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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 2024년 여름호

‘장르문학’이라는 독법

이융희 문학평론

한양대학교에서 「한국 판타지 소설의 역사와 의미 연구」로 석사 학위를, 「한국 웹소설의 환상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마왕성 앞 무기점』 출간 이후 2025년 웹소설까지 총 8종 출간한 작가 겸 ‘판타리움’이라는 출판사의 공동대표. 대학에서 웹소설을 가르쳤던 경험과 출판사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웹소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주류 선언』(공저), 『웹소설 보는 법』, 『#판타지 #게임 #역사』 등 웹소설과 장르문학 전반에 대한 저술작업을 통해 웹소설 시장의 대중과 학계 사이를 매개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1. 텍스트에서 수용자로


소위 ‘장르’의 팬덤들에게는 낡고 오래된 농담이 존재한다. 바로 ‘〈스타워즈〉는 SF인가?’이다. 이와 비슷한 농담으론 ‘순대는 역시 소금에 찍어 먹어야지’ 정도가 있으리라. 여러 강연에서 소위 ‘〈스타워즈〉 농담’을 꺼내면 청자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장르 강연을 들으러 올 정도의 사람들은 장르에 관심이 많다 보니 한 번쯤은 저 이야기를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웃는 사람들만큼이나 진지하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스타워즈〉는 SF가 아니다. 또는 〈스타워즈〉는 SF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주욱 나열된다.

  내가 ‘〈스타워즈〉는 SF인가?’를 질문이 아니라 농담으로 바꾼 까닭은, 저 질문의 답을 확정할 수 있는 주체를 모르고, 나아가서 그것이 과연 지금 시대에서도 유효할 수 있는 질문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설마 아직도 이 세상은 작가가 또는 출판사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콘텐츠의 공급자가 전제적으로 모든 정보값들을 제약한 채, 소비자들 곁에 유령처럼 붙어서 전달한 메시지 하나하나를 모두 ‘정답’으로 찾아내도록 강요한다는 소리일까. 근대 이전, 중세 성직자들의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끔찍한 상황이 현대사회까지 유효할 리는 없으리라. 텍스트를 소비하는, 신도 작가도 죽어버린 세계에서 소비자들이 강력한 오독으로 텍스트들을 무한히 확장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만약 전자와 같이 창작자와 배급자 들의 ‘정답’이 있는 세계라면, 평론가의 업무는 새로운 독해법을 제시하거나 또는 이 사회에서 텍스트가 가진 미학적 의미를 짚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친절한 독해 일타 강사의 그것과 다름없으리라.

