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동네 2024년 봄호(제118호)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 이주혜론
1. 소우주를 감각하는 일
이주혜의 소설 속 여성들은 세심히 듣는 이들이다. 그들은 시와 일기를 낭독하기 위해 부지런히 모이고, 각자의 사연들을 촘촘히 엮어 긴 밤을 함께 건너간다. 또한 “나무가 익어가는 소리”(「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129쪽)를 들으며 무언가가 변화하는 순간을 마주하는가 하면, “소우주 같은 도토리 한 알이 땅에 닿는 순간”(「누의 자리」, 13쪽)마저도 귀중히 담아낸다.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보다 ‘간절히’ 듣는 이들이기도 하다. “번역도 소설 쓰기도 ‘세계를 읽는’ 행위에서 출발”2)한다면, 둘을 오가며 형성되는 그의 쓰기는 세계를 이루는 타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주혜는 쓰기 위해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해 듣는다.
그런데 본디 잘 이해하려는 욕망의 배후에는 역설적이게도 필연적인 불가해의 영역이 달라붙어 있다. 읽고, 듣고, 옮기는 자의 관점이 실재를 투과하는 매개로 작용할 때 원본의 일부를 유실하는 일종의 시차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예술이 재현 불가능성을 본질로 삼고 있으며, 번역은 결핍과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익숙한 고찰은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의미의 결여는 잠재성으로서의 의미의 과잉을 배면에 지니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어에서 ‘sens’라는 동일한 단어는 단일성에 종속될 때 ‘의미’(단수)라는 뜻을 가지지만 복수형으로 풀려날 때는 ‘감각들’(복수)이 된다. 이처럼 번역과 해석에서의 ‘감각으로의 전환’은 언어를 이성적 합의에 기반한 개념을 향해서가 아니라 무수한 감각과 관계하는 다양성의 경험으로 끌고 간다.3) 존재를 특정 의미에 한정할 수 없음이 판명되는 순간, 문학과 번역은 친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가까운 것을 멀어지게 하면서 의미를 이해와 지시관계라는 유한성으로부터 초월적 차원의 무한성으로 열어 놓는다.4) 이러한 “탈착근(脫着根) 운동”5)이야말로 번역과 문학이 만나는 공통지대라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주혜의 소설은 이러한 운동성을 보유한 채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그가 “도토리 한 알”까지도 진귀하게 여길 수 있는 이유는 마주하는 대상 각각을 내밀한 다면성을 지닌 “소우주”로 감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단일한 상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곳에서 언어는 더 멀리까지 나아가 계속해서 형태를 바꿀 것이고, 모두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로써 별다른 생동감으로 육박해 오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일은 하나의 우주를 면밀히 살펴보는 실천이 된다. 이 섬세함 덕분에 땅에 떨어진 소우주는 무의미하게 흩어지지 않고 씨앗이 되어 심긴다. 그렇다면 이제 미지의 무언가가 발아하며 생겨나는 떨림을 들을 차례다. 따라서 이 글은 이주혜의 소설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는 지극한 경청의 이유를 살피고, 함께 귀 기울이려는 노력으로 쓰인다.
2. 근태 불량의 혐의와 질문하는 여성들
이주혜 소설의 엄마 된 여성들은 대체로 일하는 이들이다. 이 여성들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 그리고 돌봄노동 등 사회로부터 할당받은 복합적인 직무로 인한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이른바 ‘근태’가 불량하다는 혐의에 쉽게 휩싸인다. 「골목의 근태」의 ‘나’는 가정과 직장이라는 공적·사적 영역 모두에서 최고의 성과를 강요당한다. 이때 무엇보다도 여성과 남성에게 근태의 하중이 다르게 실린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신을 “유명한 삼성맨”으로 소개한 술집 사장에게 근태와 관련한 경험은 “맨날 술 처먹다 근태가 나빠서 잘”(79쪽)려 호프집을 차리게 된 계기로 남아 있지만, ‘나’에게 그것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막중한 무게로 삶을 옭아매는 무언가다. 이렇듯 ‘나’를 포함한 여성들이 사회에서 갖춰야 할 근태란 부단히 노력해도 늘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규율의 산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악착같이”(94쪽) 워킹맘 생활을 이어 나가던 중 2년간의 해외 파견 근무를 끝내고 돌아온 ‘나’에게 “완전히 다른 존재”(93쪽)로 변해버린 아이가 “씨발년아. 버리고 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엄마 노릇이야.”(94-95쪽)라는 폭언을 퍼붓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는 상황은 최종적인 평가표와도 같다. “엄마 노릇”에 미달한 “씨발년”. 그러면서도 분노나 억울함보다는 “저를 버리고 갔다는 말”(95쪽)에 대한 죄책감을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위치야말로 ‘나’가 도달하고야 만 곳이다.
젊은 술집 직원인 ‘엘리사벳’은 ‘나’를 어두운 골목길 한가운데서 빛나는 ‘제비 뜨개방’으로 인도한다. “‘가성비’가 좋다”(90쪽)는 이유로 삼십대 의사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던 외국인 여성 엘리사벳, “제 자식 버린 년”(99쪽)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주인과 주인의 어머니가 모인 이 뜨개방에서 여성들이 함께 팥죽을 나눠 먹으며 동지 밤을 나는 이야기는 삶을 살 만하게 만드는 온기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소설은 외국인 여성 ‘내니(nanny)’로 일했던 엘리사벳과 ‘나’의 묘한 친밀감과 함께,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나’를 대리해 수행한 돌봄 노동을 “‘시세’보다 넉넉히 계산”(94)한 비용과 맞바꾼 덕분에 ‘나’의 직업적 성취가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 역시 놓치지 않고 그려낸다. 공적 영역에 진출해서도 양방향에서 착취당하는 여성들의 처지와 돌봄의 임금 노동화로 인한 여성 계급 간 책임의 불균등한 전가, 여전히 가정 내에 한정해서 다루어지는 돌봄 노동의 사적이고 낮은 위상 등을 짚는 작가의 시선은 예리하고 서늘하다.
