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들 2024년 가을호(제77호)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정지돈론 — 나는 너를 말하고 너는 나를 말한다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정지돈론
- 나는 너를 말하고 너는 나를 말한다1)
문학은 누군가의 사유지가 아닙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우리는 그곳으로 자유롭고 용감하게 걸어 들어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 버지니아 울프2)
1부 접근
1. 자기 재현과 전시의 시대
칠 년이 지났다.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성폭력 고발로 시작된 미투운동(#MeToo)이 일어난 지 꼬박 칠 년이다.3) 그간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의 본격적인 대중화, 그리고 수많은 정체성들의 자기 전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화라는 말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너르게 정의한다면 이는 곧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 당사자 외의 사람들, 이웃한 이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도 사안에 대해 접근하는 페미니즘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 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러한 정치적 견해와 입장은 온라인 SNS 공간에서 적극 표현된다.
2016년 10월 트위터에서 시작된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운동은 한국문학장 내부에 만연하고 공고하던 남성 지배와 폭력적인 남성성을 가시화했다. 이 과정에서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라인에서의 공론화는 운동의 아주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 여성 창작자와 독자들이 경험한 폭력을 공유하는 작업은 구조적인 성차별과 성폭력, 여성 혐오를 가시화하고 축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완벽하지 않지만 얼마 간의 정화 작업이 문학장 내부에서 이루어졌고 이제는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놀랍거나 이상하지 않은 국면까지 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이후(post)’를 돌아볼 수 있을까? 미투운동이 종료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장 와인스타인의 재판만 하더라도 현재 계속 진행 중이며 폭력은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4) 우리는 필요하다면 언제고 또 다시 ‘미투’를 외칠 것이다. 사안은 더욱더 복잡한 국면으로 이행하고 있을 따름이며, 끝이 아닌 무수한 시작을 야기할 것이다. 사법적인 처벌과 응징이 이루어진 후에도 해당 사건들은 새로운 현재 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금 소환될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문제로 드러난 것은 진행하는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소환되며 비판적인 성찰의 대상이 되고 몇 번이고 다시금 현재화되어 사안을 바라보는 새로운 맥락들을 끊임없이 생산할 것이다. 이때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폭력에 대처하는 우리의 방식이 그 ‘이전’과는 분명 다르리라는 것이다.
특정한 시대의 페미니즘이 경험하는 ‘이후’의 시간, 포스트 페미니즘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른 시점에서 다른 양태로 드러난다. 가령 20세기 초 영국의 서프레제트 운동가들에게 여성의 투표권 획득 후의 시간이 포스트 페미니즘이었던 것처럼5) 한국의 페미니즘 또한 미투운동으로 경험한 모종의 성취를 기준으로 현재 우리가 거치고 있는 이 시간은 그 ‘이후’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주체들의 행위가 더욱더 각자도생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로 강화되는 양상은 한국의 (포스트) 페미니즘이 경험하고 있는 한 가지 특징적인 국면을 견인한다.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하지만 그것들의 공통점은 ‘여성’이라는 공통항으로부터 여성 ‘개인’이라는 각자의 개별항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은 특히 재현에 관한 문제와 강력히 결부된다. 가령 『인생샷 뒤의 여자들』(오월의봄, 2023)은 저자가 자신의 여성학 석사학위 논문6)을 수정하여 발표한 책으로 여성 주체가 자신을 온라인 가상 공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하고자 하며, 그러한 재현 속에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욕망, 여성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드러내고자 하는지를 살핀다. 요컨대 페미니즘이 철저히 개인의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실천되는가 하는 문제, 미투운동 당시에는 공동의 현안이었던 여성 문제가 그 ‘이후’의 시간 속에서 더욱 사적인 현안으로 전환되는 면모를 탐색한다.
신자유주의의 주체들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온라인 가상 세계에서 재현된 정체성을 자신의 오프라인 정체성과 긴밀히 연동시키려 하며 심지어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체제를 전복할 수 없음이 자명해진 시대 감각 안에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정치적 실천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소비의 내용을 전시하는 행위는 구조 안의 주체가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운동이 되기도 한다.7) 이와 함께 특별히 부각되는 주체성 중 하나는 소비자 주체성이다. 체제를 영속하게 하는 거대한 힘의 주체가 기업이기에 ‘나는 구매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무리 없을 만큼 현실의 거의 모든 사안은 소비와 불매의 이분법적 실천 속에서 논해진다. 친환경적인 기업을 지지하고 그들의 제품을 구입하며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에게 불매를 선언한다. 기후 위기나 노동 문제, 여성 혐오 등 대부분의 현안들은 그러한 소비 실천과 더불어 발화된다. 이러한 주체성이 동시대 한국의 페미니즘과 만나면서 발현하게 되는 한 가지 모습은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 또한 다른 여러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스스로를 재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하나의 해쉬태그, 기표이자 자기 재현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외모나 구매 내역뿐만 아니라 주체가 전시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정체성의 재현인 동시에 사적이고 공적인 사안에 관한 정치적인 발화가 된다. 예컨대, 이와 관련해서 『인생샷 뒤의 여자들』이 제공하는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예쁜 페미니스트’에 관한 부분이다. 페미니스트가 못생긴 여자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을 보다 효과적인 페미니즘의 ‘영업’을 위한 전략으로 취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8) 김지효가 뒤이어 덧붙이는 바와 같이, 이들은 “구조적 차별을 열등한 여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전략”에 대항하여, 여성 문제가 개인적인 사안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개인적 무능이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는 변수를 모두 소거”9)하고자 한다. 역으로 여성의 억압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 이러한 모순적인 전략은 주체가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편집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한다. 책에서는 특히 여성의 외모에 관한 욕망과 그것의 드러냄, 꾸밈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 지점에서 발견되는 무의식은 그러한 외모가 ‘나’의 신체라는 사실, 다시 말해 ‘나’의 절대적인 소유물이므로 ‘내’ 마음대로 꾸미고 표현할 수 있다는 시대적 합의와 상식이다. 코로나와 미투운동을 겪은 동시대의 페미니즘운동은 여성 공동의 현안으로 상정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한자리에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내보이고자 하는 개인적인 ‘재현’의 외양, 그것들의 이합집산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의 입장 표명은 매체를 통한 ‘나’의 재현으로, 게릴라적인 방식으로 발생한다.
여성의 개별적인 정치적 주권을 획득하고자 했던 제1물결 페미니즘 이후, 여성의 사회·문화적인 해방을 도모했던 제2물결 페미니즘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기치 아래에 진행되었다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은 그것의 역, 가장 정치적인 것이야 말로 가장 사적인 것이라는 표현에 더욱 부합한다. 제2물결의 구호가사적인 것을 공동의 정치적인 힘으로 재구성하는 하나의 부분 집합으로 위치시킨다면, 후자는 공공의 정치성마저도 사적인 것의 하위 영역으로 간주하여 사적 영역의 배타성을 공고히 하려 한다. 이렇게 고도로 개인화된 정치성은 일인칭의 광장에서 새로운 동력으로 전환된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물화하여 자신의 소유물처럼 인식하는 남성의 폭력적인 가상(재현), 남성적인 시선(male gaze)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들은 이제 스스럼없이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고 자랑함으로써 그 역학을 전복한다.10) 말하자면, 이제는 대상화되거나 전시되는 것 자체가 절대로 문제가 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11)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해 내가 가진 재현의 배타적인 권리다. 타인들에게 비춰지는 ‘나’의 재현을 ‘나’라는 재현 주체가 자신이 원하는 맥락 속에 기입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의 자기 재현에 관한 권리는 정치적인 의사 표현의 사유화와 더불어 그 어떤 타인도 침해할 수 없는 불가침의 성역으로 간주된다. 이때 만약, 누군가가 ‘나’의 삶을 ‘나’의 허락 없이 재료로 삼아 예술품으로 내어 둔다면 어떨까? 그것은 일말의 여지없이 비윤리적인 일일까? 그러나 그 예술 작품이 퀴어와 페미니즘을 재현하는 윤리를 수행한다면? 복수의 윤리적 가치들이 충돌하며 우선순위를 경합할 때, 우리는 특정한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위에 둘 수 있을까? 문학 내부에서 생성되는 이 ‘윤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현실의 윤리적 당위들은 아무런 무리 없이 문학 속으로 곧장 들어올까?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우리는 정지돈 소설가에 대한 김현지의 공론화와 2020년에 제기되었던 김봉곤 소설가의 ‘무단 인용’ 논란을 통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운동의 주요한 전략으로 사용해 왔던 정체성의 공표, 자신의 삶에 관한 서사 편집권의 발휘가 재현의 세계인 문학에서 어떠한 난항을 겪을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해당 사안들을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후’의 국면, 여러 정체성의 전시를 통해 폭력적인 남성성을 축출하는 데에 성공한 후 그 어느 때보다 넘쳐나는 퀴어와 여성의 이야기를 헤엄치는 우리에게 새롭게 날아든 모순과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2. 자기 서사 편집권의 배타성
2020년 7월, 김봉곤의 단편소설 「그런 생활」(『시절과 기분』, 창비, 2020)에 대하여, 작가와 자신이 나누었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소설 속에 무단으로 인용되었다고 고발한 ‘C누나’는 자신이 해당 대화를 소설 속에 인용할 것을 허락한 적이 없으며, 소설에 인용된 표현들로 인해 불쾌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트위터를 통해 공론화했다.12) 그는 작가가 자신의 ‘동의 없이’ 대화를 무단 인용한 사실에 대하여 3,500만 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최 씨는) 자신이 등장인물로 등장하고, 자신과 피고 사이의 카카오톡 대화내용을 인용하여 소설을 집필하고 출판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해 주었다.”고 판단했고, 더불어, 그가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삭제해 달라고 한 요청의 발화에 대하여 “(최씨의 요청이) 소설의 내용 중 일부가 미흡하다고 표현한 것에 불과해 보일 뿐, 소설에 인용한 카카오톡 대화내용을 삭제하거나 수정을 요구하는 의미로 보기 어렵다.”13)고 판단했다. 사법적으로 김봉곤의 사적 대화 무단 인용은 무단 인용이 아니므로 피해자 “C누나”가 만들었던 가해와 피해의 구도는 적어도 사법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14) 그러나 법원의 판결은 ‘무단 인용이 아님’을 적시할 뿐, ‘문학이 무단 인용을 해도 문제가 없다’는 내용은 아니기에 사안은 더욱 복잡해진다.15)
법원을 경유하지는 않았으나 ‘무단 인용’과 좀 더 가까이 붙어 있는 사례는 작가에게 문제를 제기했던 두 번째 피해자 ‘영우’의 사례다. ‘영우’는 김봉곤의 단편소설 「여름, 스피드」(『여름, 스피드』, 문학동네, 2018)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며 소설로 인해 아웃팅을 당했다고 밝혔다.16) 그 또한 자신이 작가와 실제로 나눈 대화가 동의 없이 소설에 등장했으며, 그의 “신변을 이루고 있는 요소와 사담, 사생활이 작품의 질료로 쓰였”기 때문에, “소설 속 ‘영우’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지인들이 ‘영우’가 나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고 했다.17) ‘영우’의 진술에 의하면, ‘C누나’의 사례와 달리 ‘영우’의 실제 삶은 소설의 한 부분으로 동의 없이 기입되었으며, 작가는 사과와 함께 인물에 관한 묘사를 어떤 방식으로 수정했으면 하는가를 그와 논의하려 했다. 이후, 김봉곤은 문학상을 자진해서 반납했으며 출판사 문학동네는 해당 작품이 실린 단행본과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환불 조치했다. 출판사 창비 또한 작가의 소설집을 환불 조치했으며 두 출판사 모두 해당 작품집의 판매를 전면 중단했다.
그리고 올해 6월, ‘영우’의 사례와 유사한 문제가 하나 더 발생했다. 김현지 씨가 정지돈 소설가의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 2021)에 등장하는 ‘H’와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 2024)에 등장하는 ‘권정현지’가 자신이라고 SNS에 공론화한 것이다. 작가와 연인 관계였던 그는 자신이 그에게 공유했던 내밀한 사적인 경험이 동의 없이 소설 속에 재현되었으며, 그러한 재현으로 인해 소설 속 인물의 서사가 가까운 이들에 의해 자신의 것으로 식별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에게 공유했던 자신의 가족사가 소설 속에서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말하며 그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그는 작가에게 보낸 메일을 공개하면서, 작가에게 (1) 사안에 대한 인정을 담은 공식 사과문을 개인 인스타그램과 출판사 인스타그램 및 홈페이지에 게시할 것, (2)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 대한 출판 중지 및 판매 회수, 그리고 (3) 작가가 교제했던 실제 인물 김현지에 대한 영원한 비밀 유지를 요청했음을 말했다. 그는 이후의 게시물에서 “지난 7월 초, 중재를 통해 출판계가 그토록 싫어하는 출간 중지 및 회수가 아닌 어떤 희망적인 방법을 제안함과 동시에 입장문을 요청하였으나 당사자로부터 그 어떠한 대답도 전달받지 못했”18)다고 이어서 밝혔다.
김봉곤과 정지돈의 사건은 세 가지 점에서 교차한다. (1) 소설가가 타인의 삶을 ‘허락 없이’(동의 없이) 소설의 요소로 기입한 것, (2) 작품의 재현 주체(창작자)가 남성이라는 것, 그리고 (3) 소설이 재현한 텍스트의 가상(내용)이 실제 현실의 대상(인물)의 삶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요컨대 소설에서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재현의 내용이 현실에서 실존하는 ‘나’로 이어진다는 점이 문제가 되며, 소설이 재현하는 서사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가 작가에게 그것을 쓸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고, 소설의 재현이 현실의 당사자를 특정할 수 있게 하는 효과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각 소설이 담아내는 재현의 내용이 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안은 아니다. 가령, ‘영우’가 아웃팅 당했다고 밝힌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는 사랑의 농밀함과 사랑했던 사람과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마음의 인력과 장력을 보여 준다. 그것은 퀴어 당사자의 것이기도 하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종류의 감정과 서사다. 다소 도발적인 성적 묘사들이 있지만 퀴어뿐만 아니라 보편의 인간 존재는 성적인 존재이며 사람들과 그러한 욕망을 나누고, 교환하고 몸을 섞는다. 텍스트 내부에서 얽혀드는 욕망이 보여 주는 보편과 특수의 길항, 그로부터 생성되는 새로운 윤리성이 있다.19)
정지돈의 『브레이브 뉴 휴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204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인공 자궁을 통해 출생한 ‘체외인’들과 자연 분만을 통해 태어난 ‘일반인’이 공존하는 세계를 상정한다. 소설 속 한국은 저출산 현상이 심화됨으로써 턱없이 부족해진 노동 인구를 보충하고자 정부와 기업이 결탁하여 인공 자궁을 개발하고 사용한다. 체외인인 ‘권정현지’는 체외인의 임신과 출산이 금지된 현실 속에서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아이를 낳는다. 소설 속 현실에 대하여 인물은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하며 정부와 충돌하고 갈등한다. ‘권정현지’는 다층적인 차원에서 폭력적인 현실에 온몸으로 항거하는 인물이며 ‘엄마’(난자 기증자)를 찾아나서고, 손가락을 잘라 ‘체외인’들의 비밀을 폭로하고자 한다. 그녀의 존재는 인간의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생명 윤리, 재생산 이데올로기에 관한 여러 다른 논박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가운데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적 가치를 믿는 숭고한 영웅적 인물로 형상화된다. 동시에 모성이 여성의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모성 신화를 박살내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20) 인물이 담지하는 가치도 그러하지만 서사 속에서 ‘권정현지’가 보여 주는 캐릭터성은 “생식의 압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21)시키고자 하는 정부의 폭력적인 재생산 정책의 비인간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비판적인 시선을 생성·강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22)
이처럼 정지돈의 소설 역시 김봉곤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재현된 결과 자체가 비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C누나’와 ‘영우’가 실제 작가의 정체성과 겹쳐지는 소설 속 인물인 ‘나’가 자기 삶 안에서 경험하는 연루된 타자로 재현된다면, 정지돈에서의 ‘권정현지’는 소설 속 인물인 ‘나’와 연루된 부분적 타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독립된 가상의 개체로서 성립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김봉곤의 소설이 실제 작가인 ‘나’까지도 작중 인물로 포함시켜 대상화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정지돈의 소설은 실제 작가인 ‘나’를 텍스트 바깥의 영역으로 분리해 둔다는 점에서 소설 세계의 가상과 현실의 연동되는 정도가 비교적 약화되는 반면, 소설 속 대상들은 대상으로서의 지위가 강화되고 작가-주체와 분리된 재현의 목적어의 자리에 더욱더 확실히 놓이게 된다.
