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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청색종이 | 2024년 가을호(제13호)

영원을 믿지 않는 사람을 영원히 믿을 때 미래는 온다 ― 차도하, 『미래의 손』(봄날의책, 2024)을 맞잡고

김다솔 문학평론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1. 쓰레기화 된 페미니즘 시대의 불안

 

불안이 상시화된 시대다. 전쟁이 횡행하고, 일상적으로 거리를 걷는 일조차 두려울 만큼 원인과 방향을 특정할 수 없는 부정적인 사건들이 세계 내부에서 쉬지 않고 들려온다. 삶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사회적 불안과 이에 따른 내적 강박 등 여러 불안이 팽배하지만, 최근 가장 날 선 대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여성혐오, 페미니즘과 관련한 불안일 것이다.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은 너 페미야?’라는 말과 함께 마녀사냥과 유사한 낙인찍기의 관행이 되었고, 딥페이크 성범죄와 교제폭력 살인의 수위와 빈도는 끔찍하리만치 높아졌지만 관련 법률의 제정과 사회적 협의는 언제나 그랬듯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반면에 기업을 위주로 행보를 이어 온 집게손가락 논란혹은 집게손가락 괴롭힘은 정당한 소비자 운동처럼 자리를 잡아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동시에 벌어지는 중이다.

이를 지켜본 소회를 다소 거칠게 말해보자면, 지금이 쓰레기화 된 페미니즘 시대가 아닌지 묻고 싶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판단에 의해 무언가는 유용한 것으로, 또 다른 무언가는 쓸모를 잃고 폐기 처분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쓰레기를 구분하는 판단 주체의 자리에는 언제나 인간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인간의 자의적인 척도가 불완전하며 편협하다는 사실이 더없이 사실감 있게 전해지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도 이러한 잣대가 여전히 유효할까. 더불어 쓸모와 유용성의 여부를 가리는 이 오래된 잣대가 페미니즘을 둘러싼 지금의 혼란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의와 수행들이 차별과 혐오에 맞서겠다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고려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못 쓸 것으로 끌어내리려는 폄훼와 이에 맞서 페미니즘을 더욱 효용성 있고 올바른 것으로 좌정시키려는 단순한 운동만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여성을 비롯해 차별받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수행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어떠한 정언명령도 재생산하지 않는 절대성의 총체적 무화에 있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페미니즘을 향한 혐오와 옹호의 움직임은 반대항에 놓여 있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정화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전제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진영 모두 페미니즘을 유용하고 올바른 것이라는 실효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이를 저급하고 유순한 것으로, 혹은 더 순결한 것으로 만들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다면 양자 모두 일종의 오염과 그로 인한 무너짐을 향한 불안으로부터 기인하는 현상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겠다. 전자는 젠더 차이에 의해 영속되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오염시킬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고, 후자는 추구하는 페미니즘적 가치를 수호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정결한 무언가를 고수한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이, 두 움직임은 모두 정화를 새로운 문법으로 위치시킬 뿐, 끝내 현재의 배타적 전체성을 무너트릴 수는 없다. 고수해야 할 가치 따윈 없다는 사실만이 페미니즘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라는 것이 새삼스럽지만 매 순간 상기되어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이제 오염을 자기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더러움은 페미니즘의 새로운 전환의 계기로 역전될 것이다.”1)

쓰레기화 된 페미니즘의 시대에, 무언가를 필요치 않은 것으로 만들어 몰아내려는 시도를 모조리 거부하고, 더러움과 오염을 기꺼이 껴안고서 나아가는 여성의 목소리가 여기에 있다. 당차고 폭발하는 이 음성은 어리고 여린 소녀-여성 차도하의 것이다. 차도하의 시는 결코 다듬어져선 안 되는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표출하며 어떤 의미화와 집단성에도 쉽게 녹아들지 않는다. 작고 뜨거운 불꽃으로 타오르고, 차갑고 단단한 돌멩이처럼 묵직하게 심장을 내리누르는 차도하의 목소리에 이끌려 세계의 무너짐과 재건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시대의 흔들리는 불안이 미래에 대한 상상의 불꽃으로 점화하는 지점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2. 현존재를 젠더화하기: ‘자신만의 세계에서 모두의 세계

하이데거에게 기분이란 이성과 감정 모두의 기저에 있는 인간의 존재와 실존의 뿌리이다. 그중에서도 근본기분(Grundstimmung)은 세계에 존재하는 특정 대상에 대한 기분이 아니라, 전체존재 일반에 대한 기분으로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특정 행위로 유도하여 존재론적으로 변화시키는 특수한 기분이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이전까지는 감정이나 심리상태에서 주로 이해되던 통속적인 기분(mood)을 실존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바라봄으로써, 이를 인간 즉 현존재가 존재 그리고 세계와 만나는 근원적 사건을 뜻하는 말로 바꿔 놓는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이 세계 그리고 세계 내 존재자들과 각기 그때마다 만나고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 바로 기분인 것이다. 그의 철학을 기분의 존재론이라 이름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2)

다소 난해하지만 조금 더 풀어 나가보자. 기분이 존재자와 관련된 존재적인 층위가 아니라 존재와 관련한 존재론적인차원과 연계된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세계--존재로서의 현존재는 여러 존재자들과 함께 세계 안에-있음이라는 존재양식을 통해 거듭 구성된다. 이는 현존재가 특정한 것의 내부 또는 속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여기 혹은 저기라는 실존론적 공간성의 모든 곳에 있고 어떤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에도 닫혀 있지 않은 채 열어 밝혀져 있으면서 존재한다는 이야기다.3)

그런데 하이데거 자신도 강조한 바와 같이, 현존재가 열어 밝혀져 있는 채 존재하려면 그는 세계 내에서 이미 일상적으로 거기에그들과 함께 실존하고 있어야 한다. , 인간은 우선적으로 자기-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균적 기준에 맞춰 그들-자신으로 먼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때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돌아서 타자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현존재에게서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을 발견한다. 불안은 다름이 아니라 전체라고 믿어온 세계와 존재자에 대한 의미체계들이 무()로 드러나면서 현존재에게 엄습하는 기분이다.4) 그러나 이 무는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허무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와 같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뜻5)에서 존재를 새롭게 열어 밝혀주는 개시의 사건이 된다.

불안에 대한 하이데거의 설명은 인간의 두 가지 선택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현존재는 지금까지 믿어 온 세계의 모든 의미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불안을 느낄 때 본래적인 자기의 삶을 등지고 타인에 맞춘 삶으로 돌아서 버린다. 두 번째, 마찬가지로 불안은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무화 작용 앞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기 위해 독단자로서 결단하고, 지금까지의 자신을 떠나보내는 죽음을 선취한다. 불안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을 외면하거나, 자기 자신이 될 선택의 기회를 대면한다.