이렇듯 여성은 가정의 수호와 건강한 개인을 양육할 의무를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재난과 병폐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아버지의 경우와 달리 어머니의 성과는 아이와 가정을 방치한 자격 미달의 증표가 된다. 그런데 모성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어머니를 대속의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사회는 무엇을 은폐하고 있는 것일까. 여성들이 모든 불행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이 현상 앞에서, 재클린 로즈의 고찰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특히 파괴적인 형태의 사회 비판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확실한 전술”6)이라는 것. 즉 어머니를 숭배하는 동시에 혐오의 대상으로 삼아 세계의 부당한 면을 감추는 방식이야말로 질서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러니 이런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가능할 리 없는 완벽한 근태를 요구당하며 내몰린 여성들의 만남이 털실처럼 포근한 위로만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완벽함에 대한 기대와 강박은 돌보는 대상에 대한 분노 혹은 다른 여성들에 대한 책임 전가로 미끄러지기 쉽다.
특히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주부들에게 엄마의 자격을 묻는 근태 조사는 더욱 가혹하게 치러지기도 한다.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는 아이를 기르는 여성들이 서로를 ‘우리’라고 느꼈던 날들과 더불어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그것이 얼마나 연약하고 불안정한 관계로 드러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은 당시의 격리 상황을 엄마 된 여성들이 지닌 고립의 기억과 겹쳐 낱낱이 펼쳐 놓는다. ‘나’(지원)와 ‘미예’ 그리고 ‘수라 언니’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기르는 주부들로 십 년 넘게 절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친상을 당한 미예를 위로하기 위해 만난 마지막 모임에서 수라 언니의 남편으로부터 전파된 전염병은 이들을 갈라놓는다.
그런데 소설은 이 불화에 바이러스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음을 밝혀낸다. 밀접 접촉자가 된 ‘나’는 소설의 서두부터 말미까지 ‘격리의 밤’과 함께 찾아온 고립감을 주의 깊게 되짚어 본다. 처음 겪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는 묘한 “기시감”(103쪽)을 느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나를 구하러 달려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고립감”(같은 쪽)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순간 몰아닥친 기억들은, 모성을 지배하고 관리하기 위해 포함하는 한편으로 혐오하고 단절시키는 현실을 되새기게 만든다. “십육년 전 가을, 산부인과 회복실에서 보낸 어떤 고립의 밤”(104쪽)에 오직 통증과 공포만이 지배하는 시간을 홀로 견딘 ‘나’는 “아이를 낳은 여자가 아니라 그저 공포에 집어삼켜진 조난자”(106쪽)로 자신을 기억한다. 모성의 신화를 배반하는 이 격리의 경험은 “한밤중에 깨어나 칭얼거리는 아이의 입에 정확히 젖병을 물리는 일 말고 내 손이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의 가능성”(107쪽)에 두려움을 느꼈을 때, 남루한 행색으로 자유롭게 내달리는 아이를 돌보면서 “왜 저러고 사냐?”(108쪽)라는 말을 들은 순간, 맨발로 선 베란다에서 “높이와 충격을 가늠”(109쪽)해보던 날처럼, 평온해 보이는 일상 뒷면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 한번 증명해보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음에도 “한결같이 증명의 압박”(115쪽)을 느끼는 엄마 된 여성들의 고립은 모성의 제도화가 질서를 매끄럽게 유지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수라 언니를 향한 미예의 격앙된 몰이해의 태도 역시 “아버지 장례 치른 지 얼마나 됐다고 어디서 정신없이 처놀다가 중간고사 앞둔 아들한테 바이러스나 옮기는 형편없는 엄마”(120쪽)로 질책받는 데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이 자꾸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까? 우릴 자꾸 고립시키고, 왜 저러고 사나 싶게 만들고, 경멸하기 좋은 얼굴로 변모시키고, 끊임없는 자기증명의 압박을 가하는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재난의 한복판에서 천근만근이 되어버린 아이를 업고 달리는 (그러나 달리지 못하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 걸까? 이 바이러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120~121쪽)
우리는 연결의 시대에도 언제나 여성들을 외따로이 존재하도록 만드는 이 병의 이름이 제도화된 모성과 고정된 여성성의 강요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심문과 처벌 그리고 불화만이 마련되어 있는 걸까. 낙담하게 되는 그 순간 이주혜는 “자기증명의 압박을 가하는 이 병의 이름”, “이 바이러스의 진짜 이름”을 묻고 또 묻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더 읽어낸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7)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안간힘을 다해 질문하게 만드는 이 힘은 고립의 기억과 함께 찾아온 다른 가능성들에서 배태된 것이다. 사건처럼 찾아온 기억들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우리’에 대한 회의뿐만 아니라 “그런 시간을 통과해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109쪽)는 공유된 경험과 “우리가 우리라서, 우리 곁에 서로가 있어서, 아찔하게 좋은 시절”(117쪽)에 대한 회상도 들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 이 병을 앓을 것이다”(122쪽)라는 ‘나’의 선언은 이글거리는 불화의 한복판에서도 반목하게 만드는 폭력을 직시하고, 함께 앓고 견디고 버티며 살아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계속된 질문을 통해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또 다른 여성이 「아무도 없는 집」에도 등장한다. ‘규’는 분쟁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지내는 산부인과 의사다. 규의 남편이자 해부학 교수인 ‘녕’이 “해부학은 ‘왜’라고 물어보는 학문이 아니”(53쪽)라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이해”(54쪽)하는 학문이기에 “왜냐고 묻지 마라. 그냥 받아들여라.”(같은 쪽)라는 말을 착실히 따르는 사람이라면, 규는 해부용 시체 앞에서도 “가장 질문이 많은 학생”(52쪽)이었다. 그리고 둘은 아들 ‘원’이 열여섯 살에 자살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규는 언제나 자격 미달의 엄마라는 평가에 내던져진다. 규가 사는 빈축들은 전부 그녀가 불량하다 못해 실패한 엄마라는 평가로부터 온다. 녕은 “제 머리를 스스로 박살 낸 건 원인데, 미칠 듯이 규가 미웠”(56쪽)기에 “네가 그러고도 엄마냐?”(42쪽)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고, “제 자식 잡아먹은 년이, 무슨 염치로 남의 자식을 살리겠다고”(47쪽)라는 악담은 규조차도 자신을 비난하게 만든다. “자격은 규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단어였다.”(43쪽)
