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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파란 | 2024년 가을호(제34호)

“길은, 가면 뒤에 있다.”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텍스트와 침묵” 읽기

이찬 문학평론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저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09),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2010), 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2011), 한국 현대시론의 담론과 계보학(2011)을 출간했고, 문학평론집 헤르메스의 문장들(2012), 시/몸의 향연(2019), 감응의 빛살(2021), 사건들의 예지(2022), 문화평론집 신성한 잉여(2022)를 썼다.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시와 영화와 비평이 더불어 감응할 수 있는 융합과 통섭의 공간을 모색하고 있으며,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이미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다.

1

 

  황지우의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5)는 오래전 한 비평가가 갈피 지었던 세 계열의 시인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시집이 북돋는 감응의 불꽃은, ‘일상적인 삶에 매몰된 자아를 노래하는 것’, ‘과장이 적절한 지적인 통제를 받아 야유통제유머로 변용되어 나타난 경우’, ‘짙은 서정성의 계열로 그의 서정성은 감각적인 것도 아니며, 관능적인 것도 아니며, 꿈꾸는 자의 몽상이 갖는 안온함’(김현, 엿듣는 풀의 淚線, 1982)으로 요약될 수 있을, 세 계열을 넘쳐흐른다. 온갖 형상들의 거침없는 트임과 급격한 비산(飛散) 속도의 리듬, 이들 전체를 꼴 짓는 전위적 실험 의식과 분방하면서도 근본적인 현실 해방의 사유 흔적들이 드넓게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의 진가는 활달한 이미지의 개방 운동이나 격렬한 양식 파괴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수반하는 해체 효과를 온전히 감싸면서도, 이를 정교한 텍스트의 짜임새와 그 사이의 침묵으로 다시 침전시키는 방법론적 자각의 첨예한 밀도에서 온다. 그리고 이 과정 전체를 다른 세계에 대한 그리움”(사람과 사람 사이의 信號, 1983)으로 갈무리 짓는 세계관적 사유의 웅혼한 깊이에서 온다.

  시인의 방법론적 밀도를 표상하는 말로 詩的인 것파괴의 양식화를 호명할 수 있으며, 세계관적 깊이를 나타내는 언표로는 낭만주의적유토피아적 꿈禪的인 것”(버리이어티 쇼 1984)을 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시집의 거죽 위로 돋아난 무수한 양식 파괴와 형식 실험은, 그 이미지 지력선 전체를 촘촘하게 조율하면서 그것의 드넓은 미적 울림이자 감응 현상인 소격효과를 미리 운산(運算)하고 명민하게 매듭짓는 자리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현이 탁월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황지우 시의 핵심을 간파하는 관건은 앞서 살핀 세 계열이 한결같이 낭만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적확한 맥락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물론 김현이 말한 낭만주의적 세계관을 황지우는 낭만주의적유토피아적 꿈이란 말로 변형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의 실질적 면모는 시인이 제시했던 詩的인 것禪的인 것이 맞닿는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해, 상호 모순 상태에 놓인 극단적인 대극(對極)’ 현상들을 두루 가로지르면서 그 이면적 진실의 바닥인 추악과 수치까지 들추어보려는 일종의 견자(le voyant) 시학’, 그것을 禪的인 것의 현묘한 깨달음과 겹쳐 떨리게 만드는 자리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황지우의 시와 시론이 모두, 상반된 것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함께 울리는 ’(이인성)의 리듬에 순도 높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의 차원에서, 황지우 시의 극단적인 형식 실험과 주제 내용의 진중한 보편성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상호 교차하는 의 리듬이 텍스트바깥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면서 이루는 보편적인 감응 효과에도 시인은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간주관성” “감염력같은 용어들이 그의 산문에서 자주 등장하게 되는 까닭도 이와 같다. 이 용어들은 결국, “작가와 독자” “텍스트와 텍스트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적 감응의 파동역학(波動力學)”(自序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1983), 시적인 것이 일으키는 섬세한 공명(共鳴)의 움직임과 드넓은 촉발 효과의 보편적 맥락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기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지우의 초기 시집과 산문 문헌들은 파동역학으로 수렴되는 내용과 형식을 두루 갖추고 있을뿐더러, 이를 통해 여러 의 차원들이 함께 울리는 콘텍스트의 개방 효과를 도드라진 양식 해체를 통해 현시하려는 특이점을 품는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시인은 詩的인 것禪的인 것이 현란하게 엇갈리며 이루는 의 리듬과 존재론을 한국시의 새로운 문법으로 선보인다. 그리고 그것에 깃든 시적 감염력의 보편적인 리듬과 해방의 위상을 자기 시학의 핵심으로 제시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결국, 시와 시론을 아우르는 황지우 시학의 정수(精髓)파동역학또는 시적인 것선적인 것이 공분모를 이루며 겹쳐 떨리는 의 리듬과 존재론에서 생성됨을 암시한다.

  가령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출간하기 이전에 작성했던 산문의 한 대목을 유심히 살펴보라. 이 대목이란 눈에 보이는 텍스트를 눈에 보이지 않는 콘텍스트 속에 잡아넣어 우리에게 낯익었던 것들, 이를테면 신문의 일기예보나 해외토픽, 비명(碑銘), 전보, 연보(年譜), 광고 문안, 공소장, 예비군 통지서 등 일상의 거의 모든 프로토콜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아주 낯설게느끼도록 하는 효과에 나는 치중한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信號)라는 문장들을 일컫는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눈에 보이는 텍스트눈에 보이지 않는 콘텍스트를 명징한 대비 관계로 문제화하는 숨은 맥락에 대해 좀 더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보라.

  “시적인 것은 씌어진 것과 씌어지지 않은 것, 텍스트와 침묵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시적인 것은 실제로 있다, 1985)라는 다른 표현에서 알아챌 수 있듯, 시인은 시적인 것이 우선 텍스트안쪽에 들어박힌 것이기는 하지만, “텍스트사이에서 맺어지는 콘텍스트(la chair)’로 나부끼는 것이라는, 이른바 상호 텍스트성의 역동적 기조(氣造)와 감응의 파동을 일찌감치 체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지우 시론의 핵심 항목들이 집약된 주요 산문들에서 간주관성이라는 언표가 빈번하게 반복되는 까닭 또한 이와 같다. 그것은 문학이 작가와 독자가 서로를 인정, 부정하는 대화적 기능으로 움직인다는 의미”(사람과 사람 사이의 信號)로 풀이되고 있지만, 실상은 텍스트안팎에 한결같이 임재(臨在)”할 수밖에 없을, “현실사회적 행동의 연장선상을 강조하기 위한 맥락에서 활용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텍스트외부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이 역사와 사회에 육화되어”(사람과 사람 사이의 信號) 있다는, 그 필연성의 행로를 도드라진 형세로 부각하려는 담론적 언표로 기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시인은 보이지 않는 콘텍스트의 자리에서 시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미적 공명(共鳴)과 감응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달리 말해, “작가와 독자” “텍스트와 침묵사이에서 생겨나는 무수한 감응 현상과 그 별자리”(503.나는 너다, 1987)의 움직임, 그리고 그것이 만드는 콘텍스트의 상호 조명 효과와 간주관성의 역장(力場)”에서 시적인 것발생한다는 사실을 오롯이 체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맥락에 휘감긴 시적인 것감염력을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짜고 엮고 마름질하는 가장 유력한 이미지 조각술이자 텍스트 배열 원리로 삼았던 것이 틀림없다.

 

2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전문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을 이룬다는 사실에서 알아챌 수 있듯,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는 무수한 시편들을 묵시적 울림으로 비추고 감싸는 여러 겹의 주름을 품는다. 또한 시인이 수미일관하게 강조했던 시적인 것의 광대무변한 넓이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텍스트안쪽의 침묵인 행간이나, “텍스트바깥쪽의 보이지 않는의미망인 콘텍스트에서 풍겨오는 것이기에, 좀처럼 쉽게 간파되지 않는다.

  이 시는 거죽 위로 드러난 시어들만이 아닌 그 행간에 잠긴 무수한 별자리를 통해, 다른 텍스트들을 넌지시 비춘다. 또한 겉면으론 드러나지 않는 콘텍스트의 자리에서 시적인 것이 말없이 솟아나게 만든다. 따라서 상호 텍스트성의 보이지 않는 울림을 설핏한 기색(氣色)으로 일렁이게 하는 특이점을 지닌다. 결국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는 다른 시편들을 드넓게 휘감는 잠재성의 터전이자 이미지의 공집합(空集合)을 이룰뿐더러, 시집 전체의 겹주름을 조건 짓는 핵심 단자(單子)로 자리한다.

