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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파란 | 2024년 봄호(제32호)

미래에서 올 ‘아름다운 영혼’의 빛살 ― 황동규 시 「즐거운 편지」

이찬 문학평론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저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09),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2010), 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2011), 한국 현대시론의 담론과 계보학(2011)을 출간했고, 문학평론집 헤르메스의 문장들(2012), 시/몸의 향연(2019), 감응의 빛살(2021), 사건들의 예지(2022), 문화평론집 신성한 잉여(2022)를 썼다.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시와 영화와 비평이 더불어 감응할 수 있는 융합과 통섭의 공간을 모색하고 있으며,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이미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다.

우리의 성장 문법과 교양 서사의 문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는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은 인기작이자 우리 시의 정수를 집약하고 있는 수작(秀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한 아이돌 스타를 통해 비로소 대중적인 인지도와 광범위한 영향력을 얻게 된 김소월의 개여울과는 달리, 그냥 그 자체로 우리를 오랫동안 사로잡아 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즐거운 편지의 어떤 마력과 반향이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마음을 붙들어 온 것일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에 대한 마땅한 풀이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작품이 매우 상투적인 독법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 그 방식 그대로 여전히 감수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즐거운 편지영원한 사랑의 반어적 표현이란 문구로도 규정될 수 없으며, 이를 예술적 모험의 중핵이나 이면적 주제의 근간으로 삼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을 다시 들여다보는 자리에서 시작해보자. 주변의 문인들과 이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를 몇 차례 나눈 적이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즐거운이라는 말이 거느리고 있는 미묘한 아이러니의 구조와 그 반전의 효과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둔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 실질적 진의(眞義)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려는 자리에 가장 순도 높은 집중력을 기울인다는 사실 역시 거듭 발견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움직임은 물론 이 시를 충실하게 이해하기 위한 필수 사항일 것이며, 그 핵심 관건에 잇닿은최전방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다.

  그러나 편지의 수신자에 대한 우리의 오랜 습관과 틀에 박힌 통념은 이 시에 들어박힌 중층적 아이러니의 두께를 꿰뚫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상식의 함정이자 완강한 벽처럼 작용하는 듯 보인다. 그것의 진면목(眞面目)을 마주할 수 없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은밀하게 가려진 맥락을 꼼꼼하게 되짚는 자리에서, 즐거운 편지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이 그 상투성의 울타리를 뚫고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편지에 달라붙는 우리의 관습적 감각과 상투적 기대감이 오히려 이 작품의 심층적 이해를 방해하는 일종의 장애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단번에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1958년 약관(弱冠)의 청년 황동규가 현대문학에 등단작으로 게재한 즐거운 편지는 과연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였던 것일까? 그것에 오랜 세월로 쟁여진 저 익숙한 손의 감각이 일러주듯, 그것은 결국 그대에게 시인이 전하려던 속마음을 담은 메신저 같은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즐거운 편지는 전통 연시(戀詩)의 계승자이자, 그 문법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는 것은 그야말로 지당한 일 아닐까?

  이와 같은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표상되는 교양소설의 보편적인 문제설정을 피해갈 순 없을 듯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각인된 저 생생한 감각의 비늘과 그 -실존의 분위기 전체를 가로지르는 세계의 살속에서, ‘아름다운 영혼과 그것이 이룰 우미와 존엄의 세계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실현되기 어렵다는 그 둔중한 진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진실은 이른바 근현대로 지칭되는 우리 문학 전체의 진상(眞相)지나친 솟구침(Verstiegenheit)’으로 갈피 짓거나, ‘식민지시대 문학사 전체의 특이점을 실패한 교양소설로 호명했던 몇몇 비평가들의 핵심 논제로 표상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동주가 꽃처럼 피어나는 피로 아로새겼고, 김수영이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라고 언명했으며, 불세출의 비평가 김현이 프랑스 문학을 피부로 느낀다고 믿은 정신의 불구자라고 고백했던 자리, 그리하여 저렇듯 뒤틀린 우리의 성장 문법과 일그러진 교양 서사의 문제는, 앞선 의문들에 기필코 가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또한 우리 모두의 감각적 실존에 깃들여진 근본 모순, 우리 각자가 나날의 삶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과잉 억압의 깊은 상흔이자 자기분열의 심각한 혼돈 상태, 그 가공할 부조리의 진실들에서 태어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따라서 이 진실들이란 우리 모두의 성장 문법과 그것을 기반으로 삼은 교양 서사아름다운 영혼에 이르는 황홀경의 비단길이 아니라, 세상에 켜켜이 쌓인 억압과 부조리의 난맥상들과 타협하는, 또 다른 거짓 화해의 계단이자 굴종의 진창길이었음을 암시하는 김수영의 설움의 징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현대사에 드리워진 세계의 살이란 그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 식민지와 군사 독재의 파행적 현대화 과정에서 빚어진 폭력과 살해의 끔찍한 참상, 억압과 체벌의 살풍경들로 가득 찬 것이자, ‘헬조선이란 표어에 휘감긴 지극한 절망감과 이 개 같은 땅이라는 고단한 욕지거리로 넘쳐났던 것이 그야말로, 사실 그 자체였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맥락은 즐거운 편지에 대한 관행적 해석의 문제가 사실상, 우리네 삶에 깃든 경험적 내용의 진실성이나 그 감각의 정직성이라는 지극히 난처하면서도 곤욕스러운 부조리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 현대사의 여러 영역 가운데서도, 정신사의 궤적을 관통하는 주요 문제들과 밀접하게 결부된 것이 틀림없다. 더 나아가, 그것은 현재진행형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탈()현대의 세계에서 앞으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오롯한 성장의 문법과 바람직한 교양의 서사를 새롭게 상상하고 기획하는 중차대한 문제로 확장될 것이 자명하다. 그리하여, 여기서 태어날 인문학적 내용이나 그 이행의 과정에서 담보될 우리의 성장 문법과 미래 방향성에 대한 근본개념이야말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에 대한 해석의 적확성 또는 그 객관성의 지평을 확보하려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 부단히 참조하고 탐색해야 할 핵심 전제일 것이다.

  따라서 즐거운 편지를 둘러싼 해석의 문제는 그저 그 적확성과 객관성이라는 단순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문학예술의 해석학적 다양성이라는 협소한 차원을 넘어서, 인문학적 가치의 당대적 내용과 그것이 꿈꾸어야 할 새로운 미래 전망이라는 훨씬 더 큰 범주의 문제와 마주치도록 강제한다. 이 문제는 또한 인문학적 가치를 새롭게 인지하면서, 기존과는 다르게 그것의 미래상을 새롭게 사유하고 그것을 미리 실험해 보는 창조적 계기를 촉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즐거운 편지의 뒷면 깊숙이 감춰진 자아 성장의 모티프와 교양 서사의 문제는 나날의 삶 속에서 매 순간 마주치는, 우리 근현대사 전체의 세계의 살로 덧씌워진, 저 남루한 모더니티의 문제와 결부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저토록 끈덕지게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낙후성, 그 무수한 부조리 현상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현재진행형의 실천을 통해 그것을 극복해가려는 화용론적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깊숙이 패인 영혼의 상처이자 미래 시점의 고단한 영광으로 남겨질 우리 안의 식민주의를 해체-재구성하는 첨예한 문제를 도래하게 할 것이다. 김수영이 오래전 제기했던 모더니티의 문제를 넘어 21세기에 다다른 바로 지금-여기, 이 역사적 현재의 지평에서 우리가 실제로 만들 수 있으며, 꿈꾸어 갈 참된 성장의 문법과 합당한 교양의 서사는 과연 어떤 내용과 비전으로 채워질 것인가에 따라, 즐거운 편지에 대한 적확한 해석과 객관적 평가는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해석과 평가는 즐거운 편지주위를 감싸고 도는 청년 황동규의 문학세계에 대한 정당한 독해나, 첫 시집 어떤 개인 날의 문학사적 위상을 재검토하는 작업과 다시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 시사(詩史)를 위시한 그 모든 문학사적 위상의 적확한 자리매김이란 결국, 기존의 문학 장에서 지배적 안정성을 구축하고 있는 지식의 체계이자 그 관행적 유통 과정인 교육 내용의 승인 절차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역사 자체의 돌발 상황과 결부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문학 텍스트가 어떤 범주에서 얼마큼의 충격과 공백의 강도를 수반하면서 돌발 상황의 크기와 파급력을 불러일으켰느냐에 따라, 그것이 발생시킨 진리-사건의 실질적 위상이나 그 역사적 가치의 의미 진폭은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몇 가지 의문을 다시 던져보자. ‘우리는 과연 즐거운 편지에서 한 철학자가 사건의 자리라고 일컬었던 일종의 ()’ 상태, 공백으로서의 진리-사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명명할 것이며, 그것을 일관되게 탐색하려는 후사건적 충실성은 그것의 해석 과정에서 과연 발휘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의문들이야말로, 이 글에서 수시로 타오르다 번쩍거리며 이내 사라져버리는 꽃불 현상으로서의 진리, 그것의 기원을 이루는 자리일 것이다. 아니, 그 발원지이자 종착지에서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또 다른 의문들을 낳는 근원적 공백의 자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의문들은 법고창신(法故創新)’의 터전으로서의 거듭남이라는 현재진행형의 변화과정 자체를 매 순간 우리가 다시 실행할 수 있는가의 난제(難題), ‘영원한 아포리아로 언명될 수 있을 이미지 사유의 별자리만을 남기게 될는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창조적 생성의 진행 과정을 통해서만 그 말의 참된 불꽃을 담보하게 될, 우리의 가슴 벅찬 성장의 문법과 아름다운 교양의 서사가 우리의 삶과 문학 자체에 오롯한 살갗으로 새겨지고 뼈마디로 들어박힐 수 있느냐의 어려운 문제와 잇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나날의 삶에서 우리가 그것을 직접 이행(履行/移行)’하고 실현할 수 있는가의 영원한 아포리아’, 그것을 매번 다시 불러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품은 현재진행형의 실천적 난제야말로, 저 의문들에 깃든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자리일 수밖에 없기에.


