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시작 2024년 가을호(제89호)
이별의 긍정과 죽음과의 동행 ― 김경수 시집, 『이야기와 놀다』, 천년의시작, 2024./이명윤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걷는 사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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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이명윤 두 분의 신작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은 잘 말하는 사람 이전에 잘 듣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경수의 신작 시집 『이야기와 놀다』의 첫 머리에 실린 시는 표제작 「이야기와 놀다」인데, 제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삶에서 이야기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시다. 하나 이 시는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타자가 발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이에 충실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런데 김경수 시인의 ‘이야기’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이야기와는 다른 면이 있다. 그는 사물을 포함한 세계의 존재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저 하늘의 별과도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다시 말해 별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이야기와 놀” 수 있다. 힌편, 이명윤 시인의 신작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의 첫 머리 시는 「귀」다. 이 시는 죽음 직후에도 귀는 얼마 동안 “신기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도 “저 홀로 남아 도둑고양이처럼 세상을 엿듣고 있”는 ‘귀’. 이 죽은 자의 ‘귀’에 대한 시를 시인이 시집 첫 머리에 실은 이유는, 이 ‘귀’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세상일들을 엿듣는 일이 이번 시집에서 전개한 자신의 시작(詩作)의 핵심임을 독자에게 미리 알려주기 위함 아닐까 한다.
그런데 김경수 시인이 주로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명윤 시인은 온갖 세상의 소리들을 듣고자 한다. 이야기란 행위 주체가 있고 사건의 진행이 있다. 어떤 별이 이야기를 한다면, 그 별이 살아온 어떤 내력을 이야기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명윤 시인이 듣는 건 어떤 소리다. 죽은 자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 같은 것. 그래서 두 시인은 세계가 발하는 말을 잘 듣고자 하면서도, 듣고자 하는 태도라든지 들은 내용을 시화詩化하는 방식엔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두 시인의 시 세계에 고유성을 형성할 테다. 김경수 시인은 세계의 사물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골똘하게 대상을 응시하고 그 대상에 대해 사유한다. 이명윤 시인은 어떤 시적 대상-사물만이 아니라 사태도 포함한-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대상이 표출하는 소리를 포착하고 이 소리의 표출을 대상의 묘사를 통해 표현한다. 김경수 시인의 시는 세계와 대화적 관계를 가지면서도 말하는 방식은 잠언풍이다. 대상이 발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해 사유해야 하고, 이 사유의 특유한 시적 진술이 그의 시의 스타일이다. 이명윤 시인은 주로 시적 대상의 행위를 마음을 담아 묘사하면서 그 묘사에 주관의 개입을 자제한다. 하지만 두 시인 모두 이 세계의 온갖 것들이 발화하는 말들을 들으려는 데에 시작의 출발선을 긋고 있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그럼, 두 시집이 전해주는 말들이 무엇인지 시집을 구체적으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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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꽃피어 난다」에서 김경수 시인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세상은 이야기로 뒤덮”여 있고 “이야기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이야기가 세상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살이에서 빚어진 것들만은 아니다. “나무들은 모국어로 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가지에 꽃을 피웠다”니 말이다. 세계는 이야기를 발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의 존재자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문장의 형태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시의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전해주는 “문장이 앉아 있는 나를”(「문장이 나를 쓴다」) 쓴다고 말한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나의 머릿속은 비워져” 가고, “문장이 나를 바라보며 나를 그”리며 시는 이루어진다. 김경수 시인은 인간중심주의적인 창작관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시인의 말>에서 그는 이 시집에서 “포스트모던한 옷을 입은 서정이 내포된 새로운 시를 표현해” 보고자 했다고 말한 것이리라.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인은 그렇게 써지는 문장을 ‘물고기 떼’라고 지칭한다.
글자들이 만든 문장은 물고기 떼이다.
마음이 물고기 떼를 끌고 가고
사람들은 물고기들의 유영遊泳을 보고 즐긴다.
문장들이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어떤 의미를 물고
혹은 어떤 지시를 찾아 물살을 헤치며 간다.
수면 가까이 올라와 입을 열고 닫으며 빛나는 은유를 표현하고
푸른 상상력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문자는 없고 이미지만 있고
사람들은 이미지를 느끼며 논다.
- 「문장은 물고기」 전반부
글자는 물고기이고 문장은 물고기 떼다. 이 물고기 떼를 몰고 가는 이는 독자의 마음이다. 독자들은 물고기의 유영과 함께 헤엄친다. 물고기처럼 “어떤 의미를 물”거나 “어떤 지시를 찾아 물살을 헤치며” 말이다. 이 물고기들과의 유영은 물고기들이 풍성하게 표현해내는 ‘빛나는 은유’와 ‘푸른 상상력’이 있기에 매력적이다. 여기서는 문장의 해독이 중요하지 않다. “문자는 없고 이미지만 있”다는 의미는 이와 관련된다. 글자들의 모임-물고기 떼-의 움직임-유영-이 표출하는 이미지의 흐름이 ‘이미지-리듬’을 독자가 수영하며 놀 때처럼 느끼도록 해준다. 이 리듬은 ‘시간’을 형성한다. 그래서 시인은 「가난한 시간」에서 “시간은 물고기이다”라고 정의내린 것일 터이다. 물고기의 유영이 리듬을 만들고 시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으면 미끄러져 달아나”듯이 시간 역시 붙잡을 수 없다. 이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슬픔이 김경수 시의 저변에 흐르는 서정을 이룬다. 그의 시적 유랑은 “날아간 시간을 찾으러 집 밖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슬프게도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으나, 다시 말해 “시간은 항상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으나, “시간을 만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인 것이다. 시간과 만나는 ‘순간’은 있는 것, 그 순간은 곧 지나가버리지만, “순간에서 순간으로 걸어가는 행위가 더 중요”(「대화를 하다」)하다. 또한 시인에 따르면, 이 “순간 속에 있는 간절한 노래가 순간을 영원으로 만”(같은 시)들 수 있다. 그 순간을 영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노래가, 시가 요구된다.
이렇듯 『이야기와 놀다』에는 시간에 대한 사색을 펼친 시들이 많다. 이야기는 시간 속에서 전개된다. 이 이야기가 노래가 될 때 지나가버리는 시간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시간의 물결에 휩쓸릴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꽃이 피어나고 지는 순간은 한순간”이듯 “미래도 너무 짧은 한순간”이어서, “시간의 몸통을 끝까지 잡고 있”(「꽃과 인생』)으려고 하지만 말이다. 「새벽 1시의 바닷가」에서의 “바다여, 파도여, 검은 하늘이여, 달이여”라며 “파도와 대화”하려는 화자의 외침은, “운명은 우리의 간절한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터져 나오는 통절한 마음을 표출한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은 우리를 우리가 모르는 데로 데려가는데, 우리가 그래도 시간의 몸통을 붙잡는 길이 있긴 하다. 기억이다. 김경수 시인은 「기억은 아름답다」에서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는 노래이다”라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노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을 영원으로 승화시킨다. 그 노래의 승화는 기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기억은 흐르는 시간의 힘에 의해 삶이 기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하여, 기억을 통해 삶은 헛된 것이 아닐 수 있게 된다. 같은 시에서 시인이 “기억함으로써 존엄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뭇 생명들은 결국 목숨을 다하고 사라질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김경수 시인은 생각한다. 죽음과 이별을 삶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이별이 영원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삶 자체와 이별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별은 연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별이 이별을 향해 손을 흔”(「이별도 아름다운 꽃이다」)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별의 연쇄적인 만남이란 바로 자연의 위대한 질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별이 있어야 새로운 만남이 있고, 죽음이 있어야 새로운 탄생도 있다. 죽음과 죽음, 죽음과 삶은 깊은 연계를 맺고 있다(이 삶과 죽음의 연쇄를 통해 세계가 이어진다는 인식을 「따듯한 풍경」은 그야말로 따듯한 시선으로 아름답게 그려낸다). 하여, 시인은 “새가 눈을 감는 것과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자연 속에서 연결돼 있고/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예정한다”(「이별도 아름다운 꽃이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별을 긍정할 때, 삶이 끝나가는 석양을, “꽃이 피면 떨어지고/지는 해는 언제나처럼 산을 넘어가”(「석양에 물들다」)는 이 세계의 시간 질서를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시간 질서를 긍정하면서 긴 시야에서 보면, “절망도 희망의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으며 “슬픔도 기쁨 일상의 이면이었”(같은 시)음을 깨닫게 될 터이다. 또한, 그래서 “평범한 것이 제일 큰 행복이라는 것”도.
