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계간 딩아돌하 | 2024년 여름호(제71호)

다른 우주에선, 우리가 함께 있다는 가능성의 위로

조은영 시, 문학비평

조은영은 시인이자 국어교육 연구자로, 문학 창작과 교육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중부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경희대학교에 출강을 겸하고 있으며, EBS 프리미엄 국어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2020년 「시인수첩」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고, 이후 시 창작과 문학 담론 형성에 꾸준히 참여해 왔다. 저서로는 『디지털 시대의 문학교육, 매체로 시를 만나다』(공저),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저) 등이 있으며, 『행복교과서』 연구위원, 『김종삼 전집』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 문학 교육, 대학 강의, 교사 연수, 공공 인문학 강연 등 다양한 교육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문학관과 도서관, 문화재단, 대학 등과 협력하여 현대시 강연과 인문 콘텐츠 기획에 참여하며, 문학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나에게 초능력이 생긴다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고 싶었다. 5분 전으로, 일주일 전으로, 한 달 전으로...다시 돌아가 후회했던 순간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렇게 뒤돌아보는 습관은 관계에도 스며들었다. 곁에 있는 가족보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가족을 그리워했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때도 지나간 인연을 자주 떠올렸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현재의 행복을 느낄 수 없단 말을 수없이 듣고 되뇌었지만, 나의 해마(Hippocampus는 뇌의 한 부분으로, 장기 기억의 형성과 공간 인식에 관여하며 감정이 형성되는 맥락을 기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는 길을 잃은 채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전히 뒤로 감기 버튼을 누르는 일을 멈추지 못했다.

 

 그런 내게 인터스텔라’, ‘인셉션’, ‘마블 시리즈SF 영화 속 시공간을 초월한 주인공들의 활약과 다중 우주(multiverse), 평행 세계와 같은 상상력은 유난히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과학 이론을 토대로 구축된 영화 속 세계에서 주인공들은 시간을 멈출 수 있었고 시간과 공간을 뒤틀어 특정한 한순간에 머물 수도 있었다. 우주라는 블록 안에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존재하는 설정 앞에서 시간이 유수(流水)와 같다라는 비유는 유효하지 않은 희미한 명제가 되었다. 실제 과학 이론 위에 작가의 상상력이 덧입혀진 이러한 영화를 보고 나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능성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능성 1. 우주A. 비가 오는 날, 김치수제비를 호호 불며 먹고 있는 열 살의 내가 있다. 여름이면 수세미가 창을 덮던 집, 읍내에 살던 소녀의 방은 수세미 그림자로 늘 어둑하다. 그 방 한켠에서 분홍 스웨터를 입은 할머니가 열 살의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프지 않다.

 

 가능성 2. 우주B. 여름밤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무인 가게 앞에 흥성거린다. 키가 큰 곱슬머리의 그와 나는 벤치에 앉아 메로나 하나를 나눠 먹는다. 우리는 늘 하나만 사서 한입씩 베어물고 또 다시 다른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한입씩 차례로 나눠 먹는다. 그곳에 우리는 함께웃고 있다.

 

 가능성 3. 우주C.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아빠의 퇴근 시간을 기다린다. 덩치 큰 아빠의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가 대롱거린다. 봉지를 열면 아이스크림 투게더가 있다. 다섯 개의 머리가 옹기종기 투게더 앞에 앉는다. 숟가락으로 바닥까지 긁고 마지막 한 입은 늘 동생이거나 나였다. 마당에서는 바둑이와 메칸더 브-이가 우리 가족을 바라보고 있다.  

 

      가능성 4. 리스본의 한 서점에서 낭독회를 연다. 유일한 까만 머리의 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점 뒤편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 남편은 아이를 안은 채 나를 바라본다. 지나가던 여행객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도 드문드문 섞여 있다.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한국어로 진행되는 낭독을 말없이 듣는 밤. 마법 같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들, 다시 돌리고 싶던 장면들, 오래 기다려 온 미래의 순간들을 다중 우주에 하나씩 꺼내 놓는다. 과거·현재·미래가 흐르지 않고 한꺼번에 존재하는 우주에서는 유년과 작년,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있었다.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곳에 있다’, ‘존재한다’, ‘가능하다’. SF적 상상력으로 다중 우주에 사는 또 다른 나와 너, 다른 시간과 공간을 그려 보면 사무치고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보고 싶어, 엘리노어
이렇게 조용한 지구를 상상해본 적 있어?
인쇄된 글자처럼 쓸쓸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내게 너무 늦게 전해지는 건지도 몰라

손바닥만 따뜻해지는 불 앞에 모여 앉아서

가늠되지 않는 오후 속에서
후, 후 숨 쉬는 연습을 하고 있어

재를 터는 것처럼
뜨거운 것을 부는 것처럼

열기가 불행을 미뤄주는 것처럼
우리가 잠깐 잡았던 손처럼

끝난 것의 끝을 기다리면서
오래 헤어지는 연애를 하는 것 같다

불행하지 않아
자 따라해봐
불행하지 않다

지구가 버퍼링에 걸린 것 같지

빌린 책은 마지막 두 장이 잘려 있었어
나는 영원히 결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됐다

이봐, 로드리게즈
앞주머니에 뭐가 들었나?
잠겼어

하지 못했던 말이 생각나서
밤새 이불을 찼다

망가진 건 천천히 정확해져서
별이 많다

너무 밝은 건 인공위성이라고
만화책에서 봤어

네가 죽을 때까지 내려다볼게
떠나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

아무도 태우지 않은 전철이 이 시간이면 지나가
같은 자리를

성냥은 그으면 꺼지고
그으면 꺼져서

뭐가 변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왜 처음 겪는 불행도 익숙한 걸까?

사람 키우는 게임을 했지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다가 정말로 사는 모습 같아지면
일시 정지하고 섹스를 했다

이렇게는 살지 말자고

무서운 표정
벌써 다 자라서 부서진 사람의 얼굴
그래서 우린 눈을 감았나 봐

이런 표정은 유전자에 이미 있었던 걸까?
때가 되면 밖으로 나오는 걸까?
네가 뭘 더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게임으로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지
얌전히 서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일을 주고
집을 짓게 했지

너를 상상해, 엘리노어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둥둥 떠나니겠지

가끔 거기 있는 것 같아
네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럴 때면 나는 너무 작은 점이고

그러면 덜 가엾고
따뜻해
정적 속에서는 모든 게 직선으로 이어지겠지
순환선처럼

엘리노어,
너는 미래의 시간에 살고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어떤 말들은 이제 알 것 같다

오늘도 전철이 지나가
같은 시간에

너의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될까

엘리노어, 아직 보고 있어?

- 2888년 지구에서 발굴된 일기장으로 2500년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가 매우 삐뚤고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어 일부는 추측으로 메웠다. 기록자는 지구의 거의 마지막 생존자로 보이며, 때문에 기록은 상상으로밖에 채울 수 없었던 지구의 마지막을 복원하는 일에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기록자가 도시 빈민이었기에 적절한 때 우주로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연구가들은 덧붙인다.
  - 조시현, 「아이들 타임」 전문, 『아이들 타임』, 문학과 지성사, 2023.


