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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지션 | 2024년 가을호(제47호)

고요한 전복 — 이다희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문학과지성사, 2024)

김다솔 문학평론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언젠가부터 계절이 끝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가을호에 실릴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자꾸만 여름을 떠올렸다. 어른거리는 물빛 그림자 앞에 선 사람처럼, 코가 알싸할 정도로 푸릇한 녹음에 둘러싸인 사람처럼 거듭 그랬다. 조금 더 말해볼까. 성큼성큼 나아가는 시간은 이루지 못한 소망과 밀쳐놓은 계획을 들먹이며 결실 없을 겨울을 떠올리게 만들고, 어딘가 마비된 나는 기이한 자신감에 힘입어 어쩌면 포근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새로운 변화의 문턱에서 주춤거리는 버릇. 내가 가진 오래된 습관이다. 어떤 순간을 상상할 적마다 과거를 곱새기는 동시에 미래를 움키려 애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경험은 왜 나만의 것이 아닐까. 이다희의 두 번째 시집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은 이와 유사한 의문을 끈질기게 탐문하고 있다.

 

갑작스레 많이 내린 눈은 인간의 질서를 바꾼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녹고, 눈이 아닌 무엇인가가 인간을 사로잡는다. 폭설이 지난 후 알게 된 것이다.

 

페르세포네가 땅 위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데메테르를 잠시 알아보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늙고 지친 여자를 봤을 뿐이다. 사람들은 페르세포네에게 몰려가 자꾸 질문한다. 페르세포네는 땅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한다.

 

눈앞에 놓인 작은 돌에 대해서. 손에 딱 쥐어봄직한 작은 돌을 쳐다보다 집어 들어 사람들 사이 허공에 힘껏 던진다. 돌에 맞은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모두 돌에 맞은 사람처럼 흩어진다.

 

손에 잡히는 작은 꽃들을 툭툭 꺾어 보낼게. 손에 쥐어봄직한 돌을 발로 차본다. 돌은 어떻게 꺾어 보내지? 다시 발로 툭 찬다.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길에 꺾인 꽃들이 널려 있다. 이런 식으로 꽃다발을 만드는 건 나뿐인걸.

 

― 「입춘(立春)」 부분

 

이다희에게는 특유의 성정이 돋보인다. 무력하지 않은 가만함. 부드러운 기개. 시인은 이를 충분히 발휘하여 주어진 것들을 찬찬히 뒤집어엎는다. 이를 이다희만의 고요한 전복이라 이름해보고자 한다. 위와 아래, 안과 밖,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은밀한 움직임을 따라가 보자. 인용한 시에서 시인은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봄의 초입에서 봄 아닌 것들을 열심히 언급하고 있다. 폭설, , 꺾인 꽃과 얼음꽃처럼 어딜 둘러보아도 겨울의 일부만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가장 격렬히 뒤틀릴 운명에 처한 대상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정해진 역사적 궤도를 반복해 유일한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간의 흐름과 반복이 필수적이다. 사계절이 언제까지고 되돌아올 것처럼 여겨지듯이 말이다. 이다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계절의 구분을 흐리는 기법으로 맹목적인 지속성과 선형적 시간관에 반대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 신화에서 사계절은 대지와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가 하데스의 모략으로 지하세계에 빼앗긴 딸 페르세포네와 지상에서 만나는 사건을 기점으로 나뉜다. 그런데 시인은 애틋하고 불가분한 여신-모녀 관계를 그렸던 기존의 신화를 뒤엎는다. 페르세포네가 귀환한 직후 일순간 데메테르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를 단지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늙고 지친 여자로 인식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시간을 동시에 살고 계절을 흩트리는 페르세포네를 앞세운 모녀 서사 다시-쓰기는 엄마-딸로 이어지는 계보와 직선적 시간관을 의문시하는 하나의 전략이다. 이는 개념이 아니라 눈앞에서 우리의 몸과 직접 맞닿아 있는 무언가가 진실로 삶을 구성하고 바꾼다는 가치를 피력하기 위해 시인이 강구해낸 방법으로 보인다. “갑작스레 많이 내린 눈은 인간의 질서를 바꾼다.” 그러니 이 시를 가장 첫머리에 두는 배치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의미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의미의 수행성을 탐구해 나가리라는 시인의 의지를 다소간 예지하고 있다. 불변의 지위를 의심하고 깨트리는 움직임이 이다희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활동성을 사물의 본질로 여길 때 중요해지는 것은 사물이 지녔다고 가정되는 실체가 아니라, 연결되고 감각될 수 있는 현재의 물성이다. 정해진 답을 얻기 위해 질문하는 사람들과 달리 돌아온 페르세포네는 스스로 생각하며 정답의 이전과 기원을 되짚는다. 생각 끝에 그녀는 눈앞에 놓인 작은 돌”, “손에 딱 쥐어봄직한 작은 돌을 쳐다보다 집어 들어 사람들 사이 허공에 힘껏 던진다. 사물과 대상에 직접 닿는 경험은 돌을 어떻게 꺾어 보내지?”와 같이 이라는 확정된 의미를 격파하는 의문으로 주체를 이끈다.

