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들 2024년 가을호(제77호)
가장 낮은 존재들의 중개자
1.
김개영의 소설 『나의 시적인 무녀 선녀 씨』는 만신으로 불린 무당 최서희의 죽음 직후부터 ‘오구굿’이 행해지기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산 자들의 한을 표출화하면서 진정한 애도를 수행하는 일종의 천도의식을 형식화하고 있다. 소설은 “산 자의 때를 벗지 못한, 완전히 죽지 못한 존재, 살아있음도 죽어있음도 아닌 그냥 중유(中有)의 존재”(p.19)와도 같은 ‘선녀 씨’의 영령이 ‘오구굿’을 통해 세상의 업을 씻고 무사히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의 과정이 죽은 자의 말을 산 자들의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이 세계와 저 세계를 하나의 시공간으로 묶어낼 수 있었던 무속적 세계관의 종말에 바치는 헌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가령 한 인물의 죽음을 지시하는 문장(“선녀 씨의 몸 위로 담요 한 장을 더 덮었다”)으로 시작된 소설은 슬픔이나 한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문장(“상처에 새살이 돋듯 간질간질했다”)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도 그러거니와, 이 소설이 남겨진 자들의 뒤늦은 후회나 사후애도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읽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의 감정이 회환보다 타자에 대한 공감에 더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2.
소설은 화자인 ‘나’(영호)의 어머니이자 샤먼으로 불리길 원했던 만신 최서희의 죽음을 애도의 형식을 넘어 새로운 존재양식의 영속적 가능성을 타진하는 서사에 가깝다. 이러한 독해는 소설 곳곳에 묘사되고 있는 ‘시인’과 ‘샤먼’의 공유지점에서 확실한 근거를 두고 있다. 소설에는 아주 오랫동안 시인의 사명과 샤먼의 숙명을 동일한 운명으로 여겼을 법한 작가의 사유가 여러 곳에 포진되어 있는데, ‘나’의 대학 선배이자 시인인 ‘사형’의 말을 전하는 다음의 문장들이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다.
사형 말대로 시인의 피에는 샤먼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어쩌면 두 존재는 상상력 과잉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지 몰랐다. 그 상상력이 만든 세계가 현실보다 더 그럴듯해서 그 세계의 강력한 지배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야말로 자궁 속처럼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하고 편안했으리라. 시 한 편은 굿 한판일 수 있었다. 언어 너머, 현실 너머, 과학과 합리 너머 뭔가가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샤먼이었는지도 몰랐다. 문명이 시작되면서, 자연과 분리된 대가로 우리 인간은 샤먼의 능력을 하나둘 잃어왔다. 삶이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 된 이유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나라에서 점점 존재 의미를 잃어가는 시인 또한 샤먼과 마찬가지로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인지도 몰랐다.(pp.139~140)
죽은 자의 목소리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강을 건너지 못한다. 때로 강물의 바람이나 물결로 도달하더라도 이승의 언어는 이를 번역할 수 없다. 따라서 저 세계의 언어를 이 세계의 언어로 풀이하고, 저 세계의 존재를 이 세계의 물질적 형태로 전환시켜줄 수 있는 존재인 영매를 필요로 한다. ‘무(巫)’라는 한자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파자(破子)할 수 있다. 즉 샤먼은 한 때 하나였던 세계의 분화를 다시 메워주면서 과학과 합리성의 결여지점을 보충하는 존재이다.
또한 현실의 언어는 상징계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어로 구조화된 상징계 이전,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운명을 가늠하던 시대(“별들에게 길을 묻던 시대”, p.218)는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근대 이후 ‘상상력’ 또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영어(囹圄)되었다. 모든 억압된 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귀환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저 무의식에 영어된 감정과 이야기들 또한 비-언어적 양식으로 소환될 것이다. 이 의식과 무의식 또는 언어와 비-언어 사이의 간극이 여전히 시인들이 요청되는 이유이다. 시인은 이 결여지점을 지시하고 폭로하면서 동시에 그 틈을 대리보충한다. 언어라는 기호에 빚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인)는 언어 너머를 가리키면서 재현불가능성을 재현해야 할 운명을 거부하지 않는다. ‘선녀 씨’의 죽음 이후 자신에게 던져진 운명을 거부했던 형 수호가 시를 쓰는 동생 영호를 응원하게 된 것도 무속과 문학의 동질성과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웅얼거림 같은 것이 들려오곤 했다. 그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예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처 언어화되기 직전의, 혀끝에서 맴도는 망설임이랄까. 이를테면 그것은 대상의 심연에 닿자마자 휘발되는 순간의 감각 같은 거였다. 언어화가 진행되는 찰라, 굴절과 왜곡이 일어나 버리고야 마는, 그래서 ‘웅얼거림’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소리들. 그것은 존재의 흔들림이 느껴지는 순간에만 명확해지는 시의 언어와 닮아 있는지도 몰랐다. 별들에게 길을 묻던 시대의 DNA가 깊이 아로새겨져 있을 언어. 말 자체보다는 말과 말 사이의 여백에 더 많은 메시지를 담은 언어. 형은 드디어 그런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 쓰기를 한판 오구로 이해한 것도 그 증거였다.(p.218)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강을 건너면서 언어는 ‘굴절과 왜곡’을 피할 수 없지만, 그래서 기호는 명확하지 않아 “웅얼거림”으로 표현되지만, 그 여백에는 기호를 초과하는 “메세지”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형 수호는 이제 인정한다. (그가 의사를 그만 두고 배를 타게 된 것도 어쩌면 이러한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샤먼과 시인, 이들은 모두 언어 너머의 세계를 주시하고 가리키는 존재들이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중재”하고, 존재들이 융화된 일종의 접신 상태에서 “침묵의 언어를 번역”하는 행위가 이들의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진짜 시는 ‘쓴’ 시가 아니라 ‘쓰여진’ 시”(이상 p.142)라는 작가의 말을 이해해야 할 듯하다.