전통 연시의 계승자, 숨겨진 교양의 서사

 

  즐거운 편지는 언뜻 우리에게 익숙한 연시(戀詩)’ 또는 사랑시의 갈래로 수렴될 수 있을뿐더러, 그 계보를 잇는 자리에서 마련된 작품인 듯 보인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읽을 때 이 시가 품고 있는 서정적 분위기와 더불어, 아름답고 고상한 감각을 향한 본원적 희구가 좀 더 강렬한 기세로 증폭되는 듯하다. “그대사이에 놓인 마음의 거리, 그 단절감에서 오는 괴로움사소함으로 바꾸어놓는 그 필연성의 자리에 이 시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가 지금 품고 있는 절절한 사랑의 느낌이 미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마음의 상태로 진화할 것임을 미리 예감하고 앞질러 다짐하는 자리에서, 이 시는 자신이 품은 서정성을 극대화한다고 하겠다. 나아가 그 뒷자락에 자아 이상또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일컬어질 수 있을 신성한 그림자를 어른거리게 하면서 그 분위기 전체를 앙양(昂揚)’의 자존감으로 이끌어 올린다. 작품 전문을 다시 꼼꼼하게 뜯어 읽어보자.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姿勢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落葉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즐거운 편지전문어떤 개인 날(中央文化社, 1961)

 

  첫머리의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에서 중핵을 이루는 부분은 배경사소한 일일 것이다. 이 시어들은 그대가 맺는 관계의 밀도와 형세를 어렴풋이 드러낸다. 특히 배경이란 시어는 그대의 관계가 상호 교감으로 이루어진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품고 그 안에 가두어둔 외사랑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배경을 이렇게 읽을 때, “내 그대를 생각함사소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행로가 가시적인 차원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그대에게 란 존재는 눈앞에서 생동하는 사랑의 박진감을 부여하고 다이내믹한 역동성을 불러일으키는 실행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매일 같이 그대생각하사랑의 주체이긴 하지만, “그대에게 는 양자의 관계 자체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그저 저만치가닿을 수 없는 거리로 동떨어진, 관조적 자연 풍경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살핀 사소한 일에는 사랑에 빠진 자가 품을 수밖에 없을 괴로움과 더불어 그것이 초래하는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을 극복해가는 마음 수련의 과정이 여울져 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랑이 안겨주는 괴로움을 실존론적 자존감을 드높일 수 있는 정신 성장의 계기이자 인격 수양의 자양분으로 삼으려는, 또 다른 마음의 움직임을 그 뒷자락에 즐거운예감으로 드리운다. “사소한 일이라는 시어는 뒷부분에서 사소함이란 명사형 어구로 다시 나타나는데, 이 어구에는 커다란 변화가 담겨 있다. 이후 시간에서 펼쳐질 무수한 괴로움의 경험 속에서도, ‘자아 성장또는 영혼의 성숙을 미리-당김의 시간의식속에서 선취해 오려는 전미래시제(future antérieur)’의 예감과 욕구가 말없이 주름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즐거운 편지배경에선 미래지향적 추동력으로 밀어 올려진 내면의 상승감이 즐거운화합의 빛살, 또는 숨은 조화의 아름다운 광휘로 은은하게 스며 나온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광휘는 이 시의 배경에 널따랗게 스며있어 겉면에선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저 숨은 조화야말로 즐거운 편지라는 수려한 제목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참된 이유이자 감춰진 맥락의 꽃무덤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즐거운 편지의 수신인이 그대가 아니라, “언젠가로 아로새겨진 불특정 장래 시점에서 성숙해 있으리라 예감되는, 혹은 한없이 잇닿은자기성찰을 여전히 욕망하고 있을 미래의 일 수밖에 없는 까닭 역시, “언젠가하염없는 아름다움으로 드리워질 숨은 조화의 광휘에서 온다. “편지그대를 향한 것도 아니며, “그대에게 발신조차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즐거운 편지내 나의 사랑이 앞으로 치러내게 될 무수한 괴로움을 그 언젠가사소한 일바꾸어버릴수 있겠노라는 정신적 성숙의 여유로움, 그 휘황한 날갯짓을 펼쳐 보이려는 헤르메스의 날개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 갈 메시아적 영혼의 자기 암시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한 종교적 완결성보다는 인간신(人間神)’이 되려는 욕망으로 불타는, 하나의 완성된 인격으로서의 절대정신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을 전미래시제와 맺을 은밀한 맹약(盟約)‘이자, 이면계약서라는 의미의 겹주름을 에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 자청한 아름다운 구속일 것이며, 그만큼 밝고 건강하고 즐거운자기성찰의 강제력을 암시한다.

  “1”의 후반부를 이루는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에서 의미론적 특이점을 이루는 자리 역시, “괴로움사소함이라는 두 시어일 것이다. 이 시어들 또한 다른 미래로 열린 시간의 질곡을 미리 예감하면서, 부단히 이루어갈 자기성찰을 상상하고 다짐하는 자리에서 빚어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인생무상이라는 시간성의 신()이 만드는 무한한 변이 현상들 가운데서도, “괴로움의 주체를 뒤바꿔놓는 일종의 정신적 모험을 감행했던 자리에서 태어난, ‘파르마콘(pharmakon)’의 흔적처럼 보인다.

  이 모험이란 가 현재 시점에서 겪는 사랑괴로움언젠가로 표현된 불특정 장래의 시점에서 그대괴로움으로 바뀔 수 있는, 어떤 가상(假想)의 상황을 생각해 보려는 시인의 적극적태도에서 온다. 이 태도는 차후의 시점에서 괴로움사소함을 느끼는 주체들의 능동-수동의 위치 전환을 능동적으로 예감하는 자리로 진화한다. 시인은 이러한 인생사의 국면 전환을 정신적 성숙또는 아름다운 영혼의 은은한 분위기로 암시하면서, 이를 향해 발돋움하려는 미래지향적 자아를 뒷면에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이와 같은 은폐-탈은폐의 변주곡은, 시인 황동규의 예사롭지 않은 지혜와 통찰력을 암시하는 반증의 징표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범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채 스물도 되지 않은 미성년의 고교생이 즐거운 편지를 지었다는 경이로운 사실에서 비롯할 것이다. 이 비범함에는 이른바 인생유전(人生流轉)’으로 집약되는 차원 높은 삶의 지혜가 묻어 있다. 그리고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 사유의 균형 감각과 더불어, ‘대대(對待)’라는 말로 일컬어지는 음양(陰陽)의 수평적 운행 원리와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역동적 평형 운동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확장해 보면,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라는 구절 역시 자연스러운 해석의 선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사소함에 상반된 의미가 동시에 덧씌워져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다소 난해한 문제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다른 미래로 열린 시인의 원초적 지향성에서 살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순리대로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우선 그대사랑해 온 시간은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그대가 알 수조차 없었을 의 일방적인 외사랑이었거나, 이 둘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던 짝사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저 관조적 자연 풍경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시 주의해야 할 부분은,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에서의 그 사소함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에서의 그것이 상반된 방향성을 겨냥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앞부분에서 이어져 온 그 사소함이 과거 시점에서 배경에 지나지 않았던 그 의미 없음의 상태를 나타낸다면, 뒷부분으로 이어져 갈 그 사소함이란 괴로움이 이미 사소함으로 바뀌어버렸을 전미래시제의 정신적 성숙과 인격적 완성 상태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은 그 사소함을 하나의 문장 단위에서 과거와 미래를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마치 타임머신과도 같은 시간적 이동체로 설정하는 일종의 의미 실험을 감행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대의 사이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과 국면에 따라 그 내포적 의미가 달라지는 가변적인 양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 사소함이 지닌 내포적 의미의 가변성과 양면가치는 “2”에서 나타난 다양한 이미지들의 윤곽선을 꼴 짓는 핵심 인자로 기능한다. “2”의 첫 구절로 등장하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에서 눈에 띄는 특이성의 면모는, 동일 어구들의 잦은 반복이 불러들이는 한없이 잇닿은그 연속적 리듬감과 지속성의 분위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기다림을 절실함의 깊이로 바꾸어버리는 감응의 파급력을 매우 밀도 높은 예언자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기다림으로 전환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것이 그대에게 기필코 전해지지 않을 수취인불명의 우편물 같은 것이자, 그야말로 어떤 배경처럼 그대의 마음이나 삶의 향방에 어떤 파문도 일으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에서 부르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리

