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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겨울호(제121호)

소설, 그 확장과 개입에 대하여 - 혐오 시대의 귀신들

소영현 문학평론

평론가.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교수. 2003년 『작가세계」에 최윤론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문예중앙』 『작가세계』 『21세기문학』 『문학웹진 뿔』 『웹진 비유』 『KLN』 기획 및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비평집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하위의 시간』 『올빼미의 숲: 사회비평 선언』 연구서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광장과 젠더: 집합감정의 행방과 새로운 공동체의 구상』 『하녀: 빈곤과 낙인의 사회사』가 있으며, 공저로 『비평포럼: 키워드로 읽는 2020년대 한국문학』 『#문학은 위험하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과 독자 시대의 한국문학』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비평 현장과 인문학 편성의 풍경들』 『감성사회』 『감정의 인문학』 등이 있다.

1. 경계, 예술, 실험, 언어, 그리고 개입


  지난 10월 ‘2024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를 통해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 <이것은 대사관이 아니다This is not an Embassy>는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타이완의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연극이라는 형식 속에 사회적인 사유 실험을 도입하여 연극의 영역을 확장하고 공연예술과 사회문제를 접속시켜온 독일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의 이 새로운 프로젝트는 예상과는 달리 타이완의 정치 현실을 무대를 통해 문제로서 재현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디지털 활동가, 전직 외교관, 뮤지션이자 버블티 기업의 상속녀로 구성된 3인의 대만인 출연자들은 소형 카메라와 자신을 소개하는 각자의 미니어처를 이용한 역할극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개인사와 가족사에 입각한 자기 서사를 전달한다. 외교적 고립의 문제를 공식, 비공식, 그리고 경제 차원에서 각기 다르게 진단하고 그 해법을 제안하면서, 연극은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개인이 왜 무대 안팎의 경계를 지우는 공연 형식을 빌려 한자리에 모일 수밖에 없는지를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국가, 정치, 외교 같은 문제를 외면한다고 해도 ‘국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시민-(국)민으로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역설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미승인국가 상태인 타이완의 상황이 코소보, 수리남, 조지아와 같은 신생국과의 유비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 관계와 같은 20세기 제국주의의 상흔과의 대비 속에서 다루어지는데, 그러한 진행이 타이완의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각화하여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승인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국가 아닌 국가에서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타이완이라는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님을, 전지구적이고 현재적인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긴 설명 없이 직접적으로 전한다. 이러한 질문과 환기만으로도 <이것은 대사관이 아니다>는 예술 작업으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에 남는 긴 여운은 이 작품이 다루는 테마 때문만은 아니다. 타이완이 처한 상황은 개인을 넘어선 국제적인 차원의 문제이지만 연극이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의 단일한 의견을 제시하는 형식과는 다르다.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되는 역사의 구체성은 한편으로는 국가의 국제적 지위가 개인의 일상에 실질적이고 미시적으로 영향을 드리우고 있음을 확인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없음의 상태가 개인의 삶을 비극적이고 억압적인 상태에 가둘 수는 없음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은 대사관이 아니다>가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와 같이 몰입의 방해나 지연을 통해 사유를 독려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의식하게 하는 연극의 현장성을 통해 이 연극이 현실 개입을 수행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는 영어로 이루어지는 연극 표층의 발화, 연극 속에서 활용되는 사진, 영상, 음악을 두고 사적인 감정을 나누는 발언자들의 중국어 담화, 번역된 한국어 자막이 공존한다. 이 창의적인 예술 장치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효과로 인해 이 작품은 정치적 의제를 다루는 문제적인 연극에서 나아가 공연으로서의 탁월성을 획득한다. 

  대사관의 설립을 공연화하면서 관객인 우리에게 동의와 참여를 요청하는 <이것은 대사관이 아니다>는 연극이 상연되는 무대가 곧 대사관이 될 수 있다는 참신한 발상을 제안한다. 나아가 극장이 임시적이고 유목적인 형태의 영토라고 할 수 있다면, 전 세계의 무대가 폐쇄적인 영토 경계를 가로지르는 탈영토화의 실험적 실천으로서 지속될 수 있지 않을지 질문한다. 무대 위에 세워진 가상의 ‘영토-대사관’은 그렇게 섬처럼 떠올랐다가 공연이 끝나면서 흔적 없이 가라앉지만, 관객인 우리가 공증한 사건으로서 그 영토의 있었음, 있을 수 있음에 대한 기억의 잔영은 그 시공간을 공유-공존했던 관객에게 지워지지 않는 감흥의 흔적으로 남는다.

