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청색종이 2024년 겨울호(제14호)
정동의 쓸모와 관계의 사유 : 한영옥, 『허리를 굽혔다, 굽혀 준 사람들에게』 (청색종이, 2024)
한영옥이 구현한 성찰적 메시지는 오랜 경험과 지혜에서 진작된 토대 위에 감정의 세목들을 세심하게 더듬어 시인으로서의 자존과 철학적 인식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 놓는다. “한번이라도 神을 느꼈다면 신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시인의 전언은 인간의 마음을 찾아가는 도정에서 건져 올린 말이다. 시는 인식의 소산도 감정의 나열도 아닌 인식과 감정이 통합된 ‘낯선 감각’이라고 한다면 한영옥의 성찰은 고전적 훈육의 메시지가 아니라 시인의 자의식과 고뇌가 삼투된 낯선 감각에 속한다. 정동(affect)은 시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시를 해석하고 감각을 사유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복잡한 철학의 정동 개념을 뒤로 하고, 시에서 정동을 연결시키는 지점은 감정과 정서와 연관되어 있다. 문학에서 통용할 수 있는 정동의 개념을 “순간적이나마 고정된 상태가 정서라면, 하나의 정서가 다른 정서로 변하는 신체의 합성과 변용 과정”(고봉준)이라고 본다면 한영옥의 시편들은 이성적 기율과 감정의 감각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져 또다른 감정으로 변이되는 과정의 사례에 속한다. 가령 다음의 시를 보자.
더 깜깜해질 때까지
창을 열어 놓고 앉아 있을 참이다
지난밤 꿈속에서 밍크코트를 입었다
꿈속에서도 얼른 벗어 버리고 싶었다
힘에 부치거나 맞지 않는 사태는 피해 다녔다
그냥 피한 건데 겸손하다는 소릴 듣기도 했으니
아직 눈 흘기고 있는 사람도 있고
오래 열매를 대어 주는 사람도 있다
힘들 때마다 밑줄 그어 둔 문장 속으로 피했다
소심했던 거라고 도량을 넓히라고
턱을 쓸어 주는 밤바람
열린 창문을 끌어당기며
소심의 날들을 소심하게 펼쳐 본다
더는 움켜잡지 못할 것 같은 손가락들
밤바람도 갔으니 놓아 버려야 하나
한참을 더 앉아 있을 참이다.
― 「더 깜깜해질 때까지」 전문
시인은 “더 깜깜해질 때까지/창을 열어 놓고 앉아 있”는 기다림의 시간을 택한다. 감정을 드러내거나 날것으로 표출시키지 않고 그대로 숙성시킨다. 인고의 시간 뒤에는 인간의 본면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순도 높은 감정의 결이 보인다.
이러한 시간의 지속이 꿈속의 혼몽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미지와 결합한다. “소심했던 거라고 도량을 넓히라”는 성찰은 창을 열어 놓고 기다리는 감정과 “아직 눈 흘기고 있는 사람”과 “오래 열매를 대어 주는 사람”의 감정을 통해 배태된다. “더는 움켜잡지 못할 것 같은 손가락들”은 감정을 대표하는 행위에 속한다. 결국 시인의 행위는 성찰의 태도를 지속하는 동시에 세계의 감각이 시인의 감성과 만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지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감각하고 감각의 틀로 감정을 인식한다. 토릴 모이는 지식애(epistemo -philia)라는 개념을 통해 몸의 감각이 육체의 문제뿐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 더 나아가 지식적으로 확장되기를 원하는 포괄적인 욕망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시에서는 몸의 감각이 윤리적 자아나 자아의 가치관이 개입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생각할수록 무거워지고 있었다
불쾌를 감당하며 꽤 헤매다가
야간 식당에 들어가 간신히 주저앉혔다
늦은 시간인데 따끈한 밥이 나왔다
두어 수저 밥이 남아 가는데
반찬들이 먼저 비워졌다
조용히 접시를 바꿔 주는 식당 사람
짭짤한 깍두기를 거의 입에 넣고서
천천히 문을 닫았다, 감사합니다
불쾌와 깍두기를 바꿔 먹은 날
손해 본 것 굳이 없는 그저 그런 날
승객들 틈에서 온기를 모으며 귀가했다
짜게 먹을 이유 굳이 없었던 날.