그런데 “시간은 가고 사람들은 가”(같은 시)도 남는 것이 있다. 추억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서정적인 시 중 한 편인 아래의 추억에 대한 사유를 담은 시는,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김경수 시인의 감성과 시적 사유를 보다 직접적으로, 종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는 하나의 이파리가 되어 허공을 떠다닌다.
저녁노을은 추억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오래된 책이다.
책장을 넘기면 먼 곳으로부터 북소리가 들린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붉은 마차가 산을 넘어가자
죽음의 빛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본다.
결국 나는 허공을 떠도는 시간의 흔적이고
물방울인 내가 언젠가는 강으로 들어갈 것이다.
침묵의 아름다움이 슬픔의 방향이었고
시간은 그 슬픔을 데리고 떠나는 새로운 소식이었고
결코 백발이 되지 않는다.
이별과 이별은 만나서 새로운 시간을 만든다.
물을 마시던 다친 새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밤의 따뜻함이 그 종착역이었다.
- 「추억의 냄새」 후반부
‘해-붉은 마차’가 산을 넘어가며 나타나는 노을은 ‘밤-죽음’이 올 것임을 알려준다. 노을은 죽음의 빛인 것, 그 빛은 시인이 “언젠가는 강으로 들어갈” ‘물방울’ 같은, “허공을 떠도는 시간의 흔적”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노을은 아름답지 않은가. 죽음, 그 침묵은 아름다워서, 죽음이 가져올 슬픔의 방향은 아름다움을 향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죽음을 통해 “이별과 이별”이 만나면서 “새로운 시간”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니 이별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도착할 ‘밤의 종착역’은 따듯한 곳일 테니까.
3
1절에서 언급했듯이, 이명윤 시인은 귀의 역능을 믿는 시인이다. 죽음 직후에도 소리를 듣는 귀의 역능. 그는 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귀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에서 그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가. 배고파서 우는지, 새끼를 찾느라 우는지 고라니가 사람처럼 우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고라니가 우는 저녁」), “혁명은 심장에 있다”는 구절이 담긴 “시를 쓴 미얀마의 한 시인이” “장기가 모두 적출되고 심장이 사라진 채/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사라진 심장」)는 처참하고 슬픈 소식을 듣기도 한다. 시인의 귀에는 “몸이 아파” “울어도 소용없”을 외국인 노동자 ‘하셉’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열아홉 나이에 처형장 가”(「오빠들이 좋아 산동입니다」)야 했던 ‘여순사건 희생자’의 노래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엄마들이 식당에 모여 단체 사진을 보며 “여기 있네, 여기 있네”(「목련」)라며 자기 아이의 얼굴을 발견하는 엄마들의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명윤 시인은 역사가 묻어버리거나 사회가 신경을 쓰지 않거나 세월이 잊은 이들의 삶이 내는 소리들을 듣고는 이들이 사는 삶을 찾아 그 단면을 묘사한다. 아직 리얼리즘은 죽을 수 없다는 듯이. 이 세상엔 여전히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지만 세상은 이에 무심하기에, 시인은 자신이라도 아픈 이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이들의 삶을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집중 조명되는 시적 대상이 있다. 가난한 노인들이 그 대상이다. 독거노인(「독거노인이 사는 집」)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완벽한 계절」), 이 시대에 여전히 연탄을 보급 받으며 겨울을 나거나(「재래식 무기」) 복지과를 드나들어야 하는 노인(「복지과 가는 길」) 등이 이 시집에 등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들 중 많은 이들이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시인은 이들이 표출하는 소리-한국 사회에서 잘 듣고 있지 않는-를 듣고는 이들의 모습을 따듯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예를 들면, 「독거노인이 사는 집」에서는 “복지사가 내뱉은 한마디에”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할머니가 묘사된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 할머니의 울음에 허름한 집에 있는 옛 사물들이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 시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야 했던 할머니의 사정에 시인의 감성과 상상력을 가미하여 노인이 품고 있었던 슬픔을 증폭하여 드러낸 것이다. 시인이 조명하는 노인들은 긴 세월 힘겹게 살아온 후 남은 건 빈곤과 곤궁을 살고 있는 이들이다. 삶이 한없는 슬픔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노인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은 이들에 대한 시인의 주목은, 그들을 감싸기 시작한 죽음을 그려내는 데로 시인을 이끌기도 한다.
갓길로 등 굽은 노인이 걸어오는데요
어떤 슬픔은 녹이 슬어
다시 펼 수가 없습니다
먼 곳에서부터 달라붙는 죽음을
쿡쿡 누르며 걸어오는 지팡이
둘이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합니다
서로의 그림자를 밟던 걸음이
개나리와 손잡고 피어나는 봄날
한 줄로 그어 놓은 공중의 길
당신은 버스 창가에 앉아
지상을 보고 있네요
풀숲 위로 손 하나가 날아오릅니다
손바닥을 접었다 펼칠 때마다
웃는 얼굴이 뭉텅뭉텅 지워집니다
손이 마치 지우개 같습니다
악수란 그런 것이겠지요
- 「나비」 후반부
‘상가 다녀오는 길’에 어떤 등 굽은 노인을 보면서, 시인은 그 노인에게 달라붙으려 하는 죽음”을 포착한다. 그 노인에게 슬픔은 오래 달라붙어 있어서 녹이 슨 정도다. 이 슬픔과 더불어 죽음도 노인에게 달라붙으려고 지하에서 올라오고 있는데, 노인은 겨우 지팡이로 그 죽음을 “쿡쿡 누르”고 있다. 지팡이만이 그의 ‘오래된 친구’인 것이다. 시인은 봄날 피어나는 개나리와 노인을 대조하면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다는 ‘나비’를 생각한다. 새로 태어난 저 개나리가 도리어 노인이 저승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노란 나비로 느껴졌던 것이겠다. 죽음에 대한 시인의 곡진한 마음은 「곡소리」에서도 보인다. 시인은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에게 마지막으로 보내는 소리인 곡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곡소리를 하는 시간은 “미처 남기지 못했던 말들이/꽃잎처럼 화르르 흩날리는 시간”이며, 그 소리는 “울컥울컥 기억을 찢고 가파르게 쏟아지는 울음 줄기”다. 이러한 시편들을 보면, 이명윤 시인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드러나는 슬픔의 표현들에 대해 마음을 다해 공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죽음은 삶에서 제거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다. 산 자들의 세계는 죽음을 껴안고 죽음이 가져오는 슬픔을 온전히 받아 안아야 한다는 것, 그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으로 젖어든 세계를 자신의 시에 묘사하면서 그러한 과제를 수행한다. 나아가 그는 죽은 자의 목소리로 죽음 자체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함께 누워 있으니
비로소 운명이란 말이 완전해집니다
당신을 향한 모든 절망의 말들이 내게로 와
흰 눈처럼 쌓이는군요
나는 철없는 신부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얻어 살아 있습니다
(중 략)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나는 나로부터 멀리멀리 걸어가야 합니다
자꾸만 삶을 향해 흔들리는 나를 잊으려
당신을 따뜻하게 안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죽음이 슬픔을 우아하게 맞이하도록,
태도는 끝까지 엄숙하게,
- 「수의」 부분
화자는 지금 방금 죽음을 맞이한 자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함께 누워 있”는 이인 ‘당신’은, “비로소 운명이란 말이 완전해”졌다는 그 다음 문장을 보면 죽음 자체라고 읽혀지기에. 살아 있을 때 죽음을 “향한 모든 절망의 말들이” 화자에게 “돌아와 흰 눈처럼 쌓”인다는 표현은 이제 절망의 끝인 죽음이 화자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막 죽었고, 그리하여 첫날밤 신부가 신랑을 껴안는 것처럼 화자는 ‘당신-죽음’을 “따뜻하게 안”게 되었다. 죽음을 맞은 화자는 이제 삶으로부터,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멀리 걸어가야” 하며, “삶을 향해 흔들리는 나를 잊”기 위해서는 처녀 시절과 단절하듯이 ‘죽음-당신’을 안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편에서 보면 슬픈 일이긴 하지만 낙담할 일은 아니다. 죽음은 막 결혼한 신부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듯이 죽음의 삶이 새로이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신부처럼 아름답기도 한 것, 하여 시인은 “죽음이 슬픔을 우아하게 맞이”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라는 문장은,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는 죽음 이후의 사태를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세계가 죽음과 함께 가듯이, “죽음을 얻어 살아 있”는 죽음의 세계도 삶과 함께 간다.