  <이것은 대사관이 아니다>만큼이나 깊은 여운을 남긴 박수남과 박마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2023, 2024년 11월 13일 개봉)에 대해서도 짚지 않을 수 없다. 일본군 ‘위안부’,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원폭 피해자, 제암리 학살 사건 등 식민지와 전쟁 폭력의 피해자를 기록한 이 영화가 전하는 여운의 무게는 무엇보다 역사를 관통하며 역사의 폭력을 피해자의 얼굴을 통해 비판하고 맞서온 박수남이라는 존재의 무게이자 역사 자체의 무게라고 해야 한다. 교사였고 기자였던 재일 조선인 박수남은 재일 조선인(이진우)의 일본인 여학생 살인사건(고마쓰가와 사건)을 제국과 식민, 인종의 차별적 위계 속에서 문제화하고 무엇보다 사건 너머 사람들의 문제로서 다루면서 증언하고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에는 그림, 사진, 영상, 저서, 사건 기록, 피해자 인터뷰, 그리고 필름 복원 작업을 포함한 박수남과 박마의 모녀의 일상 기록이 담겨 있다.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언어화될 수 없어 침묵으로 남겨진 분노와 슬픔을 있는 그대로 남기기 위해 펜이 아니라 카메라를 잡기 시작했다는 다큐멘터리 속 박수남 감독의 말은 그가 남긴 여러 말 중에서도 특히 깊은 잔상을 남겼다. 작품이 되지 못한 채 쌓여 오랜 시간의 기록이 되어버린 필름에는 이제는 대부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얼굴과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지금 이곳에는 없는 당사자의 얼굴과 목소리는 피해의 쓰기로서의 재현을 둘러싼 그간의 논의를 무색하게 만드는 면도 없지 않다. 각기 다른 시간에 기록된 각기 다른 피해의 시간들, 단속적인 사건들의 연쇄가 다시 쓰는 폭력의 역사는 재현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서의 예술의 얼개를 뚫고 나와 ‘한’으로 명명되는 고통에 공감하게 하고 무의지적 눈물로 흘러나오는 애도를 수행하게 한다.

  이러한 작품들이 주는 충격과도 같은 예술 경험이 비문자 언어라는 매체의 속성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비문자 언어의 예술 경험에 좀더 압도된다는 감각은 언어적 재현에 좀더 친숙해서 생겨나는 (나와 같은 문학 독자의) 착각은 아닌지, 그렇다면 고통과 슬픔, 분노와 상처를 문자 언어로 포착하는 것은 비문자 언어와는 어떤 차이를 갖는지, 어떤 다른 가시화와 가로지르기가 가능하다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곁들여 생각해보게 된다.



2. 폭력 이야기: 더 많은 공간을, 더 많은 이동을


  조해진의 신작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문학동네, 2024)에서 이루어진 폭력에 대한 서사적 대결의 실험적 시도가 성공적인가에 대해 시간을 들여 곱씹게 된다. 조해진 작가는 이미 전작들에서도 작품 안에 다큐멘터리 성격의 영상이나 영상화를 목표로 하는 시나리오 작업을 종종 언급했으며,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공간의 병치를 통해 서사를 영상화하고 장면화하는 기법을 활용하면서 소설이라는 형식이 포착하기 어려운 ‘동시간성’을 포착해왔다. 비교적 의미 전달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비언어적 이미지나 영상의 활용에 적극적인 편인 것이다. 거슬러오르자면 생생하게 포착한 벨기에의 풍경이 깊은 인상을 남긴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 이후로 내내 공간의 병치와 공간들 사이의 이동과 연결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단편 「문주」(2015)의 모티프를 장편소설로 확장한 『단순한 진심』(민음사, 2019)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계 연극배우이자 극작가인 사십대 여성 화자와 그를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 단편영화를 구상하는 인물 역시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공간을 거점으로 포착된다. 한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이동선 위에 기지촌 여성과 입양 문제 등이 이태원이나 용산 등으로 공간화되어 배치된다. 홍콩, 영등포, 제주도라는 공간을 거점으로 하는 『완벽한 생애』(창비, 2021)에서는 각기 다른 공간과 인물에 대한 서술과 함께 공간들 사이의 이동성을 포착하는 쪽으로 더 나아간다. 인물들이 서로의 방에 머무는 공간 배치의 순환과 그들의 이동-떠밀림의 사연을 통해 작가는 소수자의 삶을 환기하고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한다.

