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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동문학평론 | 2024년 봄호(제190호)

향토 문단을 가꾸는 생태주의적 인식 ― 최영인론

최미선 문학평론

199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05년 『아동문학평론』 신인상 당선(평론부문),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경상국립대학교 강의 경남아동문학상(2005), 이주홍문학상(연구부문,2016), 이재철 아동문학평론상(2019) 등 수상. 창작집:『물갈퀴새와 아기공룡』(2000)『가짜한의사 외삼촌』(2007), 『구쁘다 이야기 열 조각』(2018,공저), 『날아라 푸른 피리 소리』(2022), 『우리의 프렐류드』(2025) 외 평론집 : 『한국 소년소설과 근대 주체 ‘소년’』(2015), 『아동문학 야외정원』(2018), 『어린이를 기다리는 동무에게』(공저,2022)『이원수』(공저,2016) 등. 문협활동 : 한국아동문학인협회, 경남아동문학인협회, 경남문인협회 등 학회활동 : 한국아동문학학회(편집위원), 방정환연구소(학술이사) 등

   1. 들어가며

 

 

  지구 곳곳에서 이상 기후 현상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측을 불허하는 이상기온이 위협적으로 다가오지만, 현상이 지나고 나면 금방 망각하게 되고 대부분 다시 무감각하게 일상으로 스며들게 된다. 어찌 보면 다소 무질서하다 할 수 있는 일상의 수레바퀴에 휩쓸리고 만다.

  지구 환경위기가 문제라는 인식은 확산 되지만, 정작 현재 지구인들은 이 거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 수수방관하고 있는 형국으로 보인다. 거대 문제에 비례해 지구인의 해법과 대처방안은 늘 부분적으로 나타나 보인다.

  인류 앞에 놓여진 이 문제에 대해 작가들은 어떠한 해법으로 주제를 형상화할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지만, 작가란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문제 앞에서 고심하면서 문제 속으로 들어가고자 할 뿐이다.  

  그 중 최영인 작가도 지구 환경의 문제에 직면해 무엇을’, ‘어떻게라는 인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무엇보다 지방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가까이에서 자연을 지켜보며 생태 환경 친화적 시각으로 작품 활동을 견지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최영인작가는 1991경남신문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었고, 같은 해 아동문학평론』(겨울호)에 동시(童詩)로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하였다. 문학 입문기에 있는 대부분의 지망생들이 등단 절차를 마치려고 수년간 습작하며 긴 기간에 걸쳐 지난(至難)한 연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최영인은 같은 해에 동화(童話)와 동시(童詩)를 석권하며 화려한 등단 절차를 이루어냈다. 그 이후 경남문협 우수작품집상(2002), 15회 경남아동문학상(2005), 1회영남문학 동시부문문학상(2017)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작품집으로 동시집 외갓집 가는 기차』(아동문예,2001.), 시화집노란 딸기』(세계문예,2001), 동화집 내키할머니와 오두막집』(아동문예, 2012.), 동시집내 친구가 졌다』(아동문예, 2015.), 환경동화집 마름모 화가와 반쪽이 소나무』(고래책빵,2020.) 등을 상제하면서 작품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남아동문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지역 아동문단 활동을 뒷받침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1)

 최영인 작가는 자신을 소개할 때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서 자랐다는 말을 늘 앞세운다. 최영인의 대다수 동화와 동시에는 자연 친화적 생태 의식이 전면에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남의 수부 도시 창원에서 생업과 글쓰기 외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누구보다 분주하게 살아가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잃지 않고 있다.

  이 글에서는 최영인 작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생태 의식과 자연 친화적 환경과 관련된 작가 인식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아동문학과 생태주의 관련성에 대한 이론적인 배경을 먼저 살펴보게 된다. ‘생태주의와 문학’, ‘생태주의와 아동문학의 친연성을 살펴보면서 지금 이 시대 생태 사상과 생명주의의 필요성과 의미를 상고해 보려는 것이다.