  장르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장르문학’이라는 집단의 운동을 찾는 전환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고전 서사학에서 장르란 츠베탄 토도로프의 정의처럼 개별 텍스트들이 공유하는 속성에 근거하여 텍스트를 구분하는 체계로 이해되었다. 그러니 외계인이 나오는지, 과학적 엄밀성에 따른 실현 가능한 미래를 예언적인 로맨스로 이야기하였는지, 고도의 기계장치가 등장하는지 등으로 SF의 정합을 따지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의 심부에는 서사, 서정, 극, 비평으로 문학을 구획 지었던 노스럽 프라이의 정리 또한 유효했으리라. 장르문학은 이러한 중심을 해체하는 과정이다. 즉, 텍스트의 중심은 텍스트가 아니라 그것을 독해하는 순간에 있는 것이며, 독해 이후의 교류에 있는 것이고, 새로운 텍스트를 끌어내는 관통에 있다. “장르란 하나의 해석적 틀”이라 말한 허시E. D. Hirsch의 주장처럼, 현재의 장르는 내부의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비의 양식이 만들어내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허시는 “이미 습득한 장르 속성에 대한 개념”을 전제하고, “이후에 이해하는 모든 것들을 구성”한 뒤, 이를 통해 독자가 관습적으로 독해하는 예측 또는 추측을 장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장르란 텍스트가 가진 속성이 아니라 읽기의 한 기능으로 보아야 한다.1) 그러니 누군가 ‘〈스타워즈〉는 SF인가?’라고 물어보는 것이 그저 순대의 향신료 취향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 글은 장르문학의 중심을 텍스트에서 수용자로 옮겨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장르문학이라는 의미 안에는 텍스트의 작은 화소와 그로부터 분화된 수많은 양식,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관습 두 가지가 뒤섞여 있다. 소비자는 텍스트를 환상으로 비벼 먹을 수 있고, SF로 구워 먹을 수 있고, 로맨스로 익혀 먹을 수 있으며, 스릴러로 졸여 먹을 수 있다. 이러한 독해 관습이 ‘문학’이라는 형태와 상위–하위로 구분되는 건 난센스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문화’나 텍스트 또는 그 텍스트의 창작자와 배급자가 우월하고 예민한 존재로 자리하고 수용자들은 그 아래 문화적으로 복속되어 있다는, 창작자 중심의 선량주의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 글에서 이러한 주장이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예술에 대한 자의식 하나만을 에고로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을뿐더n러, 그것이 예술을 위대하게 만들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예술의 위대함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아왔다. 이것은 관점과 포지션의 문제다. 그 사람들은 순대를 쌈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는 게 좋을 뿐이다. 소설의 소재로 용이나 마법, 기사나 사랑, 외계인과 UFO를 사용하는지 여부에 따라 ‘장르’로서의 정체성이 확정된다는 인식과 한 개의 작품이나 아이돌의 이름을 ‘장르’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소비 방식이 ‘본진’으로, 특정한 문화의 형태와 관습을 장르로 이야기하고 그것을 확장해 장르문학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사람들 간에는 넘을 수 없는 해석의 간극이 존재한다. 나는 그 간극을 좁혀서 이 모든 것이 장르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단지 소비문화로서의 장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그 문화적 맥락과 토대를 짚어보는 것에 집중하였다.


2. 한국 장르문학 독법의 배경


상술하였듯 장르문학은 문학이라는 자장 안에서 특정한 관습으로 기호화된 코드code, 즉 장르 화소 존재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술된 문학 텍스트에 대해서 관습적으로 소비하느냐 마느냐의 순간에 탄생한다. 따라서 문학과 장르의 관계는 상위 범주와 하위 범주가 아니라 창작과 소비라는 선행–후행의 관계이다. 이는 굳이 ‘문학’이 아니라 다른 모든 콘텐츠 전반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장르문학은 특정한 텍스트 양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소비하는 동인, 집단에 대한 명명인 셈이다.

  그럼 장르문학이라는 소비자들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국이 해방 이후 국민 형성 Nation-building 기획의 일환으로 일본의 잔재를 ‘왜색’으로 명명하며 배제해온 ‘반일 정책’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야 한다.2)

  한반도는 소련의 공산주의와 미국의 자본주의가 맞붙는 격전지였고, 이러한 지형학적인 영향 속에서 아군과 적군을 정의하는 작업 자체를 정체성의 문제로 깊숙하게 받아들였다. 해방 직후 많은 지식인이 일제강점기 일본화의 흔적을 지우고 문화적 독립을 이룬 해방 공간에서의 문화적·사회적 동질화를 시도한 것도 이 같은 까닭이었다.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될 당시 문화비평의 장에서 지식인들에 의해 왜색 문화론이 일본에 대한 부정적 타자 이미지와 새로운 매스미디어 및 대중문화에 대한 경계와 경멸적 시선이 접합된 형태로 전개된 것도 이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문화적 현장의 대중은 일본 문화에 복잡한 시선과 욕망을 중층적으로 투영하였다.3) 부산항을 경유한 밀수를 통해 일본 잡지와 소설, 가요는 물론 아지노모토·조미료·간장 등의 식료품과 시계·선풍기·난로·냉장고·카메라·텔레비전 등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제’가 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세련된 선진 문물로 사용되었다. 상업주의와 대중의 욕망이 국가와 권위주의적 규제의 영향력을 웃돌며 자리한 것이다.4)

  일제 문화에 대한 이중의 태도는 1970~1980년대 문화 영역에서 ‘왜색의 제거’를 통해 정치적으로 문화를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 애니메이션 「타이거마스크」 「마징가Z」는 미국산으로 둔갑되어 수용되었고, 모든 등장인물은 정치적으로 번안되어 한국어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마징가Z」가 미국산으로 소개될 때는 “어린이들에게 흥미와 지혜를 가져다주는 우주과학을 소재로 한 교학적인 영화”5)라는 평가였다가 일본산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직후 ‘왜색 저질 문화’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기 시작하는 건 상징적이다.

