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창작21 2024년 여름호(제65호)
휘어진 윤리의 가지를 바로 세우는 시편들 ― 나해철 「나무와 새」, 『창작21』 2024년 봄호. 이혜녕 「프리즘」, 『창작21』 2024년 봄호. 배귀선 「희망을 감금하다」, 『문학의 오늘』 2024년 여름호. 마종기 「눈에 대한 소견」, 『문학과사회』 2024년 여름호
1. 사람들 손길이 닿지 않는다면
시는 풍부한 자원을 갖춘 자연의 보고(寶庫)이지만 정작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인도가 되어가는 것 같다. 새 로운 관계를 꿈꿀 수도 없고 사람을 잃어 음악이나 구어(口語)와 맺는 연관성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시에 노래나 낭송의 형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물론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들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시’에는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운문’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Tom Misch의 <Movie>라는 곡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의 음악은 재즈, 소울, 펑크 등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독특한 스타일로 일상 속 작은 순간들을 영화처럼 아름답게 포착한 결실이었다. 일상을 소재로 한 가사, 이해하기 편한 구어체의 속삭임과 외침, 흡인력 있는 영화적 요소, Tom Misch의 부드러운 감성적 보컬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더없는 간절함과 안 타까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이 노래의 독특한 지점은 도입부(intro-song)라고 볼 수 있는데, 마치 제목처럼, 음악을 들을 때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주인공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실험을 포기하지 않은 이 음 악을 들으면서 시의 대중화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만 같다는 긍정적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불가해성을 띠거나 한가로운 소리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오웰은 “시라는 단어 자체가 ‘하느님’이나 목 사의 개목걸이(빳빳이 세운 칼라) 같은 말처럼 나쁜 인상부터 심어”(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나는 왜 쓰는가』, 한 겨레출판, 2010, 171쪽)준다면서 시적인 것을 다시 사유할 것을 촉구하였다. 제아무리 시가 아름다운 풍경과 신비한 자연의 세계를 품고 있거나 깊은 사유의 길로 누군가를 이끈다 해도, 사람들 손길이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용의 ‘장소’가 될 뿐이니까 말이다.
2. 텍스트의 안과 밖
물론 시는 사실과 정보의 진실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타인의 고통과 탄식과 비참을 상세히 기록할 수 있다. 이것은 기발한 상상력보다 ‘실재(real)’에의 밀착을 더욱 요구하는 일이다. 문자 공화국에서 시인은 귀족들에게 내려진 작위 와 다름없었고 낭만주의 시대에서 시인은 자유의 화신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현대 러시아 시인들에게 ‘시’는 적어도 비참하고 속된 현재와 사회주의 체제의 지리멸렬함과 맞서는 자유이자 개성이며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정신 (수전 손택, 김유경 옮김, 『강조해야 할 것』, 시울, 2006, 195~196쪽)과도 같다. 이렇게 시는 기록되지 않은 타인의 고통이 희박해진 곳에서 ‘현존’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자리하고 있다.
최근 우리가 맞닥뜨린 온갖 부정의 담론은 깨진 거울로 물체를 비춰보거나 깨진 유리로 사물을 보는 것 같은 태 도에서 유래하였는지도 모른다. 21세기는 ‘액화된 근대성’(바우만), ‘위험사회’(울리히 벡), ‘사회적인 것의 종언’(보드 리야르), ‘세계의 비참’(부르디외) 등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우리는 미래의 현장에 다가설 수 없으므로 어떤 부재 속 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거기-없는-존재(Da-nicht-sein)인 우리는 어떻게 무엇으로 이 시대를 부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세월호 참사 속에서 언어의 무기력을 체험하였고 어쩌면 언어는 ‘텅 빔’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나 시대의 추함을 목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을 직면하는 일이고 그것을 옮기는 것은, 주관을 객관화하는 일이자 역사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의 무기력은 시의 본질을 흐리는 바깥의 담론 때문 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액자는 그림에 속하는 것인가? 벽에 속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파레르곤 개 념을 설명한 바 있다. 파레르곤(parergon)은 ‘주변’을 의미하는 단어 par와 ‘작품’을 뜻하는 단어 ergon의 합성어 로서 액자는 벽이나 그림도 아니지만 벽을 위해 존재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것은 텍스트의 밖이면 서도 텍스트의 안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부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는 시인의 체험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아니면 상상의 결과인가? 오늘날의 시가 꼭 사회나 정치 문제 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인이 옮겨적는 개인의 경험도 분명 공적 언어의 표현구조에 이르러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가 “우리의 모습이 점묘 된” 것일 때 진실한 실체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곽재구, 「육화된 정직과 화해의 시」, 나해철, 『무등에 올라』, 창작과비평사, 1984, 155쪽)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텍스트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텍스트 바깥에서 밀고 들어와 우리의 사유와 인식 을 흔들어 그것이 자리를 차지하여 본질인 것처럼 여기게 하는, 바깥의 담론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지하라는 지적인 셈이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나 그것을 언제나 경계해야 함을 지시하는 것이다. 글을 쓸 수 없는 시대란 홍수처럼 쏟아지는 텍스트 바깥 담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인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3. 분별할 일 없는 곳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간절함
곽재구는 “이 시대의 시인이면서 훔쳐 갈 좋은 시 하나 갖지 못한 채 살아서 부끄럽다는 그(나해철)의 인식은 사 실 이 시대의 글 쓰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며 이 부끄러움의 바탕 위에 글 쓰는 자 모두의 더욱 개진된 세계관 이 요구되고 있다.”(곽재구, 위의 글, 156쪽)라고 말하면서 나해철이 시가 지녀야 할 본분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시란 쓰라린 모순의 현장을 담아 화해의 메시지가 되도록 길을 여는 것이다. 나해철은 보편적인 민중적 정서를 수렴한 서정시의 출현이 요구되는 80년대를 살아오면서 시의 본질이 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으며 자연과의 조화와 합일을 통해 보편적 진리에 가닿을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에게 자연은 인간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해 있 으며 우리가 의존해야 할 의젓한 타자인 셈이다.
천지가 열리고
만물이 생겨날 때
누구는
나무가 되기로 선택을 하였다
자유를 바라는 그는
허공을 나는 새의 길을 갔고
나는 모든 것을 움켜쥐고 두 발로 뛰는
인간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나무는 욕심이 작아 한 자리에서 평생을 살고
새는 가볍게 하늘을 난다
삶의 길을 정할 때부터
나의 유전자는 탐욕 덩어리였다
욕심 끝에
이제는 인간을 넘어
나무와 새를 닮고자 한다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끝내
선택이 있기 전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경계가 없어
분별할 일도 없는 곳에 도달하기를
― 나해철, 「나무와 새」 전문
이 작품에는 ‘인간’과 ‘나무’ 그리고 ‘새’가 대비되어 등장한다. “욕심”과 “탐욕”, “모든 것을 움켜”쥔 인간은 “한 자리에서 평생을” 사는 나무와 “가볍게 하늘을” 나는 새와 양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주는 ‘장소들’의 우주로, 존재들의 구체적인 ‘자리’는 의미와 역사를 담고 있는 장소들(places)을 의미했다. 나해철의 시에서도 존재들은 자리 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극명하게 상반된 존재의 위치를 통해 무엇이 해체되어야 할 것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목 격하게 한다. ‘나’는 “선택이 있기 전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곳은 “경계가 없”고 “분별할 일도 없는 곳”이 며 이분법적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상호 의존적으로 타자와 주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향 유의 주체가 대상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때 향유란 ‘나’가 ‘나’를 실현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비로 소 하나의 개별적 인격이 된다. 이것은 요소의 세계를 점유하거나 종속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군가의 타자이며 세계 속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이제 어떤 유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개인은 어떤 사 회 집단이나 누구와의 관계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한 자리에서 평생을 살고” 누리는 것은 충분한 향유이며 “가볍게 하늘을” 나는 새의 것도 자유로움에 대한 향유이다. 김남주는 나해철의 이러한 사유를 “욕되지 않 은 삶을 가난에서 찾고 있는…한 줌의 물처럼 푸르고 조약돌처럼 단단한 터”(김남주, 「미운 자기와 격투하고 있는 시인」, 『아름다운 손』, 창작과비평사, 1993, 110쪽)라고 말한 바 있고, 최두석은 그의 응시가 “탐욕 덩어리 세계에 시의 본분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최두석, 추천사) 듯하다고 하였다. 분명한 것은 “그의 시들은 일체의 무분 별과 혼란과 들떠 있음의 허장성세를 걷어낸 뒤 남는 사리와 같은 맑고 투명함을 겨냥한다.”(장석주, 추천사)라는 것 이다. ‘나’가 “나무와 새를 닮고자” 하는 그 마음은 “인간을 넘어” 서는 일이며 “아름다운 지구별에서/끝내/선택이 있기 전의 세계로 돌아가기를/경계가 없어/분별할 일도 없는 곳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일 것이다.