이렇듯 이명윤 시인은 죽음과 삶의 경직된 경계선을 유연하게 바꾼다. 삶과 죽음 또는 존재와 무의 경계가 모호한 존재자가 있으니, 「눈사람」에 등장하는 ‘눈사람’이 그러한 존재자다. 눈사람은 “없는 사람”이다. “흰 눈이 내리고” “신이 나서” 우리가 만든 “없는 사람”, 눈사람. 이 “없는 사람”은 홀로 서서 노래를 부르면서 “얼굴과 심장이 흘러내리며 비로소” 우리를 향해 웃곤 했다고. 물론 이 눈사람은 “곧 마주칠 햇살에 금방 녹아 버릴 테”지만, 시인에 따르면 그럼으로써 “그렇게 없는 사람은/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사람으로/눈부시게 완성”된다. 이러한 눈사람은 어쩌면 삶의 본질을 말해주는 사람 아니겠는가. 우리의 삶 역시 결국 눈사람처럼 녹아 없어질 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사라짐으로써 우리의 삶 역시 운명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완성 이후에 새로운 차원의 세계, 죽음 이후의 세계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기 홀로 사라지며 노래 부르는 눈사람이야말로 삶의 본질을 본질 그대로 드러내며 사라지는 이라고 하겠다. 그 존재자는 “얼굴과 심장이 흘러내리며”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 눈사람을 ‘시’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다시 말해 이명윤 시인이 쓰고자 하는 시는 저 삶의 본질을 드러내며 사라지는 눈사람과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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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 시간의 부재와 매혹 우리는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상과 신념이 어떤 것이든, 누구나 결국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쟁할 필요조차 없다. 자연의 사실로서 죽음은 늦거나 빠르거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치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사고다. 동시에 죽음 그 자체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에 어떤 계기가 결합할 때, 문득 죽음이라는 사고는 죽음의 사건이 된다. 문제는 죽음을 사건으로 만드는 계기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논리 앞에 요절은 일단 하나의 사실로서 제기된다. 요절 역시 죽음의 하나인 탓이다. 그러나 한자어 ‘일찍 죽을 요(夭)’는 죽음에 ‘이른’이라는 수식을 부과해 특별한 의미를 생성한다. 대체 어느 정도의 나이에 세상을 떠야 요절의 범주에 속할까? 요절은 왜 별개로 사유되는가? 생물학적 수명보다 더 앞선 시점에서 돌연 일어나는 사태이기에 요절은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시간적 격차를 넘어선 그 의미가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르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인가 미결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함축한다. 예컨대 삶이 종점에 이르기 전에 생이 종결되어 버리듯이.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이 도래해 버린 것으로서. 그것이 요절이며, 근본적으로 사건의 아우라에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요절은 불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지를 넘어선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이끌림으로 일어난다. 저 유명한 키릴로프의 자살은 죽음 이후의 부재를 지각하며, 온전히 이를 입증하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1) 반면 요절은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올 부재의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유이자 감각이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예감, 그 소수적 사유의 소수적 감각, 또는 종말에 대한 이끌림이 요절을 고유한 사건으로 표시한다. 글쓰기가 문제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2) 요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지칭이 아니다. 미완의 삶이 남긴 여백은 글쓰기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과 맞물려 있다. 시는 언제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경계에서 태어나며, 그 미완의 긴장은 요절이라는 사건과 기이하게 공명한다. 때 이른 죽음은 한 시인의 언어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완결될 수 없는 시 쓰기의 남겨진 운명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요절은 단지 생의 비극이 아니라 문학의 내적 구조를 반영하는 역설의 표지이며, 그 미학적 효과는 시와 함께 오래도록 잔존하게 된다. 시를 쓰도록 재촉하는 시간의 부재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남겨진 가능성의 여백으로서, 오히려 충만한 시간성 자체를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차도하와 김희준의 짧은 생애와 시 쓰기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두 시인 모두 급작스레 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이 남긴 시는 생의 단절을 넘어 삶의 불가능한 연속을 증언하는 언어적 장치로 남아 있다. 그들의 시에 나타나는 불안정한 생의 감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예감와 좌절, 미완의 시간을 불러내는 듯한 시적 태도는 그저 젊은 시인의 불운한 몸짓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생의 종언과 남겨진 삶의 가능성이 대질할 때 필연코 마주치게 되는 윤리와 미학의 흔적이다. 저 대질의 시간을 글로 쓰는 모두가 요절 시인은 아니겠지만, 모든 요절 시인이 동일한 문자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저 두 시인이 보여준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그 시적 몸짓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2. 세계의 끝과 두 가지 글쓰기 죽음의 의미는 세계의 종말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기능의 중단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풍경을 알 수 없고, 그곳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나의 종언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여기에서 행위의 윤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윤리란 그 알 수 없음의 지평 위에서 책임지고 응답하려는 태도다. 끝을 모르는 자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행동한다. 세계의 종언이자 나의 종언으로서의 죽음. 내가 없는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해체를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의 삶이 그렇듯이, 나의 죽음 역시 오직 타자만이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한 언표는 나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외부, 바깥에서만 증명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윤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다. 나의 삶과 죽음은 타자가 증명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행위는 오직 나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미래가 어떻게 닫힐지 알 수 없기에, 나의 현재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열림의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내가 나의 종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떠한 자유로운 결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반복할 뿐이라면, 삶은 단지 예정된 각본의 연극에 불과할 테니. 윤리적 행위는 바로 이 알 수 없음이라는 조건, 즉 종결 불가능성과 비종결성에 근거한다.3)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지금-여기를 살아내야 하며, 그 살아냄의 과정이 곧 윤리다. 요컨대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며, 저 무지의 조건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행위하고 책임을 떠안으라는 실존적 요청이다. 일견 윤리적 태도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죽음 앞에서 현재를 살아내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학은 달리 반응한다. 그것은 죽음을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도래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까지 가설적으로 구축해 내려는 시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대신, 그 어둠의 형태를 언어와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다. 윤리가 죽음을 무지로써 책임지는 행위라면, 미학은 죽음을 앎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표현하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윤리가 무지의 지평에서 비롯된다면, 미학은 인식의 환영을 길어 올리는 노동의 지평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죽음을 호출하는 미학적 기호다. 실존적 주체로서 나는 이 세계의 끝을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자신이 직조하는 세계의 끝, 그 죽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화하는 주체는 시인이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세계의 죽음을 앞서 알며 완결시킨다. 창조된 세계 속 존재가 윤리적 주체라면, 창조하는 시인은 미학적 주체다.4) 윤리가 죽음 앞의 무지를 전제한다면, 미학은 그 무지마저 가로지르며 세계의 종언을 표현하려 든다. 미적 세계에서 인간은 지금-여기의 윤리를 실천한다. 종말의 시점을 모르기에 삶을 전체로서 결산할 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인은 그의 생애를 관조하고, 그 끝을 매듭지어준다. 예술적 방법으로서 창조는 시인의 손에 쥐어진 무기이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죽음에 부여된 ‘비극’이라는 미학적 범주는 오직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타자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하는 외부적 관점이다. 문학은 이 같은 미학적 태도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 속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윤리가 죽음 앞에 지는 실존적 책임이라면, 미학은 죽음 너머를 조형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윤리는 살아내기 위해 침묵하는 몸짓이고, 미학은 죽음을 응시하며 발화하는 언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쓰기의 두 가지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종언을 나의 끝으로 받아들이며, 그 무지로 인해 지금-여기의 삶을 더 치열하게 붙드는 글쓰기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 앞에 자신의 삶을 응답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학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글쓰기다. 세계의 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너머를 언어로 구축하려는 시도다. 글쓰기를 죽음의 불투명성에 봉인하지 않고, 미학적 형식으로 끌어들인다. 윤리는 죽음 때문에 행위하는 글쓰기이고, 미학은 죽음을 통해 형상화하는 글쓰기다. 윤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해 지금-여기를 책임지지만, 미학은 죽음을 인식하여 이 세계의 끝마저 글 속에 담아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그들의 시는 개인적 비극을 넘어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 얽혀 있다. 실존적 주체로서 그들의 짧은 생애는 윤리적 과제를 담아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 앞에서 그들은 지금-여기를 책임지는 언어를 직조하려 했다. 그들의 시 속에는 늘 불안정한 생의 감각, 곧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는 응답의 몸짓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들의 시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언어는 죽음을 감지하는 도구이자 죽음을 몰아내는 장치였다. 