  이러한 해외의 대중문화를 ‘해적’으로 탈취한 것이 1세대 장르 소비자들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 위성안테나와 레이저디스크LD 등의 선진 문물을 자유롭게 사용하던 강남 부촌, 여의도 일대의 젊은 청년들은 용산 전자랜드와 세운상가 등에서 미군이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밀수입해 온 불법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6) 부와 지식을 바탕으로 디지털 리터러시를 ‘수입’해 온 이들이 VT 통신 공간에서 빠르게 해외 대중문화, 장르의 문법 들을 익히고 재창작해 키치한 모방을 반복하며 초창기 장르문화의 기틀이 마련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과 같은 대중 소비 콘텐츠는 정부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항이었던 만큼 자연스럽게 대중문화의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대항문화의 소비자로 두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정책에 호응하여 ‘왜색’을 주창한 지식인들은 이들을 ‘일본에 국부를 넘겨주는’ 매국노 취급을 했고, 결국 장르문화의 소비자들이이자 새로운 문화의 창작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존의 지식인 계층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부인당했다. 이러한 저항이 “일부 특수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값비싼 개인 매체”가 “정치·경제적 집단에 국한”되어서 사용되었다는 약점이 그들을 왜소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7)

  결국 장르문학이라는 집단의 초기 형상은 부르주아 계층의 엘리트 얼리어답터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제도를 탈주하려는 욕망으로, ‘한국’적인 국가적 정체성과 대립하는, 민족의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반동적이자 해체적인 성격을 띠는 문화 소비의 형태로 자리한다. 그들의 욕망, 또는 반항은 ‘민족’을 중심에 넣고 민주화를 통해 넘어섰던 거대 서사의 세대 체험으로부터 탈주하여 디지털 시공간으로 자신을 끝없이 전진시켜 분해하는 수동적 자기 파괴에 다름 아니었으니, 현실의 이데올로기를 탈취하여 이상적 삶을 현실화하려던 당대 민중에겐 연대할 수 없는 배부른 푸념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주체들의 소비 대상이 ‘환상’으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3. 한국적 환상이라는 운동


통상적으로 이 시기 장르문학의 창작자들이 천착했던 것은 ‘환상성’을 가진 텍스트로 여겨진다. 그러나 환상성이라는 것이 장르문학의 고유한 형식이냐는 질문엔 고개를 내젓게 된다. 캐스린 흄은 문학을 미메시스와 환상의 특색 있는 혼합으로 본다. 흄에게 “미메시스란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핍진감과 함께 사건, 사람, 상황, 대상을 모사하려는 욕구”의 발동이었다. 환상은 그 반대편에서 권태로부터의 탈출, 놀이, 환영, 결핍된 것에 대한 갈망, 독자의 언어 습관을 깨뜨리는 은유적 심상 등을 통해 주어진 것을 변화시키고 리얼리티를 전복하려는 욕구였다.8) 이처럼 환상이란 이미 문학에 존재했던 양식이었고, 문학을 문학으로 만드는 하나의 축이었다. 나아가 정신분석에서는 환상을 일종의 본능이자 본성으로 본다.

  프로이트에게 ‘환상’이란 충족되지 못한 소망을 동력으로 하여 불충분한 만족에서 저절로 생겨나고 최초의 결핍으로 성장하는 ‘욕망의 소망’ 속에서 욕동의 분출력을 가진 것이었다. 또한 주체는 세상에서 불가능한 행복을 대체하는 심리적 행복을 찾기 위해서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그렇기에 환상은 일종의 ‘배상’이고,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대체한 성인들의 활동이며, ‘욕망의 진지함’이다.9)