3.
이들은 어느 세계에도 정착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모든 존재들의 목소리(언어를 초과하는 의미와 현상들)를 전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 비록 그 자격이 법과 제도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현실성이 결여된 비합리적 양식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배제의 원인이 되지만, 작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에게 “목소리 없는 존재의 통역사들”(p.219)이라는 헌사를 바쳤다. 이러한 헌사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존재”가 됨으로써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존재들의 목소리들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가 미치지 않는 곳일수록 샤먼은 더 힘을 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낮은 곳에서는 법과 제도의 힘이 약해진다. 샤먼이 이 나라에서 가장 낮은 존재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p.80)
‘법과 제도’는 보호와 배제라는 이중적 의미를 띠고 있다. ‘법과 제도’는 보호의 대상을 규정하는 강력한 울타리를 경계 삼아, 그 바깥에 놓여야 할 (호모-사케르와 같은) 존재들을 생산함으로써 울타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배제를 통한 보호라는 제도의 논리는 배제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무의식의 세계와 같은 영역으로 억압한다. 따라서 상징계 바깥으로 내몰린 존재들과 그들의 목소리는 언어를 초과하고 언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샤먼과 시인의 인간학적 능력은 이 지점에서 빛난다. 멸종 직전의 숙명을 타고난 이들은 무관심과 천대의 대상들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포착한다. 그래서 작가는 이들을 “먼저 알고, 먼저 고통스러워하고, 먼저 우는 존재들!”(p.43)이라고 말한다.
김개영 소설의 인물 구도와 배치 또한 이 지점에서 빛난다. 소설은 경계 바깥의 존재들을 지속적으로 소환한다. 선녀 씨 최서희를 비롯한 무속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미신의 이름으로 근대적 합리성의 바깥에 놓여 있다. 만신의 제자였던 ‘여진 누나’는 정상적 애정 관계의 대상에서 누락된 존재로 묘사되며, ‘깨깐이 형’은 그의 무속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선천적 장애라는 표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또한 소설 화자의 대학 선배이자 시인인 ‘사형’은 이중적 차별의 대상이기도 하다. “가족에게서조차 환영받지 못한 존재”(p.235)인 그는 “시인이 되겠다고 해서 부모와 인연을 끊은 것”이 아니라 “퀴어라는 이유로 외면”(p.203)을 당했다. (사형은 소설의 서사에서는 주변적 인물로 보이지만, 아마도 작가는 이 인물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는 듯해 보인다.) 싫은 소리를 마다하지 않아서 밉상이었던 ‘면도칼 선생’도 사실은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남자”(p.202)로 살아왔다. 세상은 이들을 “괴물”(p.195)로 부르지만, 다행히 무속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이들의 성 정체성을 문제 삼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입바른 소리가 밉상일 뿐.
선녀 씨의 첫 번째 남편이자 영호와 수호의 아버지는 또 어떤가. 그는 “분단의 희생자”였다. 인민군으로 징집된 할아버지 때문에 그는 평생을 “빨갱이 자식”이라는 스티그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분단국가에서 “빨갱이 자식”이라는 “딱지”는 강력한 멸시와 차별의 원인으로 작동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는 “말단 순경이기는 하지만 경찰”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매번 승진 심사에서 누락되는 불이익과 사직 권고에 시달려야 했다. “부유한 월남민으로 5대째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집안에 장가듦으로써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을 희석”하려고도 했지만, 아내였던 최서희가 무당 선녀 씨가 되면서 그는 “무당 남편”이라는 새로운 딱지를 얻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출세 따위의 야심을 버리고, 처자식은 내팽개친 채, 여자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한량이 된 것이.”(이상 p.189) 선녀 씨를 버리고 새장가를 든 아버지의 아내 ‘금희네’ 또한 정상적인 인지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물로 그려진다.
역설적으로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세계관의 바깥에 놓인 이러한 인물들의 배치를 통해 김개영의 소설은 진정한 애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길에 접어든다. 앞서 말했듯이 샤먼은 세계 바깥 존재들의 한과 미련을 살풀이함으로써 두 세계를 중개한다. 만신 최서희 또한 평생 이러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구원하지도 못했고, 그녀와 얽혀 있는 인물들 간의 미움과 죄책감 등의 해묵은 감정도 살풀이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아들 진호의 죽음과 여기에 연루된 인물들의 죄책감들, 아버지의 외도와 가정의 붕괴에 따른 미움들, 어머니의 삶을 부정하는 형의 방황과 몰이해, 두 세계관의 대립과 갈등, 고잽이 아재와 연관된 어머니의 상처, 시인이 되겠다면서도 등단을 이루지 못한 채 세계의 경계를 배회하는 화자의 삶까지, 이 모든 실타래들이 엉킨 채 만신 최서희는 육신의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진정한 애도는 이 막힌 지점에서 그 가능성이 열린다. (‘영호’가 탄 버스가 가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전후로 소설은 애도의 과정으로 이행하는데, 이 장면은 그전까지 화자가 느끼고 경험한 미움, 분노, 서운함, 차별 등의 감정들이 공감과 이해의 영역으로 건너오는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다. 터널을 통과하는 장면 이전 화자는 ‘사형’의 커밍아웃을 들었고, 아버지의 사과를 들었으며, 다른 인물들의 삶에 얽힌 숨겨진 사연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화자는 다시 어머니의 영정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세상에 남겨진 모든 한과 미움 같은 티끌들을 태워버릴 준비를 마친 셈이 된다. 이후 소설은 화재 장면을 보여주면서 마지막 오구굿을 준비한다.)