4. 일상이라는 미적 가치
우리는 세계에 던져져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은 항상 다른 무엇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공기에 의존하고 음식에 의존하고 심지어 일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해간다. 일상의 기본적인 것들 즉 요소의 세계에 몸을 맡기는 것을 향해 레비나스는 ‘향유의 개별성’을 통해 인간이 성립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향유는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 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선술집에 모인 세 여자
소주와 토닉워터 얼음과 레몬을
제 입맛대로 따른다
젓가락으로 콕 콕 콕 향기를 터트린다
세 가지 맛 칵테일 잔이 부딪치고
챙그랑 소리가
허공을 부챗살로 가른다
그 빛 속으로 세 가지 색 슬픔이 들어간다
먼지보다 작은 물방울 위에 올라타면
천장에 무지개가 걸린다
흑백 사진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람과
노을 속을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을
찾아 헤매는 여자들이
불고 푸르스름한 빛에 둘러싸인다
여기저기 부딪는 트라이앵글 소리
여자들이 킥킥거리며 그 안으로 들어간다
― 이혜녕, 「프리즘」 전문
이 시편은 “선술집에 모인 세 여자”가 고단한 하루를 쏟아내고 위로하면서 서로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어간다는 외형의 틀을 지닌다. 시인은 누구나 한 페이지 정도 가지는 일상을 가져와 소개함으로써 대중들과 멀어지지 않으려 고 하면서 미학적 가치를 추구해나가는 셈이다. “소주와 토닉워터 얼음과 레몬”을 “제 입맛대로 따”르고 “젓가락으 로 콕 콕 콕 향기를 터트”리면 제각기 다른 “세 가지 맛”이 “쟁그랑 소리가” 되고 공기 속에 “세 가지 색 슬픔이” 스며든다. 그 “먼지보다 작은 물방울 위에 올라타면/천장에 무지개”로 변하는 슬픔은 감각적 미학으로 완성된다. “흑백 사진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람”도 그리워하고 “노을 속을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을/찾아 헤매는 여자들”은 “붉 고 푸르스름한 빛에 둘러”싸여 있다. 이혜녕의 시는 1인칭 화자의 경험이나 목격 대신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장면, 즉 타자 속에서 회복되는 ‘나’를 보여주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나’의 먹고 마심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가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세 여자 머리 위에서 슬픔은 천장에 걸린 무지개가 된다. 타자의 고통과 죽음을 목 격할 수밖에 없는 ‘나’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때 비로소 주체의 자리에서 타자로 옮겨간다. 타자는 그저 공감과 연민의 대상이 아니다. 친구들에게 ‘나’ 역시 타자로 자리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 다. 세 명의 ‘나’가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나’는 가장 ‘나’다워지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청소 차량도 닦아내지 못한
얼룩이 봄꽃 대신 피는 골목
깨진 비명이 보도블록 틈에 스며
오래도록 떠나지 못한
계절 깊어간다
사고와 희생 사이
무관심과 관심 사이
몇 해를 보내야 지워질까
떠난다는 것은
때가 되어서가 아니라
떠밀린 것이라는 미숙한
이별이
언젠가의 데자뷔 같은 순간과
시간이 흘러도 자라지 않을
네가 갇힌 방문
열어 불러보는 것인데
되돌아오는 말, 엄마
아빠 이따가 갈게
사랑해
붉은 가슴이
무덤이 된
내 딸아
내 가슴에
무덤으로 사는 내 아들아
― 배귀선, 「희망을 감금하다」 전문
시는 시인이 목격한 단순한 이미지나 사유의 파편이 아니라 오히려 복합적인 계획에 따라 시인이 독자를 하나의 사유에 끌어들이는 매개물이다. 그것은 시인의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 실행 중인 사유의 이미지이다. 배귀선 의 화자는 “청소 차량도 닦아내지 못한/얼룩이 봄꽃 대신 피는 골목”에 서 있다. 그곳은 2022년 10월 29일 있었던 핼러윈 축제 때의 압사 사고 현장인 이태원일 것이다. 150명 넘는 희생자의 “깨진 비명이 보도블록 틈에 스며/오래 도록 떠나지 못한” 채 계절은 깊어만 간다. “사고와 희생 사이/무관심과 관심 사이”에서 우리는 “몇 해를 보내야”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지워낼 수 있을까 하는 화자의 탄식은, 희생자 부모의 ‘고통’이자 ‘나’의 고통이 된다. “때가 되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 “떠밀린 것이” 이유가 되어버린 이별의 현장은 화자와 부모들에게 무덤의 장소다. 화자는 “데자뷔 같은 순간과/시간이 흘러도 자라지 않을/네가 갇힌 방문/열어 불러보”지만 “되돌아오는 말”은 돌아오지 않 은 아이들의 메아리와도 같은 “엄마/아빠 이따가 갈게/사랑해”일 뿐이다. “내 가슴에/무덤으로 사는/내 아들아”의 탄식은 가슴에 묻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희망을 감금”한 부모들의 절규인 것이다.
시대의 고통을 담아내는 시는 현장을 영원히 상징으로나마 남기는 방식이 된다. 그것은 어떤 평가가 내려지기 전 의 윤리적 목소리이며 ‘나’를 ‘나’답게 만드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몸짓이다.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외상뿐 만 아니라 심각한 심리적 장애 속에 남은 생을 살아가게 된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그들의 “회복은 세 단계를 거 쳐 완결”된다고 말한다. 첫 단계는 생존자의 안전을 확립하는 일이며, 두 번째 단계는 기억하고 애도하는 일이다. 마지막 단계는 일상과 다시 연결되어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주디스 루이스 허먼, 최현정 옮김, 『트라우마』, 2022, 305쪽)이다. 시인이 타자의 고통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시적 기록이 될 것이다. 시적인 것이 따로 있다는 사 유 자체가 갈릴레이 이후 자연과학자들이 우주를 정교하게 해석하고 가설들을 반복적으로 검증하여 세계에 대한 공 식을 확고하게 성립시킨 결과에 따른 것이다. 실증주의는 이런 수학적 질서에 따라 측정되고 예측되며 검증된 지식 만을 바탕으로 학문을 구성하자는 태도를 택하였고, 이후 우리는 이성과 수학에 따라 가치가 증명되는 사회를 이루 어나갔다. 후설은 특정 영역에서 적용되는 인식의 원리를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 일반화 시도에 반대하고 다양한 영 역에 따라 적합한 인식의 원리를 주장하였다. 시적인 것은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멀리 달아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 다. 햇빛이나 공기, 잠과 일, 친구, 먹는 것 등 일상적인 것은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향유’라는 개념을 가져온 레비 나스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일상은 ‘나’와 ‘타자’의 실존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내가 사는 마을의 한복판에서
한숨도 멈추고 나를 보는 나무여
잎도 열매도 다 빼앗기고
눈감고 이를 악문 친구여
너도 사는 게 무서웠구나.
모두가 오래 그렇게 살았단다.
눈치가, 눈의 수치가 느리다고
말 몇 마디에 인생이 뒤바뀌어
입 다물고 외면하고 산 지가 얼만지
눈을 감고서야 너를 볼 수가 있었다.
― 마종기, 「눈에 대한 소견」 부분
오늘날의 사회만큼 방송과 전파 매체가 호황인 적이 있었을까. SNS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위력이 더욱 커 지고 외연이 확장되었지만, 윤리적 개인의 탄생보다는 비인간적인 회색 인간이 출현하고 고통이 반으로 줄기보다는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입 다물고 외면하고 산” 것에 기인한다. “말 몇 마디에 인생이 뒤바뀌어”가는 사회 를 살아가는 화자의 삶에 대한 성찰은 “잎도 열매도 다 빼앗기고”도 “한숨도 멈추고 나를 보는 나무”를 통해 이루 어진다. 이 작품의 매력은 본다는 것과 눈 감는 것 사이의 사유와 우리의 추함을 목격하는 자연에게서 ‘나’의 추함 을 드러나는 데 있다. 우리를 바라보는 많은 (자연의) 눈을 보고도 그것이 알아채지 못하는 인간들, 고통과 불의에 침묵하는 우리를 목격하는 눈의 한복판에서 나의 안위만을 위해 “입 다물고 외면하”는 인간들은 과연 눈을 뜬 존재 인가. 마종기에게 이 세계는 어쩌면 포르투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도 같지 않나 싶다.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사회, 오직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가정처럼 우리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내가 사는 마을의 한복판에서/한숨도 멈추고 나를 보는 나무”뿐이다. 우리는 마종기의 시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 해 새롭게 성찰하게 된다.