 

 

  2. 동심주의와 생명사상

     

  아동문학 사상에서 생명 사상, 생태주의는 어쩌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체일 것이다. 문학에서 생명 주의는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되는 비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인 현실에 주목하여 인간의 생명적 가치를 제고(提高)하는 문예사상을 일컫는다. 아동문학의 출발점이 동심이고, 동심은 바로 비인간, 반 생명을 경원시하기 때문에 생태주의와 아동문학 사상과는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문학에서 자연(환경)은 단지 인간이 자연(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1차적인 영향 관계를 초월하여 심대한 사상의 저변을 형성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욱이 생명주의는 산업화와 고도성장으로 파생되는 문제의 심각성을 작가들이 예민하게 수용하여 지속적인 진보와 발전에 회의 보이는생태 우선주의로 형상화되었는데,2) 문학 중에서도 특수문학으로 구분되는 아동문학과는 사상적으로 이처럼 일맥상통하게 된다.

 

  근대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개발과 진보의 이데올로기는 철저하게 인간중심주의로 작동된다. 인간 중심의 진보는 결국 자연 착취를 의미하게 되며 생태 위기로 귀결되는 것이다. 즉 생태 위기는 결국 인간의 지배욕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이 변화되는 것과 동시에 본래 인간성의 모습을 잃게 되자 자연 파괴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3)

  생태위기를 이해하려면 인간 욕망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4) 이처럼 무분별한 개발이나 통제받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파생되는 문제, 즉 약자,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은 아동문학 정신의 본질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생태주의는 아동문학 사상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동심에 관한 문제는 아동문학의 초창기부터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에도, ‘동심주의라는 용어가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동심천사주의라는 용어와 결부되어 다소 부정적 개념으로 통념화된 사례도 있다.

  그럼에도 동심 주의혹은 동심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추상적이고 막연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역시 동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동심이 설사 역사적으로 변화 가능한 개념이었을지라도 아동의 시기에 가장 집중해서 드러나는 심리, 생리적 특질이며, 지켜져야 할 가치(필요)에 대해 대부분은 공유하기 때문일 거다.

 

  일본 아동문학의 초창기를 보면 20세기 초 일본의 빨간새(赤い鳥)』동인은 어린이를 어른의 이상으로 삼으며 무구’,‘순진’,‘순수라고 하는 동심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5)

  동심이라는 개념의 이면에는 동심은 어린이를 현실에서 분리해 이상화하는, 현실도피의 관념이며 퇴행의 일종이라는 비판이 존재하고 있다6)고도 했다. 이는 아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역사적 계기에 의해 발견됐다는 사실과도 관련지어 생각해보게 되는 문제이다.7)

 

  정리하자면, 아동문학에서 말하는 생태주의, 생명 주의는 인간 본성의 회복인 것이다. 본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품부를 되찾을 때 자연과 공생하고, 모든 사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아동문학의 본 정신은 여기에 있는 것이며, 아동문학이 끝까지 간직해 나가야 할 문학 정신이기도 하다. 이런 아동문학을 위해 대부분의 아동 문학인들이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생태학의 기본적 정의는 유기체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8) 생태학은 좁은 의미에서 자연과학의 한 분야에 해당하지만, 유기체인 인간의 모습에 관한 연구를 포함하면서 넓은 의미의 생태학은 자연스레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영역까지 확대되어 있다. 한편 동심에 관한 다양한 정의는 공통적인 개념적 요소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동심을 인간이 지닌 마음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9) 동심의 원형적 특성 즉, 동심은 가장 원초적이며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사실은 자연과 공생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의 상태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자연스레 생태학과 동심은 필연적인 관계성을 지니게 되기에 아동문학과 생태학은 친연성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3. 생태 의식으로 살펴보는 작품 경향

 

   환경 문제의 심각성은 당장 지난 계절의 예측할 수 없었던 기상현상만 되짚어봐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덥다거나 이상한파라는 현실에만 주목할 뿐이지 대안 마련이나 대책 수립에 대해서는 아직은 강 건너 불구경으로 여기고 있는 것 또한 문제적 사실이다.  

  작가란 시대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뷔퐁은 문학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했는데, 이처럼 작가는 자신이 살고있는 사회문제를 망각할 수도 없으며, 망각해서도 안 된다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있는 위치에 있다.  