― 「이유 없던 날」 전문
시인은 감정에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 불쾌의 감각이 몸의 미각과 만나면서 불쾌의 본면을 상기하게 한다. 불쾌는 헤맬 수밖에 없는 감각인데 야간식당이 헤매는 것을 막았다. 따끈한 밥과 반찬, 새롭게 채워지는 반찬으로 올려주는 식당 사람, 짭짤한 깍두기 등이 불쾌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감사합니다”는 마음으로 순화된다. 불쾌는 깍두기로 인해 변화되었고 이런 변화가 온기를 가지고 귀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시의 외면구조는 야간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과정을 그린다. 시의 내면구조는 화자의 감정과 감각으로 점철돼 있다. 무거워짐―불쾌―따뜻한 밥―비워짐―깍두기의 짭짤함―온기로 이어지는 감정과 감각의 과정은 화자의 몸을 통해 인간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표출하고 있다.
감정을 감각하는 시인은 일상에서 구원을 감각하는 경지에 이른다. “밤늦어 외진 벌판 시골 정거장에/왜 홀로 으스스 떨고 있었나”(「구원의 감각」)는 모습은 초조와 불안의 감정을 낳는다. 불안의 감정을 뒤덮거나 변화시킬 요인은 “연인들의 따뜻한 입김 대한 기억”이다. 그런 기억의 힘으로 “구원의 감각”을 만난다. “감각은 구원의 기미에 민감하다”는 전언은 구원이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적 인식에서 비롯한다.
만나러 가고 있는 중이다
도움을 주어야 할 입장이다
걸음이 새털처럼 가볍다고 할 순 없다
어디까지 관여해야 훈훈할 것인가
화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받았다는 기억은 시간이 흐른 뒤
여러 가지 태도를 낳기 때문이다
한 태도 때문에 밤샘을 한 적도 있다
그래도 만나러 가고 있는 중이다
말없이 오래 안아 주는 느긋한 천성을
오래 부러워만 하며 살아왔다
입장을 바꿔 보라는 귀한 조언을
여러 번 귀하게 쓴 적이 있을 뿐
땀을 흘리며 관여한 적은 없었다
거의 다 와 가고 있는 중이다
그의 입장 속으로 입속의 사탕처럼,
혹은 눈이 녹듯 입장(入場)하려 애쓴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는 건 아니다.
― 「입장(立場) 속으로」 전문
시인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 깊은 사유를 드리운다. 허투루 인간 관계를 결정짓지 않는다. 시인의 관계에 대한 사유와 섬세한 감정의 결이 시집의 곳곳에 펼쳐 있다.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은 여러 인식의 단계를 거치며 공감을 불어 넣는다. 도움―입장―관여―화근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감정들은 ‘타도’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면을 인식하게 한다. 인간은 대부분 깊게 관여하며 높은 위치에 서고자하는 권자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관여와 태도의 사이에서 오래 머무르며 진정한 인간 관계가 무엇인지 성찰한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뒤끝이 오래가는 천성
여태껏 뽑아내지 못한 잡초들
말라 버린 자리서 또 싹이 나고
뻗쳐오르다가 또 서리를 맞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아닌 척하며 딴청 부렸지만
혐오로 변한 만남들이여
그냥 죽었다고 전해다오
나도 오래전 죽었다고 흘리마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차라리 딱 잡아떼어다오
사람과 사람의 일 아니라면
세상은 누리기에 아주 좋은 곳
사람과 사람의 일 아니라면
세상은 누릴 것 아예 없는 곳
생각을 뒤집었다 폈다 하면서
죽었다가 살았다가 하면서.
― 「사람과 사람의 일 아니라면」 전문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일로부터 시작되고 끝맺는다. 시인은 “뒤끝이 오래가는 천성”이라고 말했지만 기억나지 않고 아닌 척하며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는 세심한 마음의 결을 가지고 있다. 차라리 :오래전 죽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은, 관계에 대한 자기 생각이 확고하다. 사람과 사람의 일은 누리기에도 좋지만 반대인 경우에도 좋은 딜레마에 가깝다.
시인의 감정에 대한 사유는 타인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시인이 “용기 내어 한 사람을 올리”(「허리를 굽혔다, 굽혀 준 사람들에게」)는 행위는 자기주장의 다른 말인데, 주장을 수용하는 타인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헤아린다. 타인의 입장과 나의 입장을 번갈아가며 생각할 때 허리를 굽히는 행위로 표출된다.
