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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지션 | 2024년 봄호(제45호)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때 ─ 양안다 『몽상과 거울』(아침달, 2023)

황사랑 문학평론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에 대해 쾌감을 느끼며 모방을 통해 배우는 것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본다고 말한 것을 상기해볼 때, 인간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은 카타르시스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양안다 역시 시 창작의 즐거움에 매료된 시인이다. 시를 쓰는 일이 자신에게 가장 재미있고 쓸모 있는 행위라는 말처럼1) 시인은 그의 세계를 차분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넓혀왔다. 그중에서도 최근 출간된 시집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2023)와 『몽상과 거울』(2023)은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시인이 ‘불안 3부작’이라고 명명하며2) 시세계의 변모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면서도 타자와 함께하고자 했던3) 양안다의 변모를 『몽상과 거울』을 통해 만나보도록 하자.
  『몽상과 거울』은 시집의 표지가 거울의 형상을 본뜬 것처럼 제작된 것도 흥미롭지만 시집의 구성 역시 거울과 흡사하다. 목차를 보면 1부와 3부는 2부 ‘가운데에는 거울이 있다’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거울 안의 우리, 3부는 거울 밖의 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먼저 살펴볼 것은 1부에 실린 ‘우리’에 대한 내용이다. 지금까지 양안다의 시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타자들로 방공호에 모여 함께 망가져가거나(「우리들은 프리즘 속에서 갈라지며(상)」), 함께 누워 세계의 종말을 맞이하며(「내일 세계가 무너진다면」) 무너져가는 세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임을 고백했다. 그러나 최근작에 등장하는 ‘우리’는 윤이나 진, 몬데, 엘리와 같은 완전한 타자가 아닌 분열된 자아의 형태로 나타난다.

로와 이드,
그리고
S는 취한 채로 춤을 추었지. S는 맨정신일 때면 증오하는 이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했다. 당신을 용서하면 내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당신을 착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찢어진 부위를 소독하는 동안에도 S, 나는 너의 불행을 응원했어.
(…)
온통 시커멓게 뒤집어쓰고 알아볼 수 없었다.
잿더미 속에서 나는 나인가. 너는 나와 가까운가.
(…)
손거울을 깨뜨리고
이것 봐.
이것이 너다.
그리고 나다.
우리는 분열한다.
네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면
우리가 달려간다.
우리는 분열한다.

- 「실패한 룸펜들의 밤」 1 부분


  위의 시는 직접적으로 로, 이드, S, 그리고 ‘나’가 동일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은 한 공간에서 취한 채로 춤을 추는데 이때 술과 춤은 서로 다른 자아들을 묶어주는 매개로 작동한다. 술과 춤에 의해 로와 이드, S와 나는 섞여간다. ‘나’는 로와 이드의 손목을 소독하며 그들의 삶에 끼어들고, S의 불행이 계속되기를 바라거나 그들의 “춤을 보다가 기절하는 일을 삼켜내”는 것이 그 예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술에서 깨어나야 하고 댄서들도 언젠가 스텝을 멈춰야 한다. 분열된 자아들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술과 꿈이라는 약한 결속력으로 묶여있기에 그들의 결말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를 묶어주던 결속이 깨지는 순간은 그들을 담고 있던 거울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라캉은 “분신들의 출현에서 거울이라는 장치의 역할에 주목한다면 거울 이미지는 가시적 세계의 문턱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4) 이를 생각하면 양안다의 시에서 나타나는 거울이 자꾸만 ‘나’에 의해 깨지는 것은(내가 손거울을 내리쳤습니다. - 「데크레센도」 1 ) 상상계를 떠나 상징계로 이동하려는 주체의 고투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양안다 시의 주체가 극장, 꿈, 디스토피아적 세계 등에서 머무르고 있었다면 이제 주체는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분열된 자아와 신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그를 떠나 진료를 받고 있는 현실로 돌아오고(「성냥」 1 ), 연인과 함께 춤을 추다가도 고통을 겪으며 꿈에서 깨어나고(「목련밭」 1 ), 서로의 품을 파고들면서도 반지하에서 깨어나게 된다.(「돌림 사랑과 절망 노래」 1 )

나는 꿈에서 쫓겨난 사람이구나.
밀물에 떠내려온 유리병처럼…… 육체가 망가지도록 춤출 때마다
나의 영혼은 병 속의 편지처럼 떨고 있었습니다.
(…)
마지막 꿈입니다. 이국의 풍차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초원입니다.
당신은 나를 가두지. 가슴팍에서 나는 익사합니다. 나는 죽었어요.
죽은 나를 껴안고
당신이 울잖아요. 죽으려면 나가 죽으라고 말하더군요.
(…)
꿈 바깥으로 달려갑니다. 우리의 합주가 끝나니까
관객들은 손뼉 치며 환호하고요.
음악이 여기서 멎습니다.
그런데 부서진 건 나 혼자였어요.