  태생적으로 자연 친화적 성격을 보여주는 최영인 작가는 작품 전면에 생태 친화적 환경 의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 대표적 예가 근작 마름모 화가와 반쪽이 소나무』10)(2020)에 드러나는데, 출간 당시 <생태 환경동화>라는 표제를 사용했다. 환경과 생명 사상에 주목하고 있다는 작가의 의지를 전면에 내세운 기획이다. 그동안 발표해 온 다수의 단편도 생태 환경을 중심주제로 하는 생명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름모 화가와 반쪽이 소나무는 도시 환경이 모두 사람의 편의만을 위해 개발되는 사이에 사람들 곁을 지키고 있는 자연물들이 얼마나 피해를 받게 되며 심지어는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을 견디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동화이다. ‘마름모 화가 아저씨의 아틀리에 창밖에 소나무가 있고, 그 옆에는 대형 환기통이 설치되어 있다. 소나무는 당연히 환기통보다 먼저 거기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소나무가 터줏대감인 셈인데, 건물에 환기통이 필요해지면서 빈터를 골라 환기통을 설치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때 환기통을 두기에 적절한 면적만이 고려되었을 뿐, 주변의 여건은 깡그리 무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환기통이 설치된 뒤, 소나무는 환기통에서 쏟아지는 열기로 반쪽이 말라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보여주는 무신경, 무관심의 한 장면이다. 현대인들이 편의주의를 좇을 때, 소나무와 같은 자연물들이 얼마나 희생되고 있는지 현상을 통해 진실을 말해주고자 했다.

  최영인은 나무를 제재로 채택하기를 즐긴다. ‘반쪽이 소나무에 이어 최근작으로 참나무 삼 형제가 있다. ‘참나무는 상수리를 포함하여 도토리를 맺는 다수의 나무를 지칭하는 만큼, 우리 선조는 이라는 덕스러운 이름을 부여하였다. 수종도 다양하지만, 크기와 모양새도 듬직하며 가을에는 도토리를 풍성하게 맺어 사람과 산짐승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그야말로 나무이다.  

 「참나무 삼 형제에서 떡갈나무, 상수리, 졸참나무 참나무 삼형제중 늙은 떡갈나무가 당하는 수난을 그리고 있다. 마을 청년 달수는 떡갈나무를 베내고 경제 수목을 심으려 한다. 하지만 부뜰 할배는 자신과 함께 자라온 떡갈나무를 지켜내려 하지만, 심야를 틈타 결국 베어지고 마는데, 다음 해 봄 떡갈나무 그루터기에서 새 잎사귀가 돋아나 자연의 생명력은 쉬이 멸망되지 않는다는 생명의 순환을 보여 준다.  

  여기서 짚어볼 문제는 동일한 제재로 서사를 형상화할 때는 정형화의 우를 범하는 실수가 발생 될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식물(나무)의 생태적 속성을 깊이 있게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화 장르에 적합한 시적 환상성승화가 꼭 필요하다.      

  「세상에나 이런 일이에서는 인간의 욕심을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로 마을의 인심마저도 흉흉해지자 이를 보다 못한 도깨비들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환상동화이다. 사람들과 가까운 한국 도깨비를 활용하여 깨우침을 주려는 주제를 흥미롭게 엮었다.  

  「달구」11)는 씨암탉을 화자로 하는 의인 동화이다. 동물을 의인화하는 것은 아동문학에서 언제나 고전적인 기법이고, 어린이 독자에게 전달력도 높아서 작가들이 선호할 수 밖에 없다. 주인 할매가 며칠 집을 비우면서 옆집의 윤석이 할매에게 닭모이와 물을 부탁했지만, 윤석이할매는 끓는 물에 통째로 잡어 넣어버리겠다고 하거나 날개죽지에 주먹만한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마당에 흩어놓은 싸래기가 다 말랐고, 양재기에 물도 말랐고, ‘꼬꼬거릴 힘조차 없어서 허기진 배를 바닥에 깔고 꼼짝 못해서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상태가 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주인 할머니에게 땅을 팔아달라고 득달같이 조르고 있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곧 농촌 피폐로 연결된다. 할아버지의 부재는 농촌 소멸을 급속화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달구는 씨암탉 한 마리가 황폐해져가는 농촌 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표면화되어있다. 하지만 여기서 씨암탉 달구는 곧 주인 할머니와 등치 된다. 씨암탉 달구 = 주인할머니는 이콜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닭장 안 통나무 등거리 뒤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달구의 모습은 머지않은 장래의 주인 할머니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씨암탉 달구의 피폐가 아니라 농촌의 피폐, 농촌의 소멸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탈탈이 채소 밭은 할아버지의 경운기 탈탈이가 농촌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오래동안 병원에서 지내던 할아버지는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걸을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창밖만 바라 볼뿐이다. 그런 할아버지를 위해 빨간 칠이 바래고 타이어에 흙이 잔뜩 묻은 경운기 탈탈이를 창가로 옮기고 짐칸을 채소밭으로 만들어서 병과 싸우는 할아버지의 위안이 되게 하려고 한다. 짐칸 채소밭으로 옮겨진 상추, 쑥갓, 배추, 들깨 이들도 빨리 자라서 할아버지를 위로하자며 합심한다. 사물들과 자유자재로 상호 교감하고 있는 물활론적 사고가 투영된 표현기법이다. 자연물과 함께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기법 또한 유아들이 읽기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글쓰기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딛고 있는 땅은 온통 시멘트에 덮여있고, 산이랑 들판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가는 곳마다 페헤처져 있어요. 우리 같이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자연의 숨결을 한번 들어 보면 어떨까요. 조금 느리면 어때요, 조금 불편하면 또 어때요? 자연과 함께 자연의 품에서 그들이 주는 평화로움을 만끽하며 우리 또한 자연과 하나가 될 때 찾아오는 행복은 어떤 맛일까요? 사람들로 인해 파괴된 자연이 이제 더는 아파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여기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어린이 여러분도 자연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12)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최영인의 환경 의식은 하루가 다르게 시멘트로 숲으로 변해가는 도시 환경에 대한 반성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환경 의식은 동화 뿐만 아니라 동시에서도 삭막한 도시 환경을 비판적으로 보는 데서 나타난다.