  우선 맨 앞머리로 나타난 나무는 자기 몸으로/나무이다.”를 보라. 이 구절은 언뜻 상투적인 동어반복을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뒤를 잇는 부연 어구들을 좀 더 깊은 안목으로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문득 선적(禪的)인 것이 떠오를 것이다.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한없이 낮고 비루한 누더기의 삶을 사는 우리가 더없이 경건하며 신성한 빛의 세계로 앙양되리라는, 이른바 죄의 은총(felix culpa)’으로 표상되는 종교적 황홀경의 둔중한 아우라가 견실한 리듬으로 뚜벅뚜벅 에둘러짐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라는 후속 구절에서 禪的인 것으로 표상되는 대지의 은폐’(김수영)의 희끄무레한 흔적을 읽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나아가 그것이 풍기는 가느다란 뉘앙스를 섬세하게 감수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뒷면의 기색과 의미의 펄럭임을 갈피 짓는 일은 매우 난해한 해석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마디에서 처음 나타난 온몸으로라는 수식어구, 그 존재론적 이행의 무늬를 보라. 이 무늬를 어떻게 풀이하느냐의 문제가 해석의 전체 틀을 좌우하는 핵심 요건이자 적확성의 관건임을 눈치챌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이 시의 한복판에 들어선 셈이리라. 그리하여, “겨울-나무-나무”, 그것이 겹쳐 떨리면서 이루는 시적인 것의 정수(精髓)를 당신의 온몸으로이미 감수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온몸으로는 우선 다음 구절들에서, “온몸으로 헐벗고” “온몸을 뿌리박고” “무방비의 裸木” “벌 받는 자세” “벌 받은 몸” “벌 받는 목숨같은 고난과 핍박과 처벌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이미지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시 으로” “애타면서” “불타면서” “몸속으로같은 상반된 이미지 계열을 반복-변형하면서, 급격한 변환의 리듬과 반등의 벡터를 틔워 올린다. 나아가 점층적인 가속도의 리듬을 타고 흐르면서, “막 밀고 올라가는 상승의 감염력을 급박한 어조로 흩뿌려 놓는다. 이는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구성하는 상반된 두 계열의 무늬들이 웅숭깊은 (la chir)’의 차원에서도, ‘극즉반(極卽反)’으로 표상되는 대극적(對極的)’ 전환의 테를 그때그때 긋고있음을 암시한다.

  어쩌면 이 시의 백미(白眉)겨울-나무의 가혹한 수난 및 고행의 감각과 봄-나무불타는열망과 파죽지세의 상승감이 동시에 일으키는 대극(對極)’의 팽팽한 리듬에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상호 모순에 가까운 하강과 상승의 급격한 낙차(落差)와 그것이 불러오는 다이내믹한 길항(拮抗) 운동이야말로, 이 시가 1980년대 만인의 실존을 울리고 북돋고 가로질렀던 대중적 감염력의 실질적 원천일 것이다. 동시에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기념비로 기록될 수밖에 없을 독창적 성취의 주요인에 해당할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측면은 온몸으로라는 작은 무늬가 하나의 단선적인 의미 매듭으로 수렴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시사한다. 또한 강유상추(剛柔相推)’의 리듬을 타고 흐르면서, 상호 이행(移行)으로 치달아가는 대위법적 횡단의 벡터가 이 시의 온몸으로에둘러져 있음을 암시한다.

  『주역 산지박(山地剝)’ 괘에서 등장하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 그러하듯, “온몸으로는 전혀 다른 사물들이나 상반된 상황의 마주침, 양극단의 공존 상태를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그것은 은폐의 깊이와 개진의 탄력을 동시에 품는다. 나아가 -나무로 돋아나는 현실 해방의 리듬을 예지(叡智)의 넉넉함으로 미리 감싸는 희망의 언어이자,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생명력의 불씨자기의 온몸에 쟁여두고 있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겠다. 그것은 지상에 남겨진 한 알의 작은 씨 과실새봄의 싹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될’(신영복담론) 생장과 상승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더불어 그 미래 시간의 사건들을 자기 몸에 이미 쓸어안고 있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온몸으로는 이 시의 뒷자락에 숨겨진 시적인 것의 윤곽을 꼴 짓는 사유 이미지의 중핵으로 기능한다. 아니, 저 아득한 별자리를 가르며 쏟아져 내리는 우리 마음의 地圖”(503.)를 경건하면서도 수려한 감응의 빛살로 물들인다. 이 시의 거죽 위로 돋아난 온갖 무늬들을 둔중한 긍지의 고양감, 또는 견고한 열정의 자존감으로 계속 밀고 올라가도록 북돋기 때문이다. 만인의 가슴을 움켜쥐게 만드는 저 처연하면서도 단단한 아름다움, “나의 생”(수은등 벚꽃)의 처절한 수난과 먹먹한 광휘 앞에서, 우리는 문득, “길은,/가면 뒤에 있다.”(503.)라는 말을 읊조릴 수밖에 없으리라. “-나무불타는 열망과 상승의 기세는 겨울-나무의 또 다른 자기 몸 무방비의 裸木”, “그 뒤에 있는것이기 때문이다.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문장 단위로 분절해보면, 세 번째 마디가 매우 긴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地上이란 한자어 이미지를 수식하는 시구들 역시, 한자어의 반복과 누적에 따른 기묘한 상승의 감각이 드리워짐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零下 十三度/零下 二十度로부터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에로 나아가는 급격한 의미 변환의 리듬을 내장한다. 따라서 텍스트 한복판을 차지하는 한자어 이미지들은 차이와 반복을 동시에 현시한다. 이들은 한자어라는 표기 형태의 차원에서 보면 매우 도드라진 반복의 벡터를 나타내지만, 그 의미 내용의 차원에서 살피면 그러나를 분기점으로 정반대의 벡터로 치닫는 전환의 쌍곡선을 그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은 그러나가 이 시편 전체를 양분하는 변곡점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이 시구의 앞부분이 헐벗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벌 받는같은 수렴과 축소, 피동과 하강의 이미지를 구축한다면, 그 뒷부분은 애타면서” “불타면서” “밀고 간다” “밀고 올라간다같은 현재진행형 어구들을 다양하게 활용하면서, 발산과 확장, 능동과 상승의 이미지를 역동적 동선으로 그려놓기 때문이다. 이 상반된 이미지 벡터는 제목으로 활용된 겨울-나무-나무와 고스란히 상응한다.

  이러한 측면을 시인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선적(禪的)인 것에 비추어보면, ‘상즉상입(相卽相入)’이란 방편으로서의 말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전체 구조와 이미지 짜임새를 좀 더 적확하게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즉상입은 우선 밝음과 어둠은 쌍쌍으로 더불어 존재하면서 서로에게 이미 의존해 있는 상즉(相卽)’의 관계 맺음을 나타낸다. 동시에 밝음 속에 어둠이 있으며 어둠 속에 밝음이 있기에 밝음 가운데 어둠이 흘러들고 있다.’(스즈끼 다이세쯔선의 진수)라고 풀이될 수 있을 상입(相入)’을 함께 포괄한다. 따라서 그것은 지극히 이율배반적인 동일화 현상과 그 본질적 원리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헤아려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상즉상입이란 머무름이 없는 머무름(無住而住), 얻는 자취 없이 얻음(無得而得), 이름할 수 없는 이름(無名而明), 보지 않는 가운데의 봄(無見而見), 실천의 흔적 없는 실천(無行而行)’(선의 진수) 같은 지극한 역설 어법과 비논리의 논리를 방편 삼아, “선적(禪的)인 것의 현지(玄旨)를 집약하는 말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그것은 형식논리의 동일률이 포함하는 맹점과 허상이 저절로 드러나도록 유도하는 방편으로서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색즉공공즉색(色卽空空卽色)’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같은 순환어법들 역시, “禪的인 것에 주름진 언외현지(言外玄旨)’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의 언어일 것이다. ‘말이 아닌 말이자 비언어의 언어의 한 갈래를 이루는 것이기에.


3

 

시작메모/황지우//지난 겨울, 문학을 하겠다는 후배들과 간담하는 자리에서 나는, 시를 언어에서 출발하지 않고 詩的인 것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시적인 것은 딱 뭐라고 말할 수 없고, 딱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쩌면 禪的인 것과 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지난 겨울 문학을 하겠다는 후배 몇몇 사람들과 나는 말한 적이 있다. 그 실례들을 나는 전태일 일기와 임제록에서 찾아보려고 했던 적이 있다. 시란 금방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인데도,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떠마신다.”

 

- 황지우, 버라이어티 쇼 1984부분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황지우가 말하는 禪的인 것이란 불교적 맥락을 적확한 용법으로 담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적인 것에 가까운 테두리에서 활용되고 있음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또한 양자는 언어가 아닌 그 너머의 다른 기호(記號)나 지각 양식을 통해서도, “침묵에 싸인 현실의 꼴발견될 수 있음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활용된 것임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시적인 것 딱 뭐라고 말할 수 없고, 딱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쩌면 禪的인 것과 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고,”라는 대목이 시사하듯, 시인은 애초부터 언어바깥의 다양한 지각 양식들이나 시각 기호들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려는 기획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인용문에 따르면, “詩的인 것禪的인 것언어의 바깥, 딱 뭐라고 말할 수 없고. 딱 말할 수 없다는 점으로 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인용문 자체가 이미 언어바깥에서 詩的인 것감염력또는 禪的인 것의 현지(玄旨)를 어렴풋한 기색으로 발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글의 주요 관심사는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시가 거느리고 있는 텍스트와 침묵의 길항(拮抗) 관계,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개진과 은폐대극운동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데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저 대극운동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명하려는 어리석은 열정 때문에, 다소 긴 우회로를 지나온 셈인지도 모르겠다. 황지우 시의 중핵을 구성하는 텍스트와 침묵의 상호 조명 효과는 그의 長兄 宇晟 스님”(나는 너다)으로부터 촉발되었을, “禪的인 것에서 기원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결국 시인이 말하는 禪的인 것이란 두 번째 시집에서 처음 명시된 것이긴 하지만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1998)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그의 예술적 사유의 원천이자 시작법의 핵심을 차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곧 황지우의 모든 시집을 끊임없이 해체-재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유의 불꽃으로 자리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의 후반부를 禪的인 것의 시각으로 다시 되돌려보라. 이 시의 네 번째 마디 온몸이 으스러지도록/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특정한 어구의 반복-변형의 리듬이 윙윙대며 치켜세우는 생성과 되기의 리듬일 것이다. 이는 세 번째 마디에서 이미 나타난 절박한 상승의 기세와 유사한 맥락을 이룬다. 특히 전반부의 하강으로부터 후반부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지각의 이행 운동은 우리에게 거의 똑같은 해방의 감각을 선사한다.