재현의 내용이 담는 ‘좋음’의 가치와 그것이 작품 밖에서 생산하는 부정적인 효과의 충돌 속에서 소설 속 재료로 사용된 자신의 삶에 관한 소설가에게 동의를 요청하는 일이 당위로 세워지는 흐름은 자기 삶에 대한 배타적인 자기 소유권과 그에 대한 서사 편집권으로부터 비롯한다. 이 두 가지의 저변에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라는 믿음이 자리한다. 그러나, 무수한 타인들과 여러 관계를 맺고 영향을 받은 창작자가 만들어 내는 예술의 세계에서 그의 창작물이 타인으로부터 연유한 것들로 구성되는 것은 한편으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소설의 재현이 개인의 삶과 그 재현에 대한 편집권과 연동될 때, ‘영우’의 삶에 대한 김봉곤의 재현은 ‘나’가 ‘영우’와 함께 경험한 공동의 경험의 일부로 제시된다. 김봉곤의 재현이 자신이 경험한 ‘영우’와의 시간에 대하여 자신에게도 편집권이 있다는 간주 아래 행해진 것이라면, (독자의 층위에서) 실제 작가 ‘나’의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재구성하지 않는 소설 속 인물 ‘권정현지’에 관한 정지돈의 재현은 타인이 지닌 삶의 편집권을 그보다 훨씬 덜 고려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영우’와 ‘권정현지’의 사례에서 현실 속 당사자들이 경험하는 피해는 그들이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소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원하지 않게 노출했다는 데에서 온다.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에게 인스타그램이 여성운동의 공간일 수 있는 것은 해당의 가상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전시 행위의 권한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한껏 꾸민 자신의 모습이든, ‘탈코’를 한 모습이든 자신이 원하는 자기 정체성을 자유롭게 편집하고 전시할 수 있으며, 인스타그램에서 연루되는 타자들은 자신의 편집권에 조금도 간섭할 수 없는 관객의 위치에 놓인다. 김봉곤과 정지돈의 사례는 타인의 자기 전시 재현권을 ‘동의 없이’ 침해하고 점유하는 효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의 ‘영우’와 ‘권정현지’가 작가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앞서 간략히 언급한 재현의 내용, 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내보이고 싶지 않은 실제의 삶이 노출되었다는 감각 때문이다. 요컨대 ‘내 삶’에서 비롯하는 서사에 대한 편집권이 소설가에 의해 박탈당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들은 ‘나’가 공개적으로 밝히고 싶지 않았던 삶의 내용이 작품을 매개로 드러났고, 자신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것의 반영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나’를 아는 이들이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삶의 경험을 알게 되는 것도 문제적이지만, ‘나’와 무관한 이들에게 노출되는 것 또한 문제적일 수 있다.
내가 전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누군가가 ‘나’를 재현하여 익명의 다수에게 노출시킨다면 누구든 불편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작품 속에서 ‘나’가 동의한 적도, 원한 적도 없는 방식으로 재현된 ‘나’를 마주하는 일은 누군가가 그의 인스타그램의 피드에 ‘내’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멋대로 게재하는 일과 유사하다. 만약 누군가가 그 사진만을 보고 ‘나’를 자의적으로 ‘어떠한 사람’이라고 (특히 부정적인 맥락 속에서) 단정해 버린다면, 그래서 그 누군가들과의 연결될 가능성이 사라진다거나, 타자들에게 직접 ‘나’를 내보이며 그들과의 첫 만남을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그것은 분명 불쾌한 일일 것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더라도 ‘나’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재현된 ‘나’를 보는 일은 그 누구보다 ‘나’에게 불편한 일이 된다.
3. 그렇다면 시선은 어느 곳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이 지점에서 난처해진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여성운동의 한 축을 중요하게 담당해 온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실제 현실에 접근하는 문학의 여러 가상적인 태도들을 검토하며, 특정한 시선에 내장된 여성 혐오와 폭력성을 내파해 왔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제의 작가, 사람과 그의 인격 전체를 겨냥한 비판이 아니라 그가 재현해 낸 결과, 텍스트의 세계에서 발휘되어 왔다는 점을 주지하자. 물론 문단 내 성폭력 사건 당시 여러 비평가들이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 작가들에 대한 처벌과 문학장의 구조에 대한 변화를 촉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비평을 쓰는 한 ‘작가(사람)’로서 현실의 문제에 개입하고 참여했던 것이지 ‘비평’(글)이 처벌을 행한 것은 아니다. 비평이 재현된 창작물의 결과가 아닌 그 이전의 시간, 작가의 창작 과정에 대하여 적극 개입할 수는 없다.23) 이는 ‘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의 천명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권한의 불가능성에 관한 냉정한 판단이다. 그것은 차라리 사법적인 힘의 영향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의 사안이지, 재현된 가상 세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창작의 영감을 얻는 현실의 과정에 대하여 비평(가)이 작가와의 관계에서 지니는 권력을 발휘하여 작가로 하여금 특정한 입장을 취하도록 강요하거나 종용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는 순간, 창작은 비평(가)과 독자가 승인한 재현만이 가능하다는 당위가 설정된다.
‘허락’을 구하는 행위는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소유물을 빌려 온다는 맥락을 전제한다. 김봉곤과 정지돈의 사건을 둘러싸고 독자들이 제출했던 여러 의견 중 하나는 ‘어떻게 소설가가 남의 삶을 갖다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동의하기는 어려운데, 너무나 많은 문학 작품들이 타인의 이야기 위에서 작성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문학 작품이나 예술도 타인의 삶 없이는 생산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루된 존재들이다. 순수한 가상의 인물, 고도의 상상력으로 가공되거나 창작된 서사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상상력은 우리 각자가 구체적으로 경험한 타자들과의 연루된 현실로부터 연유한다. 문학비평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비평가가 쓴 여러 편의 비평을 모아 읽으면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과 문제들이 드러나고, 그가 삶에서 추구하는 핵심적인 가치들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글의 내용, 가치관 뿐만 아니라 글을 전개하는 스타일마저도 저자의 실제 캐릭터를 반영한다. 요컨대 소설과 비평을 포함한 모든 창작물은 각자의 주관적인 삶으로부터 파생되며 타인의 삶과 함께 생성되어 왔다. 우리가 이를 드러내게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저자가 밝히지 않는 한) 다만 그것의 직접적인 출처가 되는 저자의 경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세계 속에서 한 명의 주체로 살아가는 일은 그의 의지나 의도와 무관하게 무수한 타인들과 연루될 수밖에 없음을 전제로 한다. 법은 그 과정에서 ‘나’의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 단위의 권리, 개인의 재산과 신체에 관한 자기 소유권을 사법적 언어와 제도로 공표하여 보장한다. 가령, 성폭력은 누군가가 누군가의 신체를 불법적이고 폭력적으로 침탈하는 행위이므로 사법적인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가치관, 정치적 입장들은 어떠할까? 우리가 ‘우리’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에서 생겨난 유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유(有)’들 속을 굴러다니며 경합하고 영향받은 결과이며, 우리가 전적으로 ‘나’의 것으로 쉽게 간주하는 경험들 또한 온전히 ‘나’의 힘으로 이루어 내거나 겪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순수하게 ‘나’만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은 거의 없다. 절대적으로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적 재산과 자신의 신체 정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다른 존재자들과 반드시 연루될 수밖에 없는 실존적인 조건과 한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문학과 예술은 현실의 삶보다 더한 ‘무단 인용’이 벌어지는 세계다. 소설이 완전한 무에서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서사를 창출하는가? 그렇지 않다. 소설을 쓰는 ‘나’라는 주체는 작품 이전에 이미 무수한 타자성으로 구성된 결과의 총체이며 그것의 욕망과 사유 또한 무수한 타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의 모든 출처를 정확하게 적시할 수 있는가? 출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작품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생성해 낼 때 누군가(들)에게 매번 동의를 구한 후에 반영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과연 가능한가(당연한 말이지만, 기존에 발표된 작품들을 표절하는 행위는 이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것이 작가의 자율적인 행위를 초과하는 규범과 당위로 부과될
수 있는가?
전적으로 ‘너’가 소유하는 ‘너’의 경험과 ‘나’가 경험하는 ‘너’, 그리고 ‘나’와 ‘너’의 공동 경험-세계를 살아가는 일이 ‘나’와 ‘너’의 얽힘이라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세 가지 차원 안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물질, 신체와 재산에 관해서는 이 세 가지 차원이 어렵지 않게 구분될 수 있겠으나 비물질적인 소유물들, 가령 경험의 내용과 서사는 분류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공동’과 ‘공동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거나 겹쳐 있기 때문이다. ‘나’가 경험한 것이 배타적으로 ‘나’만의 것이 아니라 ‘너’들과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소설가가 타인의 삶을 ‘무단 인용’하는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직관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무단’이라는 말 때문이다. ‘무단’은 ‘사전에 허락이 없음’을 뜻하는 말로, 타인의 삶이 소설이라는 예술 작품에 기입될 때 그 당사자의 허락을 반드시 구해야 함을 전제한다. 그런데, 타인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으로 재현할 때마다 당사자의 동의를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당위가 창작의 명실상부한 대원칙이자 당위로 마련된다면 특정한 수준의 재현은 동의 없이도 가능하고, 특정한 수준의 재현은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등의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기준도 마련되어야 할 터인데, 그것은 과연 가능한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 기준은 현실을 지배하는 우리의 규범들로 복제되어야 할까? 만약, 현실의 사람이 소설의 재현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그것의 결과가 당사자를 불편하게 한다면, 그는 소설을 폐기하라고 말할 권리를 자동으로 갖게 되는 것일까?
물론 상호 간의 동의가 마련된다면 작가나 재현 대상의 당사자 입장에서도 서로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도모하는 일과 하지 않으면 곧장 악인으로 낙인찍혀 공식적인 제재를 받는 일은 분명히 다르다.24) 신중하고 섬세한 자발적 고려와 규율로서의 준칙 아래에 주체들을 복종시키는 당위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작가로서 어기면 안 되는 대원칙으로 정립되고 그를 위반한 작가가 그에 대한 징벌적 조치로 당해야 하는 것이 작품의 판매 중지라면 문학은 작가들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더는 자유로운 공간일 수 없다. 작가는 강화된 검열 의식 속에서 독자와 비평이 승인한 재현이 무엇인지를 골몰하며 그것에 얽매일 것이고, 그로인해 독자는 그간 문학이 발휘해 온 도발적이고 발칙한, 때로는 폭력적인 상상력과 재현을 경험할 기회를 잃을 것이다. 독자인 우리가 문학에서 경험하는 효용과 가치는 현실에서 합의되어 안정된 의미들을 낱낱이 해체시키거나 비약하며 확장적인 인식론을 생성해 내는 것, 그리고 그렇게 현실을 초과하는 배움을 삶 속으로 끌어와 껴안는 일에서 비롯한다. 이는 김봉곤과 정지돈의 사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문학의 효용과 가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텍스트로 재확인하고 이미 마련된 현실 인식을 강화하거나 축소하여 하나의 의미로 수렴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 우리는 문학이 제공하는 가상 세계 속에서 여러 사건을 경험하며 그러한 읽기를 바탕으로 현실의 삶을 보다 확장적이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문학은 우리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예상할 수조차 없는 국면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 새로운 차원은 비평가나 독자, 그리고 작가조차도 미리 설계하지 않은 효과 속에서의 열림이다.
그러나 만약 작가가 특정한 독자(‘영우’와 ‘권정현지’)에게 자신의 작품이 트라우마의 트리거가 되거나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고도 발표했다면 오히려 그러한 문학의 공간은 열림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미 모종의 닫힘을 딛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그가 전혀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효과는 여전히 유효하며 작가가 특정 독자에게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에 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간주할 수 있다. 작품의 창작이 전적으로 독자의 욕망과 입장만을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학이 누군가의 삶에 현실의 사건들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열림’의 효과는 필연적으로 파괴를 동반한다. 파열된 자리에서 새로운 열림이 생겨난다. 그러한 ‘열림’이 누군가의 실제 삶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고려는 예술 창작자로서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다. 창작을 하는 이라면 누구든 ‘이것이 어떻게 읽힐 것인가?’에 대한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작품이 자신의 아주 가까운 어떤 독자에게 어떤 층위에서 읽힐 수 있는지에 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창작은 그를 배제한 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독자에 대한 고려는 당위로서 강제될 수 있는 덕목이 아니므로 작가는 독자를 일절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경우에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이 오직 해당 작품이 작가로서의 ‘나’에게 어떻게 읽히는가에 관한 닫힌 차원에 머무른다는 것, 그리고 독자라는 타자의 세계는 저자로서의 ‘나’가 축조하고자 하는 세계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작가에게 자신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작가’와 ‘창작’이라는 이름 뒤로 묻어 버린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일방적인 나르시시즘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그것의 비/의도성과 무관하게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손으로 들어가고, 독자의 읽기는 언제나 작가와 작품의 의도와 설계를 초과한다. 독자의 권위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와 저자의 권위를 추락시킨다.25) 여기에 문학의 궁극적인 열림이 있다. 독자는 저자의 나르시시즘을 파괴하는 저항적 주체들이다. 사법 체계 안에서라면 당사자(작가)의 의도가 사안의 이해와 판단에 중요하게 작용하겠지만, 문학의 세계에서 의도성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독자의 반응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지 않는다. 작품을 둘러싼 무수한 읽기들 속에서 저자성(authorship)이 중요해지는 지점은 결국, 해당 작품이 누구의 창작물이냐 하는 소유권의 문제이지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좌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문학의 문을 닫아 잠그는 일과도 같으며, 작가가 독자에게 행사할 수 없으며 실행될 수도 없는 권한을 행사하고자 하는 일이다.
