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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인 | 2024년 가을호(제15호)

한국 현대시와 자본의 시학

신동옥 문학평론

1977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다. 2001년 시와 반시 신인상 공모를 통해 시단에 나왔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고래가 되는 꿈 밤이 계속될 거야 달나라의 장난 리부트 앙코르를 썼다. 산문집 서정적 게으름, 시론집 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를 펴냈다. 대산창작기금, 노작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국립목포대학교 문예창작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마샬 버만은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는 마르크스의 은유적인 선언을 제목으로 삼은 ‘현대성론’에서 20세기 초에 러시아에서 혁명과 아방가르드가 동시에 선취된 원인이 무엇인지 되물은 바 있다. ‘저개발 모더니즘’이 그것이다. 후진성과 저개발 상황이 어떻게 정치와 미학에서 아방가르드를 낳았는지라는 아포리아에 대한 해답이다. 첫째는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체의 무능력’에 대한 인식이 과도한 시도로 귀결된다는 실험 미학. 둘째는 ‘자기혐오와 자기 아이러니’를 토대로 성취를 유지하고 갱신한다는 한계의 미학. 셋째는 사회 정치적인 압력과 정신사적인 압력 차원에서 서구 근대에 대응할 수 없는 절망적인 빛을 스스로 발산한다는 미만성의 미학. 보편적이고 고유한 기준에 비해서 뒤떨어졌다는 인식,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미만한 자기 규준을 토대로 자신을 마저 써야 한다는 자기염오, 그럼에도 한계를 갱신하고 정치사회적인 압력 속에서 역사를 다시 명명해야 한다는 당위는 ‘식민지 근대 모더니즘’이라는 모순적인 명명으로 규정되는 한국 근현대시의 아포리아와 조우한다.


  1936년 임화는 「조선어의 위기하의 조선문학」을 진단하며 “최량의 ‘민족문학’만이 최량의 민족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근대적이고 시민적인 규준에 비추어 ‘최량’의 조선문학은 어떻게 자기 완결에 도달할 것인가? 임화는, 같은 해 쓴 「조선문학의 신정세와 현대적 제상」을 통해, 당대의 문학은 ‘과도적 존재로서 진실한 의미의 조선문학 건설 도정에서 형식으로 남아 있을 뿐이며, 머나먼 어느 날 문학사가 개화하는 순간 마침내 소멸될 것’이라는 자기 해소, 자기 초극으로 유예되는 묵시록적인 아이러니를 그 답으로 내놓는다. ‘식민지 근대 모더니즘’, ‘저개발 리얼리즘’의 자기 아이러니를 이것보다 뼈아프게 진단한 비전이 있었던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국가의 기본 전제를 되새기자면, 임화의 묵시록적인 비전은 여전히 유효한 문학사의 아포리아로 읽힌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 분단기로 이어진 역사적 상황에서 국가 도출론은 자본 / 정치 / 역사와 긴밀하게 길항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의 진단 그대로 이때의 “국가란 우리가 창조하고자 열망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가이거나 우리가 사라지기를 열망하는 공인된 국가이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보편적 자본의 의제와 긴밀하게 공속했던 논쟁의 시기는 카프 결성 초기의 풍경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코민테른의 의제를 받들어 ‘벌거벗은 인민’의 자기규정 가능성을 토대로 제국 일본의 지식인 그룹과 심정적인 연대의 전선을 형성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1930년대 초반, 일본이 일으킨 ‘15년전쟁’의 서막으로 추동된 사상 검열 전까지는 보편성 의제가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 팔봉 김기진은 「단편 서사시의 길로」, 「대중 소설론」 등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는 평문을 제출한다. 팔봉의 물음이 부닥친 자기모순은 자기 생산의 조건에 대한 경제학적인 탐문으로 고쳐 읽을 여지가 다분하다.


  이 시기 팔봉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천착한다. 작가의 사상과 표현이 객관적, 현실적, 구체적 변증법적인 측면에서 사실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 논의의 전제였다. 팔봉은 노동자, 농민의 삶에서 마주하는 불평등과 비극, 가치관의 충돌 및 부조화, 계급 갈등을 주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사랑과 사적인 감정의 교류는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노동자, 농민의 삶에서 어떤 부면이 주요한 작인(作因)인지를 결정하는 팔봉의 시각은 물론 지도 비평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 그 결과 ‘통속 소설’과 ‘대중 소설’을 정의하는 전제가 무너지는 논리적인 자가당착으로 빠지고 만다. 「단편 서사시의 길로」는 팔봉이 생활 리듬을 규율하는 근원적인 작인으로서 ‘사건’과 ‘사건화 과정’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 구체적인 사건을 암시하는 방법에 단편 서사시의 근본이 있다는 주장은 앞서서 팔봉이 세계관을 강조한 논의와 일맥상통한다. 독자의 계급성과 당파성에 대한 인식은 사건의 형상화 과정이 아니라 ‘쉬운 글’에서 온다는 주장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국제적인 보편성을 논의의 전제로 둔 1920년대 말 상황에서의 현상 비판이었던 셈이다. 팔봉의 주장은 현실 추수적인 창작론으로 비판받는다. 단편 서사시의 모범을 제시한 당사자로 지목된 임화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임화는 팔봉이 개량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자유주의에서 예술지상주의로 ‘개종’했다고 운을 뗀다. 임화의 팔봉 비판은 당대 카프의 방향 전환과 맥을 같이한다. 임화는 팔봉을 향해 “작품만능, 소시민적 명예욕, 예술지상주의, 매(賣) 계급적 원칙, 마르크스적 원칙을 개량주의로 바꾸어 칠한 뼁끼상인, 섹트주의자, 예술운동은 그만두고 목구멍운동도 손운동도 잘 안될 것”이라는 원색적인 비판을 토해놓는다. 논쟁은 카프의 방향전환으로 이어진다.