  그러나 네 번째 마디는 세 번째 마디와 전혀 다른 느낌의 결을 만든다. 이 맥락은 지금까지 우리가 공들여 이야기해 온 매듭 하나와 그대로 맞닿는다. 그렇다. 그것은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만이 아니라, 첫 시집에 실린 飛火하는 불새로부터 어느 날 나는 흐림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에 수록된 수은등 아래 벚꽃이나 감옥 안에 있는 떡갈나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시편들을 다시 연상시킨다. 그것은 시적인 것발생하는 콘텍스트온몸을 천지사방으로 다시 열어젖히기 때문이다.

  앞서 열거한 시편들에서 공포감죄의식”, 그리고 살의의 빛()”부서지려는 질그릇같은 무늬들이 함께 불러들이는 지옥 같은 혼돈을 절절한 감응의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라. 이 무늬들의 심연에서 울리는 치명적인 신음(呻吟)의 메아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이들이 만드는 콘텍스트별자리가 얼마나 끔찍한 살풍경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저토록 끈질기고 끈질긴 정신병리의 증상과 유사-광증으로 언명된 영혼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오랫동안 시인의 실존에 들러붙어 괴롭혀 왔는지를 눈앞의 사건처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리는 온몸이 으스러지도록/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터지면서라는 구절은, “1980530일 오후 2, 나는 청량리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았다.”(44.나는 너다)를 단번에 데려온다. 또한 여타 시편들에 나타난 시인의 끔찍한 트라우마와 고통의 얼룩을 곧장 떠오르게 만든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저 소름 돋는 풍크툼(punctum)’의 잔상들은 그것에 잠긴 끔찍한 사건 하나를 곧장 소환해온다. 그의 생 한복판에 얼룩진, 1980년 신군부 합수부에서 받은 고문의 상흔은 몸이 없어지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부끄러움의/재 한줌”(44.나는 너다이라고 표현된, 그야말로 치욕과 죄악똥덩어리”(수은등 아래 불빛)로 뒤덮인 무늬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으스러지도록은 자기 분열의 반복 어구로 이어지면서 의 리듬과 의 실존을 향해 치닫는다. 시인의 치명적인 트라우마와 ()”의 비명을 암시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상 시인의 몸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심연마저 찢기고 부서지고 망가져 버린, 파란 유황불이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았을 26호실”(감옥 안에 있는 떡갈나무)의 처참한 진실을 환기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자리로 돋아난 으스러지도록이 시인의 ()”과 관계된 것이라면, 뒤엣것은 추악과 수치가 강제하는 영혼의 증발 순간을 현시하기 위한 예술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 뒷자리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부르터지면서/터지면서역시, 앞자리에서 이어져 온 실존적 의 찢김이라는 벡터를 점층적으로 누적시킨다. 그리하여,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는 결단코 자연의 이법(理法)을 모티프의 중핵으로 삼지 않았노라.’라는 숨겨진 맥락 하나를 우리 앞에 말없이 툭 던져놓는다. 이 맥락 역시, 시인의 생 한가운데 얼룩진 끔찍한 고문 체험과 더불어 이 개 같은 땅”(이영광, 길의 장례) 어디에도 두루 편재할 수밖에 없었을 1980년대라는 시대상의 진면목(眞面目), ‘폭력의 일상화체벌의 관습화를 우회적 어감으로 상기시킨다.

  이 시편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작이자 시인의 출세작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이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은 1980년대의 대명사일 수밖에 없을 가공할 폭력과 체벌, 그 살벌한 위압과 욕설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권위주의적 가해의 쾌감으로 가득 찬 유사-사디즘(sadism)’이 악무한(惡無限)의 고리를 이루면서, 나날의 삶에 만연했던 우리 모두의 -실존’, 세계의 살에서 움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맥락 전체는, 그 시대의 섬찟한 폭력의 일상화가 잉태시킨 일그러진 살의 세계와 더불어, 거기서 해방되려는 시대정신자체의 보편적인 욕구를 연상시킨다. 이른바 독재타도로 표상되는 당대의 시대정신이란 세상 곳곳을 넘쳐흘렀던 만인의 공감대이자 정치적 감염력의 용광로였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가 거둔 대중적 인기와 예술적 성취, 그 양면성의 두 얼굴이란 무방비의 裸木처럼 그렇게 살아야만 했고, 벌 받는 목숨처럼 그렇게밖엔 살 수 없었을, 저 지긋지긋한 일상적 폭력의 진창길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진흙 몸을 벗어나려는 그 시대 자체의 간절한 일렁임에서 오는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 그 모든 이들의 온몸에 이미 주름져 있었을 현실 해방의 보편적인 리듬에서 비롯하는 것이 자명하다. 그것은 결국 1980년대 만인이 꿈꾸었을 간절한 자유의 열망과 참된 공동체를 향한 우리 모두의 강렬한 충동과 보편적인 욕구에서 기원하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라는 그 뒷자리의 이미지 다발은, 우리 모두의 자기 몸에 이미 깃들어 있었던 순결한 성장의 욕구와 꼿꼿한 저항의 기백을 현시한다. 또한 저 욕구와 기백이 만물의 보편적인 생장(生長)의 리듬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다만 여기서 부사어와 쉼표가 반복의 형태로 표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맥락을 다시 섬세하게 되짚는 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천천히, 서서히, 문득,”이라는 부사어와 쉼표의 반복적 연쇄는 우선 각각의 개인이 처한 실존적 고유성의 편차를 존중하려는 의도와 목적에서 활용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저 반복의 매듭은 개인적 편차와 실존적 맥락의 존중이라는 개인주의차원으로 고정되거나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모두의 온몸에 간절한 현실 해방의 꿈과 충동이 깃들여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달리 말해, 우리의 꿈과 충동이 새로운 진리-사건을 창출하는 역사 전환의 계기이자 원동력으로 작용하리란 사실을 미리 예감하는 자리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다른 보편주의’(이찬)의 리듬을 말없이 일렁이도록 강제한다. 달리 말해, “천천히, 서서히가 개인적 근기(根機)의 편차와 일상인들의 범속한 대열에 발맞춰 나아가려는 시인의 체질적인 배려심에서 온 것이라면, “문득현실 해방을 향한 우리 모두의 충동과 욕구가 새로운 진리-사건의 발생이라는 혁명적 시간의 리듬을 타고 도래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문득이란 부사어는 기성의 언어와 규범 체계, 그 지배적 안정성에 구멍을 뚫으면서 도래하는 다른 보편주의의 리듬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 새로운 진리-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에 깃드는 역사적 우발성을 현시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저 우발성의 시간 속에 공백으로서의 보편주의가 다시 깃들일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묵시적 행간으로 솟구치게 만든다. 그만큼 문득은 함축성의 밀도가 매우 높은 말이라 하겠다. 결국 천천히, 서서히가 만인의 삶과 일상에 보폭을 맞추려는 김수영의 지평선의 대열’(바뀌어진 지평선)과 똑같은 감응의 파장을 드리운다면, 황지우가 발명한 문득이란 우발적이면서도 보편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우발적인 진리-사건의 시간적 마디가 품은, 그 섬세한 (la chair)’의 리듬을 개현(開顯)하는 언어의 보석일 것이다.


4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만 8세 때, 영광스럽게도, 나중에 역사책에 나오는 그 현장에, 그 소요에, 그 혁명에 우연히, 있었지요. 말탄 나폴레옹 그림이 그려진 나의 란도셀 속에는 국어책, 국어공책, 산수책, 산수공책, 자연책, 자연공책, 사회생활책, 사회생활공책, 음악책, 짝짝이, 병아리표크레용, 도화지 2, 필통, 자가 들어 있고 아침에 깎아 넣은 연필들이 화란 풍차 그림이 든 철갑 필통 속에서 달그락거리고 있었지요. 나는 군대 담요색 당꼬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대열이 동명동 광주형무소와 전남여고 사이에 흐르는 동문다리 개천으로 구부러져 들어갈 때였을 거예요. 히말라야 소나무숲으로 우거진 전남여고 앞에서 검정색 제복을 입은 일단의 순경아저씨들이 곤봉을 쓰윽 빼들고 대열 앞을 가로막자, 수천명의 광주고생 · 광주상고생 · 사레지오생들이 그 자리에서 너나없이 스크람을 짜고//독재 타도 독재 타도/독재 타도 독재 타도/독재 타도 독재 타도/독재 타도 독재 타도//를 외치며 발을 맞추는 사이에, 나는 스크람을 짜기엔 키가 너무나 작아서 대열에서 빠져나와야 했지요.”

 

- 황지우, 1960419· 20· 21, 光州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1985.