 위 시는 조시현의 시집 아이들 타임의 표제작으로 화자가 엘리노어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각주에는 이 시가 “2888년 지구에서 발굴된 일기장이며 “2500년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하였다. 시 속에서 화자는 엘리노어미래의 시간에 살고있다고 말한다. ‘엘리노어는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이지만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넘어 화자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사는 영속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이를 다중 우주의 관점에서 확장해 본다면 엘리노어는 하나의 단일한 시간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의 차원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인물로 읽힐 수도 있다. 이때 시가 제시하는 우주적 차원의 죽음은 단순 소멸이 아니라 분기된 세계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는 삶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는 죽음의 새로운 형태의 재생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가능성을 지닌다.

 일기와 같은 기록은 영원한 삶을 얻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육체는 소멸되었지만, 개인이 추구하던 가치와 정체성, 기억을 담은 기록(일기)복원되어 유지된다. 따라서 일기장을 복원하는 작업은 과거현재로 가져와 미래를 성찰하는 데 핵심적인 의미를 지닌다. 2024년을 기준으로 할 때 2500년에 쓰인 일기장은 476년 이후의 기록이며, 2888년 지구가 이미 멸망한 상태라는 가정은 우리에게 시간 여행의 감각을 제공한다. 이러한 시간적 도약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가치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불행을 견디는 상상, “덜 가엾고, 따뜻하게

 

 ‘엘리노어미래의 시간에 살고”, 화자는 과거의 빛을 보고 있다. 화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대상과 소통하고자 하듯 반복적으로 여기 있어라고 말한다. SF에서 여기는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할 가능성을 지닌 지점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뤄진다.2) 이곳에서 여기는 단순한 장소(배경)가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 화자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자각하였다는 인식의 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읽는 독자 역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식의 순간에 함께 참여하며, 현재의 좌표를 상상하게 된다.  

 화자는 거기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엘리노어가 나를 보는 것 같은 순간, “우리가 잠깐 잡았던 손의 온기를 떠올리며 자신이 덜 가여운 존재가 된다고 고백한다. 그리워하는 대상이 다른 차원에서 여전히 존재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의 외로움은 조금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나의 존재와 행위가 무한히 분기된 우주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와 삶의 방식 또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닌다.

 독자들은 아이들 타임을 읽으며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 존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SF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러한 문학적 접근은 독자로 하여금 죽음과 상실을 넘어서는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이때 SF적 상상력은 불행과 상실을 견디기 위한 하나의 사유 방식이자 방법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론 : ‘SF적 상상력

 

 고대 철학에서도 인간은 종종 우주의 축소판, 소우주(microcosm)’로 이해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을 우주와 동일한 로고스에 따라 존재하는 소우주적 존재로 보았으며, 플라톤 또한 인간 안에 우주의 질서와 구조가 반영되었다는 관점을 가졌다. 이러한 사유는 동양 사상에서도 확인되는데,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는 개념은 인간과 우주가 근원적으로 하나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는 인간을 자연과 우주의 일부로 인식하고, 우주의 법칙과 질서를 내면화한 존재로 이해하려는 사유의 연장선에 놓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각 개인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하나의 ‘()우주로 비유될 수 있다. 우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팽창하듯, 인간의 경험과 지식, 인격 또한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변화한다. 우주가 수많은 별과 행성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인간도 다양한 생각과 감정으로 구성된 존재이며, 이러한 내면 세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한다.


우리는 공간과 사귀는 법을 배워야 해요 아니면 자신과 처음 만난 것처럼 새로 사귀어야죠 오리엔테이션은 언제나 어리둥절해요 다과를 차려놓고 둘러앉아볼까요
나와 공간과 나
처음엔 귓속말, 다음엔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죠 그러나 점점 크게 소리를 쳐야 들리는 곳까지 멀어져요
종이컵 전화라도 만들 걸 그랬어요 벙긋거리는 입으로, 뭐라고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요?

모래사장이 펼쳐져요 집은 멀어지고 나는 자꾸 나에게 돌아가려 애써요

애초에 목소리는 없어요 우리의 혀는 색을 잃었죠 말은 어둠 속에 잠기지만 표정이라도 보이는 곳에 있어줘요
벌써 저기 멀어진 당신
등뒤의 얼굴이 낯설어요 우리 사이엔 발자국이 어지러워요
그곳에 내 문자가 도착이나 할까요

  - 권민경, 「팽창하는 우주」 전문,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문학동네, 2024.-


20244월에 나온 권민경 시인의 팽창하는 우주를 읽는다. 우주는 빅뱅으로 탄생한 이후 지금도 팽창을 거듭하고 있으며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팽창의 근본적인 원인은 지금도 완전히 밝혀지진 않았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우리는 공간과 사귀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우주의 무한한 확장과 그로 인해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나와 공간의 관계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와 공간과 나의 이해를 말하고 있는 지점을 주목하여 첫 줄로 돌아가 다시 읽어보자.

 

우리는 공간과 사귀는 법을 배워야 해요 아니면 자신과 처음 만난 것처럼 새로 사귀어야죠

 

 이 구절은 우리가 몸을 두고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과, 그 공간을 살아가며 형성되는 내적 공간, 즉 하나의 우주로서의 가 어떻게 서로 맞물려 있는지를 사유하게 만든다. 여기서 공간은 외부의 장소이자 동시에 정신과 감정이 축적된 내면의 영역을 함께 말한다.

 따라서 시에서 지칭하는 우주가 물리적 우주가 아니라 하나의 우주인 로 전환하여 읽는다면 이 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발견하고 이해하는지에 대한 탐구로 해석될 수 있다. 이곳의 와 저곳의 ’, 그 사이 공간에는 사건, 감정, 생각, 행동과 같은 다양한 경험들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험들의 축적은 개인의 내면 우주를 팽창시킨다. 삶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과 그로 인해 생성되는 생각과 감정들은 기존의 시각을 변화시키고, 원래의 에서 다른 로 이동하게 만든다.

  이처럼 로부터 멀어졌다가 다시 에게로 돌아가려는 사투는 시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우주전쟁에서 화자는 나는 자꾸 나에게 돌아가려 애쓰는 존재로 등장하며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려는 주체를 그린다.

 한편 고행자에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에게 붙잡혔다라고 표현하며 집단적 관계망 속에 포섭된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처럼 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우리에 붙잡힌 상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은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는 정체성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화자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동시에 본래의 자신, 근본적인 자아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우주가 끊임없이 팽창하면서도 그 존재의 성격이 우주라는 사실을 잃지 않듯이, 인간 역시 다양한 경험과 사유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면서도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한다. 이는 인간의 삶이 단순한 선형적인 발전이 아니라, 지속적인 팽창과 본질적인 자아로의 회귀라는 복잡한 동적 과정임을 시인은 우주를 빌려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조심스레 더듬어 본다.

 

 

 백지 위에 내려 쓴 가능성들

 

 사람들은 시들어가는 꽃을 아쉬워하며 드라이플라워를 만들고, 뭉개지다 사라지는 딸기와 살구를 잼으로 만들어 그 맛과 향을 더 오래 음미한다. 이처럼 사라질 순간들을 붙잡아 보존하려는 행위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백지 위에 순간을 기록하는 일과 닮아 있다.

 시 쓰는 일을 우주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매우 무거울 수도 가벼울 수도 있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과 사상, 경험을 깊이 사유하며 인간의 본질이나 삶의 의미를 시로써 무겁게탐구할 수 있고 동시에 우주처럼 광활하고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가볍고자유롭게 시공간을 넘나들며 쓸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단어들은 별들처럼 흩어지기도 하고, 서로를 끌어당기며 하나의 그림과 좌표를 형성하기도 한다.