  팔봉과 임화의 충돌의 배면에는 ‘일상’과 ‘생활’의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물음들이 자리한다. 농민과 노동자, 눈앞에서 책을 펼쳐 읽는 독자들의 삶의 주기에 일어나는 변화들이 자기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는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생산의 전제인 노동과 자본과 토지는 모두 ‘죽은 노동’으로 귀결된다. 생활과 일상의 모순은 살아 있는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삶 정치의 자기 관리자로 가치에 대한 의문이 던지는 순간 의미를 띠기 때문이다. 인격과 능력을 자유롭게 소지한 인민만이 소유와 양도와 처분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자신이 물리적으로 점유한 삶의 시간을 분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삶의 국면에서 노동이란 그러한 의미에서 자본의 전제가 되는 개체로서의 주체의 유지와 재생산에 대한 물음과 긴밀하게 연동한다. 노동 시간은 생활의 수단을 공여하는 삶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수단을 전유하고, 시간의 가치를 되묻는 것이 바로 일상과 생활의 주제이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는 효모로서의 노동”이라는 표현을 제기한 이유다. 팔봉이 던진 물음이 내포하는 뼈 아픈 규정적 모순 속에 그러한 의미의 노동이 자리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노동과 긴밀하게 연동되는 생활은 불가능하다. 살아 있는 인간의 생활 리듬이 물상화된 시간으로서 일상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은 식민자, 패권자, 지배적 자본의 시선 아래 이중 구속된 모습으로 현현한다. 그것은 과도한 실험, 자기염오와 아이러니, 주체의 해소를 전제로 하는 한계의 돌파를 통해서 가까스로 재현될 수 있을지 모른다. 소월이 그러했고, 이상이 그러했듯.


  1949년은 박인환에게 의미 깊은 해였다. 신시론 1집에 이어 2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한 이후였으며, 언론가로서의 이력을 전방위적으로 전개하던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박인환이 표방한 스펜더, 오든 류의 모더니즘은 이른바 사회비판적인 성격을 띤다. 박인환은 헤겔의 유물 변증법,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역사 사회의식이 절합된 지점에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읽은 바 있다. 1948년 12월 박인환은 「전원시초」라는 작품을 『부인』 지면에 발표한다. (지면을 닫는 화보에는 김구와 이승만의 가정이 나란하게 실려 있다!) 1949년 1월 『조선중앙일보』 지면, 김지원(金志遠)은 ‘신춘시단평’을 통해 박인환의 「전원시초」를 다룬다. 조선문학가 동맹의 전위시인들의 작품과 박인환의 작품을 엮어서 평을 쓴 것도 이채롭거니와, 저윽이 목가적인 박인환의 작품을 길게 분석한 글의 제목을 「생활의 시」라고 붙인 것도 의아한 대목이다. 산마루에서 땅 냄새를 맡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것을 바라보고 완상하는 ‘술법’을 운산하지 못했으며, 신문의 활자 속에서 울리는 총소리와 거리의 소란을 구분하는 법조차도 미처 읽지 못한 사람의 한계 속에서 ‘생활의 시’가 놓인다는 논의는 ‘국가’에 대한 인식으로 귀결된다. ‘생활’이라는 어사는 ‘국가’, ‘민족’, ‘언어’, ‘세계’라는 어휘와 더불어 신생(新生)한 언어였던 셈이다. 그렇기에, 해방 이후 배후로 물러선 임화의 빈 자리에서 논쟁가의 자리를 자처한 김동석의 평론집 제호가 『예술과 생활』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 김동석의 역사의식은 인정식 등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후기의 경제학적인 인식과 문학가동맹의 당대적인 요구를 수렴하는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생활’이라는 어사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거느릴 경우, 이는 김동석의 맞은편에 자리한 김동리의 ‘제3세계 휴머니즘론’이나 ‘민족문학론’의 주요한 논리적인 밑바탕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구경(究竟)적인 어느 지점으로 이월하기 위한 현상학적인 한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생활은 자기 생산의 조건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한계, 절망, 자기염오와 아이러니를 벗어던지고 자율적으로 모순을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자본주의적 분열증 아래서 “아무도 도둑맞지 않았고 또 도둑맞을 수 없다”는 역설적인 명제를 내놓은 바 있다. 모든 생산은 상품이나 화폐라는 형식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상품과 화폐가 점유하는 시공간 구조의 유기적 결합체가 바로 자본이다. 생산 과정에서 끝없이 초과하는 잉여의 소재를 되묻게 된다. 가치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대관절 고유한 가치는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유물론적인 질서를 점유하는 도덕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가치의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 물상은 인간적 질서와 무관한가? 해방기에 되찾은 ‘생활’은 그런 의미에서 ‘아무도 도둑맞지 않고 또 도둑맞을 수 없을지언정, 도둑맞을 가능성과 도둑맞지 않을 불가능성을 살아낼 수 있다’는 (불)가능성에 대한 기도(企圖)와 상통할 것이다. 우리만의 국가를 도출할 수 있다는 의지. 해방 직후에 오장환이 쓴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오장환은 1945년 11월, 『인민보』 지면에 「깽」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오장환에 따르면, “깽은 高度한 資本主義國家의 尖端을 가는 職業이다”. 마르크스는 ‘무한하고 가변적인 성질을 갖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동물과 구분된다고 썼다. ‘깽’은 바로 그 무한성과 가변성을 특질로 하는 자본의 자기 증식의 극단 또는 초과 지점을 은유하는 형상이다. 술에 물을 타서 팔고, 불법으로 무도장을 연다. 이들의 ‘노동’은 해방과 분단은 물론 ‘인민대표의 회담’에까지 ‘야미꾼’으로 끼어든다. 오장환은 문제를 예각화하며 시를 닫는다.


