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와 문학 2024년 여름호 (모두모아 187호)
잘 산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시간 ― 이금이의 『허구의 삷』에 대하여
『허구의 삶』은 49세로 생애를 완성한 허구의 이야기이면서, 49세 어른 지상만이 자기 삶의 변곡점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허구와 지상만은 친구로 알고 지낸 30년과 만났으나 잊고 지낸 15년 정도 시간까지 더하면 생애 전반을 함께 해 온 사이였다. 비록 회복 불가한 병을 얻었으나 삶을 정리하고 장례까지 준비해놓은 것으로 보아 허구는 자기 생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렇게 막 생을 완성한 허구의 삶이 상만의 회상으로 재현되고 있다.
허구가 모든 여정을 마쳤기에 끝을 알고 시작하는 이야기다. 사건에 멈출 시간을 길게 주지 않는 대신, 허구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들을 하나씩 드러내는 것으로 소설적 재미를 준다. 놀랍게도 허구가 생애를 완성한 뒤에야 밝혀지는 사실도 있다. 그걸 알고 나야 비로소 완성되는 허구의 생애다. 이런 극적 구성은 독자를 놀라게 하고 황급히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다시 허구를 생각하게 만든다. 허구를 위한 독자의 조문은 그제야 시작된다.
독자가 사건에 멈추는 대신 시간을 따라 흐르는 건 작품과 거리를 두고 관조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사건이나 인물에 밀착해 동기화하는 대신 한 인간의 생애를 듣는다. 격식을 차린 건 아니래도 상만이 허구의 장례절차를 시작하며 시작한 이상, 상만의 회상은 허구에 관한 조사(弔辭)일 것이다.
허구의 생애를 요약하자면, 부잣집 귀한 외동아들인 줄 알았으나, 입양아였고 알고 보니 유괴되었고, 사실은 이현수라는 이름을 지어 준 친부모가 돈을 받고 허 씨 집안에 판, 그래서 유기당한 인물이다. 입양인 줄 알았으나 유괴였던 시절에 받은 이름이 허구였고, 이현수는 유기당한 허구의 본명이다. 허구이자 이현수는 이 모든 사실을 15세 즈음에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허구가 생애를 완성하기까지 지나온 시간이 이 소설의 큰 줄기다. 허구의 생애가 남다른 것처럼 그는 보통의 인간과 다르다. 상만의 회상으로 허구의 생애가 재현되기에 상만이 기억을 빌자면, 허구는 구토 증세가 나타나면서 다른 세계로의 여행이 가능했다. 물론 허구의 눈에만 보이는 세계였고, 상만은 눈앞에서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허구를 목격하지는 못했다. 허구에게는 ‘사실’이었으나 상만에게는 허구의 ‘창작’이었다. 허구가 직접 자기 얘기라고 말했을 때도 허구의 ‘여행’이 아니라 허구가 입양되었다는 것, 이후 그가 가난한 친부모에게 버려졌다는 것만 받아들였다. 둘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허구가 다른 세계로 여행이 가능한 인물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돈 많은 현재의 부모가 허구를 돌려주는 대신 돈으로 거래를 했고 친아버지가 그 돈을 받아 탕진했다는 것, 양부모를 혐오하면서도 그들을 떠나지 않은 ‘사실’들에 더 기운 건 당연한 일이다.
허구가 다른 세계로 처음 여행을 다녀온 건 열다섯 살 때였다. 이야기 끝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친부모가 돈을 받고 자신을 허 씨 집안에 팔아넘긴 사실을 알게 된 때다. 허구는 충격과 공포, 막막함 속에서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패륜적인 친부모, 헌신적이지만 유괴범인 양부모 사이에 갇힌 채 부서졌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앞에 허구는 부서진 채 선택에 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런 과정을 적은 게 허구의 노트였고 그 세계에서 허구는 K다.
그이 노트엔 이런 것들이 적혀있다. 어느 날 시장에 갔다가 엄마한테 혼 나는 아이를 보면서 구토 증세와 함께 펼쳐지는, 허구에게만 보이는 세계, 그 첫 번째 여행에서 허구가 본 것은 다른 세계에 사는 자신이었다. 닭튀김 조각을 건네주던 아줌마를 따라간 세계에서 허구는 양아치가 되어 살고 있었다. 1년이 지난 뒤엔 체크무늬 셔츠에 낡은 청바지 차림을 한 20대 초반의 청년이 보였다. 한국말을 못 하는 걸 보면 해외로 입양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K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미친 듯이 헤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이 특별한 곳에 갈 수 있는 여행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지 않은 길로의 여행, 허구가 구토 증세와 함께 도착하는 세계는 자신의 삶일 수도 있었던 다른 세계였다(59쪽).
어떤 독자는 이 모든 게 기가 막힌 사실 앞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던 허구의 무의식이 만든 환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만이 허구의 창작이라고 생각했듯 말이다. 또는 한 사람에게서 두 가지 서로 다른 인격이 존재하여 교대로 우세함을 보이는 해리 정체성 장애를 떠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소설 『허구의 삶』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허구의 세계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SF적 상상력과 신경증적 분열과 해체의 경계에서 자유롭다. 허구의 사실 주장에 그걸 허구의 창작이라고 믿는 상만이 있기 때문이다.
허구는 지금 여기의 삶과 자기 눈에만 보이는 세계의 삶을 오가며 지금 여기의 삶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규정지었다. 마치 이건 여행일 뿐이고 이번 세계에서 허구 자신은 이런 삶을 사는 여행자라는 걸 받아들인다는 듯, 양부모를 혐오하면서도 그들의 죽음을 막으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이로써 독자는 허구의 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범죄적 행위에 따를 법적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되었다. 대단히 문제적인 사건을 개인의 선택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안일한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금이는 허구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도록 밀고 나간다.
