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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동문학평론 | 2024년 봄호(제190호)

전통과 변화 ― 낡지만 새로워지는 것들

우정인 문학평론, 시

2023아동문학평론 평론 신인상, 2024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등단

김봄희 「우리 할아버지는 올해도」, 홍재현 「할아버지 검정 꼬리」, 안오일 「젠가 놀이」,

양인숙 「오지다」, 서 한 「멸종 낱말」, 이정록 「나 홀로 학교」,

어린이 시 : 박지유 「로켓배송」, 신서인 「떡볶이와 순대」, 변지연 「나뭇잎의 옷」, 손예원 「비오는 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새 생명들이 움트고 또 새봄이 올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는 늘 우리를 설레게 한다. 통상적으로 새로운 것은 과거와 충돌하며 나타난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선호하지만 어쩌면 그 새로운 것 덕분에 과거의 낡은 것들이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들뢰즈는 “낡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 세상과 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것”1)이라고 말한다. 즉, 낡거나 새로운 것은 우리가 만든 세계일 뿐 모든 것들은 동일성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과거 또한 현재에 종속된 과거이기에 새로운 세계는 결국 과거를 통해 창조된다. 그러므로 낡았다는 것은 오히려 세상 만물의 테제로 기능하기도 한다.

  겨울 간행물들은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기에 심온(深穩)하다. 수록된 작품들을 마주하다 보면 현대의 동시 또한 충돌의 지점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전통에 대한 의미 평가와 함께 시대에 맞는 변화의 추구는 아동문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끊임없이 논의되는 문제이다. 리얼리티의 추구, 예술성과 문학성의 구현 등 아동문학이 지속적으로 톺아보며 나아가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타깝고 실망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다. 전통은 낡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양산하는 데 필요한 거름이며 디딤돌이다. 형식과 소재 등에서 전통성을 고취하는 것은 좋으나 문학성에 대해서는 보다 더 숙고해야 한다.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소재와 언어, 그리고 당면한 문제들을 살펴보자.



충돌하라, 새봄이 온다


  새로운 것들은 대체로 낡은 것과 충돌한다.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건들이다. 그러나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시작하게 한다는 것을 포괄하지는 않는다.2)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아픔과 고통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읽어 나갈 때 독자는 공감한다. 실상 동시라는 개념 자체가 동심 바깥에 있기도 하므로 쉽지 않은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풍경을 보되 그 온도를 섬세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현대의 감각에 맹목이 되어 낡은 가락만 되풀이”3)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즉, 세대 간의 간극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두두둥/ 심장이 북을 친다/ 어제와 또 다른 시간이 도착했다//
얼음이 녹았다고/ 봄이 왔다고/ 여기저기 손발톱 내밀지만/
난 아직 문을 열지 못한다//
냉장고 속 같은 매서운 바람 뚫고/ 봄은/ 로켓배송처럼 도착했다//
쏜살같이 5학년이 되었다

- 박지유, 「로켓배송」 전문(《동시먹는달팽이》 2023 겨울호



지우와 소윤이와 나는/ 떡볶이와 순대처럼 잘 맞는다//
없으면 허전하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눈치 100단이 되어/
속상한 감정을 눈 녹듯 녹여 준다//
우리는 마녀처럼 깔깔깔 웃으며/
오늘도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로 간다.

- 신서인, 「떡볶이와 순대」 전문(《동시먹는달팽이》 2023 겨울호)


  위의 시들은 동시가 아닌 어린이시다. 「로켓배송」은 최근 모 사이트의 배송 형태를 시간의 흐름과 연결하여 “쏜살같이 5학년이 된” 자신으로 귀결시킨 시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덜컥 5학년이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과 아직 “냉장고 속”처럼 춥기만 한데 찾아온 ‘봄’의 동일시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봄의 “손발톱”은 새싹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고 “얼음이 녹”는 봄의 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두두둥” 울리는 ‘나’의 심장 소리처럼 봄 또한 깜짝 놀라 요동칠 것 같은 생동감을 안겨준다.

  「떡복이와 순대」는 아이들이 즐기는 간식거리로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다. 시적 화자인 “나”는 “지우와 소윤이”와 착착 들어맞는 관계를 자랑한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이들의 관계가 순대와 떡볶이의 궁합으로 이어진다. “눈치 100단”이라거나 “속상한 감정”을 “녹여 준다”는 등의 이야기는 어른들이 꾸리는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겨울호에 수록된 동시들을 살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시가 어린이였다. 쿵쿵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미래 시인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어른들이 쓴 동시보다 리얼리티와 묘사, 그리고 사유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심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린이들의 시가 동심이 살아 있으면서도 어른 세계의 사유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 동시인들이 어린이들을 마냥 어리게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시대의 변화를 더디 감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 보아야 할 일이다.

  다음의 시는 또 어떤가.


오늘은 옷 갈아입는 날/ 빨강 노랑 무슨 옷을 입을까?//
단풍잎은 빨강 옷을 입고/ 은행잎은 노랑 옷을 입고/
목련잎은 갈색 옷을 입지요.//
내년에는 무슨 옷을 입을까?/ 옷장을 열어요.

- 변지연, 「나뭇잎의 옷」(《동시먹는달팽이》 2023 겨울호)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나무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혓바닥마다 알록달록/ 바람이 재밌다고 깔깔.

- 이 지, 「단풍은 달다」 부분(《아동문학평론》 2023 겨울호)


  「나뭇잎의 옷」은 단풍잎의 색을 ‘옷 입는 것’으로 비유한 어린이시다. 나무가 옷을 갈아입는다는 표현은 평이하다. 만약에 “옷장을 열어요.”가 없었다면 이 시가 주는 문학성은 결여되었을 것이다. 옷장 문을 엶으로써 나뭇잎의 색과 옷장을 열고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사람의 모습이 중첩되어 시는 중의성을 띄게 된다. 실제로 나무도 나뭇잎 하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는 것은 연구를 통해 알려져 있다. 이는 식물도 삶의 사유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자연의 이치다.

