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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학 | 2024년 1-2월호(제617호)

문학의 공포

정한아 시/문학평론

2005년 <현대시>에 평론을 발표하며 평론 활동 시작했으며, 2006년 <현대시> 시 부문 신인상 수상하며 지면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2019년 영남일보 구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어른스런 입맞춤>, <울프 노트>, 시산문집 <왼손의 투쟁>을 출간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직 중이다. <작란(作亂)> 동인이다.

  1. 초월적 상상력의 부정적 총체성으로 얼룩진 ‘세계의 밤’을 지나 ‘우리-없는-세계’의 ‘존재-없는-생명’의 공포에 도달한다. 또는 충동의 가없는 질주를 지나 매끄럽게 균질화된 권태로운 기분의 세계에 도착한다. 아무튼 저 세계의 밤은 충동과 부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 ‘우리-없는-세계’, 또는 균질화된 권태 속을 미끄러져 가는 지금-여기의 시공간은 가장 작은 요철도 무덤처럼 불룩한 충격을 안겨주는 곳이다. 어쩌면 낭만주의 다음에 고전주의가 오는 것처럼, 혹은 패션 유행의 30년 주기설처럼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세대는 복고를 새것으로 겪는 것일지도. 그러나 과거와 꼭 같이 반복되지 않으므로, 복고가 되기 전의 그것을 겪은 사람은 거부감을 표시할지도. 그러고 보면 이즈음의 시는 어떤 면에서는 1990년대와 썩 닮았다. 형태가 아니라 기저의 근본 기분이. 1990년대의 서정시가 그랬던 것처럼, 이즈음 시의 많은 화자들은 비밀스럽게 감상적이다.


  2. 이것이 2천 년대부터 지금까지 내 신체와 심리에 새겨진 경험을 통해 떠올리면 간신히 요약해낼 수 있는 몇 개의 문장이다. 물론 이 요약은 많은 개별 사례들을 생략한 뒤, 저 개념들의 환기와 발명/발견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저 개념들의 환기와 발명/발견은 이론화하려 안간힘을 쓰는 이성의 발휘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는 주체를 벗어나려는 것은 생각하는 주체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 때문에 힘겹고 무의미한 시도가 될 뿐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모든 가치들이 평준화된 경우를, 그러니까 생각 자체가 없어진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쩌면 나대신 생각해줄 신체 없는 지능이 빠른 속도로 진화 중이니 생각보다 더 이른 시일 내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소문이 너무나 무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파산 루머가 도는 주식회사처럼 소문을 모방하다가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응용해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럴 때 더 이상 주체가 아닌 주체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네가 (대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이제 좀 잘게.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의 비틀린 판본 같구나.

  그러나 나는 내가 보아온 한 20년 남짓을 이렇게 간신히 요약하고 곧바로 불안에 시달린 직후 다음과 같이 한 사람의 시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뒤죽박죽 다른 모양으로 흐트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3. 훗날 ‘미래파’, 또는 ‘2천 년대 젊은 시인들’의 대표 주자라 불리게 된 사람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를 떠올리면 나는 희한하게도 도널드 바셀미 같은 미국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아니, 도널드 바셀미가 이 사람을 광범위하게 표절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해럴드 블룸이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독자가 어떤 시인의 시를 읽고 그의 선대 시인의 시를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선대 시인이 후대 시인을 표절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모든 후대 시인들의 열망’이라고 했던 것의 사례가 아닐까. 만일 황병승이 바셀미를 아버지 시인으로 생각하기라도 했다면 말이다. 1990년대에 태어난 음악 애호가라면, 장기하에 귀가 익숙해진 뒤 배철수를 들으면 그런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자우림에 익숙해진 뒤에 크랜베리즈를 들을 때나 신중현을 듣고 지미 헨드릭스를 들어도 그럴 수 있다. 어쩌면 지금은 LP나 카세트테이프, CD 앨범의 물리적 속성을 통해 손으로 만져지는 감촉이나 (판의 스크래치나 테이프의 늘어진 정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시간에 따른 미세한 소리의 변화, 앨범 자켓의 낡아가는 과정을 통한 시각적 정보 같은 감각적 경험 특질들이 사라진 후라 더 그럴 수도 있다. 이것은 점점 종이책이 사라지고 디지털 부호로 남게 되고 있는 문자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문학은, 순전히 독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연구자로서 머릿속에 연대기표가 입력되어 있지 않은 경우라면, 그리고 실시간으로 따라가며 충분히 시간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애써 연대기적이지 않다. (시 강독 강의실의 학생들이 들여다보는 태블릿 속이 그렇듯이) 향유된 경험 속 시간의 저수지는 허구와 역사와 실질적인 인과관계가 실제로는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마구 뒤섞여 있는 수프와 같다. 심지어 언제 출간되었느냐 보다 수용자가 언제 접했느냐가 더 문제될 수도 있다. 순전한 독자-나에게는 이상과 카프카와 양선형과 도널드 바셀미와 제임스 조이스와 황병승과 김혜순이 언어 게임 속에서 친밀한 가족 유사성으로 연결된다. 내가 서점 주인이라면 이들을 같은 서가에 배치할지도 모른다.