허구가 선택한 길과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양한 나들이 사는 세계가 있지만, 우리는 동시에 두 세계를 살지 못한다. 절망과 후회, 갈등과 욕망 등이 가지 않은 길 때문에 태어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일 때가 많다. 결론적으로 허구의 삶은 그의 선택이라는 것.
이때 허구의 선택은 수동적인 것과 다르다. 오히려 수용적이다. 수용적이란 말은 상황의 변화나 주위 환경에 잘 맞추어 부드럽게 대응하는 순응과도 다르다. 자아가 분열되고 해체되는 병리적 증상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했던 허구의 선택의지가 바탕이 된 것이다. 지옥 같은 삶이었지만 끝까지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허구의 삶이 완성된 후에 알게 되는 일이다.
허구의 전 생애를 함께 하면서 허구의 삶을 목격한 증인인 상만은 어떤가.
허구가 양부모와 친부모에 의해 파괴된 폐허였듯 상만 역시 파괴된 인물이다. 미혼모의 아들이었던 상만은 오랫동안 자신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괴로워했다. 상만은 허구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내면의 상처를 비로소 들여다본다. 어린 시절, 연탄가스가 찬 방에서 나온 후 방문을 닫았던 상만은 엄마의 죽음에 자신이 관여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래 괴로워했다. 아무도 상만이 방문 닫은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또 아무도 문을 닫은 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245쪽). 상만은 엄마 죽음에 자기 잘못이 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갇힌 채, 자기 삶을 구축하려고 했다.
이렇듯 허구와 상만은 둘 다 어른-부모라는 외부에 의해 파괴된 삶을 살았다. 허구가 폐허가 된 자신의 현실을 수용하는 것으로 구축했다면 상만은 외면했거나 회피했다.
상만은 허구와 자신이 많이 닮았음을 깨달았다. 상처로 가득한 내면은 똑같았다. 하지만 상처를 덮는 방식은 달랐다. 허구는 아무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제 이름처럼 허구의 세계를 떠돌았고, 상만은 거짓으로 다진 반석 위에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 쓰며 살았다(251쪽).
제천에서 같은 반 친구로 만났을 때 허구는 상만이 공부할 수 있게 자신의 방을 공유했고 양부모의 물질적 풍요를 나눴다. 십 대와 이십 대, 삼십 대를 지나면서 상만 자신은 대용품이라고 자각했다지만, 상만은 부모의 부재를 허구의 양부모를 통해 채울 수 있었다. 둘은 유사 형제였다.
이 소설에서 놀랍고 유일하게 아름답지만, 파괴되었다는 점에서 마음이 아픈 대목이 허구와 상만이 한때 이웃해 살았던 세계를 말하는 대목일 것이다. 허구의 장례식장에 온 허구이자 이현수의 동생 용수의 말에 의하면 허구가 다섯 살 현수일 때, 둘은 인천에서 서로 옆방에 살았다. 상만이 서울로 이사 갈 때 현수가 제일 아끼던 장난감을 줬을 정도로 친했고 어머니들끼리도 자매처럼 지냈다(249쪽). 둘에게는 아주 오래전 세계에서 그렇게 웃으며 함께 살았던 세계가 있었다. 이금이는 물리학적 평행 우주를 빗겨 가면서 가능한 또 다른 세계로 기억의 세계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허구이거나 이현수와의 인연을 매듭지으면서 상만이 그로부터 받은 유산을 깨닫는 장면은 뭉클하다. 지옥 같은 이곳으로 돌아온 현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상만이 자신들을 파괴했던 어른처럼 되지 말자는 자각이었다.
상만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 가장일지 모르지만, 아내에게 솔직하지 않았다. 두 남매에겐 가부장적 아빠였다. 아내는 허구의 장례를 치르고 보자는 상만에게 이혼을 요구한 상태였다. 허구가 이현수였음을 그가 죽은 후 최종적으로 알게 된 후 상만은 문득 깨닫는다. 그건 살아있음이 주는 회복의 가능성이었다.
“나도 버릇없이 굴어서 미안해. 그리고 아빠, 슬프면 울어. 울어도 창피한 게 아니래. 감정에 솔직한 게 더 멋진 거래.”
“……누가 그래?”
“민지가.”
상만은 순간, 어떤 손길이 슥 하고 자신의 존재 전부를 어루만지고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끊는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살아있어 아직 많은 것이 가능했다.
(253쪽)
허구가 자신에게 임종을 부탁하기 얼마 전 일이다. 상만은 전교 1등 아들이 여자친구 만나는 걸 이해 못 하고 여자친구인 민지 앞에서 아들을 모욕한 적이 있었다.
이렇듯 허구는 폐허가 된 삶을 수용했고, 살아내는 것으로 복수를 한 거였는지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허구의 죽음은 그가 상만에게 건넨 마지막 손길이었다. 폐허에 잘 지은 집인 줄 알았으나 부서지기 직전이었던 상만의 삶을 구한 손길 말이다.
허구는 이 세계에서는 이상하지만 허무하고, 허무하지만 최선이었을지 모를 삶을 완성한 뒤 또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지상만은 허구 혹은 이현수, 허구의 죽음을 겪으며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안한 어른이라는 걸 자각하고 괜찮은 어른을 준비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현수가 선택한 허구의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했다시피 상만의 존재 전부를 어루만지고 지나간 손길이 허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허구에게도 상만은 자신의 장례를 맡길 만큼 의미 있는 존재다. 다섯 살 그 어느 날, 놀이터에서 함께 행복했던 시절에 기원을 둔 두 사람이다. 어른들에 의해 파괴된 두 사람은 서로의 어루만짐이었을지 것이다. 이금이는 이런 감동을 작품에 놓아둘 줄 아는 작가다.