4.
소설은 오랜 시간 묵은 이 원한과 차별들을 그녀의 오구굿을 통해 풀이함으로써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형식으로 이행한다. 미리 말하자면 이 작품은 소설의 형식으로 빚어낸 한 바탕의 살풀이이자, 어머니의 삶에 대한 오구굿이며, 가장 낮은 존재들의 한을 위로했던 한 샤먼의 삶에 대한 진정한 애도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만신 최서희의 ‘오구굿’을 통해 한 바탕의 살풀이를 벌인다. 그녀의 육신이 세상을 뜬 지 정확히 48일째 되는 날 정오부터 시작된 굿은 자정을 넘어 49일째가 되는 날까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선녀 씨는 ‘가진리 만신’의 몸을 빌려 다시 이 세계로 건너 와 산 자들의 삶을 위로한다. 그녀의 마지막 굿이다.
선녀 씨는 먼저 아들 영호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며 그의 슬픔을 위로한다. 또 배를 타고 대양을 떠도는 첫째 아들 수호의 안녕을 약속한다. 이후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막내 진호의 색동 바지저고리를 입고서는 양껏 과자를 먹으며 그제야 친부인 ‘고잽이 아재’를 아빠라고 부른다. 고잽이 아재의 오래된 회환도 함께 해소된다. 그리고 오래 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선녀 씨의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 무녀가 된 딸과 화해했듯이, 죽음에 이른 그녀의 남편을 용서하고 ‘금희네’에게도 공수를 내려주면서 자식들의 남은 삶을 부탁한다. ‘사형’에게는 “울지 말고 설워 말고 크게 되고 성불하니 무소처럼 혼자 가거라”(p.235)라며 공감과 위로를 전한다. 이윽고 ‘글문 도사’의 몸으로 화해서는 시를 쓰는 아들이자 소설의 화자인 영호에게 “시가 공수 같은 거고 시인이 무당 같은 거야”(p.236)라는 말로써 자신의 가업을 (물론 방식은 다르지만) 전승한다. (영호의 경우 과거 “풍물패의 징을 빼앗아 뒷산 중턱까지 올라가 징을 두드리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p.209)거리기도 하는 등 일찍이 무병의 유전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니, 그가 시를 쓰는 것은 이러한 운명을 언어로 승화하는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 거리인 뒷전에서는 저승 문에 들지 못한 수많은 무주고혼과 잡귀를 일일이 불러들여”(p.239) 음식을 먹인다. 그녀의 영혼은 마지막까지 세상 가장 낮은 존재들과 제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존재들을 살뜰히 챙김으로써 만신으로서의 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렇게 굿은 마무리되고, 그녀는 이제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5.
진정한 애도는 죽은 자의 삶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산 자들의 남은 생애가 죽은 자의 삶과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산 자들이 슬픔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 찾기’의 과정에 입문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은 자가 바라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기억보다 살아남은 이들의 충만한 삶일 테니까 말이다. 때문에 이 세계의 ‘안’과 ‘바깥’을 넘나들며 살풀이를 수행했던 한 사람을 애도하는 일은 이제 이 세계의 ‘바깥’으로 넘어간 선녀 씨의 이야기를 이 세계의 ‘안’에서 살아야할 이들이 다른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형식화된다. 그 방식이 때로는 ‘시’를 쓰는 일이 될지도 모르며, 제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기실 문학이 해야 할 일이 이와 다르지 않을 터, 이 소설의 숨겨진 목적이 여기에 있음도 밝혀야 할 듯하다.) 이 모든 가능성을 닫아 버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을 타자의 삶의 자리에 놓아두는 행위야 말로 ‘완전한 죽음’을 마무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무속연구자 ‘이석’이 만신 최서희의 죽음에 바친 아래의 헌사는 작가 김개영이 그의 모친에게 바치는 묘비명의 다른 방식일 것이다.
무당의 본업을 두 가지로 설명하자면 하나는 산자, 즉 어떤 슬픔이나 곤란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망자, 즉 이 세상에 대한 한과 미련을 가진 어떤 영적 존재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당시, 최서희 만신은 불행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그 두 가지 사명으로 극복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돈만 밝히는 무당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그런 무녀를 접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pp.225-226)
산 자들의 삶을 위해 기도하고 망자들의 한을 위로하는 행위야 말로 무당의 본업이라면, 이 소설은 남겨진 자들이 죽은 자(선녀 씨)가 미처 완료하지 못한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완전한 죽음’을 성사시키는 작업이다. ‘여진 누나’는 완전한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신엄마도 편히 저 세상에 가지 못해. 망자가 저승에 가지 못하고 자꾸 뒤돌아보고, 서성이면 그건 완전히 죽은 게 아냐. 완전히 죽지 못하면 산 사람들이 괴로워. 티끌만큼의 한도 미련도 남겨서는 안 돼.”라고 말이다. 즉 소설의 마지막 장에 형상화된 오구굿은 진정한 애도와 화해를 통해 한 시대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과정을 ‘완전한 죽음’을 형식화하고 있다.
