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푸른사상 2024년 봄호(제48호)
비사물의 디스토피아와 '아이들'의 애니미즘 ― 변혜지, 남지은, 마윤지의 첫 시집에 부쳐
미디어 철학자인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에세이 『사물과 비사물–현상학적 소묘』(김태희 역, 필로소퍼, 2023)에서 우리들의 환경이 현대에 이르러 점차 ‘비사물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예시로 든 비사물들은 “텔레비전 화면의 전자 이미지, 컴퓨터에 저장된 데이터, 온갖 필름과 마이크로필름, 홀로그램 및 프로그램” 등이다. 비사물의 세계에서 인간의 손은 노동으로 대표되는 사물과의 관계맺음을 상실하고, 키(key)를 작동시켜 프로그램을 향유하는 잉여적인 기관으로 전락한다. 그가 전망하는 ‘비사물의 디스토피아’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적 의미의 ‘손’을 상실한 세계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손은 사물의 ‘사용사태(bewandtnis)’를 지각하는 최초의 기관이다. 사물은 현존재의 손에 의해 쥐어짐으로써 유의미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사용 주체인 ‘나’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망치와 못, 시계, 벽처럼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얻어진다. 하이데거에게 손은 단순히 사물을 감각하는 기관을 넘어 현존재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망을 인식하게 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반면 미래의 인간에게는 손이 아닌 ‘손끝’만이 존재한다. 플루서는 ‘손끝’은 프로그램의 명령에 따라 조작과 결정을 반복하는 수동적인 기관으로 규정한다.
빌렘 플루서가 말한 ‘비사물의 디스토피아’는 변혜지의 첫 시집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에서 가상현실에 거주하는 메타픽션적 화자의 무력감으로 구체화된다. 이 시집에 실린 시 「플라스틱 아일랜드」, 「레고 피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브릭 하우스」, 「팩맨」, 「세카이계 만화」, 「Enter the World」 등의 제목에서도 유추되듯이 시인은 인간의 ‘손끝’에서 향유되는 장난감, 게임, 만화, 웹소설과 같은 가상현실을 다룬다. 이 시집의 표제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은 2018년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싱숑’의 웹소설 『전지적 독자시점』에 등장하는 소설의 제목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에서 따온 것이다. 순문학에 비해 다수의 독자들을 겨냥한 웹소설은 인기 있는 플롯, 예를 들면 세계의 멸망이나 주인공의 회귀, 환생, 성장, 모험 등의 코드를 따른다는 점에 서 로맨스 서사의 특징을 일정 부분 공유한다. 그런데 메타픽션적 화자인 ‘나’는 멸망 위기에 처한 세계를 구원하는 뉴 로맨스 서사의 모험적 영웅 대신 “세계를 구하고 싶은 사람들이 속출하는데”도 “구태여 머물 필요가 없는 세계도 있다는 것”(「그거 그대로 내버려둬」)을 전언하는 자로 등장한다. “아무리 많이 팔아도 내가 너덜너덜해지지 않는 것이 부끄러웠다.”(「절대 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아무리 가지고 놀아도 나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무해한 놀이」)라는 구절에서처럼, 변혜지의 ‘나’는 무한 복사가 가능한 비사물적 존재다. “나는 어떻게 이 세계를 구했나. 나의 궁금증이 이 세계와 무관하였다”(「언더독」), “누구의 명령인지도 모르면서/나는 순순히 방문을 열어야 하는데”(「플로럴 폼」) 등의 대목이 암시하듯이 ‘나’는 ‘신’의 선택을 받아 프로그램 안에서 움직인다.
이번에도 완벽한 엔딩에 실패했다고
신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린다.
먹고 싶지는 않은데. 그냥 맛만 보려고. 네가 오래 씹다가 휴지에 뱉은 음식물처럼, 곤죽이 되어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나의 멀쩡한 기저귀를 살펴보려는 부모가 아주 많았다. 낡은 원목 서랍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있는데. 손잡이를 쥘 수 없었다. 외우렴.
두 손 가득 답안지를 떠안기고
신은 엄격한 얼굴을 한다.
썩어가는 음식물이 검은 비닐을 선물처럼 부풀린다. 얼마든지 양보할 수도 있겠다. 나의 바람에는 구더기들이 들끓는다.
전생에 손에 쥐었던 낙엽이 뺨을 스쳐서, 나는 자꾸만 얼굴을 긁는다. 이 어둑한 산책로의 농담을 가늠할 수가 없다. 얼마나 오래 씹었으면…… 왜 이번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반복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다른 곳을 바라보며
너는 금세 녹는 사탕 한 알을 입에 넣는다.
시스템을 초기화하시겠습니까?
