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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딩아돌하 | 2024년 여름호(제71호)

SF시란 무엇인가

박동억 문학평론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됨. 저서 및 공저로 『오규원 시의 아이러니 수사학』,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침묵과 쟁론』, 『1950년대생 비평가 연구 2』 등이 있음.

1. SF,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2013)에는 시와 SF의 장르적 차이를 넘어서는 듯한 하나의 이미지가 제시된다. 그것은 바로 우주로 내던져진 인간이다. 영화의 핵심은 우주정거장에서 일어난 조난 사고이다. 라이언 스톤 박사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서 우주정거장에 파견되는데, 우주를 떠도는 잔해가 우주왕복선에 부딪히면서 순식간에 우주로 튕겨 나간다. 막막한 우주 속에서 한 인간이 생환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서사이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시적인 관조, 즉 텅 빈 우주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스톤 박사의 얼굴을 비추며 그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과학적 사고, 즉 합리적 판단에 근거하여 생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어느 방향을 보아야 할까.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시 장르의 시선이라면 세상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SF의 시선이다. 존재 이유에 대하여 자신의 내장을 추궁하여 답을 구하는 자가 시인이고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여 답을 얻는 자가 과학자이다. 시와 SF는 장르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자세이기 때문에 동궤에 놓기 어렵다. 그렇기에 그래비티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라이언 스톤 박사가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해결책을 환상의 형식으로 얻는 대목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스톤 박사는 간신히 비상 탈출용 우주선에 도착하지만, 연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는 웅크린 채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때 우주정거장의 사고로 죽은 동료의 환상이 나타나 그에게 힘을 북돋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계획을 알려준다. 이 환상은 과학적 사실과 시적 모호성이라는 경계를 흐트러트린다. 죽은 이의 목소리가 환상이라는 형식으로 내면에서솟아올라서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할 때 시적인 시선과 SF적인 시선은 교차한다.

이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타자의 환영이라는 형식이다. 스톤 박사는 분명히 체념한 채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타자의 환영은 자신을 미리 애도하던 자, 동시에 해결할 수 없던 난관에 부딪힌 자에게 삶의 의지와 해답을 전한다. 무엇보다 어떠한 타자인가. 쿠아론 감독이 선택했을 이 환상은 가족이나 친구의 형식이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죽음을 경험한 사람’, 즉 우주정거장의 사고 때문에 희생된(심지어 스톤 박사를 위해 희생한) 동료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 그래비티는 하나의 윤리적 물음을 남긴다.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 우리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얻고, 무엇 때문에 삶을 탐구하려는 자세를 견지하는가. 이 장면은 어쩌면 인간의 감성과 이성이라는 내면의 원동력을 넘어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은 나와 같은 경험 속에서 죽어가는 타인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영화 그래비티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암시하는 동시에 내가 미리 주장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다. 만약 SF시라는 장르가 가능하다면, 다시 말해 우리 시대에 합리적 사고와 정서적 사고가 동궤에 놓이는 말하기 방식이 장르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태도를 정립하는 의지와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적 성찰과 세계의 탐구라는 두 가지 시선 사이에서, 우리와 똑같이 세상을 바라보며 나란히 선 타자가 있다. 실상 그 타자야말로 우리가 관계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확고한 지평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수평적인 토대로부터 응답받을 때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살아낼 수 있고, 또한 세계를 기록할 의지를 얻는다. 나는 바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야말로 SF시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 현대시에서 SF시 장르가 규범화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1절에서는 그래비티에 대한 분석을 통해 SF시의 가능성과 그 조건, 그리고 SF시 장르의 필요성을 미리 암시하고자 하였다. 이제 문학적인 탐구로서 제2절은 SF 장르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할애된다. 하지만 이 글의 핵심적인 논지와 현대시의 분석만을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은 제2절을 건너뛰고 제3절부터 독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2. SF장르의 역사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는 단어에서 ‘fiction’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서사 장르를 가리키는 데 통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SF시라는 용어는 성립할 수 없거나 느슨한 의미로만 통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학소설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이는 1851년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 1801 ~ 1860)이었으며, 그는 과학소설이란 그 자체의 시적이거나 진실할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로 조직된 드러난 과학적 사실이라고 규정했다.1) SF라는 용어를 떠올리는 최초의 과정에서 시적인(poetical)’이라는 단어를 연상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흔히 문학이 욕망된 미래를 예시하고 과학이 실현 가능한 미래를 예시한다는 차이를 떠올려 보았을 때, 윌슨의 용례는 오히려 과학적 사실과 시적인 욕망이 변증하는 순간 SF 장르가 탄생한다고 설명하는 듯하다.

SF문학 혹은 ‘SF적인문학은 언제 탄생했을까. SF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적 형식으로부터 그 기원을 추론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1970년대 무렵부터 SF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나타난 이해의 방식이다.2) 상당수의 연구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SF의 효시로 꼽는다.3) 하지만 브라이언 올디스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SF의 효시로 볼 수 있는지 숙고했다. 더 나아가 SF 소설가이자 연구자인 아담 로버츠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 헤매는 영웅을 SF의 전형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존 밀턴의 실낙원(1674)SF문학의 기원으로 제안한다.4)

SF의 기원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은 SF문학을 소비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형성된 시기를 살피는 일이다. 이 경우 SF 장르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잡지가 형성되는 시기가 주안된다. 미국에서 SF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데는 휴고 건스백(Hugo Guernsback)의 기여가 크다. 그는 1916년부터 줄곧 ‘Scientifi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일군의 작품을 장르화하려고 했고, 19264월 최초의 SF 펄프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스>(Amazing Stories)를 창간했다. 비록 1929년 건스백은 파산했지만,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까지 경쟁적으로 SF 펄프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이로써 1930년대 미국에서 SF 생산하는 작가층과 소비하는 독자층이 형성될 수 있었다.5)

한국의 경우 식민지 시기부터 조금씩 SF문학이 번역되거나 창작되었다. 한국에 최초로 번역된 SF문학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1870)의 일부를 중역한 해저여행기담이며, 이것은 19073월부터 19085월까지 유학생 학회지인 <태극학보>에 소개되었다. 비록 유학생을 위한 학회지에 수록했다는 한계 때문에 많은 독자가 접할 수는 없었지만, 일본에서 유학하던 박용희가 쥘 베른의 번역에 임했던 동기는 허식공상에 빠진 전래의 소설을 극복하고 유학생들이 과학적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었다.

대중을 위해 번역된 최초의 SF문학은 190811월 희동서관에서 출간된 과학소설 철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1879)을 이해조가 번안한 소설이다. <황성신문> 19081210일의 기사 科學小說 鐵世界를 살피면, 이 작품이 미국의 소설가 가이위니(迦爾威尼)’(쥘 베른)의 소설이며 신지식계발에 유용하기 때문에 추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6) 이후에도 과학소설 비행선(동양서원, 1912) 제클과 하이드(조선야소교서회, 1921) 월세계여행(박문서관, 1924) 등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문해력을 갖춘 소수의 독자에게만 유통되었을지라도 SF문학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보다 본격적으로 SF장르의 독자층이 형성되려면 과학적 지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세대의 출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한국 최초의 창작 SF문학인 김동인의 단편소설 「K박사의 연구」(1929)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등장하지만, 본격적인 SF소설과 그 수용층이 등장하는 시점은 한국전쟁 이후에야 가능했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체제에 편입된 한국 사회에서 과학 교육은 이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출판사들은 경쟁적으로 과학에 관련한 아동서적을 간행했고 어린이과학전집(김용사, 1947) 소년소녀 세계과학모험전집(아데네, 1959) 등이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SF장르의 독자층이 형성되는 것은 1960년대 전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 교육의 입안과 맞물려 1960년대에 SF장르가 일반화될 수 있었다. 최초의 SF 장편소설인 문윤성의 완전사회(수도문화사, 1967)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학생과학>(1955. 11. ~ 1983. 12.)과 같은 청소년 과학 교양지가 창간되며 SF문학이 어린 세대를 매혹하게 된다. 하지만 SF문학을 하위 장르로 이해하는 관점이 지속했다. 이것은 1960년대 SF문학이 근본적으로는 우주를 개척하는 남성 주인공을 등장시켜 제국주의적 남성 문화의 확장을 실현해가는 이데올로기 서사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다는 분석처럼,7) 1960년대까지 SF장르가 순수문학의 소재적 변주로만 이해되었음을 뜻한다.8) 이처럼 SF문학의 형성에는 정치적사회적 요구가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작품의 다양성과 별개로 SF문학을 소비하는 방식은 리얼리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현재의 SF문학은 1990년대 탈중앙적인 소통의 매체, PC통신이 등장하는 과정을 배경으로 삼고 등장했다. 1990년대는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롭게 소통의 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네트워크가 형성된 시기이다. 1990년대에 복거일과 듀나와 같은 SF작가가 창작과 비평 양면에서 활동하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또한 2000년대에는 인터넷을 통한 SF 공모전이 등장하면서 장르 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최근 활동하는 김보영김초엽정세랑 작가의 SF소설에서 다루는 주제와 동시대 순수문학에서 다뤄지는 주제는 구별되지 않는다. SF문학은 사회적 관계에 대응하거나(페미니즘), 기후위기를 예각화하거나(인류세), 인류의 미래를 예견하는(포스트휴머니즘) 주제를 다루고 있다.9)