불안은 인간의 자의적인 느낌이나,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느껴지는 공포와 달리 세계와 시대 상황 자체로부터 무언가가 현존재를 엄습하며 찾아온다. 그 부름에 양심을 움켜쥔 자는 이전의 비본래적 실존과는 달리, 진정한 자기 자신의 본래적 실존을 수행해나갈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물음”6)을 추구하여 현존재의 기초존재론 구조를 확립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밝힐 때, 시간성의 탈자태이자 각기 변화하는 현존재로서의 그의 인간에게서 동일자의 형상이 은근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결단을 통해 단독자가 된 현존재가 자신만의 죽음을 선취해 실존적 방향을 구축하고, 스스로를 기투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게 된다는 주장이 지나치게 우뚝 서 있는 근대적 주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무를 경험했지만, 그 자신은 무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부동의 움직임. 이것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순 있어도 모두의 세계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렇듯 위대한 사명을 엄숙히 수행하는 주체들이 언제나 성차화, 젠더화된 위계에 의해 나뉘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개인의 본래적 실존을 선취하는 존재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는 (백인) ‘남성현존재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기존의 세계가 무너질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주는 불안이 시대마다의 존재 망각의 상황을 일깨워주는 각기 다른 기분으로 때마다 엄습해온다면,7) 같은 사건에서도 현존재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불안과 세계 개시가 발현되어야만 한다. 불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생길 수 있으며 세계--존재를 근본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가능하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본래적 실존을 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에 유의미하지만, 그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누군가는 근본적으로 더욱 취약하고 처절한 상황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더 손쉽게 지워지는 이들과 거짓으로 부풀려진 의미까지도 덧입고 살아가는 이들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는 세계에서 다른 존재자들에 몰입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를 성취할 자격은 오직 후자에게만 주어진다. 각 존재자들이 고유한 존재의미 자체로 자신을 밝혀오는 우리들의 세계, 모두의 세계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 형성될 수 없다.

 

3. 기억할 만한 죽음과 잊어야만 하는 의미

차도하의 시적 주체들이 시대적 근본기분으로서 젠더화된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는 여성들이라는 사실은 하이데거의 결단하는 현존재가 지닌 결함을 더욱 여실히 보여준다. 시인이 그린 여성들은 분명히 남성보다 처절하게 존재의미를 부정당하면서 불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기에 기존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단독자로 고립되지 않고, 자신처럼 차별받는 또 다른 여성과 타인들에게 얽힌 채로 공동의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간다. 고정되지 않는 의미들로만 가득 찬 미래를 상상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가까스로 뻗은 손과 그 손을 절대 모른체하지 않는 집념에 기반하고 있다.

차도하의 시세계에서 발 딛고 선 세계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불안의 기분은 주로 다른 이의 죽음으로부터 온다. 「부고에서는 독특하게도 계절인 여름의 죽음이 에게 찾아온다. 여름이 죽었다는 소식은 외출 준비를 하던 중별다르지 않게 찾아오는데, 이는 죽음에 한없이 무감한 화자의 태도와 연결된다. 계절의 죽음은 하긴 누군가 신도 죽었다고 했고 재작년 이맘때쯤 김희지도 죽었는데 계절이라고 못 죽을 거 있나하는 서술과 겹치며 가장 친했던 친구이자 죽은 이후에도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까지도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라는 기이할 정도로 덤덤한 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그러니 이토록 무감한 태도의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겠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은 거라면 역시 자살인가, 자살이겠지, 그러나 나는 여름이 왜 죽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 게 예의라고 배워서.” 비정상적인 실종을 못 죽을 거 있나싶은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원인을 파악하는 일을 예의에서 벗어난 일로 치부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 무정하고 무의미한 독백을 늘어놓는 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언가가 부자연스럽게 사라졌을 때 죽음의 원인을 묻지 못하게 만드는 압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억하지 않을 만한 지나침에서 그러한 힘이 구체적으로 세계를 어떻게 어그러지게 만드는지로 이어진다. 해당 시에서는 복숭아를 좋아하는 죽은 친구를 둔 사람과/ 딸기 디저트를 좋아하는 죽은 친구를 둔 사람이/ 어느 날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건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일은 죽은 친구의 영혼을 각자 한 사람씩 더 업고 있었던 둘이 서로 마주쳤음에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마무리된다.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를 마무리하고/ 남은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무감함의 강요는, “어떤 사람의 죽음이/ 오늘의 교통 상황에 숫자로 기록되듯이 인간 본연의 존재 의미를 망각하고 수치화하는 권력의 행태가 영혼에 대한 믿음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앗아간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이렇듯 죽음의 경험을 평균화하는 힘은 죽음의 이유를 묻지 못하게 하고, 각자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 세상의 기준에 걸맞은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을 살아가도록 만든다. 본래 타인의 죽음은 기존의 세계를 문제 삼을 수 있는 무화의 경험을 선사하는 불안의 촉매다. 가까이 있는 이의 죽음은 그중에서도 무척 중요한 사건이지만, 위의 시들처럼 연결되었던 이의 죽음마저도 덧없는 것으로 만드는 힘은 어떤 죽음 앞에서도 불합리성을 향해 질문할 힘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차도하의 시적 주체들은 침묵을 종용하는 힘 앞에서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잊어도 좋을 것으로 치부 당하는 죽음들을 기억할 만한 것들로 되바꾸기 위해 불안에 전율하면서 질문을 반복한다.

 

왜 우는 것임?

왜 식당에서 남이 죽은 이야기를 하며 우는 것임?

 

(...)

 

그가 죽은 이유 궁금하지 않았음

모르는 얼굴들이 식당에서 나가기를 바랐음

그들의 대화는 길어졌음

아는 사람 앞에 부사가 끝없이 붙었음

그건 내가 모르는 사람의 삶

나는 두부를 꼭꼭 씹었음

 

식당 안은 어느새 울음바다가 되었음

일어날까? 일어나자 이제

모르는 얼굴들이 식당에서 나갔음

나는 그 후로도 한참 앉아 있었음

나 원래 밥 먹는 속도 느림

- 「명사형 죽음부분

 

명사형 죽음의 화자는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 얼굴만 아는 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엿듣게 되고, 죽은 이를 말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말하며 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가 죽은 이유도 궁금하지 않다고 단언하지만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먹으면서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다. 죽음의 이유를 찾을 수도 없고, 그래야 하는 이유도 모르지만 왜인지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 여운을 느낀다. 이러한 태도는 세계를 향한 질문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도 모두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 지니는 날카로운 자율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은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서 결코 돌아설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죽음을 미지근한 상태로 느끼도록 만드는 힘은 더 많이 죽는 이들과 더 무감한 이들을 만들어낸다. 여성은 더 많이 죽고, 남성은 더 무감하다. 「시선에서는 모두가 쉽게 다니는 산책로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고, 피해자는 로부터 늘어난 수많은 여성들, 폭력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이들로 확대되었다. “산책로에서 성폭행이 일어났다/ 나는 더는 쓸 수 없다/ 나는 백 명으로 천 명으로 만 명으로 늘어나/ 산책로를 뛰었다// 나는 우르르 넘어졌고 나를 밟았고 압사를 당했고/ 나를 뛰어넘어 겨우 살았고// 산책로는 점점 짧아지고/ 하나의 점이 되어/ 나의 모두가 그 위에 쌓여// 하늘을 뚫고 우주를 뚫는 첨탑이 되었다// 과장이 아니에요/ 나는 한 번도 현실을 앞지른 적 없습니다”. 하늘을 뚫을 정도로 많이 쌓인 수는 결코 과장이 아니. 시적 표현은 한 번도 현실을 앞지른 적 없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요절복통의 화자는 갑자기 터지는 웃음처럼/ 강간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상황을 마주한다. 속수무책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폭력 앞에서 발생한 죽음은 그러나 꾸민다는 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니?”라고 말하던 여성의 죽음을 한 송이의 흰 국화로 정갈하게 정돈하여 유의미한 흔적들을 제거한 채 예쁘게 꾸며낸다.

