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간(間) 의 기록 ― 문지혁론
내 안에 있을 무언가를 찾아서
익숙하고 편한 것을 기어이 버려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를 들면 직과 업, 가족과 친구 그리고 언어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여기에 머무른다면 지금까지의 삶을 그대로 살아갈 것이고 익숙함이 내어주는 편안함과 안온함 덕분에 때때로 행복할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아주 낯선 곳으로 떠나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범박하게 두 가지로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혹은 현재의 곤궁함을 벗어나기 위해. 언뜻 이 둘은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둘 사이의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면 ‘떠남’을 통해 무언가를 ‘획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밝아 보이는 미래와 확실한 현재의 진창 사이에서 찾고자 하는 것들의 종류는 떠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선사시대 이후 인간의 역사는 줄곧 이주와 이민으로 이루어져 왔고, 그렇기에 무엇을 찾아 떠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러니 이런 ‘떠남’도 가능할 것이다. 삶을 위해, 앎을 위해, 슬퍼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자기 안에 있을 언어와 이야기를 찾기 위해 혹은 그것들을 꺼내보기 위해.
문지혁의 소설 속에는 자꾸만 ‘여기’를 떠나 ‘저기’로 향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국의 도시가 언뜻언뜻 보여주는 낯선 눈빛에 당황하고, 이방인을 손쉽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배타성에 진저리치면서도, 골목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는 ‘여기’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고국도 아닌 그렇지만 완전한 타국도 되지 못하는 장소에,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의 언어로 겨우 뱉어낼 수 있는 말들이 놓여 있다. 국가와 국가, 언어와 언어의 나와 당신, 그 사이에서만 할 수 있었던 일과 말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현존과 부재 사이, 죽음의 의문사 (疑問詞)들
어머니의 죽음 이틀 뒤, 바르트는 이렇게 적는다.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2) 어떤 죽음은 도덕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애도하는 주체가 되기로 한 자들은 시스템 안에 통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계절을 지나며 다시금 깨닫는 중이다. 여기에서 애도하는 주체가 시스템에 통합될 수 없다는 말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로 어떤 죽음은 말 그대로 세계의 지반, ‘그룬트grund’>를 붕괴하고 뒤흔든다는 것. 그렇기에 재난 이후의 세계는 이전의 시스템에 통합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두번째, 슬퍼하는 자는 살아 있음과 죽음의 경계에서 타인의 부재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절대적인 공백의 공간으로 침잠한다. 그렇기에 이들이 느끼는 부재와 공백은 시스템의 논리와 언어로 쉽사리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룬트의 붕괴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무엇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일까. 우선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어제 ‘현존’했던 사람이 오늘부터 영원히 ‘부재’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존과 부재 사이에 부착되는 의문사들—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의 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이때 비로소 애도의 시작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죽음들에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사가 오래도록 붙어 있게 된다.
문지혁의 두번째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에는 떠난 이들의 영원한 부재를 생각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기꺼이 슬퍼하고자 노력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설집의 첫 자리에 놓여 있는 「다이버」는 통합 세기 219년, 아쿠아플래닛이라고 불리는 인공행성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내와 아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직접 바닷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남자를 조명한다.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은 「폭수」에도 등장하는데, 오상택 교수는 호수에 빠져 죽은 아들의 죽음을 이해해보기 위해 매일 연구실 창가에서 호수를 향해 동전을 던진다. 그는 동전을 호수에 던지면서 이렇게 질문한다. “왜 그동안은 물이 폭발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까”(pp. 120~21). 「다이버」의 ‘그’와 「폭수」의 오상택에게서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 처절하고 아프게 읽히는 이유는 죽음에 부착되어 있는 질긴 물음표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온전히 죽음을 어루만지고 껴안으며 슬퍼하거나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허락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들은 현존과 부재 사이의 진공상태 속에 갇혀버린 자들이다.
