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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동문학평론 | 2024년 겨울호(제193호)

결핍을 장점으로 만드는 동화의 힘

박종순 문학평론

朴宗順 girincho64p@hanmail.net 아동문학평론가. 2003년 ≪아동문학평론≫ 평론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2009년 창원대학교에서 「이원수문학의 리얼리즘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남아동문학상(2012)을 수상했으며, 현재 국립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북한 아동잡지의 체제와 아동 글쓰기의 이데올로기 내면화 경향 연구」, 「근대 아동잡지 『신소년』의 소년문예 독자 성장과 문예 작품의 변화 양상 연구」등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연구교수 지원으로 학술지에 게재한 다수의 논문이 있으며, 저서로는 공저 이원수와 한국 아동문학(창비, 2011),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아동청소년문학』(창비, 2023)와 평론집 『아동청소년문학의 시대』(소소담담, 2023) 등이 있다. 세계방정환학술대회(2023)에서 주제논문 「『어린이』 동요 운동의 현대적 가치와 확산 가능성」을 발표하는 등 학술발표회 다수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1. 책을 좋아하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래서 책을 쓰는

 

  경상권에 함께 살고 있는 아동문학가임에도 만날 일이 드물었던 문선희 작가를 기억하는 건 아동문학평론에 몇 년간 게재되었던 해외 아동문학 소개 글이었다. 2018년 미국 스테이트칼리지에 있을 때 한 도시가 한 권의 책에 뜨겁게 호응하는 모습을 들려주기도 하고, 2002년 영국 케임브리지시에 있을 때는 작가가 열중해서 읽었던 영국 아동문학을 꼼꼼한 줄거리와 함께 소개하는 글까지, 두루 알려주는 소식이 재미있어 가끔 읽곤 했다. 다시 찾아 읽은 CORAM BOY 소개 글에서 문선희 작가는 영국 최초로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한 자선단체 코람병원을 언급하며 자선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했다. 더불어 그가 쓴 동화 토리의 꿈을 관심 있게 보게 했다. “작품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경탄스러운지,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인지, 긍지 슬픔 사랑 고통 외로움마저도 삶이 주는 축복의 한 형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兒童文學評論』 Vol.43)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그 역시 작품 쓰기에,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아동문학 글쓰기에 얼마나 진심일지를 가늠하게 된다.

  문선희(文善姬, 1954~ )가 아동문학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86<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소나무와 민들레가 당선되면서다. 공부하는 남편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5년간 머물며 쓴 동화가 당선의 선물을 안긴 것이다. 멀리 해외에 있으면서 우리말을 쓰지도, 그리운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더욱 아이들에게 가식적이고 허황된 이야기가 아닌 진실하고 절실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지 않았을까. 또한 환상적인 마무리로 동화의 속성을 유감없이 살려 놓았다.”(이재철, 어효선)라는 심사평을 얻은 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에 바쳤던 열정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일 테다. 독서와 습작을 꾸준히 했던 것이 등단의 비결이었다고 스스로 밝힌 것처럼. 울산에 터를 잡고 작품 활동을 하던 그가 어느 인터뷰(“울산의 아름다운 서재”)에서 밝힌 것처럼 그에게 책은 읽어야 하는 도구인 동시에 써야 할 목표이기도 했다.

  문선희 작가는 학창 시절 동네 작은 책방에서 다달이 나오는 잡지 학원을 사 읽으며, 새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를 좋아했고, 달마다 연재되는 이야기에 설렜던 독자였다. 또한 스스로 습작할 정도의 재능을 지닌 문학소녀이기도 했다. 이후 간호학과에 진학했으나 예술적 끼는 사그라들지 않았으니, 해외에 머물면서도 그 외로움을 문학적 열정으로 끌어올렸으리라.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현대영문학과 문예창작 과정을 마쳤으며, 울산에 터를 잡고는 다시 울산대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는 등 문학 이론과 창작에 대한 토대를 다졌다.