 

  「즐거운 편지의 한복판에 아로새겨진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라는 이미지는 현재 시점까지 잇닿아내 나의 사랑의 연속성에 대한 자기성찰과 더불어, “언젠가는 그것이 그칠지도 모른다는 묵시적 뉘앙스를 풍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을 알리는 변곡점의 이미지로 해석된다. 이 대목에서 즐거운 편지가 수록된 첫 시집 어떤 개인 날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겨울” “” “과 같은 유사 이미지 계열을 불러올 필요가 있을 듯하다.

  특히 이들이 차갑고 어둡고 단단한 음()의 분위기를 내뿜으면서, ‘힘겨운 내적 고통(수련)의 과정깨끗한 정화의 의식 절차를 동시에 암시하는 양면가치의 의미 벡터를 발산할뿐더러, 공들임의 함수를 상징하는 말꽃의 이미지로 기능한다는 특이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이에 따르면, 위의 인용 구절 전체는 지금까지 잇닿아 온 내 나의 사랑을 자기성찰의 시선으로 다시 응시하기 시작했다라는 뜻으로 새롭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겨울” “” “과 같은 형상들이 겉면에서 내뿜는 고난과 시련의 이미지는 그 뒷면에서 시인의 내적 수양의 깊이와 정화 의식의 견고함이라는 이면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올린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맥락은 “1”에서 의미론적 불꽃으로 타올랐던 인생유전의 지혜와 극즉반의 통찰력을 다시 불러들인다. 나아가 이들 모두가 서로를 마주 보고 함께 울리는 원격 감응의 빛살과 그 오롯한 분위기를 거죽 위에 은은하게 펼쳐놓는다.

  이러한 맥락을 해석의 기반으로 삼을 때,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에 주름진 이면적 주제의 반어적 표현 방법, 또는 심층적 의미 구조의 역설적 발산 회로를 꿰뚫어 볼 수 있을 듯하다. 달리 말해, 이 작품에 숨겨진 비의(秘義)의 결절점으로서의 자아 성장교양 서사를 자연스럽게 감수하게 될 것으로 짐작된다. 더 나아가, 겉으로 드러난 사랑그침이나 그대를 향한 기다림의 자세가 아니라, 그 뒷면에서 말없이 드리워지는 미래지향적 주체의 정신 성장의 예감과 더불어, 그 시간의 숱한 질곡을 뛰어넘어 고차원적 교양을 선취하려는 자리에 이 시의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괴테와 쉴러가 같이 이루려 했던 아름다운 영혼’, 우미와 존엄의 세계를 미리-당김의 차원에서 선취하려는 미래지향적 기투(企投)즐거운 편지의 이면적 주제와 예술적 사유의 불꽃이 빠짐없이 휘감겨 있음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려는 시인의 또 다른 실존론적 기획투사야말로 즐거운 편지의 본원적인 생명력의 약동, 그 내적 추동력의 꽃불 현상을 이루는 것으로 추론된다. 따라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라는 시구는 내 나의 사랑이 초래했던 그 괴로움이 무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소함으로 뒤바뀔 수 있는, 영혼의 내적 성숙 과정을 미리 예감하는 또 다른 자아를 뒷면에 전제한다고 하겠다.

  물론 이 성숙의 예감은 현재진행형으로 실천될 행동의 결단이 아니기에, 추상적 예단(豫斷)의 표명에서 오는 성마른 자기 확신의 선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동시대 비평가의 탁월한 통찰처럼, ‘자기 정서의 폐쇄적인 몰입에서 비롯하는 나르시시즘의 공개 선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예감의 이미지는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자기성찰의 지속성을 뒷면에 전제하는 순정한 의욕의 구절과 결합한다. 나아가 쉴러의 우미와 존엄의 세계를 넘보는 자리로 나아가려는 시인의 생득적인 지향성을 싣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것은 앞 구절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에서 풍기는 정신적 치기(稚氣)를 소리 없이 가라앉히는 견고한 진정(鎭靜) 효과를 발생시킨다. 시인은 이 두 구절을 자기성찰의 은은한 분위기로 에둘러진, 어슴푸레한 실루엣의 느낌으로 연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어디쯤이라는 불특정 미래 시점까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감되는, 그 고행의 시간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속적 신뢰감의 양태로 바꾸어버리는 분위기 전환의 뉘앙스를 흩뿌려놓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기 충실성의 확신과 신실한 지속성의 분위기를 그 배경에 가로놓인 자연 풍경의 한결같은 변화이미지로 드리워놓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구절은 즐거운 편지의 이면적 주제를 가장 밀도 높게 응축한 말꽃의 이미지로 보인다. 그것은 이 작품 전체를 타고 흐르는 미래 시점의 추상적 예감이나 섣부른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수행하려는 자기성찰이 얼마나 신실한 자세를 다짐하며 펼쳐지고 있는지를 반증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꽃이 얹어진 이미지의 꽃불이자 시의 눈, 시안(詩眼)으로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다만 그때라는 말은 내 나의 사랑그칠어디쯤의 장래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의 미래 시간을 미리 상상하고 앞질러 다짐하겠노라는 실행 의지를 묵시적으로 거느린다. 여기서 한정을 나타내는 부사어 다만은 시인의 관심과 집중력이 그대의 미래 시점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 시점에서 아름답게 성숙해 있을 의 영혼에 대한 희구로 쏟아지고 있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따라서 에게 진실로 진실로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그대도 아니며, “한없이 잇닿은” “내 나의 사랑의 영속성도 아니다. “다만중요한 것은 내 기다림의 자세에 켜켜이 주름져 갈, 그야말로 그 세월의 흐름과 함께 들이닥칠 괴로움일 것이며, 이 자리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자기성찰의 자세일 것이다. 따라서 내 기다림의 자세란 한편으로 내 나의 사랑이언젠가” “그치게 될 바로 그때의 그 시점까지, “의 자기성찰이 계속되리라는 예감을 적극적으로 선언할 수 있는 내적 충실성의 태도를 동반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기성찰의 충실성이 수반하게 될 정신 성숙의 예감과 더불어 인격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고행의 다짐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 작품 전체의 말꽃으로 기능하는 내 기다림의 자세1958년 당시 황동규의 성장 문법이나 교양 서사자기 정서에의 폐쇄적 몰입이라는 나르시시즘의 한계와 모순에 갇혀 있었음을 예증하는 것이 틀림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인의 일관된 자기성찰의 예감과 묵시적 다짐의 충실성을 은은한 뉘앙스로 다시 감돌게 한다. 그 뒤를 떠받치는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라는 이미지에 의해 그 자세에 깃든 자기성찰의 지속적 일관성과 더불어 그 미래로 열린 시인의 예감과 확신이 신뢰할만한 것임을 보증받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내 기다림의 자세라는 말꽃은 시인이 현재 시점에서 직접 겪고 느끼는 사실성과 생동감의 상연 무대가 아니다. 그것은 불특정 미래 시점의 가정적(假定的) 상황 설정 속에서 도래하리라 예감되는 자아 이상이나 서구적 교양의 독서 체험에서 온 아름다운 영혼을 그 배경에 숨겨두고 있다는 점에서, ‘관념적 추상성의 차원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내부 혹은 삶의 추상이나 간접적 교양 체험의 내면화라는 말들로 집약될 수 있을 비평 대가들의 비판적 시각과 부정적 어조 역시, 이와 같은 테두리에서 온다. 이들 역시 황동규의 초기 시편들을 가로지르는 삶의 추상이나 간접적 교양 체험을 비판적 안목으로 지적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다이내믹변화가 이후의 시편들에서 충실하게 구현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라는 종결부의 이미지는, 청년 황동규가 품은 미래지향적 정신 성장의 예감과 더불어 그 기나긴 괴로움의 미래 시간을 내적 성숙의 도약대로 바꾸어버리려는 시인의 자기 확신을 암시한다. 이 시의 제목이 즐거운 편지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편지그대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때에 이른 장래의 시점에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해 있을 자신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현재 시점의 괴로움을 미래 시점의 사소함”, 아름다운 영혼의 드넓은 수용력으로 바꾸어버릴수 있는 그 장구한 시간의 드라마를 적극예감하는 자리에서 타전될 것이다. 그러나 결단코 수신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즐거운 편지가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우편물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미완결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품은 채, ‘파르마콘(pharmakon)’의 의미론적 차이 운동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자기 충실성의 빛과 그늘

 

  청년 황동규의 초기 시편들에 대한 기존의 비판적 언급이나 그 지적의 내용은 물론 타당한 일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즐거운 편지에 잠긴 담대하면서도 정결하고, 섬세하면서도 강직한 자아 성장의 의지와 더불어, 자기 인생길 전체를 걸 만큼의 내적 충실성의 고뇌로 가득 찬 미래지향적 거듭남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표기되는 전후(戰後)의 참혹한 현실과 그 폐허 상태의 부조리, 당대 우리 사회의 지극한 모순과 혼란상을 텍스트의 속살을 엮는 체험의 실질적 무늬들이나, 그 이미지 지력선 전체를 마름질하는 예술적 사유의 불꽃으로 벼리어 두지 않았다는 데서 기원할 것이다.

