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동문학평론 2024년 여름호(제191호)
불화하는 동심에 대하여
박용숙 「까마귀 아주머니」, 윤슬빛 「다음 공을 던질 차례, 최수주 「동갑내기」
1. 들어가며
동화가 소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잊을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이 질문에 물론 정답은 없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동화를 읽고 쓰는 이에게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하다. 개인의 주관에 따라 각기 다른 대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 대답 안에 그의 동화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녹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선 질문은 때때로 다음과 같이 들리기도 한다. ‘당신은 동화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알기로 이에 대해 가장 흔한 대답은 ‘동심’이다. 동화는 어떤 형태로든 어린이의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 품이 넓은 대답이라 틀린 말이 될 소지가 적다. 이 대답은 한동안 동화의 본질을 묻는 물음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답이 되어 주었다.
문제는 하나의 언어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동안 정작 그 언어가 지칭하는 현상이 흐릿해졌다는 사실에 있다. 동심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간 수많은 이들이 동화와 동심을 한데 엮어 말해 왔지만 해부의 대상은 언제나 동화라는 텍스트와 그 주변의 맥락이었을 뿐이다. 동심은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이므로 별도의 인문학적 분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결국 누구나 동심을 말하지만 감히 아무도 동심을 정의하지 않는 지점에서 기우뚱한 균형이 성립한다. 이는 동화라는 장에서 가장 강력한 불문율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질문이 꽤 괜찮은 대답으로 매끄럽게 대체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진부함이라는 부작용이 따라붙는다. 동화가 동심을 반영해야 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렇게 모호한 대답으로 만만하게 건져 올릴 수 있는 의미란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가. 당신은 그 대답을 정말로 신뢰하는가.
오해가 없도록 이쯤에서 미리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나는 동심에 관한 모든 논의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동화가 동심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작가가 글을 쓰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것은 동화의 본질이라기보다 전제에 해당하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동화란, 어린이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증과 호기심을 갖는 매체다. 동심을 궁금해 하지 않는 이야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일단 동화가 아니다. 하지만 동심을 궁금해 하는 모든 이야기가 동화의 본질을 관통하던가. 그렇지는 않다. 동화의 본질이 무엇이든, 그것이 동심이란 한 단어로 간단히 압축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 글에서 다루는 핵심도 이와 맞닿아 있다. 요컨대 동화의 본질은 단 하나의 낱말이나 개념으로 압축,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동화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본질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본질을 탐색하기 위해 우리는 각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양한 동화를 읽고, 좋거나 아쉽다는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의 준거를 언어적으로 정밀하게 드러내야 한다. 동화를 읽고 쓰는 이들에 의해 생산된 1, 2차 텍스트를 끊임없이 접하고 각자의 프레임을 다듬어야 한다. 동화의 본질은 바로 그 과정에서 상호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감각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즉, 동화의 본질은 동화를 읽고 쓰는 순간순간의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본질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나는 그간 동화계에서 누적된 몇 가지 아이러니와 그것들로 빚어 낸 암묵적인 규칙들을 적극적으로 재활용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동심에 관한 불문율도 그 중 하나다. 이를 바탕으로 한 논의는 어쩔 수 없이 자주 모호해지겠지만 나는 그 모든 알쏭달쏭한 과정 안에 정말로 쓸만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2. 동화가 현실에 맞서는 방식
동화 속 주인공은 종종 제 물리적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사회적 문제들에 직면하곤 한다. 도대체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상황을 설정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그럴 때 ‘현실은 더 심하다’라는 식의 냉소와 푸념은 그다지 쓸모 있는 답변이 되어 주지 못한다. 대부분의 독자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맥락에서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불행한 삶의 단면이 동화라는 무대 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일 것이고, 여기엔 어느 정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누구도 그 과정을 직접 목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어쩌다 이토록 차가운 현실 앞에 놓이게 되었을까.
박용숙의 「까마귀 아주머니」(《창비어린이》 2024년 봄호)에는 한여름에도 검은 롱패딩을 입고 돌아다니는 노숙자 아주머니가 등장한다. ‘까마귀’는 이 아주머니의 별명이다. 주인공 ‘주안이’와 까마귀 아주머니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바, 이 작품이 지닌 문제의식에는 현대의 주거권 개념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 주안이네 동네에 재개발 바람이 불더니 일 년 사이에 회오리바람이 되어 몰아쳤다. 친구들은 모두 이사 가고 철진이와 민호만 남았다. 말이 이사지 쫓겨난 거나 다름없다고 했다. 새로 지어질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상가와 아파트가 들어선다는데, 주안이네 동네에는 빨간 스프레이로 쓴 ‘철거’라는 글자만 늘어 갔다.
지금 사는 연립 주택도 언제 철거될 지 모른다고 했다. 그때까지 한 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아빠는 회사 마치면 대리운전을 하고, 엄마는 빵집 아르바이트도 모자라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한다.
(……)
- 박용숙, 「까마귀 아주머니」, 《창비어린이》 2024년 봄호, 66쪽.
주안이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에서 까마귀 아주머니는 집이 없는 사람이고, 자신은 집에서 곧 쫓겨날 사람이다. 이것은 어린이가 넉넉히 감당할 만한 현실일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재개발, 철거, 빨간 스프레이, 노숙자와 같은 말들은 단편동화 속 어린 인물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겁게 들린다.
문제는 이것이 성인에게조차 무난한 정도의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거 불안정이라는 것이 성인이 겪는다고 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해지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 삶의 터전을 잃는 일은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위협이다. 그러니 상황을 주거 불안정으로만 한정하여 본다면 어른과 어린이가 겪는 어려움은 질적으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까마귀 아주머니」는 어린이가 겪는 문제 상황을 성인의 그것과 유사하게 설정한 뒤, 어린 인물이 독자적으로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방식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동화에서 이러한 서사가 특히 의미 있어 보이는 까닭은, 어른과 유사한 문제를 겪는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까마귀 아주머니」의 전개가 조금은 낯설고 엉뚱하게까지 보이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처음에 주안이는 철진이, 민호와 함께 놀이터 정글짐에다 종이 상자로 비밀 기지를 만든다. 사는 집에서 곧 쫓겨나게 생긴 마당에 웬 놀이터 비밀 기지인가 싶지만, 어린이의 투쟁은 어른의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주안이에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내 친구들만의 전용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일이고, 그럼으로써 정당하게 주거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비록 어른들이 만든 법과 제도의 승인을 받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주안이의 비밀 기지가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가장 온전하고 합리적인 투쟁의 상징물임을 간파하게 된다.
이처럼 현상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어린이의 방식을 그가 속한 세계 안에서 유의미하게 펼쳐 보일 때, 독자는 비로소 동화 속 주인공이 처한 차가운 현실의 모순을 편견 없이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동화가 어린 인물들을 현실의 거대한 문제 앞으로 불러들이는 일의 당위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다만 그럴 때에도 여전히 정도의 문제는 남는다.
3. 불행의 정도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을 떠올려 보자.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2009)
이것은 한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야기와 캐릭터의 전제에 대해서도 훌륭한 지침을 제공한다. 예컨대 이 문장을 -극히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 이렇게 바꾸어 이해해도 뜻은 통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하기만 한 주인공은 매력이 없다.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하려면, 주인공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불행해져야만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동화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문제가 파생한다. 동화의 주인공은 대체로 어린이, 또는 어린이와 유사한 속성을 갖는 어떤 존재이다. 그런 존재에게 무지막지한 고통과 난관과 불행을 안겨 주어도 되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어느 선에서 타협을 이루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전형적인 답변이 하나 있다. 극적 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어린 주인공에게 ‘지나친 불행’을 안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화의 재미를 위해 현실의 불행을 지나치게 전시해서도 안 된다. 그럼 지나친 불행이란 무엇일까. 어느 정도로 불행해야 동화의 주인공에게 지나친 정도로 인식될까. 이에 대해서도 다분히 정형화된, 암묵적인 기준이 존재한다. 첫째는 주인공의 행동이나 책임과 무관한 방식으로 찾아오는 불행이고, 둘째는 어린 몸과 마음으로 감당해 낼 도리가 없는 종류의 불행이다. 현실에 그런 불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동화 속 인물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런 기준은 지금까지도 일정 부분 유효하게 작동해 왔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윤슬빛의 「다음 공을 던질 차례」(《창비어린이》 2024년 봄호)의 도입부다.
아빠가 감옥에 갔다. 경찰들이 집까지 들이닥쳤다. 내가 보는 앞에서, 아빠를 데려갔다. 그 뒤로 고모는 변호사를 구해 보겠다며 종종거리고 다녔다.
‘어차피 나와 봤자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모에겐 말하지 않았다. 동생이 아니라 원수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아빠 흉을 보면 고모는 속상해했다. 아빠가 잡혀간 뒤로 나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밥을 먹다가도, 이를 닦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불쑥 아빠 생각이 났다. 딱히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냥, 이게 다 뭔가 싶었다.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 나까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 윤슬빛, 「다음 공을 던질 차례」, 《창비어린이》 2024년 봄호, 87쪽.
이 단편 동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겪는 어려움은 모두 ‘아빠가 감옥에 갔다.’라는 첫 문장으로 환원된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나’의 행동이나 책임과 무관하다. 하루아침에 범법자의 딸이 되어 아버지의 누나와 살게 된 상황 역시 당사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깊은 상흔을 남길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두 가지 기준에 따라, 이 작품을 주인공에게 지나친 불행을 안긴 사례로 보아야 할까.