 나는 달의 맛이란 시를 처음 썼을 때 다중 우주를 상상했다. 지금은 함께할 수 없는 사람과 다른 우주에서는 함께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 시는 출발했다. 이 작품우주에서 행성으로, ‘행성에서 , 다시 에서 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사유의 변주 속에서 탄생하였다. 따라서 시 속의 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와 차원, 그리고 시간의 층위를 가로질러 지속되는 기억과 감정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웅크리고 자는 날엔 당신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손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날엔
귤을 한 봉지 사들고 집에 옵니다
방이 조금 환해집니다

봉지가 쏟아지면 터진 마음 하나가 먼저 주저앉습니다 가장 멀리 굴러가는 것을 향해 몸을 일으킵니다

작은 귤을 집어 듭니다 얇은 껍질이 과육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손톱 끝으로 조각조각 벗겨냅니다
어제를 벗기는 소리가 방을 채웁니다

겨울이 괜찮은 건 귤 때문이라고 말하던 당신이었어요
귤 하나가
기다림의 이유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 필자, 「달의 맛」 중에서



  비평가이자 작가인 새뮤얼 딜레이니는 SF와 판타지를 구분하며, SF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판타지를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장르를 구분한 바 있다.3) 이에 비추어 보자면, “웅크리고 자는 밤에 당신을 만난다는 상상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일 뿐이다. 이는 SF적 상상력이 열어 보이는 가능성의 시간에 속한다.    

 ‘이 가져다주는 빛은 단순한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존재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빛이길 바랐다. 귤을 먹는 행위를 하나의 우주적 사건으로 보고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경험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순간에 닿아 보고자 했다. 비록 이러한 시도가 우주의 먼지만큼 소소해 보일지라도, 다중 차원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잘 표현되어 별처럼 반짝이고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자꾸 돌아보는 사람들이 시를 쓴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 시 쓰기는 그렇다. 나에게 시 쓰기는 다중 우주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후회하고 뒤돌아보는 마음이 나를 백지 앞에 앉게 한다. 그리워하는 것들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 한 장 한 장, 한 편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우주가 되어 그 안에서 숨 쉰다. 현실에서 해답을 찾기 어려울 때면, 는 종종 다른 차원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 다른 차원, 우주와 같은 상상 속에서 시를 완성하고 천천히 낭독해 본다. 백지 위에 써 내려간 모든 가능성의 세계가 이미 그곳에 존재하기에 나는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고 느낀다. 내가 소중히 여겨 온 모든 것들은 백지라는 차원 안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별처럼 시가 된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도 불면을 다독여 본다.  
  • 1) 시인, 중부대학교 학생성장교양학부 조교수
  • 2) 우주에서는 “여기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이는 자기가 속한 사회, 위치, 정체성을 말하는 ‘자기 반영적’ 말이기도 하다. SF 주인공들이 “여기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 있는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에 있다. <이동신, 『SF,시대정신이 되다』, 서가명강, 2022, 18-20쪽>
  • 3) 심완선,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학교도서관저널, 2023, 29쪽에서 ‘새뮤얼 딜레이니’ 말을 재인용.