그러나 중요히 되짚어봐야 할 사실은 원의 죽음 앞에서도 “왜, 그랬대?”(57쪽)라고 힘겹게 물었던 규가 늘 질문하는 방식으로 자기 몫의 사랑을 실천해왔다는 것이다. 규는 죽음이 빗발치는 곳에서 엄마가 되려는 타국의 여성들에게 “아무렇게나 낳고 죽이고 싶지 않으면”(58쪽) 무구함이라는 무지에서 벗어나라고 소리치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라고 중얼거리며 원의 “고통의 기원”(58쪽)을 더듬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59쪽)였던 녕과 달리 임신과 출산의 두려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던 규의 현실이 함께 있다.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느꼈던 공포, 피임 실패와 낙태 중 “산부인과 의사에게 덜 쪽팔리는 선택의 결과물”(55쪽)로 태어난 아이를 외면하게 된 이유들, 한밤중에 남몰래 원을 찾아가 빈 젖을 물리면서도 아이가 낯설고 예쁘지 않아서 “푸슬푸슬 부서져 내리던 그날 밤의 마음”(60쪽) 같은 것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게 삭제된 고통의 기원들이다.
규는 원의 죽음 이후 “어디에 눈길을 주어도 익명의 고통, 몰개성의 고통이 낭자”(44쪽)한 분쟁 지역에 남아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고, 그저 감내하라고 윽박지르는 질서에 역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간다. 탄생과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산소를 공급받던 구멍이 막히며 심장에 남는 흔적인 “타원 오목”은 “몸이 간직한 먼 과거의 기억. 폐기의 흉터”(51쪽)로, 인간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누구도 보편성의 이름 아래 자신의 삶을 삭제당해선 안 된다. 따라서 실패한 엄마, 불행한 아이라는 도식을 파하고 원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기 위해 규는 “하나이자 둥근 우주”(65쪽)인 원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고통의 원인들을 파헤치며 각각의 우주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켜낸다. 원의 탯줄을 끊은 손으로 시체를 직접 봉합하며 시작과 끝, “원의 알파와 오메가”(56쪽)를 이미 마무리 지은 녕과 달리, 규는 원을 “또 하나의 우주가 생겨”(65쪽)나는 다채로운 순환으로 계속해서 불러들인다.
그러니 질문하는 이 여성들의 목소리는 비단 어머니가 된 이들의 해방에만 공헌하는 데 그치는 것일 수 없다. 욕망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미래를 단일한 모양으로 주조하는 억압은 뭇 여성의 삶 전반에 음습하게 퍼져 있다. 그 영향력 아래에서 그들은 추문과 혐의에 시달려 서로 미워하거나, 자식과 불화하고, 어머니가 되지 않기 위해 호명에 불응하면서도 자기검열을 저버리지 못해 죄책감 속에 살아간다. 따라서 더 많은 이들이 증명의 요구를 향해 도리어 그것이 우리를 감싼 세계로서 충분한 자격을 가지는지를 역으로 질문할 때, 삶은 다른 숨을 토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성을 포함해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숨통을 터주는 일이기도 하다. 모성의 형상을 뒤틀고 죄책감과 헌신에 국한되지 않는 넓은 영역들로 애정의 위력을 개방하는 이 사랑이 더 멀리 퍼져나갈 수 있도록, 이주혜는 그 생경함 앞에서 결코 움츠러드는 법이 없다.
3. 속죄하지 않는 가부장의 망령과 애착의 궤도 변경
사라 아메드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으로 개인 책임주의를 거론하며, 이를 매끄럽게 직조하는 통치술로 ‘감정 정치’의 시행을 주장한다.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경유하는 아메드에 의하면, 어떤 대상이 본래 특정한 속성을 지닌 것처럼 물질화되는 과정은 정동적 가치가 사회의 합의를 얻어 굳어지며 사람들에게 내재화되는 경로를 따른다. 감정을 느낀다는 건 대상으로부터 어떤 느낌을 받는 일인 동시에 대상이 그런 감정을 촉발하는 원인이라고 여기는 해석을 함께 수행하는 일이다. 주체는 대상으로부터 마땅히 어떤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됨에 따라 특정한 방향으로 정동을 강화하고 투자한다. 이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특정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을 거쳐 감정을 ‘형성’했을 때조차도 그것을 역으로 대상의 속성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즉, 감정 정치를 통해 구축되는 정치경제적 구조의 내부에서는 사실상 감정이 아니라 특정 인상을 지닌 ‘대상’이 순환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어떤 감정은 권력의 일종이 되고, 해당 감정을 촉발하는 대상은 일방적으로 재단된다. 인종차별과 젠더차별이 인식론적인 대응에 앞서 직관적인 혐오와 불쾌의 반응과 맞닿아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감정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기능하면서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질서를 생성하는 기제로 작동한다.8) 그러니 사회로부터 무언가에 마땅히 애착을 쏟아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을 행복의 대상으로 삼아 정동을 투자하는 일은 주류의 해석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는 일종의 생존 전략이 아닐 수 없다.9) 감정의 배후에는 특정한 해석이 반복·축적된 기억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주혜의 소설에서 거시적인 정치적 사건들과 개인의 일생사를 겹쳐 놓는 방식을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고통에는 거듭된 감정 정치의 수행 아래 역사적이고 복합적으로 물화(物化)되어 온 배경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유독 두드러지는 사건이 바로 독재자의 죽음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절대로 속죄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상처에 무감할 수 있는 위치야말로 그들이 거머쥔 특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속죄하지 않는 독재자들의 망령은 끈질기게 남아 세계를 배회한다.