그러므로 이다희는 여름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뛰어든다”(「무화과나무 여름 바구니 이름」)는 내던짐의 태도로 일관한다. 한데 뒤엉킨 살갗들이 종종 출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군가와 맞닿은 이들은 결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충청도의 화자는 다른 이의 살결을 어루만지는 안마사로, 불길한 손님을 만진 날이면 장갑을 끼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싱크대에서 태우는 의식을 꼬박 실행한다. 이것이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14년 넘게 근속을 할 수 있는 이유. 그러나 살들은 이어지고, 틈입하고, 터져 흐른다. “살들을 틀어막기에 어딘가 한참은 작아 보이는 반창고를 붙여보지만 접촉 이후에 감각들은 속수무책으로 쏟아진다. 꿈에서 손에 닿았던 살들이 모두 이어져 파도치는 장면을 목격하고 깨어나 그녀가 내뱉은 첫마디는 오래된 손님이 있는 지역인 충 청 도. “그녀의 손을 거쳤던 살들이 실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진 것이다.” 맞붙었던 살들의 물결은 주체가 이전까지 고수해왔던 의미를 뒤흔드는 파도가 되어 출렁인다.

의미구조가 실재를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은 글쓰기에 내재한 폭력성을 상기시킨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기술(記述)은 특성 중 일부를 전면화하여 그것에 존재를 붙박는 물화의 술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한계로부터 누구보다 자유로울 수 없음을 체감하고 있다. 눈앞에 놓인 어떤 것도 주워 담지 못하는 좌절과 실패로 이어지는 전개가 그의 시에서 드물지 않은 이유다.

 

겨울 거울 주머니

 

단어들을 단정하게 줄을 맞춰 적어놓으면 거울을 주머니에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

 

겨울 주머니

 

거울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겨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겨울은 주머니에 넣을 수 있지만 어쩐지 잘 되지 않는다

 

(...)

 

겨울은 항변한다

 

난 겨울이야 겨울은 그냥 겨울이고 겨울은 죄가 아니야

주머니에 연루되고 싶지 않아

 

제발

 

겨울은 한없이 투명해진다

 

한없다는 말은 한계가 없다는 뜻이니

나는 원한이 없다는 뜻으로 쓰고 싶다

 

겨울 주머니

여전히 나는 겨울에 실패한다

 

― 「겨울병부분

 

인용한 시의 주머니라는 단어 안에 다른 단어들을 집어넣으려 하고 있다. “단어들을 단정하게 줄을 맞춰 적어놓으면손쉽게 주워 담을 수 있었던 거울과 달리 겨울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단어의 배열은 겨울 거울 주머니에서 겨울 주머니로 바뀌어 반복된다.