추천 콘텐츠

황유지 생동하는 ‘것’들의 크레디트

1. 파수의 다시 쓰기 (서윤후,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2025, 04) 경계하여 지킨다는 뜻의 파수(把守)의 한자어를 달리하여 派收로 써볼까? 여러 번 중의 어느 한 번을 뜻하는 파수(派收)를 다시 破水로 쓰면 파문을 향해 빠져나가는 물 혹은 분만 전에 쏟아지듯 터지는 양수를 일컫는 힘찬 말이 된다. 시인이 스스로 “내 오랜 파수(把守)의 역사”(「유리가미」)라고 운을 뗀 시집을 펼치며 우리는 가장 먼저 “돌아보지 않으려고”“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는 문장을 만난다. <시인의 말>에 기대어 이 시집이 악몽의 받아쓰기, 오래 뒤숭숭한 꿈자리를 지켜온 자의 고단함을 옮겨놓은 파수(把守)의 고백임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은 그러나 얼마나 충실히 이행될 수 있을까? 이 결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또 어떤 금기를 어기는 심정으로 어쩌지 못하고 돌아보았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야 조금 놓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은 어떻게 변해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 시집의 관건 중 하나는 시간이다. 시간은 자꾸만 ‘나’를 유기하고 가버린다. 곧장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 앞에서 종종 나만이 오도카니 남겨졌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모여앉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린 때도, 선생의 질문에 더 좋은 답을 궁구하느라 우물거리며 대체로 수용될만한 밋밋한 답을 제출한 때도, 누군가의 결정에 맞서 당차게 의견을 설파하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만 있던 때도 시간은 나만 놓고 표표히 흘러가곤 하지 않았나. 그럴 때면 어떻게 했던가? 돌아와 누운 밤에 후회와 함께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을 저 검은 어둠 속에 꼼꼼하게도 새겨넣지 않았나. 여기서 서윤후는 “나를 눌러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시인에게는 곧 ‘다시 쓴다’는 말이다. 제때 행하지 못한 대답은 나중에 한다고 해도 정답은 아니라서 그는 시간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다만 그 시간은 망쳐버린 이야기의 시간이기에 주요 인물일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기다린다. 이미 내가 종료해버린 이야기의 장면에는 그러나 나 혼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서 도리 없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리하여 장면 안의 이들이 행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럴 때 세계는 온통 구겨지고 주름진 것들이다. 전단지 속 예수를 접었을 때 가방 속에서 툭 펼쳐지는 전단지의 주름은 전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전능도 나를 데리고 갈 순 없어서 그저 이 망가진 이야기가 끝이 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즉 더 나빠지길 기다린다. 시간과의 결별이라는 결심은 한편 시인의 권능이기도 해서 여러 번 중 한 번을 겪을 기회, 다시는 가능해진다. 다시 쓰기라는 파수(派收)의 쓰기이다. 그러나 부적응의 시간은 상처로 오롯해서 왠지 씁쓸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망가진 것들은 저들끼리 순환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세계의 주름일까. 주름만이 시가 될 것을 아는 자는 그렇게 “나빠지길 기다린다”. 창밖엔 멀쩡한 걸음으로 들고 온 목발을 다시 어디선가 절뚝이며 나타난 이에게 건네고 지폐를 주고받은 뒤 그가 왔던 길을 다시 또박또박 걸어가는 장면 균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구나 세상의 부목은 여기저기 출렁이면서 부러진 일순간을 잡아주면서 -「나빠지길 기다린다」 부분 다시 말해 세계의 균형이란 좋은 것만 있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한 시간마다 스프링클러가 열”린 후 나오는 햇빛은 외려 식물을 죽게 만들 수 있듯이(「독화살개구리」), “호주머니 속에”“젖은 돌멩이”를 가진 사람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저수지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임을, 그 고독한 세계로의 재입장(入場)의 입장(立場)이 매우 난처함을 헤아림이 필요하듯이(「고독지옥」), “살려주는”일이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짐작하듯이(「견본 생활」) 좋은 쪽과 나쁜 쪽은 절반씩 유효하다. 또 하나의 관건은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랑이다. 그건 타고난 체질인 양하다. 이를테면 「물길 빈티지」와 「유리가미」는 나란히 놓고 읽을 때 인과관계를 이룬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 관리를 맡기고 흘러갔다”. “이미” 물도 다 “말라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아……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음을. “서로 헤어진 적 없는 물의 우정”은 나를 배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이 길을 지우지 않는 기다림”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은 이를테면 쓸모에 대한 발견이면서도 소망하던 이들과 함께 갈 수는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이기도 하다(「물길 빈티지」). 그래서 그는 다음 시편에서 이런 시도를 해본다. “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기억의 뒤뜰”이다. 이 뜰에서 숱하게 끊어진 연을 떠나보냈을 것이나 기어이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고 싶어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사람들을 모으고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연줄을 죄 끊어버릴 참인 게다. 그리고 알게 되는 건 이 억지스러운 연(緣) 놀이가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인연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유리가미」). “사랑의 천재를 사랑한 적 있”(「사랑의 천재」)다는 고백은 그 말의 주인 역시 사랑의 천재라는 말로 들린다. 정말이지 사랑이 체질. 그런 그가 사랑을 부조하는 방식은 마지막 시편, 「비로소 함께할 것」의 목록으로 더욱 선명히 융기한다.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꼽아 부르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쓴 이 참여의 목록은, 앞으로 함께 걸어야 할 대상들이 아름답게 박제된 완결의 이야기 쪽이 아닌 미완과 실패의 조금은 남루한 조각들 쪽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럴 때 어둡기만 하던 흑백의 시퀀스는 이제는 보내야하는 어떤 끈질긴 마음의 한 장면을 아스라하게 닫는 기억의 보존 방식이자 그 시간을 닫는 이별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끝내 홀로 꾸던 악몽의 시간 속에서 다음의 이야기는 마냥 나쁘게만 쓰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그런 시간, 기억과 이별하는 방식이 결코 함부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님을 이 악몽의 파수꾼은 지키고 쓰고 지우고 쓴다. 그럴 때 그 시간과의 결별 후 찾아올 새로운 시간은 무언가 한꺼번에 물꼬를 틀 파수(破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밝은 쪽에 있다고 믿는 나의 눈부심은 실은 항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고, 누군가는 눈부심에 찔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심스레 어둠 쪽을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과 함께 다음의 시간은 올 것만 같다.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곳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그게 벌어진 모든 일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될 순 없어서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경적을 울리며 자들이 나를 지나친다 -「흑백판화」 부분 2. 유동하는 물질들의 시론 (서동욱, 『유물론』, 민음사, 2025, 03) 서윤후의 시가 그런 시간과 기억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숱하게 썼다 지우는 이야기라면 그 미덕은 극복에만 있지 않다. 미덕이라면 저 반복적인 쓰고 지우기 쪽에 더 있달 수 있는데, 서동욱의 「시론」에 기댈 때 그건 “낯선 것과의 조우”를 요청하는 “무의미”, 쓰는 자가 유의미로 포착한 그 무의미 속에서 생소한 무엇을 만나기 위한 “응답의 요구”인 셈이다. 그런 이야기는 시를 잉태하는 인간의 말, 실용성과 거리를 둔 그렇기에 쉽사리 “소통을 져버”리는 “고립”의 언어다. 이런 서동욱의 시론은 어쩌면 이 시집이 횡단하고 건너뛰며 출렁이는 물질성의 다양함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지점으로 보인다. 서동욱의 자서는 이러하다. “아스팔트 창밖으로 쓰레기장이 파랗게 빛난다 벼락을 맞아 충전된 건전지들이 폐건전지 통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폭풍우가 친다 벼락이 밤새 한 인간을 찾는다”. 자서 속 인간은 벼락을 받을지도 모르는 물질의 한 유(類)로 존재한다. 벼락의 내려침에 인간이 결코 예외일 수 없다는 자명함은 저 쓰레기장의 폐건전지와 인간을 나란히 놓게 한다. 한편 인간이 폐기한 건전지는 차라리 자연의 일부인 듯 쓰레기장에 놓여 벼락의 힘으로 충전됨으로써 재생의 물질로 전환되어 인간을 역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확장되는 행위자의 범위에 대한 인식은 의도나 욕망과 같은 지향을 지닌 존재를 ‘두꺼운 행위자’로, 지향이 없는 것을 ‘얇은 행위자’로 나누기도 하지만(대니얼 C. 데닛, 『마음의 진화:대니엘 데닛이 들려주는 마음의 비밀』, 이희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6, 49쪽), 시가 되기도 전 저 날것의 언어에서 이미 벼락은 어쩐지 의도를 품은 듯 “한 인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좀 더 인간의 권위를 내려놓고 싶은 내 과도한 마음일까, 저 구획과 분류의 틀에서 인간의 자리를 좀 더 지울 수 있다면 하는 심정. 시인과 함께 걷는 “동네에는 내가 하나” 있으면 “길이 하나” 있고, “공실이 된 상점”도 “하나가” 있다. “공실이 편의점이었을 때” 그는 “매일 술을” 샀는데, “점주 여인은 교회 나가자고” 권한다. 길과 상점과 ‘나’의 일대일 관계에서 길과 상점은 나의 산책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그리고 상점 안의 술이라는 물질은 나와 여인 사이에 신앙을 삽입하여 일종의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끔 추동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주 여인을 떠올리는 건””생뚱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그이를 포함한 것이 저 산책길의 풍경이기 때문에 유독 그이만 빼는 게 더 어색하다. 