한 가지 간명한 사실은 SF장르의 중심에는 언제나 소설이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번역과 창작 양면에서 모두 그렇다. 이는 마치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과학적 상상력을 유통하는 방식, 그리고 국가 내에서 과학적 지식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서 소설이 적절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근본적으로 SF장르가 미래를 예시하는 장르라면, 서정적 순간을 다루는 시 작품보다 서사적 시간을 다루는 소설 작품이 SF적인 것은 타당해 보인다. 시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소설이 SF적인 인과관계와 합리적 세계관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밀어붙이고자 하는 것은 SF시라는 개념이며, 더 정확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SF시라는 개념은 왜 필요한 것인가.

 

3. SF시의 가능성 : 불안의 정동으로부터 불안의 상상력으로

한국 문화에서 SF문학은 적어도 세 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로 SF장르는 지식인 계급이 과학 지식이나 합리적 사고에 대한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교육의 도구였다. 식민지 시대에 쥘 베른의 SF소설이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둘째로 SF장르는 국가 차원에서 다른 국가와의 기술 경쟁에 임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육성하기 위한 매체로 확장한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 정부의 과학화기조와 맞물려 과학소설전집이 발간되고 SF잡지가 창간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90년대 이래 SF장르는 PC통신의 성립과 맞물려 대중적 소통의 장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SF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으며, 여성운동, 환경파괴, 동물권 등과 같은 주제를 공유하게끔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전개에서 SF문학은 곧 SF소설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귀납적으로 묻자. SF시 또한 SF소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교육의 도구이거나 과학 지식의 매체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시 장르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 장르는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보편적 앎을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고유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시에 과학을 도입하는 순간 언제나 과학적 경험에 대한 사적 체험의 승리가 행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SF시의 가능성이 형성되는 시기는 적어도 SF장르가 대중의 다성적인 발화구로 이행하는 1990년대 후반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SF가 과학 지식의 전달방식이 아니라 과학적 경험을 분유하는 대화 수단으로 인지될 때 비로소 하나의 시 작품에서 SF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과정이 의의를 지니게 된다. 최초로 가정할 것은 기술 발전을 공통의 현실로 목격하는’ 1970~1980년대 도시시의 주체가 기술을 주체화의 과정으로 체험하는’ 1990~2000년대 SF시의 주체로 이행한다는 전제이다. 주목할 것은 가능한 현실이 아니라 가능한 주체인 셈이다.

몸 속에 웹 브라우저를 내장하게 되었어. 야금야금 제 속을 파먹어 들어가는 달. 신이 몸 속에 살게 되었어. 신은 이제 몸 속에서 키울 수 있는 존재야. 몸 속에는 사철나무, . 목이 잘린 불상. 금칠이 벗겨진 십자가. 당신이 보낸 천년에 한 번 우는 새. 당신이 내게 올 때 걸었던 최초의 오른발과 왼발. 기어이 제 살을 다 파먹은 달. 그물로 된 달. 그물에 걸린 신들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과 발가락들을 생각해봐. 몸 속이 점점 비좁아지고 있어. 십계명을 새긴 돌이 자궁 속을 굴러다니고 있어. 사막을 건너 아버지가 찾아와 내 몸이 신전이니 죽은 아버지가 새벽마다 기도해. 몸 속은 무덤이 아니야. 방금 네가 날 검색했잖니. 서른 닢의 은전도 받지 않고, 새벽은 아직 멀었는데, 쉬지 않고 아버지를 부정해. 더 이상 신전은 몸 밖에는 없어. 이제 낮과 밤은 몸 속에서 만나고, 낮과 밤은 몸 속에서 헤어지고. 신들은 내 몸을 로터스 꽃처럼 먹고 꾸역꾸역 자라. 몸은 구멍투성이야. 신들의 취미는 피어싱. 구멍은 신들의 수유구. 아니면 주유구. 세상은 구멍이야. 만개하는 몸이야. 열리고 닫히는 몸

 

이원, 「몸이 열리고 닫힌다전문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문학과지성사, 2001)

 

본격적 SF시는 아니지만 SF적인 성격을 띠는 이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를 상기해 보자. 시인은 이미 첫 번째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문학과지성사, 1996)부터 PC, 드라마, 대중음악 등의 소재를 다루면서 대중매체가 인간의 인식 속도에 미치는 변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매체의 영향이라는 주제는 두 번째 시집에서 더 첨예해지며, 몸이 열리고 닫힌다에서는 아예 몸속에 삽입된 웹브라우저라는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은 웹브라우저로 가득 차 비좁고 끝내 구멍 난 것으로 훼손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첨단 기술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 작품은 1997년 서비스되었던 웹사이트 Yahoo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인간 존재는 웹브라우저에 의해 장악될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작품이 이라는 타자를 호명함으로써 주제를 강화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대에 웹브라우저는 몸속에 살게 된 신이 되었다. 이제 몸은 웹브라우저를 모시는 신전이고, “더 이상 신전은 몸 밖에는 없. 인터넷이라는 세속적인 신성은 이제 기존의 신성성을 파괴할 것이다. 이때 이러한 메시지는 신앙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렵다. 시인의 최근 시집까지 살펴보았을 때 신성은 주된 소재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의 관계를 부각하며 시인이 부각하려는 것은 신체의 황량함이다. 신본주의 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세계를 상실하는 듯한 불안의식이 두드러지게 된다.

동시대의 첨단 문물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현대시에서 지속해왔던 주제처럼 보인다. 즉 무분별한 도시 발전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놀랍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화자이다. 이 작품은 기술적 변화를 목격하는 농민이나 시민과 같은 계급적 입장에서 서술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용자를 화자로 내세운다. 웹브라우저를 사용하는 는 마치 웹브라우저 또한 를 사용하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히는데, 이로써 방금 네가 날 검색했잖니라는 문장은 가능하다. 따라서 야기되는 불안은 사회적 불안이 아니라 실존적 불안이며, 그러한 불안은 하나의 새로운 도구와 접촉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이 송두리째 재구성되는 듯한 감각이 곧 에 대한 호명으로 표현되는 셈이다.

불안의 근원은 하나의 새로운 발명품이 의 신체를 재구성하는 듯한 이질감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여기서 를 재구성하는 것은 정보의 패턴이다. 캐서린 헤일스는 현실에 기초하는 전통적 소설과 달리 가상의 시공간에 기초하는 SF문학의 서사를 정보 내러티브라고 부른 바 있다. 이때 정보 내러티브는 물질적 시공간이 아니라 신체와 사이버스페이스 사이에서 정보를 교환하는 패턴이 곧 서사를 이룬다. 헤일스의 독창적 주장은 정보와 접촉하고 수용하며 이해하는 패턴 자체가 곧 우리의 신체를 인식하는 방식을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기술 문명이 발전한 시대에 패턴은 현존을 압도하는 것이다.10) 느슨하게, 이원의 시는 SF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SF시는 SF소설처럼 정보 내러티브를 서사화하는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SF시는 정보 내러티브의 본질적인 패턴을 형상화한다. 이원의 시는 신성성이 파괴된 신체, 정보를 받아들이는 주유구로 전락한 신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절망적 정동으로 주조된 신체적 패턴을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기지가 건설됐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그로써 달이 사라졌다. 파도가 가라앉았다. 푸른 자정의 순환이 사라진 심해에서 숨죽인 이들의 허파꽈리가 물거품으로 떠올랐다. 죽은 달의 사정액처럼. 앞으로도 영영 기지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기지는 빈 기지일 뿐. 이름 없는 군함들이 기지를 조문하고 사라졌다. 기지의 노포핵이 껍질을 벗었다. 커졌다. 우뚝 섰다. 조준과 발사. 때때로 정체가 분명한 다국적 유령선들이 기지를 뚫지 못하고 해체됐다. 파스칼, 얼굴들은 물러나야 해. 물러나서 얼굴들은 기지의 촌에 숨어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해. 파스칼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얼굴들은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을 저 멀리 불어 터진 허파들로부터 찾으려 했다. 기지는 홀로 드넓어졌다. 기지의 피스톤 운동을 피해 얼굴들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멸종의 미토콘드리아는 생물의 어깨 위로 내렸다. 붉은 눈이었다. 얼굴들은 1헤르츠씩 주저앉는 어깨를 맞대고 서로에게 호흡을 쌓았다. 파스칼은 시간을 가로질러 가려 했다. 얼굴들은 입을 모아 실패한 공작을 이야기했다. 파스칼, 얼굴들에게 남은 건 단 한 번의 기회뿐이야. 기지는 황홀하게 황폐해졌다. 얼굴들은 기지의 핵심으로 모였다. 얼굴들은 융합되고 폭발했다. 백과 흑. 바다에 구멍이 뚫렸다. 기지는 기지로 기지로 기지로 기지를 넓힌다. 기지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섬으로 뻗어 온다. 구멍을 지나온 파스칼은 최첨단의 불안을 안고 단단한 바위 해변의 입구에 당도했다. 붉은발말똥게들이 달빛을 생포한 집게다리를 사납게 쳐들고 줄지어 좌로 좌로 이동 중이었다. 파스칼은 해변의 끝에 있는 미래의 기지를 향해 dp5를 움직였다. 과거에 찍히는 파스칼의 발자국들이 점점 더 선연해졌다.