  따라서 즐거운 편지에 포함된 추상 구도의 한계와 간접적 교양 체험의 모순이란 지극히 자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겸허하게 자기 충실성의 광휘를 향해 뚜벅뚜벅 내딛어가려는 시인의 기백이란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저 불굴의 기백을 자기 내면에 가득 채워 넣으려는 전미래시제의 예감과 더불어 지금-여기의 현실을 앞질러 기대하는 실천적 다짐의 자리에서, 청년 황동규는 자기 충실성으로 이행해 가는 부단한 자기 수양(修養) 운동을 시작했던 것으로 직감되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좀 더 복잡한 다중초점의 시각에서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당대의 거의 모든 문인과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1958년 청년 황동규 역시 서구 문화의 간접적 교양 체험의 내면화로 표상될 수 있을, 그 시대의 질곡 자체를 벗어나진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1967년 동시대의 문학청년 김현이 아프게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교양 체험으로 덧씌워진 저 간접적이란 수식어는 착란된 문학 풍토또는 우리의 착란된 문화전체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두의 보편적 생의 그늘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모더니티의 문제라는 이름으로 우리 몸 한가운데 촘촘하게 들어박힌 온갖 더러움의 비늘들을 절절한 마음으로 읊조리는 자리에서 나온, 진실의 사막을 포착한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작고한 비평가 황현산이 르네의 바다에서 김현과 ‘419세대의 문학을 맨주먹 붉은 피라는 노랫말로 암시하려 했던 이유와 배경 역시 이와 같다. 그야말로 처절한 운명으로 주어진 저 후진적 모더니티의 멍에를 온몸에 걸머지고, 맨몸으로 싸워나가야 할 시대적 사명이 ‘419세대에게는 장구한 시간 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419’라는 찰나의 해방 공간에서 잠시 맛보았던 자유와 민주주의, 서구적 교양의 세계를 구가(謳歌)했던 그 감각의 테두리와 환각적 분위기의 향유란 그저 하룻밤 꿈이자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꿈과 환각으로 호명되는 우리만의 비애일 수밖에 없을 모더니티의 문제’, 따라서 착란된 우리 문화전체에 오래도록 들러붙어 온 저 지긋지긋한 후진성이란 지금-여기, 2024년 우리 사회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한 맹위를 떨치며 살아 펄떡거리는 인문학의 화두로 우리 삶 곳곳에 스며있는 듯 보인다. 나아가 우리를 여전한 정신적 긴장 상태로 휘몰아가는 듯하다. 나날의 몸의 감각이자 그 날 것의 살아 펄떡거리는 분위기로 휘감겨오는, 저토록 끈덕진 모더니티의 문제는 서구 문화의 간접적 교양 체험이 필연적으로 수태하게 될 관념적 추상성의 치명적 한계이자 그 후진성의 근본 모순을 다시 처절하게 일깨우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제는 즐거운 편지를 그저 입시용 문제 풀이의 대상이자 시험답안의 자료로만 접근했던 우리 교육 전체의 서글픈 생태와 직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 입시에 나라의 향방과 시스템 전체가 좌우되는 이른바 불행한 선진국에서, 즐거운 편지라는 예술작품을 그야말로 심미적 대상으로 즐기고 여유롭게 뜯어 읽으면서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교실이란 2024년 봄, 지금-여기서도 여전한 불가능의 자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우리 현대사의 근본 모순일 수밖에 없을 간접적 교양 체험관념적 추상성의 문제를 즐거운 편지의 속살을 보고 듣고 어루만지는 과정에서 절절하게 느끼고 그 한계의 지점을 진지하게 토론하는 광경이란 우리 교실의 현장에선 결코 목도(目睹)할 수 없는 불가능자체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미래의 비전을 함께 고민하고 탐색하는 교실의 풍경은 우리 교육의 현실에선 더더욱 상상조차 어려운, 그야말로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몇 가지 의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자. 적어도 우리 삶의 세부에서 보면, 전국의 학원가를 넘어 인터넷 곳곳에서 거듭 마주치게 되는, 영원한 사랑의 반어적 표현이란 문구는, 그야말로 김수영의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 상투적 해석 문구는 우리 모더니티의 초라하고 서글픈 역사를 생생하게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의 교육 관행과 그 감각의 테두리로 깃든 과잉 억압과 후진성의 을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감으로 예시해주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저 문구는 우리 삶의 감각과 분위기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의 살의 생생한 힘과 정서적 주름을 표상하는 것은 아닐까? 달리 말해, 현대 한국인의 천편일률적인 삶의 모양새에서 기원하는, 마치 만인의 거울인 듯 서로의 얼굴을 빠짐없이 비추는 우리 모두의 평준화된 삶의 모델과 일률적인 욕망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그것의 오래고 오랜 클리셰가 드리우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 생의 그늘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문학사에서 더러운 그리움이란 말로 표상되는 예술의 정신 승리’, 그 역설적 아름다움의 꽃을 피우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의 희망으로 내딛어나갈 수 있는 미지의 소리를 선사했던 작가들을 잠시 떠올려보자. 거듭 강조하지만, 이들이 한결같이 고민했던 자리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 생의 그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다 같이 감당해야만 했을 간접착란이란 말에 오랜 세월로 쟁여진 우리 문화 전체의 후진성, 지저분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뒷자락에서 우리가 문득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은 보편적 생의 그늘이 만드는 저 고통과 신음의 자리, 그 비루하고 황폐한 감각의 비늘들이야말로. 시의 원초적 터전을 이룰뿐더러 참된 예술이 빠짐없이 창출하려는 불가능의 자리에 해당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청년 김현이 용감하게 고백했던 나는 우선 솔직히 한국 문화의 지저분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굴욕과 수치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큰 용기를 얻기 위해서이다.’라는 말을 다시 불러올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 ‘4·19 세대를 넘어서 우리 현대문화 전체에 들어박힌 착란지저분함즐거운 편지가 외면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 움터 올랐을 것이라는 지극히 난처한 맥락을 암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리에서, ‘간접적 교양 체험에서 비롯하는 정신의 불구자가 내뱉는 고통과 신음, 그 시대적 진실의 맥락을 즐거운 편지가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았다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이 작품이 우리 모두의 보편적 생의 그늘을 예술적 사유의 중핵이나 시적 형상화의 초점으로 삼지 않았던, 어떤 치명적인 결함을 품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편지는 아름답다. 이 작품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반 미친 듯 폭주할 수밖에 없었을 우리 모두의 청년 시절을, 그 시간의 화염과 질풍노도의 광기를 견뎌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그야말로 인간답게 살려는 자아 성장의 욕구와 민주적 교양 의식의 분투에서 움트는 우리 모두의 몸부림이 가능했을 것이다. 몸부림이란 비록 지금-여기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서 올 아름다운 영혼의 빛살을 미리 예감하고 실천하려는 자에게만 촉발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다림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운 영혼을 앞질러 선취하려는 자에게서만 뿜어져 나오는 내적 충실성의 징표이자 부단한 자기성찰의 흔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시의 말꽃으로 깃든 내 기다림의 자세에서 그 대상은 그대도 아니며 사랑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미래시제속에서 성장해 있을 내 나의 사랑”, 자신의 미래로 펼쳐질 아름다운 영혼일 수밖에 없다. 즐거운 편지를 비롯한 어떤 개인 날의 초기 시편들이 간접적 교양 체험의 내면화에 하염없이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미지의 시간으로 한없이 잇닿은자기성찰의 지속적 충실성에 대한 견고한 예감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저토록 당당하면서도 일관된 예언자의 목소리기다림의 자세속에서, 그 영속성을 예감하고 다짐하는 적극적 수동성의 자리에서 겸허한 어조로 읊조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기다림은 능동적 다짐과 수동적 현실을 동시에 넘나들면서, 이들을 매 순간 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의 영속성을 띤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또한 영원한 현재의 실천적 예감과 다짐으로 기다림의 의미를 바꾸어버리려는 시인의 미래지향적 기투가 가장 밀도 높게 응축된 말꽃의 이미지일 것이다. 더 나아가, 즐거운 편지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시와 예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서의 신성한 잉여’, 진리-사건의 자리를 말없이 내비치고 있는 문제작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기다림이라는 탁월한 이미지를 새롭게 발명함으로써, 그것에 수반될 수밖에 없을 현재진행형의 영속적 과정과 더불어 불가능의 지속적 상태를 동시에 암시하는 빼어난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리야말로, 즐거운 편지의 숨겨진 존재 가치가 새롭게 발현되는 장소일 것이며, 그것의 은폐된 문학사적 위상이 최초로 명명되는 특이점의 자리라고 공개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 황동규는 즐거운 편지를 등단작으로 내놓았던 1958년에도 물론 청년이었지만, 지금-여기, 2024년 봄에도 언제나 늘 한결같은 청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영원한 현재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내 기다림의 자세를 자기성찰의 회로 속에서 되새기면서 매 순간 거듭남을 이행할 수 있는 자리, ‘영원한 현재를 이루려는 의욕으로 가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참된 시인이란 언제나 늘 변화의 과정을 이행하려는 거듭남의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동규 시 마디마디에 깃든 활발발(活潑潑)의 생생하고 아름다운 탄력, 영원한 젊음의 생명력이 기다림에서 오는 까닭 또한 이와 같다. 그에게 기다림이란 영원히 종결되지 않을 형이상적 그리움일 수밖에 없기에. 아니, ‘자아 성장을 끊임없이 추동하는 정신의 도약대이자 결코 가닿을 수 없을 불가능그 자체일 것이 틀림없기에.