  등단 이후 문선희 작가는 유아 동화와 연작 동화를 꾸준히 발표하는가 하면 단편동화집 까치고모』(윤진, 1991), 『말하는 거북이』(현암사, 1995), 『무지개 다리』(책만드는집, 1997)를 출간하고, 저학년 장편동화 하나님의 칫솔』(국민서관, 1998), 『왕바보 내 친구』(문원, 2004), 『벙글이 책가게 단골손님』(강같은평화, 2011), 『토리의 꿈』(푸른고래, 2022) 등을 차례로 출간하였다. 그리고 청소년 장편소설 장다리꽃』(사계절, 2004), 장편소설 사랑이 깨우기 전에 흔들지 마라』(책만드는집, 2007), 단편소설집 바람, 바람, 코로나19』(산지니, 2020) 등을 출간했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기문 박상진-광복회 총사령 우국충정의 일대기』(책만드는집, 2010)에 이어 어린이용 전기문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책만드는집, 2011)을 출간하는 등 지역 인물을 다루는 책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문선희는 지역에서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지역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확인해 가는 작가이기도 하다. 1999<울산아동문학회> 창립에 함께하여 사무국장을 맡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울산 아동문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동문학평론』(2024년 봄호)에 기획으로 발표한 <울산아동문학회> 소개 글을 보면 지역문학이 가야 할 길을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또한 2021년에는 <세린문학회>를 결성하여 지역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확장해 가고 있으며, 지난해까지 작품집 세린문학3호까지 발간하는 등 회원 작품 활동을 격려하며 지역문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2. 성경적 지혜를 일깨우는 동화의 섬세한 동심 표현

 

  문선희 작가는 성격적 지혜를 어린이들에게 일깨우고 싶어 하는 마음을 동화 곳곳에서 드러낸다.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어린이 마음에 심어주고 싶기 때문일 테다. 그런 측면에서 문선희 작가는 행복한 사람이다. 어린이를 만날 수 있다는 그 자체로도 감사할 일 많은 사람이다. 동화라는 형식을 빌려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성경창작동화라는 꼭지를 달고 출판한 동화 벙글이 책가게 단골손님은 재개발 지역의 시장을 중심으로 엮여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시장 바닥을 뒹굴며 떼를 쓰는 아주머니도 있지만 이번 장마는 참 착한 것 같아요. 비 한 보따리 뿌린 후 햇살 한 아름. 촉촉한 산길 맨발로 밟는 듯 상쾌한 느낌이 새롭습니다.”라는 글을 가게 앞에 내걸어두는 미경이 엄마의 <이불가게>도 있다. <벙글이 책가게>를 하며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건우 할아버지도 있다. 이름도 없이 노숙자 1,3,5로 불리는 사람들도 있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닭집 하는 할머니와 살며 통닭을 배달하는 중학교 3학년 상민이 형도 있고, 종이박스를 모으느라 리어카를 끄는 수옥이 할아버지도 있다.  

 

“건우가 돋보기로 글을 읽기 시작하자, 글자 크기가 확대되었어요. 중국산 가짜 조기, 짝퉁 명품 가방, 시험 점수 조작, 기업체 비자금 적발, 거짓 증언, 가짜 고춧가루 등등 ‘가짜’나 ‘거짓’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 많았어요.
돋보기로 ‘가짜’란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햇볕을 모았어요. 한참 만에 종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어요. 글자가 서서히 타들어 가기 시작했어요.
건우의 머릿속에 ‘진실’이라는 낱말이 두둥실 떠올랐어요. 동시에 자신의 생각이 쑤욱 자라는 것을 느꼈어요.(『벙글이 책가게 단골손님』)

 

  책을 많이 읽으면 지혜가 생기니 지혜는 책이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벙글이 책가게 할아버지는 말한다. 그것을 작가는 할머니의 돋보기로 손때 묻은 성경을 읽듯, 작은 일에도 올바른 생각을 키우면 지혜가 생긴다고 믿어요.”라는 문장으로 설명한다. 또 건우는 돋보기로 글을 읽듯, 생각에 초점을 맞추니 건우의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으로 문제를 풀어간다. 그렇게 성장하는 건우는 떼쓰며 시장 바닥을 뒹구는 아주머니나 노숙자 아저씨들에게도 진짜 꿈을 되찾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을 꾼다. 이처럼 약한 사람이든 강한 사람이든 이웃과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혜가 있으니, 살만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본다고 스스로 높은 체 착각했던 날을 돌아보며 이제부터 반달일 때는 물론이고 초승달이거나 심지어 일식일 때에도 감사하게 살 테야.”(「반달과 코스모스」, 『말하는 거북이』)라는 반달의 마음도 낮은 데로 향한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꿈을 안고 성난 바람과 먹구름을 이겨내는 코스모스를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처럼 코스모스나 반달이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묵묵히 견디며 주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도 성경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교회 한구석에서 쓸모없이 버려진 낡은 풍금에서도(「저절로 연주하는 풍금」, 『말하는 거북이』) 그 마음은 그대로 전해진다.