글쎄, 이 이야기를 읽기 전이라면 몰라도 읽고 난 지금은 좀처럼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 읽고 나니 주인공이 겪는 불행이 가볍게 느껴졌다거나, 갑자기 기준에 동의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두 기준 모두에 큰 틀에서 동의한다. 다만 때때로 일반론적 기준과 규칙이 거의 무용하다고 느껴질 만큼 강한 설득력을 갖춘 작품이 있고, 「다음 공을 던질 차례」도 그런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이것은 사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간혹 동화에 관한 학술적 견해를 접할 때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반례로 쓸만한 작품 한두 개를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흔한 일이다. 문학은 과학이 아니어서 모든 문학 텍스트에 빠짐없이 들어맞는 법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동화를 읽고 쓰는 사람들에게 꽤나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법칙에도 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본질을 탐색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동화의 본질이 특정 단어와 개념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동화를 읽고 쓰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으로 형성된다고 했던 말과도 닿아 있다.
「다음 공을 던질 차례」의 주인공 ‘나’는 친구들과 함께 새를 보러 갔다가 그곳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땅에는 새끼 새 한 마리가 떨어져 울고 있고, 어미 새는 새끼를 지키기 위해 ‘나’와 친구들을 맹렬히 공격한다. 일행이 어미 새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며 새끼 새를 높은 나뭇가지 위에 무사히 올려놓으려는 순간, 허무하게도 새끼 새는 제힘으로 훌쩍 날아오른다. 그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듯.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나’는 고모에게 묻는다. “좋아하는 걸 해도 돼요? 아빠는 벌 받고 있는데, 내가, 나만.” 고모는 단호하게 말한다. “당연하지! 아빠는 아빠고 너는 너야.”
아빠가 감옥에 간 이후 불행해진 ‘나’에게 동화는 ‘아빠는 아빠고 너는 너’라고 말하며 앞으론 죄책감 없이 행복해져도 된다고 위로한다. 일면 당연하고 단순한 결론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동화 속 불행의 크기와 깊이와 강도가 주인공이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으로서 알맞게 기능했다는 지표로 해석된다. 이렇듯 제 책임과 무관한 불행으로 고통받는 모든 어린이의 마음에 깊이 남을 한 마디를 건네는 것으로, 나는 이 동화가 불행의 정도(正道)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4. 불화하는 동심
불행을 겪는 주인공이 언제나 절대적인 지지와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 상처받은 동심은 외부 세계를 향한 공격적인 반응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동심이란 것이 언제나 선하고 순한 상태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므로, 다양한 결의 동심을 묘사하고 탐구하는 것은 동화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최수주의 「동갑내기」(《아동문학평론》 2024년 봄호)는 어느 재혼 가정의 일상 속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우야-.”
교문 앞에서 엄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셨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엄마는 입학할 때 며칠만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학교가 끝나면 교문 앞에 엄마들이 많이 서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고 우리 엄마를 찾으면서 자기 엄마의 손을 잡고 집에 가는 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봤다. 그런데 이 학교로 전학 온 첫날,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기분이 좋은 나는 엄마 손을 잡고 겅중겅중 뛰면서 갔다. 아이들이 나를 부러워할 것 같았다.
교문 앞에 엄마 차가 세워져 있었다. 엄마가 차에 타라고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엇!”
어느새 왔는지 김형진이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운전석에는 새아빠가 있었다.
- 최수주, 「동갑내기」, 《아동문학평론》 2024년 봄호, 105~106쪽.
알다시피 동화가 동심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결론이 나지 않는 비판과 반성은 종종 공론장을 넘어 동화를 읽고 쓰는 이들에게 직접 유용하고 생산적인 사유의 도구를 제공해 왔다. 동심을 표현하거나 이해함에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한번 더 생각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담론은 그것이 명시적으로 다루는 경계를 뛰어넘어 다분히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나는 이것이 담론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품과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쟁점은 때때로 거칠게 표출되는 동심을 다루는 태도(Attitude)에 있다. 옳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나는 동심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동갑내기」의 1인칭 주인공 ‘현우’는 엄마의 재혼으로 ‘새아빠’와 그의 아들 ‘김형진’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의형제 사이가 된 현우와 형진은 공교롭게도 동갑내기인데, 학년은 형진이 현우보다 하나 위다. 현우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현우는 형진을 끝까지 ‘김형진’이라 서술한다. ‘형진이’라 부르기엔 학년이 다르고, 동갑내기를 ‘형’이라 부르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뚜름한 불만은 이내 기싸움으로 번지다 급기야 주먹다짐이 된다.
나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김형진을 한 대 쳤다.
번쩍! 순간, 내 눈 앞에 별이 보였다. 김형진도 나를 친 거다.
“이 자식이.”
내가 김형진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김형진도 지지 않고 덤벼들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뒤엉켜서 치고받았다. 그렇잖아도 속이 뒤틀렸었다.
속에 맺힌 대로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 최수주, 「동갑내기」, 《아동문학평론》 2024년 봄호, 109~110쪽.
이 작품에서 현우에게 불만을 안기는 가정환경은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표출되는 다른 많은 동심들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 일차적 의미를 갖는다. 비슷한 여건에 놓인 모든 어린이가 현우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럼에도 겉으로 드러난 행동 이면의 동기를 살펴봄으로써 한 어린이를 전인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는 동화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현실에서 폭력을 저지른 어린이는 좀처럼 깊이 이해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동화 속 현우의 모습은 우리가 동심에 대해 무심코 갖는 갖가지 환상들을 수정할 계기를 제공한다. 동심을 마냥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평소 어린이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신경했던 태도가 누적된 결과일 것이므로, 우리는 동화 속에 구체적으로 묘사된 어린이 한 명 한 명의 감각을 통해 동심의 실체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동심은 선한 것’이라는 환상은 아직도 강력해서, 악한 마음을 들킨 어린이는 그 가상의 동심 이미지 바깥으로 손쉽게 밀려나고 만다. 그럴수록 세상과 불화하는 동심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애쓰는 동화가 더욱 필요하다. 천사가 아닌 아이들, 교활하고 영악하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받은 동심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는 것이야말로 동화가 가장 앞장서서 추구해야 할 본질이 아닐까. 적어도 오늘 나는, 동화의 본질이 불화하는 동심에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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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집은 언제나 무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벽지와 바닥재의 색깔부터 배치된 가구의 종류와 재질, 그 위에 놓인 소품과 집기의 모양새들은 공간을 채우고 집의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집안에 존재하는 아주 큰 것부터 무척이나 작은 것까지, 무엇 하나 집주인의 취향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 없기에 누군가의 집에 발을 들이는 일은 그가 정성스레 가꿔 온 자의식으로 진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교하게 구축된 그 공간으로부터 한 자리를 내어 받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때, 어쩐지 스스로의 음습한 욕망을 마주하게 되는 이가 비단 나뿐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여기저기를 파헤치며 책장에 꽂힌 책과 서랍을 채운 잡동사니들을 실컷 구경해버리고 싶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눈알만 도로록 굴리면서 집안의 곳곳을 탐색하고 또 가늠해보는 소심한 악취미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제발 다들 끄덕여주었으면. 이런 보편적(이기를 바라는) 관음증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차현준과 박술의 첫 시집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집들이를 예고한다. 