  4. (본래적으로, 시는, 대형 온라인 서점이 시라고 부르는 것의 테두리를 훨씬 더 넘쳐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지면이 지면이니만큼 보다 관습화된 범주에 한정해야 할 테다. 그러니 너무 멀리 가지 말도록 하자.) 그러나 또 한편, 언젠가 쓴 적도 있지만, 황병승은 20세기 후반 장정일의 적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해도 아버지의 인정을 굳이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아바 아버지’--강제된 표준에 대한 생래적인 면역거부반응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말은, 외설적인 아버지에 대한 노골적인 폭로를 위해서는 외설적인 재현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압도적인 대안적 폭력을 필요로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황병승의 시집 해설에 “숭고한 뒤죽박죽 캠프” 같은 제목이 붙은 이유이고, 장정일이 『서울에서 보낸 3주일』의 책 말미에 남이 써준 해설 대신 자신이 쓴 평론을 실으면서 1980년대 시인들을 한데 모아 불사르고 있는 이유다. 매우 거칠게 나는 다음과 같이 섣부른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조짐은 모더니즘이 몰래 측은히 여겼던 아버지의 시체를 장지(葬地)까지 질질 끌고 가며 모독하는 자의 울부짖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었다고. 오늘날의 독자가 보기에 그 울부짖음은 폭압적인 아버지의 고함만큼이나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


나는 두드린다!
어린이날이라고
당신은 나를 피아노 앞에 주저앉히고
나는 더 세고 강하게!
두드려도 괴롭고
두드리지 않아도 괴롭고
당신은 그저 즐거워, 한다 어린이날 기념 독주회라고
우리 아이는요 금세 피아노의 주인이 됩니다 보세요
곧 알게 되겠지만,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황병승, 「어린이날기념좌절어린이독주회」 결구, 『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사, 2007


그런 건 불필요했다, 죽은 아버지가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니까. 모든 방식은 나의 방식이다. 모든 형상과 모든 배경은 내 머릿속에서 나온 내 것이다. 모든 색채는 내 것이다. 너는 내 의미를 앗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요, 줄리가 말했다.
-도널드 바셀미, 『죽은 아버지』 중에서, 김선형 옮김, 팽귄클래식 코리아, 2011(원작 1975)


  5. 나는 지금 유진 새커가 블랙 메탈로 시작해서 흑마술과 고딕소설을 지나 21세기 재난영화로 마무리함으로써 악마학을 존재신학에 얹어 어렴풋이 보여주고자 했던 철학의 공포의 여운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1). 그가 설명하는 20세기 공포영화의 특징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 알레고리 현시방식 형이상학적 원리 살아 있는 모순으로서의 후생의 형태
살아있는 시체 좀비 하층계급의 폭동 다중, 전염병 활기 있는 시체
언데드 흡혈귀 낭만적인 귀족계층의 몰락 인간과 동물 변환, 유기체와 무기체 변환 불멸성의 부식
악마 혼합물(인간의 몸+악마의 혼), 혼종 중산층이나 부르주아, 때로 치유의 틀 또는 임상의 틀에 속한다 인간을 짐승으로, 짐승을 신으로 변형(위계상의 변환) 고기 초자연적 존재인 동시에 비천한 짐승
허깨비 유령 후생의 미지의 기원(정신이나 영혼 혹은 그 세속적 형태인 기억의 영역) 영매, 물리적 세계 속 대상의 변화, 징후와 전조에 의한 현시 정신 비물질성의 물질화

  다소 도식적이지만 다채로워 보인다. 도식적인 것들은 가끔 그리움을 유발한다. 괴수의 종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으로 전승된 익숙한 ‘전통’에 입각해 있다. 이미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전형적인 서사를 생각하게 되고, 그 서사들은 괴수들의 특징에 알맞은 사회적 알레고리의 의미와, 형이상학적인 각각의 원리와, 악몽이 도사린 무의식에서부터 기어 나온 것 같은 ‘살아 있는 모순으로서의 형태’, 그러나 반드시 인간을 닮아 있고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언젠가 ‘신’(들)이 그러했듯이. 마치 ‘시적인 것’에 대한 여러 정의가 그러했듯이.

  그러나 유진 새커는 그보다 최근에 등장한 공포영화들의 공포의 뚜렷한 특질을 그 익명성이라고 해석한다. <The Being>, <The Entity>, <It’s Alive!>, <It Lives Again>, <The Stuff>, <Them!>, <The Thing> 같은 제목의 영화들에서 공포를 주는 대상은 분류도 거의 무의미하다. 이 이름들은 ‘거기 있음’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 물론 이 해석은 2010년에 출간된 것이므로, 코로나 언택트 기간 동안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데카메론’을 제공하기 위해 이미지에 이미지를 덧칠해야 했던 OTT의 폭발적인 괴수 재해석 속도전을 비롯한 나머지 10여 년은 별도의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 공포의 대상이 살, 피, 고기, (반투명한) 정신처럼 이미지와 덩어리감, 축축함과 일정한 공간 점유의 신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달리 점점 더 그냥 ‘있음’이나 ‘it’으로 명명불가능하고 새커 말마따나 ‘기후학적인’ 실체 없는 생명으로 재현되는 양상은 2천 년대 시에 흘러넘치던 피, 살, 고기의 현기증 나는 실재의 현시적 공포와 충동의 육화가 휩쓸고 간 후 도래한 존재신학적인 암시의 시들의 전개와 모종의 유사성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저 괄호 안의, 으스스한 익명의 공포의 대상들은 한때 ‘신’이나 ‘물 자체’ 를 일컫는 말들이었고, 공교롭게도 한국담배인삼공사가 ’90년대에 출시한 뒤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담배 이름들—(연기가 되어 사라질) 이것This, 존재Esse—과 겹친다.)


물탱크가 있다
환기구가 있다
창문이 있다
5층의 건물이 있다
간판이 있다
전신주가 그 앞에 있다
내가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내가 있다
무작정 올라갔더니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가면
옥상이 있다
거기에는 물탱크가 있다

푸른 물탱크가 있다
- 황인찬, 「개종 2」,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6. 푸른 물탱크는 생각하기에 따라 숭고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이 시에 등장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처럼 육중하고 이 건물의 생명을 관장할 것만 같은 팽창한 능력을 떠올리는 한편,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급작스럽게 팽창시키고, 다음 순간, 화자는 너스레를 떨면서 말한다. 이거봐, 당신들이 ‘위층에 계시는 그분’(The one upstairs, 아차, the one도 담배 이름이다)이라고 부르는 분이 바로 이분이셔. 알아서 모시라고. 공포와 신성과 웃음이 번갈아 자리를 바꾸는 물탱크가 이 시에서 하는 역할은 순전히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공집합처럼.


  7. 이런, 살아 있는 시인은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실수다. 그러고 보니 유진 새커도 살아 있는 시인이네.