차도하의 시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끝을 향한 응시, 김희준의 시에서 감지되는 부재의 공간에 대한 관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착하는 미학적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붙잡아 언어로 새겨넣는 이중의 긴장 속에서 태어났다. 미학적 윤리와 윤리적 미학의 섬세한 교호와 긴장이 그들의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의 요절, 이는 한 생애의 종결이면서 갑작스러운 언어의 중단을 말한다. 그러나 이 중단은 문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다. 윤리적으로는 끝에 대한 불안을 담은 채 지금-여기를 책임지려는 응답으로, 미학적으로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호출하는 형상화의 방식으로.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는 이 두 층위가 교차하고 분기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요절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남긴 글쓰기는 윤리와 미학의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한다. 죽음을 세계의 끝으로 경험하면서도, 그 끝을 시 속에서 다시 열어젖히는 것. 요절이라는 사건에 대해 시인이 남기는 가장 치명적인 증언이 거기 있다. 3. 차도하 — 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윤리 차도하 시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미래의 손』은 차분하고도 담담하지만, 결코 잊힐 수 없는 다음의 문구로 첫 시편을 펼친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5) “입국”은 출국을 전제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섬이며, ‘이곳’과는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저곳’의 경역이 존재함을 고지한다. 들어서는 장소는 “천국” 혹은 “외국”이라 불리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상하다. 흔히 신앙의 구원이나 마음의 안식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들어서려는 자는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 낯익고 몸에 익은 정체성을 전부 버려야 한다. “엄마”와 “모국”, “모국어”, “발음하는 법”, “밥그릇”,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 곧 기성의 존재 조건 전부가 폐기의 대상이다. “천국”은 들어섬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버리는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기이한 영토다. 그럼, 이 모두를 내려놓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과연 “천국”에 입장하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천국, 혹은 저 너머의 생이란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시구를 뇌까리는 이는 이미 출국해 버린 상태이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상에 몸은 남겼으되 허공을 유전하는 정신은 “공터” 같은 현생에 속박된 영혼이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텅 빈 시공이야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거꾸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한(「미래의 손」) 지금-여기의 진실일 것이다. 익숙한 생활의 흔적도 없는, 새로이 채워 넣을 기대와 예기의 감각도 없는. 하지만 그 같은 공백이야말로 오히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바탕 아닐까? “없다는 게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독서 유예」). 시를 쓰는 것, 이는 낯익은 정체성을 지우고 소거하는 과정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낯선 정체를 받아들여 공백을 메우는 행위이다. 보람의 과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생의 무시간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시포스가 무익한 노동에 종사했던 것처럼, 시 쓰기는 오직 천국의 문이 열려 입국이 허락될 때까지 저 공백을 견디려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삶의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어떠한 과장된 희망이나 전망도 남겨 두지 않으려는 절망의 역설이 그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침착하게 사랑하기」). 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시작(詩作)의 무상성은 이 세계가 시로 채워질 수 있다는 단 하나의, 그러나 무망한 가능성만을 허락한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 「입국 심사」 부분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행위 속에 명멸하는 감각이다. “천국에 갈 것”이라는 당찬 선언은 자신의 시가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겹쳐진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라는 이어지는 결심으로 변곡하며, 지금-여기에 대한 긍정의 씨를 뿌린다. 이는 현생에 대한 체념 어린 수긍이 아니다. 반대로, 천국에 걸려 있는 공허한 기대를 거부하고, 죽음의 허망함조차 부정하며 그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의지를 함축한다. 그러니 시를 “많이 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다짐은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의 끝, 죽음과 대면하겠다는 치열한 시적 응답에 해당한다. 탈주로서의 시 쓰기, 이는 죽음이라는 미지와 무지를 견뎌내려는 윤리적 기획에 값한다. “파쇄기”에 던져지는 시는 나날의 행위, 즉 온갖 고심과 분투 속에 수행되는 선택과 결단을 은유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일 쓰이는 즉시 파쇄되고 소멸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잊히고 사라져서 불가지의 시간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죽음,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는 필멸자의 섭리이며 그가 수행하는 윤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행위는 문자로 포착되어야 하며, 시적 언어로 남겨져야 한다. “시를 쓸 것”, “많이 쓸 것”이 담는 맹목의 의미가 여기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이 세계는 끝날 것이다. 이를 공허한 수사학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삶에 남겨진 최후의 순간까지 시로 옮기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필연에 ‘이 나’가 응답/책임을 다하려는 윤리의 본질일 것이다. 이러한 시적 실존과 그 행위 양식은 시인의 이중적 정체를 슬그머니 암시한다. 시인은 한편으로 텍스트 내에서 시를 쓰고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자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 바깥에서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직조하는 현실의 자신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매일 시를 쓰고 파쇄기에 던져넣는 윤리적 실존이면서, 또한 그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텍스트 바깥의 미학적 실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시인은 윤리적 행위를 감당하는 실존 조건과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의 미학적 완결을 꾀하는 존재 조건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윤리적 행위자인 동시에 미학적 창조자에게 벌어지는 고뇌의 진자 운동이 이 시집의 주도 동기를 그려가는 셈이다.6) 첫 번째 시 「입국 심사」가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도달하는 윤리적 행동에 관한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시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는 세계의 종점을 상상하고 이를 종결짓기 위한 미학적 행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도심일 수도 있다.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컵에 담긴 음료의 이름만큼만 상상력이 허용된 교차로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도 풍경은 아름답다. […] 삶을 포기하고 죽음도 포기하고 기다란 흰 끈을 손에 쥔 채로 나는 생각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산”도 “바다”도 담아내는 “풍경”은 지금-여기, 이 세계의 경계선을 이룬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아마도 그 경계의 닫힘을 통해 죽음이라는 열림을 이겨내는 미적 완결성을 암시할 것이다. 그렇게 시인-창조자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작품으로 보상받는다. 미학적 이상으로 창조된 세계는 현실의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면제된 사유의 공간일 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 속의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깊거나 얇게, 짙거나 흐릿하게 젖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이나 “바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도심”에는 “불쾌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꽉 막힌 “상상력”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저 인공의 아름다운 세계는 생생한 실존의 현실, 삶만큼이나 죽음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무지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무서웠는데 정말 무서웠는데 무섭지 않은 척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이 이미 맑았다. 날씨의 경계가 보였다. 그때부터 이곳이 흐려도 맑은 저곳을 이곳이 맑아도 흐린 저곳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창문이 생겼다. 창문을 열자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이 보였다. 그것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그러나 풍경은 아름답다」 부분 자신의 죽음, 이 세계의 끝이 알려지지 않은 ‘열린 세계’는 무서운 세계이다. 지금-여기서 행하는 몸짓이 무엇을 불러낼지,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는 탓이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는 “날씨의 경계”는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고 예상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무지의 공간을 품고 있음을 방증한다. “창문”은 일견 투명하게 그 “경계”를 이어주는 듯하지만, 실상 넘을 수 없는 장벽마냥 분리하는 울타리다. “천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비행운”은 그것을 지우는 오인, 또는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 너머로 향하는 “비행운”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닫으려 애를 써도, 결국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게 강요하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윤리를 온전히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이를 차도하의 시 세계가 구축하는 미학적 윤리의 표지라 불러도 좋을 터. 시집 전체에서 시인은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과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불가지의 분열 앞에 절망한다. 아마도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가지의 예감, 결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주하면서도 끝내 이를 언어로 옮기는 데 무력하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시적 세계의 형상이란, 필경 존재의 무상을 버텨내기 위한 윤리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빠져나와 […] 시를 쓰게 될 […] 미래의 손”(「미래의 손」). 4. 