페미니즘과 문학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지점 또한 바로 이 부분이다. ‘무단 인용’ 사안에서 피해자의 고통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가해자의 위치에 놓이는 작가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이 지점에서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이 성범죄자 처벌에 관한 사안에서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피해와 가해의 구도 안에서 논의의 참여자들은 한쪽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의사 표명을 하여 가해자의 처벌과 피해자의 구제를 향한 집단적인 권력을 형성한다(우리는 이것을 ‘연대’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간의 사건들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인의 역량을 초과하는 구조와 집단의 힘을 이용하여 재현 당사자의 피해를 보다 ‘직접적’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욕망은 이것이 현실의 사법 권력 등으로 처리될 수 없는 ‘예술’에 관한 사안이라는 현실 인식 안에서 점점 더 깊은 딜레마로 빠져든다. 피해와 가해 두 진영 중 오직 하나만을 택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가치를 최대한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시민의식과 그로 인해 신중히 고려된 발화들이라 할지라도 피해 당사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조심스러움은 사건에 관한 보다 확장적인 논의를 어렵게 만든다. 나아가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은 소비와 불매, 창작의 자유와 개인의 인격권, 가상과 현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양심의 자율과 윤리적 당위라는 이원론적 구도를 소거한다. 요컨대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소설의 공간에서 빚어진 재현의 문제들은 현실의 성범죄와 동일한 사안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현실에서는 명확해 보이던 이분법은 문학이라는 세계를 통과하면서 두 개의 항이 서로를 끝없이 재구성하는 이원론적인 역학 구도로 변환된다. 문학과 현실이 서로를 한 몸으로 박음질하고 있는 ‘무단 인용’의 사안들은 이분법의 정중앙을 힘겹게 찢으면서 틈새에 제 몸을 구겨넣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둘 중 어느 하나만을 택하거나 택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 힘겹게 벌어지고 있는 사이 공간을 잔뜩 노려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의 힘은 ‘열림’이라는 파괴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더 최근에 벌어진 정지돈 작가의 사건은 트위터와 블로그, 페이스북 등에서 정말 많은 이들이 논의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기와 무관하게 여전히 중요한 무언가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은 피해자 김현지가 구체적인 사과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고, 어느 시점부터는 무언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적인 처벌이 불가한 사안에 관하여 피해자의 구제는 해당 사건에 관한 상대방의 공식적인 인정과 공개적인 사과로부터 시작하고, 그것이 구제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된다. 그러나 사과는 자발적인 행위이므로 그 누구/무엇으로부터도 강제될 수 없다26)(한 사람의 독자이자 시민으로서 그가 사과할 것을 촉구하는 의사 표현과 비평가가 비평을 통해 한 작가에게 그것을 종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발화다). 이는 곧 정지돈 사건의 핵심이 작가의 자율성, 그가 작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지닌 양심의 문제라는 것을 뜻한다. 만약 작가가 현재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사안은 어떻게 되는가? 현재 공론장에서 치열하게 논의되고 있는 발화들의 열기는 그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미제 사건(cold case)의 일부로 차갑게 식어가고 말 것인가? 다시 한 번, 둘 중 어느 하나만을 고르고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고 그를 근거로 오답들을 적발하는 작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작은 틈새 하나 없어 보이던 이분법의 구도를 힘겹게 찢고 있는 그 사이 공간으로 들어서는 일이 중요하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피해와 가해, 해결과 미해결의 이분법 사이를 비집고 양쪽이 놓인 토대를, 그리고 그 토대가 두 개의 항이 벌이는 이원론적 상호구성 작용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집요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입장은 마치 비평이 작가의 모든 과오와 수치를 문학의 이름으로 사면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하는 것으로 곡해될 수 있다. 그러나 문학과 비평이 한 작가의 자율성과 양심을 중요히 여긴다는 것은, 역으로 자신이 작품을 통해 발생시킨 모든 사후 효과와 파생물에 대하여 오롯이 작가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엄정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지, 그것들을 마치 없던 것처럼 여기고 면책권을 부여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가령, 범죄자의 경우에도 형벌이라는 신체적인 유형력을 통한 법익(法益)의 박탈만이 그에게 내려지는 처벌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속해 있던 사회·문화적 집단 내부에서의 격리와 소외, 그가 저지른 비윤리적인 이고 ‘나쁜’ 일의 폭로는 그가 앞으로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든 부정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역사로 새겨질 것이며, 바로 그 부정할 수 없는 자기 대면의 시간이 그의 인격과 시간을 계속해서 재구성할 것이다. 물론 법의 엄중한 처벌을 받고 사회로부터 맹비난을 받아도 전혀 반성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수치와 모욕을 내심 아주 깔끔하게 분리하여 타자화해 버릴 수도 있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의 기만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조차 탕진해 버리기도 한다.27) 우리가 자신의 삶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라고 간명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한히 얽히는 연루의 자연 속에서도 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 관해 갖는 자기 인식, 성찰과 비판의 내용이 그 어떤 형벌로도 강제할 수 없는 배타적인 자기 소유권 안에서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와 가장 가까운 타인들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법과 제도의 권력조차도 한 인간이 스스로에 대하여 행사하는 인격권의 내용을 좌우할 수는 없다. 하물며, 타인과 세계,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거리를 두며 메타적인 성찰을 수행하는 비평이 한 작가로 하여금 자기 인격의 자유로운 발휘를 막아설 수 있겠인가. 단, 그러한 인격권의 발휘로 인한 효과와 결과 또한 그 인격의 주체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지돈 작가의 사건을 말하면서 김봉곤 작가의 사건을 함께 언급한 것은, 위에서 말한 비평과 출판 권력의 부당한 개입이 실제로 김봉곤 작가에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은 ‘나쁜 작가’의 작품은 그것의 재현과 무관하게 (해당하지 않는 다른 작품들 또한) 곧장 ‘나쁜 작품’이 된다는 도식을 남겼고 이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작품의 창작 과정과 그것이 재현하는 내용에 관한 비판은 작가를 ‘나쁜 작가’로 더욱 매도하고 창작물의 유통을 막아서는 쪽으로 향했다. 이후의 독자 반응은 그 외에도 또 누가 ‘나쁜 작가’인지 판별하는 검열의 시선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요컨대 저간의 사건은 공공의 독자가 작품을 읽고 자신의 독해를 세울 권리와 서사 속에서 ‘무단’으로 인용된 당사자의 자기 삶에 대해 주장하는 서사 편집권 사이에서 발생한 충돌이다. 김봉곤의 소설집이 환불 조치되고 판매 중단된 것은 그러한 충돌 속에서 후자가 전자를 이긴 사례다.28)
이때, 비평은 한 사람의 자기 서사 편집권과 독자의 읽을 권리가 충돌하는 지점에 대해 적극 성찰할 수 있다. 개인의 사적 소유물에 관한 갈등에 관여하여 실질적인 유형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사법 권력이 유일하다. 그러나 비평(가)은 판사나 법원이 아니며 오히려 사법 권력과 정반대의 작업을 수행한다. 사안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보며 문제 상황을 단일한 해석으로 수렴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구심력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면서 상충하는 여러 개의 해석과 새로운 질문들로 나아간다. 비평이 재현의 윤리에 접근할 수 있는 차원은 작가의 구체적인 창작 과정이나 실제 삶의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 그리고 그 이후에 관해서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에 동참했던 페미니즘 문학비평 또한 실제 삶에서 일어난 폭력, 그리고 문학장이 공고하게 묵인해 온 구조적인 폭력과 공동의 문제를 가시화하는 작업에 동참한 것이지, 창작 과정에서 개인 간에 일어난 갈등에 개입하여 중재하거나 화해와 처벌을 판정하는 작업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비평은 문학의 주체들이 양심적일 것을 당위로 제시할 수 있으나, 그 양심의 구체적인 실행들 각각을 강제할 수는 없다. 양심의 핵심은 한 인간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인격권과 자율성으로부터 기인하며 문학 역시, 그러한 자율성과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지는 인격권의 존중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만약, 비평을 쓰는 어떤 이가 그러한 삶의 영역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비평’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문학인으로서 또는 여성으로서 행동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비평을 쓰는 주체는 시민과 여성/남성, 그리고 그 외의 중첩된 여러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므로 사안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사적 영역에 접근할 수 없다는 한계 속에서 비평의 힘은 더욱 유의미하게 발휘된다.
2부 겹눈
4. 재현의 의도와 무관하게 삶은 열려 있으므로
페미니즘은 여성이 부당하게 입은 피해를 가시화하고 그것을 사회적인 공동의 사안으로 문제화한다. 페미니즘 운동 자체를 너른 의미에서 공론화라고 말한다면 공론화의 목표는 피해자의 구제와 재발 방지를 위한 구조의 개선 또는 파기다. 비평은 작품이 행하는 재현과 그에 내장된 시선에 관해 깊은 탐색과 엄정한 심문을 행할 수 있다. 김봉곤의 작품들에 대한 일괄적인 환불·판매 중지 조치 사안과 정지돈의 소설이 어떤 지점에서, 어떠한 과정으로 재현된 당사자의 수치심과 분노를 유발하는지에 관해 치밀하게 파고들어 논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해당 작품에 접근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정지돈의 『야간 경비원의 일기』가 판매 중지된 것은 그러므로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판매 중지된 김봉곤의 소설집 두 권도 복간되어야 마땅하다. 이 글에서 정지돈의 『브레이브 뉴 휴먼』만을 다루는 이유는 사건이 발생한 후 『야간 경비원의 일기』를 그 어디에서도 구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29) ‘현재’ 발생한 사안에 대하여 모두가 언제든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사건에 동시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극단적으로는 성 범죄자의 시나 소설이라 하더라도 판매를 중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평이나 출판사가 먼저 개입하지 않더라도, 그의 문학성은 독자들에 의해 자연히 획득되거나 폐기될 것이기 때문이다.30)
게다가,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든 읽고 쓸 권리가 있다. 범죄를 저지른 자가 처벌의 종료 이후에도 남은 평생 동안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영구히 박탈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가 갱생하여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중 하나를 빼앗기는 일일 테다. 범죄자의 경제적인 이해 관계도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관점에 서는 것이 아니다. 독자는 그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읽고 자신의 입장을 세울 권리를 가지며, 이러한 공공의 자유와 복지는 개인의 권리와 이익만큼이나 중요하게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30 여기에 숨은 모순은 ‘읽는다’는 것이 곧 해당 작품과 작가를 지지하는 것으로 곧장 치환되는 전제를 폭로한다. 그러나 ‘읽기’ 그 자체가 ‘동의’와 ‘지지’의 행위로 즉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게다가 성범죄자가 문학을 쓸 수 있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그것을 읽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다. 가령, 고은은 그의 성범죄가 고발된 후에도 실천문학사에서 두 권의 책을 냈지만 독자 반응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누구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우선 누구든 해당 작품에 접근할 수 있는 열린 조건 하에서만 동시대적인 비판, 나아가 역사적인 성찰이 열린다. 페미니즘이 역사적으로 여러 폭력에 맞서 대항할 수 있었던 궁극의 힘은 현실의 모순을 모두 소거하지 않고 바로 그 모순들을 안고 나아왔던 데에서 비롯한다. 가령, 미국 페미니즘운동권에서 레즈비언들과 이성애중심 페미니스트들이 충돌하여 일으킨 ‘라벤더 위협(lavender menace)’은 이에 관한 멋진 사례다.31)
『브레이브 뉴 휴먼』의 세계관은 1970년대 영미권의 래디컬 페미니즘을 기초로 한다. 인공 자궁에 대한 상상력이 그러하고 “젠더는 임의적”32)이라는 입장과 인간의 생물학적 재생산 능력에 기초한 가족 제도가 젠더 불평등의 토대라는 시각이 그러하다. 맑시즘의 영향을 받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거나 또는 전면 거부하면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 차별이 가부장제에 기초한 가족 형태로부터 비롯한다고 파악하며 ‘가족’ 제도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역학으로부터 생산되고 유지된다고 말한다.33) 소설의 중요한 서사적 결절점이 되는 ‘체외인’의 출생의 비밀은 이를 반영한다. 여섯 명의 정자 기증자(아버지)로부터 약 800만 명의 체외인이 태어났다는 것, 그들은 거의 한 명의 아버지만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소설 속 인물이 위험을 무릅쓰고 밝혀내는 자신의 종(種)에 관한 비밀이다(급진적인 혁명 조직인 ‘뉴 휴머니스트’들이 행하는 테러는 프로이트의 남자아이가 지닌 친부 살해 욕망을 함축하기도 한다).
소설 속 뉴 휴머니스트들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가장 큰 영향권 하에 있는 이들로 ‘체외인’과 ‘일반인’을 동등하게 대우하며 정부가 독점하는 인공 자궁을 탈취해 민간으로 분배하려 한다. 그들은 인공 자궁을 통해 인류의 억압이었던 생산과 그 결과인 가족 구조로부터 해방될 때, 생물학적 재생산의 결과로 부여받는 인간의 젠더와 그로 인한 억압이 무의미해지고 성 역할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요컨대 그들은 생물학적 아버지를 죽이고 여성을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이성애 유성 생식의 역학 자체를 이 세계에서 추방하여 인간이 처한 여러 종류의 차별과 위계를 철폐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적인 이상을 향한 추구 속에서 동성애자들은 도구화되거나 소리 소문 없이 희생되고 만다.34)
자연적인 출산과 임신 중단 사이에서 갈등하는 ‘권정현지’는 소설이 지향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욕망의 한가운데서 독자로 하여금 비판적인 성찰을 하게 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세계의 구조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는 영웅적인 인물이다. 소설에 따르면 그녀는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하려는 체외인”의 한 분류인 ‘일인’이자 ‘체외인’의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 “인간성의 증거”가 되는 희망을 표상한다.35) 임신 중단에 대한 고민, 모성이 여성의 본능이 아니라는 것을 견인하는 그녀의 캐릭터성은 인공 자궁을 통한 재생산이 자연화된 세계에서 일탈적인 휴머니즘적인 가치를 체현한다. 그러나 모든 제도와 시스템이 예외를 포함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유지되고 운용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권정현지’는 ‘체외인’과 ‘일반인’의 위계가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위해 구조를 완성하는 예외적인 인물, 즉 구성적 외부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악이 악으로서 존립하기 위해서 그에 맞서는 선이라는 이항 대립물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보여 주는 영웅적 면모의 예외성은 인물이 지닌 근본적인 결핍에서 비롯한다. 소설은 이를 인물이 ‘엄마’(난자 기증자)를 찾아나섰다가 실패하는 장면, 임신 중단을 고민하고 ‘체외인’으로서의 실존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부분36) 등을 통해 재현한다. 인물의 실제 모델인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소설의 어떠한 부분에서 수치심과 모욕을 느꼈는지 우리는 완벽하게 알 수 없지만 (두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정보의 한계는 현실의 사실과 소설의 재현이 어떻게 재구성 되었는지에 관해 세부적인 가늠을 어렵게 하고, 정보의 부족은 이 사안 자체를 대하는 당사자 외의 이들과 비평에게도 동일한 한계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피해자나 가해자가 그들 삶의 내밀한 맥락, 사생활을 추가적으로 더 공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설에서의 재현이 실제 현실의 ‘나’로 돌아와 ‘나’를 재구성하며 대치하게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김현지는 바로 그것이 자신이 겪는 부당한 피해라고 말한다.37) 이는 오토픽션의 역학이 발생시키는 효과와도 일치하는데, 차이가 있다면 오토픽션은 재현의 주체이자 재현의 대상인 ‘나’ 스스로의 욕망에서 비롯한 행위38)인 반면, 정지돈 소설의 재현이 일으키는 효과, 가상과 현실 사이를 침투하는 재귀적인 효과는 재현된 대상 당사자의 욕망이 재현 주체의 그것과 불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재현의 결과가 독자의 차원에서 발생시키는 효과는 재현된 당사자의 욕망과 무관한 층위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김현지가 자신의 삶이 투영되었다고 언급한 부분들에 대해 그러한 반영을 부인하며 해명하는 정지돈의 글은 어쩌면 무의미하다고도 할 수 있다.39) 게다가, 독자가 작품을 읽고 ‘내 삶이 이곳에도 있었다’고 말하는 연루의 감각을 작가가 나서서 부정하는 일은 앞서 말한 문학의 열림을 닫히게 하는 효과에 복무할 뿐이다.
작품 안에서 재현된 인물이 디스토피아적인 세계 속에서 휴머니즘을 사수하는 영웅적인 페미니스트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의 ‘나’가 원한 재현이 아니라면, 텍스트가 내포하는 내부의 ‘좋음’은 바깥의 실제 ‘나’에게 수치와 불쾌가 될 수 있다. 김봉곤의 오토픽션이 소설 속 가상 세계에서 수치를 전면 재현함으로써 실제 ‘나’의 현실의 자긍심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에는 그러한 수치를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주관성이 강하게 작동한다. ‘나’를 포함한 타자와 세계를 감각하는 인식의 주관성과 그것의 발휘는 배타적으로 ‘나’에게 귀속된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재현된 것의 가치가 아름답거나 윤리적이라 하더라도 작품이 포함하는 질적 가치와 무관하게, 그것이 형상화되는 미시적인 과정 안에서 독자는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발견하고 감각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이 작품에 기입되었다고 느끼는 당사자 뿐만 아니라 당사자가 아닌 이들 또한 그들의 읽기에 따라 그들만의 수치와 모욕을 감지할 수도 있다.