  8. 왜 나는 이제 될 수 있으면 살아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9. 철학의 공포를 빌려서 문학의 공포를 이야기하려 했지만, 두 번 죽은 아버지가 공집합이 되었는데도 완전히 잃어지지 않아 희망을 가져야 할지 절망해야 할지 헷갈리고 있다. 아아, 여기구나. 포스트모던의 무간지옥이.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으려면: 길을 잃은 아버지를 찾는 데 있어 첫 번째 문제는 일단 그를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셀미, 같은 책

  • 1) 유진 새커,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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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림 녹는점을 만지는 비인칭 주체들 : 김숨, 『무지개 눈』(민음사, 2025)

1. 흰 벽, 검은 구멍을 보는 거울의 눈 “내 눈雪동자는 떨어지고 있고 녹고 있다”(p. 171). 이 문장은 낯설고 난해한 도식이지만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추론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의 가혹한 운명을 대체하는 동시에 1997년 데뷔부터 현재까지 70편(장편, 단편 포함)이 넘는 소설을 발표해 온 김숨의 저력을 보여준다. 『무지개 눈』의 눈[雪]과 눈[目]은 동일 기표다. 이 명제에 대한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눈은 테제인 동시에 안티테제이다. 여기에서 진테제가 ‘녹는점’이라고 한다면 김숨을 모르는 것이다. 김숨 소설을 단순한 변증법으로 접근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라는 이야기다. 다만 ‘녹는점’을 가진 작가가 김숨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녹는점’을 들뢰즈와 가타리 방식으로 이해하자면 ‘기관 없는 신체’가 될 것이다. 어쨌든 눈[雪]과 눈[目]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이질성 속으로 침잠하여 함께 녹아내려야 한다는 추상적인 방정식 외에 김숨 소설을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연작소설 『무지개 눈』은 선천성 전맹 또는 선천성 저시력과 지체 장애를 복합적으로 겪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모티브로 삼는다. 시각장애라는 결핍은 색이 전제되는 무지개와 일곱 색깔에 흰색과 검은색이 없다는 다중장치로 재현한다. 슬픈 색, 화난 색, 간지러운 색 등 ‘색’에 대한 사유가 소설 전반을 압도하는데, 일반적인 색채 인식을 초월하여 도전과 실패, 욕망과 죽음이라는 양극단을 오가며 김숨만의 독보적인 아우라를 뽐낸다. “내 얼굴에는 눈동자가 없어.” “아니야, 네 얼굴에도 눈동자가 있어.” “거짓말!” “정말이야. 네 눈동자는 육각형이고 흰색이야.” 육각형이고 흰색인 것은 눈雪이다. (「검은색 양말을 신은 기타리스트, p. 170」) 위 인용은 『무지개 눈』 행위자의 결핍이 눈[雪]과 눈[目]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으로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1장(편의상 책의 순서대로 1~5장으로 표기)의 그녀는 또 다른 자아로 표상되는 백문조를 기른다. 새의 흰색 깃털은 눈동자를 갈망하는 욕망으로 현현한다. 2장의 남자가 선물받은 토끼는 하얀색이다. 하얀색을 산책시키고 연두색을 먹이지만 토끼는 여전히 하얀색이다. “내가 하얀색을 잊어도 하얀색은 있어요. 내가 하얀색을 잊어도 하얀색은 죽어요”(p. 73). 흰자만 남은 눈, 하얀색을 먹이고 키워도 볼 수 없다는 진실만이 폐허가 된 동공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시각장애인에게 하얀색은 극복할 수 없는 흰 벽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백색 공포가 아닐 수 없다. 3장의 소녀는 선천성 전맹과 지체장애인으로 휠체어에 의지하여 생활한다. 빨간색 크레파스로 도화지에 집을 그리며 그곳에서 사랑을 나눌 미지의 당신을 기다린다.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p. 151). 소녀의 절절한 사랑 고백은 그림 속에 갇혀버리고 ‘어느 시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당신’은 트라우마로 남아 의식 폭력의 가해 대상으로 떠오른다. 소녀의 트라우마는 어릴 적 처음 봤던, 어쩌면 딱 한 번 봤을지도 모르는 빨간색이다. 빨간색은 소녀의 심장이고 삶의 전부다. 욕망 덩어리가 된 빨간색으로 인해 소녀의 심장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4장의 기타리스트는 검은 눈동자를 갖고 싶어 검은색 양말만 신고 검은색 기타를 친다. 미끄럼틀 위에서, 동굴에서, 물방울에 박자를 맞춰가며 줄을 튕기지만, 음계를 벗어난 눈동자는 눈[雪]처럼 녹아 검은 구멍으로 사라진다. 5장의 화자 ‘파’는 아홉 살 때 선천성 저시력 판정을 받았다. ‘파’에게 눈동자는 11층 엘리베이터 거울에만 남아 있다. 얼굴조차 증발하고 두 행성처럼 의식 저편에 남은 파의 눈은 ‘거울의 눈’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눈은 『무지개 눈』 행위자 모두의 아포리아다. ‘색’이 눈동자로, 동물로, 실현 불가능한 욕망으로, 급기야 ‘무지개 눈’으로 스며드는 절묘한 기획의 발원지가 바로 ‘녹는점’이다. 2. 나무 - 뿌리에 닿는 손 『무지개 눈』에서 활용한 시각장애인의 언어인 점자는 그동안 김숨이 집요하게 추진해 온 생존 불가능한 생태계 복원 작업의 구심점이 된다. 점자를 소설에 기표한 순서대로 따라가면 나무/혼자/물방울/밤/물/하얀 조약돌/눈[雪]/그녀/바다/뿌리/검은 물고기/양/당나귀/오리이다. 물방울/하얀 조약돌은 눈[目]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나무는 존재의 표상이며 ‘혼자’라는 점자는 고립된 시각장애인의 생활 세계를 전면에 내세운다. 나무/혼자/밤/하얀 조약돌에서는 만지는 대상으로 기표하였는데 감각인지는 의식의 지향점을 아우른다. 