그런데 차도하가 드러내는 죽음의 종용과 축소는 비단 남성 중심적인 권력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페미니즘 내부에서의 순결성을 응시하는 힘 있는 발화가 그의 시편들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도발적인 당혹감을 선사하기도 하는 시인의 시어들은 이내 그 당혹스러운 불안감앞에 우리를 멈춰 세우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세련의 시어들처럼 말이다. “이국적인 문양을 갖고 있는 접시를 잘 닦아서 유리장 안에 넣어놓듯이 시를 쓰세요라는 선생님의 말에 그녀방치된 공원의 쓰레기통 같은/ 오래된 병원에서 재사용하기 위해 주사기를 모아놓는 상자 같은/ 질염 찌꺼기가 가득한 보지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솔직한 쓰기를 향한 여성의 욕망을 풀어놓는다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이 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뒤의 사건에서 밝혀지는데, “요즘 젖가슴이라는 말을 누가 쓰나요?/ 중년 남성이 쓴 시를 놓고 트위터 사람들이 욕을 하고 있었던 상황을 목도한 그녀가 자신의 시에 젖가슴을 쓰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차도하는 여성을 향한 사회적 억압에 적대한다는 단선적인 전선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말들의 의미 역시도 함께 무너트리고자 한다. 따라서 도발적이네요, 하지만 이게 꼭 필요한 표현일까요, 누구누구의 시를 읽어보셨나요하는 인사치레들이 오가다가 이건 이미, 끝난 시예요라는 말을 들은 화자가 유리장의 금을 깨고 나가려는 여성 언어가 정결화되면서 생긴 또 다른 억압에 유리장 따윈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절멸로 응수하는 장면은 유의미하다. 시인에게 여성과 차별 받는 이들을 지키는 언어는 세련된 빛의 언어가 아니라 온갖 더러운 경험을 거치고서라도 영원히 전달될 주술적인 힘을 지닌 언어(「지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호를 긋는 순서를 모르고.

성경을 펼쳐본 적 없고.

십계명을 모르지만.

 

나에게도 지키고 싶은 것은 있다.

 

두 손을 맞잡지 않은 채로 필사적으로 바라고 있다.

 

그녀가 죽지 않기를.

 

신이 그녀를 속여도. 전 재산을 잃어도. 강간을 당해도. 소설을 읽을 수가 없고. 선한 인물이 싫어지고.

자두를 먹어도 단맛이 느껴지지 않고

끈적한 진물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릴 때도.

 

보지에서 코에서 입에서 눈에서 피가 줄줄 쏟아지고.

 

살아라

라는 말이 비겁하게 느껴질 때도

 

그래서 그녀가 이미 죽은 이후에도

 

나는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 「지키는 마음부분

 

침묵하게 만들고 폭력을 감행하는 신의 사랑(「침착하게 사랑하기」)이 아니라, “왜 그가 아니라 내가 남았나요?”(「동반자」)라고 이유를 묻는 절절한 사랑이 차도하가 지키고 싶은 마음이자 시적 태도다. “살아라/ 라는 말이 비겁하게 느껴질 때도정합적 의미와 매끄러운 맥락들이 아니라 상대가 악착같이 살아남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만이 상대의 존재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날것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차도하 시의 정수를 이루는 레즈비언 화자,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들의 발화와 더불어 빛이 있으라, 빛이 있으라……/ 중얼거리는 사내의 손을 잡고/ 없어도 돼요말하며 춤을 추는 시적 주체들은 모든 집단성을 벗어던지고 오직 눈앞의 대상에게 투신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기억하고, 의미를 잊는다.

 

4. 잿더미에서 다시 쓰는 손

 

이렇듯 정해진 의미와 기존의 세계를 이루는 구조들을 전부 거부하겠다는 차도하의 힘 있는 시는 불태우는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듯이/ 나도 너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고 지친 표정으로 말하는 엄마에게서 태어난 지구를 불태우기엔 충분한 개수였고/ 내 집을 불태우기엔 충분한 개수성냥개비를 낳(「선택」). “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지/ 왜 죽은 사람은 죽어야 했는지”(「추모」) 손에 쥘 수 없을 만큼 가득하고 커다란 질문을 쥔 이가 그것을 바닥에 떨어트렸을 때는 걷잡을 수 없이 큰 화재가 발생한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였다고 했다.

미친놈이 그랬다고 했다.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고

 

끝없이 옮겨붙었다.

도시가 불탔다.

 

영원히

 

재가 된 도시 속에서

영원을 믿지 않는 한 사람이

내 시신을 발견했다.

 

그는 시신을 옮기고

연구실에서

나를

내 손을 오래 바라보다

 

이런 기록을 남겼다

: 그는 무척 뜨거운 것을 쥐고 있었다

 

일지를 쓰다 엎드려 잠든 그의 꿈속으로부터

 

도시가 재건되고 있었다.

- 「추모부분

 

 

화자는 여성과 여성과 남성도 아닌 이와 아이와 노인과 같이 느닷없이 죽고 쫓겨난 이들을 은폐하는 세계에서 불안을 느끼고 서성인다. 장례식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해 하는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불안이 곧 질문이 되어 도시 전체를 불태운 불꽃이 된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미친놈의 소행 정도로 일단락시키려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은 도시를 영원히불타게 만든다.

그러나 불안 앞에서 모든 존재 의미의 무를 발견한 뒤 새로운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가는 차도하는 결코 어떠한 영원도 믿지 않는다. 다시금 만들어진 질서 역시도 배제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도하의 글쓰기는 남성 중심적 권력성에 단순히 반대하는 전복성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권력을 삭제하고 폐허로부터, 잿더미로부터 다시 쓰려는 창조적 회복성에 집중하고 있다. 시인은 돌을 던져 강을 메울 수 있다면 돌 던지기를 멈추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렇지만 돌 던지기는 계속될 것”(「돌 던지기」)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모두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 앉기 게임의 규칙을 아예 변경 시켜버리는 세계에서 더는 새 시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최초의 시인”(「최초의 시인」) 역시 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뜨거운 것을 쥐고 죽은 화자를 바라보며 도시를 재건해 나가는 또 다른 주체는 영원을 믿지 않는 한 사람이다. 시인은 자신이 쥔 질문으로 기존의 의미를 잿더미로 만드는 폭발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면서, 그 폭발 역시 영원하지는 않으리라는 걸 믿는 자에게 재건의 힘을 뒤이어 맡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무화시키고 보다 나은 유의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세계를 위한 단초를 다져준 화자는 죽고, 다시 열리는 세계 앞에 우리만이 덩그러니 서 있는 시의 끝에서 감출 수 없는 쓸쓸함을 느낀다. 재건의 현장에 시인과 함께 있을 순 없는 걸까.

 

원래란 뭐지?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중학생은 담배를 피우면 안 되고. 중학생은 담배 냄새가 빠질 때까지 산책을 좀 하다가 집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담배 냄새는 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학생이 하는 질문은,

 

혼을 낼까? 혼을 내지 않을까?

 

예측할 수 없는 체벌.

중학생의 마음을 공터로 만들게 한.

 

그러나 우선은 공터에서 빠져나와 담배 냄새를 빼기 위해 산책을 하기로 하고, 중학생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다가

 

주머니 속에서 어떤 손을 잡았다.

 

그것은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의, 미래의 손.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고

 

주머니 속에 깊게 손을 찔러 넣은 중학생이 당신을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 「미래의 손부분

 

 

뜨겁고 단단한 손을 잡기 위해, 아니 그 손과 손을 스쳐라도 보기 위해 표제작 미래의 손을 살펴본다. 시에서 중학생인 시인, 차도하는 의미를 무의미로 만드는 자다. 시대의 불안을 온몸으로 감각하면서 세계의 의미에 대해 반복해서 고뇌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때 중학생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는데, 앞서 살펴본 시에서와는 달리 미미한 불꽃이지만 담배의 필터가 타들어 갈 때 세상의 필터도 조금씩 타들어 가고, 세상의 모든 관계가 지워지고. 비어 있는 곳 빼고 모든 것이 지워져서.// 세상엔 공터만이 남았다.”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사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떠올리되 기존 의미에 속박된 사랑을 떠나서. 그 모든 관계가 아닌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중학생은 미약한 불빛으로 세상의 의미를 찬찬히 지워나간다.

