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지션 2024년 가을호(제47호)
콘크리트 디스토피아 ─ 김유섭 『비보이』(포지션, 2023)
문학작품을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면 문단은 거대한 생태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에 시작된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논의, 2010년 중반부터 펼쳐진 참사와 애도의 기록, 2010년대 후반에 시작된 퀴어와 페미니즘을 거쳐 이제 2020년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포스트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주요 논의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들이다. 문학장의 거대한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군소 시인들 역시 다양한 곳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잊기 쉽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발간된 김유섭의 시집을 보는 것은 잊힌 서정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조명 따위 사라진 지 오래지만/어금니 악물고 주머니 속에 감춰둔 것”(「복서」)을 쥐고 걸어가려는 시인의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김유섭의 세 번째 시집 『비보이』를 마주하면 높이 솟은 건물들 사이에서 고집스레 건물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듯하다. 투박한 손에 억센 머리칼을 가진 흙냄새가 나는 사람, 누가 보아도 자연과 어울릴 듯한 사람 말이다. 그래서인지 시의 화자가 도시에 적응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시인은 “콘크리트 밀림”(「태엽 사람」)이나 “콘크리트 무한 제국”(「모래와 바람의 전언」), “콘크리트 숲속”(「날마다 기적」), “반지하 콘크리트 핏빛 행성”(「얼음 행성」)처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화자를 밀어 넣는다. 때문에 시의 화자는 어울리지 않는 관계를 맺어보고(「AI 사랑」), 도시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가짜 별을 꺼내 보기도 하지만(“별인 척,/지갑에서 발광다이오드 조명을 꺼낸다.” - 「발광다이오드 별」) 화자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한 층씩 엘리베이터가 올라갈 때마다
피멍 소리 들린다고 울먹이던 시인은 재빨리 잊혔다.
겹겹이 쌓아 올린 빌딩이
사람 뼈와 살점이라는 소문이 썩어 코를 찔렀다.
눈도 귀도 지워진
기괴한 울음에 뒤덮인 끈적이는 도시
지친 주검을 태우는 화장장
수직 굴뚝 위로 잿빛 스카프 연기가 멈추지 않고 솟아올랐다.
누군가 피 울음 비명을 지르면
우아한 손길,
사방에서 황금빛 솜사탕 공기가 달려들어
여린 숨통을 틀어막았다.
번쩍이는 꿈
아름다운 날이라는 광고음악만 들려왔다.
바퀴 없는 마차를 끌고 달리는
형광색 혀를 길게 빼문 24시 사람들,
잠들지 않으려고
주먹으로 제 발등을 내리찍으며 헉헉거렸다.
- 「달콤한 공기의 세계」 전문
그렇다면 도시에 대한 시인의 부정적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위의 시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시인에게 도시는 사람들의 뼈와 살로 쌓아 올린 곳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빌딩들을 세운 것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도시에서의 삶을 향유할 수 없다. 정확하게는 계급에 상관없이 김유섭의 시에서 모든 사람들은 착취되고 버려질 뿐이다. 사람들은 착실하게 빌딩을 세우고 늘려갔지만 ‘사람 뼈와 살점’으로 빌딩이 세워졌다는 소문이나 ‘기괴한 울음’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 사람이 형체를 유지할 수 없는 곳, 곳곳에 죽은 자 또는 고통에 가득한 자를 만들어 내는 곳이 시인이 인식하는 세계이며 도시는 사람을 계속해서 대체하고 소진 시키며 자신의 몸집을 불려 나가는 거대한 권력이다.
권력이 작동하는 세계는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관심조차 가질 수 없게 만든다. 1연에서 등장하는 화자의 동료 시인은 예민한 감각으로 사람들의 ‘피멍 소리’를 감지하지만, 세계는 동료 시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도태시킴으로써 세계 밖으로 밀려나게 한다. 화자 역시 도시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지만 도시에 의해 제거되는 동료를 구해내지 못할 정도로 도시의 권력은 강력하게 작동한다. 주목해볼 것은 거대권력인 도시가 사람들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도시는 “황금빛 솜사탕”처럼 화려하고 달콤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매혹하지만, 도시의 법에 위배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질식시키는 잔인함을 내포하고 있다. 도시의 권력이 촘촘하고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이다. 특히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달콤한 공기는 도시의 규율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도시에 오점을 남길 법한 울음을 발견하는 즉시 그를 효과적으로 배제 시킨다. 이러한 도시의 시스템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저항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거나, “형광색 혀를 길게 빼”내고 빌딩을 늘려가는 재료로써 착취되느냐일 뿐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에 종속되어 말 대신 마차를 끌고, 죽지 않기 위해 발등을 내리찍으며 달리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화자는 “핫도그 하나로 견딜 오후를 준비”하며 “싸구려 커피 찾아가는”(「날마다 기적」) 등 값싼 유희를 통해 삶을 연명하면서 유토피아로 향할 미래를 꿈꾼다. “바위 밑에 뿌리 내린 꽃, 새소리”, “춤추는 햇살”, “바람의 날갯짓”, “풀잎 물결 들판”(「타임 루프」)이 가득한 곳을 말이다.