그녀는 밤에 혼자 누워 눈동자를 더듬다가 흙을 덮고 있다고 느낀다. 이 수사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죽음의 각인이다. 특수학교 기숙사에 입소한 1장의 그녀는 죽음의 문턱을 무시로 넘나든다. 문턱은 복도라는 통로로 형상화되고 있는데 복도에는 늘 바람이 불고, 모든 문은 닫혀있다. “물방울에 삼켜지고 싶다”(p. 23). 가능성이 차단된 공간에서 그녀는 ‘죽음 욕망’에 시달린다. 죽음 욕망은 물고기 또는 곰 인형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죽음 경험’으로 우회한다. “혼자서 혼자를 만”(p. 24)지며 수도꼭지에 대롱거리는 물방울에 매달리는 그녀. 물이라는 생명의 시원을 통해 죽음 충동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은 “나방의 날개처럼 떨리는 눈꺼풀”(p. 28), 즉 볼 수 없다는 생생한 현실에 곧바로 압도당한다. “그녀는 자신 앞에 있는 게 그냥 커다란 구멍 같다”(p. 41). 검은 구멍에 갇혀 구멍 투성이가 된 곰 인형을 끌어안고 ‘사랑해’라고 중얼거린다. 이 처절한 사랑 고백이 ‘죽은 그녀’ 자신을 향해 있음을 누구도 모를 수 없다. 곰 인형은 그녀의 ‘죽음 모델’이다. 2장의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게 취업했으나 직장생활에 실패하고 만다. 시각장애가 결코 비인간의 조건이 될 순 없으나 비정한 사회는 남자를 따돌렸고 자발적으로 퇴사하도록 압박했다. “사람이 그리워” “나와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p. 144).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상처 입은 그들은 여전히 사람의 숲에 섞이길 소망하며 ‘당신 목소리’를 들려달라 매달린다. 시각장애인에게 목소리는 소통이고 합일이다. 목소리가 찾아온 건 그녀가 찾아온 것이고 하나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목소리가 떠난 건 그녀가 떠난 것이며 모든 세계가 닫힌 것이다. 주어진 세계의 ‘안과 바깥’ ‘존재와 비존재’, 그 어느 영역에도 소속될 수 없는 그들은 ‘비인칭 주체’로 방기 되고 만다. ‘비인칭 주체’는 의식이든 몸이든 눈[目]이든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이 되어 녹아버려야만 산다. 자기 해체 방식으로서의 ‘녹는점’은 생존을 위한 ‘절대지’다. 점자를 따라가 보면, 물/눈[雪]/그녀/바다/뿌리/양과 당나귀 등 동물들이 나온다. 물과 눈[雪], 바다는 생명의 시원(始原)과 닿아 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시원(녹는점)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비인간, 즉 동물로 변한다. 물고기/양/당나귀/오리는 ‘흐르며 떠오른다’라는 서술어를 공통으로 배치하고 있다. “여섯 개의 줄(날개뼈)이 뿌리처럼 흐른다”(p. 163)라는 선행 문장을 볼 때 ‘흐르며 떠오른다’라는 서술은 ‘뿌리’와 상통한다. 낯설고 기이한 ‘동물-되기’를 재생이나 부활 또는 존재 회복으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쯤에서 김숨의 의식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나무-뿌리’를 소환하게 된다. 김숨은 “새장 속에서 태어나 나무를, 그리고 숲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를 “이동 새장에 넣”(‘작가의 말’, p. 228)어 생명의 근원인 숲으로 인도한다. 이 시대 모든 ‘비인칭 주체’에게 존재자의 자리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농후하다. 따라서 『무지개 눈』의 시각장애인들 손이 닿은 곳도 ‘나무-뿌리’다.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는 나무가 있어야 해?”(p. 132). 나무의 종언은 생명의 종말이므로 이것은 물음이 아닌 답이다. 빨간 집 소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숲을 보길 원한다. 기타리스트는 기타의 음을 조율하며 숲에 스며든다. ‘파’는 지평선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나무를 바라본다. 시력을 잃고도 자식을 낳아 키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림을 그리고, 안마 일을 하며 지평선을 향해 묵묵히 걷는 시각장애인들은 이미 심연의 숲을 보고 있다. “사람처럼 보인다는 건 뭘까?”(p. 179). 숲에 닿은 그들은 참된 인간의 자리를 고민한다. 해답은 소금을 팔러 세상에 왔다는 시각장애 아동 미솔이 쥐고 있다. 소금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그들의 실천 강령이다. 소금 닮은 그들은 이제 “사람을 믿고 싶어요”(p. 106)라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레비나스 관점을 빌리자면 『무지개 눈』은 눈[目]이 아닌 믿음으로 타자를 바라보는 무한자의 자리다. “오늘 아무래도 내 오른쪽 눈동자에 무지개가 뜰 것 같다”(p. 220). 무한자의 자리에 선 시각장애인들은 무지개가 되어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무지개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이어주는 탯줄과 같다. 극단적인 자기 해체 여정을 지나 타자의 고통에 동참할 때 김숨 특유의 ‘공존 미학’이 완결된다. “내 눈雪동자는 떨어지고 있고 녹고 있으며 보고 있다”(p. 183). 눈동자를 녹여 우주를 품은 ‘비인칭 주체’들. 김숨은 그들과 함께 녹아버렸다. 녹는점은 문학의 심층이다. 심층에 남은 『무지개 눈』 작가도 작중 인물도 녹아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사회적 약자를 향한 다수의 시선이 어떠한지 문득 의문이 생긴다. ‘녹는점’에서 마주친 대상이 멀쩡한 눈을 질끈 감은 채 황무지 같은 광야를 떠도는 ‘나’라면 이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내게 닿으려 내게 걸어갔어요”(p. 11). 그녀의 고백이 새삼스레 심장을 울린다.