- 「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 2 부분


  3부에 실린 작품들에서도 꿈 밖으로 나오게 되는 화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다정한 너를 보며 죽음 충동을 억제해왔다. 잠에 들면서도 나의 손을 잡아주던 너로 인해 나는 “죽고 싶은 생각을 삼”키며 너의 곁, 즉 꿈속에 머물렀으나 마지막 꿈에 다다른 순간 너의 품에서 죽음을 맞는다. 흥미로운 것은 시의 화자가 꿈에서 나오게 되는 방법이다. 1부의 화자가 거울을 직접 깨뜨리며 현실로 돌아오는 능동적 방법을 취했다면 3부의 화자는 현실로 나오게 된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화자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고백하며(나는 아무것도 못 해요.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장작 대신 나를 던져줘요. -「실패한 룸펜들의 밤」 2) 자신을 꿈에서 추방된 피해자로 여긴다. 너에 의해 꿈 밖으로 던져지듯 나오게 된 화자는 더 이상 꿈의 세계에 속하지 못하게 된 것에 절망하고 불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으며(나의 생각은 뒤섞이고 흔들리고 있었다. 두 발은 비틀거렸다. -「꿈 일기」 2) 거짓을 일삼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는(「돌림 사랑과 절망 노래」 2) 추방자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회피적인 태도의 화자의 모습은 1부에서 보여준 화자의 모습과 상반되지만 그렇기에 이 시집은 거울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다. 같은 대상을 비추면서도 좌우가 반전된 거울처럼 세계를 부수고 자아를 분열시키는 ‘나’와, 자신의 모습을 규정하지 못하고 꿈속에서 쫓겨나는 수동적인 ‘나’는 동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양안다는 상상계에서 나오는 과정을 다각도로 조명하며 주체의 투쟁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안은 자연스럽게 수반된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한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그동안 주체가 의지하고 있던 세계를 배반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양안다 시의 주체들은 가상의 세계에 남을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해보며 불안해하고(「one」 1 ) 자신에 대한 고찰을 멈추며 불안을 떨치려 하는 것이다.(「목련 경전」 2 )
  인간은 “매순간 자살을 통해 자기 세계를 구성”하듯이5) 거울을 깨뜨리고, 꿈에서 추방당한 화자는 홀로 걸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혼자가 된 화자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내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극장, 숲, 꿈, 거울에서 벗어난 ‘나’의 모습에서 가상의 세계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 현실의 삶을 견인하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을 껴안은 화자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 그의 발걸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다.

추천시 : 「실패한 룸펜들의 밤」 1, 「xanax」, 「악보가 육체라면, 음악이 영혼이라면」 2.
  • 1) 양안다,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산문」, 『오늘의문예비평』 112호, 오문비, 2019.3, 126쪽.
  • 2) <문장의소리> 752회, 2023.4.5. https://munjang.or.kr/board.es?mid=a40102000000&bid=0032&act=view&list_no=5432&nPage=1
  • 3) 박동억, 「언어의 소실점」, 양안다, 『숲의 소실점을 향해』, 민음사, 2020, 248쪽.
  • 4) 자크 라캉, 『에크리』, 홍준기 외 역, 새물결, 2019, 115-116쪽.
  • 5) 자크 라캉, 앞의 책,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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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월간 현대시 류수연 서윤후나쁘게눈부시기어둠양안다이것은천재의사랑불안 2025
정원 깨진 조각이 비추는 것 : 박지일, 『물보라』(민음사, 2024) /최하연, 『보헤미아 유리』(문학과지성사, 2024)

깨진 조각이 비추는 것1) 박지일, 『물보라』 최하연, 『보헤미아 유리』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 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은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다.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움직임을 포착한다. 밥을 먹기 위해 손을 움직이거나, 입을 오물거려 씹거나 삼키는 행위 없이, 그러니까 동작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존재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예컨대 「물보라」(15p)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중단전은 하단전과 상단전 사이에 있다"는 것과 "접시는 벽과 문, 어둠과 빛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시인은 이 사실을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니, 중요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모종의 대상에 대한 믿음은 믿지 않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믿음을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기실 불안하지 않으면 구태여 믿지 않아도 상관 없다. 쓴 것은 찢어버리면 그만이듯 믿음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 없이 간다" 당신의 마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이 믿음은 그러니까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곧 '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너를 믿는다'는 말은 '너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하물며 '하고 싶다'는 소망은 "너는 네게 주도권이 없"(「물보라」,p.137)을 때 발생한다. 주도권 있는 자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소망하지 않는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신이 인간을 질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삶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이 그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생과 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라면, 당신은 굳이 살고 싶지 않아도 된다. 굳이 죽고 싶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지 않았다. 