한 권의 책이 담지하고 있는 사적인 세계를 비유하기 위해 가상의 집 한 채를 세우는 일은 전혀 새롭지 않으며 오히려 기계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두 권의 시집으로부터 감지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감이나 그 안에 조밀하게 들어차있는 생활의 흔적은 못 이기는 척 닳고 닳은 메타포를 꺼내들도록 한다. 마침 두 시인이 개방한 아공간은 방문객들에게 무척이나 관대하고, 우리는 들뜨는 마음으로 그곳을 발발거린다. 집주인의 눈치를 보느라 은근슬쩍 두리번대던 날들이여, 안녕. 너희들에게 보이어리즘의 자유를 허하노라. 그러나, 가만한 감시와 암묵적 규칙으로부터 해방된 채 시의 행간과 시어를 넘나들며 잔뜩 들쑤신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마 묘한 패배감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보고도 아주 적은 것만을 간신히 짐작할 뿐인 불가해의 심정과 아무튼 실패한 것만 같다는 예감. 왠지 모를 기대에 찬 눈으로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을 집주인에게 뭐라고 선뜻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다. 이 서글프고도 기이한 감각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 차현준의 시집 『온몸일으키기』는 아주 촘촘하게 구상된 설계도에 기반해 지면을 구획하고 공간을 채운다. 시인에게 이끌려 당도한 낯선 곳에는 수평선처럼 이어지는 복도와 그 옆으로 딸린 무수한 방들이 있으며, 각각의 방에서는 농작물들이 무럭무럭 자란다(「구조조정」). 어림잡아도 꽤 큰 규모와 텃밭이 아닌 방 안에서 경작되는 각종 작물들의 모습은 기상천외하다고 일컬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난생 처음 맞닥뜨린 광경이다. 그러나 우리를 이 집으로 데려온, 무척이나 계획적인 듯 보이는 이는 놀란 기색을 보이는 손님들을 내버려둔 채 방과 방을 옮겨다니며 밭일에 열심이다. 손바닥에는 방이 있다 둘렀던 벽 하나를 열면 다음과 같은 광경이 있을 것이다 바닥에는 밭이 있을 것이다. 흙을 촉촉하게 고른다. 이랑과 고랑을 가른다. 손바닥에서 흙내가 난다 흙내와 잘 어울리는 작물들이 차례대로 오고 있다 손바닥과 방 곁에는 먼저 만든 방들이 널려 있다 밭에서 무언가 기르기 전에 방부터 충분히 길러낸다 - 「키트」 부분 예상치 못한 홀대에도 꿋꿋하게 복도를 거닐던 방문객은 복도 어딘가에 떨어져있던 키트 하나를 무심코 줍게 된다. “바닥”과 “네 벽”, “천장”과 “설명서”로 구성된 키트는 방 한 칸을 조립하기 위한 것인데, 설명서를 읽어내려가며 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해보다가 우리는 문득 이 아리송한 공간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얻는다. “밭에서 무언가 기르기 전에 방부터 충분히 길러”내야 한다고 말하는 화자는 분명 “방”과 “밭”을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는 듯 보인다. 확실히 방과 밭은 ‘안’과 ‘밖’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작물들이 자라는 곳이 밭이라면 이 시집에 줄지어 등장하는 여러 방들은 밭과 다름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시인이 창조해낸 기묘한 공간을 헤집어 “집에 도착해 / 이제 밭에 가는 길”(「도움밭」)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밭 이전에 잘 가꾸어진 방이 있어야 한다는 「키트」의 진술을 이제 차현준이 시를 쓰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 읽어본다면 어떨까. 손바닥 위에 조심조심 방 하나를 세운다. “니트릴 장갑을 갈아 끼고 셔츠 단추들 사이를 지나 단숨에”(「당귀 방」) 손을 뻗어 고립되어 있던 하나의 생각을 끄집어낸다. 실체 없는 발상에 물성을 부여한다. 어느새 생명력을 지니게 된 심상에 기뻐하며 그것을 살금살금 방에 옮겨심을 때, 한 편의 시가 움을 튼다. 차현준에게 시 쓰는 일은 무언가 촉발된 순간이 한 칸의 방을 꽉 채울 만큼 무성해질 때까지 정성으로 보살피며 길러내는 작업인 것이다. “돌연 / 설명할 수 없”(「아이솔레이션」)이 조우한 감각을 잘 다듬고 벼려낸 끝에 언어의 옷을 입혀 바깥으로 내놓는 일. 부지런한 집주인이 방과 방, 마음의 안과 밖을 오가며 “그간 안팎으로 운반한 것들”(「셀프 캠코더」)이 쑥쑥 자라 온 집에 그득해지고 “1층과 6층에서도 16단지와 16동에서도”(「쑥대밭」)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싱그러워질 때 방은 밭이 된다. 이 집에서는 안도 밖이 된다. 이제야 이 이상한 집에 대해 조금 알 것만 같다고 자만하는 순간, 집주인은 우리를 놀리듯 “여기서부터 당신이 살던 행정구역이 낯설어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얼마간 흘려보내보기」) 말하고는 손을 끌어 밖으로 향한다. 총 5부로 구성된 『온몸일으키기』는 3부의 마지막 시인 「얼마간 흘려보내보기」를 기점으로 하여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당귀와 깻잎, 루콜라 등을 키우느라 집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차현준이 4부에서 “쿠바 여정 소속 현준”(「나의 나의 라임 라임」)이 되어 쿠바의 비냘레스와 잉헤니오스, 아바나를 거쳐 “아르헨티나”(「남쪽물결」)로 이어지는 여행길에 오르기 때문이다. 우수아이아 택시에 타고 Corea만 말해도 Vivero los coreanos? (중략) 아주 질긴 아킬레스건은 여전한 한국에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이곳까지 늘어난 발목이 이어진 동안 망친 기분은 너무 많이 겹쳐서 나는 결국 망망해졌다 드디어 이제껏 한국에 있었던 발바닥 떼자 첫발을 내딛는다 남극 - 「도착하기」 부분 그로 하여금 살던 곳을 훌쩍 떠날 마음을 먹게 한 것이 무엇인지,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한국행 항공권을 취소”(「남쪽 물결」)하며 그가 느꼈을 감정이 후련함일지 서러움일지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한국이 / 좀 빨라”서 “거기에 가면 / 제가 저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아바나 일화」) 말하는 차현준의 모습으로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며 운반하느라 어느새 “오래된 건초”(「잉헤니오스」)처럼 메말라버렸을 시인의 마음 한 자락을 짐작만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아주 멀리로 떠나왔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에 딱 붙어 있는, “아주 질긴 아킬레스건”처럼 운명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얄궂어서 차현준은 그 먼 아르헨티나에서도 기어이 드넓은 농장을 마주한다. 비베로 로스 꼬레아노(Vivero los Coreanos). ‘한국인의 농장’이라는 뜻으로, 아르헨티나의 가장 남쪽 도시인 우수아이아에 실제 위치하고 있는 농장이다. 이 농장을 처음 세운 이민 1세대 한국인은 비닐하우스 농법으로 채소들을 무럭무럭 길러내다가, 더 이상 채소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오자 “망했던 자리를 꾹꾹 밟”고 일어선 끝에 농장을 꽃천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망망한 마음으로 세상의 끝자락에서 피워냈을 꽃들과 마주한 차현준은 “드디어 이제껏 한국에 있었던 발바닥”을 떼어 자신만의 “남극”으로 향할 결심을 한다. “여길 돌아다녔던 발바닥”을 데려가 “오래 써먹”어(「아바나 일화」) 보겠다는 다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분주하게 “다대포”(「DDP」)와 “우이동 계곡”(「채소 콜키지」)을 걷는 집주인의 발걸음으로부터 왠지 모를 홀가분함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안도 밖이 되는 이상한 집에서는 바깥의 것들을 안으로 들여와 울창해질 때까지 가꿔내는 일도 물론 가능함을 우리의 집주인은 비로소 알았으므로, 홀가분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방에서 시작해 쿠바, 아르헨티나, 다시 한국을 경유하며 완성된 『온몸일으키기』의 지형도는 「아이솔레이션」이 「다-체-rium」으로 향하는 여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고립되었던 마음과 다종한 바깥의 언어를 얽어내어 한 접시의 “다중생활체”로 만들어내는 조리법은 사실 정해진 것이 없다. 다만 손이 기억하는 “떠드는 감각”을 믿으며 계속해서 부지런히 떠들다보면 이 생활체는 끈끈하고도 근근하게 자라 “점점 확장된다. 사방팔방으로”(「다중생활체」). 초록의 빛깔로 무성한 집을 뒤로 하고 집들이를 끝내려는 손님에게 집주인은 슬쩍 “어느 모종” 하나를 건넨다. 이곳저곳을 오가느라 소홀했던 것에 대한 사과의 표시인가 생각하며 우리는 그 모종을 받아들기로 한다. 그 모종에서 무엇이 자라날지를 기대하며, 또한 자신이 부여받을 방을 기다리면서 숨죽이고 있을 “반백여 모종 샘플러”를 끝내주게 성실한 우리의 집주인이 “끝내주게 잘 길러내”(「다-체-rium」)어 언젠가 또 우리에게 선보여주기를 바라며. * 이상하고도 싱싱했던 초록의 집을 나와 우리는 또 다른 집의 문지방을 밟는다. 이 집은, ‘진공 같은 곳’. 시인이 살아온 날들로부터 그의 시를 가늠해보는 일은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20여 년 전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해 독일어로 말을 하고 사유해왔다는 박술의 내력은 『오토파일럿』을 잘 읽어내기 위한 단초가 된다. 시와 번역과 철학, 그리고 한국어와 독일어, 가끔은 영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를 재료로 축조된 시인의 집은 굉장한 밀도를 자랑하지만 왠지 선뜻 다가서기에는 어렵다. “푄 Föhn 바람”과 “뵈엔 Böen 바람”(「란스 Lans」)으로부터 불어오는 풋내와 짠내의 차이를 사전에 의존해서만 더듬더듬 감각할 뿐인 이 방문객은 잘 읽어내고 싶은 마음과 근사하게 읽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을 오가며 찬찬히 집의 곳곳을 살핀다. 혼자서 집을 짓고 방울뱀처럼 네 가슴을 두드려보니 한국말로 울기에 좋았다 사랑이란 나라말을 몸에서 벗겨내는 일 삭발을 앞둔 메두사의 심정으로 거울 앞에서 발화를 연습한다 안녕, 내 이름은, 안녕. 이것은 우리말이 아니야 우리는 모두 쟤네나라사람이야 네 마음도 둘이니 - 「쟤네말」 부분 방울뱀은 허물을 벗을 때마다 더 크게 울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의 언어도 저곳의 언어도, 그렇다고 “우리말”도 아닌 시어가 부유하는 벽간에서 어쩐지 슬픈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까닭은 이 집이 진공 상태가 되기 전 고여있었던 “한국말”이 도처에 스몄기 때문일까. 박술은 시집의 끝에 실린 산문에서 「쟤네말」이 “우리말이 낯설어지고 외국어가 모국어를 밀어내던 시절, 그러나 자리를 빼앗긴 말들이 아직 경련하던 시절”에 쓰인 시라고 고백한다. 이 말로부터 거울 앞에 선, “삭발을 앞둔 메두사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지를 감히 짐작해본다. 자신을 지키던 가장 큰 무기를 제 손으로 버리기 위해 돌처럼 굳어가는 마음. 방울뱀처럼 울고 싶지만 울어버릴 언어조차 굳어 그저 황망하기만 했던 기억이 박술의 시를 지탱한다. 중력이 없는 이 집에서 사물의 제자리를 찾아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집주인이 어딘가에 내려놓은 시어들은 그 자리에 가만 있지 못하고 공중을 둥둥 부유하다가 우연히 우리의 손 끝에 걸리게 된다. “향수를 뿌려서 집을 지”은 것마냥(「Åhus」) 쉬이 부서지려는 말들은 아마 “나라는 나라”(「밤」)에서 온, 오직 한 사람만이 능통한 모국어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쟤네나라사람”이다. 