문학은 오독의 세계다. 누군가는 아웃팅을 발생시킨 ‘전력’이 있는 소설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아웃팅에 대하여 공감하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소설이 지닌 고유의 미덕과 힘을 동시에 보기도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주의적인 가치를 체현하며 가족사라는 개인적 차원의 비극을 넘어서는 영웅적인 인물을 보더라도 누군가는 그로부터 고양감(empowering)을 느낄 수도, 다른 누군가는 그러한 예외적인 영웅성이 또 다른 배제의 시선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유일무이한 절대적 정답은 없다. 독자는 문학이 자신을 갱신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하는 자다. 독자가 자신의 고유한 삶을 겹쳐 읽으면서 작품 속 세계와 함께하고, 감화되고, 또는 대결하면서 자신만의 오독을 발견해 낼 때 비로소 그 작품은 독자 자신만의 것이 된다.
비평이 독자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작품이 갓 태어나는 현장의 최전선에서 그러한 작업을 가장 적극적으로 하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오독의 역동 속에서 삶을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는 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역으로 퇴행하는 길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읽기, 독자의 수행은 독자가 자신이 그간 살아온 삶의 역사와 몸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행하는 뼈아픈 행위다. 저자의 권위 속에서 생산된 작품을 ‘나’가 읽어 낸 ‘나’의 텍스트로 해체하여 변환하는 작업이다. 소설 속에서 재현된 가상의 ‘나’가 현실의 ‘나’를 긍정적으로 재구성하거나 부정적으로 공격하여 불행하게 만들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제나 현실과 재현의 세계는 부분 집합으로서 상호를 구성한다는 것이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40) 문학이 현실을 완전히 대체하거나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낭만으로의 도피와 다름없다.
신자유주의가 나날이 가속화되는 이 시대에 설령 가상으로 지어진 표면의 세계가 실제의 현실을 대체할 만큼 큰 위력을 지닌다 하더라도, 『브레이브 뉴 휴먼』의 세계가 말하는 것처럼 “진정성은 내면이 아니라 표면에 있으며 이미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41)이라 하더라도, 비평과 독자의 시선은 언제나 그 표면을 뚫고 이면의 내부로 침투한다. 독자의 비평적 시선은 현실을 물화하는 가상 세계의 작용을 일시 중지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게다가 당사자가 동의한 재현이든 아니든, 재현의 결과가 윤리적이든 윤리적이지 않든 문학은 우리의 삶을 축소하여 획정하지 않고 오히려 잔인할 만큼 거침없이 뒤흔든다. 문학이 추구하는 윤리는 현실 도덕의 올바름이나 정의와 다르다. 문학의 윤리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안정적으로 합의된 사회적 당위나 가치를 몇 번이고 집요하게 되묻는 급진적인 개방성과 그러한 수행이다. 그것은 그 ‘윤리’를 현실의 행위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절대불가침의 준거점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을 축소하려는 억압적인 시선과 행위를 내파하기 위해서다.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페미니즘의 소멸”42)이라는 말처럼, 현실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을 해체하고 비판적으로 반추하는 작업이 중단될 때가 온다면 그것은 이 세계에서 더는 페미니즘이 필요치 않게 될 때, 즉, 깔끔하게 정리된 단일한 의미의 세계만이 남게될 때뿐일 것이다.
5. 배제가 아닌 포함 속에서 ‘무단 인용’은 과연 가능한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볼 때, 김봉곤과 정지돈 사건이 문제가 되었던 것에는 재현의 주체가 남성이라는 사실 또한 포함된다.43) 2020년의 김봉곤 사건과 2024년의 정지돈 사건의 배경에는 2010년대의 문단 내 성폭력의 공론화, 해쉬태그 미투운동의 경험이 역사로 자리한다. 많은 남성 작가들이 문학 창작을 매개로 한 위계 성폭력을 일삼았고,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폭력을 축출하고 재발되지 않기 위해 힘을 모았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문학의 ‘비호’ 안에서 발생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구심점 삼아 많은 이들이 온라인 가상 속에서 결집했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집요하게 맞서 싸워 온 것 역시 여성을 소비·착취 가능한 대상으로 물화하는 폭력적인 남성성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작품을 읽을 때 재현의 주체가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읽기의 선험적 한계로 미리 작동해도 되는 걸까? 우리가 미투운동을 통해 얻은 것이 과연 이러한 배제의 논리였던가? 배제의 논리는 여성들이 긴 시간 동안 대항해 온 남성적 언어와 논리의 핵심이 아니었던가. 페미니즘은 남성의 배제가 아니라 여성의 포함으로부터 출발한다.44)
직접적으로 묻자. 남성은 페미니즘 소설을 쓸 수 없는가? 여성에 관한 적극적인 재현이 단지 작가가 남성이라는 사실만으로 문제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가령, 남성 작가는 페미니스트 여성 인물이 경험하는 내적 갈등이나 인공 자궁에 대한 상상력을 재현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가? 특정한 ‘여성’의 몸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이들(당사자성이 없는 이들, 가령, 남성이나 트랜스여성 등)이 재현하는 여성 서사는 텍스트는 당사자에게 수치와 모욕을 안겨 줄 뿐인가? 『브레이브 뉴 휴먼』이 보여 주는 임신과 출산, 가족 제도 전반에 관한 비판적이고 도발적인 접근을 단지 성적 대상화의 일환이라고 말하려 한다면, 작가의 성별이 남성이라는 사실 외에 텍스트 내부의 다른 근거들이 필요할 것이다. 페미니즘 문학은 (생물학적) 여성 창작자에 의해서만 점유되는 것이 아니며, 여성에 관한 모든 문학적 담론을 포함한다. 또한 소설의 도입부에서 제시되는 ‘패닉룸’에서의 섹스 장면은 여성의 문란함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기보다 소설의 세계가 구획된 섹슈얼리티의 경계 없이 역동적으로 뒤섞이는 욕망 위에서 그려짐을 알리는 부분으로 읽힌다.45) 게다가 ‘패닉룸’에서 ‘현지’와 조우하게 되는 ‘아미’가 같은 성별인 여성과의 섹스를 그것이 더 안전하다는 이유로 선호한다는 대목은 이성애 섹스 관계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폭력을 작품이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46) 다만, 작중에서 섹스하는 인물이 현실의 구체적인 대상으로 특정될 수 있는 기표(이름)가 장착되는 대목은 작가와 작품의 의도가 어떠하든 그와 무관하게 당사자에게 굉장한 불쾌감을 줄 수 밖에 없다.47) 『브레이브 뉴 휴먼』이 받아야 하는 비판은 남성이 여성에 대한 재현을 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재현이 역으로 현실의 주체가 직접 행위한 것과 같은 오인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에 근거한다. 『브레이브 뉴 휴먼』이 재현하는 페미니즘의 가치와 이상이 ‘감히’ 남성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것을 비판한다면 이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오직 생물학적 여성들로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것과 같다. 또는, 작품이 견인하는 여러 문제 의식의 급진성이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환심을 얻으려는 남성적 욕망의 산물이라고 비하하는 것 역시 우리 스스로 삶과 문학, 여성과 남성 사이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젠더 이분법을 강화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재현의 내용이 아니라 단지 창작 주체의 성별만을 강조하며 작품을 비하/비난하는 것은 그간 문학사에서 남성 젠더가 여성 젠더를 ‘여류’로 비하해 온 역사의 역학과 동일하다. 발화의 주체가 지닌 남성성과 여성성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며 더욱 확장적인 논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48)
2010년대를 건너온 우리는 당사자성의 여부를 떠나 부당하고 정의롭지 않은 문제에 관하여 결집하고 힘을 모아 해결한 빛나는 경험을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재현에서의 윤리성과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강박을 얻었다.49) 가령, 최근에 발표되는 대부분의 소설 안에서 남성 작가들은 남성 화자만을 주요하게 그리며, 여성 작가들은 성애적인 관계를 묘사할 때 성적인 묘사들을 적극 배제한다. 퀴어인 인물을 재현한 소설을 두고는 작가가 실제로 퀴어인가? 하는 질문이 곧장 날아들기도 한다. 억압적인 남성 지배 질서와 시스템 안에 숨어 있던 폭력을 색출하는 과정 속에서 ‘적발’하고 ‘고발’하는 시선이 지나치게 강화된 것이다. 이는 포스트 페미니즘, 미투운동 이후의 국면에서 2020년대의 한국문학, 퀴어 문학과 여성 문학이 처한 새로운 억압의 내용이다. 이때 재현은 작가에게 ‘퀴어’와 ‘여성’이 당사자성으로 마련되는 한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소설이 재현하는 인물이나 사건, 서사가 아무리 허구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창작하고 편집할 권리가 작가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증상이다. 재현의 결과가 작가 자신의 실제 정체성과 겹칠 수 있을 때 그러한 부분적 일치는 2010년대 이후 문학장이 경험하는 불안을 다소 해결해 주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타인의 삶이 소설 속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공론화되고, 실제 모델이 되는 인물이 자기 서사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며 대치하는 상황은 작가와 독자, 비평 모두를 자기 재현에 관해 제기되는 새로운 갈등 앞으로 데려간다. 동의와 허락의 여부를 둘러싼 문제는 개인이 지닌 자기 삶을 서사화할 권리를 가시화하고, ‘나’가 타인과 연루된 세계의 실제를 허구 속으로 녹여 낼 때 과연 그 경계의 설정은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물으며 창작의 권리의 범위에 관해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언뜻 마땅히 정당해 보이지만 문학, 예술의 세계를 이루는 것들이 철저히 타자적이라는 점을 쉽게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타자로부터 건네 받은 삶의 경험을 서사화할 수 있는 권리는 우선적으로 당사자 본인에게서 출발하지만, 현실에서 무수한 방식으로 연루되고 해체되기를 반복하는 존재의 관계망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경험은 ‘나’와 ‘너’가 공유하며 나눠 갖는 공동의 것이기도 하다. 문학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무단 인용’으로 지어진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우연과 타자, 그리고 여러 조건과 환경으로부터 연유한다.
그렇다면 소설 창작에서 타인의 삶이 반영되거나 그것을 들여올 때, ‘무단 인용’이라는 표현의 사용 자체가 수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50) 오히려, 소설은 현실의 출처가 분명하든 분명하지 않든, 그 복수의 출처들이 뒤섞여 원래의 출처를 알 수 없게 되기도 하는 무자비한 무단 인용의 세계다. 오토 픽션의 본격화 이후로 우리에게 날아드는 새로운 고민은 그러한 무단 인용의 세계, 사실과 허구가 뒤섞일 수밖에 없는 역학 자체를 무너뜨려 불가능한 순수의 허구를 추구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복합적인 중층 작용 안에서 어떻게 최대한으로 그 복잡성을 이해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어야 한다. 문학의 폭력과 파괴는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는 열림의 파열이지 작가나 독자 그 누구의 실제 삶을 주저앉히려는 의지나 힘이 아니다. (물론 그런 작품도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겠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문학성이 과연 그런 것일까?)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나’와 타자가 보유한 배타적 권리와 그 사이의 거리를 정확하게 가늠하며 상호 침범하지 않을 것을 최선의 가치로 합의하는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침해한다. 서로를 물들이고, 서로에게 비/의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서로를 오독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가 재현한 ‘나’의 일부를 보며 ‘나’는 재현의 의도나 결과와 다른 것을 읽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나아가 그러한 재현이 실제 삶에 대한 누군가의 좋지 않은 평가나 해석으로 여겨진다면 ‘나’는 깊이 낙심하거나 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발휘하는 창작의 자유와 그 대상이 되는 다른 누군가의 삶에 대한 자기 서사 편집권, 그리고 그 삶 자체에 대한 권리가 충돌하는 경우, 우리는 어느 한쪽을 우위에 세우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상상을 해 왔다. 그러나 복수의 자유/권리가 서로 경합할 때, 각각의 힘을 축소시키지 않면서 상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부작용을 발생시키는 힘에 관하여 제한하고 제재를 가하는 것은 사법적인 해결의 방식이지 우리가 안착한 현실을 초과하는 더 크고 열린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문학의 방식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질문에 유의하자. 무엇을 ‘해야 할’까, 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 규제로 작동하는 당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능동적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지닌 역능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체성에 관한 자기 재현의 기술과 전시의 역능은 이때 다시 한 번 더 유효해진다.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둘러싼 타자들의 알 수 없는 시선이 곳곳에 매복해 있는 시대다. 대상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대상화를 하느냐가 중요해지는 국면을 경험하고 있다. 동시대 여성들은 자신을 원하는 방향과 맥락으로 대상화하는 작업을 주체의 역능으로 삼아 그를 적극적으로 발휘하며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욕망을 실현한다. 이는 곧 자신이 자신에 대해 갖는 주관성의 힘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누군가 ‘나’를 재현한다면 ‘나’ 역시도 ‘나’를 재현할 수 있고, ‘나’ 역시도 ‘너’의 동의 없이 ‘너’를 재현할 수 있다. 인정하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얽힘의 운명이다.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연루되고 마는 이 공거(共居)의 형식 자체가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작가가 주변의 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소설의 작고 큰 부분으로 재현하는 것이 ‘무단 인용’이 될 수 없는 이유 중 또 하나는, 형식적으로는 타인의 삶 자체가 활자로 고정되어 그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는 유동하는 물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글이 되지 않은 말과 이야기들은 세계의 공중을 떠다닌다.51)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맥락들이 경합하는 그간의 문학사에서 퀴어들은 비가시화되거나 제한적으로 타자화되고 게토화되어 왔지만 퀴어 문학은 그러한 수치를 자긍심으로 전환해 내며 퀴어의 삶을 스스로 생성하고 확장하는 중이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폭력적인 남성성을 체현하고 퀴어를 혐오하는 작품들에 관하여 그것을 유통되지 못하게 막아서야 한다거나, 창작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는 등 권리의 실현을 제재하는 층위의 주장을 제기할 수는 없는 것처럼, 페미니즘 문학과 퀴어 문학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역으로 더 많은 발화를 생성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서사의 편집권으로 다른 세계와 다른 가치를 써 내려가며 대응하는 일이며 그것은 수치의 역사를 딛고, 그러나 부정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페미니즘 역시 남성의 ‘입’ 자체를 틀어막는 일이 아니라 여성의 더 많은 말하기와 행동을 이끌어 내는 운동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요컨대 우리를 억압하던 폭력적 시선을 다시, ‘우리’의 맥락이 세워지는 구성적 외부로 재전유하여 오독과 오독의 치열한 대립, 그리고 경합의 장으로 더욱 깊이 나아가는 일이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바로 이 한가운데에 서 있다.
