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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자음과모음 | 2024년 여름호(제61호)

예민한 동시대인들 ― 전하영, 『시차와 시대착오』

이원기 문학평론

2023년 제22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시간의 틈을 넘는 목소리들 -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읽기」 등이 있다.

예민한 동시대인들 전하영, 『시차와 시대착오

 

이원기

 

 

1. 관찰하는 동시대인들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참으로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자,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자, 그래서 이런 뜻에서 비시대적인/비현실적인 자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까닭에, 바로 이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동시대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다.”1) 자신의 시대와 거리를 둠으로 그 시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라야 진정한 동시대인이며, “그것은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72)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그런 점에서 전하영 소설의 인물들은 마땅히 동시대인이라 불러줄 만한데,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향이 일종의 예민함이기 때문이다. 예민함이 세계를 대하는 한 가지 태도가 될 수 있다고 할 때, 전하영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밀도의 예민함으로 세계와 그 안의 자신을 적극적으로 감각하고 분석한다.

유학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영화감독 난희(「영향」)는 서울 외곽의 중국인 거리에서 방을 얻어 살며 창밖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촬영을 하며 난희는 거리의 그 누구든 간에 저마다의 생활에 몰두하고 있”2)음을 보고 오직 자신만이 한 걸음 멀리 떨어져 거리를 관망할 뿐”(같은 쪽)임을 실감한다. 외부를 관찰함으로 세계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감각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음이 급해질 때면 혼잣말을”(106) 하는 난희의 버릇에 대한 서술은 반대로 스스로를 관찰되는 자리에 위치시키며(“마치 다른 외부자가 그녀의 삶을 바로 곁에서 관찰하고 있다는 듯이”(107)) 마찬가지로 관찰이라는 행위가 전제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거리두기의 감각을 내면화한 인물에 대한 묘사로 읽힌다. 무언가를 관찰하는 인물들은 이 단편에뿐 아니라 단편집 곳곳에 편재해 있는데, 이러한 관찰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이질감을 빠르게 느끼고 분석하는 능력인 예민함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3)

인물들의 예민함은 먼저 신체감각에 대한 관찰로서 나타난다. 「남쪽에서의 화자 는 예술재단의 지원사업으로 고층 호텔에서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데, 36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순간적으로 귀가 멍해지며 몸이 미세하게 찌그러지는 느낌”(50)을 받는다. 이는 영화화되지 못하는 시나리오와 반복되는 패배감에 대한 그녀의 자격지심이 알레고리화된 신체감각의 형태로 관찰되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성공의 자리를 연상시키는 높은 곳’(36)에 스스로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엘리베이터)으로 도달할 때의 불쾌감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의 감각과 중첩되어 그려지는 것이다. 예민한 신체감각이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예민함의 은유로 기능하며 화자가 느끼는 세계의 이질감이 실체화되는 지점이다.

신체감각이 신체 외부로서의 세계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예민함의 일차원적 발현이라면, 인간관계로 대표되는 보다 다차원적인 세계에 대한 예민함은 인물들이 타인과 소통하는 상황에서 가시화된다. 독특하게도 이 단편집에서 인물들이 자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표정, 그중에서도 자신의 표정이다. 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때에 따라 필요한 표정을 짓고(“난희는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그래야 할 것 같았으므로”(111)) 감정을 숨기며(“아무 일도 아니라는 내색을 하려고 순간적으로 (… …)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44)) 그것의 효과를 가늠한다(“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아서 내가 지은 표정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고”(28)). 때로 이들은 자신의 표정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객관적으로 포착해내고(“당신의 미소에는 어떤 직업적인 뉘앙스가 담기는데”(274)), 그러한 태도는 곧잘 자기객관화로 연결되기도 한다(“당신은 그 사실을 새삼 알아차리고 남몰래 기쁨을 느낀다. 이상한 여자.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같은 쪽)).

사실 이들은 자주 자신의 어떤 기질적인 특성에 대해 생각하는데, 가령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언가 스스로에게 결핍된 면을 찾아내고 슬퍼하는 것”(195)이 한 예다. 이때 자아 분리로서의 자기객관화는 예민함이 도달하는 필연적인 상태처럼 보인다. 예민함이 관찰을 추동하며, 이때 정확한 관찰의 필수요건이 바로 객관성의 확보이기 때문이다. 「검은 일기에서 화자가 쓰기 시작한 일기-소설로 짐작되는 후반부의 우리는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쪼개진 것 같았다”(38) 같은 서술은 그러한 자아의 분리가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장면으로도 읽을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남쪽에서화장실에서 이를 닦을 때면 거울 속의 내가 나와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기분이 들”(53)곤 했다는 문장 또한 단순히 전에 살던 집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이기를 넘어 그 이상으로 읽힐 여지를 갖는다.