일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나 기존의 가치체계를 지워버리고 비어 있는 곳”, “공터만을 남긴 이 중학생의 마음도 공터라는 사실은 극도의 허무 앞에 선 어린 소녀의 무화시키는 힘과 정확히 그에 비례하는 쓸쓸함을 동시에 전달한다. “원래란 뭐지?” 질문하려는 마음은 예측할 수 없는 체벌에 의해 다시금 텅 비어간다. 이처럼 세계의 부조리 앞에서 불안을 감지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 실존으로 나아가려는 결단은 젠더화되고 위계화된 차이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그렇기에 애초에 비워진 채인 공터를 내면에 간직한 시인은 역설적이게도 이 근본적인 무에 기반하여 모든 의미와 세계를 다시 써나갈 힘을 보유하게 된다. 그렇게 힘을 낼 수는 없을지라도 포기하지는 않는 중학생이 산책 중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맞잡은 손은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의, 미래의 손.” 다름 아닌 자신의 손이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입국 심사」)라고 다짐하는 차도하. “그러니까 내가 작가라면 계속 쓸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이 정도 길이인가 싶다가도 문장이 아직 남아서 계속 잴 수 있으니까 계속”(「독서 유예」)이라던 차도하가 주머니 속 어떤 작은 손을 움켜쥐는 장면은 어떤 말을 덧붙이더라도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재생과 재건의 힘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끝내 역접의 접속사로 미래에서 온 시인의 존재가 다시금 지워지는 결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는 현실에서, 뜨거운 손이 맞잡고 지나간 시간은 중학생이 꿈꾼 찰나의 미래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비관하고 낙담하기 전에, 시인이 늘 자신이 딛고 선 현재로 되돌아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겠다. 차도하의 폭발과 재건의 상상력은 언제나 현실 너머, 현재 이후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 뿌리 내리고 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발에 땅이 닿는 감각을 되새”(「레이스」)기고, 현실에서 자신을 탈출시킨 이후에도 모두를 두고 나온 우주 바깥에서 어리둥절 서성이다가 땅으로 돌아와 더럽고 차가운 맨발을 씻”(「시선」)는 이가 곧 시인이었다. 그런 시인에게 평생 쫓겨 다녀서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한 미래는 사실은 도망치지 않았고/ 문밖에서 내내 기다렸던 무언가임이 밝혀진다.

그러니 세상의 낙인과 오명을 모조리 지워 공터로 만드는 중학생의 손을 맞잡은 시인은 새로운 배치를 세우고 또 무너트리기 위해 끝없이 되돌아가는 운동성을 반복하는 자다. 어떤 영원도 믿지 않는 시인의 역동성은 덧없음을 한탄하는 좌절이 아니라 위치변경을 거듭하는 세계의 재배치화를 일궈낸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미래가 현재를 기다리게 하고, 현재에 미래를 풀어놓음으로써 둘의 만남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꼭 맞물리는 만남이 아닐지라도, 영원한 접촉은 없을지라도 잠시간 맞잡은 손의 열기만으로도 세상은 무너지고 미래는 새롭게 떠오를 수 있다.