  한편 정신분석의 영역에서 ‘환상’이란 단어의 어원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환상fantasy은 환등기가 만들어내는 ‘마술환등fantasmagorie’에서 유래하였다. 즉, 환상이란 회전하는 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으로부터 풀려나 화면에 비쳐지고 상상력을 가동하게 만들면서 탄생한다. 그렇기에 환상은 실재로서 존재하되 조합되지 않은 상태의 보류인 동시에 상상력이자 독창력을 가진 일종의 운동이자 동작, 행위가 된다.10)

  이해가 어렵다면 아이들이 갖고 노는 착시 장난감을 떠올려보자. 원형의 딱지 앞장에는 새, 뒷장에는 새장을 그린다. 그러고 나서 딱지의 양옆에 고무줄을 꿰어 딱지를 회전시키면 된다. 그러면 쉽게 새장에 갇힌 새를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새장에 갇힌 새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당 그림이 이 세상에 현현되려면 오로지 ‘동작’이 가해져야만 한다. 결국 환상이라는 것은 그 존재 자체가 주체의 운동성을 전제한다.

  환상이라는 것은 결핍을 가진 주체가 자신을 미래에 기투하여 운명을 쟁취하기 위해 선행되는 목적의식인 동시에, 그러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그렇기에 환상이라는 형식이 문학의 보편적 양식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장르로 뚜렷이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기일 수밖에 없다. 원환의 세계에서 순환하며 살아가던 생의 형태가 무너지고, 증기기관을 심장 삼아 종횡으로 구역을 옮겨가기 시작한 근대는 ‘정확한 지식’을 만들어내며 신화의 시공간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환상의 의미를 살펴볼 때, 환상성이 1990년대 이후 부상한 장르문학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은 당시가 개개인의 능력이 박탈되고 보수적으로 고정된 전(前) 세대의 이념들이 해체되며 ‘비어’ 있던 시대란 반증인 동시에, 미래로 나아가던 구속이 해체되고 무한히 확장될 미래가 열린 상황에서 주체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일종의 환상으로 꾸준히 발화하였단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르문학’이 보다 확실하게 탈주하기 위해서는 동력이 필요하다. ‘낯섦fremd’은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는 방랑을 뜻한다. 이러한 환상의 배회는 아무런 예정도 없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낯선 것의 방랑은 자신이 “머무를 장소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11)이다. 그렇기에 장르문학이 탈주하려는 공간, 그리고 나아가야 할 공간으로서 이중적 의미를 가진 ‘순문학’이 호명되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호명’에 대해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고 각 개인들이 호명에 답하는 과정에서 주체가 형성되고 구조가 재생산된다”12)고 이야기한 것을 주지한다면 장르문학과 순문학이라는 호명을 누가, 왜 만들었느냐의 질문은 한층 무게감을 가진다.

  사실 순문학이라는 명명은 조금 기이하다. 장르문학이라는 것이 특정한 기호나 구분, 또는 분별에 관련된 것이라면 ‘순문학’이라는 명칭은 그것이 호명되는 순간 굉장히 장르적으로 변모한다. 중심은 사라진 채 장르문학이라는 행위 그리고 그 타자로 존재하는 ‘순문학’ 그리고 다시 순문학이 호명하는 ‘장르문학’으로의 순환은 결국 순문학이라는 거짓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장르문학의 담론을 자폐적으로 매몰시키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번엔 장르문학의 본질을 텍스트 내부가 아니라 텍스트 외부로 옮겨놓자. 이러한 지형도에선 순문학은 일종의 관습과 문화를 공유하지 않는 독서의 방식을 뜻한다. 문학 텍스트와 예술은 독자로서의 독자를 만나고, 독자는 있는 그대로 문학의 내용을 지각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어낸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순문학이라는 형태의 독서라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때의 ‘순’은 순수예술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주로서의 사회와 독자, 작가를 모두 벗어나 오로지 소설이라는 형식의 순수성만을 추구하는 독서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아이러니한 것은 이것이 순문학으로서의 독서 방법이라면, 특정한 형태의 기호나 관습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을 순문학적으로 읽어낸다면 해당 텍스트는 더 이상 장르문학이 아니게 된다.