  『빛과 멜로디』에서 작가는 이동 혹은 이주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연결 혹은 흥미로운 연대의 면모를 좀더 촘촘하게 구축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빛과 멜로디』에서 공간 병치는 일종의 기법처럼 전면화되고 다변화된 셈이다. 재난 현장 사진,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기록하고 증언하는 비언어 매체들이 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요소로 활용된다. 소설은 두 명의 분쟁 현장 사진가를 등장시켜 그 행보를 겹쳐두며 그들이 죽음을 기록하는 작업에서 죽음 가까이에 있는 삶을 구원하는 쪽으로 옮겨가는 변화를 포착한다. 그것은 작가가 내내 다루어오던 주제이기도 하다. 조해진은 그러한 매체의 의미와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도 그 위험성과 한계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실제로 소설 속 인물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에 가닿거나 다른 이유로 이동하게 하는 것은 그 위험성에 대한 예민한 성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빛과 멜로디』에서 시간을 공간화하고 장면화하는 기법 자체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러한 진전을 강력하게 추동하는 동력이다. 피사체를 착취하지 않는 사진 찍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한 사진 찍기란 과연 무엇인가.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 모두의 입을 통해 그 동력인 의심과 성찰이 고백처럼 기술된다는 점이다.

  

  살마의 이야기를 듣고 살마를 알아갈수록, 그녀는 살마를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닮았으니까. 완전한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나 다름없는 스스로를 외로운 방에 감금했던 살마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되비추는, 과거에서 온 거울 같았으니까. 닮지 않아야, 그러니까 피사체와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거리낌없이 촬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거리는 결국 냉정함의 거리라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그런 생각은 셔터를 누른 이후 피사체가 살아갈 실제 삶에는 무심했다는 자각,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진을 위해 한 사람의 고통을 이용해온 건지도 모른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구원이 불가능한 세계를 편집한 것에 불과한 사각형의 파일 하나, 혹은 종이 한 장……(60~61쪽)

  배경은 아름답고 구도는 안정적이되 그 안의 사람들은 더 아프고 더 불쌍하게 보이는 사진, 혹은 끊임없이 잔인한 이미지를 징집해서 찍은 사진이 과연 세상의 분쟁을 막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의심이었다. 그건 들판에 버려진 시체를 찍을 때도 노을이 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에게 진실을 보여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기도 했다. 의심은 짙었지만 오래 품을 수는 없었다. 분쟁을 막든 부추기든, 일단 지면에 실려야 그런 고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으니까.(172쪽)


  조해진의 소설 계보 속에서 공간을 병치하고 공간성을 포착하려는 시도는 형식 실험이라기보다 폭력과 재난에 거리를 둘 때에만 가능한 예술이 눈앞의 폭력과 재난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작가의 윤리적 염결성에 가까운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해결 모색의 일환이다. 작가의 작품세계 구축의 동력이라고도 해야 할 이러한 태도는 『빛과 멜로디』를 포함한 조해진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한 자기 성찰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작가는 공간들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면서 탈중심성을 확보하고, 그것을 이야기의 차원에도 적용시킨다. 『빛과 멜로디』는 서사를 응집시키는 중심부로 작동하는 화자의 자리를 도려내고, 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 사이를 연결한다.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그 이야기를 통해 소설은 전쟁, 재난, 빈곤, 굶주림, 인종 혐오 등 이 세계를 가득 채운 폭력을 비판하면서 가시화한다.

