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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현대비평 | 2024년 여름호(제19호)

현대소설론 보강(補講·補強) ― 안서현 작가론

이원기 문학평론

2023년 제22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시간의 틈을 넘는 목소리들 -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읽기」 등이 있다.

1. 나는 어떻게 비평을 쓰게 되었나
    몇 달 전 안서현 선생님께로부터 본인의 작가론을 써줄 수 있겠냐
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비평가론을 써보는 건 처음이다. 그게 더 
낫다…. 
    안서현론을 쓰기 위해 우선 내가 기억하는 안서현에 대해 떠올려
보기로 했다(편의상 호칭은 생략한다). 안서현을 처음 만난 건 어느 해 
가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한 강의실이었다. 1학년이었던 나는 언
젠가 소설가가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들뜬 채 들을 수 있는 모든 
강의를 열심히 듣던 학생이었고, 안서현은 <비평 읽기> 수업을 담
당하는 선생님이었다. 그 수업을 들으며 나는 1학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평가가 되기로 결심했더랬다. 분명 소설가가 되려 했는데…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걸까…. 
    학교에 다닐 때 문창과 동기, 선후배들과 종종 그런 이야기를 나
누곤 했다. 이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학생들로 하여금 계속 읽고 쓸 
수 있게 하는 건 결국 선배로서 현장에 몸담고 있는 선생님들의 따뜻
한 응원일 것이라는. 안서현은 나와 친구들에게 그런 선생님이었다. 
매 수업마다 읽을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오시는, 질문이라면 언제나 
환영하시는, 공모전에 낼 글이 있다면 얼마든지 봐주겠다고 하시는 
선생님. 언젠가 비평 이론을 공부하던 내가 막막함을 느끼고 연락했
을 때 안서현은 누군들 안 그렇겠냐며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다 보면 
그 영역이 확 열리는 순간이 올 거라고, 마치 지뢰찾기 게임처럼요, 
라고 말해주었다. 그런 말들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선생님으로서 안서현을 정말 좋아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
는 원체 멋진 말을 잘 하시는 선생님이었고, 그런 말들을 새겨듣고 기
억하는 일이 당시의 내겐 중요하고도 즐거웠다. 가령 이런 말들: 비평
가의 일이란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만드는 천문학자의 마음으로 문
학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비평의 기본적 
작업이 작품 속에서 모티프들을 수집하거나 작품들 간의 관계성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비평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이었을 
수 있지만, 거기서 내가 느꼈던 건 냉철한 분석적 태도의 서늘함보다 
한 명의 문학 독자가 가진 애정, 거기 담긴 온기에 더 가까웠던 것 같
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자. 당시 내가 느꼈던 비평이라는 분야의 매
력은 사실상 <비평 읽기> 수업의 매력과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강단에서뿐 아니라 동시대 문단의 현장에서도 문학을 
향한 안서현의 애정은 그가 지속해온 비평 작업들을 통해 꾸준히 드러
나 오지 않았나 싶다. 그간 안서현이 우리 문단의 시와 소설을 촘촘히 
따라 읽으며 써온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동시대 
문학 읽기의 새로운 궤적이 서서히, 그러나 선명히 그려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으로만 그릴 수 있는 긴 선을, 안서현의 작업을 통
해 우리는 보고 있다. 한 명의 성실한 독자로서 안서현이 우리에게 보
여주는 것은 문학을 향한 그의 열렬한 애정 그 자체와 다르지 않은 셈
이다. 강의실에서 안서현을 만난 적 없는 독자들에게도 그를 소개해
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을 이 글은, 그렇기에 안서현에 관한 이토록 개
인적인 기억에서 출발한다 해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가장 
개인적인 기억이 가장 보편적인 증언이 될 수 있으므로….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안서현의 수업은 <현대소설론>이었다. 
당시 아직 2학년이었던 나와 달리 안서현은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어
느덧 5년째로 접어들고 있었고, 이듬해 그는 다른 학교로 가게 되었
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도 나는 안서현으
로부터 더 들어야 할 수업이 남아 있다는 느낌을 마음 어딘가에서 반
복적으로 받고 있다. 내가 듣지 못한 안서현의 현대소설론 이야기는 
더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안서현의 현대소설론 보충수업, 그러니까 그 보강
(補講)을, 나는 여러 지면에 지속적으로 발표된 그의 소설론 작업을 통
해 접할 수 있었다. 안서현 자신이 ‘청자의 서사학’이라 명명한 소설
론 연작이 그것이다. 2022년 여름에 처음 발표되기 시작한 이 연작은 
소설 속 청자의 존재에 주목함으로 오늘날 우리 소설을 이해하는 관
점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문학론의 중요한 작업
이 된다. 지금의 한국 소설을 읽고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분석의 틀
이 이 작업을 통해 선명하게 기획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청자의 
서사학’ 연작은 우리 소설론에 대한 안서현의 보강(補强) 작업이라고
도 부를 만한 것이 된다. 이 글은 작가론이지만, 작가론이므로, 지금 
이 시기의 안서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의 소설론 연작을 구심점 삼
아 전개해 보기로 한다.1)

2. 보강1 - 비평가가 꿈꾸는 소설론
    좋은 비평은 이론을 만든다. 수입된 이론과 철학에 기대기보다 그 
자신이 새로운 이론과 철학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비평이 좋은 비평
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철학을 하는 비평’을 쓰라는 이야기는 안서
현이 어느 수업에서 해준 말이기도 하다. 안서현은 소설론에 관한 그
의 글 「소설론은 움직인다」를 “비평은 이론의 꿈을 꾼다”라는 문장으
로 시작하고 있는데, “자꾸만 기존의 이론을 넘어서”는 문학 텍스트들
에 대해 비평은 궁극적으로 “이론을 생성하거나 갱신해야 한다”(360
쪽)는 것이다. 이론과 그것을 만드는 비평에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널리 읽히는 소설론 책들을 검토하며 오늘날의 소설론이 새로이 
확장될 가능성을 찾고 있는 이 글에서 유달리 주목할 만한 점은, 안서
현이 “소설이라는 장치가 ‘한국어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365
쪽) 논의를 지속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글이 다
루는 주제가 ‘한국의 소설론’보다도 소설론 일반에 가까운 건 사실이
나, 안서현은 한국 소설을 예시로 드는 국내의 소설 이론서를 소개하
며 “한국 소설을 바탕으로 소설론을 쓰는 작업”(같은 쪽)이 계속되어야 
할 필요를 글의 곳곳에서 피력하고 있다. 글의 말미에 “한국 소설에 
바탕을 둔 소설론도 나올 수 있다”(368쪽)고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어
쩌면 앞선 그의 표현을 빌려 ‘안서현은 한국 소설론의 꿈을 꾸고 있다’
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 맥락에서 ‘청자의 서사학’ 연작은 한국 소설론이라는 꿈을 향
해 안서현이 내딛는 구체적인 첫걸음으로 읽힌다. 연작의 출발이 되
는 글 「청자의 서사학 - 20세기 여성을 ‘듣는’ 21세기 여성들」에서 안
서현은 세대를 뛰어넘는 여성의 연대라는 키워드와 함께 동시대 우
리 소설에서 발견되는 청자의 존재를 면밀히 살핀다. 글의 도입부에
서 안서현은 시대가 변하며 “1인칭이나 3인칭 서술의 한계를 극복”하
기 위한 다양한 서술적 시도들이 소설에 생겨남에 따라 서술자-화자
의 서사학 외에도 그 이야기를 ‘듣는’ 존재를 분석하는 새로운 이론, 
“새로운 서사학이 필요”(62쪽)하다고 역설한다. “이렇게 기존 서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제적 서술의 도입이 계속해서 시도되고, 그 
부분과 전체의 결합 양상이 다양해지면서 전체 서술의 설계가 복잡
해진다면, 이를 분석할 수 있는 청자의 서사학이 요청된다.”(같은 쪽)
창작이란 언제나 이론의 틀과 무관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분
야이므로, 이론 역시 창작의 발전 속도에 발맞춰 따라가는 것이 필연
적이며 차라리 자연스럽다는 설명이다. 
