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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파란 | 2024년 겨울호(제35호)

1961년 5월 16일: ‘樂夫天命’을 위한 ‘공-실존’의 몸부림 ― 도연명으로 김수영 읽기

이찬 문학평론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저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09),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2010), 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2011), 한국 현대시론의 담론과 계보학(2011)을 출간했고, 문학평론집 헤르메스의 문장들(2012), 시/몸의 향연(2019), 감응의 빛살(2021), 사건들의 예지(2022), 문화평론집 신성한 잉여(2022)를 썼다.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시와 영화와 비평이 더불어 감응할 수 있는 융합과 통섭의 공간을 모색하고 있으며,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이미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다.

1

 

  김수영을 대상으로 삼았던 몇몇 문헌들에서 한결같이 강조해왔던 것처럼, 그의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접맥된 상호 유비(類比)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만 한다. 그것의 예술적 특이점과 시인의 문학사적 위상이 수미일관한 차원에서 낱낱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양자의 촘촘한 대비를 통해서만 그가 일찌감치 성취하고 예견했던 한국시의 이상한 역설”, 곧 우리 모더니티를 여전히 에두르고 있는 뒤떨어진 현실과 그 추악한 진실의 이면들이 시인의 긍지로 되살아나는 기묘한 장면들이 고스란히목도(目睹)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시와 예술의 존재론적 불꽃으로 깃들일 수밖에 없을 극단적 아이러니를 꿰뚫을 수 있는 의미론적 지평 역시 이와 같은 테두리에서 생성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저토록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이나 역사적 전변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고전(古典)의 지위와 전통의 별자리를 구성하는 것들을 곰곰이 헤아려보라. 그것의 한가운데 여지없이 깃드는 이상적 질서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아니, 청빈한 생의 표상이자 유가적 선비의 심미적 도상(圖像)으로 자리매김해 온 도연명의 생애와 작품들을 다시 뒤적여보라. 나아가 신귀거래라는 제목으로 김수영이 도연명을 수용하는 동시에 변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 혹독한 실존의 주름들과 예술적 영감의 여울들을 속속들이 헤집어보라. 어쩌면 이 자리에서, 우리의 문학과 예술이 세계 최고의 무대들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것으로 거듭 공준을 받게 된, 오래된 미래의 예지적 통찰과 창조적 잠재력을 되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2의 춘추전국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극심한 혼란기를 살았던 도연명의 삶과 문학을 수용하여 신귀거래연작을 지었다. 이 수용의 맥락은 비단 귀거래()라는 제목의 차원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포에지(poesie)’로 대변되는 시적 영혼의 정수이자 창조적 영감의 불꽃으로 간직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것이 엿보인다. 그것에는 우리 현대사에 주름진 온갖 비극적 사건들과 처절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생사(生死)를 넘나들며 마주칠 수밖에 없었을 지극한 공포심과 불안의식, 그리고 ‘516’으로 집약되는 정치적 격변의 시대 상황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의용군으로 강제 편입되는 가혹한 운명에 처하면서, “자유를 찾아”(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목숨을 건 탈출을 두 차례나 감행하는 천신만고(千辛萬苦)의 끝에서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겨우 수용될 수 있었던 김수영의 파란만장한 생의 궤적을 뒤쫓아보라. 그리하여, ‘516’ 직후 소설가 김이석(金易錫)의 집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절박한 은둔의 자취를 당신 곁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처럼 매만질 수 있는 자리로 들어가 보라. ‘516’이 일어난 지 일주일 뒤쯤 머리를 박박 깎은 채로 나타난’(최하림) 그의 실존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을, 지극한 공포심과 불안의식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을 그 참담한 마음결이 지금-여기를 가로지르는 살갗의 육감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은 이미 신귀거래연작을 여는 첫 시 여편네의 방에 와서- 新歸去來 1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에 얼룩진 불안의식이 어떤 질감과 음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무엇보다 생생한 살(la chair)의 깊이와 공-실존(co-existence)의 메아리 속에서 어루만지고 있을 터이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김수영의 지극한 퇴행 심리란 자연스러운 마음결의 움직임이자 실존의 귀결점일 수밖에 없음을 이미 터득하고 있을 것이기에.


2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이렇듯 소년처럼 되었다

흥분해도 소년

계산해도 소년

애무해도 소년

어린놈 너야

네가 성을 내지 않게 해주마

네가 무어라 보채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성을 내지 않는 소년

바다의 물결 작년의 나무의 체취

그래 우리 이 성하(盛夏)

온갖 나무의 추억과

물의 체취라도

다해서

어린놈 너야

죽음이 오더라도

이제 성을 내지 않는 법을 배워주마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나는 점점 어린애

태양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죽음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언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애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사유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간단(間斷)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의 어린애

베개의 어린애

고민의 어린애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너를 더 사랑하고

오히려 너를 더 사랑하고

너는 내 눈을 알고

어린 놈도 내 눈을 안다

 

- 여편네의 방에 와서- 신귀거래 1전문

 

  인용 시에서 수시로 반복되는 소년”(5), “어린놈”(3), “어린애”(12) 같은 형상들을 보라. 표제어로 차용된 귀거래(歸去來)”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지극한 자아분열과 정신적 거세에 가까운 주체성의 망실(亡失) 상태를 직감할 수 있으리라. 특히 1연과 2연에서 거듭 나타나는 어린놈 너야‘516’ 직후 김수영의 존재 전체를 후려갈겼을지극한 불안감을 묵시적으로 역설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당시의 정국(政局)에서, 자신의 운명전체를 타인들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을 시인의 절박했던 실존 상황을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실제 광경처럼 육박해 오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이석의 집이라면, 그리고 김이석의 부인인 박순녀라면 몇날 며칠이고 그를 숨겨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단되어서였다.’(최하림)라는 역사전기적 탐구 기록에서 엿보이는 김수영의 실존 상황을 다시 면밀하게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 이를 통해서만, ‘516’이 강제한 그의 은둔과 귀가의 행적이 어떤 실존적 계기와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한 것이며, 196163일로 마무리된 신귀거래연작의 서막 여편네의 방에 와서를 관통하는 퇴행 심리를 살뜰하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자기 주체성의 중심마저 무너진 김수영의 위태로운 실존 상황과 극단적인 의존심을 바로 우리 자신의 그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생생한 감응(感應)의 순간, -실존의 무대가 번쩍하며 도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들은 시인이 新歸去來이후에도 상당한 시간을 공포와 불안으로 시달렸을뿐더러, 그의 실존의 중심축이 무너지면서 지극한 퇴행 심리로 허우적거렸음을 묵시적으로 웅변한다. 나아가 시인 자신을 어린애로 호명하도록 강제했던 것이 결국은 극도의 자기분열에 다다른 실존적 위기 상황이었음을 직감케 한다. 따라서 신귀거래연작의 두 번째 시 격문(檄文)의 앞머리로 등장하는 마지막의 몸부림도는 그 처절한 상황에서 오는 시어일 수밖에 없으리라. 격문전체를 가로지르는 정화와 재생의 이미지 역시, 그의 몸부림이 간절하게 희구했을 평정심(平定心)을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김수영은 나날의 삶에서 내면의 화락(和樂) 상태를 되찾고 진짜 시인의 삶으로 귀착할 수 있기를 소망했을뿐더러, 다양한 시어들의 집요한 반복을 통해 이를 암묵적으로 개진하려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몸부림도/마지막의 양복도/마지막의 신경질도/마지막의 다방도/기나긴 골목길의 순례도/<어깨>/허세도/방대한/방대한/방대한/모조품과/막대한/막대한/막대한/막대한/모방도/아아 그리고 저 도봉산보다도/더 큰 증오도/굴욕도/계집애 종아리에만/눈이 가던 치기(稚氣)/그밖의 무수한 잡동사니 잡념까지도/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농부의 몸차림으로 갈아입고/석경을 보니/땅이 편편하고/집이 편편하고/하늘이 편편하고/물이 편편하고/앉아도 편편하고/서도 편편하고/누워도 편편하고/도회와 시골이 편편하고/시골과 도회가 편편하고/신문이 편편하고/시원하고/버스가 편편하고/시원하고/하수도가 편편하고/시원하고/펌프의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온다고/어머니가 감탄하니 과연 시원하고/무엇보다도/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인제 정말/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이건 진짜 시원하고/이 시원함은 진짜이고/자유다

 

- 김수영, 격문(檄文)- 신귀거래 2전문

 