이쯤에서 주머니에 담기는 일이 함의하는 바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다. 우선 겨울의 항변을 들어보자. 겨울은 자신이 나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겨울일 뿐이기에 주머니에 연루되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말한다. 항변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주머니에 들어가는 순간 무엇이든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고유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거울이 담긴 직후 대열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말이다. 시의 도입부터 끝까지 는 겨울을 담고, 잡고, 멋대로 변형시키는 일에 자꾸만 실패한다.

기표의 형태가 크게 다르지 않은 두 단어의 차이는 무엇일까. “겨울이 주머니에 넣는 단계까지는 가능하지만 결국 빠져나가는 이유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뚫려 있는 풍경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수월하게 담긴 거울은 정연하지만 꽉 막힌 보편의 획일상을 되비추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가 겨울을 웬만하면 주머니에 넣고 싶어 하는 것도 확정되지 않은 풍경 앞에서 한없이 우울해지는경험을 피하고 싶어서이다. 사방이 뚫려 있어 그저 바라보는 것이 고작인 곳. 혹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더 큰 원한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곳. 이다희가 쓰는 자로서의 위치와 폭력을 응시하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하지만 시인은 실패에 낙담하거나 더한 압제로 응수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이 자리를 겨울을 풀어놓기 좋은 빈 곳으로 뒤집고자 온 힘을 다한다. “여기를 여기가 아니게 만들 것이 필요하다”(「샌드위치 시스템」).

그러므로 의 거듭된 실패 끝에 생기는 미묘한 변화를 놓쳐서는 안 될 듯하다. 대상의 의미가 강조된 명사 겨울에서, 마치 동사처럼 행위성을 함축한 겨울(하다)’로 중심 시어의 함의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 변동은 겨울의 능동성이 반비례하게 증감함에 따라 발생한다. 주체의 확신이 옅어지면서 겨울은 점차 동력을 가진 무언가로 묘사된다. 처음에 겨울에 대한 의 태도는 거울과 관련한 확신과는 달리 웬만하면 겨울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싶다는 소망에 가까웠다. 그마저도 실패로 끝나고, 목적어로서 단순 대상의 자리에 놓이던 겨울‘-하는 것에 실패하다와 같이 행위성을 함축하는 동적 존재로 제시된다.(“여전히 나는 겨울에 실패한다”)

이 변화는 서서히 스며들어 를 이전과는 다른 발화로 이끈다. 「충청도의 화자처럼, 타자의 음성을 듣고 몸을 맞댄 이후에는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말, 내게서 나갔지만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닌 듯한 오묘한 말들이 도래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안과 밖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어 묘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말들만이 예비되어 있다. “말이 원래 내 안에 있는 거라면 말을 하면 할수록 안에 남아 있는 게 없어져야 하는 거 아닐까하는 의심은 늘 말이 바깥에 있는 거라면 우리가 이렇게 가까울 필요가 있을까”(「오일 페인팅」)라는 의문과 함께 온다.

이때의 죄책감은 남의 인생을 살고 있는 대가내가 내 인생을 살고 있는 대가를 동시에 치르면서 생기는 것이다.(「미인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 개인주의 신화의 해묵은 미명은 질서가 요구하는 대로 자신을 지우고, 존재론적으로 얽혀 있는 타자를 적대하라고 불가능한 명령을 내린다. 인간은 자기 상실과 타자 상실이라는 고난을 두루 겪으며 이중의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처지에 놓인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역겨워하고 그것을 잊”(「오일 페인팅」)는 습관이 곧 인간의 자격이 되는 것이다.