    안서현이 청자의 서사학을 도구 삼아 가장 처음 분석 대상으로 삼
고 있는 존재는 동시대 소설의 각자 다른 세대에 속하는 여성 청자들
이다. 『연년세세』(황정은, 창비, 2020), 『밝은 밤』(최은영, 문학동네, 2021), 
『시선으로부터,』(정세랑, 문학동네, 2020)를 차례로 다루는 이 글에서 안
서현은 세 작품의 여성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과 한
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대화를 나누거나, 글을 쓰고 그것을 읽는 일”(63쪽)임을 우
선 짚으며, 이들을 ‘여성-청자’로 호명하고 분석하는 일이 그러한 측
면에서 더욱 입체적인 작품 읽기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먼저 『연년세세』에서 안서현이 주목하는 것은 청자의 빈자리다. 
그는 「무명」 속 화자 이순일의 이야기가 청자를 명확히 상정하지 않
은 채로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에 집중한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이순일의 이 이야기에는 청자가 부재한다는 점, 즉 한
세진은 이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는 점이다.”(66쪽) 안서현은 텍스트상
의 표현과 그 세밀한 지점들을 근거 삼아 청자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침착하게 확인하면서, 뒤이어 그 원인을 작품 내부에서 찾아내고 있
다. “그녀가 말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삶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
기도 하다. (…) 위의 발화는, 시장통에서 잠깐 사이에 이순일의 마음 
속에서 흘러가는 독백일 뿐이다.”(같은 쪽, 중략은 인용자)
    그런가 하면 『밝은 밤』을 분석하면서 안서현은 “나의 시점을 거쳐 
할머니와 증조모의 이야기가 다시 서술”(69쪽)된다는 이 소설의 구조
에 주목해 ‘나’가 화자이기에 앞서 할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청
자라는 사실을 짚어낸다. 이러한 듣기와 말하기의 순환은 ‘나’를 “조
금씩 치유”한다. 받아들일 수 없던 이야기를 듣고 또 “그것을 받아들
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자신이 “회피하려 하던 것
을 마주”(69쪽)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읽기를 통해 최은영의 인
물은 단순히 청자-화자의 이중적 존재를 넘어 듣기-말하기를 통해 치
유의 상태로 접속하는 존재, 곧 ‘이야기를 통해 회복하는 인물’의 한 
전형으로서 의미화되기에 이른다. 청자의 자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
는 안서현의 독해는 그렇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서로 계속해서 말하고 또 들어야 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역설적인 이유가”(71쪽) 됨을 발견해내고 있다. 
    『시선으로부터,』에서 안서현이 읽는 것은 “자기 삶을 전혀 훼손하
지 않는 듣기”를 수행하는 청자들의 존재다. “청자의 삶이 우선이 되
는 것이다.”(73쪽) 이 청자들이 서술자의 통합적 지배력을 약화하며 
“연속성이 아니라 파편성으로 이어지는 ‘계보 없는 계보’의 이야기”(75
쪽)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이 소설의 독자들은 심시선의 이야기를 접
하는 청자 또는 독자로서의 인물과, 그 인물의 삶을 동시에 상상하게 
된다.”(72쪽) 안서현에 의하면, 이처럼 화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다시 말하고 쓰며, 그 이야기를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다음 세대 청자의 서사”(76쪽)는 꾸준히 요청되고 있다. 그에 대한 응
답으로서 안서현이 전개하는 청자 중심의 소설론은 이처럼 서술자 화자 중심의 근대적 소설 독법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그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3. 보강2 - 청자론적 독법과 그 가능태들
근대소설의 전통적 독법이 만들어내는 소설 읽기의 획일성이 안
서현의 작업에 의해 부정되거나 적어도 다른 가능성을 제시받는다고 
할 때, 그 핵심은 동시대 소설에 대한 청자 중심의 독법이 1인칭 화
자-서술자의 지배력을 약화하거나 붕괴시킨다는 데 있다. 첫 글에서 
한강의 소설을 예로 들며 그것이 “여러 인물 사이의 잦은 초점 이동을 
통해 서술자의 통합적인 지배력이 약한 서술 방식”(같은 글, 73쪽)을 구
사한다고 썼던 안서현은, 연작의 두 번째 글 「청자의 서사학 2 한강 
소설의 ‘듣는’ 인물들」에서도 마찬가지로 견고한 것으로 여겨져 온 1
인칭 화자-서술자 중심의 근대적 소설 읽기가 무너져내릴 수 있는 가
능성에 주목한다. 
    본격적으로 청자의 존재에 집중해 한강의 장편소설 세 편을 검토
하는 이 글에서 안서현이 보여주는 것은 그동안 꾸준히 다중화자를 
등장시켜 온 한강의 소설에 대한 청자론적 독법이라 할 만한 읽기 작
업이다. 『채식주의자』(창비, 2007)의 첫 작품 「채식주의자」에서 안서현
은 영혜의 발화가 “청자를 잃어버리고 산산이 흩어지고 있”(123쪽)음
을 포착한다. 작품 속에서 이탤릭체로 표기되는 영혜의 목소리는 언
뜻 보면 남편을 향해 이루어지는 발화 같지만, “꿈 이야기가 되풀이되
자 그는 더 이상 묻기를 그만두었다는 진술”(125쪽)에 의해 맥락상으
로 남편이 더 이상 그 청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안서현의 분석이다. 