 

  인용 구절들 가운데서도, “수천명의 광주고생광주상고생사레지오생들이 그 자리에서 너나없이 스크럼을 짜고//독재 타도 독재 타도/독재 타도 독재 타도/독재 타도 독재 타도/독재 타도 독재 타도//를 외치며 발을 맞추는 사이에라는 대목에 집중해보라. “8세 때로 명시된 시인의 원초적 진리 체험에서 비롯하는 ‘419’라는 정치적 진리-사건의 그 생동하는 현장감을 고스란히 느껴보라. 이 대목의 형상들이 선명한 질감으로 증언하듯, ‘419’라는 혁명의 시간을 흘러넘쳤던 드넓은 공감대와 만인을 추동했던 진리-사건의 보편적 감염력이란 인류의 역사 자체에 깃든 어떤 필연성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문득을 인간의 역사적 차원에 대입하여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에 따르면, “문득-나무에로나아가는 역사적 진리-사건이 우발적 발생 계기를 명시하는 것인 동시에 만인을 가로지르는 드넓은 감염력의 바다, 그것이 발산하는 보편적인 해방의 리듬을 암시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모든 이의 가슴 벅찬 교감 상태와 더불어 그 펄럭이는 감응 현장의 드넓은 전율과 유대감을 타고 흐르는 다른 보편주의의 리듬을 현시할 수 있는 양면성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득은 이 시 내부에서 진리-사건의 우발성과 필연성을 동시에 표현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며, 그러하기에 매우 중요한 미학적 단자로 기능한다고 하겠다.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그때 이미 다 알았다”(수은등 아래 벚꽃)라는 이후의 또 다른 무늬가 명징하게 환기하듯, “문득-나무막 밀고 올라가게 하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성장의 꿈과 욕구가 현실에서 굴욕을 당할지언정, ‘그 언젠간 반드시 이루어지겠노라.’는 처연하면서도 가슴 벅찬 미래 시간의 예지(叡智)를 뒷면에 휘감는다. 그것은 푸른 잎이 되고/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라는 구절로 이어지면서, “-나무의 상승하는 기운과 드넓은 현실 해방의 욕구가 겨울-나무의 그 모든 장애와 방해와 반작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밖에 없는 자연의 당연한 순리이자 역사의 보편적 리듬임을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그리하여, 그 뒷자리에서 나타나는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라는 문장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자유해방의 성취 순간을 우리 모두에게 선사한다. 그것은 겨울-나무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벌 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있었던, 그 처절한 고통과 수난의 시간을 자기 몸에 이미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온몸으로무던히 극복해 온 자기해방의 시간을 절절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의 자기실현, 또는 자기완성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유토피아적 꿈에 대한 근원적 희구를 암시한다.

  마무리 부분을 장식하는 아아, 마침내, 끝끝내/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꽃피는 나무이다.”라는 자기 완결성의 형상들 역시, 앞선 마디에서 이어져 온 흐름을 고스란히 받아안는다. 따라서 동어반복의 이미지를 다시 축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동어반복은 우리가 여태껏 탐색해 온 禪的인 것의 내포와 외연을 완결짓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함축한다. 또한 황지우 시 곳곳에 폭넓게 산재하는 불교적 사유의 다양한 편린(片鱗)을 집약하는 두 가지 핵심 항목과의 현란한 마주침과 엇갈림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달리 말해, “시적인 것선적인 것을 하나로 꿰뚫을 수 있는 사유의 밀도와 온몸의 열정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는 앞서 살핀 부사어의 반복과 거의 비슷한 미감의 효과를 발산한다. 그러나 그것은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꽃피는 나무이다.”를 치켜올리면서 이 시의 자기 완결성이라는 주제를 암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황지우 시 전체를 관통하는 주도 모티프(leitmotif)’ 가운데 하나인 화엄(華嚴)”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이후 시집들에서도 부단히 형상화되었던 화엄을 향한 시인의 참을 수 없는 그리움”, “현실 해방의 간절한 꿈과 소망을 묵시적으로 개진하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꽃피는 나무는 오직 자기 몸으로꽃피는 나무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으며, 번뇌가 보리이고 보리가 번뇌이므로 그 몸은 둘이 아니다.(生死涅槃非異處 煩惱菩提體無二)’(明皛海印三昧論)로 표상될 수 있을,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모든 온몸을 빠짐없이 가로지르는 禪的인 것의 현묘한 깨달음에서 온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이 깨달음이란 사방을 열어젖히는 다른 보편주의의 리듬을 타고 도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세상만사의 온몸자기의 온몸으로 받아들이려는 광대무변한 보편성의 자리에서만, 그것은 참된 빛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온갖 일들을 두루 아우르면서도 그 어디서도 자유자재하게 활동할 수 있는臨濟錄-성철 스님의 임제록 평석), 그야말로 참된 보편주의의 리듬을 여는 깨달음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온몸으로 꽃피는깨달음인 동시에 세상의 온몸자기의 온몸으로 꽃피우려는 열린 마음, “여래청정심(如來淸淨心)‘의 제약 없는 실천을 암시하고 있기에.

  그리하여, 이 시의 가장 평범한 무늬로 자리한 꽃피는, “그러나이후로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온 성장과 상승의 리듬에 고스란히 잇닿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 뒷면에 상하(上下)’ ‘좌우(左右)’ ‘귀천(貴賤)’ ‘빈부(貧富)’ ‘성속(聖俗)’을 빠짐없이 통관(通貫)’하면서, 그 모든 차이와 구분과 분별심을 넘어서 도래하는 깨달음, 불교적 보편주의의 진경(眞境)을 표현한다. 이 깨달음이 시작되는 참된 계기와 결정적 장면들 역시 자기의 온몸”, 불법(佛法)의 근간인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올 수밖에 없으므로.

  오랫동안 시인이 붙들고 있었을 임제록(臨濟錄)”의 한 구절을 떠올려보라. 그리하여, ‘시방법계(十方世界)를 두루 관통하여 삼계에 자유자재로 활동하며, 온갖 차별된 경계에 들어가도 끌려다니거나 휘말리지 않는다.(通貫十方 三界自在 入一切境差別 不能回換)’(臨濟錄-성철 스님의 임제록 평석)라는 표현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저 구절이 문득일깨우듯, 정작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자기 몸의 주인이 실제로되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본래면목을 매일같이 새롭게 깨달으면서 나날의 삶에서 그것을 부단히 수행해가는 그 실천 과정 자체의 일관된 충실성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지금 나에게는 칼도 도 없다./이 길을 가르쳐주진 않는다.”503.라는 시구가 우리 가슴에다 찔러넣는 실존적 파문의 동심원처럼.


5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지평선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날이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도 없다.

이 길을 가르쳐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너니까,

우리는 自己.

우리 마음의 地圖 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 503.전문나는 너다, 1987.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는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이제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수은등 아래 벚꽃부분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있을 거다, 1998.

 

  어쩌면 시인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를 가든 주인이 된다면 자기가 서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라는 임제록의 한 구절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자기 생()과 시를 함께 만들어 갈, 처연한 미래의 과 휘황한 마음의 地圖를 동시에 마련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시인 황지우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가 되는 지도임제록에서 구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로 표상되는 깨달음의 을 우리 모두에게 권유하면서, 지도를 함께 들고 걸어가고 있기를 소망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시인이 권유하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 그 깨달음의 빛살을 거두어들일 수만 있다면, “길은, 가면 뒤에 있다라는 황지우의 시구가 왜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의 세계, “九萬里 靑天으로 날아오를 수밖에 없는지를 이내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록 유토피아적 꿈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우리 실존이 매일같이 마주치는 온갖 곤욕과 우여곡절들을 무리 없이 순리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허주(虛舟)’의 지혜와 겸허의 행복감을 그 뒷면에 말없이 드리우기 때문이리라. 오직, “자기 몸으로꽃피우라는 밀어(密語)’를 우리 모두에게 침묵의 행간으로 건네주고 있기에.

  「503.에 새겨진 나는 너니까, 우리는 자기야콘텍스트의 자리에서 불러오는 벚꽃들 사이 수은등”(수은등 아래 벚꽃)이라는 다른 무늬를 보라. 그리고 그것이 수록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1999)를 꺼내어 다시 찬찬히 뒤적여보라. 저 처연한 수은등불빛이 뿜는 기묘한 아이러니의 광휘를 문득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 503.전체를 감싸며 휘돌아나가는 그야말로 호방한 좌망(坐忘)’의 환희, 또는 아슴아슴한 고양감의 실루엣과 겹쳐 떨릴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가 되고, “우리자기가 될 수 있겠노라고 시인이 계속 노래할 수 있었던, 또는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노라는, 저 초라하고 남루한 수은등아랫길을 한참 동안 거닐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시인이 그렇게 노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결같이, “늦은 사랑”(수은등 아래 벚꽃)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이 말하는 늦은 사랑이란 결국,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기의 온몸이자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임을 문득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리라. 극단적 아이러니어떤 죄악도 아름다워라는 무늬에 고스란히 스민다. 이 역시, ‘중생이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어서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이다.(直指一切衆生 本來是佛)’(황벽희운완릉록)라는 禪的인 것의 오랜 화두를 온몸으로깨우쳤던 자리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기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518’이라는 한국사의 진리-사건에 깃들여져 있었을 땅에서는 환호성, 하늘에서는 비밀한 불꽃 빛 천둥음악”(華嚴光州)이 발산하는 저 극단적 아이러니의 장엄한 감염력을 다시 어루만져보라. 그리고 이들이 불러들이는 다른 보편주의의 시간적 여울목에 오랫동안 머물러보라. “화엄광주(華嚴光州)”를 가로질렀을 수많은 마니(摩尼) 보배 꽃도둑, 깡패, 마약범, 가정파괴범의 공존, 곧 상호 모순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양극단의 무늬들이 서로 횡단하는 자리를 보라.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유마힐(維摩詰)” 또는 죄의 은총(felix culpa)’으로 대변되는 종교적 영성(靈性)이 드넓은 감응의 메아리로 울려 퍼지면서, 저 양극단의 무늬들이 다 함께 어우러지고 정화되고 치유되는 장면을 직접 목도(目睹)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현현하는 극단적 아이러니가 얼마나 절절하면서도 경건한 발광체(發光體)”로 감싸여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518’이라는 정치적 화엄의 시간에 깃들일 수밖에 없을 한국사의 진리-사건이 왜 다른 보편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적 리듬과 행동의 벡터를 낳을 수밖에 없는지를 살갗에 이는 소름처럼 느낄 수 있으리라. 그것을 관통했던 만인의 보편적 공감대와 드넓은 정치적 감염력온몸으로감수하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황지우 시가 한국시의 중요한 기념비 가운데 하나로 헌정될 수밖에 없는 합당한 이유와 근거도 바로 이 자리에 있다. 그것이 이룬 독보적인 성취는 결국, 정치적 진리-사건이 촉발하는 다른 보편주의의 무늬들을 의 리듬으로 일렁이게 하는 탁월한 예술적 장치들과 시대를 앞지른 미학적 발명의 첨단점(尖端點)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늦은 사랑을 한결같이 넉넉하고 애틋하고 절실하게 간직할 수 있는 청정한 마음, “유마힐(維摩詰)”에 가까워지려는 시인의 대승적(大乘的) 삶의 태도와 수미일관한 세계관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 틀림없기에.

