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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창작과비평 | 2024년 여름호(제204호)

불가피한 미래란 없다 : 박문영과 정지돈의 최근 소설

김다솔 문학평론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불가피한 미래란 없다: 박문영과 정지돈의 최근 소설

김다솔

 

 

1. 누구를 위한 기술력과 법안인가?

 

지난 2, 정부는 법률적 근거에 기초한 제도가 마련되기 전까지 공공장소에서 실시간 얼굴인식 기술을 도입하거나 활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1) 구성원들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하기에 해당 기술을 금지해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정부가 수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과정은 법무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출입국 심사를 고도화한다는 명목으로 2019년부터 진행한 인공지능 식별·추적시스템 구축 사업에서 개발을 명분 삼아 1억 건 이상의 내·외국인의 생체정보를 위탁한 민간 개발 기업에 무단으로 유출한 참담한 사태로부터 비롯되었다.2)

딥러닝 기술의 빠른 성장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 산업이 팽창하는 가운데 기업들과 정부 역시 여러 영역에 해당 기술력을 앞다투어 도입하는 추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문제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3) 이에 대응해 미국은 일찍이 국가 인공지능 이니셔티브법을 제정하여 인공지능 산업 지원과 규제 근거를 마련했고, 유럽연합(EU)은 지난달 규제 강도가 높은 인공지능법(AIA)을 가결하였다. 개인정보 침해를 제재한다는 명목으로 세계의 각 정부들이 국경 너머의 기업과 기술력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법적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상황이 기술의 무분별한 활용을 막는 한편으로 빅테크와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근거로 귀결될 가능성 역시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4)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가 말한 대로, 개인들에게서 수집된 데이터가 곧장 자본이 되는 감시자본주의 시대에서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법률 제정은 초국적 감시 형태를 제도화할 위험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5) 주보프에 따르면 감시자본주의는 인간의 경험을 원재료로 삼아 데이터로 번역한 뒤, 일부는 서비스 및 상품 개선에 사용하지만, 나머지는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 예측을 상품으로 만드는 데 활용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권력은 소셜미디어와 의료서비스, 스마트홈 등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소통과 편리함을 자처하며 개인의 신체뿐만 아니라 감정, 성격과 같은 내적 경험까지도 데이터로 변환한다. 이 과정은 데이터의 원재료가 되는 개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기에 문제적이다.6)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예측상품을 더 많이 판매하기 위해 개인의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수정하고 조종하는 시스템으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이다. 예측이 곧 돈이 되는 사회에서 이제 개인은 그저 정보의 자원일 뿐이다. 따라서 친숙한 얼굴로 다가오는 기술력 이면에 숨겨진 무분별한 정보 착취와 개인 주체를 말살하려는 야심을 파악하고 대처하려는 시민적 성숙과 경각심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최근의 한국소설에서도 우리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은밀히 조종하고 형성하는 권력을 향한 비판적 시선이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박문영과 정지돈은 기업과 국가가 가진 감시 권력의 위세를 서늘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이에 포섭되지 않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기백을 발휘한다. 이 글은 감시자본주의 내부에서 말소되어가는 개인들의 모습과 이를 나름으로 재건하려는 노력을 함께 그리는 문학적 분투를 살펴보며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2. 초연결 시대의 관계 맺기와 진짜 만남의 추구 : 박문영 패나

 

박문영의 첫 소설집인 방 안의 호랑이(창비 2024)에는 그동안 SF장르를 통해 문명비판적 상상력을 다채롭게 구축해온 작가의 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번 소설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어떤 때보다도 서로에게 닿기 쉬워 보이는 초연결의 시대에 오히려 타자와 진솔한 관계 맺기를 회피하는 인물들에 대한 세심한 포착이다. 이들은 대상과 직접 맞닿기보다 기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촉하기를 택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데이터 객체이자 그것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사회 구조다. 감시권력은 개인을 디지털화된 객관적인 통계 수치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고 시스템에 빠르고 정확하게 반응할 뿐인 자동반사의 대상으로 상정한다.7) 자신이 집단 속 무수히 많은 개체 중 그저 하나일 뿐이라고 반복적으로 학습하면서 격하를 내면화한 이들은 라고 할 만한 능동적인 행위자로서의 감각을 상실한다.

이러한 내용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패나를 주목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인간의 내적인 감정과 감각까지 추출하여 데이터 자본화하는 감시자본주의하에서 세계와 타인을 자주적으로 접할 가능성마저 약탈당한 인물들의 현주소를 묘파한다. 주인공인 는 증강현실 체험기기에 중독된 아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아날로그 작곡을 가르치는 강사다. 돈이 주된 목적인 직업 생활을 이어가던 는 청소년 치유캠프에서 실감기기인 패나에 중독되어 남자 아이돌의 삶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수이를 만난다. 패나는 발신자의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 정보를 수집해 수신자에게 전달하여 직접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연계하는 실감기기(243), “그 사람 자체가 되는 감각을 느끼게(244) 해주는 장치이다. 소설은 일대일로 작곡 수업을 진행하며 수이와 특별한 교감을 나누다가 결국에는 이 관계로부터 도망치듯 멀어지고 마는 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낸다.

소설의 중요한 성취 중 하나는 패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관련한 모든 현실의 실제들을 자본 창출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윤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도록 행동하게 만들며, 이 과정에서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를 영구히 순환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임을 폭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은 감시자본주의의 두 가지 핵심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하나는 데이터의 원재료로 철저히 도구화된 개인의 처지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 형성에 필수적인 직접적 경험을 빼앗기고 사회에 의해 특정 방향의 감각만을 겪도록 강제되면서 발생하는 자기다움의 소실이다.

패나가 보장해주는 막대한 부는 공인들이 앞다투어 생체정보를 등록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이들이 치르는 정서적 댓가는 적지 않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불특정 다수에게 일정 부분 감시당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패나에 등록한 셀럽은 팬들의 수 외에 그들 각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248). “공인 말고 가까운 사람 감각을 궁금해하는 건 섬뜩한 (…) 범죄(247)로 여겨지지만 자신의 생체 데이터를 이용해 수익을 내는 이들에게 사적 영역은 보존되지 않는다. 게다가 패나를 통해 분석된 정보는 다시금 소비자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경험을 차단한다.