습관은 자동적이다. 그래서 무의식적 층위에서 매끄럽게 작동하는 구조는 오차 없는 인과관계로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역사처럼 오래도록 반복되어 온 시간의 형식이 덧붙여진다면 의심은 더더욱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예술사 수업을 듣고 있으면, 원인과 결과가 서로를 밀고 당기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언제나 필요한 다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 이 아주 정교한 착시에 제법 길게 머무른다.(「모든 것과 그 밖의 다른 것」)

하지만 이러한 역사의 기원에는 신이나 진리가 아니라 사람, 언제나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인간인 시인은 인공물인 의미 체계의 바깥을 향해 걸어 나갈 채비를 한다. “현시대현대시로 잘못 읽고서 괴상한 추측을 보태고(“혹시 내가 봤을 때 글자가 슬쩍 자리를 바꾼 거 아닐까?”, 「현대시」), 자명한 사실들을 끈질기게 심문한다.(“피는 왜 파란색이 아닐까 눈은 왜 붉게 충혈되는가 붉은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어째서 투명한가”, 「샌드위치 시스템」)

 

아이들이 역할 놀이를 하는 것은 미래 연습이 아니다

부모를 꺼내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나는 엄마 너는 아빠 하고 내가 밥을 차려놓으면 들어와 손을 씻고 밥을 먹어

이건 모래이지만 밥이니까

 

인형은 부드러운 조각

나는 내 속의 인간을 꺼내보기 위해 인형을 샀다

 

인간을 꺼내놓고 부드럽게 스트레칭을 한다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

 

신하들의 충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눈을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네

나의 잘못으로 충성이 사라진다면 애초에

그대들에게 충성이란 무엇인가

 

왕관을 오래 쓰지 못하고 나는 옆으로 쓰러진다

 

―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부분

 

밝고 집요한 조명”(「신호라도 되는 것처럼」)을 비추듯이 끈질기게 의심한 끝에 시인은 마침내 왕관을 탈환한다. 체스판 위의 퀸처럼 종과 횡과 사선으로이동할 수 있고 뒤로 갈 수 있지만 뒤로 간다고 수를 물리는 것은 아니면서(「종과 횡과 사선으로」),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임을 아는 권세가는 선형적 시간의 가치관에서 가뿐히 벗어나 있다. 이때 예측불허한 움직임이 가능했던 건 시인이 아이의 시선과 마음으로 돌아가려 노력한 덕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모라는 역할처럼 관습과 규범이 주입 시킨 내 속의 인간을 꺼내놓고서 뒤집힌 상태로 세상을 마주하는 용기는 아이들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아이에게는 자신의 시행착오를 지켜보게 하는 힘이 있다”, 「시선을 내려놓고」) 그러니 가 쓰고 있는 왕관은 정해진 미래를 그대로 따르며 세습되는 미래 연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물구나무 선 역행의 방식을 거쳐 얻어진 것이다.

부드러운 스트레칭과 물구나무로 일군 전복은 외부의 승인이나 초월자의 보증이 아니라 머리카락처럼 주체의 내부에 이미 왕관의 근원이 될 만한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일깨워주기에 다분히 전위적이다. 화자가 충성이 무엇인지를 구태여 묻는 것 역시 이를 강조하기 위함일 테다. 그런데 화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옆으로 쓰러지고 만다. 여기서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오래도록 거꾸로 서 있기가 불가능하고 혼자만의 힘으로는 변화를 오래 지속시킬 수 없다, 라는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토록 진부한 교훈이 시에 담긴 전부일까.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가장 경계하려던 인습이 자신의 허울을 유지해온 유구한 방식이지 않나.

다르게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화자가 쓰러진 쪽이 다른 존재의 곁이라면 어떨까. “사랑은 금세 삶 쪽으로 쓰러진다. 바닥이 더러운 이유다. 비유가 너절한 이유다. ,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시 모르게 된다. 그러니 다시 모르게 된다. 누군가 나의 단점을 묻는다면 없다고 말해야 한다.”(「시티 커피」) 다른 시에서는 유사하지만 조금 다르게 사랑이 삶 쪽으로 쓰러지고 만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타자와 복잡하고 질척하게 얽혀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갈등과 다툼으로 삶의 바닥은 쉽게 더러워지고 남에게 하는 혼잣말”(「선악을 초월한 다리 위에서」)만이 난무하기에 비유는 한없이 너절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모두를 까무룩 잊고서 몇 번이고 유사한 모습으로 끝끝내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니 다시 모르게 되는 현실은 볼썽사납지만, 여전히 온갖 기형의 사랑으로 가득 찬 실망스러운 현실이 반복되기에 삶 역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 시인이 생각하기에 삶이 반복되어야만 하는 건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병속 화자의 실패가 점차 다른 의미를 구성해나갔듯이 시인은 유사하지만 다른 반복으로 또 다른 전복을 꾀한다. 이때의 반복에는 타자가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인은 다른 이들의 흔적을 더듬기 위하여 슬픔이라는 단어만 있는 사전을 만들어 “249개의 슬픔을 읽으면서 같은 슬픔을 매번 다르게 읽을 수 있새로운 초능력”(「입 모양을 읽었거든」)을 연습하고, 와인 잔에 찍힌 사람들의 립스틱 자국들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작은 열대어들처럼 여기며 “143개의 립스틱을 하나씩 직접 발라본다.(「열대어」)