  한글책이 없던 미국 펜실베니아주 생활에서 두 아이를 키우던 문선희 작가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썼다는 동화 소나무와 민들레amazon kindle store에서도 영문판으로 시판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두 남매가 부모를 잃고 새 부모와 어렵게 살다 나중에 작은아버지를 만난다는 이야기다. 마치 어린 두 남매가 시련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있으며 그 시련으로 더욱 단단해지고 마음 따뜻한 소통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작가는 작품 속 어린이가 어머니와 아버지 살아계시던 때를 그리는 장면, 두 분을 잃게 되는 장면을 아릿하면서도 환상적으로 그려냈다. 새엄마새아버지와 함께 살며 견뎌내야 하는 시련이 있을 때는 신문 배달하며 만나는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는 따뜻한 마음도 엮어낸다.

  그리고 붉은 잎을 단 큰 나무에서 어머니의 붉은 치마를 보게 된 어느 날, 남매가 작은아버지를 만나는 환상적 장면으로 소나무민들레라는 두 아이의 이름을 찾는 데까지 나아가며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한다. 슬픔과 고난을 다 이겨낸 두 형제는 비로소 본래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두 남매가 그토록 크고 시린 시련을 감당해야 했던 이유였던 것으로 읽힌다. 그래서 이 동화는 슬프고 고달픈 장면도 기쁘고 뿌듯한 장면도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으로써 어린이 삶에 사실성을 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환상성으로 그 슬픔을 이겨낼 상상력을 안겨준다. 판타지적 요소가 사실은 현실보다 더 소중한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장치를 잘 심어둔 동화다.

 

3. 고아 없는 세상을 만드는 디딤돌, 동화

 

  전 세계에는 1억이 넘는 고아가 있으며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18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유엔 세계 고아의 날>을 제정하자고 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마다 고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면 좀 더 좋은 세상이 되리라는 꿈을 꾸며 함께하자고 모였던 일이다. 문선희 동화에 유독 고아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작가 역시 이런 문제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단작 소나무와 민들레의 주인공 남매도 고아이고, 어린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토리의 꿈은 작가가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정을 염원하고 쓴 동화다. 고아 없는 세상을 만드는 디딤돌로써 동화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 그렇게 작가는 세계 고아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작은 불씨를 살리고자 동화를 쓴다고도 했다.    

  중편 동화 토리의 꿈은 작가가 사는 곳 근처 <울산 양육원>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고 그런 이유로 취재하여 쓴, 실화에 바탕을 둔 동화라고 한다. 도토리처럼 야무지고 옹골차게 자라라는 뜻으로 이름 토리를 지어준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고 버려진 아이가 주인공이다. 토리는 양육원으로 들어온 후 형들도 새아빠도 새할아버지도 만난다. 그래서 새로운 꿈을 꾸며 따뜻한 희망을 품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상상력을 선사한다.

  토리가 고아원까지 가게 되는 경위, 고아원에서 만나는 형들의 아픔과 갈등, 새아빠의 사연
그리고 전쟁 때 고아가 된 할아버지 이야기까지 모두 작가가 만난 사람들일 테다. 새엄마와 살던 토리는 늘 아빠도 형도 누나도 동생도 있는 집,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많은 집에서 살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고아원에 들어와 그 꿈이 이루어졌다. 아이러니다. 가족이 아무도 없어 고아원에 오게 됐는데 더 많은 가족이 생겼다. 어렸을 적 양육원에서 자랐다는, 그래서 고아인 토리 마음을 더 잘 헤아리고 배려하는 새아빠의 관심과 사랑 덕분에 새로운 꿈도 꾸게 되었다.