  이와 반대로 「단풍은 달다」는 단풍잎을 달콤한 사탕과 비교하여 쓴 동시다. 색깔의 이미지와 사탕으로 연상되어 “달다”라는 표현이 이해된다. 그러나 이것은 색깔이 가진 이미지를 작가 개인의 연상에 끼워 맞추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더군다나 시가 주는 사유가 없다. 시적 전환 없이 이미지 묘사에 그치고 있다. 문학성을 하나의 특징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독자와의 공감과 설득 문제는 간과하기 힘든 문제다.

  「나팔꽃의 자백」도 마찬가지다. ‘나팔꽃=나팔’을 분다는 것은 이미지와 연상이 거의 동일하다. 게다가 이 시의 주제라고 볼 수 있는 “한숨 쉬는 할아버지”의 심상과 시적 연결 지점이 느슨하다. 「꼼수」 또한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주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전통시는 길이가 짧은 것이 많다. 짧다는 형식적 특징은 단순히 언어의 간단함이 아니라 명료함이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시로 전환되는 부분이 있다면 나머지 행간은 독자의 몫이다.


밤새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 파란 하늘이 있었다/ 공연히 눈물이 나왔다

- 문제술 「하늘」 전문(《시와 동화》 2023 겨울호)


  시적 주체는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공연이 눈물이 나왔다”로 귀결시킨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왜 눈물이 나왔는지 전혀 설득되지 않은 채 시가 끝났다. “파란 하늘”이라는 상징적 이미지에도 어긋난다. ‘비=눈물’의 연상 작용이라고 보더라도 이미 비가 그쳤다. 하늘도 파랗다. 역설적인 말이다. 그 안에 어떤 사유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는 알 길이 전혀 없다.

같은 호에 어린이시 「비 오는 날」이 있다.


빗방울이 주룩주룩/ 꽃이 세수한다// 풀이 하하하 웃는다//
달팽이는 느릿느릿 기어가고// 꽃과 나무는 비를 먹는다

- 손예원, 「비 오는 날」 전문(《시와 동화》 2023 겨울호)


  이 시는 비가 오는 형상이 잘 나타난다. “꽃이 세수”하고 풀잎에 숨어있던 달팽이가 느릿느릿 도망가는 모습이 살아 있다. 시적 주체는 “꽃과 나무가 비를 먹는다”라고 한다. ‘비를 맞는다’거나 ‘비를 먹고 자란다’ 라

고 말하지 않는다. 비를 맞는 것은 자신은 원하지 않는데 비가 내리는 것이고 비를 먹는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이는 생육 때문에도 그렇다. 그러므로 비를 먹는다는 말에는 ‘비를 먹고 자랄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풀도 비가 오고 나면 성큼 자랄 것이니 “하하하” 웃을 수밖에 없다. 이 시에서 “하하하” 의성어는 시 전체를 밝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밝고 생동감이 느껴지니 마치 비가 오는 광경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반대로 박미영의 「행복의 소리」(《시와 동화》 2023 겨울호)는 이렇게 노래한다. 봄에는 “자근, 자근/ 대청소하고 누워 계신 엄마 허리 밟지요.”라고 말이다.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가? 과연 행복의 소리인가? 대청소를 하고 피곤한 엄마의 허리를 주물러 드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겠지만 위의 연에서 물웅덩이와 단풍, 함박눈을 밟는 것과 엄마의 허리가 “밟다”와 같은 위치에 놓인다는 것은 불편한 표현이다.

  아이들도 어른들의 일이 힘들고 고단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이 동심을 모른다. 1980년대 발표된 제해만의 「어른들은 모르셔」라는 동시를 떠올려 보자.


엄마,/ 제비가 왔어요.// 엄마는 들은 척도 않고/ 빨래를 하십니다.//
아빠,/ 새싹이 나왔어요.// 아빠도 들은 척 않고/ 비질을 하십니다.//
어른들은 정말 모르셔/ 말다툼이나 하시고/ 돈 걱정이나 하시고,//
할머니,/ 여기 꽃이 웃어요/ 빙그레 웃어요,//
- 무슨 소리냐?/ 꽃이 웃다니!//
정말 어른들은 모르셔/ 꽃이 웃는 것도/ 모르시나 봐.

- 제해만, 「어른들은 모르셔요」 전문(『어른들은 모르셔요』, 1988)


  일상에 지친 어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제비가 날아오고 새싹이 나오고 꽃이 피는 것이 어른들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돈 걱정하며 사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심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게다가 꽃이 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꽃이 빙그레 웃는 것까지 본다. 동심의 봄은 이렇게 온다. 그렇다고 이 시에서 어른들의 일상이나 고뇌가 없는 것이 아니다. 고단한 일상과 “돈 걱정”하는 어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심의 봄은 현실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제비가 오고, 새싹이 나오고, 꽃이 피면서 온다. 이 봄은 고단한 현실보다 우위에 있다. 모르는 것은 어른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꽃이 웃는 것”을 보는 아이다. ‘핀다’는 것을 넘어 “웃어요”라고 한다. 이는 초월적인 상상이다. 그리고 이 사유는 고단한 어른들에게 ‘웃으세요’라고 말하는 위로이기도 하다.

  지구의 하루하루는 전쟁과 기아, 전염병과 천재지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들로 점철되어 있다.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체감하는 현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이들이라고 이 지독한 위험들을 감지하지 못할까?

  아동문학이 태동되던 근대기는 나라를 걱정하는 구국의 염원들이 아동에 대한 인식변화를 모색하였고, 다양한 아동문학 장르를 만들었다. 동시 또한 해방과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동요, 동시, 동시조와 동화시까지 장르 영역을 확산시켜 왔다. 근대 이전만 해도 ‘아해놈, 애 녀석’이라며 인격적인 대우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휴대폰과 컴퓨터 세대인 ‘포노 사피엔스’, ‘테크노 사피엔스’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휴대폰과 컴퓨터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기성세대보다 더 빠르게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이해하며 사유한다. 동시문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상황을 숙지하고 시대적 요구를 감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의 동시들을 살펴보며 함께 고민해 봐도 좋을 것이다.