시적인 것이 따로 존재한다는 하이어라키(hierarchy)적 믿음은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요소의 세계를 저버리게 만 들고 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일상이 질료가 되어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 다. 또한 새로움을 수확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목격한 바가 정동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꽃피우고 휘어진 윤리의 가지를 바로 세워 지지대를 대야 한다. 그리고 참신한 비유의 언어를 통해 사물과 인간과의 관계가 유리되지 않게 서로를 매만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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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2월호 신인특집에 함께하게 된 이수빈, 이현아, 임어지니, 장희수, 정태인, 최경민의 시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삶과 언어의 도정을 예리하게 응시하는 여섯 개의 서로 다른 감각이자 하나의 세대적 사유로 읽힌다. 각기 다른 이력과 문학적 여정에서 출발한 이들의 시적 몸짓에는 관계의 불안과 결핍, 동일시의 실패, 존재의 진동, 텍스트와 사물의 해체, 제도와 언어의 부조리를 가로지르는 탐색이 응축되어 있으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장면들이 미리 스며들어 있다. 2025년 시단에 첫발을 내디딘 이 신인들의 작품은 단순한 개성의 제시를 넘어, 동시대 청년 세대가 마주한 균열과 감각의 변화를 촘촘한 형식 실험과 사유의 밀도로 형상화함으로써, 오늘 한국시가 어떤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고자 하는지 또렷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의 시 앞에 함께 서 있는 동안, 독자는 친밀과 거리, 소유와 결여, 있음과 있었음, 정지와 흐름, 안내와 방황 사이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감정과 사고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완결과 합일의 환상 대신, 실패와 잠정성, 불확정성과 우연을 감수하는 태도가 이들의 언어를 떠받치는 공통의 윤리로 드러나며, 그 위에서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과 존재의 사유, 시적 상상력의 책임이 다시 질문된다. 이들은 관습적 서정보다 불안정한 접속과 해체의 감각을 밀어붙이며, 평범한 일상과 비극적 현실, 실존적 결핍과 축제적 상상력을 교차시키는 다양한 전략으로 시의 경계를 확장한다. 올해의 신인 시인들을 통해 우리는, 시가 더 이상 하나의 의미나 메시지로 귀결되는 통로가 아니라, 세계와 주체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부딪히고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건네는 열린 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특집은 여섯 신인의 개별 작품을 따라가며 그러한 움직임의 결을 세밀히 더듬어보는 작은 동행이자, 앞으로 이들이 한국시의 지형 위에 남겨갈 긴 문장들의 서두가 되기를 바란다. 이수빈의 「빈속」과 「귀갓길」은 현대적 인간관계의 불안·결핍과 일시적 연대,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윤리의 잠정을 감각적으로 표상하는 작품이다. 두 시에서 시인은 익숙함이나 표면적 친밀 속에서도 오히려 더 깊이 체감되는 거리·결핍의 정동, 그리고 자기소외의 아이러니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먼저 「빈속」에서 화자는 “나를 미워하는 친구의 집”에 초대받는다. 이 집은 “창문이 많았고 식물이 많았고 나무 빛깔의 가구들이 많”지만 “진짜 나무는 하나도 없”고, 온통 “나무 무늬를 흉내 낸” 것뿐이다. 친구의 집은 외관상 충만해 보이나 본질적 결여가 깃든 장소로, 친구 또한 소외와 결핍의 구조 안에 있으며 화자는 호두의 텅 빈 속에 자신의 존재를 포갠다. 이는 우정과 인정,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결국 실패로 전환되는 심리적 역학을 드러낸다. “나는 친구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친구가 주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일 것만 같은데”, “중요한 건 전부 친구에게 있는 것 같다”는 화자의 고백은, 타인과의 관계가 항시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자신을 차라리 결핍의 자리로 위치시킴으로써 관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것이다. 「귀갓길」은 「빈속」과 달리, “집에 가지 않”는 화자가 익명의 타자인 아저씨와 마주치면서 관계의 또 다른 층위를 탐구한다. 아저씨가 “정말 하수구 덮개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어깨까지 접어 넣어 손을 휘젓더니 내 지갑을 꺼”내는 행위는, 화자가 처음부터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과 교차하며 극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자신의 곁에서 “땡볕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힘을 다하는 “교과서에서 배운 좋은 사람”을 실제로 마주한 화자는 오히려 그 초월적 선의와 헌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놀라움과 낯섦을 경험한다. 이 만남은 타인과의 관계가 단순한 연대나 지속적 돌봄의 형태로만 해명되지 않더라도 사회적 선의가 분명히 세계 속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비둘기가 됐네. 아저씨가 말한다./그 말이 재밌어서 나는 웃는다.”는 구절이 상징하듯, 이런 일시적 돌봄과 선의가 완결이나 해결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관계의 의미와 삶의 풍요로움을 증명한다. 시인은 이 과정을 통해 현대인의 관계 맺기가 미완성과 불확정성의 상태에 머무르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과 순간성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윤리적 언덕이 된다는 통찰을 환기한다. 「빈속」과 「귀갓길」 전편을 관통하는 관계의 구조는, 친밀에 대한 열망이 궁극적으로 결핍, 소외,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완전한 결속이 아닌 잠정적 윤리가 성립된다는 데 있다. 친구, 그리고 익명 아저씨와의 관계 산물은 완전한 소유나 영속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두 시는 현대적 인간관계의 지속 불가능성과 일시성을 드러내며, 타자와의 만남의 현장이 언제든 실패와 결핍, 잠정성과 불안을 품을 수 있음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익숙하거나 친밀한 공간, 예상치 못한 우연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정동을 세밀하게 그려내어, 오늘날 존재·윤리적 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선사한다. 이수빈의 시는 어떠한 교훈이나 모범답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담백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완전한 의미나 지속적 소유에 도달할 수 없는 현대적 관계성의 본질, 그리고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불완전한 시도와 실패,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연결, 끊임없는 불확실성의 미학을 포착한다. 감각적 이미지와 절제된 서사, 미묘한 정동의 떨림을 통해, 관계의 좌절·틈새 윤리·결핍의 정서를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오늘날 실존적 현실에 대한 현대시의 성찰적 깊이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현아의 「거절」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부정의 표명이라기보다, 존재론적 함수처럼 읽혀야 한다. 이 시에서 ‘거절’은 행위의 단절이나 의사의 미수(未遂)를 넘어, 근본적인 내부적 불일치,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합일이 불가능하다는 윤리적·존재적 통찰의 알레고리다. 또한 메타시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동일시를 통한 묘사나 모방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면서도, 주체가 대상을 자기 안에 온전히 흡수하거나, 대상을 자신과 동등하게 체험하려는 시적 의지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일치가 불가능함을 전제하며, 이는 서정시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동일시의 전략, 곧 주체와 대상을 하나로 묶으려는 욕망의 실패를 현대시적 자의식으로 재구성한다. 「거절」 시의 주체는 대통령, 영부인, 수행원, 그리고 귀신으로서의 화자라는 다층적 관찰자와 중개자의 시선에서 이 비일치의 조건을 반복적으로 마주한다. 영부인의 반지를 대통령에게 건네는 장면, 수행원이 죽어서도 그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초월적 설정, 그리고 내밀한 공간인 침실에서조차 타자의 감정과 내면은 이해 불가능함인 “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으로 남는다. 여기서 ‘거절’은 소유와 일치, 결정적 진실에 대한 모든 요구에 부드럽지만 냉철하게 선을 긋는다. 어떤 친밀함과 접근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남기며, 타자의 고유성, 내부적 비밀에는 끝내 도달할 수 없음이 시 전면에 놓인다. 익숙한 동일시의 미학이 동질적 교감·일치로 수렴했던 것과 달리, 현대시에서 ‘거절’은 반대로 불일치, 미끄러짐, 간극의 미학을 긍정한다. 「망상과 착각」은 이현아 시의 존재론적 간극과 동일시 불가능의 미학을 한층 더 섬세하게 확장한다. 반려견을 둘러싼 고독사의 이야기와 “그 개가 남긴 망설임의 흔적”은 타자의 실존, 감정, 본능마저도 끝내 전적으로 포개지지 않는 비일치의 조건을 상징한다. 