즉 당신에게는 삶에 주도권이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살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보라』의 깨진 조각으로부터 나는 살아 있음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말은 "지긋지긋하게도 세상이 좋다"(「물보라」,p.17)는 말이었다. 느리다고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 나는 믿을 수 없다. 방향은 나를 바꾼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없이 간다. - 「물보라」(p.15) 부분  "느리게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은 바로 우리가 그 삶의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감각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과 믿지 않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부딪침'. 그것이 물보라다. 물보라의 사전적 정의가 '물결이 바위 따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이라면, 여기서 방점은 그러므로 자잘한 물방울이 아닌 '부딪쳐' '흩어지는' 데에 찍혀 있다. 흩어지는 것들은 참혹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흩어진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연애는 물보라를 즐긴다. 물보라 물보라. 키스는 섞이는 혀를 잊었다. 머릿속에서 키스는 절단한다 섞이는 혀를 잊은 본인을. 키스와 키스는 멀어지면서 비로소 키스가 된다. 너는 나와 혀를 섞는구나. 나와 멀어지기 위해서. - 「물보라」(25p) 전문  한편 물보라는 물보라를 일으키기도 한다. "연애"는 당신이라는 물보라와 나라는 물보라가 부딪히면서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을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부딪히면서 또 다른 삶을 일으킨다. 키스를 하면 혀가 부딪치고, 나란히 걸으면 손이 부딪친다. 키스는 혀들이 굴곡되어 부딪치고 섞이면서 타액이 서로의 몸으로 흩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부딪침'은 기억을 생성한다. 기억은 발생하는 동시에 '왜곡'된 것이고, 다른 기억들과 '섞이는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키스도, 기억도 이 모든 게 다 물보라다. 따라서 연애란 물보라와 물보라가 부딪혀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일이다.  물보라 없는 물은 고여 있는 물이다. 물이 순환되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번식하는 박테리아가 물을 썩게 만든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물보라는 산소를 공급하고 물을 순환시키며 정화한다. 물이 고여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우리는 그러므로 필사적으로 물보라를 일으켜야 한다. 박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질 하고 달음박질 해야 한다. 시인에게 발버둥질은 시 쓰기이다. 시인은 그가 쓴 시에 주도권이 없다. 이미지는 정해진 그곳이 아니라 사방으로 튀어야만 한다. 시란 깨지고 박살난 그 기록들이 얽히면서, 그것과 독자 각자의 기억이 설키면서 발생하는 무수한 이미지의 사건이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자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날의 기억들을 부수고 날짜를 쪼개는 이 시집의 부록은 특히 그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너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네게 미안하다. 사랑해서 미안할 수는 있지만 미안해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네가 그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순서가 맞다. 그것이 이치다. 한데 왜 그는 계속하여 네 앞에 설까? 네가 그의 앞에 가서 설 때, 그는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는 매번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한다. 네게 미안하기는 한 걸까? 너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다. 너는 그 말을 그 무엇에게도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읽는다. 모처럼 네가 마음속에서 그를 지워 냈을 때 너는 네게 미안해한다. - 「11月4日」 전문 하지만 거기 너는 없다.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초원에 선 울타리만을 보여 주는 거울. 거울은 엄마를 닮았다. 너는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써 본다. 너는 거울로 도망한다. 거울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춘다. 양의 걸음으로 울타리를 향해 너는 걷는다. 양처럼 밥을 먹고 양처럼 뿔을 간다. 그리고 양은 울보다. 울음소리를 들은 거울이 양을 비춘다. 너는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염소가 울타리 안에서 바깥을 찾아 맴돈다. 염소는 울보다. 너는 염소에게 미안하고 양에게도 미안하다.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마침 눈물이 나온 김에 울어 본다. 거울은 바깥과 안을 번갈아 비춘다.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 「11月4.3日」 전문  첫 번째 인용시는 아마도 아직 사랑하는 '너'를 매번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했던" '그'를 이제는 지워 낸 사람의 기록일 테다. 그리고 그 다음 인용시는 그 날의 풍경에 대한 감각의 재구성이다. "그를 지워 냈을 때" '너'가 "네게 미안"한 것은 '너'가 지워 낸 것이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너'이기 때문이다. '너'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 자신이었고, '너'는 그런 너의 모습을 지워서 "네게 미안"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너'와 "네게 미안"하고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너'를 상대하지 않는 '그'가 '너'와 다르지 않다면 '너'는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이다. 그것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추"지만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 '너'는 그렇기 때문에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너'와 '그', 그리고 '너'를 지워 낸 '너'는 각자 그 자리에서 양처럼 염소처럼 울지만, 이미 '너'를 지워 냈기 때문에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기억은 흩어지면서 파편화 되지만 동시에 흩어진 다른 기억의 파편들과 섞이면서 감각적으로 재구성된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들이 부피와 빛깔이 다른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 이제 세상에 물보라 아닌 것 없고 물보라 일으키지 않는 물보라 없다. 우리는 『물보라』라는 물보라가 일으킨 물보라다. 그의 시는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는 그를 살게 한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발버둥질과 달음박질, 그 숨 막히는 고투가 결국 나를 숨쉬게 한다.