만신 최서희의 죽음이 무속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한 시대의 끝을 의미할지 몰라도, 이를 서사화함으로써 만신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질문하는 이 소설은 한 시대와 세계관의 종말이 아니라 그것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세상의 밑바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 세계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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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1. 주석으로 남은 말 끝내 말하지 않아서,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은 완결되지 않는다. 미완성의 일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자이가르니크 효과—물론 심리학적 개념으로서의 정확한 정의는 다르지만 미완이라는 상태가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연민과 응시의 감각. 시는 언제나 그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에 머무르며 우리를 흔든다. 비평이 그 흔들림을 정리하고 서열화하고 요약하는 방식으로 시에 접근할 때 무언가는 반드시 누락된다. 나는 그 누락된 자리,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문장 곁에 남겨진 것들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를 설명하지 않는다. 해설하지 않는다. 다만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자리에 주석처럼 붙는다. 최근 우리 비평은 점점 더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세이적 비평, 1인칭 비평, 자기 서사의 회복. 그것은 오랫동안 구조적 불투명성 속에 머물렀던 비평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시도이며,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들이미는 행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어떤 문장은 오히려 '나'의 감정을 철수시키고 대신 더 오래 응시하고 더 천천히 다가가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바로 그 요구에 응답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거의 모든 비평이 한 편의 시 앞에서, 시가 말한 것과 침묵한 것을 민감하게 감지하려고 문장 옆에 오래 머무르고 부단히 응시한다. 비평은 이미 '시 앞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 비평의 부단한 출발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비평이 도달하기 위해 설정해둔 목적지를 '전달'이 아닌 '증명'으로 다시 지정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통과해 독자에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미에 도달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결정이다. 그 결정은 말을 침묵으로, 해석을 응시로, 감정의 진술을 주의의 태도로 바꾸는 형식적 전환이며, 동시에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작은 목소리의 윤리적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석적 평론은 단지 명명적 발명도, 마케팅 수사도 아니다. 그것은 평론이라는 장르 안에서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던 어떤 잠재적 가능성, 기존의 비평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었던 윤리적 감수성의 방향성을 명시화하고자 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요청하는 한 명의 윤리적 독자로서 실험해본 기록이다. 한 발 늦은 문장으로, 아니 애초에 너무 일러서 말을 멈춘 문장으로. 1인칭 비평이 감정의 진폭을 밀어 올리는 고백이라면 주석적 평론은 거리를 유지한 채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을 문장의 그림자처럼 걸어두는 일이다. 그래서 주석적인 평론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 글쓰기다. 나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문장의 여백에 오래 머물며 침묵의 밀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주석적인 문장은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 깊은 곳을 통과한 언어이며 끝내 도달하지 못한 말의 끝자락이다. 내가 머문 시간만큼 이 문장은 스스로의 침묵을 완성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시처럼 쓰인다. 끝내 말해지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떤 시 앞에 주석처럼 붙을 것인가. 나는 류근의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를 선택했다. 한 시집은 등단 후 18년의 침묵 끝에 도달한 첫 문장이며, 다른 한 시집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언어의 경계를 탐색하는 시도다. 두 시집은 서로 다른 시차와 온도를 지녔지만 공통적으로 '말할 수 없음'과 '도달하지 않음'을 전제한 채 끝내 문장을 선택한다.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도착하지 않을 말을 계속 써 내려간다. 단지 감정의 양태나 표현 방식이 다른 게 아니다. 류근은 고백한다.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상처적 체질』, 「어떤 흐린 가을비」)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가 언어화되는 순간—누군가에게 들리는 순간—속되게 소비될 운명을 자각한 시인의 언어적 체념이자 그 감각의 응축이다. 『상처적 체질』의 슬픔은 그래서 '진짜'이기를 포기한 슬픔이다. 표현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끝내 표현되는, 그래서 감각으로만 읽힐 수 있는, 어떤 내부로 굴절된 상처의 언어다. 그러나 이 언어는 김근의 시 앞에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김근은 말한다.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 「에게서 에게로」) 상처는 폐쇄되지 않고 이동한다. 김근의 시 속 상처는 정적인 고통이 아니라 방향과 운동을 가진 감정이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하나의 문장 속에서 다른 구절로 옮겨가는 관계적 감염이다. 여기서 상처는 타인의 것으로 흘러들고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 흐름은 류근이 거부한 바로 그 순간, "함부로 눈이 마주친" 순간(「어떤 흐린 가을비」)에서 출발한다. 김근의 시는 류근의 시를 주석한다. "왜 당신은 상처를 자기 안에만 가두는가?" "그 상처는 타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는가?" 김근의 언어는 묻지 않으면서도 되묻는다. 류근이 선언한 '삼류화된 감정'은 김근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더는 감정이 중심이 아니라 감각의 궤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화한다. 고백은 더 이상 정서의 진실이 아니라, 감각이 거쳐간 자리의 구조가 된다. 이 전환은 해석이 아닌 잔여이며, 문장이 말한 것보다 문장이 말하지 못한 것에 머무는 응시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김근의 시 또한 류근의 시로부터 되묻는다. 타자에게 흘러간 감정은 끝내 다시 돌아오는가? 관계는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는가? 『상처적 체질』의 음울한 자족성은 『에게서 에게로』의 관계적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에게서 에게로』의 파열된 리듬은 『상처적 체질』의 감정 구조를 되틀어보게 만든다. 