이처럼 의미로부터 스스로 풀려난 이들이 활보하는 영역은 사실 특별한 이상향이 아니라 그간 우리가 보지 못했던 더 넓은 삶과 생활의 터전 그 자체다. 인간은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협소한 사회를 구축했으나 그러한 세계는 약동하는 생명들로 이루어진 더 큰 세계의 극미한 일부일 뿐이다. “오늘 치의 글쓰기가 끝났다고 삶이 갑자기 시작되는 게 아니”(「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이를 아는 시인은 비좁은 주머니와 좁은 방 한 칸에 갇혀 있던 의미를 풀어놓기 위해 역사와 규범과 같은 거시사에 등을 돌리고 함께 생활을 이루고 살아가는 타자들을 직접 만지고 감각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일반 쓰레기 버리는 날을 아는 것”(「하이쿠」)실 핀에서 다시 시작”(「모든 것과 그 밖의 다른 것」)한다. 사랑하고 증오하면서 세계를 한껏 더럽히고 마는 복잡다단한 생에서 나는 여기 있고 싶어 여기 있고 싶어 중얼거”(「설탕물」)리는 혼잣말을 귀담아듣는다. 

조용한 안간힘 끝에 담담한 위로를 전하는 시인의 귓가에 나 역시 그저 네 편을 자처하겠다는 당신의 삶 곁에 사뿐히 몸을 던지고 싶다고, 나지막이 고백해본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양 아래서 나는 네 편이야. 너는 무심하게 내 마음을 밟고 지나가. 행성들을 모아 모래성을 지어줄게. 난 널 안타까워하지 않아. 우린 결코 같은 편이 아니지. 그렇지만 난 그저 네 편이야.

― 「하루보다 긴 일기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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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영 물질의 기억과 추상의 기억 ― 나희덕 시집 『시와 물질』, 김종연 시집 『검은 양 세기』