패나의 어원이 피난처 그리고 은신처인 동시에 자아를 잊고 신과 합일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248)는 대목은 필연적인 자기상실을 예시한다. 자기 자신으로서 타인과 관계하는 게 아니라, 타인을 비교대상으로 상정하고 그 사람 자체가 되고자 하는 바람은 자기의 구성을 외부에서만 찾아야 하는 모순에서 나온다. “패나에서 내보내는 신호가 가짜라는 얘기남의 감각도 사실 가짜인데, 신호도 가짜면 뭐죠? 180도 더하기 180도는 360. 그럼 제자리네(247)라는 비통한 농담이 유통되는 상황은 사회적 관계마저 은밀히 직조되는 구조에서 대상화된 채 제자리를 맴돌 뿐인 개인들의 처지를 현상한다.

 그러므로 진짜 나와 만나기(244)라는 치유캠프의 슬로건에 진짜 나 같은 거에 관심쏟는 일을 무용하게 취급하며 왜 진짜로 살아야 하는데요? 10퍼센트, 20퍼센트, 50퍼센트만 살아도 되잖아요라고 반발하는 수이의 모습은 데이터로 치환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아이들을 상징한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 오래인 역시도 현실에 순응하기가 무엇보다 쉬운 게 사실이다. “기적이나 극복 같은 가치를 믿지 않는 수이를 보면서 미성년에게 중요한 건 단 두가지, 유전자와 환경(251)라고 손쉽게 일축해버린다. 이들의 자포자기와 무력함은 자신을 잃어버린 개인들로 가득한 사회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곡에 재능과 흥미를 보이는 수이에게 가 작곡을 가르치면서 둘 사이에는 예상치 않았던 친밀함이 쌓여간다. 그렇게 감시자본의 통제를 벗어나 가까워진 둘은 점차 서로에게 마음을 내보인다. ‘는 자본주의가 부리는 상술을 따르는 음악을 할 때와 달리 애쓰지 않아도 코드가 떠(254)오르는 경험을 한다. 수이는 알면 알수록 괴로운데도, 제가 다치는데도(256)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어 타인이 되기를 갈망하며 패나에 몰입해야만 했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러나 는 수이의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며 지금 느끼는 감각이 진짜야” “이게 100퍼센트지(256)라고 함께 되뇐 바로 다음 날 인사 없이 캠프를 떠난다. 강도 높은 사회적 비교와 타인의 시선에 전적으로 이양되어 자기를 구축해온 인물들은 자아와 타자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관계 형성의 과정에 나설 진짜자신을 잃어버려 내세우지 못하거나, 특정한 자아를 감추게 된다.8) 결말에서 는 서로의 마음을 열어 보인 그날 나눈 단어 “100퍼센트서해를 합쳐 백서해(259) 라는 이름으로 아이돌이 된 수이를 라디오에서 알게 된 뒤, 패나를 주문해 백서해의 감각을 매달 50퍼센트까지 느(261)낀다. “접속을 할 수 없는 날은 내게 몸이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았다(같은 면)의 마지막 진술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과 내용까지 전부 강탈당해 안정된 자아감을 잃어버린 채 기계를 통해 오염된 감각을 느낄 때만 표면적으로나마 누군가와 함께일 수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패나는 오래도록 블랙박스로 여겨진 인간 내면의 감각까지도 여지없이 자본으로 환산하는 세태를 고찰하고, 자아를 구성하는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경험이 얼룩져버린 현대 기술사회의 단면을 제시한다. 물론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여 자신의 일부를 구성하는 일은 인간의 오랜 관습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불필요하다고까지 느끼는 인물들의 등장은 오직 자신을 다른 개체의 시선에서만 보도록 종용하는 감시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 관계의 어긋남은 스스로를 잃어버리다 못해 폐기해버린 이들이 주저앉는 모습으로 묘사되기에 애석하다. 하지만 여전히 진짜 감각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감촉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그곳에는 소멸하지 않은 어떤 반짝임이 함께 어른거리고 있다.

 

3. ‘알 권리의 상실과 미래의 재건 : 정지돈의 너는 너를 바꿔야 한다」, 『브레이브 뉴 휴먼

 

최근 정지돈의 소설들은 감시자본권력이 구성한 현실 이면의 참담한 진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미래를 잃어버린 개인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창작과비평』 2023년 겨울호)는 기업과 정부가 결탁하여 폭력적일 만큼 밝은 빛으로 개인을 발가벗기는 사회를 살아가는 의 이야기다. 이때 기업과 국가는 공적·사적 영역 전반에서 데이터를 최대치로 수집하는 한편, 누가 얼마나 알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권한까지도 쥐고 있다. 그곳에서 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비롯한 세계의 작동방식과 의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불안에 떤다.

소설에서는 다국적기업이 개발한 셀프메이커 앱’(이하 셀프)을 기반으로 개인이 스스로를 얼마나 발전시키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개인계발지수 시스템이 국가적으로 시행 중이다. “가능한 모든 자료를 수집한 빅데이터를 토대로 매겨”(156)지는 지수는 개인의 내·외적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실시간으로 바뀐다. 이 지수가 곧 계급을 가르는 기준이자 사회 구조의 토대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은 오분에 한번씩 셀프에 접속(160)하여 일상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자발적으로 공유한다. “셀프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지수를 체크하고 최적화의 기술을 배우고 포트폴리오를 매력적으로 관리했다.(157)

오직 스크린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앱을 통해 서로를 드러내고 바라보며 밈의 흐름으로 세상의 정서를 이해(156)하는 양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삶을 전방위적으로 포위한 감시권력을 이의 없이 받아들일뿐더러 환영하기까지 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오로지 경제 능력만으로 등급을 매기던 시절에 비해 개인계발지수는 객관적이고 인간적(156)이라는 의 진술에 주목해보자. 개인을 다면적인 정보로 평가하되, 그 기준을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는 제도가 과거에 비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최적화가 진정한 자신의 삶을 발굴하도록 돕는 기제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개인을 단지 행동하는 객체로 전락시켜 질서를 유지하려는 감시자들의 사회 최적화에 기여한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셀프의 메인화면을 장식하는 문구로 진짜 예술과 진짜 삶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었(157)던 릴케의 깨달음에서 따왔다. 애초 예술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급진적인 질문이었던 이 문장은 이제 외부에서 형성된 알 수 없는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라는 주문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그러던 와중에 주인공인 는 하룻밤 사이에 지수 상위 1퍼센트가 되는 경험을 한다. 해할 수 없는 상황에 ‘너’는 당황하지만, 이내 상황의 급변을 의문시하고 진실을 탐구하기보다 변화한 지수에 따라 “자아의 상태와 삶의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부수적인 풍요를 누린다. 그렇게 “너는 네가 설명하는 사람이 되어간다.”(162면) 

그러나 의 이러한 결정마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외부적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조율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급작스러운 지수 변화는 사실 알고리즘의 기술적 오류에서 비롯되었는데, 기업과 국가는 시스템의 불확실성을 은폐하고, 오류대상마저 시스템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귀중한 참고 사례”(163)로 활용하려는 야심으로 를 감시할 합법적인 통계사무관을 파견한다. ‘는 감시자본주의가 설정한 최적화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조정하는 도구화된 개체의 행보를 보여준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깨닫지 못한 채 무지의 영역에서 고통받는 의 모습은 극히 비극적이다.