김근의 '관계적 감각'은 류근의 '내면적 구조'를 질문하고, 류근의 '리듬화된 감정'은 김근의 '언어 바깥의 감정'을 불러낸다. 서로는 서로를 주석한다. 그러나 그 주석은 해설이 아니다. 불완전한 해석, 조각난 반응, 때로는 비틀린 되비침이다. 그렇게 두 시집은 하나의 장(場)에서 서로를 반사하며, 상처의 정의를 확장하고, 감정의 구조를 해체한다. 『상처적 체질』은 침묵의 주석이 되고, 『에게서 에게로』는 운동의 주석이 된다. 이 두 주석은 평행선을 그리듯 가까스로 닿지 않는다. 독자는 그 사이의 긴장에서야말로 오늘의 시가 상처를 견디는 방법을 다시 배운다. 2. 응시의 독법—감각의 작동 방식 감정은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대부분 재현되지 않는다. 감정은 말해지기보다는 누락되고 언어는 그것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지연된 리듬으로 감각을 구성한다. 시는 종종 말해지지 않은 감정에 가닿기 위해 언어를 미루고, 여백을 건너며, 때로는 되묻는다. 말보다 오래 남을지도 모를 감각. 언어로는 끝내 증명되지 않을 감정의 궤적. 예컨대 김근의 「정류장」은 그러한 감각의 실패와 구성의 시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가 말했다. 나도 한때 들판이었던 적이 있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빈 들판이요. 고독하지도 않은데 이것참 남세스럽군, 정류장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다.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생각해보시오. 곡식들은 저마다 열매를 매달고 눈부신 햇빛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삽 같은 농기구를 어깨에 걸치고 농부 하나가 들판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냇물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을 거요. (……)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빈들판이 되자마자 나는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떠올릴 수 없게 되어버렸소. 들판이었던 때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소. 빈 하나만 내 몸에 달라붙었을 뿐인데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내게 끼얹어질 줄은 차마 몰랐지 뭐요. 그때 등뒤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 두 개가 빛을 내고 있는 게 보였다. 길고양이일 것이 분명했지만 왠지 그 눈빛의 주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으로만 자꾸 생각되었다. 한 쌍의 눈빛은 이따금 동시에 깜박거렸다. 눈을 감을 때 짐승은 거기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히는 것처럼. (……) 처음부터 내가 기다렸던 게 버스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딘가로 가야 한다. 여긴 정류장이니까. 정류장을 버리고 정류장 혼자서 기다리라고 내버려두고. 나는 짐승의 눈빛 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어쩌면 이 시답잖은 알레고리의 바깥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내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이내 눈빛은 사라졌다. 다시 눈뜨지 않았다. 다시 아무것도. 당신은 너무 일렀거나 너무 늦었소만, 그곳에 눈빛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다시 그곳은. 없어졌다. 다시 바깥은. 빈 들판이 되기에도 빈이 되기에도. 그의 목소리만이 어둠처럼 끈질기게 내 귀를 잡아당겼다. —김근, 「정류장」 부분 빈 들판이 “한때 들판이었던 적”을 회상할 때, 그것은 단지 지나간 풍경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다. 그 회상은 수동적으로 과거의 감각을 재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현재와 미래의 감각의 재생 버튼은 자동적으로 눌린다. 회상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비어 있음’과 과거의 ‘비어 있지 않음’, 들판과 들판이 아닌 무엇, 그리고 그것 아닌 어떤 무엇으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들뜸 없는 기대, 또 그외의 어떤 개연성 없는 감각들이 점철되어 있다. 이 모든 감각을 하나로 이르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이 그리움은 실제로 있지 않았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일’에 대한 미련과 연민의 정서를 일으킨다. 그는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끼얹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그 감각은 실상 여기에서, 있지 않았던 감각을 일으킨다. 있지 않았던 감각에 대한 감각은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내 몸에 각인된다. 경험하지 못한 꿈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에 존재론적 분열을 치유하는 어떤 시에서의 상징처럼 말이다. 그곳에 있었다고 믿는 감각은 어느새 “정말 있었던 것”으로 몸에 각인된다. 그러니까 감각은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그 구성은 언제나 ‘빈’에서 시작된다. 상실의 자리에서, 결여의 틈에서, 감각은 다시 만들어진다.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다. 과거를 새로 쓰는 방식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감각이 실재처럼 작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각이 과거에 근거한 증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시하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기억의 소환이 아니라 발명의 발견이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무언가를—사실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무언가를—끝내 구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이 없던 자리를 통해서만 진실에 닿을 수도 있다. 김근이 감각을 작동 시킬 때, 어떤 시들은 조용히 풀어진다. 감각이 말을 밀어내고, 말이 감정을 넘긴다. 그떄 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진실에 닿는다. 어떤 누명을 벗어낸다. 벗겨진 시는 우리를 더 예민하게 만들고, 예민한 감각은 더 오래 응시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이 글은 감각이 언어보다 앞서 있고, 시는 그 감각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비평적 실천이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류근, 「독작(獨酌)」 전문 재회를 믿었고, 새끼 손가락 꼭 걸었다. 그러나 사랑은 또다시 나를 떠나간다. 그때의 같은 자리에 거듭 새겨진 상처는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헤어짐의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고 고통의 반복은 그 감각을 무디게 만들지만 상처는 항상 새롭게 많아지거나, 깊어지거나, 비대해 질 것이다. 그건 너도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우리 지독하게 사랑한 만큼 지독하게 마음 먹고 단숨에 헤어지자. 라고, 예전의 나였으면 이 시를 이렇게 읽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완벽히 지워내겠다는 감정의 독단처럼 들리도록 해석해버리기. 혼자 술을 퍼마시며(독작) 이별을 조금 멋스러운 쓸쓸함으로 포장하고, 새벽녘 sns에 올렸다가 다음 날 조용히 삭제하는 글처럼, 대학교에 하나쯤 있을 법한 센치한 선배처럼 만들기. 이런 해석은 정말 우리가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모든 이별에 대한 실례일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진폭을 서술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제는 좀 더 감각적으로 읽어보자. 