스스로만 알고 있는,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역사 위에 재건된 각자의 모국어를 발화하는 한, 우리 모두는 서로의 “쟤네나라사람”이 될 운명이다. 그러니, “사랑이란 / 나라말을 몸에서 벗겨내는 일”이라면, 생경한 언어를 입고 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읽기는 무엇이라 칭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가 말했듯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면, 타인의 언어를 더듬거리며 나의 한계를 감각하고 그의 가장 내밀한 공간으로 들어가려는 몸부림에는 어떠한 이름을 붙여야 마땅한 것일까. 그 집의 구조는 미궁과 같아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이지만 그 안은 짐승의 내장처럼 복잡했다. (중략) 집의 크기는 무한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의 수는 무한하다. 어린 우리는 집 안에서 길을 잃으면서 마음에서 피를 흘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요하고 따뜻한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걸으면서 그것을 되찾으려고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중심에서 멀어졌다. 멈추어 있으면 집 그 자체가 움직이면서 우리 주위를 맴돌았고,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 「망치의 방」 부분 박술의 『오토파일럿』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일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 사유한다. 모든 이들은 이방인의 신분으로 산다. 고국을 떠나 독일 땅을 밟았을 어느 날의 박술만이 이방인이 아니며,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으로 남은 채 서로의 집을 헤매는 이방인의 처지를 우리 모두가 타고났다. 이런 우리가 “길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의 수”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집을 거닐 때, 사람들 사이로 어떠한 원심력이 작용하게 된다. 세계의 중력과 구심력을 무화시키고 “누군가에게 절을 올리고 싶”(「윤회」)게끔 하는 이상하고도 숭고한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눈먼 언어의 집”(「바실리카타 여행기」)을 배회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누가 집주인이고 방문객이랄 것도 없이 집안을 마냥 감돌던 우리는 어느 방 앞에 멈춰 선다. 「망치의 방」은 “미궁”과도 같게 느껴지는 이 집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 뜻모를 곳이다. 이 방의 막대한 부피는 마치 소설 같기도 하고, 오래된 괴담 같기도 하다. “기억이 다가오면 기억을 쓰고 생각이 다가오면 생각에게 지면을 내어주고자”(「산문」) 했다는 글. 혼란한 공간에 놓인 언어들은 시집의 제목인 “오토파일럿”에 의해 기술되기라도 한 것처럼 산만하며 방대하지만, 그곳에서 박술이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얻어볼 수도 있다. “네 이름을 안다는 것은 너만을 위한 망치를 만들어 가지는 일이라는 것”. “망치”가 은유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내기란 어렵겠으나, 분명한 것은 망치의 본질은 부수는 일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방인을 나의 안으로 초대할 때, 우리는 그만을 위한 망치를 만들게 된다. 그 망치로 내려치게 될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즐거운 나의 집 한 귀퉁이를 허물고 그가 들어올 구석을 마련하는 일은 더욱 즐겁다. 한계의 지평선을 넓히며 “백만 개의 어둠”(「휘어진 빛」), 그 미지의 가능성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로부터 존재와 불가해와 사랑이 태어난다.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두워질수록 너에게 가까워진다는 감각”(「횔덜린 변주곡 6」)에 몸을 맡긴 채 이 희미하고 까다로운 무중력에서 기꺼이 휘청거리는, 우리. “은어로 지은 집”(「페를라흐 Perlach」)을 누빌 때의 우리는 이제 절대적인 이방인에서 벗어나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방황하는, 오토파일럿 모드의 비행사가 된다. 결코 도달하지 못할 건너편의 세계에서, 진공 상태를 뚫고 반가운 소리가 전해진다. “있지, 잠결에 한국말이 들려왔다. 언제 거기에 한번 데려다줘”(「망치의 방」). * 초록이 무성해지는 집과, 뜻모를 언어가 부유하는 집. 차현준과 박술이 내보인 첫 시집으로부터 우리는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세계의 안과 밖을 허무는 작업임을 다시금 감각한다. 바깥에 서 있는 당신을 나의 안으로 초대하고 당신을 위해 나의 안을 바깥으로 꺼내어놓을 때, 경계는 희미해진다. 흐려질지언정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대신 우리의 사이에 탄생한 새로운 만유인력을 나와 당신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 “한 번도 안 적도 온 적도 없었던 곳”(차현준, 「대저택」)을 궁금해하며 자꾸만 그 이상한 집으로 향하게 되는 발걸음은 기이하다. 그러니, “지금, 여기말에, 자기말을, 내어주기”(박술, 「도움닫기 없이 날기」).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은 고립되어 꽉 닫혀있던 나를 조금 허물어 나와 당신이 먹고, 자고, 사랑하며 무성해질 곳을 마련하고 싶다는 뜻에 다름 없을 것이다. 안과 밖, 나와 당신의 가운데에 놓인 ‘우리’의 집은 침범과 침입을 반복하며 기이하게도, 무한해진다.
황성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아침달, 2024)를 열면, 일상과 환상이 정밀하게 직조된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쉽게 의미화되지 않는 문장들, 때로는 잔혹동화처럼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들이 마치 타인의 꿈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생경함을 불러일으킨다. “의미를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의미를 만드는 방식”(「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이라는 표제작의 한 구절을 통해 유추해본다면, 시인이 그려내는 세계란 소거된 의미의 빈자리에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이 들어선 비정형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꿈의 주인공은 아이(소녀)이거나 혹은 아이의 상태에 머무르는 어른으로 추측된다. 가령 이 시집에 첫 번째로 실린 작품 「쓰레기 소녀」에는 현재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장난감인 ‘나’가 등장한다. “처음 밀봉에서 나를 꺼내던 기대에 찬 손들”은 ‘나’가 한때 근사한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암시하지만, “누군가의 파티에서/달콤한 케이크와 함께 그이의 집까지 들려갈 줄 알았”던 화자의 기대는 폐기되는 고통과 함께 좌절되고 만다. 낡고 버려졌지만 여전히 ‘소녀’의 상태를 유지하는 장난감. 시간의 흐름을 기묘하게 빗겨난 ‘쓰레기 소녀’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과거에 조난된 채 “꿈속과 꿈 밖 사이를 미끄러지”(「소라게 시계」)듯이 걷는다. ‘소녀’의 의식을 장악한 과거는 시집에 빈번하게 출몰하는 ‘어머니’와 연관이 깊다. “어머니는 간간이 나타나서/늘 그랬던 것처럼 다가오지 않았다”(「철부지 토네이도」)와 같은 고백적 언술로 전달되듯이 어머니는 ‘나’에게 한없이 냉담할 뿐만 아니라 온몸을 동반해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다. 어머니는 “내가 제대로 묻혔는지 봉분을 발로 밟아 다지고 또 다”지며 ‘나’를 더욱 견고하게 매장시키고(「이토록 아름다운 소녀 대잔치」), 그의 손목은 “내 목을 조르던 마지막 모양 그대로 굳어” 있다(「언니, 엄마는 아직도 사과를 싫어해?」). 목을 조른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의 모습은 목줄에 묶인 ‘개’의 몸부림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가끔 목줄을 찬 채로 높이 뛰어오르면/허공의 목을 캑캑 조르는 재미가 있었다”(「개자식 여러분」), “개는 허공 속으로 혀를 내밀어/양쪽 입가를 천천히 핥아 내린다”(「개 한 마리의 지구력」)와 같은 대목에서, 허공을 향해 뛰어오르고 혀를 밀어 넣는 ‘개’의 유희는 목줄의 반경과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물론 황성희의 화자가 어머니의 폭력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시 「손목 걱정」에 이르면 애정을 향한 딸의 갈망은 증오로 돌변해 어머니의 손목을 자르는 잔혹함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냉정한 어머니는 자신의 손목이 잘려나가는 순간에도 “그 흔한 애원”은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다. “어쩌면 나의 소원은 불편이라도 되고 싶은 것이었나/못 견딜 불편이 되어서라도 어머니께 해결되고 싶었나”라는 화자의 나지막한 읊조림에는 차라리 성가신 존재가 되어서라도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자 하는 딸의 절박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렇듯 황성희의 시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어머니와 딸의 폭력적인 관계는 다만 개인이 겪는 고통의 차원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상징질서를 철저히 내면화한 어머니는 딸을 통제할 수 있는 소유물로 간주하며 명령을 내린다. 상징질서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는 ‘소녀’의 혼란스러운 발화는 상징계의 언어를 체득한 어머니가 휘두르는 동일시의 폭력에 기인한다. 그런데 황성희의 ‘소녀’가 지닌 특성은 어머니에 대한 반발과 저항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잡성을 갖는다. 사랑과 분노, 연민과 서글픔이 어지러이 뒤섞인 ‘소녀’의 감정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못한다. 예컨대 「언니, 엄마는 아직도 사과를 싫어해?」의 화자는 어머니와 “달지도 시지도 않은 덜 익은 사과 맛 같은 대화/이상한 맛이 나면 씹다가 뱉기도 하는 그런 대화/그래도 나는 계속 사과를 내밀게 되는 그런 대화”를 나눈다. 거듭 중단되는 어머니와의 대화는 ‘덜 익은 사과’의 맛처럼 떫고 불쾌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사과를 내밀”며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나아가 화자는 “뜯어낸 어머니의 손목을 징표처럼 목에” 걸고 “그래도 좋아 드디어 어머니의 손을 가졌으니까”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손은 ‘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부위인 동시에 ‘나’가 그토록 갈구했던 애정과 온기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을 ‘징표’로 박제하고 간직하려는 화자의 페티시즘적 행위에는, “나와 달 사이/나와 별과 태양 사이”(「철부지 토네이도」)의 아득한 거리를 초월해 어머니에게 닿고자 하는 딸의 염원이 잠재해있다. 