  이 동화에서 작가는 사랑은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계속 이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할아버지가 고아원에 왔을 때, 새아빠가 양육원에 들어왔을 때, 토리가 양육원에 맡겨졌을 때 그곳에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줬던 품이 있었다. 자신만큼 외로운 상대를 만났을 때 자신이 받은 이상의 사랑을 오롯이 상대를 향해 나누는 가운데 더 큰 사랑이 생겨난다는 사실. 이처럼 문선희 작가는 고아의 문제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한 대에서만 이야기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을 베풀 때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이런 구성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누구든 혼자 쓸쓸함을 느낄 때 외로움을 느끼는 것과 같이 고아의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 손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염원하며, 동화로 그 힘을 보태고자 했다.  

 

4. 어른 세계의 모순을 날것으로 보여주는 작가

 

  어린이 화자가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화에서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는 어른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동화 쓰는 사람이라면 늘 고민한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표현 역시 수위 조절에 조심스럽다. 어린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에 적절하고 효과적인가도 배려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문선희 작가는 다소 대담하게 날것 그대로를 드러내는 편이다. 어떨 때는 어른보다 일찍 철든 아동이 등장하는데 그게 어색하지 않을 때가 있다.

 

“고모는 와 기다립니꺼? 아부지가 술을 많이 드셨기 때문에 고모가 너무 고생 아입니꺼? 고모도 이제부텀은 편안히 살아야 할 꺼구먼요.”(「까치 고모」, 『까치 고모』,)

 

  아버지가 화를 내며 손찌검을 해도 단단하게 할 말 하는 어린이 화자를 그리고 있는 단편 동화 까치 고모의 섭이가 하는 말이다. 어려운 환경에 철 들어가는 아이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데 사투리도 한몫한다. 무절제한 음주로 쓰러진 아버지 약값뿐 아니라 조카와 집 걱정으로 결혼도 못하고 고생하는 고모 때문에 마음 아픈 아이의 항변은 어른인 아버지를 다잡고자 하는 뜻이다. 고모에게도 아버지 약한 마음을 다잡자고 더 이상 집에 오지 말라고 어른스럽게 말한다.

  어린이 삶 자체의 문제보다 어른인 아버지로부터 촉발된 문제이고, 어른인 고모의 위로와 다짐으로 서서히 철이 들어가고 있는아이의 모습으로 결말지어지는 동화를 어린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린이 삶과 어른 삶이 분리될 수 없다는 문제는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미래를 다짐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그 속에서 세계의 모순을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동화문학인데 어른 세계의 문제를 어린이가 안고 있으며 어른보다 더 어른처럼 행동해야 하는, 그래서 너무 일찍 현실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 안쓰럽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후반에 환상적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고모의 격려를 받으며 멀리 보이는 섭이의 판잣집이 꿈을 키우는 도서관처럼나타나면서 섭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처리한다.

 이 아이는 어른에게 보호받기보다 오히려 어른을 걱정하고 어른을 배려한다. 스스로 독립하려 하고 때로는 어른을 넘어서고 있다. 아동문학가들이 잘 쓰지 않는 아동의 형상이다. 성인의 아동에 대한 인식을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다. 루소의 말처럼 우리가 어린이에 대해서 그릇된 인식을 하는 한, 더욱 방황하게된다는 것을 고민해본 지점이다. 삶의 문제와 부딪히면서 살아야 하는 어린이가 스스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어른으로서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절실함을 염려하는 마음이 전해온다.  

  단편동화집 무지개 다리』(1997)를 엮으며 작가는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미국에 있으며 글을 쓰게 되었기에 더욱 가족과 모국의 귀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1980년대 뉴스로 전해지는 광주민주화운동, 아웅산 테러 사건,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 등을 타국에서 접하며 늘 깨어 있어야겠다는 그때의 다짐이 혹시라도 퇴색해지거나 변질될까 봐 겁이 나서 아무도 몰래 웅크리고 앉아 나를 단근질하며 썼던 작품들을 모은 것이라 했다. 그러다보니 이 작품집 안에는 과학 문명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곳곳에 그대로 배어나고 있다.