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 모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이 아니던가요?)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이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라면,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존재 그 너머의 풍경을 모으거나 분산시키는 렌즈에 가깝다. 폭우가 내리던 언젠가 고인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와 함께했던 풍경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벅차오르는 동시에 곧 씻겨져 내려 갈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폭우 이후에 뒤섞인 풍경은 곳곳에 그를 심어두었고, 어디에도 그는 없지만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그 풍경의 파편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시인은 존재의 기억을 무작위로 뒤섞고, 그것을 곳곳의 풍경에 심어두는 것으로 존재의 흔적을 보존한다.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린다 하얗게 낯선 도시의 장례식장 앞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듯 톡 들판과 들판이 이어지는 꽃대의 어디쯤에서 먼저 온 버스에 올라 내릴 곳을 가늠하듯 톡톡 더러는 졸고 툭 누군가는 젤리 한 봉지를 쥐고 있다 처마의 맛 들판 끝에 기차역이 있고 창밖 풍경은 잎맥의 반대쪽으로 달린다 뿌리에서 멀어지면 꽃과 가까워지는 중이니 빗소리를 들으며 종점까지 가기로 한다 젤리를 깨문다 툭 마른 풀잎의 맛, 검은 리본의 맛 들춰보면 남은 물기가 조금은 있으리라 들춰야 보이는 곳들은 발 없는 것들의 무덤- 눅눅하고 달고 창백했다 고인의 얼굴은 잊었다 상주의 이름도 잊었다 양철 지붕 아래 하얀 장례식장을 짓고 긴 객차를 대절해 문상 와서는 홀로 남겨진 사람 꽃대 위로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람이 일자 양철 지붕 한 짝이 날아갔다 양초가 젖는 동안 나머지 지붕을 걷어내고 지붕을 걷는 동안 무릎을 접어 절을 올린다 오금이 축축하게 저려온다 툭툭 혓바늘이 솟아올랐지만 톡톡 양철 지붕이 빗방울을 때리듯이 나도옥잠화 하얀 꽃 안에 길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앉았다가 일어선다 - 「흰꽃」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리"는 이곳은 누군가의 장례식장이다. 빗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 쓸쓸한 풍경은 비가 그치고 소리가 멎으면, 아니 그보다 먼저 빈소를 벗어나면서 이내 잊힐 풍경이다. 존재'였던' 것들의 풍경은 이제 굳이 들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들춰야 보이는 곳들"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흔적을 곳곳에 심어두는 것으로 들추지 않아도 보이는 풍경으로 그것을 재구성한다. 예컨대 양철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는 시인에 의해 누군가 고개를 '툭' 떨구고 졸고 있는 모습으로, 젤리를 '툭' 깨무는 모습으로, 혓바늘이 '톡톡' 솟아오르는 모습으로 치환된다. 말하자면 청각적 심상의 그것이 다양한 시각적 심상의 그것으로 곳곳에 분산 되면서 풍경은 파편화 되는 동시에 보존된다.  한편 어느날 문득 밟히는 "신발 속 모래 한 알"을 두고 "걸을 때마다 소식이 생긴 것 같아" "그냥 두었다"(「보헤미아 유리」)는 시구로 미루어보았을 때 시인은 풍경을 부수어서 재구성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풍경이란 감각하는 자에 의한 기억의 소산이라서, 그 자체로 이미 파편화 된 것이라면, 시인은 그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 자국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존재가 남긴 자국은 그 존재를 온전히 표상할 수 없으나, 흐릿하게나마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자국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깨무는 것이다. 깨물면 대개는 물린 자국이 생긴다. 예컨대 한 계절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으면 그 계절을 이루는 것들을 깨물면 된다. 코너에는 재봉틀이 있다. 꿰맬 수 있는 명암과 꿰맬 수 없는 독경이 바람에 실려 밀려온다. 라일락을 깨물었다. 남천을 깨물었다. 나비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먹으며 딱정벌레가 지나간다. 돌에게 돌을 던진 돌을 향해 개가 짖는다. - 「쉿」부분  여기서 깨무는 것은 무엇을 터뜨리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지워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그 존재에 잠시 닿아 있었음을 그저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모과나무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서 깨무는 것은 시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깨물리는 것과 깨무는 것이 서로의 존재에 닿아야 하는 것이 깨물이라면 시인이 풍경을 깨물 때 그도 그것에 깨물린다. 그러므로 흔적을 남기는 일은 쌍방의 사건이다.  풍경을 곳곳에 분산하고 자국으로 남겨서 그 흔적을 보존하는 시인의 렌즈로 우리는 기억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된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억하고 싶은 어느 날이 있지만 흩어지는 기억을 어찌 할 줄을 몰라 망각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식의 좌변이 망각이면 우변은 반드시 슬픔이 뒤따른다"(「쉬」). 비록 그 풍경이 슬플지라도 '기억되는 슬픔'은 다만 슬프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한 풍경의 파편들을 조금 더 모은 것 같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물보라』의 깨진 조각과, 풍경을 분산하거나 깨물어서 기억하려는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과 폭우 이후에 사방으로 떠내려가는 풍경은 모두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전자는 존재의 움직임이고, 후자는 존재의 자국 흔적이다.  존재 자체로 불안한 우리는 평생토록 무엇인가에 부딪치고 깨지고 발버둥질 하며 살아간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물보라의 자잘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또 다른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보라가 일면서 물은 순환하고 정화되며 생명력을 얻는다. 한편 삶에 폭우가 내린 이후 휩쓸린 풍경들은 곳곳에서 기억의 파편으로 발견된다. 또한 존재와 존재가 맞물리면서 생긴 자국은 너와 내가 살아 있다는 혹은 살아 있었다는 존재의 흔적이다. 깨무는 것과 깨물린 것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결국 움직임도, 자국도 모두 삶에 대한 증명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방증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이다. 존재가 없으면 움직임도 자국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1) 「물보라」(2024) 에서 인용 시편이 「물보라」 연작시인 경우 쪽수만 표기한다.