계간 문학과사회 김유림 시각장애눈雪눈目녹는점비존재나무뿌리존재 생성 2025
염선옥 액체적 지각을 통해 비세계·비존재에 이르는 언어 ― 김안 시집 『귀신의 왕』, 변선우 시집 『비세계』

부정의 세계, 스키드마크 모든 예술이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부정을 전제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왔기에,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주어진 세계의 허물을 벗고 만료된 현재의 형상을 깔고 앉아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이는 낯선 미지의 세계에서 발원되는 새로운 감각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고 세계의 한계를 확장해 나가기 위함이다.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해 서슴없이 “지옥의 연쇄”(류수연, 「연옥으로의 한 걸음」, 김안, 『Mazeppa』, 문학과지성사, 2024, 108쪽)에 몸을 맡긴 바 있는 김안과 그의 시적 주체는 죽음에의 도정을 『귀신의 왕』(아시아, 2024)에서 이어간다. 『아무는 밤』(민음사, 2019) 이후 5년 만에 『Mazeppa』(문학과지성사, 2024.2)를 발간한 시인은 2024년 11월 『귀신의 왕』을 내놓았다. 2024년에 출간된 두 권의 시집은 창조된 세계가 의식의 세계와 이질감 없이 포개져 시인만의 독특한 시적 형식을 작성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아무는 밤』 이후 죽음에 관한 의식에 큰 변화가 생긴다. “어떤 아이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데 “죽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미타찰」, 『아무는 밤』)를 듣게 된 것이다. 시인은 2014년 딸아이의 출생과 수많은 학생의 죽음 사건을 동시에 경험했고 생과 사에 대해 깊이 통찰하며 결국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으로 연결되어 구분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이 ‘죽음’이라는 ‘사건’과 ‘순간’에 의해 우리에게서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안은 죽음과 삶을 이어주던 ‘골목’을 매개로 그들에게 다가선다. ‘골목’이 기억의 실재를 규정하거나 보여주는 장소 역할을 해 왔듯 시인은 의미가 되는 실재, 존재, 사물, 활동으로 가득 차 있는 바로 그 ‘골목’에서 만나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물론 모두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없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못할”(「시인 노트」, 98쪽) 것 같다는 김안의 고백에는 어딘지 모를 짙은 여운이 서려져 있다. ‘귀신’이 된 ‘나’에게 귀신들은 더 이상 이질적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나’가 사랑하던 이웃과 가족이 되고 그들의 목소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전환된다. 그 어떤 낯선 행동과 기묘한 일들도 더는 ‘불가해’의 영역이 아니다. 변선우는 소진된 의식 세계의 언어와 감각 대신 미지의 땅인 ‘무의식’의 세계를 굴착(掘鑿)한다. 무의식 세계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쓰기가 진행되므로 기존의 독법과 문법을 살해하고 ‘난시의 눈’으로 세상 읽기가 된다. 시인은 시가 언어에 의해 현실화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무의식의 존재들에게 ‘몸’을 내주고 그 ‘몸’이 직접 발화하도록 한다. 그 언어는 무의미의 시처럼 보일 수 있으며 풀이할 수 없는 기표의 ‘스키드마크’로 읽힐 수도 있다. 그것이 당장은 독해 불가능한 것일 수 있겠지만, 이는 나 자신의 배면에 관한 일이므로 시인은 작업을 결코 멈출 수 없다. 변선우의 이러한 창작 태도는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의 세계보다 중요하고 무의식이 의식 세계의 대부분을 설명해 줄 것이라 굳게 믿은 프로이트를 충분히 연상시킨다. 경험 불가능한 세계에서 최초의 사물 앞에 섰던 ‘최초의 인간’ 보들레르처럼, 귀신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와 관계 맺는 변선우와 김안은 ‘사물’이 되고 ‘귀신’이 되어 감각 불가능한 세계의 존재를 마주 대하는 최초의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초석적 살해·창조적 전환 2018년 《동아일보》로 등단한 변선우 시인이 6년 만에 첫 시집 『비세계』(2024, 타이피스트)를 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의 시선과 감각에 따른 획일화와 몰개성적 감각의 다발에서 떠나 무의식과 환시 세계의 존재들에게 ‘몸’을 내어줌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감각을 써나간다. 그것은 말라르메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시학에서 솟아나야만 하는 어떤 언어를 발명하는 일이다. 변선우의 ‘비세계’는 “너무 많은 가시 때문에 너무 많은 구멍”(「비세계」)을 가졌고 ‘눈물’과 ‘콧물’ 그리고 ‘물’처럼 흐르며(「복도」, 「비세계」, 「식물의 말」) 자꾸만 “터지고”(「오토와 마톤」, 「폭탄 마니아」) “계속 움직이고 / 계속 변”(「사건과 순간」)한다. 변화하는 세계는 박제하듯 고정하는 기존의 언어가 절대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변선우는 기존의 세계를 뒤집기로 한다. 의식의 세계가 아닌 무의식과 환시 세계의 존재들이 써나가는 언어의 모험을 택함으로써 시인은 무한한 지평 위에 시를 올려놓으려는 것이다. 나는 회전하므로 입장이 번복됩니다. 내부와 외부는 나로 하여금 교차합니다. 나의 내부는 외부가, 나의 외부는 내부가 되어 공존을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반복적으로 중단을 사유합니다. 내 몸에, 이 순간에 도사리는 안과 밖이 이토록 함께 간섭하다니. 나는 놀라움으로 하여금 조작을 하여 회전문을 더욱 빠르게 작동합니다. 더욱 빠르게 넘나듭니다. 그래서 경계는 도리어 뚜렷해지며 내부는 능숙하게 외부가 되고, 외부는 능숙하게 내부가 됩니다. 그럴수록 나는 바깥을 몽상합니다. 그럴듯하게 중단을 사유합니다. - 변선우, 「회전문」 전문 「회전문」은 무의식 세계에 몸을 내맡긴 시인의 의지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시편이다. 회전문이 된 시적 주체 ‘나’는 회전하면서 자꾸 “입장을 번복”하여 의미를 전환하고 순환시킨다. 마치 하나의 텍스트는 단 하나의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원본도 없는 단어들이 뒤섞이고 충돌하는 다차원의 공간임을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회전문이 된 ‘나’는 내부의 사유를 중단시키고 외부가 내부가 되도록 “공존을 도모”한다. 이윽고 ‘나’는 “회전문을 더욱 빠르게 작동”시켜 “내부는 능숙하게 외부가 되고, 외부는 능숙하게 내부”가 되도록 만든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유 방식을 뒤집는 일이며 무의식과 일탈의 언어가 시인을 통해 박제되지 않도록 하여 보다 ‘진실’에 가까운 날것의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변선우의 『비세계』는 ‘비세계’로 탈주하는 시인의 상상을 통해 현실과 의식의 한계와 경계를 극복하려는 상상의 연주인 셈이다. 