 

김현, 「THE FUTURE」 부분11)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

 

실존적 정동과 패턴의 측면에서만 SF를 연상케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원의 시와 달리, 김현의 첫 시집 글로리홀은 뚜렷이 SF적 소재를 차용한 작품집이다. 퀴어 시집의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글로리홀에서 비교적 소수의 작품이 SF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 「THE FUTURE」는 우주적 규모의 기상이변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이 사라졌고 푸른 자정의 순환이 사라진 심해에서사람들은 심해에 기지를 건설하면서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지조차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린 뒤, ‘다국적 유령선이 나타나 기지를 침략하고자 시도하거나 사람이 부재한 기지가 홀로 드넓어지는미스테리한 사건이 뒤따른다.

이 작품의 서사는 의도적으로 모호하다. “실패한 공작이 일어나고 바다에 구멍이 뚫리며 희망이 사라지는 묵시록적 분위기만이 뚜렷하다. 모호함을 가중하는 것은 기지의 노포핵이 껍질을 벗었다. 커졌다. 우뚝 섰다.”라는 표현처럼 기지가 곧 남근을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기지가 성애를 연상케 한다면, ‘홀로 드넓어지는 기지란 고착된 성욕을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사람을 얼굴들이라는 제유로 총칭하는 것 또한 눈에 띈다.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이라는 표현처럼, ‘얼굴들은 사람다움을 잃은 채 숨어있거나 죽어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를 배경으로 삼아서 파스칼이라는 인물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의 걸음은 시간을 가로지르며미래로 나아가는 전진으로 규정된다. 그가 최첨단의 불행을 끌어안은 채 해변의 끝에 있는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곧 이러한 묵시론적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시의 과도한 모호성 때문에 유의미한 해석에 도달하려면 징후적 독법으로 옮아가야 할 것이다. 내면, 관계, 세계라는 세 층위에서 모든 것이 병증을 앓고 있다. ‘홀로 드넓어지는 기지로 빗대어 표현된 성욕은 고착된 채 배출되지 못한다. 한편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을 깨달은 얼굴들은 숨거나 찾아 헤맬 뿐이고, 애초에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얼굴들은 융합되고 폭발했다라는 시구처럼 관계는 언제나 파국으로 치닫는다. 마지막으로 바다는 구멍이 뚫린 채 소실되고 있다. 그렇다면 표면상 이 작품의 주제는 욕망의 죽음이고, 관계의 상실이며, 세계의 종말이다. 무엇보다 이 주제의식을 매끄럽게 서사화하지 못하는 시 형식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징후이다.

그런데 이 시는 유희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시를 징후적 독법으로 읽어나가면 결국 자연스럽게 세계에 대한 정합적 인식을 상실한 주체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 또한 불안의식을 주제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만족스럽지 않다. 의도적으로 SF적 스펙터클을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은 SF소재를 차용함으로써 불안을 느끼는위치에서 불안을 상상하는위치로 이행하는 것은 아닐까. ‘달이 사라지는우주적 규모의 상상력부터 멸종의 미토콘드리아라는 현미경적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이 시의 정조인 불안의식은 SF적 상상력에 의해 탄력적으로 변주된다. 이러한 상상 덕분에 세상 모든 것이 위태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마음이 곧 그것과 유희하는 태도로, 이 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황홀하게 황폐해지는태도로 전이될 수 있다.

앞서 이원 시인의 시는 웹브라우저를 최초로 사용하는 세대의 충격을 반영한다. 그는 새로운 매체의 사용자가 느끼는 불안의식을 정보가 삽입된 신체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그의 몸속에서 육체의 신성성은 정보의 패턴으로 대체된다. 이에 비해 김현 시인의 시에서 불안은 묵시론적 세계관으로 확장한다. 이원의 시에서는 신의 상실이라는 주제 속에서 사람이 무엇에 기댈 것이냐는 물음을 연역할 수 있다. 하지만 김현의 시에서 자아, 타인, 세계가 모두 몰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은 그 어느 곳도 기댈 수 없다는 징후를 표현한다.

그런데도 이원의 SF적인 시로부터 김현의 SF시로의 이행은 중요한 가능성을 지닌다. 김현은 스펙터클과의 유희 속에서 불안을 ‘SF적 문법을 빌려다시쓰기하는 능동적 태도를 보인다. 이로써 새로운 매체가 야기했던 불안의 정동은, 다시금 그 매체적 경험을 빌려 자아관계세계를 재인식하는 태도와 맞닿게 된다. SF가 가능한 미래에 대한 응답이라면, 가능한 미래가 야기하는 수동적 정동을 능동적 상상력으로 이행하는 힘이야말로 바로 SF시가 지닌 중요한 형식인 셈이다.

 

4. 2020년대 SF시의 양상

사회적 기반 없이 이성은 실현될 수 없다라는 유물론적 테제에 덧붙여,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기반을 받아들이는 마음 없이 이성은 실현될 수 없다는 테제를 세워볼 수 있겠다. SF시는 새로운 물질적 기반에 대한 정동적 반응이다. 그런데 우리가 숙고할 것은 새로운 사회적 조건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적 조건을 애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이율배반을 우리는 제3절에서 음미할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원 시인은 신성성이 상실을 애도한다. 또한 김현은 SF적 묵시록을 도입하여 세계 전체를 애도하는 자세를 보인다.

끝없이 발전하는 기술 문명 속에서 인간의 느끼는 불안의식이 SF시의 주조라면, 인간은 어떻게 그 미래를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끝없는 발전이 자아내는 두려움은 어떠한 타자에게 기댈 때 극복 가능한 것인가. 이제 ‘SF적인시를 벗어나 최근의 SF시를 논의해 보도록 하자. SF시란 간단히 시인 자신이 SF라고 표명한 작품과 이러한 작품들과 유사한 장르군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만약 SF시가 고유한 장르적 규범을 가진다면 우리는 SF시를 귀납적으로 살펴보고 SF시의 개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절벽만 있는 곳이 우주라면 이 땅이 그랬습니다

 

방독면을 쓴 소년은 하얀 바이러스들이 무릎까지 차오른 번화가로 나갔습니다공중의 소형 비행기들은 날개를 접는 법을 잊어버리고 미지로 날아갔지만소년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잡초가 무성한 팔을 흔들며 걸었습니다

 

탐사선들이 보낸 미지의 사진들은 이상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만

 

잘리지 않고 남겨진 나뭇가지의 심정으로 소년은 걸었습니다여기저기서 아득한 굉음들이 방사형으로 퍼져가는 날들소형 비행기들은 고물이나 괴물이 될까봐 날개를 접지 않는다는 사실을 늦게야 떠올렸고소년에게 새하얀 하늘은 그저 죽기에 적합할 뿐태초로 향하는 비행기는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우주라면 이 땅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이 땅으로 옵니다목성의 아침 인사였던 새가 이곳으로 왔듯이새가 날아가면 시민들은 연유를 모르는 채 시선을 빼앗깁니다나 또한 너처럼 지구와 너무 다르지 않니라는 눈빛으로가끔은 아침의 거리에서 얼굴을 꺼내 묻곤 합니다나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지?