  이처럼 순문학과 장르문학이라는 명칭은 하나의 의미를 확정하는 순간 다른 하나가 ‘타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편의 의미를 완전히 해체하려는, 일종의 정치 싸움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순문학이라는 불분명한 대상을 해체하는 순간 장르문학은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수용자들이 텍스트를 읽어내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오롯이 귀결될 수 있으리라.


4. 장르라는 해체 작업


장르는 오래전부터 텍스트를 해체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장르의 특정 요소, 문법을 알아야만 텍스트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그 반대다. 장르의 문법을 안다는 것은 오히려 텍스트를 가장 적극적으로 해체하고, 읽지 않음을 선언하는 행위이다. 하나의 작품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 사이를 배회하면서 경유하고 관통하는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구조적으로 완성된 텍스트 속에 순례하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장르’라는 경유지를 일종의 도시적 시공간으로 삼는 것이다. 장르는 거주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관통하기 위한 곳이고, “거주하기에 적당한 순환circulation habitable”13)인 셈이니 장르의 독서를 흔히 ‘계보적 독서’로 읽어내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장르 문화’의 유물론적 토대는 이러한 ‘순환’을 가속시킨다. 텍스트를 구매하여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책–비디오 대여점’을 통해 그저 감상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초기 해외의 대중문물은 조폭 상권을 경유하여 제도에 저항하는 적극적 해적 행위였겠으나 일본 문화의 완전 개방 이후 불법적으로 자료를 소비하고 유통하는 인터넷 공간의 잔재들은 그저 ‘한국이 아닌’ 형태의 기형적 문화와 비틀린 욕망이 뒤섞인 채 복잡하게 문화 소비를 이어가는 ‘음습한’ 형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2010년대를 전후한 장르 문화의 축은 초자극으로 대표되는 감각 추구,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용인받지 못할, 기형적이고 왜색적인 욕망의 컬래버였던 셈이며, 이러한 소비 지향의 장르문학에 반발하던 사람들이 고급 장르를 표방하며 서점으로 이동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이동이 처음이 아니란 점이다.

  1960~1970년 당시 한국에서 장르문학 시장을 처음으로 열었던 것은 홍콩과 대만으로부터 들여 왔던 무협지였다. 무협지는 가난한 중국인 유학생 또는 화교 들을 통해 수입되었는데, 어설픈 번역 작업을 보조하기 위해서 가필자가 문장을 윤문했고, 판매량을 위해 유명한 해외의 무협 작가 필명을 가져와 출간되었다. 이러한 가필자와 대표 필명제의 번안 작업으로 점철된 비정상적 출판문화는 결국 무협지의 질적 하락을 가져왔다. “한국사회에서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하위자들 간 협업 체계의 소비상품”14)인 무협지에 대해 김현은 “한국 중산층의 비개성적 허무주의의 발로”15)라고 분석한다. 이후 1980년대 김용의 『무협지』가 만화방이 아닌 서점을 겨냥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이러한 성공을 벤치마킹하여 대본소라는 유통 공간을 벗어나 서점으로의 양질화를 시도한 사람들이 1990년대 ‘신무협’이라 일컬어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순수와 대중의 경계를 무화하여 예술성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서사적 실험을 시도하였고, 시장의 질서에 기여하는 한편 무협이라는 질서 자체를 탈피하여 보다 고유한 문화 정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16) 그러니 이러한 경험을 했던 장르문화의 창작자들이 ‘대여점’이라는 공간을 탈주하여 서점으로 이동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그러나 여기서 더 흥미로운 건 서점으로 탈주한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터전을 서점으로 변환시킨 존재들이다. 대여 공간을 디지털 플랫폼으로 이동시키고, 한 권이라는 형식을 해체한 뒤 한 편 단위의 상품을 거래하였다. 이 같은 과정에서 ‘서사’라는 형식조차도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한다. 웹소설의 소비자는 특정 텍스트를 읽기 전 스스로의 신체와 독법을 가다듬고 특정한 부족적 지형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며, 완전히 해체된 특정 기호를 마주하는 순간 즉발적으로 감각하고 반응한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음습했’던 욕망은 다소 완화되었으나,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철저한 신자유주의 경제의 이념의 욕망과 소비 행태였다.