『자두』는 에이드리언 리치 산문집의 역자 후기를 겸하여 쓰였다는 점 외에도 김일성의 사망으로 서두를 여는 자못 색다른 형식을 취한다. 1994년의 여름날 독재자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던 ‘나’(은아)에게 그날의 기억은 “순전히 기쁘거나 후련한 것 같지는 않”(24쪽)아 보이던 버스 기사 아저씨의 모습과 낯선 여자의 반응을 보며 몸을 떨던 순간으로 남아 있다. 이후 ‘나’는 담도암에 걸린 시아버지를 남편 ‘세진’과 함께 간병하는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소문자 가부장제”10)가 더욱 은근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세계 내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대문자 가부장인 독재자의 죽음 이후로도 예속적인 동조에 의해 유지되는 규율은 “어설프고 유치한 촌극”(93쪽)처럼 아슬아슬하게 맥을 이어간다.‘나’는 “로맨스 그레이의 현신, 신사 중의 신사, 며느리도 딸처럼 대하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95쪽)이었던 시아버지의 섬망 증세를 통해 그가 사실 “박사님과 결혼하면서 열쇠 세 개를 해왔나? 애를 낳았나? 저 애 때문에 우리 집 귀한 손이 끊겼다.”(100쪽)라는 본심을 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렇듯 가부장만이 일방적인 시혜와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위치를 점하는 위계 구조에 따라 여성은 “죄도 없이 용서받는 기분”에 더해 “죄도 없이 가혹한 형벌”(101쪽)을 받아야 하는 배역에 강제된다. 단란한 가정의 일원으로 “오늘이 어제보다 더 행복한 나날”(31쪽)을 보내고 있다고 의심치 않았던 ‘나’의 평화는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자두』가 보여주는, “한통속”(104쪽)인 가부장적 혈연가족으로부터 배척받는 외부인인 간병인 ‘영옥씨’와 ‘나’의 여성 연대의 가능성은 질병과 돌봄에 대한 관심이 요청되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주목받은 바 있다. 그런데 영옥씨와 ‘나’가 서로를 폭력에서 구해낸 뒤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말해버린 기분”(106쪽)을 느낀 순간과 그에 이어지는 ‘나’의 안부 묻기의 의미를 논하기에 앞서 다시 살펴야 할 분열적인 지점들이 있다.
“‘우리’란 과연 누구부터 누구까지를 포함하는 것일까”(117쪽)를 곱씹으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많은 것을 용서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그런데 이런 ‘나’의 노력이 응당 느껴 마땅한 감정들을 내리누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원망이 치밀 때마다 “이제 제가 용서할 차례”(115쪽)라는 말을 “주문”(115쪽)처럼 되뇌던 ‘나’에게서 남성 중심 사회의 문법을 지나치게 성실히 답습한 여성의 분열증적인 면모를 읽어내는 일은 과한 억측인 걸까. “용서를 받았고 용서를 했”지만 사실 “용서로 위장”(118쪽)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끝내 “아버님, 잘 가요. 다정했던 기억만 간직할게요.”(120쪽)라며 이중의 짐을 감내하려는 ‘나’의 이 절제와 순치는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부장제의 작동이 “얼마나 구성적이고 담론적이며 허구적인 것인지를 제시하는 은아-영옥의 경계 허물기의 서사”11)로 보거나, “혈연가족주의의 폭력을 겪은 이들이 나눈 공감”인 동시에 “연약한 생명 존재로서의 인간을 마주한 과정에서 얻게 된 유대”12)로서 돌봄에 대한 상상력의 확장으로 여기는 해석에는 보다 신중히 도달해야 할 듯하다. 바깥에 선 여성 인물들에게 경계는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이 발각된 이후에도 진정한 애도조차 가로막는 더 큰 위력으로 되돌아오고, 용서에 번번이 미달하고 마는 ‘나’의 모습은 여전히 돌보는 자의 개인성과 구체적 맥락이 쉽게 지워지는 상황 속에서 돌봄을 공적 윤리로 손쉽게 확장하는 일을 재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13)
그렇다면 이제 여성들로 하여금 규율과 질서를 당연히 감내하게 하는 감정의 순환이 ‘무엇을 하는가’를 문제 삼는 건 어떨까. 사회의 총력을 일원화하는 독재 체제처럼, 짓지도 않은 죄를 용서하는 시혜를 베풀고 은근한 질책으로 내면화된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배제의 방식으로만 여성을 포함하는 시아버지의 행동은 특정 대상에 정해진 감정을 투자하도록 종용하는 정치의 실행과 긴밀하게 호응한다. 그리고 이 작동의 과정을 소상히 꿰뚫는 자만이 정해진 경로를 변형할 수 있을 것이다.시아버지가 섬망 증세 속에서 그토록 탐냈던 검붉은 자두는 아내의 재생산 능력을 전용하여 얻은 “하나뿐인 태양. 유일신”(132쪽)인 세준과 동일시된다. 이렇게 자두=태양(sun)=아들(son)의 구조가 성립될 때, “시아버지의 유일신을 탐한 배덕한 자”(같은 쪽)인 ‘나’와 같은 여성들은 소설의 원제목처럼 부정한 ‘자두 도둑’14)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와 영옥씨가 공유한 찰나의 순간은 부당한 책임을 진 여성들의 만남과 이해로 한정하기보다, 허락되지 않은 감정을 향한 갈망과 그에 대한 목격으로 확장해서 볼 때 더욱 풍부해지는 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혼 후 홀로 떠난 여행에서 ‘나’가 말 없이도 모든 것을 이해받는 기분을 공유한 영옥씨에게 “아침에 잘 일어나고 있나요?”(133쪽)라고 적은 엽서를 보내는 것은, 영옥씨가 “단 한 번 불쑥 내비친 날것의 감정”(71쪽)을 목격한 데 대한 위로와 안부로 애착의 방향성을 재조정하는 순간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모님’과 ‘여사님’이라는 “터무니없는 호칭을 주고받”(59쪽)는 역할극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고유한 감정과 욕망을 추구하는 길로 향하는 것이다.