자신의 감각을 믿고 문장 옆에 더 오래 머무르면서 응시하는 몸의 언어로 말해보자. 재회를 믿었을 때, 재회를 기약했을 때, 당신의 감각은 어땠는가. 만남의 끝이 결국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나는 예외일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을 것이다. 모종의 다짐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건, 감각을 잊어서도, 무뎌져서도, 그것이 멸해서도 아니다. 그 감각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감각 버튼을 누르고 그에 따라 자동 재생되는 진실된 감각을 말해보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었던 사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얼굴조차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공간 속 특정한 날씨와 냄새, 그리고 그 배경에 깔렸던 음악 같은 것.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들이 몸 안에서 어딘가 동시에 켜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직접 떠올린다기보다, 그 사람과 얽힌 감각들의 궤적을 따라간다. 이 궤적은 항상 비선형적이다. 마트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팝송의 한 소절, 커피잔을 내려놓을 때 손가락 끝에 전해지던 찻잔의 온기, 아니면 그 사람의 코트에서 나는 먼지 섞인 향수의 마지막 노트. 그때 그 사람을 떠올렸던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감각’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는 선언은 자동 재생된 감각 앞에서 질문으로 변모한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어?’라고. 이 되묻기의 순간에 감각은 문장을 바꾼다. 반문이 아니라, 반향이다. 믿었던 그 미래, 품었던 그 목소리, 붙들었던 그 감각—그것들은 단지 실패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감각의 총체였다. 그리고 그 총체는 말로는 남지 않았지만, 끝내 당신의 몸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다. 감정의 절단처럼 들렸던 류근의 언어는 김근의 감각의 구조를 통과하면서 절단이 아니라 잔류였음을 드러낸다. 시가 말한 것보다, 시가 말하지 않은 여백, 그 여백에서 다시 떠오른 감각, 그 감각으로 인해 드러난 문장.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3. 에게서, 체질로—감각의 회로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은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거듭된 상처의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류근, 「상처적 체질」 전문 “상처적 체질”이라는 말에서 먼저 떠오른 건, 어쩐지 비관적인 단상들이었다. 체질이라,—그 말은 어딘가 책임을 유예하는 언어처럼 들린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변명, 몸에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정서적 면책을 꾀하는 일.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운명론. 언뜻 상처를 내면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몸의 감각에게 모종의 중압감을 짊어지게 하며 고통의 근원을 흐리고 상처의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처의 열망”이니, “거듭된 상처의 폐허”니 하는 미학적 언어는 상처 입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미화된 언어, 즉 자기방어의 수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이 시가, 상처는 체질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감각은 그 체질 속에 갇힌 반복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상처에 대한 일종의 면책 기록일 것이다. 그때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말 거대한 병원이고, 시란 그 병증일 수밖에는.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체질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감각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구조다. 이 시에서 말하는 상처는 어떤 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반복되는 감각의 축적이고, 그 축적의 양상이다.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는 말은 그래서 사건의 인과를 제거한다. 상처는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닿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시인은 감각의 구조를 발화한다. 그것은 하나의 감각이 끝나지 않고 반복될 때, 다시 말해 상처가 현재진행형의 감정이 될 수 없을 때 그 감각은 고체화된다. 말하자면 감정은 굳어지고, 감각은 구조가 된다. 그 구조는 “체질”이다. 하지만 체질은 감각이 멈춘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되어, 말해지지 않으면서도 끝내 몸에 남아있는 상태다.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는 상처는 모두 감각으로서 켜켜이 쌓여 체질이 된다. 체질 때문에 고통은 받아도, 체질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끝내 생존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그 유명한 말, 너무 유명해서 통속적인 명언이 되어버린 그 말이 체질의 비유가 될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상처적 체질이라는 그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도, 상처를 잘 준다는 것도 아니라, 단지 감각이 만든 문장으로서 상처를 잘 살아내고 있다는 감각 구조의 이름이다. 정리하자면 류근의 언어는 감각을 하나의 구조로 고정한다. 반복되는 상처의 리듬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상처가 감각으로 응고된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 감각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류근의 체질은 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을 내부에서 되씹고 되풀이하는 구조이지, 타자와의 접촉에서 열린 흐름은 아니다. 그는 감각의 ‘패턴’을 만든다. 하지만 그 패턴은 고립된 채 순환하고 있다. 반면 2부에서 김근이 보여준 감각 구조는 그와 다른 흐름을 구성한다. 김근은 감정을 선형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의 감각을 구성한다. 그는 실재하지 않은 과거로부터 감정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감각은 말해지지 않은 말, 망각된 장면, 잊힌 풍경 속에서 돌연 작동한다. 그리하여 류근의 감각은 되풀이되는 내부의 리듬이고, 김근의 감각은 되살아나는 외부의 흔적이다. 체질이 되기까지 감각은 응축되고, 되살아나기 위해 감각은 분산된다. 두 감각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의 회로를 완성한다. 말해지지 않은 말, 기억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응시된 감각이 하나의 회로로 엮이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감각은 더 이상 한 사람의 내부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시로, 다른 몸으로, 다른 말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회로 속에서 감정은 해석되지 않고 다만 응시된다. 