눈에 띄는 점은 이 시집에서 어머니의 폭력과 함께 발현되는 ‘소녀’의 애증은 자신을 비롯해 우리를 억압하는 세계의 질서를 향한 분노로 점차 확장된다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이 세계의 자본을 지켜볼 것이다/동전 하나에서 시작해 이제는 암호가 되어가는”(「관찰자 시점」)이라는 구절을 통해 언급되고 있듯이, 황성희의 화자가 목도한 세계는 암호처럼 은밀하게 위장된 자본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한밤의 무인 편의점 앞에서” 일자리를 잃고 쓰러지는 노동자(「관찰자 시점」), “어느 나라의 침공이 방영되”는 텔레비전(「우리 사이에 통용되는 기법」), “내가 판 무기로 다친 아이들에게 내가 모금한 돈으로 우물 파주고 학교 지어주고 아이들은 그런 후원자님께 감사의 편지를 쓰고, 다음 날이면 온정의 폭격으로 없어지는 마을”(「창작의 시대와 새의 절망」)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풍경을 이룬다. 진보와 발전의 논리가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돈으로 은폐하는 알량한 위선의 세계. 시인은 이곳의 ‘관찰자’를 자처하며 도처에 널린 폭력을 끝끝내 응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질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황성희의 문장들이 난해함의 장막을 뚫고 진솔한 고백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시인이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되묻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를 거대서사로부터 소외당한 열등생”으로 인식하는 황성희의 화자는 자신이 “거대서사를 학습하고 구사하려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고민 속에서 “거대서사 대신 트렌드를 말해야 한다”(「소련 사과와 옥희 선생」)는 시인의 현실에 서글픔을 느낀다.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어디서 강의를 하는지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개인 사정으로 인한 결투」)를 걱정하는 시인은 “내가 살아온 시절은 뚜렷하긴 했지만/누구도 그 앞으로 불러세우지 못했다”(「태양 아래서의 성찰」)는 사실에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시 쓰기에 대한 시인의 치열한 자의식은 이 시집에 등장하는 또 다른 시적 주체인 존재인 ‘김’을 통해 구체화된다. “살롱과 인문을 좋아하고 전쟁은 싫어하나 전쟁사에는 해박하고 혁명에는 문외한이나 혁명사에는 두각을 나타”(「김의 신냉전 수법과 간호사의 의문 세계」)내는 ‘김’은 현학적인 지식에 도취된 자이기도 하고, “되찾은 자신의 안정을 생각”(「개의 희생」)하며 사소한 일상에 안주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허공을 개간하여 사과나무를 심는” 허무맹랑한 연구에 매진하며 “사과나무를 심기 위해 사과나무를 뽑고 다니는 기행으로/멧돼지보다 더한 농장의 골칫덩이가 되는”(「멧돼지보다 김」) 자이기도 하다. 희극적 인물인 ‘김’은 현실의 질서를 위배하는 광인이자 시인의 자아를 대별하는 분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세계와 내가 머물러 있는 세계는 서로 달랐다/나의 질병은 이 둘 사이의 거리에서 비롯됐지만”(「산타의 세계」)이라는 황성희의 고백은 그의 시가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절박하게 헤엄치는 시인의 (불)가능한 몽상임을 함축하고 있다. 암호화된 폭력의 불투명성과 비가시성 속에서 시적 분투는 과연 가능한가. 이 시대의 시인이란 목줄에 묶인 채로 허공을 향해 추락이 예정된 도약을 반복하는 몽상가에 불과한 것인가. 긍지와 수치, 분노와 절망이 교차하는 황성희의 자의식은 시집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알몸’의 형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알몸’의 광인이 발설하는 언어가 다만 난해한 꿈 안에 고립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작고 단단한 두 개의/동그란 세계를 선물해주고 싶은 이유”(「손바닥을 생각하는 이유」)가 있기에 시인은 시를 쓴다. 자신의 문장들이 현실 너머의 세계를 응시할 수 있는 두 눈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헐벗은 채로 허공을 개간하는 광인의 노역이, 닫혀 있던 우리의 영토를 조금씩 넓혀간다. 추천 작품: 「사람으로 지낸 어느 한 해」,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 「관찰자 시점」
What is Love1) 유선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문학과지성사, 2024) 백인경, 『멸종이 확정된 동물』(봄날의책, 2024) 너도 사랑해버리지 않게 조심해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인식인가, 관습(적 반응)인가, 선언인가, 계약인가. 물론 층위가 다르므로 모두 정답일 것이다. 지배적인 미디어 문법의 경우, 일련의 반응을 거쳐 어떠한 상태의 지속성을 경험함으로써 인식에 도달한 뒤, 계약으로써 배타적 관계를 결단한다. 서로를 익명의 군중이 아니라 유일무이하고 고유한 존재로서 존중하기를 합의하기에, 어느 때든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도록 기대를 품고 요구할 수 있는 상대로 자신을 설정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인식에 그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저 계약만으로 사랑을 시작하기도 한다. 혹은 암묵적인 합의 상태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이미 사랑의 수행을 한다. 그런가 하면 우정에서의 친밀감과 로맨스의 구분이 쉽지 않은 무연정자는 특권화되는 사랑의 위계를 거부하며, 모노가미 사랑으로 진입하더라도 이는 상대가 요청하는 책임감의 결심에 가깝다. 성적 접촉을 (식으면 식었지) 사랑의 필수 요소나 심화된 커뮤니케이션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무성애자에게 파트너십의 약속은 섹슈얼한 행위의 전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또 폴리아모리에게 사랑은 모노가미로 상상되지 않거나 그러한 관계가 다중화된다. 자신의 상태와 반응에 사랑이라는 명명을 붙이길 거부하는 이들도 분명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그간 우리 비평은 규범적 인식 틀에서 사랑으로 명명되지 않았던 사랑들, 승인과 무관하게 이미 자유롭고 활발히 존재하고 있던 퀴어한 사랑들을 가시화함으로써 우리 모두 같은 사랑을 하고 있음을 세밀하게 포착해왔다. 동시에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급진적인 재고를 요구하는 사랑의 퀴어함에도 주목하여 유의미한 성취를 축적해왔다. 이렇듯 그간 비평에서 ‘퀴어한’ 사랑들과 사랑의 ‘퀴어함’을 적절히 자리매김해왔다면, 이처럼 무수한 사랑이라는 포스트잇 아래 각자 전제하는 사랑이 어떠한 함의와 전제를 내포하고 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다채롭게 정의되는 다른 사랑들에 대한 사전을 우리 안에 더 많이 확보하여 획일화되지 않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상상 가능한 사랑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성애의 규범화를 비판하고 성적인 것을 주변화하고자 하는 무성애적 관점으로 이전의 문학작품들을 다시 읽을 수도 있고, ‘전체’로서의 개체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데이터베이스 섹슈얼리티와 같이 사랑의 대상을 재고할 수도 있다. 사랑이 시의 첫 생애부터 함께한 시어일지라도, 언젠가부터 시집을 펼치면 사랑과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어가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동원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랜 의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사랑’을 자주 말하는 시인들에게 사랑은 무엇으로 정의되는 걸까. 간혹 사랑이 봉합을 위한 기능적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는 사랑이라는 시어의 어떠함을 신뢰하는 걸까. 그러한 작업의 출발지로서 이 글은 사랑이라는 시어가 자주 발견되는 최근의 두 시집 속 사랑의 양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두 시집 모두 사랑에 대한 독특한 함의를 보여주는데, 유선혜 시집의 경우 가장 동시대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눈여겨봐야 할 시집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들은 모두 ‘멸종’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공유하고 있어 최근 포스트아포칼립스 시들이 자주 발견되거나 멸종, 멸망 등의 시어가 잦다는 진단5)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들 시에서 이러한 시대적 정조를 함께 포착할 수도 있을까. 백인경 시집의 경우 표제작 외에 ‘멸종’이 등장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동에서도 다소 멀어 보이지만, 종말과도 같은 끝의 순간과 침범에 대한 인식이 사랑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이 그리는 사랑의 지형도를 차례로 따라가보자. 큐트니스 매니페스토 The Cuteness Manifesto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랑해, 라고 발음하는 수밖에 없다고. - 「마녀와 로봇의 사랑」 부분 사랑을 모른다면서 왜 사랑을 말해야만 하는 걸까. 그에 앞서 유선혜 시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구멍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구멍」은 각 존재의 “비물질적인 부분”에 있는 구멍을 상상한다.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의 / 타고난 결핍 / 타고난 허무 / 타고난 무의미 / 타고난 균열 / 타고난 어긋남”이 구멍이라 칭해지는데, 구멍의 끌어당기는 속성으로 인해 존재들 간에는 강한 인력이 발생한다. 이러한 구멍의 명령은 “빈 곳을 채워 넣으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는 허기에 패배하여 일단 “뭐든 입에 넣고 보는”(「괄호」) 장면이 빈번히 등장한다. 구멍에서 비롯되는 근원적인 슬픔에 의해 상시적인 허기에 시달리는 것인데, 이로 인한 과식은 다시 슬픔을 형성하고 슬픔은 또다시 허기와 과식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형성된다.6) 이들은 “폭식과 거식의 배턴 터치”를 멈출 수 없다. “자살 기도 직전에”도 “짜장면 (먹어줘)”(「집단 상담」)를 외친다. 