나아가 안서현은 이를 이 작품의 주제인 ‘소외’를 더욱 심화시키는 서
술적 장치로 읽는다. 
    이때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1인칭 화자가 가진 지배력의 붕
괴다. “영혜의 말을 듣지 않는 화자와 그것을 ‘듣고(읽고)’ 있는 독자 사
이에는 점점 거리가 생겨”(같은 쪽)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독자
가 화자에게 친밀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면에서 소외
의 서술 구조를 실현”(126쪽)하고 있기도 하다. 안서현은 이렇게 한강
의 소설에서 소통을 둘러싼 인물들 간의 다층적 의지, 곧 대답하지 않
으려는 의지와 대답을 기다리는 의지 들이 한데 얽히면서 서사를 만
들어 나가고 있다며, “이러한 청취의 의지”를 “한강 소설의 중요한 서
사적 계기로 작동”(128쪽)하는 것으로 지목한다. 
    이어 『소년이 온다』(창비, 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2)
에서 안서현이 각각 읽어내는 것은 ‘청자를 필요로 하는 화자’와 ‘청
자로서 존재하는 화자’다. 『소년이 온다』가 “서로 화자와 청자로 얽혀 
있는” 인물들을 통해 “생사를 초월하는 내밀한 소통이라는 주제를 표
현”(131쪽)하고 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 생존 여부를 신뢰할 
수 없는”(134쪽) 1인칭 화자를 통해 “모호한 서술 상황과 청자를 표면
상으로 거부하는 서술 구조”(137쪽)를 만들어냄으로써 이 작품이 다루
고 있는 4.3 사건의 사회적 맥락을 함께 서사화한다는 것이다.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우선 금기로 덮어두었던 사건이기에 죽은 이들
의 말을 생사의 경계를 넘어 되살림으로써만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
다.”(같은 쪽)
    중요한 것은 이때 『작별하지 않는다』의 1인칭 화자 ‘나’가 청자로
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을 하나로 종합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이 보고 말한 것을 ‘듣는’ 청자로서의 화자가 등장한 것이다.”(138
쪽)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한강의 화자가 “기존의 화자가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세계에 대한 해석과 진술의 권리를 내려놓고, 
타자의 세계 경험과 이해에 귀 기울이고 응답”(138쪽)하고 있기 때문
이다. 안서현에 따르면 이는 “강력한 주체 중심성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소설의 전통을 배반”하는 것으로, 화자와 청자의 존재와 그 관계
를 고민하게 하는 “새로운 서사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같은 쪽)
    이처럼 소설론 연작의 두 번째 글을 통해 안서현은 최근의 소설들
에서 서사를 추동하는 동력으로서의 ‘듣기’와 그것을 수행하는 청자
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안서현은 “인물 간 화청 구조의 
섬세한 설계는 관계 중심 서사라는 최근 한국 소설의 경향을 대변한
다”며 “‘듣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140쪽) 이러한 이야기가 서구적 근
대소설의 전통을 상대화함으로써 “한국 소설에 나타나는 ‘청자의 서
사학’을 총체적으로 구명할 수 있을 것”(141쪽)을 함께 기대하고 있다. 
    새로운 서사학을 구획하는 안서현의 작업이 동시대 한국 소설
을 근거로 삼아 더욱 심화되는 양상은 세 번째 글 「청자의 솔리로퀴
(soliloquy), 화자의 마지막 테이프(last tape) - 청자의 서사학 3」에서 확인
된다. 이 글에서 안서현이 살피는 것은 김숨의 『듣기 시간』에 나타나
는 새로운 형태의 화자와 청자 들이다. 소설 속에서 서술상의 화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증언을 녹취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할머니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서술
상의 화자 겸 대화상의 청자는 그 공백을 자기의 서술과 인터뷰 질문
으로 채워 나간다.”(232쪽)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청자 간 두 차례의 
독특한 자리바꿈이 나타난다. 서술상의 화자가 대화상의 청자로 그
려지는 것이 그 첫 번째요, 텍스트를 채우는 것이 대화상 화자의 구술
이 아닌 대화상 청자의 독백이라는 것, 즉 대화에서 서술로 자리를 옮
기며 서술의 주체가 다시 청자에서 화자로 변하는 것이 두 번째다. 
    재밌는 점은 대화상의 화자가 침묵하는 장면을 설명하며 안서현
이 다시금 1인칭 서술자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모습을 읽어내고 있다
는 사실이다. “『듣기 시간』의 1인칭 화자는 서술 내용을 갖지 못하고 
있다. 대화상의 화자가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1인칭 화자의 주도권을 빼앗고 그를 무력하게 만든다.”(233쪽) 화자와 
청자의 자리바꿈과 그 역할 전도 현상을 작품 내부의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치가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작동하는 지점으로
까지 인식하는 이러한 안서현의 확장적 읽기는, 청자에 관한 이 논의
를 궁극적으로 소설론을 다시 쓰는 일과 연결하려는 비평-이론가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듣기 시간』에서는 이처럼 침묵하려는 화자의 의지와 들으려는 청
자의 의지가 맞부딪는다. 안서현은 이를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상에 
대한 일종의 소묘로 이해한다. “듣기는 타자에 대한 순진한 동화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꾸준한 침입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
이며 따라서 증언은 “화자의 말할 수 없음과 청자의 들을 수 없음 사
이를 뚫고 전해진 것”(236쪽)이라는 해석이다. 안서현에 의하면 김숨
이 이 소설에서 하려는 것은 “증언을 낯설게 만들고 독자가 증언 자체
에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같은 쪽) 해 소설에 대한 독자의 관습적인 
독해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그렇게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녹음기 속 자신의 침묵을 
재생”(239-240쪽)하는 할머니의 모습 위로 증언은 덧씌워지고, 이내 완
성된다. 이때 덧씌워지는 목소리가 할머니의 것인지 1인칭 화자가 듣
는 환청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중요한 건 이것이 화자와 청자의 “역
설적 의지들이 서로 만나 마침내 증언을 구성하는 장면”(240쪽)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안서현이 『듣기 시간』에서 읽는 것은 결국 “불확실
한 언어의 받아쓰기를 계속”(242쪽)하는 일의 필요성, 곧 윤리적 듣기
에 관한 문제이며, 이것은 다시 청자의 서사학에 관한 중요한 검토가 
된다. 