차별적 질서에 애착하면서 분열하는 여성들은 이주혜의 소설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다. 「오늘의 할 일」에는 가부장적인 “시간과 세계를 완성”(10쪽)하기 위해 딸들에게 사계절의 이름을 붙여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11쪽)에 사로잡힌 한편으로, 혼외자를 낳고도 무책임하게 회피한 아버지를 어떻게든 사랑하기 위해 남동생 ‘겨울’을 대리적 부친 살해15)의 희생양으로 박해한 세 자매가 등장한다. 그러나 자매가 삶 속에서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누군가를 외면할 때마다, 겨울은 상대의 얼굴을 하고 되돌아온다. 그 앞에서 무너지는 자매의 모습은, 속죄하지 않는 질서에 폭력의 책임을 묻지 못할 때 그것이 더 약한 존재들에게 부당하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과 공명한다.
이처럼 질서 가까이에서 그것이 약속하는 미래만을 추구할 때 누군가의 삶은 스러지고 만다는 사실을 이주혜는 잊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 운동권의 후일담에 가까운 「물속을 걷는 사람들」은 이처럼 이상적인 연대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애착의 양가성을 깊게 되새기는 ‘히읗’의 이야기다. ‘나’가 오래 앓고 있는 절박성 요실금은 애써 눈감으려 해도 새어나가는 연대의 결절 지점을 보여주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나’는 대학교 일학년 때 농활대와 마을 청소년들의 불화 속에서 여학생에 대한 윤간 협박이 벌어지면서 오직 타의에 의해 “누군가의 사냥감이자 누군가의 수호 대상”(183쪽)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운동권 내부의 젠더 위계를 뚜렷하게 경험한 그때 ‘나’는 급작스러운 요의와 맞닥뜨리고, 이는 이후에도 “기대했던 환대가 사라”(186쪽)질 때마다 되돌아오는 감각이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배제 없는 연대의 허상을 고발하는 실금 행위가 남성중심적 구조를 향한 여성 연대 내부의 (무)의식적 애착 역시도 함께 보여준다는 점이다. 히읗은 성관계를 한 적이 없는 몸에 대한 자신의 “기이한 자부심”(183쪽)을 목격하고, 진압대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그날 밤’ 절친한 ‘니은’에게 기대했던 환대가 남자 선배의 운동화 앞에서 흩어져버리고 만 순간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미친년이고 재수 없는 년이고 씨팔년”으로 불리면서도 “처녀인 게 부끄럽고 처녀가 아닌 게 수치스러웠던 미숙한 계집들”(189쪽)로 살 수밖에 없었던 날들을 고백하는 히읗의 발화는 진솔하고 묵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가능성 앞에서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않게 만드는 동력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뒤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189쪽)는 자각이다. 규범을 향했던 애착의 궤도를 사라진 이에게로 조정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추동하려는 변형은 그래서 또다른 시작이 된다. 그렇기에 독재자의 죽음에 혼란스러워하며 떨던 소녀가 근작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에 이르러 “씨발새끼가 사과도 않고 죽어버렸어”(9쪽)라고 분노를 표명하는 중년의 여성이 되는 과정은 눈여겨볼 만하다. 다른 여성을 스토킹하고 폭력을 행사해 고발당한 남편 ‘석구’와 이혼하고 딸 ‘해준’과 불화를 겪는 ‘나’는 일기 쓰기 모임에서 “내가 기록한 나와. 내가 기록 속에 가두어놓은 나와.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매는 나와”(23쪽) 헤어지기 위해 허구적 소설과 사실인 일기 사이의 어떤 글을 쓴다.