불안함에 흔들리면서 영원을 믿지 않는 사람을 영원히믿을 때, 무엇도 단정하지 않고 상정하지 않는 의심에서 불안이 불꽃으로 바뀌는 장면을 함께 목격할 때, 어떤 오염과 더러움도 겁내지 않고 살아남으라고 일으켜 세우는 목소리를 들을 때, 그렇게 미래는 오게 될 것이다. 잿더미에서 끈질기게 다시 쓰는 미래의 손을 맞잡고서, 이내 다시 스쳐 가면서. “그래서 그녀가 이미 죽은 이후에도/ 나는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는 차도하의 마음. 내가 유일하게 믿고 싶은 영원은 오직 그것뿐이다.
  • 1) 심진경, 『더러운 페미니즘』, 민음사, 2023, 7
  • 2) 강학순, 「하이데거의 기분의 존재론에 대한 고찰」, 『현대유럽철학연구』 71, 한국하이데거학회, 2023, 98-10쪽 참조.
  • 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183-185쪽 참조.
  • 4) 불안이 현존재에게 상기시키는 무는 손안에 있음 중의 어느 것도 아님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세계로부터 기인하는데, 이 세계는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으로 세계--존재인 현존재에게 속해 있다. 따라서 불안이 불안해하는 것은 바로 세계--존재 자체인 현존재의 무에 대한 깨달음과 그로 인한 가능성 그 자체에 있다. 여기서 바로 무 앞에서 결단할 수 있는 현존재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위의 책, 255.)
  • 5) 이은주, 「하이데거에게서 불안과 죽음의 의미」, 『존재론 연구』 15, 한국하이데거학회, 2007, 24쪽 참조. 강조 인용자.
  • 6) 마르틴 하이데거, 앞의 책, 250.
  • 7) 하이데거의 전기사상에서 근본기분 불안은 통시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후기에는 역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현시대의 근본기분으로서 존재 망각을 상기시키는 변화한 불안의 성격을 말한다. (박찬국,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의 불안 개념에 대한 비교 연구」, 『시대와 철학』 10,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999, 217쪽 참조.) 이 글에서는 후기 불안의 역사적 성격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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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나’ 아닌 것들이었다. 타오르듯 싱그럽던 나무의 잎사귀 같은 것들이나 그 아래의 무수한 기척 같은 것들, 땡볕 아래 타오르듯 일렁이듯 작은 돌멩이나 창틀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같은 것들, 혹은 녹아내리는 시간 속에 서 있던 한 사람까지.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은 나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손쉽게 사로잡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언어를 그물 삼아 ‘나’ 아닌 것들을 손에 넣고자 무던한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란 참으로 무정한 것이어서, 그 숭숭 뚫린 구멍들로 정작 우리가 사로잡으려던 것들은 쏟아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궁색한 언어만이 슬픈 흔적으로 남곤 한다. 그러니 ‘시’란 근원적으로 편린들, 혹은 우리가 사로잡고자 했던 바의 부스러기들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이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손에 넣고자 했던 바로 그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잡고자 무던한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던 시간의 허물에 진배없으니 말이다. 영혼 잃은 육체처럼 허물어지듯 남겨진 언어의 잔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사로잡으려한 나머지 그에 미달하는 언어만이 남겨진 슬픈 실패의 기록.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남기는 이 언어들을 바라보며 실패의 쓴맛을 들이키며 그것을 증오하듯 사랑하고 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추함은 단지 ‘醜’한 것이라고만은 말하지 못하리라. 적어도 그 추함은 한때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는 실패의 기록일테니 말이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전동균의 시가 특별한 까닭도 그와 같으리라.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은 모두 망가지고 부서진, 흡사 세계의 부스러기와 같은 모습들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그리하여 시간 속에 유폐되어 있는 듯 보이는 사물들은 제 자리를 영원토록 잃어버린 모습으로 이 시적 세계 곳곳에 허물어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언어로 포획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 허물어지고 유폐된 시간의 기록들. 그렇기에 그의 시는 한편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홀로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아로새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을밤의 손바닥에 철철 넘쳐나는 달빛 속의 얼룩들, 몸부림치며 빛이 빠져나간 흔적 같은 내 눈이 빛을 얻고 내 입술이 말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靈)들이 나를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을 생각합니다 지도 밖으로 흘러나간 길들 바다에 가라앉은 화산들 육지를 처음 걸어다닌 물고기 틱타알릭과 그 지느러미 같은 것들 어딘가에 숨어 한 방울 눈물의 온기로 견디며 나를 부르는 이 모든 것을 데리고 온 운명 혹은 우연 - 「슈퍼 문」, 전문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특질은 많은 경우 무수한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시작된다. 툭하니 내버려진 듯 무심히 존재하는 사물들의 모습은 그 쓸쓸함을 원인 삼아 다른 무수한 사물들로 이어지며, 화자의 진술을 통해 고독한 원환성을 완성시킨다. 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핵심적인 정서는 사물들의 연쇄로부터 그것들에 대한 화자의 진술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에 덧붙여진 표현들, 예컨대 “빠져나간”, “다녀갔을까”, “잊혀진 것들”, “흘러나간”, “가라앉은”과 같은 표현들이 그러한 정서를 강화시킨다. 사물과 그에 대한 화자의 진술이 한 데 어울리면서, 5연에 배치된 시어들에 이르러서는 진술의 주체인 화자를 포함한 이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시간이 지나버린, 제 자리를 끝내 잃어버리고 만 존재들임을 알게 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이 모든 사물들과 자신이 하나의 “운명” 혹은 “우연”으로 묶여 있음을,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존재론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 속에 유예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쓸쓸하고 외로운 형상들을 단지 슬픔이라 말하는 것은, 혹은 그 슬픔을 단순히 일차원적인 감각적 소요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화자를 포함한 그 모든 사물들을 한 데 묶는 요소로서 ‘슬픔’이란 감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써, 보다 정확하게는 존재의 양태로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지막 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견딤’에 대해 보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 외롭고 쓸쓸한 형상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기 위한 자세인 것이라면,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촉발시킨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그 모든 사물들의 망가지고 부서진 형상이란, 서로 다른 시간을 경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면서, 서로 다른 자기만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그 무수한 기억들을 독립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전동균의 시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사물들의 형상, 그것들의 부서지고 망가진 모습들은 한편으로 시가 가진 본질적인 추함과 서로 공명하고 있다. 