4. 기말시험 대체 과제 - 청자의 서사학이 남기는 질문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안서현은 그동안 소설론에서 주목되
지 않았던 청자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심화하고 확장하며 청자의 서
사학이라는 독특한 소설론의 영역을 탐구하고 있다. 그 이론을 발전
시키는 과정에서 동시대의 한국 소설들이 예시와 근거의 지반으로 
삼아졌음은 또한 특기할 만한데, 그 사실을 통해 청자의 서사학이 도
달하는 지점이 새로운 소설론의 자리를 넘어 한국 소설을 통해 설명
되는, 혹은 반대로 한국 소설을 설명하는 ‘한국의 소설론’의 자리이기
도 하기 때문이다. 소설론의 꿈을 꾸는 비평가로서 안서현은 지금 그
러한 이중의 과제 앞에 바쁘게 응답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함께 이야기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건 안서현이 
이러한 읽기 작업의 과정을 통해 한국 소설을 향한 자신의 애정을 가
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토록 멋진 이야기들을 제대로, 
잘 읽어주고 싶다는 그 마음이 안서현의 작업에서는 줄곧 발견된다. 
그가 작품을 더 잘 읽기 위한 도구로서 이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려 
한다는 것, 곧 새로운 소설을 위한 새로운 소설론을 지속적으로 상상
하려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안서현의 이 애정은 그의 작업이 개별 텍스트를 특정 이론에 우
악스럽게 끼워 맞추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또한 도드라진다. 예컨
대 안서현은 기본적으로 작품의 서술적 특징을 그 내용과 연결해 읽
어내려는 비평적 태도를 견지한다. 『연년세세』의 여성 화자 이순일의 
발화가 청자에게 들리지 않는─말해지지 못하는 장면을 그 인물이 
자신의 삶을 용서하지 못했다는 작품 속 내용을 근거 삼아 해석하거
나, 화자의 목소리를 듣는 청자가 부재한다는 한강 소설의 서술적 특
징을 작품의 주제인 소외와 연결해 이해하는 읽기가 비근한 예다. 
    모든 좋은 수업이 질문을 남기듯, 안서현의 현대소설론 수업도 이
제 우리에게 몇 가지 과제들을 내어주며 마무리된다. 일종의 기말시
험 대체 과제인 셈이다. 청자의 서사학 논의가 촉발하는 질문들은 가
령 이런 것이다; 동시대 한국 소설에서 남성 인물들은 어떤 청자 유형
으로 분류되는가, 그들이 서사의 구조와 진행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
인가, 또 다른 청자의 형태들엔 무엇이 있을까, 200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 소설에서는 청자의 존재가 징후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만
약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청자의 서사학은 문학론을 넘어 문학사
를 정리하는 도구로까지도 확대될 수 있을까, 시에서는 또 어떨까, 청
자의 시학은 가능할까. 
    질문의 목록은 끝없이 나열될 수 있다. 마치 학교 수업의 과제가 
거의 영원히 계속되듯…. 하지만 안심해도 좋다. 앞서 우리에게 과
제가 부여된다고 말할 때, ‘우리’라는 말에는 안서현도 포함되기 때문
이다. 한 명의 한국 소설 독자라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함께 공부하
는 선생님이자 동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부담감을 내려놓고 안
서현이 이끄는 조별 과제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기로 하자. 동
시대 한국 소설을 촘촘히 따라 읽는 그 걸음을 그는 기꺼이 함께 걸어
주겠다고 하는 것 같다. 오래전 공릉동에서 나와 친구들에게 그 손을 
내밀어주었던 것처럼…. 
    나는 아마 영영 그의 현대소설론 보강(補講)을 듣지 못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한국문학의 현대소설론은 안서현에 의해 지금도 계속 
보강(補强)되고 있다. 우리 문학과 소설 이론의 지평이 안서현의 비평
을 통해 앞으로 얼마나 더 멀리, 더 깊이, 더 넓게 뻗어나갈 수 있을지 
기대하는 일은 한국문학을 따라 읽으며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쁨
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의심스럽지 않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안서현의 글들은 다음과 같다. 「청자의 서사학 - 20세기 여성을 ‘듣는’ 21세기 여성들」, 《문학인》 2022 여름; 「청자의 서사학 2 한강 소설의 ‘듣는’ 인물들」, 《현대비평》 2022 가을; 「청자의 솔리로퀴(soliloquy), 화자의 마지막 테이프(last tape) - 청자의 서사학 3」, 《문학들》 2023 여름; 「소설론은 움직인다」, 《자음과 모음》 202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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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기 엉겨붙은 우주가 다시 여기로 돌아올 때 ― 송재학 시집 『습이거나 스페인』

그간 송재학의 시는 그것이 ‘긴장’과 ‘감각’이라는 두 키워드를 축으로 삼아 일상의 여러 구체적 이미지들을 경유해 독특한 서정시의 영역에 도달하고 있다는 맥락 위에서 읽혀왔다.1) 그리고 그것들이 음악, 죽음, 어둠, 색깔 등에 관한 밀도 높은 사유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송재학의 시를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고 흩뜨리는 제의적 작업의 공간 또는 그 풍경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다성악의 공연장에 놓이는 작업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역시 여러 차례 제출되었다.2) 한편으로 송재학의 시는 최근 어느 시인이 정리한 바와 같이 “하나의 전체성을 품고 다가”오기도 하는데3), 그 말인즉 그의 시가 (송재학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어의 차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생성되는 각자의 울림”(같은 글, 22쪽)에 조금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시에서 추상적인 감각 세계가 묘사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모호함이 관념의 차원으로 떠올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떠한 끈끈함을 만들어 내며 지상에 남아 우리와 함께 여전히 일상의 면면을 뒹군다는 말이다. 