 

김향지, 「지구에서 발견된 필름—SF」 전문얼굴이 얼굴을 켜는 음악(문학동네, 2021)

 

5편으로 이루어진 지구에서 발견된 필름연작은 소재와 주제 양면에서 SF시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연작의 주제의식은 그 무엇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정체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구에서 발견된 필름—SF」에서는 묵시론적 분위기가 부각되고 있다. 대지는 바이러스로 뒤덮였고, “여기저기서 아득한 굉음들이 방사형으로 퍼져가는 날들이 지속된다. 하늘과 우주는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소년은 저 소형 비행기처럼 미지로 날아가는 방법을 잊었을뿐더러 소년에게 새하얀 하늘은 그저 죽기에 적합할 뿐이다. 다만 처음으로되돌릴 수 없는 삶 속에서 이상하게도모든 것이 이 땅에 도착하고, 또한 시민들은 연유도 없이새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상실된 것은 세상을 바로 보거나 갱신하려는 인간의 의지이다.

음미해 볼 것은 나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지?”라는 마지막 시구의 반문이다. 마치 온 세상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한 체념의 세계 속에서 왜 시인은 내면이나 세계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이곳에온 것인지 묻고 있는가. 왜 그는 최후의 순간 곁을 찾아 헤매는가. 따라서 시인이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 유대감의 상실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바이러스라는 시어로 연상케 하는 코로나 팬데믹이나 굉음이라는 시어로 연상케 하는 전쟁이나 파괴는 유대를 상실케 하는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시인이 회복하기를 체념한 것은 바로 소년시민가 호흡을 나눈다는 감각, 즉 생명의 유대감이다.

그렇다면 SF적 소재는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 이 작품이 향수하는 것이 생명의 유대라면, 이 작품은 우주적 규모에서 생명의 가없음을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SF시에서 항상 유대란 휴머니즘을 벗어나 포스트휴머니즘적인 것, 즉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으로써 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목성의 아침인사였던 새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는 지구의 일부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일부로서 인식된다. 여기 시인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상하고 있는 유대의 토대는 바로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성립하는 우주적인 생명의식인 셈이다.

 

우주 밤은 기억을 재생해

밤마다 시간을 다시 살아

저장된 기억이 부분적이고 뒤죽박죽이라

어떤 날은 시 같고 어떤 날은 악몽 같지만

허락된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았다면

이제 지난 삶을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남은 생을 모두 살 수가 있는데

이것마저 돈이 들어서 매일 공중 도시의 교각을 타며

이천 개씩 볼트를 조여야 해

 

올 거지?

, 전쟁이 나도.

심하게 싸운 뒤에도 너는 점령군처럼

당당히 왔다 나는 함락당해 기뻐한다

닿아도 돼?

이런 거 묻지 않았잖아

응 근데 오늘은

물어야 할 것 같아서

 

볼트를 하나 조일 때마다 우주 밤에서 재생할 기억을 가다듬는다

 

더욱 생생한 영상을 위해서 그날 입었던 옷 색깔

주고받았던 대화의 단어 하나하나를 복기한다

원하는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하듯

기억을 윤색한다 내 잘못이니까

전쟁이 나도

 

공중도시 긴 교각의 H빔을 조일 때

균형을 위해 양쪽에서 마주보며 조여와야 하는데

그런 작업을 할 때마다 하루에 딱 한 번 마주치는 순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작업 패턴 분석: 1/2 지점에서의 지체 현상을 해결 바람

주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미달한 양에 상관없이 지급액의 40%를 삭감한다

 

남의 기억에 접속한다고?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색다른 재미를 위해서라면 그러고 싶지 않아

아니 누군가 되고 싶을 때

난 네가 되고 싶은데

마주 온다고 모두 만나지는 것은 아니니까

 

김원석, 「우주 밤부분12)엔딩과 랜딩(문학동네, 2022)

 

김원석 시인의 경우 기술의 발전이 도리어 인간을 노동의 굴레에 옥죄는 근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작업 패턴과 작업량은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취미를 위해서라도 매일 공중 도시의 교각을 타며” “이천 개씩 볼트를 조여야만 한다. 그들의 유일한 낙은 우주 밤이라고 불리는 기억재생장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휴식을 잠시 취하고 나면 다시 일터로 돌아오기를 반복할 것이다. 여기서 우주 밤은 다만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한편 똑같은 처지에 놓인 는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그들은 상대와 주고받았던 단어 하나, 상대가 입었던 옷 색깔조차 간직하려 한다. 때론 그러한 만남에 사로잡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날도 있다. 더 나아가 이 시는 하나의 SF적인 상상력에 도달한다. ‘우주 밤을 통해서 의 기억을 교환할 수 있다면 어떨까. 즐겁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존재 이해를 넘어서 존재 일치에까지 도달하기를 욕망할 때 말 건넴은 곧 사랑의 극한을 표현한다.

우주 밤이라는 도구를 상상함으로써 김원석 시인이 예시하는 미래는 두 가지다. 첫째로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사회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사회는 인간의 기억력마저도 효율적인 노동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둘째로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인간은 인간과 유대하는 방식을 찾아낼 것이다. 그것은 지극한 사랑의 이미지, ‘를 일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표현된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숙고해볼 것 또한 두 가지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사회 시스템의 영구발전과 더 내밀한 존재의 결속을 이루어지는 사랑의 영구지속은 근본적으로 다른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주 밤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것이 나란히 놓이듯, 실상 발전의 욕망과 에로스는 동궤에 놓이는 힘은 아닐까. 프로이트는 그렇기 때문에 말년에 에로스의 목적은 개인을 결합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족을 결합시키고, 그 다음에는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결합시켜, 결국 하나의 커다란 단위즉 인류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덧붙일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는 우리도 모르지만, 에로스가 하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반문했다.13) 마지막 물음은 이 글에서 해소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 기억재생장치의 이름은 우주 밤인가. 아마도 시인은 인간의 기억과 에로스가 우주적인힘을 간직한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 물음은 음미할 만한 것으로 남겨두도록 하자.

 

네가 죽을 때까지 내려다볼게

떠나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

 

아무도 태우지 않은 전철이 이 시간이면 지나가

같은 자리를

 

성냥은 그으면 꺼지고

그으면 꺼져서

 

뭐가 변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왜 처음 겪는 불행도 익숙한 걸까?

 

사람 키우는 게임을 했지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다가 정말로 사는 모습 같아지면

일시 정지하고 섹스를 했다

 

이렇게는 살지 말자고

 

무서운 표정

벌써 다 자라서 부서진 사람의 얼굴

그래서 우린 눈을 감았나 봐

 

이런 표정은 유전자에 이미 있었던 걸까?

때가 되면 밖으로 나오는 걸까?

네가 뭘 더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게임으로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지

얌전히 서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일을 주고

집을 짓게 했지

 

너를 상상해, 엘리노어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둥둥 떠다니겠지

 

가끔 거기 있는 것 같아

네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럴 때면 나는 너무 작은 점이고

 

그러면 덜 가엾고

따뜻해

 

정적 속에서는 모든 게 직선으로 이어지겠지

순환선처럼

 

엘리노어,

너는 미래의 시간에 살고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어떤 말들은 이제 알 것 같다

 

오늘도 전철이 지나가

같은 시간에

 

너의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될까

 

엘리노어, 아직 보고 있어?

 

조시현, 「아이들 타임후반부14)아이들 타임(문학과지성사, 2023)

 

김현과 김향지의 시가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조시현의 아이들 타임은 아예 지구가 멸망한 이후에 남겨진 기록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이 작품의 제목에는 각주가 달려 있는데, 기록의 연대는 2500년대이며 글쓴이는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이지만 빈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행성으로 떠나지 못한 채 남겨진 자라고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목소리는 지구를 떠나간 이주민인 엘리노어를 향한 말 건넴이면서도, 공허한 방백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독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홀로 남은 지구의 생존자,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계급 차별의 극적인 과장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곧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 셈이다. “왜 처음 겪는 불행도 익숙한 걸까?”라는 반문은 빈민층의 불행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벌써 다 자라서 부서진 사람의 얼굴의 이미지와 이어지는 이런 표정은 유전자에 이미 있었던 걸까?”라는 진술은 그러한 불행이 누대에 걸쳐 상속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남겨진 자가 타인의 시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엘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라는 물음처럼 가 바라는 것은 엘리노어의 시선이다. 이 요구가 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사람 키우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을 주고 을 짓게 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연상이 가능해진다. 마치 게임 캐릭터를 바라보듯, ‘는 엘리노어가 를 내려다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해 는 우주로 떠난 이주민을 향해 최소한의 관심을 간청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엘리노어, 아직 보고 있어?”라는 물음으로 마무리되며 남겨진 자의 비참은 심화한다.