  시인은 다른 미래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그칠수 없는 사랑”, 불가능의 자리로 열린 기다림의 과정만이 시의 태반(胎盤)이자 예술의 귀소(歸巢)라는 진리를 찰나의 순간조차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온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즐거운 편지의 그 풋풋한 청년 시절로부터 날개 비벼 펴고의 원숙한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을 부단히 유지해 온 것으로 헤아려지기 때문이다. “날개 새로 비비 펴는에서 가장 도드라진 윤곽선으로 솟아오르는 최근 시집의 이미지 능선, 그 상승감의 휘몰이바람이 생생하게 예증하는 것처럼. “보통 나비몸부림으로 아로새겨진 마음 성장의 끝나지 않을 미래이자 영원한 현재속에서 울려 퍼질, 저 신실한 내면의 목소리가 그러하듯.

  그리하여, “다 함께 다시 한번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 어법을 타고 흐르는 간절한 마음 성장의 욕구가 드리워놓는 감응의 빛살이란 그 휘황한 광휘만큼이나 아름답다. 그것은 다른 미래로 나아가려는 현재진행형의 아이러니를 기꺼이 살아내려는 자의 아름다운 뒷모습, 그 순도 높은 자기 충실성으로 첨예하게 벼리어져 있기 때문이다. “날개로 날든 몸통째 날리든이 내뿜는 생의 원초적인 약동, “자욱이 흩날리꽃잎들이 선사하는 저 엘랑 비탈(élan vital)의 처연한 몸부림처럼,

 

바람이 이는가, 꽃잎들 자욱이 흩날린다.

한창때는 그들이 날아다니는 벽화였지.

꽃잎들 땅에 내려 뒤집히다 말다

꽃길 하나 깔리네.

 

이즈음 꽃 지는 기척에 왜 이처럼 신경 쓰이는지.

마지막 날이 오면 나비나 벌처럼 조그맣고 가벼운 것이 되어

꽃잎들에게 바쁘면 먼저 자리 뜨게! 하고

혼자 천천히 날아갈 텐데

독무 멋지게 추고 자리 뜨는 모양새도 춤이 되는

호랑나비는 못 되어도

꽃비 맞고 황홀해져 날개 새로 비비 펴는 보통 나비가 되어

날아가다 꽃길에 슬그머니 몸을 눕힐 수는 없을까?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삶의 짐 다 부려놓고 홀가분하게 누워 있는 꽃잎들.

휘몰이바람 불 때

다 함께 다시 한번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는 없을까,

날개로 날든 몸통째 날리든.

 

날개 비벼 펴고전문오늘 하루만이라도(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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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계간 파란 최진석 간절기생성산책미래이행사건 2025
이찬 ‘時中’, ‘다른 미래’로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 김수영 시 「바뀌어진 지평선」