이제 “전단지 나눠 주는 알바가” “나의 도착을 기다리”는 길에서 며칠 뒤엔 전단지와 알바를 떠올릴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동네의 본질”. 산책의 본질이 아닐까.(「산책」) 그런가 하면 여덟 편에 이르는 ‘생일과 명절에 관한 연애시’ 연작은 ‘날’에 대해 곱씹어보게 한다. 자정이 오자 생일 같은 명절이 되었고 생일들은 답안에 도달한 수학자의 숫자들처럼 서로 꼭 들어맞으며 연애의 첫 기쁨을 잔잔한 나날로 만들었고 생일이 된 명절은 아기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늙은 인간을 새 이야기로 놀라게 하리 -「한 해의 마지막 저녁」 부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해는 한 살을 더 먹는 날이니 생일인 셈이기도 하다. 1월 1일은 데칼코마니 배열이고 ‘오늘부터 1일’은 설렘이 폭주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날’들은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게 만드는 힘이었던 걸까, 우리가 수없이 매달았던 날들의 의미를 되뇌어보자. 그때 인간의 행위는 그 감정까지도 꽤 수동의 모양이기도 하다. “철학도 정치도 자비심도” 호르몬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호르몬」). 우리는 파손된 기계 속았다고 미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끄집어낼 수 있는 말이 거짓말밖에 없다면 넌 내게 모든 것을 준 것이다 (중략) 우리는 파손된 기계 치킨과 소주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지 아주 살짝 그러나 엄연히 눈물이었지 -「사랑」 부분 그러고 보면 “영혼은 고독한 물질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 “추억을 간직할 지성도 없”는 “순수 존재”인 그것은 기실 “그저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영혼이 아니다”(「유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지만 사랑했으므로(아직 사랑하므로) 거짓말조차 네가 내게 준 전부라고 믿는 이 무지성적 현상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그리하여 사랑에 빠졌을 때 인간은 “파손된 기계”일 따름이다. 사랑도 그러할진대 “시 쓰기는 욕망이 창끝에 매단 토템 같은 것”(「시론」)이라면, 이 시집은 온통 출렁대는 물질의 유동성, 그러한 유물론(流物論)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식용’ 식물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 (차현준, 『온몸일으키기』, 2025, 04) 물질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때 표제작인 「온몸일으키기」는 보도블록의 이야기지만, 이 블록은 사고하고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결코 ‘얇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블록은 다만 하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근육이 없”을 뿐이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기에 스스로 “망각”을 택하기도 하는 블록은 “요즘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긴 하지만, 실패의 기억 때문에 “이제는 누군가와 손은 잡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블록은 “태풍이나 지진”을 틈타 “흔들리”거나 “전력 질주”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 안간힘을 통해 블록은 벌떡 일어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을 가능성을 꿈꾼다. 가능성, 차현준의 시는 공간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연다. 그 방법의 한쪽 손아귀는 육체이고 다른 한쪽은 미끄러짐이다. 그는 아무 데서고 미끄러져 여기와 저기를 불쑥 열어젖힌다. 그러한 공간은 “니트릴 장갑에 물을 채운 다음 비워내”기 위해 “속에 묻혀 있던 단면을 정반대로 끄집어내자” 접속 가능해지는 식이다. 장갑 하나 뒤집었을 뿐인데 “난생처음 보는 들판에 엎어”질 수 있다(「적재접속」). 만약 당신이 “셔츠를 입었을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통풍이 잘되는 곳을 찾아간다. 가슴팍에 있는 단추 두 개를 고른다.” 그런 다음 “명치보다 더 안쪽으로. 복도까지 닿게 손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확보해놓은 부지에 찾아가는 방법이다”(「당귀 방」). 아무런 거리낌도 주저함도 없이 앨리스가 그리하던 것처럼 쑥 미끄러지고 착 당도한다. 그럴 때 육체란 하등 방해의 요소가 되지 않는다. 되레 육체는 그 통로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럼 거기 가서 무얼하느냐? “들판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여기서 몇십 년 지낸 뒤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니 “이 경험을 써먹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 한마디로 시적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적재접속」). 그는 온통 푸릇한 것을 기르고자 한다. 당귀를 비롯해 적근대, 치커리, 상추, 케일, 겨자, 호박잎, 방울토마토 등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그가 기르는 푸른 것들은 온통 먹을 수 있는 것들,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채소류이다. 보리차를 담은 유리병이 고창의 청보리밭을 꿈꾸게 하는 것처럼(「청보리밭」), 그가 보는 것들의 목록은 몇몇 나무 이름을 제외하고는 먹거리로 무성하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려 한다. 그건 새삼스레 식물을 키우며 그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고상한 취미 같은 게 아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에 필수적이다(서동욱의 「병원 밥」에서 병원이 죽음이 아닌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밥’으로 이야기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몸이 지속되는 물질의 선상에 놓이는 것처럼). 식물성에 접속하기 위해 육체를 경유하는 것을 차현준이 공간을 창조하는 독자성이라 말한다면, 차현준의 시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계에 접맥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랄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을 먹는 행위는 식물을 해하는 행위가 아니다(이 구분이 인간 중심적일 수는 있겠다, 다만 미처 처분하지 못한 “물컹해진 치커리”는 “퀴퀴한 냄새”로 변환되고 “뭉쳐지고 물컹해진 당귀들”은 “진물”을 내놓는다「당귀 방」). 식물과 인간은 먹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 먹는 행위는 인간을 배설하게 하는데 이 식물성의 배설은 “유기물이 풍부하다”(「밟아보기」). 유기물은 미래의 식물성을 예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태 순환 고리 안에 인간의 자리, 역할을 마련해준다. 이런 배치는 인간의 행위와 임무를 결코 인간중심으로 놓지 않으면서 그 연결 안에서만 유의미한 것이게끔 만든다. 이런 식용의 식물성은 인도어팜이나 주말농장 등 어디 먼 농촌의 들녘이 아닌 “7호선 상도역”(「인도어팜 방문기」)과 같은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의 식물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도시의 식물성은 어쩌면 ‘농촌상’ 보다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창조주이기라도 한 양 빛과 산소, 물을 공급하는 일이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그것은 자주 망하고 물크러지는가 하면 엄청난 자생력으로 인간을 초과한다. 이를테면 「방울토마토 신드롬」 같은 현상 말이다. 방마다 방울토마토가 들끓었다. 방울이라는 말이 없어 말이 되는 토마토가 무르익어 있었다. 굳이 자신을 방울토마토라고 우기 길래 그래, 그래. 상자에 들어가 있어. 나는 방마다 방울진 방울토마토들을 열심히 쓸어 담았다. (중략) 이렇게 다 담아도 방마다 한 번씩 더 돌아다녀줘야 한다. 과즙이 묻은 초록 계열의 잎들을 떼어내기로 했다. 쌈 싸 먹을 수도 없게 구린내가 나니까. (중략) 이 방울토마토들은 대체 왜? 어떻게? 방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내가 왜 방울토마토를 채집하고 다녀야 하는지 난감했다. 방에 있는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비치는 밭. 거기서 또 생겨나지. 기어이 생겨나니. 아주 기꺼이 생겨나지. 화가 났다. 방울토마토는 농락하듯이 더 커져만 갔다. (중략) 거대한 방울토마토를 베어 물고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는다. -「방울토마토 신드롬」 부분 먹는 행위로 식물과 도시의 인간은 연결된다. 인간은 식물을 먹기 위해 키우고 식물을 키우면서 자연계의 일원이 된다. 키우는 것과 자라나는 것, 만드는 인간과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결국 한 몸이다. 그건 방울토마토의 초과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실천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차현준의 시는 확실히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은 식물이 가진 생동성, 그 생장과 번식 심지어 짓무르는 죽음으로 가능한 이야기다. 인간은 식물의 포식자이지만 홀로 행위자이지만은 않아서 키우고, 먹고, 배설하지만, 자라거나 짓무르고 확장하고 팽창하는 힘은 식물 쪽이 더 세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싱그럽지만 매서운 사실을 껴안고 있는 셈이다. 이 식물성이 없을 때 인간의 배설은 오염이다. 인간은 잘 먹고 좋은 배설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잘 돌보아야 하고 방울토마토가 얼마든지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시집은 변화하는 생태와 인간의 연결을 전혀 새로운 감각, 그 독자성으로 써나간다, 확장해간다. 사물과 인간사가 타자, 난입자에 의해 계속 바뀌어 간다는 서동욱의 「시론」은 함께 읽은 시들을 관통하는 시간과 물질, 인간의 사유에 대한 다시 쓰기, 새로 쓰기, 바꿔 쓰기가 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시에는 애초 중심과 경계를 나누고 의미와 그 속에 머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계라는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라면 세계의 바깥 역시 없다는 통찰은 지금 우리의 시가 읽어내는 목소리들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음을, 바뀐 그것 역시 누군가의, 무엇의 영구적인 자리가 아님을 적시하며 그간의 위계와 같은 폭력을 지워나가는 ‘시’라는 언어를 보다 부드럽게 연마하는 중인 듯하다.