‘나’는 왜 자신과 헤어져야만 할까. 19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상황들을 함께 서술하는 소설에서 “어쩐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 생”(33쪽)긴 ‘시옷’을 분신으로 삼아 이어가는 ‘나’의 글쓰기는 누구도 듣지 못한 개인의 일생과 역사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결별해야 할 자신은 더 큰 가치를 위해 경직되어야만 했던 나이며,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글쓰기는 누군가의 면면에 세심히 공들이는 작업이다. 보편의 폭력이 대의라는 진실로 둔갑하여 개인의 말소를 불문율로 여기는 현실 속에서, ‘나’는 “나라를 걱정하며 모인 이 안에서 왜 나만 개인적인 일로 상처받고 분노하는지, 왜 저들은 내가 아닌 투표만 궁금해하는지”(120쪽)를 의문시하고, 과거에는 곧잘 내뱉었던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니까요.”(12쪽)라는 페미니즘의 구호 앞에서도 종종 망설인다. 변혁을 위해 다시금 개인의 피해와 고통의 역사성을 보편적인 피해로 납작하게 만드는 순간, 거부하려던 질서와 꼭 닮은 폭력을 반복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일기 쓰기는 합의된 사실관계에 얽매이기보다 “기억과 결합한 감정이 중요하게 작용”(256쪽)하는 방식을 따라가며 기억의 주체를 다분화하고 삶의 가능성을 제약 없이 열어 놓는 “복수의 자서전”(340쪽)으로 완성된다. 괄목할 만한 지점은 이러한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함께 의지하며 지나온 ‘윤수’의 자살 앞에서, ‘나’는 소외된 이의 비참한 죽음으로만 기억되기에는 “어이없게 입체적인 새끼”(336쪽)인 그의 면모들을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동생 ‘수호’와 함께 윤수에 대한 서로의 기억을 주고받는다. 소원을 빈 어금니가 시궁창에 빠지자 “불길한 어금니에 어딘가 괜찮아 보이는 운명을 점지해주고 싶어서” 자신만의 어금니 신화를 새롭게 꾸며냈던 “윤수의 안간힘”(334쪽)을 되새긴다. 모든 것을 정해진 방향으로 투자하라는 강요에 대해 “나는 거부한다. 투자를, 안녕을, 미래를.”(143쪽)이라고 외쳤던 ‘나’의 ‘미래 없음’은 “미래 기억의 질을 최대로 높이는 방식”(131쪽)인 이 쓰기를 통해 욕망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적극적인 ‘미래 바꿈’으로 나아간다. 강제되었던 삶의 경로를 자신과 타인의 무궁한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이 움직임이 지금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
4. 붉은 언어로 쓴 사랑의 이름
상처 입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모두의 슬픔을 하나로 전유하지 않는 이주혜식의 세심한 듣기와 쓰기는 어떤 새로운 “정치적 정언명령”도 만들어내지 않는 방향으로 “각본의 변화”16)를 모색한다. 고통의 원인에 대해 질문하고 분노하는 일은 정치하게 퍼져 있는 기존의 정상성과 규준을 책문하고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재창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끈끈하게 달라붙는 이 과정은 타자를 자신의 내부로 집어삼키는 것을 경계하고 상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있게 만든다. 희망은 규범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이라는 유토피아적 허구로부터가 아니라, 규범을 겪어내면서 형성하는 또다른 생의 여지에서 발생한다. 이를 위해 이주혜는 경계 내부에 뛰어들어 발 디딜 곳 없는 자들을 위한 자리를 내고 간절한 목소리로 잊힌 자들을 부른다.
이 염원이 고요한 세계의 한복판에 「누의 자리」를 내어놓았으리라. 소설은 “내 자리는 어딘가요?”(16쪽)를 버릇처럼 묻던 연인에게 ‘누의 자리’라는 독특한 영역을 선사하려는 ‘나’의 행적을 그린다. ‘나’는 생전에는 왕에게 괄시당하고 죽어서는 일방적인 상찬과 함께 미래의 왕을 위해 한쪽이 비어 있는 무덤에 묻혀야만 했던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왕비의 곁에 ‘너’의 유해를 말 그대로 “박아 넣”(12쪽)으려 분투한다. 이 기이한 행동은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어 방황하면서도 언제나 한 존재의 무게와 가치를 보호하고자 했던 ‘너’의 일생을 의미화하려는 ‘나’의 애도의 방식이다. 성추행 피해자이자 부당한 가사와 양육 노동의 짐을 져온 내밀한 사정은 전연 고려되지 않은 채 ‘너’는 “대학 강사 출신 박사, 그리고 이혼(당)한 여자라는 너의 배경”(17쪽)으로 인해 남에게 기생하는 “빨판”(18쪽)이라 불리며 폄하된다. 또한 유일하게 ‘너’의 많은 부분을 이해한 연인이었지만 “가족이 아니라서 의견을 말할 수 없고 너의 마지막을 실은 배에 올라타지도 못한 나”(21쪽) 역시 ‘너’와 별반 다르지 않게 온전히 속한 곳 없는 여성이다.
‘너’가 들려준 왕비의 무덤 이야기와 맞물린 ‘너’와 ‘나’의 사랑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당연시되어 온 여성들의 자리 없음에 퀴어의 사랑을 향한 차별이 더해진 ‘이중의 자리 없음’이라는 현실의 부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삶 속에서 ‘너’의 오랜 연구 주제이자 ‘나’와 ‘너’의 관계를 재정의한 ‘누의 자리’는 몫 없는 이들의 자리를 ‘너’ 스스로 분명히 “언명”하여 이룩한 성취다.
내게 ‘누’는 ‘누구’가 아니야. ‘누’는 ‘너와 나’야. 너와 나라면 우리라는 말이 있지 않으냐고 내가 물었고 너는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용량이 큰 말이야. 우리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너무 많기도 하고 하나도 없을 때도 있어. 나는 우리 속에 들어간 적이 별로 없어. 누구도 나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환대해주지 않았어. 하지만 넌 달라. 넌 나를 우리라고 불러주었어. 그런 너를 흔한 말 속에 가두고 싶지 않아. (…) 이제 ‘누’는 너와 나만을 위한 단어야. 내가 그렇게 언명했어.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함께 아름다운 춤을 출 거야. (24-25쪽)
“누구의 옛말”인 ‘누’는 “의문형 인칭 대명사, 혹은 특정인이 아닌 막연한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이기에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누의 자리는 공백”(23쪽)이다. 오랜 시간 이에 관해 골몰해온 ‘너’는 최종적으로 ‘누’의 의미를 “너와 나”로 재정의한다.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했던 ‘너’는 ‘누구’나 ‘우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보편의 이름 하에 개인들을 한데 묶어버리거나, 동질성을 보유한 이에게만 자리를 내어주는 배타적인 집단성에 기초한 이 “용량이 큰 말”들의 폭력에 짓눌려온 사람이다. 따라서 ‘너’는 상대를 흡수하거나 고유성을 삭제하지 않고 “너와 나”로 따로 또 함께 존재하는 ‘누의 자리’에서 ‘나’와 관계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다. 각각의 특별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맞이하는 이 자리야말로 지워졌던 존재들이 되살아나는 장소다. 그렇기에 “왕을 따돌리고 느긋해진 한 여자”(32쪽)와 함께 휴식할 ‘너’를 상상하며 사계절 내내 그곳을 찾겠다는 ‘나’의 다짐은, 존재를 간단히 정의하는 방식으로 말끔히 지워버리려는 세상에 맞서 어떤 상으로도 가둘 수 없는 ‘너’의 의미를 거듭 구명하겠다는 또다른 언명이 된다.