곰삭아 단맛을 내는 소재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동시의 단골 소재다. 어린이들에게는 조부모 세대는 일상에 바쁜 부모 세대보다 느슨한 관계에 있으므로 그 품이 넓고 특별하다.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이들의 혜안과 지혜는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까지 사물의 이치와 삶의 방식에 눈뜨게 한다. 반면 고집스럽기까지 한 노인의 말과 행동은 어린이들에게는 다소 기이하게 보이기도 하여 웃음을 유발하게도 한다. 각 세대마다 생각도, 삶의 모습도 다르지만 이런 다양한 경험들 속에서 어린이들의 공감대가 커지고 가족애를 느끼며 자라게 된다.


창고에 들어온 쥐를 살살 꼬드겨/ 백 마리도 넘게 잡은 다음/
밤 밭에 풀어 주셨다//
시장에 나온 미꾸라지를/ 천 마리도 넘게 사서/
앞 냇물에 놓아 주셨다//
날이 가문 날엔 조밥을 지어/ 물고기 밥으로 던져주셨다//
죽순같이 기운차게 올라오는 싹은/ 꺾거나 밟지 않으셨다//
남들이 웃어도 끄덕 안 하셨다//
구십 평생 살아온 대로/ 올해도/ 그렇게 사셨다

- 김봄희, 「우리 할아버지는 올해도」 전문(《열린아동문학》 2023 겨울호)


  할아버지들은 자신이 겪은 일화를 영웅담처럼 들려준다. 작품 속 할아버지가 “쥐를 살살 꼬드겨” 잡아 “밤 밭에 풀어 주셨다”거나 “미꾸라지를 천 마리도 넘게 사서/ 앞 냇물에 놓아 주셨다” 등의 일화는 분명 과장되었다. 모든 영웅담이 그러하듯 다소 과장되어야 보다 흥미진진하다. 할아버지는 마치 영웅이 된 듯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한다. 그럼에도 “싹을 꺾거나 밟지 않으셨다”거나 “남들이 웃어도 끄떡 안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실상 현대인들은 자주 흔들린다. 작은 이익을 쫓아가기 바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 애쓴다. 빠르게 변화되고 있는 사회가 그것을 부추기기도 하고,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기에 할아버지의 과장되고 완고한 삶의 방식이 마냥 우습지만은 않다.

  전통적 관습과 방식은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삶의 방식과 주택 공간의 변화가 주된 이유이지만, 핵가족화도 한 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꼿꼿한 정신은 민족의 정신과 닿아 있기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전통과 변화는 이렇듯 늘 양가적이다.


“에헴. 고놈! 또 왔냐!”//
주말에 놀러갈 때마다/ 한 번도 우릴 보고/ 웃지 않는 할아버지//
그래도 난 알아요!/ 뒷짐 진 할아버지 손 밑에서/
달랑달랑 반갑게 흔드는/ 할아버지 검정 꼬리//
오늘은 고 검정 봉다리 꼬리 안에/ 뭐가 들었을까요?


- 홍재현, 「할아버지 검정 꼬리」 전문(《열린아동문학》 2023 겨울호)


  체면을 중시하는 말투와 무표정한 모습에서 전형적인 옛날 할아버지의 모습이 얼비친다. 손자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검정 봉다리’로 대체되어 생동감을 준다. 할아버지가 걸을 때마다 “손 밑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검정 봉다리의 의미를 아이들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이 모양새가 마치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드는 모습으로 연상되기에 할아버지와 ‘나’의 거리는 바짝 다가와 있다.고 “검정 봉다리” 안에는 ‘나’가 좋아하는 것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꼬리=검정 봉다리’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시적 도구가 된다. 어린이들은 말로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표정, 때로는 교감만으로도 의미를 읽고 사유한다. 이 시의 주체인 ‘나’는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검정 봉다리로 할아버지의 애정을 알아차린다.

  세대가 다르고 소통방식이 달라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런 공감적 능력은 아주 오래전의 인류로부터 전수받은 삶의 방식이며 낡지만 익숙한 것이고, 또 오래 지속될 불변의 이치 같은 것이다.


치매 걸린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기억이 하나씩 빠져 있다//
뻥 뚫린 자리/ 점점 많아지자/ 엄마도 아빠도 불안해하는데//
아슬아슬 지탱하는/ 할머니의 남은 기억들/ 언제까지 버텨줄까……//
하나 또 빠져나가려는지/ 기우뚱, 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얼른 손잡아드리는 아빠를/ 빤히 쳐다보시던 할머니,/
“학교 잘 다녀왔냐?”//
이번엔 구멍이 크나 보다/ 아빠가 할머니를 안아드린다.