그렇다면 현존과 부재 사이에, 우울과 애도 사이에 갇혀버린 이들은 어떻게 이 진공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이버」의 ‘그’는 말 그대로 슬픔의 근원지로 뛰어드는 방식을 선택한다. 유가족들으로 구성된 다이버들이 깊은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피해자들의 유류품이 쌓여감에 따라 이를 지켜보던 유가족들은 점점 사고 현장을 떠나고 마침내 두 사람, 청년과 ‘그’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청년마저 ‘그’에게 “저는 오늘까지인 것 같아요”(p. 16)라는 말을 남긴 채 자살을 하고, ‘그’는 다시금 혼자가 된다. 사고 현장에 남은 최후의 다이버가 된 그 역시 “사랑하는 가족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청년이 택한 방법이야말로 진짜 다이빙은 아닌가”(p. 17)라고 생각하며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기를 택한다. 여객선의 추락 지점과 수면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아내와 딸이 남겼을지도 모를 흔적을 찾아 헤매던 그는 그룬트가 무너진 곳이자 타인의 부재를 절감하게 만드는 공백의 장소를 향해 뛰어듦나기를 택한다. 그러므로 자살(혹은 사고사)로 독해되는 그의 마지막을 슬픔 끝의 죽음이 아니라, 물음표가 발생한 그곳으로의 침투로, 우울도 애도도 허락하지 않는 시스템 바깥으로의 투신으로, 그래서 이를 “그 재난들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창작 노트’, p. 240)한 상태에서 행할 수 있는 어떠한 ‘의지’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공간을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폭수」는 한 수학자의 연구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벌어진 모종의 사건을 그린다. 한국인 최초로 필즈상을 수상한 오상택 교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연구실을 찾은 언어학 대학원생 ‘나’는 인터뷰 중에 오상택의 아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계가 좋아할 만한 연구 주제에 골몰했던 그는 아들의 죽음 이후 ‘타인의 욕망’을 좇는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질문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물이 갑작스럽게 모이고 포개져 와류와 소용돌이를 만들고, 그 한가운데의 에너지 밀도가 무한대로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p. 120)이다. 매일 호수에 동전을 던지면서 물이 폭발하는 특이점에 골몰한다는 오상택을 보며 화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가 동전을 던지는 것은 수학자로서의 호기심 때문일까, 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 가진 죄책감 때문일까”(p. 124). 오상택의 이야기를 들은 화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저도 한번 던져보면 안 될까요?”(p. 125)라고 하며 그의 세계에 한 발짝 들여놓는다. 오상택의 조언대로 긴 포물선을 그리도록 호수에 동전을 던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호수가 폭발한다. 이때 폭수의 특이점, 싱귤래리티는 홀로 동전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동전을 던지는 것이 된다. 누군가 동전 던지는 자세를 봐주고, 동전을 던지는 그 순간을 함께 목격하는 것이 어떻게 물의 압력과 성질을 변화시켜 폭수의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이 두 사람은 오상택이 아들의 죽음 이후 그토록 골몰하던 폭수를 마침내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틈과 열림, 그것은 어디에나
죽음에 부착된 물음표와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기록하는 일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슬픔의 진공과 부재의 공백으로부터의 탈출은 투신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폭수」의 오상택과 화자처럼 ‘연결’을 통해 가능한 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우연히 포트 리의 카페에서 마주친 일본인 친구 ‘아야’와 함께 조지워싱턴교를 건너는 과정을 소묘한다. 뉴저지와 맨해튼을 잇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미국 독립전쟁과 성수대교 붕괴, 9·11 테러, 동일본 대지진이 다리 위에 나란히 포개어진다.
그 친구는 나보다 늦게 미국에 왔는데 자기는 돌아갈 생각이 없대. 왜 그런지 자세히 설명해 준 적은 없지만 나는 알 것 같아.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간혹 물어볼 때가 있어. 너와 네 가족은 괜찮았느냐고. 지진이 네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냐고. 글쎄, 거기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기 포트 리 언덕에 사는 친구와도 지진 이야기는 깊이 나눠본 적 없어. 심지어 그 친구는 센다이 출신인데도 말야. (p. 203)
화자는 성수대교 붕괴에 대한 논문과 소설을 쓰는 중이지만, 이는 논문의 언어로도 소설의 언어로도 포착할 수 없는 잉여를 내포한다. 이 때문에 그가 쓰는 논문은 소설 같고, 소설은 논문 같아지는 애매하고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논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다리를 건너기 시작한 화자는 다리를 건너며 뜻밖의 것들을 알게 된다. 가령, 어떤 슬픔은 쉽게 공유되지 못하지만 공유되지 않음이 연결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떤 사건은 그것을 직접 경험했는가와 무관하게 삶을 바꿔놓지만 그 변화에 대해 정확하고 말끔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으며 이 불명확함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애매함이 정확함의 반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논문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그 애매함이야말로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진실은 아닐까. 만약 재난과 참사에 대해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면 말이다.