 

    작년엔

    놀이터 곁

    미루나무 키가

    제일 컸는데

 

    올해는 졌다

    우리 동네 새로 생긴

    높다란 아파트한테

 

    작년엔

    뒷산에 보름달이

    최고 밝았는데

   

    올해는 졌다

     번쩍번쩍

     아파트 상가

     요란한 불빛한테

        -「내 친구가 졌다전문13)

   

  인용 시 내 친구가 졌다는 도시화로 인해 자연물이 점점 소외되는 현상을 그리고 있다. 작년엔 내 친구 미루나무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컸지만, 올해는 새로 생긴 아파트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또 작년까지는 우리 동네에서 보름달이 제일 밝았지만, 이젠 아파트 상가 불빛이 더 요란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자연물 미루나무’, ‘보름달을 내 친구로 상정하고 있다. 새로 지은 아파트가 아무리 우람해도, 상가 불빛이 아무리 요란해도 내 친구는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한정하고 있다. 특히 미루나무는 제일 큰 것이라서 내 친구이기도 했지만, 새로 지은 아파트는 미루나무 보다 더 우람해도 내 친구의 범주에는 들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큰 것, 높은 것, 힘 센 것을 좋아하는 것은 어린이들이 심리에 내재되어 있는 거인지향 의식의 발현이다. 아직은 작고 약한, 약점을 극복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현상으로도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물이 아닌 인공의 것은 아무리 우람하고 요란해도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자연물에 대한 친화의식, 환경사상을 보여주었다.    

 

 

        마무리

 

   지금까지 최영인 작가의 동화와 동시 주요 작품에서 환경보전과 생태의식이 전면에 두드러짐을 읽어 낼 수 있다. 생태와 환경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한두 해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생태 아동문학에 관심을 보여왔다. 무엇보다 대학원 과정(부산대)을 공부할 때 생태 아동문학논문에 대해 자주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작가는 대표적인 계획도시 창원에서 오래 거주하고 있다. 농업 위주의 성산벌이 공업도시 창원으로 변모하면서 인구 집결지가 되었고, 급격하게 도시화가 진전된 도시 중의 한 곳이 창원이다. 그만큼 지근거리에서 환경변화를 목도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런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작가들은 진실을 말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행정적 주요 결정들은 편의주의를 채택하게 되고, 진실을 찾으려는 목소리는 작고 미미하게 흩어져버리는 게 가장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생태주의나 생명 사상과 관련된 길고 장황한 이론은 결국 인간이 자연환경과 함께할 때 가장 건강하고 자연스럽다는 한 줄의 결론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나무 한 그루 옮기는 데도, 도심 속에 시멘트 건물 하나를 건축하는 데도 주의를 요하는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동심을 빌려서 작가들은 말하고 싶은 거다.