그러나
깽은 끝까지 職業이다
全國의 生産이 完全히 쉬어진 오늘에
이것은 確實히 新奇한 職業이다
그리하야 점잖은 衣裳을 갖추운 資本家들은
새로히 이것을 企業한다
그리하야 그들은 그들의 번창해질 장사를 위하야
“韓國”이니 “建設”이니 “靑年”이니
“民主”니 하는 간판을 더욱 크게 내 건다

— 오장환, 「깽」, 『인민보』, 1945.11 부분


  노동, 자본, 토지의 생산 조건을 자기화한 국가의 경제 안에서 자본은 인정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 가치 의식을 드러내는 조건일 것인가. 기업과 자본의 측면에서 문제는 평균 노동력이고, 균질화할 수 있는 노동시간이다. 인간적 노동의 산물들은 물적 존재인 동시에 감각적이며 또 초감각적인 존재다. 그것은 종래의 노동생산물이 지니는 단일하고 고유한 성격에서 벗어나며, 인간들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중층적으로 포괄한다. 바로 그 관계, 물상과 물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는 환상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환등상의 형태로 드러난다. 물신숭배는 욕망의 이데올로기와 맞닿는다. 환상의 극점에 화폐 상품 즉 돈이 있다. 돈은 현물의 형식과 등가의 형식이 사회적으로 결합한 상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폐 상품의 논리는 ‘민주’, ‘청년’, ‘건설’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기구와 맞닿으며, 억압적인 기구와도 접속한다. 억압적인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한 몸이 되어 작동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깽’이 탄생한다. ‘프로파간다’적인 성격이 강한 시임에도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내장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돈은 잉여 가치의 아포리아를 자본으로 전화한다. 욘 엘스터가 분석한 그대로 이제 자본의 유령인 상품의 초과 잉여의 문제는 ‘자본 그 자체’라는 ‘신포도’의 논리로 전화한다. 화폐는 자기 목적성을 지닌 무한한 가치와 비슷한 유령으로 은유되기 때문이다. 화폐는 의식과 의지를 부여받은 자본이다. 삶의 순환고리라는 생활 리듬 속에서 현상, 형태를 분할하고 절취하고 고정하며 스스로 가치를 증식한다. 자본은 화폐 그 자체라는 측면에서 상품이다. 자본이 가치의 자기 전개 과정의 주체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동일한 실체를 지니는 물상은 생산활동의 규정성, 노동의 유용성과의 차이를 배제한 상황에서 값이 매겨진다. 이러한 배제는 유용 형태의 각기 다른 차원에서 비롯되는 고유성과 보편성을 사상하기 마련이다. 김수영이 「육법전서와 혁명」에서 쓴 법의 아이러니를 바탕으로 다시 쓰자면, 헌법은 법의 상상력 바깥에서 작동하고, 국가는 국가의 한계 바깥에서 도출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국가의 생성에 자본의 질서가 개입하는 양상을 정신화와 내면화의 기제를 바탕으로 설명한 바 있다. 원(Ur-) 국가의 생성은 국가의 내면화와 정신화를 동시에 동반한다. 사회적 힘들의 물리적 장에서 국가는 주체의 장으로 내면화된다. 형이상학적, 초지상적 장에서 국가는 정신화된다. 근대는 신민에서 주체로의 이동이기 때문이다. 주체에 내면화되어 정신화된 국가의 형상은 중세의 목적론적인 세계관을 위장된 논리로 계승한다. 천년왕국의 도래, 목적론적 구원론적 세계 속에서 신에 대한 열정은 감정 자본의 논리로 순치된다. 베버 류의 합리성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정신화, 내면화 기제와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불가해한 열정은 합리적인 질서 아래서 초과 잉여를 갈음하는 합리적 재생산의 논리로 순화된다. 기든스가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미시정치의 장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 또한 여기 있을 것이다. 일상과 생활의 재발견을 통해 자본의 정신화, 내면화에서 탈각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장환의 「깽」에서 제기한 근본주의적인 물음을 확장해서 탐문한 작품을 꼽자면, 박인환의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도시문화사, 1949.4)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약소민족 / 우리와 같은 식민지의 인도네시아”의 인민에게 바치는 헌시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은 ‘구미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의 잔재 아래서 국가를 도출할 가능성에 대한 규정적인 모순에 대한 답변의 형식을 띤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이중모순에 대한 인식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전위시인’들의 현실 인식이 좌절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상훈이 “小作爭議가 끝나지 않어 / 散髮한 벳단이 밭고랑에 누어 있는 들길을 / 지쳐 쓰러진 이야기를 담고 牛車바퀴가 게을리 굴러가고, / 荒凉하다 賤한 촌 百姓이 사는 이 마을엔 / 어미가 子息을 헐벗겨 떨리고 / 삽살개 사람을 물어 흔들고 / 金錢과 바꾸워진 딸자식을 잊으랴 애썼다. / 日章旗가 太極旗로 變했어도 / 그것은 지친 그들에게 ‘萬歲’소리로 높이 낼 負擔밖에 / 설익은 빵덩이 하나 던져주지 못했다”(「田園哀話」, 『전위시인집』, 노동사, 1946.10)에서 노래한 제국주의적 모순은 ‘식민정책’의 영속화 과정에 대한 고발의 형태로 박인환의 시에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상민이 “그 이전은 모르지만 / 할아버지도 소작인으로 죽었다 / 아버지도 소작인으로 늙었다 // 그러나 왜정 40년이 끝나도 / 정 도령은 나와주지 않았다 // 재 넘어 강 선달네 밭머리에서 / 이것만 기다리다 흙에 묻혔고 / 이렇게 속아 살아왔는데 // 이제야 젊은이들은 또 다시 / 정 도령만 믿고 견딜 거냐”(『옥문이 열리든 날』, 신학사, 1948)에서 노래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박인환의 시에서는 공화국을 향한 인민의 의지라는 낭만적인 의지의 형상으로 다시 쓰인다.