그렇기에 전하영의 소설에 예술가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예술가란 언제나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예술은 곧 예민한 감각의 작동이자 대응이며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히 20대 초반의 여성 현대미술가가 이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단편 당신의 밝은 미래현대미술 작가로 살아남기에서는 어쩌면 당신은 정말로 남다른 예술적 감각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면에서는 예민하지만”(290)이라든지 당신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다짐한다. 당신은 그런 것에 예민한 사람이니까”(298) 같은 문장들이 예민함과 예술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있기도 하다.

 

2. 예민함으로 세계를 확장하기

이쯤에서 다시 사전을 펼쳐보자.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는 예민하다의 두 번째 뜻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인데, 여기서 지나치게라는 부정적 가치판단이 눈에 띈다. 오늘날 일상에서 예민함의 감각이 우리 자신보다 타인을 향해 작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탓에 의도와 무관하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많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예민하다는 표현이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 경위도 일견 이해된다. 그러나 정말 예민함은 그렇게밖에 활용될 수 없는 걸까. 그것을 더 생산적으로 사용하기란 불가능할까. 예민함의 감각이 자신만을 위해 쓰일 땐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으려는 이기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쉽지만,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예민함과 그 반경에 대한 충분한 감수성이 함께 발현된다면 이 감각은 무엇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이타성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전하영의 인물들이 자신의 표정에 대해 독특한 관찰을 수행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는데, 대화를 할 때 타인의 표정만큼이나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사람이란 어쩌면 관계에 있어 섬세하고 사려 깊은 자세로 임하려는 사람인 건 아닐까. 외부로부터 내가 받는 영향만큼이나 내가 외부로 주게 될 영향에 대해서도 숙고하는 이러한 태도는, 모두가 서로의 세계를 예민하게 감각할 때 이곳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예민함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희망은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의 한 장면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40대 후반의 독신 여성 숙희는 할머니가 된 윤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나이에 대해 생각한다.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에 이제 겨우 익숙해졌는데 머잖아 할머니라고 불려야 한다는 사실이 숙희를 괴롭힌다. “칠십대면 칠십대 여성이라 하고, 팔십대면 그냥 팔십대 여성이라 지칭하면 될 것이지, (… …)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고 아무에게나 할머니라고 대충 불리고 싶진 않았다.”(133) 주목을 요하는 건 숙희가 꾀죄죄한 행색의 백인 남자를 보는 장면이다. “숙희는 자기도 모르게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가 이내 칠십대 남성으로 정정했다.”(154) 간략한 서술 이후 더 진전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자신을 할머니라는 범박한 호칭이 아니라 특정한 나이대로 불러주길 바라는 숙희의 예민함, 말하자면 당사자성을 띤 예민함이 타인의 입장으로까지 그 작동 범위를 넓히는 모습이 발견되는 순간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자신과 비슷한 폭력에 노출된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예민함은 일종의 감각적 확장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예민하게 가다듬고 확장하는 일이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상상력은 검은 일기에서도 발견된다. 화자 는 죽은 작가의 일기를 소설로 만들고, 동시에 그 과정을 일지로 남기는 일을 청탁받는다. 삶과 글쓰기가 뒤섞이는 이 작업의 구조 속에서, 하나의 삶이 소설로 재서사화될 때 또 다른 삶은 다시 한 편의 글로 기록된다. 삶의 언어화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글쓰기가 애도의 유일한 방법으로서 수행되는 것도 같은 흐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애도는…… 언제 끝날까. 결국 글을 쓰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을 것이다.”(65) 글쓰기가 언어적 예민함을 필요로 하는 작업임을 생각해볼 때, 이 다시쓰기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은 타인의 삶, 나아가 세계에 대한 폭넓은 감각이다. 이 예민함으로 언어는 넓어지고 세계는 확장된다.

그렇기에 전하영 소설의 인물들이 부지불식간에 개진하는 것은 자기 영역에 대한 배타주의적 주장이기보다 차라리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반경을 넓히는 일이며, 이 맥락에서 예민함은 세계를 넓게 보려는 태도가 된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그런 작은 태도들일 것이다. “인류의 약 십오 퍼센트 정도는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감각을 지니는데, 이들이야말로 세계를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일을 해내는 특별한, 아니 유의미한 사람들이라는”(57) 믿음으로 다시금 용기를 얻으며, 이제 아감벤적 동시대인은 더 많아지길 바라야 할 것 같다. 동시대의 어둠을 관찰하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예민함을 가진 전하영 소설의 인물들이 우리의 밝은 미래를 꿈꾸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여기서 동시대성에 대한 두 번째 정의를 제안하고 싶다.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이다. 모든 시대는 그 동시대성을 체험하는 자들에게는 어둡다. 따라서 동시대인이란 이 어둠을 볼 줄 아는 자, 현재의 암흑에 펜을 적셔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 자이다.”4)


  • 1) 조르조 아감벤,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양창렬, 난장, 2010, 71.
  • 2) 전하영, 「영향」, 『시차와 시대착오』, 문학동네, 2024, 105. 이후 쪽수만 표기하며 모든 중략은 인용자.
  • 3)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는 예민하다는 다음과 같다.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 4) 조르조 아감벤, 같은 글,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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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기 엉겨붙은 우주가 다시 여기로 돌아올 때 ― 송재학 시집 『습이거나 스페인』