1  새로운 사회학·생물학적 지식을 접하며 인식의 전환을 겪게 된 순간들을 빈번히 다루는 만큼, 『시와 물질』에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이들의 발언이나 저서가 빈번히 인용된다. 또한 기후생태위기가 심화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우세종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인간종 내부에서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가령 「물의 국경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지는 "지도"와 "얼음처럼 단단"한 "국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데, 이를 통해 나날이 물 부족 지역이 넓어지며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이 속수무책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경계선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 내부에서도 은연중에 계급과 우열을 나누었던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령 「강물이 요구하는 것」에서 화자는 자신을 시혜적 위치에 두고서 현지인을 대상화하고 연민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부끄러운 마음 한 조각"을 자각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여행 중 화자는 배 젓는 "베트남 노인의 비참을 / 좀더 리얼하게 / 좀더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서 핸드폰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 과정에서 핸드폰이 강물에 빠진다. 이에 화자는 핸드폰이 스스로 강에 뛰어든 것이며 "강물"이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린 것이라 의인화에 입각한 심적 봉합을 시도한다.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행위 동기를 강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하고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다.  섣부른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슴새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나타난다. 화자는 언젠가 슴새를 만났던 일을 메모해 놓고 시로 쓰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시집에 넣지 않았을 이유를 자문한다. 이때 "슴새를 시집에 가두지 않고 / 구굴도나 사수도나 칠발도 같은 섬으로 / 날려 보내고 싶어서였"을 거라 스스로 답을 내려보는 모습은 어떤 대상을 손쉽게 가공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슴새를 맞닥뜨린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을 쉬이 떠벌리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사건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희덕에게 시는 존재자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고 가두는 부정적 속성에 머물지 않으며 서로 다른 존재자 간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뻗어 나감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산호와 버섯 -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이라는 표현은, 유성생식을 통하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버섯만큼이나 시 또한 물리적·심리적으로 멀거나 상이한 곳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매개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 나라의 다른 시인을 호명하며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정한 말 건넴은 비록 가까이 있거나 자주 볼 수 없어도 시를 통해 경험하는 깊은 우정과 유대감에 대한 환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뻗어감의 속성은 「세포들」에서 암시되듯 무질서함과 더불어 나희덕에게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 듯하다. 「밤과 풀」에서는 인간이 설치한 "경고판"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뻗어가는 풀의 집요한 생명력을 주시하면서 머잖아 풀로 무성하게 뒤덮일 황무지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는 앞서 본 시의 확장성과 겹쳐지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가 변화시켜 갈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보도록 이끈다.  나아가 나희덕에게 뻗어감에 대한 사유는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을 긍정하며 성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이미 죽은 자들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이 그의 시 안에 마련된다.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는 눈의 무진장, 흰 글씨로 쓴 겨울 이야기는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눈 위에 가만히 누웠다 춥지 않았다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 눈 속에서 잠들지 마, 가만히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의 실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피를 나르는 실핏줄처럼 눈의 대지가 들려주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 「눈의 대지」 부분  여기서 "멀리 뻗어가"는 "눈의 실뿌리"는 물이 얼고 녹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다른 물질로 순환해 온 물의 내력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통해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며 영원히 이어질 물질의 생애를 암시한다. 또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고 듣고 간직했을 기억들도 물방울 안에 담겨 물질의 무한한 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물질의 기억에 새겨진 각 존재자들의 삶 또한 물질의 순환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순환을 거듭하기에, 혹은 여러 물질들로 분해되어 단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적적인 순간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쌓았을 추억, 동생이 들려줬을 걱정 어린 목소리는 동생이 떠난 이후에도 화자의 곁을 지키며 나란히 누워 있다. 즉 이 시에는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며 순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들이 이 땅에서 누적한 기억 역시 물질의 순환 속에서 몇 겹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포개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인간사의 필연과 그럼에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연결의 기억을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이기도 한데, 가령 「샌드위치」는 공장에서 교반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괴로워하며 흘렸을 피와 소스의 물질적 유사성에 기반해 고인을 사고 당시 그가 만들고 있었던 '소스'로 치환하는 것은 정당한가. 수식을 위한 '자본주의의'라는 관형어 또한 누군가의 생을 '희생된 노동자'로만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처럼 보여 고민이 남는다. 