김희준 — 응시하는 언어, 다가서는 미학 김희준의 시적 태도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리에서 성립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애의 끝을 지시하는 표지가 아니라, 시적 행위를 추동하는 근원적 자극으로서 시인 자신을 사로잡는 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회피와 외면의 대상이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 저 불투명성을 헤쳐나가 언어적 형상화를 감행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희준의 글쓰기는 죽음의 불가촉성을 끝내 언어로 붙들어두려는 행위에 비견되며, 그 자체로 윤리적 태도를 이룬다. 관건은 이러한 윤리적 자세를 미학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는 윤리적 미학으로 압축해 표명된다. 그는 죽음을 모호한 상징으로 감추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의 면과 결로 마지막까지 다듬어내려 했다. 이는 죽음에 다가서는 시적 응답인 동시에 책임을 가리킨다. 시인은 자신의 실존과 이 세계의 끝에 관해 ‘알 수 없다’는 태도로 글을 썼다. 하지만 무지의 주변을 맴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문자의 연료로 삼았다. 일상의 무심한 장면들, 이를테면 편의점 진열대(「싱싱한 죽음」), 낡은 책갈피가 보이는 서점(「평행 세계」), 저수지와 달동네의 옥상(「8구역」) 등을 두루 살피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운동으로 번역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윤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려는 결단에서, 미학은 그 결단을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직조하는 형식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시를 쓰는 것은 응시와 형상화가 왕복할 때 생기는 사건이자, 실패를 무릅쓴 그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노동이다.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7) “싱싱한 죽음”. 삶과 죽음을 뒤섞는 역설의 제목으로 문을 여는 이 작품은 죽음이 더 이상 드물고 생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깊숙이 내려앉은 기호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가령 “참치든” “과육”이든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 만큼 죽음 역시 숙연하거나 섬뜩할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은 “내일”조차 “외상”으로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에, 미래를 꿈꿀 까닭조차 잠식해 버린다. 무심한 현상을 타고 흐르는 시선은 “냉장고” “칸”의 깊이와 분절에 따라 “골목”과 “심해”, “배수구”와 “과수원”으로 미끄러지며, 돌연 “누군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는 광경으로 날카롭게 솟아난다. 이 한 줄이야말로 김희준의 시학을 응축해서 보여주는데, 죽음을 사물의 문제인 동시에 언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단어와 잘려 나간 감정, 즉 언어의 사체와 감응의 잔흔을 수습하는 데서 시의 윤리가 성립하며,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표현의 형식으로 남기는 데서 시의 미학도 존립한다. 설령 “형편없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 “영수증”이 문학사의 무게를 담아낸다면 이는 충분히 남겨볼 만한 과업일 테니까. 이런 사유를 더 날것으로 펼쳐내는 시편은 「하지만 그러므로」일 것이다. “내 무덤은 깡통에 있을 거야 문은 열어도 문이거든”에 표명된 역설은 “무덤”과 “깡통”, “문”이 일련의 의미론적 연속체를 이루며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지시한다. 죽음도 삶도 일직선으로 배열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가치 관계를 벗어나 버린다. 삶이 과잉 가치화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평범한 사물로 내려 앉고, “깡통” “문”을 여닫는 과정의 하나로 치부된다. 문을 열지 않았던 건 유통기한이 지나서다 오래전 죽어버린 내 무덤을 열 수 없다 틈으로 보았던 것이 은밀하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뜻이다 - 「하지만 그러므로」 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한선은 “유통기한”으로 범속화되면서 의미를 잃고 물질화되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폐기’의 순환에 투입되고, 언어는 ‘개봉’의 행위로 처리된다. 시인은 이런 감각의 전위를 재치있는 언어적 도락에 떠넘기지 않는다. “유통기한”과 “영수증”, “깡통”, “뚜껑” 같은 일상어가 병치되며 일어나는 감응의 효과는 이제 죽음조차 강고한 아우라를 내뿜는 시대가 아님을 냉정히 환기시킨다. 죽음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가공과 진열, 구매의 열거만으로 죽음의 실감을 완전히 미학적 형식에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존의 절대적 장벽이던 죽음은 일상의 사물로 내려왔지만, 의미가 비워진 언표로 버려지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인은 꿈의 해부대에 자기의 몸을 올려 직접 열어 보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뱀 신화의 원형을 빌리되, 이를 분신의 이미지로 옮겨 다듬은 텍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해석학에 따를 때, 꿈과 상자는 동종적이다. 일상 너머의 의식, 잠재화된 욕망을 실어 나르고 보존하는 초공간인 까닭이다.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 비현실적인 동물은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보인다. 형태 이상의 형태, 무의식적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신일 것이다. 모성 생식으로 태어난 “나”는 고형화된 부성적 형태를 거부하고, 순전한 욕망에 몸을 기댄다. 이어지는 행에서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한다는 진술은 생식과 파괴, 분출과 배출의 생리적 역동을 추상의 리듬으로 환원하지만, “나를 헤집”는 “뱀”이 드러내는 “척추의 능선”은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구체적이다. 형태 이상의 형태, 구체 너머의 구체가 분명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놀랍게도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이다.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르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찌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 「요르문간드의 띠」 부분 무의식의 지평은 현실 너머에, 이 삶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꿈의 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존재의 영토에 들어섬을 뜻한다. 비현실과 초현실, 어쩌면 순전한 무의 환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진실은 비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나”의 이형환위(異形換位)이다. 지금-여기라는 현재 너머에서 만나는 자기의 진실이자 본래면목일 수도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은 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며, 시인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여기서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최종 도달점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이미 계속되었던 원환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서로의 조건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성을 통해 변주된다. 죽음에 대한 시적 태도는, 한편으로 자기 실존의 유한함을 끌어안는 윤리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너머’를 언어적 상상 속에 구축하고 살아보는 미학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하는 글쓰기는 선형적 탈주와 그 결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되감기와 회귀에 있다. 물론, 이는 자신이 알던 세계의 끝, 실존의 죽음이라는 문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장력이 다한 용수철이 다시 튕기듯, 그 힘을 응축하기 위한 재생의 일환이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 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계절의 끝을 “안쪽”으로 되감는 이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돌리기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롯되는 다른 생의 변곡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 새로운 시작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은 채, 바로 그곳을 영점으로 삼아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윤리적 미학의 근거이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제페토의 숲」)는 시구 역시 이런 원칙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죽음, 실존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종결에 대한 감각은 종결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등을 맞대며, 늘 또 다른 출발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8) 시학, 언어적 행위는 죽음/삶의 결속과 분리, 분기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 그 종말을 응시하며 이를 숙명처럼 수긍한다. 하지만 체념은 아니다. 응시는 곧 형상화를 통해 보이도록, 읽히도록 조형하는 과정에 맞물려 있다. 당연히, 이는 무망한 동시에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를 감수한 형상화와 그 반복은 시작(詩作)의 종결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어떤 무엇이 도래할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철저한 무지,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멈춰 서기 마련이다. 시인의 몫은 바로 이 지점에 따로 있으니, 그는 무지의 자리 멈춰 서지 않고, 그것을 본다. 그리고 문자로 옮긴다. 김희준의 윤리적 미학이란 이를 가리킨다. 5. 요절, 문학적 사건 너머의 물음 시인은 언제나 시간의 경계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차도하와 김희준의 시 세계는 그 경계에 유난히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이들의 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예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유한한 그릇 속에서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지평에 가장 치열하게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절’은 이른 죽음의 시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시적 사유와 글쓰기 방식이 지닌 구조적 지평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의 실제 생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사유가 맞닥뜨린 시간의 단절, 혹은 끝에 관한 태도이자 형상화의 문제로 드러난다. 차도하의 시에서 죽음은 탈주의 대상으로 표명된다. 그는 종종 언어를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탈하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자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발길은 끝내 죽음의 형상과 마주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차도하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동시에 언어를 통해 계속 써가야 할 낯선 이름이었다. 미학적 윤리라 부른 그의 시적 태도는 죽음, 세계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열린 감각과, 이를 미학적으로 닫아보려는 절망적 시도 사이에서 형성된다. 