그간 송재학의 시는 그것이 ‘긴장’과 ‘감각’이라는 두 키워드를 축으로 삼아 일상의 여러 구체적 이미지들을 경유해 독특한 서정시의 영역에 도달하고 있다는 맥락 위에서 읽혀왔다.1) 그리고 그것들이 음악, 죽음, 어둠, 색깔 등에 관한 밀도 높은 사유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송재학의 시를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고 흩뜨리는 제의적 작업의 공간 또는 그 풍경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다성악의 공연장에 놓이는 작업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역시 여러 차례 제출되었다.2) 한편으로 송재학의 시는 최근 어느 시인이 정리한 바와 같이 “하나의 전체성을 품고 다가”오기도 하는데3), 그 말인즉 그의 시가 (송재학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어의 차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생성되는 각자의 울림”(같은 글, 22쪽)에 조금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시에서 추상적인 감각 세계가 묘사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모호함이 관념의 차원으로 떠올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떠한 끈끈함을 만들어 내며 지상에 남아 우리와 함께 여전히 일상의 면면을 뒹군다는 말이다. 단어가 아닌 문장, 문장이 아닌 문단의 단위로 이미지와 의미가 서로 엉기는 시. 요컨대 그러한 ‘명료한 애매함’이 송재학의 시에서는 꾸준히 읽혀왔다.4) 함께 살필 첫 시 「백일홍이 싸우듯이」에서도 송재학 특유의 ‘엉겨붙는 언어’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죽은 고양이의 눈을 지나쳐서 썩은 나무를 뽑다가 뿌리에 엉켜 붙은 벌레를 만졌다 솜깍지벌레라는데 꼬물거리는 것들의 맹렬한 잡식성이 으스스하다 무수한 잔뿌리 탓에 벌레와 엉키는 뿌리는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무슨 냄새인지 솜털인지 구별이 안 되는 벌레와 다투는 것이 벌레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벌레와 벌레, 손가락과 발가락에 번지는 류머티즘 때문에 서로 삼키고픈 다족류가 많아진다 벌레의 반대말은 뿌리거나 다시 벌레, 나무는 목백일홍, 백 일은 꽃으로 살아간다는 명칭,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뿌리는 자신을 벌레라고 고백하였다 - 「백일홍이 싸우듯이」 전문 썩은 나무를 정리하다가 솜깍지벌레를 발견한 화자는 나무의 잔뿌리와 벌레가 서로 엉기는 모습을 보며 벌레로 인해 들썩이는 잔뿌리가 벌레의 모습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뿌리는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거기서 그 자신의 존재를 또한 본다는 것이다(“벌레와 다투는 것이 벌레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 류머티즘 때문에 서로 삼키고픈 다족류가 많아진다”). 화자의 이러한 고백은 그를 그것들과 함께 엉기도록 만들고, 시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그로 하여금 썩은 나무의 자기진술을 받아내도록 한다(“뿌리는 자신을 벌레라고 고백하였다”). 길지 않은 산문시 형태로 쓰인 이 시에서는 문장의 형식 또한 얼마간 그 ‘엉김의 시학’을 충실히 지탱하고 있는데, 가령 “벌레의 반대말은 뿌리거나 다시 벌레, 나무는 목백일홍, 백 일은 꽃으로 살아간다는 명칭,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뿌리는 자신을 벌레라고 고백하였다”와 같은 부분에서는 문장과 문장이 명확한 단위 구분 없이 서로를 물고 늘어지고, “무슨 냄새인지 솜털인지 구별이 안 되는 벌레와” 같은 표현은 후각적 요소(냄새) 옆에 시각적 요소(솜털)를 나란히 가져다 둠으로 독특한 공감각적 심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처럼 모호함으로 비로소 명확해지는 삶의 무수한 장면들이 이 시에는 나타나고 있다. 탁자 위의 물 한 잔, 생각 같은 먹물 한 방울이 컵에 떨어진다 먹물은 머뭇거리다 고양이눈성운의 비밀처럼 슬며시 물에 스민다 원래 물이었던 것처럼, 물 수(水)의 내장이 섬세하게 보이도록 물의 핏줄은 가지런하다 흐트러진 물의 모서리마다 반드시 검은색이 있다 물이 물에게 보내는 기척이기에 다시 먹물 한 방울이 물 위에 톡, 떨어진다 단순한 브라운운동이지만 몇 방울의 먹물이 유리컵의 선을 툭, 건드린다 물에게도 부지런한 지층이 있다는 짐작 너머 시선이 저절로 갔다 햇빛이 통과하는 맑은 물 한 잔 - 「물 한 잔」 전문 엉김의 시학이 드러나는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물 한 잔」은 물잔에 먹물 방울이 떨어져 흩어지는 광경을 가까이서 살피는 화자의 시선이 만든 시다. 