다리를 건너 맨해튼 쪽에 도착한 아야는 버스를 타고 다시 포트 리로 되돌아간다. 다리 위에 혼자 남은 화자는 그가 쓴 논문의 새로운 제목을 제안하는 지도교수의 메일을 확인한다. 지도교수는 새로운 제목으로 “Cracks Everywhere ”(p. 212)를 제안한다. 이때 ‘균열’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재난과 사고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고와 죽음을, 사회 안전망과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의 지반을, 안온한 일상을 붕괴시키는 것으로서의 균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균열은 틈과 열림의 다름이 아니다. 그러니 이때의 균열은 재난과 재난 사이의 열림, 죽음과 죽음 사이의 열림, 슬픔과 슬픔 사이의 열림이 되기도 한다. 이 열림을 통해 조지워싱턴교를 건너며 서울의 성수대교를 생각할 수 있고, 9·11 테러와 동일본 대지진이 포개어지며, 각자 고유한 슬픔을 경험한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슬픔의 진공과 공백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재난과 재난 사이의 열림, 죽음과 죽음 사이의 열림 속에서 우리는 연결되고, 논문과 소설 사이의 언어 속에서 1994년과 2001년, 2011년의 참사가 기록된다. 다리 위에서 817매에 달하는 소설 원고를 던져버리려던 화자가 끝내 원고를 던지지 못하고 그대로 다리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혼자가 아니라 ‘아야’와 함께 다리를 건넜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소설을 던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야와 함께 걷는 동안 다리는 뉴저지와 맨해튼이 아닌 뉴욕과 서울, 센다이를 연결하는 세계의 틈이자 서로를 향한 열림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열림의 공간에서는 어제의 슬픔과 오늘의 슬픔이, 너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고여 썩어버리는 일은 허락되지 않으며, 사건과 장소를 기록하는 문학의 언어, 소설의 언어를 버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우리’와 ‘건너다’라는 단어는 ‘사이’를 필요로 한다. 나와 너 사이, 이곳과 저곳 사이. 이 사이는 언제나 열려 있다. 모든 강 위의 ‘다리’가 그러한 것처럼. ‘내가’ 아니라 ‘우리가’, ‘지나는’ 것이 아니라 ‘건너는’ 것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문지혁의 소설에서 이러한 연결을 만들어내는 틈과 균열은 어렵지 않게 포착되는데, ‘틈’의 물적 형상화로 자주 사용되는 소재는 ‘책’이다. 종이책이 사라진 통합 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에서 아버지가 남긴 단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장편 『비블리온』과 단편 「서재」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책을 이어받아 다음 내용을 작성하는 딸의 이야기인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 종이책이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마지막 종이책을 출간하는 작가의 모습을 조명한 「멸종과 생존」, 딸의 죽음 이후 딸이 남긴 책을 읽기 위해 섬으로 떠나는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문지혁의 작품에서 책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위의 소설들에서 책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세계의 금기를 위반하는 저항의 상징이거나, 인류를 구원할 진리나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종이책은 그 자체로 가장 완벽한 발명품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빈 종이 안에 내용과 형식에 상관없이, 언어의 제한 없이 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타인에게 전달 가능하며,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다는 책의 형식 그 자체에 책의 중요성이 있다. 이 세계에서 책은 문자 그대로 ‘코르푸스’가 된다. 하나의 말뭉치로서, 완결되지 않은 채 그것을 읽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3) 그렇기에 이 책들은 완성되거나 완전한 책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씌어지는 중인 책이 되어 영원한 미완의 상태로 세계의 전체주의적 완결성에 틈을 낸다. 이를 통해 책은 완전히 닫히지 않는 세계의 열림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 기록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며, 그 이야기는 어떤 언어로 씌어져야 하는 것일까.
쓰는 일과 사는 일, 그 사이의 기억과 기록
앞서 언급한 장편 『비블리온』과 단편 「서재」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에 등장하는 책에 적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플라톤의 『국가론』도 아니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아닌,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책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 바이오그래피가 씌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이 한 개인이 쓸 수 있는 가장 정밀한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질문을 조금 바꾸어보자.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 정밀(精緻)한 삶의 기록을 통해 삶의 정치(政治)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언어는 과연 무엇일까. 과연 우리에게 모국어는 그 자체로 충분히 예리한 도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2020년과 2023년에 출간된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는 연작소설이자 자전적 소설로 일인칭 화자 ‘지혁’을 통해 (외국인)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뉴욕과 서울에서의 삶, 그리고 소설 쓰기의 곤란함과 지난함을 예리하게 묘파한다. 『초급 한국어』는 뉴욕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맡게 된 지혁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온 지 1년 6개월 만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일을 새로 시작하게 된 지혁은 그토록 꿈꿔왔던, 미국에 정착하여 한국어를 가르치며 영어로 글을 쓰는 이민 작가의 삶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첫 수업부터 앞으로 이어질 초급 한국어 강의가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영어에서 제일 처음 배우는 말이 hello와 hi인 것처럼 한국어 역시 가장 처음 배우게 되는 말은 ‘안녕하세요’이다. 그러나 ‘안녕’이라는 간단한 두 글자가 지혁을 안녕하지 못하게 만든다. 편안할 안, 평안할 녕. 우리가 하루에 수없이 주고받는 말. 편안하고 평안하니? 편안하고 평안하세요. 이 말을 영어로 옮기면 오직 한 단어 peace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안녕과 peace 사이에서 지혁의 ‘안녕’은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린다.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꺼내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와 무관한 일이다. 오히려 그것과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 그것을 얼마나 낯선 눈으로 다시 읽어낼 수 있는지와 관련한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어 수업을 포함한 지혁의 미국 생활은 그의 몸과 삶을 구성하던 요소들과 한 발짝 멀어지는 일이 된다. 새삼스러운 낯섦 앞에서 지혁은 생각한다. “문지혁은 영어로도 문지혁이라는 것을,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혹시 나는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p. 49) 어떤 것들은 도무지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 아니 함부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외국어와 모국어를 오가며 골몰한다.