 

왜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너 역시 고통스럽다. 너는 진심으로 죄책감과 상실감을 느낀다. 문제는 네가 느끼는 감정과 이 감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욕구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너의 경험은 너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너와 너의 외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168)

 

이쯤에서 어떤 전제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의 뒤에 시스템이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을까? 사무관은 기초생활수급권자인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사회적 평판 때문에 괴로워하는 에게 지수 오류에 대한 진실을 말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시스템의 존재 여부와 오류를 파악하고 있는 사무관 역시 앎과 무지 중 무엇이 삶에 도움이 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많은 것을 안다 해도, ‘진짜 삶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지 않는 이상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171))

그런 의미에서 촘촘하게 얽힌 시스템에 의문을 품고 결함을 응시하며 다른 미래로 나아가려는 인물들로 채워진 작가의 근작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 2024)은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소설의 배경은 인구 감소로 인한 국가 소멸을 막기 위해 인공자궁을 이용한 출산을 국가법으로 명시한 미래의 대한민국 사회다. 그 사회에는 정부의 철저한 주관하에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인 체외인과 신체적 생식으로 태어난 일반인이 함께 살고 있다. 체외인은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16)지만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일반인보다 열등한 계급과 권리를 할당받는다. 체외인에게는 배척과 구분의 증표인 생체 바코드가 부여되며, 만성적인 혐오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소설은 이른바 체외인 DNA 게이트폭로전을 축으로 전개된다. 일반인의 난자와 정자를 받아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수백만의 체외인이 법규와 달리 단 일곱명의 남성으로부터 수정되었다는 비리가 밝혀진 것이다. 한편에서는 체외인 혐오범죄를 두고 각 사회집단 간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체외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근본적으로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사건들을 통해 정지돈은 가족 개념의 허상을 파헤치면서 한가지 질문을 꾸준히 던진다. 인간을 언제까지나 인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인간이 인간임을 보증하는 인간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배타적으로 구축된 인간의 상징 문명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가상에 불과하다. 체외인은 생물학적으로 일반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17)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성을 보증해주는 탁월한 타자화로 기능한다. 그들은 불가능에 가까운 승격을 거친 경우에만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다.

소설 속 한국에는 감시자본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아 구성원들의 사회적 권리는 물론이고 생명까지도 데이터로 축적될 만큼 자유가 전적으로 부재한다. 모든 정보를 보유하는 한편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까지 결정하는 권력자들은 불합리한 구조는 철저히 숨기면서도 투명한 사람들(57)을 자처한다. 그러나 인간을 정보값으로만 이해하는 세계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삶의 존엄을 잃는다.

아미는 체외인 출생의 엘리뜨로, 대다수의 체외인이 누릴 수 없는 삶을 산다. 그는 고강도의 감시자본주의 사회에 표면적으로 복종하기를 택한 냉소적인 지식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탈을 즐기는 정도가 아미가 추구하는 최대의 자유다. 반면 같은 체외인으로서 아미와 함께 성장한 권정현지는 언제나 경계를 넘(23)는다.

같은 체외인이지만 확연히 구분되는 둘의 차이는 계급 차이에서 발생하는 지식과 감정의 깊이에서 기인한다. 뛰어난 능력과 지식에 대한 우수한 접근성을 가진 아미는 인간들의 기만적인 상징적 체계와 그 위에 세워진 사회의 모순성을 파악하면서도 다른 체외인들의 고충에 무감하려 애쓴다. 반면에 권정현지는 사회로부터 교육받은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기에 그와 어긋나는 불합리한 사안에 저항하면서도 울분의 출처와 타도할 대상을 특정할 수 없어 혼란을 겪는다. 평탄한 삶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아미와 늘 맹렬한 증오나 파괴 욕구”(185)에 사로잡혀 살아온 권정현지는 계층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텅 빈 껍데기처럼 여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독자적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이 없다.

그런데 이는 비단 체외인들만의 고충이 아니다. 감시자본주의권력은 일반인과 체외인을 구분하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아미의 남자친구인 일반인 철멍은 저명한 예술가이자 문체부 장관 출신인 반형태의 아들이다. 겉보기에 남부럽지 않은 조건을 갖췄음에도 타인의 관점에서만 자신의 쓸모를 찾는 등 감시체제에 맞게 길러진다는 측면에서 그의 내면 역시 체외인들과 다를 바 없이 황폐하다.

모든 것이 데이터화되어 스스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게 된 이들은 자립할 수 없다는 불안에 빠져 다른 이를 향한 혐오와 증오를 포기하는 순간 존재할 이유 역시 사라”(135)지고 말 거라는 오판을 반복한다. 아미가 근무하는 연구소에서 정부의 허가를 받아 줄기세포만으로 이루어진 합성인을 개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다른 하위객체를 ()생산하여 일반인-체외인-합성인의 위계를 조직한다면 포함적 배제를 반복하는 구조가 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각각의 인물들은 외부적 명령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 자신으로 점차 새롭게 거듭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삶을 총체적으로 틀어쥐는 감시자본주의에 대적할 모종의 희망이 싹튼다. 이들은 기술문명을 겨냥하여 과거 혹은 미래만을 좇는 맹목적인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주의, 체외인을 자의적으로 대상화하는 혐오자와 애호자의 대립 같은 이분법을 넘어서 다른 미래를 개척한다. 서로 대조되는 듯한 이 입장들은 사실 누군가를 제외하는 배타적 집단성을 다시금 형성한다는 점에서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을 인간성의 최후 보루로 남겨두기 위해 제정된 체외인의 출산금지법을 어기고 권정현지는 아기를 낳는다. 또한 체외인의 탄생에 엮인 비리를 폭로하자고 아미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미는 그를 도우면서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한 능력 있고 순종적인 체외인(156)에서 벗어나 인간은 기술적 존재들의 주체가 아닌 도구(136)라는 믿음을 버린다. 특정 존재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위층 엘리트(157) 한명에게서 수십만의 체외인을 탄생시키고, 혐오를 또다른 차별과 폭력으로 응수하는 현실 앞에 신념은 철저히 무너진다. 이때 생겨난 질서와 조화를 이유로 세계를 억누르는 힘을 향한 맹렬한 분노(186)철통같은 시스템에도 여백은 있기 마련(67)이라는 제도의 맹점을 정확히 꿰뚫는다. 권정현지는 사실 자신 역시 모성을 지닌 일반인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합리적인 도덕적 규범에 따라 아이를 비롯한 타인을 사랑하고 싶었으나, 누구에게도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삶과 문화 자체를 모두 무너뜨리고만 싶었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합리성이나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이 불분명하고 단순히 같은 체외인으로 묶일 수 없이 다른 권정현지와 아미의 모습은 언제나 변화하는 인간그 자체를 현시한다. 그렇게 두 존재는 사회에 의해 분열된 자아로 살아가는 동안 각자 내면에서 잃어버린 가치와 힘을 서로 되비추며 주체적인 힘을 회복한다.