주거와 의식은 최저도
노예적 지위는 더욱 심하고
옛과 같은 창조적 혈액은 완전히 부패하였으나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생의 광영은 홀랜드의 소유만이 아니다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인민의 해방
세워야 할 늬들의 나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성립하였다 그런데
연립임시정부란 또다시 박해다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모략을 부숴라
이제는 식민지의 고아가 되면 못쓴다
전 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 박인환,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도시문화사, 1949.4 부분


  주거와 의식의 문제는 노동의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와 공속한다. 서로 독립된 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사적 노동은 저마다의 환경이 배태한 특수한 역사사회적 성격을 함의한다. 이 대목에서 억압적 기구나 추상적 기구의 구조적 모순이나, 자율성 논의에 발 디딘 국가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인간노동의 동질성의 차원에서 보자면, 개별 노동자의 사회적인 관계는 생성하는 동시에 은폐되고 분할되면서도 결합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환의 질서에 있고, 교환의 척도와 비율에 있다. 비율은 고정되려는 경향을 가진다. 비율의 생성은 법칙으로 인간과 세계를 ‘거꾸로 뒤집힌 거울상’처럼 추상화, 자연화하며 지배력을 행사한다. 교환의 질서가 발생하는 순간 모든 산물은 그 본질의 측면에서부터 유해한 무언가로 오도된다. 오인의 메커니즘이 사회적인 생산의 저변에 작동한다. 주체는 오인된 주체이며, 물상은 오도된 물상이다. 사회적인 관계 자체가 물상화된다. “경제학은 로빈슨 크루소를 좋아한다.” 마르크스의 전언이다. 국가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1949년 봄. 박인환은 자유신문사 소속 기자로 「삼팔선 현지 시찰 보고」를 연재한다. 동년 7월 16일, 박인환은 유엔한국위원회 소속 기자 신분으로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어 송치된다. 국가보안법 2항을 위반한 혐의였다. 남로당 평당원이었기 때문이다. “본인 등이 해방 직후 가맹한 ‘조선문학가동맹’을 비롯한 좌익 계열에서 탈퇴하는 동시 앞으로 대한민국의 발전에 적극 참여할 것을” 임호권, 박영준, 이봉구 등과 함께 『자유신문』 1949년 10월 2일 자에 성명서 형식으로 발표한다. 동년 11월 30일에는 동일 지면에 비슷한 내용의 ‘전향서’를 한 번 더 발표한다. 이후 박인환은 ‘청년문학가협회’가 주축이 된 ‘한국문학가협회’에 추천위원으로 참여하고, ‘보도연맹’에서 주최하는 ‘국제예술제전’에 작품을 발표하고 낭송회에 참가한다. 1950년대 박인환의 작품 세계는 실존주의적인 비가의 형상을 띠는 방향으로 급선회한다.


  시계열에 따라 기술하면 그야말로 ‘전향’으로 읽히지만, 박인환의 전향을 저 ‘전주사건’ 초기 박영희나 백철의 전향과 같은 측면에서 해석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김윤식이 전향의 맥락을 확장하면서 제안한 문장파의 암흑기의 세계 변화 등으로 넓혀서 해석하기에도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신시론 동인 이후의 박인환과 후반기 동인을 결성한 조향은 1950년 1월, 박인환의 ‘전향’ 즈음이다, 「문단 앙데팡당 풍경」(『해동공론』 5권 1호)에 다음과 같이 쓴다. “‘살롱 맑시스트’의 전형으로 밖엔 안 보이는 유물상아탑의 주인공 인정식 김동석 씨 따위가 그 조금 가진 재주의 굴택으로 문학가동맹의 중진석에서 수째 에헴!을 뽐내고 있는 꼬락서니들이란 웃지 못할 희극이 아니고 무어랴?” 이 즈음, 그러니까 공식적인 전향 이후의 박인환이 과연 조향의 극우적 야유에 동의했을까?


  사회학자 조희연은 한국전쟁기 이후 남한 사회의 이념을 ‘반공 규율 사회(anti-communist regimented society)’, ‘의사 합의 사회(pseudo-consensus society)’로 규정한 바 있다. 박인환의 포지션 변화는 외부적인 억압을 동인으로 하지만 자발적인 신념의 변화로 귀결되는 전향의 문법이기보다는, 반공 규율 사회의 지배 이념을 의사 합의의 측면에서 내면화한 내부 검열의 결과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읽힌다. 생활, 자본, 국가의 중층적인 모순은 박인환의 시에서 삭제된다. 이러한 물음이 가장 전위적으로 형상화되는 사례는 1950년대 김수영이 보여준 생활 시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김수영은 노동의 근원적인 부재에서 발생하는 설움으로 생활의 자기 아이러니를 드러냈다. 김수영이 박인환을 (필요 이상으로) 야유한 이유는 인민군 포로 신분으로 한국전쟁을 마감한 처지의 대비로도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김수영은 가짜 신념에 합의하지도 않았고, 공산주의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불문에 부치지도 않았다. 다음은 김수영의 사후적인 회고.


  나에게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좀처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죽음과 가난과 매명(賣名)이다. 죽음의 구원. 아직도 나는 시를 통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40여 년을 문자 그대로 헛 산 셈이다. 가난의 구원. 길가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신문 파는 불쌍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역사를 긴 눈으로 보라고 하지만,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저애들은 내 자식만큼도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막다른 수치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나는 40여 년 동안을 문자 그대로 피해 살기만 한 셈이다. 매명의 구원.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산문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진정한 <나>의 생활로부터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나의 머리는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에서 헤어날 사이가 없다.

— 「마리서사」(1966),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2003, 107~108쪽


  김수영이 천착한 생활론은 속물론을 거쳐서 자유와 사랑의 문화론으로 전화하기에 이른다. 김수영의 시에서 생활, 설움의 주제는 1960년 4월 혁명과 1961년 5월 쿠데타에 이르러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기 전까지 연속된 기획이었다. “‘돈은 암만 벌어도 만족하여지지 안는다’ / 는 상인을 업수이 여기는 나의 마음 / 사실은 오지 않을 기적을 기다리는 / 영원의 상인”(「그것을 위하여는」, 『연합신문』, 1953.10.3)이라는 고백은 일(work)과 노동(labour)의 대비에 대한 인식을 배면에 두고 있다. 오직 양적으로만 측정할 수 있는 노동은 교환 가치를 벗어나서 사유할 수 없다. 그러나 사용 가치 그 자체를 생산하는 일은 다른 차원과 관계된다. 생활에서 비롯되는 설움은 인간적인 노동에 응결된 공통적인 사회적인 실체의 근거를 되묻는 의제와 상관한다. 노동, 일은 존재와 물상을 매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보라 항간에 금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으려고 / 버둥거리고 있다 / 보라 금값이 갑자기 8,900환이다 / 달걀값은 여전히 영하 28환인데”(「육법전서와 혁명」(1960.5.25 초고), 『자유문학』, 1961.1)라고 쓴 혁명기의 시와 판이하다. 1950년대 김수영의 시각과 혁명기 김수영의 시각은, 작고 직전에 매진했던 시인의 ‘역경주의 미학’과 비교하면 또 다른 차원의 물음으로 귀결된다. “덤핑출판사의 20원짜리나 20원 이하의 고료를 받고 일하는 / 14원이나 13원이나 12원짜리 번역일을 하는 / 불쌍한 나나 내 부근의 친구들”(「이 한국문학사」, 『한국문학』, 1966년 여름호)에서 읽을 수 있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김수영은 양계든 시작(詩作)이든 ‘무슨 일이든 얼마가 남느냐보다 얼마나 힘이 드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버릇’을 ‘역경주의(力耕主義)’로 규정했다.


