 문제의 입체화”, “생활화”4)를 창작적 측면에서 고민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물려받은 땅이 있었으나 대지주가 아니었고, 귀환한 후에도 충남 연기군에서 어머니와 아내, 아이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가던 안회남에게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는 빈곤은 더 뼈아픈 것이었을 터이다. 특히 그 자신이 과거 부재지주이자 자작농이었던 안회남은 해방을 전후한 농촌의 현실을 직접 삶으로 체험했다는 작가적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의 문학적 전환이후 안회남의 글쓰기는 조선문학가동맹 창작방법론의 규준 속에서 평가되어왔지만, 한국 사회의 현재적 기억과 이념 갈등 속에서 감춰지고 후경화된 해방의 풍경과 당대적 욕망이 기입되었다는 점에서 안회남의 작품은 새롭게 읽혀질 필요가 있다.

 

 

2. 비참했던 해방의 풍경

해방은 기쁨에 찬 조선인들의 함성과 나부끼는 태극기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함석헌의 유명한 말처럼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이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해방은 억압적 식민 체제를 종식시키고 사람들에게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해방이 초래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해방을 전후해서 일본인들이 통

화를 남발하고 비축했던 물자와 화폐가 풀려 시장 질서가 교란되면서 조선의 경제계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거기에 징용이나 강제이주 등으로 국외에 머물던 사람들이 대거 귀국하는데, 해방 이후 1년여 동안 남한으로 유입된 인구만 약 266만 명 이상5)으로 추산될 정도였다. 실업난과 주택부족에 더해 미군정의 자유시장 정책마저 실패하면서 조선의 경제계는 문자 그대로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6)고 서술될 만큼 일대 파국을 맞게 된다. 서울의 도매 물가는 해방 직후 약 2개월 간 7.5배 상승하였으며, 6개월 동안 16배 상승, 정부 수립 시까지는 무려 67.1배 상승하였다7). 급격한 인구 폭증에 대응하지 못한 미군정의 정책 실패와 그에 협잡한 모리배들의 준동은 사람들에게 해방이란 무엇인가를 회의하게 했다.

한 외국인 여성이 목도한 1945년 남한의 현실은 그야말로 생존과의 사투였다. “비참할 정도로 실업이 만연한 현실에서 실업자의 대규모 행렬이 이어졌고, 농민들은 지주에게 진 빚과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미군정의 쌀 가격 정책이 실패하여 쌀값이 폭등하고 그나마도 야미쌀 암매매로 시장에서 쌀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농민들은 풀과 나무뿌리를 먹고고통 속에서 목숨을 부지했다.8) 그 와중에 1946년에는 끔찍한 가뭄과 콜레라가 남한을 덮쳤다. 해방과 함께 행복한 삶이 도래할 것이라 믿던 사람들의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주목할 점은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기아로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 북한이라는 비교항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남한과 대조적으로 북한은 인민위원회 주도로 19463월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분배하였고, 일본인의 공장과 기업을 접수하여 공동 운영 체제를 확립했다. 노동법령을 공포하여 기존 일본인과 임금 차별을 받아야했던 조선인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노동시간과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 개혁을 단행했다. 내부적 갈등과 파열은 존재했을 터이나 당장의 생존에 허덕여야 하는 남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북한의 개혁은 중요한 비교항이자 해방의 준거점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의 주요 언론들에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이 전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진 와중에 미군정은 실패한 미곡 정책을 수습하기 위한 일환으로 하곡 공출을 시행했다. 쌀값 급상승과 엄청난 인플레이션, 홍수와 콜레라까지 일어난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공출로 낼 쌀이 없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르러 이미 일제가 집안의 놋수저 식기까지 싹 끌어간 형편에 한 번 더 마른수건을 쥐어짜야 했던 것이다.

하곡공출은 왜정시대에도 없었던 것이라는 원성은 해방 이후 더욱 극심해진 생활고와 해방을 기쁨으로 여겼던 사람들의 좌절을 보여준다. 게다가 하곡공출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미군정은 경찰력을 동원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강제적 하곡 공출을 단행한다. 문제는 친일파 청산에 대한 민중들의 원한이 컸던 상황에서 미군정이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경찰들을 대거 기용했고, 이들이 다시 민중들을 향해 완장을 바꿔 차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전에 일본 경찰은 심하게 구는 데도 오히려 정도가 있었다고 할만큼 지금의 경찰은 더 무지하고 무법하기 짝이 없었다. 의례히 반말, 의례히 욕이였고 불한당떼 모양으로 아무 집이나 막 달려들어 뒤지다가 곡식이 없으면 곳과 로소 남녀를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함부로 두드려 패고 총대로 짓찧고 그래도 부족해서 총을 탕탕 놓고 위협하며 트럭으로 五명 六명씩 잡아 싣고 주재소로 경찰서로 끌고 가서 죽어라고 패주고 가두고 하였다.9)

 