1 2024년 여름 『계간 파란』 통권 33호 ‘문질빈빈(文質彬彬)’ 항목에서 제시된 「“지평선”의 아름다움」에서 이미 암시했듯, 김수영의 「바뀌어진 지평선」은 『주역』과 『중용』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고전의 영향 관계라는 문제틀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어야만 한다. 이 시편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래된 미래’로 자리할 수밖에 없을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이라는 방법론과 의제의 초점화를 통해서만 적확하게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시와 산문 텍스트의 상관성을 심층적으로 탐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고전의 충실한 이해 및 참조가 필수 불가결의 조건을 이룬다고 하겠다. 김수영의 초기작 「공자(孔子)의 생활난」에서부터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유발한 도피 행각과 귀가 이후의 실존적 격투가 고스란히 배어든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 그리고 말년에 창작된 「미역국」이나 「사랑의 변주곡」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수한 시편들에선 동아시아 고전의 수용 및 변용의 맥락이 일관된 지속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김수영의 시에서 동아시아 고전의 이름이 거죽 위로 솟아오른 텍스트로는 「술과 어린 고양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는 中庸의 술잔” “여기에 있는 것은 中庸이 아니다” 같은 구절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시의 本髓」 같은 산문 텍스트에서 활용된 “양극의 긴장” “대극” 같은 용어들 역시. 동아시아 문명사의 주축을 이루는 ‘주역 철학사’에서 부단히 제시되었던 ‘대대(對待)’ ‘순환(循環)’ 같은 어휘들을 수용・변형한 것이다. 김수영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설움”과 “긍지”, “생활”과 “자유” 같은 대립적 심상들이 상호 보완적인 “대극”의 지력선을 이루는 것처럼, “대극”과 “양극의 긴장”으로 표상되는 산문 텍스트의 핵심 원리 역시,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중용』의 ‘신독(愼獨)’으로 대변되는 근본적 ‘자기성찰’을 수미일관한 실존적 태도로 “이행(履行)”하려 했을뿐더러, “생활”과 “뮤즈”가 “일자(一字)”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실천의 기반으로서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끊임없이 견지하려 했으며 이를 당대의 “서정시인”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시중(時中)’이란 말은 『중용』 제2장에서 등장하는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君子가 中庸을 함은 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小人이 中庸에 반대함은 小人이면서 忌憚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을 통해, 그 어휘적 관련 맥락과 구체적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주희(朱熹)의 주석으로 나타난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君子가 中庸을 하는 까닭은 君子의 德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中에 처하기 때문이요)’라는 구절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시중’이 인격 수양의 정점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맥락을 좀 더 생생하게 감득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시중(時中)’이란 ‘고시조지의야(故時措之宜也)’라는 말에 담긴 실질적 의미, ‘그러므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행함에 의(宜), 적합하면 된다’(우응순, 『친절한 중용 강의』)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상황과 시간의 구체적 마디들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더불어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마땅함(宜)을 매번 다시 살피고 수행해야 한다는 숨겨진 맥락을 명료하게 풀이해주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에서 부단히 등장하는 부끄러움의 형상들이나 보잘것없음을 반성하는 자기성찰적 시구들은 한결같이 ‘시중’의 윤리학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김수영의 여러 시작품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시각성’의 이미지들 역시 좀 더 심층적인 차원의 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위시한 동아시아 고전에서 유래하는 ‘신독(愼獨)’ ‘권도(權度)’ 등과 같은 성찰성과 관련된 어휘들과 더불어 ‘중용’ 및 ‘시중’의 사유 맥락에 대한 섬세한 이해 및 본격적 탐구가 필수 불가결하다. 2 뮤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 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콜맨의 신작품(新作品)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賣春婦)의 생활(生活)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神經質)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卑怯)하다고 경멸(輕蔑)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라크 케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노력(勞力) 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영국인(英國人)들은 호스피탈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 - 「바뀌어진 지평선」 전문 3 「바뀌어진 지평선」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 텍스트를 넘어서 그의 실존적 태도와 세계관의 중핵을 구성하는 ‘중(中)’의 사유와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 시는 상당히 긴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라는 예술 장르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되어 온 의미의 압축성과 리듬의 암시성을 충실하게 확보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특이점과 미학적 자질이 온전하게 작품 내부에 응축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 역시, 김수영 특유의 “대극”의 사유 방식 또는 “양극의 긴장”에 대한 그의 첨예한 통찰력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1연에 나타난 “뮤즈”와 “생활”이란 이미지는 명시적인 차원에서 이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극”의 의미 계열을 구축한다. 양자의 사이 공간에 들어박힌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시구와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라는 시간적 심상은 “대극”이 반복・변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이란 “생활”에서 파생된 것이며, “너”는 “뮤즈”를 대명사로 바꾸어놓은 대체 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매듭이 나날의 범속한 생활이 만드는 온갖 우여곡절들을 암시한다면, “뮤즈”와 “너”가 함께 이루는 연속적인 이미지 지력선은 시인의 포에지(poesie), 곧 시인의 예술적 이상으로 이루어진 예술혼을 표상한다. 나아가 시작(詩作)의 ‘내재적 과정’에서 체감하게 되는 ‘신독(愼獨)’의 실천적 태도와 ‘시중’의 윤리학의 절실한 자각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위에서 풀이한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측면 또는 상반된 계기를 품고 있다는 의심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을 중용의 관점과 문제틀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긍지의 날」에서 상반된 위상을 차지하는 “설움”과 “긍지”라는 심상을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로 통합시키는 “대극”의 사유 원리를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사랑」에서 등장하는 “변치 않는”과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이라는 시구의 상반성, 그리고 「사랑의 변주곡」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사랑의 도시”와 “개미”라는 대극적 이미지 구성원리에서도 또렷한 되풀이의 모양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만한 경박성”이란 작은 무늬는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이상적 질서’, 곧 ‘중용’의 사유 및 실천 원리이자 ‘대대(對待)’라는 말로 집약되는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점에서 감수되고 해석되어야만 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이 품은 사유의 보석이란 어쩌면 정반대 상황에 놓인 사태들을 “대극”의 원리로 포괄하면서, 이들을 그저 대립하는 것만이 아닌 상호 보완하는 것이라고 사유했던 지점에서 최고 순도의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요만한 경박성”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덧씌워진 속물성이나 천박성을 껴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나의 가족」)를 예감하면서 “긍지”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상반된 “대극”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잠재적 포석을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에는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예감하는 사유의 밀알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내적 “성장”을 성취하려는 시인의 웅대한 미래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2연을 구성하는 “대극”의 짜임새는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정(靜)의 심상과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동(動)의 표현이 상반된 지력선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양자의 이미지 계열을 한층 더 풍성하면서도 복합적인 일상의 다면성을 담을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간다. 양자는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상반된 이미지 지력선을 각각 계승한다. 따라서 그저 단순한 ‘정(靜)/동(動)’의 “대극” 현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도리어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요약되는 역동적 상호 침투의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나아가 중층적 “대극”의 무늬들을 2연 마디마디의 모서리로 틔워 올리면서 그야말로 풍요로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주요 동인으로 기능한다. 2연의 “다소곳한 분위기”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심상들 역시,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구절들을 각각 잇따르는 것이기에, ‘정(靜)/동(動)’의 단순한 “대극” 현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표현되는 상호 침투의 역동적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그야말로 다면적인 “대극”의 무늬들을 아로새긴다. 달리 말해,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라는 심상이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고요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느낌을 함축하는 것이라면,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심상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고양된 충만감으로 솟아오르는 역동적 개방성의 이미지와 “대극”을 이루면서 고립된 폐쇄성의 감각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무거운 일기”와 “우울”이라는 형상이 둔중하면서도 정적인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이와 상반되는 “걸어가기 위하여”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라는 구절들은 예민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의 원환 운동을 표현한다. 4연에 나타난 “생활”->“비겁”->“나의 원죄와 회한”의 계열이 함축하는 세속적 “타락”이라는 의미 매듭과 더불어, “뮤즈”->“경멸”->“너의 생리”로 이어지는 형상의 연속선이 이루는 신성한 “지혜”라는 의미 계열 역시, 앞서 살핀 연과 같은 “대극”의 구도에서 발원한다. “생활”의 이미지 계열이 발산하는 ‘세속-현실-일상’이라는 하나의 “극”과 더불어, “뮤즈”라는 형상의 계열체로 수렴되는 ‘신성-이상-예술’이라는 또 다른 “극”이 함께 이루는 “힘”과 “긴장”의 미학이 생생한 느낌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뮤즈”의 “대극”을 형상화하면서, 김수영은 나날을 살아가는 “온몸”에 “타락”과 “지혜”를 동시에 포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나날의 “생활” 속에서는 “뮤즈”로 표상되는 시의 예술혼이 끝끝내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와 “대극”을 이루는 “뮤즈” 속에서는 “생활”과의 공분모를 형상화하려 했던, 시인의 실존적 “싸움”을 주도 모티프로 삼는다. 달리 말해, 시인의 몸과 마음에서 수시로 엇갈리는 무수한 “대극” 운동이 「바뀌어진 지평선」을 구성하는 전체 이미지의 주도소(主導素)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5연과 6연에서도 이와 같은 “대극”의 이미지들은 수미일관한 연속선으로 구축되지만, 좀 더 본원적인 차원으로 진화한다. 곧 상호 모순에 가까운 ‘극단적 아이러니’의 어법과 구조를 새롭게 펼쳐놓는다. 특히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5연), “뮤즈여/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6연) 같은 대목들은 표면적인 통사 구조만을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의 적확한 해석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에 내포된 그 복잡다단한 의미론적 계기와 극단적 아이러니 구조에 관한 섬세한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7연의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를 비롯하여, 8연에서 등장하는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같은 구절들 역시 상호 “대극”의 이미지 계열을 구성한다. 전자(前者)가 바로 앞에 놓인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에서 이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면, “타락한”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또한 “기자”의 직무상의 윤리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해가는 세속의 풍습과 인심을 “정시”하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이라는 시어와는 결합할 수 없는 상반된 의미 지향성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7연에서 도드라진 모양새로 등장하는 “타락한”은 기자”의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발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상태이자, “이 어지러운 세상”이 강제하는 온갖 “탈”, 곧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다. 