화자는 빨래 건조대 양 끝에서 “점점 멀어지는” 두 존재의 행위를 반복하며, 동일시의 실패와 존재론적 거리, 미끄러짐을 일상적 장면으로 그려낸다. “그 사람이 거기서 진짜 빨래를 너는지, 혼자 집으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라는 고백은, 실재와 상상 사이, 나와 타자, 기억과 현재 사이의 확인 불가능과 불확정성이 상상력의 출발점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일시와 이해, 행위의 의미가 결여와 불확정성의 지점에서만 반복되는 윤리를 지시한다. 이 시에서 상상과 미끄러짐은 채울 수 없는 거리를 감각하며, 결국 이러한 틈과 거리의 자각에서만 현대적인 시와 존재의 미학적·윤리적 가능성이 살아난다. 바르트가 텍스트의 미학은 끊임없이 미끄러져 가는 해석의 복수성과, 완전한 합일에 도달할 수 없음 그 자체에 있다고 했듯, 시의 읽기도 언제나 ‘마지막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무한한 해석, 다양한 감정·경험 간의 에너지 위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이현아의 「거절」과 「망상과 착각」은 동일화의 불가능성, 완결과 단일성의 유예를 담담하면서도 치밀하게 수락하는 현대시의 윤리적·미학적 혁신으로 자리한다. 시의 목표는 더 이상 단일함이나 일치가 아니라, 열린 장 속에서 실패와 미끄러짐,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시적 전략은 독자의 읽기도 정적 재현이 아닌 무한히 개방된 해석과 자기성찰, 그리고 주체와 타자, 이미지와 기억이 과정적으로 겹쳐지는 창조적 소통의 현장임을 강하게 환기한다. 임어지니의 「있음과 있었음」과 「모델 하우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이 시적으로 펼쳐지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자인(Sein)은 ‘얼음’이나 ‘집’처럼 물질적이고 세계에 놓인 단순한 ‘있음’의 상태다. 이런 사물들은 자신의 변화나 소멸, 의미를 자각하지 않는다. 「있음과 있었음」에서 사물로 제시되는 얼음은 자연의 섭리와 순환성의 법칙을 따르며, 그 자체로 시적 주체가 되지 않는다. 집 역시 「모델 하우스」의 서두에서 경제적 표상, 사회적 기호, 공간에 한정된다. 시의 화자는 이와 같은 ‘자인’적 사물과의 작용에서 시적인 의미를 확장한다. 얼음의 녹음과 소멸, 집의 존재와 이동이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닌 자기 인식의 계기가 된다. “얼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에서 시작해, 사라짐과 흔적, 남겨짐 앞에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주체는 집에 대해서도 “집을 사기로 했다 살 것이다”라는 주체의 인식에서 시작해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 건너려고 신호 기다릴 때” 등 모든 공간과 장소를 초월해 존재의 사유를 채움을 보여준다. 이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다자인(Dasein)’의 인식이 풍요로워짐을 말한다. 다자인의 관계성은 ‘자인’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하는 것이다. 주체는 사물 자체의 운명과 자기 경험의 흔적, 결핍, 해석의 운동을 실존적으로 배치한다. “글러브 박스”의 비어 있던 자리, 얼음의 흔적을 집요하게 감각하고 환기하는 과정은 세계 내 던져진 존재인 다자인의 실존적 태도를 소환한다. 주체는 시간과 부재, 흔적과 상상의 교차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며, 항상 세계와 사물, 시간적 가능성의 긴장 안에 존재한다. 「모델 하우스」는 집이라는 사물이 단순한 경제적 혹은 사회적 표상을 넘어 의미와 기억, 내면적 진동이 축적되는 복합적 장소로 전환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시의 화자는 집을 단순한 정주의 공간이나 투자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일상 속 크고 작은 경험, 가족과의 삶, 소유와 결여, 귀속과 떠남의 감정이 집에 층위별로 배어든다. “집에 살았다, 집에 살 것이다”라는 시제의 중첩은 주체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축 위에서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정체성의 진동을 감각함을 의미한다. 집이 일상의 반복적 경험에 내면적으로 녹아들면서, 어느 순간 과거의 긴 시간에 편입된 현재가 존재의 가장 큰 불안의 근원이 된다. 이 시에서 집 자체는 원래 하나의 기의, 단순한 본질에 가둘 수 없는 존재다. 집은 한때의 경험이기도 하며, 불확정한 미래의 가능성, 소망 혹은 결여의 상징으로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띤다. 시적 주체는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라는 엄청난 입에 삼켜지듯, 항상 어딘가로 쓸려가는 자신의 존립 조건을 예민하게 인식한다. 단어와 장소, 기표와 의미의 관계는 하나의 본질에 고정되지 않고 풀려나가며, 그것이 곧 언어의 연약함과 해석의 불완전함, 나아가 존재의 덧없음과 상실의 미학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임어지니의 시는 실존적 경험에 귀속된 사물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이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며 내면적 지각의 장으로 소환하는 주체의 감각을 정교하게 교차시킨다. 집이나 얼음 같은 물질적 대상은 자인(Sein)의 차원에 머물지만, 주체가 자신의 기억, 상상, 소망, 상실, 불안, 내면의 흔적을 그 위에 겹쳐 올릴 때 다자인(Dasein)의 자기성찰과 해석의 운동이 비로소 시작된다. 이 층위에서 시는 단순한 사물의 존재를 넘어, 실존의 불안과 정체성, 상상과 결여, 시간과 흔적이 교차하는 해석의 장 역할을 하며,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 존재의 불확정성과 생성, 상실의 미학을 현대적 감각과 깊이로 펼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임어지니의 시는 자인과 다자인이 교차하는 시적 현장에서 언어와 세계, 주체와 의미의 긴장과 개방성을 유기적으로 드러낸다. 임어지니의 시들은 일상적 사물과 내면적 세계, 정체성과 시간의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현대적 존재의 진동과 경험의 의미를 담담하면서도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사물의 나열이나 감정의 표출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와 의미화, 언어와 세계의 복합적 긴장을 정교하게 펼치는 현대시의 한 실천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장희수의 「싱크대」와 「적설」은 일상적 경험과 자연의 이미지를 감각적이며 서정적으로 조직하여, 존재의 온도와 따스함을 정교하게 그려낸다. 두 시 모두 홀로 선 주체라기보다는 타자와의 교감, 일상과 공동체적 체온이 작품 세계를 따뜻하게 감싼다는 믿음을 바탕에 둔다. 「싱크대」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생활 사물과 신체적 경험을 극대화하면서 감각과 정서, 시간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너의 옆구리가 젖은 건, 설거지를 마친 손을 허리춤에 슥슥 문질렀기 때문”과 같은 동작은 “덕분에 네 옆구리에서는 오후 내/세제향이 났다”로 이어지며, 손목, 바람, 식물과 같은 일상의 요소들이 신체적 교감과 감정적 유대를 촘촘하게 확장한다. 손목이 옆구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로 연상되고, 서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긁고 오랫동안 함께 웃는 모습은, 일상적인 순간조차 관계의 친밀성, 촉각적 유대, 공동의 정서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장희수의 시에서 실현되는 미학적 방법은 반복과 일상의 평범함이 결코 낡은 것, 시적 소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의 시편은 시간과 수많은 사물,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시적 해방과 미학적 자유의 가능성을 실감나게 입증한다. 구체적 손길, 바람, 미묘한 향, 일상의 움직임과 그 감정의 변동, 타자와의 촉각적 교감은 모두 언어와 이미지의 층위에서 섬세하게 조율된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일상적 순간과 신체 감각의 자연스러운 연계를 통해 ‘평범함’ 자체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그의 작품은 반복의 세계에서도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며, 사물과 시간, 타자와의 접촉이 곧 미학적 존재의 시작점이자 메타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출발점이 됨을 증명한다. 「적설」의 첫 부분은 ‘너’가 “떠날 사람처럼” 화자를 “꼭 안아준” 장면에서 시작한다. 화자는 그 체온을 간직하고 있다. 눈은 “끝나버린 세상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세상이 얼어붙을 것 같아도, “마지막에 껴안은 사람과는/영원히 붙어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에, 화자는 그 믿음을 간직한다. 화자는 “어떤 말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자꾸만 믿고 싶어”하고, 언젠가는 “끝나버릴 것 같”아도, ‘너’의 포옹에 남겨진 가능성을 “희게 쌓는다.” 시는 처음부터 따스함과 이별,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남는 온기와 만남, 신뢰와 관계의 지속성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종말적 상상, 관계의 소멸과 재생, 윤리적 가능성을 끝까지 탐색한다.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면 하얀색일 것”, “끝이 날 것이라고//누구에게 말하는지 몰라도/누군가에게 말하는 목소리가//희게 쌓이고 있었다”와 같은 구절에서 시인은 세계의 거짓과 희망, 종말과 만남, 현실과 상상, 영화와 눈이 교차하는 미학을 그린다. 이 두 시는 일상성과 감각, 시간성, 정체성, 관계, 흔적, 소멸, 애도라는 현대시의 주요 의제를 집요하게 탐색한 셈이다. 평범한 사물과 신체적 행위, 작은 몸짓과 자연의 미묘한 변화가 모두 언어와 이미지로 실존의 결, 감정의 파장, 시간의 불확정성을 유기적으로 직조한다. 