- 안오일, 「젠가 놀이」 전문(《동시발전소》 2023 겨울호)


  치매 걸린 할머니의 기억이 젠가 놀이를 하듯 아슬아슬하다. 치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아이들에게 ‘젠가 놀이’의 비유는 아주 절묘하다. ‘불안’과 ‘눈동자의 흔들림’, 그리고 기억이 빠져나간 ‘구멍’은 치매환자의 불안정한 모습을 견인하고, ‘젠가놀이’를 하는 모습을 연상해 볼 때, 이 둘은 “기우뚱”이라는 부사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특히 “할머니를 안아”드리는 아빠의 모습은 혈연공동체와 가족애를 넘어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한국 사회에서 치매노인의 증가와 가족 돌봄 문제는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었다. 효를 중요시하는 통념 때문에 이는 종종 가족 분쟁으로 이어져 어린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린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다. 조부모와 손자의 관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당수 변화되었다. 조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 가정이 대부분인 것을 감안한다면 ‘부양’과 ‘봉양’에 대한 인식은 물론, ‘효’에 대한 의미도 상당히 변화되었다. 삶과 죽음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화두이기에 노인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선은 어린이들의 삶에 바탕이 되어 줄 것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은 어찌할 것인가


  인터넷의 발달로 지구촌의 일상이 공유되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보다 폭넓게 경험할 수 있기에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다양하고 넓어지고, 간단한 기계 조작이나 터치만으로도 사람의 일을 기계가 대신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기술 혁신을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가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쾌적한 삶과 편의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파괴를 야기했다. 더욱이 인공지능은 인간이 하는 많은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사람이 설 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인구 감소로 이어지고 이렇게 파생된 문제들은 언어의 소멸과 축소로까지 이어진다. 유네스코의 발표에 따르면 21세기 말에는 세계 언어의 절반 이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지난주 국어사전에서 지워진 낱말인 ‘매미’에 이어 ‘딸기’도 지워진다는 소식입니다. 국립 멸종국어원에 따르면 ‘딸기’가 전 세계에서 지난 50년 간 자라지 않아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 낱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주 멸종낱말위원회에서 ‘동시’를 사전에서 제외하는 회의가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제 앞으로 멸종된 낱말들은 한글박물관에전시될 예정입니다.// 이상 멸종 뉴스였습니다.


- 서 한, 「멸종 낱말」 전문(《동시마중》 2024, 1·2월호)


  언어는 행동이며 실재다. 또한 언어는 실재에 의해 제한되기도 한다. 언어는 인간의 기호 체계가 만든 것이기도 하지만 사유를 시작하도록 허용한다. 곧 사유의 출발점이다. 언어 안에는 전제와 욕망에 대한 물음이

스며있다. 실재한다는 것은 단지 실질적 존재만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사건을 포함한다. 실존은 “목적과 해답에 의해 규정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는 새로운 문제를 구성함으로써 가능하다.

  박물관은 희귀하거나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다. 낱말이 지워진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물음이 지워진다는 것이며 인간 사유 체계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사유한다. 만약 실존의 사유가 없다면 멸종은 자명한 일이다. ‘매미’와 ‘딸기’는 파괴되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매미는 ‘매미’라는 언어가 있기에 실존한다. ‘딸기’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실재하는 것의 사라짐이다. 즉,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언어로 쌓아 온 지혜와 역사, 문화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일”이다.


가뭄/ 뼈가 드러난 듯 그 마른 땅에/ 비가 호복하게 내렸다.//
물의 뼈처럼/ 드러나 있던 바닥/ 살 차오르듯//
시나브로 차오르더니/ 찰랑찰랑 호수를 채웠다//
손 내밀면 닿을 듯 물이 차오른다.//
호미 든 손 뒷짐 지고/ 바라보던 할머니//
“오지다!”
- 양인숙, 「오지다」 전문(《동시발전소》 2023 겨울호)


  “오지다”라는 말은 어학사전에 따르면 “허술한 데가 없이 매우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라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올지다”라는 말도 있다. 경상도 방언으로는 ‘그것 참 고소하다’라는 다소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 ‘오지다’는 표준어다.

언어가 가진 요소들은 늘 유연한 상태로 변화하기에 사회적 요건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최신 유행하는 신조어들이 그에 속한다. 언어는 의사전

달의 도구이지만 궁극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하므로 표현이나 이해의 편

의성에 맞추어 변화한다.

  언어의 소멸 위험도는 언어 사용 수가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세대에 있다고 한다. 가령 제주어와 같이 젊은 세대의 전수 없이 노인 인구만 사용하는 언어 같은 경우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살릴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어린이이며, 그와 연관하여 문학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문학작품은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하기 때문이다. 언어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사라진 한 단어에 대한 문제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보다 풍부한 언어를 구축하고 전수해 나가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언어가 이러하다면 현대의 어린이들에게 당면한 다음의 문제들은 어떠한가.


나 홀로 입학입니다./ 나 홀로 소풍입니다./ 나 홀로 3학년입니다.//
꼴찌가 없습니다./ 이등이 없습니다./
반장, 부반장, 청소 당번, 급식 당번, 우유 당번이 같은 사람입니다.
(…)
너와 나 사이가 없습니다./ 사이가 없으니까/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이 없습니다.//
바람과 어깨동무합니다./ 내 그림자와 사이좋게 지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사이좋게 지냅니다.//
일등 하는 게 지겹습니다.


- 이정록, 「나 홀로 학교」 부분(《동시마중》 2024, 1·2월호)


  ‘나 홀로’ 있으니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다. ‘반장, 부반장’이 될 수도 있고 ‘일등’도 도맡아 한다. 친구와 싸울 일도 없다. ‘나 홀로 학교’는 ‘끼리끼리’ 모여 ‘왕따’와 ‘동네북’을 만드는 일도 없으니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럼에도 시적 주체는 “일등 하는 게 지겹”다고 한다. 일등을 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대상과의 경쟁을 통해 도달할 때 희열을 느낀다. 경쟁은 삶을 피폐하게도 하지만 때로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삶의 가치는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때 생성된다. 그러나 혼자의 삶은 그렇지 않다. 이 상황이 시적 상상만이라면 좋겠지만 출산율 저하 여파를 예측할 때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나 홀로 학교」는 지방 학교의 존폐 문제를 넘어 우리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문제를 내보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고민할 때 동시 또한 미래지향적인 문학이 된다. 낡은 것들을 버린다고 삶이 풍요로워지겠는가. 새로운 것이라고 모두 좋겠는가. 결국 인간 삶의 가치는 낡았다고 믿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반추해 보라.