물에 떨어진 먹물은 “원래 물이었던 것처럼” 스며들기 시작하고, 화자는 그 광경 앞에서 “물 수(水)의 내장이 섬세하게 보이도록 물의 핏줄은 가지런하다”라고 쓴다. 먹물의 검은색이 물속으로 흘러내리면서 만들어지는 각양의 선들을 ‘물의 핏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때 水라는 상형문자는 물의 내장, 그러니까 물이 먹물을 삼켰을 때 먹물이 타고 내려가는 물의 소화기관이자 그것이 흐르는 핏줄을 형상화한 문자로써 다시 읽힌다. 물에 관한 놀랍도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통찰이다. 그럼 물에 스미는 먹물에 관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화자에 의하면 먹물은 “물이 물에게 보내는 기척”이다. 앞선 시의 경우처럼 이 시에서도 모든 문장이 명확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맑은 물에 먹물 방울이 떨어지는 장면, 물에 삼켜진 먹물이 조영제처럼 물의 신체 구조를 드러내 보이는 모습, 이윽고 먹물의 검은색이 구석구석 쌓여가는 광경(“흐트러진 물의 모서리마다 반드시 검은색이 있다”)은 마찬가지로 엉김의 어떤 가능태에 대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그것은 아마도 삶 속의 죽음, 빛 속의 어둠과 같이 상반된 것들이 서로 엉기는 모양을 지켜보는 태도의 윤리, 요컨대 “물에게도 부지런한 지층이 있다는 짐작”을 해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이번 시집에서는 유독 우주와 천체에 관한 시어들이 자주 눈에 띈다.5) 공중의 색깔을 관찰하던 시인의 마음[“공중에서 묻혀 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송재학, 「공중」, 『검은색』, 문학과지성사, 2015)]이 이제 하늘 너머 우주로 뻗어나가는 중인 걸까? 「달에 닿기 위하여」라는 시편 역시 그중 하나이다. 달에 닿으려는 수많은 발걸음 밀물과 함께 달빛은 어디에나 스며들지만 달빛과 함께 알아가는 달의 표면 달까지의 계단이기에 달빛이 일렁이지 왠지 모를 슬픔의 입구처럼 날이 저물고 직렬로 켜지는 가로등은 달과 연결되는 잔별의 모습 지상의 모든 악기는 달에 남겨졌던 슬픔 - 「달에 닿기 위하여」 전문 화자의 시선이 “밀물과 함께” “어디에나 스며”드는 달빛을 향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의 공간적 배경이 우선 밤의 해변으로 추정되는 이 시에서, 화자는 “달에 닿으려는/수많은 발걸음”이 있었지만 정작 달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왠지 모를 슬픔의 입구” 같은 달빛을 통해서라고 말한다(“달빛과 함께 알아가는/달의 표면”). 재밌는 점은 우주에 관한 이러한 관심도 송재학의 시에서는 관념적인 상상 공간으로 휘발되지 않고 끝까지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밀물에 비친 달빛은 “달까지의 계단”을 닮았고, 이러한 늘어선 빛의 이미지는 6연에 이르러 가로등의 그것과 포개어진다(“직렬로 켜지는 가로등은/달과 연결되는/잔별의 모습”). 그렇게 도착하는 시의 마지막에서야 화자는 우리가 “달에 닿기 위하여” 시도했던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사실 지상의 음악이 출발한 곳이 바로 저 위였음을 밝힌다(“지상의 모든 악기는/달에 남겨졌던 슬픔”).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여기 놓인 이 슬픔을 주해하는 일인바, 결국 송재학의 우주는 까마득한 하늘 위가 아닌 우리 각자의 내밀한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된다.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송재학의 우주가 결국 우리 내면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조금 더 자세히 헤집어 보기 위해 다시 시집의 앞쪽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 힌트가 이미 거기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목성을 바라보게 되었다 목성의 세 고리와 함께 거닐기도 한다 나는 지금 가니메데 위성의 얼음에 앉아 있다 내 사념 한 조각이 탄식도 그림자도 없이 거대 행성의 가스층까지 들락거린다 가니메데의 희박한 대기는 내 생각을 덥석 삼켰다 번개를 동반한 거대 폭풍이 소용돌이치는 목성의 대적반은 나와 시선을 나누는 하나의 눈동자이다 낮으면 뜨거워지고 밤이면 차가워지는 내 하루는 별빛의 팽창 속도를 따라간다 지구에서 나는 소멸되고 정신의 복사열만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생을 