― 변혜지, 「누군가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전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3)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신’은 ‘완벽한 엔딩’을 창조하는 전능한 자가 아니라 “시스템을 초기화하시겠습니까?”라는 명령 체계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플레이어다. ‘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전능함은 “완벽한 엔딩에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손가락’을 움직여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유추해본다면 아마 이 시에 등장하는 ‘부모’는 플레이어의 대리자로서 ‘나’를 키우는 또 다른 가상캐릭터인 듯하다. 그런데 “멀쩡한 기저귀를 살펴보려는 부모가 아주 많았다”라는 구절에서처럼 ‘부모’는 아이가 우는 원인을 좀처럼 찾지 못한다. 게임을 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전생에 손에 쥐었던 낙엽이 뺨을 스쳐서, 나는 자꾸만 얼굴을 긁는다”라는 대목이 플레이어의 머뭇거림에 반응하는 게임 캐릭터의 반복 동작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처럼 ‘신’은 무수한 ‘답안지들’ 사이에서 ‘완벽한 엔딩’을 찾아내기 위해 골몰한다. 반면 ‘나’는 자신의 세계가 ‘손가락에 의해 작동되는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또한 “두 손 가득 답안지를 떠안기고”라는 구절에 암시되는 것처럼 자신을 거쳐 갔던 수많은 ‘엔딩’을 기억한다. 여타의 환생물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나’는 이번 생에서도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웹소설, 만화, 게임에서 일반적으로 전생의 기억이 주인공의 능력치로 활용되는 것과는 달리 ‘나’의 기억은 무력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전의 플레이를 기억하는 화자는 ‘낡은 원목 서랍’ 속에 든 것, 이를테면 단서나 장비,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신’이 조종하지 않고서는 ‘손잡이’를 쥘 수 없다. 그저 ‘완벽한 엔딩’을 보여주기 위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나’는 “먹고 싶지는 않은데. 그냥 맛만 보려고. 네가 오래 씹다가 휴지에 뱉은 음식물”, “금세 녹는 사탕 한 알”처럼 간편하면서도 무의미하게 소비되는 존재다. 또다시 도래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나’는 “왜 이번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며 ‘신’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변혜지의 시는 사랑을 갈구하는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신’에게 ‘완벽한 엔딩’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 시대에 범람하는 수많은 환생물들의 성공 법칙은 ‘완벽한 엔딩’의 공략법을 그대로 닮아 있다. ‘가상/현실’, ‘육체/비육체’, ‘사물/비사물’의 경계가 모호해진 지금, 우리는 게임을 플레이하듯이 취업, 연애, 결혼, 심지어 삶 전체를 ‘완벽’과 ‘실패’로 이원화한다. 가령 “이번 생의 내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음을 느끼는 변혜지의 화자는 “주머니 손난로는 일회용이고 이 삶도 마찬가지”(「러브 딜리버리」)임을 깨닫는다. “반복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신’과 같이, ‘완벽한 엔딩’에 집착하는 우리는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 따라서 손끝으로 간단히 ‘초기화’할 수 있는 것으로 소비할 뿐이다. 이 시집에서 ‘사랑’이라는 시어가 유달리 빈번하게 발견되는 이유는 가상이든 현실이든 혹은 이 모든 구분이 무화된 세계이든, 사랑이야말로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진정한 ‘멸망’은 우리가 더 이상 누군가를, 그리고 삶을 사랑할 수 없을 때 도래한다.
변혜지의 시집이 ‘손끝’에서 향유되는 비사물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면, 남지은이 12년 만에 펴낸 첫 시집 『그림 없는 그림책』(문학동네, 2024)은 아이들의 놀이에 동원되는 ‘손’을 언캐니(uncanny)한 방식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이 시집에 숱하게 암시되고 있는 어른들의 폭력성은 아이들의 ‘손’을 기묘하게 뒤트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시집 제2부 「유리 그리기」에 형상화된 유년의 집은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뽑아내는”(「넝쿨장미」) ‘아버지’의 폭력이 작동하는 공간이며, ‘나’와 ‘언니’는 “앙상하게 깎여나가는 잠의 속살”(「커터」) 속에서만 겨우 안전함을 느낄 수 있다. “우린 열한 번째 손가락/어쩌면 신이 떨어낸 모래 알갱이/뻥 뚫린 시간 속으로 튕겨진”(「모조」)이라는 대목에서 아이들의 존재성은 잉여적 기관인 ‘열한 번째 손가락’에 비유된다. 어른들의 폭력을 체험한 아이들은 놀이의 세계를 창조한다. 하지만 “검고 미끌한 손끝을 갈고 또 갈았으니까”(「귀신의 집」), “굴러다니던 머리통에 징그러운 팔뚝을 꽂아넣은 거”(「모조」), “쥐어뜯기고 쥐어박히는 소의 눈과 다리, 날틀과 젓가락, 사다리와 톱질”(「혼자 하는 실뜨기」) 등의 구절을 통해 드러나듯이, 놀이의 공간은 전능한 자아의 폭력이 발휘되는 그로테스크한 세계이기도 하다.