  ‘516’ 직후 김수영의 실존적 맥락을 두루 살피면, 격문에 나타난 다양한 반복 어구들은 그 소릿값의 도드라진 반향에 힘입어 주술적인 후렴구와 같은 정화와 치유의 뉘앙스를 내뿜고 있음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격문의 다양한 반복 어구들이 불러일으키는 주술적인 리듬감이 한국전쟁의 끔찍한 체험이 남긴 정신적 트라우마와 무수한 억압 기제들을 정화하고 해소하려는, 생존을 건 몸부림자체였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시인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정화의 의식(儀式)이자 주술적인 힘을 행사하는 말소리로 들어박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주문(呪文)처럼, 발화자의 꿈과 소망이 강렬하게 투사(投射)된 후렴 어구로 기능하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주술성의 리듬은 생존 자체를 위협당했던 한국전쟁 시기의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필사적인 몸부림”, 그 치유의 과정이 격문의 창작 계기이자 그 내밀한 마음결의 속살임을 말없이 드러낸다. 또한 ‘516’ 직후 김수영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복잡미묘한 실존 상황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격문(檄文)”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었던 주요인일 것이다. 이에 따라 격문이란 말이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흥분을 일으키거나 집단적 참여를 고무하기 위하여 발송하는 글발이라는 의미로 활용되어 온 동아시아 전통의 역사적 맥락을 좀 더 섬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김수영은 檄文이라는 한자어에 주름진 감각의 역사를 환기하면서, ‘516’ 직후 자기 실존의 급격한 전변의 상황과 내면적 추이를 공공(公共)의 차원에서 선언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격문(檄文)- 신귀거래 2에서 우리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것은 마지막의”(4), “방대한”(3), “막대한”(4), “깨끗이 버리고”(7), “편편하고”(12), “시원하고(하게/하다고/)”(8) 같은 동일 어구들의 집요한 반복이다. 또한 어간(語幹)과는 관계없이, 이 작품의 음성적 미감과 뉘앙스, 그리고 정서적 분위기 전체를 자유다라는 마지막 행의 장쾌한 선언으로 수렴될 수 있도록 강제하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간파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의 무수한 시어들 가운데서도, 이미 드러나 있으면서도 쉽사리 포착되지는 않는 “-“-같은 어미(語尾)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라. 특히 이들의 집요한 반복이 불러들이는 의미론적 발산과 정서적 효과를 집중적으로 응시해보라. 나아가 자유다라는 해방의 감각에 도달하는 그 과정의 움직임 전체를 좀 더 면밀하게 더듬어보라.

  물론 저 어미(語尾)들은 어떤 대단한 의미 지향성을 품은 것도 아니며, 거창한 사유의 잠재력을 간직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의 빈번한 되풀이에 담긴 연속적 진행과 점층적 확장의 뉘앙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의 몸체를 이루는 어간(語幹)의 지속적 반복과 함께 보이지 않는 공명의 겹주름을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시의 정서적 분위기와 의미론적 뉘앙스의 지속적인 상승 작용을 견인한다. 나아가 이 시 전체를 타고 흐르는 감응의 빛살은 천지만물(天地萬物)로 명명되는 세계의 모든 것들과 편편하고” “시원하게어우러질 수 있는 화락(和樂)의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러한 측면은 “-“-라는 어미(語尾)가 김수영이 상상력의 차원에서나마 겨우겨우 품게 된 평정심(平定心), 곧 맨 끄트머리에 아로새겨진 자유다로 나아가기 위한 비가시적 촉매이자 해방의 도화선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말없이 암시한다. 이러한 평정심은 귀거래()에서 형상화된 낙부천명(樂夫天命)”의 이미지와 상호 유비의 닮은꼴을 구성할뿐더러, 도연명의 삶과 문학을 통해 시인 자신의 실존적 위기를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그 한계를 돌파하려 했던 그의 고단하고 혹독한 몸부림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3

 

歸去來兮, 돌아왔도다!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旣自以心爲形役, 이미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니

奚惆悵而獨悲. 어찌 한탄하고 홀로 슬프지 않으리.

悟已往之不諫, 지난날이야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知來者之可追. 앞날은 좇을 수 있음을 안다네

實迷塗其未遠, 실로 길을 잃었어도 멀리 가지 않았으니

覺今是而昨非.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다오.

舟遙遙以輕,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바람에 날리고

風飄飄而吹衣. 바람은 나부껴 옷에 불어오네.

問征夫以前路, 나그네에게 앞길 물어 보고

恨晨光之熹微. 새벽빛 희미함을 한탄한다네.

乃瞻衡宇, 이에 집 대문과 처마 보이자

載欣載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네.

僮僕歡迎, 머슴은 기쁘게 맞이하고

稚子候門. 어린아이들 대문에서 기다리는구나.

三徑就荒, 제 오솔길에 잡초가 무성해도

松菊猶存. 소나무 국화는 여전하기도 하여라.

携幼入室, 어린 놈 손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술은 항아리에 가득.

引壺觴以自酌, 술단지 끌어당겨 자작하고

眄庭柯以怡顔.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남창에 몸을 기대고 의기양양해 하니

審容膝之易安.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집 그 얼마나 편안한가.

園日涉以成趣, 정원을 날마다 걸으며 운취를 이루니

門雖設而常關. 문이야 비록 달렸어도 늘 닫혀 있다네.

策扶老以流憩, 지팡이 짚고 가다 발길 멎는 대로 쉬고

時矯首而遐觀. 때때로 머리 치켜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

影翳翳以將入, 해는 어둑어둑 장차 들어가려는데

撫孤松而盤桓.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서성인다네.

歸去來兮, 돌아왔도다!

請息交以絶遊. 사귐을 쉬고 교유도 끊으리.

世與我而相違, 세상과 나 서로 어긋나니

復駕言兮焉求.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

悅親戚之情話, 친척들과의 정다운 대화 기쁘고

樂琴書以消憂.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없애네.

農人告余以春及,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이르면

將有事於西疇. 장차 서쪽 밭두둑에서 일을 하리.

或命巾車, 때로 휘장 친 수레를 타고

或棹孤舟. 때로 외로운 배를 노 저어,

旣窈窕以尋壑, 깊숙한 산골을 찾아들고

亦崎嶇而經丘. 험한 산길과 언덕을 지나리.

木欣欣以向榮, 나무는 즐거이 꽃 피우려 하고

泉涓涓而始流. 샘물은 졸졸 흘러 나가리.

善萬物之得時,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내 삶이 장차 끝날 것에 느꺼워하네.

已矣乎, 그만 생각할지라!

寓形宇內復幾時. 몸을 우주에 부칠 때가 다시 얼마나 되려는가를.

曷不委心任去留, 어찌 마음에 맡겨 가고 머뭄을 놓아두지 않는가? 胡爲乎遑遑欲何之. 어이하여 분주한 모양으로 어딜 가려 하는가?

富貴非吾願, 부귀는 나의 소원 아니며

帝鄕不可期. 신선의 땅을 기약할 수 없도다.

懷良辰以孤往, 좋은 날씨 바라며 홀로 나아가

或植杖而耘. 지팡이 세워 둔 채 김을 매리라.

登東皐以舒嘯, 봄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

臨淸流而賦詩. 맑은 물결 임하여 시도 지으리.

聊乘化以歸盡, 애오라지 조화를 따라 죽어 돌아가리니

樂夫天命復奚疑. 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

- 歸去來兮辭전문도연명 전집, 이성호 역, 문자향, 2001.

 

  도연명은 365년 동진(東晋)의 심양(潯陽) 시상(柴桑)에서 출생했으며, 56세 되던 4206송왕 유유(劉裕)가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송()으로’(이성호, 2001) 선포하면서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체험해야만 했던 인물이다. 이에 따라 역사적 대격변기가 파생시키는 지극한 모순과 생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우지사(不遇之士)의 전형으로 호명되어왔다고 하겠다. 이 맥락을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수많은 군벌의 득세와 몰락, 그리고 끊임없는 모반과 찬탈에 따른 빈번한 왕조 교체와 역사적 대혼란기가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문인으로서의 비범한 기개와 고결한 자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내밀한 실존의 계기들을 포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귀거래()서문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余家貧, 耕植不足以自給. 幼稚盈室, 瓶無儲粟, 生生所資, 未見其術. 親故多勸餘為長吏, 脫然有懷, 求之靡途. 會有四方之事, 諸侯以惠愛為德, 家叔以餘貧苦, 遂見用於小邑. 于時風波未靜心憚遠役. 彭澤去家百里, 公田之利, 足以為酒, 故便求之, 及少日, 倦然有歸歟之情, 何則?質性自然, 非矯厲所得. 饑凍雖切, 違己交病, 嘗從人事, 皆口腹自役. 于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 猶望一稔, 當斂裳宵逝. 尋程氏妹喪于武昌, 情在駿奔, 自免去職. 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 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우리 집은 가난해 밭을 갈아도 자급할 수가 없다. 어린애들은 집에 가득하나 항아리에는 저장해 둔 곡식이 없어 생육하고 생활할 밑천을 마련한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친구들은 내게 관리가 되라고 많이들 권하니 마음을 열어 뜻을 두기도 했지만 구할 방도가 없었다. 마침 사방지사(四方之事)가 있어 제후들이 은혜와 사랑을 덕으로 삼으니 숙부는 내가 가난해 고생한다며 드디어는 작은 고을에 기용되게 하였다. 당시 전란이 끝나지 않는데다 멀리서 벼슬살이하기를 마음에 꺼렸으나 팽택(彭澤)은 집에서 백 리 거리이고 공전(公田)의 이로움이 술을 담글 만했으므로 문득 그 자리를 구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다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은 뜻이 생기고 말았다. 왜 그러했던가? 성질이 진솔함을 좋아하니 억지로 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가 비록 절박하지만 자기를 어김은 병이 되고 만다. 일찍이 인사를 따른 것은 다 구복(口腹)의 부림을 당한 것이다. 이에 슬프고 강개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의 뜻에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오히려 일 년이나 있기를 바랐으니, 마땅히 의복을 싸 밤중에라도 떠나야만 했다. 머잖아 정씨에게 시집간 동생이 무창(武昌)에서 상을 당하니 급히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사면하고 관직을 떠났다. 중추부터 입동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것이 80여일이다. 일에 인연하여 마음을 따른바, 글의 제목을 귀거래혜라 한다. 을사년 11.)”(歸去來兮辭 序도연명 전집, 2001)