작가에게 직접 들은 얘기로, 이금이 작가는 “자신에게서 갈라져 나간 또 다른 ‘나’들이 살아가는 평행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158)는 평행 우주론에 빠졌던 적이 있다. 『허구의 삶』은 그런 SF 소설적 욕망으로 구상한 작품이고 작가의 고백에 따르면 실패했다. 그녀의 말처럼 『허구의 삶』은 완벽한 SF는 아니다. 대신 독자는 이금이 작가가 주로 써왔던 이야기와 ‘결이 어긋난’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알다시피 그녀는 40년 가까이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써오고 있고, 어린이와 청소년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현실의 언어로 천착해온 작가였다. 그런 작가를 매료시킨 것이 있고 기꺼이 도전했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녀가 작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허구의 삶』이 성공한 SF소설은 아닐지 모르지만, 작품을 읽다 보면 평행 세계와 같은 SF적 요소가 이금이 작가의 방식으로 확장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녀는 평행 우주론의 이론적 가능성과 실제적 증명의 괴리를 병리적 징후와 개인적 환상, 인간 개인의 선택이 열어갈 다양한 세계의 가능성을 시공간으로 활용한다. 그런 가능성은 충분히 동의할만하고 이는 일직선의 시간에 또 다른 시간의 틈을 내는 일이었다. 내가 경험하는 시간은 지금 여기 하나이지만 다른 시공간에도 우리는 이미 있다. 인터넷을 통한 다중 사용자 시스템에 등록된 많은 ‘나들’을 생각해보라. 접속이라는 선택적 행위를 통해 주체에서 파생된 ‘나들’은 원한다면 완전히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허구의 삶』에서 SF적 요소와 더불어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이야기의 화자가 되어 작품을 여닫는 인물이 현재 49세의 어른이라는 점이다. 어른의 시점에서 발화되는 『허구의 삶』이 청소년소설이 갖는 독자적 지향을 수렴하면서도 어떻게 청소년 밖으로 확장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청소년 시기란 신체적ㆍ정신적ㆍ사회적으로 성인이 되어 가는 도중의 시기다. 또 주변적 위치에 따른 갈등과 방황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건 청소년기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런 갈등과 방황, 불완전함에 대한 불안이 청소년기만의 일이 아니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독자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허구의 삶』은 이금이 작가에게 새로운 장르적 글쓰기에 도전한 작품이다. 청소년소설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가적 욕망도 보였다. 작가적 욕망, 장르적 모험과 도전이되 이금이다운 감동이 뒤섞인 색다른 작품으로 기억되지 않을까.추천 콘텐츠
1. 한 통계에 따르면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을 포함한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다. 한국의 독서 인구가 매년 감소하고 있다고 하지만 2023년 기준 신간도서 발행 분포를 보면, 문학(20.1%)은 교육(20.9%)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 독자층의 도서 구매 상황은 다르다. 교보문고의 집계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소설과 시/에세이 부문의 판매 권수와 판매액 점유율은 점점 하락하는 추세이다.2) 도서 소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양 서적과 직업 관련 서적이라고 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계가 전례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학이 독서 시장에서 유력한 장르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학을 떠받치고 있는 독서 시장이 위축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학을 읽고 경험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해졌다. 문학이 특정한 매체, 특정한 직업군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걷어내면 문학은 어디에나 있다. 매일 접하는 인터넷과 SNS에 게시되는 문학 관련 정보들과 자기 표현 글쓰기에서 비평적 욕구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이 가장 활성화되는 곳은 문예지가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비전문적인 장소들인지 모른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문학은 특별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그런 관심만으로 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책에 매혹된 독자들이 비평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건 비평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그런 독자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직업 독자로서 비평가가 있지만 모든 문학 종사자들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독자이다. 최근 생태 비평의 화두인 ‘얽힘’(Entanglement)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문학과 독자의 관계에도 필요한 상상력이다. 문학은 독자와 함께 만드는 세계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2. 강동호의 「새로움의 경제」(웹진 『비유』, 2025. 3-4)는 독자에 관한 글은 아니지만 문화경제학의 관점에서 문학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새로움’을 일종의 경제로 바라보는 이 글은 상품경제와 구별되는 문화경제에 주목한다. ‘새로움’은 동시대 문화 아카이브와 관련하여 작품이 지닌 가치를 측정하는 기호(화폐)로 “‘새로움의 경제’란 문화적 혁신을 독려하고 정당화하는 특수적 통화 체제”이다.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동시대 문화 현상은 새로움의 공급 과잉, 즉 새로움의 인플레이션인데 이는 시장과 자본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글의 목적은 시장과 문화라는 ‘새로움’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효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저자는 문학의 가치 역시 작품을 현실에서 사용하고 체험하는 독자들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교환 행위를, 그리고 그러한 교환 원리가 현실 언어의 경제라는 광의의 체제와 구별되는 지점”과 “자본의 논리에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영역을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통상의 사회경제적인 원리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학을 살펴보겠다는 것은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특히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독자와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인 교환 원리는 주목할 만하다. 강동호는 「새로움의 경제2(1)」(『문장웹진』, 2025. 4)에서도 유사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아직 ‘새로움의 경제’에 관한 가설이 있을 뿐 그 내용이 충분히 전개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글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문화경제 원리에 관한 여러 가정들과 개념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로 검증 가능한 구체적인 사례나 예시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문화경제는 이론인 동시에 실물경제이다. 