단어가 아닌 문장, 문장이 아닌 문단의 단위로 이미지와 의미가 서로 엉기는 시. 요컨대 그러한 ‘명료한 애매함’이 송재학의 시에서는 꾸준히 읽혀왔다.4) 함께 살필 첫 시 「백일홍이 싸우듯이」에서도 송재학 특유의 ‘엉겨붙는 언어’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죽은 고양이의 눈을 지나쳐서 썩은 나무를 뽑다가 뿌리에 엉켜 붙은 벌레를 만졌다 솜깍지벌레라는데 꼬물거리는 것들의 맹렬한 잡식성이 으스스하다 무수한 잔뿌리 탓에 벌레와 엉키는 뿌리는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무슨 냄새인지 솜털인지 구별이 안 되는 벌레와 다투는 것이 벌레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벌레와 벌레, 손가락과 발가락에 번지는 류머티즘 때문에 서로 삼키고픈 다족류가 많아진다 벌레의 반대말은 뿌리거나 다시 벌레, 나무는 목백일홍, 백 일은 꽃으로 살아간다는 명칭,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뿌리는 자신을 벌레라고 고백하였다 - 「백일홍이 싸우듯이」 전문 썩은 나무를 정리하다가 솜깍지벌레를 발견한 화자는 나무의 잔뿌리와 벌레가 서로 엉기는 모습을 보며 벌레로 인해 들썩이는 잔뿌리가 벌레의 모습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뿌리는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거기서 그 자신의 존재를 또한 본다는 것이다(“벌레와 다투는 것이 벌레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 류머티즘 때문에 서로 삼키고픈 다족류가 많아진다”). 화자의 이러한 고백은 그를 그것들과 함께 엉기도록 만들고, 시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그로 하여금 썩은 나무의 자기진술을 받아내도록 한다(“뿌리는 자신을 벌레라고 고백하였다”). 길지 않은 산문시 형태로 쓰인 이 시에서는 문장의 형식 또한 얼마간 그 ‘엉김의 시학’을 충실히 지탱하고 있는데, 가령 “벌레의 반대말은 뿌리거나 다시 벌레, 나무는 목백일홍, 백 일은 꽃으로 살아간다는 명칭,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뿌리는 자신을 벌레라고 고백하였다”와 같은 부분에서는 문장과 문장이 명확한 단위 구분 없이 서로를 물고 늘어지고, “무슨 냄새인지 솜털인지 구별이 안 되는 벌레와” 같은 표현은 후각적 요소(냄새) 옆에 시각적 요소(솜털)를 나란히 가져다 둠으로 독특한 공감각적 심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처럼 모호함으로 비로소 명확해지는 삶의 무수한 장면들이 이 시에는 나타나고 있다. 탁자 위의 물 한 잔, 생각 같은 먹물 한 방울이 컵에 떨어진다 먹물은 머뭇거리다 고양이눈성운의 비밀처럼 슬며시 물에 스민다 원래 물이었던 것처럼, 물 수(水)의 내장이 섬세하게 보이도록 물의 핏줄은 가지런하다 흐트러진 물의 모서리마다 반드시 검은색이 있다 물이 물에게 보내는 기척이기에 다시 먹물 한 방울이 물 위에 톡, 떨어진다 단순한 브라운운동이지만 몇 방울의 먹물이 유리컵의 선을 툭, 건드린다 물에게도 부지런한 지층이 있다는 짐작 너머 시선이 저절로 갔다 햇빛이 통과하는 맑은 물 한 잔 - 「물 한 잔」 전문 엉김의 시학이 드러나는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물 한 잔」은 물잔에 먹물 방울이 떨어져 흩어지는 광경을 가까이서 살피는 화자의 시선이 만든 시다. 물에 떨어진 먹물은 “원래 물이었던 것처럼” 스며들기 시작하고, 화자는 그 광경 앞에서 “물 수(水)의 내장이 섬세하게 보이도록 물의 핏줄은 가지런하다”라고 쓴다. 먹물의 검은색이 물속으로 흘러내리면서 만들어지는 각양의 선들을 ‘물의 핏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때 水라는 상형문자는 물의 내장, 그러니까 물이 먹물을 삼켰을 때 먹물이 타고 내려가는 물의 소화기관이자 그것이 흐르는 핏줄을 형상화한 문자로써 다시 읽힌다. 물에 관한 놀랍도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통찰이다. 그럼 물에 스미는 먹물에 관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화자에 의하면 먹물은 “물이 물에게 보내는 기척”이다. 앞선 시의 경우처럼 이 시에서도 모든 문장이 명확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맑은 물에 먹물 방울이 떨어지는 장면, 물에 삼켜진 먹물이 조영제처럼 물의 신체 구조를 드러내 보이는 모습, 이윽고 먹물의 검은색이 구석구석 쌓여가는 광경(“흐트러진 물의 모서리마다 반드시 검은색이 있다”)은 마찬가지로 엉김의 어떤 가능태에 대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그것은 아마도 삶 속의 죽음, 빛 속의 어둠과 같이 상반된 것들이 서로 엉기는 모양을 지켜보는 태도의 윤리, 요컨대 “물에게도 부지런한 지층이 있다는 짐작”을 해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이번 시집에서는 유독 우주와 천체에 관한 시어들이 자주 눈에 띈다.5) 공중의 색깔을 관찰하던 시인의 마음[“공중에서 묻혀 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송재학, 「공중」, 『검은색』, 문학과지성사, 2015)]이 이제 하늘 너머 우주로 뻗어나가는 중인 걸까? 「달에 닿기 위하여」라는 시편 역시 그중 하나이다. 달에 닿으려는 수많은 발걸음 밀물과 함께 달빛은 어디에나 스며들지만 달빛과 함께 알아가는 달의 표면 달까지의 계단이기에 달빛이 일렁이지 왠지 모를 슬픔의 입구처럼 날이 저물고 직렬로 켜지는 가로등은 달과 연결되는 잔별의 모습 지상의 모든 악기는 달에 남겨졌던 슬픔 - 「달에 닿기 위하여」 전문 화자의 시선이 “밀물과 함께” “어디에나 스며”드는 달빛을 향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의 공간적 배경이 우선 밤의 해변으로 추정되는 이 시에서, 화자는 “달에 닿으려는/수많은 발걸음”이 있었지만 정작 달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왠지 모를 슬픔의 입구” 같은 달빛을 통해서라고 말한다(“달빛과 함께 알아가는/달의 표면”). 재밌는 점은 우주에 관한 이러한 관심도 송재학의 시에서는 관념적인 상상 공간으로 휘발되지 않고 끝까지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밀물에 비친 달빛은 “달까지의 계단”을 닮았고, 이러한 늘어선 빛의 이미지는 6연에 이르러 가로등의 그것과 포개어진다(“직렬로 켜지는 가로등은/달과 연결되는/잔별의 모습”). 