  「귀거래()서문에는 중추부터 입동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것이 80 여일이다. 일로 인하여 마음을 따른바, 글의 제목을 귀거래혜라 한다. 을사년 11.(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 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라는 대목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이 작품의 제목과 집필 시기, 도연명의 궁핍한 생활상과 진솔한 성정, 그리고 역사적 대혼란의 시대 상황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갈 수 없었던 그의 성정과 기질을 명료하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굶주림과 추위가 비록 절박하지만 자기를 어김은 병이 되고 만다. 일찍이 인사를 따른 것은 다 구복(口腹)의 부림을 당한 것이다. 이에 슬프고 강개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의 뜻에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오히려 일 년이나 있기를 바랐으니, 마땅히 의복을 싸 밤중에라도 떠나야만 했다.(質性自然, 非矯厲所得. 飢凍雖切, 違己交病, 嘗從人事, 皆口腹自役. 于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 猶望一稔, 當斂裳宵逝)” 같은 구절들을 보라. 바로 이 자리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도법(道法)처럼, 일종의 생체 리듬처럼 몸에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그의 운명선 전체를 실감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은 도연명의 천품(天稟)으로서의 기질을 염두에 두면, 귀거래()본문에 나타난 이미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니(旣自以心爲形役)”라는 대목은 일찍이 인사를 따른 것은 다 구복(口腹)의 부림을 당한 것이다.”(嘗從人事, 皆口腹自役)라는 서문의 한 구절에서 온 것임을 이내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시인의 실존적 정황이 담긴 객관적 상관물로 기능하는 외로운 소나무”(孤松) “외로운 배”(孤舟) 등의 심상을 보라. 이들 역시 서문에 기록된 이에 슬프고 강개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의 뜻에 부끄러웠다.”(于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라는 내밀한 심사(心事)에서 발원하는 것임을 선명한 느낌으로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문이야 비록 달렸어도 늘 닫혀 있다네”(門雖設而常關,) “사귐을 쉬고 교유도 끊으리. 세상과 나 서로 어긋나니,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같은 본문의 구절들 역시, 그것의 서문에서 명시화된 도연명의 내밀한 심정이 문학적 이미지를 걸쳐 입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귀거래()본문에도 세상의 탐욕으로 얼룩진 부귀영화의 운명선을 결코 추종할 수 없는 불우지사(不遇之士)의 성정과 심사가 명징한 이미지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의 서문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생의 소박한 기쁨과 자연스러운 생활의 즐거움이 허허로운 리듬감에 실려 배어 나오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봄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맑은 물결 임하여 시도 지으리./애오라지 조화를 따라 죽어 돌아가리니/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같은 형상들을 보라. 이들은 한결같이 귀거래()서문에서 감응의 동심원을 이루며 울려 퍼지는 가난(余家貧)” “마음에 꺼림(心憚遠役)” “성질이 진솔함”(質性自然) “절박”(饑凍雖切) “슬프고 강개한 마음”(悵然慷慨) “부끄러움”(深愧平生之志) 등등의 암담하고 부정적인 느낌을 훌쩍 넘어서서, 소탈하면서도 자유로운 마음 상태를 노래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심층적인 사상적 차원에서 보면, 천분으로서의 태생적 기질과 고단한 생의 행로를 기꺼이 즐기려는 자연명정론(自然命定論)‘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대격변기의 불우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고고한 인품과 특출한 시재(詩才)로써 인생의 애환을 담박하면서도 깊이 있게 표현’(이성호)했던 도연명의 문학적 면모는 우리 문인과 지식인들에게 부단한 감응 현상을 일으키면서 장구한 시간 동안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면모들 역시, 앞서 살핀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김수영 역시 ‘516’에 따른 은둔과 귀가 이후 연달아 집필했던 9편의 시편들을 신귀거래라는 부제를 달아 하나의 매듭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시습과 김창숙을 비롯한 우리의 무수한 선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수영 역시 고려 중기 이인로(李仁老) 이후 정립된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라는 전통의 압력을 의식하면서 신거귀래연작을 창작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격문의 끝자락에 나타난 자유다라는 평정심의 이미지야말로, 김수영과 도연명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상호 유비 관계의 근본 바탕일뿐더러, “신귀거래연작의 내밀한 창작 계기이자 실존적 배경을 구성하는 핵심 인자를 이룬다고 하겠다. 귀거래()의 작은 무늬들과 이미지 전체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정서적 집약체 역시, 맨 마지막 구절로 들어박힌 樂夫天命復奚疑(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그 무엇을 의심하리)”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낙부천명(樂夫天命)”이란 표현은 도연명 자신의 천분(天分)과 나날의 고단한 생활을 기꺼이 즐기려는 자연명정론(自然命定論)’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달리 말해, 그것에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로 표상되는 비범한 절제력과 더불어, 부귀영화로부터 초연한 도연명의 태생적인 기질과 숙명 사상이라는 근본적인 지향성이 주름져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유다라는 시구는 김수영이 도연명이 읊조린 낙부천명”(樂夫天命)에 육박하는, 내면적 화평 상태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구체적 시공간의 엄청난 격차를 뛰어넘어, 두 인물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며(善萬物之得時)”로 표상되는 세상의 화평 상태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만나지 못한 불우지사(不遇之士)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천지만물(天地萬物)을 기꺼워하고 즐기려는 낙천(樂天)의 근본적 태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도연명과 김수영은 그들이 살았던 당대의 모순 상황이나 그 시대적 질곡조차도 사랑하고 즐기려는 낙부천명의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를 주변의 사물들과 함께 이루는 만물 감응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상호 유비(類比)의 그물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귀거래()의 마지막 행을 장식하는 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樂夫天命復奚疑)”라는 구절과 격문- 신귀거래 2끝자락의 자유다라는 표현은 사실상 똑같은 뉘앙스와 의미의 바탕을 품는다. 세상만사가 어떤 부조리와 우여곡절에 휘둘린다고 하더라도, 이를 천명(天命)으로 여기며 살겠노라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기꺼움과 자부심이 양자의 심부를 휘감는 생의 불꽃으로 깃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격문의 마무리 대목에서 나타나는 무엇보다도/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인제 정말/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이건 진짜 시원하고라는 구절들을 유심히 보라. 이들은 김수영이 도연명의 숙명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진짜 시인으로 자신을 호명할 수 있는 첨예한 자의식과 더불어 역사적 소명 의식을 그 뒷면에 숨겨두고 있었다는 또 다른 추론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양자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롭게 포착되고 호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도연명의 귀거래()와 김수영의 격문사이에 가로놓인 차이는 김수영이 낙부천명(樂夫天命)” 상태에 전적으로 도달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염원하거나 추구하지 않고서는 ‘516’ 직후의 정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좀 더 내밀한 실존의 맥락을 되짚어 보도록 강제한다. 격문진짜 시인이라는 형상에 깃든 김수영의 자의식과 소명 의식이란 신귀거래상황에서 자신이 맞닥뜨린 초조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김수영은 도연명의 귀거래()에서 나타나는 은둔과 탈세간(脫世間)의 상태에 그대로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출사표(出師表)를 그 언젠간 결국 다시 내놓게 되리란 예감을 그 뒷면 깊숙이 감춰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격문의 끝에서 나타나는 자유다라는 평정심의 공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후 집필된 신귀거래연작에서 다시 솟아오르는 불안의 심상을 꼼꼼히 되살펴야만 한다. 특히 누이그의 진혼가를 시적 오브제의 중핵으로 삼아 내밀한 억압 기제들을 남김없이 드러내면서, 이를 정화하려고 시도한 시편들이 신귀거래연작의 후속편으로 계속 나타난다는 사실에 좀 더 섬세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시편들로는 伏中- 신귀거래 6, 누이야 장하고나!- 신귀거래 7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며, 술과 어린 고양이- 신귀거래 4에서는 시인의 불안감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뒷면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술과 어린 고양이는 미묘한 양가감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말해 온 평정심과 불안감의 양극단 사이에서 시인의 마음이 재귀적 길항(拮抗) 운동을 거듭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시인의 실존 상황을 좀 더 내밀한 차원까지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는 김수영이 ‘516’이 강제한 생존의 위기감과 불안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과 세계를 풍자하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비판과 연민의 마음결을 동시에 품을 수 있을 만큼 내면적 여유를 회복했음을 말없이 일러준다. 이는 또한, “신귀거래아홉 번째 연작이자 마지막 시편인 이놈이 무엇이지?를 완성한 1961825일 즈음에 이르러서야, 그가 현실 풍자와 사회 비판으로 집약되는 진짜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었음을 묵시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신귀거래연작은 ‘516’ 직후 김수영을 엄습해왔을 실존적 불안감과 그가 희구하는 나날의 평정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쳤음을 암시하는 시편들일 것이 자명하다. 나아가 시인의 가장 내밀한 실존의 어둠과 그림자, 그리고 그 무수한 고통의 얼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간직하고 있는 작품들로 읽힌다.