6. 연대 불가능의 자리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가상을 재현해 내는 것이 주체의 생존과 삶의 전략으로 대두된 시대에서 누군가가 ‘나’에 대해 부당한 재현으로 상처 입힐 때, 폭력적인 가상이 실제의 현실로 삼투하며 오염을 일으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항의 실천은 그러한 오염의 국면을 낱낱이 살피고 또 다른 재현을 내보이는 일일 것이다. 재현된 가상이 현실에게 발휘하는 효과 앞에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새로운 재현을 생산하는 일일 것이다.52) 누구라도 ‘나’에 관해 쓸 수 있지만 ‘나’가 직접 쓰는 ‘나’의 서사는 여타의 재현물과 질적으로 다른 권위를 갖는다. ‘나’가 경험한 서사의 편집권이 배타적으로 소유될 수 없다 하더라도, ‘삶’ 자체를 창작할 권리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불가침한 ‘나’의 권리이기 때문이다.53)
오토픽션뿐만 아니라 ‘나’가 ‘나’에 관해 쓰는 모든 쓰기는 반드시 현실의 ‘나’를 재귀적으로 구성한다. 가령 최근의 독자들이 에세이에 관해 나날이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는 현상은 한 사람이 ‘나’에 관한 쓰기라는 자기 재현을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살피고자 하는 욕망의 반영이기도 한다. ‘나’가 행하는 자기 재현의 과정, 그것의 양상이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나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써야만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쓸 수 있을까?’의 질문을 붙들어야 한다. 이때의 ‘쓰기’는 직접 문학 작품이나 비평을 쓰는 등의 문학적 실천이기도 하면서 자기 삶의 서사를 현실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살아내고자 하는 전인격적인 살아냄 그 자체에 관한 실천 두 가지 모두를 담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누군가가 조건 지어 둔 안전한 당위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눈, 오독하는 고유의 시선을 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무리 평범한 서사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면 그러한 재현의 과정은 ‘나’의 삶을 예측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도착하는 좌표는 ‘나’만의 세계가 아니라 그러한 ‘나’조차도 무수한 타자들 중 한 명으로 정위되는 타자적 세계의 한가운데일 것이다. 이미 우리 뒤에 놓인 수많은 문학이, 퀴어 문학이, 그리고 여성 문학이 그러했다. 소수자에게 가해진 폭력과 그것의 트라우마가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은 상처를 없었던 것처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흉터로 만들어 끝내 자신만의 무늬로 만드는 것이다.54)
‘나’의 삶에 관한 서사 편집권이 ‘나’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한 존재의 ‘삶’ 자체가 지니는 권리나 역량이 전적으로 한 명의 주체에게 위임될 수 있는 배타적인 것이라고 여기기는 어렵다. 삶의 ‘주인’됨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분명 개인으로서의 ‘나’에게 우선적으로 귀속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삶의 출처와 배경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 세계 자체, 또는 자연이라는 너른 범위로 귀속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실제 삶과 그 경험을 과연 유일무이한 하나의 원본으로 여길 수 있을지 의문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경험을 재료로 삼아 생산하는 모든 ‘쓰기’는 들뢰즈의 ‘반복’과도 같다. 예술의 물질적인 재료로 동원되는 경험들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삶을 살아나가며 무엇을 자신으로 서사로 취득할 것인지를 타진하며 행하는 살아감 자체로서의 ‘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은 흔히 우리가 ‘반복’으로부터 떠올리는 무의미함, 또는 동일성이나 유사성과 같은 자질이 아니라 ‘차이’의 생성이자 그 생산이다. 들뢰즈에게 반복은 주체의 외적인 행동이자 역량이다.55)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삶의 원본성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시선으로 물화하려는 예술의 행위가 각각의 ‘반복’이라면 이것은 무수한 차이를 생산해 내는 작업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반복의 ‘연극’이 통상적인 재현의 연극에 대립한다고 보며, 이것은 ‘운동’과 결부된다.
반면 반복의 연극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순수한 힘들이며 공간 안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역동적인 궤적들이다. 이들은 매개물 없이 정신에 작용하며 정신을 자연과 역사에 직접적으로 통합한다. 이들은 단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말하는 언어, 유기적 신체들보다 앞서 표현되는 몸짓들, 얼굴들보다 앞선 가면들, 등장인물보다 앞선 유령과 환영들 - ‘공포의 힘’에 해당하는 반복의 모든 장치들-이다.56)
앞서 살펴보았던 ‘무단 인용’ 사건의 피해를 고백하는 현실의 당사자들이 작품 속에서 재현된 ‘나’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일부가 투영된 “등장인물”로서의 자신, 그리고 그보다 앞선 “유령과 환영들”로서의 형상화된 결과물이다. 분명 자기 자신의 살아냄으로부터 연유한 것들에서 근거하나 자신의 소유물로 인지하는 대상들을 너끈
히 초과해 버리는 재현은 ‘나’가 지닌 삶에 대한 서사 편집권, 재현할 권리와 충돌하는 “순수한 힘들”의 격동이다. ‘나’의 바깥 세계, 자연에서 넘실대는 무수한 힘들이 설령 그것이 ‘나’를 경유해서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운동, 움직임에 대하여 배타적인 권한을 독점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삶이 그가 배타적으로 붙들고자 하는 하나의 ‘개념’이 될 수 있다고 할 때, 권리 차원에서의 ‘개념’은 “실존하는 특수한 사물의 개념일 수 있고, 그런 한에서 무한한 내포(內包)를 갖는다.”57)고 말하는 들뢰즈의 사유를 빌려 올 수 있다. 하나의 개념은 “자신이 내포하는 술어들 각각의 수준에서 봉쇄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규정으로서의 술어는 개념 안에서는 고정되어 있지만”58) 사물 안에서는 얼마든지 그를 초과하는 무한한 내포를 발생시키며, 그래서 결국 “사물 안에서 달라지고 난 술어는 개념 안에서는 어떤 다른 술어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인 셈”59)이 된다. 요컨대 사물들은 주체가 인위적으로 봉쇄60)해 둔 ‘개념’의 영역 안에서 명료하게 규정되지만 그것들이 또 다른 술어들을 통해 자유롭게 발화될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국면은 결국 무한함인 것이다.
‘술어’가 삶의 한 가지 경험을 둘러싼 여러 방식의 재현과 작품의 발화라면 작품 바깥에서 그것의 원본성을 주장하는 ‘개념’으로서의 삶은 역설적으로 삶 자체를 특정 형태로 속박하고 축소시킨다. 그러나 무수한 타자들과 여러 ‘사물’들로 구성되며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인간의 삶은 그렇게 속박되는 특정한 ‘개념’들의 복수적인 비/의도적인 얽힘으로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차원에서 그러한 개념들이 안정적으로 구속될 수 있다 하더라도,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삶이 지니는 지위를 고려할 때 삶 자체는 결국 한 가지 개념만으로 고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개념의 내포에 대한 모든 논리적 제한은 1보다 큰 외연, 권리상 무한한 외연을 가져온다.”61) 우리가 하나의 삶에 대해 한 가지 종류의 술어로 서술할 때, 그러한 재현 결과는 그것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충돌하는 “무한한 외연”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나’(“1”)의 삶을 자신의 작품 속으로 기입하는 쓰기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쓰기, ‘1’을 초과하는 무한한 외연을 창발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유되는 삶의 양태들이다.
‘나’가 경험하는 삶의 부분을 서사화할 수 있는 권리가 오직 ‘나’만이 갖는 배타적인 소유권일 수 없을 때, 타인의 힘이 ‘나’의 삶에 개입하게 되면서 여러 충돌과 갈등, 피해와 상처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은 지극히 타자적인 세계이며, 그곳에 포함되는 ‘나’ 또한 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지닐 수 없는 타자가 된다. 문학은 이를 둘러싼 무수한 시선의 오독들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장이기에, 우리는 예측 불허로 날아드는 행복과 불행을 모두 안아들고 자신만의 읽기와 쓰기를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다. 문학 속 가상이나 실제의 현실 한쪽으로 의미를 수렴시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러한 중력을 매 순간 쳐내면서 그것을 초과하는 차원으로 돌파해 나아가야 한다. 주체가 행하는 노력의 차원에서도 그러하겠으나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하나의 재현은, 그리고 그것이 부분으로 끌어안는 한 사람의 삶은 가상과 현실 그 어느 한쪽으로 배타적으로 귀속되지만은 않는다. 들뢰즈가 말하듯, 봉쇄된 개념의 배후에는 또 다른 술어들의 무한한 생성 작용, ‘반복’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무한정한 내포를 지니는 한에서 자연의 개념들은 항상 다른 사물 안에 있게 된다.”62)는 그의 말처럼,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쩌면 삶의 특정한 원본성은 수립될 수 없음을, 다만 그것을 둘러싼 무수한 ‘반복’의 쓰기와 재현만이 운동하고 있을 따름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투운동은 그간 쉽게 밝혀지지 않았던 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힘껏 견인해 내는 데에 힘을 모았던 소중한 경험이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역사적 경험은 그 ‘이후’의 시간 속으로 막 들어서는 우리에게, 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고 손쉽게 채택할 수 있는 구도이자 도구가 되었다.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명확해야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이분법을 초과하는 더욱 입체적인 경우도 있다. 혹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없는데도 분명하게 실재하는 폭력도 있다. 재현의 윤리에서 우리가 더욱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은 폭력과 상처에 관한 위의 세 가지 경우에 대하여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일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명확한 사안에서조차 가해자의 처벌은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최종 국면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구제. 그리고 폭력이 발생한 구조와 시스템이 정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적인 부분이다.63)
소설의 재현 윤리에 관한 갈등은 성범죄의 사안과 명백히 다르다. 피해자의 피해는 현실의 신체나 재산에 가해진 유형력이 아니라, 현실과 가상이 중층된 복합적인 차원에서 그가 읽어 내는 ‘읽기’의 효과로 발생하는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든 폭력의 해결이 반드시 처벌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화와 합의, 사과와 인정
등으로도 어떤 폭력은 더 잘 해결될 수 있으며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재발을 막을 수 있는 논의의 과정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적발’과 ‘처벌’ 외의 방법으로 폭력을 해결해 온 경험은 아직 없었고, 미투운동의 중력 속에서 그러한 전인격적인 접근 방식은 해결에 대한 회피나 기만적인 타협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미투운동에서 가해자의 응당한 처벌과 피해자의 구제는 가해와 피해의 정체성을 획정하기 위함도, 남성 젠더를 모조리 축출해 버리기 위함도 아니었다. 우리는 더 많은 여성들의 존재와 목소리가 들리고, 보이는 세계를, 하나의 시선으로만 형상화되는 재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선이 경합하고 불화하면서 생성하는 교차적인 재현의 무수한 등장을 욕망했다. 이 글에서 다루는 문학적 재현에 관한 일련의 사안에 대하여 손쉽게 피해와 가해의 구도를 들이대려 하는 시선이 있다면, 어쩌면 미투운동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고발의 효능감을 무리 없이 재경험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그를 통한 주체의 윤리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 시선의 내면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매체의 가상이 실제의 현실과 더욱더 긴밀히 중첩되고 동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현재와 미래의 예감 속에서, ‘적발과 처벌’, 그리고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적용하는 것은 사안의 복잡성을 단순화할 뿐이다.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하여 연대하고자 하는가? 또는 무엇을 위해 연대를 필요로 하는가? 개인과 개인들의 산술적인 집합을 초과하는 유기체로서의 구조와 제도가 부당한 권력을 행사할 때 우리는 연대하고자 한다. 언뜻 그 자체로 절대적인 윤리를 지시하는 말인 것처럼 보이는 ‘연대’는 그러나 성스러움보다는 아주 실용적인 차원의 효용 때문에 필요하다. 시스템이 자행하는 불의와 폭력, 억압을 악이라 부를 수 있다면 선은 살아 있는 구체적인 개별자들, 한 사람만큼의 크기를 지닌다. 그러므로 선은 필연적으로 악보다 약하다. 본질적으로 무력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힘의 크기와 그 작용 범위가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연대한다. 구조적인 악에 맞서고 그것을 능가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 악이 제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취한 동일한 편법과 술수를 모방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만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결국, 작은 선(善)들이 응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구조적 악에 맞서는 선은 언제나 작다. 그러나 크다. 연대는 이러한 모순을 성공적으로 성립시킨다.
그러나, 만약 ‘나’가 당한 폭력과 불의가 구조적인 악이 아니라 의도와 비의도가 중첩되어 있고, 가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내는 복잡함과 모호함 속에서 파생된 결과이자 의도를 초과하는 재현의 효과라면, ‘나’가 행할 수 있는 대항의 실천은 연대가 들어서기 어려운 독립의 자리에서 마련되기도 한다. 3장에서 말한 바처럼, 우리는 지금 이 글에서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의 균열과 사이 공간을 살피고 있다. 이 비좁은 틈새에서 피해자의 구제는 어디로부터,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이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감각의 확인, 자기 삶에 대한 서사 편집권이 상실된 것이 아니라는 인지, 그리고 얼마든지 그 삶은 ‘나’에 의해 다시 쓰일 수 있다는 역능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나’는 자신이 소설 속에서 겪은 모든 행태에 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와 부당함은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다.64) 타자로서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은 그가 표현하는 여러 감정과 생각을 경청하는 일이다. 마치 사법 주체가 행하는 것처럼 사안을 판정하고 색출과 검증, 검열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 유동하는 모호한 물질을 덩어리째로, 훼손하지 않고 오롯하게 듣는 일이다. 이때 ‘사람’의 항에 놓이는 것은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작가와 독자, 출판사 등 사안에 연루된 모든 문학의 주체다. 그러니 우리는 ‘나’와 다른 의견과 입장을 지닌 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이때, 말하기의 자질을 위해서 그보다 선제적으로 요청되는 자질은 ‘듣기’다. 듣지 않는 말하기는 다른 종류의 발화를 막아선다. 상대방의 침묵은 대화를 거부하는 회피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나’가 ‘너’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 대한 방증이기도 한다. 이야기하던 누군가가 도중에 입을 다문다면, 그의 입닫음 자체를 비난하기보다 ‘왜’ 그가 침묵을 선택하는지에 대한 숙고 또한 필요하다. 대화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65)
인간이 한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서로가 지닌 계급성의 차이를 무화하여 기계적인 동질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기만이다) 각자가 서 있는 다른 좌표를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가 발생시키는 이야기들을 힘겹게 듣는 일이다. 그로 인한 ‘너’와의 연루를 정직하게 감당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간 기민하게 경계해 왔던 타자화는 이와 정반대의 작업이다. 그것은 ‘나’가 ‘너’와의 연루를 적극 부인하는 일이다. 마치 ‘너’의 차이와 고유함을 겉으로는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그가 ‘나’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서고, 혹은 그 진입이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극구 부인하는 것이다. 만약 ‘나’의 세계가 그 어떤 타자적인 존재나 힘과의 연루 없이 순수하게 배타적인 ‘나’만의 행위들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가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체들이 처할 수 있는 자기 소외의 위험이다. 그러한 타자화의 과정이 행해질 때 ‘너’의 세계는 ‘나’에 의해 (겉으로는 비폭력적으로) 게토화된다. 그러니 상대를 타자화하지 않면서 그의 말을 듣는 일은 그가 ‘나’에게 던지는 말에 의해 적극 오염되고자 하는 일이다.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세계로 침투하지 못하고 주변을 공회전하는 일은 경청이 아니라 ‘나’와의 연루를 차단하는 고도로 기술화된 배제의 결과다.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 누구도 변하지 않고 자기만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실상 서로의 일방적인 방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대화’로 진입하게 된다면 ‘적발’과 ‘처벌’이 아니라 ‘사과’와 ‘인정’ 그리고 사유의 갱신을 반드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경청의 작업에는 생각보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어쩌면 우리는 죽기 전까지도, 동일한 하나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다른 판본으로 반복해서 들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66) ‘나’가 ‘나’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단지 일방적인 말하기만을 뜻하지 않는다. 화자로서의 ‘나’는 ‘나’에 관해 쓰고, 말함으로써 ‘나’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청자의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결국 내가 ‘나’의 이야기를 쓰고 말하는 일은 ‘나’가 자신을 다시 듣는다는 점에서 ‘듣기’이자 ‘읽기’다. 말하자면, ‘나’에 관해 쓰는 작업은 인스타그램에 올려 둔 매끄럽게 편집된 사진과 멋진 해시태그들을 통해 ‘나’를 원하는 대로만 편집하고 전시하는 일로 축소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 ‘나’를 전시하는 주체인 ‘나’ 또한 자기 자신을 향한 한 명의 타자가 됨으로서, 인스타그램에서 순전히 관객이기만 하던 타자들과 ‘나’의 관계는 분리되지 않고 뒤섞인다. ‘나’ 또한 ‘나’의 관객이다.