코코코코 눈
코코코코 입
코코코코 귀
귀가 흘러내려서 양볼에 닿은 느낌
어디까지가 뺨이고
어디까지가 턱인가
검지로 가리키면
맑디맑은 침이 손끝에 닿는 느낌
물체가 이름을 지니고 그림자는 깊어집니다
상자는 가로 칠십이 센티미터 세로 오십칠 센티미터 높이 칠 센
티미터이고 놓인 물건을 한눈에 살필 수 있습니다.
코코코코 눈썹
코코코코 이마
코코코 코,
콧구멍을 만듭니다
쿡 찔러봅니다
찢어진 우리들의 눈 코 입
웃음이 새는 건 순식간입니다
한 호흡 마시고
한 호흡 내쉽니다
숨쉬는 법을 배웁니다 까먹습니다
해가 다 식고 나면
어디까지 밤이고 어디까지 뺨인가
짚어보면 우리 얼굴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 남지은, 「모래 상자」 전문
(『그림 없는 그림책』, 문학동네, 2024)
그런데 남지은의 시에서 놀이하는 ‘손’은 다만 초자아의 원초적 폭력을 답습하는 기관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코코코코 놀이’는 아이가 양육자의 목소리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단계에서 아이의 몸을 직접 짚어주며 신체 기관을 학습시키는 놀이다. 아이가 언어 체계로 진입하는 단계에 수행되는 이 놀이는 한편으로 아이가 자신의 얼굴을 ‘눈’, ‘코’, ‘입’, ‘이마’, ‘손’, ‘발’, ‘배’, ‘등’ ‘다리’와 같이 각자의 위치가 명확히 구별된 실체로 인식하게 만든다. 반면 시 「모래 상자」에서 시인은 ‘코코코코 놀이’가 “우리들의 눈 코 입”을 마치 모래처럼 허물어뜨리는 순간을 포착한다. ‘우리’는 모래가 담긴 상자를 가지고 얼굴을 만들어 나가면서 ‘코코코코 놀이’를 한다. 모래 위에 만들어진 ‘눈 코 입’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손가락은 고정된 ‘얼굴’의 체계를 순간적으로 무너뜨리며 흘러내리고, 구멍이 나고, 찢어지게 만든다. “숨쉬는 법을 배웁니다 까먹습니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얼굴’의 균열로부터 새어나오는 ‘웃음’은 경직된 ‘호흡’의 리듬까지 이완시킨다. ‘코코코코 놀이’로부터 발생하는 ‘얼굴’과 ‘호흡’의 허물어짐은 ‘밤’과 ‘뺨’처럼 음소 단위로 의미가 변별되는 언어 체계의 무너짐과도 대응된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동화평론가 김지은의 말처럼, 남지은의 시집에서 ‘손–촉각’은 위기를 감지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본다면, 이 위기를 존재들의 섞임과 불확정성의 순간으로도 독해할 수 있지 않을까? 놀이를 통한 손의 어루만짐은 ‘나’와 ‘너’로 구획된 경계를 때로는 난폭하게 찢으며, ‘우리’로 하여금 서로의 ‘닮음’을 발견하게 만든다. 이러한 ‘닮음’의 발견은 놀이의 배후에 작동하는 애니미즘적 세계관과도 상통한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비롯해 동·식물, 사물, 심지어는 귀신, 유령, 게임, 만화 캐릭터 등 비사물에도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 “옛 물건을 깎고 엮고 새긴/옛사람의 생각을 생각하다보면//그림책을 며칠씩 끌어안고/이 종이 이 판형 이 서체를 고집한/뜻을 헤아리다 보면/눈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법이지”(「잊었던 용기」)라는 대목에서처럼, 남지은 시에 드러나는 애니미즘적 상상력은 ‘그림책’이라는 사물뿐만 아니라 이것에 담긴 생각이나 영혼과 같은, 말하자면 비사물적인 것에게까지도 ‘사랑’을 줄 수 있는 인간의 따스한 역량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상자 속 모래에 ‘얼굴’을 부여하는 놀이는 “가로 칠십이 센티미터 세로 오십칠 센티미터 높이 칠 센티미터”로 계량화되는 상자의 물성을 초과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렇듯 ‘나’와 ‘너’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아이들의 애니미즘적 상상력은 인간의 관점을 단순히 ‘사물–객체’에 투사한 것이 아니라, ‘주체/객체’, ‘생명/비생명’, ‘사물/비사물’이라는 견고한 이분법으로부터 탈주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남지은의 시에서 발견되는 애니미즘적 상상력은 마윤지의 첫 시집 『개구리극장』(민음사, 2024)에서도 발견된다. 