고집스럽게 담과 벽을 넘는 『비세계』는 이후 시인이 펼쳐나갈 시적 지평이자 포석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김안의 다섯 번째 시집 『귀신의 왕』이 출간되었다. 문단 경향이나 세대의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만의 방’을 완성해 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들과 마주 대한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의 근원적 성찰로, 김안은 죽음을 삶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대신 생(生)이라는 세계에 맞닿은 하나의 ‘골목’으로 삼는다. 이는 불교에서 논하는 존재론의 핵심인 연기론(緣起論)에 바탕을 둔 생사불이(生死不異) 또는 생사일여(生死一如)로 풀이될 수 있다. 생사일여란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원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구분할 수 없다는 불교의 생사관을 나타낸다. 한 승려가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으므로 나는 따랐다. 이윽고 승려의 몸은 사라지고 불이 저 혼자 허기에 몸부림치며 걷고 있었다. 불에게는 눈이 없으므로, 허나 불에게는 길고 거대한 팔이 있으므로, 허기진 불은 사방을 향해 성난 붉은 원숭이처럼 제 팔을 휘둘렀다. 나는 저 낯선 불의 팔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충동은 지난밤 꿈에서 황금빛 옥수수밭 사이를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시체를 안아주려 했던 것과 비슷했다. 가여운 것, 허기진 것, 끝없는 거대한 어둠이 너를 보고 있구나 이렇게 계속 눈 감고 있으면 영영 뜨지 못할 거야. 나는 시체에게 말을 건넸다. 설득하려는 듯. 누구를? 시체를. 꿈이었으니까. 죽지 말자고. 시체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내게 말했다. 나는 안개처럼 떠다니는 흐릿한 이야기일 뿐이야. 나는 밤의 어두운 주머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일 뿐이야. 그리고 시체의 이마에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더니 작은 나방으로 변해 내 이마에 부딪혔다. 눈을 떴다. 지금 내 앞에는 거대한 불이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구름처럼 느린 춤과 같았다. 나는 저 불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잊고 있던 시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눈을 뜨면 현실. 그것은 얼어 죽은 불의 낙원이야. 경험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욕망들. 그리고 나는 시체를 껴안았다. 나는 화로의 재처럼 조금씩 멀리 흩어져가는 나를 느끼기 시작했다. - 김안, ① 「미메시스」 전문, 8~9쪽 그해 겨울, 나는 죽은 것 같았다. …(중략)… 나는 손으로 억세게 귀를 막았다. 귓구멍이 손을 먹기 시작했다. 억지로 귀에서 손을 떼자, 귓구멍에서 긴긴 이야기들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그날 이후, 매일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 들어와 숙덕이던 하얗고 묽은 영혼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따라 나는 온몸으로 어둠을 받아들이며 옥수수밭으로 들어갔다. 귀 밖으로 늙음과 붉음과 묽음이 꿀렁거리며 뱀처럼 끝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김안, ② 「미메시스」 부분, 92~94쪽 시작과 끝을 알리는 두 편의 「미메시스」에는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두 작품은 하나이면서 결코 하나가 아닌 서사로, 죽음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시 전체가 운용될 것임을 전제하는 관문인 셈이다. ① 「미메시스」에서 ‘나’는 “승려의 온몸에 불이 붙은 채”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우리는 ‘나’가 바라보는 이 ‘죽어감’의 생생한 한 장면에서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온몸으로 물을 껴안고”(「불가촉천민」, 『아무는 밤』, 민음사, 2019, 26쪽) 죽어가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나는 저 낯선 불의 팔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힌다. ‘나’는 시체를 “설득하려는 듯” 눈을 뜨라고 말한다. “죽지 말자고.” 잠시 머뭇거리던 시체는 “나는 안개처럼 떠다니는 흐릿한 이야기”이고 “밤의 어두운 주머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라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 시 속에서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이다. 또한 ‘시체’는 인간이 만들어낸 “어두운 주머니에서만 존재하는” ‘단어’일 뿐이다. ‘시체’와 ‘나’는 설명할 수 없지만 다르지 않은 ‘존재’이므로 이제 “나는 시체를 껴안”는다. “화로의 재처럼 조금씩 멀리 흩어져가는 나”는 이제 ‘귀신’이다. 계사(繫辭), 미메시스, 뫼비우스 철학적 용어 가운데 계사(繫辭)라는 말이 있다. 계사는 서양 논리학의 기초 용어인 ‘코풀라(coupula)’의 번역어로, 코풀라는 무엇인가를 묶고 조이는 데 쓰이는 일종의 끈(매듭)을 의미하는 라틴어(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비, 2013, 421쪽)다. 계사는 주어와 보어를 잇는 ‘be동사’인 ‘이다’(est)라는 점에서 관절(마디) 역할을 하고 의미론적으로 실체를 지시하는 ‘끈’을 지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명사가 계사에 묶여 영원히 하나가 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김안과 변선우의 시집에서 우리는 어떠한 ‘끈’을 발견할 수 있을까. 두 시인을 이어주는 ‘끈’은 두 세계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의 존재를 발견해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세계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현실과 몽상/환시의 세계, 죽음과 삶의 세계, 죽음과 죽어감의 세계, 너와 나, 존재와 비존재, 비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포함한다. 김안과 변선우는 이질적인 두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배치하지 않고 하나의 세계로 통합한다. 2000년대는 전쟁 아닌 일상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시대가 되었다. 2014년 이후 우리의 죽음에 관한 정신의 지도가 크게 바뀐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시인들의 발자취마저 돌려놓았다. 