연대가 공감의 자리에서 최초로 마련된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서로의 고통에 대해 완전히, 그리고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나’ 자신이 ‘나’와 맺는 관계까지 포함하여, 우리는 서로에 대한 타자다. 타자로서의 우리는 서로를 열렬히 오해하고, 열심히 오독하면서 일평생 함께 살아간다. 이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한 운명적인 얽힘을 받아들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공감에서 마련되는 연대의 자리는 타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나’만이 말할 수 있는 고유한 응답의 언어를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67) 하나의 삶은 수많은 서사를 내포하고 여러 개의 삶이 한곳에서 만나 얽힐 때, ‘나’가 ‘너’에게 혹은 ‘너’가 ‘나’에게 증여할 수 있는 공감의 반응은 서로 다를 것이다. 어쩌면 전혀 공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언어들의 조합으로 공감을 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한 사안들에 대하여 단일한 의견의 합치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고 욕망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피해자를 구제하고 사안을 해결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하나됨의 연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미투운동의 경험이 그러한 낙관적인 믿음을 더욱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후’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차이’와 ‘대화’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공론화되는 사안들은 이전보다 반드시 더 복잡해질 것이며 깔끔하게 해결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이 더욱 확실해지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미 경험했던 모습의 ‘연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현실이 문학적 재현의 가상 안으로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들어올 때, 실제와 가상은 둘 중 어느 하나로 귀속되거나 동화되지 않는 새롭고 복합적인 차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제출된 복수의 의견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정답으로 신격화하며 그와 다른 의견들을 폄하하고 배제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서로 다른 ‘응답’들이 게릴라적으로 한곳에 모였을 때 발생시키는, 아주 낯선 차원에서 드러나는 복수의 ‘오답’들의 자리다. 조악하게나마 비유하자면 1+1=1 이 아니라 1+1>2 가 되는 차원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것은 무수한 ‘나’들이 만들어 내는 교집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것의 바깥에 있는 차이들 때문이다. 미투 국면을 통과하며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여성 간 연대의 고양감을 주고 사안에 대한 결집력을 높였지만 이제는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더욱더 복잡한 불화의 국면으로 나아가야 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서로 다른 페미니즘의 입장들이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차례다.68)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적대시하고 불화하고 미워하기도 하겠지만, 누구든 자신의 오인과 한계를 정확하게 인정하되 합리화하지 않으면서 사과를 주고 받을 수 있다면, 새로운 ‘이후’의 차원은 비로소 열릴 것이다. 역동하는 게릴라적 연대 속에서 나타날 비판의 낯선 얼굴을 기대하는 시간,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이후’의 시간이다.
*
‘정치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로 설명되는 국면 속에서, 누군가들이 특정한 정치적 사안에 관하여 다른 이들과 뜻을 모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동의 입장이나 정체성으로 모아지기보다 그것을 전시하는 주체 개인에게 전적으로 귀속되는 재현물의 한 부분임이 더욱 강조된다. 재현되는 ‘나’의 정치성 또한 전적으로 ‘나만의’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가 목격하게 될 연대는 과거의 모습과 분명 다를 것이며 사안의 해결과 그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 하는 게릴라적인 양태에 가까울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수의 주체가 실천하는 행위들이 점점 더 보이지 않는 형태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고 어려운 방식으로 얽히리라는 것이다. 이때 사법적 권력의 시선인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는 결코 더 나은 국면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페미니즘이 재현 윤리와 만날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 만든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맥락들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작업이지, 창작과 재현의 당위를 설정하고 그를 위반한 존재들을 소거하여 창작의 권리를 박탈하며 문학의 범위를 축소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과 문학, 재현과 정치, 주체와 대상,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 등의 열쇳말을 통해 살펴본 바에 따르면 페미니즘 문학비평의 실천은 마치 사회학자가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상을 기존의 개념과 도식 안으로 분류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여태 보유하던 개념과 도식을 해체하거나 확장하고 수정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최근 발생한 정지돈 작가의 사건은 2020년에 일어났던 김봉곤 작가의 사건에 무리 없이 적용되었던 성범죄자 처벌과 유사한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의 적용이 타당하지 않았으며, 사안의 복잡성을 깊이 다루지 않고 판매 중지 조치 등으로 성급하게 해결한 것의 부작용으로 재발견된다. 기시 마사히코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결하고자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이전보다 복잡해질 것이다. 인간이 지구 위를 살아가는 한 페미니즘이 소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이 있는 한 폭력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고 우리가 그에 관해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모순과 마주할 것이다. 사건이 물리적으로 종결된다 하더라도 그것의 사후적인 화학 작용은 몇 번이고 삶 속으로 재침투해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안에 대한 우리의 반추와 성찰, 그리고 비판은 계속될 것이고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다만 ‘차이’나는 것으로 ‘반복’ 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문학은, ‘읽기’와 ‘쓰기’는 그러한 모순을 끝없이 안아 들며 앞으로 나아가는 아주 느리고 더딘 자기 구원의 작업이며, 그것은 개별자로서의 ‘나’의 의도와 욕망을 초과하는 공유지에서 행해진다.
‘인간에 관한 이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상황에 있다면 그런 행위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이해’, 또한 그런 상황에서 한 그 행동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해’의 집합이다. 이 이론은 폭주하여 상호 모순되는 다수의 가설을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이론은 더욱 가설을 늘리려고 한다. 즉, 상호 모순되는 가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모두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물과 같은 크기의 지도를 그리려는 듯, 모순되는 가설들을 최대한 늘리려 한다.69)
전승민 2020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과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
- 1) 이 글은 '문학들 2024년 여름호에 실린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에서 다룬 소설의 재현 윤리에 관한 논의의 연장이자 확장이다(해당 글은 평론집 「퀴어(포)에티카」(문학동네, 2024)에 약간의 윤문을 거쳐 수록되었다). 더불어, 이하의 내용은 2024년 8월 3일에 최종으로 작성되었으며, 글 속에 반영된 사실은 해당 시점까지 누구든 접근할 수 있는 공개적인 차원에서 밝혀진 사실과 입장문에 근거하여 쓰였음을 밝힌다.
- 2) "Literature is no one's private ground: literature is common ground. [......] Let us trespass freely and fearlessly and find our own way for ourselves." Wooll, Virginia, "The Leaning Tower." The Essays of Virginia Woolf: Volume 6: 1933~1941, Hogarth Press, 2011. 번역은 인용자.
- 3) 지난 5월, 미국 뉴욕의 최고 법원은 와인스타인의 2020년 강간 범죄에 대해 내렸던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 현재 72세인 와인스타인은 2006년 TV/영화 제작 스태프에게 강제로 구강 성교를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2013년 한 여성 배우에 대한 3급 강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23년형을 선고 받고 현재 뉴욕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202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또 다른 강간으로 유죄 판결과 16년형을 선고 받았기 때문에 그는 계속 투옥될 것이지만, 뉴욕에서 증언한 여성 중 한 명에 관련된 혐의에 대해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New York Appeals Court Overturns Harvey Weinstein's 2020 Rape Conviction From Landmark #MeToo Trial," EL PAÍS English, April 25, 2024, https://english.elpais.com/usa/2024-04-25/new-york-appeals-court-overturns-harvey-weinsteins-2020-rape-conviction-from-landmark-metoo-trial.html
- 4) 머리 짧다고 여성 구타... 대검,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 엄정대응 지시 <한겨레>. 정환봉 기자, 입력일 2023, 11, 21.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17180.html
- 5) 조선정, 포스트 페미니즘과 그 불만 영미권 페미니즘 담론에 나타난 세대론과 역사쓰기 「한국여성학, 30권 4호, 2014, 51쪽.
- 6) 김지효, '20대 여성의 인생사진 문화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여성학과 석사학위논문, 2020,
- 7) 소비는 자신을 구성하는 정체성의 일부가 되고, 무엇을 구매할지에 관한 고민은 따라서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편집하고 재구성할지에 관한 문제로 재귀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윤리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제품/기업을 불매하는 움직임인 '캔슬 컬쳐' 등이 이와 같다. 이는 SNS 시대의 소비자 '보이콧'의 한 형태로, 반드시 '윤리적'인 맥락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직원을 대상으로 페미니스트 사상 검증을 실시했던 게임회사 넥슨에 대한 여성 유저들의 불매 운동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로 여겨지는 연예인의 광고 모델로 사용한 맥도날드에 대한 남성 유저들의 불매 운동도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넥슨, 여혐 논란 침묵하더니..." 여성 게임 유저 '불매운동' 확산 (경향신문), 박채연·윤기은 기자. 입력일 2023. 12. 10.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12102135025, 「재재, 맥도날드 모델되자... "페미 요람 이대 출신, 불매하자" <한국경제신문>, 김예랑 기자, 입력일 2021. 5. 3.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105033697H
- 8) "예쁜 페미니스트가 말하면 좀 더 다가가기 쉽다고 생각했고, 좀 더 먹힐 거라 생각했어요. 페미니스트이기 이전에 여자로서 그 사회에 들어가려면 일단 기본적인 꾸밈을 해야 해요. 기본적인 꾸밈. (………) 내가 꿈꿔 온 커리어우먼, 되게 멋있는 대학생 언니에 대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걸 구현하면서 저를 정말로 잘 가꾸고 잘 통제하는 사람이 페미니즘 이야기를 했을 때, 더 잘 먹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김지효, '인생샷 뒤의 여자들, 오월의봄, 2023, 206쪽.
- 9) 김지효, 위의 책, 208쪽.
- 10) 가령 어떤 여성들은 탈코르셋을 실천하고 자신이 코르셋은 벗은 사람임을 입증하는 '탈코' 행위를 열렬히 전시한다.
- 11) 그간 여성을 억압해온 외모 강박과 그를 대상화하는 남성의 시선을 전유하여 메갈리아는 역으로 남성들을 외모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전략을 보이기도 했다. "young and rich, big and handsome, tall and muscle(어리고 부유하며 잘생기고 몸이 좋고 키가 크며 성기가 큰 남성을 지칭하는 은어)"라던가 "dutch face(더치페이를 미러링한 단어로 남성이 여성만큼 꾸밈에 공들이지 않아 여남 간 외모 격차가 큰 상황을 비꼬는 은어)" 또는 어느 안경점에서 만든 이미지로 한국 남성의 '표준' 외모라며 "십이한남 (한국 남성들이 외모를 꾸미지 않아 거의 다 외모가 비슷하다는 점을 비꼬는 이미지)" 짤을 만들어 조롱하는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김지효, '메갈리아와 '미러링': '얼평'의 대상이 된 남성들, 앞의 책 211~212쪽.
- 12) 트위터 닉네임 "다이섹슈얼"(@kuntakinte1231) 2020년 7월 10일 게시물. https://twitter.com/kuntakinte1231/status/1281501681042120709? qvjgiHix4zYMbllwtx689g&s=19
- 13) 인용한 대목은 다음의 기사에서 가져왔다. 「카카오톡 대화 인용한 김봉곤 소설 법원 "무단인용 아니다" 한소범 기자, <한국일보> 입력일 2021. 10. 5.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00514250004812#
- 14) 전승민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 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181쪽.
- 15) 이 사안에서 사법 주체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특히 한국 법원이 성범죄에 대해 선고하는 가벼운 형량을 고려한다면 모든 사법적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인용 허락의 여부에 관해서는 법원이 작가와 피해자 두 당사자의 내밀한 입장과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최선의 객관적 주체였기 때문, 그리고 성범죄의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 일부가 미흡하다고 한 'C누나'의 말로 미루어보건대 그가 자신의 대화가 소설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거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16) 현재는 트위터의 원본 게시글을 읽을 수 없는 상태이나 한 블로그에 당시 트윗의 전문이 이미지로 공유되어 있다. 「김봉곤과 오토 픽션 - 쓰는 사람의 윤리, 작성자 유해, 입력일 2020. 7. 18. https://m.blog.naver.com/yoozont/222034220808
- 17) "소설속 영우입니다" 또 사생활 아우팅... 김봉곤 책 판매중지, 김호정 기자. <중앙일보> 입력일 2020. 7. 19.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28040
- 18) 김현지 본인의 블로그, [공지] <김현지, 김현지 되기> 작성자 사스미, 입력일 2024. 6, 23, https://blog.naver.com/pasilda/223488600534
- 19) 위의 사이트,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작성자 사스미, 입력일 2024. 7. 21. https://blog.naver.com/pasilda/223520532731
- 20) "애를 가진 상태로 열 달 동안 있으면 그런 생각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어. 나도 보통 사람처럼, 모성의 위대함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을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어. 내 몸을 차지하고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얘가 미워 죽을 것 같았어. 내가 죽지 않고 버틴 이유는 지지 않기 위해서였어." 정지돈, 브레이브 뉴휴먼 은행나무, 2024, 185쪽.
- 21) 정지돈, 위의 책, 16쪽.
- 22) 김현지는 자신이 모델이 되는 소설 속 인물 '권정현지'가 "엄마 없이 소설 속을 떠돌고 자기가 임신한 태아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소설은 인용자] 이미 너는 실패한 세계를 살고 있는 거라고 단언한다고 해석하며 자신이 느끼는 슬픔을 말했다. 서사가 중요하게 견인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누군가에게는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특정한 요소들은 당사자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다. 김현지 본인의 블로그, <천하의 정지돈이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 작성자 사스미, 입력일 2024. 6. 27. https://blog.naver.com/pasilda/223493531083
- 23) 이광호는 고은과 김수영의 시를 젠더적인 관점으로 다시 읽는 글에서 여성 혐오를 행하는 남성중심성의 재현에 관해 "다시 읽기와 재배치를 통해 한국문학 전반에 구축되어 있는 왜곡된 젠더 시스템을 폭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 혐오의 흔적을 삭제한 한국문학의 목록은 오히려 '혐오 없는 세상'이라는 허구적인 믿음을 가져다 준다. 비평이 여성 혐오에 관하여 행할 수 있는 문학적 수행은 작품을 삭제하여 독자들이 접근 불가한 세계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러한 작품들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이광호, 저 책들을 불태워야 할까? 정치적 올바름과 비정체성의 '문학 정치' 작별의 리듬 문학과지성사, 2024, 80쪽.
- 24)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공유받은 폭력의 피해 또는 트라우마의 경험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그중에서도 더욱 섬세히 고려되어야 할 예외적인 경우다. 가령. 무엇보다도, 작가는 타인이 경험한 폭력을 재현하고자 할 때, 인간과 작품의 존엄성을 지키는 차원에서 당사자와 사전에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소설이나 시로 가공된 타자의 경험이 그의 실제 삶으로 반향되며 삶을 재구성하는 효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문학의 '읽기'는 독자의 삶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그 효과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경우에는 문제적일 것이다. 문학의 '폭력성'은 현실의 '구속력'을 파괴하며 더 나은 '열림'으로 이끄는 힘이지, 삶을 (예컨대 피해자라는) 하나의 차원 안으로 몰아넣고자 하는 '닫힘'의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어떤 삶의 모양은 피해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가시화되어 열리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적인 복잡성을 고려한다면, 타인의 '피해' 자체가 재현될 수 없다는 당위로 나아가기 이전에, 그것이 어떤 맥락으로 서술되는지에 따라 (독자이기도 한) 당사자의 반응이 다를 수 있으며, 작가가 의도한 맥락과는 독립적으로 별개의 주관적 반응을 보일 수 있음을 살펴볼 수도 있다. 예컨대 경험의 직접 당사자는 가공의 정도와 재현의 방식에 따라 작품 속에 반영된 것이 자신의 경험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 25) "그렇다면 독자의 그러한 주관적인 감정이 작가의 소설세계와 그것을 구성해 온 소설론을 단번에 무너뜨릴 만큼의 위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독자의 권위에서 온다. 소설의 핍진성, 정당성, 문학성과 미학성에 대한 승인은 이제 비평이 아니라 정말로 독자로부터 상당 부분 발생하게 됐다." 전승민, 앞의 글. 퀴어(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197쪽.