일제시대보다도 더 무도한 방식으로 민중들을 폭압하는 미군정 경찰에 대한 분노는 친일협잡에 대한 원한과 함께 점차 누적되었다. 거기에 더해 당장의 생존마저 위협 당하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 하곡공출은 남한 민중들을 폭발시키는 기제가 된다. 194610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남한 전역으로 확대된 ‘10월 항쟁은 이러한 배경에서 촉발된 민중들의 봉기였다. 9월말 기아행진에 이어 10월 항쟁에서 외쳐진 쌀을 달라라는 구호는 거의 모든 국민이 결식상태”10)였던 배고픈 상황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의 처절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 왔던 <시카고 선(Chicago Sun)>의 기자 마크 게인은 대부분의 혁명이 그러하듯이 이 역시 토지와 식량과 정의에 대한 굶주림이라는 뿌리깊은 고통에서 유래하고 있었다기록한 바 있다. 좌익의 선동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수적으로도 대구에서만 15만 주민 중 3분의 1이 봉기에 참여했을 정도로 수십만은 관련되어 있는 대규모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11)안회남의 폭풍의 역사」(1947.4)는 이러한 10월 항쟁을 배경으로 남한 민중들의 현실을 그려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 등을 동원해 항쟁을 무력 진압했다. 항쟁 당시 민중들의 원한의 표적이 되었던 경찰들은 진압의 선봉에 섰다. 배곯은 민중들은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공산 폭도로 규정 당했다. 경상북도에서만 약 77여 만 명이 참여했으며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5천여 명이 검거된 대규모 항쟁이었고, 이후 여순사건과 제주4·3으로 이어지는 공권력에 의한 학살의 교두보를 구축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사건은 금기처럼 여겨지며 침묵의 장막 속에 가려져왔다. 박정희(1917∼1979)의 형 박상희 역시 10월 항쟁의 진압 과정에서 경찰에 사살당한 항쟁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

10월 항쟁 이후 미군정은 더 철저한 검열과 사전 검거 체제를 가동했으며, 1948216UN총회에서 사실상 단독 선거안인 가능 지역 총선거안이 가결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기정사실처럼 되어갔다. 극렬한 이념 갈등과 탄압 속에서도 그러나 민중들의 생활은 달라진 게 없었다. 「폭풍의 역사」 1년 뒤 발표된 농민의 비애」(1948.4)는 이처럼 더 이상 정치적 전망을 발견하기 어려워진 시점에 놓인 남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3. 농민들의 나라

농민의 비애」(문학, 1948.4)는 땅 없는 농민 서대응 노인의 희망과 절망, 죽음을 조선의 역사적 결절들과 겹쳐 형상화하고 있다. 가진 것도 없고 권력도 없는 농민 서대응은 일제시기부터 고통 속에 살아온 수많은 조선 농민들의 평범한 얼굴에 다름 아니다. 또한 그것은 대를 물려 겪어야 했던 고통이자 폭력이다. 서대응의 부친은 구한말 동학당으로 몰려 죽었고, 서대응의 아들은 일제 징용에 끌려가 죽었다. 그의 손녀 영이는 유복자로 태어나 배고픔에 시달린다. 구한말 조선나라의 백성이었던 시절에도, 나라가 해방된 후에도, 민중들의 비애는 계속된다. 그것은 단지 식민체제만의 문제성이 아니라 반봉건 사회의 모순, 지배세력의 계급적 착취와 횡포가 얽힌 사회 구조적 병폐이다.

구한말 위정자와 그 부하들은 일신상의 편안함과 모리(謀利)에만 급급하여 가진 못된 짓을했고, “기어코, 한국이 망하야 일본에 병탐되었을 때, 정부 기관을 가지고 백성을 못살게 하며 억누르고 있던 놈들이 나라를 팔아먹었다.” “민족 반역자 매국노들은 일본의 사작을 받아 귀족의 칭호를 받았고, “일인의 손으로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어 측량등기가 끝났을 적엔 세력 있던 양반들이 지주가 된 대신 많은 농민들은 토지를 잃었으며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양식 아래에 소작인이라는 근세적 반노예로 전환되고 말았다는 조선근세사에 대한 서술자의 평가는 농민의 비애에서 농민들의 궁핍한 삶과 운명을 통찰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땅을 잃은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떠돌며 소작인이 되었고 조선의 농민들은 농민이면서 농민이 아닌 인간 이하의 식생활을 하여왔다.” 서대응은 육십 평생을 살도록 쌀밥 한 그릇을 먹지 못하고 보리, 좁쌀, 강냉이로 연명했다. 그것은 “8·15해방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농민들은 이제 만주 좁쌀 대신 어디서 나는지 모르는 밀가루를 먹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감자, 고구마, 콩으로 연명하는 처지가 된다.

동학당으로 몰려 죽은 서대응의 아버지나 강제 징용에 끌려가 죽은 아들이나 모두 국가의 폭정에 의한 피해자들이다. 농민들에게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무용한 일이다. 국가는 농민들에게 공출과 노동력을 착취하지만 그들을 보호해주지는 않는 이상한 존재이다.