  최근 동시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들 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상황을 양적인 문제보다 질적인 문제로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 즉, 문학성의 고취이다. 이 문제에는 현실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소재 선택과 시어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심은 어디에도 어떤 상황에도 있다. 보다 고민하고 숙고하여 동심을 발견하고 사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동시의 책무 중 하나일 것이다.

  • 1)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530쪽.
  • 2)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307쪽.
  • 3) 김이구, 『어린이 문학을 보는 시각』, 창비, 2018,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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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숙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배옥주,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 ·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

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월간 현대시 김효숙 문화 보충물문화 텍스트문화 감수성그림기후 위기남성-언어성 착취몸의 식민지다중 감각시의 비판적 기능 2025
전병호 동시로 읽는 동시 역사, 우리의 삶 2

<들어가며> 1908년 <소년> 창간호에 실린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한국 동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어느덧 한국 동시의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었다. 한국 동시가 걸어온 길을 찬찬히 돌아보니, 각 시대의 하늘마다 별이 되어 빛나는 작품이 많다. 이것들은 모두 앞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동시인들이 내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남겨준 귀중한 정신문화유산이다. 각 시대를 살다 간 시인들을 떠올리며 대표 작품을 음미해 본다. 비록 어린이를 독자로 쓴 동시이지만 어느 작품인들 지난한 세월을 이겨내고 살아온 민족의 삶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래서 한 편 한 편이 그 무엇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동시 작품이 많다고 해도 우리가 자꾸 불러내고 되새기지 않으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세대를 뛰어넘는 민족의 노래가 되어 오래 기억되고, 널리 불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920년대 동시를 순차적으로 소개한다. 창작 동기, 사연, 역사적 사실 등을 곁들여 해설을 덧붙인 까닭은 동시가 독자의 마음에 각인되어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더 많은 동시 작품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다만 아쉽다. □ 1923년 청개구리 백기만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장마 때에 슬프게 운다. 장마 때에 목이 아프도록 운다. 청개구리는 불효한 자식이었다. 어머니의 시키시는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개구리가 ‘오늘은 산에 가서 놀아라’ 하면 청개구리는 반드시 물에 가서 놀았었다. 또 ‘물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기어이 산으로만 갔었느니라. 어머니 청개구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죽을 때에, ‘나를 강가에 묻어라’ 하였다. - 이 말은 ‘산에 묻어라’는 말이어니. 청개구리는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볼 때, 조고마한 가슴이 슬픔에 무너졌었다. 넓고 넓은 천지에 다시는 그를 사랑하여 줄 이가 없었음이다. 그때에 청개구리는 어머니의 생전에 한 말씀도 들어보지 못하였음을 뉘우쳤다. 그러나 그것은 영영 돌아올 줄을 모르는 지난 일이다. 그는 어린 가슴에 슬픔과 아픔을 안고, 그의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을 쫓아 어머니의 시체를 물 맑은 강가에, 떨어지는 눈물과 한가지로 묻었더라. 그 뒤에 장마 때가 될 때마다, 그는 어머니의 무덤을 생각한다. 싯뻘건 황토물이 넘어 어머니의 시체를 띄워갈까 염려이다. 그리하야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비 맞은 나뭇잎에서 몸을 적시우면서 어머니를 생각하고는, 슬프게 슬프게 소리쳐 우느니라. 아이들아. 너희들이 일찍이 장마비 오는 날, 또는 밤 청개구리의 우는 슬픈 노래에, 귀를 기우려들어본 적이 있느냐. (이것은 우리의 어떤 지방에 전해오는 아이들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청개구리… 나라를 빼앗기고 슬퍼 통곡하는 우리 민족으로 비유 백기만의 「청개구리」는 손진태의 「별똥」, 「달」과 함께 <금성> 1923년 11월호에 발표되었다. 한국동시문학사에서 동시 장르명을 표기해서 발표한 첫 작품이다. 백기만은 친구인 이상화와 함께 대구에서 3·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등 항일저항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이상화가 죽은 뒤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 시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섰고,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하여 『상화와 고월』을 간행했다. 그의 시 세계는 신선한 감각과 신비주의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산문적인 호흡을 내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1998)에 의하면 「청개구리」는 일제강점기에 나라 빼앗긴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통곡하듯 노래하는 시로 소개한다. 