  어느 날 문득”, 당신은 이 모두를 깨닫는 삶의 진경을 華嚴光州속에서 마주치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 시에 맺힌 저 장엄하고 숭고한 무늬들 가운데서도, “그때에 도둑, 깡패, 마약범, 가정파괴범,/국가보안법 관련자, 장기수 공산주의자 들이/폭소를 터뜨리며 교도소 문을 나오고”, 그리고 땅에서는 환호성, 하늘에서는/비밀한 불꽃 빛 천둥 음악이라는 대목에 한참 동안을 서 있어보라. 그리고 이 둘을 오랫동안 느릿느릿 견주어보라. 그리하여, 여기서 일어나는 극단적 아이러니의 움직임이란 결국, ‘여래청정심(如來淸淨心)’으로 표상되는 대승적(大乘的)’ 깨달음으로 나아가려는, 그야말로 재앙스럽고 위험한실존적 정신병리와의 힘겨운 싸움에서 오는 것임을 당신의 심안(心眼)으로 다시 들여다보라.

  그리하여, “급격한 소용돌이와 현기증을 만들기도 했던”(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이라고 시인이 고백했던 어두운 의 파란만장한 곡절들을 당신의 온몸으로체득해보라. 바로 이 자리에서, 황지우 시의 정수와 감염력이 어디서 오는지를 바닥까지 헤아릴 수 있는 혜안을 얻게 될는지도 모른다. 아니, “화엄(華嚴)”으로 가는 ()”이라는 마음의 지도온몸으로품게 될 것이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을 만날 수 있는 摩尼 보배 꽃, 을 활짝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길은, 가면 뒤에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에.

  마지막으로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을 황지우 시 전체의 영광과 비참’(김인환), 그 이중주를 당신의 살갗에 닿는 장엄한 교향곡의 리듬으로 느껴보라. “시방세계(十方世界)”의 그 모든 이에게로 열리는 불교적 보편주의의 리듬, “여어러 세상 흘러온 굽이굽이 千江月山의 달무리가 떠 있는 아래의 풍경처럼. “十方으로 큰 우레 소리 두루 내는 강처럼/흘러들고 흘러나올수밖에 없을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달무리가 그러하듯.

 

저 도청 앞 분수대에

유리 줄기 나무 높이 올라오르리라

그 투명 가지가지마다

지금까지 참았던 눈물 힘껏 빨아올려

유리 나무 상공에 물방울 뿌린 듯

수많은 魔尼 보배 꽃, 빛 되리라

그때에 온 사찰과 교회와 성당과 무당에서

다 함께 종 울리고

집집마다 들고 나온 연등에서도 빛의

긴 범종 소리 따라 울리리라

상점도 은행도 창고도 모두 열어두고

기쁜 마음 널리 내는 강 같은 사람들

發光體처럼 절로 빛나는 얼굴들 하고

젊은이는 무등 태우고 늙은이는 서로 업고

어린이는 꽃 갓끈 빛난 신 신겨 앞세우고

금남로로, 금남로로, 노동청으로, 도청으로

十方으로 큰 우렛소리 두루 내는 강처럼

흘러들고 흘러나오고

그때에, 須彌山(수미산)에서 날아와 굳어 있던

무등산이 비로소 두 날개 쫘악 펴고

羽化昇天하니, 정수리에 박혀 있던

레이다 기지 산산조각나는구나

땅에서는 환호성, 하늘에서는

비밀한 불꽃 빛 천둥 음악

마침내 망월로 가는 길목 山水에는

기쁜 눈으로 세상 보는 보리수 꽃들

푸르른 억만 송이, 작은 귓속말 속삭이고

오시는 때 맞춰 황금 깃털 수탉이 숲 위로

구름 憧奇 일으키며 힘차게 우는 鷄林

그때에 도둑, 깡패, 마약범, 가정파괴범,

국가보안법 관련자, 장기수 공산주의자 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교도소 문을 나오고

그날 밤, 연꽃달 환히 띄우고

여어러 세상 흘러온 굽이굽이 千江

산기슭에 닿아 있는 月山, 처음으로

물 속 연꽃달 보았던 개 한 마리

늑대 울음 울며 산으로 돌아가고

 

 

華嚴光州부분게 눈 속의 연꽃,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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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간-절기, 밤을 불러내는 주문의 시간 ― 2025년 봄, 환절의 시편들

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계간 파란 최진석 간절기생성산책미래이행사건 2025
이찬 ‘時中’, ‘다른 미래’로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 김수영 시 「바뀌어진 지평선」