이때 형성되는 자아는 자기동일성을 전제하고 또다른 인간성을 형성하는 폐쇄적 주체로 회귀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언어와 시각 중심의 수치로는 환산되지 않는 온몸의 감각을 감시자본권력으로부터 되찾아 내면의 정념을 일으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데이터 값으로 정리되어 정해진 궤적만을 반복적으로 모방하는 객체로서의 운명을 거부하는 일이다. 이들은 다른 존재와 생생히 얽혀 자신을 변화시킨다.

 

어디로 갈 거야? 권정현지가 말했다.

아미가 철멍을 바라봤다. 철멍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멀리 붉게 물든 서해가 보였다. 균형을 잡은 버티컬은 산등성이를 넘어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전진했다. 아미는 벵족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벵족의 신화에서 죽은 아기들은 우르그비로 돌아간다. 원래 그들이 존재했던, 이곳과는 다른 세계로. 아미는 생각했다. 우리에게 다른 세계가 없는 게 아니라고, 다른 세계는 존재한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가 바로 그곳이라고. (195~96)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이 운동성은 미래에 대한 체념이나 방향 상실의 감각을 너끈히 뛰어넘을 원동력이 된다. 이들은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그 현실은 초월적인 너머가 아닌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에 있다. “생명이 다른 세상에서 온 것이라고 믿(83)벵족의 신화에서 개체들은 제어가 불가능(85)하다. 그들은 현존하는 세계의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도래하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고유성과 더불어 불확실성을 지닌 채 함께 얽혀 무한히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현실에 우르그비 같은 장소는 없다(같은 면)는 단호한 전제는 자연히 무너진다. 이는 사실 규율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이를 변화시키고, 이질적인 존재와 갈등하는 동시에 공존의 방식을 찾아 자신을 거듭 바꿔온 인간의 영구한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설 속 인물들은 고정된 인간성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착오자들이 아니며, 배타적인 휴머니즘휴머니티라는 범주를 새롭게 구축하여 인간을 또다른 고정성에 몰아넣지도 않는다. 여타 존재와 자신을 데이터가 아니라 매 순간 달라지는 생동감으로 경험하는 이 존재들은 다시금 일어설 용기를 가지고 미래로 나아갈 새로운 주체들이다.

 

4. 불가피한 미래란 없다

 

오늘날의 현실에는 존재의 구분 없이 총체적 데이터화를 위시한 감시자본주의사회의 거대한 영향력을 더는 피할 수 없으리라는 믿음이 팽배하다. 이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전지적인 자율성을 지녔으며, 그러한 기술과 데이터를 독점한 감시자본가들의 움직임에 다수가 탄력적인 발전을 경험하거나 무력하게 휩쓸릴 수밖에 없다는 상반된 견해 두 가지가 모두 공유하는 대전제다. 그러한 미래는 우리가 반민주주의적인 감시자본주의의 완력에 고개를 숙일 때 비로소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게 실험실에 누워 삶의 생기를 데이터로 간단없이 전환 당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빼앗긴 권리에 대한 분노와 상실의 감각을 되살려 대항하는 주체로 바로 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박문영의 소설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상대를 비교적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상상적 초연결의 사회에서 오히려 관계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인물들을 제시한다. 인물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절망적인 분위기를 환기하는 듯하지만, 비대면적인 인간관계라는 타성에 젖은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게 만들 수 있다.

정지돈의 소설은 기업과 정부가 결탁하여 정보 지배력이 신속히 확장되는 동시에 제도화되는 국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감시 규율과 구성원들의 시각에 치우쳐 자신을 응시하는 개인들은 타인과 사회를 지독히 불신하고 미래를 구상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인간문명의 실효성과 새롭게 재건되어야 할 인간성에 대해 깊이 있게 질문하면서 감시자본의 권력을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는 브레이브 뉴 휴먼의 행보는 유의미하다. 인물들의 전회가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감이 있지만, 기존의 문법에 기대지 않게 인간성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근본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쉽게 망각되는 것은 그러한 기술이 인간 문명의 산물이며 따라서 해당 기술력의 뒤에는 언제나 인간이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기술은 서로를 돕는 조력자여야 하며, 이러한 존중을 토대로 인간 역시 우세 종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해온 지배자의 논리를 허물어 현재 당면한 민주주의와 생태주의의 어려움을 함께 조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9) 문학 역시 기술적 현실에 포섭되어 거짓된 영광을 되비추거나 유폐적인 세계로 침전하지 않고 변화하는 세계에 걸맞은 인간의 가능성을 거듭 사유할 때, 지금 여기의 현실을 더 나은 미래로 바꿔놓는 일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1) 「정부 입법 전까지 실시간 얼굴인식 기술 도입 안 한다”」, 경향신문 2024.02.22.
  • 2)  「정부, 출입국 얼굴사진 17천만건 AI업체에 넘겼다」, 한겨레 2021.10.21.
  • 3) 최근 HD현대중공업은 협력회사 근로자들의 정확한 근태 관리를 위해 도입한 안면 인식기를 두고 개인정보 침해라며 거부권을 행사한 노조와 갈등을 빚은 바 있다. 관련기사로 다음을 참고. 「HD현대중 협력사 근로자 출입시스템 설치 갈등노조, 강제 철거에 협력사 고발 맞대응」, 경향신문 2024.04.17.
  • 4) 언급한 국내 사례들에서 국가와 기업 모두 구성원들이 개인정보 동의안에 명시적으로 동의했음을 근거로 제도의 법적 효력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분히 증상적이다.
  • 5) 쇼샤나 주보프 감시 자본주의 시대』, 김보영 옮김, 문학사상 2021.
    이 글에서는 개인의 데이터화를 둘러싼 기업과 국가의 결탁과 감시권력의 형성과 행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 위해  ‘데이터 자본주의’(빅토어 마이아 쇤베르거·토마스 람게, 『데이터 자본주의』, 21세기북스, 2018.) 또는 플랫폼 자본주의’(닉 서르닉, 『플랫폼 자본주의』, 심성보 옮김, 킹콩북, 2020.)가 아닌 주보프의 명칭을 따른다.
  • 6) 같은 책, 322~23.
  • 7) 김홍중, 「플랫폼의 사회이론: 플랫폼 자본주의와 알고리즘 통치성을 중심으로」, 『사회와이론』, 한국이론사회학회, 2022, 31~38.
  • 8) 가 마지막 날 수이에게 내 남자친구랑 비슷한데?”(257) 하고 거짓말을 내뱉은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가 수이와의 관계 맺기를 포기한 이유에는 퀴어성에 대한 외면이 결부되어 있다. 이 역시도 다각도에서 검열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객체적 처지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 9) 이은지, 「두 번째 인간」, 『』 2024년 상권,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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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니’와 인간의 공동체 : 김해자의 시를 중심으로