아이들이 돌아오겠다던 금요일은 550번 이상 지났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훌쩍 지났어도 좀체 낫지 않고 집단적 우울증으로 남아 각인된 죽음들, 어린 친구들의 무고한 죽음이 남긴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삶에 도사리고 있다. 2015년 메르스에 이어 2020년 코로나19, 2022년 이태원 참사로 죽음은 우리의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가족 대부분은 갑작스럽게 준비도 없이 가족 구성원을 잃어야 했고 그 ‘상실’로 가족은 아직도 고통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죽음의 그림자를 지니게 된 셈이다. 세계는 다양한 감정의 다발들로 소용돌이치고 슬픔이 넘쳐 흐른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던 아이,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잡아드린 어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상지(上肢)에는 여전히 그들의 온기가 남아 있는데 말이다. 죽음을 단순히 한 개인의 불행과 삶의 질감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 그들은 내게서 완전히 분리되어 소멸했는가? 우리는 말더듬이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 감각과 감정을 억제하고 슬픔을 애써 외면한다. 애도해야 한다면서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 모른 채 ‘애도, 애도, 애도’만을 되뇌곤 한다. 변선우는 무의식이 흘러나오도록 하여 고통받는 무의식의 ‘나’에게 손을 내밀고 김안은 죽음 사건으로 비존재가 된 존재들에게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잊지 않겠다는 진정한 애도를 수행한다. 그곳과 먼 곳에도 있는 ‘나’ 『귀신의 왕』의 촘촘한 유기적 연결성이 ‘나’의 ‘어린 시절’ 골목으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이끈다. 시인에게 “기억들은 한 골목에 집중되어 있”(「시인 노트」, 96쪽)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며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우리가 ‘귀신’이라고 부르는 죽은 존재들도 살아있는 “나와 비슷한 형식과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들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온기를 더듬어 나간다. ‘나’는 어린 시절의 공간에 도착해 ‘귀신’이 된 그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귀신의 왕』은 어린 시절 ‘나’가 살았던 한 골목의 ‘그 집’을 중심으로, 이제 ‘귀신’이 되어 버린 사랑하는 존재들의 서사를 잔뿌리처럼 펼쳐 보여준다. ‘귀신’이 된 ‘나’가 마주 대하는 귀신들은 오랜만에 해후하는 이웃이자 벗이다. 그곳과 먼 곳의 ‘나’는 ‘너’를 포용하여 ‘우리’가 된다. 11월의 늦은 오후,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직까지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건 내일도 내내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때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게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는 오랜만에 뵌 어머니 모습에 얼떨떨하면서도 반가웠다. 철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강아지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 나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 이름이 뭐였죠? 무슨 소리니? 강아지라니. 내가 그 강아지가 된 마음이라니까, 오랜만에 엄마를 보니. 냉장고에서 하얗고 서늘한 빛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어두고서 내게로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강아지 키운 적이 없어. 왜 나 예닐곱 살 때 무당집 골목에 살 적에 키웠잖아. 굶어 죽었던가, 맞아 죽었던가, 그래서 아버지가 화장실 옆 나무에 묻어준. 나는 허기진 짐승처럼 어머니의 신선한 손목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손목을 내어주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아버지가 없잖아? 생각해보니 내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난 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어린 시절, 밤마다 창밖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서늘하게 흘러 들어와 어머니의 몸을 휘감았는데, 나는 그것을 아버지라 여긴 것일까? 어머니는 남은 한쪽 손목을 내어주었다. 그건 골목들이란다. 양팔이 사라진 어머니는 하얗게, 깊게, 서늘하게, 침묵하고 있는 냉장고 속으로 뱀처럼 기어 들어갔다. 어머니의 팔에서 흘러나온 붉은 그림자들이 밤의 골목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 김안, 「기일」 전문 세계가 달라도 존재의 관계는 부식되지 않는다는 주제를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독특한 서사를 작성하는 명편 중 하나는 「기일」이다. 우리는 「기일」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귀신의 세계에서도 변하지 않는 존재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이다. 이를 통해 생과 사의 ‘벽’은 무너지고 확실의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 ‘나’는 ‘기일’이 되어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는 만나자마자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선 냉장고 문”을 여신다.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귀신이 된 어머니와 자식의 대화 역시 낯설지 않다. “나는 오랜만에 뵌 어머니 모습에 얼떨떨하면서도 반”갑다. 항상 자식이 그러하듯 “철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강아지 같은 마음”으로 “엄마, 나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 이름이 뭐였죠?”라며 평소 궁금했던 질문 하나를 한다. 어머니는 “우리 강아지를 키운 적이 없어”라고 답한다. 이 부분에서 확신과 확실의 세계가 흔들린다. ‘나’는 세계를 공고히 다지려 한다. 아니, “굶어 죽었던가, 맞아 죽었던가, 그래서 아버지가 화장실 옆 나무에 묻어준” 바로 그 강아지요. 라고 묻자, 어머니는 “넌 아버지가 없잖아?”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확신과 확실의 경계는 무너진다. 