1 2024년 여름 『계간 파란』 통권 33호 ‘문질빈빈(文質彬彬)’ 항목에서 제시된 「“지평선”의 아름다움」에서 이미 암시했듯, 김수영의 「바뀌어진 지평선」은 『주역』과 『중용』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고전의 영향 관계라는 문제틀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어야만 한다. 이 시편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래된 미래’로 자리할 수밖에 없을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이라는 방법론과 의제의 초점화를 통해서만 적확하게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시와 산문 텍스트의 상관성을 심층적으로 탐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고전의 충실한 이해 및 참조가 필수 불가결의 조건을 이룬다고 하겠다. 김수영의 초기작 「공자(孔子)의 생활난」에서부터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유발한 도피 행각과 귀가 이후의 실존적 격투가 고스란히 배어든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 그리고 말년에 창작된 「미역국」이나 「사랑의 변주곡」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수한 시편들에선 동아시아 고전의 수용 및 변용의 맥락이 일관된 지속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김수영의 시에서 동아시아 고전의 이름이 거죽 위로 솟아오른 텍스트로는 「술과 어린 고양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는 中庸의 술잔” “여기에 있는 것은 中庸이 아니다” 같은 구절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시의 本髓」 같은 산문 텍스트에서 활용된 “양극의 긴장” “대극” 같은 용어들 역시. 동아시아 문명사의 주축을 이루는 ‘주역 철학사’에서 부단히 제시되었던 ‘대대(對待)’ ‘순환(循環)’ 같은 어휘들을 수용・변형한 것이다. 김수영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설움”과 “긍지”, “생활”과 “자유” 같은 대립적 심상들이 상호 보완적인 “대극”의 지력선을 이루는 것처럼, “대극”과 “양극의 긴장”으로 표상되는 산문 텍스트의 핵심 원리 역시,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중용』의 ‘신독(愼獨)’으로 대변되는 근본적 ‘자기성찰’을 수미일관한 실존적 태도로 “이행(履行)”하려 했을뿐더러, “생활”과 “뮤즈”가 “일자(一字)”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실천의 기반으로서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끊임없이 견지하려 했으며 이를 당대의 “서정시인”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시중(時中)’이란 말은 『중용』 제2장에서 등장하는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君子가 中庸을 함은 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小人이 中庸에 반대함은 小人이면서 忌憚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을 통해, 그 어휘적 관련 맥락과 구체적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주희(朱熹)의 주석으로 나타난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君子가 中庸을 하는 까닭은 君子의 德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中에 처하기 때문이요)’라는 구절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시중’이 인격 수양의 정점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맥락을 좀 더 생생하게 감득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시중(時中)’이란 ‘고시조지의야(故時措之宜也)’라는 말에 담긴 실질적 의미, ‘그러므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행함에 의(宜), 적합하면 된다’(우응순, 『친절한 중용 강의』)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상황과 시간의 구체적 마디들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더불어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마땅함(宜)을 매번 다시 살피고 수행해야 한다는 숨겨진 맥락을 명료하게 풀이해주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에서 부단히 등장하는 부끄러움의 형상들이나 보잘것없음을 반성하는 자기성찰적 시구들은 한결같이 ‘시중’의 윤리학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김수영의 여러 시작품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시각성’의 이미지들 역시 좀 더 심층적인 차원의 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위시한 동아시아 고전에서 유래하는 ‘신독(愼獨)’ ‘권도(權度)’ 등과 같은 성찰성과 관련된 어휘들과 더불어 ‘중용’ 및 ‘시중’의 사유 맥락에 대한 섬세한 이해 및 본격적 탐구가 필수 불가결하다. 2 뮤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 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콜맨의 신작품(新作品)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賣春婦)의 생활(生活)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神經質)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卑怯)하다고 경멸(輕蔑)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라크 케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노력(勞力) 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영국인(英國人)들은 호스피탈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 - 「바뀌어진 지평선」 전문 3 「바뀌어진 지평선」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 텍스트를 넘어서 그의 실존적 태도와 세계관의 중핵을 구성하는 ‘중(中)’의 사유와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 시는 상당히 긴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라는 예술 장르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되어 온 의미의 압축성과 리듬의 암시성을 충실하게 확보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특이점과 미학적 자질이 온전하게 작품 내부에 응축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 역시, 김수영 특유의 “대극”의 사유 방식 또는 “양극의 긴장”에 대한 그의 첨예한 통찰력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1연에 나타난 “뮤즈”와 “생활”이란 이미지는 명시적인 차원에서 이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극”의 의미 계열을 구축한다. 양자의 사이 공간에 들어박힌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시구와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라는 시간적 심상은 “대극”이 반복・변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이란 “생활”에서 파생된 것이며, “너”는 “뮤즈”를 대명사로 바꾸어놓은 대체 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매듭이 나날의 범속한 생활이 만드는 온갖 우여곡절들을 암시한다면, “뮤즈”와 “너”가 함께 이루는 연속적인 이미지 지력선은 시인의 포에지(poesie), 곧 시인의 예술적 이상으로 이루어진 예술혼을 표상한다. 나아가 시작(詩作)의 ‘내재적 과정’에서 체감하게 되는 ‘신독(愼獨)’의 실천적 태도와 ‘시중’의 윤리학의 절실한 자각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위에서 풀이한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측면 또는 상반된 계기를 품고 있다는 의심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을 중용의 관점과 문제틀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긍지의 날」에서 상반된 위상을 차지하는 “설움”과 “긍지”라는 심상을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로 통합시키는 “대극”의 사유 원리를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사랑」에서 등장하는 “변치 않는”과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이라는 시구의 상반성, 그리고 「사랑의 변주곡」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사랑의 도시”와 “개미”라는 대극적 이미지 구성원리에서도 또렷한 되풀이의 모양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만한 경박성”이란 작은 무늬는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이상적 질서’, 곧 ‘중용’의 사유 및 실천 원리이자 ‘대대(對待)’라는 말로 집약되는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점에서 감수되고 해석되어야만 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이 품은 사유의 보석이란 어쩌면 정반대 상황에 놓인 사태들을 “대극”의 원리로 포괄하면서, 이들을 그저 대립하는 것만이 아닌 상호 보완하는 것이라고 사유했던 지점에서 최고 순도의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요만한 경박성”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덧씌워진 속물성이나 천박성을 껴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나의 가족」)를 예감하면서 “긍지”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상반된 “대극”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잠재적 포석을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에는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예감하는 사유의 밀알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내적 “성장”을 성취하려는 시인의 웅대한 미래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2연을 구성하는 “대극”의 짜임새는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정(靜)의 심상과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동(動)의 표현이 상반된 지력선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양자의 이미지 계열을 한층 더 풍성하면서도 복합적인 일상의 다면성을 담을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간다. 양자는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상반된 이미지 지력선을 각각 계승한다. 따라서 그저 단순한 ‘정(靜)/동(動)’의 “대극” 현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도리어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요약되는 역동적 상호 침투의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나아가 중층적 “대극”의 무늬들을 2연 마디마디의 모서리로 틔워 올리면서 그야말로 풍요로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주요 동인으로 기능한다. 2연의 “다소곳한 분위기”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심상들 역시,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구절들을 각각 잇따르는 것이기에, ‘정(靜)/동(動)’의 단순한 “대극” 현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표현되는 상호 침투의 역동적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그야말로 다면적인 “대극”의 무늬들을 아로새긴다. 달리 말해,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라는 심상이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고요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느낌을 함축하는 것이라면,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심상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고양된 충만감으로 솟아오르는 역동적 개방성의 이미지와 “대극”을 이루면서 고립된 폐쇄성의 감각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무거운 일기”와 “우울”이라는 형상이 둔중하면서도 정적인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이와 상반되는 “걸어가기 위하여”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라는 구절들은 예민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의 원환 운동을 표현한다. 4연에 나타난 “생활”->“비겁”->“나의 원죄와 회한”의 계열이 함축하는 세속적 “타락”이라는 의미 매듭과 더불어, “뮤즈”->“경멸”->“너의 생리”로 이어지는 형상의 연속선이 이루는 신성한 “지혜”라는 의미 계열 역시, 앞서 살핀 연과 같은 “대극”의 구도에서 발원한다. “생활”의 이미지 계열이 발산하는 ‘세속-현실-일상’이라는 하나의 “극”과 더불어, “뮤즈”라는 형상의 계열체로 수렴되는 ‘신성-이상-예술’이라는 또 다른 “극”이 함께 이루는 “힘”과 “긴장”의 미학이 생생한 느낌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뮤즈”의 “대극”을 형상화하면서, 김수영은 나날을 살아가는 “온몸”에 “타락”과 “지혜”를 동시에 포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나날의 “생활” 속에서는 “뮤즈”로 표상되는 시의 예술혼이 끝끝내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와 “대극”을 이루는 “뮤즈” 속에서는 “생활”과의 공분모를 형상화하려 했던, 시인의 실존적 “싸움”을 주도 모티프로 삼는다. 달리 말해, 시인의 몸과 마음에서 수시로 엇갈리는 무수한 “대극” 운동이 「바뀌어진 지평선」을 구성하는 전체 이미지의 주도소(主導素)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5연과 6연에서도 이와 같은 “대극”의 이미지들은 수미일관한 연속선으로 구축되지만, 좀 더 본원적인 차원으로 진화한다. 곧 상호 모순에 가까운 ‘극단적 아이러니’의 어법과 구조를 새롭게 펼쳐놓는다. 특히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5연), “뮤즈여/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6연) 같은 대목들은 표면적인 통사 구조만을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의 적확한 해석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에 내포된 그 복잡다단한 의미론적 계기와 극단적 아이러니 구조에 관한 섬세한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7연의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를 비롯하여, 8연에서 등장하는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같은 구절들 역시 상호 “대극”의 이미지 계열을 구성한다. 전자(前者)가 바로 앞에 놓인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에서 이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면, “타락한”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또한 “기자”의 직무상의 윤리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해가는 세속의 풍습과 인심을 “정시”하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이라는 시어와는 결합할 수 없는 상반된 의미 지향성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7연에서 도드라진 모양새로 등장하는 “타락한”은 기자”의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발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상태이자, “이 어지러운 세상”이 강제하는 온갖 “탈”, 곧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다. 