작품의 가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자, 작품 생산과 수용 과정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교환의 원리를 문학 현장의 사례로 논증하는 과정 없이 ‘새로움의 경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강동호의 글은 독자가 포함된 문학을 역동적인 경제 교환의 흐름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그 새로움의 발생지, 현장의 실체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노태훈의 「한국문학의 현장」(『자음과모음』 2025년 봄호)은 한국문학의 현장을 생산과 유통, 수용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어 강동호의 글과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한국문학의 생산은 ‘등단’과 ‘문학상’이라는 집단적 승인을 전제하고 있으며,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문학의 유통은 수용의 현장과 분리되어 있다. 특히 문예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기 전의 작품들을 게재하는 것은 상품으로서 문학을 예비하는 과정이며 그 점에서 문예지는 생산 현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수용의 단계는 어떤가. 문학의 현장은 결국 수용자인 독자에게 그 핵심이 달려 있다. 문학의 현장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 읽히고 공유되는 순간이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곳만을 현장이라 칭한다면 사실 그것은 아주 왜소해질 것이다. 여타의 모든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생산자는 작품의 유통과 수용에 있어 결국 철저하게 보호적인 존재로 남게 된다. 작가의 강연, 낭독회, 사인회 등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문학의 현장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문학에서 현장은 사후적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수용 이후, 작품의 감상 이후에 현장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작가와 작품은 필요조건이 될 뿐, 현장의 주체는 오로지 독자의 행위에 달려 있다. 그런데 또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 현장성이 생겨나지는 않아서 이를테면 도서관을 두고 문학의 현장이라 명명하기는 다소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3) 노태훈의 글에서 독자는 중요한 존재지만 작가와 작품, 독자가 만나는 현장은 아직 현장으로서 불충분하다. 이 글은 도서관을 비롯해 문학작품을 향유하는 공간을 언급하면서도 문단 시스템을 벗어난 현장을 의미 있게 고려하지 않는다. 독자를 현장의 핵심에 두고 있으면서 독자와 현장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발생한다. 이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현장’은 비평적 태도의 유무인 듯하다. “핵심은 문학작품을 읽고 나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평’”이며 문학의 현장이 고민할 것은 “인정이나 승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비평적 태도, 즉 독자讀者/獨自적인 것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전통과 관습을 비트는 방식으로, 아카이브라는 저항의 형태로, 즉흥적인 아마추어리즘”으로 나타나는 문학 현장이지만 그 주체가 문예지와 전문 독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생산과 유통, 수용은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전문/비전문, 중심/주변의 경계는 여전히 뚜렷하다. 3. 한국 문학의 생산과 유통에서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문학 제도의 오래된 관성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스템에서 보면 한국문학은 ‘극소수’의 작가를 생산하고 연구하고 비평해 왔으며 ‘대다수’의 독자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대칭이 한국문학 연구에서 독자 연구가 희소한 이유이며 같은 이유에서 비평의 관심도 작가나 작품으로 향한다. 문학을 향유하는 현장에서 독자를 배제할수록 독자는 추상적인 집합명사로 취급될 확률이 크다. 이를테면 낭독회와 같은 문학 이벤트를 의미 있는 문학 현장으로, 작가와 독자 간의 수평적 연대의 실천으로 돌아보기란 아직 한국문학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황유원 시인은 최근 낭독회에 참여했던 경험을 놀랍고 반가웠다고 말한다. 직접 시를 읽어주는 독자들과 만나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겹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에게 “낭독회는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목소리들이 부유하는 시간”이며 서로 다양한 “목소리들이 구름처럼 희미하면서도 분명하게 시각화되는 시간”4)이었다. 아직 낭독회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시인의 소감은 중의적이다. 낭독회는 일회적인 문학 이벤트지만 작가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과 감응은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를 다른 사람이 낭송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시가 나를 떠났다는 것과 떠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다.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을 목도하는 것이다. 이유는 굳이 따져보지 않았는데, 사실 나는 내 시를 낭송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늘 거리 조준에 실패하고 마는 느낌이다. (중략) 참석하신 분들이 낭송해준 8편은 좋았다. 호흡과 리듬이 나와 달라서, 시에 첨가된 이질적인 분위기가 시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낭송이 끝나고 토크가 이어졌다 (중략) 나는 난감한 질문을 선호하고, 난감함 속에 생각이 촉발되는 울퉁불퉁한 흐름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대답은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에 힘입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5) 낭독회는 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지는 시간이다. 낭독회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만나고 말하고 새롭게 듣는 시간이다. 현장의 즉흥성은 다른 생각을 촉발시킨다. 낭독회는 서로 함께 참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발신자가 수신자가 되고 생산자와 수용자의 자리바꿈도 일어난다. 이수명 시인이 말하는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은 문학의 현장이 상호적이고 역동적인 공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산성에 힙입어 나아가는 문학의 현장이 문예지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문학의 현장을 생기 있게 하는 것은 기존의 제도가 아니라 ‘작가-작품-독자’의 연결을 만드는 이질적인 리듬과 시간이다. 