 

“청소 시간과 빨래 시간에 맞춰진 로봇들은 어김없이 제시간에 청소와 빨래를 했고 그 로봇들을 작동하는 큰어머니가 그렇게 재미있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종철이 남매는 별천지에라도 온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계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아 삼 년 전에 느꼈던 편치 않은 기분은 여전히 들고 말았습니다.”(「종철이 남매의 여름방학」, 『무지개다리』)

 

   방학이면 늘 기대와 설렘으로 방문했던 큰아버지 댁을 사람 대신 로봇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 두 남매는 영 불편하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당신의 명령에는 따를 수 없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씨가 나올 뿐 텔레비전 하나도 스스로 켜지 못하는 집이다. 결국 시골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두 남매에게 큰어머니는 태양에너지로 달리는 최첨단 자가용으로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으나 두 남매는 시외버스를 탔다.” 당당히 자신들 스스로 버스를 타고 걸어서 집으로 들어온 두 남매는 마당에 심겨 있는 화초들에게 말을 걸며 자연스러운 생활에 안도한다.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혜롭게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두 남매를 통해 들려주고자 하였다.

  문선희 작가는 이처럼 유독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나 모순을 비추거나 들추어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가식적이고 허황된 이야기보다 절실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어린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일 게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작가의 눈길, 탐욕 세태를 비판하는 작가의 의식, 그 가운데 우리가 희망하며 주고받는 말의 힘을 믿는 아이들을 통해 건강한 미래를 시사하고 있다.

 

5. 자신의 결핍을 오히려 장점으로 만들 줄 아는

 

  동화를 펼쳐 첫 페이지를 읽으며 바로 기분 좋아지는 작품이 있다. 『나의 분홍 삼순이가 바로 그렇다. 학급 반 아이들의 번호를 정하는데, “남학생과 여학생을 구별하지 않고 ㄱ, , ㄷ부터 ㅎ의 순서대로정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 번호 정할 때 남학생을 먼저 앞세우고 뒤에 여학생 번호를 매기는 것, 심지어 키 큰 순서대로 번호를 정하는 것에 인격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던 터라 작가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져 좋았다.

  일기 형식의 동화에서 일기를 쓰는 당사자는 시험관 아기박금동이며,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는 아버지가 누워만 있는 썰렁한 집에 사는 여자 아이 이상아다. 금동이를 금똥이로 부르고, 상아에게 세 가지 유별난 버릇이 있어 삼순이로 부르는 사이다. 시작부터 금동이가 쟤는 왜 세 가지 버릇에 길들여졌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면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로 성장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장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담은 금동이의 일기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일기 중간에 등장하는 폐품 모으는 고물상 아저씨는 혀 짧은 언어장애를 가졌다. 금동이는 시험관 아기로 태어났고 삼순이는 고아원에서 데려와 키우는 아이다. 삼순이 아버지는 군대에서 사고를 당하여 척추를 쓰지 못해 누워만 있으며, 이 학교 교장 선생님도 군대에서 한쪽 어깨를 다쳐 그 어깨로는 가방도 못 메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고물상 아저씨는 폐품 모은 것으로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맹그러쓰고 만날 곡조도 없고 가사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닌다. 교장 선생님은 학급 친구들에게 아버지 상태가 알려져 난감해하는 상아네 집에 방문하여 상아 아버지 손을 잡고 자신의 장애를 이야기하며 위로한다. 시험관 아기 금동이는 나쁜 기운을 가진 검정나방을 향해 나는 시험관 아기니까, 난 특별한 존재니까, 욕은 하면 안 되는 거야.” “난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거든.”이라고 당당하게 맞설 줄 아는 아이다. 모두 자신이 가진 결핍과 문제를 오히려 장점으로 믿으며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이 동화의 빛나는 지점이다. 일기라는 형식을 취한 동화라 주인공 금동이의 이런 마음이 직접적으로 전해지니 더 당당해 보인다는 것도 장점이다.

 