반복하고 있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보냈는가는 나를 지구로 보냈던 약속과 다를 바 없다 광활하다는 우주의 넓이와 깊이는 늘 익숙하고도 으스스하다 생은 시공을 다시 삼키면서 반복하는 것이다 내 교우록은 가니메데의 오로라와 얼음 그리고 어두운 부분이다 얼음의 흰색과 회색은 먼지 덩어리, 내 생각도 먼지처럼 흩어지고 뭉쳐진다 중얼거리다 얼어붙은 얼음은 모든 온도를 품기에 무겁다 어두운 부분도 마찬가지, 밝은 부분의 반대쪽이 아니면서도, 원래 어둠에서 태어났기 보이지 않는 암흑을 발명하고픈 크레이터이다 혼자서 입김을 내뿜고 행성의 궤도와 평행해진다는 것은 어떤 생인가 지구에서 난 식구라는 개념을 간직했다 윤리와 욕망도 당연했다 여기서 내 존재는 우주의 일부, 스타더스트라는 순서를 따라간다 별과 별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지지만, 푸른 별과 붉은 별의 일생을 지켜보는 일과를 포함해서이다 가끔 목성 너머 푸른 점과 마주칠 때, 희로애락은 별의 위치에서 쓸모없고 생로병사 역시 먼지라는 물질이지만, 지구에서 가져온 사소한 감정은 단 하나, 저 별에 대한 희미한 애착이다 무시무시한 중력으로 지구를 보호해왔던 목성은 거대한 규칙을 실천한다 오늘 가니메데의 공전이 휜 덕분에 목성에 가장 근접했다 분홍빛 자전 소리가 이끌고 가는 목성의 하루는 아홉 시간 오십오 분이다 - 「가니메데라는 궤도」 전문 “언제부터인가 목성을 바라보게 되었다”라는 일인칭 고백으로 시작하는 위의 시 속 화자는 지구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목성의 위성 가니메데에서 지내고 있다(“지구에서 나는 소멸되고 정신의 복사열만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생을 반복하고 있다”). “윤리와 욕망” 같은 것을 간직했던 지구에서의 삶과 달리 화자는 이곳에서 “우주의 일부, 스타더스트라는 순서를 따라”가는 중이다. 언뜻 환상성과 관념적 상상력에만 기대어 쓰인 시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뜯어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시의 화자는 기존의 세계와 절대적 거리를 둠으로써 내면으로 철저히 침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들은 전부 지구를 벗어난 일들이다(“내 교우록은 가니메데의 오로라와 얼음 그리고 어두운 부분이다”). 이때 가니메데라는 행성과 그것이 놓인 우주는 화자가 침잠해 들어가는 내면세계가 가진 무한성의 한 은유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화자에게 내면세계는 영원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인 모양이다(“광활하다는 우주의 넓이와 깊이는 늘 익숙하고도 으스스하다”). 이제 화자를 움직이는 것은 지상의 비루한 일상이 아니라(“희로애락은 별의 위치에서 쓸모없고 생로병사 역시 먼지라는 물질이지만”), 우주적 스케일의 초월적 삶에 대한 의지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내면세계의 비일상성으로 깊숙이 들어간 화자가 다시 지구의 일상성과 만날 가능성이 역설적으로 고개를 든다. 화자가 지구에 대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애착이 시의 후반부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가져온 사소한 감정은 단 하나, 저 별에 대한 희미한 애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희미한 애착이 내면세계를 향한 화자의 침잠을 보장해 주고 있으며, 그를 살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구에서 가니메데로, 다시 지구로 이어지는 화자의 세계는 또 한 번 공전하기 시작한다. 송재학의 우주가 운영되는 방식이다. 1) 신형철, 「해설 – 검은 2인칭의 시」, 『검은색』(송재학, 문학과지성사, 2015), 88쪽. 2) 관련하여 이희우는 송재학의 시가 가진 음악성을 ‘바로크적 세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희우, 「해설 – 나와 세계의 바로크적 선율」, 『습이거나 스페인』, 문학과지성사, 2025, 95쪽. 3) 신용목, 「아침을 담는 항아리는 천 개의 색을 모으는 중이다 – 시인 송재학 선생과의 만남」, 『대산문화』, 2025년 여름호, 24쪽. 4) “‘명료한 애매함’, 우리는 이를 ‘섬세함’이라 부르는데, 실로 송재학의 시는 그런 섬세함의 교과서와도 같다.”(권혁웅, 「죽음과 형식」, 『내간체를 얻다』, 문학동네, 2011, 78쪽) 5) 목성과 지구와 우주(「가니메데라는 궤도」, 「눈을 바라보는 눈 1」, 「푸른 별」), 성운과 별과 별자리(「말머리성운」, 「물 한 잔」, 「스타더스트」), 달의 분화구와 낮달(「잎새의 물갈퀴」, 「리스본 가이드」, 「이중국적」), 자전(「자전」) 등의 시어들이 시집 전반에 고루 흩어져 있다.