 

농군들에게는 나라라는 관념이 이상했다. 그들에게는 언제든지 나라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백성이다 하는 의식을 항상 갖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속에는 구한국 봉건 시대나, 왜정의 식민지 시대나, 해방 후 군정시대나, 남북 통일 완전 독립의 그 전이나 후나, 늘 나라가 있고 또 자기네들은 언제든지 백성일 것이다. 지배하고 지배당할 뿐인 것이다. 그것은 혈연의 신분적인 것과 종교적인 심리까지가 포함되어 자기네의 위에 대한 귀의하고 복종하는 심정이다. (「농민의 비애」)

 

농민들에게 나라를 감각하게 하는 기제는 피상적인 정치 타령이 아니라 오히려 잔존하는 친일파들의 얼굴이며 당장 빼앗기는 공출과 소작료 제도이다. 서대응 노인은 왜정 때 면서기 노릇한 사람해방 후 새로이 된 면서기엄밀히 구별한다. 그들이 무섭고 또 원수로 여기면서도 아무 반항도 보복도 못하지만 해방 전후의 면서기를 구별해서, 한 패에게는 인사도 말도 안 하고, 새 면서기에게만 기대와 호의를 갖는 것은, 그의 독특한 농민적 성격에서 나오는 말하자면 소극적 투쟁이다.

그들 농군은 모스크바 결정도 유엔도 신탁도 반탁도,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자본주의,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우익 좌익도 몰랐,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지만 단지 오늘날 좌우익 어느 편이, 금일의 현실을 지지하고 좋아하고, 친일파와 손을 맞잡고 있느냐? 이것 한 가지만은 즉각적으로 느껴 알고 있다.” “(유엔)손님이 왔다는데, 다른 누구보다도 왜 그들 친일파가 좋아하나, 대통령을 뽑는 눈치인데 선거란 뭔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와중에도 그것이 필연코 좋지 못한 징조임을 농민들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농민들을 직접 움직이고 애달프게 하는 것은 사랑방에서의 정치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 정치제도를 악랄하게 이용하는 지주의 농간이다.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지주 이선달은 (소작할) “논을 주마라는 한마디로 마을 사람들을 부려먹는다. “농민들은 농사짓고 소작료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얻기 위해서 또는 땅을 지어 먹는 죄로 지주에게 반 종노릇을 하는것이었고, “물론 착취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며 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대응 역시 공()으로 이선달 집 일을 해주고, 혹시나 밥 한 끼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마당에 쌓인 눈까지 모조리 쓸어준다. 땅을 얻기는커녕 수년간 땅을 주마하는 말에 휘둘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농민들에게 별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이다. 십 리 밖에 있는 땅을 상답(上畓)으로 만들면 소작을 주겠다는 말에 또 다시 속은 서대응과 최만돌은 겨울 내내 거름을 져 나른다. 이처럼 일제시기부터 계속되던 지주의 횡포는 해방이 되었다고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계급적 모순과 착취의 구조를 공고히 한 채로 농민들을 옭아매고 있다는 점이 폭로되는 것이다.

 

 

4. 죽고 사라진 시간을 써나가는 일

그렇다면 안회남은 왜 남한 현실의 비참을 보여주기 위한 인물로 농민을 선택했을까. 전 국민의 77%가 농업에 종사12)할 정도로 조선의 주력 산업은 농업이었고, 이중 자작농 비율은 17%(1943년 조사)13)에 불과했다. 편중된 산업구조와 소작 비율은 조선 사회의 발전을 막는 중대 문제로 여겨졌다. “토지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완전한 민족의 해방이 없다”14)는 관점은 좌우익이 모두 공유하는 해방기 사회의 인식이었고 토지개혁을 해방의 증좌이자 제1과제로 여기게 했다.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완료되고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소문은 남한사회를 술렁이게 했다. 한민당을 위시한 지주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던 남한에서는 토지개혁에 대한 합의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민중의 목소리와 민심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토지개혁을 완료한 북한사회와 체제적 우월성을 경합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군정은 지주와 소작인이 37의 비율로 수확물을 나누는 제도인 삼칠제를 단행하게 된다.

당장 소작 부칠 땅을 구하기도 어려운 농민들의 입장에서 삼칠제는 더 큰 어려움을 불러온다. 토지개혁의 불안에 시달리는 지주에게도 땅을 떼일까 걱정하는 농민에게도 삼칠제는 재앙이었다. “조선 농가의 대부분이 영세 경작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삼칠제를 한다고 작인이 무슨 큰 혜택을 입는 것은 아니, 오히려 옛날에는 가져가지 않던 짚단까지 지주가 빼앗아 가거나 아예 소작지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농민의 비애의 지주 이선달도 겨우내 거름을 내면 소작 주기로 약속했던 십 리 밖 땅을 삼칠제를 핑계로 팔아버린다. 소작료가 줄어든 데다가 공출에 지주 몫을 가져간 것도 불만이고, 땅을 무상몰수했다는 북한의 소문도 그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농민의 비애는 북한사회의 변화된 환경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남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통해 진정한 해방과 탈식민의 과제를 완수한 북한의 상황을 소설의 배면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10월 항쟁이 무력 진압되고 친일파와 악덕지주가 더욱 활개를 치는 남한 농촌의 상황에서 희망적 서사는 씌어질 수 없었다. 「농민의 비애왜정 때는 비록 농부들이 쌀 농사를 지어, 쌀은 빼앗기고 만주 좁쌀로 연명을 했었으나 모두 마음은 고왔었다며 해방 전보다 각박해진 마을 사람들의 심성을 지적한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남의 곡식이야 상하거나 말거나 호방 넝쿨 같은 것까지 꼴을 해갔고, 서울로 야미 장사를 하러 다니거나, 륙색에다 남의 농작물을 다 훔쳐간다. 이전에는 서로 돌보며 가까이 지내던 최만돌네 가족 역시 서대응이 찾아온 방에 밥 한 대접을 들였다가 다시 밖으로 빼는 등 극심한 가난에 자연히 마음까지 각박해지는 것이다.