  한 사람이 품은 이야기의 무게는 다른 이야기로 대체될 수 없으며, 서사 내에서 비중을 다툴 수 없다는 인식으로 작가는 인물들에게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더 많은 공간과 이야기를 복원한다. 이동과 연결의 궤적을 추적하며 촘촘하게 ‘사람-이야기’의 지도를 제작한다. 그 지도 제작이 곧 소수자 타자의 복원이자 증언이고 현실의 폭력에 대한 개입이자 전망일 수 있음을 전한다. 이야기로 이루어진 지도 제작 방식의 소설은 몰입하게 하기보다는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어 앞뒤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조해진 소설은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예술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할 만하다.

  역설적인 효과일 수 있으나, 소설 속 화자에게 부여되는 조망하는 힘을 약화시키자 『빛과 멜로디』에서 인물들이 품은 사연이 이야기라기보다는 정보에 더 가까워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공감의 경험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공감을 방해받는 과정에서도 성찰적 환기력이 증대될 수 있다고 할 때, 그 적절한 비중은 좀더 중요해진다고 하겠다. 소설 속 인물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듯이 독자가 인물과 만나 그들에 대해 알아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며, 아마도 인물들 사이에 오고가는 감정이나 작은 에피소드들이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빛과 멜로디』에서 독자가 시간을 투여해 가늠해야 하는 ‘관계’는 줄어 있고 확인해야 할 등록 정보는 여타의 소설보다 늘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펼쳐진 비극적 참상들이 그 특이성과 유일성을 잃어가면서 점차 참상과 비극 일반에 대한 기술처럼 추상화되는 것으로도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으로 여겨진다. 언어의 세계에 비언어적 요소를 도입하려는 이러한 시도가 흥미로운 작법임이 분명함에도 그 시도가 의도만큼의 성과를 확보했는지 대해 재고해보게 되는 것은 그래서인 듯하다. 『빛과 멜로디』가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서사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느라 길에서 만난 ‘사람-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살피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이야기의 무게에 압도되어 그들 사이의 경계가 그리 쉽게 넘을 수 없는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혐오 이야기: 혐오 공동체와 귀신 문양 태피스트리


  타이완 작가인 천쓰홍의 『귀신들의 땅』(김태성 옮김, 민음사, 2023)의 매력 역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소설이라는 점에 있다. 타이완 중부 소도시 용징을 배경으로 한 『귀신들의 땅』은 부부와 딸 다섯, 아들 둘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며 그들 각자가 품은 비밀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애를 전한다. 개별 장에서 다루어지는 각 인물들의 이야기가 삼인칭으로 위계 없이 기술되는 동시에 귀신에게는 일인칭 화자의 권한이 부여된다. 귀신들은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자신의 내면을 누설하지만, 사건이나 장면에 직접 개입하지는 못한다.

  표면적으로 막내아들 톈홍이 독일에서 자신의 파트너 T를 살해한 사건에 대한 궁금증이 독서를 이끄는 동력이라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슬쩍 언급된 이야기들 속에 숨겨져 있고 그 진실은 소설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면서 반전의 충격을 안긴다. 톈홍이 연인을 살해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들도 소소하고 일상적인 장면들처럼 소설 전반에 흩어져 있다가 이후에 제시되는 단서들과 만나서야 비로소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퍼즐의 작은 조각들이 맞춰지는 과정에서 단서들에 부여되는 의미도, 사건의 무게도 커진다. “누나 다섯에 형 하나, 좀처럼 말이 없는 아버지, 이러쿵저러쿵 끊임없이 얘기를 늘어놓는 엄마, 뱀 잡는 이웃, 빨간 반바지 차림의 징쯔총菁仔欉, 물웅덩이, 혼례, 추풍나무, 백악관, 하마, 용싱 수영장, 지하실, 양타오 과수원, 청자오마城腳媽, 밍르明日 서점, 은색 물탱크 탑”(19쪽)을 문양 삼아 소설은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짜듯 이야기를 구성한다.

  소설에는 1960~70년대 한국소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타이완의 근대화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심화했고, 타이완 경제가 맹렬하게 발전하던 시기에도 소설 속 시골은 지체되고 쇠락하여 귀신과 같은 존재들만 남은 황량한 곳이 되었다. 소설은 가부장제가 강고하고 보수적이며 미신과 소문의 힘이 센 농촌이 여성과 퀴어와 같은 타자적 존재들에게 죽음을 부추기는 곳이었음을 전한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없었으며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미혼의 출산은 말할 것도 없이 미혼인 채로의 삶도 허용되지 않았다.