종말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는 순간조차 묘사하고 응시하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미학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존재의 절박한 윤리로 전화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도래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 때문에 그가 실존적 좌절감에 젖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글쓰기를 윤리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을 것이다. 김희준에게 시는 죽음을 직접 응시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완결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부정적 한계선에 멈춰 세우지 않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구상하려는 노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시편에서 출몰하는 여러 일상의 이미지들은 그저 삶의 기호가 아니라 죽음을 관통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의 표식들이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유한자의 좌절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내지만, 문학은 이를 형상화의 의지로 전위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적 태도를 윤리적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죽음의 형상화는 끝내 도래할 종언 앞에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처럼 두 시인의 시적 세계는 모두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와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차도하는 죽음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늘 있었고, 김희준은 죽음을 응시하고 그것을 끝내 언어로 증언하는 자리에 다가갔다. 하나는 미학 속에서 윤리를 발견했고, 다른 하나는 윤리 속에서 미학을 길어 올렸다. 요절은 두 사람의 실제 생애를 규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들의 시적 태도 속에 줄곧 내재해 있던 미학과 윤리의 긴장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 이상 신화를 믿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 시인의 시적 태도와 실제 삶이 공명하는 기이한 아우라를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다.차도하와 김희준, 이들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청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을 둘러싼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야말로 그들이 던진 물음의 중핵이다.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그 끝을 형상화하기에 미학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이중의 요청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 두 가지 시적 태도는 동일한 의미의 귀결을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을 둘러싼 언어의 책임, 즉 어떻게 죽음을 말하고, 어떻게 끝을 견디며, 어떻게 세계를 다시 써낼 것인가에 관한 응답이다. 이런 문답 앞에서 요절은 더 이상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시적 언어가 도달한 극한의 경계와 그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요절은 두 젊은 시인을 기리는 기호를 넘어 시와 죽음, 언어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 될 것이다. 1)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0, 166-167쪽.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30쪽. 3)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0, p. 13. 4) Mikhail Bakhtin, Art and Aswerability, p. 45. 5) 차도하, 「입국 심사」, 『미래의 손』, 봄날의책, 2024, 11쪽. 이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표기한다. 6) “작품은 시간과 문학적 유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식이다.”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2, 371쪽. 7) 김희준, 「싱싱한 죽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101쪽. 이하 시인의 작품은 이 책에서 인용하며 제목만 밝히겠다. 8) “세계는 영원하지 않아도, 삶에는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이 깃들어 있다.”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Oxford, 2000, p. 73.
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두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동일한 인식이다. 다른 이들은 바쁘게 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삶을 잘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삶은 곧 소멸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죽고 사라지는 것들을 돌아보는 행위가 시를 쓰게 한다. 여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시집은 세계의 사라짐에 대한 감각을 공통분모로 한다. 중요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속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세계의 소멸에 대한 응전으로써 이들은 각기 다른 사랑의 일을 도모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일을 꾸민다. ‘곁’의 사랑 김지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본다. 지구상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사물들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자신의 눈동자에 맺히도록 지긋이 바라본다. 그 목소리가 몸 안에 담기도록 한없이 귀 기울인다. 그것들이 죽고 사라진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꽃이 시들고 노을이 지듯/ 지금 아름다운 것도/ 끝날 것이다”(「오늘의 하늘」)라며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기우는 햇살 아래 꽃 그림자/ 희미하게 남은 노을의 자취/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지”(「피로의 필요」). 시인은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를 쓴다. 시인의 임무는 찰나에 피었던 짧은 생을 죽음에서 건져 올려 끊임없이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서 이름이 없어진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작은 씨앗의 뿌리는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 푸르러질 준비를 하고 바람은 속삭이지, 네 차례야그러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나 우리는 그것들을 신록이라고 부르지 어차피 역사란 그런 것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는 것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을 쓰다듬는 바람, 입술을 적시는 빗방울 젖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깊어지면 찰나의 빛을 품은 침묵이 땅에 묻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한동안 고요해져도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를,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지 -「봄」 전문 시인은 지금 이 땅에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때문에 그 자리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꽃”의 존재가 사라지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자라난다. “작은 씨앗의 뿌리”가 “지난해”에 죽은 “꽃들”의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피는 꽃들은 “지난해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날 것이다. 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한철 마음껏” 피는 “꽃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가겠다는 결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는 “지난해의 꽃들”이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를 위해, 죽음으로 스러진 지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내기 위함이다. 그러하기에 꽃들은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결의를 보여준다. 가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바람”이 꽃을 쓰다듬고 “빗방울”이 꽃의 입술을 적신다. 하지만 꽃들은 곧 스러질 것이다. 결국 “땅에 묻히”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꽃들”이 피었던 눈부신 “찰나의 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로 계속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오면 기적처럼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곧 사랑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신록”은 매번 새로운 초록빛(新綠)인 동시에 새로운 행복(新祿)이고 또 새로운 기록(新錄)이 된다. 이것은 비단 “꽃”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를 길러낸 부모도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나’라는 존재가 꽃피우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무수히 “아름다운 것들”이 피고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은 이름”이 되고 “산 이름”을 기르리라는 것을 예감할 터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들은 곧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이 곧 사랑하는 것들이다. 멀리 있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고요하고 평안한 무감각 속에 너무 멀어 풍경이 되는 것들 가까이, 오직 가까이서만 볼 수 있지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도,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 선 이만 알 수 있는 것 고운 늦가을 단풍이 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걸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그러니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고 낮은 속삭임은 가까운 데서만 들리는 것을 조그만 촛불도 가까운 곳에서는 밝고 보잘것없는 온기도 다가서면 따스하지 초라한 모닥불 하나 피워 나란히 앉자 그 작은 불씨마저 꺼진대도 입김을 불어 넣어 줄게,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가 돌 때까지 한참 후에야 우린 알게 되겠지,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릴 살아남게 했다는 걸 -「가까이에서」 전문 ‘당신’의 삶이 “풍경”이 될 정도로 저 “멀리” 있다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안”할 것이다. ‘나’는 먼 거리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직 가까이”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의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결점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당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이다. “곁”은 “낮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힘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그만 촛불”의 “보잘것없는 온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밝고 따듯한 힘이 된다. 서로의 “곁”을 내어준 자들은 서로의 “작은 불씨”가 꺼져갈 때마다 “입김을 불어 넣어”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고 “낮은 속삭임”을 듣고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다. 