 

5. 무엇으로부터 답을 구하는가

SF시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 소략한 결론을 내리자면, SF시에서 세계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한 부정태이다. 한 해의 간격을 두고 간행된 김향지김원석조시현 시인의 SF시에서 공통된 것은 묵시록적이거나 멸망해 버린 현실이다. 그들이 그려낸 것이 가까운 미래이든 먼 미래이든 현실은 사람이 살아내기에는 너무나 괴로운 공간으로 그려진다. 어떤 의미로 이것은 여러 번의 참혹한 사건과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세대가 지닐 수밖에 없는 세계관의 투영일 수 있다. 혹은 문명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를 포기한 세대의 세계관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물을 필요가 있다. 삶의 원천은 주어진 사회의 물질적 조건만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내고자 하는 힘은 타인의 목소리와 타자의 몸짓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얻어지는 것은 아닌가. 김향지 시인의 물음을 빌리도록 하자. 그는 질병이 창궐하고 어떤 붕괴가 암시되는 미래를 상상한 뒤 나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지?”라고 물었다. 그것은 더는 살아낼 수 없는 세상이 응답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견디는 또 다른 생명을 향해 답을 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김원석 시인은 같은 입장에 놓인 타인을 그려낸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 건넴을 통해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휴머니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김향지 시인과 조시현 시인은 위를 향해묻는다. 그들은 우주를 향해서, 이 세상을 살아낼 이유가 무엇인지 추궁한다. 세상의 중심이 인간이기를 폐기한 이후에 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는 그들의 질문 방식은 놀라운 것이다. 이들의 시는 살아갈 이유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또한 소외된 인간에게 세상이란 무엇인지 되묻기 위해서 가능한 미래를 시 장르를 통해 상상한다. 그들이 찾아 헤매는 것은 삶의 이유고, 더 근본적으로는 삶의 정당함을 가능케 하는 타인과 타자와의 관계이다.

지금까지 이 글에서 제기한 질문과 결론은 섣부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SF시가 하나의 장르로 형성될 수 있을 만큼 그 작품의 양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SF시가 매개하는 중요한 물음을 최근의 시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삶이 가능한 것이라면 삶의 조건은 물질의 충족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삶을 홀로 짊어지지 않는다는 것, 여기 함께 이곳에 온 것임을 확신할 때 삶은 긍정될 수 있다. 문명이 물질로부터 삶을 부양할 때, SF시는 관계로부터 삶을 예시한다. 사람은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을 용납할 수 없다. SF시가 찾아 헤매는 것은 삶을 확신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들이 행하는 최초의 실천은 곁을 향해 말 건네는 것이다. 그 곁에는 쉽사리 응답하지 않는 우주가 놓인다. 저 막막한 어둠속에 인간을 왜소한 점으로 보이게 만드는 가없는 타자의 세계가 놓인다.

  • 1) Science Fiction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용례는 윌리엄 윌슨의 평론집 A Little Earnest Book Upon A Great Old Subject: With The Story Of The Poet-Lover(1851)10장에서 발견된다.  “Science-Fiction, in which the revealed truths of Science may be given interwoven with a pleasing story which may itself be poetical and true.” 이 인용구는 미국 사학자 H. 브루스 프랭클린(Howard Bruce Franklin; 1934 ~ )의 홈페이지에서 재인용하였다(https://www.hbrucefranklin.com/articles/history-of-science-fiction/).
  • 2) 대표적인 1970년대 SF문학 연구서로는 브라이언 올디스의 10억 년의 잔치(Billion Year Spree; 1973)와 다르코 수빈의 과학소설의 변형(Metamorphosis of Science Fiction; 1979) 등을 꼽을 수 있다.
  • 3) SF문학의 효시를 프랑켄슈타인으로 보는 관점은 한국 SF 연구자들에게도 폭넓게 수용되었다. 고장원, SF의 법칙, 살림, 2008, 26쪽 참조.
  • 4) 더 정확히 말해서 아담 로버츠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더불어서 퍼시 셸리의 마브 여왕(1813),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3), 존 밀턴의 실낙원(1674) 등으로 SF기원을 소급한다. Adams Roberts, Sciencie Fiction, Routledge, 2000, p.55 참조.
  • 5) 셰릴 빈트·마크 볼드, 송경아 역, SF 연대기 - 시간 여행자를 위한 SF 랜드마크, 허블, 2021, 1장 참조.
  • 6) 科學小說 鐵世界」, <황성신문> 1908. 12. 10.
  • 7) 장수경, 「1960년대 과학소설의 팽창주의 욕망과 남성성」, 아동청소년문학연구 23, 245~277쪽 참조.
  • 8) 이지용의 최근 연구 또한 문윤성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며 분단국가라는 거대한 사회적 구조 안에서 대중문화로서 다양한 서사를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이지용, 「한국 SF 소설의 역사가 보여 준 특징과 현재」, 문명과 경계 6, 2023, 236).
  • 9) 이지용, 위의 글, 248쪽 참조.
  • 10)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열린책들, 2013, 80.
  • 11) 본래 글로리홀 전반의 시에는 각주가 달려있다. 각주로는 가상의 내용을 부기하거나 한 시구를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안내하는 내용이 덧붙여진다. 여기서는 각주를 제외한 본문 전체를 인용하였다.
  • 12) 우주 밤이라는 시어에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다. “2039, S사에서 개발한 기억 재생 장치. 2042, 정부는 우주 밤의 미성년 사용을 금지했다. 삼 년 간의 베타 테스트 후 유료화되며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폭동이 일어났다. 테스트 초기, 논란이 되었던 기억 조작 의혹은 단순한 기기 조작 오류로 밝혀졌으나 의도적 오작동으로 기억을 훼손하는 사용자들은 점점 늘어났다.”
  • 13)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석희 옮김, 「문명 속의 불만」,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20, 301.
  • 14) 본래 제목에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다. “2888년 지구에서 발굴된 일기장으로 2500년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가 매우 비뚤고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어 일부는 추측으로 메웠다. 기록자는 지구의 거의 마지막 생존자로 보이며, 때문에 기록은 상상으로밖에 채울 수 없었던 지구의 마지막을 복원하는 일에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기록자가 도시 빈민이었기에 적절한 때 우주로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연구가들은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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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희 끈의 감각, 금의 시선 ― 오은경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