장희수의 시세계는 언어, 세부적 감각, 상상력, 공동체적 연대가 만나는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과 자기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는 ‘돌’처럼 “정지한 사고”와 언어,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상상력과 “움직이는 시간”이 “삐걱대”(「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면서 직조해내는 우리의 상상력의 현실적 질감, 텍스트의 탈장소적 특질, 해체적 실험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현대시의 모범적 성취를 보여준다. 시의 첫 구절 “나: 보이는 순간 끝을 예견한다”는 시적 객체가 등장하자마자 곧 상상력이 소진되는 불확정성과 파편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꺾였다/다채로워서... 유복해서”, “나: 차라리 망쳐 보라 했다”와 같은 파편화된 장면과 파괴적 명령을 통해 시는 감각과 인식의 경계를 흔들며, 독자가 하나의 알레고리나 고정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항상 새로운 체험적 해석의 장을 만들도록 한다. 이러한 해체적 실험정신은 바르트가 강조한 “텍스트는 기호에 비해 접근하거나 체험되는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기의로 닫혀진다.”(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2002, 41쪽)라는 원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정태인은 단일한 해석이나 알레고리에 저항하며, 각 행과 단어·이미지를 독자 몸에 밀착시키며, 독자가 읽는 순간마다 “내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도록 이끈다. 이로써 ‘목이 긴 나무’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독자가 진입하는 열림의 장이자, 매번 흔들리는 사건의 연속체로 기능하게 된다. 특히 “시계 침이 뾰족해지고/서정은 유리 공예에 갇히면/나는 너와 너를 사랑한 적 없다”와 같은 구절은 ‘목이 긴 나무’와 ‘시계’라는 시간성과 경직성을 병치함으로써, 단일한 기호에 의미를 환원하지 않고 시간의 연장, 멎음, 서정의 경직 등 다양한 감각적 층위를 활성화한다. 이어지는 “모방은 창조를 학대/구체는 모방의 미끈함을 덮고”, “유복함이 가짜일 때/목덜미에서 살냄새가 난다”, “딸기씨가 때론 딸기를 벗어나 종이에 우글거린다” 등에서 실체와 모방, 감각과 추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유희하며, 독자에게 언어의 돌발적 감각과 의미의 미끄러짐을 선사한다. “유복함”이라는 표현은 시 창작에서 모방이 과잉되면 ‘가짜’가 되기에 십상이고, 그것이 “유복함이 가짜일 때” 느끼는 “살냄새”를 통해 진짜 시적 실재의 감각을 드러낸다. 우글거리는 기의들 속에서 하나의 기의를 찾으려는 독서 행위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바르트적 “텍스트의 체험성” 원리를 재확인하게 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정태인은 각 행, 어휘, 이미지를 독자 경험에 침잠시키며, 닫힌 작품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체험되는 텍스트의 본질을 구현한다. 독자는 시를 읽는 순간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의미를 발명하고, 새로운 감각적 사건과 해석의 여정을 실현하는 텍스트의 자유와 해체적 실험정신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와의 교차적 맥락을 통해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의 밀도는 더욱 강화된다. “멎음;/부둣가에 달려가 해를 잡으면 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다/내려간다?”와 같은 구절은, 사유의 지점이 미끄러지고, 실체처럼 굳어진 사고와 움직이는 시간 사이에서 자주 삐걱대는 현존을 고스란히 포착한다. 결국, 정태인의 시는 닫힌 작품, 해석의 최종성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접근하고 체험되는 ‘텍스트’로서의 공간을 창출한다. 돌처럼 굳어진 사고, 용암이 굳은 자리, 흐르는 시간과 붉은 해, 썩어가는 나무, 비옥하지 않은 땅 등 다양한 사물과 현상을 통해 시인은 실체 없는 실체, 멈추고 흔들리는 삶의 흔적을 복합적으로 상상한다. 이렇게 시와 독자는 서로 병치 되고, 결과적으로 바르트적 해석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텍스트의 본질, 의미의 창출과 사유의 미끄러짐이 정태인의 시 안에서 가장 섬세하게 실현된다. 두 시에서 드러나는 제목의 배열과 라틴어와 한자, 영어(외국어)의 사용은 미학적으로 ‘열림’, ‘다성’, 그리고 경계의 유연함을 구현하는 전략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우리 고유 언어와 문화의 소중함은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크지만, 다양한 언어와 표현 방식을 단절하고 배척하는 폐쇄적 태도는 결국 ‘돌’처럼 굳어버린 사고, 무관심적·기계적 반복, 혹은 철학적 질문 없는 ‘비사유’에 머무를 위험성을 내포한다. 정태인의 시적 구도에서 ‘돌’은 의미를 경직시키는 사고를 상징하며, “이매진(Imagine)”과 같은 흐르는 영어 동사는 의식과 감각의 흐름을 동적인 사유의 힘으로 전환한다. 시인은 고정적 해석에 안주하지 않고, 낯설고 열린 체험을 지속적으로 유도함으로써 정동적 힘, 곧 주체와 언어·이미지의 역동적 재배치를 구현한다. 많은 시인들이 상상력의 융합, 이질적 감각, 독특한 형식 실험을 펼쳐왔던 흐름과 달리, 정태인은 언뜻 파편적으로 보이는 시상의 흐름을 각 이미지를 통해 유기적으로 직조해내며 결과적으로 명확한 사유와 체험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의 시는 바르트의 텍스트는 접근하고 체험되는 것이라는 미학을 적극적으로 설계해, 단일한 알레고리와 저자 중심 해석을 철저히 거부하고 시적 언어와 감각을 독자 신체와 경험으로 촘촘히 전달한다.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에서 “목이 긴 나무”라는 이미지는 특정 의미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이미지는 독자가 텍스트 안을 걷고 감각하며, 흔들리고, 다시 일어나는 해체적 사건의 연속으로 기능한다. 독자는 그 열린 공간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자유롭게 발명하며, 언어·상상력·사유의 무한한 변주를 직접 체험한다. 바르트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닫힌 ‘작품’의 형식이 아니라 독자와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능동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로 작동한다. 여기에 정태인의 시적 축제의 장(場)에는 연극적 요소가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연극은 현실의 경계를 해체하며, 공연마다 새롭게 변형되는 극적 힘을 품고 있다. 알프레드 시몽이 『기호와 몽상』(박형섭 역, 동문선, 1999)에서 말하는 축제와 연극의 파편적·전복적 구조, 그리고 몽상가의 세계가 고독 속에서 우주적 상상과 평형(아니마)의 정동적 열림으로 나아간다는 점은, 정태인 시의 파편적 이미지·공간의 단절·대화와 소리의 겹침·물질의 초월·멎음·윤리적 감정 등과 긴밀히 맞닿는다. 한편 시몽은 인간의 삶을 연극과 축제에 비유하며, 축제와 연극 모두 민중 삶의 조건과 비극성에서 태어난 문화적 산물로 해석한다. 정태인의 시작품은 시적 조건과 비극적 현실에서 발현되는 환희와, ‘사리자’의 목소리로 상징되는 지혜와 질문, 감정 구조를 동시에 담아낸다. 정태인의 시는 주체와 기호, 현실과 환상, 언어와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해체·재배치되는 역동적 현장이다. 축제적 해방, 연극적 전환, 몽상적 상상력, 그리고 유연한 경계의 감각은 실험적 언어와 구체적인 체험 구조로 귀결되며, 현대시 해체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최경민의 「안내원」과 「라스굴라」는 현대시가 부조리의 미학과 해체적 언어 전략을 어떻게 갱신하는지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두 시는 현대사회에 널리 퍼진 “사람의 말이 차가운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언어와 제도, 관리 절차가 인간 고유의 감정·고통·기억·죽음을 어떻게 표면적이고 소외된 대상으로 환원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안내원」은 반복적·무표정한 안내 언어로 구성된 시스템 안에서, “너무 누르지 마세요. 쉽게 터질 수도 있습니다. 터지면 저희가 치워야 해요.”, “실족사는 누구의 기억도 아니어서 복원할 수 없습니다. 대신 깔끔한 가족을 써드릴게요.”, “번호가 불리면 나아가세요. 끝나면 힘껏 돌아오세요.” 등 절차적 언표가 일상적 사건, 개인의 상실, 심지어 죽음조차 데이터로, 복원 불가한 에러로 치환한다. 이는 의미 없는 반복과 객체화, 존재적 공허의 심화로, 소통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라스굴라」는 인도 디저트 캔이라는 사물에 ‘예언’과 ‘유산’을 덧씌운다. “콜카타에서 가져온 예언이었다.”, “당신은 세 개의 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입구가 찌그러진 제품은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같은 구절을 통해, 신화적 내러티브와 산업사회의 경고와 공지, 소비와 관리의 언어가 구체 사물(캔)의 표면에 동시에 아로새겨진다. 이처럼 언어는 단순 정보 혹은 경고를 넘어, 인간 경험의 현실과 신화적 상상, 관리사회의 절차가 겹겹이 작동하는 복합적 층위를 형성한다. 남자의 신체 “둔부가 사실 거대한 종기…흘러내”리고, 들개의 상상적 파트너십과 반복적 언어는 결국 모든 것이 관리·절차·소비의 공허 속에 미끄러지는 인간 실존의 우울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곧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이 보여준 미학과 맞닿는다. 『엔드게임』에서 넬과 네그가 깡통(쓰레기통)에 갇혀 기억, 신체, 생의 잔여물로만 존재하는 것과 같이, 「라스굴라」의 남자와 들개는 캔 속에서 ‘예언’의 의미도, 유산의 실체도 다 소진된 채로 반복과 공허, 아이러니와 우울 속 부조리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예언이 텅 비고 말았군”, “유산은 달콤한 맛이 나는군”과 같은 반복적 대사는, 삶의 의미 생성 실패와 현대적 소외·결핍의 심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두 작품은 이 세계가 소통 불능, 맹목적 반복, 파편화·객체화·공허, 그리고 시스템 언어와 관리·경고·소비 코드가 인간 조건을 조직함을 밀도 있게 드러낸다. 