이 일들이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우릴 살아남게” 한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지윤 시인의 사랑은 당신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우린 망가진 채로도 하나가 될 수 있어”(「화음」).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서로의 결여가 포개져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 꽃이 흔들리는 소리/ 귓가에 속삭였던 아득한 그 말들”(「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에 귀 기울인다. “나뭇잎과 꽃잎들마다, 져 버리고 시들어 버릴 모든 존재들에/ 이슬과 햇살과 바람으로 적혀 있는 희미한 진심을 읽는다”(<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피로의 필요』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밀어가 가득하다. “나는 너를 살리겠어// 땅이 뿌리에게/ 숲이 나무에게/ 빛이 어둠에게 하는 말”(「스미는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스미는 숨」)이다. 그것은 ‘당신’의 소멸 이후에도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곁’의 사랑이다. 사랑의 ‘둥지’ 강백수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어두운 터널과 같은 청춘의 뒤안길을 사랑한다. 이 청춘이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힘이다. 한 손에 시,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엉망진창 온몸으로 살아낸 사랑의 기록이다. 시집 『가라 인생』의 제목은 가짜(fake) 인생이자 고고(go go) 인생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시집의 결론에 도달하면 알겠지만, 이는 선후관계이다. 시인은 “블로그와 유튜브와 여행책이 아니더라도 대충 어떻게 살다가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시부야」)라며 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언뜻 내비친다. 또한 “삶의 의미가 고작 담배냐고/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워크에식(Work ethic)」)라면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가라 인생」)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어쨌거나 삶은 주어졌고/ 어느 시점엔가 당신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게 삶이구나”(「시작점」)라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사랑한다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뒤늦게 사랑한다 그건 이를테면 아직 눈코입도 없는 태아를 벌써 사랑해서 이름을 짓고 이미 재가 되어 흩어진 고인이 아직 그리워서 이름을 쓰는 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정사진을 공유하며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하는 일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지만 지구상에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과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어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고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한다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미래와 현재와 과거 -「뒤섞인 시간」 전문 이 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의 시차時差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미리 뱃속의 태아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을 때는 건네지 못한 말을, 이제는 죽고 없을 때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한다. 우리는 왜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시인의 궁금증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이 있고 또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미래의 사랑’과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과거의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인의 이 독특한 시간관이 곧 그의 독특한 사랑관을 말해준다. ‘나’의 사랑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종결되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사랑하는 것들과 벌써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의연히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대도 닿기 전에 죽어버릴 나의 생 그러나 바로 지금 별자리는 저기에 있다 일 년이건 백 년이건 그대도 나도 결국은 시한부 인생 두고 떠나건 홀로 남겨지건 결국은 예정된 이별 그러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청춘을 건너온 시인은 삶을 뒤돌아본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 그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과거의 그때는 이 사랑이 끝난다면 다른 삶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다. 강백수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렇다.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랑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나’를 지켰고 과거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온 사랑의 대상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별들”이 뿜어내는 그 별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삶의 조건은 죽음이다.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이고 우리는 모두 “예정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예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죽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육탄전으로 “예정된 이별”에 뛰어든다.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은 어쩌면 시인이 삶에 장착한 제1의 신조일 수도 있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지구 최후의 벙커는 진정 사랑이라는 듯이, 온갖 세상의 풍파도 이별도 죽음도 다 막아내겠다는 듯이, 키스한다. “모든 생은 단 한 번”(「사후세계관」)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산다/ 그 힘듦으로부터 어떻게든 몸을 숨긴다”(「버러지」)라고 썼다. 연약한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두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개고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는 사랑의 둥지이다. 이 사랑의 둥지가 시인이 찾은, “거의 무의미한 내 삶 속의 유일한 의미”(「무임금 노가다」)이다. 그는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둥지를 노래한다.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싶다. “사랑의 끝을 알면서도 스로틀을 당기던 그 밤”(「110cc」)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아,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단 하나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후세계관이 하나 있단다 죽고 나면 반드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거라는 거 그걸 생각하면 어떤 이별도 나의 죽음도 최악의 일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곤 한단다”(「명견 강삼돌」). 그의 솔직한 위로 앞에서 마음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꼭 그의 노래 <타임머신>과 같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강백수의 시는 세계가 무너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둥지’이다.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 사랑은 한없이 덧없고 슬프다. 사랑의 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도 함께 껴안는 것이다.
1. 소월이 그러하듯, 황동규 시인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 것인가. 황동규는 1958년 미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시력 67년을 지나는 시인이다. 그는 첫 시집 『어떤 개인 날』(1961)을 발표한 후 『풍장』(1995)을 거쳐 지난번 『봄비를 맞다』(2024)에 이르기까지 도합 열여덟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1,000편에 거의 근접한 그의 시세계는 이번 근작 시편에도 등장하는 평론가 이숭원의 일전 언급대로,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춤”(『꽃의 고요』 해설)이라고 일단 상징적으로 명명할 법하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지난 세월동안 시인이 꿈꾸며 가꿔온 삶의 시간들이 때로는 황홀한 감각과 사유로, 또 서늘하면서도 생기 있는 언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몸짓을 극서정시가 견인하고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황동규 시의 독특한 구성 원리이자 시세계 전반을 추동하는 극서정시는 단적으로 말해 ‘극’을 내장한 서정시이다. 시에 극적 구조를 연출함으로써 반전이나 시적 자아의 깨달음과 거듭남 같은 내적 변화를 유도하는 시인 특유의 창작 방식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극서정시는 “극(劇)적 구조를 지니고 싶다”라는 시인의 선언적 문구가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표사에 실리면서 한국 시사에 본격적으로 등재된다. 이후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 『우연에 기댈 있었다』(2003), 『꽃의 고요』(2006)는 물론 최근의 시집에 이르기까지 황동규의 시편들은 극서정시의 계보를 독자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이전 그의 시가 ‘시 안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시’의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도 시인의 말마따나 “명칭은 나중에 붙였지만,” “극서정시는 초기부터 있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가령 황동규 시세계의 중심축을 떠받치던 일련의 사랑 시편은 기존의 전통 서정시와 달리 극적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들에서 ‘사랑(이야기)’는 극서정시 구조를 통해 새롭게 변주되고 그때그때마다의 정황적 의미를 획득한다. 데뷔작 「즐거운 편지」를 위시한 황동규의 사랑 노래는 재래의 수동적이고 추상화된 주제 영역을 벗어나 생활세계에서 ‘사소’하고 ‘조그만’하며 ‘비리고’ ‘쨍한’ 극적 사랑의 계기들을 만들어 온 것이다. ‘시간 속에 비치는 시간’의 감지와 ‘홀로움(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의 정서, 그리고 세계의 필연성과 필연적으로 동행하는 우연성의 수용은 사랑주의자 황동규가 자신의 사랑 시편들과 함께 극서정시를 가동해온 의식/무의식의 흔적들이다. 아울러 일상의 규범을 벗어나 지각의 갱신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선택한 여행(시)과 시인의 타고난 예술적 정열은 그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를 지속적으로 마련해왔다. 여기에 죽음에의 선주(先走)를 감행하여 확보한 삶과 죽음의 인식론적 전환 사유와 선(禪)에의 깊은 관심은 그의 시에 세계 인식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기 위한 시적 장치이자 방법론으로 주어져 있다. 이렇듯 황동규의 시는 일상과 탈일상의 세계를 분주하게 오가며 시와 삶이 하나 되는 극적인 순간의 풍경을 연출해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마치 ‘외계인’과도 같은 낯선 시선과 호기심으로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세계의 진면목을 환하게 그려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시는 알레고리와 상징의 밀회를 적극적으로 주선하며, 황홀하면서도 서늘한 삶의 풍경들을 노래하고 있다. 2. 