  내리 딸을 낳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학대에 가까운 질책과 욕설은 그들의 시어머니의 시어머니로부터 이어져온 혐오 폭력의 반복이다. 어린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고 도시로 떠난 여성은 방직공장 여공이 되어 도시에 정착하려던 꿈을 이루지 못한다. 임신으로 공장에서 쫓겨난 그들은 미혼인 여자가 아이를 낳는 추문을 막으려는 가족의 안간힘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행으로 떠밀린다. 학업에 뛰어난 여성이라고 해서 그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아내라는 역할을 벗어난 삶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성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가정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여성은 드물다. 미래에 대한 별다른 전망이 없기에 여성들은 종종 결혼을 위해 자매끼리도 경쟁하는 일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이 남긴 상흔에서도 자유로워지기 어렵다. 톈홍 가족의 여성들 모두 이러한 삶을 살았다. 길게 언급했지만, 사실 우리에게도 조금도 낯설 것 없는 풍경이다. 그 익숙한 풍경이 타이완의 시골 마을에서 고스란히 반복되었음을 서글픈 마음으로 확인하게 된다.

  『귀신들의 땅』은 여기에 덧붙여 퀴어에 대한 오랜 혐오의 역사를 비극적인 죽음들을 통해 드러낸다. 좀더 은폐된 자리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퀴어의 존재를 복원하는 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듯, 흥미롭게도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결과적으로 소설이 가시화하는 것은 혐오 폭력으로 구조화된 공동체 자체이다. 퀴어에 대한 혐오는 강고했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잔혹했다. 동성애를 범죄로 취급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백주 대낮에 혐오 폭력이 벌어져도 누구도 개입하지 않을 정도의 공동체적인 묵인이 있었고, 그런 까닭에 작은 소문만으로도 공동체에서 퇴출될 위험에 내몰려야 했다. 공동체 전체가 타자적 존재들을 더이상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퀴어에 대한 폭력이 공동체 전체의 공모였다는 사실을 짚는 일은 꽤 의미 있게 여겨진다. 소설은 누구도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이었음을 환기한다. 정상 가족 바깥의 누구도 추문에서 자유롭지 않았기에 자신의 추문을 막기 위해 좀더 취약한 자리에 놓인 타자들을 사지에 내몰기도 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성폭력을 당해 죽음을 택한 어머니의 사연을 비밀로 간직해야 했으며 아들을 출산하지 못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치욕의 시간을 살았음에도 톈홍을 향해 “이 변태 새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멍청한 새끼!” “너는 왜 나가 뒈지지 못하는 거야! 뒈져서 귀신이 되어야 눈에 보이지 않을 것 아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 눈에 보이지라도 말아야 할 것 아냐!”(250쪽)라는 식의 악담과 끝나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여 결국 톈홍이 가족과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였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밝혀진 바에 따르면 톈홍의 어머니가 무고한 이를 모함하고 소문을 꾸며냈던 것은 또다른 피해자인 아버지 때문이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피할 길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타자들과 그 내부의 곤궁이 비극적 참상으로 그려진다고 하겠다.

  공동체의 공모가 결국 모두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공동체의 지속을 용인하게 한다고 할 때, 『귀신들의 땅』의 소중한 점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이러한 폭력의 소용돌이에 가담하거나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을 소설적으로 포착한 데 있다. 많은 비밀과 비극이 은폐되어 있는 밍르 서점 사건은 혐오가 아니라 호의를 가진 존재조차 그와는 무관하게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매질하던 할머니를 자신이 키우던 검은 개가 물자, 할머니가 그 개를 남자들에게 먹였던 사건에 대한 톈홍의 둘째 누나 수리의 기억은 검은 개를 죽인 것이 자신이라는 죄의식으로 남겨지고 만다. 혐오 폭력은 악의적인 차원에서만 행사되는 게 아님을, 공동체를 지탱하는 남성 중심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와 같은 관념은 결국 공동체의 일원 모두를 망가뜨리는 것임을 확인시키는 대목이다.