그 핵심은, 현대 존재가 결핍과 부조리·불확정성과 아이러니로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그 경계에서 해체적 언어와 블랙코미디 미학만이 진실로 인간 실존을 감각하게 한다는 통찰에 있다. 이를 통해 두 시는 해체미학의 실천적 성취를 드러낸다. 올해 등단한 이수빈, 이현아, 임어지니, 장희수, 정태인, 최경민 등 여섯 신인의 시편들은 단순한 개성 표현이나 언어실험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대 청년 세대가 겪는 세계의 깊은 변화와 복합적 결핍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이들은 관계의 불안과 결핍을 연대의 가능성, 타자와의 접촉, 아이러니와 부조리, 파격적 상상력과 시적 실험을 통해 깊이 탐색한다. ‘관계’의 불안정성은 피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언어, 일상적 감각, 상상력, 존재 인식 층위로 확장·해체되어 작동하며, 이는 단순한 시의성을 넘어 세계와 존재의 분리 불가능한 틈 사이에서만 생성되는 독특한 감각과 사유, 윤리·상상력의 책임까지 묻는다. 이러한 결핍은 고립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이 충돌·포개지는 현장으로 성립되고, 시적 언어는 해체와 실험, 평범한 일상을 뒤흔드는 감각의 진동, 정체성과 타자성, 세계와 자신 사이의 긴밀한 긴장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이 신인들은 구체적 경험과 내면의 리듬,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을 미감으로 끌어들여, 한국시의 서사적 확장과 일상에서 새로운 언어적 감수성을 착취하며, 시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넓히고 있다. 현실과 내면, 언어와 침묵, 소외와 감각이 교직된 이들의 시는 결코 완성과 합일로 안착하지 않으며, 손이 닿지 않는 영역, 불안정의 운동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특히 이들의 시적 작업은 메타시의 상상력과 존재 미학의 구현, 언어의 자기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존재의 다양한 양태를 시적으로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로 이해된다. 시는 언어적 표현을 넘어 존재와 현실의 틈새, 그곳에서만 드러나는 감각과 상상력, 윤리를 길어 올리고, 이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주체적 활동이 된다. 올해 신인 시인들의 작품은 그렇게 오늘날 한국시의 중대한 미학·문학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시단의 방향성과 역할에 대해 깊은 통찰을 낳게 하는 의미 있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 믿는다.
부정의 세계, 스키드마크 모든 예술이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부정을 전제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왔기에,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주어진 세계의 허물을 벗고 만료된 현재의 형상을 깔고 앉아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이는 낯선 미지의 세계에서 발원되는 새로운 감각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고 세계의 한계를 확장해 나가기 위함이다.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해 서슴없이 “지옥의 연쇄”(류수연, 「연옥으로의 한 걸음」, 김안, 『Mazeppa』, 문학과지성사, 2024, 108쪽)에 몸을 맡긴 바 있는 김안과 그의 시적 주체는 죽음에의 도정을 『귀신의 왕』(아시아, 2024)에서 이어간다. 『아무는 밤』(민음사, 2019) 이후 5년 만에 『Mazeppa』(문학과지성사, 2024.2)를 발간한 시인은 2024년 11월 『귀신의 왕』을 내놓았다. 2024년에 출간된 두 권의 시집은 창조된 세계가 의식의 세계와 이질감 없이 포개져 시인만의 독특한 시적 형식을 작성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아무는 밤』 이후 죽음에 관한 의식에 큰 변화가 생긴다. “어떤 아이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데 “죽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미타찰」, 『아무는 밤』)를 듣게 된 것이다. 시인은 2014년 딸아이의 출생과 수많은 학생의 죽음 사건을 동시에 경험했고 생과 사에 대해 깊이 통찰하며 결국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으로 연결되어 구분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이 ‘죽음’이라는 ‘사건’과 ‘순간’에 의해 우리에게서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안은 죽음과 삶을 이어주던 ‘골목’을 매개로 그들에게 다가선다. ‘골목’이 기억의 실재를 규정하거나 보여주는 장소 역할을 해 왔듯 시인은 의미가 되는 실재, 존재, 사물, 활동으로 가득 차 있는 바로 그 ‘골목’에서 만나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물론 모두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없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못할”(「시인 노트」, 98쪽) 것 같다는 김안의 고백에는 어딘지 모를 짙은 여운이 서려져 있다. ‘귀신’이 된 ‘나’에게 귀신들은 더 이상 이질적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나’가 사랑하던 이웃과 가족이 되고 그들의 목소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전환된다. 그 어떤 낯선 행동과 기묘한 일들도 더는 ‘불가해’의 영역이 아니다. 변선우는 소진된 의식 세계의 언어와 감각 대신 미지의 땅인 ‘무의식’의 세계를 굴착(掘鑿)한다. 무의식 세계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쓰기가 진행되므로 기존의 독법과 문법을 살해하고 ‘난시의 눈’으로 세상 읽기가 된다. 시인은 시가 언어에 의해 현실화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무의식의 존재들에게 ‘몸’을 내주고 그 ‘몸’이 직접 발화하도록 한다. 그 언어는 무의미의 시처럼 보일 수 있으며 풀이할 수 없는 기표의 ‘스키드마크’로 읽힐 수도 있다. 그것이 당장은 독해 불가능한 것일 수 있겠지만, 이는 나 자신의 배면에 관한 일이므로 시인은 작업을 결코 멈출 수 없다. 변선우의 이러한 창작 태도는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의 세계보다 중요하고 무의식이 의식 세계의 대부분을 설명해 줄 것이라 굳게 믿은 프로이트를 충분히 연상시킨다. 경험 불가능한 세계에서 최초의 사물 앞에 섰던 ‘최초의 인간’ 보들레르처럼, 귀신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와 관계 맺는 변선우와 김안은 ‘사물’이 되고 ‘귀신’이 되어 감각 불가능한 세계의 존재를 마주 대하는 최초의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초석적 살해·창조적 전환 2018년 《동아일보》로 등단한 변선우 시인이 6년 만에 첫 시집 『비세계』(2024, 타이피스트)를 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의 시선과 감각에 따른 획일화와 몰개성적 감각의 다발에서 떠나 무의식과 환시 세계의 존재들에게 ‘몸’을 내어줌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감각을 써나간다. 그것은 말라르메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시학에서 솟아나야만 하는 어떤 언어를 발명하는 일이다. 변선우의 ‘비세계’는 “너무 많은 가시 때문에 너무 많은 구멍”(「비세계」)을 가졌고 ‘눈물’과 ‘콧물’ 그리고 ‘물’처럼 흐르며(「복도」, 「비세계」, 「식물의 말」) 자꾸만 “터지고”(「오토와 마톤」, 「폭탄 마니아」) “계속 움직이고 / 계속 변”(「사건과 순간」)한다. 변화하는 세계는 박제하듯 고정하는 기존의 언어가 절대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변선우는 기존의 세계를 뒤집기로 한다. 의식의 세계가 아닌 무의식과 환시 세계의 존재들이 써나가는 언어의 모험을 택함으로써 시인은 무한한 지평 위에 시를 올려놓으려는 것이다. 나는 회전하므로 입장이 번복됩니다. 내부와 외부는 나로 하여금 교차합니다. 나의 내부는 외부가, 나의 외부는 내부가 되어 공존을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반복적으로 중단을 사유합니다. 내 몸에, 이 순간에 도사리는 안과 밖이 이토록 함께 간섭하다니. 나는 놀라움으로 하여금 조작을 하여 회전문을 더욱 빠르게 작동합니다. 더욱 빠르게 넘나듭니다. 그래서 경계는 도리어 뚜렷해지며 내부는 능숙하게 외부가 되고, 외부는 능숙하게 내부가 됩니다. 그럴수록 나는 바깥을 몽상합니다. 그럴듯하게 중단을 사유합니다. - 변선우, 「회전문」 전문 「회전문」은 무의식 세계에 몸을 내맡긴 시인의 의지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시편이다. 회전문이 된 시적 주체 ‘나’는 회전하면서 자꾸 “입장을 번복”하여 의미를 전환하고 순환시킨다. 마치 하나의 텍스트는 단 하나의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원본도 없는 단어들이 뒤섞이고 충돌하는 다차원의 공간임을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회전문이 된 ‘나’는 내부의 사유를 중단시키고 외부가 내부가 되도록 “공존을 도모”한다. 이윽고 ‘나’는 “회전문을 더욱 빠르게 작동”시켜 “내부는 능숙하게 외부가 되고, 외부는 능숙하게 내부”가 되도록 만든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유 방식을 뒤집는 일이며 무의식과 일탈의 언어가 시인을 통해 박제되지 않도록 하여 보다 ‘진실’에 가까운 날것의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변선우의 『비세계』는 ‘비세계’로 탈주하는 시인의 상상을 통해 현실과 의식의 한계와 경계를 극복하려는 상상의 연주인 셈이다. 고집스럽게 담과 벽을 넘는 『비세계』는 이후 시인이 펼쳐나갈 시적 지평이자 포석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김안의 다섯 번째 시집 『귀신의 왕』이 출간되었다. 