1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광장에서 들었다. 친위쿠데타를 획책한 대통령의 파면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 부러 광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윤석열이 일으킨 쿠데타는 대한민국 사회에 꽤 긴 감정의 침전상태를 초래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으며 그것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쿠데타 주도세력을 통해 그동안 은폐된 채 현존해 있던 충격적인 우리 사회의 일면이 드러난 사태는, ‘윤석열의 시간’이 ‘박근혜의 시간’과도 또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깊게 각인시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동의 그림자가 넓고 깊었다는 사실 앞에서 적잖은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비구름처럼 몰려오기도 했다. 예컨대 현실로 존재하는 윤석열 지지세력 혹은 극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물으면서 적대시를 경계하고 ‘대화’나 ‘공존’을 주장한 글들1)과 그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갈피없이 치솟아오른 실례가 된다. 이것이 ‘박근혜 때’와 다른 지점이다. ‘박근혜 때’는 나름대로 한뜻을 모아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었지만, ‘윤석열 때’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중국인’이나 ‘이재명’이라는 적대적 타자를 만들어 나타나는 착시 같지만, 아마도 이번 현상의 뿌리는 깊은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현상이라는 이파리는 쉬 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쿠데타와 동시에 떠오른 현상에 대한 상당한 지적 분석과 그 역사적 계보와 관념의 토대를 찾아나서는 정신적 노고를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껏 우리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공부와 실천들이 부족했기에 이런 사태와 현상이 터졌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우리의 자세와 수련에 따라 천우신조의 ‘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특히 시는 인간의 감정을 일차적인 출발지이자 도착지로 하는 장르인바 ‘사회적 감정’의 출렁임에 예민할 수밖에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감정이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전제가 어느새 성립된다. 그런데 여기서 감정이란 무엇일까? 스피노자(B. Spinoza)는 『에티카』(1677)에서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한 다음 “정서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 자체나 신체의 어떤 부분이 가지는 활동력이나 존재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했다.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나 정서에 대한 신체(몸)의 우선성이다. 즉, 감정이란 것은 신체에 의존적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칸트를 읽으며 ‘직관’과 ‘사유’를 인식의 요소로 파악하면서 사유는 직관에 의존한다고 말한다.3) 직관의 능력은 마음이 가지는데 사유가 마음의 작용으로서의 감정에 의존적이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스피노자처럼 그 중간에 신체가 개념적으로 자리잡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에게 있어 감정, 즉 마음의 작용을 우선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공동체라는 것이 몸과 몸의 연결이라는 차원을 갖는다면, 마음 차원에서도 그 연결을 유추하는 일에 논리적 하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클리셰나 혹은 지적 나태로 읽힐 수 있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논파당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윤석열‘들’이 기도한 쿠데타로 인해 깊은 감정의 공동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물론 ‘감정의 공동체’라는 말은 모두가 갖는 감정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공동체’는 무차별적인 동일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차별적인 동일성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강압이 일으킨 환영일 뿐이며, 민주적인 공동체를 상상할 때는 도리어 비추는 빛에 따라 반사되는 빛이 다른, 즉 내적 구조와 밀도가 다른 구슬들이 한데 모여 통일된 색조를 띠는 것 같은 이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연합적인 조화를 건강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당연히 이 조화는 부단히 해체되려는 힘과 서로 곁이 되려는 힘이 공존하는 관계양식을 말한다. 여기서 ‘구슬’이 환기하는 것에는 감정이 제외될 수도, 제외될 리도 없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에서 집단의 감정을 재구성하는 시의 역량과 책무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물론 시의 역량과 책무가 어떻게 발현되고 또 발현되어야 하는지는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냉정한 조건을 통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설령 현실적 조건이 시의 역량과 책무를 축소시키거나 은폐한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시 자체의 위의와 본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현실적 조건의 변화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할수록 시가 공동체의 감정에 대해 져야 할 십자가는 무거워진다고 봐야 옳다. 하지만 작품의 현실성은 어디까지나 시인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되어 개인인 독자의 감정을 변화시킨다는 평범한 진리를 놓쳐서도 안 된다. 2  김해자의 여섯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창비 2023)은 사람의 삶에서 사람 아닌 존재의 삶까지, 구체적인 생활의 세목에서 역사적 상황과 우주적 영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김해자의 시에 독자의 감정이 움직이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인의 감정의 동요가 고스란히 작품에 전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동요라는 것이 좋은 시에서는 항용 그렇듯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동요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김해자의 시에는 집단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 집단적인 감정이란 추상적이고 평균화된 전체의 감정이 아니라 시인의 감정 자체가 집단적인 관계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김해자의 시는 어쩔 수 없이 복수인 그 감정‘들’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된다. 다음의 시를 보자. 물은 안 되겄고, 눈 감고 뛰어내리믄 괜찮을 거 같어 저짝에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죽을 맛이더라고. 이제 죽으나 저제 죽으나 죽을라고 올라가는디, 허리가 아파 죽겄어. 나는 모르겄지만 흉한 꼴 볼 사람들 떠올리니께 도저히 못 뛰어내리겄데. 별이 저리 많아도 달 하나 못 구하나 별이 아무리 여럿이 박힜어도 달 하나만 못혀 하이고야, 저 하늘 좀 봐 목화송이마냥 훤혀 물에 처박힜다 꽃이 되었구마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 어디까정 갈지 모르겄지만 살다보믄 무슨 수가 있겄지. 그냥 살기로 혔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으니께 살아야지. 나 죽네 나 죽네 하믄서도 세상은 돌아가잖여. 야아 달이 살아났네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 —「월식」 부분  인용 부분(4~7연)은 작품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여기서 시의 화자는 “자식 놓쳐불고 죽을라고” 했던 여인이다. 작품은 전체가 화자의 입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1, 3, 5, 7연은 제목인 ‘월식’에 걸맞게 달이 사라졌다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화자가 혼잣말처럼 내뱉고 있지만 청자가 숨어 있는 구조를 취하는 서정시의 형식이다. 반면 그 사이의 2, 4, 6연은 행의 구분 없이 화자에게 실제 있었던 사건을 진술하는 이야기시의 형식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특성을 활용하여 서정시의 깊이를 확보하고 그 외연을 넓히는 방식은 김해자 시인이 자주 활용하는 형식구조다. 