먹을 입이라도 덜겠다고 며느리가 재가한 이후 서대응 노인은 손녀 영이를 먹이고 키우며 살아간다. 지주 이선달이 주겠노라 약속했던 십 리 밖 논이 그에게는 유일한 희망이다. 서대응은 이번 겨울에야 설마 단 한 마지기라도 붙이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이선달의 눈치코치 보이는 대로, 무엇이고 긴히 고생을 하는 것이다.

농민의 비애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유일하게 이 한 마지기의 땅에 붙여진다. 나중에 이선달은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어기지만, 결국 서대응 노인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은 손녀를 먹일 수 있는, 미래에 부치게 될 땅 한 마지기였던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서대응은 죽음을 맞이하며 그 희망의 파기를 보지 못한다.

서대응의 또 다른 소망 하나는 노루를 잡는 것이었다. 노루를 잡아 고기로 배고픔을 달래고 가죽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려 했던 것이다. 서대응은 와이어줄로 올가미로 만들어 노루를 잡으러 다닌다. 단지 먹고 가죽을 만들 심산으로만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노루는 엄청나게 매혹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노루다!”

그는 자기 모르게 외쳤다. 보니까 노루 두 마리가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있다. 그것은 참으로 황홀한 정경이었다. 미끈하게 생긴 노루 한 쌍이 밝고도 맑은 달빛을 받으며, 하얀 백설 우를 가루시루 뛰며 있는 것은 상상 못할 그야말로 선경이었다. 푸르스름한 빛, 꿈같은 그림이었다.

 

한밤 노루를 본 서대응은 홀리듯 노루를 따라가 눈밭을 헤맨다. 사냥감을 쫓는 발걸음이 아니라 무엇에 홀린 듯이 노루를 뒤따른 것이다. 눈 덮인 산 속에서 하나뿐인 나막신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은 채 헤매던 서대응은 환영처럼 굴뚝 위로 솟아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본다. 그것은 배고픈 노인에게 한 순간의 희망이자 오랜 절망이었다. 굴뚝의 연기는 영이를 데려가려고 집에 찾아온 며느리가 땐 장작불이었다. “할아버지하구 살 테야라며 재롱을 떨던 영이는 이제 엄마의 품 안에서 , 엄마하구 살어라며 진심을 보인다. 서대응 노인은 속으로 눈물 없는 울음을 울며 영이를 떠나보낸다. 이제 그가 땅에 연연할 까닭도, 노루를 잡을 이유도 사라진 것이다. 며칠 간 폭설이 계속된 뒤에 서대응의 집을 찾은 최만돌이 그를 발견한다.

 

서대응 노인은 와이어줄로 실겅에다 목을 매어 죽었다. 오막싸리 실겅으로는 적잖이 높건만 서대응은 키가 커서 염려가 됐던지, 실겅 및 방고래를 미리 둥그렇게 파헤쳤다. 물론 노인의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크고 긴 몸집이 축 늘어져 빳빳이 매달렸고 철사로 꼰 쇠줄이 푹 목 밑에 배겼으며, 죽은 사람의 얼굴빛은 그냥 철색으로 까맸다.

 

혹시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까봐 서대응은 움푹하게 파헤친 방고래 위로 목을 매어 죽는다. 서대응의 목에 감긴 것은 그가 노루를 잡기 위해 구한 와이어줄이었다. 최만돌은 서대응의 시체를 발견하던 날 마당에서 봉당으로 방문 앞에까지 이어져 있던 노루 발자국을 떠올리며 영이 할아버지는 꼭 노루한테 홀려 돌아가셨어라고 생각한다. 서대응이 노루를 잡은 것이 아니라, 노루가 서대응을 잡았다는 것이다.

영이 할아버지 돌아가신 것을, 노루란 놈은 내려와서 달빛에 가만히 방문 구멍으로 들여다보구 갔을 거라는 말에 영이 어머니는 쓰디쓴 웃음을 짓는다. “너무나 못 살아서 이 지경이 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흰밥을 지어 드리니 서대응이 이게 웬 밥이냐!”며 실성한 사람처럼 정신을 못 차렸던 기억 때문이다. 그리고 영이를 들쳐 업고 나올 때 한 발 나막신을 신고 봉당 기둥에 쓰러진 듯, 기대어 서서 탄식을 하며 바라보던 노인의 모양.”