문단 경향이나 세대의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만의 방’을 완성해 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들과 마주 대한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의 근원적 성찰로, 김안은 죽음을 삶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대신 생(生)이라는 세계에 맞닿은 하나의 ‘골목’으로 삼는다. 이는 불교에서 논하는 존재론의 핵심인 연기론(緣起論)에 바탕을 둔 생사불이(生死不異) 또는 생사일여(生死一如)로 풀이될 수 있다. 생사일여란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원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구분할 수 없다는 불교의 생사관을 나타낸다. 한 승려가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으므로 나는 따랐다. 이윽고 승려의 몸은 사라지고 불이 저 혼자 허기에 몸부림치며 걷고 있었다. 불에게는 눈이 없으므로, 허나 불에게는 길고 거대한 팔이 있으므로, 허기진 불은 사방을 향해 성난 붉은 원숭이처럼 제 팔을 휘둘렀다. 나는 저 낯선 불의 팔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충동은 지난밤 꿈에서 황금빛 옥수수밭 사이를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시체를 안아주려 했던 것과 비슷했다. 가여운 것, 허기진 것, 끝없는 거대한 어둠이 너를 보고 있구나 이렇게 계속 눈 감고 있으면 영영 뜨지 못할 거야. 나는 시체에게 말을 건넸다. 설득하려는 듯. 누구를? 시체를. 꿈이었으니까. 죽지 말자고. 시체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내게 말했다. 나는 안개처럼 떠다니는 흐릿한 이야기일 뿐이야. 나는 밤의 어두운 주머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일 뿐이야. 그리고 시체의 이마에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더니 작은 나방으로 변해 내 이마에 부딪혔다. 눈을 떴다. 지금 내 앞에는 거대한 불이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구름처럼 느린 춤과 같았다. 나는 저 불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잊고 있던 시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눈을 뜨면 현실. 그것은 얼어 죽은 불의 낙원이야. 경험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욕망들. 그리고 나는 시체를 껴안았다. 나는 화로의 재처럼 조금씩 멀리 흩어져가는 나를 느끼기 시작했다. - 김안, ① 「미메시스」 전문, 8~9쪽 그해 겨울, 나는 죽은 것 같았다. …(중략)… 나는 손으로 억세게 귀를 막았다. 귓구멍이 손을 먹기 시작했다. 억지로 귀에서 손을 떼자, 귓구멍에서 긴긴 이야기들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그날 이후, 매일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 들어와 숙덕이던 하얗고 묽은 영혼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따라 나는 온몸으로 어둠을 받아들이며 옥수수밭으로 들어갔다. 귀 밖으로 늙음과 붉음과 묽음이 꿀렁거리며 뱀처럼 끝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김안, ② 「미메시스」 부분, 92~94쪽 시작과 끝을 알리는 두 편의 「미메시스」에는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두 작품은 하나이면서 결코 하나가 아닌 서사로, 죽음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시 전체가 운용될 것임을 전제하는 관문인 셈이다. ① 「미메시스」에서 ‘나’는 “승려의 온몸에 불이 붙은 채”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우리는 ‘나’가 바라보는 이 ‘죽어감’의 생생한 한 장면에서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온몸으로 물을 껴안고”(「불가촉천민」, 『아무는 밤』, 민음사, 2019, 26쪽) 죽어가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나는 저 낯선 불의 팔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힌다. ‘나’는 시체를 “설득하려는 듯” 눈을 뜨라고 말한다. “죽지 말자고.” 잠시 머뭇거리던 시체는 “나는 안개처럼 떠다니는 흐릿한 이야기”이고 “밤의 어두운 주머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라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 시 속에서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이다. 또한 ‘시체’는 인간이 만들어낸 “어두운 주머니에서만 존재하는” ‘단어’일 뿐이다. ‘시체’와 ‘나’는 설명할 수 없지만 다르지 않은 ‘존재’이므로 이제 “나는 시체를 껴안”는다. “화로의 재처럼 조금씩 멀리 흩어져가는 나”는 이제 ‘귀신’이다. 계사(繫辭), 미메시스, 뫼비우스 철학적 용어 가운데 계사(繫辭)라는 말이 있다. 계사는 서양 논리학의 기초 용어인 ‘코풀라(coupula)’의 번역어로, 코풀라는 무엇인가를 묶고 조이는 데 쓰이는 일종의 끈(매듭)을 의미하는 라틴어(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비, 2013, 421쪽)다. 계사는 주어와 보어를 잇는 ‘be동사’인 ‘이다’(est)라는 점에서 관절(마디) 역할을 하고 의미론적으로 실체를 지시하는 ‘끈’을 지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명사가 계사에 묶여 영원히 하나가 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김안과 변선우의 시집에서 우리는 어떠한 ‘끈’을 발견할 수 있을까. 두 시인을 이어주는 ‘끈’은 두 세계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의 존재를 발견해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세계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현실과 몽상/환시의 세계, 죽음과 삶의 세계, 죽음과 죽어감의 세계, 너와 나, 존재와 비존재, 비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포함한다. 김안과 변선우는 이질적인 두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배치하지 않고 하나의 세계로 통합한다. 2000년대는 전쟁 아닌 일상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시대가 되었다. 2014년 이후 우리의 죽음에 관한 정신의 지도가 크게 바뀐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시인들의 발자취마저 돌려놓았다. 아이들이 돌아오겠다던 금요일은 550번 이상 지났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훌쩍 지났어도 좀체 낫지 않고 집단적 우울증으로 남아 각인된 죽음들, 어린 친구들의 무고한 죽음이 남긴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삶에 도사리고 있다. 2015년 메르스에 이어 2020년 코로나19, 2022년 이태원 참사로 죽음은 우리의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가족 대부분은 갑작스럽게 준비도 없이 가족 구성원을 잃어야 했고 그 ‘상실’로 가족은 아직도 고통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죽음의 그림자를 지니게 된 셈이다. 세계는 다양한 감정의 다발들로 소용돌이치고 슬픔이 넘쳐 흐른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던 아이,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잡아드린 어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상지(上肢)에는 여전히 그들의 온기가 남아 있는데 말이다. 죽음을 단순히 한 개인의 불행과 삶의 질감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 그들은 내게서 완전히 분리되어 소멸했는가? 우리는 말더듬이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 감각과 감정을 억제하고 슬픔을 애써 외면한다. 애도해야 한다면서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 모른 채 ‘애도, 애도, 애도’만을 되뇌곤 한다. 변선우는 무의식이 흘러나오도록 하여 고통받는 무의식의 ‘나’에게 손을 내밀고 김안은 죽음 사건으로 비존재가 된 존재들에게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잊지 않겠다는 진정한 애도를 수행한다. 그곳과 먼 곳에도 있는 ‘나’ 『귀신의 왕』의 촘촘한 유기적 연결성이 ‘나’의 ‘어린 시절’ 골목으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이끈다. 시인에게 “기억들은 한 골목에 집중되어 있”(「시인 노트」, 96쪽)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며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우리가 ‘귀신’이라고 부르는 죽은 존재들도 살아있는 “나와 비슷한 형식과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들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온기를 더듬어 나간다. ‘나’는 어린 시절의 공간에 도착해 ‘귀신’이 된 그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귀신의 왕』은 어린 시절 ‘나’가 살았던 한 골목의 ‘그 집’을 중심으로, 이제 ‘귀신’이 되어 버린 사랑하는 존재들의 서사를 잔뿌리처럼 펼쳐 보여준다. ‘귀신’이 된 ‘나’가 마주 대하는 귀신들은 오랜만에 해후하는 이웃이자 벗이다. 그곳과 먼 곳의 ‘나’는 ‘너’를 포용하여 ‘우리’가 된다. 11월의 늦은 오후,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직까지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건 내일도 내내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때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게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는 오랜만에 뵌 어머니 모습에 얼떨떨하면서도 반가웠다. 