  전통적인 서사학narratologie 또는 이러한 개념을 조금 더 완화한 표현으로 기술한 서사 이론은 ‘시간성’을 바탕으로 한다.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이끌어내는 동사를 주목하고, 변화의 과정을 시간이라는 기호로 추출한다. 그러나 이미 해체된 상태의 텍스트 시간은 동결되었으며 그 안에서 서사적 주체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최근 유행하는 ‘회귀’ ‘빙의’ ‘환생’ 등의 형식들은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미래가 과거로 박제되고, 그 속에서 선형적 시간을 벗어난 주인공이 신적 능력을 가진 뒤 예비된—그러면서도 지연된—성공을 향해 n으로 나눠진 사건을 그저 경험할 뿐인 것은 시사적이다. 변화하는 것은 텍스트 내부의 인물이 아니라 바깥의 수용자뿐이다.

  소위 말하는 ‘고구마–사이다’라는 형식의 구조는 이 같은 수용자의 감정 변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양태이다. 소설 속의 ‘고구마’란 독자를 답답하게 만드는 상황을 뜻한다. 그리고 ‘사이다’는 이러한 ‘고구마’의 요소, 갈등을 해결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5천 자 내외로 짧게 분절된 세계 속에서 ‘고구마’를 유발하는 건 캐릭터들의 행동이나 갈등이 아니라 이미 독자가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우주 모델의 경험, 그것도 디지털 커뮤니티에서 체화된 밈들이 대부분이다. 사회의 밈은 사회의 한계를 그대로 나타내고, 그것을 해결하는 ‘환상’을 목격함으로써 독자들은 사회를 버티고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위안을 얻으며 나아간다.

  이외에도 장르가 텍스트를 해체하는 사례나 장르라는 형식이 독서의 주체에 집중된 사례는 여러 상황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를테면 ‘남성향’이나 ‘여성향’ 같은 분별이 그러하다. 최근 웹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화 전반에는 작품군을 여성적 소비와 남성적 소비로 나누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의 ‘남성’과 ‘여성’은 신체적 성이나 사회적 성과는 관련이 없다. 소위 말하는 남성향은 남성 독자들이 주로 좋아하는 욕망을 구현하는 소설을 일컫는다. 반대로 여성향은 여성 독자들이 주로 좋아하는 욕망을 구현하는 소설을 일컫는다. 성향과 상관없이 모두 로맨스나 판타지, 무협 등의 장르가 존재한다. 남성의 신체만 등장하는 BL이 여성향으로 가 있는 사례나, 또 반대로 여성의 신체만 등장하는 GL을 남성향의 사례와 여성향의 사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 환상적인 세계에서의 모험담을 다룬 판타지를 남성향·여성향 또는 중성향까지 나눈 사례를 보면, 이제 ‘장르’라는 것은 소비자들의 집단과 권익을 대변하는 또 다른 이름이 되었음을 상기하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에 장르라는 명칭이 붙는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작품군이 아니라 한 명의 작가, 한 명의 감독 또는 한 종의 작품에도 ‘장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러한 소비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던 고전적 예술자와 예술의 체계를 분해한다. 그러니 오랫동안 여겨왔던 ‘장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시대의 구성원을 받아들이듯 ‘장르’라는 용어 역시 바꿔보자. 그것이 장르를 이해하는 첫 여정이 될 것이며, 마침내 장르를 해체하는 여정이자 연대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 1) 아니스 바와시·메리 요 레이프, 『장르: 역사·이론·연구·교육』, 정희모 외 옮김, 경진출판, 2015, p. 52.
  • 2) 김성민, 『일본을 禁하다』, 글항아리, 2017, pp. 26~29 참조.
  • 3) 같은 책, pp. 38~43 참조.
  • 4) 같은 책, pp. 104~21 참조.
  • 5) 같은 책, p. 119.
  • 6) 남영, 「한국 게임 산업의 형성: PC게임의 기원에서 온라인게임 산업의 정착까지」, 중앙대학교 대학원, 2009, p. 16 참조.
  • 7) 김성민, 같은 책, p. 146 참조.
  • 8) 캐스린 흄, 『환상과 미메시스』, 한창엽 옮김, 푸른나무, 2000, p. 55 참조.
  • 9) 폴-로랑 아순, 『환상의 정신분석』, 이오갑 옮김, 한동네, 2022, pp. 21~26 참조.
  • 10) 같은 책, pp. 11~15 참조.
  • 11) 리처드 카니, 『재신론』, 김동규 옮김, 갈무리, 2021, p. 45.
  • 12) 강경덕,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대한 비판 및 재구성: 발리바르의 ‘자유 – 평등’ 명제의 관점에서」, 『인문학연구』 제56권 제3호,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7, pp. 54~55.
  • 13) 폴 비릴리오, 『속도와 정치』, 이재원 옮김, 그린비, 2004, p. 49.
  • 14) 윤재민, 「무협적 글쓰기 혹은 1990년대적 남성성의 포스트 냉전문화론: 유하의 『무림일기』, 김영하의 『무협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제51집,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8, pp. 407~10.
  • 15) 김현,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허무주의의 부정적 표출」, 『김현 문학전집 2: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사회와 윤리』, 문학과지성사, 1992, p. 228.
  • 16) 성민엽, 「한국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문학과사회』 2002년 여름호, 문학과지성사, 2002, pp. 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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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적의 아이를 키워라 ― 『에너미 마인』