시인이 감각과 관계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를 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어서는 감정은 처음이어서/밀쳐 두었던 시집들을 열어 보”(「처음이었네」)는 것은 시의 마음이 충만할 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시인은 시로 사유한다. 시를 통해 감각을 일깨우고 새로운 감정에 대해 사유한다. 새롭고 낯선 감정을 다시 새기기 위해 시집을 읽는 행위는 감정이 육화되어 언어화되는 과정이 시라는 것을 시사한다. 지혜의 말을 낳기 위해 감정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관계의 사유를 천착하는 시인에게 가장 큰 힘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사람이지만, 타인들에게 큰 힘이 되는 존재 또한 시인이다. “늘 걷는 사람이 있었”고 “의심 없이 한 평생을/한 방향으로 걷는 길은/얼마나 먼 길인가”(「사람이 있었다」)를 알면서도 꿋꿋이 그 길을 걸어왔던 시인이 바로 한영옥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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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로 와닿는다는 말이 이렇게 들어맞는 소설이 있을까. 소설 「보통의 경우」를 읽는 내내 머리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니, 간지러움을 넘어 두피를 박박 긁고 싶다가, 자칫 너무 긁어대서 피가 날까 봐 두렵고 서늘한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는 이미 긁고 있는 것도 같은, 그러니까, 소설을 읽는 내내 생생하게 깨어나는 몸이 있었다. 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소설,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이 분명한 문장들. 그런 정동의 경험을 이 소설을 읽으며 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삼십대 남자에게 대머리는 더 이상 개그의 소재가 되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 말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어떤 사람에게는 더 이상 대머리가 개그의 소재가 되지 않는다. 가렵다는 것은, 머리에 붉은 원들이 자리 잡는다는 것은, 검은 머리칼이 숭덩숭덩 빠진다는 것은 그리 웃긴 일은 아니다. 물론 딱한 일도 아니다. 희수 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버티는 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119쪽) 김남숙의 소설 「보통의 경우」는 대머리가 되는 일은 웃긴 일도 딱한 일도 아니라, ‘버티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슬픈 설명으로 시작한다. 버티는 일. 이는 이 소설의 중심을 붙잡고 있는 자세인데 주인공은 이 ‘버티는 일’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러다가 몸이 견뎌내지 못할 때, 버티는 일이 우리의 몸을 뚫고 나올 때, 우리는 괜찮을 수 있을까? 소설의 주인공을 지켜보는 내내 그런 물음을 쥐게 된다. * ‘나’는 한 방송 외주업체에서 일하는 방송 작가 막내이다. 히터와 가스난로가 동시에 돌아가며 건조하다 못해 버석한 사무실에서 ‘나’는 ‘잡일 처리’를 맡고 있다. 밤 11시가 넘어도 ‘영수증 처리’를 해야 하니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PD의 말에 “진짜 안”(143쪽) 가고 기다리면서. 언젠가부터 ‘나’는 원인 모를 탈모 증상에 시달린다. 여러 병원에서는 그 원인을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인스턴트 음식 섭취”(128쪽)라고 간명하게 축약해서 설명했지만 ‘나’는 그런 설명은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나마 한 병원에서 ‘열’ 때문이라고 말해준 것에 “그런대로 납득할 만”(128쪽)하다고, 개운하지는 않지만 수긍한다. 그러면서 ‘나’는 자신이 겪는 탈모 증상을 똑같이 겪었던 희수 언니를 떠올린다.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기 전에 ‘내’게만 비밀을 털어놓았는데 그것은 “정수리 왼쪽의 한 줌 정도 남은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솜털도 없이 민둥”(120쪽)한 머리를 보여준 것이었다. 놀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나’에게 희수 언니는 이 비밀이 유지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의아한 말을 한다. 비밀은 비슷한 애들끼리 맺을 수 있기에 우리에겐 비밀이 가능하다고. “말하자면, 비슷한 애들끼리의 결속 같은 거야.”(122쪽) ‘나’는 이후로 희수 언니의 말을 습관처럼 되뇌인다. 그런 비밀을 공유해서일까. ‘비슷한 애들’끼리 결속을 하게 되어서일까.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잡일을 하게 되어서일까.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나’는 희수 언니의 탈모 증상을 이어받게 된다. “검은 머리칼이 숭덩숭덩” 빠져나가는 일을 막을 수 없다고 여기듯 ‘나’는 자신의 상황을 견디고 버틴다. ‘내’가 버텨야 하는 것들은 참 치졸하고 지긋지긋한 것들이다. 더 큰일을 하기 위해선 잡일부터 잘해야 한다는 ‘꼰대’ 같은 말과 메인 작가가 “일부러 시킨 그 많은 음식”(138쪽)을 억지로 먹는 직장 내 괴롭힘 같은 것들을 ‘나’는 자신의 몫이 되어버렸다 여기며, 견디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다음을 생각하면서. ‘다음’을 기약하며 지금의 ‘나’를 착취하는 목록들은 참 잔인하다. 