이는 아마도 이야기와 노래 둘 다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시는 자발적으로 죽음 가까이 다가갔다가 서서히 삶의 영역 쪽으로 옮겨오는 화자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자식을 앞세운 여인이 처음에는 자살의 장소로 강을 택했다가 “맴만 젖”고 만다. 물이 “허리까지 차니께 몸이 붕 뜨”고 말아서 죽으러 갔다가 도리어 삶의 부력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죽어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역설적이게도 몸의 고통을 통해서 삶을 느끼게 된다. 결정적으로 남에게 자신이 죽어서 보일 “흉한 꼴”을 포기함으로써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며 죽음으로 난 쪽문을 닫아버린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몸의 역할이다. 2연에서는 물에 들어간 몸이 수면 위로 붕 뜨고, 4연에서는 아픈 허리를 붙잡고 옥상 꼭대기로 올라가는 게 “죽을 맛”이다. 몸이 고단해진 것이다. 그 몸의 실감을 통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다는 구체적 진실을 깨달으면서 삶의 방향 쪽으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른바 ‘객관적인 눈’은 화자의 증언에서 과장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증언을 작품으로 빚어내면서 녹아 들어간 시인의 진실한 마음이—설령 화자의 증언이 과장일지라도 그것마저 넘어선—삶의 의지를 부활시키고 있다.  1, 3, 5, 7연은 달의 사라짐(죽음)에서 다시 나타남(부활)까지 노래의 형식으로 독자의 감정에 물결침으로써 더욱더 화자의 증언이 진실임을 밀어올린다. 특히나 마지막 7연의 “야아 달이 살아났네 /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는 개인의 경험을 훌쩍 넘어서는 자연의 본질, 즉 은폐와 생성(poiesis)의 반복이라는 진리의 영역에 해당된다. 이 진리의 영역이 가능했던 것은 화자의 변화하는 마음과 몸의 작용을 시인이 세밀하게, 하지만 과잉되지 않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화자의 마음 변화, 즉 죽음에 기울었던 비탄에서 삶을 향한 자기보존(혹은 극복)의 감정으로 전환하는 운동은 일면 화자 개인의 것인 듯하지만, 이 시의 이면에 흐르는 것은 개인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운동하는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민중의 마음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김해자가 파악한 민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관념적인 자의식을 벗어나 자신의 몸이 다른 몸과 연결돼 있다는 실감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된 긍정의 감정이다. 달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월식현상을 어떤 부활로 노래하는 짝수 연은 홀수 연에서 도드라지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고대 그리스 비극양식에 비유하자면 디티람보스(dithyrambos)의 역할을 한다. 디티람보스는 본래 고대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축제기간 중 마지막 행사로 벌이는 비극 경연대회에서 각 부족 대표로 참가하는 민중 합창단을 뜻하지만, 니체(F. Nietzsche)는 디티람보스가 비극 전체에서 “자연의 가장 숭고한 표현, 즉 자연의 디오니소스적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즉 디티람보스는 “함께 고통을 겪는 자로서 동시에 현자이며, 세상의 심장으로부터 널리 진리를 전하는 자다.”4)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수의 목소리라 하더라도 그 목소리에 복수의 감정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개별자라 하더라도 감정은 복수의 갈래가 뒤엉켜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까운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 개인의 감정은 집단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에 의해 입증되기도 하지만 감정이 의존하는 몸 자체가 이해(利害)를 떠난 여러 생명의 복합체라는 과학적 사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민중의 아픔과 설움을 “대신 울어주러”(「버버리 곡꾼」, 『집에 가자』, 삶창 2023) 온 경우에서 보듯, 김해자의 시는 시인 자신의 감정과 민중의 감정이 동시적으로 울리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그의 시세계에서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반적인 경향이다. 한 몸에서 한 감정의 노래만 흘러나오는 전통적인 서정시나 혹은 단수의 감정인데 복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기획’하는 이른바 현대시의 ‘다성성’은 몸과 마음의 관계망이 존재론적으로 앞선다는 차원에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다.  「월식」이 시적 화자의 삶을 통해 민중의 삶에 대한 긍정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니들의 시간」은 한참 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차원을 확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 자신의 몸이 귀속돼 있는 시간과 공간과 차원에 그것을 초월하는 상상력이 들어오면서 시의 선형적 구조는 흐트러지고 만다. 즉 작품에 다른 기(氣)가 내유(內有)함으로써 「월식」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는다. 3 1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도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삵이 마을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밤 창문을 닫으려다 흠칫 놀랐어요 누군가 여태껏 훔쳐보기라도 한 듯 뻣뻣한 털들이 돋아난 유리창은 거대한 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찔릴 것 같았지요 수상쩍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이상스러운 생물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죠 봄이 오긴 온 건가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안전해지긴 할까요 이끼 낀 계단이 노려보았어요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 모서리가 너무 많아요 2 비늘구름 속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어요 인형 속에 인형, 탄두 속에 탄두, 아이 손에서 터지는 탄두 속 작은 집속탄, 밀밭은 보고 있었죠 무너진 담벼락과 흩어진 살점들, 폭격에 쓰러진 나무가 가리키고 있었죠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떨어진 토치카-U 로켓에 쓰인 흰 글씨, ‘어린이를 위해서’ 겨우내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친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 남몰래 사그라진 화장장의 연기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살아도 죽어도 제로가 되는 수치 한낮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군요 소금을 바가지로 뿌려대다 영구 엄니는 옥수수밭에 서 있는 발 없는 귀신들에게 넙죽 절했다죠 한잔 받으시오, 고수레 술 가득 부어, 고수레 삭삭 빌었다죠 손가락 넣고 휘휘 저어 석 잔 대접하고야 놓여났다죠 발 붙들고 놓지 않는 산 그림자 (…) 5 니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산이 공들여 ✕자를 붙였어도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창에 비치던 너와 나의 얼굴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앞으로 올 니들을 니들의 시간을 —「니들의 시간」 부분  먼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이 부른다는 “니”에 당연히 주목해야 한다. 우데게족에게 ‘니’는 형체가 있든 없든 모든 존재자들을 부르는 명칭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절된 시간을 초월해 “깃든 모든 영혼”이다. 그러니까 ‘니’는 시간과 공간, 유형과 무형을 떠나서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지금 자신도 그런 ‘니’에 둘러싸여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니들의 세계’는 이미 깨어졌다. 1절에서 그런 징후를 드러내다가 2, 3, 4절에서 시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니’가 사라진 세계 또는 ‘니’의 의미가 타락한 현실에 대해 마치 “고수레”하듯 읊조린다. 