『에너미 마인』과의 만남은 뭐랄까…… 운명적이었다. 때는 전 국민을 잠 못 들게 한 12월 3일로부터 열흘가량이 지난 어느 평일 저녁. 나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니 늘 눈이 피로했고, 집중력도 떨어져 독서는커녕 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매일매일 현실의 뉴스에 압도되어 실핏줄이 바짝 선 눈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봤더랬다. 가장 나를 괴롭혔던 건 ‘지금 소설 같은 걸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프리랜서인 나에게는 정해진 마감 날짜가 있었다. 도저히 가상 세계에 몰입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시시각각 디데이는 다가왔다. 나는 점차 초조함과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글을 써야 한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돼!’ 일단 잃어버린 텍스트의 감각부터 되찾을 목적으로 독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집 소파 옆에는 사거나 선물 받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한참을 살펴봤는데도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내 신경은 계속 휴대폰과 그날 이후 ASMR처럼 틀어 놓는 뉴스 채널으로만 쏠렸다. 이러다가는 또 한 줄도 못 읽겠다 싶어서, 일단 눈을 감고 책탑을 더듬다가 아무 책이나 붙잡았다. 그게 바로 이 샛노란 표지의 『에너미 마인』. 무려 1979년에 쓰인 SF이다. 처음엔 내 손으로 골랐지만 우려스러웠다. 하필 지금, 급한 작업에조차 집중을 못 하는데 가상의 시대, 미지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 외계인 소설에 몰입할 수 있을까? 나중에 좀 더 심적 여유가 있을 때 읽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보드라운 표지의 감촉에 이끌려 책을 펼쳤고, 단숨에 몰입해 그날 새벽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지금은 세상의 어떤 신묘한 흐름이 나에게 이 책을 만나게 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가 동생 시험 날에 예수님이 상장을 하사하는 꿈을 꿨던 것처럼……. 난 아직 종교가 없지만. 소설이 공개된 1979년은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냉전 시기다. 그런 국제 정세를 비유하듯 소설 안의 두 종족, 드랙과 인간 사이에도 긴 전쟁이 진행 중이다. 드랙은 손가락이 세 개에 노란 피부를 가진 외계 종족이다. 우리의 주인공 군인 윌리스 데이비지는 전투 중 적군인 제리바 쉬간과 함께 무인 행성 ‘파이린 4호’에 조난 당한다. 시대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대입해 보자면, 데스 매치 중이던 미군과 소련군이 함께 무인도에 불시착한 셈이다. 행성에서 눈을 뜬 두 존재는 서로를 인식하자마자 다시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곧 괜한 짓이라는 걸 깨닫는다. 중요한 건 적을 죽이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제 두 종족 간의 원한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인간과 드랙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동굴을 아늑하게 꾸민다. 낮의 노동 후에는 긴 밤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즐길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무료함을 달래 줄 만한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무인도와 달라 파도에 떠밀려 오는 새로운 아이템조차 없다. 날씨 변화 이외의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에,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허한 공간에서 오로지 두 존재의 회상만이 지루함을 달래 준다. 우리의 인간 주인공 데이비지는 외로움에 취약하다. 적군이었던 쉬간마저 없었으면 분명 미치거나 자살했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쉬간 역시 마찬가지다. 두 종족은 완전히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세월도 다르지만 절대적인 고립은 양극단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제리바는 데이비지의 언어(영어)와 그의 농담을 이해하게 되고, 데이비지는 제리바의 족보와 드랙의 역사를 매일 밤 경청한다. 핏줄의 기록을 달달 외는 게 이 드랙이라는 종족의 특성이므로, 다행히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극 초반부 전개이다.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아 있다. 고난은 계속된다. 드랙의 또 다른 특성은 스스로 번식이 가능한 양성체라는 점이다. 