낭독회를 기획한 이성주 평론가는 시민들과 문학 작품을 함께 읽을 때 종종 ‘요즘 문학’이 ‘그들만의 문학’이 아니냐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시민들은 동시대 문학 작품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문학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6)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낭독회에 관한 수많은 후기와 감상은 모두 그런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지금 문학 독자가 문학을 경험하는 방식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크고 작은 낭독회와 강연, 독서 모임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이, 더 다양한 작가와 일반 독자들이 문학 현장에 참여하는 것은 한국 문학에 유익한 일이지만 이런 교류를 기획하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제한이 따른다. 문학을 경험하는 일은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와 연계되어 있다. 2024년도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한국의 독서량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책을 선택할 때 서점이나 도서관 등에서 책을 직접 본다고 응답한 비율(26.8%)은 제일 높았다. 인터넷과 SNS의 책 소개나 광고를 본다는 비율(21.2%)은 그 다음으로 높다.7) 그러나 문학 현장의 전망은 밝지 않다. 2023년 정부는 지역서점 예산을 전액 삭감했고 앞으로 서점 문화활동 지원 예산 역시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다.8) 코로나 상황의 종식 이후 다양한 도서 행사들이 활기를 되찾았지만 서점을 중심으로 한 도서 문화활동은 위기를 맞고 있다. 잡지 산업 역시 지속되는 경제 침체로 부정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AI 기술과 디지털 시대라는 변환점을 준비하고 있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증진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발전에 중요한 기준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변화가 현행하는 문학 생산과 유통 방식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는 아직 더 지켜볼 일이다. 핵심은 독자와의 상호 작용이다. 문학을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고민은 더 필요하다. 5. 기존 문단의 시스템이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익숙하다. 한 좌담에서 육호수 시인은 최근의 SNS를 통한 문학의 확산이 등단 제도를 거친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향유자’로서 현대시에 대한 진입장벽과 문턱을 낮추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독자들이 한국 시에 유입되어야 한국 시도 활성화된다고 말한다.9) 김건영 시인은 SNS에서 매체의 홍보나 자본을 업지 못하면 아예 독자의 손에 닿지도 못한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SNS의 과도한 상업주의 경계한다.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김연덕 시인은 홍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면 SNS가 시 쓰기나 운용 방식에서 개개인의 질서나 미감을 즐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좀더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모두 일리 있는 발언들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문학은 디지털 시대와 얽혀 있다. 한국의 독서 문화에서 종이책 선호도는 월등히 높지만 정보 습득 선호 경로는 포털 사이트와 유튜브, TV/라디오, SNS 순으로 나타났다.10)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책을 선택할 때 정보를 얻는 방법에서는 서점이나 도서관 다음으로 SNS의 영향이 컸다. ‘종이책’과 ‘디지털 문화’의 공존 속에서 한국 문학에 필요한 것은 문예지의 쇄신만이 아니다. 한국 문학은 ‘종이책’ 바깥의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좌담에서 알 수 있듯 SNS는 창작자와 독자가 서로의 존재를 생생하게 마주하는 곳이다. 단순히 홍보를 목적으로 한 경우라도 SNS는 문학의 존재감을 알리는 편리한 수단이며 그 안에서 자기 표현의 매력과 홍보의 경계가 언제나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시와사상』(2025년 봄호)에 실린 「동시대 패러디스트의 밈적 욕망」(최다영)과 「사람이 사는 무인도-시와 패러디, 육호수와 고선경의 시를 중심으로」(하혁진)는 변화된 문학 환경에서 시가 어떻게 동시대의 문화와 교류하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인터넷 밈을 섞어놓은 ‘힙한’ 시가 그 자체로 또 다른 밈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싸이월드’의 ‘감성체’를 활용한 시는 학습을 요구하는 대신 비슷한 시대와 문화 감각을 지닌 독자를 초대한다. 이 글들은 현대시와 패러디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대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의 변화로 읽는 것이 유용하다. 디지털 시대의 파편화된 문화를 수용하는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인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가 먼저 존재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만드는 문학 현장이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저변을 축소하기는커녕 더 독특한 취향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입구처럼 보인다. 보편성과 진지함, 엘리트주의와 전문 독자에 둘러싸인 시가 아니라 비록 소수의 지지를 받더라도 가벼움과 귀여움, 사랑스러움, 놀이와 유머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그 안에서 전파되는 중이다. 전문 독자에게 다소 부족했던 자질들, 문학 제도가 배제해 온 요소들이 새로운 호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가 밈이 되고, 문학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감성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향유하는 시대적 현상이다.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거부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통의 보편성이나 대중성이 아니라 다양하고 고유한 소통의 방식을 만드는 일은 이제 능동적인 문학 행위이다. 시가 자신의 독자를 스스로 불러 모으는 일도 그러하다. 그것은 시에 좋은 일이다. 매일 접하는 수많은 콘텐츠들 사이에서 문학이 잠시 눈길을 끌고 멈추는 순간이 되는 일, 문학이 독자에게 이동하는 울퉁불퉁하고 즉흥적인 현장이 되는 일은 문학의 다양성, 문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의 목적이 불확실한 즐거움에 있다고 했다. 종이책 바깥에서도 시는 그 목적에 충실하다. 작지만 다양한 문학들의 난립과 행진 속에서 그 즐거움이 커진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서의 문학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닐 것이다. 1)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출판시장 통계」, p.67.(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2)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p.154. 