한 권의 시집을 열어 하나의 세계로 진입한다. 시인이 세심하게 배열해 놓은 시의 지도를 따라 걷다 보면, 세계와 교호하는 내면 풍경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오은경의 세 번째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는 어떨까. 그 길의 초입에 그녀는 끈을 손에 쥐여 준다. 오은경은 첫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에서 타자―외부와의 접점에서 개인이 느끼는 모호한 윤곽을 가늠해 왔고, 두 번째 시집 『산책 소설』에서는 산책자의 시선으로 다층적인 삶의 이야기를 포착하는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시집에서는 끈으로 상징되는 관계의 시작과 변용, 그 이후의 상태를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처럼 조망하고 밀착하여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나와 너 혹은 나와 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거리, 변해버린 감정의 결이 포착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서시 「공중제비」와 바로 그 뒤를 잇는 「끈」, 시집의 마지막에 위치한 「두 눈으로」를 경유하여 살펴보려 한다. 이건 미래이고, 손에 잡힌 건 정체불명의 노끈이다. 미래가 노끈의 형태라면 미래란 얼마나 작고 가벼운가? 아니, 미래란 왜 이렇게 헐거워져버렸을까? 작은…… 미래, 꿈꾸던 내 모습이 아니었어. 나는 나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었다(미래에는 당연히 나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했는데, 어디에도 나는 없었네. 그렇다면 지금이 미래가 아니라는 소린가? 잠깐 의심했지만, 노끈이 되어버린 미래는 여전히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노끈을 사용한 적 없었고 무언가를 묶거나 무언가에 묶인 적 없었다. 노끈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노끈은 바람에 흔들렸지만, 떠내려가지 않았다. 땅에 단단히 박힌 상태였다. * 아무도 끈을 사용하지 않았다 ― 「공중제비」 전문 「공중제비」의 미래는 시간의 저편에 아득하게 존재하는 가능성의 영토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고 없이 도착한 현실이자, 감각할 수 있는 사물로 손안에 놓여 있다. 이 시의 미래가 당혹스러운 이유는 이것이 “정체불명의 노끈”이기 때문이다. 원대한 포부나 반짝이는 약속 같은 기대를 배반한 미래는 값싸고 흔한, 아무렇게나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질감을 가질 따름이다. 미래를 손에 쥐고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정녕 그것이 미래가 맞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섦과 마주하는 것은 ‘나’에게나 독자에게나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 갑자기 공중제비를 넘는 것처럼. 공중제비는 화려한 도약이자 제자리를 맴도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순간적으로 세계를 거꾸로 볼 수 있지만, 이내 이전과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와 착지하는 운동. 괄호 안에 담긴 ‘나’의 독백은 어지러운 회전을 중계한다. 과거의 예상(“나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했는데”)과 현재의 발견(“어디에도 나는 없었네”) 사이에서 “그렇다면 지금이 미래가 아니라는 소린가?”라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짧은 의심을 품는 일. 이는 공중제비의 정점―세계가 거꾸로 휙 지나쳐 보이는 면면과 유사하다. 그러나 역전은 길지 않다. 손으로 만져지는 노끈을 체감하면서 이내 현실로 착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지각이 뒤흔들린 ‘나’는 도무지 노끈으로 구현된 눈앞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노끈은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릴 만큼 가볍지만 질기게 현존한다. “땅에 단단히 박힌 상태”라는 시구를 보라. 동시에 “아무도 노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아이러니를 겸하여, 노끈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겨진다. 그렇게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노)끈은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끈을 잡아당겼다. 흙먼지가 일었다. 황사였다. 풀 몇 포기 마른땅에 나 있었다. 풀이 아니라 허물 같았다. 동물 사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냄새도 없었고 날개 달린 것들, 파리나 독수리, 참새 떼도 나타나지 않았다. 예견된 일이었거나 전에 한 번은 겪어본 일 같았다. 지금, 내 손은 핏기 없이 창백한데 이렇게까지 당길 이유가 없었다.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여기가 아닌지도 몰랐다.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통행금지 구역에 내가 와 있으며…… 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다. 수풀 우거진 배경은 기억에 없었다. 여름, 풀독이 오를까 봐 걱정되었는데 백구들이 논밭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지가 먼저 강아지들 쪽으로 향했다. 철책도 없는 논밭, 지난 계절의 벼와 새 떼, 메추리를 날려 보낸 다음 다시 볼 수 없었다. 나는 백구와 토끼를 구분하지 못했다. 수풀 사이사이 토끼가 숨어 있다는 것도. 전부 수지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 있었다. 내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바깥은 위험하며 나를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고 했다. 기다리라고 말했던가? 하지만 시간을 일러주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는지, 아니면 내가 찾으러 가면 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수지는 어디를 간다고 했지? 어디에 있지? 내게 장소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 손바닥에는 실금 같은 주름이 얽혀 있었다. 손은 소금빵 같았다. 먼지와 피가 달라붙어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끈을 당겨야 했다. 끈을 당길 나머지 손이 필요했다. 팔은 바게트 같았다. 끈을 힘주어 당길 필요는 없었다. 잡고 있기만 하면, 놓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 나 스스로 만든 규칙이었다. 끈은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 「끈」 전문 이 시의 끈은 ‘수지’와 연결된 기억의 매개체다. 「공중제비」에서의 시제가 사적 서사로 전환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헐거웠던 노끈은 더 질긴 “새끼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러한 끈을 잡아당겨 마주하는 것은 숨 막히는 “흙먼지”와 “황사”뿐이다. “허물” 같은 풀이 돋아난 건조한 땅. 사체를 처리할 “파리나 독수리, 참새 떼도” 보이지 않는 황량함은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을 암시한다. 생명의 역동성뿐만 아니라 죽음의 자연스러운 과정마저 정지된 상태는 한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기억의 복잡한 층위를 드러낸다. 그 중심에 수지가 있다. 수지는 “내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통제라기보다 불안에서 비롯된 과잉보호에 가깝다. “바깥은 위험하며 나를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던 수지는 위험이 제거된 안전한 장소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제 수지는 찾을 수 없다. 이 시의 후반부는 세계에 내던져진 ‘나’의 신체가 어떻게 감각되는지 기록한다. “먼지와 피가 달라붙어 있었”던 손과 팔은 “소금빵”과 “바게트”로 비유된다. 무력함 속에서 ‘나’는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나 스스로 만든 규칙이었다.”라는 고백에 있다. 이전까지 ‘나’는 수지가 만든 규칙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되었으나, 규칙의 제정자가 수지에서 ‘나’로 바뀐 까닭이다. “잡고 있기만 하면, 놓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라는 최소한의 머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이 미래를 방기하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라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 손으로는 미래를 단단히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과거와 이어진 현재를 어루만지면서 ‘나’의 시선은 천천히 바깥을 향한다. 무엇을 “두 눈으로” 응시하는 것일까. 유리의 조각난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빛이 전부였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느라 세상을 분간할 수 없었어. 세상에는 너도 있다, 통유리로 된 복도 바깥에 네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너를 발견한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바로 이곳이 처음이기 때문 아닐까? 다른 말로는 길 잃음. 헤맴, 너와 손잡고 거리를 거닐었을 때 진짜 즐거웠는데. 안심되었으니까. 그때는 세상이 미로 같았고, 너와 나는 퍼즐 조각 같았지. 한 번도 바깥에 나가본 적 없는 것처럼. 자꾸만 날씨를 상상하고 싶어져. 그리고 깨닫고 만다. 떠난 것은 네 쪽이라는 것을. 적어도, 너와 둘일 때는 멈춰 있었던 적이 없고 내가 복도에 누워 잠들었던 적도 없지. 빛이 이렇게나 밝고 아름다운데 굴절되는 만큼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 ― 「두 눈으로」 전문 ‘나’는 “통유리로 된 복도” 안에 있고, 그 너머에 “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내가 나갈 수 없”기에 “너를 발견한다고 해도 만날 수 없”다. 볼 수는 있으나 가닿을 수 없는 유리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 시는 ‘나’와 “너”를 포함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양자의 변모 양상을 되짚는다. 세상이 방향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았”을 때, 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퍼즐 조각 같았”기에 길을 잃지 않았다. 길을 잃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헤맴, 너와 손잡고 거리를 거닐었을 때 진짜 즐거웠는데. 안심되었으니까.” 그런데 “너”를 떠나보낸 뒤 ‘나’는 진짜로 길을 잃는다. 미로를 즐겁게 탐험하던 동반자가 사라졌으니, 세상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돈으로 뒤바뀐다. 이에 ‘나’는 “굴절되는 만큼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라고 서술한다. “금”은 “너”와의 지난날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영원한 필터가 되었다. 필터는 이미지를 왜곡한다. 아름다운 “빛”도 그러한 균열을 통과하면서 휘어서 꺾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금”은 선명히 드러난다. 추억을 떠올리는 행위가 행복이 깨진 현재의 상처를 아프게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눈으로」가 응시하는 삶의 이면이다.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은 한쪽 눈으로는 환했던 기억(“빛”)을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금”)을 같이 바라보는 일이다. 두 개의 이미지를 겹쳐서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은 관계의 실패에 대한 뼈아픈 기록만은 아니다. 한 관계가 남긴 흔적을 자기 일부로 수용하고 이후의 나날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태도다. 외면하지 않기는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규범과 통한다.