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첫 수업 직후 한국에 있는 여동생 지혜에게서 엄마가 뇌졸중에 걸려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안녕하냐고 물을수록 안녕하지 못한 상태로 미끄러져버린다. 『초급 한국어』는 외국 생활 중 마주하게 되는 초심자의 마음과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초보가 되어버리는 상황의 연속을 묘파하는데, 초보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들과 멀어진다는 것의 다름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혁은 언어와의 멀어짐과 엄마의 죽음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초보자가 된다. 건강 상태가 점차 악화되는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학기 중간에 수업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파트타임 “논 레지던트 에일리언”(p. 113)이라는 신분인 지혁은 처음으로 한국어의 구개음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삶과 삶 사이에서 더듬더듬, 아플 만큼 정직하고 숨김없는 자기 고백을 꺼내놓는다. 어쩌면 자신에게 허락된 미래는 중국인 이민 작가 하진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여자친구의 가족들에게 소개시켜주기 부끄러운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을, 자랑스러운 아들도 오빠도 아닌 그저 ‘개새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이유가 그저 ‘우쭐하기 위해’ 하는 일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결국 지혁의 한국어 강의는 첫 학기를 끝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된다. 학기의 마지막 날 자신이 ‘해고’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고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강사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다. 점점 상태가 악화되는 엄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지혁은 캐리어 두 개에 미국에서의 삶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한국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려던 순간,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으로 나눈다면 지혁이 미국에서 보낸 시간은 어떤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대부분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 즉 ‘크로노스’의 시간이겠지만 지혁이 미국에서 보낸 그 마지막 시간만큼은 “한번 일어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p. 128) 신과 인간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음은 확실하다.
『초급 한국어』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이 엄마의 죽음이었다면 『중급 한국어』에서는 딸 은채의 탄생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다. 지혁은 한국에 돌아와 미등단인 상태로 SF소설 한 권을 출간했고, 미국에서 헤어졌던 은혜와 결혼했으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은채가 태어나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대학에서 비정규직 시간강사라는 신분으로 학생들에게 소설 쓰기를 가르친다. 미국에서의 강의가 모국어로서의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면, 한국에서의 글쓰기 강의는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모두 한국어 사용자라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말에 숨겨진 희미한 뉘앙스, 여백, 서브 텍스트까지 모두 파악했고, 심지어는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차”(p. 53)리게 되는 숨을 공간 없이 밀착된 곳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완전히 숨길 수도 완전히 꺼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지혁은 자주 부끄러워진다.
또 하나 지혁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작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작가가 되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문단의 제도이다. 한국 문단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책을 ‘출간’하는 것이 아니라 ‘등단’을 한다는 의미이며, 제도권의 호명을 기다리지 않고 이탈한 자는 ‘작가’가 아니라 그저 ‘책을 낸 사람’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그의 글쓰기를 힘에 부쳐 지속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제도권의 부름을 기다리는 일이 글쓰기 자체가 압도한 현실 속에서 ‘쓰는 삶’은 지혁에게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Q: 앞으로 글을 쓰는 것이 너와 네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A: ……아무 의미도 없다.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만 빼면.
그런 결론에 이르자 갑자기 분노가 솟아오르면서 눈물이 찔끔 나려고 했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무엇을 위한 눈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막연하게, 세상과 책과 문학과 문단과 출판사와 편집자와 악플러와…… 그리고 나, 바로 나, 나 자신 때문이었던 것 같다. [……]
그래, 그만두는 마당에 못 쓸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체이싱 유」 같은 함량 미달의 SF도, 「호랑이와의 하룻밤」 같은 어쭙잖은 문단 문학도 아닌 글을 쓰자. 아니, 그냥 내 이야기를 쓰자. 나를 쓰자. (pp. 232~33)
학생들에게 잘 읽는 법과 잘 쓰는 법을 알려주는 선생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써야 하는 글 앞에서는 어떠한 이론도 무력해지는 경험을 한다. 빈 종이 앞에서, 두서없이 늘어져 있는 문장 앞에서 커서를 이리저리 옮기며 헤매는 동안 알게 되는 것은 소설은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배반하는 방식으로만 씌어진다는 것이다. 이 배반이야말로 언제나 유효한 소설 쓰기의 유일한 법칙이다. 마치 지혁의 삶에서 문학이 뒤로 밀려나는 순간, ‘쓰는 삶’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는 쓰는 손을 자꾸만 움츠리게 만들었던 타인들의 문학에서 ‘나’의 문학으로 이주하는 과정이라 읽을 수 있다. 쓰기의 기술에는 ‘사랑의 삼각형 이론’이나, 묘사의 기술, 파격적인 문장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유년’과 ‘사랑’ ‘대화’와 ‘상상’ ‘죽음과 애도’가 필요할 뿐이다. 소설은 삶에 앞서서 존재할 수 없지만, 삶의 어떤 기억들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유년과 사랑, 대화와 상상, 죽음과 애도의 과정에서 글을 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두 가지뿐이다. 나에게서 영영 사라져가는 모국어 단어들을 잘 기억하는 것, 새롭게 얻게 될 단어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
그러므로 문지혁의 ‘한국어 강의’ 시리즈는 누군가를 사랑했고, 아직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라는 성실한 반복에 대한 기록이자 무언가를 좋아했고, 욕심냈고, 그래서 떠났고, 미워했고,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창조이며,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허구 위에 지은 집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p. 64)하는 것이라면, 사는 일과 쓰는 일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기억하고 기록한 발명의 바이오그래피는 “반듯”하기 때문에, “순진하며 찌질하고 뻔”(p. 149)하기 때문에 진실하고 강렬하다.