3) 노태훈, 「한국문학의 현장」, 『자음과모음』 2025.봄, p.27. 4) 황유원,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는 중-소하서점 낭독회 후기」, 『포지션』, 2024.겨울호, p.248. 5) 이수명, 「소하의 밤」,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소하서점 낭독회 자료집, 2024, pp.75-77. 6)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p.172. 7)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292. 8)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181. 9) 김건영·육호수·김연덕, 「이달의 시 현장점검-그 평론가는 이제 출판사 마케터 아냐?」, 『현대시』, 2025.3, p.53. 10)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독서정책연구소, 「2023년 독서문화 통계」, p.17. ( 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첫 동시집 『시옷 생각』(브로콜리숲, 2022)을 낸 후 신재섭 시인은 두 번째 동시집에 대해 걱정했던가. 기억이 분명치는 않는데 두 번째 동시집은 오래 걸리지 않고 발표하면 좋겠다(동시를 쓰기 시작한 후 10여 년 만에 첫 동시집을 냈다)는 말을 했던 거 같다. 걱정을 이기고 바람대로 두 번째 동시집 『왕 집중 왕』(초록달팽이, 2025)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알맞은 속도로 도착한 듯하다. 첫 동시집 해설을 쓰면서 나는 그의 동시가 무언갈 만들며 혼자 가만히 노는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왕 집중 왕』에서도 그가 살피는 작은 것들의 움직임, 그들의 존재감, 사소해 보이는 것을 향한 마음 씀이 가만하고 단정하다. 삶과 유리된 관념에 몰입하거나 현란한 언어로 독자의 혼을 쏙 빼놓지도 않는다. 오염된 세계에서 그가 건져 올리고 있는 동시의 언어들은 놀랍고 새삼스럽다기보단 소박하다. 이건 신재섭 시인의 동시를 관통하는 특질일 테고 두 번째 시집에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동시집은 첫 동시집에서보다 목소리가 커졌고 확실히 선명해졌다. 이는 『왕 집중 왕』에서 도드라지는 ‘4학년’ ‘열한 살’이라는 구체적인 시절과 대상 덕분이다. 외부로 열린 시공간인 동시에 대체로 고른 질감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품들이 생기를 느끼게 해준다. 『왕 집중 왕』을 읽을 땐 그가 어떤 인연으로 4학년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호명하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될 것 같다. ‘달팽이가 단 한 번도 자신의 키를 재 본 적 없는 줄자의 키를 풀어(「달팽이와 줄자」) 주었듯 그가 4학년이라는 삶의 주체, 이는 반드시 또 다른 존재와 세대로 확장되며 그가 삶의 과정과 연결을 어떻게 이해하고 언어로 풀어내는지 살피는 쪽으로의 읽기를 해야 한다. 그리하여 『왕 집중 왕』은 과정과 연결이라는 두 개의 의미로 맥락을 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그에게 4학년, 대략 열한 살 즈음의 존재란 확실히 과정의 존재들이다. 학제로도 낮은 학년을 마치고 높은 학년으로 넘어가는 시작의 시기, 이전 십 년의 한 시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십 년을 시작하는 열한 살 주체들이다. 이들은 “구름 점을 치며 어금니에 낀 속상한 마음을 야금야금 나눠 먹”(「4학년의 자세」)을 만큼 마음의 근육이 자랐다. “날마다 이리저리 발자국을 키우는”(「하루가 하나씩」) 과정의 존재들이다. 마음의 길이를 물으며(「나무와 나」) 너라는 대상을 향한 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마음의 자리를(「마음의 자리」) 찾을 줄 아는 존재들이다. 변화하거나 변신한다는 건 신영이에서 주형이로 이름 하나 바꾼 게 아니다. 신영이로 살 때 못 하던 일을 주형이가 되어 좋아하던 애에게 눈을 맞춘 건(「하루 아침에」) 다른 존재의 탄생이다. 신재섭 동시에 자주 등장하는 분위기이거나 말들인 ‘아직이지만’ ‘기대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꼭 4학년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닐 것이다. 이 말들은 이전과 이후, 시기와 세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운명적으로 과정을 사는 우리는 모두 미완일 수밖에 없는 시간을 사는 존재들이다. 오늘은 오지 않은 것으로 ‘아직’이고 여전히 실패하지만 그래도 이 시간 너머는 좋은 쪽으로 다르리라는 기대로 우리는 시간을 밀고 간다. “머지않아 날아오를 시간을”(「오늘도 씨근씨근」) 향해 “오늘의 나를 믿어 보기로 하”(「축구 좋아하는 나에게」)는 것이다. 그렇게 나아가면 떡잎이 새잎을 키우고 시든 다음에 펼쳐지는 장관을 만나게 될 것이다. 고 작은 떡잎이 지고 새잎이 자라 “줄기가 밭둑을 휘감으며 줄기차게 뻗어 나가고 호박잎은 그늘을 무럭무럭 키우고 둥글둥글 호박을 내놓”(「떡잎 두 장에서 시작되었다」)는 일이 펼쳐진다. 호박씨는 반드시 호박을 내놓는다. 4학년은 떡잎 두 장이 시든 자리에 돋아난 새순이라고 생각해본다. 신재섭은 4학년과 우리가 호박씨에서 시작한 긴 여정의 어느 때를 살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게 든든하고 위로가 된다. 이번 동시집에서 과정의 존재 인식과 함께 인상적인 게 연결감이다. 가시적인 호박의 기원이 호박씨였다면 4학년의 기원은 “우당탕 유전자”다. 복도에서 너랑 나랑 우다다다 뛰는 건 들판을 달린 기억 때문이야 울창한 숲을 걷고 언덕을 뛰어오르고 맷돼지와 호랑이를 피해 달리고 달렸던 먼 먼 조상이 우리 몸속에 있어서야 우리가 뛰는 이유야 「우당탕 유전자」 전문 긴긴 시간을 품은 이 작품은 우리가(열한 살이, 혹은 4학년이)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건 유전자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이 말에는 논리적 설득력은 약할지 몰라도 감정적 호소의 힘은 강하게 들어있다. 걷지 않고 뛰는 건 유전자 때문이므로 교정의 대상을 거부하는 이유가 되어준다. 이 작품처럼 유전자적 역사의 시간을 비롯해 앞에서 살펴본 「떡잎 두 장에서 시작되었다」처럼 호박씨 씨앗에서 호박 열매로 이어지는 자연적 연결감(이 작품에는 앞서 읽어야 하는 작품이 있다. 「호박씨가 땅 위로 내놓은 떡잎 두 장」과 「떡잎 두 장에서 시작되었다」는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개별 작품이면서 두 작품은 선후로 연결되어 있다. 순간에 집중하면서도 사물의 과정을 연결하여 읽는 재미가 커서 새로웠다.), 사물과 사람, 사물과 사물의 연결(「내가 꽃」「민들레꽃」「비누와 비누」「바닷속 나비」) 등은 신재섭 동시 읽기의 재미이며 의미이다. 연결을 통해 주체와 세계는 변신과 변화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가 자주 시도하는 언어의 동음과 이의의 변주에서 느끼는 재미도 지나칠 수 없다. 예를 들면 「오이 장터」의 오이 장터는 채소인 오이를 파는 장터가 아니다. 당연히 “아삭한 오이”는 없다. 대신 포장 그대로인 냄비, 양말, 손수건, 고양이 간식, 칡즙, 내 서랍 속 딱풀 같은 쓰지 않는 물건을 파는 장터를 줄여 쓴 ‘오’래 쓰고 ‘이’어쓰는 장터다. 「여름 판다」에는 곰 판다가 없고 동생의 이야기를 듣는 살구는 고양이 살구인지 과일 살구인지(「이야기 듣는 살구」) 경계가 모호하다. 이런 창작 방법은 오래되었지만 「별명으로 말하기」「용띠 해 인사법」「화장실 똑똑」「와요=눈」 등과 같은 작품은 가만하지만 재미난 일에 빠져 본 자의 성질을 드러낸 것 같아 흥미롭다. 이들 작품엔 말놀이 이상의 온기가 있다. 빗방울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눕는다 납작 누워 흐른다 흘러가며 뭉친다 저도 모르게 뭉치며 간다 빗방울은 누워서 자란다 「비가 내리면」 전문 과정을 거쳐 변신하는 건 새로운 존재의 탄생으로 연결되고 기대하게 한다.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빗방울이 모여 물줄기가 되는 과정을 뭉침과 자람으로 연결하여 새로운 존재를 보아내는 건 시인의 힘이다. 사실 이 말도 『왕 집중 왕』을 읽고 나서야 하게 되었으므로 나의 말이 아니다. 눈송이에서 ‘눈사람의 씨앗’(「와요=눈」)을 찾아내는 존재가 시인이다. 시인과 연결된 우리는 그를 빌어 오염된 세계에서 사느라 상한 마음을 위로할 언어를 기다리는 것이다.