- 26) 누군가에게 사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셈인데 왜냐하면 사과를 원하는 이가 상대방에게 동등한 인격적 대우를 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이가 사과를 기대하지 않는 국면에서 상처를 준 이는 더 이상 누군가의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비인격적 존재로 추락한다. 그 어떤 발화도 의미를 갖지 않으며, 그것이 발화의 수신자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을 때 발화의 주체는 실상 주체의 지위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다.
- 27)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 사흘만에 주검 발견 <한겨레>, 박유리 기자. 입력일 2013. 7. 29.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7554.html
- 28) 이는 사안을 둘러싼 비평과 출판사, 그리고 독자들이 각기 감당하던 불안과 두려움이 크게 작용한 결과다. 문단 내 성폭력 이후의 문학장의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의 호소는 곧장 독자 다수의 공감으로 발화되었으며, 독자로부터 외면 받을 것에 대한 출판사들의 공포는 사안에 대한 입체적인 논의가 아니라 문제를 '삭제'할 것만이 유일한 해결법인 것으로 간주하게 했다.
- 29) 해당 작품은 현재 도서관에서도 대출 불가한 상태다. 이 글은 그러한 현재적 한계를 사안이 처한 현실로서 동반하고자 한다.
- 30) 최영미는 2017년 시인 고은의 성범죄를 폭로하며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을 점화했다. 그는 고은의 시를 교과에서 빼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며 "고은의 시가 생명력이 있다면 교과서에서 빼든 빼지 않든 살아남을 것이다. 반대로 그의 시가 생명력이 없다면 교과서에 실리든 실리지 않든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투' 촉발 최영미 "고은 시 교과서에서 빼는 것 반대" <한겨레>, 김미향 기자, 입력일 2019. 10. 19.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51721.html
- 31) '라벤더 위협'은 1969년 당시 전미여성기구(NOW, The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의 대표였던 베티 프리단이 처음 사용한 말로 페미니즘 진영이 레즈비언들과 연합할 때 맞닥뜨릴 위험을 의미한다. 프리단은 레즈비언들이 페미니즘 진영의 구심력을 흩뜨린다고 보았으며 레즈비언들을 배제하려고 했다. 페미니즘 내부의 이러한 충돌과 갈등은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태어나게 했고 1970년 리타 매 브라운 등이 '라벤더 위협 그룹(the Lavender Menace Group)'을 창설함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의 새로운 활력을 이끌었다. 라벤더는 게이와 LGBT+ 진영을 뜻하는 색상이기도 하다.
- 32) 정지돈, 앞의 책, 112쪽.
- 33)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김민예숙·유숙열 옮김, 꾸리에, 2016.
- 34) 프로이트의 도식을 경유하며 해방의 급진성을 보여 주는 듯한 이 주장은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가족 제도의 변이 또는 희생자라고 해석하며 가부장제 가족 제도가 사라지면 동성애자들 또한 사라지리라는 비약적인 결론에 도착한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해방을 위해 동성애자들을 삭제할 수밖에 없다는 그녀의 주장은 명백한 동성애 혐오이며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 시대의 동성애자들은 가족에서 발전한 왜곡된 성적 제도의 극단적인 희생자들일 뿐이다." 파이어스톤, 위의 책, 91쪽,
- 35) 정지돈, 앞의 책, 26쪽.
- 36) "우리는 일종의 실험이었을까? 만약 실험이었다면 이 실험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광장에 모여서 고개를 쳐들고 스크린을 바라보는 체외인들의 마음속에는 어쩔 수 없는 의문과 질문이 떠올랐다." 정지돈. 위의 책 187쪽.
- 37) "상처받았다구요. 힘들다구요. 당신이 김현지를 'H'라는 이름으로 불행하게 소설 속에 가둬 버려서 그게 겨우 내 전부일까 봐, 불행한 내가 전부일까 봐 너무너무 슬프고 아프다구요. 근데 이게 다가 아니잖아요." 김현지 블로그, 앞의 글.
- 38) 김봉곤의 오토픽션이 발휘하는 가장 핵심적인 예술성과 미학은 작가가 재현한 예술의 가상이 실제의 '나'를 역으로 구성하면서 퀴어로서 그가 내면화했던 수치심을 자부심으로 전환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러한 방법론을 펼치는 과정에서 '영우'의 아웃팅이 발생했고, 물론 이를 윤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 39) 그가 김현지의 글을 일부 반박하며 소설에 재현된 인물의 캐릭터성이 실제 모델의 삶의 서사와 일치하지 않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소설의 방법론이 그로 인해 무너질 위험에 처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간 정지돈이 발휘해왔던 소설적 방법론이 실제 현실의 기표들을 소설의 가상 속에 배치하여 가공된 상상력과 함께 녹여내 원본성을 삭제하며 현실과 가상을 다른 차원으로 연동시키는 것일 때, 소설 속의 특정 부분이 실제의 기호와 완벽한 일대일 대응 관계를 이룬다고 말하게 된다면 자신의 작법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정지돈 블로그, 현 상황에 대한 제 입장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작성자 jidon2024, 작성일 2024. 6. 25. https://blog.naver.com/jidon2024/223490507152
- 40) 그런데 만약, 소설 속 인물이 경험하는 일련의 사건과 섹슈얼리티 등이 현실의 실제적인 폭력으로부터 기인했고, 작가가 자신이 실제로 가한 (성)폭력을 작품으로 서사화한 것이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은 성범죄자가 문학의 힘을 남용하여 피해자에게 새로운 폭력을 가한 행위다. 이 글의 1장에서 밝혔듯, 미투운동은 언제고 다시 시작될 수 있다.
- 41) 정지돈, 앞의 책, 152쪽.
- 42) 손현주,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페미니즘의 소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5호 2018, 30쪽.
- 43) 전승민, 이 글의 2장, 78쪽.
- 44) 리베카 솔닛은 페미니즘을 자신들의 이익이 배제당하는 것이라고 느끼는 여러 남성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남성들에게 있어 페미니즘이 그들의 몫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은 남성들을 배제하는 운동이 아니(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 어느 한쪽의 힘을 축소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었던 여성의 입지와 영역을 최소한 남성과 동등한 출발점 위로 놓아두려는 운동이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남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더 많이 포함시키는 것이다. 남성은 항상 배제되지 않았다. 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적 희소성 개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희망, 자신감, 정의 등 비물질적인 가치는 양이 무한하다. 누군가 더 누림에 의해 내 것을 빼앗길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여성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줘도 남성이 누리는 것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더 자유를 누리고 존중을 받는 것을 남성들도 희망했으면 한다." '리베카 솔닛 "한국 페미니스트들, 5년 아니라 50년 보고 가길"」 <한국일보>, 안선희 기자. 입력일 2022, 3. 16.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34905.html
- 45) "이곳에선 어떤 차별도 없이 마음껏 섹스를 즐길 수 있었다. 인종이나 계급, 외모, 성별, 나이, 경제력, 유전자 모두 무관하게 성욕만으로 서로를 탐할 수 있다고" 정지돈, 앞의 책, p. 10.
- 46) 여성 동성애가 폭력적인 이성애 섹스와 남성의 폭력성에 대한 대타항으로 발생하는 역학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세계 인식이다. "아미는 선수들에게 종종 몸을 맡겼고 그들의 생물학적 성별이 여자일수록 좋았다. 안전하게 느껴졌고 안전함을 금기를 넘나드는 행위의 두려움을 나른한 서스펜스로 바꿨다. 그러나 아미와 달리 권정현지는 붐랜드를 좋아하지 않았고 패닉룸을 경멸했다." 정지돈, 앞의 책, 11쪽.
- 47) 소설 초반의 해당 '쓰리썸' 장면이 나중에 발생하는 '권정현지'의 임신과 임신 중단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것은 마치 여성의 '문란한' 섹스로 인해 계획없이 일어난 임신을 비난하는 맥락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서사의 해당 부분을 '문란한' 섹스로 인한 임신으로 읽는 시선도 분명 있겠으나, 소설이 그러한 맥락을 일방적으로 강조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유롭게 펼치는 국면이 어떠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지에 관해 지극히 현실적으로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독자가 여성의 자유로운 섹스에 관하여 어떠한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이다. "현지를 닮은 여자는 패닉룸의 왼쪽 끝방에서 두 명의 남자와 뒤엉켜 있었다. 아미는 구역질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정지돈, 위의 책, 12쪽.
- 48) 정지돈의 이 소설은 그것이 얼마나 '잘' 쓰인 '좋은' 소설인지에 관한 질적 판단의 결과와 별개로 동시대를 향해 던지는 급진적인 질문을 품고 있고, 그것들은 분명 독자가 그들의 삶 속으로 가져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만한 유의미한 지점들이다.
- 49) 2010년대의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김봉곤 소설의 게이 화자를 열렬히 호명하는 동시에 무단 인용 논란이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돌아섰던 모순적인 행위는 당시의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채택하던 이성애 중심성으로 설명된다. 게이의 남성성은 문학장에서 몰아내고자 하던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폭력성을 지니지 않으면서도 '나'(이성애자 여성)를 욕망의 대상으로 물화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시선을 장착한다. 당시 문학장이 열광했던 김봉곤과 박상영 소설의 게이 서사는 그러한 윤리적 강박 안에서 '안전한 작품들이었다. "비평의 '나'가 여성일 때,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 물화할 가능성이 아주 적으면서도 동시에 그 시선의 주체가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소수자로서의 여성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열악한 지위에 있는 곳은 게이의 세계다." 전승민,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 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183쪽.
- 50) 작가가 실제 삶에서 함께 살아가는 타인들의 삶이 작품 안으로 다양한 층위에서 직간접적으로 기입되며,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각자의 것을 상호 공유한다는 뜻이지 타인의 소유권을 침탈하여 '나'의 배타적인 영역으로 물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나'의 이야기가 '너'에게로 흘러들어 갈 때 그것은 분명히 공유된다. 그러나 '너'가 '나'의 이야기를 공유받았다고 하여 그 이야기의 최초 소유권자인 '나'의 권리가 '너'의 세계에 의해 무화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 소유는 자신의 소유권 외의 소유권 또한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창작은 그렇게 공유하고 공유받은 것들을 토대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다. 창작의 자유는 서로의 것을 공유할 권리이자 그것의 실행이다.
- 51) 가령, 이런 사례를 들 수도 있다. 비평가 A와 B가 오랜만에 만나 카페에서 사담을 나누던 도중, B가 A에게 최근 골몰하는 작업이 무엇이냐고 안부차 묻는다. A는 자신이 작품 K에 대하여 그간 합의되어 온 해석을 뒤집는 새로운 해석을 발견했다고 B에게 기쁘게 말해 주었고, B 역시 그러한 해석에 대하여 놀라워하며 동의한다. 작업을 계속해 나가던 A는 얼마 뒤 B가 자신이 말했던 '새로운 해석'을 기반으로 한 비평을 발표한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B의 행위는 과연 '무단 인용'인가 아닌가? 이때, A는 모종의 과정을 통해서 B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음을 증명하고 B의 글의 게재를 철회시킬 수 있을까? A와 B가 대화를 나누던 시점에서 작품 K에 관한 A의 '새로운 해석'은 아직 공식적인 글로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적 재산권이 없는 상태이며 B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글을 발표했을 것이다. A는 결국 먼저 발표된 B의 글을 인용하며 자신만의 비평을 완성해서 발표했지만 그의 논의는 후발 주자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A가 포착한 '새로운 해석'은 A가 자신의 사유를 통해 스스로 발견해 낸 것이었으므로 B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친다. 이때, A가 B의 '합법적인 절도'로 인해 느낀 모욕과 수치는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을까?
- 52) 문학의 세계는 현실 세계와 긴밀히 연동되는 다른 또 다른 가상의 세계다. '코드화'는 현실의 주체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와 욕망을 문학이라는 가상에 투사하거나 반영할 때 이루어지는 한 가지 작용 양상이다. 전승민, '가장 음험한 가장 앞의 책
- 53) 이와 관련해 읽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 중 하나는 박서련의 장편소설 「폐월: 초선전(은행나무. 2024)이다. 이 소설은 남성의 시선에서 일방적으로 재현되었던 여성 '초선'이 자신의 삶의 서사를 서술할 권리를 한껏 발휘하며 소설의 서술자인 동시에 서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가 됨으로써 그녀가 지닌 여성과 인간의 지위를 복권하는 이야기다. 누구든 '나'에 관해 재현할 수 있지만 '나'가 재현하는 '나'의 서사는 타인의 재현으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 강력한 힘이 있다. "삼국지의 초선이 남성 간에 이루어지는 여성 거래의 재화에 불과했다면 박서련의 초선은 그러한 거래의 역학을 통해 자기 해방에 도달하는 여성의 주체성, 급진적인 재전유의 극단을 행위한다. 만약 유통되지 않았더라면 유교 가부장제의 예속된 주체로 고정되어 죽은 바 다름없었을 초선의 인격은 역설적으로 남성의 여성 거래 '덕택에' 남성의 '집'을 탈출한다. 이는 저간의 한국소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여성 해방의 가장 급진적인 국면이다." 전승민, 발문 가장 급진적인 존엄 박서련, 위의 책, 240~241쪽.
- 54) '흉터'와 '무늬'의 관계에 관한 의미는 최영미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랜덤하우스코리아, 2005)와 청동정원(은행나무, 2014)에서 영감을 얻었다. 전승민, 사청(乍晴)」「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18쪽.
- 55) "반복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사한 것도 등가적인 것도 갖지 않는 어떤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것과 관계하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행동에 해당하는 이 반복은 그자체로 아마 더욱 비밀스러운 어떤 떨림의 반향일 것이다. 그것은 더욱 심층적이고 내면적인 어떤 반복의 반향, 다시 말해서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단독자 안에서 일어나는 반복의 반향이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24쪽, 강조는 인용자.
- 56) 질 들뢰즈, 위의 책 43~44쪽, 강조는 인용자.
- 57) 질 들뢰즈, 위의 책, 46쪽.
- 58) 질 들뢰즈, 위의 책, 47쪽.
- 59) 질 들뢰즈, 위의 책, 같은 쪽.
- 60) 이때의 봉쇄는 "개념의 내포가 확장되지 못하도록 저지하거나 동결하는 것, 개념의 내포를 고정시키는 것 등을 의미한다." 질 들뢰즈, 위의 책, 역주 20번, 48쪽.
- 61) 질 들뢰즈, 앞의 책, 같은 쪽.
- 62) 질 들뢰즈, 위의 책, 52쪽.
- 63) 김남숙의 단편소설 「파주」(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는 폭력의 피해와 가해의 구도를 넘어서는 국면을 담는다. "피해자로서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글은 단지 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명확히 밝히고 누군가를 엄정하게 처벌하는 것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피해와 가해의 구도는 사실로서의 사건을 적확하게 검토하고자 하는 과정적이고 부분적인 차원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가해자의 물리적인 처벌이 아니라 피해자의 구제와 세계의 정화다. 폭력을 경험한 자를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단순히 물화시키지 않을 때 그는 비로소 폭력을 끝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자로 다시 태어난다." 전승민, 앞의 글, 14쪽, 피해자로 물화시키지 말자는 말은 피해자의 경험을 무화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가진 인격의 총체를 피해자성과 피해자로서의 경험만으로 압축·환원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 64) 작가인 '나'와 독자인 '나'는 '지면'의 보유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힘을 가진다. 이전의 세계에서는 잡지와 단행본 등의 지면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했으나 지금의 현실에서 종이 지면은 그 어떤 매체보다도 양적으로 빈약한 독자수를 가진다. 가령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의 채널은 종이 지면보다 훨씬 더 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실시간으로 상호 소통하며 서로의 현실을 더욱 빠르게 재구성할 수 있는 상당한 파급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지면 권력'이라는 말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접근될 필요가 있다. 이제 작가는 더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거대한 존재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독자 역시 그저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이 시대의 독자들은 이미 자기 재현과 그 전시에 능한 주체들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의 중력이 개인을 각자도생 하도록 내몰고 있다면 그 시대에 속한 개인이 행할 수 있는 역공 중 하나는 바로 그 외부의 힘을 재전유 하여 '나'의 삶의 역능으로 발휘하는 일이다. 그러나 1부에서 언급한 사례, 페미니스트들의 인스타그램을 통한 자기 재현과 전시가 스스로를 모순에 처하게 했던 것처럼, 그것이 구조 자체를 파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주체들에게는 '일인칭 바깥으로 나아가는 대화'가 필요하게 된다.