이렇듯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익명성이 오히려 존재의 망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전에 없던 의미를 명명하는 두 사람처럼, 이주혜는 기존 질서에 의해 낙인찍힌 모든 오명을 애써 “지우지 말고 칠”(「꽃을 그려요」, 195쪽)해버리기로 작정한다. 흔적을 닦아내는 행위 자체가 일방적인 명명의 권위를 인정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으니 말이다. 번역하는 동시에 창조함으로써 의미를 무한의 극으로 몰고 가는 이주혜식 글쓰기의 힘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강제로 부여받은 이름을 뒤트는 정확한 명명이 기존의 이야기를 깨트리는 해방의 첫 단계라면, 새로운 호명은 잠들어 있던 것을 깨어나게 하는 창조의 작업이다.17) “처음 이름을 바꿀 권리가 우리에겐 있다”18)는 작가의 이 반가운 믿음은 “애정으로 붙이고 또 붙인 이름만이 길어질 수 있고, 우리는 마음을 다해 긴 이름을 부르는 수고로움을 자처”19)하겠다는 다정한 결단으로 이어진다. 이에 인물들은 고양이의 행복을 빌며 “구루미 라떼 아로니아 바로네즈 3세”(「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153쪽)라는 기다란 이름을 함께 붙여주고, 변화를 가져오는 기도의 힘이 “기적이 아니라 간절한 부름에 대한 응답”(「소금의 맛」, 57쪽)에서 온다고 확신하며 어딘가로 가라앉은 이름들을 계속해서 부른다. 평생 “자궁의 무게”(고양이, 137쪽)에 짓눌리고 “몸의 쓸모”(125쪽)를 평가당하며 “죽도록 싫어했던 별명”(같은 쪽)으로 불려야만 했던 이들. “온몸에 소금 알갱이가 묻은 것 같은 까끌까끌함”과 “이상한 만남”(「소금의 맛」, 52쪽)으로 치부되던 누군가의 사랑이 이에 화답하듯 제 빛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간곡한 사랑의 언어는 어쩐지 꽤나 붉은빛을 띠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빛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정도로 눈부신 태양의 광채를 분유한 예의 그 자두나 남성성의 “검붉은 성기”(「여름 감기」, 74쪽)와 같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주혜의 붉은색은 언제나 어둠과 함께 등장한다. 이 낯선 빛의 의미는 「초록 비가 내리는 집」에서 한층 더 선명해진다. 대학 강사로서 자신을 “문헌과 문장 사이를 파고들어 인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31쪽)라고 여기는 ‘손우정’은 임용 자리를 두고 부당한 성적 착취를 요구한 ‘허 교수’와의 사건 이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다. 그런 와중에 도달하게 된 집에서 그녀는 이전 주인 ‘양순덕’이 자식처럼 정성스레 가꾼 백 개의 화분을 위해 식물 돌보는 법을 적어둔 공책을 마주하게 된다. 손우정에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경이로운 세계”(36쪽)와 같은 느낌을 준 이 공책은 평생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했던 양순덕이 유일하게 자기 자신으로서 진실한 애정을 담아 지켜 온 삶의 영역을 언어화한 것이다.
양순덕의 공책에는 자기를 잃어버리는 부끄러운 삶을 거부하고 싶었던 바람과, 자신만의 언어에 대한 열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남편에게 배운 글자를 이용해 거짓으로 그를 높여 쓴 무가치한 유서를 결국 찢어버린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다. 뜨거운 이 감정은 손우정이 읽은 논문 속 신화에서 잔혹한 폭력을 당하고 혀가 잘려 붉은 피를 흘리면서도 “기어이 언어를 찾아낸 필로멜라의 끈기”와 중첩된다. 모든 것을 뒤덮어버릴 만큼 짙은 붉은색 언어로 새로운 삶을 덧칠해 그려내는 열정은 어떤 일렁임을 지니고 있다. 피에 젖은 상처를 붙들고도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붉은 입을 가진 제비가 되어서 노래하는 이 열망 앞에서 어쩐지 숙연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캄캄한 혼돈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농도 짙은 색채에 의해 이미 세계의 끝자락은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 어둠을 헤쳐 나가는 일은 곧 생존을 위한 여정이자 세계를 다시 쓰는 행위와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암 투병의 생존자인 ‘철학자’를 만나기 위해 육지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소 중입니다」 속 ‘시인’, ‘소설가’, ‘번역가’의 여행길 역시 이소(離巢)의 과정, ‘새집’에 비견되는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는 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세상의 끝에 모여 낮에는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배추씨를 뿌리고, 밤에는 밤바다의 심연에 맞서 큰 소리로 시를 낭독하리라 결심한다. 세상의 끝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친구에게로 점점 다가가는 이 거꾸로 된 여정은 정상성의 정치와 효율성의 경제를 정반대로 거스르는 움직임이다. 특히 이들이 각각 말기암을 선고받은 전남편의 시아버지, 홀로 기른 딸, 병든 노견처럼 “서로에게 가장 짐이 된다고 짐작되는 존재”(36쪽)를 떠맡고 있으면서도, 노쇠하고 병든 신체가 곧잘 ‘쓸모없음’과 살아갈 ‘가치 없음’으로 직결되는 신자유주의적 문법의 내부에서 그들이 사라질까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자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역동(逆動)의 역동(力動)이라는 이 신묘한 운동성은 몸소 끝으로 걸어가 기어코 그곳을 시작으로 만드는 힘을 품고 있다.