그 모든 상흔들은 결국 제 스스로 가닿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실패의 자국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동균의 시는 그 자체로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메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말해보고 싶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추함, 혹은 망가지고 부서진 자국들, 그 모든 상흔과 유폐된 시간들은 단순한 실패의 산물로써 자기 위로나 혐오를 위해 동원되는 수사적 사물들이 아닌 것이며, 비록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부스러기 같은 모습에 불과할지 몰라도 제각각의 기억 속에서 한 때나마 찬란했던 혹은 찬란하고자 했던 실패의 순간을 보존하고 있는 사물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그러한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형제라 호명함으로써 그 무수한 사물들의 모습을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쓰며, 찬미의 대상으로 아로새긴다. 빈집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사랑하였다 저문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기척들을 사랑하였다 땡볕 속을 타오르는 돌멩이, 그 화염의 무늬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창틀에 낀 먼지, 깨진 유리 조각, 찢어진 신발, 세상에서 버려져 제 슬픔을 홀로 견디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나의 사랑은 부서진 새 둥지와 같아 내게로 오는 당신의 미소와 눈물을 담을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후회를 내 눈동자를 스쳐간 짧은 빛을 사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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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레레」, 전문. 그러한 윤리성은 위의 시 「미제레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무수히 호명되는 저 많은 주어들은 마땅한 자리를 ‘지금 여기’에 갖지 못한 사물들이기에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유예되며 또 다른 부서지고 깨어진 쓸쓸한 것들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화자는 “그 가난과 추위의 이름으로/찬미 받으소서”라 말하며, 이 모든 사물들이 행하는 견딤의 시간에 헌사를 보낸다. 그러한 헌사는 동시에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물들에게 마땅한 몸피를 부여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언어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성을 형성하는 주체적인 능동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을 향한, 높은 곳에 위치한 성스러운 존재들이 아닌 낮은 곳에 위치한 비천한 사물들을 향한 그의 찬미와 사랑을 통해 그는 비로소 ‘혼자’이되, 자신과 같은 무수한 형제들을 가진 ‘혼자들’의 하나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전동균의 시에 있어 ‘견딤’이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간의 부피를 단지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어 ‘견딤’이란 돌이킬 수 없는 찰나 이후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가진 고유한 쓸쓸함을, 그 고독의 시간을 감각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슬픔을 견디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비추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언어는 보편적인 찬미의 대상이 되는 태양이나 달, 별과 같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는 사물들이 아니라 “먼지들”, “죽은 벌레”, “해진 걸레들”, “빈 소주병”, “노숙의 새까만 발들”, “감겨진 눈의 눈물”과 같이 유폐된 존재들에게 향하는 것이리라. 그 모든 것들이 화자에게는 “통증 없이는 빛나지 않는 별들”일지니. 이와 같은 화자의 특수한 시선은 그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을 향한 섬세한 감각들이 언어로 피어나는 까닭과도 이어진다. 가령 「천지간」에서 “흙들의 밤이 두리번두리번 몰려왔다” 말하며 자연에 새겨진 고유한 슬픔을 읽어내는 것이나, 「다대포」와 같은 시에서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 속에 새겨진 영겁에 가까운 고통의 시간을 읽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시에서 무의미한 존재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기 다른 슬픔과 고통을,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것일 뿐인 고독을 모두 다른 모습으로 시간의 부피를 견뎌내고 있는 위대한 ‘혼자’들이기 때문이다. 시궁창의 구더기다 깨진 유리 조각이다 짓이겨진 담배꽁초다 이것들을 다정한 나의 형제여, 라고 부르는 실성한 입술이다 - 「이 밤은」, 부분. 그렇기에 화자는 심지어 “시궁창의 구더기”와 “깨진 유리 조각”, “짓이겨진 담배꽁초”와 같이 한없이 낮은 존재들을 향해 “이것들을/다정한 나의 형제여”라 호명한다. 상식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없는 자기혐오에 가까운 일일 테지만, 그의 시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호명은 자기혐오를 초과하는 여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혐오도, 자기중심적인 고백도 아니다. 모든 존재가 제각기 다른 자기만의 슬픔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로써,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된 것으로 다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언어란 그 모든 부서지고 망가진 사물들의 견딤을 향한 헌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삶의 양태란 결코 명확한 상징이나 명제로는 표현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견딤의 형상을 말함으로써만, 그리하여 부서지고 망가진 쓸쓸하고 홀로된 모습을 언어를 통해 비출 때에야, 사람의 양태란 초과 혹은 결여의 형태로써 우회적으로나마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쓸쓸함은 결코 쓸쓸함만이 아닌 것이며, 그 모든 실패들은 단지 실패인 것만이 아닌 것이고, 이러한 사물들의 양태를 언어로 비추는 것은 그 고유하고도 보편적인 삶의 양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뎌나가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고쳐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시적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추하다. 그러나 그 추함은 고독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본질적으로 홀로된 세계는 무수한 ‘혼자’들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다. 이 모순되고도 상반된 세계의 모습. 전동균의 시적 언어가 비추는 세계의 모습이란, 그리하여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생의 긍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흡사 그가 화자의 입을 빌려 “왜 세상 모든 곳은/무덤이며 성전인지”(「해가 지면 다시」)라 질문했던 것처럼. 그 질문 자체가 결국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기에 그의 시는 단단하지 않고 때때로 깨어지고 흩어지며 중얼거리듯 간신히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도착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다시금 깨어지고 흩어지며 때로는 바스라지듯 간신히 이어지더라도,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모든 존재의 홀로된 생에 대한 사랑이자 헌사이며 찬미이기도 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 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잊혀진 것들을 다시 데려오려 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기록의 모습으로, 때로는 기도의 형태로, 때로는 고백이자 슬픔의 토로와 같은 모습으로 그의 시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계간 청색종이 임지훈 전동균「미제레레」서정 2025
이소 어른의 서정 : 백수린,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25)