이제 우리는 그 응시의 방식, 감각의 회로 속에서 김근의 시 「서러우니, 아프니,」(『에게서 에게로』)를 다시 읽어본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끝내 문장이 되지 못하고 중얼거림으로 남아 있는 시, 그 바깥에서만 감정이 반응하는 시. 감정의 진술이 실패한 자리에 감각이 어떻게 잔류하는지, 그 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자.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가 교접하는 꼴을 지켜볼 참이었는데 서러우니, 는 어느 문장의 교접에서 빠져나와 여기 있나 아프니, 는 (……)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 바깥은 아리고 아리더라는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이게만 서러우니, 아프니, 바깥도 나도 당신도 완성되지는 결코 않고, —김근, 「서러우니, 아프니,」 부분 이 시는 문장이 완성되기 직전, 혹은 완성되지 못한 채 파열되는 리듬 속에서 감정의 부재를 감각의 형태로 전환한다. “서러우니,” “아프니,”라는 말들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정이 언어에 들어서지 못한 채 멈춰 선 쉼표의 흔적이다.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하고, 문장은 감정을 담지 못한다. 그때 남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감각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비문법적인 어형, 중얼거림, 반복과 흔들림 속에 잔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감각들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문장 바깥에서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감정의 발화 실패가 곧 감각의 작동 개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고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다. 감각은 문장 밖에서 흐르고, 그 흐름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패턴이 된다. 이 패턴은 류근의 시가 말한 ‘체질’처럼 하나의 리듬 구조로 굳어지기 직전의 상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떻게 감각의 회로를 만들고 있는가. 류근이 고정된 감각의 구조(체질)를 말한다면, 김근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흘러다니다가 다시 몸 안에서, 말 바깥에서 감각으로 발화되는 장면을 기록한다. 하나는 응고된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지점—말하자면, 감정이 말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 깊이 감각되고, 감각이 언어 바깥에서 반복되며 하나의 회로를 만든다는 이 감각의 순환 구조—가 이 글이 추적하려는 “감각의 회로”다. 김근의 시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는 감각이 단일 주체 안에 고립되지 않고 ‘너에게서 또 다른 너에게로’ 흐르는 관계적 회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어떤 ‘나’의 내면에서 발화된 것이 아니라, 이미 ‘너’를 통과해 온 감각이며, 또다시 ‘다른 너’를 향해 옮아가는 언어적 궤적이다. 이 감각은 멈춰 있지 않고 전이되며, 감정의 기원이 아니라 감각의 운동성으로 시를 구성한다. 너는 언제 눈이 멀까 네 입술의 거스러미들이 일어난다 네 말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고 나는 끝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로 이곳은 범람한다 감정은 여기서도 ‘말해지지 않음’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서러우니, 아프니,」에서의 말해지지 않음이 문장 바깥의 정지라면, 「에게서 에게로」의 말해지지 않음은 감각의 흐름이다. 그것은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이 범람하는 풍경이고, 이 범람은 감정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감각의 홍수다. 고백이 실패했기 때문에 감정은 여전히 감각으로 유예되고, 그 감각은 관계 속에서 옮아간다.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감각의 패턴이자 언어적 관계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류근의 감각이 몸에 각인되어 고체화된 것이었다면, 김근의 감각은 타인의 말에 의해 범람하고 이동하며, ‘자리를 잡지 못한 말’로서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의 회로는 감정의 전유가 아니라 감정의 유실을 전제로 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 감각은 계속 이어진다. 감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를 통과한 감각은 언제나 ‘너’를 향해 열려 있고, 그 감각이 언어를 통해 완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 감각을 감지하고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관계 속에서 돌아오고, 흘러가고, 감염된다. 그것이 감각의 회로이고, 시가 끝내 감정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결국 이 글은 감정을 진술하지 않기 위해 감각을 오래 붙잡았고, 감각을 붙잡기 위해 시에 더 오래 머물렀다. 우리가 읽어온 시들은 감정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이 감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조용히 보여주었다. 상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남긴 리듬을 반복했고, 말하지 않은 감정이 어떻게 감각으로 번역되는지를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그 반복과 전이의 흐름 속에서 감각은 체질이 되었고, 체질은 끝내 관계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감각의 회로는 단일한 자아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늘 ‘너’의 존재를 전제하고, ‘또 다른 너’에게로 건너가는 경로다. 시는 그 경로를 하나의 언어로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말들,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 도달하지 못한 언어의 잔해들 속에서 더 정확하게 살아 있다. 비평이 그 잔해 앞에 머문다면, 그것은 해설이 아니라 응시이고, 설명이 아니라 기다림이며,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각의 지속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을 추적하려 했다.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설명이 아니라 구성된 흔적을, 하나의 완결이 아니라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반복을. 그리고 그 반복의 한 가운데에서 시는 말해지지 않았던 사랑을 다시 감각하게 한다. 감각은 다시 살아 있는 문장이 된다. 4. 감각 이후의, 시대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마저 예의주시한다. 상처는 쉽게 고백되지만, 그 고백은 종종 감각되기 전에 소비된다. 이미지로, 이모지로, 몇 초 만에 반응하는 감정의 압축된 형식 속에서 슬픔은 감정 이전에 태그가 되고, 상처는 경험 이전에 서사화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간 속에서, 말함은 곧 존재의 증명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슬픔은 말한 뒤에도 남고, 상처는 고백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자주 말하는 일만이 아니라, 더 오래 감각하는 일이다. 말함은 윤리의 출발이지만, 감각은 그 윤리가 지켜지는 방식이다. 말함이 고통의 첫 번째 증명이라면, 감각함은 그 증명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두 번째 언어다. 이 글은 그 두 번째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묻는다. 하여, 묻게 된다. 