  편의주의가 아니라 생명 주의가 채택되어야 할 필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자칫 황폐해질 수 있는 도시 환경,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잃게 될 인간에 대한 관심은 낮은 목소리일망정 아동문학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말해질 것이다. 그 목소리는 어쩌면 아이의 숨결처럼 작은 소리일 수도 있다. 낮은 속삭임에도 그 진실을 찾아 들으려고 하는 노력은 이제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
  • 1) 이 글은 2023경남문학겨울호 원고를 토대로 최영인의 작품론을 보완하여 완성하였음을 밝혀둠
  • 2) 생태운동은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침묵의 봄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인류 중심적 자연관에 대한 회의와 생태 중심적 자연관의 모색 등으로 환경운동을 비롯하여 생태철학의 발전에도 기여하게  된다. 1962년 발표된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농약 사용으로 생명체들이 사라져 버린 미국 중부의 어느 마을에서 아무런 생명의 소리 없이 다가오는 정적의 봄을 가상적으로 그린 것이다. 저자는 그런 일들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송명규, 『현대 생태 사상의 이해』,따님, 2008, 95.
  • 3) 생태 위기의 근원에 대한 생각은 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심층 생태학작들은 생태 위기의 근원을 인간중심주의라고 간주하고, 사회생태학자들은 사회계층구조, 그러니까 동식물에 대한 지배, 이용, 착취, 파멸을 조장하는 권위주의적 사회구조 때문에 생태위기가 왔다고 생각한다.(송명규, 앞의 책, 95.) 한편 생태 여성주의자들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며, 상대적을 우월한남성은 결핍되고 열등한 여성과 자연을 지배하는 위치라고 간주한다. 즉 생태위기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정정호에코페미니즘」, 『탈근대 인식론과 생태학적 상상력』, 한신문화사, 1997,379쪽 참조.)
  • 4) 일반적으로 생태철학의 범주에는 심층생태학, 사회생태학, 생태여성주의를 포함하고 있다. 심층생태학은 어떤 것도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끊임없는 문제의식과 대안적 삶의 방식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사회생태학은 변증법적 자연주의철학으로 생태적 삶을 유지하려면 급진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생태여성주의는 여성과 자연을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시켜야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 5) 이와 같은 영향 때문에 한국 아동문학의 초창기에도 역시 소파 방정환이 천도교를 바탕으로 동심의 표상을 펼쳤으며, 송완순 등 근대기 작가겸 비평가들은 소파의 아동관을 동심천사주의라는 용어로 평가하기도 했다.
  • 6) 성인(成人)에게서 동심은 회고적인 형상으로 재현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 7) 가라타니 고진은 <아동>의 발견을 <풍경>의 발견과 동일하게 간주하며, 오가와 미메이의 <아동>이 발견된 것이듯, 오가와 미메이의 <아동>을 비판하는 <현실의 어린이> 또는 <진정한 어린이> 또한 발견된 것이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 진정한 아동의 개념이 어떠하듯 아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그는 <아동>에 관한 <>을 운운하기 전에 <아동>자체의 역사성을 볼 것을 당부한다.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도서출판 b, 2010, 163~183면 참조.
  • 8) 아모스, H. 홀리, 홍동식 외 옮김, 『인간 생태학』, 일지사, 1995, 11∼15.
  • 9) 신헌재, 「아동문학의 동심론(童心論) 연구」, 『아동청소년문학연구』12, 아동청소년문학학회, 2013. 신헌재는 방정환부터 시작해서 윤석중, 이원수, 이오덕, 석용원의 동심론을 차례로 정리하며 제시하는데, 이들의 동심론에는 공통적으로 동심이 원초적이고 순수한 마음이라는 시각이 나타나 있다
  • 10) 최영인, 『마름모 화가나무와 반쪽이 소나무』(고래책빵, 2020)에는 표제작 마름모 화가나무와 반쪽이 소나무초록나라 회색 나라」, 「세상에나 이런 일이!」, 「뽐내는 자두나무」, 「수박요정이 없어졌어」 4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 11) 단편 동화 달구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씨암탉을 통해 농촌과 당대 현실을 형상화해 낸 솜씨 때문에 필자는 매우 관심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 12) 최영인, 『마름모 화가와 반쪽이 소나무』(작가의 말), 고래책빵, 2020, 5.
  • 13) 최영인, 「내 친구가 졌다」, 『내 친구가 졌다』, 아동문예, 20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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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정원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계간 파란 정원 단속정체성시선타자고맥락저맥락윤혜지 2024
정원 형식을 개척하는 형식 : 이지아,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계간 자음과모음 정원 이지아서사시극시독백형식본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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