또한 「존엄한 퇴거」는 고독사로 죽은 어떤 이가 "개의치 마시"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그의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중략)…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을 두고 '존엄한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의 이러한 "퇴거"에 '존엄'이라는 수식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누군가가―결코 '자발적'이라 할 수 없는―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타인을 먼저 헤아린 것에 '존엄'을 부여하는 모습이 왜 이토록 시혜적인 태도로 읽히며 고독사의 모범군을 구획하는 것처럼 읽히는 걸까. 보편의 영역인 '존엄'보다는 '품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는 시집 속 대부분의 화자들이 여전히 타자를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얼음 시계」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빙하 조각들이 되려 '인증샷'을 위한 '핫플'이 되고 만 것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걸음걸이」에서는 "평화의 걸음걸이란 …(중략)…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 말하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빠르게 뛰다 적군에 발각되어 희생된 청년의 일화를 교훈 삼아 이끌어 낸 아포리즘이라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두려움 속에서도 뛰지 않고 걷기를 택한 소년을 죽은 청년과 대조되는 교훈적 위치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무고한 청년의 죽음의 '귀책사유'가 청년에게 있다는 식으로 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동일화에 입각한 인간적인 의미화가 다소 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령 「옥시토신」에서는 젖을 가리켜 "모성애의 다른 이름 …(중략)… 희뿌연 액체로 이루어진 선물,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호르몬"이라 칭하는데, 이는 포유류의 생리적 반응인 '젖'을 '선물'과 '사랑', '모성애'와 곧장 연결함으로써 감성 구조의 상투적인 재현 체제를 반복하고 어미에게 사랑의 의무를 고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치들」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사람들은 / 바닥에 파닥이던 멸치들처럼 시들어갔"다며 물밖에 타의로 끄집어내진 멸치들의 격렬한 꿈틀거림을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몸부림에 직접 대응하는데, 이러한 비유 축조는 멸치에게도 인간에게도 상당히 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상위자의 위치에 자연히 놓고서 그 지위의 추락을 비참한 하위자로 상정된 존재에 이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수사의 활용 자체가 아니라, '인과응보'를 경고하기 위한 목적 아래 멸치를 도구화하고자 그 속성을 앞서 구획하는 태도, 인습적 감각을 갱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있다.  표제작 「시와 물질」에서 시는 아무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시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더욱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희덕 시인같이 오랜 시간 독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무수한 교과서에 시를 실어 어린 시 독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좋은 시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온 시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쓰는 한 줄 한 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이 한국시의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이자 자부심으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이런 식의 타성화에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와 물질」에서 "우리의 발견은 /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는 로알드 호프만의 언급이 또한 인용되듯,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대 시의 한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뤄낼 풀의 번성을 기대하던 마음으로, 느리고 조용하더라도 분명한 변화와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시의 역할을 더욱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축적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온 시인이므로 물론 가능할 것이다. 2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일까, 『검은 양 세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모든', '모두'일 것이다. 일제히 같은 풍경 속에 멈춰 있는 장면과, 그러한 장면을 기어이 비집고 아주 작은 균열과 어긋남이 발생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진다. 또한 '영원', '무한' 등 의미 단위가 큰 추상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무한소급 모티프, 메타시에 대한 알레고리 축조와 '사랑'을 기능적 어휘로 활용하는 점은 언뜻 이 시집을 가속류의 극단화된 형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게 한다.  서시에 해당하는 「검은 회화」는 텅 빈 직사각형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시다. '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액자 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부도 검은 풍경이 아닌 투명함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조르주 페렉의 『공간들』이 루이스 캐럴의 『스냐크 사냥』 속 '태평양 지도'―텅 빈 사각형―를 발췌하며 서문을 열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1)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지도 말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이자 단절의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이 텅 빈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의 흘러넘침을 예고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있는 이미지"(「리부트월드」)의 반복되는 변주는 구멍이 뚫려 있기에 내부의 누수와 외부의 침입을 무한히 허용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윤곽을 중심으로 흘러넘침과 채워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는 시집 전반에서 여러 번 형상화된다.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략)…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엇에 전전긍긍하기를 멈추고 /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기를 멈추고 //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 영원히 열려 버리고 말 텐데 터져 버리고 말 텐데 //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할 텐데 //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중략)… 너는 몸이 처음이라 // 구멍을 찾아다닌다 - 「원영영원」 부분  위 시에서는 구멍 뚫린 상자에 무언가가 자꾸만 들어차는 모습과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윤곽이라 할 수 있을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만이 남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너' 또한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으로 제시되는데, 결코 봉합될 수 없으며 무한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이 구멍은 영원한 유동성을 현시한다. 