- 65) 피해자 김현지는 트위터에서 출판사 은행나무가 7월 26일 그에게 전한 마지막 답변을 공개했다("현 상황에서 저희 출판사는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해당 답변은 '회피'로서 '대화'의 종결을 꾀하는 (피해자와 출판사가 주고 받은 이야기의 모든 내용과 맥락을 공개된 해당 메일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발언으로 읽힐 수 있다. 만약 피해자와 출판사 사이에 충분한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면 이는 무책임한 태도일 것이나, 논의의 끝에 도달한 입장이 그것이라면 그것은 침묵이라기보다 한 주체가 내보이는 반응의 내용일 것이다. 김봉곤 작가의 사건에서 벌어진 작품집의 일괄적인 판매 중단 조치가 겉으로는 당시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대화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상 사안의 주요 당사자인 작가를 그들(독자와 출판사)의 대화 속에서 배제하는 일과 다름없었을 뿐인 것과 마찬가지이거나 다를 수 있는데,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므로 이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문학동네와 창비가 2020년 당시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스처를 보이면서 작가를 대화의 장에서 일방적으로 축출시킨 것과 같은 발화나 행위는 앞으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트위터 닉네임 "H권정현지가 아닌 김현지" (@beinghyunji) 2024년 7월 29일 게시물. https://x.com/beinghyunji/status/1817766399479332958?uwDpzPoFS3w6Uwldsc9zw&s=19
- 66) 김혜진의 장편소설 「경청(민음사, 2022)은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초월하는 '듣기'에 관한 한 가지 탁월한 예시다.
- 67) 아서 프랭크는 2024년 8월 3일, 최근 출간된 신작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 육체 질병, 윤리(최은경·윤자형 옮김, 갈무리, 2024) 기념 온라인 실시간 강연회에서 타인의 아픔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우리는 오직 그에 대해 각자의 고유한 '응답'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 68) 2010년대의 한국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이성애중심성을 채택한다. 페미니즘이 이성애중심적이라는 말은 그 주체들의 성적 지향이 단지 이성애자라는 뜻만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퀴어들조차도 삶의 수행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이성애중심의 문법을 채택할 수 있다. 가령, 레즈비언 부치의 남성성을 동성애 관계 내에서 이성애 각본을 수행하는 '남성'의 젠더로 간주하는 일 등이 그러하다.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레즈비언들의 경우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의 극단적인 분리를 전제하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성애중심성을 재생산하기도 한다.
- 69) 기시 마사히코, '담배와 코코아 망고와 수류탄 - 생활사 이론, 정세경 옮김, 두번째테제, 2021, 293쪽. 강조는 인용자.
추천 콘텐츠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1 새로운 사회학·생물학적 지식을 접하며 인식의 전환을 겪게 된 순간들을 빈번히 다루는 만큼, 『시와 물질』에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이들의 발언이나 저서가 빈번히 인용된다. 또한 기후생태위기가 심화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우세종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인간종 내부에서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가령 「물의 국경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지는 "지도"와 "얼음처럼 단단"한 "국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데, 이를 통해 나날이 물 부족 지역이 넓어지며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이 속수무책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경계선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 내부에서도 은연중에 계급과 우열을 나누었던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령 「강물이 요구하는 것」에서 화자는 자신을 시혜적 위치에 두고서 현지인을 대상화하고 연민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부끄러운 마음 한 조각"을 자각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여행 중 화자는 배 젓는 "베트남 노인의 비참을 / 좀더 리얼하게 / 좀더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서 핸드폰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 과정에서 핸드폰이 강물에 빠진다. 이에 화자는 핸드폰이 스스로 강에 뛰어든 것이며 "강물"이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린 것이라 의인화에 입각한 심적 봉합을 시도한다.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행위 동기를 강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하고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다. 섣부른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슴새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나타난다. 화자는 언젠가 슴새를 만났던 일을 메모해 놓고 시로 쓰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시집에 넣지 않았을 이유를 자문한다. 이때 "슴새를 시집에 가두지 않고 / 구굴도나 사수도나 칠발도 같은 섬으로 / 날려 보내고 싶어서였"을 거라 스스로 답을 내려보는 모습은 어떤 대상을 손쉽게 가공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슴새를 맞닥뜨린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을 쉬이 떠벌리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사건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희덕에게 시는 존재자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고 가두는 부정적 속성에 머물지 않으며 서로 다른 존재자 간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뻗어 나감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산호와 버섯 -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이라는 표현은, 유성생식을 통하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버섯만큼이나 시 또한 물리적·심리적으로 멀거나 상이한 곳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매개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 나라의 다른 시인을 호명하며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정한 말 건넴은 비록 가까이 있거나 자주 볼 수 없어도 시를 통해 경험하는 깊은 우정과 유대감에 대한 환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뻗어감의 속성은 「세포들」에서 암시되듯 무질서함과 더불어 나희덕에게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 듯하다. 「밤과 풀」에서는 인간이 설치한 "경고판"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뻗어가는 풀의 집요한 생명력을 주시하면서 머잖아 풀로 무성하게 뒤덮일 황무지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는 앞서 본 시의 확장성과 겹쳐지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가 변화시켜 갈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보도록 이끈다. 나아가 나희덕에게 뻗어감에 대한 사유는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을 긍정하며 성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이미 죽은 자들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이 그의 시 안에 마련된다.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는 눈의 무진장, 흰 글씨로 쓴 겨울 이야기는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눈 위에 가만히 누웠다 춥지 않았다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 눈 속에서 잠들지 마, 가만히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의 실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피를 나르는 실핏줄처럼 눈의 대지가 들려주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 「눈의 대지」 부분 여기서 "멀리 뻗어가"는 "눈의 실뿌리"는 물이 얼고 녹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다른 물질로 순환해 온 물의 내력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통해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며 영원히 이어질 물질의 생애를 암시한다. 또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고 듣고 간직했을 기억들도 물방울 안에 담겨 물질의 무한한 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물질의 기억에 새겨진 각 존재자들의 삶 또한 물질의 순환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순환을 거듭하기에, 혹은 여러 물질들로 분해되어 단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적적인 순간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쌓았을 추억, 동생이 들려줬을 걱정 어린 목소리는 동생이 떠난 이후에도 화자의 곁을 지키며 나란히 누워 있다. 즉 이 시에는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며 순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들이 이 땅에서 누적한 기억 역시 물질의 순환 속에서 몇 겹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포개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인간사의 필연과 그럼에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연결의 기억을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이기도 한데, 가령 「샌드위치」는 공장에서 교반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괴로워하며 흘렸을 피와 소스의 물질적 유사성에 기반해 고인을 사고 당시 그가 만들고 있었던 '소스'로 치환하는 것은 정당한가. 수식을 위한 '자본주의의'라는 관형어 또한 누군가의 생을 '희생된 노동자'로만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처럼 보여 고민이 남는다. 또한 「존엄한 퇴거」는 고독사로 죽은 어떤 이가 "개의치 마시"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그의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중략)…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을 두고 '존엄한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의 이러한 "퇴거"에 '존엄'이라는 수식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누군가가―결코 '자발적'이라 할 수 없는―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타인을 먼저 헤아린 것에 '존엄'을 부여하는 모습이 왜 이토록 시혜적인 태도로 읽히며 고독사의 모범군을 구획하는 것처럼 읽히는 걸까. 보편의 영역인 '존엄'보다는 '품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는 시집 속 대부분의 화자들이 여전히 타자를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얼음 시계」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빙하 조각들이 되려 '인증샷'을 위한 '핫플'이 되고 만 것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걸음걸이」에서는 "평화의 걸음걸이란 …(중략)…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 말하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빠르게 뛰다 적군에 발각되어 희생된 청년의 일화를 교훈 삼아 이끌어 낸 아포리즘이라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두려움 속에서도 뛰지 않고 걷기를 택한 소년을 죽은 청년과 대조되는 교훈적 위치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무고한 청년의 죽음의 '귀책사유'가 청년에게 있다는 식으로 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동일화에 입각한 인간적인 의미화가 다소 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령 「옥시토신」에서는 젖을 가리켜 "모성애의 다른 이름 …(중략)… 희뿌연 액체로 이루어진 선물,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호르몬"이라 칭하는데, 이는 포유류의 생리적 반응인 '젖'을 '선물'과 '사랑', '모성애'와 곧장 연결함으로써 감성 구조의 상투적인 재현 체제를 반복하고 어미에게 사랑의 의무를 고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치들」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사람들은 / 바닥에 파닥이던 멸치들처럼 시들어갔"다며 물밖에 타의로 끄집어내진 멸치들의 격렬한 꿈틀거림을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몸부림에 직접 대응하는데, 이러한 비유 축조는 멸치에게도 인간에게도 상당히 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상위자의 위치에 자연히 놓고서 그 지위의 추락을 비참한 하위자로 상정된 존재에 이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수사의 활용 자체가 아니라, '인과응보'를 경고하기 위한 목적 아래 멸치를 도구화하고자 그 속성을 앞서 구획하는 태도, 인습적 감각을 갱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있다. 표제작 「시와 물질」에서 시는 아무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시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더욱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희덕 시인같이 오랜 시간 독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무수한 교과서에 시를 실어 어린 시 독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좋은 시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온 시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쓰는 한 줄 한 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이 한국시의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이자 자부심으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이런 식의 타성화에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와 물질」에서 "우리의 발견은 /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는 로알드 호프만의 언급이 또한 인용되듯,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대 시의 한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뤄낼 풀의 번성을 기대하던 마음으로, 느리고 조용하더라도 분명한 변화와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시의 역할을 더욱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축적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온 시인이므로 물론 가능할 것이다. 2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일까, 『검은 양 세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모든', '모두'일 것이다. 일제히 같은 풍경 속에 멈춰 있는 장면과, 그러한 장면을 기어이 비집고 아주 작은 균열과 어긋남이 발생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진다. 또한 '영원', '무한' 등 의미 단위가 큰 추상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무한소급 모티프, 메타시에 대한 알레고리 축조와 '사랑'을 기능적 어휘로 활용하는 점은 언뜻 이 시집을 가속류의 극단화된 형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게 한다. 서시에 해당하는 「검은 회화」는 텅 빈 직사각형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시다. '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액자 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부도 검은 풍경이 아닌 투명함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조르주 페렉의 『공간들』이 루이스 캐럴의 『스냐크 사냥』 속 '태평양 지도'―텅 빈 사각형―를 발췌하며 서문을 열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1)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지도 말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이자 단절의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이 텅 빈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의 흘러넘침을 예고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있는 이미지"(「리부트월드」)의 반복되는 변주는 구멍이 뚫려 있기에 내부의 누수와 외부의 침입을 무한히 허용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윤곽을 중심으로 흘러넘침과 채워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는 시집 전반에서 여러 번 형상화된다.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략)…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엇에 전전긍긍하기를 멈추고 /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기를 멈추고 //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 영원히 열려 버리고 말 텐데 터져 버리고 말 텐데 //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할 텐데 //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중략)… 너는 몸이 처음이라 // 구멍을 찾아다닌다 - 「원영영원」 부분 위 시에서는 구멍 뚫린 상자에 무언가가 자꾸만 들어차는 모습과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윤곽이라 할 수 있을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만이 남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너' 또한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으로 제시되는데, 결코 봉합될 수 없으며 무한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이 구멍은 영원한 유동성을 현시한다. 이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는 화자의 발화는 이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난 구멍은 상자일 수 없는가? 단지 구멍일 뿐인가? 안팎의 경계가 무화된 구멍 난 상자는 상자인 동시에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며 / 점점 투명한 안팎이 되어 가는"(「구유에 담긴 시」)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리버스림버스」에서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허물어짐에 따라 예정된 "미래가 파쇄"되고 윤곽 안에 가두어 두었던 "형상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데 "밤"이자 몸인 내부의 범람으로 유리 저편이 검게 물들어갈 때, 이 범람 퇴적물―넘쳐흐른 형상이 "새 공병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어 새로운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해 및 회수되고 있는 장면, 한정된 자원으로 세계를 건축하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이 시집의 내적 구조를 축조하는 의지 자체의 표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저장용량을 압축하듯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은 이 가상 세계 혹은 디지털화된 저승의 관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나아가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미자나빔」)라는 언급 등에서 암시되듯 이 관리자는 외부의 플레이어인 시인의 창작 수행과 그로 인한 입력값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즉 세계의 축조와 몰락의 동시성을 그리는 상호구성의 아이러니는 시를 입력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또한 빗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자나빔」에서 마음의 깜빡임이 커서에 비유되듯, 마치 자각몽이나 AI 작업과 같이 외부 시인 혹은 유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컨트롤러처럼 기능하는 모습은 입력값의 유무에 따라 세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양상을 반영한다. 가령 "어느 한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 있"(「원영영원」)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라는 조작 및 설계를 계속하지 않으면 질료화된 형상의 누수가 멈출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추구체」)다는 지침이 성립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 차의 현시 유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채석장」에서는 "마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 꿈에서 시인이 된 네가 공원 계단에 앉아 낭독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는데, 이를 통해 '너'의 풍경을 형성한 변수가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제어 불가능한 오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외부자이자 창조자로서 '시인'이 거듭해서 고쳐 쓰는 시―세계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실상 이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정지시켜 반복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시간의 영원한 밑빠짐에는 반복만이 적힐 수 있"(「구유에 담긴 시」)다는 언급은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영구적인 누수의 풍경이 시간의 역행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시간에 누수가 발생했기에 시간의 선형적인 이행이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시집 속 인물들은 특정한 반복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 "매일 신발을 잃어버리"(「홀」)는가 하면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환영의 안쪽―에게」)을 벗어날 수 없으며, 「추구체」에서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도 / 이전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 비어 있"어 이들이 일상적인 리셋과 초기화를 겪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 영원한 내리막길을 굴러 너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처럼, 이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과거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너'에게 가닿기 위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돌려세우고 싶은 심적 동기의 발로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한을 추동하는 가운데 이들의 의식은 나날이 과거를 반추하는 방향으로, "과거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같다」) 그러나 「사모바르―에게」에서 그려지듯,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어도 "매번 같은 슬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라 일컬어진다. 매번 겪는 슬픔일지라도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미 아는 슬픔일지라도 번번이 새롭게 상처를 새긴다는 건 슬픔의 특수성이자 영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다듬은 개가 가지 않고 쏘아 올린 폭죽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는 "멈춰 버린 세상에서" 끝내 "개의 꼬리가 다시 흔들"(「난지도」)리는 장면은 이러한 슬픔의 속성을 받아들임에 따라 과거로의 반복 루프에 언젠가 금이 가고 말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 자그마한 균열의 암시는 "밑그림" 너머를, 반복되는 슬픔 너머를 상상해보도록 이끈다. 1)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이 시집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관련해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리부트월드」는 김종연식 '검은 회화'에 대한 전시 소개 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사각형 안을 가득 채운 '아무것도 아닌' '투명함'의 덧바름은 불투명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한 지향을 드러내며 회화 내부의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리자는 세계 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옵저버로 보이는데, 가령 「미자나빔」에서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며,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 (…)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은 '나'가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가 짙게 드리운 이 세계를 디지털화된 저승계라 할 수 있다면, 관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자적 존재인 셈이다.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