다음이라는 조건이 얼마나 우리를 쉽고 유연하게 속일 수 있는지 생각하면, 다음을 믿는 ‘나’의 연약한 믿음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버티면 괜찮다고 믿는 마음이 결국 자신의 몸밖으로 터져 나오고, 그것이 ‘가려움’이라는 증상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단순 가려움으로 시작되고 끝났던 것이 이제는 후끈하게 온몸에 열이 오르면서 정수리와 두피 부근이 미치도록 가려워졌다. 가려움은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긁고 나면 손톱 밑에는 진물과 각질과 머리카락이 한데 뭉쳐 있었다. (…중략…) 긁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순간들이 이 작은 사무실 안에서 매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125~126쪽) 소설에서 ‘나’의 가려움은 ‘버티는 일’이 몸을 초과할 때, 더이상 버텨낼 수 없는 몸이 될 때의 이상 증상처럼 보인다. 버티다가 참지 못해, ‘나’는 “딱 절반 정도만 참아”(126쪽)내는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 그렇게 절반을 참지 않는 것은 곧 절반을 참는 것이기도 해서, ‘나’의 상황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나’는 가려움을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를 모자 속에 숨겨 놓는다. 이 모습에서 가려움이 완화되고 나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더욱 심각한 ‘몸’으로 ‘나’의 상태가 옮겨가리란 무서운 예감이 흐를 뿐이다. * 너 방송하고 싶다며. 작가하고 싶다며. 그럼 너도 그만큼의 의지를 보여줘야 되는 거 아니야?(156쪽) 우리는 얼마나 참아야 할까. ‘나’의 몸을 통해 우리는 버티는 일의 폭력을 엿본다. 버티라고 강요하는 목소리. 그것은 우리의 곁에, 일상과 일터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더 나은 다음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것이 있다고 추동하면서 ‘네 의지를 보여달라’는 말을 기회인 척 건넨다. ‘다음’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가령 꿈 같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네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말은 손쉽게 얼굴을 바꿀 수 있다. 혹여 다음으로 가지 못하게 됐다면, 그럼 그건 네 노력과 의지가 부족했다는 말로. 무서울 정도로 냉혹한 현실의 초상을 김남숙의 소설은 몸으로서 그려낸다. 사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따갑고 붉어진 정수리를 모자 속에 숨긴 채”(126쪽)로 있지 않는 것이 더욱 어렵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닐까. 머리가 숭덩숭덩 빠지고 있는데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가려워. 가렵다니까. 가려워 죽겠다니까”(157쪽)라는 울부짖음 같은 목소리는 소설을 뚫고 나온다. 어쩐지 서늘하게 일어서는 두피의 각질을 느끼면서, 곱씹어본다. 나는 지금 어디가 가려운지.
내가 지금껏 포기한 것들, 포기할 수밖에 없던 것들, 포기한 줄도 모르고 포기에 이르렀던 것들……을 헤아리면 지면을 넉넉히 채울 것이고, 눈물이 앞을 가릴 듯하다. 이 글을 막 적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구구절절하게) 무얼 포기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라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무얼 포기했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린 것들이 있는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갔다. 화장실 배수구에 쌓인 머리카락을 집어 올리며 언제 빠졌더라, 묻는 사람처럼. 하나씩 말할 때마다 화도 나고 울적해지므로 잔뜩 열거하고 싶지는 않으나 나의 삶 속 괄호 안에 무엇을 넣어도 포기라는 단어와 어렵지 않게 연결된다. 나만 그럴까. 우리(나만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우리)에겐 정말이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투성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속한 세상은 포기를 죄처럼 여긴다. 괄호 안에 들어갈 많은 것들에 접근할 기회조차 박탈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주문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포기를 실패와 패배로 낙인찍고, 포기하면 바보 취급한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너무나 (정말이지 너무나!) 쾌활하고 낙천적인 태도로 포기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건 용기 있는 일이라고, 멋진 결단이라고! 포기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처럼 군다. 돈이든 직장이든 인간이든 뭐가 됐든 여차하면 ‘빠른 손절’이 답이라고, 그게 현명한 거라고.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태도 역시나 미심쩍긴 마찬가지다. 명랑할 것까진 없잖아. 이런 명랑함에는 수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포기라는 단어가 내게 그래서인가. 김지연의 소설 「포기」는 제목에서부터, 사실 읽기도 전부터, 마음을 울컥 건드리는 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다. 