1. 구본창의 비누 사진을 본다. 말라비틀어진 비누의 갈라진 틈에 흘려보냈어야 할 때가 박혀 까맣게 굳어 있다. 더는 손 씻는 데 사용할 수 없을 작은 비누를 차마 버리지 못한 연한 마음. 한낱 비누 조각에 담긴 손때에서 세월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섬세한 시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할 것이다. 아름답지만 그뿐. 스스로 빛나지 않는 것에 과할 만큼 환한 조명을 비춰 부유하는 듯 피사체를 연출한 사진술에 불과하다고. 삶은 어찌할 바 없이 낡아가기 마련이고 그 사실 자체는 대단한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고.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을 동원하지 않으면 포착할 수도 간직할 수도 없는 평범하지만 놀라운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조명을 비추고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어도 메마른 비누가 다시 수분을 머금고 유선형으로 부풀어 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저 모양과 저 색으로 머무르는 비누의 한순간이 존재하고, 때때로 예술은 부드럽고 환한 조명을 비춰 그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영원의 빛을 부여하는 일을 해내고야 만다. 잘 짜인 베일 위에 손때 묻은 비누 조각을 올려 섬세한 조명을 비춰보는 일. 말라붙은 비누는 놀랍게도 영롱한 빛을 뿜고, 우리는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다. 2. 백수린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에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p.36) 자주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놀라움과 함께 등장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기에 놀랍고,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라고 잊었기에 새삼스럽다. 현란한 타임라인에 무한한 현재가 피드되는 오늘날에도 소설은 삶이 연속적임을, 젊었던 내 모습은 절대 돌아오지 않고 그 비가역성이야말로 삶이 지닌 잔인하고도 엄연한 속성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은 삶이 단속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내 앞에 돌아와 놀라운 기시감을 선사해주라는 것 또한 알려준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까맣게 잊었을까”(「아주 환한 날들」, p.33) 하고 작은 경악을 느끼는 것처럼, 마흔이 넘은 여자가 “일렁이던 특별한 빛”을 가졌던 한때를, 그 시절 품었던 “이제 와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무척 황홀한 감정”(「빛이 다가올 때」, p.65, 71)을 언제든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삶은 기억에 남은 몇 장면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인생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장면들로 엮어낸 사슬이 어떤 이야기를 빚어내는지에 달려있다. 당신은 어떤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나. ‘그 순간 이후 나는 달라졌다’라는 말은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차라리 진실은 ‘그 순간을 떠올린 이후 나는 달라졌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순간을 반복해 살고, 그때 비로소 그 순간의 적확한 좌표를, 그 순간이 인생에서 차지한 위치와 의미를 뒤늦게나마 알아채게 된다. 이야기의 형태로 순간은 영원을 획득하고, 그때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진실이 선물처럼 손에 쥐어진다. 그렇게 되찾은 시간은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내 삶을 관통해왔음을, 다시는 얻을 수 없는 환희가 그때의 내게 주어졌음을 깨닫는 순간. ‘그때 그곳’은 ‘지금 이곳’에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1) 모습으로 펼쳐진다. 오래되고 낡은 기억을 새롭게 재생하는 이 뒤늦은 행복의 수확은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예컨대 다시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믿었던 노인이 앵무새를 사랑하게 되었거나(「아주 환한 날들」), 뉴욕에서 만난 마흔이 넘은 사촌 언니의 때늦은 첫사랑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빛이 다가올 때」), 당혹과 감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시에 이 모든 일은 이미 충분히 고독하기에 발생한다. 아무리 후회해도 노인이 젊은 엄마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고, 첫사랑의 추억에 무감해질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여자에게 뉴욕은 광채를 잃은 도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므로 연속과 단속의 교차, 고독한 사람이 길을 걷고 서길 반복하는 모습이야말로 삶에 관한 정확한 비유로 보인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길은 끊기지 않고 다만 종종 정지되고 자주 되감길 것이다. 그렇게 백수린 소설의 행로는 언제나 한 곳을 향한다. 잃어버린 제 자리를 찾아서. 과거의 한 장면이 제자리를 찾아 잃어버린 조각처럼 박힌다.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닌, 방금 만들어진 자리. 박히는 순간 이 자리가 바로 제자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자리. 그렇다고 사랑이 이별로 마무리되고 삶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지당한 진리가 훼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녹아 사라지거나 말라비틀어져 버려지는 것이 비누의 운명인 것처럼. 인생이 비극이라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고, 비극에서 실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가의 고군분투가 존재할 따름이다. 미약한 우리가 삶의 비극성에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임을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될 수밖에 없지만, 다행히도 예술가의 눈에 발견되어 그의 손에 의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소설의 아름다움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2)에서 유래하며, 소설의 독자이자 제 삶의 독자인 우리가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3. 아름다움에 대한 책임은 지적인 책임 역시 저버리지 않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지나간 시절의 좌표를 해독하는 일인 동시에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 이곳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물론 아름다움과 진실은 함께 지켜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기억은 재구성의 작업을 멈추는 법이 없고, 보정된 과거는 진실성을 잃는 대신 아름다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사건을 보도하는 일과 같지 않고, 어쩌면 기사를 작성하는 일조차 현장에서 써 내려간 기사가 모든 일이 끝난 후 숙고하며 작성된 기사보다 진실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숲에서 벗어나 숲을 풍경으로 바라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곳에 속했던 나로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시간이 빚어낸 거리를 통과하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편집과 윤색의 의혹에 자유로울 수 없을지라도 차마 거짓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은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한다. 복기되지 않는 사실은 순결하지만 무의미하고, 삶은 끊임없이 복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도약을 감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매개물”에 가깝다. 만약 기억을 탐사하는 자가 “발굴된 물건들의 목록에만 신경을 쓰고 옛것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를 오늘날의 대지에 표시하”는 걸 잊는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3)고 있는 셈이다. 되찾은 기억은 단지 사실을 보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솟아오르는 현재의 이 장소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시절의 보라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는 유타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15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녀는 더 이상 “유타의 대책 없음이 한심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건 어쩌면 그녀가 이제는 나이 들고 병든 개를 간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봄밤의 우리」, p.92) 이 순간 그녀의 눈앞에 과거 유타와 함께했던 나날이 다시 한번 펼쳐진다. 타인의 말과 몸짓이 새롭게 발굴되고, 그렇게 되찾은 것들은 발굴이 이루어지는 지금 이곳의 내 삶에 대해 알려준다. 뒤늦은 앎이 전적으로 내 덕이 아닌 것처럼, 당시의 무지도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닐 것이다. 스물여덟 살의 다혜가 자신을 얼마나 성숙한 어른으로 여기든 간에,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모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도, 자식들의 만류에도 어깨관절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없다. “이제 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짐짓 어른스러운 포즈로 반문한다. 그러나 마흔에 접어들자 희미한 깨달음과 후회가 밀려온다. “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 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 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눈이 내리네」, pp.208~209) 앞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를 것이고, 운이 좋다면 언젠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얻은 불완전한 앎에는 놀랍게도 아름다움이 함께할 것이다. 삶은 기억이 빚어내는 반복을 통해 의미를 발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고작 1인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손안에 놓일 앎이 그리 대단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미미한 앎에 깃든 아름다움을 기만이나 허위로 폄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린 딸을 잃은 엄마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순간처럼, 차마 바랄 수도 없던 빛, 꿈에서도 허락한 바 없던 빛이 삶에 내려앉는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그 빛이 언제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 경외감이 어린 눈으로 그 빛이 번져가는 광경을 바라볼 수는 있”(「그것은 무엇이었을까」, pp.245~246)다. 삶의 아름다움은 감히 기다릴 수는 없지만 기꺼이 맞이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어른을 위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찾아온 앎이 가까스로 맺힌 물방울 같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정교한 결정에 감탄하면서도 그 찬란함이 곧 흩어지리라는 걸 납득하는 사람의 이야기.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지는 자가 되는 것도, 힘을 갖거나 성취를 쌓은 자가 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포기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에 가깝다. 갓 성년이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섬으로, 다른 이들을 파도로 여겼다. 파도가 나를 치거나 감싸며 가까워지고 멀어지길 반복한다고 믿었던 순진함. 나이를 먹고 알게 된 것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나는 바다 위에 고정된 섬 같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말의 허위를 깨닫게 된 순간, 인생의 많은 것을 마음 편히 포기할 수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를 먹어야 알 수 있는 것들, 나이를 먹어야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4) 젊은 시절을 “서정적 시기”라고 설명하는 쿤데라의 말에 동의한다.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가 존재한다. 그러니 성숙해진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하는 일, 서정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소설은 어른의 것이고, 소설가의 탄생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5) 여기서 백수린의 소설을 좀더 염두에 두고 말해보자면, 소설가는 그 폐허 위에 어른의 서정 세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복잡한 서정, 그러니까 무지로 빚어낸 매끈한 서정이 아닌 주름지고 비틀리고 손때 묻은 서정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 세상에는 어른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와 충만이, 얼마만큼 나이를 먹어야 알아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작가를 가진다는 건 달라진 그의 관측소를 공유하며 새로운 어른의 서정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다정한 공모자들처럼.”(「흰 눈과 개」, p.142) 1) 발터 벤야민,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역, 「햇빛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도서출판 길, 2007, 212쪽. 2) 밀란 쿤데라, 권오룡 역,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 『소설의 기술』, 민음사, 2013, p.195. 3) 발터 벤야민, 같은 책, 「발굴과 기억」, pp.182~183. 4) 밀란 쿤데라, 박성창 역, 「커튼 뒤에 숨겨진 삶의 나이」, 『커튼』, 민음사, 2012, p.204. 5) 같은 책, 「시인과 소설가」,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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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천 ‘어제’를 봉합하는 거듭나기의 시(詩)