그렇게 도착하는 시의 마지막에서야 화자는 우리가 “달에 닿기 위하여” 시도했던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사실 지상의 음악이 출발한 곳이 바로 저 위였음을 밝힌다(“지상의 모든 악기는/달에 남겨졌던 슬픔”).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여기 놓인 이 슬픔을 주해하는 일인바, 결국 송재학의 우주는 까마득한 하늘 위가 아닌 우리 각자의 내밀한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된다.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송재학의 우주가 결국 우리 내면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조금 더 자세히 헤집어 보기 위해 다시 시집의 앞쪽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 힌트가 이미 거기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목성을 바라보게 되었다 목성의 세 고리와 함께 거닐기도 한다 나는 지금 가니메데 위성의 얼음에 앉아 있다 내 사념 한 조각이 탄식도 그림자도 없이 거대 행성의 가스층까지 들락거린다 가니메데의 희박한 대기는 내 생각을 덥석 삼켰다 번개를 동반한 거대 폭풍이 소용돌이치는 목성의 대적반은 나와 시선을 나누는 하나의 눈동자이다 낮으면 뜨거워지고 밤이면 차가워지는 내 하루는 별빛의 팽창 속도를 따라간다 지구에서 나는 소멸되고 정신의 복사열만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생을 반복하고 있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보냈는가는 나를 지구로 보냈던 약속과 다를 바 없다 광활하다는 우주의 넓이와 깊이는 늘 익숙하고도 으스스하다 생은 시공을 다시 삼키면서 반복하는 것이다 내 교우록은 가니메데의 오로라와 얼음 그리고 어두운 부분이다 얼음의 흰색과 회색은 먼지 덩어리, 내 생각도 먼지처럼 흩어지고 뭉쳐진다 중얼거리다 얼어붙은 얼음은 모든 온도를 품기에 무겁다 어두운 부분도 마찬가지, 밝은 부분의 반대쪽이 아니면서도, 원래 어둠에서 태어났기 보이지 않는 암흑을 발명하고픈 크레이터이다 혼자서 입김을 내뿜고 행성의 궤도와 평행해진다는 것은 어떤 생인가 지구에서 난 식구라는 개념을 간직했다 윤리와 욕망도 당연했다 여기서 내 존재는 우주의 일부, 스타더스트라는 순서를 따라간다 별과 별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지지만, 푸른 별과 붉은 별의 일생을 지켜보는 일과를 포함해서이다 가끔 목성 너머 푸른 점과 마주칠 때, 희로애락은 별의 위치에서 쓸모없고 생로병사 역시 먼지라는 물질이지만, 지구에서 가져온 사소한 감정은 단 하나, 저 별에 대한 희미한 애착이다 무시무시한 중력으로 지구를 보호해왔던 목성은 거대한 규칙을 실천한다 오늘 가니메데의 공전이 휜 덕분에 목성에 가장 근접했다 분홍빛 자전 소리가 이끌고 가는 목성의 하루는 아홉 시간 오십오 분이다 - 「가니메데라는 궤도」 전문 “언제부터인가 목성을 바라보게 되었다”라는 일인칭 고백으로 시작하는 위의 시 속 화자는 지구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목성의 위성 가니메데에서 지내고 있다(“지구에서 나는 소멸되고 정신의 복사열만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생을 반복하고 있다”). “윤리와 욕망” 같은 것을 간직했던 지구에서의 삶과 달리 화자는 이곳에서 “우주의 일부, 스타더스트라는 순서를 따라”가는 중이다. 언뜻 환상성과 관념적 상상력에만 기대어 쓰인 시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뜯어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시의 화자는 기존의 세계와 절대적 거리를 둠으로써 내면으로 철저히 침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들은 전부 지구를 벗어난 일들이다(“내 교우록은 가니메데의 오로라와 얼음 그리고 어두운 부분이다”). 이때 가니메데라는 행성과 그것이 놓인 우주는 화자가 침잠해 들어가는 내면세계가 가진 무한성의 한 은유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화자에게 내면세계는 영원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인 모양이다(“광활하다는 우주의 넓이와 깊이는 늘 익숙하고도 으스스하다”). 이제 화자를 움직이는 것은 지상의 비루한 일상이 아니라(“희로애락은 별의 위치에서 쓸모없고 생로병사 역시 먼지라는 물질이지만”), 우주적 스케일의 초월적 삶에 대한 의지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내면세계의 비일상성으로 깊숙이 들어간 화자가 다시 지구의 일상성과 만날 가능성이 역설적으로 고개를 든다. 화자가 지구에 대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애착이 시의 후반부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가져온 사소한 감정은 단 하나, 저 별에 대한 희미한 애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희미한 애착이 내면세계를 향한 화자의 침잠을 보장해 주고 있으며, 그를 살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구에서 가니메데로, 다시 지구로 이어지는 화자의 세계는 또 한 번 공전하기 시작한다. 송재학의 우주가 운영되는 방식이다. 1) 신형철, 「해설 – 검은 2인칭의 시」, 『검은색』(송재학, 문학과지성사, 2015), 88쪽. 2) 관련하여 이희우는 송재학의 시가 가진 음악성을 ‘바로크적 세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희우, 「해설 – 나와 세계의 바로크적 선율」, 『습이거나 스페인』, 문학과지성사, 2025, 95쪽. 3) 신용목, 「아침을 담는 항아리는 천 개의 색을 모으는 중이다 – 시인 송재학 선생과의 만남」, 『대산문화』, 2025년 여름호, 24쪽. 4) “‘명료한 애매함’, 우리는 이를 ‘섬세함’이라 부르는데, 실로 송재학의 시는 그런 섬세함의 교과서와도 같다.”(권혁웅, 「죽음과 형식」, 『내간체를 얻다』, 문학동네, 2011, 78쪽) 5) 목성과 지구와 우주(「가니메데라는 궤도」, 「눈을 바라보는 눈 1」, 「푸른 별」), 성운과 별과 별자리(「말머리성운」, 「물 한 잔」, 「스타더스트」), 달의 분화구와 낮달(「잎새의 물갈퀴」, 「리스본 가이드」, 「이중국적」), 자전(「자전」) 등의 시어들이 시집 전반에 고루 흩어져 있다.