철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강아지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 나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 이름이 뭐였죠? 무슨 소리니? 강아지라니. 내가 그 강아지가 된 마음이라니까, 오랜만에 엄마를 보니. 냉장고에서 하얗고 서늘한 빛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어두고서 내게로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강아지 키운 적이 없어. 왜 나 예닐곱 살 때 무당집 골목에 살 적에 키웠잖아. 굶어 죽었던가, 맞아 죽었던가, 그래서 아버지가 화장실 옆 나무에 묻어준. 나는 허기진 짐승처럼 어머니의 신선한 손목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손목을 내어주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아버지가 없잖아? 생각해보니 내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난 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어린 시절, 밤마다 창밖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서늘하게 흘러 들어와 어머니의 몸을 휘감았는데, 나는 그것을 아버지라 여긴 것일까? 어머니는 남은 한쪽 손목을 내어주었다. 그건 골목들이란다. 양팔이 사라진 어머니는 하얗게, 깊게, 서늘하게, 침묵하고 있는 냉장고 속으로 뱀처럼 기어 들어갔다. 어머니의 팔에서 흘러나온 붉은 그림자들이 밤의 골목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 김안, 「기일」 전문 세계가 달라도 존재의 관계는 부식되지 않는다는 주제를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독특한 서사를 작성하는 명편 중 하나는 「기일」이다. 우리는 「기일」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귀신의 세계에서도 변하지 않는 존재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이다. 이를 통해 생과 사의 ‘벽’은 무너지고 확실의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 ‘나’는 ‘기일’이 되어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는 만나자마자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선 냉장고 문”을 여신다.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귀신이 된 어머니와 자식의 대화 역시 낯설지 않다. “나는 오랜만에 뵌 어머니 모습에 얼떨떨하면서도 반”갑다. 항상 자식이 그러하듯 “철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강아지 같은 마음”으로 “엄마, 나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 이름이 뭐였죠?”라며 평소 궁금했던 질문 하나를 한다. 어머니는 “우리 강아지를 키운 적이 없어”라고 답한다. 이 부분에서 확신과 확실의 세계가 흔들린다. ‘나’는 세계를 공고히 다지려 한다. 아니, “굶어 죽었던가, 맞아 죽었던가, 그래서 아버지가 화장실 옆 나무에 묻어준” 바로 그 강아지요. 라고 묻자, 어머니는 “넌 아버지가 없잖아?”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확신과 확실의 경계는 무너진다. 마치 귀신의 세계를 읽는 독자의 현실 세계와의 경계를 허물기라도 하듯 말이다. 현실 세계에서 형성한 가치관과 사유·언어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완전한지, 이것 때문에 너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죽음의 세계를 ‘나’의 세계에서 분리해 ‘나’라는 실존이 고통스럽고 고독한 것은 아니었는지 많은 사유와 깨달음이 우리에게 도착한다. 「기일」은 귀신들의 대화를 변증법적으로 검토하여 우리를 다양한 세계로 이끌고 결코 관계란 끊어지지 않음을 상기시켜 준다. 비세계(非世界), 비세계(飛世界) 김안과 변선우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나가면서 같은 제목을 몇 차례 부여한다. 김안은 『아무는 밤』에서 「파산된 노래」 5편, 「불가촉천민」 8편, 「가정의 행복」 4편, 「피그말리온」 2편 등 동일한 제목으로 시를 써나갔는데, 이러한 시적 방식과 특징은 「미메시스」로 시작하여 「미메시스」로 끝을 맺는 『귀신의 왕』에서 ‘신성한 높이’에 도달하게 된다. 변선우 역시, 『비세계』에서 「비세계」 10편, 「제정신세계」 11편, 「폭탄 마니아」 4편을 써나가면서 비가시적 시적 장소를 가시화하고 활성화한다. 두 시인에 ‘미메시스’적 글쓰기를 통해서 텍스트 속 장소의 가상성은 순환하며 생명을 얻고 구체화되는 것이다. ‘밤’의 세계, ‘죽음’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 ‘환시’의 세계는 장소의 언어와 몸이 없어 우리는 그 세계를 실감하기 어렵다. 시인은 귓구멍에서 흘러내리는 “긴긴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는 “그날 이후, 매일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 들어와 숙덕이던 하얗고 묽은 영혼의 목소리”이다. 1 세계를 발견하였어요. 이 말은 세계를 발명하였다는 의미의 다름 아녜요. 나는 세계의 경계에 당도하여, 문을 밀어 열 듯, 선을 넘어 입장하였어요. 새하얀 세계, 금방 새카만 세계……, 새하얗기도 하고 새카맣기도 하는 세계가 펼쳐졌어요. 복판에 사람들이 있었어요. 살충제 마신 벌레들처럼 반지르르하게 널브러져 있었어요. 바라던 광경이었어요. 너무도 돌아왔어요. - 변선우, ① 「비세계」 부분, 11쪽 1 사물은 넘어진다. 깨진다. 흐르기 시작한다. 비세계에 도착한다. 2 사물은 거기서 내가 된다. 나를 시작한다. 트랙을 걷는다. 달린다. - 변선우, ② 「비세계」 부분, 19쪽 변선우의 10편의 「비세계」 가운데 2편(번호 필자 부여)을 살펴보자. ① 「비세계」에서 시적 주체는 “세계를 발견”한다. 아니 “세계를 발명하였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 것이다. 시인은 “새하얀 세계, 금방 새카만 세계”에 “반지르르하게 널브러져 있”는 존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려고 한다. 혼돈(Chaos)의 세계에서 세계가 창조되듯이 ‘비세계’의 존재들이 시인의 ‘몸’과 ‘글쓰기’를 통해 생명이 획득된다. “사물은 넘어”지고 깨져서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다.” 사물은 마침내 생명을 얻는다. 살아있다는 것의 상징성은 ‘정지’ 대신 ‘흐름’, ‘순환’이다. 생명의 순환을 대표하는 원소를 부러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없이 ‘물’을 택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지구의 97%, 인간 신체의 70% 이상이 물로 구성되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순환’은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변신의 반복을 의미한다. 물은 친화적 성격을 지녔다. 물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긍정의 에너지를 생성한다. ‘흙(土)’과 결합한 물은 진흙이 되어 집을 짓고 ‘불(火)’과 결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는 에너지가 되며, ‘공기(風)’와 결합한 물은 파도와 바람이 되어 자연물과 유기체의 이동을 도와 생존을 도모한다. 이것은 물이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변화의 중심에 서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변선우의 ② 「비세계」에서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 사물이 내가 되어 “나를 시작한다.” 사물은 이제 “트랙을 걷”고 달릴 수 있다. 변선우의 시적 주체는 무의식과 상상/몽상의 존재들이 ‘나’의 ‘몸’을 입고 현시의 세계에서 걷고 달릴 수 있도록 몸을 내준다. ‘몸’과 ‘언어’를 가진 비세계의 사물들이 비상한다. 김안과 변선우는 열린 시선과 감각을 지니고 있다. “겨울에는 겨울의 소리가 있고 겨울의 언어가 있”(「끽다거喫茶去」, 『Mazeppa』)다고 믿기에 시인은 ‘방’이라는 단어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실과 울먹임들이 웅얼웅얼 귓속으로 들려오는 것”(김안, 「사전」, 강정 외, 『시인의 사물들』, 한겨레출판, 2014, 164쪽)을 포착한 것이다. 이제 시인은 ‘귀신의 왕’이 되어 귀신의 소리와 귀신의 언어를 듣고 말한다. 이는 시인이 현실적 문제보다 비가시적·비현실적 문제에 집중해 시세계를 확장하거나 “문학성이라는 뻔한 밀교”(「시인의 말」, 『Mazeppa』)를 펼치려는 자세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한때 우리 삶을 감쌌던 존재들이 불쑥불쑥 의식의 세계에 찾아오는 것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대화함으로써 존재들이 살아가는 실재적 삶을 명시해 보려는 것이다. 김안과 변선우는 유일한 세계, 인간만이 사유의 존재로 믿어왔던 가치관들이 오히려 존재에게 고통과 고독을 주지 않았나 하고 의문을 가진다. 그들이 창조한 시적 세계에서 무수히 많은 사물과 귀신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사실 죽음이 관계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라졌다고 믿어왔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생의 고통이 되지 않았을까. 시인들은 아교처럼 생의 한가운데 흘러내리는 수많은 고통과 단절이 고립된 사유 때문임을 안다. 『귀신의 왕』과 『비세계』는 아직 언어가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더 이상 못 본 척 시약불견(視若不見)하지 않겠다는 시인들의 의지이자 세계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죽음이 뛰어오”(「아오리스트」, 『Mazeppa』)는 소리와 무의식의 몸짓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들은 계속해서 너머의 세계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액체적 지각을 통해 거침없이 새로운 세계로 흘러 들어가 ‘몸’ 없는 세계 속 존재들의 ‘언어’가 되어줄 것이다. 확신의 세계를 허물자, 다양한 세계의 새로운 언어와 감각이 흘러넘치면서 출렁댄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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