  김수영의 미적 자기 갱신의 귀결은 김수영 사후(死後) 1968년 8월 『현대문학』 지면을 통해 공개된 「사랑의 변주곡」(1967.2.15 초고)에서 완성형에 달한다. 사랑의 절망과 사랑의 권력을 동시에 노래하는 이 작품은, 자본주의와 분열증을 다룬 들뢰즈와 과타리가 내놓은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나만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둘을 하는 것도 아니며, 수천 수만을 하는 것이다”를 연상시키며 자연스레 김수영의 ‘온몸 시론’을 되뇌게 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사랑의 바탕에는 경제적 규정들, 즉 돈이 있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모든 재현은 억압되기 때문에 불가능한 재현이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 재현의 붕괴를 내포한다. 모든 생산과 재생산은 재현의 평면에서는 ‘결핍 내지는 부재’로 상연된다. 사건화 과정과 무관한 지점에서 돌발하는 ‘주관적 재현’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끊임없이 부과된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 사랑을 발견하겠다면”이라는 김수영의 선언적 천명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가난한 사랑 노래」)라고 노래한 신경림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저 1970년대에서 80년대, 신경림은 가족 로망스의 기제를 투과해 역상으로 건립되는 ‘아버지’, ‘역사’, ‘원 국가’의 불가능성을 노래했다. 그런가 하면,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라는 김수영의 권유는 이성복을 거치며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그해 가을」)라는 날이 선 절규로 변주된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의 근저에서 신경림이 형해화한 가족 서사의 (불)가능성과 김수영이 극한으로 밀어붙인 사랑의 (불)가능성을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이유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논리를 “시대는 이제 잔혹의 시대도 고통의 시대도 아닌 냉소의 시대이며, 냉소의 시대는 이상한 독실함을 동반하고 있다(이 둘은 휴머니즘을 구성한다. 냉소는 사회장의 물리적 내재성이며, 독실함은 정신화된 원국가의 존속이다. 냉소는 초과노동을 수탈하는 수단으로서의 자본이지만, 독실함은 이 동일한 자본이되 모든 노동력이 그로부터 유출되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신(神)-자본과도 같다)”라고 정리하기도 했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1987)은 바로 그 냉소와 신실함을 동시에 전유하며 ‘수탈’의 대상이 된 형상으로 「쉬인」을 그려낸 바 있다.


  끝끝내 바꾸고 싶지 않은, 끝끝내 버리고 싶지 않은, 그렇기에 영원히 찾아 헤매는 마지막 하나의 고갱이는 늘 우리와 함께 머물러왔다고 말한 이는 경제학자 장 피에르 뒤피다. 그것은 이미 우리 곁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신실재론의 논리를 빌리자면, ‘유한성 이전’에 이미 다른 언어로 명명되고 재현될 수 없었기에 부재의 형상으로 우리 곁에 상존했기 때문이다. 자본이라는 유령은 바로 그 명명될 수 없는 실재의 이면일 것인가?


  영속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가치의 영구 기관은? 그러나, 기계는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기계의 시간을 영속화할 수 있다면 인간적 생산과 노동 과정은 추상적으로 영구 분할된다. 노동에 부과되는 사법적, 정치적 강제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기관은 영구 기관이다. 정치적 자율성을 관장하는 국가 역시 영구 기관으로 돌변한다. 그것은 지배의 질서 바깥에서 지배를 영속화한다. 어쩌면 이것은 AI의 꿈일 것이다. 자본의 영구 증식 말이다. 그 영구한 꿈의 가치를 무화하는 극한의 초월. 기계는 사회적인 노동력을 소유하지 않는다. 기계를 소유한 사람이 대체된 구체적 노동의 사용 가치의 근거를 담론 차원에서 독점한다. 인간적 노동 생산 과정에서 가치 물음은 공제된다. 22세기 러다이트. 기술이 노동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최상의 사용 가치로 치부하며 잉여 가치의 생산을 증대하고 그것을 자본으로 즉시 환원하려는 억누를 수 없는 인간적 욕망이 노동에 본원적으로 내재한 사회적 과정을 불문에 부친다. 기계와 노동의 결합 생산성(combined productivity)에 미래를 놓고 가르치고 쓰고 소통할 것. 야만적이고도 냉소적인 자본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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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하혁진 광장의 흔적, 흔적의 광장 ―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계간 문학인 하혁진 윤은성유리 광장에서광장공동체동일성타자성연대시민 2025
이찬 ‘時中’, ‘다른 미래’로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 김수영 시 「바뀌어진 지평선」