그러나 아직은 떠나는 중
『중급 한국어』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글쓰기는 일종의 여행이”(p. 37)라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이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떠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서사의 기본 구조라면, 소설 쓰는 일도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삶이야말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쓰고 있는’ 소설”(‘작가의 말’, p. 184)이라면 우리의 삶의 기본 구조 역시 떠났다–돌아오는 구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책의 안과 밖으로 귀가 중인 사람들이다. 문지혁의 근작 『고잉 홈』은 조금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미국에 체류 중인 한국인 유학생인데, 이 유학생이라는 신분은 어딘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단 한국을 떠났으나 앞으로 미국 사회에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떠남은 아직 ‘과정’ 중에 있다.
「크리스마스 캐러셀」은 공개 입양된 에밀리와 어느 날 갑자기 새엄마가 생긴 ‘나’가 디즈니월드에서 겪게 되는 모종의 ‘실종’ 소동을 그린다. 의도적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미아’가 된 에밀리를 찾는 과정 속에서 ‘나’는 에밀리가 다섯 살 때 디즈니월드에서 유기되었다는 것과 에밀리의 원가족들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렵게 크리스마스 캐러셀 앞에서 만난 에밀리에게 도대체 왜 사라졌느냐 묻는 ‘나’의 질문에 에밀리는 “다시 혼자가 되어보고 싶었어”(p. 125)라고 답한다.
‘다시’ 혼자가 되어보고 싶었다는 말은 최초로 혼자가 되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에는 무언가 확인할 것이 있음을 내포하기도 한다. 다시 혼자가 된 에밀리는 자신을 유기한 ‘가짜 엄마’가 자신을 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자신을 살려주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에밀리는 다시 자신을 입양한 ‘진짜 엄마’가 있는 곳으로, 그녀와 함께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 죽음의 끝에서 살려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돌아가는 집은 그전과는 다른 집이 될 것이며, 앞으로 에밀리에 도래할 시간도 조금은 다른 시간이 될 것이다. 화자 역시 돌아가신 엄마가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함께 보고 싶다던 디즈니월드의 불꽃놀이를 본 후에 돌아갈 집은 전과는 다를 것이다. 어쩌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나’의 집은 “내가 많이 노력할게”(p. 96)라고 이야기하는 새엄마를 “엄마라고 불러보는”(p. 128)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새로운 ‘집’을 만들어낸 에밀리와 ‘나’가 함께 타는 놀이기구가 크리스마스 캐러셀, 즉 회전목마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회전목마는 떠나는 동시에 돌아오는 것이므로. 목마가 출발과 도착 사이에서 달리는 것은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또 다른 ‘집’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뜰 안의 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뜰 안의 볕」은 목회학 석사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늘봄’의 이야기이다. 현재 늘봄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 하나는 대학원 졸업 이후 교회 스태프로 일하면서 계속 미국에 남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당연히 미국으로 유학까지 온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자의 옵션이 훨씬 매력적이며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늘봄은 흔쾌히 미국에 남아 교회 스태프로 일하기를 망설인다. 왜냐하면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는 위장 취업과 같은 편법을 사용해야 하고, 무엇보다 늘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목회’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늘봄이 결정을 망설이는 표면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사실 늘봄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존재한다. 바로 늘봄이 ‘무성애자’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폐쇄성을 떠나 미국행을 선택한 늘봄이지만, 미국 한인 교회의 상황도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늘봄은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부를 수 있을지, 그래도 괜찮은 것인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언하기를 주저한다. 말하자면 늘봄은 한국도 미국도, 신학도 목회도, 교회 동료들과 엄마조차도 자신에게 온전한 ‘집’이 되어주지 못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단지 내 정원 사용에 대한 이웃들 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가 소집된다. 정원에 설치된 유대인 이웃의 ‘수카’ 철거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이웃들이 모인 와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인 유대인은 안식일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인 이웃 그 누구도 그의 불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나무라거나 집으로 쫓아가 회의 참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수카’ 철거 문제에 가장 열을 올리던 중국인 부부마저도 아이가 가져온 과자를 함께 나누고, 늘봄도 역시 따뜻한 둥굴레차를 가져와 이웃들과 함께 나눠 마신다. 텅 비어 있던 정원은 이렇게 노을을 보며 함께 둘러앉아 있는 것으로 진짜 정원이 된다.