그래서 “낭독의 빨강 날개”(50쪽)를 달고 어둠을 밝히겠다는 각오는 강요된 미래의 압박에서 벗어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웃고, 함께 만들어 갈 내일을 상상하며 “적어도 오늘의 그들에겐 내일이 있다는 것”(35쪽)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욕의 공동체”인 동시에 “모욕의 공동체”(48쪽)에 속한 이들은 세상 끝에 스스로 멈춰 선 철학자처럼, 붉은 날개를 펼치고 화산으로 날아간 앤 카슨의 작품 속 게리온처럼, 끝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추락하지 않으려고”, “다시 말해 살려고”(49쪽). 그래서 이들은 절대 등 떠밀린 채 벼랑 위에 선 누군가가 되지 않는다.
물론 소설은 죽음을 불사한 새로운 세계로의 이소가 결코 순탄치만은 않으리라는 사실 역시도 잊지 않고 암시한다. 시종일관 어긋나는 셋의 대화와 트렁크에 실린 수상하고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정체불명의 짐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조성한다. 또한 “성장 중인 어린 새”(46쪽)의 위태로워 보이는 이소를 목격한 데 이어 “추락하는 새의 비명”(50쪽) 같은 소리를 내며 발생한 사고는 보이지 않는 어떤 벽을 다시금 실감하게 만드는 듯하다.
그러나 이주혜의 소설 속 붉은빛들은 미력하더라도 언제나 어둠의 한 귀퉁이를 가르며 등장한다. 그것은 “저승길을 환히 밝혀준다”「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 264쪽)는 속설에 의지해 “불꽃보다 더 짙은 붉은색으로”(265쪽) 봉숭아 물을 들인 엄마의 손톱에서 반짝이거나, 한 사람이 입에 문 담배의 불빛을 다른 이가 이어받으며 “어둠 속에서 주황색 불 알맹이 한 알이 또 다른 주황색 불 알맹이를 탄생”(「골목의 근태」, 82쪽)시키듯 은은히 번지고, 동굴 속에서 “불꽃인지 꽃잎인지”(「꽃을 그려요」, 211쪽) 모를 무언가로 피어난다. 그러므로 이 빛에 의지해 나아가는 이주혜는 쉽게 낙관하지 않지만, 끝끝내 절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장 긴 밤 속에서도 반드시 살아남아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길어 올린 언어로 쓰고 또 쓴다. 약동하는 이 사랑의 언어로 새긴 무수한 우주들의 이름을 찬찬히 부를 때, 세계는 조금씩 충만해질 것이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이주혜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자두』(창비, 2020), 「오늘의 할 일」, 「아무도 없는 집」, 「여름 감기」,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물속을 걷는 사람들」, 「꽃을 그려요」, 「그 시계는 밤새 한 번 윙크한다」(『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창비, 2022), 「누의 자리」, 「소금의 맛」, 「골목의 근태」(『누의 자리』, 자음과모음, 2023), 「이소 중입니다」(『현대문학』 2023년 5월호), 「초록 비가 내리는 집」(『여름기담: 순한맛』, 읻다, 2023),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인용시 작품명과 쪽수만 밝힌다.
- 2) 이주혜·이희우, 「인터뷰」, 『소설보다』 2022년 봄호, 문학과지성사, 145쪽.
- 3) 티펜 사모요는 단수, 복수로 쓰일 때 의미 차이를 지니는 프랑스어 sens의 사례를 들며 ‘감각으로의 전환’을 의미와 문자의 관계를 새롭게 현시하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이 전환은 감각과 결합하기 위한 의미로부터의 멀어짐, 결핍된 의미의 보완, 의미 뒤집기를 통해 번역이 텍스트를 기존의 경험으로부터 무한의 창조성으로 이끌고 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티펜 사모요, 『번역과 폭력』, 류재화 옮김, 책세상, 2023, 281-288쪽 참조.)
- 4) 앙트완 베르만,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독일 낭만주의 문화와 번역』, 윤성우·이향 옮김, 철학과 현실사, 2009, 200-207쪽 참조.
- 5) 위의 책, 201쪽.
- 6) 재클린 로즈, 『숭배와 혐오』, 창비, 2020, 41쪽.
- 7) 재클린 로즈, 앞의 책, 28쪽.
- 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44-47쪽 참조.
- 9)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후마니타스, 2021, 80-85쪽 참조.
- 10) 강경석, 「완전한 타인」, 『자두』 해설, 143쪽
- 11) 선우은실, 「세계적 위기의 공통 감각 위에서 읽는 질병 시대의 여성 서사-이주혜의 「자두 도둑」과 이현석의 「너를 따라가면」 읽기」, 『시대의 마음』, 문학동네, 2023, 212쪽.
- 12) 백지연, 「삶의 전환을 꿈꾸는 돌봄의 상상력」,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30쪽.
- 13) 전청림, 「돌봄의 극사적 에로스: 사적 돌봄과 공적 돌봄의 경계에서」, 웹진 비유 2022년 12월호.; 강도희, 「돌봄에 대해 우리가 대화하지 않은 것들」,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70-71쪽 참조.
- 14) 이주혜, 「자두 도둑」,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 15) 황정아, 「절도 있게 끓어오르는 불화의 서사」,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해설, 286-287쪽 참조.
- 16) 사라 아메드, 앞의 책, 2023, 328쪽.
- 17) 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김명남 옮김, 창비, 2018, 8-9쪽 참조.
- 18) 이주혜,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에트르, 2022, 81쪽.
- 19) 위의 책,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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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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