흥미로운 점은 2020년대 이후 시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유령’ 대신 마윤지의 시집에는 유독 ‘귀신’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귀신’은 죽은 사람의 넋이라는 뜻 외에도 “사람에게 화와 복을 내려준다는 신령”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참고할 때 신비로움이나 언캐니함을 함축한 ‘유령’과 달리 ‘귀신’은 인간의 삶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비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이 시집에 실린 시 「포천」은 액운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쥐불놀이’의 현장을 그린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어른들이 손에 쥐여준 부럼을 지붕 위로 던지고 밭에서 별달거리를 부르며 풍물놀이를 한다. 어른들은 달이 뜨자 신명나게 쥐불을 놓으며 소원을 빌고, “보이지 않는 곳부터/보이지 않는 데까지” 모여든 귀신들은 사람들을 구경한다. ‘나–아이’의 눈에 비친 쥐불놀이의 난장(亂場)은 인간, 사물, 비사물의 경계를 흩뜨리는 애니미즘의 세계다. 이러한 경계의 해체는 시집에서 주로 놀이에 동원되는 ‘몸’, 특히 ‘손’의 감각을 통해 이뤄진다. “너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숨”(「오늘의 한가운데」), “손가락이 열 개인 털장갑/이를테면 깍지/햇빛의 다른 말이다”(「동지(冬至)」), “손이 닿는다는 건/더 깊은 비밀”(「쎄쎄쎄」) 등의 구절에서 발견되듯이, 마윤지의 ‘손’은 사물뿐만 아니라 ‘숨’, ‘햇빛’, ‘비밀’과 같은 사물과 비사물의 경계에 놓인 것을 감각하는 기관으로 나타난다.
분수 광장의 아이들
손을 잡고 한 줄로 걷는다
물이 솟는 블록을 찾아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가
더 가까이
낮은 환하고
광장은 캄캄하다
저 나란함이 빛나기 위해
젖은 옷이 따뜻해
속이 다 비치는데
무엇에도 뚫리지 않을 것같이
때때로 진동하며
튀어오르는 물줄기의 전조처럼
광장 밑에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몸의 몸
더 끝에 있는 몸
어떤 물기둥은
바른 자세로 고개를 숙인
기도의 모양
야야 신기해 팔 벌려 봐 되게 무겁다
아이들이 물줄기를 꺾어 햇빛에 뉘인다
한없이 예쁜
저 입체가 두렵다
바라볼 뿐인데
있는 힘껏 옷을 쥐어짜고도
물이 뚝뚝 흐르는 수건을 가방에 넣어
가장자리로 달려가는 목소리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금방 잊혀질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만져지는 건 늘 뒷목
나타나기 전에 이미 닿아 있는
― 마윤지, 「여름 촉감」 전문(『개구리극장』, 민음사, 2024)
시 「여름 촉감」으로부터 감지되는 모종의 섬뜩함은 아이들의 놀이와 죽음의 어두운 기억이 교차하는 ‘분수 광장’의 장소성에 기인한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자유롭게 뛰노는 ‘분수 광장’의 낮 풍경은 얼핏 밝고 평화롭게 보인다. 하지만 “광장 밑에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어떤 물기둥은/바른 자세로 고개를 숙인/기도의 모양”이라는 구절들을 통해 추측할 수 있듯이 이곳은 과거 끔찍한 폭력이 가해졌던 죽음의 현장이자 미처 애도되지 못한 자들이 떠도는 ‘캄캄한’ 세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말끔하게 정비된 ‘분수 광장’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애도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화자의 시선이 포착하는 아이들의 물놀이 현장은 무수한 죽음 위에 축조된 평화와 망각을 교란한다. 물은 투명하고 형체가 없지만 선명하게 감각된다는 점에서 독특한 물성을 가진다. 이러한 물의 유동성은 공적 기억에서 누락된 이들의 비가시적인 존재성, 다시 말해 ‘기억과 망각’, ‘육체와 영혼’,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죽은 자들의 (비)존재성과 연속되어 있다. “몸의 몸/더 끝에 있는 몸”이라는 의미심장한 대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이 시에서 죽은 이들은 ‘몸’이라는 물질성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이들은 “때때로 진동하며/튀어오르는 물줄기의 전조처럼” 뚜렷한 감각으로 다가오면서 자신들의 부재를 드러낸다.