어머니 청개구리가 살아계셨을 때, 어머니 청개구리가 시키는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불효자였던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이후 장마 때마다 슬피 우는 것을 나라 빼앗긴 쓰라린 슬픔과 후회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장마를 일제의 탄압으로 보고, 청개구리를 나라를 빼앗긴 후 슬퍼하고 통곡하는 우리 민족으로 묘사했다. “특히 끝의 두 연은 조국 잃은 후회와 일제의 횡포에 조국을 영원히 상실할까 염려하며 통곡하는 민족의 발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청개구리」에 최초로 동시라는 장르명은 밝혀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는 전 국민 동요 개창 시대라고 할 만큼 창가와 계몽 동요 그리고 7·5조, 4·4조 등 정형적 리듬을 차용한 동요시가 대유행하던 때였다. 「청개구리」가 비록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쓴 작품이기는 하지만 글자수를 맞춰 쓴 동요라고 할 수 없어 동시라고 새롭게 표기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더구나 전래동화를 소재로 차용한 산문시이기에 더 그렇다. ● 백기만(1902 ~ 1967). 호는 목우(牧牛) 필명 백웅(白熊)·흰곰.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고등보통학교와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양주동·유엽·이장희 등과 『금성』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 1923년 별똥 손진태 어머니, 제게 말하셨지요. 어젯밤에 별똥이 떨어졌을 때, ‘저 별똥을 먹으면 죽잖는다’고. 새벽에 나 혼자 앞산 넘어로 그 별똥을 주으러 갔다 왔어요.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어요 어머니, 별똥이 어찌 생겼소? 영원 불멸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염원… 그러나 예견된 좌절 ‘저 별똥을 먹으면 죽잖는다’고 해서 시적화자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나 앞산 넘어 별똥을 주으러 갔다. 그러나 별똥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께 별똥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고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영원 불멸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염원, 그러나 아직 준비되지 않은 자세로 열정만을 갖고 추구했기에 좌절 또 실패는 예상된 결과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아갈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해 고심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별똥」은 손진태가 백기만의 「청개구리」와 함께 <금성> 창간호(1923.11.)에 동시라고 장르명을 표기해서 발표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동시라는 장르명을 개인적인 자각에 의해 표기했다기보다는 <금성> 편집진이 협의해서 표기한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겠다. 백기만, 손진태가 양주동, 유엽, 이장희 등과 <금성> 동인으로 참여하여 발간했으니까 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표기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손진태는 <금성> 창간호(2023.11)에 동시 「별똥」, 「달」을 발표한 것 이외에 「신선 바위에서」(<금성> 2호)와 「키쓰와 포옹」, 「옵바, 인제는 그만 돌아오세요」(<금성> 3호)도 발표했다. 그러나 <금성>은 3호로 종간된다. 「별똥」과 함께 발표한 「달」도 소개한다. 「별똥」과 「달」은 1923. 10. 12 밤에 쓴 것이다. □ 1923년 달 손진태 달아 너는 몇 살 먹었니? 몇 살에 너 어머니 돌아가셨니? 나는 다섯 살에 돌아가셨다! 달아 너 혼자 어디로 가니? 이 밤중에 너 혼자 어디로 가니? 너의 집은 너의 집은 어디에 있니? 달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집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슬픔의 주체는 누구인가? 달인가? 나인가? 달은 밤하늘 높이 떠 있다. 달은 유기체가 아니라서 슬픈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시 속의 달은 슬픈 내 마음을 투사한 감정의 등가물이다. 그래서 시에 등장하는 달과 하늘에 뜬 달은 같은 달이 아니다. 즉, 시 속의 달은 내 가슴에 새롭게 뜬 나만의 슬픈 달이다. 1연에서 달은 내가 다섯 살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되고 2연에서는 밤중에 집도 없이 혼자 어디론가 가는 처연한 모습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연에서 보면 시인은 달에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달은 나와 같이 어머니가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심정적 동일체가 된다. 즉, 달은 곧 나이다. 그래서 달에게 이 밤중에 혼자 어디로 가느냐고 안타까이 묻고 또 너의 집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지극한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달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달은 집이 없기 때문이다. “삼심 년대 한국시의 두드러진 문학적 징후의 하나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극심한 고향상실의식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명백하게 그들 자신에 의해 언표되든 안 되든, 일정한 삶의 근원으로부터 뿌리가 뽑혀진 채로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이 수많은 시인들의 심정의 밑바닥에 있었다.”(김종철, 『시와 역사적 상상력』, 1978. p.11)라고 간파한 김종철의 견해가 이 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달은 시인과 감정의 등가물로써 시대적 상황과 관련지어 무엇의 상징일까 곰곰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윤극영의 「반달」처럼 달을 잃어버린 조국의 상징이라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합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 손진태(1900~1960년대). 일제강점기의 사학자, 민속학자로 더 많이 알려졌다. 1927년 와세다 대학교 법문학부를 나왔으며 해방 후에는 우리 민족사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정리했다. 그러나 후에 친일 작품을 쓴 것으로 밝혀졌고, 6·25 전쟁 중에는 납북되어 1960년대 후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간 동시먹는달팽이 전병호 백기만손진태최초동시청개구리별똥금성 2025
남기택 타자의 외연 ― 이형권론