황동규의 주요 시편들이 극적 구조를 거느린다고 했거니와, 이는 근작시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번 그의 「벽오동」은 작품의 말미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글귀를 위치시킴으로써 이즈음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밑그림”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 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 같이 물드는가 했더니 벽오동이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쁜데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다. 몸에 걸쳤던 것 낌새 못채게 털어버리고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서었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 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 아니겠나? 「벽오동」 전문 시 「벽오동」의 도입부에는 세 개의 나무가 등장한다. “은행, 벽오동, 벚” 나무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시의 제목이 ‘벽오동’으로 제시된 이유는 “양편 두 나무는 옷 갈아입기 바쁘”고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몸단장 한창인데”, 유독 ‘벽오동’만 “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이틀 만에 잎 두 개만 달랑 남았”기 때문이다. “벽오동”만이 “언뜻 보면 뵈지 않는 나무 되어”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를 내고 있는 형국이다. 「벽오동」의 시적 반전은 이 부근에서 준비된다. “세상의 리듬과 엇박자라고?”와 같은 화자의 의도 섞인 물음은 “주차장 건너편 축대 위에/나란히 서 있던 은행, 벽오동, 벚”의 상황 묘사로 일관했던 이 시를 급기야 세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과 자기 확인의 지대로 인도한다. 이때 10행의 접속 부사 “하지만”은 시적 자아가 겪는 거듭남의 여정을 노골적으로 주도하고 암시한다. 그 거듭남이란 “엇박자”와 정박자의 구분이 없는, 아니 구별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자세라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잊을만하면 떠올리고 잊을만하면 꿈꾸는/색즉시공(色卽是空) 살기의 밑그림”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이 시는 평범한 생활세계의 한복판에서 “세상의 리듬”과 “같이” 하지 않은 자연생명을 통해 시적 화자의 변화된 생각을 명쾌하게 전달한다. 이를테면 우리 삶에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공존한다든가, 초월은 결국 초월하지 않는 곳에 있다든가, 더하여 죽음은 삶의 시간에서 분리된 이원화된 공간이 아니라든가 등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저 찬란하면서도 심오한 구문이 간직한 모든 가능태의 해석들로 말이다. 이 대목을 특히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색즉시공(色卽示空) 살기”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어지는 「시에 대한 단상들」에도 재차 변주되어 나타나는 까닭이다. 가령, 최근 시에 대한 시인의 단상은 이렇다. “시 쓰는 일은” “우연 같은 우연, 우연 아니게 만나는” 길이고, “더 이상 다르게 말할 필요가 없을 때/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이 꿈틀”대는 순간이며, “명동 간다는 게 충무로역에 내렸”지만 가끔씩은 “그런 시가 생각보다 더 실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날것 보다는 제대로 익힌 시가 그래도” 좋겠으나 “익힌 날것도 있”다는 생각. “시인과 대상과의 관계는 늘 1:1”이지만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쉬고 있는 곤줄박이”를 “안 본다 안 본다 하면서 더 보고 싶은 사람”처럼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기우뚱한 균형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다는 생각 등등. 이렇듯 황동규에게 시는 고정불변의 규율과 법칙으로 규정되거나 강제되지 않는다. 인과론적 사유로만 구성되지도 않는다. 그에게 “시는 이 세상 모든 걸 다 맛보려”(「시가 사람을 홀리네」, 『오늘 하루만이라도』, 2020) 드는 생감각의 집결지이고, 변화무쌍한 색(色)이자 공(空)의 세계다. 삶의 실제가 그러하듯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의 이치가 투명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전이되어 황홀하게 펼쳐지는 구체적 장이다. 그리하여 다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앞문으로 들어가/뒷문을 찾지 못하는 시도 시다.” 그 시들 속에는 “무심히 돌다 뒤꼍에서 만나는/이끼, 환한 빛의 섬들”이 존재한다. “이크 밟을 뻔! 민들레와 달팽이/뜻밖에 창틀에 와 앉아 쉬고 있는 곤줄박이”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다. 3. 아무래도 황동규의 근작 시편을 읽다보면, 노년의 시인을 자주 만나게 된다. 노년은 많은 것들을 서서히 세상에 내려놓는 마음의 시간대다. 인간에게 죽음이 가장 확실한 미래의 사건으로 고지되듯이, 노년은 유한 존재가 어쩔 수 없이 겪는 예고된 시간의 절차이자 필연의 변화이다. 감각기관의 퇴화와 기억력의 감퇴는 필연적 변화의 대표적 항목이다. 거기에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이 필연적 변화의 끄트머리를 실시간으로 경험하게 한다. 지난밤 꿈에 너와 나 너무 많은 말을 주고받았어. 너 어제 세상 뜨고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 어제 저녁 네 빈소에 갈 때 현관서부터 가을비 추적추적 뿌렸지.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나란히 서 있던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 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말보다 더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 너무 많았다」 전문 「말이 너무 많았다」는 죽음을 경험한 시인의 차분한 언어들이 동원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어제 저녁” 가까웠던 이의 부음을 접하고 “빈소”에 다녀왔다. 안타까운 마음일 것이다.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일 게다. “이제”, “어제”의 “너와 나”는 꿈속에서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현관서부터” “추적추적 뿌렸”던 가을비는 이런 화자의 공허한 심리상태를 우회적으로 반영한다. “이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없는데”라는 화자의 읊조림에는 ‘너’를 향한 그리움과 아쉬움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너와 나”의 “어제”와 “이제” 사이에는 느닷없는 죽음이 가로 놓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는 ‘너’의 죽음을 처연한 슬픔의 분위기로 몰아가지 않는다. 애도의 마음을 부러 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시인은 “높낮이 서로 다른 비 맞는 소리를/비긋는 한 소리로 내고 있는” “키 엇비슷한 목련과 오동”을 모나지 않게 적재함으로써 “말보다 더한 말”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유도한다. 죽음을 계기로 “서로 다툴 일도 척질 일도” 많았던 “어제”를 봉합하고 “이제”의 내 삶에서 ‘너’와의 진정한 관계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 기실 황동규에게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단절도, 우리의 현재와 무관한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본원적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절대적인 계기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 죽음은 “어제”의 일상적 시간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건으로 인식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마감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인간의 짧은 삶에 ‘그때그때마다’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시 「말이 너무 많았다」가 ‘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말보다 더한 말”의 진실을 “이제”의 삶에서 환기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입춘 가까워 추위 잠깐 풀린 어제 저녁 시의 혈관 건강 살피는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 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그만 내 뇌혈관 상태 들키고 말았다. 운 떼려다 멈칫하게 만든 낱말, 신문이나 휴대폰에서 매일 두세 번씩 만나고 언제부터인가 가족이 모일 때 내가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 즉시 요양원 보내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그 말,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 디멘셔(dementia) 하고 말았다. 이리저리 설명하니 이교수가 치맵니다, 했지.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셈이지만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별일은 참 별일이다.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 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쓰며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 센강에 몸 던진 시인 파울 첼란, 그가 독일어로 마신 ‘검은 우유’가 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다.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 전문 「지워버린 말을 찾아서」는 노년의 시인이 겪은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시의 화자는 모처럼 “비평가 이숭원 교수와/사당동 조그만 횟집에서 만나 한잔하다가” 노년의 불편함에 난감해 한다. “아무리 해도” “그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교수가 치맵니다,” 말하고 나서야 세월의 늙음이 “지워버린” “그 말”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바로 조금 전 글 쓰다 어제 그 말 넣으려 하자/이번에도 영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할 수 없이” “사전 꺼내 dementia를 찾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시인이 경험하는 노년의 불편함이란 당연히 기억력의 감퇴이다. “뇌혈관”의 노화가 야기하는 이런 불편함은 사실 “참 별일이다”라며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정도에 따라 “그 병에 걸리면 집에 두지 말고/즉시 요양원 보내”야 할 만큼 걱정스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 낱말이 “신문이나 휴대폰에서/매일 두세 번씩 만나”는 흔한 모국어라면 사태는 보다 심각하다. 그렇기는 하나 시의 화자는 이 난감하고 걱정스러운 국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쾌하게 돌파하는 듯하다. “한평생 영어로 먹고 산”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음에도 “매일 뇌에서 영어 낱말 열 개씩 지워지는 지금”, 영단어 “dementia”가 아니라 “치매”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분히 혼란스럽기는 하되, 이마저도 삶의 “별일”로 인정하고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로써 “지워버린 말”의 사소함과 심각함 사이의 긴장감은 “별일은 참 별일이다”라는 시인의 무심한 독백으로 무리 없이 해소된다. 이 시가 노년의 불편함과 난처함을 호소하는 차원에서 단순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소환하는 극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어제 저녁”부터 “아침”까지 시인에게 발생한 일종의 이중 언어(정체성) 문제는 곧바로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유대 종족 말살 행한 독일인의 말로 시를” 쓴 시인 파울 첼란의 삶으로 이월되는 것이다. 특히 파울 첼란의 「죽음의 둔주곡」(Todesfuge)이 음악적 형식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적 모티프의 반복·변형 구조를 취한 작품임을 염두에 두면, ‘과거’ 시적 화자와의 친연성마저도 확보된다. “검은 우유가/새삼 생각나는 아침”이라는 시구가 전혀 어색하거나 새삼스럽지 않다. 이렇듯 황동규의 근작 시편들은 여전하다. 여전히 그의 시는 “밝고 생생한”(「프리지아」) 생명과 마주하고 실존의 삶을 향유하며 환한 생의 감각으로 세계를 노래한다. 만년에 들어서도 시인은 “어제”를 봉합하며 거듭나기를 꿈꾼다. 어쩌면 저 근작 시편들 뒤에서 시인은 속엣 말로 이렇게 되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년의 필연적 변화, 하지만 그 불편함과 난처함마저도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맛’이고 ‘사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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