한편 구멍은 몸에 난 상처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구멍은 화자들 대부분이 일상을 잘 챙기지 못하고 방치하는 점과 연관된다. 가령 「괄호」에서 “괄호 쳐버린”다는 건 시급한 일을 당장 해결하지 않고 미루는 것을 뜻하는데, 정작 괄호를 쳐야 하는 일이 “과도한 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상을 괄호 친 결과 머리에 딱지가 지고 그걸 뜯으니 구멍이 난다. 딱지가 생길 시간조차 못 참고 뜯어버리는 모습은 허기를 못 참고 음식을 퍼먹던 모습과 겹쳐진다. 「악의 문제」에서도 ‘나’의 방은 온갖 쓰레기로 뒤덮여 있는데 이 시집에서 방이나 행성은 화자의 확장된 몸이자 내면을 포함하므로 엉망진창인 방의 모습은 함부로 다뤄지고 방치되는 것이 생활 영역에 한정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자주 일상의 방법을 잊어버리”(「흑방의 메리」)는 이들은 “겨우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잠을 자”(「사이비 리듬」)는 일조차 버겁다. 회피가 습관이 되어 관계에서의 미묘한 감정적 균열마저 방치해버린다(「아이」). 이처럼 망가진 일상을 방치하여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는 아물지도 못하게 계속 헤집는 동안 구멍은 자꾸만 커져간다. 먹어봤자 슬퍼지고 뜯어봤자 커지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당장의 슬픔과 욕구에 복종하는 화자들. 이는 만성적 우울감의 한 증상인 걸까[“나는 단지 우울하다고만 했다”(「반납 예정일」)]. 그러나 이를 단순히 불행에 길들여진 병리적 증상으로만 진단하는 건 온당치 않다. 그보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헤집고 뜯어버리는 태도에 다시 주목해보자. 이 화자들은 조금 다치거나 망가질수록 오히려 “안심”(「물어뜯기」)한다. 얼마간 불행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이들은 나아가 일부러 상처를 키워서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에 마음을 쏟아 사랑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제 상처를 귀여워하며 반려 구멍 삼아 키우는 것이다[“제가 키우는 귀여운 구멍이랍니다”(「괄호」)].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에서도 ‘나’는 종양을 침입자나 오염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더러운 자신의 몸에서 이렇게 “귀여운” 덩어리가 자라났다는 것에 놀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며, 악의는 없었다며 종양을 변호하기도 한다. 왜 제 상처를 귀여워하고 상처에 사랑을 퍼붓고자 하는 걸까. 여기서 귀엽지 않은 것들마저 열렬히 귀여워하는 유선혜만의 독특한 사랑의 양상이 발견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귀여움의 태도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당대의 중요한 감수성을 함께 암시한다. 이때 귀여움이란 대상을 장악 가능한 형태로 데포르메 모에화하는 심리적 안정화 기제나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원리에 한정되지 않으며, 그보다는 오래 지속되는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일종의 충동이자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귀여움의 핵심은 “모든 진지한 것이 귀여움으로 녹아내리게 하는 데”7) 있다. “목적 없는 표면들로 욕망을 분산시킴으로써”8) 감당도 통제도 안 되는 일상적 위기에 심각성을 소거해 어떻게든 수용 가능한 형태로 변형하는 것이다. 가령 남자에게 뺨을 맞는 순간 배경으로 등장하는 “”(「우리는 못 말려」), “이건 내 폐예요 / 조금 지저분하죠? / 제가 골초라......”(「임무」) 너스레를 떠는 모습 등은 다분히 전략적으로 진지함을 사소하게 만드는 데 복무한다. 그런데 이러한 귀여움은 종말의 정동이 팽배한 오늘날, 만성적으로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생존의 기술과 연관된다.9) 강아지 고양이가 귀여운 이유가 뭔지 아니? 귀엽지 않은 개체는 인간이 다 죽여버렸기 때문이란다. […] 창밖에는 모텔을 나오는 연인들의 풍경뿐입니다. 그러니까 생존은 아 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게 그때 생각난 문장. 애인은 당분이 듬뿍 들 어간 음식을 아주 좋아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귀여운 컵에 담긴 푸딩과 요거트를 퍼 먹을 것입니다. 나와 애인은 발암물질과 인공감미료도 아 주 많이 먹을 것입니다. - 「원룸에서 추는 춤」 부분 귀엽지 않으면 죽는 건 비단 동물들에만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귀여워하기’를 넘어 자신을 사랑스러운 소비 상품으로 만드는 ‘귀여워지기’ 또한 생존 본능에 근거한 행동으로서 중요하게 포착되기 때문이다.10) “자신의 수동성을 극복하는 데 관심이 없는”11) 것처럼 보이고 “불가피한 것에 자발적으로 항복”12)을 미리 해버리는 유선혜의 화자들은 전 지구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귀여움이 동시대적 감각이 된 현실을 시사한다. 한편 구멍은 개인의 가장 깊은 심연이기 때문에 숨겨야 할 치부이기도 함을 유선혜의 화자들은 학습을 거쳐 알고 있다. 제 속을 보여주고 싶다 못해 날것의 장기 그대로를 꺼내 보이고 싶은 과잉 고백 욕망의 시기를 지나, 이제 속내를 적당히만 보여주는 ‘나’는 누군가 자신의 구멍을 들여다본다면 어김없이 떠나가버릴 것임을, “어떤 풍경은 흐릴수록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다. 그렇기에 사랑은 일부러 흐리게 보는 “착각”으로 정의된다(「임무」). 서로의 심연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저 아름답다고 일부러 착각하는 상태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착각까지 해가면서 사랑은 왜 굳이 해야만 하는 ‘임무’가 되는 걸까. 무엇보다도 이 사랑은 끝을 모르(게 되)는 마음으로서, 예정된 종말을 망각하고 현실을 낙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심장은” “끝을 상상하는 능력을 모두 잃”는다. 미래를 대비하기보다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죄다 끝나버린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 조급한 박동으로 뛰어나가고 / 넘어지”(「빈맥」)는 모습에서 암시되듯 사랑은 예정된 결말을 잊어버리게 함으로써 자꾸만 미래를 기약하게 한다. “손쉽게 꿈을 꾸고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는 아이들을 낳고 싶어”(「지질시대」) 하도록, “끝도 모르면서 번식하”(「뼈의 음악」)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사랑은 양가적 속성을 지니게 된다. 사랑은 ‘이별’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어떤 무모함으로써 종말의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이자, 그렇기에 현실적인 문제를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외면하도록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종의 도피적 속성을 지닌 사랑은 일상을 방치하여 구멍을 커지게 하던 모습과 겹쳐진다. 구멍을 메우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타인을 구겨 넣”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고집스러운 빈자리”(「구멍」)가 결코 메워지지 않는 건 이러한 연유이다. 사랑이 구멍을 메울 거라 ‘착각’하지만 실상 구멍은 나날이 커지고 그에 따라 더욱 강하게 서로를 빨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선혜의 시에서 사랑은 멸종을 잊게 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멸종을 동반한다. 앞서 각 존재가 본래적으로 가진 구멍의 끌어당기는 속성 또한 필연적인 충돌과 파괴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멸종으로 이어진다(「아쿠아리움」, 「충돌에 관한 사고실험」).13) 이때 운석은 사랑이라는 회피-방치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구멍의 파괴성을 상징한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다가오는 “운석”이 단지 이별의 기척이나 동시대 종말론적 위기의 유비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사랑과 멸종 사이의 독특한 인과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니까 다가가고 폭발하니까 사랑하고 멸종하니까 사랑하고 멸종에 빠져버린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사랑과 멸종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어 무한한 순환을 형성한다. 그렇기에 “멸종에는 사랑이 필요했”다는 언급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생존의 역사”, 멸종하여 사랑하고 다시 멸종하는 “그런 이상한 되풀이”(「어떤 마음을 가진 공룡이」)는 사랑과 멸종의 순환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유선혜의 화자들은 늘 과잉 진실성 욕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14) 심연을 숨기고서만 가능한 사랑의 기만을 끝내 견딜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유선혜 시의 특이성이 발견된다. 사랑하긴 하는데 사랑해서 버겁고 버거워서 해치워버리고 싶다. 그래서 차라리 스스로 사랑을 망쳐버리기를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던 모든 사람을 끝으로 몰아넣는 신”이 되기를 자처하여 “내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폭발시키는 것이다(「폭탄이 불량이 아니라는 사실은」). 같은 맥락에서 “생존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원룸에서 추는 춤」)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니, 그렇기에 번식은 징그러운 일이 된다. 녹차가 든 잔이 넘어지고 온 집 안으로 물기가 흘러 들어간다. 원래부터 축축했는지 그저 잔을 넘어뜨린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온통 젖어버린 건지 알 수 없어지고 나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 유성생식은 그런 징그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낳고, 태어나고, 자라고, 나는 변기 옆에 쪼그려 앉아 타일 사이사이의 검은 자국들을 박박 문질러 닦는다. 