이처럼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앞뒤로 연속된 시구들은 서로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어긋나는 모양새를 띤다. 이들은 “뮤즈”와 “생활”, 곧 ‘신성과 세속’, ‘이상과 현실’ ‘예술과 일상’ 등등의 상반 항들이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구도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시인의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의 사유를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이 품은 그 형상의 진의(眞義)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가치 전도의 의미를 거느린 이 형상은, “뮤즈”와 “생활”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오히려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상호 전환의 융합 관계에 놓여있다는 이면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중(中)’의 시간적 궤적을 표상하는 형상인 동시에 ‘역동적 균형’의 운동 및 이행 과정을 지속하는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암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8연의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 역시, “바뀌어진 지평선”으로 빗대어진 ‘신성’과 ‘세속’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상호 전환 과정 및 ‘역동적 균형’의 상호 이행 운동을 역설 어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 바로 앞에 놓인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와 더불어, 그 뒤를 잇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는 이미지 매듭을 오랜 시간 동안 숙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을 곰곰이 되살피면,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은 비단 “타락한”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풍자를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 구절은 언뜻 “가벼워서”, “배반”, “간악” 같은 시어들로 이어지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꼴 짓는 이미지의 핵심 매듭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앞뒤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정반대 의미 계열을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서만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이 “생활”에 있을뿐더러 “경박성”이란 그것의 필수 요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표면”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날아갈” 수 있는 “정신”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은폐된 측면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이라는 적확한 은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저 이미지들은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 “물”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 “위를 날아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단히 유지할 수 있는 실천의 벡터를 암시적 문법으로 개진한다. 이 실천의 원리를 ‘시중’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 철학자가 제시한 ‘인간의 모든 “중中”은 “시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時”라는 것은 객관적・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라는 언급은, 이 맥락 전체를 좀 더 명확한 철학적 범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4 이와 같은 ‘시중(時中)’의 사유 맥락은 8연 마지막 대목을 이루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같은 형상들이나, 9연의 “너의 육체는/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1연의 “뮤즈여/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같은 심상들로 변형되면서 점층적 확산의 의미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이 “뮤즈”에게 “표면에 살아라”라고 말하면서,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시중’의 윤리학에서 기원한다. “표면”은 “생활”의 의미 계열로 수렴되며,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뮤즈”의 이상적 예술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자기 신념을 은은한 뉘앙스로 드러내는 역설 어법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9연과 11연의 이미지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의 범주에서 감수되는 것이 합당하다. “뮤즈”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육체”의 차원에서 호명하는 이미지 매듭(9연)이나, “시인”과 “시”를 “대극”의 차원으로 설정하면서 “뮤즈”와 “시”를 의미론적 연속체의 범주로 설정하는 구절(11연)은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생활”과 “뮤즈”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계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이 구절들은 “생활”과 “뮤즈”를 끊임없는 상호 전환 및 상호 이행이라는 융합・횡단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김수영 특유의 ‘중(中)’의 사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는 또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라는 실천 원리와 가치 지향성을 내포한다. 9연과 11연이 연속적인 의미 계열을 이루면서 개진하려는 바는, 각각의 상황과 국면에 따라 “생활”과 “뮤즈”가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관계이자 최적의 방향성, 곧 매 순간 ‘시중(時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궁극적 전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과 “뮤즈”가 12연에서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양자의 상호 이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달라지는 ‘시중(時中)’의 위상과 내용을 신중하게 사유하고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해, 시인은 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최적의 방향을 모색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는 실천의 ‘내재적 과정’,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나날의 실존적 태도로 견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라는 구절로 표상되는 세계의 모든 영역이 “일자(一字)”를 이루는 “지평선의 대열”을 구축할 수 있는 궁극적 화합의 미래 비전을 상상하고 선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수영이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무리 대목에서 “뮤즈”에게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12연), “앞장을 서지 마라”(13연),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13연)라고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점을 이룬다. 시인은 “생활”과 “뮤즈”의 “대극”이 함께 이루어가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이행 과정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로 소묘함으로써, ‘세속/신성’, 현실/이상’, ‘예술/일상’이라는 대립 구도의 고정성을 부단히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동시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권유하려 했던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라는 대목은 “서정시인”으로 비유된 당대의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모두 “모더니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혁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전언을 간곡한 명령 어법으로 권고하는 내용을 품는다. 이렇듯 “지평선의 대열”이 그야말로 “일자(一字)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매리지/하우스펠 에어리어” 같은 어휘들로 표상되는 서구 기계산업문명의 선진성과 그 문화적 세련성을 무작정 동경하고 추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으리라. 나아가 이와 같은 서구의 문화적 특질을 “뮤즈” 곧 “시”의 이상적 본질이자 예술혼의 정수로 추구하거나 숭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대 서구의 문화는 우리의 “생활”과 엄청난 격차로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진 지평선」에서 시인이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라는 사회・역사적 상황과 이에 대한 신중한 고민 및 극복의 비전을 여타의 “서정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권고하려 했던 맥락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이 권고에 깃든 속도의 담론과 비전이란 우리 사회 전체의 “모더니티” 수준과 밀도에 대한 시인의 근본적인 염려와 신중한 고민의 깊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것은 『중용』 제2장의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과 그대로 맞닿는다, 『중용』의 이 구절에 따르면, 군자의 ‘시중(時中)’은 소인의 ‘무기탄(無忌憚)’과 상반된 방향과 내용을 지니는 ‘기탄(忌憚)’, 곧 ‘거리낌’을 심사숙고하는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낌이란 신중함’이며, ‘거리낌은 인간에게 “거리”와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기에 실수의 가능성을 줄인다’(김용옥, 『인간의 맛』)라는 깊은 안목의 풀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거리낌은 겸손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강함’일뿐더러, ‘시중(時中)’의 근거이자 그 실천적 이행의 원천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지막 연에서 극단적 역설을 표현하는 반어법을 동반하면서, 우리 “모더니티”에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울”과 “경박”을 반추하도록 강제한다. 마지막 13연에서 “앞장을 서지 마라” “낮추어라” 같은 말들로 표현된 제한과 금지의 명령어들을 “뮤즈”에게 덧씌울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은 김수영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1950-60년대 한국 시단에서 “모더니티”의 첨단을 맹종(盲從)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각별한 어조와 리듬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여타의 시인들이나 예술가에게 권고하고 공유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3연은 두 매듭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뮤즈여/앞장을 서지 마라/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낮추어라”라는 부분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마지막 대목으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는 “뮤즈”에게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 풍조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님을 권고한다. 또한 우리가 나가야 할 최적의 선택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기를 간곡하게 요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고민과 성찰의 자리가 바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 펼쳐지는 구체적 실천의 무대일 것이다. 이는 또한 후자(後者)의 지극한 역설로 이루어진 반어법을 낳는 토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의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맨 마지막 무늬들은 김수영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를 비유적 차원에서 집약하는 구절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 없이는 충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 구절과의 통사론적 맥락에서 보면 지극한 역설을 내포한 아이러니의 수사학일 터이지만,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은 “우울”과 “경박”이라는 시어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우리 “모더니티”의 낙후된 수준과 후진적 형성 과정을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그것과 ‘사랑하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그 복잡다단한 속사정을 비교적 명징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모더니티의 문제」에 나타난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김수영의 “이상한 역설”이란 현대 한국인에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을 “우울”과 “경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말하는 “긍지”란 우리 모두의 “우울”과 “경박”을 껴안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뿐더러. 이른바 ‘중용’의 미덕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김수영에게 “긍지”란 ‘시중’의 윤리학에 깃든 ‘실천적 원근법’과 ‘역동적 균형’의 부단한 “이행”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에서 발원하는 “우울”과 “경박”을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 터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열어가려는 수미일관한 실천의 자리, ‘시중(時中)’의 충실한 이행 과정을 통해서만 체화될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아랫자리에서 인용되는 작은 무늬들이 넌지시 말해주듯. 오오 환희(歡喜)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구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退溪)든 정다산(丁茶山)이든 수염난 영감이든 복덕방(福德房) 사기꾼도 도적놈지주(地主)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 자칭(自稱) 예술파시인(藝術派詩人)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能辯)을 욕해도-이것이 환희(歡喜)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人生)도 인생(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 - 「미역국」 부분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학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 - - 「모더니티의 문제」 부분