  대나무 숲 여자 귀신은 일제강점기에 강간당한 여자로, 정절을 훼손당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쫓겨나 대나무 숲에서 목을 맸다고 했다. 이때부터 귀신이 되어 오직 젊은 남자들만 유혹한다고 했다.(16쪽)

  “귀신이 가장 많은 곳은 밭 옆에 있는 백 년 된 도랑이래요. 도랑 양쪽 버드나무에 여자 나무 귀신이 살고 있기 때문에 버드나무를 만져서 잎을 떨어뜨리면 절대 안 된대요. 나무를 만졌다 하면 귀신이 몸에 들어와 시험에서 빵점을 맞게 된대요. 유일한 해결 방법은 여자 귀신이랑 결혼하는 거래요.”
  사람들은 버드나무 여자 귀신이 대부분 시집을 못 가보고 죽은 노처녀 귀신들이고, 죽어서도 시집을 가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 버드나무에 매달려 살면서 귀신에게 장가들 재수 더럽게 없는 사내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도랑에는 물귀신도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한 아름다운 부녀자가 일본 병사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나서 우물에 뛰어들었다가 구조되었는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가 병원에서 또 의사에게 성폭행을 당해 결국 줘수이시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이다. 물귀신들은 줘수이시를 따라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기 때문에 관개용 도랑으로 흘러들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했다.(17쪽)


바로 그런 이유로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산 사람들 사이로 수많은 귀신 이야기가 떠돌게 된다. 길게 반복할 필요도 없이 귀신 이야기는 여자들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누설이자 애도이고, 죽은 이후에도 가해지는 혐오 폭력의 가혹함에 대한 고발이자 경고다. 인터뷰에서 작가 스스로 언급한 것처럼, 서로 다른 시간을 오가며 고무지우개를 들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선을 희미하게 지우듯 구축한 『귀신들의 땅』은 직조되는 동안 전체 그림을 알 수 없는 태피스트리처럼 소설의 끝에서 예측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소설 전면으로 밀어올린다. 그리하여 귀신들의 이야기로 채워진 소설은 그 자체로 경계를 지워가면서 떠오르는 폭력과 그 피해자들의 이야기이자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정들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무엇보다 폭력 자체와 폭력의 잔혹성에 대한 고발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4. 귀신 아니 비-귀신 이야기: 귀신 연대와 환생의 맛 


  당연하게도 아름다움만이 추억과 반추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폭력 자체일 뿐일지라도 그곳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 의식하지도 못한 채 내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알지 못하는 희망과 연대의 가능성이 거기에 남아 있어서일 수도 있다. 죽었으나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귀신들의) 알 수 없는 마음을 임선우의 『0000』(위즈덤하우스, 2024)은 생 전부를 거는 환생 모티프로 들여다본다. 경계가 선이 아니라 접힌 면이라는 듯이 삶과 죽음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중간 지대’로 펼쳐 보이지만, 소설에서 그곳은 가능성의 공간이기보다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애매하고도 모호한 통로에 더 가깝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귀신까지 등장하지만 『0000』에서 『귀신들의 땅』에서와 같은 세계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이나 저항의 열기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차별적 질감이 『귀신들의 땅』이 다루는 폭력적인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우리가 도착했다는 확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판이나 저항을 (불가능하기에) 불필요하다고 여길 만큼 세계의 폭력성이 강고해졌음을 암시하는 건 아닌지 혹은 우리의 존재 방식과 그 마음이 시야를 한없이 좁히지 않고는 발견될 수 없을 만큼 희미해진 것은 아닌지 가늠해보게 한다. 

  이러한 징후가 임선우만의 것은 아닌데, 예소연의 ‘희조와 미정’ 삼부작이라 할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기혐오의 정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삼부작에서 사무치는 원한과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멸시의 정동, 고립감과 우울, 억울함, 납득할 수 없는 현실, 무엇보다 그런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 뒤틀린 그리움이 흘러넘치며, “인생이 적당한 시점에 최악의 결말로 끝나버릴 거라는 염세적인 기분”(「우리는 계절마다」, 86쪽)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저 최악의 길을 걸어온 나머지 최악이 된 사람일 뿐”(「그 얼굴을 마주하고」, 115쪽)이라는 감각을 떨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멸시”(「내가 머물던 자리」, 187쪽)하는 젊은 여자들이 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들을 혐오하며 이 순환이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1)  