언뜻 기묘하게 보이는 이 풍경 속에는 공동의 영역을 공유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지만, 그럼에도 타인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하거나 훼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종교와 안전을 위해 떠난 이들이 먼 곳에서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집’을 훼손하지 않는 과정 속에서 늘봄은 자신의 이름 뜻이 “‘올웨이즈 스프링’이 아니라 ‘이터널 스프링’일지도 모”(p. 255)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항상 봄이 아니라, 영원히 봄이라는 것은 봄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봄이라는 뜻을 갖는다. 늘봄이 늘봄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늘봄이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에도 나는 나에게 ‘이터널’한 존재가 된다. 어디를 가고, 무엇이 되어도, 먼 타국의 땅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순간에도 내가 영원한 ‘나’라는 사실은 내가 나에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을 내어주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집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저 나에서 나로, 나의 사이사이를 마음껏 헤매는 일과 같을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아직은 떠나는 중이다.
사이의 애매함, 애매함의 진실함
명확한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진실이 명확함과는 거리가 먼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진실을 잘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도, 혹은 진실을 눈앞에 두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문지혁의 소설은 애매하다. 그의 소설은 늘 무언가의 사이를, 분명히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간 (間)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삶과 죽음, 애도와 우울 사이를 보여주고, 차이가 아닌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를 힘주어 말하며, 쓰는 일과 사는 일 사이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결과는 이 모든 일들이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서, 나와 나 사이에서 치열하고 처절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문지혁의 소설은 애매하고, 애매하기에 진실하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비블리온』(위즈덤하우스, 2018), 『초급 한국어』(민음사, 2020), 「다이버」 「서재」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 「폭수」 「아일랜드」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다산책방, 2022), 『중급 한국어』(민음사, 2023), 「크리스마스 캐러셀」 「뜰 안의 볕」(『고잉 홈』, 문학과지성사, 2024), 「멸종과 생존」(『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옮김, 이순, 2012, p. 18.
- 3) 장- 뤽 낭시, 「코르푸스: 또 다른 출발」,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pp. 54~58.
추천 콘텐츠
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1. 림보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해가 뜨고 지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예외 없이 반복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 의미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사이, 온전한 구원도 영원한 처벌도 아닌 기이한 경계 위에 놓인 끝모를 유예의 삶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텅 빈 약속에 기대어 자기 몫으로 주어진 무한한 침묵의 무게를 온 힘을 다해 견디며 서서히 소진되어 갈 뿐이다. 림보가 때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원형이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구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한없이 갈망하는, 의미를 믿을 수 없으면서도 간절히 희구하는 인간의 오래된 마음과 그 기이한 관성을 림보의 심연으로부터 불현듯 마주치게 되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흐르지 않는 시간의 더미 속을 오늘도 무심히 통과해 간다. 림보 안에 갇혀 있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망각하고 부정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금까지의 생과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무한한 반복뿐인 오늘의 심부에 거칠게 쑤셔 넣는다. 어떤 부정도 외면도 더는 되풀이할 수 없을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생의 열기를 창백히 소진시켜 하루치의 안도와 평화를 가까스로 얻어낸다. 그렇게 림보의 일부가 되어 간다. 급류에 휩쓸리듯 림보의 심연에 깊이 좌초된 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허방 속을 무한히 배회하며 림보의 중력에 천천히 소화되어 간다. 이번 최호빈의 시편들은 이 림보의 심연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매혹과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화자들은 공허한 반복뿐인 림보의 시간을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살아냄으로써 정보와 명령의 과잉으로 점철된 현실의 앙상한 구조를 적확하게 짚어내고, 오래도록 잊어온 살아 있다는 일의 경이와 그 선득한 실재를 회복해내고 있었다. 의미의 부재를 좇으면서도 섣불리 상상적 매개에 의지하지 않는 신중한 견고함으로 림보가 뿜어내는 육중한 중력을 존재의 내부로부터 캄캄히 씹어 삼키고 있었다. 림보의 심연 속을 항해하는 그 투명하고도 예리한 시적 섭생의 한 방식을 따라가 본다. 2. 림보의 출입구를 발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그토록 선명했던 목표도 출발점도 림보의 중력과 그 자장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여놓게 되면 모든 것이 한없이 모호하고 흐릿해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림보는 단순히 삶만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온 일체의 가치나 의미까지도, 이에 기대어 뿌리내려온 존재의 모든 시간까지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린다. 