“아이들이 물줄기를 꺾어 햇빛에 뉘인다”라는 구절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놀이를 다만 무해하고 순수하게 그리는 것을 넘어 죽은 이들에게 헌화하는 애도 행위와 교묘하게 겹쳐놓는다. 어른들에게 분수가 관조의 대상에 불과하다면, 아이들은 그곳에 뛰어들어 손으로 물줄기를 주무르며 생생하게 감각한다. 따라서 아이들의 손과 몸은 놀이의 매개일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의 “몸의 몸/더 끝에 있는 몸”과 교섭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만져지는 건 늘 뒷목/나타나기 전에 이미 닿아 있는”이라는 마지막 대목에 잠시 머물러보자. ‘뒷목’은 우리의 눈이 닿지 않는 신체 부위이면서 가장 민감하고 섬세한 부위 중 하나다. 죽은 이들에게 나의 ‘뒷목’을 열어두어 이들이 나에게 ‘늘’, 그리고 ‘이미 닿아 있음’을 감지하는 것, 그럼으로써 ‘광장’이라는 공적 공간이 수행하는 폭력에 매몰되어버린 ‘사람들’을 비사물의 영역에서 끄집어내는 것. 어쩌면 마윤지의 시집이 전달하는 서늘함과 따스함의 공존은 이 ‘뒷목’의 촉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까지 살펴본 변혜지, 남지은, 마윤지의 첫 시집은 점차 ‘손’을 상실해가는 우리들의 비사물적 세계를 새롭게 사유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시적 모험으로 다가온다. 변혜지의 시가 손끝에서 펼쳐지는 ‘완벽한 엔딩’이라는 가상에 균열을 낸다면, 남지은과 마윤지의 시는 아이들의 손과 놀이에 잠재되어 있는 애니미즘적 상상력을 통해 ‘생명과 비생명’, ‘사물과 비사물’, ‘존재와 비존재’의 이분법을 넘어 이들의 공거(cohabitation) 가능성을 드러낸다. 변혜지, 남지은, 마윤지의 시는 “‘비사물의 디스토피아’에서 시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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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황성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아침달, 2024)를 열면, 일상과 환상이 정밀하게 직조된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쉽게 의미화되지 않는 문장들, 때로는 잔혹동화처럼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들이 마치 타인의 꿈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생경함을 불러일으킨다. “의미를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의미를 만드는 방식”(「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이라는 표제작의 한 구절을 통해 유추해본다면, 시인이 그려내는 세계란 소거된 의미의 빈자리에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이 들어선 비정형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꿈의 주인공은 아이(소녀)이거나 혹은 아이의 상태에 머무르는 어른으로 추측된다. 가령 이 시집에 첫 번째로 실린 작품 「쓰레기 소녀」에는 현재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장난감인 ‘나’가 등장한다. “처음 밀봉에서 나를 꺼내던 기대에 찬 손들”은 ‘나’가 한때 근사한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암시하지만, “누군가의 파티에서/달콤한 케이크와 함께 그이의 집까지 들려갈 줄 알았”던 화자의 기대는 폐기되는 고통과 함께 좌절되고 만다. 낡고 버려졌지만 여전히 ‘소녀’의 상태를 유지하는 장난감. 시간의 흐름을 기묘하게 빗겨난 ‘쓰레기 소녀’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과거에 조난된 채 “꿈속과 꿈 밖 사이를 미끄러지”(「소라게 시계」)듯이 걷는다. ‘소녀’의 의식을 장악한 과거는 시집에 빈번하게 출몰하는 ‘어머니’와 연관이 깊다. “어머니는 간간이 나타나서/늘 그랬던 것처럼 다가오지 않았다”(「철부지 토네이도」)와 같은 고백적 언술로 전달되듯이 어머니는 ‘나’에게 한없이 냉담할 뿐만 아니라 온몸을 동반해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다. 어머니는 “내가 제대로 묻혔는지 봉분을 발로 밟아 다지고 또 다”지며 ‘나’를 더욱 견고하게 매장시키고(「이토록 아름다운 소녀 대잔치」), 그의 손목은 “내 목을 조르던 마지막 모양 그대로 굳어” 있다(「언니, 엄마는 아직도 사과를 싫어해?」). 목을 조른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의 모습은 목줄에 묶인 ‘개’의 몸부림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가끔 목줄을 찬 채로 높이 뛰어오르면/허공의 목을 캑캑 조르는 재미가 있었다”(「개자식 여러분」), “개는 허공 속으로 혀를 내밀어/양쪽 입가를 천천히 핥아 내린다”(「개 한 마리의 지구력」)와 같은 대목에서, 허공을 향해 뛰어오르고 혀를 밀어 넣는 ‘개’의 유희는 목줄의 반경과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물론 황성희의 화자가 어머니의 폭력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시 「손목 걱정」에 이르면 애정을 향한 딸의 갈망은 증오로 돌변해 어머니의 손목을 자르는 잔혹함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냉정한 어머니는 자신의 손목이 잘려나가는 순간에도 “그 흔한 애원”은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다. “어쩌면 나의 소원은 불편이라도 되고 싶은 것이었나/못 견딜 불편이 되어서라도 어머니께 해결되고 싶었나”라는 화자의 나지막한 읊조림에는 차라리 성가신 존재가 되어서라도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자 하는 딸의 절박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렇듯 황성희의 시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어머니와 딸의 폭력적인 관계는 다만 개인이 겪는 고통의 차원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상징질서를 철저히 내면화한 어머니는 딸을 통제할 수 있는 소유물로 간주하며 명령을 내린다. 