4

 

똘배가 개울가에 자라는/숲속에선/누이의 방도 장마가 가시면 익어가는가/허나/인생의 장미여/추녀 끝 물방울 소리가/아직도 메아리를 가지고 오지 못하는/8월의 밤에/너의 방은 너무 정돈되어 있더라/이런 밤에/나는 서울의 얼치기 양관(洋館) 속에서/골치를 앓는 여편네의 댓가지 백 속에/조약돌이 들어 있는/공간의 우연에 놀란다/누이야/너의 방은 언제나/너무나 정돈되어 있다/입을 다문 채/흰 실에 매어달려 있는 여주알의 곰보/창문 앞에/안치해 놓은/당호박/평면을 사랑하는/코스모스/역시 평면을 사랑하는/킴 노박의 사진과/국내 소설책들....../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누이야/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 김수영, 누이의 방- 신귀거래 8전문

 

  「누이야 장하고나!에서 누이숭배할대상으로 형상화했던 김수영은 누이의 방에서는 1950-6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 여배우 킴 노박의 사진으로 표상되는 누이의 속물적인 모습을 부정적인 어조와 뉘앙스로 그린다. 이와 같은 속물적 모양새는 비단 누이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얼치기 양관(洋館) 속에서/골치를 앓는 여편네의 댓가지 백 속에조약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인이 여편네누이를 연달아 호명하면서, 이들의 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스케치하는 까닭을 세속적 현실에서 자신을 돋보이는 모양새로 치장하려는 여성들의 물신화된 심리와 그것의 외면적 장식을 구성하는 문화적 소품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소품들의 정돈된진열 행태 속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누이의 방에서는 물신주의의 부산물들이 가지런하게 배열된 공간에 작동하는, 그 속물적 습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인의 첨예한 안목과 비판적인 통찰력이 선명한 윤곽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등장하는 서울의 얼치기 양관” “여주알 곰보” “당호박” “코스모스” “킴 노박의 사진” “국내 소설책들같은 시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일상성이 빚어놓는 상품-사물들일 것이다. 또한 이들이 유발하는 물신주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뉘앙스가 담긴 이미지로도 기능한다. 나아가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라는 부정적 어조의 시구들이 결말 부분에서 거듭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시인은 누이여편네로 대변되는 당대 여성들의 속물적인 면모에 대한 풍자적 시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앞서 열거한 상품-사물 이미지에 깃든 겉치레로서의 교양과 일상인들의 허위의식을 비판적 시선과 풍자적 관점에서 응시하려 한 시인의 수미일관한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령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달나라의 장난)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구름의 파수병) 같은 시구들로 집약되는 김수영의 내밀한 실존적 태도와 태생적 기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좀 더 심층적인 안목과 충실한 탐색 과정이 필수 불가결하다. 누이의 방에서 형상화된 속물적 이미지들이란 비단 여편네누이로 대변되는 당대 여성의 속물적 취향과 일반적 기호(嗜好) 사항들을 풍자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 이미지들은 시인 자신의 속물성을 나날의 삶의 테두리를 함께 이루어가는 가족에게서 발견한다는 이면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그 부끄러운 생활의 일면을 정직하게 발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증식하면서 아이러니의 겹주름을 만든다. 이 시편에선 누이여편네의 속물적 면모와 물신주의적 습성을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하려는 지식인의 고압적 태도와 일방적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인이든 지식인이든 관계없이, 현대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본주의 세계의 물신화 현상에 감염될 수 있음을 안타까운 심려의 어조로 읊조리고 있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화자의 어조를 누이를 염려하는 오빠의 목소리로 설정하여 그 안타까운 심경을 담담하게 진술하는 자리에서, 일상생활에 밀착한 살아 움직이는 감각의 파장과 생동감을 오롯이 전달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결말 부분에서 나타나는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라는 시구는 지식인/일상인의 대립으로 표상되는 고정적 위계화나 가치론적 대립 상태를 상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너의 방은 너무 정돈되어 있더라” “너의 방은 언제나/너무나 정돈되어 있다라는 이미지들과 상호 조명의 유비 관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세계가 개개인들에게 부과하는 보이지 않는 일상적 차원의 물신화 현상을 포착한다. 나아가 이 현상의 지배적 흐름에 누이역시 물들거나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배려심이 마디마디의 작은 무늬들 사이에서 스며 나오게 만든다.

  이러한 섬세한 마음결은 또한, 김수영이 ‘516’이 가져다준 실존적 불안과 공포에 갇혀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던 처지에서 벗어났음을 묵시적으로 웅변한다. 그것은 누이의 일상생활에 자리한 속물성과 물신주의의 폐해를 염려하고 근심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평정심을 회복했음을 암시하는 징표로 읽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516’ 이후로 실존적 불안의식에 끊임없이 시달렸을 김수영은 가장 내밀한 자기 억압 기제로 작용하는 가족을 다시 철저하게 반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야말로 진짜 시인이 품어야 할 나날의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누이를 안타까운 염려의 마음과 풍자와 연민의 시선이 한데 뒤얽힌 좀 더 깊은 배려의 안목에서 누이를 타이르며 보듬을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곧 그만큼의 정신적 여유와 내면적 안정감을 되찾았음을 역설 어법을 활용하여 뒤집어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행을/안 한다/가지고 있는/이데올로기도 없다/밀모(密謀)/전혀 없다/담배마저 안 피우는/날이 올지도 모른다/그때에는/성급해지면 아무 데나 재를 떠는/이 우주의 폭력마저/없어질지도 모른다/정적(靜寂)이 필요 없다/그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낚시질도/안 간다/가장(假裝) 파티에/가본 일도 없다/하물며/중립사상연구소에는/그림자도 비친 일이 없다/뇌물은/물론 안 받았다/가지고 있는/시계도 없다/집에도/몸에도/그러니까/the reason why/you don’t get/a clock/or/a watch마저/말할 필요가 없다/집에도/몸에도/이놈이/무엇이지?”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전문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유사한 의미를 지닌 어휘들의 집요하고 빈번한 반복이며 연속적 리듬감일 것이다. 따라서 표면적인 차원에서 여타 신귀거래시편들과의 단절과 차이보다는 오히려 연속성과 공분모가 눈에 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거듭 되풀이되는 것은 다채로운 부정어(否定語)의 활용형들이며, 이들로 이루어진 각 문장의 서술어들이 기묘한 뉘앙스를 내뿜으면서, 특정한 의미망을 말없이 직조하게 되는 비가시적 효과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이 부정어들의 반복이 틔워 올리는 서술부의 연속적 리듬감에 대한 촘촘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놈이 무엇이지?가 우리에게 건네려고 하는 궁극적 전언이 무엇인지를 좀 더 적확하게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편에서 활용된 부정어들을 차례대로 열거해보라. “안 한다” “없다” “전혀 없다” “올지도 모른다” “없어질지도 모른다” “필요 없다” “필요도 없다” “안 간다” “없다” “안 받았다” “없다” “don’t get” “필요가 없다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한결같이 부정어(否定語) 용언들로 이루어진 서술어임을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격문에서 일곱 번이나 연달아 되풀이되는 깨끗이 버리고에 깃든 자기 억압의 해소와 정화라는 의미소를 상호 조명 관계 속에서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격문깨끗이 버리고‘516’ 이전에 시인이 품었던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을 일소해버리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속뜻을 내포했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 선명한 형세로 나타나는 부정어의 다양한 변형들로 이루어진 서술부 역시, ‘516’이 가져다준 초조와 불안과 공포, 그 내면적 불안정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기성 사회의 모순과 허위와 부조리에 대한 풍자와 연민을 동시에 명시할 수 있을 만큼 시인의 실존 상황이 일상적 차원의 평정심을 회복했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따라서 신귀거래연작의 마지막 시편 이놈이 무엇이지?에서 수미일관하게 활용된 부정어의 집요한 반복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서술부 전체의 이미지는, 김수영이 ‘516’이 발생하기 이전의 내면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묵시적으로 표현하는 비가시적 이정표로 기능한다. 시인은 우리 모두의 뒤떨어진 현실에서 생겨나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풍자적인 시선과 근본적인 연민의 태도를 동시에 견지했을뿐더러, 이를 지속하는 자리에서 안 한다” “없다” “전혀 없다같은 다양한 부정어(否定語)들이 태어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돋을새김 기법으로 나타난 부정어의 집요한 반복과 그것이 구축하는 서술부 전체의 연속적 리듬감은, 저 비루하고 오염된 사회 현실에 시인 자신이 물들거나 굴복하지 않았음을 역설 어법으로 강조한다. 나아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이 숨겨진 이른바 사랑하는 싸움’(김인환)으로 집약되는 김수영의 근본적인 태도, “진짜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되찾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리하여, 이놈이 무엇이지?의 서술부가 수미일관하게 보여주는 부정어의 집요한 반복과 이에 따른 연속성의 리듬 구축은 시인이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들이나 부조리한 계기들과 연루되지 않았음을 공개 선언하는 담론 효과를 낳는다. 더불어 이들에 대한 풍자와 연민의 시선을 동시에 견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달리 말해, 풍자의 명시적 선언과 연민의 묵시적 내포를 동시에 표현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516’이 가져다준 생존의 위기감과 불안의식, ‘한국전쟁시기에 겪었던 끔찍한 수난과 수용소 체험에서 비롯하는 무수한 자기 억압 기제에서 벗어나, “자유다라는 시어로 표상되는 자기 평정심(平正心)진짜 시인으로 표상되는 실존적 정체성을 나날의 삶에서 되찾았음을 암시한다. 곧 사회 비판적 시인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충실하게 회복했음을 간접 화법을 통해 우회적으로 공표한다.