이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는 화자의 발화는 이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난 구멍은 상자일 수 없는가? 단지 구멍일 뿐인가? 안팎의 경계가 무화된 구멍 난 상자는 상자인 동시에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며 / 점점 투명한 안팎이 되어 가는"(「구유에 담긴 시」)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리버스림버스」에서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허물어짐에 따라 예정된 "미래가 파쇄"되고 윤곽 안에 가두어 두었던 "형상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데 "밤"이자 몸인 내부의 범람으로 유리 저편이 검게 물들어갈 때, 이 범람 퇴적물―넘쳐흐른 형상이 "새 공병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어 새로운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해 및 회수되고 있는 장면, 한정된 자원으로 세계를 건축하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이 시집의 내적 구조를 축조하는 의지 자체의 표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저장용량을 압축하듯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은 이 가상 세계 혹은 디지털화된 저승의 관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나아가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미자나빔」)라는 언급 등에서 암시되듯 이 관리자는 외부의 플레이어인 시인의 창작 수행과 그로 인한 입력값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즉 세계의 축조와 몰락의 동시성을 그리는 상호구성의 아이러니는 시를 입력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또한 빗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자나빔」에서 마음의 깜빡임이 커서에 비유되듯, 마치 자각몽이나 AI 작업과 같이 외부 시인 혹은 유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컨트롤러처럼 기능하는 모습은 입력값의 유무에 따라 세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양상을 반영한다. 가령 "어느 한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 있"(「원영영원」)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라는 조작 및 설계를 계속하지 않으면 질료화된 형상의 누수가 멈출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추구체」)다는 지침이 성립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 차의 현시 유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채석장」에서는 "마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 꿈에서 시인이 된 네가 공원 계단에 앉아 낭독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는데, 이를 통해 '너'의 풍경을 형성한 변수가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제어 불가능한 오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외부자이자 창조자로서 '시인'이 거듭해서 고쳐 쓰는 시―세계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실상 이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정지시켜 반복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시간의 영원한 밑빠짐에는 반복만이 적힐 수 있"(「구유에 담긴 시」)다는 언급은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영구적인 누수의 풍경이 시간의 역행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시간에 누수가 발생했기에 시간의 선형적인 이행이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시집 속 인물들은 특정한 반복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 "매일 신발을 잃어버리"(「홀」)는가 하면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환영의 안쪽―에게」)을 벗어날 수 없으며, 「추구체」에서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도 / 이전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 비어 있"어 이들이 일상적인 리셋과 초기화를 겪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 영원한 내리막길을 굴러 너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처럼, 이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과거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너'에게 가닿기 위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돌려세우고 싶은 심적 동기의 발로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한을 추동하는 가운데 이들의 의식은 나날이 과거를 반추하는 방향으로, "과거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같다」)  그러나 「사모바르―에게」에서 그려지듯,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어도 "매번 같은 슬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라 일컬어진다. 매번 겪는 슬픔일지라도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미 아는 슬픔일지라도 번번이 새롭게 상처를 새긴다는 건 슬픔의 특수성이자 영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다듬은 개가 가지 않고 쏘아 올린 폭죽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는 "멈춰 버린 세상에서" 끝내 "개의 꼬리가 다시 흔들"(「난지도」)리는 장면은 이러한 슬픔의 속성을 받아들임에 따라 과거로의 반복 루프에 언젠가 금이 가고 말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 자그마한 균열의 암시는 "밑그림" 너머를, 반복되는 슬픔 너머를 상상해보도록 이끈다. 1)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이 시집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관련해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리부트월드」는 김종연식 '검은 회화'에 대한 전시 소개 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사각형 안을 가득 채운 '아무것도 아닌' '투명함'의 덧바름은 불투명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한 지향을 드러내며 회화 내부의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리자는 세계 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옵저버로 보이는데, 가령 「미자나빔」에서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며,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 (…)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은 '나'가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가 짙게 드리운 이 세계를 디지털화된 저승계라 할 수 있다면, 관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자적 존재인 셈이다.

월간 현대시 최다영 나희덕김종연리뷰 2025
최다영 오렌지 셰이밍 ― 김나현, 「공중정원」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김나현소설계간평리뷰 2025
최다영 유독한 유기농 가족 ―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 (『림 : 숲속에는 축복이』, 열림원, 2025)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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