서대응의 존재는 매우 단편적인 장면과 추측으로 몇몇 주변인에게만 기억된다. 노인의 자살로 한동안 수런거리던 마을 역시 새로운 화제들로 들끓는다. 마치 관아에 끌려가 강제로 눕혀져 냉수에 젖은 백지장 밑에서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식해 죽은 아버지의 얼굴과 또 그보다 못지 않게 처참히 죽었을 아들의 기억처럼, 그 삶들은 개별적인 고통과 망각 속에서만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서대응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 자신의 목소리를 남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48년 초봄으로 남한 단독선거를 앞두고 선거 기표를 위해 관 주도로 마을 사람들을 매일 야학방에서 공부시키던 장면을 담고 있다. 이른바 문맹퇴치를 위한 관 주도의 교육 사업은 남북히 공히 실시되었다. 「농민의 비애에서도 면서기가 글 배우기를 어려워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당신네들이 언문을 몰라서 조선 독립이 안 돼요라고 타박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오늘날과 같은 11표제는 아니었지만 민주주의의 형식을 표방하여 대의를 담은 선거라는 제도를 실시함에 있어 피선거권자와 선거권자의 이름 석 자 정도를 읽고 쓸 줄 아는 문해력이 요청되었던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남한과 북한의 체제 경쟁 속에서 특히 교육 사업을 통한 선전 작업은 중요한 정책적 방향이기도 했다. 서대응 역시 삼월달에 우리나라가 독립하느라고 총선거를 하면 그때 이름들을 잘 쓸 줄 알어야한다는 면서기의 당부 속에서 종이와 연필을 받아 한글을 공부한다. 그리고 이때 익힌 한글로 서대응은 유서를 남긴다.

불꺼진 화로에 앙상하게 남은 숯으로 서대응은 영이야 잘살어라/ 가서 잘살어라/ 잘살어라라는 축복의 말을 적었다.

 

그 끝편에다가,

나는 죽어 노루나 되지

이렇게 씨워 있었다. 그리고,

죽는 사람

하고는 옆줄로 똑 야학방에서 칠판에다 성명 석 자를 쓰던 고대로,

서 대 응

서 대 응

서 대 응

무슨 말인지 세 번을 나란히 썼다.

 

서대응 노인은 죽는 사람이라는 예언적 명명을 빌려 흙벽 위에 자신의 존재와 이름을 남긴 것이다. 또박또박 글자가 새겨지던 그 시간은, 산꼭대기에 산다고 간단히 야마무라라는 이름이 붙여지거나 지주나 관리에 의해 통제되고 정의되고 이용당하던 도구적 대상으로서의 삶을 벗어난 순간이다. 서대응이 남긴 글자들은 그 자신의 내면을 관통하고 세상으로 향해 나가는 또렷하고 주체적인 메시지이다. 죽어서 노루가 되겠다는 그의 바람은 최만돌이 목격했던 방문 앞의 노루 발자국과 조응하며 죽음 이후에서야 비로소 펼쳐지는 새로운 선경을 상상케 한다.

그리고 그 글자들을 읽어준다는 것. 영이 어머니와 재혼한 월봉이가 띠엄띠엄노인의 유서를 읽어나가는 장면은 단절되고 그 명맥이 흩어진 채로 부유했던 민중들의 목소리와 욕망이 비로소 이후의 시간과 존재들에 현재성을 갖게 되고 현현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쉽게 지워지고 뭉뚱그려지는 흔적 없는 존재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목소리와 꿈을 가지고 있던 인간으로서 서대응 노인은 영속적인 존재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수단은 역설적이게도 관에 의해 강제로 배워야 했던 한글이지만, 읽고 쓰게 된 농민 대중의 역량과 가능성은 상징적인 형태로나마 비로소 가시화될 수 있었다.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을 거쳐 10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민중이라는 대명사로만 남은 존재들과 그들의 꿈은 죽음이라는 비극을 경유한 위에서 다시 씌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이념 갈등이라는 틀로 구조화된 해방의 역사 속에서 다시 들여다보아야 하는 은폐된 진실이자 또 하나의 역사이다. 그것은 마치 눈 녹은 산 속에서 형체를 드러낸 서대응 노인의 잃어버린 나막신 한 짝처럼 무르익은 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유적일 것이다.

 

 

 

<작가 소개>

안회남(安懷南, 1909∼)

안회남은 1909년 서울 출생으로 금수회의록의 저자 안국선의 외아들이다. 본명은 필승(必承). 집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20년 수송보통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였으나 3학년에 자퇴하고 약 8개월 간 한성강습소에서 수학했다. 19234월 휘문고보에 입학하였으나 1926년 안국선의 사망 이후 집안이 급속하게 몰락하였고 192712월 중퇴한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3등 당선, 1932년 매일일보 신춘문예에 애정의 비애2등 당선되었다. 19331월 개벽사에 취직하여 잡지의 편집을 맡는 한편 많은 단편소설과 평론을 발표했다. 19353월 퇴사한 뒤 상사회사에 짧게 근무하다 유산으로 받은 땅이 있는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으로 이주하여 서울을 오가며 활동했다.