계간 딩아돌하 황유지 다시쓰기물질식물유물론식용서동욱서윤후차현준 2025
황선희 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계간 딩아돌하 황선희 한국현대시시계간평광장정치연대공동체정동걱정 2025
황유지 아보하는 가능할까

한때 행복의 지표로 회자 되며 최근까지도 세간의 주요 키워드로 꼽히던 소확행은 소비사회의 알리바이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변질된 모양새다. #소확행은 행복을 소비의 정도에 대비시켜 되레 과도한 물질적 욕망에 명분을 제공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시태그를 단 이 단어는 비교와 경쟁을 추동하고 스몰럭셔리, 행복 강박의 다른 이름이 되어 소셜미디어에서 행복의 경쟁이라는 또 다른 피로를 누적한다. 이에 그 자리에 새롭게 떠오른 행복 담론을 한 매체는 아주 보통의 하루, ‘#아보하’로 제시한다.1) 아보하의 핵심은 무탈, 평온, 보통과 같은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에 있다. 초고도 발전의 사회란 안전한 삶과 등가가 아니어서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길을 가다가 여행을 다녀오다가, 죽는다. 너무도 쉽게 반복되는 우연과 거듭되는 참사, 믿을 수 없는 역사의 회귀는 일상의 유지라는 문제를 기도하고 소망해야 하는 난제로 만든다. 행복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무탈하게 하루를 보낸 것만으로도 장하고 고맙다는 ‘아주 보통의 하루’는 논쟁적인 말일 수 있지만 순차적 인생 모형이라는 것이 죄 뒤틀어진 지금, 행복을 좇을 때는 행복하지 않다는 역설이 낳은 이 ‘추구미’에 우리는 해시태그를 달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겨울을 함께 지나온 시집을 읽어본다. 1. 골디락스2) 생존법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창비, 2024, 12.) 성격유형 지표에 따를 때 사고형(Thinking)을 일컫는 T형 타입은 감정형에 비해 사실에 관심을 두고 객관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특징 지어진다. 현실적이라는 단어로 갈음되는 이 타입은 공감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상주의적 인간형 F(Feeling)로부터 ‘너 T야?’라는 말을 듣곤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모종의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 시집을 읽고 있자면 화자를 향해서도 이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혹시, 너 T야? 그런데 저 물음은 수상쩍다. 그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정동이 꽤나 들러붙어 있는 듯해서인데, 재난과 참사라는 상처에 쓰라림을 끼얹은 것은 정치적 입장과 재난을 둘러싼 부조리였고 애도를 불가능하게 몰아세운 이들에게 누군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공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는(않는) 일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농담에 힐난의 어조를 들씌워 저 물음을 썩 개운치 못한 것으로 투사한다. 공감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음에도 혹자는 공감 부재와 불능에 대해 일종의 반작용을 작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너는 T형 타입이구나! 라는 말에는 공감에 대한 사회적 강박이 내재하고 개인의 윤리의식을 강제하는 측면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정서에 반하는 커밍아웃은 제법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매일 아침 기도는 드리지만 신을 사랑하라는 이들의 발화가 낯선 것은 (가족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인사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고백 같은 것 말이다(“제가 사랑이 없습니다”, 「오늘 서울 날씨」). 사랑이 없다는 고백 뒤로는 생활의 후경이 일상과 함께 두루 그려진다. 산책로와 그 길을 따라 흐르는 하천과 뒷산, 빵집, 마트, 지하철역과 같은 동네 지형지물을 배경으로 이 시집의 화자는 ‘산다’. 시인의 주변을 살짝 옮겨보면, “산속 개구리의 주인이 있고/ 소비자가 있고” 들개는 “자주 훼손된 채로 발견”되며(「뒷산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다. 묶여 있는 것은 호수뿐만이 아니라서 큰 개도 묶여 있는데, 화자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호수공원」).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풍광은 이렇듯 이미 묶여 있는 것, 인간의 손을 탄 것, 다시 말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자연이 되레 인공에 의해 그 의미의 자리가 탈각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는다. “전기 좋아해요?” 그리고 따라붙는 문장은 자답에 가깝다.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빛의 생산」). 기존의 의미 체계가 이미 소실된 세계에서 자연(스러움)이란 거대한 인공호수와 나를 해칠 염려가 없도록 묶인 개가 있는 풍경이며, 종달새는 없을 수 있겠지만 전기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취향은 얼마든지 삭제 가능하고 ‘나’라는 존재는 필멸이며 그 시기는 언제든 가능한 이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고통과 전기만을 재편된 세계의 질서에 의심 없이 남을 대상물로 지목한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의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 번에 한 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부분 자연은 인공적인 것을 거쳐 물질화된 것으로 그 정의를 다시 쓴다.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면 그 출발은 마트에 있을 것이라는 화자에게는 차라리 글로벌 유통과 거기에 매달린 지구 반대편의 노동과 부채, 불안정한 나의 노후에 관계되는 GMO 감자칩 한 봉지가 더 세계관에 밀착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건강과 질병은 마트에서 나의 선택으로 판가름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에게 모든 선택의 자유를 내맡기지 않나. 친환경 무라벨이든 해석 불가의 외국어 상표든 문자의 제 기능이 소외되기는 매한가지인 상품 진열대 앞에서 문자가 물건에 부착되기에는 비위생적인 것이 된 것이라 해석하는 화자는 이 유니버스의 ‘적당히’ 건강한 소비자(식용 동물도 그렇지만 소비자 역시 적당히 병들고 적당히 건강해야 한다. 소비자는 식품뿐만이 아니라 약품도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로서만 요구될 따름이다. 세계의 질서, 그 정의가 변하면 거기서 생존 내지는 의탁하는 존재들의 양태 또한 변해야 할 것인데, 변형된 질서와 정의의 불일치는 화자를 곤란하게 한다. 그래서 그는 학습을 통해 세계를 배우고 연습하려 하지만, 자연에는 없는 곡선을 연습하는 일이나(「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원데이 클래스에 등록해 휴일을 배우려는 일은(「도시의 명소」) 늘 실패로 귀결된다. 변화는 한 인간이라는 개체의 리듬에도 적용되는데, “누가 아줌마하고 소리쳐 부르면/ 갑자기 아줌마로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그래서 내력과 외력의 충돌이라는 소란 양상의 능동태가 된다. 그럴 때 화자는 발화와 협의된 적 없는 행동반응의 요구라는 부조리를 체현하는 중이다. 부조리는 도처에 있는데, “이웃집에서 애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했지만/ 아이가 없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 있다는 그 아이들을 찾아 나서야”(「복도식으로」)하는 식이다. 사태란 우물쭈물하는 화자보다 먼저 근미래에 도달하고 그럴 때 이웃의 요구에 대한 화자의 다소 순진한 답은 오답 처리되고 만다. 먼저 도착한 발화가 정해놓은 답에 화자는 다다를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일을 ‘자연스러움’이라고 할 때 미처 자라지 못한 마음은, 아직 수긍에 이르지 못한 심정은 삐걱댄다. 「꿈의 번영」에서 말하듯 세계란 때로 해결을 위해 문제를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연결해서, “초월”이라는 식당에는 도무지 가능한 메뉴보다는 불가능한 메뉴가 많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비만과의 전쟁을 보도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곧 어떤 전쟁의 적이 되는 일로 전환된다. “왜 나는/ 혼자서 뚱뚱한가”(「자영업자들」)라는 질문을 읽기라도 한 듯, 식당 주인이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붉은 곡물을 판매하는 게 우리가 사는 세계, 일상이다. 