1. 비평의 입지 문학 용어로서 비평은 작품의 뜻, 작가의 기능, 어느 작가 또는 작품의 가치를 논의하는 작업이라 정의된다. 범박하게는 문학에 관련된 일체의 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두루 쓰인다. 그 밖에 방법론에 따라 기술비평, 실천비평, 이론비평, 인상비평 등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고, 에이브럼즈의 입론대로 모방론, 존재론, 표현론, 효용론 등 관점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웰렉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으로 그 양상을 대별하였다. 요컨대 문학비평의 중요한 과제는 내재적 요소와 외재적 구조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한 후 서술 및 평가하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면밀하고도 편견 없는 관찰이 어떤 종류의 비평에서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렇다면 비평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은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비평이란 위 기준에 의거해 접근된 하나의 결과이기에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전제한다. 전제된 기준은 중층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성과 수행성을 담보하기에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메타 담론적 성격이 지닌 자체의 곤란도 분명해 보인다. 비평 행위에 내재된 ‘평가’란 한 작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인식하거나 그 가치의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20세기 이래의 이론적 지평에 따르면 어느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활동과 사회적·제도적 관행을 통한 지속적 작용이다. 평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 활동과 관행에 의해 생산되는 효과에 가깝다. 어떤 문학작품의 해석과 그 가치에 대한 경험은 상호 의존적이며, 양자는 특정한 가정 혹은 기대를 따른다.(프랭크 랜트리키아·토마스 맥로린 공편, 『문학 연구를 위한 비평용어』) 결국 비평 행위의 관건은 텍스트 구조는 물론 이를 둘러싼 문학사회학적 관계를 수렴하는 평론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느 비평세계에 대한 판단은 그 평론가의 입지 기반에 대한 재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형권 비평세계는 1998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에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 경기도 안성 출신인 그는 충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때 지역의 중등 강단에 몸담았다. 이어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년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과정 중 평론 쓰기를 병행하던 그였기에 제도적 등단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제출한 원고는 충분한 내공을 체현하고 있었다. 당시 심사평은 세기말 위기의식에 빠진 시가 영상문화에 대응하는 현장을 균형적 감각으로 다가선 비평적 시각에 주목하였다.(『현대시』 1998년 7월호)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은 1990년대 이후 일군의 시인들을 다룬다. 이형권은 장르 의식의 확산과 초월, 도시적 일상성, 우울한 내면세계의 고백, 대중문화의 수용 등이 전통적 시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이라고 보았다. 그중 영상예술의 수용 및 변주를 시적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우로 이승하의 사진시, 하재봉의 컴퓨터시, 유하의 영화시 등을 꼽고, 그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였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개척하려는 이들 노력은 향후 시적 긴장의 영역을 개방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반면 대상에 대한 내적 인식의 진정성 차원은 경계의 대상이다. 이들이 예증하는 영상매체의 시적 전유가 문화사적 의미나 역사적 전망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은 향후 지난하게 펼쳐질 장르의 길항을 전조하기에 충분한 비전이었다. 이처럼 이형권은 문학의 본령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그 외부, 어쩌면 문학 장르의 타자성에 대한 시대적 응전 감각을 출발 단계부터 벼리어 온 비평가에 해당된다. 대개 이러한―문학의 장르론에 관한―입장이 취하는 포즈는 이론적 언어로의 무장이다. 문학이라는 범주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한 모더니티의 공재성(共在性)이 한국문학 연구에 있어서 주된 관성으로 작동되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 영역을 포함하여 문학은 ‘literature’의 역어이자 제도적 산물로 생성된 것이었고, 이론적 내면화는 한국문학의 정체성 설정을 위한 필연의 수순이기도 했다. 한편 이형권 비평의 경우 이론에의 경사로부터 의도적 거리를 취한다. 이는 여러 지면에서 반복되어 온 비평적 입장을 통해 확인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은 시의 정서적 깊이와 높이를 확보하여 시적 감동을 전문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넓히는 일”(『공감의 시학』 서문)이라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에게는 문학의 타자라는 분명한 성찰 대상이, 그리고 그 존재 의미를 구명하는 언어는 현학적 외장이 아닌 문학 본연의 공감과 소통 기제라는 입지가 초기 비평 단계로부터 각인되어 있었다. 2. 문학의 타자, 타자의 문학 이형권 비평세계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2006), 『발명되는 감각들』(2011), 『공감의 시학』(2017) 등의 평론집으로 집약되어 왔다. 대학 강단에서의 교육을 병행하고 있기에 연구서 성격의 다양한 성과물이 평론집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예지 『너머』, 『시와 시학』, 『시작』, 『애지』 등의 편집위원 역할이 주요한 문단 경력으로 꼽힌다. 꾸준한 연구 작업과 더불어 실천적 문단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외현이다. 오늘날 비평 행위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역학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구조는 비단 한국문단만의 실정이 아니다. 일부 비평가는 대학 교원으로 정착한 이후 평단의 참여에는 소원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형권은 중부권 거점 대학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서울과 지역을 넘나들며 문단 활동을 이어 온 실천적 사례라 평가할 만하다. 제도적 성과도 다양하다. 그의 저술 중 『공감의 시학』은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상의 대상 평론집이 되었다. 당시 심사평은 이형권 평론이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며, 한국 시문학이 마주하는 핵심 문제에 대해 정공법의 언어로 다가서는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그는 이때 자신의 문학 여정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자전을 적었다. 나의 대표적인 평론집은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평론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독자와의 공감을 지향해 온 글쓰기의 결과물들이다. 가능하면 관념이나 이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혹은 관념과 이론마저도 문학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다. 나는 지금도 가장 어려운 작품도 가장 쉽게 비평할 수 있는 평론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무엇보다도 다른 비평가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평 언어, 나만의 비평 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물음표로 출발하여 느낌표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심미적 개성과 인간적 진실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안성천에서 자란, 내 영혼의 자서전」, 『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이 회고에서도 비평적 입지의 방법론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표제로 내건 공감의 가치가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강조되었다. 독자적 언어와 이론을 향한 포부는 일견 무모하게도 들린다. 어느 장르보다 기존 시학적 지평을 전제로 성립되는 비평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와 이론의 신생은 비평보다는 또 다른 창작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형권 비평의 시각이 이른바 비평과 창작의 이분법에 근거하지 않은, 양방향적 이해를 위한 의사소통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형권의 시학적 탐구는 『미주 한인 시문학사 : 1905∼1999』(2020)라는 중요한 성과이자 비평적 변곡점을 낳았다. 그는 이 연구서로 인해 2021년 김준오시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형권 비평은 출발 단계부터 시 장르의 타자성 문제를 다루었다. 타자라는 주제는 이형권 비평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로 어어져 왔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서울 이외의 주변부 지역 문학도 일종의 타자”이며 “국외의 한인 문학도 타자의 문학”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곧 “다양성의 문학과 확장성의 문학”을 의미하기에 앞으로도 추구해 나갈 것이라 다짐하였다.