림보에 갇힌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동력은 관성이며, 이는 삶의 고유성과 의미를 모두 말끔하게 지워버린 현재라는 강력한 동일성의 중심을 향해 어떤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나아간다. 최호빈의 시는 그 맹목의 관성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투명하게 응시하되 어떤 확신도 포기도 신중히 경계하는 이중의 절제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성찰적 시가 도달하기 쉬운 환원론적 경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 낸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체온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혈압을 잰다 폐활량도, 골밀도도, 시력도, 심전도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맥박을 세고, 혈당을 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기록한다 오늘이 낮이 긴 날인지 밤이 긴 날인지 모르겠지만 매 순간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있다 (중략) 체인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차르르, 차르르 하루가 하루를 굴리고 있다 ―「루틴 버그」 부분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맹목적 “루틴”뿐인 삶의 허망함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사유하고 있는 자신만큼은 이 림보의 중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근대적 자각의 형식을 빌린 손쉬운 착각 속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오직 동일한 운동의 “반동”과 그 강도에 기대어 “하루가/하루를 굴리”는 지리멸렬한 삶의 풍경은 명백한 부정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간단히 지워버릴 수 없는 우리 삶의 조건이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며 그 삶이 놓여 있는 지배적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계몽적 맥락에서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림보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그 맹목뿐인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호빈의 시는 림보에 갇힌 생의 구체적 세부를 하나하나 주시하고 “기록”해 둠으로써, 그 텅 빈 강박의 형식에 깃들어 있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존재의 깊은 불안과 고독을 읽어낸다. “맥박”, “혈당”, “혈압” 등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수치화한 표백된 추상의 개념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살아가는 뒤틀린 허기뿐인 삶의 중심엔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나 없는 곳에서/점멸하는 가로등같이 애써 살아가는 오늘이/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나”나 우리, 혹은 존재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닌데, 다음의 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앞만 보고 달리라고 했다 선생님, 저희는 팔을 흔들며 달릴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궁금한걸요 (중략) 마지막 곡선코스를 돌면서 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한 친구는 쓰러져 있었고, 한 친구는 울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고, 한 친구는 마치 신호를 듣지 못한 듯 출발선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손에 있었던 것은 건네주고 건네받는 릴레이 바통이 아니라 녹초가 될 때까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0의 릴레이」 부분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경주마의 은유는 이미 우리 생의 보편적 형식이 되었고,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이를 내면화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당위적 상식과 표준 내지 윤리적 규율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녹초가 될 때까지” 결코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시대의 “릴레이”란 사실 “릴레이”의 형식을 빌린 단독 경주에 불과하다. 우리가 참고 견뎌온 공동체의 경주가 실은 어떤 것도 서로에게 “건네주”거나 “건네받”지 못하는 “0의 릴레이”였다는 깨달음은 날카롭고 명징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암울하고 비관적이다. 물론 최호빈의 문장은 그와 같은 체념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비록 영원한 “0의 릴레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릴레이 바통”을 단 한 번도 서로에게 건넨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트랙을 도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이 공통의 운명에 처한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였음을 아프게 지적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번도 온전히 발설된 적 없는 “우리”가 림보 바깥의 시간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한다면, 다음 절의 시편들은 이를 존재에 대한 질문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전환해내는 시적 사유의 깊이와 그 견고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3. 앞서 다룬 시편들이 림보에 갇힌 삶의 구체적 세부와 그 표면에 비교적 밀착해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다음의 시편들은 성찰적 거리의 매개를 통해 림보의 바깥을 좀더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사유한다. 이에 따라 시의 무대 역시 성격이 조금 달라지는데 이들 시편들에서 림보는 맹목의 관성과 공전(空轉)의 열기로 위태롭게 굴러가는 타성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존재를 향한 열망으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매혹적인 탈경계적 공간으로 변모된다. 그럼에도 이를 림보의 차원에서 일컫는 까닭은, 이 마력의 공간이 언제나 경계와 경계 사이에 놓인 항구적 임시의 공간이며 오직 경계를 넘기 위한 갈망의 깊이만이 그 내부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최호빈의 다음과 같은 시들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림보의 중심에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 림보 너머를 사유하고 매개하려는 존재 탐구의 의지를 드러낸다.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하겠지. 