이웃의 정원을 보면서도 내 눈길이 집요하게 향하는 곳은 ‘조화’일 뿐인데(「이웃의 정원」), 생화와 조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조화가 더 눈길을 끌 수도 있지 않은가? 인공의 자연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엉키는 일보다 차라리 마트에서 감자칩을 적당히 사 먹는 편이 이치에 더 가까이 있다는 이 멀찍한 시선은 실은 조심스러움을 포함한다. 어쩌면 다소 미온적으로 보이는 이 태도야말로 그가 일상을 유지하는 생존전략은 아닐까, 적극적 수행도 폐기도 하지 않는 상태만이 ‘지금’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환생을 거듭하며 우리는 우주의 먹이를 공급하고 있다고 깨달은 수행자가 있었다 오직 우주에서 삭제되는 것을 목표로 하세요 -「우리가 작고 어두운 것이었을 때」 부분 2. 무해함의 사정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열림원, 2025, 01.) 반면 고선경의 화자는 지극히 F형 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집은 무해함으로 가득하다. 귀여운 것이 무해하다는 이 트렌디함은 그러나 단지 귀여움으로만 소급되지 않는다.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을 바라고 “나에게는 아직 끝낼(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며 “내가 태어난 게 대길”(「신년운세」)이라고 믿는 문장의 저류는 전혀 자신감이 아니다. 그건 차라리 ‘지금’을 버티는 자신을 응원하는 안간힘에 가깝다. 남을 돕는 팔자라는 시인의 운세는 도움이 필요한 자는 자신의 시집을 사라는 기지로 변형되는데, 시에 일말의 구원이 있다는 믿음을 초과하여 흘러넘치는 것은 어쩌면 시를 사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생존 신고와도 같아서 시집을 사는 이와 시인이 서로의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는 소통의 감각이다. 풍선껌만 한 세계, 그마저도 단물이 다 빠진 이 세계에서 자주 벗겨지는 양말을 닮은 미래란 매일 걷는 골목에서도 여행자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럭키슈퍼」). 이런 기분은 서울에 거주하지만 자신이 “외지인”(「남영」)인 까닭은 설령 빌런이 출현한다 해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정함에 닿지 못하는 사실과 함께 화자가 소속감 부재, 이탈자의 감각을 느끼게끔 만든다. 어딘가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는 기분은 화자(또는 시인)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궁구하게 한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시집을 뒤적인다. 해설에 적힌 말을 내 식대로 풀어 말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건 마케팅의 언어와 다르다. 백화점 판매직에 종사한 적 있는 나는 어떤 말이 효과적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지 알고 있다. 내 앞의 시인이 “한 권쯤 책장에 비치해 두면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사람으로 보일 것이므로 여자를 꼬시기에 좋다.”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그러다가 내 차례가 다가오면 나는 시집을 펼치고 말한다. “여기······ 딸기와 판다곰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는데요. 딸기랑 판다곰······ 참 귀엽죠? 귀여우니까······ 좋아하실 거예요. 어디에나 두루······ 잘 어울릴 거고요.” -「도전! 판매왕」 부분 살아남기 위해 화자는 시인들이 홈쇼핑에 나와 자신의 시집을 팔 수 있기를 소망한다. 팔린다는 소비시장의 논리라면 문학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소위 ‘잘 팔리는’ 일은 모든 예술에서도 중요하다. 예술과 예술가의 생존이라는 문제는 급기야 어차피 팔려야 한다면 잘 팔아보자는데 가닿는다. 여자를 꼬시는데 유용하다거나 문장의 밀도가 높다거나 하는 선배들의 시와는 다른 자신의 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고심 끝에 귀엽고 두루 잘 어울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 대책 없는 무해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제목으로 묶인 시집의 2부는 어쩌면 무해함과 귀여움, 그리고 보통의 하루에 대한 소망에 닿는데 중요한 축으로 보인다. 이 시집의 코어에 들어앉은 것은 그러니까 친구의 죽음, 그가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었다”(「팬레터-12월 31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생의 통과의례를 가족보다, 가족이 아니라서 더욱 긴밀하고 친밀하게 나누었을 다정한 또래의 죽음은 멈춘 채인 친구의 나이와 달리 꼬박꼬박 셈해지는 나의 생을 그와 다른 것으로 가르는 결정적 사건이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말은 무엇을 욕망하는 문장이 아니라 욕망의 유예를 소망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무엇이 화자의 욕망을 성취의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게 하는가? 너의 죽음이다. 차라리 유망주일 때 우리는 함께였다. 나의 삶이 타인의 죽음을 인수함으로써 이룩된다고 할 때, 화자의 삶은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지 않다. 죽은 너를 응원하는 나의 삶은 동시에 나를 조로하게 하고, 나의 삶과 너의 죽음은 이어져 너의 것이게끔 하며, 너의 삶은 나의 늙음을 재촉한다. 이런 뒤엉킴과 연결의 감각은 ‘뜨개질’을 빌려 표현되기도 하며(「털실로 뜬 시계」) 이 시집을 삶 쪽으로도 죽음 쪽으로도 당겨 놓는데 성공하게끔 한다. 너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내게 물 한 줌을 뿌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물이 더 많았다 내일은 비가 내린대 예보를 무를 수는 없고 그것이 걱정되지 않았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 -「미래에 내리던 비에는 아무도 잠기지 않고」 부분 무해하고 귀여운 그렇지만 당돌한 어조들은 실은 그 아래 실패의 감각을 공유하고 이를 전유함으로써 가능한 전복적 의미로 가득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 있다”라는 말은 심상하지 않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은 살아있는 일이겠지만 이 문장을 조금 변형해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로 읽는다면 그건 누군가는 죽는 필멸의 운명에 대한 수긍이 된다. 오늘 나의 일상이 죽은 친구의 미래라는 이런 인식은 ‘열심’이나 ‘최고’를 강조했던 때 유행하던 격언을 닮아있지만 작금에 곁의 친구들이 느닷없이 죽거나 돌아오지 않는 일을 ‘흔히’ 겪은 세대의 죽음과 삶에 대한 다소 직관적인 감각이라 읽는다면 과도한 것일까? 생사에 대한 달라진 감각은 “나는 그저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행복한 파괴자들」)인 이들이 아주 보통의 하루를 원하는 이유를 짐작게 하는데 결정적인 것이 아닐까. 그저 죽거나 죽을 많은 친구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가까이 당겨 부르며 “씨발······을 견딜 뿐”(「검은 고양이와 자객」)일지라도, 미래를 먼저 보고 온 듯한 저 과거형의 전언에는 누구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순한 마음이 돌올하게 남는다. 3. 기대하지마, 배반할 거니까 (윤지양, 『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 12.) 윤지양의 시집은, 기대하지 않는다. 이 시집은 어떤 기대를 파기한 것일까? 그리고 왜 기대하지 않을까? 김수영이라는 이름에 기대어볼 때 이 시집은 윤지양의 시가 기성의 것에 기대지 않고 어딘가를 찌르고 없는 것을 만들고 있어야 할 것을 지운다는 증거이기도 할 테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은 시종일관 무척 냉랭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태에 대한 냉담을 뜻하지는 않아서 시집의 많은 것들은 실증이기보다 실증할 수 없음, “부정형으로 실현되는 소설”(「소설」)과 같은 문장과 사유를 표방한다. 어쩌면 나는 문장의 가능성만으로 쓰인 소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부정형 어미만으로 실현되는 소설을.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그것은 소설이기에 가능하다. 