월간 현대시 이원기 송재학엉겨붙음엉김스며듦우주시학 2025
이원기 시선의 연금술로 열리는 사랑의 미래 ―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현대문학, 2025)

1. 시선의 연금술: 사랑의 집요한 쓰기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소설 『풀베개』(송태욱 역, 현암사, 2015)에서 양갱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모든 과자 중에서 양갱을 가장 좋아한다. 별로 먹고 싶지는 않지만 그 표면이 매끈하고 치밀한 데다 반투명하게 빛을 받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특히 파란 빛을 띠게 이겨서 훌륭하게 다듬은 것은 옥과 납석의 잡종 같아 아무리 봐도 기분이 상쾌하다.”(66쪽) 소설의 화자가 문화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속에서 일본의 양갱을 서양의 과자들과 대조하며 그 빼어남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읽다 보면 독자에게까지 푸른 양갱의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는 작가의 글에는 독자를 그 사랑에 동참시키는 힘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만하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강보원의 산문집 『에세이의 준비』(민음사, 2024)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싫음을 매우 성공적으로 표현한 탓에 그 자신의 싫음이 가장 진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128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소세키의 경우와 달리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쓰기가 갖는 힘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작가의 일이란 결국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쓰기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임과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쓰기를 지속하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세 번째 시집을 펴낸 김연덕의 작업 역시 그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집요한 쓰기의 연속이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요컨대 ‘자기만의 작은 공간’과 그 확보에 대한 것으로서 지속되어 왔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작은 공간은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민음사, 2021)와 두 번째 시집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줄곧 탐색되었다. 그 작은 공간은 대부분 유리나 구슬, 얼음처럼 “표면에 맺힌 상이 제각각/다르게 반사되”(「재와 사랑의 미래」, 『재와 사랑의 미래』)는 투명한 물체의 모양을 띠고 있거나, 오래된 주택의 거실(「폭포 열기 열기」, 『폭포 열기』)이나 부엌(「유리빛」, 『재와 사랑의 미래』), 혹은 책상과 의자, 소파(「잘못들」, 『폭포 열기』)처럼 집의 공간과 그것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김연덕의 화자들이 주목하는 이러한 공간은 모두 작고 투명해 언뜻 연약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작음으로 인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성질을 공유한다. 이에 더해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화자들에 의해 이것이 일상의 영역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디서든 자신이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해 내는 시선, 곧 무엇이든 귀중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른바 ‘시선의 연금술’이라 할 만한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 이르러 이 시선의 연금술사들은 그 탐색의 영역을 과거의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제목이 지시하고 있듯 이번 시집의 화자들은 집, 특별히 화자가 전에 살았던 옛집과 그에 관한 기억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사랑의 대상을 발견해 내기 위해 옛집의 구석구석을 차분히 살피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집을 나설 때 혹 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다시금 살펴보는 누군가의 미지근한 눈길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집이라는 공간은 그런 화자들의 눈길 아래 자본화할 만한 대상을 긁어모으는 착취의 현장이기보다 애정의 온기가 훑어나가는 보살핌의 자리, 사랑의 경작지가 된다. 2. 오래된 이야기들의 집 『재와 사랑의 미래』가 얼마간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서는 과거라는 시제가 전면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 다 식은 검은 재를 마신 채 그때의 여름 마당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같은 구절은 “재”라는 첫 시집의 시어를 직접적으로 경유하며 이를 통해 과거의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실 과거에 대한 이 시집의 관심은 첫 시에서부터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시집의 대문이라 해도 좋을 「소품 가정집」은 거기에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째서 과거의 공간으로 나아가는지, 그것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종이를 열어 나의 오래된 집으로 아직 죽지 않은 먼지 나는 이야기들이 방마다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 「소품 가정집」 부분 화자가 “걸어 들어”가는 “오래된 집”은 그곳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공간, 구석구석에 시가 되지 못한 이야기의 잔여물들이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공간이다. “종이”나 “파본”과 같은 시어들이 책의 이미지를 환유적으로 견인하며 이 시를 시적 기원에 관한 것으로 읽힐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 배경이 되는 “오래된 집”은 그 자체로 시인의 시적 작업이 태동된 곳으로서의 근원적 공간으로 이해되기에 적절해 보인다. 이때 시인은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이 “오래된 집”으로 들어가 그 사랑의 탐색을 지속해야 할 일종의 정당성 내지 필연성을 역설하는데, 그 방법은 시적 기원과 비교적 무관했던 기존의 작업들에 대해 거리를 두며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단절감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 재채기는 나지 않는 옷이었던 거야. 하자 없는 이야기는 내가 그랬듯 언제든 나를 버릴텐데. - 「소품 가정집」 부분 아무래도 화자는, 적어도 이 시집에서만큼은 “하자 없는” 말끔한 이야기보다 책이 되지 못한 채 파본으로 남은 어딘지 미진한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 모양이다[“나는 새 코트보다 이것이 좋다.”(같은 시)]. 