계간 문학과사회 정원 기억풍경소망불안 2025
황사랑 몫 없는 자들의 광장 : 배수연,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문학과지성사, 2024) /윤은성,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미래의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공간이 주어질까. 기술의 발전으로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대화하거나 가상현실 속에서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미래는 이제 인간에겐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팬데믹을 거치며 깨달은 것은 인간에겐 자신을 보호해줄 사적 공간 외의 공적 공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느리게 걸으며 자연의 변화를 목격하고, 나와 비슷하고도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발견하며, 친밀한 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 말이다.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자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뜻"1)이라는 에드워드 렐프의 말처럼 인간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장소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들은 인간의 삶을 지탱한다. 우리에겐 여전히 장소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많은 이와 관계 맺는 장소이자, 가장 문제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그곳은 단연 광장일 것이다. 그리스의 아고라(Agora), 로마의 포럼(Forum)을 거쳐 현재의 광장은 사람들을 위한 장터부터 공연과 전시, 종교적 행사나 군중의 집회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광장이 중요한 점은 "오늘날까지도 시민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소"2)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나타나는 광장도 현실의 광장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문학 안에는 시대를 반영하고, 시민을 대변하면서도 시인의 시 세계를 드러내는 다양한 광장들이 존재한다. 최근 출간된 배수연의 시집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과 윤은성의 『유리 광장에서』에서도 타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결의 광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랄한 상상력과 단단한 실천으로 이루어진 광장을 함께 거닐어보자. 이분법을 넘는 걸음들  배수연의 세 번째 시집은 동화적인 상상력이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맥을 함께하면서도 경계가 희미해지는 장소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모두가 혼자 있지만 같은 노래를 듣는 집이나(「모두네 집」), 컬렉션과 컬렉터의 위치가 동등해지는 갤러리(「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청소부와 손님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는 호텔(「마리골드」) 등 사회가 구분해놓은 경계는 배수연의 시에선 무의미한 것이 된다. 청소 노동자와 손님, 컬렉션과 컬렉터와 같이 마주칠 일 없는 이들을 한곳에 배치함으로써 배수연의 시 세계는 만들어진다.  시에 등장하는 동물 타자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거위나 두더지(「모두네 집」), 광대 역할을 맡은 앵무새(「광대 없는 마을」), 컬렉션이 된 갈치와 악어(「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터진 포대 안을 처리하는 비둘기(「개발팀」)처럼 시 속 동물들은 극에 따라 얼마든지 역할을 바꿀 수 있는 배우처럼 시와 시 사이를 건너다니며 경계를 허무는 데 일조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위들이다. 거위는 어린 시절에 함께 놀던 친구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화자의 심술에 낯선 동물이 되기도 하며(「거위와의 목욕」),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다가도 자유롭게 헤엄치며 동물적 특성을 드러낸다(「반짝이는」).  의인화가 일반적으로 부재한 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3)이라면 배수연 시의 동물들은 의인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의인화에 한정되지 않으려는 듯하다.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거위의 말들(“거위 1 나는 돌이 될 수도 있고 풀이 될 수도 있다 물이 될 수도 곰이 될 수도 / 거위 2 나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목수가 될 수도 있다 배우가 될 수도 학자가 될 수도”)처럼 거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면서도 언제든 동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를 보면 배수연의 세계에서 고정된 것이란 없으며 개념들은 넓게 풀어져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날은 약속한 날이었다 높은 빌딩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는데 거위 하나가 일찍 와 있었다 여기 청소 일 알아봤어 번호가 적힌 쪽지를 가방에 접어 넣었다 [……] 거위들과 나란히 책을 읽을 때 거지의 개와 과부의 고양이 그런 건 우화였다 행복한 손님이 많은 곳에서는 청소하지 마 차라리 종합병원은 어때?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부끄러웠고 나와 거위들의 부끄러움은 다르지만 함께 책을 읽었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어서 계속할 수 있었다 -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 부분  그런데 배수연 시의 떠다니는 이미지들 속에서 건져지는 것이 있다. 