너는 자꾸만 발자국을 남기고 곰팡이는 자라나고 우리의 미래는 끈끈하게 퍼져서 지워지지 않는다. // 그래,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 -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 부분 이 시는 전반에 드리운 가난으로 말미암아 나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사랑의 유지마저 확답할 수 없는 청춘의 무기력한 초상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보다 주목되는 건 “낳고, 태어나고, 자라”는 일의 징그러움에 대한 감각이다. “습기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곰팡이는 다소 더러운 환경에서 안심을 느끼는, 그리고 그런 자신을 더럽게 여기는 유선혜 화자들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는 바람은 “세상의 시세를 감당할 수 없”고 “우리의 미래는 뛰어놀 거실이 없다”는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곰팡이처럼 하찮은 존재로서 자신의 유성생식이 “징그러운” 것이라는 거부감 또한 드러내는 것이다. 번식 행위를 통해 비참한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음은 물론, 외형상 아름답지 않은 벌레를 사랑하여 벌레의 알을 배고 싶다던 강박적인 진술과 마찬가지로(「왜냐하면 그 상자는 비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겹고 징그럽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큐트 가속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번식 가능성의 제로 지점에 다가가”15)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끝내버리고자 하는 충동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멸종은 다시 사랑을 형성하는 것이 되므로, 사랑은 제대로 끝날 수도 없다. “어떤 심각한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 상승”이자 “끝없이 미완성 상태로 남는 만성적인 애틋함의 연장”16)만이 이어진다. 차라리 모든 게 끝나버려 태어나기 이전으로 “퇴행”17)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절대 극점에 도달하지는 않으면서 예정된 끝을 잘게 쪼개 끝을 미룰 뿐이라는 무력감이 시집 전반에 드리워져 있다. 이 시집에서 무언가를 쪼개거나 미분하는 이미지가 빈번한 이유도 이와 같다.18) 그러나 이들이 다만 무기력한 되풀이만을 그리는 건 아니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건 멸종을 미루며 “삶의 입자를 쪼개”(「여자친구」)는 데 골몰하는 일이 아니라 박자를 못 맞추더라도 자유롭게 추는 “춤”이다(「제2외국어」, 「줌바 버전」). 서툴더라도 춤을 추며 무한 순환의 리듬과는 다른 리듬을 만들어보려는 수행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멸종의 댄스」에서 “과거로 가자, [...] 사라진 동물들과 함께, 덜덜 떨며 문명 이전의 춤을 추자” 권유하는 건 “과거”와 같은 모습일 ‘미래’의 멸종 속에서 이미 사라진 동물들과 평등하게 지구 “퇴장”을 맞을 것에 대한 유쾌한 지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수(水)속성 마음 유선혜의 화자들이 삶의 기본적인 생활 영역들을 방치하고 허기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백인경의 화자들은 인내심도 강하고 바른 자세와 바른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돈을 주고서라도 글씨를 교정하고 싶”(「악필」)다는 단정함에 대한 바람은 유선혜의 시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산다는 건 어쩌면 / 일종의 유행성 허세에 불과”(「OOTD」)함을 알면서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백인경의 시에는 사물이 단단하게 버티고 선 모습이 자주 발견되는데, 몸 또한 건축물과 같이 중심과 균형을 지키려고 애쓰는 자세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견고한 상태가 한순간 무너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경계가 무너져 침범당하고 마는 장면 또한 어김없이 이어진다. “풍경의 영향을 받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모래사장의 테두리를 흐트러트리는 파도”(「운동성」)에 의해 결국 발끝이 젖어버리고, “주먹 속에 표정을 가”두지만 “모래처럼 흘러나오는 이야기”(「OOTD」)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어렵게 유지해온 최선도 예외는 아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악필」)는 진술은 실상 최선을 다하는 삶에 지쳐가고 있음을 암시하며, “평생 맛있어지는 일에만 골몰해온 것 같은 / 한 컵의 최선”인 파르페는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면서 / [......] / 울기 시작”한 ‘너’의, 무너지기 직전까지 온 힘을 다해 쌓은 “정직한” 노력을 짐작하게 한다(「마스킹」). 어쩌면 “바람이 불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배열과 // 동시에 / 볼링 핀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 그런 힘”(「독설가」)은 백인경 시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그런데 이들이 최선을 다하는 방식에는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일이 수반된다. “최선을 다해 낯설게 바라보다가 / 무뎌져버린 낮들이 있지?”(「백일장 키즈」) 묻는 건 마음에 흠집을 내가면서 감정에 무딘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단련시키는 시집 속 인물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안간힘을 다해 마음을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백인경에게 마음은 쉽게 짓무르며 망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세한 접촉에도 금방 뒤섞이고 상해버리는 성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기어코 상처를 주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마음은 한없이 취약한 수(水)속성으로 그려진다. 파문을 넓게 퍼뜨리거나 축축해지는 모습, 불어서 퉁퉁 부풀어버리는 것까지 모두 물의 속성에 기인한다. 아이들마저도 눈물 없는 “바삭한 슬픔”(「파우더형 인간」)이 필요해서 울지 않도록 마음을 훈련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껍질의 채도가 높아질수록 상하기 쉬운 마음이”(「크로마키」) 되어버리는 것 또한 섞일수록 상해버리는 마음의 성질을 암시한다. 이러한 무른 마음을 예기치 못한 침범이나 뒤섞임으로부터 보호하기라도 하듯, 이 시집에는 벽이나 문, 테두리가 경계를 구획하는 것으로서 중요하게 활용된다. 여장에 대한 소망을 늘 품고 있었던 ‘그’의 “옷장”에 “가득 찬 레이스 속옷”(「캐시어스 클레이, 자주색 비키니 옷장」)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마음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문 안쪽에 걸어 잠가 보호하는 양상을 대표한다. 「유기」에서는 “마음이 / 밖으로 튀어나와버릴까 봐” 겁이 나 “현관문을” 언제나 “극도로 조심스럽”게 여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는 마음을 문 안에 소중히 숨겨놓으며 산책을 나갈 때도 혹여나 마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쥔 주먹”으로 “너무 많은 목줄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 [......] // 물가에 벗어둔 낯선 신발”(「악필」)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나, “우리 반 아닌 애들 다 나가라고!”(「이동 수업」) 소리치는 장면은 완고하게 세워둔 마음의 벽이 외부인에 의해 침입당하며 돌연 그 분리가 무너질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그러한 이들이 침범에 대비하여 마음을 단련시키는 양상은 자주 육체단련이 되기도 하다. 턱과 목 사이에 / 방울토마토 하나를 끼운 듯한 자세 / 그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 그 상태를 의식적으로 유지하세요 // 선생님은 그러고선 늘 사라진다 // [......] // 창가 화분 위로 연두색 방울토마토 한 알이 안간힘을 다해 붉어지는 동안 /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덩그러니 살아 숨 쉬는 일에 열중한다 // 언제나 갈비뼈를 닫는다는 느낌으로 호흡하세요 / 또다시 마음을 다친다면 / 갈비뼈를 제대로 닫지 못한 탓일 테지 / 고개를 끄덕이면 턱 아래 방울토마토가 으깨질 것 같다 // [......] // 오늘 내일은 조금 뻐근할 거예요 /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좋은 상처가 필요하거든요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이 말이 듣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것이지만 // 의심이 쌓일수록 베개가 높아졌다 / 밤새 축축한 믿음이 목 소매를 물들였다 - 「올바른 자세」 부분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열중”하는 신체 변화는 방울토마토의 익어감으로 전이된다. 이때 흥미로운 건 “갈비뼈를 제대로 닫지 못”하면 “마음을 다친다”는 인과 관계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몸을 단련하는 동안 도리어 몸에 상처가 나는데, 이 “좋은 상처”는 다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써도 결국 어딘가는 다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쳤”음을 알게 된 ‘나’는 원했던 답을 얻었음에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자는 동안 베개가 “축축”해진 건 기껏 꿈속에 가둬놓은 노력이 무색하게 수속성 슬픔이 꿈을 비집고 흘러나올 정도로 화자가 깊이 상처받았음을 알게 한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몸이 다쳐야 하는 이 법칙은 다른 수록시들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비단 운동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혹사시켜가며 마음을 지켜내고자 하는 분투가 시집 전반에 이어지는 것이다. 「이글루」는 마음의 성벽을 오래 지켜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는데, 벽에 기대면 자기 체온에 벽이 녹을까 봐 이글루의 가운데에 가서 앉는다. 어딘가에 기대지 못할지언정 그게 ‘나’에게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열이 펄펄 끓도록 앓은 다음엔 / 벽이 더 단단해졌다”는 언급 또한 몸이 아플수록 마음이 단련되는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마음을 보존하기 위한 최선과 그러한 마음의 성벽을 기어코 열어젖히기 위한 다른 최선이 만난다면 어떨까. 마음과 마음의 만남 또한 문이라는 경계를 매개로 알레고리를 그린다. 「가정식 희망」에는 식당으로 착각하고 문을 열라며 난동을 피우다가 대기 번호를 받아 들고 “열리지 않을 문 밖에서 / 언제까지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가정식 요리, 즉 문 너머 누군가의 마음이라기보다는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노력을 증명받는 것이다. “의지의 발현이 중요했고 / 노력했다는 게 중요했고 /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증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제스처에 중독된 듯한 사람들이 늘어가며 문밖의 줄이 길어질수록 “잘못 보관해 다 버리게 생긴 희망들이 쌓여”간다. 