이처럼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앞뒤로 연속된 시구들은 서로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어긋나는 모양새를 띤다. 이들은 “뮤즈”와 “생활”, 곧 ‘신성과 세속’, ‘이상과 현실’ ‘예술과 일상’ 등등의 상반 항들이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구도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시인의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의 사유를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이 품은 그 형상의 진의(眞義)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가치 전도의 의미를 거느린 이 형상은, “뮤즈”와 “생활”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오히려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상호 전환의 융합 관계에 놓여있다는 이면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중(中)’의 시간적 궤적을 표상하는 형상인 동시에 ‘역동적 균형’의 운동 및 이행 과정을 지속하는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암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8연의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 역시, “바뀌어진 지평선”으로 빗대어진 ‘신성’과 ‘세속’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상호 전환 과정 및 ‘역동적 균형’의 상호 이행 운동을 역설 어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 바로 앞에 놓인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와 더불어, 그 뒤를 잇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는 이미지 매듭을 오랜 시간 동안 숙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을 곰곰이 되살피면,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은 비단 “타락한”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풍자를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 구절은 언뜻 “가벼워서”, “배반”, “간악” 같은 시어들로 이어지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꼴 짓는 이미지의 핵심 매듭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앞뒤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정반대 의미 계열을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서만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이 “생활”에 있을뿐더러 “경박성”이란 그것의 필수 요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표면”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날아갈” 수 있는 “정신”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은폐된 측면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이라는 적확한 은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저 이미지들은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 “물”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 “위를 날아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단히 유지할 수 있는 실천의 벡터를 암시적 문법으로 개진한다. 이 실천의 원리를 ‘시중’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 철학자가 제시한 ‘인간의 모든 “중中”은 “시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時”라는 것은 객관적・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라는 언급은, 이 맥락 전체를 좀 더 명확한 철학적 범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4 이와 같은 ‘시중(時中)’의 사유 맥락은 8연 마지막 대목을 이루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같은 형상들이나, 9연의 “너의 육체는/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1연의 “뮤즈여/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같은 심상들로 변형되면서 점층적 확산의 의미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이 “뮤즈”에게 “표면에 살아라”라고 말하면서,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시중’의 윤리학에서 기원한다. “표면”은 “생활”의 의미 계열로 수렴되며,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뮤즈”의 이상적 예술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자기 신념을 은은한 뉘앙스로 드러내는 역설 어법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9연과 11연의 이미지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의 범주에서 감수되는 것이 합당하다. “뮤즈”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육체”의 차원에서 호명하는 이미지 매듭(9연)이나, “시인”과 “시”를 “대극”의 차원으로 설정하면서 “뮤즈”와 “시”를 의미론적 연속체의 범주로 설정하는 구절(11연)은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생활”과 “뮤즈”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계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이 구절들은 “생활”과 “뮤즈”를 끊임없는 상호 전환 및 상호 이행이라는 융합・횡단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김수영 특유의 ‘중(中)’의 사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는 또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라는 실천 원리와 가치 지향성을 내포한다. 9연과 11연이 연속적인 의미 계열을 이루면서 개진하려는 바는, 각각의 상황과 국면에 따라 “생활”과 “뮤즈”가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관계이자 최적의 방향성, 곧 매 순간 ‘시중(時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궁극적 전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과 “뮤즈”가 12연에서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양자의 상호 이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달라지는 ‘시중(時中)’의 위상과 내용을 신중하게 사유하고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해, 시인은 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최적의 방향을 모색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는 실천의 ‘내재적 과정’,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나날의 실존적 태도로 견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라는 구절로 표상되는 세계의 모든 영역이 “일자(一字)”를 이루는 “지평선의 대열”을 구축할 수 있는 궁극적 화합의 미래 비전을 상상하고 선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수영이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무리 대목에서 “뮤즈”에게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12연), “앞장을 서지 마라”(13연),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13연)라고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점을 이룬다. 시인은 “생활”과 “뮤즈”의 “대극”이 함께 이루어가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이행 과정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로 소묘함으로써, ‘세속/신성’, 현실/이상’, ‘예술/일상’이라는 대립 구도의 고정성을 부단히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동시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권유하려 했던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라는 대목은 “서정시인”으로 비유된 당대의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모두 “모더니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혁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전언을 간곡한 명령 어법으로 권고하는 내용을 품는다. 이렇듯 “지평선의 대열”이 그야말로 “일자(一字)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매리지/하우스펠 에어리어” 같은 어휘들로 표상되는 서구 기계산업문명의 선진성과 그 문화적 세련성을 무작정 동경하고 추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으리라. 나아가 이와 같은 서구의 문화적 특질을 “뮤즈” 곧 “시”의 이상적 본질이자 예술혼의 정수로 추구하거나 숭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대 서구의 문화는 우리의 “생활”과 엄청난 격차로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진 지평선」에서 시인이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라는 사회・역사적 상황과 이에 대한 신중한 고민 및 극복의 비전을 여타의 “서정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권고하려 했던 맥락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이 권고에 깃든 속도의 담론과 비전이란 우리 사회 전체의 “모더니티” 수준과 밀도에 대한 시인의 근본적인 염려와 신중한 고민의 깊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것은 『중용』 제2장의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과 그대로 맞닿는다, 『중용』의 이 구절에 따르면, 군자의 ‘시중(時中)’은 소인의 ‘무기탄(無忌憚)’과 상반된 방향과 내용을 지니는 ‘기탄(忌憚)’, 곧 ‘거리낌’을 심사숙고하는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낌이란 신중함’이며, ‘거리낌은 인간에게 “거리”와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기에 실수의 가능성을 줄인다’(김용옥, 『인간의 맛』)라는 깊은 안목의 풀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거리낌은 겸손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강함’일뿐더러, ‘시중(時中)’의 근거이자 그 실천적 이행의 원천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지막 연에서 극단적 역설을 표현하는 반어법을 동반하면서, 우리 “모더니티”에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울”과 “경박”을 반추하도록 강제한다. 마지막 13연에서 “앞장을 서지 마라” “낮추어라” 같은 말들로 표현된 제한과 금지의 명령어들을 “뮤즈”에게 덧씌울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은 김수영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1950-60년대 한국 시단에서 “모더니티”의 첨단을 맹종(盲從)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각별한 어조와 리듬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여타의 시인들이나 예술가에게 권고하고 공유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3연은 두 매듭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뮤즈여/앞장을 서지 마라/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낮추어라”라는 부분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마지막 대목으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는 “뮤즈”에게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 풍조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님을 권고한다. 또한 우리가 나가야 할 최적의 선택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기를 간곡하게 요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고민과 성찰의 자리가 바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 펼쳐지는 구체적 실천의 무대일 것이다. 이는 또한 후자(後者)의 지극한 역설로 이루어진 반어법을 낳는 토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의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맨 마지막 무늬들은 김수영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를 비유적 차원에서 집약하는 구절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 없이는 충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 구절과의 통사론적 맥락에서 보면 지극한 역설을 내포한 아이러니의 수사학일 터이지만,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은 “우울”과 “경박”이라는 시어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우리 “모더니티”의 낙후된 수준과 후진적 형성 과정을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그것과 ‘사랑하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그 복잡다단한 속사정을 비교적 명징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모더니티의 문제」에 나타난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김수영의 “이상한 역설”이란 현대 한국인에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을 “우울”과 “경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말하는 “긍지”란 우리 모두의 “우울”과 “경박”을 껴안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뿐더러. 이른바 ‘중용’의 미덕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김수영에게 “긍지”란 ‘시중’의 윤리학에 깃든 ‘실천적 원근법’과 ‘역동적 균형’의 부단한 “이행”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에서 발원하는 “우울”과 “경박”을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 터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열어가려는 수미일관한 실천의 자리, ‘시중(時中)’의 충실한 이행 과정을 통해서만 체화될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아랫자리에서 인용되는 작은 무늬들이 넌지시 말해주듯. 오오 환희(歡喜)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구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退溪)든 정다산(丁茶山)이든 수염난 영감이든 복덕방(福德房) 사기꾼도 도적놈지주(地主)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 자칭(自稱) 예술파시인(藝術派詩人)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能辯)을 욕해도-이것이 환희(歡喜)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人生)도 인생(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 - 「미역국」 부분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학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 - - 「모더니티의 문제」 부분