마치 귀신의 세계를 읽는 독자의 현실 세계와의 경계를 허물기라도 하듯 말이다. 현실 세계에서 형성한 가치관과 사유·언어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완전한지, 이것 때문에 너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죽음의 세계를 ‘나’의 세계에서 분리해 ‘나’라는 실존이 고통스럽고 고독한 것은 아니었는지 많은 사유와 깨달음이 우리에게 도착한다. 「기일」은 귀신들의 대화를 변증법적으로 검토하여 우리를 다양한 세계로 이끌고 결코 관계란 끊어지지 않음을 상기시켜 준다. 비세계(非世界), 비세계(飛世界) 김안과 변선우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나가면서 같은 제목을 몇 차례 부여한다. 김안은 『아무는 밤』에서 「파산된 노래」 5편, 「불가촉천민」 8편, 「가정의 행복」 4편, 「피그말리온」 2편 등 동일한 제목으로 시를 써나갔는데, 이러한 시적 방식과 특징은 「미메시스」로 시작하여 「미메시스」로 끝을 맺는 『귀신의 왕』에서 ‘신성한 높이’에 도달하게 된다. 변선우 역시, 『비세계』에서 「비세계」 10편, 「제정신세계」 11편, 「폭탄 마니아」 4편을 써나가면서 비가시적 시적 장소를 가시화하고 활성화한다. 두 시인에 ‘미메시스’적 글쓰기를 통해서 텍스트 속 장소의 가상성은 순환하며 생명을 얻고 구체화되는 것이다. ‘밤’의 세계, ‘죽음’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 ‘환시’의 세계는 장소의 언어와 몸이 없어 우리는 그 세계를 실감하기 어렵다. 시인은 귓구멍에서 흘러내리는 “긴긴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는 “그날 이후, 매일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 들어와 숙덕이던 하얗고 묽은 영혼의 목소리”이다. 1 세계를 발견하였어요. 이 말은 세계를 발명하였다는 의미의 다름 아녜요. 나는 세계의 경계에 당도하여, 문을 밀어 열 듯, 선을 넘어 입장하였어요. 새하얀 세계, 금방 새카만 세계……, 새하얗기도 하고 새카맣기도 하는 세계가 펼쳐졌어요. 복판에 사람들이 있었어요. 살충제 마신 벌레들처럼 반지르르하게 널브러져 있었어요. 바라던 광경이었어요. 너무도 돌아왔어요. - 변선우, ① 「비세계」 부분, 11쪽 1 사물은 넘어진다. 깨진다. 흐르기 시작한다. 비세계에 도착한다. 2 사물은 거기서 내가 된다. 나를 시작한다. 트랙을 걷는다. 달린다. - 변선우, ② 「비세계」 부분, 19쪽 변선우의 10편의 「비세계」 가운데 2편(번호 필자 부여)을 살펴보자. ① 「비세계」에서 시적 주체는 “세계를 발견”한다. 아니 “세계를 발명하였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 것이다. 시인은 “새하얀 세계, 금방 새카만 세계”에 “반지르르하게 널브러져 있”는 존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려고 한다. 혼돈(Chaos)의 세계에서 세계가 창조되듯이 ‘비세계’의 존재들이 시인의 ‘몸’과 ‘글쓰기’를 통해 생명이 획득된다. “사물은 넘어”지고 깨져서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다.” 사물은 마침내 생명을 얻는다. 살아있다는 것의 상징성은 ‘정지’ 대신 ‘흐름’, ‘순환’이다. 생명의 순환을 대표하는 원소를 부러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없이 ‘물’을 택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지구의 97%, 인간 신체의 70% 이상이 물로 구성되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순환’은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변신의 반복을 의미한다. 물은 친화적 성격을 지녔다. 물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긍정의 에너지를 생성한다. ‘흙(土)’과 결합한 물은 진흙이 되어 집을 짓고 ‘불(火)’과 결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는 에너지가 되며, ‘공기(風)’와 결합한 물은 파도와 바람이 되어 자연물과 유기체의 이동을 도와 생존을 도모한다. 이것은 물이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변화의 중심에 서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변선우의 ② 「비세계」에서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 사물이 내가 되어 “나를 시작한다.” 사물은 이제 “트랙을 걷”고 달릴 수 있다. 변선우의 시적 주체는 무의식과 상상/몽상의 존재들이 ‘나’의 ‘몸’을 입고 현시의 세계에서 걷고 달릴 수 있도록 몸을 내준다. ‘몸’과 ‘언어’를 가진 비세계의 사물들이 비상한다. 김안과 변선우는 열린 시선과 감각을 지니고 있다. “겨울에는 겨울의 소리가 있고 겨울의 언어가 있”(「끽다거喫茶去」, 『Mazeppa』)다고 믿기에 시인은 ‘방’이라는 단어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실과 울먹임들이 웅얼웅얼 귓속으로 들려오는 것”(김안, 「사전」, 강정 외, 『시인의 사물들』, 한겨레출판, 2014, 164쪽)을 포착한 것이다. 이제 시인은 ‘귀신의 왕’이 되어 귀신의 소리와 귀신의 언어를 듣고 말한다. 이는 시인이 현실적 문제보다 비가시적·비현실적 문제에 집중해 시세계를 확장하거나 “문학성이라는 뻔한 밀교”(「시인의 말」, 『Mazeppa』)를 펼치려는 자세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한때 우리 삶을 감쌌던 존재들이 불쑥불쑥 의식의 세계에 찾아오는 것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대화함으로써 존재들이 살아가는 실재적 삶을 명시해 보려는 것이다. 김안과 변선우는 유일한 세계, 인간만이 사유의 존재로 믿어왔던 가치관들이 오히려 존재에게 고통과 고독을 주지 않았나 하고 의문을 가진다. 그들이 창조한 시적 세계에서 무수히 많은 사물과 귀신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사실 죽음이 관계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라졌다고 믿어왔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생의 고통이 되지 않았을까. 시인들은 아교처럼 생의 한가운데 흘러내리는 수많은 고통과 단절이 고립된 사유 때문임을 안다. 『귀신의 왕』과 『비세계』는 아직 언어가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더 이상 못 본 척 시약불견(視若不見)하지 않겠다는 시인들의 의지이자 세계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죽음이 뛰어오”(「아오리스트」, 『Mazeppa』)는 소리와 무의식의 몸짓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들은 계속해서 너머의 세계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액체적 지각을 통해 거침없이 새로운 세계로 흘러 들어가 ‘몸’ 없는 세계 속 존재들의 ‘언어’가 되어줄 것이다. 확신의 세계를 허물자, 다양한 세계의 새로운 언어와 감각이 흘러넘치면서 출렁댄다.

월간 현대시 염선옥 액체적 지각비세계와 비존재탈세계적 감각애도 감성환시의 시학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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