감각한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해지지 않은 것의 윤리를 오래 응시했다면 이제 그 감각의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로이 감당해야 하는가. 이 글은 끝내 말해지지 않은 어떤 문장 옆에 머물렀고, 그 여백의 떨림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말하라고 한다. SNS에서, 인터뷰에서, 기록에서, 고백의 형식에서—슬픔은 표현되기를 요구받고, 상처는 빠르게 이해되기를 강요받는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대,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자주 망각된다. 우리는 안다. 상처는 말해져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상처는 더 깊은 침묵으로만 남았고, 그 침묵은 누군가가 말하기 전까지 결코 메워지지 않았다. 또한 안다. 말은 때로 너무 빨리 잊힌다.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감각은 증발하고, 감정은 마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무거운 감각이다. 그 감각이 말을 떠받치고, 그 말이 끝내 다시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윤리의 회로. 이 글은 그 회로를 만들기 위한 다만 아주 작고 느린 실험이었다. *부록 시가 감정의 언어라면, 그 감정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동일한 슬픔도 같은 말로는 다시 불릴 수 없고, 같은 고통도 똑같은 문법으로 말해질 수 없다. 시는 종종 세계보다 한 박자 느리게 도착하지만 때때로 세계보다 먼저 아프다. 세계가 아직 체감하지 못한 감정을 시는 미리 감각하고 그 감각의 구조를 가장 먼저 언어화한다. 그래서 시는 지나간 감정을 말하면서도, 다가올 슬픔을 증언하는 언어다. 이 평론이 주석한 류근과 김근은 그 감정의 시간성에서 서로 다른 리듬으로 같은 고통을 구성해낸 시인들이다. 류근은 감정을 반복과 리듬의 구조로 정제했고, 김근은 실패와 결여의 구조 속에서 감각을 잔류하게 만들었다. 이 부록은, 그 두 언어의 병렬을 통해 우리가 어떤 감정을 어떻게 말해왔고, 어떻게 끝내 말하지 못했는지를 복기하려는 시도다. 2010년대 전반의 한국 시는 고백의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발화하기보다는 정제된 이미지와 절제된 문장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는 일상의 슬픔을 산문시와 서정의 경계에서 절제된 말투로 조직했고, 하재연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2012)은 침묵의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며, 감정의 과잉 대신 감각의 압축을 선택했다.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는 원래 1995년 출간되었지만, 2014년 복간되며 재조명된 이후, 감정의 리듬을 신화적 상상력과 병치해 해체한 언어로 다시 독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감정을 고백하거나 날것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응축하고 조율하려는 윤리를 견지했다. 감정은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 속에 미루어지고, 독자는 감정의 진폭이 아니라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감정의 미학이자, 서정의 윤리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시의 문법은 균열을 맞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적 감정은 언어에 대한 회의와 감정의 발화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고, 시는 감정의 고백보다 감정의 불능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안미옥의 『온』(2017)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가장 조용한 언어를 실험하며, 감정을 직접 호명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 자체를 오래 응시한다. 이소호의 『캣콜링』(2018)은 페미니즘적 시선을 통해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각하게 하는 시학을 구축하며, 사회 구조 속 침묵의 감정을 가장 급진적인 형식으로 표출한다. 언어는 더 이상 감정을 담는 그릇이 아니며, 감정은 더 이상 말로 재현되지 않는다. 시는 감정의 실패를 감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가 모두 파열로만 향한 것은 아니다. 김행숙, 이문재, 김복희 같은 시인들은 여전히 정제된 말 속에서 감정을 환기하며, 느린 서정의 리듬으로 시대를 반사했다. 심보선, 장이지, 함기석 등은 형식을 실험하면서도 감정을 비틀거나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서정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결국 이 시기의 시는 파열과 구조화, 고백과 침묵, 직접화와 간접화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다층적 국면이었다. 202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시는 감정의 언어를 더욱 신중히 의심하게 된다. 감정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기보다, 애초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감정은 문장 바깥에서 흔들리고, 잔류하며, 실패한다.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는 그 전환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감정은 이제 고백되지 않고, 시는 감정의 실패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쉼표, 중단된 구절, 어긋난 문법은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 방식을 감각하게 한다. 감정은 주체 내부에서 고립되지 않고,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한다. 감정은 감염되고, 옮겨지고, 끝내 다시 말해지지 않는 자리에서만 증명된다. 이 시집은 감정이 말해지지 않음으로써만 말해질 수 있다는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감각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이 2010년의 류근과 2024년의 김근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어떤 대표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둘은 각자의 시기를 압도한 시인은 아니지만 각자의 시기가 요청한 감정의 구조에 가장 날카롭게 반응한 언어들이었다. 류근은 감정을 리듬과 반복의 구조 속에서 조율하며 상처를 체질화했고, 김근은 감정의 결여와 실패를 끝내 감각으로 환원하며 언어의 파편 속에서 응시했다. 하나는 감정의 정제이고, 하나는 감정의 잔류다. 이 둘이 나란히 놓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병렬 속에서 지금-여기의 감정 구조가 어떤 언어를 필요로 하는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 이 글은 바로 그 물음의 옆에 붙는 문장이다. 시를 해설하지 않고, 감정을 분석하지 않으며,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각의 흔들림에 오래 머문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응시다. 주석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언어가 어떻게 시대의 문장을 바꿔왔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하나의 문장.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도,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에도, 여전히 문장 바깥에 남아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이 결국 언어를 다시 부른다는 것. 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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