김유진,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 이미 단편 「음의 속성」(『보이지 않는 정원』, 문학동네, 2018)에서 등장한 바 있는 피아노 조율사는 김유진 소설이 다루는 가족간의 불화와 갈등에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미세하게 틀어진 음을 조절하고 감정의 진폭을 고르게 하는 일은 가족에게도 필요하다. 김유진 소설은 섬세한 조율사처럼 이들이 어떻게 틀어지고 불확실한 간극을 넓히게 되었는지를 탐사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제 막 결혼 생활을 끝낸 수민과 수찬,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실패한 수민의 엄마, 빠리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정우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피아노의 현처럼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주인공 수민이 피아노 조율 수업을 배우는 과정을 따라 삼인칭 시점으로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율은 산술과 이론이 아니라 경험과 실전만이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실제로 피아노를 만져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악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걸 깨달”(57면)은 수민처럼 상대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수민과 수찬의 이혼에도 그런 오해가 있었다. 수민이 프랑스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만난 수찬은 원예학을 전공한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귀국해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수민의 피로와 불만은 쌓여만 갔다. 수민에게 배우자의 무능력은 “아주 자주 유대와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20면)이었다. 먼저 이혼을 말한 사람은 수찬이었지만 이미 정서적 이혼 상태와 다름없던 수민은 살려고 이혼한다는 수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틀린 부분을 찾아 고치는 유능한 편집자인 수민은 판사처럼 “단죄하고 처단하”(41면)는 일이 어울리는 “너무 엄격하고 고지식”(122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수민의 불행은 엄마 임정희의 불행과 닮았다. 임정희가 어린 시절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형제들에게 무시를 당했듯 수민 역시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신의 개인성을 존중받지 못하며 자랐다. 슬픔과 두려움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없었던 이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도피처였다. 임정희는 남편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주리라는 확신”(111면)을 가졌고 수민은 “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97면) 예감으로 수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은 남편의 무능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선택하고, 낭만적 사랑이나 구원의 허위성을 벗어나 자기 삶을 재조율하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야 한다. 인생 초기의 결핍은 임정희와 수민을 무뚝뚝하고 애정에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가족 공동체에서 독립할 수 있게 했다. 이 점에서 『평균율 연습』은 가족보다 개인으로서의 과업에 몰두하는 여자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다. 이혼 후 임정희는 생활고를 이겨내며 왕성한 경제활동을 펼친다. 서울의 아파트를 사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불확실한 숫자놀음”(73면)을 즐기며 전남편을 사업 파트너로 이용할 만큼 대범하고, 투자 사기를 당했을 때는 딸에게 호소하고 가족에 의지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소송에 임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 둘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정우의 사랑 이야기이다. 정우는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수민의 룸메이트이자 예술가로 자립한 여성으로 도피나 구원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창조한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실수할 때조차 상대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정우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 불운한 사고를 겪은 그의 열일곱 살 시절로 가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를 매만질 때마다 그 결함이 마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149면)이라고 상상하는 정우는 그와 결혼 대신 새로운 가족형태인 시민연대계약을 맺으며 살아간다. 수민은 정우를 자신과 비교하지만, 그런 사랑은 수민에게도 있었다. 수찬의 이야기를 보면 이들이 서로 얼마나 기적 같은 존재였는지, 수찬이 얼마나 수민의 외로웠던 과거를 보듬어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은 결혼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우의 경우처럼 상대의 경험과 감정까지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이다. 수민이 수찬을 무능하게만 보는 것은 그런 상상력이 권태와 오해 속에서 무뎌졌음을 의미한다. 피아노 조율 학원 원장의 말처럼 평균율은 순정율이 만든 결함을 모든 건반에 조금씩 떠안겨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대안이다. 조율은 완벽한 순정율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수용할 때에야 비로소 거리가 아름다워질 수 있”(194~195면)는 미묘한 작업이다. 수민은 이 조율 훈련의 심화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수민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202면)”는 왜 “고치고 또 고쳐 쓰는”(202면)” 과정이 필요하다. 엄마와 수찬의 결함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엄마 임정희는 이혼 후 돈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었고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수찬은 회사의 인원 감축에 어쩔 도리 없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렇다면 수민에게 필요한 조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율 수업에는 교훈적인 메시지들이 많지만 조율의 핵심은 그것의 기능이나 유용성에만 있지 않다. 수민에게 고치는 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하나하나 매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음의 진동수를 조화롭게 만드는 기술이 단번에 되지 않듯 수민의 삶도 무언가에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과정에 있다. 『평균율 연습』은 상대의 결함을 나눠가지려는 시도가 사랑과 이해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기당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하는 것은 수민이 선택한 조율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수찬이 이혼 후에도 수민과 수민의 어머니와 이어나가는 우정이다. 그것은 가족에 관한 하나의 대안이자 수찬이 만드는 평균율이다. 지금 가족 서사에 필요한 조율이 있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지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상상력일 것이다. 전지영, 『타운하우스』(창비 2024) 전지영의 『타운하우스』는 어둡고 불편하다. 이 이야기들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위계가 삶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결말을 유보한다. 