상징질서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는 ‘소녀’의 혼란스러운 발화는 상징계의 언어를 체득한 어머니가 휘두르는 동일시의 폭력에 기인한다. 그런데 황성희의 ‘소녀’가 지닌 특성은 어머니에 대한 반발과 저항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잡성을 갖는다. 사랑과 분노, 연민과 서글픔이 어지러이 뒤섞인 ‘소녀’의 감정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못한다. 예컨대 「언니, 엄마는 아직도 사과를 싫어해?」의 화자는 어머니와 “달지도 시지도 않은 덜 익은 사과 맛 같은 대화/이상한 맛이 나면 씹다가 뱉기도 하는 그런 대화/그래도 나는 계속 사과를 내밀게 되는 그런 대화”를 나눈다. 거듭 중단되는 어머니와의 대화는 ‘덜 익은 사과’의 맛처럼 떫고 불쾌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사과를 내밀”며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나아가 화자는 “뜯어낸 어머니의 손목을 징표처럼 목에” 걸고 “그래도 좋아 드디어 어머니의 손을 가졌으니까”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손은 ‘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부위인 동시에 ‘나’가 그토록 갈구했던 애정과 온기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을 ‘징표’로 박제하고 간직하려는 화자의 페티시즘적 행위에는, “나와 달 사이/나와 별과 태양 사이”(「철부지 토네이도」)의 아득한 거리를 초월해 어머니에게 닿고자 하는 딸의 염원이 잠재해있다. 눈에 띄는 점은 이 시집에서 어머니의 폭력과 함께 발현되는 ‘소녀’의 애증은 자신을 비롯해 우리를 억압하는 세계의 질서를 향한 분노로 점차 확장된다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이 세계의 자본을 지켜볼 것이다/동전 하나에서 시작해 이제는 암호가 되어가는”(「관찰자 시점」)이라는 구절을 통해 언급되고 있듯이, 황성희의 화자가 목도한 세계는 암호처럼 은밀하게 위장된 자본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한밤의 무인 편의점 앞에서” 일자리를 잃고 쓰러지는 노동자(「관찰자 시점」), “어느 나라의 침공이 방영되”는 텔레비전(「우리 사이에 통용되는 기법」), “내가 판 무기로 다친 아이들에게 내가 모금한 돈으로 우물 파주고 학교 지어주고 아이들은 그런 후원자님께 감사의 편지를 쓰고, 다음 날이면 온정의 폭격으로 없어지는 마을”(「창작의 시대와 새의 절망」)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풍경을 이룬다. 진보와 발전의 논리가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돈으로 은폐하는 알량한 위선의 세계. 시인은 이곳의 ‘관찰자’를 자처하며 도처에 널린 폭력을 끝끝내 응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질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황성희의 문장들이 난해함의 장막을 뚫고 진솔한 고백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시인이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되묻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를 거대서사로부터 소외당한 열등생”으로 인식하는 황성희의 화자는 자신이 “거대서사를 학습하고 구사하려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고민 속에서 “거대서사 대신 트렌드를 말해야 한다”(「소련 사과와 옥희 선생」)는 시인의 현실에 서글픔을 느낀다.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어디서 강의를 하는지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개인 사정으로 인한 결투」)를 걱정하는 시인은 “내가 살아온 시절은 뚜렷하긴 했지만/누구도 그 앞으로 불러세우지 못했다”(「태양 아래서의 성찰」)는 사실에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시 쓰기에 대한 시인의 치열한 자의식은 이 시집에 등장하는 또 다른 시적 주체인 존재인 ‘김’을 통해 구체화된다. “살롱과 인문을 좋아하고 전쟁은 싫어하나 전쟁사에는 해박하고 혁명에는 문외한이나 혁명사에는 두각을 나타”(「김의 신냉전 수법과 간호사의 의문 세계」)내는 ‘김’은 현학적인 지식에 도취된 자이기도 하고, “되찾은 자신의 안정을 생각”(「개의 희생」)하며 사소한 일상에 안주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허공을 개간하여 사과나무를 심는” 허무맹랑한 연구에 매진하며 “사과나무를 심기 위해 사과나무를 뽑고 다니는 기행으로/멧돼지보다 더한 농장의 골칫덩이가 되는”(「멧돼지보다 김」) 자이기도 하다. 희극적 인물인 ‘김’은 현실의 질서를 위배하는 광인이자 시인의 자아를 대별하는 분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세계와 내가 머물러 있는 세계는 서로 달랐다/나의 질병은 이 둘 사이의 거리에서 비롯됐지만”(「산타의 세계」)이라는 황성희의 고백은 그의 시가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절박하게 헤엄치는 시인의 (불)가능한 몽상임을 함축하고 있다. 암호화된 폭력의 불투명성과 비가시성 속에서 시적 분투는 과연 가능한가. 이 시대의 시인이란 목줄에 묶인 채로 허공을 향해 추락이 예정된 도약을 반복하는 몽상가에 불과한 것인가. 긍지와 수치, 분노와 절망이 교차하는 황성희의 자의식은 시집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알몸’의 형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알몸’의 광인이 발설하는 언어가 다만 난해한 꿈 안에 고립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작고 단단한 두 개의/동그란 세계를 선물해주고 싶은 이유”(「손바닥을 생각하는 이유」)가 있기에 시인은 시를 쓴다. 자신의 문장들이 현실 너머의 세계를 응시할 수 있는 두 눈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헐벗은 채로 허공을 개간하는 광인의 노역이, 닫혀 있던 우리의 영토를 조금씩 넓혀간다. 추천 작품: 「사람으로 지낸 어느 한 해」,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 「관찰자 시점」