1944926일 충남 연기군 농민 133명과 함께 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탄광에 징용 당했다가, 일 년 만인 1945926일 귀국했다.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분과 부위원장 겸 농민문학위원회 서기장을 맡았고, 19468월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북한 인민공화국 인민회의에서 남조선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선문학가동맹 맹원들과 함께 월북했다. 월북 후 민주조선 문화부장을 역임했고, 한국전쟁 때 종군작가단의 일원이자 남조선문학가동맹 제1서기장의 직책으로 서울에 왔다. 월북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으나, 1954년 남로당 숙청 때 숙청 당했다는 설, 1966년 사상검토회 때 숙청 당했다는 설 등이 있다.

소설집으로 안회남 단편집(학예사, 1939), 탁류를 헤치고(1942), 대지는 부른다(조선출판사, 1944), 전원(고려문화사, 1946), (을유문화사, 1947), 봄이 오면(정음사, 1948) 등이 있다.



  • 1)  임화, 「작품에 관한 서간임화씨로부터 안회남씨에게」, 문학평론, 1947.4.
  • 2)  김동석, 「비약하는 작가()안회남론」, 우리문학, 1948.4.
  • 3)  백철, 「신사상의 주체화문제이태준, 안회남, 박영준의 작품에 관하야」, 신천지, 1948.7.
  • 4)  안회남, 「작품에 관한 서간안회남씨로부터 임화씨에게」, 문학평론, 1947.4.
  • 5) 전재동포원호회중앙본부가 일본, 중국, 만주, 남양, 북한 각지에서 귀국한 전재동포수를 조사한 결과. 「전재민의 실태」, 동아일보, 1946.12.10.
  • 6) 민주주의민족전선 편, 해방조선(1946), 과학과사상, 1988, 387.
  • 7) 조선식산은행, 식산은행월보 4(3), 조선식산은행조사부, 1949, 7.
  • 8)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 김명호 옮김, 1945년 남한에서, 한울, 1996, 256∼259.
  • 9) 이동규, 「김 첨지」(1946.10), 그 전날 밤,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 106∼107.
  • 10) 이일재, 「대구항쟁? 먹을 것이 없어 싸운 거죠」, 문제안 외, 8·15의 기억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 체험, 한길사, 2005, 171.
  • 11) 마크 게인, 도서출판 까치 편집부 옮김, 해방과 미군정―1946.10∼11., 도서출판 까치, 1986, 64∼65.
  • 12) 김석준, 미군정 시대의 국가와 행정, 이화여대출판부, 1996, 368.
  • 13) 조선은행조사부, 조선경제연보, 조선은행조사부, 1948.
  • 14) 封建的土地關係終焉 農民에土地分與」, 해방일보 1946.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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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하혁진 광장의 흔적, 흔적의 광장 ―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계간 문학인 하혁진 윤은성유리 광장에서광장공동체동일성타자성연대시민 2025
성현아 필화(筆禍)와 필화(筆花)의 역사 ― 『한국 현대 필화사』(소명출판, 2024)