문을 열라고 요구하는 쪽도, 갑작스러운 침입에 대응하는 쪽도 모두 각자의 최선을 다해 원하는 것을 충족하고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안간힘으로 애써 유지하던 경계는 결국 침범당해 무너지고 만다. 아무리 몸을 훈련해서 마음을 잘 닫아두더라도 도리 없이 마음을 다치고야 마는 것 또한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양상이다. “담장 밖에서 별안간 넘쳐 온 불편함”(「담론 [fence]」), “마음의 균열”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이스트」) 쓰는 노력 등은 단단히 잠가두었던 마음이 결국 다른 마음과 뒤섞여 부패해버리고 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벽이나 문으로 마음의 안팎을 철저히 분리하고 있다가 결국 그 경계가 무너지고 마는 건 백인경이 그리는 사랑의 양상과도 긴밀히 이어진다. 우선 백인경에게 사랑은 “댐의 안팎처럼 문을 가운데 두고 / 서로 다른 습도에서 / 같은 자세로 기대앉는” 것으로 정의된다. 완고한 경계인 벽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공간을 보호하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수문이 열리는 순간은 허가 없이 찾아”오고야 만다(「아가미」). 이와 유사하게 「몰입」에서는 화자가 기계 소리의 방해로부터 벗어나 생각을 계속하기 위해 내면의 내밀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림자의 윤곽이 상해갈수록 / 생각의 테두리가 단단해”짐에 따라 화자는 “더 이상 /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몸이 구덩이와 섞일수록 내면에 둘렀던 경계가 더욱 단단해져 내면의 주인인 ‘나’조차도 입장을 거부당하는 것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안팎 분리라는 자신의 방식을 고수할수록 그 사랑이 불가능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랑의 의미가 전환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랑은 그토록 두려워하던 외부의 침입을 받아들인 뒤에야 가능해지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얼렁뚱땅 오렌지」에서는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져서 낯설어지지 않는 상태를 사랑이라 보는 것 같다. 일부러 스스로를 상처 입혀 마음을 무뎌지게 하는 연마로 마음을 지키고자 했다면, 뒤섞임을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무뎌짐’이 ‘익숙함’으로 긍정됨으로써 사랑이라 재명명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또한 마음이 수속성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애착의 형태」에서 화자가 ‘당신’의 형태에 자신을 꼭 맞추고서 그의 “늑골의 곡선을 베”낄 수 있게 되는 것도, 맞닿는 대상의 형태에 따라 있는 그대로 상대를 수용하고 자유자재로 제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물의 성질에 근거할 것이다. 「마음의 준비」에는 함께 살던 강아지를 떠나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화자가 강아지를 돌보고 사랑할 때의 생활 습관들을 이제 더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내용이 나열된다. 이어 무너진 마음이 건물의 파괴에 빗대어지는데, 단순히 강아지와 “함께 살았던 집을 허물”어버리는 것을 넘어 집-마음을 구성했던 건축자재들마저 모조리 삼킬 거라 말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랑의 양상은, 사랑하는 대상을 문 안 자신의 공간에 들이는 것을 넘어 마음을 ‘우리’의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우리’의 루틴을 만들어 마음을 동기화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자랄수록 내 집이 폐허가”(「유기」) 된다는 건 사랑의 깊이를 누적시키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므로 종말 또한 예정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사랑이 끝나면 그저 그 대상을 제 마음의 안에서 밖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우리’를 이루었던 공간으로서의 마음이 모조리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사랑의 종말에 의해 파괴되는 건 사랑과 함께 변형되고 재구성된 자기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이토록 치명적인 것이 사랑이기에 백인경의 화자들은 마음을 열어보이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고 마음의 벽을 견고히 지켜내고자 하는 걸까. 이처럼 백인경에게 사랑은 불가침의 영역에 상대를 겨우 맞아들여 상처의 주고받음을 허용하고자 하는 결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랑에 의해 새롭게 뒤섞일 마음을 향해 조심스럽게 진입했을 때, 안간힘을 다해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턱 밑에서 방울토마토가 톡 으깨짐으로써 다른 풍경의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이다. 1) 이하 본문에서 유선혜 시집의 괄호가 사랑하는 구멍은 「괄호」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는 「여자친구」로, 「그게 우리의 임무지」는 「임무」로,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는 「아이」로, 「구멍의 존재론」은 「구멍」으로 표기한다. 2) 유수연, 「사랑은 잊히고 근육은 남는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 2024. 3) 에밀리 정민 윤, 「나의 첫 이별 후 아빠는 내게 최초의 이메일을 보냈다」, 2024년 겨울호. 4) 에밀리 정민 윤, 같은 시. 5) 어쩌면 이는 시대적 위기와 긴밀히 얽힌 현상으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해 사라 아메드에 의해 다루어지는 사랑의 정치학이 주목된다(사라 아메드, 6장 '사랑의 이름으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6) 슬픔과 허기의 상관관계는 「일란성 슬픔 쌍둥이 슬픔」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허기는 슬픔과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괴물”과도 같은 “허기”를 달래고자 밤에 라면을 먹어도 오히려 “두 배로 불어나는 슬픔을 겪”는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허기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구멍과 같다. 7) 한편 인아영은 '귀여움'이 무력하고 연약한 것에 대한 욕망이자 수동 공격이라는 양가성을 지니며, 무가치해 보이는 것들을 교환 논리로부터 보호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제동을 거는 비판적인 수행"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시스템에 대한 순응이자 저항으로서 귀여움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다(인아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 『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pp. 114~15). 8) Amy Ireland·Maya B. Kronic, 『Cute Accelerationism』, Urbanomic, 2024, p.4. 논외로, 고선경과 유선혜를 함께 주목할 때 동시대 시에 나타나는 귀여움에 대해 더욱 다양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9) Ibid., p. 13. 10) "특정한 자기 인식을 포기하는 것으로서 귀여움"은 "자신을 대상으로 보고, 좋아하고, 공유하는 것을 포함한다"(Ibid., p. 31). 그리고 이는 "소비와 자기 소비를 분리할 수 없는 상태"(Ibid., p. 20)와 맞닿는다. 김홍중은 “스스로를 보살핌의 대상으로 유지"시키고 "영원한 유아에 머무르"며 양육되기를 자처하는 귀여움 지향이 민주화 이후의 생명권력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김홍중, 「삶의 동물/속물화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귀여움」,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 69). 이러한 2000년대적 "존재론적 유아들"(같은 책, p. 71)로 포섭되는 것을 넘어, 오늘날에는 자기 소비로써 귀여움의 조합들을 끊임없이 갈아 끼우는 양상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11) Ibid., p. 5. 12) Ibid., p. 6. 13) 그런데 이러한 충돌과 파괴는 한편으로 내면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된다. 이 세계관의 법칙에 따르면 "내면이 멸종한 행성을 /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외로움이 있어"서 몸과 몸이라는 물질의 맞부딪침은 외로움들의 "충돌"을 발생시키고 서로에게 "스며들어 번지"(「충돌에 관한 사고실험」)게 한다. 그렇기에 유선혜 시에서 내면은 폐쇄적이거나 단일성에 갇히지 않는 내면이라 할 수 있다. 「마녀와 로봇의 사랑」에서는 방이나 행성, "껍데기" 안에 있는 "진짜 내가" 내면에 해당하는데, '너'의 "심장을 주물럭거리는" "누군가"(「Nirvana」)는 이미 무수한 타인과 섞인 '너'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너'가 자신의 내면을 견뎌야 하는 이유는, 이미 그것이 타인의 외로움에 침범된 내면이기 때문이다. 14) 이 시집에서 허기와 구토감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려지는 이유는 유선혜의 화자들이 허기에 시달리는 만큼이나 과도하게 진실하고자 하는 충동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토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죠?" 묻는 이들은 "기어이 써버리"(「반납 예정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15) Ibid., p. 4. 16) Ibid., p. 14. 17) Ibid., p. 5. "그녀는 전생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우리로는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여자친구」). 18) "영에 한없이 다가가지만 절대 영이 될 수 없는 / 무한히 가까워지지만 도착하지는 못하는 / 리미트 영의 마음 // 끝으로 간다는 것에 대해 / 그러나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영으로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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