계간 파란 이찬 김수영바뀌어진 지평선중용시중신독역동적 균형상보성대극상반상성 2025
김주원 종이책 바깥의 문학

1. 한 통계에 따르면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을 포함한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다. 한국의 독서 인구가 매년 감소하고 있다고 하지만 2023년 기준 신간도서 발행 분포를 보면, 문학(20.1%)은 교육(20.9%)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 독자층의 도서 구매 상황은 다르다. 교보문고의 집계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소설과 시/에세이 부문의 판매 권수와 판매액 점유율은 점점 하락하는 추세이다.2) 도서 소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양 서적과 직업 관련 서적이라고 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계가 전례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학이 독서 시장에서 유력한 장르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학을 떠받치고 있는 독서 시장이 위축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학을 읽고 경험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해졌다. 문학이 특정한 매체, 특정한 직업군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걷어내면 문학은 어디에나 있다. 매일 접하는 인터넷과 SNS에 게시되는 문학 관련 정보들과 자기 표현 글쓰기에서 비평적 욕구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이 가장 활성화되는 곳은 문예지가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비전문적인 장소들인지 모른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문학은 특별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그런 관심만으로 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책에 매혹된 독자들이 비평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건 비평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그런 독자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직업 독자로서 비평가가 있지만 모든 문학 종사자들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독자이다. 최근 생태 비평의 화두인 ‘얽힘’(Entanglement)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문학과 독자의 관계에도 필요한 상상력이다. 문학은 독자와 함께 만드는 세계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2. 강동호의 「새로움의 경제」(웹진 『비유』, 2025. 3-4)는 독자에 관한 글은 아니지만 문화경제학의 관점에서 문학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새로움’을 일종의 경제로 바라보는 이 글은 상품경제와 구별되는 문화경제에 주목한다. ‘새로움’은 동시대 문화 아카이브와 관련하여 작품이 지닌 가치를 측정하는 기호(화폐)로 “‘새로움의 경제’란 문화적 혁신을 독려하고 정당화하는 특수적 통화 체제”이다.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동시대 문화 현상은 새로움의 공급 과잉, 즉 새로움의 인플레이션인데 이는 시장과 자본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글의 목적은 시장과 문화라는 ‘새로움’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효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저자는 문학의 가치 역시 작품을 현실에서 사용하고 체험하는 독자들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교환 행위를, 그리고 그러한 교환 원리가 현실 언어의 경제라는 광의의 체제와 구별되는 지점”과 “자본의 논리에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영역을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통상의 사회경제적인 원리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학을 살펴보겠다는 것은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특히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독자와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인 교환 원리는 주목할 만하다. 강동호는 「새로움의 경제2(1)」(『문장웹진』, 2025. 4)에서도 유사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아직 ‘새로움의 경제’에 관한 가설이 있을 뿐 그 내용이 충분히 전개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글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문화경제 원리에 관한 여러 가정들과 개념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로 검증 가능한 구체적인 사례나 예시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문화경제는 이론인 동시에 실물경제이다. 작품의 가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자, 작품 생산과 수용 과정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교환의 원리를 문학 현장의 사례로 논증하는 과정 없이 ‘새로움의 경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강동호의 글은 독자가 포함된 문학을 역동적인 경제 교환의 흐름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그 새로움의 발생지, 현장의 실체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노태훈의 「한국문학의 현장」(『자음과모음』 2025년 봄호)은 한국문학의 현장을 생산과 유통, 수용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어 강동호의 글과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한국문학의 생산은 ‘등단’과 ‘문학상’이라는 집단적 승인을 전제하고 있으며,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문학의 유통은 수용의 현장과 분리되어 있다. 특히 문예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기 전의 작품들을 게재하는 것은 상품으로서 문학을 예비하는 과정이며 그 점에서 문예지는 생산 현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수용의 단계는 어떤가. 문학의 현장은 결국 수용자인 독자에게 그 핵심이 달려 있다. 문학의 현장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 읽히고 공유되는 순간이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곳만을 현장이라 칭한다면 사실 그것은 아주 왜소해질 것이다. 여타의 모든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생산자는 작품의 유통과 수용에 있어 결국 철저하게 보호적인 존재로 남게 된다. 작가의 강연, 낭독회, 사인회 등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문학의 현장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문학에서 현장은 사후적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수용 이후, 작품의 감상 이후에 현장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작가와 작품은 필요조건이 될 뿐, 현장의 주체는 오로지 독자의 행위에 달려 있다. 그런데 또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 현장성이 생겨나지는 않아서 이를테면 도서관을 두고 문학의 현장이라 명명하기는 다소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3) 노태훈의 글에서 독자는 중요한 존재지만 작가와 작품, 독자가 만나는 현장은 아직 현장으로서 불충분하다. 이 글은 도서관을 비롯해 문학작품을 향유하는 공간을 언급하면서도 문단 시스템을 벗어난 현장을 의미 있게 고려하지 않는다. 독자를 현장의 핵심에 두고 있으면서 독자와 현장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발생한다. 이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현장’은 비평적 태도의 유무인 듯하다. “핵심은 문학작품을 읽고 나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평’”이며 문학의 현장이 고민할 것은 “인정이나 승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비평적 태도, 즉 독자讀者/獨自적인 것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전통과 관습을 비트는 방식으로, 아카이브라는 저항의 형태로, 즉흥적인 아마추어리즘”으로 나타나는 문학 현장이지만 그 주체가 문예지와 전문 독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생산과 유통, 수용은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전문/비전문, 중심/주변의 경계는 여전히 뚜렷하다. 3. 한국 문학의 생산과 유통에서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문학 제도의 오래된 관성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스템에서 보면 한국문학은 ‘극소수’의 작가를 생산하고 연구하고 비평해 왔으며 ‘대다수’의 독자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대칭이 한국문학 연구에서 독자 연구가 희소한 이유이며 같은 이유에서 비평의 관심도 작가나 작품으로 향한다. 문학을 향유하는 현장에서 독자를 배제할수록 독자는 추상적인 집합명사로 취급될 확률이 크다. 이를테면 낭독회와 같은 문학 이벤트를 의미 있는 문학 현장으로, 작가와 독자 간의 수평적 연대의 실천으로 돌아보기란 아직 한국문학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황유원 시인은 최근 낭독회에 참여했던 경험을 놀랍고 반가웠다고 말한다. 직접 시를 읽어주는 독자들과 만나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겹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에게 “낭독회는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목소리들이 부유하는 시간”이며 서로 다양한 “목소리들이 구름처럼 희미하면서도 분명하게 시각화되는 시간”4)이었다. 아직 낭독회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시인의 소감은 중의적이다. 낭독회는 일회적인 문학 이벤트지만 작가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과 감응은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를 다른 사람이 낭송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시가 나를 떠났다는 것과 떠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다.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을 목도하는 것이다. 이유는 굳이 따져보지 않았는데, 사실 나는 내 시를 낭송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늘 거리 조준에 실패하고 마는 느낌이다. (중략) 참석하신 분들이 낭송해준 8편은 좋았다. 호흡과 리듬이 나와 달라서, 시에 첨가된 이질적인 분위기가 시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낭송이 끝나고 토크가 이어졌다 (중략) 나는 난감한 질문을 선호하고, 난감함 속에 생각이 촉발되는 울퉁불퉁한 흐름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대답은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에 힘입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5) 낭독회는 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지는 시간이다. 낭독회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만나고 말하고 새롭게 듣는 시간이다. 현장의 즉흥성은 다른 생각을 촉발시킨다. 낭독회는 서로 함께 참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발신자가 수신자가 되고 생산자와 수용자의 자리바꿈도 일어난다. 이수명 시인이 말하는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은 문학의 현장이 상호적이고 역동적인 공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산성에 힙입어 나아가는 문학의 현장이 문예지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문학의 현장을 생기 있게 하는 것은 기존의 제도가 아니라 ‘작가-작품-독자’의 연결을 만드는 이질적인 리듬과 시간이다. 낭독회를 기획한 이성주 평론가는 시민들과 문학 작품을 함께 읽을 때 종종 ‘요즘 문학’이 ‘그들만의 문학’이 아니냐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시민들은 동시대 문학 작품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문학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6)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낭독회에 관한 수많은 후기와 감상은 모두 그런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지금 문학 독자가 문학을 경험하는 방식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크고 작은 낭독회와 강연, 독서 모임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이, 더 다양한 작가와 일반 독자들이 문학 현장에 참여하는 것은 한국 문학에 유익한 일이지만 이런 교류를 기획하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제한이 따른다. 문학을 경험하는 일은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와 연계되어 있다. 2024년도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한국의 독서량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책을 선택할 때 서점이나 도서관 등에서 책을 직접 본다고 응답한 비율(26.8%)은 제일 높았다. 인터넷과 SNS의 책 소개나 광고를 본다는 비율(21.2%)은 그 다음으로 높다.7) 그러나 문학 현장의 전망은 밝지 않다. 2023년 정부는 지역서점 예산을 전액 삭감했고 앞으로 서점 문화활동 지원 예산 역시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다.8) 코로나 상황의 종식 이후 다양한 도서 행사들이 활기를 되찾았지만 서점을 중심으로 한 도서 문화활동은 위기를 맞고 있다. 잡지 산업 역시 지속되는 경제 침체로 부정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AI 기술과 디지털 시대라는 변환점을 준비하고 있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증진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발전에 중요한 기준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변화가 현행하는 문학 생산과 유통 방식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는 아직 더 지켜볼 일이다. 핵심은 독자와의 상호 작용이다. 문학을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고민은 더 필요하다. 5. 기존 문단의 시스템이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익숙하다. 한 좌담에서 육호수 시인은 최근의 SNS를 통한 문학의 확산이 등단 제도를 거친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향유자’로서 현대시에 대한 진입장벽과 문턱을 낮추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독자들이 한국 시에 유입되어야 한국 시도 활성화된다고 말한다.9) 김건영 시인은 SNS에서 매체의 홍보나 자본을 업지 못하면 아예 독자의 손에 닿지도 못한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SNS의 과도한 상업주의 경계한다.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김연덕 시인은 홍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면 SNS가 시 쓰기나 운용 방식에서 개개인의 질서나 미감을 즐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좀더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모두 일리 있는 발언들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문학은 디지털 시대와 얽혀 있다. 한국의 독서 문화에서 종이책 선호도는 월등히 높지만 정보 습득 선호 경로는 포털 사이트와 유튜브, TV/라디오, SNS 순으로 나타났다.10)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책을 선택할 때 정보를 얻는 방법에서는 서점이나 도서관 다음으로 SNS의 영향이 컸다. ‘종이책’과 ‘디지털 문화’의 공존 속에서 한국 문학에 필요한 것은 문예지의 쇄신만이 아니다. 한국 문학은 ‘종이책’ 바깥의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좌담에서 알 수 있듯 SNS는 창작자와 독자가 서로의 존재를 생생하게 마주하는 곳이다. 단순히 홍보를 목적으로 한 경우라도 SNS는 문학의 존재감을 알리는 편리한 수단이며 그 안에서 자기 표현의 매력과 홍보의 경계가 언제나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시와사상』(2025년 봄호)에 실린 「동시대 패러디스트의 밈적 욕망」(최다영)과 「사람이 사는 무인도-시와 패러디, 육호수와 고선경의 시를 중심으로」(하혁진)는 변화된 문학 환경에서 시가 어떻게 동시대의 문화와 교류하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인터넷 밈을 섞어놓은 ‘힙한’ 시가 그 자체로 또 다른 밈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싸이월드’의 ‘감성체’를 활용한 시는 학습을 요구하는 대신 비슷한 시대와 문화 감각을 지닌 독자를 초대한다. 이 글들은 현대시와 패러디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대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의 변화로 읽는 것이 유용하다. 디지털 시대의 파편화된 문화를 수용하는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인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가 먼저 존재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만드는 문학 현장이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저변을 축소하기는커녕 더 독특한 취향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입구처럼 보인다. 보편성과 진지함, 엘리트주의와 전문 독자에 둘러싸인 시가 아니라 비록 소수의 지지를 받더라도 가벼움과 귀여움, 사랑스러움, 놀이와 유머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그 안에서 전파되는 중이다. 전문 독자에게 다소 부족했던 자질들, 문학 제도가 배제해 온 요소들이 새로운 호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가 밈이 되고, 문학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감성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향유하는 시대적 현상이다.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거부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통의 보편성이나 대중성이 아니라 다양하고 고유한 소통의 방식을 만드는 일은 이제 능동적인 문학 행위이다. 시가 자신의 독자를 스스로 불러 모으는 일도 그러하다. 그것은 시에 좋은 일이다. 매일 접하는 수많은 콘텐츠들 사이에서 문학이 잠시 눈길을 끌고 멈추는 순간이 되는 일, 문학이 독자에게 이동하는 울퉁불퉁하고 즉흥적인 현장이 되는 일은 문학의 다양성, 문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의 목적이 불확실한 즐거움에 있다고 했다. 종이책 바깥에서도 시는 그 목적에 충실하다. 작지만 다양한 문학들의 난립과 행진 속에서 그 즐거움이 커진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서의 문학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닐 것이다. 1)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출판시장 통계」, p.67.(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2)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p.154. 3) 노태훈, 「한국문학의 현장」, 『자음과모음』 2025.봄, p.27. 4) 황유원,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는 중-소하서점 낭독회 후기」, 『포지션』, 2024.겨울호, p.248. 5) 이수명, 「소하의 밤」,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소하서점 낭독회 자료집, 2024, pp.75-77. 6)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p.172. 7)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292. 8)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181. 9) 김건영·육호수·김연덕, 「이달의 시 현장점검-그 평론가는 이제 출판사 마케터 아냐?」, 『현대시』, 2025.3, p.53. 10)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독서정책연구소, 「2023년 독서문화 통계」, p.17. ( 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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