(『신생』 2021년 겨울호) 『미주 한인 시문학사』는 한국문단 내부의 타자성 영역을 최대 이민국이자 패권국이라는 외부로 확장하여 모색한 결과물이라 하겠다. 2012년 상반기 LA에서의 방문교수 경험은 이형권 시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문학의 경계에 관한 비평적 모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평론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이 주목된다. 이 글은 디아스포라의 맥락 속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시의 형상화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문학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과 심상지리를 구성하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주 한인에게 모국어는 도구가 아닌 생존을 환기하는 의사소통적 매개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현전하는 물성이자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에 비견된다. 이 글에서 주요 논거로 제시된 김병현, 배정웅, 오문강 등의 작품들은 디아스포라의 난관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의 동일시 욕망, 이주국 지리 환경과의 정서적 공감, 새로운 삶의 개척 의지 등을 재현한다. 이들 작품에 사용된 모국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실존의 영역을 증거하는 시적 형상인 것이다. 이 같은 논의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쟁점 역시 분명하다. 대표적 문제가 이주국 한인문단의 분파적 속성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포함하여, 서정적 언어 구성물로서의 시작 경향이 주류 흐름으로 반복되는 현상은 경계의 대상이다. 치밀한 제도적 기반이 전제되기 어렵다는 게 난관이다. 긴장 없는 자족적 시스템이 매너리즘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실정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살아가는 후속 세대의 중층적 문학 환경 역시 문제적이다. 이런 배경 위에 모국어의 소멸 위기이자 새로운 문학 언어의 개방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이 양립한다. 이형권은 이중언어의 문제 혹은 현지어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국문학의 매개로서 한국어라는 기능적 판단 외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전제로서의 언어관에 입각한 견해로 보인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언으로 마무리된다. 한인이 현지어로 창작한 문학작품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인 문학은 한글 표기를 전제로 하여 그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한인 문학에서 한글 표현과 현지어 표현을 모두 용인하는 것이다. 곤혹스럽지만, 이에 대한 선택의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국외에서 뿌린 한인 문학의 씨앗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인 혹은 한인의 문화가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나가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훗날 그것이 비록 과거형이 될지라도, 발해의 역사가 분명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한인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 『시작』 2022년 여름호) 물리적 경계 간의 거리가 해체된 오늘날에 있어서 ‘영어’로 상징되는 글로벌 의사소통 기호는 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의 위상은 선험적 가치가 되었다. 모국어라는 숙주의 해체는 디아스포라 같은 문학적 타자가 변주하는 또 다른 생성의 선을 개방할 것이다. 이형권 평론은 디아스포라 시인이 모국어를 통해 존재를 형상화하는 양상을 분류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그의 제언은 문학의 타자성을 제도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방안, 다양한 언어와 한국문학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3. 또 다른 감각 혹은 환상 이형권이 조명하는 비평적 타자의 영역은 장르적 다양성이나 문단 경계의 확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학적 상상력의 기반을 재고하려는 이론적 모색 역시 초기 단계부터 지속되어 온 탐구 분야였다. 이와 관련하여 부각되는 주제가 이른바 환상의 역학이다. 환상의 상상력을 집중해서 다룬 평론으로 「발명되는 감각들―현대시와 환상시학」(『발명되는 감각들』)이 있다. 이 글은 비평가 스스로에게도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자리한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지면에서 자신의 대표 평론으로 이 글을 꼽았다. 「발명되는 감각들」은 현대시의 또 다른 주류 범주에 환상의 시를 올려놓은 동력으로 21세기 초의 젊은 시인군을 예시한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혹은 자의식적 시 쓰기에서 벗어나, 환상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표출하는 동시에 시적 형식의 재구를 시도하였다. 환상은 단순한 도피나 유희가 아닌, 미적 전복과 시적 실험의 전략적 기제인 것이다. 이형권은 환상이 현실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요 결 다른 감각을 창조하는 에너지라고 보았다. 김행숙(귀신), 문혜진(메두사), 김민정(아이), 유형진(모니터), 장석원(낙타), 이민하(마네팅) 등의 도발적 이미지를 대표적인 환상의 장치로 거론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환상들이 현실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미적 전유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감동으로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면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된 시편들의 수용적 거리감은 실험적 외장의 포즈에 비례한다. 일부 작품의 경우 감각의 발명보다는 소재주의적 실험 경향이 짙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이형권 역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나 문학적 진정성의 결여를 경계하였다. 이는 환상의 시학이 진정한 문학적 성취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파격에 수반되는 사유의 깊이를 구조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어서 이 글은 환상의 상상력이 폐쇄성과 섹트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역설한다. 환상은 기호로 재현될 수 없는 실재에 다가서기 위한 언어적 우회로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서정성이나 진정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독자의 기대지평에 어떻게 관계되고 소통하는지의 문제이다. 문학의 경계를 재구성하려는 이형권의 비평적 모색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최근 사례로서 「리진: 로씨아 땅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하늘」(『시작』 2024년 겨울호)은 재러 시인 리진의 경우를 조명한다. 북한 정권에 저항하며 무국적자로 소련에서 살아가게 된 배경, 그의 시가 조국과 언어 정체성을 고수했던 흔적을 개관해 주었다. 이형권은 리진 시의 본질을 우리 언어에 대한 사랑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체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리진의 시적 형상이 재러 고려인들의 보편적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관찰을 담고 있으며, 언어가 곧 민족을 잇는 정신적 뿌리라는 기존의 모국어 인식과도 연동된다.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실존의 기반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모국어는 실체 없는 상징에 머물 수도 있다. 리진의 시가 제한된 독자층에만 읽혔다는 사실은 언어의 고립성과 함께 시적 단절을 지시한다. 이형권 비평이 집중적으로 수렴해 온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현황 속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형권 비평을 포함한 한국문학의 제도는 보다 정치한 장르론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또 다른 환상의 영역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 이형권 비평이 전유하고 있는 시학적 개념으로서의 환상은 우리 시대의 자유를 사유하는 철학적 기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젝의 현학적 분석에 따르면 환상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그 논리를 보면, 무의식은 매끄러운 인과적 연결이 아니라 트라우마적 침입에서 비롯된 충격과 잔여이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증상(symptoms)’은 트라우마적 단절에 대처하는 방식이요, 그런 단절을 가리기 위한 형성물로 ‘환상(fantasy)’이 작동한다. 이처럼 지젝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자유 의지를 분석하는 기제로서 환상을 전유하고 있다. 현대의 이성은 실재와 같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의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자유가 존재 방식의 근원적 가능성일 때에도, 자아는 결정된 존재일지언정 우리는 자유로운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타자의 균열에 공명하는 무언가로서 미친 도박이자 자기 자신에 선행하는 위태로운 도약이 된다.(지젝, 『자유, 치유할 수 없는 질병』) 결국 주체는 그 자체가 객관화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 간극을 지양하고, 필연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환상은 비롯된다. 동일성의 장르로서 시 역시 동종의 운명 위에 놓여 있다. 이 위태로운 서정시의 미래를 보듬어 공동체의 담론으로 이끈 양태가 곧 이형권 비평이 천착해 온 타자의 외연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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