월간 현대시 이원기 송재학엉겨붙음엉김스며듦우주시학 2025
이원기 시선의 연금술로 열리는 사랑의 미래 ―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현대문학, 2025)

1. 시선의 연금술: 사랑의 집요한 쓰기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소설 『풀베개』(송태욱 역, 현암사, 2015)에서 양갱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모든 과자 중에서 양갱을 가장 좋아한다. 별로 먹고 싶지는 않지만 그 표면이 매끈하고 치밀한 데다 반투명하게 빛을 받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특히 파란 빛을 띠게 이겨서 훌륭하게 다듬은 것은 옥과 납석의 잡종 같아 아무리 봐도 기분이 상쾌하다.”(66쪽) 소설의 화자가 문화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속에서 일본의 양갱을 서양의 과자들과 대조하며 그 빼어남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읽다 보면 독자에게까지 푸른 양갱의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는 작가의 글에는 독자를 그 사랑에 동참시키는 힘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만하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강보원의 산문집 『에세이의 준비』(민음사, 2024)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싫음을 매우 성공적으로 표현한 탓에 그 자신의 싫음이 가장 진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128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소세키의 경우와 달리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쓰기가 갖는 힘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작가의 일이란 결국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쓰기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임과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쓰기를 지속하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세 번째 시집을 펴낸 김연덕의 작업 역시 그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집요한 쓰기의 연속이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요컨대 ‘자기만의 작은 공간’과 그 확보에 대한 것으로서 지속되어 왔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작은 공간은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민음사, 2021)와 두 번째 시집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줄곧 탐색되었다. 그 작은 공간은 대부분 유리나 구슬, 얼음처럼 “표면에 맺힌 상이 제각각/다르게 반사되”(「재와 사랑의 미래」, 『재와 사랑의 미래』)는 투명한 물체의 모양을 띠고 있거나, 오래된 주택의 거실(「폭포 열기 열기」, 『폭포 열기』)이나 부엌(「유리빛」, 『재와 사랑의 미래』), 혹은 책상과 의자, 소파(「잘못들」, 『폭포 열기』)처럼 집의 공간과 그것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김연덕의 화자들이 주목하는 이러한 공간은 모두 작고 투명해 언뜻 연약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작음으로 인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성질을 공유한다. 이에 더해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화자들에 의해 이것이 일상의 영역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디서든 자신이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해 내는 시선, 곧 무엇이든 귀중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른바 ‘시선의 연금술’이라 할 만한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 이르러 이 시선의 연금술사들은 그 탐색의 영역을 과거의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제목이 지시하고 있듯 이번 시집의 화자들은 집, 특별히 화자가 전에 살았던 옛집과 그에 관한 기억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사랑의 대상을 발견해 내기 위해 옛집의 구석구석을 차분히 살피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집을 나설 때 혹 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다시금 살펴보는 누군가의 미지근한 눈길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집이라는 공간은 그런 화자들의 눈길 아래 자본화할 만한 대상을 긁어모으는 착취의 현장이기보다 애정의 온기가 훑어나가는 보살핌의 자리, 사랑의 경작지가 된다. 2. 오래된 이야기들의 집 『재와 사랑의 미래』가 얼마간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서는 과거라는 시제가 전면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 다 식은 검은 재를 마신 채 그때의 여름 마당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같은 구절은 “재”라는 첫 시집의 시어를 직접적으로 경유하며 이를 통해 과거의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실 과거에 대한 이 시집의 관심은 첫 시에서부터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시집의 대문이라 해도 좋을 「소품 가정집」은 거기에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째서 과거의 공간으로 나아가는지, 그것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종이를 열어 나의 오래된 집으로 아직 죽지 않은 먼지 나는 이야기들이 방마다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 「소품 가정집」 부분 화자가 “걸어 들어”가는 “오래된 집”은 그곳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공간, 구석구석에 시가 되지 못한 이야기의 잔여물들이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공간이다. “종이”나 “파본”과 같은 시어들이 책의 이미지를 환유적으로 견인하며 이 시를 시적 기원에 관한 것으로 읽힐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 배경이 되는 “오래된 집”은 그 자체로 시인의 시적 작업이 태동된 곳으로서의 근원적 공간으로 이해되기에 적절해 보인다. 이때 시인은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이 “오래된 집”으로 들어가 그 사랑의 탐색을 지속해야 할 일종의 정당성 내지 필연성을 역설하는데, 그 방법은 시적 기원과 비교적 무관했던 기존의 작업들에 대해 거리를 두며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단절감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 재채기는 나지 않는 옷이었던 거야. 하자 없는 이야기는 내가 그랬듯 언제든 나를 버릴텐데. - 「소품 가정집」 부분 아무래도 화자는, 적어도 이 시집에서만큼은 “하자 없는” 말끔한 이야기보다 책이 되지 못한 채 파본으로 남은 어딘지 미진한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 모양이다[“나는 새 코트보다 이것이 좋다.”(같은 시)]. 그것들은 “유통되기에는 컨디션과 완성도가 부족했”지만 “파본 한 권 한 권마다의//야성”(같은 시)이 매혹적으로 꿈틀거리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야성”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이름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된 그들마다의 계단을 떠올리며”(「sparkle」)]. 이번 시집에 유독 옛집에서 화자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엄마와 아빠, 오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의 존재는 여러 시편들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며, 시집 전체의 흐름 속에 형상화되는 화자의 유년기 기억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오래된 집에 대한 이야기, 혹은 오래된 이야기로 구축된 집[“비현실적인 주택의 언어”(「my mushrooms」)]에서 과거에 함께 살던 존재들과 만남으로써 화자들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 나간다. 보다 정확히는, 옛집이 바로 그러한 공간으로 재의미화되는 것이다. 가령 「구슬과 번개」에서는 집이라는 공간이 “거실에 놓인 자라 박제”의 “눈에 박힌 싸구려 구슬”로 축소되어 나타나며 이후 “구슬은 가족들의 피부나 얇은 거실의 창” 같다는 화자의 서술이 이어지고,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예민하고 투명한 껍질로 이뤄진 사랑인/앵두를 따러 갈 때마다 어린 나는 가족들과 함께/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곤 했다”는 「앵두 따기」 속 화자의 진술 역시 가족들과의 기억이라는 맥락 위에서 투명한 구슬 모티프를 다시금 변주한다. 이처럼 화자들이 저마다 작은 공간들을 확보해 갈 때, 김연덕의 시는 정확히 그 공간들의 크기만큼 넓이와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된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또박또박 수집하며, 김연덕의 화자들은 그렇게 사랑의 경작지를 넓혀간다. 3. 커튼 치기 흥미로운 점은 시 속에 묘사되는 옛집의 공간들이 많은 경우 어둠과 빛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일찍부터 시선의 연금술을 체화함으로 “오랜 내구성”(「구슬과 번개」)을 갖추어 둔 김연덕의 화자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집의 제목에 명시되어 있는 “오래된 어둠”이야말로 이번 시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이 사랑의 탐색전을 벌이는 주 무대가 된다. 요컨대 어둠까지도 사랑을 경작할 수 있는 영토로 기어이 흡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시집에서 과거나 어둠이라는 단어가 현재나 미래, 빛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커튼이라는 소재는 어둠과 빛이 맺는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화자들이 여러 편의 시 속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는 이 다중 우주적 옛집에서, 커튼은 주로 할머니의 방에 둘러쳐져 있다[“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브로치」), “할머니는 모직 커튼이 쳐진 낮의 방에 앉아서도”(「낮의 옥상」)]. 그리고 그것은 종종 옛집의 가부장적 분위기를 고발하며 김연덕의 시들이 내장하고 있는 여성주의적 면모를 내비치기도 한다[“평소 모직의 두꺼운 커튼이 사방으로 쳐져 있던/대부분 비어 있던 그들의 어두운 거실에서 언니의 바이올린 선율은”(「낮의 성벽」), “누군가의 부모/아내/친구도 상사도 아닌/딸로 이어진 자만 가볼 수 있는 곳이 있다.”(「새가 되어」)]. 하지만 기본적으로 커튼이란 빛의 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공간의 따뜻함은 커튼을 통해 미세하게 조정된다. 