그것들은 “유통되기에는 컨디션과 완성도가 부족했”지만 “파본 한 권 한 권마다의//야성”(같은 시)이 매혹적으로 꿈틀거리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야성”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이름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된 그들마다의 계단을 떠올리며”(「sparkle」)]. 이번 시집에 유독 옛집에서 화자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엄마와 아빠, 오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의 존재는 여러 시편들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며, 시집 전체의 흐름 속에 형상화되는 화자의 유년기 기억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오래된 집에 대한 이야기, 혹은 오래된 이야기로 구축된 집[“비현실적인 주택의 언어”(「my mushrooms」)]에서 과거에 함께 살던 존재들과 만남으로써 화자들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 나간다. 보다 정확히는, 옛집이 바로 그러한 공간으로 재의미화되는 것이다. 가령 「구슬과 번개」에서는 집이라는 공간이 “거실에 놓인 자라 박제”의 “눈에 박힌 싸구려 구슬”로 축소되어 나타나며 이후 “구슬은 가족들의 피부나 얇은 거실의 창” 같다는 화자의 서술이 이어지고,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예민하고 투명한 껍질로 이뤄진 사랑인/앵두를 따러 갈 때마다 어린 나는 가족들과 함께/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곤 했다”는 「앵두 따기」 속 화자의 진술 역시 가족들과의 기억이라는 맥락 위에서 투명한 구슬 모티프를 다시금 변주한다. 이처럼 화자들이 저마다 작은 공간들을 확보해 갈 때, 김연덕의 시는 정확히 그 공간들의 크기만큼 넓이와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된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또박또박 수집하며, 김연덕의 화자들은 그렇게 사랑의 경작지를 넓혀간다. 3. 커튼 치기 흥미로운 점은 시 속에 묘사되는 옛집의 공간들이 많은 경우 어둠과 빛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일찍부터 시선의 연금술을 체화함으로 “오랜 내구성”(「구슬과 번개」)을 갖추어 둔 김연덕의 화자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집의 제목에 명시되어 있는 “오래된 어둠”이야말로 이번 시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이 사랑의 탐색전을 벌이는 주 무대가 된다. 요컨대 어둠까지도 사랑을 경작할 수 있는 영토로 기어이 흡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시집에서 과거나 어둠이라는 단어가 현재나 미래, 빛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커튼이라는 소재는 어둠과 빛이 맺는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화자들이 여러 편의 시 속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는 이 다중 우주적 옛집에서, 커튼은 주로 할머니의 방에 둘러쳐져 있다[“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브로치」), “할머니는 모직 커튼이 쳐진 낮의 방에 앉아서도”(「낮의 옥상」)]. 그리고 그것은 종종 옛집의 가부장적 분위기를 고발하며 김연덕의 시들이 내장하고 있는 여성주의적 면모를 내비치기도 한다[“평소 모직의 두꺼운 커튼이 사방으로 쳐져 있던/대부분 비어 있던 그들의 어두운 거실에서 언니의 바이올린 선율은”(「낮의 성벽」), “누군가의 부모/아내/친구도 상사도 아닌/딸로 이어진 자만 가볼 수 있는 곳이 있다.”(「새가 되어」)]. 하지만 기본적으로 커튼이란 빛의 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공간의 따뜻함은 커튼을 통해 미세하게 조정된다. 빛을 차단해 어둠을 만들어 내는 이 도구는 반대로 공간에 빛을 초대함으로 어둠을 차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에서 커튼은 기억의 주체인 화자들에게 옛집의 각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의 조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주어진다. 화자들은 옛집의 곳곳에 커튼을 칠 수도 걷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해당 기억을 어둡게도 밝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안방의 커튼이 화자의 기억에 따라 쳐져 있을 때도(「브로치」), 반대로 걷혀 있을 때도[“나는 빛이 나른하게 쏟아지는 할머니의 안방 안에 들어와 소반 위의 호떡을 먹는다.”(「낮의 크레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의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커튼이라는 소재를 통해 어둠과 빛의 이분화가 만들어 내는 평면성에서 끝내 해방되어 그 자체로 어느 한 가지 성질로만 표현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맥락 위에 “한 평 남짓한 크기 그 안의/어둠”을 보며 그것이 “꼭 고해성사실 같았다”(「철사 천사」)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언니를 떠올릴 때면 그 장면이 “항상/해와 그림자가 기쁨과 후회가 같은 빈도로 길어지던 여름 한가운데서 시작된다”(「sparkle」)는 화자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공간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가치 초월적 발화의 구체적인 예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커튼은 어둠을 옹호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할머니가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고 그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브로치」의 커튼이 쳐진 안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 그릇”과 브로치들이었고,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는 서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는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커튼이 만들어 내는 어둡거나 밝은, 혹은 ‘어둡고도 밝은’ 공간에서 이제 화자는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나는 그런 슬픔과 즐거움, 어둠의 시간을 좋아한다”(「천국의 개들」)고. 한편 커튼은 물리적 차원뿐 아니라 개념적 층위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어둠과 빛에 대해 그러했듯 부정적 표현과 긍정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언어의 새로운 연금술을 시도하는, 이른바 ‘커튼을 치는’ 식의 발화가 화자들의 서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슬픔”(「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숨 막히게 행복하고 억눌린 느낌으로”(「비좁은 불」), “마당에서 가장 아끼고 무서워하던 꽃”(「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재라는 기쁜 슬픔”, “따뜻하고 슬픈 빛”(「새가 되어」), “얼룩덜룩한 의기양양함으로/눈부신/자신 없음으로”(「낮의 크레페」) 같은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커튼을 쳐서 어둠과 빛을 섞고 그 농도를 흩트리듯, 이 시집의 곳곳에서 화자들이 수행하는 시적 발화들은 언어의 부정성과 긍정성의 구분을 지운다. 