월간 현대시 허희 오은경둘이 거리로 나와현대시얽힘서평 2025
황유지 생동하는 ‘것’들의 크레디트

1. 파수의 다시 쓰기 (서윤후,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2025, 04) 경계하여 지킨다는 뜻의 파수(把守)의 한자어를 달리하여 派收로 써볼까? 여러 번 중의 어느 한 번을 뜻하는 파수(派收)를 다시 破水로 쓰면 파문을 향해 빠져나가는 물 혹은 분만 전에 쏟아지듯 터지는 양수를 일컫는 힘찬 말이 된다. 시인이 스스로 “내 오랜 파수(把守)의 역사”(「유리가미」)라고 운을 뗀 시집을 펼치며 우리는 가장 먼저 “돌아보지 않으려고”“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는 문장을 만난다. <시인의 말>에 기대어 이 시집이 악몽의 받아쓰기, 오래 뒤숭숭한 꿈자리를 지켜온 자의 고단함을 옮겨놓은 파수(把守)의 고백임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그러나 얼마나 충실히 이행될 수 있을까? 이 결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어떤 금기를 어기는 심정으로 어쩌지 못하고 돌아보았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야 조금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어떻게 변해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 시집의 관건 중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은 자꾸만 ‘나’를 유기하고 가버린다.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 앞에서 종종 나만이 오도카니 남겨졌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모여앉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린 때도, 선생의 질문에 더 좋은 답을 궁구하느라 우물거리며 대체로 수용될만한 밋밋한 답을 제출한 때도, 누군가의 결정에 맞서 당차게 의견을 설파하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만 있던 때도 시간은 나만 놓고 표표히 흘러가곤 하지 않았나. 그럴 때면 어떻게 했던가? 돌아와 누운 밤에 후회와 함께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을 저 검은 어둠 속에 꼼꼼하게도 새겨넣지 않았나. 여기서 서윤후는 “나를 눌러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시인에게는 곧 ‘다시 쓴다’는 말이다. 제때 행하지 못한 대답은 나중에 한다고 해도 정답은 아니라서 그는 시간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다만 그 시간은 망쳐버린 이야기의 시간이기에 주요 인물일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기다린다. 이미 내가 종료해버린 이야기의 장면에는 그러나 나 혼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서 도리 없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리하여 장면 안의 이들이 행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럴 때 세계는 온통 구겨지고 주름진 것들이다. 전단지 속 예수를 접었을 때 가방 속에서 툭 펼쳐지는 전단지의 주름은 전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전능도 나를 데리고 갈 순 없어서 그저 이 망가진 이야기가 끝이 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즉 더 나빠지길 기다린다. 시간과의 결별이라는 결심은 한편 시인의 권능이기도 해서 여러 번 중 한 번을 겪을 기회, 다시는 가능해진다. 다시 쓰기라는 파수(派收)의 쓰기이다. 그러나 부적응의 시간은 상처로 오롯해서 왠지 씁쓸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망가진 것들은 저들끼리 순환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세계의 주름일까. 주름만이 시가 될 것을 아는 자는 그렇게 “나빠지길 기다린다”. 창밖엔 멀쩡한 걸음으로 들고 온 목발을 다시 어디선가 절뚝이며 나타난 이에게 건네고 지폐를 주고받은 뒤 그가 왔던 길을 다시 또박또박 걸어가는 장면 균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구나 세상의 부목은 여기저기 출렁이면서 부러진 일순간을 잡아주면서 -「나빠지길 기다린다」 부분 다시 말해 세계의 균형이란 좋은 것만 있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한 시간마다 스프링클러가 열”린 후 나오는 햇빛은 외려 식물을 죽게 만들 수 있듯이(「독화살개구리」), “호주머니 속에”“젖은 돌멩이”를 가진 사람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저수지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임을, 그 고독한 세계로의 재입장(入場)의 입장(立場)이 매우 난처함을 헤아림이 필요하듯이(「고독지옥」), “살려주는”일이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짐작하듯이(「견본 생활」) 좋은 쪽과 나쁜 쪽은 절반씩 유효하다. 또 하나의 관건은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랑이다. 그건 타고난 체질인 양하다. 이를테면 「물길 빈티지」와 「유리가미」는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인과관계를 이룬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 관리를 맡기고 흘러갔다”. “이미” 물도 다 “말라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아……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음을. “서로 헤어진 적 없는 물의 우정”은 나를 배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이 길을 지우지 않는 기다림”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은 이를테면 쓸모에 대한 발견이면서도 소망하던 이들과 함께 갈 수는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이기도 하다(「물길 빈티지」). 그래서 그는 다음 시편에서 이런 시도를 해본다. “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기억의 뒤뜰”이다. 이 뜰에서 숱하게 끊어진 연을 떠나보냈을 것이나 기어이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고 싶어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사람들을 모으고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연줄을 죄 끊어버릴 참인 게다. 그리고 알게 되는 건 이 억지스러운 연(緣) 놀이가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인연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유리가미」). “사랑의 천재를 사랑한 적 있”(「사랑의 천재」)다는 고백은 그 말의 주인 역시 사랑의 천재라는 말로 들린다. 정말이지 사랑이 체질. 그런 그가 사랑을 부조하는 방식은 마지막 시편, 「비로소 함께할 것」의 목록으로 더욱 선명히 융기한다.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꼽아 부르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쓴 이 참여의 목록은,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대상들이 아름답게 박제된 완결의 이야기 쪽이 아닌 미완과 실패의 조금은 남루한 조각들 쪽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럴 때 어둡기만 하던 흑백의 시퀀스는 이제는 보내야하는 어떤 끈질긴 마음의 한 장면을 아스라하게 닫는 기억의 보존 방식이자 그 시간을 닫는 이별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끝내 홀로 꾸던 악몽의 시간 속에서 다음의 이야기는 마냥 나쁘게만 쓰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그런 시간, 기억과 이별하는 방식이 결코 함부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님을 이 악몽의 파수꾼은 지키고 쓰고 지우고 쓴다. 그럴 때 그 시간과의 결별 후 찾아올 새로운 시간은 무언가 한꺼번에 물꼬를 틀 파수(破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밝은 쪽에 있다고 믿는 나의 눈부심은 실은 항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고, 누군가는 눈부심에 찔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심스레 어둠 쪽을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과 함께 다음의 시간은 올 것만 같다.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곳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그게 벌어진 모든 일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될 순 없어서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경적을 울리며 자들이 나를 지나친다 -「흑백판화」 부분 2. 유동하는 물질들의 시론 (서동욱, 『유물론』, 민음사, 2025, 03) 서윤후의 시가 그런 시간과 기억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숱하게 썼다 지우는 이야기라면 그 미덕은 극복에만 있지 않다. 미덕이라면 저 반복적인 쓰고 지우기 쪽에 더 있달 수 있는데, 서동욱의 「시론」에 기댈 때 그건 “낯선 것과의 조우”를 요청하는 “무의미”, 쓰는 자가 유의미로 포착한 그 무의미 속에서 생소한 무엇을 만나기 위한 “응답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 이야기는 시를 잉태하는 인간의 말, 실용성과 거리를 둔 그렇기에 쉽사리 “소통을 져버”리는 “고립”의 언어다. 이런 서동욱의 시론은 어쩌면 이 시집이 횡단하고 건너뛰며 출렁이는 물질성의 다양함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지점으로 보인다. 서동욱의 자서는 이러하다. “아스팔트 창밖으로 쓰레기장이 파랗게 빛난다 벼락을 맞아 충전된 건전지들이 폐건전지 통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폭풍우가 친다 벼락이 밤새 한 인간을 찾는다”. 자서 속 인간은 벼락을 받을지도 모르는 물질의 한 유(類)로 존재한다. 벼락의 내려침에 인간이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자명함은 저 쓰레기장의 폐건전지와 인간을 나란히 놓게 한다. 한편 인간이 폐기한 건전지는 차라리 자연의 일부인 듯 쓰레기장에 놓여 벼락의 힘으로 충전됨으로써 재생의 물질로 전환되어 인간을 역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확장되는 행위자의 범위에 대한 인식은 의도나 욕망과 같은 지향을 지닌 존재를 ‘두꺼운 행위자’로, 지향이 없는 것을 ‘얇은 행위자’로 나누기도 하지만(대니얼 C. 데닛, 『마음의 진화:대니엘 데닛이 들려주는 마음의 비밀』, 이희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6, 49쪽), 시가 되기도 전 저 날것의 언어에서 이미 벼락은 어쩐지 의도를 품은 듯 “한 인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좀 더 인간의 권위를 내려놓고 싶은 내 과도한 마음일까, 저 구획과 분류의 틀에서 인간의 자리를 좀 더 지울 수 있다면 하는 심정. 시인과 함께 걷는 “동네에는 내가 하나” 있으면 “길이 하나” 있고, “공실이 된 상점”도 “하나가” 있다. “공실이 편의점이었을 때” 그는 “매일 술을” 샀는데, “점주 여인은 교회 나가자고” 권한다. 길과 상점과 ‘나’의 일대일 관계에서 길과 상점은 나의 산책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그리고 상점 안의 술이라는 물질은 나와 여인 사이에 신앙을 삽입하여 일종의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끔 추동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주 여인을 떠올리는 건””생뚱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이를 포함한 것이 저 산책길의 풍경이기 때문에 유독 그이만 빼는 게 더 어색하다. 