상아가 나를 올려다보았어. 나는 빙긋 웃었어. 그러고는 쏜살같이 화장실로 달려갔어. 오줌을 시원하게 누고 나서, 손을 깨끗이 씻었어.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서, 혀를 쏘옥 내밀어 보았어.
내 분홍빛 혀는 짧지만, 내 혀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 깨달았어.(『나의 분홍 삼순이』)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손을 씻은 금동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고민이 해결됨과 동시에 단단한 마음 근육을 키운 자신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록 13일 동안의 일기지만 학급 친구들과의 갈등 가운데 금동이와 삼순이의 갈등을 풀어가는 사려 깊음이 들어 있어 따뜻하다. 또한 일기의 핵심에는 자신과의 약속이 들어있기 마련이니, 금동이의 미래 자신과의 약속이 결국 단단한 아이로 성장하게 해주고 있음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작가가 새로 생긴 도서관에서 독서토론을 맡았을 때 만난 어린이들이 들려준 사연을 가슴에 안고 있다 쓴 동화책이라고 했다. 그 아이들의 마음이 단단한 돌처럼 굳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썼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장편 동화 한 권을 쓰면서 내내 마음을 졸이다가, 주인공과 친구들의 마음이 밝아지면서작가의 마음도 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작가로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어린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작품이며, 영문판 『My Pink Samsoon』이 아마존 어린이 도서 코너에서도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단편동화 말하는 거북이」(『말하는 거북이』)에서는 느릿느릿한 거북이가 느린 걸음으로 어린이 문제를 천천히 풀어가는 힘을 보탠다. 시간을 훔치는 어른들, 어린이 시간을 훔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시간도 빼앗기는 어른들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더구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자식의 시간을 빼앗고 훔치는 행위를 하는지,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들려주는 이 동화는 발표한 지 오래된 작품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서 거북이가 시간을 생명 자체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동화에서 정아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정아의 시간을, 그리고 정아라는 존재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일에도 느린 거북이가 돕고 나섰다.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학교도 싫고 집도 싫어.~”라고 하는 정아의 무거운 마음은 느릿느릿한 거북이 조곤조곤 말하는 정아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주었기 때문에 밝아졌다. 느리게, 천천히 들어주고 함께할 때 결핍을 채우고 생명 자체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것을 거듭 말하고 있다.

 

6. 문선희 작가는 장다리꽃이다

   

  문선희 작가는 울산의 특이성다양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다정한 문화, 따뜻한 공동체를 일구어 나가고자 <세린문학회>를 이끌고 있다. 감사할 일 많은 동화 세계를 실천하고자 하는 뜻으로 만든 문학 단체이며, 단체 활동으로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행위로도 읽힌다. 지역 어린이를 만나며 자료를 충실히 찾아 쓰고, 도서관과 함께하는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다. 누가 뭐라 하든 스스로 찾고, 쓰고, 전하며, 자신의 향기를 드러내고 있는 작가가 지역 문학을 이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다.

  문선희 작가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자료 찾기에 진심인 특징은 작품 곳곳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작품을 집필하고자 할 때 먼저 철저한 자료 조사를 끝낸다고 하는 것, 장편 청소년소설 장다리꽃을 쓰는 데 12년의 시간이 걸린 이유이다. 배경이 되는 마을을 찾아 온몸으로 마을을 느끼기도 하고,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과 전쟁, 그리고 복구기의 시대 상황과 그 가운데 사람들의 삶을 실제처럼 그리기 위해 다양한 자료 조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선희 작가는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며 작품 쓰기를 이어간다. "삶이란 아무도 돌봐 주지 않아도 제 나름의 모양과 빛깔을 가지고 소박하고 수수하게 피어나는 장다리꽃과 같은 것이다."(『장다리꽃』)라고 했듯이, 그의 삶도 어린이 삶도 우리네 삶도 누가 돌봐 주지 않아도 스스로 모양과 빛깔을 가지고 피어나는 장다리꽃이다. 겨울을 보내고 새봄을 알리는 들판에 노랗게 피어난 장다리꽃처럼,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며 꿈을 키우는 어린이를 상상하며 글을 쓰는 문선희 작가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제 스스로 향기를 뿜어내는 장다리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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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란 허공을 개간하는 꿈의 파수꾼 ― 황성희 시집