이들에게 좋고 싫음의 문제는 밝음과 어두움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이나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이다. 4. 현관을 나서기 전에: 과거에서 길어 올리는 사랑의 미래 옛집과 거기 방치돼 있던, 시적 기원이 되는 오래된 기억들을 부지런히 톺으면서 화자들은 이제 더 넓은 사랑의 경작지,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미래의 자리로 나아간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해 되짚으며 화자들은 과거의 미래, 곧 현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주로 결과론적 반추의 형태로 나타난다[“나는/내 사랑이 한 번에 행복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사랑에서 오는 즐거움을 내가/많이 낭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앵두 따기」), “진동하는 기쁨과 수치라는 과일나무들 사이를 지나게 될 내가 앞으로 어떤 과일들을 먹게 될지 (…) 미리 알고 있었지만”(「vague frame」)]. 특히 「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에서 이러한 발화들은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주로 여성주의적인 형태를 띤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어린 내가 본다 어느 쪽을 응원할지 그래서 미래에 어느/유형의 여자로 클지”, “송출된 화면 속 관중은/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수치만큼//다정한 허무만큼 많았어”, “내가 원 안에서 쏠리고 넘어지는 여자 어른으로 클 줄은”(「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 이때 해당 시의 중심에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이 시집의 여러 시편들에서 할아버지가 가부장적 위계를 집안에 흘려보내는 이로 그려지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이 시는 그가 옛집에서 화자를 포함한 집안의 여자들에게 줬던 불편함에 대해 화자가 뭔가를 말하길 시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시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어둠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는바, 그것은 더 많은 사랑이 가능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김연덕의 화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음을, 다시 말해 이들이 옛집이라는 어둠-빛의 공간에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시편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브로치」를 읽어볼 수 있다. 해외에 다녀오면서 할머니에게 브로치들을 사준 이는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였다. 그는 따뜻한 사랑의 말들을 “할머니에게 해준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화자는 그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무심한/사랑”을 발견해 내며 그를 이해하길 시도한다(“할아버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애석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브로치들은 화자의 엄마와 작은 엄마들에게 나누어지고, “중요한 것들 몇 개는 나의 오래된 거울 속에” 들어와 화자를 구성하며 그를 자신만의 이야기, 시적 기원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한다(“잠에서 가끔 깨어나는 이야기는//나를 종종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둠 속에서 귀한 것을 찾아내는 김연덕 화자들의 연금술이 또 한번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어둠을 대면해 이해를 시도하고 끝내 그것과 화해할 가능성을 찾아내는 화자들은 「낮의 서재」와 「tiny hole」을 비롯한 이후의 몇 시편들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5살 무렵 깊은 우물에 빠졌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덮개 위로 올라가 어린 할아버지의 가장 약한 부분 옆에 누워 있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tiny hole」 속 화자의 모습은 그가 과거의 어둠과 화해하는 장면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우물 속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던 할아버지를 나의 햇볕 아래 누인다”). 시적 기원을 형성하는 과거의 이야기들로 구축된 오래된 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은 이렇게 사랑할 만한 것들을 끈질기게 길어 올린다. 그 과정에서 파본으로만 굴러다니던 그곳의 이야기들은 커튼을 치는 행위가 가지는 정치적 수행성을 통해 이분화되어 있던 어둠/빛의 영역과 시적 언어의 한계를 이중으로 타파함으로써 이제껏 쓰이지 않았던 시의 여러 가능태로 새롭게 의미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김연덕의 화자들은 사랑의 미래로 뻗어나갈 일단의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마지막 시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은 옛집을 떠나는 화자가 그곳에 남기는 끝인사처럼 읽힌다. 그늘 속에서 편안하게 썩어나가던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가 쉴 수 있을 때, 마지막 사람이 난방을 끄고 나오며 뒤돌아보지 않을 때 괴로운 행복을 좀 늦게 알아채는 방으로 기어 들어가 자존심 강한 파본들을 주워다 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이제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입을 시간. -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부분 마지막 연의 “코트”는 물론 첫 시에 등장했던 코트의 변형일 것이고[(“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소품 가정집」)], 이 수미상관의 구조는 곧바로 이 시집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한 채의 집, 예컨대 ‘시로 세운 집’으로 인식되게 하며 독자에게 시인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갔다가 문을 닫고 나오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시인 김연덕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행하는 집요한, 그리고 구체적인 쓰기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나의 음악은 이 모든 사라짐을 집요하고 구체적인/사랑을 기록하는 것에 있었다”(「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1)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현대문학, 2025. 이후 인용하는 시들은 제목만 적으며, 모든 중략은 인용자.

계간 청색종이 이원기 김연덕시선연금술과거기억이야기사랑 2025
노태훈 픽션의 용기와 멀리 가는 퀴어 ― 김병운론

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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