제리바는 삭막한 행성에서 임신을 하고, 결국 출산 중 사망한다. 데이비지는 쉬간의 부탁으로 적이자 친구인 그의 배를 찢는다. 그렇게 샛노란 드랙 아기 자미스가 태어난다. 데이비지는 친구에게 섣불리 약속한 대가로 이 외계인 아기를 키워야 한다. 생존기에 육아가 더해진 것도 고달픈데, 자미스는 어마어마하게 발육이 빠르고 호기심도 왕성하다. 자미스는 데이비지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제 예정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난 인간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지.” 나는 그때 어린애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 “삼촌, 어른이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생기나요?” 나는 앉아서 자미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다른 두 손가락이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데이비지는 너와 내가 어떻게, 왜 다른지 설명해야 한다. 왜 이 행성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는지도 알려 주어야 한다. 쉬간과의 전투와 전쟁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그 모든 갈등과 유리된 행성에서 태어난 자미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이 행성 밖에서도 ‘삼촌’인 데이비지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 자미스는 언젠가 행성을 떠나면 통역사가 되어 전쟁을 끝내게 돕고 싶다고 말한다. 두 존재의 애절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성인 인간과 드랙 아이, 대척점의 존재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소설은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안에서 개인과 개인이 공유한 시간은 상황이 급변한다 해도 동영상 파일처럼 간단히 삭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은 결말이 도달하도록 두 종족의 평화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종족 안에서도 깊어 가는 혐오와 차별의 현상을 짚어 낸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홍보 문구에 적혀 있듯이, 『에너미 마인』은 무려 ‘전 세계 최초로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동시에 석권한 소프트sf의 걸작’이다. 이렇게 요란하게 상을 휩쓸면 기대감보다는 ‘어디 한번 보자.’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집중력 부족에 더불어 조금 삐뚤어진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결국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SF라는 장르와 외계 종족과의 전쟁이라는 오락적인 배경으로 작가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의 가치, 공존에 대해 말한다. 호불호 없이 흥미로운 전개는 다른 종족의 캐릭터에도 쉽게 이입하게 하고, 매력적인 대화와 문체는 독서에 속도감을 더한다. 나에게 SF는 정말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어려운 장르다. 스스로도 정확히 취향을 가늠할 수 없다. 어렸을 땐 스페이스 오페라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마블 시리즈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가장 좋은 걸 보니 아닌 것 같다. 절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작품에 심장이 직격타를 맞을 때도 있고, 분명 내 취향일 거라 생각하고 접했는데 그저 한편의 과학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작품도 있었다. 복불복이 크다보니 주변의 추천을 받은 게 아니면 선뜻 시작하기 꺼려진다. 그런 와중에 만난 『에너미 마인』은 쓰는 욕망을 되찾아 주는 것은 물론 어지러운 세계에서 소설이 가지는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sf 장르에 장벽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한다. 그렇게 한밤의 독서가 끝나고……. 나는 다음 날 이제 다시 힘내서 쓰자, 하고 의지를 다지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과연 마감을 지킬 수 있을까? tmi. 이 리뷰 원고도 지각함…….

격월간 릿터 조예은 갈등sf장르문학리뷰소설전쟁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정원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계간 파란 정원 단속정체성시선타자고맥락저맥락윤혜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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