시인은 의미가 고착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몫 없는 자들의 곁에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공부하며(「독서 모임」), 광대가 받는 박수를 원하는 왕을 만들어내고(「새 하늬 마 높」), 항상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들을 등장시킨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거위들이 선택한 것이 청소부라는 점은 시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된다. 청소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거위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거위와 모과」), 스스로가 청소부에 적임자임을 강조하는 거위의 모습에서 [“누구나 리더가 될 수는 없어요 / 저는 좋은 팔로워, 현명한 팔로워예요”(「모두네 집」)] 그들은 언제까지나 청소부의 자리에 머무르며 사회가 원하는 노동을 제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하지만 줄을 잘 서는 거위들과 마주칠수록(「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2」) 화자의 부끄러움은 배가된다.  앞서 인용한 시에서 화자가 거위와 마주친 곳은 높은 빌딩의 근사한 식당이다. 식사를 즐기는 화자 앞에서 거위는 장소에 개의치 않고 “청소 일”을 알아보았다며 말을 건넨다. 어디서든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에게 높은 빌딩은 인간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거위와 함께 읽은 책의 주인공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작곡가가” “시인이 아니라 화가가”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며 이루지 못한 꿈을 갈망한다. 하지만 거위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관심 밖의 일이며, 사람들이 부와 행복을 과시하는 곳이라도 거위에겐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거위는 착취 구조에 무지하기에 역설적으로 착취 구조에서 해방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거위를 보고 죄책을 느끼는 것은 화자이다. 화자는 청소부로 살아가는 거위 앞에 항상 손님으로 누군가의 노동의 혜택을 누려왔다는 부끄러움, 행복한 이들 사이에서 일할 거위의 불행을 단정 짓는 편협함에 대한 부끄러움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은 화자를 수직적 공간에서 내려와 거위와 누울 수 있는 수평적 장소로 이끈다. 경계를 구분하는 수직적 문법을 탈피하고 무해한 거위와 누운 곳이야말로 화자가 원하는 장소일 것이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는 행동을 함으로써 거위와 화자는 우화가 아닌 현실에서 함께하게 된다. 서로 다른 부끄러움을 견디며 거위들과 책을 읽는 것, 근사한 곳에서 내려와 청소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정기 모임」), 기록되지 않는 이들을 조명하는 것을 [“동대문 미싱사는 이런 말을 하지 않고, / 기록되지도 않는다”(「일요일」)] 몫 없는 자들에 대한 애정4)이 아니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항상 의자에 앉을 수는 없어서 모자가 발명되었어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나는 모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많이 알아 [……] 더 좋은 모자를 줘, 더 좋은 의자를 줘, 더 멋지고 더 가치 있는! 진실을 잘 이용해야 해 진실은 쉽게 녹지 않으니까 진실을 휘젓다 지친 사람들 그들의 비석 앞에 꽃과 모자가 놓여 있네 모자를 맞대고 오래오래 행진했어 실패라는 생각에 괴로울 때면 종종 모자 안의 코끼리를 쓰다듬지 인명 없는 미술사를 읽는 기분으로 흰 연기로 색색의 카펫을 짜는 기분으로 해방되는 기분으로 - 「모자의 기분-광장에서」 부분  거위와의 만남에서 보이듯 배수연은 경계를 구분하고, 계급을 나누는 이분법을 탈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시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모자는 의자를 대신해 사회적 계급을 상징하게 된 물건이다. 기존의 세계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만 의자를 허락하여 수직적인 계급 구분을 뚜렷이 했다면, 모자로 구분되는 세계는 모두를 광장이라는 수평적 공간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기존 체제와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세계가 계급을 나누는 방식이 더욱 교묘해졌을 뿐, 계급은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있다. 되레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모자는 어디에서든지 서로의 계급을 확인할 수 있어 모자를 향한 욕망을 부추기고, 누구나 멋진 모자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더 많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모자가 전부인 세계는 군중을 어리석게 만든다. 사람들은 현재의 모자에 만족하기보다 더 좋은 모자를 쓰기 위해 아우성치고, 이미 멋진 모자를 가진 왕과 판관들도 자신의 모자에 만족하지 않는다. 모자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려 했던 이들은 죽고 묘비만이 남아 세계의 폐쇄성을 확인시켜준다. 화자가 서 있는 광장은 이 모든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혼돈의 장소이다.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등 모자를 바꾸기 위해 모여든 이들과 죽은 자들의 묘비, 모자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헹가래하는 군중이 함께하는 어지러운 곳에서 화자는 거위와 함께 책을 읽었던 것처럼 이들과 모자를 맞대고 행진한다. “실패라는 생각에” 무너질 때마다 모자 안의 코끼리를 만지며, 상상력에 기대어 다시금 몫 없는 자들과 함께 걷는 것이다. 