이제 “전단지 나눠 주는 알바가” “나의 도착을 기다리”는 길에서 며칠 뒤엔 전단지와 알바를 떠올릴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동네의 본질”. 산책의 본질이 아닐까.(「산책」) 그런가 하면 여덟 편에 이르는 ‘생일과 명절에 관한 연애시’ 연작은 ‘날’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자정이 오자 생일 같은 명절이 되었고 생일들은 답안에 도달한 수학자의 숫자들처럼 서로 꼭 들어맞으며 연애의 첫 기쁨을 잔잔한 나날로 만들었고 생일이 된 명절은 아기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늙은 인간을 새 이야기로 놀라게 하리 -「한 해의 마지막 저녁」 부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해는 한 살을 더 먹는 날이니 생일인 셈이기도 하다. 1월 1일은 데칼코마니 배열이고 ‘오늘부터 1일’은 설렘이 폭주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날’들은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게 만드는 힘이었던 걸까, 우리가 수없이 매달았던 날들의 의미를 되뇌어보자. 그때 인간의 행위는 그 감정까지도 꽤 수동의 모양이기도 하다. “철학도 정치도 자비심도” 호르몬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호르몬」). 우리는 파손된 기계 속았다고 미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 거짓말밖에 없다면 넌 내게 모든 것을 준 것이다 (중략) 우리는 파손된 기계 치킨과 소주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지 아주 살짝 그러나 엄연히 눈물이었지 -「사랑」 부분 그러고 보면 “영혼은 고독한 물질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 “추억을 간직할 지성도 없”는 “순수 존재”인 그것은 기실 “그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영혼이 아니다”(「유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사랑했으므로(아직 사랑하므로) 거짓말조차 네가 내게 준 전부라고 믿는 이 무지성적 현상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인간은 “파손된 기계”일 따름이다. 사랑도 그러할진대 “시 쓰기는 욕망이 창끝에 매단 토템 같은 것”(「시론」)이라면, 이 시집은 온통 출렁대는 물질의 유동성, 그러한 유물론(流物論)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식용’ 식물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차현준, 『온몸일으키기』, 2025, 04) 물질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때 표제작인 「온몸일으키기」는 보도블록의 이야기지만, 이 블록은 사고하고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결코 ‘얇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블록은 다만 하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없”을 뿐이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기에 스스로 “망각”을 택하기도 하는 블록은 “요즘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긴 하지만, 실패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누군가와 손은 잡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블록은 “태풍이나 지진”을 틈타 “흔들리”거나 “전력 질주”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 안간힘을 통해 블록은 벌떡 일어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을 가능성을 꿈꾼다. 가능성, 차현준의 시는 공간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연다. 그 방법의 한쪽 손아귀는 육체이고 다른 한쪽은 미끄러짐이다. 그는 아무 데서고 미끄러져 여기와 저기를 불쑥 열어젖힌다. 그러한 공간은 “니트릴 장갑에 물을 채운 다음 비워내”기 위해 “속에 묻혀 있던 단면을 정반대로 끄집어내자” 접속 가능해지는 식이다. 장갑 하나 뒤집었을 뿐인데 “난생처음 보는 들판에 엎어”질 수 있다(「적재접속」). 만약 당신이 “셔츠를 입었을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통풍이 잘되는 곳을 찾아간다. 가슴팍에 있는 단추 두 개를 고른다.” 그런 다음 “명치보다 더 안쪽으로. 복도까지 닿게 손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확보해놓은 부지에 찾아가는 방법이다”(「당귀 방」). 아무런 거리낌도 주저함도 없이 앨리스가 그리하던 것처럼 쑥 미끄러지고 착 당도한다. 그럴 때 육체란 하등 방해의 요소가 되지 않는다. 되레 육체는 그 통로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럼 거기 가서 무얼하느냐? “들판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여기서 몇십 년 지낸 뒤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니 “이 경험을 써먹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 한마디로 시적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적재접속」). 그는 온통 푸릇한 것을 기르고자 한다. 당귀를 비롯해 적근대, 치커리, 상추, 케일, 겨자, 호박잎, 방울토마토 등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그가 기르는 푸른 것들은 온통 먹을 수 있는 것들,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채소류이다. 보리차를 담은 유리병이 고창의 청보리밭을 꿈꾸게 하는 것처럼(「청보리밭」), 그가 보는 것들의 목록은 몇몇 나무 이름을 제외하고는 먹거리로 무성하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려 한다. 그건 새삼스레 식물을 키우며 그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고상한 취미 같은 게 아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에 필수적이다(서동욱의 「병원 밥」에서 병원이 죽음이 아닌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밥’으로 이야기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몸이 지속되는 물질의 선상에 놓이는 것처럼). 식물성에 접속하기 위해 육체를 경유하는 것을 차현준이 공간을 창조하는 독자성이라 말한다면, 차현준의 시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계에 접맥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랄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을 먹는 행위는 식물을 해하는 행위가 아니다(이 구분이 인간 중심적일 수는 있겠다, 다만 미처 처분하지 못한 “물컹해진 치커리”는 “퀴퀴한 냄새”로 변환되고 “뭉쳐지고 물컹해진 당귀들”은 “진물”을 내놓는다「당귀 방」). 식물과 인간은 먹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 먹는 행위는 인간을 배설하게 하는데 이 식물성의 배설은 “유기물이 풍부하다”(「밟아보기」). 유기물은 미래의 식물성을 예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태 순환 고리 안에 인간의 자리, 역할을 마련해준다. 이런 배치는 인간의 행위와 임무를 결코 인간중심으로 놓지 않으면서 그 연결 안에서만 유의미한 것이게끔 만든다. 이런 식용의 식물성은 인도어팜이나 주말농장 등 어디 먼 농촌의 들녘이 아닌 “7호선 상도역”(「인도어팜 방문기」)과 같은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의 식물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도시의 식물성은 어쩌면 ‘농촌상’ 보다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창조주이기라도 한 양 빛과 산소, 물을 공급하는 일이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그것은 자주 망하고 물크러지는가 하면 엄청난 자생력으로 인간을 초과한다. 이를테면 「방울토마토 신드롬」 같은 현상 말이다. 방마다 방울토마토가 들끓었다. 방울이라는 말이 없어 말이 되는 토마토가 무르익어 있었다. 굳이 자신을 방울토마토라고 우기 길래 그래, 그래. 상자에 들어가 있어. 나는 방마다 방울진 방울토마토들을 열심히 쓸어 담았다. (중략) 이렇게 다 담아도 방마다 한 번씩 더 돌아다녀줘야 한다. 과즙이 묻은 초록 계열의 잎들을 떼어내기로 했다. 쌈 싸 먹을 수도 없게 구린내가 나니까. (중략) 이 방울토마토들은 대체 왜? 어떻게? 방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내가 왜 방울토마토를 채집하고 다녀야 하는지 난감했다. 방에 있는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밭. 거기서 또 생겨나지. 기어이 생겨나니. 아주 기꺼이 생겨나지. 화가 났다. 방울토마토는 농락하듯이 더 커져만 갔다. (중략) 거대한 방울토마토를 베어 물고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는다. -「방울토마토 신드롬」 부분 먹는 행위로 식물과 도시의 인간은 연결된다. 인간은 식물을 먹기 위해 키우고 식물을 키우면서 자연계의 일원이 된다. 키우는 것과 자라나는 것, 만드는 인간과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결국 한 몸이다. 그건 방울토마토의 초과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실천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차현준의 시는 확실히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은 식물이 가진 생동성, 그 생장과 번식 심지어 짓무르는 죽음으로 가능한 이야기다. 인간은 식물의 포식자이지만 홀로 행위자이지만은 않아서 키우고, 먹고, 배설하지만, 자라거나 짓무르고 확장하고 팽창하는 힘은 식물 쪽이 더 세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싱그럽지만 매서운 사실을 껴안고 있는 셈이다. 이 식물성이 없을 때 인간의 배설은 오염이다. 인간은 잘 먹고 좋은 배설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잘 돌보아야 하고 방울토마토가 얼마든지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시집은 변화하는 생태와 인간의 연결을 전혀 새로운 감각, 그 독자성으로 써나간다, 확장해간다. 사물과 인간사가 타자, 난입자에 의해 계속 바뀌어 간다는 서동욱의 「시론」은 함께 읽은 시들을 관통하는 시간과 물질, 인간의 사유에 대한 다시 쓰기, 새로 쓰기, 바꿔 쓰기가 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시에는 애초 중심과 경계를 나누고 의미와 그 속에 머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계라는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라면 세계의 바깥 역시 없다는 통찰은 지금 우리의 시가 읽어내는 목소리들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음을, 바뀐 그것 역시 누군가의, 무엇의 영구적인 자리가 아님을 적시하며 그간의 위계와 같은 폭력을 지워나가는 ‘시’라는 언어를 보다 부드럽게 연마하는 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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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희 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계간 딩아돌하 황선희 한국현대시시계간평광장정치연대공동체정동걱정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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