1 2024년 여름 『계간 파란』 통권 33호 ‘문질빈빈(文質彬彬)’ 항목에서 제시된 「“지평선”의 아름다움」에서 이미 암시했듯, 김수영의 「바뀌어진 지평선」은 『주역』과 『중용』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고전의 영향 관계라는 문제틀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어야만 한다. 이 시편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래된 미래’로 자리할 수밖에 없을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이라는 방법론과 의제의 초점화를 통해서만 적확하게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시와 산문 텍스트의 상관성을 심층적으로 탐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고전의 충실한 이해 및 참조가 필수 불가결의 조건을 이룬다고 하겠다. 김수영의 초기작 「공자(孔子)의 생활난」에서부터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유발한 도피 행각과 귀가 이후의 실존적 격투가 고스란히 배어든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 그리고 말년에 창작된 「미역국」이나 「사랑의 변주곡」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수한 시편들에선 동아시아 고전의 수용 및 변용의 맥락이 일관된 지속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김수영의 시에서 동아시아 고전의 이름이 거죽 위로 솟아오른 텍스트로는 「술과 어린 고양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는 中庸의 술잔” “여기에 있는 것은 中庸이 아니다” 같은 구절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시의 本髓」 같은 산문 텍스트에서 활용된 “양극의 긴장” “대극” 같은 용어들 역시. 동아시아 문명사의 주축을 이루는 ‘주역 철학사’에서 부단히 제시되었던 ‘대대(對待)’ ‘순환(循環)’ 같은 어휘들을 수용・변형한 것이다. 김수영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설움”과 “긍지”, “생활”과 “자유” 같은 대립적 심상들이 상호 보완적인 “대극”의 지력선을 이루는 것처럼, “대극”과 “양극의 긴장”으로 표상되는 산문 텍스트의 핵심 원리 역시,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중용』의 ‘신독(愼獨)’으로 대변되는 근본적 ‘자기성찰’을 수미일관한 실존적 태도로 “이행(履行)”하려 했을뿐더러, “생활”과 “뮤즈”가 “일자(一字)”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실천의 기반으로서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끊임없이 견지하려 했으며 이를 당대의 “서정시인”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시중(時中)’이란 말은 『중용』 제2장에서 등장하는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君子가 中庸을 함은 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小人이 中庸에 반대함은 小人이면서 忌憚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을 통해, 그 어휘적 관련 맥락과 구체적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주희(朱熹)의 주석으로 나타난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君子가 中庸을 하는 까닭은 君子의 德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中에 처하기 때문이요)’라는 구절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시중’이 인격 수양의 정점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맥락을 좀 더 생생하게 감득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시중(時中)’이란 ‘고시조지의야(故時措之宜也)’라는 말에 담긴 실질적 의미, ‘그러므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행함에 의(宜), 적합하면 된다’(우응순, 『친절한 중용 강의』)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상황과 시간의 구체적 마디들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더불어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마땅함(宜)을 매번 다시 살피고 수행해야 한다는 숨겨진 맥락을 명료하게 풀이해주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에서 부단히 등장하는 부끄러움의 형상들이나 보잘것없음을 반성하는 자기성찰적 시구들은 한결같이 ‘시중’의 윤리학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김수영의 여러 시작품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시각성’의 이미지들 역시 좀 더 심층적인 차원의 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위시한 동아시아 고전에서 유래하는 ‘신독(愼獨)’ ‘권도(權度)’ 등과 같은 성찰성과 관련된 어휘들과 더불어 ‘중용’ 및 ‘시중’의 사유 맥락에 대한 섬세한 이해 및 본격적 탐구가 필수 불가결하다. 2 뮤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 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콜맨의 신작품(新作品)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賣春婦)의 생활(生活)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神經質)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卑怯)하다고 경멸(輕蔑)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라크 케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노력(勞力) 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영국인(英國人)들은 호스피탈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 - 「바뀌어진 지평선」 전문 3 「바뀌어진 지평선」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 텍스트를 넘어서 그의 실존적 태도와 세계관의 중핵을 구성하는 ‘중(中)’의 사유와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 시는 상당히 긴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라는 예술 장르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되어 온 의미의 압축성과 리듬의 암시성을 충실하게 확보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특이점과 미학적 자질이 온전하게 작품 내부에 응축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 역시, 김수영 특유의 “대극”의 사유 방식 또는 “양극의 긴장”에 대한 그의 첨예한 통찰력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1연에 나타난 “뮤즈”와 “생활”이란 이미지는 명시적인 차원에서 이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극”의 의미 계열을 구축한다. 양자의 사이 공간에 들어박힌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시구와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라는 시간적 심상은 “대극”이 반복・변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이란 “생활”에서 파생된 것이며, “너”는 “뮤즈”를 대명사로 바꾸어놓은 대체 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매듭이 나날의 범속한 생활이 만드는 온갖 우여곡절들을 암시한다면, “뮤즈”와 “너”가 함께 이루는 연속적인 이미지 지력선은 시인의 포에지(poesie), 곧 시인의 예술적 이상으로 이루어진 예술혼을 표상한다. 나아가 시작(詩作)의 ‘내재적 과정’에서 체감하게 되는 ‘신독(愼獨)’의 실천적 태도와 ‘시중’의 윤리학의 절실한 자각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위에서 풀이한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측면 또는 상반된 계기를 품고 있다는 의심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을 중용의 관점과 문제틀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긍지의 날」에서 상반된 위상을 차지하는 “설움”과 “긍지”라는 심상을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로 통합시키는 “대극”의 사유 원리를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사랑」에서 등장하는 “변치 않는”과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이라는 시구의 상반성, 그리고 「사랑의 변주곡」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사랑의 도시”와 “개미”라는 대극적 이미지 구성원리에서도 또렷한 되풀이의 모양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만한 경박성”이란 작은 무늬는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이상적 질서’, 곧 ‘중용’의 사유 및 실천 원리이자 ‘대대(對待)’라는 말로 집약되는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점에서 감수되고 해석되어야만 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이 품은 사유의 보석이란 어쩌면 정반대 상황에 놓인 사태들을 “대극”의 원리로 포괄하면서, 이들을 그저 대립하는 것만이 아닌 상호 보완하는 것이라고 사유했던 지점에서 최고 순도의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요만한 경박성”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덧씌워진 속물성이나 천박성을 껴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나의 가족」)를 예감하면서 “긍지”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상반된 “대극”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잠재적 포석을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에는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예감하는 사유의 밀알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내적 “성장”을 성취하려는 시인의 웅대한 미래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2연을 구성하는 “대극”의 짜임새는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정(靜)의 심상과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동(動)의 표현이 상반된 지력선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양자의 이미지 계열을 한층 더 풍성하면서도 복합적인 일상의 다면성을 담을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간다. 