성호를 긋는 마음으로 걷고 또 걷는(「예술가」), 몫 없는 자와 거위들을 하나로 잇는 마음은 이분법에서 해방될 하나의 미래를 바라며 행해진다. 그래서일까. “나비 떼가 번쩍 곰을 들었으면 좋겠다”(「산책」)는 화자의 고백처럼 작은 발걸음들이 모여 이분법을 부수는 미래를 그리게 되는 것은. 우리는 배수연의 시를 통해 이분법을 넘어 화자와 거위, 두더지, 악어, 앵무새 들과 함께 행진하는 광장을 그리게 된다. 아무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아무나와 걸을 수 있는 광장을. 희미한 연대의 광장  윤은성의 두 번째 시집은 투명한 눈물들로 이루어진 슬픔의 기록 같다. “슬픔을 얼굴에 눌러 붙인 물고기들”(「둑과 빛과 물의 시」)처럼 “어디에서도 잠은 슬펐다고”(「멀다」) 고백하며, “슬픔으로 빌린 / 집”(「영원과 하루」)에 초대되는 화자를 보면 우리도 슬픔의 한가운데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감지하는 깊은 슬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이 목격한 죽음과 체험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와야 하는 소년 소녀 들의 이야기부터, 여름날을 채우던 “죽은 교사들”(「우리의 물이 우리를」)의 소식, 비난받는 소수자들과 함께하며 “먼 / 미래를 보여준 사람”(「좁고 긴 옷」)의 부고와 “크레인도 아닌 전신주 위에 올라가”(「창문을 열다가」) 목소리를 내던 여자의 이야기를 화자는 지나치지 못한다.  또한 시인에게 비인간 존재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의 시는 고양이의 얼굴을 사람의 얼굴과 겹쳐 보게 하고(「선반 달기」), 닭이나 소, 돼지와 같은 비인간을 조명하며(“닭과 소와 돼지가 차례로 앓거나 / 물에 잠겨 죽거나 / 한꺼번에 묻히거나”, 「행사장」), “너무 크거나 작아서 / 발견되지 않는 죽음들”(「둑과 빛과 물의 시」)에게 자리를 마련해준다. 마음을 쏟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시인이 겪게 되는 슬픔이 더욱 깊고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전제해야지만 평등이 가능하다고 본 것5)처럼 윤은성은 사회적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뿐 아니라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비인간들을 동일 선상에 놓으며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실천으로 엮인 시는 슬픔을 껴안은 채로 행동하는 화자를 만들고(“지금 아프다고 우리 함께 울고 웃고 // 무슨 이상한 계절을 불러오게 되더라도 // 외쳤어야 맞아”, 「확성 빛 겨울」), 우리는 윤은성의 시를 통해 문학과 정치가 불가분의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기억하니 우리는 음악과 지구과학을 같은 날 배우고 함께 옥상에 올랐잖아 구름 사이로 빛이 보이면 무언가 알아챈** 것만 같은 기분도 들고 소나 강아지의 이마를 만지는 것 같은 부드러운 떠가는 시간을 촘촘히 알 것 같았잖아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면서 엎드려 울기밖에 할 수 없더라도 시간에 맞추어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었잖아 그때도 이걸 알았던 기분이야 내가 사는 도시에선 자주 광장으로 사람이 모이고 흩어져 계속 말하려고 하는데 어쩐지 여기에서 외치는 기도가 멀리까지 가닿지 못하는 기분도 들고 [……] 내 목소리가 지상에서 또 지하에서 잠시 울리고 사라져 우리가 붙들고 모이는 게 미래를 등지고 선 사람들이 몸을 되돌려보려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조용한 기도라고 하자 유리와 안개를 동시에 깨뜨리고 밖에서 안으로 집어넣는 손들을 알아채려 잠시 모였다고 하자 * 교사 보란을 통해 과학 교과목이 따뜻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함. ** 동물해방 운동을 했던 혜린과의 대화에서 “알아채다”라는 말을 전해 받음. - 「유리 광장에서」 부분  하지만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해서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는 위기들에 마음을 쏟고 행동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또 외로운가. 위의 시에서 시인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친구와 함께 보낸 다정한 과거를 떠올린다. “부드러운 / 떠가는 시간” 속에서 무언가 깨달은 것 같으면서도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고, 서로에게 의지하여 보낸 기억들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화자는 광장에 선다. 그러나 화자가 처한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다. 현재의 화자는 엎드려 울기만 했던 과거보다 자주 목소리를 내고, 기도도 해보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미래, 기대할 수 없는 희망에 화자는 “무엇을 더 느끼고” “나이를 더 먹어야” 하느냐며 절망에 빠지는 듯하다.  이때 화자가 선 광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윤은성은 첫 시집 『주소를 쥐고』(문학과지성사, 2021)에서부터 광장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었는데 첫 시집의 광장이 쓸쓸함이 깃든 곳이거나(「비단길앞잡이」) “살갗을 할퀴는”(「장미 광장」) 상처를 내는 곳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의 광장은 희미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광장은 "대중에 의해 정의되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6)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쉽도록 도시의 중요한 장소에 위치한다. 많은 장소가 그러한 것처럼 광장의 성격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며 사람이 모이지 않은 광장은 빈터일 뿐이다.  