1.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국가폭력으로서의 필화 2024년의 겨울밤, 반국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계엄이 선포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답시고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태는 잡은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해 우선 폭력을 행사하고 이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비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미는 국가폭력의 메커니즘과 완전히 일치한다. ‘반국가세력’이라는 범주는 실체 없고 추상적이기에 누구든 반국가활동에 연루되게 만들 수 있다. 이 만능 단어 앞에서 우리는 국가라기보다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집권 세력에 반하는 이라면 누구나 ‘종북 좌파’, ‘빨갱이’로 낙인찍어 왔던 익숙한 책임 전가 방식을 환기하게 된다. 계엄령 선포 전에 발간된 책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4)에서 일찍이 임헌영 작가가 “반공독재 체제로서의 국가형성의 골조”가 “미군정 시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거쳐” 현재의 “윤석열 검찰독재”(177쪽)로 이어졌 왔음을 짚어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민주주의를 빼앗길 뻔한 국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할 때, 군인이 자국민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상기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고,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는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광장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위반할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처단”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가 첫 피난지인 대전에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어 적에게 협력한 사람을 3심이 아닌 “1심 단독 종심終審”(384쪽)으로 처벌하도록 하여 “모든 과오를 부역자들에게 전가해서 오히려 ‘레드 콤플렉스’를 심화시킬 수 있는”(408쪽) 기회를 잡았던 맥락과도 유사하다. 계엄이 선포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체포조를 가동하여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등을 구금하려 했던 정황을 살피면, 계엄령 선포 이전의 행위에도 해당 포고령을 소급하여 적용하려던 악의를 확인할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과 제주 4·3을 다룬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에 한국의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 출판 검열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한강 작가가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그의 책 『채식주의자』가 유해 도서로 지정되어 폐기 처리되었던 것과 아주 다르지 않다.1) 출판 검열은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 아래에서만 행해지는 특수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우리 곁에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다. 『한국 현대 필화사 1』의 권두에서 임헌영 작가는 ‘필화(筆禍)’의 개념을 먼저 소개한다. 필화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이나 의사를 자유롭게 나타내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개인이나 집단에 국가가 가하는 제재와 압력, 형벌 등에 대한 총칭”(4쪽)이다. 그는, 필화는 권력을 지닌 세력이 행사하는 명백한 폭력이므로 허위나 날조를 제재하는 벌칙과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말한다. 문학뿐 아니라 영화, 공연, 정치, 언론 등에서도 이와 같은 탄압은 일어나기 때문에 필화는 통념과는 다르게 문학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임헌영은 문학을 비롯하여 영화나 공연, 정치나 언론 전반에서 일어났던 필화사건을 두루 다루고 있다. 더불어 더욱 다양한 소통 매체들이 생겨난 현대에서의 필화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수단으로 인간이 행사하는 모든 의사소통에 대한 직간접적인 제재 일체”(5쪽)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필화의 핵심은 무력을 사용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탄압했느냐의 문제다. 서문에서 그는, 반나치적이라고 판정받은 인사들의 저작물을 태웠던 1933년의 분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유태인 미술가 미하 울만이 설치한 작품 ‘도서관’의 안내판 문구를 인용한다. “그것은 다만 서곡이었다. 책을 태운 자들은 결국에는 사람도 태울 것이다.”라는 하이네의 비극 『알만조르』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로 역사는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입증해 주었다. 임헌영은 저작물을 처형시키는 것이 작가를 간접 살인하는 일과 같다고 일갈한다. 필화란 글만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작가와 그 책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 모두를 감시하고 처형함으로써 결국엔 그 안에 깃든 사상까지도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베카 크누스가 창안한 “도서 대학살Libricide이란 술어”(9쪽)는 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 기반하여 필화 또한 국가폭력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임헌영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로 인한 인명 사상 사건을 지칭하는 국가폭력에 필화를 포함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이해하며, 그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논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헬렌 페인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범주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해 절대적 악의 화신으로 분류되거나 국가의 신화에 의해 적으로 분류된 집단을 집단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적 학살ideological genocide”(21쪽)이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 활동에 가하는 일체의 금지, 제약, 학대, 억압 등”(21쪽)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필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더불어 필화사건에 휘말릴 때 작가들은 구금되거나 감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를 폭력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임헌영을 따라 필화를 국가폭력의 일환으로 해석하게 되면 필화사건을 더욱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 현대 필화사』를 읽으며 우리 삶에 필화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지 체감하게 된다. 2. 탄압받는 사람과 삶, 말살되는 글과 영혼 임헌영은 1945년 8·15 이후부터 시대순으로 필화사건을 배치하고 탄압의 주체에 따라 부를 나누어 그 양상을 살핀다. 제1권의 경우 해방에서 이승만 집권기까지의 필화를 다루고 있으며, 아직 발간되지 않은 제2권은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의 필화를, 제3권은 전두환 쿠데타 이후부터 윤석열 정권까지의 필화를 다룬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방대한 양의 필화를 세밀히 다루어내는 엄청난 작업이다.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필화가 많았던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를 상기하면, 한 사람이 한국의 필화사를 정리한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료를 정리하여 현대사를 짚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 외에 모종의 조치 및 정책이 시행된 이면적 의미까지 예리하게 짚어낸다는 점과 필화를 당한 작가들의 생애 전반을 제시하여 필화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국가권력의 희생양이자 검열의 대상일 뿐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독창적인 예술관을 지니고서 살아온 한 명의 입체적인 사람임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임헌영 작가의 성실성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필화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임헌영 작가가 채택한 서술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깊이 살필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3부 제1장에서 “여류 4인방”(405쪽)이라 불리는 여성 작가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최정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구태여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사는 “모윤숙과 이광수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여 장편소설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의 러브 스토리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은메달급”(405쪽)과 같이 조롱 섞인 어조로 서술된다. 이는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 여전히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남길뿐더러 필화사건에 엮여 고통받는 작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피력하는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 작가의 삶의 일부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기술하여 동등한 작가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어 우려된다. 해당 부분은 거의 700장에 육박하는 책에서 1장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는 하다. 다시 책의 기술 방식이 지니는 장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필화사건 안에서만 작가를 조명하면 그는 단순히 검열과 억압의 희생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만 부각되었을 때 작가는 상징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다소 수동적인 객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글로써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비유를 활용해 우회하여 발화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열의 위협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염결성만이 강조되어 작가 또한 입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비가시화되기도 한다. 임헌영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생애 전반을 자세히 묘사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사실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 친일파라고 해도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에 가깝다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방법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덧붙인다.