양자는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상반된 이미지 지력선을 각각 계승한다. 따라서 그저 단순한 ‘정(靜)/동(動)’의 “대극” 현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도리어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요약되는 역동적 상호 침투의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나아가 중층적 “대극”의 무늬들을 2연 마디마디의 모서리로 틔워 올리면서 그야말로 풍요로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주요 동인으로 기능한다. 2연의 “다소곳한 분위기”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심상들 역시,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구절들을 각각 잇따르는 것이기에, ‘정(靜)/동(動)’의 단순한 “대극” 현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표현되는 상호 침투의 역동적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그야말로 다면적인 “대극”의 무늬들을 아로새긴다. 달리 말해,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라는 심상이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고요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느낌을 함축하는 것이라면,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심상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고양된 충만감으로 솟아오르는 역동적 개방성의 이미지와 “대극”을 이루면서 고립된 폐쇄성의 감각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무거운 일기”와 “우울”이라는 형상이 둔중하면서도 정적인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이와 상반되는 “걸어가기 위하여”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라는 구절들은 예민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의 원환 운동을 표현한다. 4연에 나타난 “생활”->“비겁”->“나의 원죄와 회한”의 계열이 함축하는 세속적 “타락”이라는 의미 매듭과 더불어, “뮤즈”->“경멸”->“너의 생리”로 이어지는 형상의 연속선이 이루는 신성한 “지혜”라는 의미 계열 역시, 앞서 살핀 연과 같은 “대극”의 구도에서 발원한다. “생활”의 이미지 계열이 발산하는 ‘세속-현실-일상’이라는 하나의 “극”과 더불어, “뮤즈”라는 형상의 계열체로 수렴되는 ‘신성-이상-예술’이라는 또 다른 “극”이 함께 이루는 “힘”과 “긴장”의 미학이 생생한 느낌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뮤즈”의 “대극”을 형상화하면서, 김수영은 나날을 살아가는 “온몸”에 “타락”과 “지혜”를 동시에 포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나날의 “생활” 속에서는 “뮤즈”로 표상되는 시의 예술혼이 끝끝내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와 “대극”을 이루는 “뮤즈” 속에서는 “생활”과의 공분모를 형상화하려 했던, 시인의 실존적 “싸움”을 주도 모티프로 삼는다. 달리 말해, 시인의 몸과 마음에서 수시로 엇갈리는 무수한 “대극” 운동이 「바뀌어진 지평선」을 구성하는 전체 이미지의 주도소(主導素)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5연과 6연에서도 이와 같은 “대극”의 이미지들은 수미일관한 연속선으로 구축되지만, 좀 더 본원적인 차원으로 진화한다. 곧 상호 모순에 가까운 ‘극단적 아이러니’의 어법과 구조를 새롭게 펼쳐놓는다. 특히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5연), “뮤즈여/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6연) 같은 대목들은 표면적인 통사 구조만을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의 적확한 해석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에 내포된 그 복잡다단한 의미론적 계기와 극단적 아이러니 구조에 관한 섬세한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7연의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를 비롯하여, 8연에서 등장하는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같은 구절들 역시 상호 “대극”의 이미지 계열을 구성한다. 전자(前者)가 바로 앞에 놓인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에서 이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면, “타락한”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또한 “기자”의 직무상의 윤리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해가는 세속의 풍습과 인심을 “정시”하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이라는 시어와는 결합할 수 없는 상반된 의미 지향성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7연에서 도드라진 모양새로 등장하는 “타락한”은 기자”의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발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상태이자, “이 어지러운 세상”이 강제하는 온갖 “탈”, 곧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다. 이처럼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앞뒤로 연속된 시구들은 서로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어긋나는 모양새를 띤다. 이들은 “뮤즈”와 “생활”, 곧 ‘신성과 세속’, ‘이상과 현실’ ‘예술과 일상’ 등등의 상반 항들이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구도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시인의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의 사유를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이 품은 그 형상의 진의(眞義)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가치 전도의 의미를 거느린 이 형상은, “뮤즈”와 “생활”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오히려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상호 전환의 융합 관계에 놓여있다는 이면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중(中)’의 시간적 궤적을 표상하는 형상인 동시에 ‘역동적 균형’의 운동 및 이행 과정을 지속하는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암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8연의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 역시, “바뀌어진 지평선”으로 빗대어진 ‘신성’과 ‘세속’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상호 전환 과정 및 ‘역동적 균형’의 상호 이행 운동을 역설 어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 바로 앞에 놓인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와 더불어, 그 뒤를 잇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는 이미지 매듭을 오랜 시간 동안 숙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을 곰곰이 되살피면,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은 비단 “타락한”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풍자를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 구절은 언뜻 “가벼워서”, “배반”, “간악” 같은 시어들로 이어지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꼴 짓는 이미지의 핵심 매듭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앞뒤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정반대 의미 계열을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서만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이 “생활”에 있을뿐더러 “경박성”이란 그것의 필수 요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표면”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날아갈” 수 있는 “정신”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은폐된 측면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이라는 적확한 은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저 이미지들은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 “물”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 “위를 날아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단히 유지할 수 있는 실천의 벡터를 암시적 문법으로 개진한다. 이 실천의 원리를 ‘시중’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 철학자가 제시한 ‘인간의 모든 “중中”은 “시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時”라는 것은 객관적・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라는 언급은, 이 맥락 전체를 좀 더 명확한 철학적 범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4 이와 같은 ‘시중(時中)’의 사유 맥락은 8연 마지막 대목을 이루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같은 형상들이나, 9연의 “너의 육체는/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1연의 “뮤즈여/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같은 심상들로 변형되면서 점층적 확산의 의미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이 “뮤즈”에게 “표면에 살아라”라고 말하면서,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시중’의 윤리학에서 기원한다. “표면”은 “생활”의 의미 계열로 수렴되며,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뮤즈”의 이상적 예술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자기 신념을 은은한 뉘앙스로 드러내는 역설 어법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9연과 11연의 이미지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의 범주에서 감수되는 것이 합당하다. “뮤즈”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육체”의 차원에서 