그런데 몫이 없는 자들을 위해 외치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모으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생태주의에 관심을 보이지만 다른 사회적 갈등과 다르게 생태주의는 대중의 결집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7)는 말처럼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화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유리를 부수고 화자의 곁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광장은 공공장소이지 거주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함께 모인 이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산되고, 화자의 목소리는 유리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진다.  이같이 사람들 사이의 단절과 연대의 불안정성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유리 광장에서 시인은 홀로 허망함과 미움을 삭일지언정 희미한 연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안에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더 많은 참여를 만들어내고, 더 오래 참여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아는 듯하다. 때문에 무자비한 손들을 알아채기 위해 모인 광장에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대오고, 조용한 기도로 사람들과 연결된다. 이것이 윤은성의 시가 몫 없는 자들을 위한 최전선에 서 있으면서도 온화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너무 멀리서 헤맨 날이면 자다 깨어나 안을 것을 찾아서 내가 얻어 온 모든 체온이 도는 몸을 천천히 뻗어봐. [……] 살아 움직이는 우리가 서로를 알아채며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안아주고 있었어. 파도보다 오래 더 오래 다시 모르는 아픈 물결까지 붙잡아주고 있었어. 안다고, 안다고 붙잡아주고 있었어. - 「사슴뿔청각」 부분  시인에게 광장은 그가 지키고자 하는 생태계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는 물의 광장으로서의 바다가 나타난다. 바다는 새로운 물결이 기존의 물결과 더해져 ‘하나의 물결’을 만드는 끊임없는 생성의 장소이다. 그러나 투명한 파도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시인은 바다의 포용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물고기들의 떼죽음과(「둑과 빛과 물의 시」), 조개들의 죽음, 바다에 터를 둔 사람들의 이주는(「행사장」)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일이다. 바닷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과 바다 생물의 사체가 함께 놓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현실에서 화자는 바다가 더 나쁜 쪽으로 변하고 있음을 어린 청각을 통해 목도한다. “자라다 말고 색이 변하”(「사슴뿔청각」)는 어린 청각의 현실이 말간 얼굴로 첨벙거리는 아이들의 미래인 것만 같아 화자는 두려움에 떨고 “시를 잃어버린 것 같”(「창문을 열다가」)은 기분에 휩싸인다.  두렵고 슬픈 마음에 무너져 내리는 시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광장에서 만난 동료들이다. 슬퍼하는 시인에게 전해진 체온과 전달된 언어(「생일 세계 공원」) 그리고 그림자(「모르는 일들로부터」) 등 동료들에게 받은 것들은 시인을 허무의 파도에 쓸려가지 않게 하는 안전망이 된다. “파도보다 오래” 화자를 끌어안는 포옹을 통해 시인이 낙담과 허무에 잠식되지 않고 일어날 것을 예감할 수 있다.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안아주는 연대는 약하지 않다. 서로의 고통까지 보듬어줌으로써 희미할지언정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동하는 궤적들의 묶음으로서 우리의 ‘함께 내던져져 있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8)이라면,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은 우리가 ‘지구에’ 함께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에서 우리는 모두 몫 없는 자들이 된다. 사회가 정한 계급, 성별, 종차를 넘어 우리는 무너져가는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땅에 속한 자들 The Earthbound’9)이 되고 그제야 우리는 몫 없는 자들의 슬픔을, 언어가 없는 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을 견디고 묵묵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시 앞에서 나는 기꺼이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서 있는 자리를 조심스럽게 확인하며(「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곧은 마음으로 걷는 시인과 다양한 생명체들을 잇는 광장에서 만나고 싶기에. 시인이 그리는 안전한 미래에 멸종하지 않은 우리가 있기를 바란다. 1)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김덕현 외 옮김, 논형, 2005, p. 25. 2) 프랑코 만쿠조 외, 『광장』, 장택수 외 옮김, 생각의나무, 2009, p. 5. 3) James J. Paxon, 『The Poetics of Personif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 13. 4) 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08, p. 11. 5)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길, 2015, pp. 48, 64, 68~69. 6) 프랑코 만쿠조 외, 같은 책, pp. 6, 19. 7)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이규현 옮김, 이음, 2022, p. 13. 8) 도린 매시, 『공간을 위하여』, 박경환 외 옮김, 2016, 심산, p. 284. 9)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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