(142쪽) 악행을 저지른 작가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편이 옳으며, 악인을 단죄하는 의미로 주어지는 “바람직한 필화”(142쪽)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1949년, 문교부가 월북작가 작품을 교과서에서 전체 삭제하고 좌경 문학인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월북한 문학인을 1급,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으로 판단된 문학인을 2, 3급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더불어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 가장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정지용 시인의 경우 사상 검열과 모략에 몹시 시달렸음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지용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월북했다는 풍문에 휩싸이는 등 고초를 겪다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맹하게 되는데, 당시 가입 심사를 밝히며 자신이 “이십삼(二十三) 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 왔”던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임에도 월북하였다는 소문에 휘말려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을 옮기고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2)하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정지용의 슬픈 고백마저도 신문에 보도되어 국민보도연맹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는 점은 해방기의 사상 탄압이 극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1년 10월 1일,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공보당국은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을 발매금지 처분”(307쪽)하고 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를 임헌영은 “반공의식을 고조시켜 아예 독재와 부정부패 등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전면 차단”(308쪽)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작가가 월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향유할 수도 없게 만드는 국가의 조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임헌영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고 해도 “작품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정상”(308쪽)이라고 역설하며, 작가의 행보에 근거하여 작품 자체를 금지 및 폐기하는 방식의 부당성을 다시금 지적한다. 임헌영에 의해 쓰인 필화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필화가 단순히 글과 그에 대한 검열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필화사란 결국 권력 다툼과 정치 싸움 속에서 사람, 그리고 그에 깃든 영혼과 사상을 죽여 온 대학살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한국이라는 특수한 민족사를 보되,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악(惡)과 진리를 향한 양극단의 갈망을 확인하게 된다. 3. 검열 기준의 모순 임헌영의 저서 속에서 우리는 검열의 기준이 모호하다 못해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1948년까지 한국에서 책이 번역된 작가 중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파상, 조지 오웰 등을 꼽는데, 반소 소설로 소개하며 미공보원에서 나서서 번역하여 출판했던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허술함을 보인다.(53쪽, 282쪽 참조)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임수생의 시 「지붕」의 “인간이여, 우린 / 우리의 생활을 찾아 /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 / 고향으로 돌아가자”(567쪽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오독된다. 임수생을 취조했던 형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구는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며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를 예찬하는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한 후, 그의 시를 “빨갱이 시”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부모의 사상 전과를 근거로 한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추측이지만, 이후에도 임수생은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번번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임헌영은 부산 시인 임수생의 일화를 제시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필화사건이 있어왔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더불어 “서울 중심 문화형성 풍토 속에서 전국 각 지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570쪽) 필화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당부한다. 이때 짤막하게 소개되는, 빨치산을 비판하는 영화 『피아골』이 상영 허가 취소를 당한 이유도 자못 황당하다. 빨치산이 키스하는 장면이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괴물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진다. 검열의 기준이 이처럼 모호할뿐더러 쉽게 뒤집히는 것은 검열의 필요성과 실효성이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헛되이 조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필화는 작품을 자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난도질하여 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의 시 「데모」는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 1945)에 실리는데, 이때 추천사를 쓴 이병철과 표지를 그린 정현웅이 이듬해 월북한다. 이에 1953년에 재판이 간행될 때는 이병철의 해제가 빠지고 표지 디자인은 바뀌며, 수록 시 「데모」의 제목은 「행렬」로 변경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인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시구는 삭제된다.(4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하운은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자 『한하운 시전집』을 발간할 때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라는 시행을 추가하고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시 「데모」를 반공 작품으로 변모시킨다.(423~424쪽) 검열과 모략이 어떻게 작품을 훼손하는지, 어떻게 문학을 왜곡하고 그에 담긴 정치성마저 뭉개버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되는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들에까지 관여하게 되며 작가를 자기 검열의 굴레에 가둔다. 혼란스럽기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석한 작품이 기이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4. 필화(筆禍)의 역사이자 필화(筆花)의 역사 필화가 빈번하다는 것은 “질곡과 비극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임헌영이 적절히 지적해 주었듯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4쪽) 필화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악랄한 폭압에 경악하게 되지만,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필화사건은 불의에 맞서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던 국민들의 갈망과 노력이 절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 없던 시대는 없었던 것이 된다. 책의 말미인 제1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향신문』 폐간 사건에 주목해 보자. 1959년 4월 30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언제든지 폐간조치할 수 있도록 규정”(656쪽)한 미군정법령 제88호(1946.5.29)에 의해 『경향신문』은 페간된다. 1946년 10월 창간 당시부터 친일파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점과 칼럼 「여적(餘滴)」란의 논조 등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경향신문』의 발행 허가를 취소한 것에 더해 사옥에 꽂힌 기를 내리게 하고 마크를 떼어내게 하여 상징물까지 모두 금지하는데, 임헌영은 이러한 조처는 여타의 필화사건에서도 보기 드문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부연하며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655쪽)이라고 진단한다. 주목할 점은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이후의 대처다.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의 정치비판 논조가 가톨릭 교지 위배”(669쪽)라는 지적에 맞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 역시 종교의 일임을 역설하였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염상섭을 비롯한 33인의 문학인들은 폐간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고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또한 『경향신문』 폐간 취소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 측은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데, 사복형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에도 또다시 무기정간 명령이 내려져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사월혁명 직후 『경향신문』은 복간된다. 부당한 억압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고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분투는 붓을 꺾지 않는 염결한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필화’는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한자를 바꾸면 좋은 글을 지칭하는, ‘붓 끝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필화(筆花)’가 된다. 붓을 쥔 손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 그 손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꽃을 틔우고 있다. 1) 이에 관해서는 책의 목차에서 살필 수 있듯 발간 예정인 『한국 현대 필화사 3 :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의 제11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필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2) 「詩人鄭芝溶氏도加盟」, 『東亞日報』, 1949.11.5, 2쪽.

계간 문학인 성현아 검열필화국가폭력역사저항적 글쓰기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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