1. 소월이 그러하듯, 황동규 시인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 것인가. 황동규는 1958년 미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시력 67년을 지나는 시인이다. 그는 첫 시집 『어떤 개인 날』(1961)을 발표한 후 『풍장』(1995)을 거쳐 지난번 『봄비를 맞다』(2024)에 이르기까지 도합 열여덟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1,000편에 거의 근접한 그의 시세계는 이번 근작 시편에도 등장하는 평론가 이숭원의 일전 언급대로,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춤”(『꽃의 고요』 해설)이라고 일단 상징적으로 명명할 법하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지난 세월동안 시인이 꿈꾸며 가꿔온 삶의 시간들이 때로는 황홀한 감각과 사유로, 또 서늘하면서도 생기 있는 언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몸짓을 극서정시가 견인하고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황동규 시의 독특한 구성 원리이자 시세계 전반을 추동하는 극서정시는 단적으로 말해 ‘극’을 내장한 서정시이다. 시에 극적 구조를 연출함으로써 반전이나 시적 자아의 깨달음과 거듭남 같은 내적 변화를 유도하는 시인 특유의 창작 방식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극서정시는 “극(劇)적 구조를 지니고 싶다”라는 시인의 선언적 문구가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표사에 실리면서 한국 시사에 본격적으로 등재된다. 이후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 『우연에 기댈 있었다』(2003), 『꽃의 고요』(2006)는 물론 최근의 시집에 이르기까지 황동규의 시편들은 극서정시의 계보를 독자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이전 그의 시가 ‘시 안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시’의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도 시인의 말마따나 “명칭은 나중에 붙였지만,” “극서정시는 초기부터 있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가령 황동규 시세계의 중심축을 떠받치던 일련의 사랑 시편은 기존의 전통 서정시와 달리 극적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들에서 ‘사랑(이야기)’는 극서정시 구조를 통해 새롭게 변주되고 그때그때마다의 정황적 의미를 획득한다. 데뷔작 「즐거운 편지」를 위시한 황동규의 사랑 노래는 재래의 수동적이고 추상화된 주제 영역을 벗어나 생활세계에서 ‘사소’하고 ‘조그만’하며 ‘비리고’ ‘쨍한’ 극적 사랑의 계기들을 만들어 온 것이다. ‘시간 속에 비치는 시간’의 감지와 ‘홀로움(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의 정서, 그리고 세계의 필연성과 필연적으로 동행하는 우연성의 수용은 사랑주의자 황동규가 자신의 사랑 시편들과 함께 극서정시를 가동해온 의식/무의식의 흔적들이다. 아울러 일상의 규범을 벗어나 지각의 갱신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선택한 여행(시)과 시인의 타고난 예술적 정열은 그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를 지속적으로 마련해왔다. 여기에 죽음에의 선주(先走)를 감행하여 확보한 삶과 죽음의 인식론적 전환 사유와 선(禪)에의 깊은 관심은 그의 시에 세계 인식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기 위한 시적 장치이자 방법론으로 주어져 있다. 이렇듯 황동규의 시는 일상과 탈일상의 세계를 분주하게 오가며 시와 삶이 하나 되는 극적인 순간의 풍경을 연출해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마치 ‘외계인’과도 같은 낯선 시선과 호기심으로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세계의 진면목을 환하게 그려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시는 알레고리와 상징의 밀회를 적극적으로 주선하며, 황홀하면서도 서늘한 삶의 풍경들을 노래하고 있다. 2. 황동규의 주요 시편들이 극적 구조를 거느린다고 했거니와, 이는 근작시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번 그의 「벽오동」은 작품의 말미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글귀를 위치시킴으로써 이즈음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밑그림”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 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 같이 물드는가 했더니 벽오동이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쁜데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다. 몸에 걸쳤던 것 낌새 못채게 털어버리고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서었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 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 아니겠나? 「벽오동」 전문 시 「벽오동」의 도입부에는 세 개의 나무가 등장한다. “은행, 벽오동, 벚” 나무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시의 제목이 ‘벽오동’으로 제시된 이유는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쁘”고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유독 ‘벽오동’만 “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기 때문이다. “벽오동”만이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를 내고 있는 형국이다. 「벽오동」의 시적 반전은 이 부근에서 준비된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와 같은 화자의 의도 섞인 물음은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의 상황 묘사로 일관했던 이 시를 급기야 세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과 자기 확인의 지대로 인도한다. 이때 10행의 접속 부사 “하지만”은 시적 자아가 겪는 거듭남의 여정을 노골적으로 주도하고 암시한다. 그 거듭남이란 “엇박자”와 정박자의 구분이 없는, 아니 구별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자세라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이 시는 평범한 생활세계의 한복판에서 “세상의 리듬”과 “같이” 하지 않은 자연생명을 통해 시적 화자의 변화된 생각을 명쾌하게 전달한다. 이를테면 우리 삶에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공존한다든가, 초월은 결국 초월하지 않는 곳에 있다든가, 더하여 죽음은 삶의 시간에서 분리된 이원화된 공간이 아니라든가 등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저 찬란하면서도 심오한 구문이 간직한 모든 가능태의 해석들로 말이다. 이 대목을 특히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색즉시공(色卽示空) 살기”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어지는 「시에 대한 단상들」에도 재차 변주되어 나타나는 까닭이다. 가령, 최근 시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렇다. “시 쓰는 일은” “우연 같은 우연, 우연 아니게 만나는” 길이고, “더 이상 다르게 말할 필요가 없을 때/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이 꿈틀”대는 순간이며, “명동 간다는 게 충무로역에 내렸”지만 가끔씩은 “그런 시가 생각보다 더 실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날것 보다는 제대로 익힌 시가 그래도” 좋겠으나 “익힌 날것도 있”다는 생각. “시인과 대상과의 관계는 늘 1:1”이지만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쉬고 있는 곤줄박이”를 “안 본다 안 본다 하면서 더 보고 싶은 사람”처럼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기우뚱한 균형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다는 생각 등등. 이렇듯 황동규에게 시는 고정불변의 규율과 법칙으로 규정되거나 강제되지 않는다. 인과론적 사유로만 구성되지도 않는다. 그에게 “시는 이 세상 모든 걸 다 맛보려”(「시가 사람을 홀리네」, 『오늘 하루만이라도』, 2020) 드는 생감각의 집결지이고, 변화무쌍한 색(色)이자 공(空)의 세계다. 삶의 실제가 그러하듯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이치가 투명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전이되어 황홀하게 펼쳐지는 구체적 장이다. 그리하여 다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앞문으로 들어가/뒷문을 찾지 못하는 시도 시다.” 그 시들 속에는 “무심히 돌다 뒤꼍에서 만나는/이끼, 환한 빛의 섬들”이 존재한다. “이크 밟을 뻔!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앉아 쉬고 있는 곤줄박이”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다. 3. 아무래도 황동규의 근작 시편을 읽다보면, 노년의 시인을 자주 만나게 된다. 노년은 많은 것들을 서서히 세상에 내려놓는 마음의 시간대다. 인간에게 죽음이 가장 확실한 미래의 사건으로 고지되듯이, 노년은 유한 존재가 어쩔 수 없이 겪는 예고된 시간의 절차이자 필연의 변화이다. 감각기관의 퇴화와 기억력의 감퇴는 필연적 변화의 대표적 항목이다. 거기에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이 필연적 변화의 끄트머리를 실시간으로 경험하게 한다. 지난밤 꿈에 너와 나 너무 많은 말을 주고받았어. 너 어제 세상 뜨고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 어제 저녁 네 빈소에 갈 때 현관서부터 가을비 추적추적 뿌렸지.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나란히 서 있던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 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말보다 더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 너무 많았다」 전문 「말이 너무 많았다」는 죽음을 경험한 시인의 차분한 언어들이 동원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어제 저녁” 가까웠던 이의 부음을 접하고 “빈소”에 다녀왔다. 안타까운 마음일 것이다.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일 게다. “이제”, “어제”의 “너와 나”는 꿈속에서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현관서부터” “추적추적 뿌렸”던 가을비는 이런 화자의 공허한 심리상태를 우회적으로 반영한다.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라는 화자의 읊조림에는 ‘너’를 향한 그리움과 아쉬움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너와 나”의 “어제”와 “이제” 사이에는 느닷없는 죽음이 가로 놓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는 ‘너’의 죽음을 처연한 슬픔의 분위기로 몰아가지 않는다. 애도의 마음을 부러 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시인은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을 모나지 않게 적재함으로써 “말보다 더한 말”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유도한다. 죽음을 계기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많았던 “어제”를 봉합하고 “이제”의 내 삶에서 ‘너’와의 진정한 관계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 기실 황동규에게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단절도, 우리의 현재와 무관한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본원적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절대적인 계기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 죽음은 “어제”의 일상적 시간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건으로 인식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마감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인간의 짧은 삶에 ‘그때그때마다’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시 「말이 너무 많았다」가 ‘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말보다 더한 말”의 진실을 “이제”의 삶에서 환기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입춘 가까워 추위 잠깐 풀린 어제 저녁 시의 혈관 건강 살피는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 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그만 내 뇌혈관 상태 들키고 말았다. 운 떼려다 멈칫하게 만든 낱말, 신문이나 휴대폰에서 매일 두세 번씩 만나고 언제부터인가 가족이 모일 때 내가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 즉시 요양원 보내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그 말,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 디멘셔(dementia) 하고 말았다. 이리저리 설명하니 이교수가 치맵니다, 했지.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셈이지만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별일은 참 별일이다.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 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쓰며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 센강에 몸 던진 시인 파울 첼란, 그가 독일어로 마신 ‘검은 우유’가 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다.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 전문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는 노년의 시인이 겪은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모처럼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노년의 불편함에 난감해 한다. “아무리 해도” “그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교수가 치맵니다,” 말하고 나서야 세월의 늙음이 “지워버린” “그 말”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시인이 경험하는 노년의 불편함이란 당연히 기억력의 감퇴이다. “뇌혈관”의 노화가 야기하는 이런 불편함은 사실 “참 별일이다”라며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정도에 따라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즉시 요양원 보내”야 할 만큼 걱정스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 낱말이 “신문이나 휴대폰에서/매일 두세 번씩 만나”는 흔한 모국어라면 사태는 보다 심각하다. 그렇기는 하나 시의 화자는 이 난감하고 걱정스러운 국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쾌하게 돌파하는 듯하다.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음에도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영단어 “dementia”가 아니라 “치매”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분히 혼란스럽기는 하되, 이마저도 삶의 “별일”로 인정하고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로써 “지워버린 말”의 사소함과 심각함 사이의 긴장감은 “별일은 참 별일이다”라는 시인의 무심한 독백으로 무리 없이 해소된다. 이 시가 노년의 불편함과 난처함을 호소하는 차원에서 단순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소환하는 극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어제 저녁”부터 “아침”까지 시인에게 발생한 일종의 이중 언어(정체성) 문제는 곧바로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쓴 시인 파울 첼란의 삶으로 이월되는 것이다. 특히 파울 첼란의 「죽음의 둔주곡」(Todesfuge)이 음악적 형식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적 모티프의 반복·변형 구조를 취한 작품임을 염두에 두면, ‘과거’ 시적 화자와의 친연성마저도 확보된다. “검은 우유가/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라는 시구가 전혀 어색하거나 새삼스럽지 않다. 이렇듯 황동규의 근작 시편들은 여전하다. 여전히 그의 시는 “밝고 생생한”(「프리지아」) 생명과 마주하고 실존의 삶을 향유하며 환한 생의 감각으로 세계를 노래한다. 만년에 들어서도 시인은 “어제”를 봉합하며 거듭나기를 꿈꾼다. 어쩌면 저 근작 시편들 뒤에서 시인은 속엣 말로 이렇게 되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년의 필연적 변화, 하지만 그 불편함과 난처함마저도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맛’이고 ‘사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라고.

계간 청색종이 이성천 황동규죽음에의 선주극서정거듭남노년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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