호명하는 이미지 매듭(9연)이나, “시인”과 “시”를 “대극”의 차원으로 설정하면서 “뮤즈”와 “시”를 의미론적 연속체의 범주로 설정하는 구절(11연)은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생활”과 “뮤즈”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계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이 구절들은 “생활”과 “뮤즈”를 끊임없는 상호 전환 및 상호 이행이라는 융합・횡단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김수영 특유의 ‘중(中)’의 사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는 또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라는 실천 원리와 가치 지향성을 내포한다. 9연과 11연이 연속적인 의미 계열을 이루면서 개진하려는 바는, 각각의 상황과 국면에 따라 “생활”과 “뮤즈”가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관계이자 최적의 방향성, 곧 매 순간 ‘시중(時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궁극적 전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과 “뮤즈”가 12연에서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양자의 상호 이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달라지는 ‘시중(時中)’의 위상과 내용을 신중하게 사유하고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해, 시인은 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최적의 방향을 모색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는 실천의 ‘내재적 과정’,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나날의 실존적 태도로 견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라는 구절로 표상되는 세계의 모든 영역이 “일자(一字)”를 이루는 “지평선의 대열”을 구축할 수 있는 궁극적 화합의 미래 비전을 상상하고 선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수영이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무리 대목에서 “뮤즈”에게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12연), “앞장을 서지 마라”(13연),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13연)라고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점을 이룬다. 시인은 “생활”과 “뮤즈”의 “대극”이 함께 이루어가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이행 과정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로 소묘함으로써, ‘세속/신성’, 현실/이상’, ‘예술/일상’이라는 대립 구도의 고정성을 부단히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동시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권유하려 했던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라는 대목은 “서정시인”으로 비유된 당대의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모두 “모더니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혁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전언을 간곡한 명령 어법으로 권고하는 내용을 품는다. 이렇듯 “지평선의 대열”이 그야말로 “일자(一字)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매리지/하우스펠 에어리어” 같은 어휘들로 표상되는 서구 기계산업문명의 선진성과 그 문화적 세련성을 무작정 동경하고 추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으리라. 나아가 이와 같은 서구의 문화적 특질을 “뮤즈” 곧 “시”의 이상적 본질이자 예술혼의 정수로 추구하거나 숭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대 서구의 문화는 우리의 “생활”과 엄청난 격차로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진 지평선」에서 시인이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라는 사회・역사적 상황과 이에 대한 신중한 고민 및 극복의 비전을 여타의 “서정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권고하려 했던 맥락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이 권고에 깃든 속도의 담론과 비전이란 우리 사회 전체의 “모더니티” 수준과 밀도에 대한 시인의 근본적인 염려와 신중한 고민의 깊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것은 『중용』 제2장의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과 그대로 맞닿는다, 『중용』의 이 구절에 따르면, 군자의 ‘시중(時中)’은 소인의 ‘무기탄(無忌憚)’과 상반된 방향과 내용을 지니는 ‘기탄(忌憚)’, 곧 ‘거리낌’을 심사숙고하는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낌이란 신중함’이며, ‘거리낌은 인간에게 “거리”와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기에 실수의 가능성을 줄인다’(김용옥, 『인간의 맛』)라는 깊은 안목의 풀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거리낌은 겸손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강함’일뿐더러, ‘시중(時中)’의 근거이자 그 실천적 이행의 원천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지막 연에서 극단적 역설을 표현하는 반어법을 동반하면서, 우리 “모더니티”에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울”과 “경박”을 반추하도록 강제한다. 마지막 13연에서 “앞장을 서지 마라” “낮추어라” 같은 말들로 표현된 제한과 금지의 명령어들을 “뮤즈”에게 덧씌울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은 김수영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1950-60년대 한국 시단에서 “모더니티”의 첨단을 맹종(盲從)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각별한 어조와 리듬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여타의 시인들이나 예술가에게 권고하고 공유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3연은 두 매듭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뮤즈여/앞장을 서지 마라/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낮추어라”라는 부분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마지막 대목으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는 “뮤즈”에게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 풍조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님을 권고한다. 또한 우리가 나가야 할 최적의 선택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기를 간곡하게 요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고민과 성찰의 자리가 바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 펼쳐지는 구체적 실천의 무대일 것이다. 이는 또한 후자(後者)의 지극한 역설로 이루어진 반어법을 낳는 토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의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맨 마지막 무늬들은 김수영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를 비유적 차원에서 집약하는 구절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 없이는 충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 구절과의 통사론적 맥락에서 보면 지극한 역설을 내포한 아이러니의 수사학일 터이지만,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은 “우울”과 “경박”이라는 시어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우리 “모더니티”의 낙후된 수준과 후진적 형성 과정을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그것과 ‘사랑하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그 복잡다단한 속사정을 비교적 명징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모더니티의 문제」에 나타난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김수영의 “이상한 역설”이란 현대 한국인에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을 “우울”과 “경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말하는 “긍지”란 우리 모두의 “우울”과 “경박”을 껴안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뿐더러. 이른바 ‘중용’의 미덕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김수영에게 “긍지”란 ‘시중’의 윤리학에 깃든 ‘실천적 원근법’과 ‘역동적 균형’의 부단한 “이행”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에서 발원하는 “우울”과 “경박”을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 터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열어가려는 수미일관한 실천의 자리, ‘시중(時中)’의 충실한 이행 과정을 통해서만 체화될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아랫자리에서 인용되는 작은 무늬들이 넌지시 말해주듯. 오오 환희(歡喜)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구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退溪)든 정다산(丁茶山)이든 수염난 영감이든 복덕방(福德房) 사기꾼도 도적놈지주(地主)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 자칭(自稱) 예술파시인(藝術派詩人)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能辯)을 욕해도-이것이 환희(歡喜)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人生)도 인생(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 - 「미역국」 부분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학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 - - 「모더니티의 문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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