소설 속 진실은, 사실상 모두 허구가 아닌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부럽고 질투가 난다. 뛰어난 것을 보면 으레 그러하듯. 나는 단지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러나 시를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 쓰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말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대요. 소설 또한 쓰지 않는다. 연필을 들어, 가장자리에 금박을 입힌 메모지에 글자를 채워 넣지 않는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며 내 앞에 있는 전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는다. 전등은 가끔씩 깜박이지 않는다. 위층에서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설」 부분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건 허구일테니까. 그러나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소설」이라는 시로 쓰인다. 시의 내용은 그러하지 않음을 단정하는 부정(否定)으로 연결되지만 이를 정해지지 않음의 부정(不定)으로 놓을 때 성립하는 듯도 하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것이야말로 지어놓은 심상을, 알고 있는 형식을, 그 안에 담긴 모든 의미를 배반하는 부정(否定)과 부정(不定)이기 때문이다.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대체로 잃어버린 것들을 호명하기에 알맞다. 그러니까 시간, 책(내용), 기억, 관계와 같은 비물질들, 쉽사리 의미화에 도달하지 않는 것을 호출하기에 적당하다. 이를테면 기억은 왜곡과 밀착되어 있다. 성글게 말해서 정확한 기억이란 불가능하다. 왜곡 가능성 자체를 포함하는 기억은 기억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이는 저장 과정에 이미 불순물을 포함한 채로 유입되고, 주체를 통과함으로써 변형되며, 시간을 경유하면서 유실된다. 그렇기에 기억을 불신 쪽으로 밀어붙이고 왜곡의 모양새를 살피는 일은 역으로 개인을 가장 그‘답게’ 알아낼 지표를 얻는 일일 수 있다. 「7월 9일 비는 미스트처럼」이란 제목을 기억에 기대 읽으면, 날짜는 틀릴 수 있고 비가 내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미스트처럼 흩뿌렸는지 옷이 젖을 만큼 제법 내렸는지도 불확실하다. 미스트의 자리에는 얼마든지 다른 비유물이 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날 바라본 것은 별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지하철 안의 사람들과 역사를 수리하는 인부들이다. 화자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싶은 걸까?” “바라본 것은 일이초의 순간이며 그보다 몇 백 배의 시간 동안 기억하는 데 열중해”야만 하는 이런 일을 말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혹시 정보의 값어치라는 기준을 배반하는 작업이 아닐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기억회로에 대한 배반 말이다. 어쩌면 7월 9일 미스트처럼 비가 뿌리던 날 내게 맺힌 기억들이 나와의 특별한 관계성을 획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만이 기억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 하나의 사실은 내가 기억한다는 것. 그래서일까? 역사를 나오며 바라본 인부들이 치우고, 세우고, 고치는 구조물은 마치 기억의 해체와 조립, 왜곡과 직조 가능성의 모형화로 가시화된다. 그런 기억에 대해 천착하면서도 시인일 이 시집의 화자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그것은 바로 의미이다(“의미가 제일 무서워 그게 나를 평생 피했으면 좋겠어”, 「외면」). 의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어쩐지 한 곳에 맺히는 것, 부정(不定)을 부정(否定)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누군가 치우고, 세우고, 고치길 거부하는 것 말이다. 한 곳에 부착되어 떨어지지 않을 때 어쩌면 그 의미는 죽어버리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제목은 지워지고(「 」), 주석은 또 하나의 시가 되며(「경계 수칙」), 본문의 문장도 없이 홀홀한 주석이 탄생한다(「소원」). 이런 형식의 파괴는 때로 주석에 비해 내용을 하등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형식은 내용과 자리를 바꾼다. 거기서 무엇을 달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 형식과 의미는 다만 고민되는 중이다. 시를 쓰는 일이 시인의 내면 쪽에 방점을 찍어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시 쓰기가 몰래 바깥을 토해내는 일이라는 화자(「폭우」)는 시인의 사유를 대변한다. 비켜 가고 또 빗겨 가며 바깥을 제 내부에서 조립의 이전으로 분해하고 흩트리는 과정에 윤지양의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Nguyễn Thế Hoàng」과 같은 시에서는 언어를 통해 형식과 의미에 대해 묻는다. 이 시는 번역을 통해 읽는 시, 편집된 시는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모국어로 쓰인 시는 또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을 파생하면서도 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묻게끔 한다. 이 시는 ‘윤지양’과 ‘Nguyễn Thế Hoàng’의 업무 메신저를 편집해 부분만 들여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시는 무엇을 의미 삼는가? 또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애초에 시는 완전한 독해를 목표로 하는가? 그럴 때 윤지양의 시도들은 차라리 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숱한 가능성을 찢어버림으로써, 놓치지 않고 모조리 해석하겠다는 욕구 대신 불가능의 인식과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만지는 중인’ 시의 본성을 일깨운다. 그럴 때 저 인부들의 직조 행위는 차라리 시적 태도일까? 그런 태도에 근간할 때 이 시집의 감정은 물성화되며(「유실물」, 「토요일」), 감정은 ‘안다’는 인지적 사실로만 성립하는(“너를 뺀 모든 걸 사랑한다는 걸 알아”, 「조지에게」) 낯선 것이 된다. 그리하여 냉랭하며 파괴적인 윤지양의 시가 배반하는 것은 차라리 신화가 아닌 일상, 시의 살아냄이라는 형식 자체는 아닐까? 기대라는 게 누군가 정해놓은 일정 높이의 허들을 넘는 일이라면, 이 시인에게 기대란 의미라는 약속의 틀에 처박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의미로 가득 찬 일상과 시라는 세계에서 윤지양의 시는 기대하지 않는다. 얼음이 단단해지고 사무실에 앉아 있던 사람이 하품을 한다 모든 것이 침묵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얼마나 녹을 수 있을까 걸어가는 사람들은 분홍색 자전거는 언제쯤 녹을 수 있을까 -「토요일」 어째서 아주 보통의 하루가 추구해야 할 미덕이 되었을까? 추구해야만 도달 가능한 보통의 일상은 시인에게도 퀘스트가 된다. 한 시인은 이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남현지, 시인의 말). 또 다른 시인의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선경, 「카푸치노 감정」)는 다짐은 자신을 향한 주문일 테다. 헤어지고 연인이 되었다 다시 덩어리가 되고 해봤자 창틀 안에서 돌뿐인(윤지양, 「비연인」) 이 관계 속에서 여러모로 뒤틀고 바꾸고 엮고 지우며 세계를 읽고 쓰는 일, 시 쓰기와 일상을 따로 놓지 않는 일은 자신을 고백하고 다독이며 배반하는 식으로 시작되었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가능하다면, 설령 #아보하를 달 수 없는 날에도 시를 읽으며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리라. 우리, 그러하기를 약속하기로. 그렇게 살아내기로. 1)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25-2025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전망』, 미래의 창, 2024. 2) 영국 전래동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골디락스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를 일컫는 관용어이다. 골디락스가 곰이 끓인 뜨거운 스프와 차가운 스프, 적당한 온도의 스프 중 적당한 온도의 스프를 고른 데서 유래했다.

계간 딩아돌하 황유지 아보하일상생존법무해함배반고선경남현지윤지양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