김지연의 소설 「포기」에는 ‘포기’가 쉽지 않은 인물들이 나온다. 그러나 결국 포기해야만 하는 무엇을 마주하는 인물들. 무엇에 대한 포기냐 하면 그건 돈이기도 하고, 평범한 삶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서, 포기를 한참 망설이고 바보 같아지는 인물인 호두에 눈이 머문다. 소설의 화자인 미선은 헤어진 남자친구 민재가 고동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사촌이자 친구인 호두에게 전한다. 미선과 호두는 고동이 어딘지 모른다. 양꼬치 집에서 호두는 ‘고동’이라는 지명의 마을회관을 검색하며 “여기, 이런 데 다 전화해보자”(12쪽)고 한다. 고동에 있는 민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정말로 호두는 술에 취해 고동 마을회관이란 이름을 가진 곳에 무턱대고 전화를 건다. 호두가 그렇게까지 열심히 민재를 찾는 사정은 민재로부터 사기를 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민재는 잠적하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고, 그중 가장 많은 액수를 빌려준 사람이 호두였다. 양꼬치집에서 호두는 양꼬치를 처음 먹어본 이유로 민재를 들며 원망한다. “민재가 내 걸 다 가지고 가버려서”(14쪽). 미선은 속으로 그건 핑계라고 여기지만 호두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고작 양꼬치 하나”(14쪽) 사 먹는 것도 포기하며 모았던 돈. 어릴 때부터 사촌 미선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던 그가 독립하기 위해 악착같이 모았던 돈. 그러는 과정에서 포기했던 것이 양꼬치뿐이었겠는가. 호두는 그 돈을 전부 민재에게 빌려주었고 민재는 잠적했다. 그런데 호두는 돈을 되찾기 위한 채권자로서는 조금 어색한 행동을 한다. 돈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하루빨리 민재를 신고해야 할 텐데 호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민재를 원망하면서도, 신고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미선의 말에 “그렇게까지?”(16쪽) 되물을 뿐이다. 민재를 찾아도 돈을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고 사실은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 뭐하러 찾느냐고 미선이 묻자 호두는 답한다. “그냥 한 대 때려주기라도 하려고.”(18쪽) 이런 물렁한 생각도 팔짝 뛸 노릇인데 술에 취해서는 자기가 때리면 민재가 아플 거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잡아 족치지는 못할 망정 돈을 떼먹고 도망간 사람을 두고 무슨 그런 걱정을 하느냐고, 민재가 아니라 호두의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 된다. 하지만 호두는 바보같이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고, 정작 민재를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는 망설이며 뒤로 물러선다. 그렇게 민재를 찾으면 자신이 무언가를 잃는 것처럼. 호두에게 2천만 원이란 큰 돈은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것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돈만이 아닌 무언가가 끼어들며 호두를 망설이도록 한다. 호두는 어쩔 수 없이 거듭 포기하는 사람이다. 돈도, 민재를 때려주려 했던 마음도 자꾸만 포기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민재라는, 한 인간에 대한 마음인 것처럼. 자신이 믿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한 인간에 대해서 포기할 수가 없어 우스워지는 호두의 모습을 지켜보면 마음이 아리다. 믿었던 이에게 당한 배신과 기만에 화를 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사정이 자꾸 아른거리는 호두. 그에 대한 걱정을 끊을 수가 없는 호두. 사람이 사람을 때리면 아프다는 사실을 먼저 걱정하는 호두. 나를 포함한 제3자인 다른 사람들은, 참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호두를 보며 한심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놓을 수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는 사람도 있다. 포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를 오가는 마음. 그렇게까지 포기해도 되는지 잃어버려도 되는지 자꾸만 묻게 되는 마음. 그 서성이는 마음속에서 ‘포기’란 무 자르듯 깔끔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 분노와 슬픔을 오가면서, 사람과 사람이 맺었던 관계와 시간을 싹둑 잘라내지 않게끔 하는 것을 발견한다. 설사 지금은 변질됐다 해도 그 이전의 시간이, 아름다웠던 한 시절이 조금은 남아 지금을 지나가도록. 이야기의 끝에서 호두는 결국 민재를 걱정하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나는 포기를 용기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그것대로 미심쩍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포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 그 순간을 비웃지 않고 이해하고 싶다. 그런 이해의 순간을 김지연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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