별생각 없는 이마를 쓰다듬고 사라진 건 누굴까.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겹쳐 쥔 채, 조금씩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늘 한 걸음 늦게 도착하는 너의 시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가 거기서 깨어난 적이 있다. 오늘도, 내일도. 네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오랜 꿈을 다시 꾸듯 네게 짖고 싶어. 그게 내 운명이라면, 컹컹. ―「데자뷰」 부분 꿈 저편에서 돌 하나가 또 건너왔다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돌 하나 정말 내 꿈에 누가 또 있는 걸까 세 번째 돌을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 건너오다가 가라앉은 걸까 아니면 그냥 가져간 걸까 그냥 돌아간 걸까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물수제비」 부분 세계는 “미심쩍은 그림자들”로 대표되는 무의미한 일들의 무한한 반복과 단 하나 강렬한 사건적 의미의 출현이라는 선명한 이분법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적대적 요소들의 대립으로 삶과 세계를 거칠게 이분화하여 환원시키려는 폭력적 의지와는 별 관련이 없는데, 의미의 부재와 결여는 상실된 존재의 시원을 회복하기 위한 인식의 토대이자 판단의 근거일 뿐, 무구한 세계에 죄를 물으려는 핏빛 단죄나 원한의 투사가 아닌 까닭이다. 그의 화자들은 “너”가 “날 선택했”다는 명료한 판단과 전제 위에서,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타자의 방문과 그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위에서 ‘너머’의 감각과 그 물성을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만, 이 간절한 열망은 언제나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라는 질문의 형식으로만,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라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기다림의 언어로만 발화되고 매개된다. 최호빈의 시에서 의미는 그렇게 찾아온다. 림보 바깥으로부터 건너온 환대와 초대의 몸짓들은 오로지 그 너머와의 맹약에 사로잡힌 화자의 절대적 갈망과 의지로 인해, 기다림에의 헌신과 그 오랜 견딤의 밀도로 인해 비로소 고유한 얼굴과 목소리를, 체온과 무게를 갖게 된다.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라는 시적 전언은 그러므로 또 하나의 절대적 기다림에 대한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꿈속에 ‘나’를 투신하여 나를 지우려는 것도, ‘나’의 두터운 중력으로 꿈의 물성을 구부려 억지로 집어삼키려는 것도 아닌 이 투명한 기다림의 자세가 최호빈 시의 고유한 호흡과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 기다림이 있는 한, ‘너머’는 어디에서나 출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곳도 ‘림보’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다음의 시에서 림보는 세계를 집어삼키는 적대적 미로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 바깥을 상상하고 잉태하는 무수한 ‘너머’들의 자궁이자 그 기미들로 흘러넘치는 경계들의 성소로 현현된다. 조문하러 가는 장례식장은 얼마 전에도 갔던 곳 그전에도 몇 번이나 갔던 곳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아, 맥도날드 모든 불행은 멀리 있다는 듯 웃고 있는 맥 도 날 드 불 고 기 버 거 한참 뒤에 나타난 경찰이 정리를 해봐도 한번 막힌 도로는 쉽게 뚫리지 않고 눈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호루라기 소리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아, 글자 하나하나가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인 것처럼 묵묵히 솟아오르는 M c d o n a l d ’ s ―「이방인-맥도날드 불고기버거」 부분 “맥도날드”는 평소엔 아무런 문제도 의문도 일으키지 않는, 편리하고 무감한 숱한 일상의 장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퇴근길 막힌 도로처럼 꼼짝없이 림보에 갇히고 만 삶의 실재를 차분히 응시하려는 화자의 시선에 인해 일순간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처럼 분리되어 “묵묵히 솟아오”른다. 일상의 허기(“시장기에서 오는 쓸쓸함”)와 존재의 허기(“쓸쓸함에서 오는 시장기”)가 엇갈리며 뒤엉키는 이 기이한 경계적 시간 속에서 화자는 “맥도날드”라는 일상의 공간이 불현듯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무수한 “통로”들로 변신하는 시적 도약의 비일상적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맥도날드” 자체는 물론 어떤 숭고한 의미도 약속도 제공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기이하게 뒤틀린 경계적 공간들은 림보 너머의 삶과 그 선연한 물성들을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받아들이고 예감하게 한다. 이 너머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과 존재론적 갈망이 최호빈 시의 화자들이 ‘림보’의 심연을 헤매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면, 그것이 “너”라는 인칭으로 호명되든 “돌”이라는 존재론적 사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든, 불길하고 불가해한 실재에의 매개나 교차로로 묘사되든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최호빈의 화자들은 이 ‘너머’에 대한 사유와 갈망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실재들을 림보 속 그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림보’는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조건이자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 혹은 이미지이기에 앞서, ‘너머’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과이자 그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림보와 맺고 있는 곤경의 특수성을 얼마쯤 정확히 짚어내 주기도 한다. 우리는 림보 안에서 태어나 ‘너머’를 꿈꾸고 갈망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림보는 우리를 가두지만, 동시에 그 가둠을 통해 깨어나게 한다. 깨어남을 갈망하게 한다. 림보는 우리의 적이면서 자궁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이다. 림보의 바깥은 림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는 림보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만 림보의 바깥으로 향할 수 있다. 최호빈의 시는 이 ‘림보’의 생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림보 안에서가 아닌 림보 속으로 쓰여진 기나긴 울음의 내력들을 그의 문장들로부터 뜨겁게 읽는다.
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