5

 

  “신귀거래연작 시편들에서 일관된 양상으로 나타나는 반복 어구들이나 주술적 리듬의 명시적 현현이란, 김수영이 ‘516’으로 인한 실존적 충격을 수습하고 내면적 평정심을 되찾으려는 혹독한 몸부림의 시간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갖 부정어들의 집요한 되풀이를 기반으로 삼은 연속적 리듬감의 서술부 구축은, 시인 자신이 우리 사회의 무수한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물신주의전혀관계가 없다라는 사실을 공공성의 차원에서 선언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아가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려는 묵시적 뉘앙스를 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결국 이놈의 무엇이지-신귀거래 9에서 소묘된 간접화된 풍자와 더불어 그 안감을 타고 흐르는 웅숭깊은 연민의 감각이야말로, 격문-신귀거래 2에서 등장하는 자유다라는 해방 선언과 직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김수영이 ‘516’이라는 정치적 사건의 충격에서 온전히 벗어나, 시인으로서의 자기 위상과 실존적 정체성을 되찾았음을 다채로운 부정어들의 반복과 연속성의 리듬 창출이라는 지극한 역설 화법으로 뒤집어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들은 신귀거래연작을 곧바로 잇는 김수영의 또 다른 걸작 먼 곳에서부터를 그대로 관통한다. 이 작품을 가로지르는 것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감통(感通)의 참다운 환희이자,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상호 교감으로 표상될 수 있을 보편주의의 광대무변한 광휘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기성 세계의 지배권과 상징적 질서에 구멍을 뚫어버리면서 도래하는 보편주의’(알랭 바디우)의 드넓으면서도 발본적인 사후 효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신귀거래연작을 곧바로 잇는 먼 곳에서부터의 만물 조응의 미감과 상호 교감의 전체 분위기를 오랫동안 다시 들여다보라. 마찬가지로 역사의 자정(自淨) 능력을 자기 원천으로 삼는 동시에 열린 사회의 공동체적 비전과 그 미래 역사의 다중적 체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감을 표출하려 한 아픈 몸이먼 곳에서부터의 뒤를 이을 수밖에 없었던 내밀한 속사정을 더듬어보라. 아마도 김수영 고유의 실존론적 기획투사와 예술적 창조력의 불꽃이 어디서 튕겨 오르는지를 섬세하게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온갖 들과 함께/들의 들과 함께/무한한 연습과 함께라는 소극적 수용력의 강인한 읊조림이 그러하듯. “함께라는 말의 연속적 되풀이가 드리우는 저토록 고단하면서도 드넓고, 끈덕지면서도 섬세한 사랑의 메아리가 그러하듯.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내 몸이 아프다에 주름진 -실존의 몸부림이 우리에게 펼치는 바로 그것처럼.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 먼 곳에서부터전문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지고

온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들과 함께

들의 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아픈 몸이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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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간-절기, 밤을 불러내는 주문의 시간 ― 2025년 봄, 환절의 시편들

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계간 파란 최진석 간절기생성산책미래이행사건 2025
이찬 ‘時中’, ‘다른 미래’로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 김수영 시 「바뀌어진 지평선」