빛을 차단해 어둠을 만들어 내는 이 도구는 반대로 공간에 빛을 초대함으로 어둠을 차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에서 커튼은 기억의 주체인 화자들에게 옛집의 각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의 조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주어진다. 화자들은 옛집의 곳곳에 커튼을 칠 수도 걷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해당 기억을 어둡게도 밝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안방의 커튼이 화자의 기억에 따라 쳐져 있을 때도(「브로치」), 반대로 걷혀 있을 때도[“나는 빛이 나른하게 쏟아지는 할머니의 안방 안에 들어와 소반 위의 호떡을 먹는다.”(「낮의 크레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의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커튼이라는 소재를 통해 어둠과 빛의 이분화가 만들어 내는 평면성에서 끝내 해방되어 그 자체로 어느 한 가지 성질로만 표현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맥락 위에 “한 평 남짓한 크기 그 안의/어둠”을 보며 그것이 “꼭 고해성사실 같았다”(「철사 천사」)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언니를 떠올릴 때면 그 장면이 “항상/해와 그림자가 기쁨과 후회가 같은 빈도로 길어지던 여름 한가운데서 시작된다”(「sparkle」)는 화자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공간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가치 초월적 발화의 구체적인 예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커튼은 어둠을 옹호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할머니가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고 그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브로치」의 커튼이 쳐진 안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 그릇”과 브로치들이었고,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는 서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는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커튼이 만들어 내는 어둡거나 밝은, 혹은 ‘어둡고도 밝은’ 공간에서 이제 화자는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나는 그런 슬픔과 즐거움, 어둠의 시간을 좋아한다”(「천국의 개들」)고. 한편 커튼은 물리적 차원뿐 아니라 개념적 층위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어둠과 빛에 대해 그러했듯 부정적 표현과 긍정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언어의 새로운 연금술을 시도하는, 이른바 ‘커튼을 치는’ 식의 발화가 화자들의 서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슬픔”(「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숨 막히게 행복하고 억눌린 느낌으로”(「비좁은 불」), “마당에서 가장 아끼고 무서워하던 꽃”(「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재라는 기쁜 슬픔”, “따뜻하고 슬픈 빛”(「새가 되어」), “얼룩덜룩한 의기양양함으로/눈부신/자신 없음으로”(「낮의 크레페」) 같은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커튼을 쳐서 어둠과 빛을 섞고 그 농도를 흩트리듯, 이 시집의 곳곳에서 화자들이 수행하는 시적 발화들은 언어의 부정성과 긍정성의 구분을 지운다. 이들에게 좋고 싫음의 문제는 밝음과 어두움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이나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이다. 4. 현관을 나서기 전에: 과거에서 길어 올리는 사랑의 미래 옛집과 거기 방치돼 있던, 시적 기원이 되는 오래된 기억들을 부지런히 톺으면서 화자들은 이제 더 넓은 사랑의 경작지,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미래의 자리로 나아간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해 되짚으며 화자들은 과거의 미래, 곧 현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주로 결과론적 반추의 형태로 나타난다[“나는/내 사랑이 한 번에 행복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사랑에서 오는 즐거움을 내가/많이 낭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앵두 따기」), “진동하는 기쁨과 수치라는 과일나무들 사이를 지나게 될 내가 앞으로 어떤 과일들을 먹게 될지 (…) 미리 알고 있었지만”(「vague frame」)]. 특히 「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에서 이러한 발화들은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주로 여성주의적인 형태를 띤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어린 내가 본다 어느 쪽을 응원할지 그래서 미래에 어느/유형의 여자로 클지”, “송출된 화면 속 관중은/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수치만큼//다정한 허무만큼 많았어”, “내가 원 안에서 쏠리고 넘어지는 여자 어른으로 클 줄은”(「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 이때 해당 시의 중심에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이 시집의 여러 시편들에서 할아버지가 가부장적 위계를 집안에 흘려보내는 이로 그려지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이 시는 그가 옛집에서 화자를 포함한 집안의 여자들에게 줬던 불편함에 대해 화자가 뭔가를 말하길 시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시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어둠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는바, 그것은 더 많은 사랑이 가능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김연덕의 화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음을, 다시 말해 이들이 옛집이라는 어둠-빛의 공간에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시편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브로치」를 읽어볼 수 있다. 해외에 다녀오면서 할머니에게 브로치들을 사준 이는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였다. 그는 따뜻한 사랑의 말들을 “할머니에게 해준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화자는 그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무심한/사랑”을 발견해 내며 그를 이해하길 시도한다(“할아버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애석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브로치들은 화자의 엄마와 작은 엄마들에게 나누어지고, “중요한 것들 몇 개는 나의 오래된 거울 속에” 들어와 화자를 구성하며 그를 자신만의 이야기, 시적 기원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한다(“잠에서 가끔 깨어나는 이야기는//나를 종종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둠 속에서 귀한 것을 찾아내는 김연덕 화자들의 연금술이 또 한번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어둠을 대면해 이해를 시도하고 끝내 그것과 화해할 가능성을 찾아내는 화자들은 「낮의 서재」와 「tiny hole」을 비롯한 이후의 몇 시편들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5살 무렵 깊은 우물에 빠졌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덮개 위로 올라가 어린 할아버지의 가장 약한 부분 옆에 누워 있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tiny hole」 속 화자의 모습은 그가 과거의 어둠과 화해하는 장면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우물 속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던 할아버지를 나의 햇볕 아래 누인다”). 시적 기원을 형성하는 과거의 이야기들로 구축된 오래된 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은 이렇게 사랑할 만한 것들을 끈질기게 길어 올린다. 그 과정에서 파본으로만 굴러다니던 그곳의 이야기들은 커튼을 치는 행위가 가지는 정치적 수행성을 통해 이분화되어 있던 어둠/빛의 영역과 시적 언어의 한계를 이중으로 타파함으로써 이제껏 쓰이지 않았던 시의 여러 가능태로 새롭게 의미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김연덕의 화자들은 사랑의 미래로 뻗어나갈 일단의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마지막 시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은 옛집을 떠나는 화자가 그곳에 남기는 끝인사처럼 읽힌다. 그늘 속에서 편안하게 썩어나가던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가 쉴 수 있을 때, 마지막 사람이 난방을 끄고 나오며 뒤돌아보지 않을 때 괴로운 행복을 좀 늦게 알아채는 방으로 기어 들어가 자존심 강한 파본들을 주워다 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이제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입을 시간. -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부분 마지막 연의 “코트”는 물론 첫 시에 등장했던 코트의 변형일 것이고[(“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소품 가정집」)], 이 수미상관의 구조는 곧바로 이 시집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한 채의 집, 예컨대 ‘시로 세운 집’으로 인식되게 하며 독자에게 시인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갔다가 문을 닫고 나오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시인 김연덕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행하는 집요한, 그리고 구체적인 쓰기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나의 음악은 이 모든 사라짐을 집요하고 구체적인/사랑을 기록하는 것에 있었다”(「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1)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현대문학, 2025. 이후 인용하는 시들은 제목만 적으며, 모든 중략은 인용자.

계간 청색종이 이원기 김연덕시선연금술과거기억이야기사랑 2025
송현지 대화의 기술 — 이혜원, 『고백의 파동』 (파란, 2024)

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계간 현대비평 송현지 이혜원고백의파동대화경청지형학적비평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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