계간 파란 이찬 김수영바뀌어진 지평선중용시중신독역동적 균형상보성대극상반상성 2025
이성천 ‘어제’를 봉합하는 거듭나기의 시(詩)

1. 소월이 그러하듯, 황동규 시인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 것인가. 황동규는 1958년 미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시력 67년을 지나는 시인이다. 그는 첫 시집 『어떤 개인 날』(1961)을 발표한 후 『풍장』(1995)을 거쳐 지난번 『봄비를 맞다』(2024)에 이르기까지 도합 열여덟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1,000편에 거의 근접한 그의 시세계는 이번 근작 시편에도 등장하는 평론가 이숭원의 일전 언급대로,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춤”(『꽃의 고요』 해설)이라고 일단 상징적으로 명명할 법하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지난 세월동안 시인이 꿈꾸며 가꿔온 삶의 시간들이 때로는 황홀한 감각과 사유로, 또 서늘하면서도 생기 있는 언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몸짓을 극서정시가 견인하고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황동규 시의 독특한 구성 원리이자 시세계 전반을 추동하는 극서정시는 단적으로 말해 ‘극’을 내장한 서정시이다. 시에 극적 구조를 연출함으로써 반전이나 시적 자아의 깨달음과 거듭남 같은 내적 변화를 유도하는 시인 특유의 창작 방식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극서정시는 “극(劇)적 구조를 지니고 싶다”라는 시인의 선언적 문구가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표사에 실리면서 한국 시사에 본격적으로 등재된다. 이후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 『우연에 기댈 있었다』(2003), 『꽃의 고요』(2006)는 물론 최근의 시집에 이르기까지 황동규의 시편들은 극서정시의 계보를 독자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이전 그의 시가 ‘시 안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시’의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도 시인의 말마따나 “명칭은 나중에 붙였지만,” “극서정시는 초기부터 있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가령 황동규 시세계의 중심축을 떠받치던 일련의 사랑 시편은 기존의 전통 서정시와 달리 극적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들에서 ‘사랑(이야기)’는 극서정시 구조를 통해 새롭게 변주되고 그때그때마다의 정황적 의미를 획득한다. 데뷔작 「즐거운 편지」를 위시한 황동규의 사랑 노래는 재래의 수동적이고 추상화된 주제 영역을 벗어나 생활세계에서 ‘사소’하고 ‘조그만’하며 ‘비리고’ ‘쨍한’ 극적 사랑의 계기들을 만들어 온 것이다. ‘시간 속에 비치는 시간’의 감지와 ‘홀로움(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의 정서, 그리고 세계의 필연성과 필연적으로 동행하는 우연성의 수용은 사랑주의자 황동규가 자신의 사랑 시편들과 함께 극서정시를 가동해온 의식/무의식의 흔적들이다. 아울러 일상의 규범을 벗어나 지각의 갱신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선택한 여행(시)과 시인의 타고난 예술적 정열은 그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를 지속적으로 마련해왔다. 여기에 죽음에의 선주(先走)를 감행하여 확보한 삶과 죽음의 인식론적 전환 사유와 선(禪)에의 깊은 관심은 그의 시에 세계 인식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기 위한 시적 장치이자 방법론으로 주어져 있다. 이렇듯 황동규의 시는 일상과 탈일상의 세계를 분주하게 오가며 시와 삶이 하나 되는 극적인 순간의 풍경을 연출해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마치 ‘외계인’과도 같은 낯선 시선과 호기심으로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세계의 진면목을 환하게 그려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시는 알레고리와 상징의 밀회를 적극적으로 주선하며, 황홀하면서도 서늘한 삶의 풍경들을 노래하고 있다. 2. 황동규의 주요 시편들이 극적 구조를 거느린다고 했거니와, 이는 근작시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번 그의 「벽오동」은 작품의 말미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글귀를 위치시킴으로써 이즈음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밑그림”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 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 같이 물드는가 했더니 벽오동이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쁜데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다. 몸에 걸쳤던 것 낌새 못채게 털어버리고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서었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 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 아니겠나? 「벽오동」 전문 시 「벽오동」의 도입부에는 세 개의 나무가 등장한다. “은행, 벽오동, 벚” 나무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시의 제목이 ‘벽오동’으로 제시된 이유는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쁘”고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유독 ‘벽오동’만 “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기 때문이다. “벽오동”만이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를 내고 있는 형국이다. 「벽오동」의 시적 반전은 이 부근에서 준비된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와 같은 화자의 의도 섞인 물음은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의 상황 묘사로 일관했던 이 시를 급기야 세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과 자기 확인의 지대로 인도한다. 이때 10행의 접속 부사 “하지만”은 시적 자아가 겪는 거듭남의 여정을 노골적으로 주도하고 암시한다. 그 거듭남이란 “엇박자”와 정박자의 구분이 없는, 아니 구별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자세라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이 시는 평범한 생활세계의 한복판에서 “세상의 리듬”과 “같이” 하지 않은 자연생명을 통해 시적 화자의 변화된 생각을 명쾌하게 전달한다. 이를테면 우리 삶에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공존한다든가, 초월은 결국 초월하지 않는 곳에 있다든가, 더하여 죽음은 삶의 시간에서 분리된 이원화된 공간이 아니라든가 등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저 찬란하면서도 심오한 구문이 간직한 모든 가능태의 해석들로 말이다. 이 대목을 특히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색즉시공(色卽示空) 살기”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어지는 「시에 대한 단상들」에도 재차 변주되어 나타나는 까닭이다. 가령, 최근 시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렇다. “시 쓰는 일은” “우연 같은 우연, 우연 아니게 만나는” 길이고, “더 이상 다르게 말할 필요가 없을 때/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이 꿈틀”대는 순간이며, “명동 간다는 게 충무로역에 내렸”지만 가끔씩은 “그런 시가 생각보다 더 실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날것 보다는 제대로 익힌 시가 그래도” 좋겠으나 “익힌 날것도 있”다는 생각. “시인과 대상과의 관계는 늘 1:1”이지만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쉬고 있는 곤줄박이”를 “안 본다 안 본다 하면서 더 보고 싶은 사람”처럼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기우뚱한 균형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다는 생각 등등. 이렇듯 황동규에게 시는 고정불변의 규율과 법칙으로 규정되거나 강제되지 않는다. 인과론적 사유로만 구성되지도 않는다. 그에게 “시는 이 세상 모든 걸 다 맛보려”(「시가 사람을 홀리네」, 『오늘 하루만이라도』, 2020) 드는 생감각의 집결지이고, 변화무쌍한 색(色)이자 공(空)의 세계다. 삶의 실제가 그러하듯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이치가 투명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전이되어 황홀하게 펼쳐지는 구체적 장이다. 그리하여 다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앞문으로 들어가/뒷문을 찾지 못하는 시도 시다.” 그 시들 속에는 “무심히 돌다 뒤꼍에서 만나는/이끼, 환한 빛의 섬들”이 존재한다. “이크 밟을 뻔!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앉아 쉬고 있는 곤줄박이”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다. 3. 아무래도 황동규의 근작 시편을 읽다보면, 노년의 시인을 자주 만나게 된다. 노년은 많은 것들을 서서히 세상에 내려놓는 마음의 시간대다. 인간에게 죽음이 가장 확실한 미래의 사건으로 고지되듯이, 노년은 유한 존재가 어쩔 수 없이 겪는 예고된 시간의 절차이자 필연의 변화이다. 감각기관의 퇴화와 기억력의 감퇴는 필연적 변화의 대표적 항목이다. 거기에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이 필연적 변화의 끄트머리를 실시간으로 경험하게 한다. 지난밤 꿈에 너와 나 너무 많은 말을 주고받았어. 너 어제 세상 뜨고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 어제 저녁 네 빈소에 갈 때 현관서부터 가을비 추적추적 뿌렸지.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나란히 서 있던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 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말보다 더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 너무 많았다」 전문 「말이 너무 많았다」는 죽음을 경험한 시인의 차분한 언어들이 동원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어제 저녁” 가까웠던 이의 부음을 접하고 “빈소”에 다녀왔다. 안타까운 마음일 것이다.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일 게다. “이제”, “어제”의 “너와 나”는 꿈속에서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현관서부터” “추적추적 뿌렸”던 가을비는 이런 화자의 공허한 심리상태를 우회적으로 반영한다.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라는 화자의 읊조림에는 ‘너’를 향한 그리움과 아쉬움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너와 나”의 “어제”와 “이제” 사이에는 느닷없는 죽음이 가로 놓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는 ‘너’의 죽음을 처연한 슬픔의 분위기로 몰아가지 않는다. 애도의 마음을 부러 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시인은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을 모나지 않게 적재함으로써 “말보다 더한 말”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유도한다. 죽음을 계기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많았던 “어제”를 봉합하고 “이제”의 내 삶에서 ‘너’와의 진정한 관계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 기실 황동규에게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단절도, 우리의 현재와 무관한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본원적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절대적인 계기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 죽음은 “어제”의 일상적 시간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건으로 인식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마감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인간의 짧은 삶에 ‘그때그때마다’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시 「말이 너무 많았다」가 ‘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말보다 더한 말”의 진실을 “이제”의 삶에서 환기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입춘 가까워 추위 잠깐 풀린 어제 저녁 시의 혈관 건강 살피는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 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그만 내 뇌혈관 상태 들키고 말았다. 운 떼려다 멈칫하게 만든 낱말, 신문이나 휴대폰에서 매일 두세 번씩 만나고 언제부터인가 가족이 모일 때 내가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 즉시 요양원 보내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그 말,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 디멘셔(dementia) 하고 말았다. 이리저리 설명하니 이교수가 치맵니다, 했지.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셈이지만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별일은 참 별일이다.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 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쓰며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 센강에 몸 던진 시인 파울 첼란, 그가 독일어로 마신 ‘검은 우유’가 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다.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 전문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는 노년의 시인이 겪은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모처럼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노년의 불편함에 난감해 한다. “아무리 해도” “그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교수가 치맵니다,” 말하고 나서야 세월의 늙음이 “지워버린” “그 말”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시인이 경험하는 노년의 불편함이란 당연히 기억력의 감퇴이다. “뇌혈관”의 노화가 야기하는 이런 불편함은 사실 “참 별일이다”라며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정도에 따라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즉시 요양원 보내”야 할 만큼 걱정스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 낱말이 “신문이나 휴대폰에서/매일 두세 번씩 만나”는 흔한 모국어라면 사태는 보다 심각하다. 그렇기는 하나 시의 화자는 이 난감하고 걱정스러운 국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쾌하게 돌파하는 듯하다.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음에도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영단어 “dementia”가 아니라 “치매”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분히 혼란스럽기는 하되, 이마저도 삶의 “별일”로 인정하고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로써 “지워버린 말”의 사소함과 심각함 사이의 긴장감은 “별일은 참 별일이다”라는 시인의 무심한 독백으로 무리 없이 해소된다. 이 시가 노년의 불편함과 난처함을 호소하는 차원에서 단순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소환하는 극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어제 저녁”부터 “아침”까지 시인에게 발생한 일종의 이중 언어(정체성) 문제는 곧바로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쓴 시인 파울 첼란의 삶으로 이월되는 것이다. 특히 파울 첼란의 「죽음의 둔주곡」(Todesfuge)이 음악적 형식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적 모티프의 반복·변형 구조를 취한 작품임을 염두에 두면, ‘과거’ 시적 화자와의 친연성마저도 확보된다. “검은 우유가/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라는 시구가 전혀 어색하거나 새삼스럽지 않다. 이렇듯 황동규의 근작 시편들은 여전하다. 여전히 그의 시는 “밝고 생생한”(「프리지아」) 생명과 마주하고 실존의 삶을 향유하며 환한 생의 감각으로 세계를 노래한다. 만년에 들어서도 시인은 “어제”를 봉합하며 거듭나기를 꿈꾼다. 어쩌면 저 근작 시편들 뒤에서 시인은 속엣 말로 이렇게 되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년의 필연적 변화, 하지만 그 불편함과 난처함마저도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맛’이고 ‘사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라고.

계간 청색종이 이성천 황동규죽음에의 선주극서정거듭남노년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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