1 2024년 여름 『계간 파란』 통권 33호 ‘문질빈빈(文質彬彬)’ 항목에서 제시된 「“지평선”의 아름다움」에서 이미 암시했듯, 김수영의 「바뀌어진 지평선」은 『주역』과 『중용』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고전의 영향 관계라는 문제틀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어야만 한다. 이 시편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래된 미래’로 자리할 수밖에 없을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이라는 방법론과 의제의 초점화를 통해서만 적확하게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시와 산문 텍스트의 상관성을 심층적으로 탐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고전의 충실한 이해 및 참조가 필수 불가결의 조건을 이룬다고 하겠다. 김수영의 초기작 「공자(孔子)의 생활난」에서부터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유발한 도피 행각과 귀가 이후의 실존적 격투가 고스란히 배어든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 그리고 말년에 창작된 「미역국」이나 「사랑의 변주곡」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수한 시편들에선 동아시아 고전의 수용 및 변용의 맥락이 일관된 지속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김수영의 시에서 동아시아 고전의 이름이 거죽 위로 솟아오른 텍스트로는 「술과 어린 고양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는 中庸의 술잔” “여기에 있는 것은 中庸이 아니다” 같은 구절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시의 本髓」 같은 산문 텍스트에서 활용된 “양극의 긴장” “대극” 같은 용어들 역시. 동아시아 문명사의 주축을 이루는 ‘주역 철학사’에서 부단히 제시되었던 ‘대대(對待)’ ‘순환(循環)’ 같은 어휘들을 수용・변형한 것이다. 김수영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설움”과 “긍지”, “생활”과 “자유” 같은 대립적 심상들이 상호 보완적인 “대극”의 지력선을 이루는 것처럼, “대극”과 “양극의 긴장”으로 표상되는 산문 텍스트의 핵심 원리 역시,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중용』의 ‘신독(愼獨)’으로 대변되는 근본적 ‘자기성찰’을 수미일관한 실존적 태도로 “이행(履行)”하려 했을뿐더러, “생활”과 “뮤즈”가 “일자(一字)”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실천의 기반으로서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끊임없이 견지하려 했으며 이를 당대의 “서정시인”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시중(時中)’이란 말은 『중용』 제2장에서 등장하는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君子가 中庸을 함은 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小人이 中庸에 반대함은 小人이면서 忌憚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을 통해, 그 어휘적 관련 맥락과 구체적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주희(朱熹)의 주석으로 나타난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君子가 中庸을 하는 까닭은 君子의 德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中에 처하기 때문이요)’라는 구절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시중’이 인격 수양의 정점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맥락을 좀 더 생생하게 감득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시중(時中)’이란 ‘고시조지의야(故時措之宜也)’라는 말에 담긴 실질적 의미, ‘그러므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행함에 의(宜), 적합하면 된다’(우응순, 『친절한 중용 강의』)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상황과 시간의 구체적 마디들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더불어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마땅함(宜)을 매번 다시 살피고 수행해야 한다는 숨겨진 맥락을 명료하게 풀이해주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에서 부단히 등장하는 부끄러움의 형상들이나 보잘것없음을 반성하는 자기성찰적 시구들은 한결같이 ‘시중’의 윤리학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김수영의 여러 시작품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시각성’의 이미지들 역시 좀 더 심층적인 차원의 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위시한 동아시아 고전에서 유래하는 ‘신독(愼獨)’ ‘권도(權度)’ 등과 같은 성찰성과 관련된 어휘들과 더불어 ‘중용’ 및 ‘시중’의 사유 맥락에 대한 섬세한 이해 및 본격적 탐구가 필수 불가결하다. 2 뮤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 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콜맨의 신작품(新作品)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賣春婦)의 생활(生活)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神經質)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卑怯)하다고 경멸(輕蔑)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라크 케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노력(勞力) 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영국인(英國人)들은 호스피탈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 - 「바뀌어진 지평선」 전문 3 「바뀌어진 지평선」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 텍스트를 넘어서 그의 실존적 태도와 세계관의 중핵을 구성하는 ‘중(中)’의 사유와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 시는 상당히 긴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라는 예술 장르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되어 온 의미의 압축성과 리듬의 암시성을 충실하게 확보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특이점과 미학적 자질이 온전하게 작품 내부에 응축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 역시, 김수영 특유의 “대극”의 사유 방식 또는 “양극의 긴장”에 대한 그의 첨예한 통찰력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1연에 나타난 “뮤즈”와 “생활”이란 이미지는 명시적인 차원에서 이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극”의 의미 계열을 구축한다. 양자의 사이 공간에 들어박힌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시구와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라는 시간적 심상은 “대극”이 반복・변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이란 “생활”에서 파생된 것이며, “너”는 “뮤즈”를 대명사로 바꾸어놓은 대체 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매듭이 나날의 범속한 생활이 만드는 온갖 우여곡절들을 암시한다면, “뮤즈”와 “너”가 함께 이루는 연속적인 이미지 지력선은 시인의 포에지(poesie), 곧 시인의 예술적 이상으로 이루어진 예술혼을 표상한다. 나아가 시작(詩作)의 ‘내재적 과정’에서 체감하게 되는 ‘신독(愼獨)’의 실천적 태도와 ‘시중’의 윤리학의 절실한 자각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위에서 풀이한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측면 또는 상반된 계기를 품고 있다는 의심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을 중용의 관점과 문제틀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긍지의 날」에서 상반된 위상을 차지하는 “설움”과 “긍지”라는 심상을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로 통합시키는 “대극”의 사유 원리를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사랑」에서 등장하는 “변치 않는”과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이라는 시구의 상반성, 그리고 「사랑의 변주곡」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사랑의 도시”와 “개미”라는 대극적 이미지 구성원리에서도 또렷한 되풀이의 모양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만한 경박성”이란 작은 무늬는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이상적 질서’, 곧 ‘중용’의 사유 및 실천 원리이자 ‘대대(對待)’라는 말로 집약되는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점에서 감수되고 해석되어야만 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이 품은 사유의 보석이란 어쩌면 정반대 상황에 놓인 사태들을 “대극”의 원리로 포괄하면서, 이들을 그저 대립하는 것만이 아닌 상호 보완하는 것이라고 사유했던 지점에서 최고 순도의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요만한 경박성”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덧씌워진 속물성이나 천박성을 껴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나의 가족」)를 예감하면서 “긍지”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상반된 “대극”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잠재적 포석을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에는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예감하는 사유의 밀알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내적 “성장”을 성취하려는 시인의 웅대한 미래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2연을 구성하는 “대극”의 짜임새는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정(靜)의 심상과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동(動)의 표현이 상반된 지력선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양자의 이미지 계열을 한층 더 풍성하면서도 복합적인 일상의 다면성을 담을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간다. 양자는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상반된 이미지 지력선을 각각 계승한다. 따라서 그저 단순한 ‘정(靜)/동(動)’의 “대극” 현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도리어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요약되는 역동적 상호 침투의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나아가 중층적 “대극”의 무늬들을 2연 마디마디의 모서리로 틔워 올리면서 그야말로 풍요로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주요 동인으로 기능한다. 2연의 “다소곳한 분위기”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심상들 역시,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구절들을 각각 잇따르는 것이기에, ‘정(靜)/동(動)’의 단순한 “대극” 현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표현되는 상호 침투의 역동적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그야말로 다면적인 “대극”의 무늬들을 아로새긴다. 달리 말해,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라는 심상이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고요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느낌을 함축하는 것이라면,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심상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고양된 충만감으로 솟아오르는 역동적 개방성의 이미지와 “대극”을 이루면서 고립된 폐쇄성의 감각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무거운 일기”와 “우울”이라는 형상이 둔중하면서도 정적인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이와 상반되는 “걸어가기 위하여”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라는 구절들은 예민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의 원환 운동을 표현한다. 4연에 나타난 “생활”->“비겁”->“나의 원죄와 회한”의 계열이 함축하는 세속적 “타락”이라는 의미 매듭과 더불어, “뮤즈”->“경멸”->“너의 생리”로 이어지는 형상의 연속선이 이루는 신성한 “지혜”라는 의미 계열 역시, 앞서 살핀 연과 같은 “대극”의 구도에서 발원한다. “생활”의 이미지 계열이 발산하는 ‘세속-현실-일상’이라는 하나의 “극”과 더불어, “뮤즈”라는 형상의 계열체로 수렴되는 ‘신성-이상-예술’이라는 또 다른 “극”이 함께 이루는 “힘”과 “긴장”의 미학이 생생한 느낌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뮤즈”의 “대극”을 형상화하면서, 김수영은 나날을 살아가는 “온몸”에 “타락”과 “지혜”를 동시에 포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나날의 “생활” 속에서는 “뮤즈”로 표상되는 시의 예술혼이 끝끝내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와 “대극”을 이루는 “뮤즈” 속에서는 “생활”과의 공분모를 형상화하려 했던, 시인의 실존적 “싸움”을 주도 모티프로 삼는다. 달리 말해, 시인의 몸과 마음에서 수시로 엇갈리는 무수한 “대극” 운동이 「바뀌어진 지평선」을 구성하는 전체 이미지의 주도소(主導素)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5연과 6연에서도 이와 같은 “대극”의 이미지들은 수미일관한 연속선으로 구축되지만, 좀 더 본원적인 차원으로 진화한다. 곧 상호 모순에 가까운 ‘극단적 아이러니’의 어법과 구조를 새롭게 펼쳐놓는다. 특히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5연), “뮤즈여/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6연) 같은 대목들은 표면적인 통사 구조만을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의 적확한 해석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에 내포된 그 복잡다단한 의미론적 계기와 극단적 아이러니 구조에 관한 섬세한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7연의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를 비롯하여, 8연에서 등장하는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같은 구절들 역시 상호 “대극”의 이미지 계열을 구성한다. 전자(前者)가 바로 앞에 놓인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에서 이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면, “타락한”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또한 “기자”의 직무상의 윤리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해가는 세속의 풍습과 인심을 “정시”하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이라는 시어와는 결합할 수 없는 상반된 의미 지향성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7연에서 도드라진 모양새로 등장하는 “타락한”은 기자”의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발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상태이자, “이 어지러운 세상”이 강제하는 온갖 “탈”, 곧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다. 