그런데 ‘고수레’의 의미와도 연관되는 것이지만, 마치 혼자만의 넋들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체 작품의 복판격인 2절과 3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고수레’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2절 1연의 (우끄라이나)전쟁 상황과 2연의 원망과 미움에 가득 찬 현실은 이어져 있는 인과관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시인은 어디까지나 조각보를 기우는 듯한 방식을 쓰고 있기에 전쟁과 미움의 연관관계는 읽는 독자마다 다르게 경험되기도 한다. 그 뒤 이어지는 3절 2연에서도 역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현실이 지금 시인의 마음을 치고 있음이 충분히 느껴진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든가 “니는 대체 왜 그래”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숱하게 뱉어내고 또 듣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런 원망의 언어 “없이”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라고 묻지만, 이미 현실에서는 “연해주에 사는 우데게족”의 “니”는 다 파괴되었다. 물론 우데게족의 ‘니’와 한국어 ‘니’의 실제 의미는 다르지만 소리를 빌려와 동일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가 가진 특권의 문제이며 시인은 그것을 근사하게 해냈다.  그런데 “니가 나와 섞”이지 못하는 현실과 ‘니’를 향한 원망과 미움은 막연한 심리적 뒤틀림이 아니라 우리의 근대가 차곡차곡 쌓아온 업(karma)에 다름 아니다. 4절 2연의 “니가 깎여 나가는 동안 허리가 묶인 물고기들처럼 / 아무리 헤엄쳐 가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우리는 우리가 아니야)”에서 그 일면을 제시하면서 시인은 그 업에 무릎 꿇고 비는 대속(代贖)행위를 한다. 누구에게? “한낮에도” 출몰하는 귀신—다름 아닌 ‘니’들—에게. 우리는 지금 귀신마저 원망에 차 “안전 안내 문자”처럼 출몰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게 귀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귀신의 목소리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이 대신 빌고 있는 것이다.  근대가 자신의 업을 고쳐보겠다고 더 쌓고야 만 업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의 “고수레”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절인 5절에서 다시 무너지듯 내뱉는 탄식은 그런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우린 어쩌다 앞으로 올 존재들과 그들의 시간을 다 먹어치워버렸나. 그렇다면 ‘고수레의 마음’은 죽었다 살아나는 달(「월식」) 같은 자기치유와 닮은 마음 아닐까. 귀신에게 비는 마음이 일종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 지낼 때 조상의 신위를 벽이 아니라 ‘나’로 향하게 함)’라면 결국 자기 마음에 비는 행위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월식」과 「니들의 시간」은 그려내는 시공간의 폭이나 그 형식은 다른 작품이지만,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민중의 자기치유를 통한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통치만이 결국 ‘니’(타자)에 대한 성찰과 ‘니’(귀신)에 대한 기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죽임과 좌절, 원망과 혐오로 얼룩진 우리의 세계가 나아가야 할 근원을 가리키지 않는가?  동학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경신년(1860) 4월 종교체험을 할 때 들은 첫 말은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吾心卽汝心)”였다. 최제우는 가뜩이나 세상이 어지럽고 민심이 좋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서양 제국주의가 괴이한 언어(기독교)를 앞장세워 무력까지도 불사하며 밀어닥치고 있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려는 바람과 기도가 깊고도 깊었던 것일까. 급기야 신다전한(身多戰寒), 즉 몸이 심하게 떨리고 춥더니 새로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순간적인 깨달음인 확연대오(廓然大悟)가 찾아왔다. 이때 들려온 말이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다”였고, 이어서 “사람들이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한다(知天地而無知鬼神)”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서 ‘귀신’은 도올 김용옥의 번역으로는 “천지의 또 다른 영묘한 이름”이라 했거니와 최제우가 몸으로 접한 새로운 기운(接靈之氣, 신령과 맞닿아 합일하는 기운)을 일컬을 것이다.5) 그런데 최제우의 ‘귀신’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의 “니”와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해자의 시는 ‘니’로서의 ‘귀신’이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산산이 부서지면 “안전 안내 문자”같은 악귀(惡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사유에서 기(氣)는 뭉쳤다 흩어졌다 하면서 영원회귀하는 실체로서, 그 기의 운동에 괴변이 생기면 기에 감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과 마음도 헝클어지고 만다. “인간 안에 있는 것은 신령이요 인간 밖에는 기의 운동”(「동학론」, 『동경대전』)이라는 말은, 기(氣)와 영(靈)은 내재적으로 같은 것이며 그래서 함께 운동하고 함께 변화하는데 그중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영은 신령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인간을 일러 최령자(最靈者, 가장 신령한 존재)라고 했던가. 따라서 우주 전체 혹은 우리가 사는 지구나 지역의 기에 문제가 생기면 그 안의 모든 생명·사물에 깃든 영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인간 안에 모셔져 있는 ‘신령’도 위태로워진다.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를 강조한 것은 이런 상태일수록 우리 안의 신령을 배신 혹은 불신하지 말고 마음을 닦고 기를 바로 하라는(修心正氣) 바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언어의 타락과 타자를 혐오하는 영혼이 절정에 달해 있는 오늘날에 비춰 볼 때, 기의 운동 변화에 심대한 차질이 생겼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일단 기후변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당연히 기후변화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생태계를 교란·파괴한 탓이라는 것에 이제 다른 토를 달 수가 없게 됐다. 생태계의 교란·파괴라는 것은 결국 “니들의 시간을” 먹어치워버린 것과 같은 의미다. 다른 사물과 타자 또한 기의 형체이고 그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영, 즉 ‘니’가 깃들어 있는데 그것들을, 아니 “앞으로 올 니들”까지 먹어치웠으니 그 ‘니’가 다른 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게 바로 ‘악귀’이고 그 악귀의 파토스는 원한과 혐오이며, 그 파토스의 로고스 형태가 언어의 타락인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존재의 목자’이고 시인이 ‘언어의 파수꾼’이라면, 김해자의 「니들의 시간」은 목자의 역할과 파수꾼의 임무에 응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4  오늘날 ‘민주주의’는 너무도 지당한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은 점점 더럽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재자도 자본가도 관료들도 그리고 파시스트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어찌 보면 현대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증명 방식 같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주인된 민중이 스스로 정치의 방식을 계발해 나아가면서 그 방식에 따라 스스로 정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체제가 과연 ‘주인된 민중’을 어떻게 괴롭혀왔는지에 대해서는 묻기를 주저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저는 자연과 신성(神聖)의 파괴와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자연과 신성이 곧 민중의 삶의 거처이며 존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신성을 파괴하면서 자연과 사물을 지배받아야 할 대상으로 격하시킨 근대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물은 상품생산을 위한 원료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적 경제관념을 제공했으며, 이 비도덕적 경제관념이 수탈과 식민, 착취와 파괴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논리로 이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역사는 과거지사일 뿐이고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집단무의식이 혹 형성되었던 것일까. 