황성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아침달, 2024)를 열면, 일상과 환상이 정밀하게 직조된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쉽게 의미화되지 않는 문장들, 때로는 잔혹동화처럼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들이 마치 타인의 꿈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생경함을 불러일으킨다. “의미를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의미를 만드는 방식”(「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이라는 표제작의 한 구절을 통해 유추해본다면, 시인이 그려내는 세계란 소거된 의미의 빈자리에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이 들어선 비정형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꿈의 주인공은 아이(소녀)이거나 혹은 아이의 상태에 머무르는 어른으로 추측된다. 가령 이 시집에 첫 번째로 실린 작품 「쓰레기 소녀」에는 현재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장난감인 ‘나’가 등장한다. “처음 밀봉에서 나를 꺼내던 기대에 찬 손들”은 ‘나’가 한때 근사한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암시하지만, “누군가의 파티에서/달콤한 케이크와 함께 그이의 집까지 들려갈 줄 알았”던 화자의 기대는 폐기되는 고통과 함께 좌절되고 만다. 낡고 버려졌지만 여전히 ‘소녀’의 상태를 유지하는 장난감. 시간의 흐름을 기묘하게 빗겨난 ‘쓰레기 소녀’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과거에 조난된 채 “꿈속과 꿈 밖 사이를 미끄러지”(「소라게 시계」)듯이 걷는다. ‘소녀’의 의식을 장악한 과거는 시집에 빈번하게 출몰하는 ‘어머니’와 연관이 깊다. “어머니는 간간이 나타나서/늘 그랬던 것처럼 다가오지 않았다”(「철부지 토네이도」)와 같은 고백적 언술로 전달되듯이 어머니는 ‘나’에게 한없이 냉담할 뿐만 아니라 온몸을 동반해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다. 어머니는 “내가 제대로 묻혔는지 봉분을 발로 밟아 다지고 또 다”지며 ‘나’를 더욱 견고하게 매장시키고(「이토록 아름다운 소녀 대잔치」), 그의 손목은 “내 목을 조르던 마지막 모양 그대로 굳어” 있다(「언니, 엄마는 아직도 사과를 싫어해?」). 목을 조른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의 모습은 목줄에 묶인 ‘개’의 몸부림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가끔 목줄을 찬 채로 높이 뛰어오르면/허공의 목을 캑캑 조르는 재미가 있었다”(「개자식 여러분」), “개는 허공 속으로 혀를 내밀어/양쪽 입가를 천천히 핥아 내린다”(「개 한 마리의 지구력」)와 같은 대목에서, 허공을 향해 뛰어오르고 혀를 밀어 넣는 ‘개’의 유희는 목줄의 반경과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물론 황성희의 화자가 어머니의 폭력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시 「손목 걱정」에 이르면 애정을 향한 딸의 갈망은 증오로 돌변해 어머니의 손목을 자르는 잔혹함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냉정한 어머니는 자신의 손목이 잘려나가는 순간에도 “그 흔한 애원”은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다. “어쩌면 나의 소원은 불편이라도 되고 싶은 것이었나/못 견딜 불편이 되어서라도 어머니께 해결되고 싶었나”라는 화자의 나지막한 읊조림에는 차라리 성가신 존재가 되어서라도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자 하는 딸의 절박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렇듯 황성희의 시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어머니와 딸의 폭력적인 관계는 다만 개인이 겪는 고통의 차원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상징질서를 철저히 내면화한 어머니는 딸을 통제할 수 있는 소유물로 간주하며 명령을 내린다. 상징질서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는 ‘소녀’의 혼란스러운 발화는 상징계의 언어를 체득한 어머니가 휘두르는 동일시의 폭력에 기인한다. 그런데 황성희의 ‘소녀’가 지닌 특성은 어머니에 대한 반발과 저항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잡성을 갖는다. 사랑과 분노, 연민과 서글픔이 어지러이 뒤섞인 ‘소녀’의 감정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못한다. 예컨대 「언니, 엄마는 아직도 사과를 싫어해?」의 화자는 어머니와 “달지도 시지도 않은 덜 익은 사과 맛 같은 대화/이상한 맛이 나면 씹다가 뱉기도 하는 그런 대화/그래도 나는 계속 사과를 내밀게 되는 그런 대화”를 나눈다. 거듭 중단되는 어머니와의 대화는 ‘덜 익은 사과’의 맛처럼 떫고 불쾌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사과를 내밀”며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나아가 화자는 “뜯어낸 어머니의 손목을 징표처럼 목에” 걸고 “그래도 좋아 드디어 어머니의 손을 가졌으니까”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손은 ‘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부위인 동시에 ‘나’가 그토록 갈구했던 애정과 온기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을 ‘징표’로 박제하고 간직하려는 화자의 페티시즘적 행위에는, “나와 달 사이/나와 별과 태양 사이”(「철부지 토네이도」)의 아득한 거리를 초월해 어머니에게 닿고자 하는 딸의 염원이 잠재해있다. 