이처럼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앞뒤로 연속된 시구들은 서로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어긋나는 모양새를 띤다. 이들은 “뮤즈”와 “생활”, 곧 ‘신성과 세속’, ‘이상과 현실’ ‘예술과 일상’ 등등의 상반 항들이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구도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시인의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의 사유를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이 품은 그 형상의 진의(眞義)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가치 전도의 의미를 거느린 이 형상은, “뮤즈”와 “생활”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오히려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상호 전환의 융합 관계에 놓여있다는 이면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중(中)’의 시간적 궤적을 표상하는 형상인 동시에 ‘역동적 균형’의 운동 및 이행 과정을 지속하는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암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8연의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 역시, “바뀌어진 지평선”으로 빗대어진 ‘신성’과 ‘세속’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상호 전환 과정 및 ‘역동적 균형’의 상호 이행 운동을 역설 어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 바로 앞에 놓인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와 더불어, 그 뒤를 잇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는 이미지 매듭을 오랜 시간 동안 숙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을 곰곰이 되살피면,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은 비단 “타락한”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풍자를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 구절은 언뜻 “가벼워서”, “배반”, “간악” 같은 시어들로 이어지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꼴 짓는 이미지의 핵심 매듭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앞뒤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정반대 의미 계열을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서만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이 “생활”에 있을뿐더러 “경박성”이란 그것의 필수 요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표면”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날아갈” 수 있는 “정신”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은폐된 측면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이라는 적확한 은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저 이미지들은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 “물”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 “위를 날아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단히 유지할 수 있는 실천의 벡터를 암시적 문법으로 개진한다. 이 실천의 원리를 ‘시중’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 철학자가 제시한 ‘인간의 모든 “중中”은 “시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時”라는 것은 객관적・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라는 언급은, 이 맥락 전체를 좀 더 명확한 철학적 범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4 이와 같은 ‘시중(時中)’의 사유 맥락은 8연 마지막 대목을 이루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같은 형상들이나, 9연의 “너의 육체는/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1연의 “뮤즈여/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같은 심상들로 변형되면서 점층적 확산의 의미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이 “뮤즈”에게 “표면에 살아라”라고 말하면서,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시중’의 윤리학에서 기원한다. “표면”은 “생활”의 의미 계열로 수렴되며,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뮤즈”의 이상적 예술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자기 신념을 은은한 뉘앙스로 드러내는 역설 어법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9연과 11연의 이미지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의 범주에서 감수되는 것이 합당하다. “뮤즈”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육체”의 차원에서 호명하는 이미지 매듭(9연)이나, “시인”과 “시”를 “대극”의 차원으로 설정하면서 “뮤즈”와 “시”를 의미론적 연속체의 범주로 설정하는 구절(11연)은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생활”과 “뮤즈”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계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이 구절들은 “생활”과 “뮤즈”를 끊임없는 상호 전환 및 상호 이행이라는 융합・횡단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김수영 특유의 ‘중(中)’의 사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는 또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라는 실천 원리와 가치 지향성을 내포한다. 9연과 11연이 연속적인 의미 계열을 이루면서 개진하려는 바는, 각각의 상황과 국면에 따라 “생활”과 “뮤즈”가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관계이자 최적의 방향성, 곧 매 순간 ‘시중(時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궁극적 전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과 “뮤즈”가 12연에서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양자의 상호 이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달라지는 ‘시중(時中)’의 위상과 내용을 신중하게 사유하고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해, 시인은 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최적의 방향을 모색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는 실천의 ‘내재적 과정’,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나날의 실존적 태도로 견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라는 구절로 표상되는 세계의 모든 영역이 “일자(一字)”를 이루는 “지평선의 대열”을 구축할 수 있는 궁극적 화합의 미래 비전을 상상하고 선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수영이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무리 대목에서 “뮤즈”에게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12연), “앞장을 서지 마라”(13연),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13연)라고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점을 이룬다. 시인은 “생활”과 “뮤즈”의 “대극”이 함께 이루어가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이행 과정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로 소묘함으로써, ‘세속/신성’, 현실/이상’, ‘예술/일상’이라는 대립 구도의 고정성을 부단히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동시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권유하려 했던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라는 대목은 “서정시인”으로 비유된 당대의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모두 “모더니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혁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전언을 간곡한 명령 어법으로 권고하는 내용을 품는다. 이렇듯 “지평선의 대열”이 그야말로 “일자(一字)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매리지/하우스펠 에어리어” 같은 어휘들로 표상되는 서구 기계산업문명의 선진성과 그 문화적 세련성을 무작정 동경하고 추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으리라. 나아가 이와 같은 서구의 문화적 특질을 “뮤즈” 곧 “시”의 이상적 본질이자 예술혼의 정수로 추구하거나 숭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대 서구의 문화는 우리의 “생활”과 엄청난 격차로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진 지평선」에서 시인이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라는 사회・역사적 상황과 이에 대한 신중한 고민 및 극복의 비전을 여타의 “서정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권고하려 했던 맥락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이 권고에 깃든 속도의 담론과 비전이란 우리 사회 전체의 “모더니티” 수준과 밀도에 대한 시인의 근본적인 염려와 신중한 고민의 깊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것은 『중용』 제2장의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과 그대로 맞닿는다, 『중용』의 이 구절에 따르면, 군자의 ‘시중(時中)’은 소인의 ‘무기탄(無忌憚)’과 상반된 방향과 내용을 지니는 ‘기탄(忌憚)’, 곧 ‘거리낌’을 심사숙고하는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낌이란 신중함’이며, ‘거리낌은 인간에게 “거리”와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기에 실수의 가능성을 줄인다’(김용옥, 『인간의 맛』)라는 깊은 안목의 풀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거리낌은 겸손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강함’일뿐더러, ‘시중(時中)’의 근거이자 그 실천적 이행의 원천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지막 연에서 극단적 역설을 표현하는 반어법을 동반하면서, 우리 “모더니티”에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울”과 “경박”을 반추하도록 강제한다. 마지막 13연에서 “앞장을 서지 마라” “낮추어라” 같은 말들로 표현된 제한과 금지의 명령어들을 “뮤즈”에게 덧씌울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은 김수영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1950-60년대 한국 시단에서 “모더니티”의 첨단을 맹종(盲從)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각별한 어조와 리듬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여타의 시인들이나 예술가에게 권고하고 공유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3연은 두 매듭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뮤즈여/앞장을 서지 마라/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낮추어라”라는 부분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마지막 대목으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는 “뮤즈”에게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 풍조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님을 권고한다. 또한 우리가 나가야 할 최적의 선택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기를 간곡하게 요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고민과 성찰의 자리가 바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 펼쳐지는 구체적 실천의 무대일 것이다. 이는 또한 후자(後者)의 지극한 역설로 이루어진 반어법을 낳는 토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의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맨 마지막 무늬들은 김수영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를 비유적 차원에서 집약하는 구절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 없이는 충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 구절과의 통사론적 맥락에서 보면 지극한 역설을 내포한 아이러니의 수사학일 터이지만,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은 “우울”과 “경박”이라는 시어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우리 “모더니티”의 낙후된 수준과 후진적 형성 과정을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그것과 ‘사랑하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그 복잡다단한 속사정을 비교적 명징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모더니티의 문제」에 나타난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김수영의 “이상한 역설”이란 현대 한국인에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을 “우울”과 “경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말하는 “긍지”란 우리 모두의 “우울”과 “경박”을 껴안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뿐더러. 이른바 ‘중용’의 미덕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김수영에게 “긍지”란 ‘시중’의 윤리학에 깃든 ‘실천적 원근법’과 ‘역동적 균형’의 부단한 “이행”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에서 발원하는 “우울”과 “경박”을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 터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열어가려는 수미일관한 실천의 자리, ‘시중(時中)’의 충실한 이행 과정을 통해서만 체화될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아랫자리에서 인용되는 작은 무늬들이 넌지시 말해주듯. 오오 환희(歡喜)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구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退溪)든 정다산(丁茶山)이든 수염난 영감이든 복덕방(福德房) 사기꾼도 도적놈지주(地主)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 자칭(自稱) 예술파시인(藝術派詩人)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能辯)을 욕해도-이것이 환희(歡喜)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人生)도 인생(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 - 「미역국」 부분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학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 - - 「모더니티의 문제」 부분