그래서 웬만한 신생독립국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그 반대쪽의 암흑은 모르쇠해왔는지도 모른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의 상태, 즉 여타의 활동력과 존재력에 따른 것이라면, 다른 신체로서의 사물, 그리고 그것들의 연합이자 존재 근거인 자연상태가 변질되면서 우리의 신체와 감정에도 비례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여러 병증(病症)을 통해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 우리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뒤틀린 감정을 만들었을지 모르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주인된 민중의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락한 교의와 정치이념에 맹종하는 노예의 감정을 퍼뜨렸을 것이다.  시가 감정의 변화 속에서 시작돼 다른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해서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계몽에 몰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 감정을 절대시하는 감정의 독재를 낳을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시대의 감정‘들’의 결을 섬세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의 연원을 제대로 사유하는 일의 동시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현대의 철학적 경향에는 대체적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또다른 기계로 보려는 관점이 강한데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의 결여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 대한 사유 자체가 ‘근대인’에 한정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역사의 국면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왔으며 시대적 국면과 어떻게 조응해왔는지 종합적인 인식이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직관도 풍성해질 것이다. 이는 사유와 인식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는 게 아니다. 인식의 새로움은 다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은 다시 자유로운 사유의 촉발로 되먹임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과 정신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몸과 마음과 정신이라는 구분법은 인간이 가진 언어의 한계에 따른 것이며, 어쩌면 한계 자체가 인간 존재의 본질에 해당될지 모른다.  다만 민주주의에 대한 랑씨에르(J. Rancière)의 말마따나 시가 꿈꾸는 민주주의가 “행태들을 갱신하는” 일이나 “주체의 새로운 출현”6) 등에 머문다면 어딘가 미진해 보인다. 주체의 ‘분할’이나 감성의 ‘분배’ 같은 것에 치중하는, 인간 ‘주체’로 꽉 찬 민주주의는 기계적 평등과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권리의 횡행을 가능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인간 ‘주체’의 범람으로 ‘니들’의 세계인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다)의 공동체, 인간만이 아닌 모든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몸과 마음의 공동체가 깨진 상태다.  근대적 주체, 곧 ‘나’는 서구의 근대 정신사에서 신과 ‘능산적 자연’(스피노자)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관념의 토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의 강조가 인간을 위하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주체 개념을 다른 존재자에게까지 확장하는 현대의 철학적 경향은 사실 인간 아닌 존재를 의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인간중심주의의 변종에 가깝다.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 점점 납작해져가는 상황은 인간이 ‘니들’을 먹어치운 상황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시가, ‘니’의 회복을 어떻게,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그 감당을 회피하기 위함도 아니고 회피를 위한 알리바이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는 주어진 현실을 통과하며 넘어서기 위한 ‘신다전한(身多戰寒)’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신다전한이란 결국 자기 시대의 토양, 공기, 귀신, 욕망, 꿈과 한몸이 되면서 맞는 고통일 것이다. 시에 가르침의 임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 먼저 시가 ‘니’와 한몸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 몸에서 나온 작품이 현실의 집단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감정이 생성되는 창조적 순간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순간의 다중공유가 가능해진다면, 이때를 새로운 시운(時運)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1)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박권일 「윤석열의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한겨레 2025.3.24; 정희진 「내전과 공존」, 경향신문 2025.3.18. 2) B.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202~203면. 3) 마르틴 하이데거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1, 127면. 4)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74면. 니체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부정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중우화(衆愚化)되면서 비극이 몰락하는 계기가 됨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를 비극을 몰락시킨 구체적인 인물로 지목하며 ‘그리스의 명랑성’(“어려운 것을 책임지지 않고 원대한 꿈을 추구하지 않으며, 지나간 것이나 미래에 올 것을 현재 있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는 노예들의 명랑성”, 92면)에 대한 부박함을 비판한다. 이때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그 건강성을 잃은 시기이기도 했다. 신화와 음악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비극이 합리적 이성이 지배적이었던 아테네 민주정 시기에 번성했던 것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비합리의 세계(운명, moira)에 대한 의식이 아테네 시민들의 시민적 덕성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가 확보해준 문화가 토양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 기대 말하자면, 예술이 종교(철학)와 정치를 이어주는 동시에 그 둘을 통합하는 교각이 되어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을 (오늘날의 경우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그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이 다시 예술이 샘물이 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말이다. 5) 이상 원문과 번역은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2』, 통나무 2021, 118~19면 참조. 6)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 110~11면.

계간 창작과비평 황규관 민주주의동학창조김해자하이데거 2025
하혁진 말을 잃은 아버지들 ―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을 중심으로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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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간-절기, 밤을 불러내는 주문의 시간 ― 2025년 봄, 환절의 시편들

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계간 파란 최진석 간절기생성산책미래이행사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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