긴장의 해소가 아니라 곤경의 실상을 지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말의 눈」은 폭력의 전염성을 파헤친 수작이다. 주인공 수연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딸 서아를 섬에 있는 국제 학교로 전학시킨다. 새출발을 결심한 그곳의 타운하우스는 CCTV와 보안이 완비되었지만 그럴싸한 외관과 달리 미세하게 갈라진 이층 천장 틈으로 물이 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10면)을 경험한다. 이번에는 서아가 지희의 딸이 저지른 학교 폭력을 옆에서 방관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수연은 서아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은 채 서아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에 ‘비겁한 안도감’을 느낀다. 같은 타운하우스 이웃인 지희는 수연의 이러한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인물이다. 지희는 자신의 딸이 가해자지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걸 서아가 증언해 주기를 바라며 그동안 쌓은 친분과 의리를 내세워 수연을 압박한다. 지희는 폭풍우를 무릅쓰고 비가 세는 수연의 집 지붕에 올라가 방수포를 덮으려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어떻게든 자기 아이를 구하겠다는 지희의 얼굴에서 수연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장면은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아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35면)는 모성은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폭력을 은폐함으로써 폭력에 공모하기 쉽다. 지희처럼 궁지에 몰린 부모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것은 수연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35면)이다. 여기서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위협하고 전염시킬 수 있다. 눈여겨 볼 점은 피해자의 내면에 숨겨진 가해 심리다. 친구의 폭력을 관망했던 서아는 맞는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차라리 때리는 쪽”(26면)이 낫다고 말한다. 수연의 가해 심리는 한층 교묘하고 잔인하다. 수연은 지희에게서 과거 자신의 선처를 바라던 가해자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희를 떠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지붕에서 떨어진 지희가 깨어나지 않기를 은밀히 바란다. “같은 폭력을 반복”(23)할 것이라며 가해자들을 엄정하게 심판했던 수연의 도덕적 신념은 서아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됨으로써 무너진다. 소설 초반에 타운하우스를 어슬렁거렸던 말은 검은 실루엣으로 수연 앞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수연이 낯설게 마주한 것은 바깥의 위협 때문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이다. 수연은 말의 눈에 비친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무고한 피해자였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은 웅덩이 같은 말의 눈은 수연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숨겨진 가해자의 마음을 보게 만든다. 수연은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지금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 소설집에 엮인 작품들에서 삶의 안전지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새는 타운하우스는 “갑작스런 기온 변화, 결로, 바람과 비에 약”(8면)하고 인물들의 갈등은 악천후 속에서 고조된다. 이런 식의 묘사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전지영의 소설에서 변화무쌍한 기후(climate)는 불가해한 삶에 관한 징표로 때로 인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쥐」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솟아오른 불기둥은 군 내부의 불미스런 의혹을 감춘 해군 관사를 태울 기세로 커진다. 그러나 관사를 돌아다니는 쥐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부조리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기습적인 스콜은 아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공무원인 주인공은 불합리한 공공 사업에 몰두하느라 아들의 죽음에 무방비 상태였고 성공적으로 끝난 사업은 자신의 일상에 예기치 않은 해를 입히는 중이다. 스콜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침수시키며 평온한 일상 속에 숨어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소리 소문 없이」의 ‘나’는 음대 입시생으로 피아노와 악보가 삽시간에 물에 잠기는 수해를 겪는다. 이 “이해되지 않는 일”(211면)은 입시 경쟁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나’의 뒤틀린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된다. 한편 자연재해와 관련된 소설적 배경은 삶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언캐니 밸리」 속 도시 고지대에 있는 부촌 청한동에서 흐르는 물은, 장마철마다 ‘나’가 세 들어 사는 저지대 상가 건물을 물바다로 만든다. 그러나 청한동 노부부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약물과 주사가 오가는 일들에 ‘나’는 접근할 수 없다. 기후는 한국 사회의 계급 지형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침식시키는 중요한 사사적 요소이다. 『타운하우스』에서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친구나 동료에 대해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고(「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 부당한 업무와 명령에 복종하는(「쥐」,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인물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할 뿐이다. 「맹점」에서 안과 의사 은애도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은애는 어시장 노인들에게 고액의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보험제도의 틈새에서 이익을 착복한다. 병원에 노인 환자들을 공급하며 “주는 걸 확실히 주고 받을 걸 확실히 받는”(121면) 보험회사 영업사원 재복과 과잉 진료로 수술 건수를 늘리는 은애는 「말의 눈」의 수연과 지희처럼 비슷한 욕망으로 조응한다. 은애가 검게 젖은 어시장을 빠져나올 때 고양이 한마리가 생선 피와 비늘, 내장으로 범벅이 된 입으로 은애의 발을 맹렬하게 핥는 장면의 기이함은 그녀의 맹목적인 탐욕을 암시한다. 사회적 약자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은애의 성공은 그러기에 더 착잡하다. “한 사람이 웃으면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뼈와 살」) 경쟁 사회의 심리는 거의 생존 본능처럼 전지영 소설의 인물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이야기는 익숙하다. 그러나 『타운하우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사회가 만드는 파괴적인 갈등이 주목한다.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회는 끔찍하다. 「맹점」의 은애처럼 소설의 다른 인물들도 자신의 성공 뒤에 누군가의 불운과 불행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불길한 날씨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인 『타운하우스』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고딕 소설로 손색이 없다. 비슷한 갈등 구조와 패턴이 반복되는 면도 있지만 이들 이야기가 일으킨 균열은 오래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폭력에 가담하는 사람들, 더 나쁘게는 알면서도 그 불길한 운명에 적신 발을 빼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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