눈에 띄는 점은 이 시집에서 어머니의 폭력과 함께 발현되는 ‘소녀’의 애증은 자신을 비롯해 우리를 억압하는 세계의 질서를 향한 분노로 점차 확장된다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이 세계의 자본을 지켜볼 것이다/동전 하나에서 시작해 이제는 암호가 되어가는”(「관찰자 시점」)이라는 구절을 통해 언급되고 있듯이, 황성희의 화자가 목도한 세계는 암호처럼 은밀하게 위장된 자본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한밤의 무인 편의점 앞에서” 일자리를 잃고 쓰러지는 노동자(「관찰자 시점」), “어느 나라의 침공이 방영되”는 텔레비전(「우리 사이에 통용되는 기법」), “내가 판 무기로 다친 아이들에게 내가 모금한 돈으로 우물 파주고 학교 지어주고 아이들은 그런 후원자님께 감사의 편지를 쓰고, 다음 날이면 온정의 폭격으로 없어지는 마을”(「창작의 시대와 새의 절망」)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풍경을 이룬다. 진보와 발전의 논리가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돈으로 은폐하는 알량한 위선의 세계. 시인은 이곳의 ‘관찰자’를 자처하며 도처에 널린 폭력을 끝끝내 응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질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황성희의 문장들이 난해함의 장막을 뚫고 진솔한 고백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시인이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되묻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를 거대서사로부터 소외당한 열등생”으로 인식하는 황성희의 화자는 자신이 “거대서사를 학습하고 구사하려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고민 속에서 “거대서사 대신 트렌드를 말해야 한다”(「소련 사과와 옥희 선생」)는 시인의 현실에 서글픔을 느낀다.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어디서 강의를 하는지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개인 사정으로 인한 결투」)를 걱정하는 시인은 “내가 살아온 시절은 뚜렷하긴 했지만/누구도 그 앞으로 불러세우지 못했다”(「태양 아래서의 성찰」)는 사실에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시 쓰기에 대한 시인의 치열한 자의식은 이 시집에 등장하는 또 다른 시적 주체인 존재인 ‘김’을 통해 구체화된다. “살롱과 인문을 좋아하고 전쟁은 싫어하나 전쟁사에는 해박하고 혁명에는 문외한이나 혁명사에는 두각을 나타”(「김의 신냉전 수법과 간호사의 의문 세계」)내는 ‘김’은 현학적인 지식에 도취된 자이기도 하고, “되찾은 자신의 안정을 생각”(「개의 희생」)하며 사소한 일상에 안주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허공을 개간하여 사과나무를 심는” 허무맹랑한 연구에 매진하며 “사과나무를 심기 위해 사과나무를 뽑고 다니는 기행으로/멧돼지보다 더한 농장의 골칫덩이가 되는”(「멧돼지보다 김」) 자이기도 하다. 희극적 인물인 ‘김’은 현실의 질서를 위배하는 광인이자 시인의 자아를 대별하는 분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세계와 내가 머물러 있는 세계는 서로 달랐다/나의 질병은 이 둘 사이의 거리에서 비롯됐지만”(「산타의 세계」)이라는 황성희의 고백은 그의 시가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절박하게 헤엄치는 시인의 (불)가능한 몽상임을 함축하고 있다. 암호화된 폭력의 불투명성과 비가시성 속에서 시적 분투는 과연 가능한가. 이 시대의 시인이란 목줄에 묶인 채로 허공을 향해 추락이 예정된 도약을 반복하는 몽상가에 불과한 것인가. 긍지와 수치, 분노와 절망이 교차하는 황성희의 자의식은 시집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알몸’의 형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알몸’의 광인이 발설하는 언어가 다만 난해한 꿈 안에 고립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작고 단단한 두 개의/동그란 세계를 선물해주고 싶은 이유”(「손바닥을 생각하는 이유」)가 있기에 시인은 시를 쓴다. 자신의 문장들이 현실 너머의 세계를 응시할 수 있는 두 눈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헐벗은 채로 허공을 개간하는 광인의 노역이, 닫혀 있던 우리의 영토를 조금씩 넓혀간다. 추천 작품: 「사람으로 지낸 어느 한 해」,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 「관찰자 시점」

계간 포지션 이은란 황성희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소녀어머니잔혹동화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정원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계간 파란 정원 단속정체성시선타자고맥락저맥락윤혜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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