정은기 시인의 첫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걷는사람, 2024)에는 유독 ‘얼굴’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본래 얼굴은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개인성의 표지이자 소통의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시인의 ‘얼굴’은 주체의 온전한 존립과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를 지시한다. “눈코입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옮겨 다녔다/바람에 지워지는 모래 언덕처럼”(「숲은 간지러운 걸 어떻게 참지」),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에서 정체불명의 것은 추상적인 내 얼굴뿐이다”(「구체적인 의자」), “있다가 없고, 없다가도 있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현기증」)와 같은 대목들로부터 포착되는 ‘얼굴’의 가변성과 추상성은 완결되지 못한 ‘나’의 취약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철이 벗겨진 대문처럼 내 얼굴에는 푸른 녹이 슬었다 열렸다 닫히며 아무나 드나들었다”(「러시아 소설 같은 밤」)라는 구절로 암시되는 것처럼, 단단히 걸어 잠그지 못한 시인의 ‘얼굴’은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며 외부의 침범을 수시로 허용한다. 통제할 수 없는 타자의 틈입과 함께 균열되는 시인의 ‘얼굴’은 “복수의 나”(「기분 탓」)가 탄생하는 장소가 된다. 건조한 우울을 머금은 정은기의 문장들은 ‘복수의 얼굴들’이 무질서하게 펼쳐진 세계를 배회하는 자의 궤적과도 같다. 그렇다면 정은기의 화자가 지닌 ‘얼굴’이 결핍되거나 분열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년 시절의 고독은 ‘나’가 근원적으로 체험해야 했던 관계의 불가능성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가정과 학교,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나’의 내면은 불신과 상처로 가득 채워진다. “분장한 배우들의 얼굴은 쉽게 금이 간다 얼굴이 깨지면 진짜가 나올까”(「그런 사이」)라는 화자의 물음에는 위장된 얼굴들이 연출하는 관계의 공허함, 그리고 이로부터 촉발되는 고독과 허무가 배어있다. 이러한 시인의 물음은 더욱 내밀한 형태의 관계맺음인 사랑에도 지속된다. 예컨대 「낫」이라는 작품에는 떠나간 ‘너’와 남겨진 ‘나’가 등장한다. “나는 너의 뒷모습이고/너는 여전히 나의 얼굴”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부재하는 ‘너’는 ‘나’의 존재성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마침내 ‘나의 얼굴’이 된다. ‘나’의 존재성을 대별하는 기호인 ‘얼굴’은 이별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너’의 부재를 지시하는 기호로 변주되면서 ‘나=부재’라는 공식을 성립시킨다. 만일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나’의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관계의 불투명성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체로 존립할 수 있는가. 타자와의 조우와 섞임이 ‘나’를 무너뜨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왜 우리는 다가올 고통을 예견하면서도 관계를 부단히 지속하려고 하는가. 장시 「사유지」에서 통증을 수반한 타자와의 섞임은 ‘얼굴’의 균열을 넘어 온몸에 ‘두드러기’를 돋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살갗을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대는 ‘나’는 “이제 시는 그만 쓰자”라고 다짐하듯이 말하면서도 “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를 향해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에겐 점점 팽창하는 그림자와 갈피없이 흩어지는 고백들만이 남는다. 시인은 ‘얼굴’을 통해 관계를 쌓고, 그 허물어짐에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연약함을 차분하게 응시하는 듯하다. ‘얼굴’을 통해 구체화되는 ‘나’의 존립 불가능성은 시인의 발화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나는 생활의 어려움과도 연결되어 있다. 「얼룩, 얼굴」이라는 시에서,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집 안을 구석구석 조”이는 ‘나’의 행위는 어떻게든 생활을 유지하고 지탱해보려는 노력을 암시한다. 그러나 번듯하게 꾸며진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바라보는 화자는 이내 “어디에도 숨을 곳이 보이지 않았”음을 덤덤하면서도 서글픈 어조로 고백한다. “전염병처럼 얼굴이 따끔거린다”라는 화자의 언술을 통해 전달되듯이, 가족이자 남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은 ‘얼굴’에 조금씩 전해져오는 통각으로 뚜렷이 각인된다. 