계간 파란 이찬 김수영바뀌어진 지평선중용시중신독역동적 균형상보성대극상반상성 2025
김주원 종이책 바깥의 문학

1. 한 통계에 따르면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을 포함한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다. 한국의 독서 인구가 매년 감소하고 있다고 하지만 2023년 기준 신간도서 발행 분포를 보면, 문학(20.1%)은 교육(20.9%)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 독자층의 도서 구매 상황은 다르다. 교보문고의 집계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소설과 시/에세이 부문의 판매 권수와 판매액 점유율은 점점 하락하는 추세이다.2) 도서 소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양 서적과 직업 관련 서적이라고 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계가 전례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학이 독서 시장에서 유력한 장르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학을 떠받치고 있는 독서 시장이 위축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학을 읽고 경험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해졌다. 문학이 특정한 매체, 특정한 직업군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걷어내면 문학은 어디에나 있다. 매일 접하는 인터넷과 SNS에 게시되는 문학 관련 정보들과 자기 표현 글쓰기에서 비평적 욕구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이 가장 활성화되는 곳은 문예지가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비전문적인 장소들인지 모른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문학은 특별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그런 관심만으로 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책에 매혹된 독자들이 비평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건 비평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그런 독자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직업 독자로서 비평가가 있지만 모든 문학 종사자들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독자이다. 최근 생태 비평의 화두인 ‘얽힘’(Entanglement)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문학과 독자의 관계에도 필요한 상상력이다. 문학은 독자와 함께 만드는 세계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2. 강동호의 「새로움의 경제」(웹진 『비유』, 2025. 3-4)는 독자에 관한 글은 아니지만 문화경제학의 관점에서 문학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새로움’을 일종의 경제로 바라보는 이 글은 상품경제와 구별되는 문화경제에 주목한다. ‘새로움’은 동시대 문화 아카이브와 관련하여 작품이 지닌 가치를 측정하는 기호(화폐)로 “‘새로움의 경제’란 문화적 혁신을 독려하고 정당화하는 특수적 통화 체제”이다.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동시대 문화 현상은 새로움의 공급 과잉, 즉 새로움의 인플레이션인데 이는 시장과 자본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글의 목적은 시장과 문화라는 ‘새로움’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효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저자는 문학의 가치 역시 작품을 현실에서 사용하고 체험하는 독자들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교환 행위를, 그리고 그러한 교환 원리가 현실 언어의 경제라는 광의의 체제와 구별되는 지점”과 “자본의 논리에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영역을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통상의 사회경제적인 원리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학을 살펴보겠다는 것은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특히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독자와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인 교환 원리는 주목할 만하다. 강동호는 「새로움의 경제2(1)」(『문장웹진』, 2025. 4)에서도 유사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아직 ‘새로움의 경제’에 관한 가설이 있을 뿐 그 내용이 충분히 전개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글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문화경제 원리에 관한 여러 가정들과 개념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로 검증 가능한 구체적인 사례나 예시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문화경제는 이론인 동시에 실물경제이다. 작품의 가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자, 작품 생산과 수용 과정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교환의 원리를 문학 현장의 사례로 논증하는 과정 없이 ‘새로움의 경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강동호의 글은 독자가 포함된 문학을 역동적인 경제 교환의 흐름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그 새로움의 발생지, 현장의 실체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노태훈의 「한국문학의 현장」(『자음과모음』 2025년 봄호)은 한국문학의 현장을 생산과 유통, 수용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어 강동호의 글과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한국문학의 생산은 ‘등단’과 ‘문학상’이라는 집단적 승인을 전제하고 있으며,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문학의 유통은 수용의 현장과 분리되어 있다. 특히 문예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기 전의 작품들을 게재하는 것은 상품으로서 문학을 예비하는 과정이며 그 점에서 문예지는 생산 현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수용의 단계는 어떤가. 문학의 현장은 결국 수용자인 독자에게 그 핵심이 달려 있다. 문학의 현장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 읽히고 공유되는 순간이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곳만을 현장이라 칭한다면 사실 그것은 아주 왜소해질 것이다. 여타의 모든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생산자는 작품의 유통과 수용에 있어 결국 철저하게 보호적인 존재로 남게 된다. 작가의 강연, 낭독회, 사인회 등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문학의 현장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문학에서 현장은 사후적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수용 이후, 작품의 감상 이후에 현장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작가와 작품은 필요조건이 될 뿐, 현장의 주체는 오로지 독자의 행위에 달려 있다. 그런데 또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 현장성이 생겨나지는 않아서 이를테면 도서관을 두고 문학의 현장이라 명명하기는 다소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3) 노태훈의 글에서 독자는 중요한 존재지만 작가와 작품, 독자가 만나는 현장은 아직 현장으로서 불충분하다. 이 글은 도서관을 비롯해 문학작품을 향유하는 공간을 언급하면서도 문단 시스템을 벗어난 현장을 의미 있게 고려하지 않는다. 독자를 현장의 핵심에 두고 있으면서 독자와 현장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발생한다. 이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현장’은 비평적 태도의 유무인 듯하다. “핵심은 문학작품을 읽고 나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평’”이며 문학의 현장이 고민할 것은 “인정이나 승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비평적 태도, 즉 독자讀者/獨自적인 것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전통과 관습을 비트는 방식으로, 아카이브라는 저항의 형태로, 즉흥적인 아마추어리즘”으로 나타나는 문학 현장이지만 그 주체가 문예지와 전문 독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생산과 유통, 수용은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전문/비전문, 중심/주변의 경계는 여전히 뚜렷하다. 3. 한국 문학의 생산과 유통에서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문학 제도의 오래된 관성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스템에서 보면 한국문학은 ‘극소수’의 작가를 생산하고 연구하고 비평해 왔으며 ‘대다수’의 독자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대칭이 한국문학 연구에서 독자 연구가 희소한 이유이며 같은 이유에서 비평의 관심도 작가나 작품으로 향한다. 문학을 향유하는 현장에서 독자를 배제할수록 독자는 추상적인 집합명사로 취급될 확률이 크다. 이를테면 낭독회와 같은 문학 이벤트를 의미 있는 문학 현장으로, 작가와 독자 간의 수평적 연대의 실천으로 돌아보기란 아직 한국문학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황유원 시인은 최근 낭독회에 참여했던 경험을 놀랍고 반가웠다고 말한다. 직접 시를 읽어주는 독자들과 만나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겹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에게 “낭독회는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목소리들이 부유하는 시간”이며 서로 다양한 “목소리들이 구름처럼 희미하면서도 분명하게 시각화되는 시간”4)이었다. 아직 낭독회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시인의 소감은 중의적이다. 낭독회는 일회적인 문학 이벤트지만 작가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과 감응은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를 다른 사람이 낭송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시가 나를 떠났다는 것과 떠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다.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을 목도하는 것이다. 이유는 굳이 따져보지 않았는데, 사실 나는 내 시를 낭송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늘 거리 조준에 실패하고 마는 느낌이다. (중략) 참석하신 분들이 낭송해준 8편은 좋았다. 호흡과 리듬이 나와 달라서, 시에 첨가된 이질적인 분위기가 시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낭송이 끝나고 토크가 이어졌다 (중략) 나는 난감한 질문을 선호하고, 난감함 속에 생각이 촉발되는 울퉁불퉁한 흐름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대답은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에 힘입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5) 낭독회는 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지는 시간이다. 낭독회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만나고 말하고 새롭게 듣는 시간이다. 현장의 즉흥성은 다른 생각을 촉발시킨다. 낭독회는 서로 함께 참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발신자가 수신자가 되고 생산자와 수용자의 자리바꿈도 일어난다. 이수명 시인이 말하는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은 문학의 현장이 상호적이고 역동적인 공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산성에 힙입어 나아가는 문학의 현장이 문예지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문학의 현장을 생기 있게 하는 것은 기존의 제도가 아니라 ‘작가-작품-독자’의 연결을 만드는 이질적인 리듬과 시간이다. 낭독회를 기획한 이성주 평론가는 시민들과 문학 작품을 함께 읽을 때 종종 ‘요즘 문학’이 ‘그들만의 문학’이 아니냐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시민들은 동시대 문학 작품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문학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6)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낭독회에 관한 수많은 후기와 감상은 모두 그런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지금 문학 독자가 문학을 경험하는 방식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크고 작은 낭독회와 강연, 독서 모임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이, 더 다양한 작가와 일반 독자들이 문학 현장에 참여하는 것은 한국 문학에 유익한 일이지만 이런 교류를 기획하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제한이 따른다. 문학을 경험하는 일은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와 연계되어 있다. 2024년도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한국의 독서량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책을 선택할 때 서점이나 도서관 등에서 책을 직접 본다고 응답한 비율(26.8%)은 제일 높았다. 인터넷과 SNS의 책 소개나 광고를 본다는 비율(21.2%)은 그 다음으로 높다.7) 그러나 문학 현장의 전망은 밝지 않다. 2023년 정부는 지역서점 예산을 전액 삭감했고 앞으로 서점 문화활동 지원 예산 역시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다.8) 코로나 상황의 종식 이후 다양한 도서 행사들이 활기를 되찾았지만 서점을 중심으로 한 도서 문화활동은 위기를 맞고 있다. 잡지 산업 역시 지속되는 경제 침체로 부정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AI 기술과 디지털 시대라는 변환점을 준비하고 있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증진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발전에 중요한 기준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변화가 현행하는 문학 생산과 유통 방식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는 아직 더 지켜볼 일이다. 핵심은 독자와의 상호 작용이다. 문학을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고민은 더 필요하다. 5. 기존 문단의 시스템이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익숙하다. 한 좌담에서 육호수 시인은 최근의 SNS를 통한 문학의 확산이 등단 제도를 거친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향유자’로서 현대시에 대한 진입장벽과 문턱을 낮추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독자들이 한국 시에 유입되어야 한국 시도 활성화된다고 말한다.9) 김건영 시인은 SNS에서 매체의 홍보나 자본을 업지 못하면 아예 독자의 손에 닿지도 못한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SNS의 과도한 상업주의 경계한다.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김연덕 시인은 홍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면 SNS가 시 쓰기나 운용 방식에서 개개인의 질서나 미감을 즐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좀더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모두 일리 있는 발언들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문학은 디지털 시대와 얽혀 있다. 한국의 독서 문화에서 종이책 선호도는 월등히 높지만 정보 습득 선호 경로는 포털 사이트와 유튜브, TV/라디오, SNS 순으로 나타났다.10)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책을 선택할 때 정보를 얻는 방법에서는 서점이나 도서관 다음으로 SNS의 영향이 컸다. ‘종이책’과 ‘디지털 문화’의 공존 속에서 한국 문학에 필요한 것은 문예지의 쇄신만이 아니다. 한국 문학은 ‘종이책’ 바깥의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좌담에서 알 수 있듯 SNS는 창작자와 독자가 서로의 존재를 생생하게 마주하는 곳이다. 단순히 홍보를 목적으로 한 경우라도 SNS는 문학의 존재감을 알리는 편리한 수단이며 그 안에서 자기 표현의 매력과 홍보의 경계가 언제나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시와사상』(2025년 봄호)에 실린 「동시대 패러디스트의 밈적 욕망」(최다영)과 「사람이 사는 무인도-시와 패러디, 육호수와 고선경의 시를 중심으로」(하혁진)는 변화된 문학 환경에서 시가 어떻게 동시대의 문화와 교류하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인터넷 밈을 섞어놓은 ‘힙한’ 시가 그 자체로 또 다른 밈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싸이월드’의 ‘감성체’를 활용한 시는 학습을 요구하는 대신 비슷한 시대와 문화 감각을 지닌 독자를 초대한다. 이 글들은 현대시와 패러디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대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의 변화로 읽는 것이 유용하다. 디지털 시대의 파편화된 문화를 수용하는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인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가 먼저 존재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만드는 문학 현장이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저변을 축소하기는커녕 더 독특한 취향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입구처럼 보인다. 보편성과 진지함, 엘리트주의와 전문 독자에 둘러싸인 시가 아니라 비록 소수의 지지를 받더라도 가벼움과 귀여움, 사랑스러움, 놀이와 유머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그 안에서 전파되는 중이다. 전문 독자에게 다소 부족했던 자질들, 문학 제도가 배제해 온 요소들이 새로운 호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가 밈이 되고, 문학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감성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향유하는 시대적 현상이다.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거부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통의 보편성이나 대중성이 아니라 다양하고 고유한 소통의 방식을 만드는 일은 이제 능동적인 문학 행위이다. 시가 자신의 독자를 스스로 불러 모으는 일도 그러하다. 그것은 시에 좋은 일이다. 매일 접하는 수많은 콘텐츠들 사이에서 문학이 잠시 눈길을 끌고 멈추는 순간이 되는 일, 문학이 독자에게 이동하는 울퉁불퉁하고 즉흥적인 현장이 되는 일은 문학의 다양성, 문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의 목적이 불확실한 즐거움에 있다고 했다. 종이책 바깥에서도 시는 그 목적에 충실하다. 작지만 다양한 문학들의 난립과 행진 속에서 그 즐거움이 커진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서의 문학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닐 것이다. 1)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출판시장 통계」, p.67.(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2)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p.154. 3) 노태훈, 「한국문학의 현장」, 『자음과모음』 2025.봄, p.27. 4) 황유원,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는 중-소하서점 낭독회 후기」, 『포지션』, 2024.겨울호, p.248. 5) 이수명, 「소하의 밤」,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소하서점 낭독회 자료집, 2024, pp.75-77. 6)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p.172. 7)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292. 8)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181. 9) 김건영·육호수·김연덕, 「이달의 시 현장점검-그 평론가는 이제 출판사 마케터 아냐?」, 『현대시』, 2025.3, p.53. 10)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독서정책연구소, 「2023년 독서문화 통계」, p.17. ( 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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