  세대 감각이라고 해야 할 이 고립감은 임선우의 소설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적 존재를 등장시키는 이유이기도 한 듯하다. 담배를 사러 가던 길에 폭우와 강풍으로 떨어진 중국집 간판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유령의 마음으로』, 민음사, 2022)의 화자처럼 존재감 없는 한 웹툰 작가의 죽음을 다룬 『0000』에서 화자는 노후한 보일러의 배기가스 연결 문제로 사망하게 된다. 불운하고 억울한 죽음이건만 임선우의 화자들은 그리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가족을 버리듯 집을 나간 아버지, 유사종교에 빠진 후 결국 다른 사람의 사기죄를 대신해서 감옥에 간 엄마, 손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친할머니까지, 소설 속 화자에게는 가족과의 친밀함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없어 보인다. 삶의 영역이 아니라 중간 지대에서 그것도 아주 자그마하나마 미약한 친밀감이 다시 생겨나는 것은 동물과의 관계에서이다. 고양이 오후와의 만남을 통해 화자는 한 번도 아쉽다고 여긴 적 없는 자신의 생을 다시 시작해보기로 마음먹는다. 


  기의 공을 만들기 위해 사랑하는 것들을 잊고, 사물이 되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고, 전부를 쏟아부었던 일을 그만두는 것. 전부 다 사랑과는 멀어지는 일이니까. 오후의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나고 당황스러웠는데,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오후의 말이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는 게 존재감이라면, 나는 현실에 발 디디고 있다는 감각조차 사라졌을 정도로 사랑과 멀어진 것이다.(61쪽)


  이 소설의 매력은 통장 잔고 0, 인간관계 0, 행동반경 0, 메신저 알림 0인 존재감 없는 인간에게 고양이 오후가 존재감을 없애는 비법을 전수받기를 청하고 그것을 연습하는 장면들이 만들어내는 몽글몽글한 온기에서 마련된다. 길고양이의 안녕을 위해 인간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전수받고자 하는 고양이 오후와의 연습 끝에 화자는 돌봄에 특화된 동물과 자신의 웹툰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여자애를 만나 외로움을 위로받고, 오후의 목숨 구슬을 양도받아 환생을 선택한다. 작가는 보은하는 고양이라는 환상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 가운데 누구도 0000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리고 사물 되기의 정반대 방향으로, 즉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무감해하지 말고 누군가 다정한 말을 건넬 때 기억해야 한다고, “죽은 듯이” “사물처럼 조용하게”(46쪽) 살지 말라는 독려의 말을 전한다. 그런데 “한번 맛을 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새큼하고도 씁쓸한 환생의 맛”(78쪽)이 궁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차오르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환생 이후 화자의 삶이 이제껏과 달라질 수 있을까 궁금하다. 삶의 가치가 0000이라는 숫자로 환산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듯, 화자의 외로움은 감정의 문제만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스한 위안을 품고 환생을 선택하는 마음으로 무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을 찾으려 한다면 그 노력이 곧 결실로 이어지기는 하는 걸까. 어쩌면 소설은 환생을 통해서나 가능할, 바뀔 수 없는 죽음 같은 삶의 막막함을 역설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당장의 긴급한 요청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세계의 폭력성으로 시야를 확장하지 않는다면 소설적 상상이 끝나지 않을 이 환상의 바퀴를 내내 반복해서 보여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소설적 상상을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현실에 대한 개입이라고 해야 한다면 세계에 대한 시야 확장과 현실에 대한 소설적 개입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봐도 좋지 않을까.   

  • 1) 이후 「사랑과 결함」을 통해 자기 멸시의 정동이 생물학적인 자질에 의한 것만은 아닌 만성 우울증으로 표출되기도 하거니와, 그것이 개인의 비극으로 치부될 수 없음이 고모 같은 존재를 통해 확인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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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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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계간 창작과비평 하혁진 광장아버지이미상성혜령예소연세대젠더부녀서사 2025
최다영 오렌지 셰이밍 ― 김나현, 「공중정원」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김나현소설계간평리뷰 2025
최다영 유독한 유기농 가족 ―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 (『림 : 숲속에는 축복이』, 열림원, 2025)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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