이러한 자조는 “지금까지 내가 쓴 계약서는 모두 무효가 되었고”(「누구나 다 하는 생각」)라는 다른 시의 한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집을 얻거나 직장에 다닐 때, 심지어는 단 한 편의 시를 잡지에 실을 때조차 우리는 계약서를 쓴다. 사회적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를 상징하는 계약서는 ‘문서화된 얼굴’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평생 써온 ‘계약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는 사실은,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시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드러낸다. “요즘은 출신이라는 말도 잘 안 쓰는데 저에게는 죄책감이 큰 말이거든요 시인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빠 말입니다”(「오전의 아이는 한밤중에 문장이 되고」)라는 진솔한 고백을 읽으며, 이 시대에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는 화자의 씁쓸한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시인이라는 직함은 돈이 최우선의 가치로 변질된 세상에서 문학의 순정을 지키려는 자만이 쓸 수 있는 숭고한 ‘관사(冠詞)’일까, 혹은 평범한 일상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이방인을 지칭하는 단어일까. 아들이 시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과 맞닥뜨린 ‘나’는 무력하기만 하다. 화자는 ‘이력서’를 품에 안고 하루 종일 집 밖에서 방황하며(「변명」), “아직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었군요”라는 ‘미국 유학파 출신’ 면접관의 차가운 물음에 위축되고 만다(「인터뷰」). “세수하는 얼굴은 오늘의 방향을 묻”(「기분 탓」)지만,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앞에서조차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시집 전반에 감도는 소외의 윤곽은 “숨을 쉴 때마다 말라 가는 얼굴”과 “나를 뱉어내는 재채기”(「나의 폐」)의 건조함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얼굴’의 균열은 현실의 냉혹함 속에서 좌절을 겪어야 하는 시인의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시인의 좌절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립적인 개인(나)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동자가 되어 세속적 원리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다. 이 세속적 원리를 거스르는 아이러니한 노동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 교환가치로 도저히 환원될 수 없는 노역, 즉 현실이 무용(無用)하기 짝이 없는 노동으로 규정한 ‘시 쓰기’를 통해 시인은 유용성만을 뒤쫓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한다. 예컨대 정은기의 시에서 목적지향적인 삶의 형식은 ‘나’의 존재성을 뒤흔드는 폭력으로 간주된다. “나는 목적지와 같은 말을 믿지 않는다/삶을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시간이라 설명하는 것은 운전수들의 말이다/누군가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자의 변명이거나/이를 꽉 물고 그 누군가의 속을 휘저어 놓는 자들의 습관이다”(「비슷한 말」)라는 대목에서처럼, 정은기의 화자는 맹목적인 성취만을 강조하는 세계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이 세계를 장악한 ‘운전수들’은 목적지를 설정하고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이기적인 삶이 마치 자명한 원리이자 인간의 본성인 양 설파한다. ‘운전수들’이 삶의 방향으로 제시한 이기심은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고 휘젓는 일마저 합리화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삶의 방식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정은기의 시에 나타나는 ‘얼굴’의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은 단순히 ‘나’의 왜소한 자아를 표상하는 데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균열된 ‘얼굴’은 인간의 본성을 악(惡)과 이기심으로 규정하는 세계와 불화하면서, 기꺼이 그 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자의 초상이다. ‘얼굴’은 현실의 감관(感官)이기에, 정은기의 시는 훼손된 ‘나’를 고립시키지 않는다. 시인은 현실의 고통과 상처를 묵묵히 감내하며 어두운 상흔으로 응결되어 있던 문장들을 조심스레 꺼낸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문장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기를, 타자의 상처를 섬세하게 보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비록 “유리보다 쉽게 부서지는 주먹과 머리로,”(「인터뷰」) 견고한 현실의 벽에 몸을 부딪는 ‘불가능한 투쟁’일지라도. “들켜버리기를 기대하며 꼭꼭 숨었다 발각되기만을 바라면서 가슴을 두드렸다”(「꼭꼭, 숨어라」)라는 표현에는 열림과 닫힘이 아이러니하게 교차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깃들어있다. 그의 문장에 고인 따뜻함과 섬세함이, 건조하게 닫힌 우리의 ‘얼굴’을 열어내는 원동력일 것이다. 추천 작품: 「누구나 다 하는 생각」, 「사물의 방향」, 「건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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