놈들이 구역을 침범해왔다.
죽음은 언제나
빈틈을 노리며 등 뒤에 붙어 서성인다.
돌아설 곳 없는 뒷골목
어둠 섞인 식은땀에 숨구멍까지 짓밟혀 본
풀잎은 안다.
밤의 도시를 휘감아
사방으로 뻗어가는 콘크리트 지평선이 절벽이라는 사실을
몰려오는 비린 피 냄새가 가르친다.
퉤, 씹다가 뱉어버린 껌 조각으로
번들거리는 악어가죽 구둣발에 짓이겨지지 않으려면
부서져 흩날리리라
살 부스러기조차 남길 것 없는 생
움켜쥔 맨주먹
뼈마디 속으로 겨울비가 달려든다.
-「풀잎 전쟁」 전문
하지만 불행히도 이 세계가 건재하는 한 화자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세계는 화자가 유토피아를 찾도록 떠나보내지도 않으며,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도록 두지도 않고, 화자를 병든 세계에 가두고 있었으나 세계를 향한 저항을 멈추지 않는 화자를 보고 그를 축출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시집이 진행될수록 화자가 무언가에 쫓기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 그 예이다. 화자는 자주 “칼이 발등에 내리꽂”히고 “독침이 날아오”거나(「스릴러 시」) “산소를 찾아 전속력으로”(「엔딩 드라이브」) 달려나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한다.
위의 시에서도 화자는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놈들’이라고 지칭되는 폭력은 집요하게 화자를 노리고 세력을 넓혀간다. 미루어보건대 도시는 ‘놈들’의 차지가 될 것이며 사람들은 좀비와 같은 상태로 착취될 것이다. 이처럼 몸을 누일 곳 하나 없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화자는 도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결의에 찬 목소리로 짓이겨지기보다 “부서져 흩날”릴 것을 맹세하는 화자의 모습은 멸망한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은 자의 외침 같다. 지켜야 했던 것들은 모두 스러지고 세계의 부조리함을 인식하는 마지막 사람일 화자는 이제 세계와의 마지막 대결을 위해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나간다. 무모하고도 외로운 싸움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김유섭의 시는 기존의 생태시가 품어왔던 고민들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그 역시 거대 자본과 권력을 고발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90년대 생태시가 봉착했던 문제들에서1) 자유로울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사용된 관습적인 이미지들의 반복이 잠재된 서정성을 가로막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시인은 “검은 밤 따위에 무너지지 않”고(「잊힌 약속」),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라 해도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을(“혼자가 아니라는 것/어디까지 가보아야 알게 될는지요. … 오늘도/여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떠도는 산책」)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다가오는 미래에는 그의 발걸음이 환하게 웃고 있기를 바란다.
추천시 : 「달콤한 공기의 세계」, 「풀잎 전쟁」, 「떠도는 산책」
- 1) 이승하, 「한국 생태시의 현주소」, 『문학과 환경』, 6(2), 문학과환경학회, 2007.
김선태, 「한국 생태시의 현황과 과제」, 『비평문학』 28, 한국비평문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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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비로소 더 잘 실패하기 김근의 시집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하고 흐릿한 목소리로 가득하다. 『에게서 에게로』는 주제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 본연의 기능에는 관심이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거부하고 의미의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산문시가 많고 시의 행도 긴 편이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듯 자유연상을 따라 말이 늘어난다. 그럴수록 의미는 저 멀리 달아난다. 출처를 규명할 수 없는 떠도는 목소리들이 시를 끌고 간다. 김근의 시는 무언가 선명하게 비추거나 재현되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빛이 아니라 어둠을 끌어당긴다. 김근의 시는 빛에서 어둠으로 이행 중이다. 시집의 맨 처음 놓인 「이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신이 들어와 살았어요. 나는 결코 세준 적 없는데 스멀거리는 어둠쯤에서 당신은 사는 모양이어서, 밝은 쪽에서는 결코 당신을 볼 수 없었지요”.(「이사」) 이 시에서 ‘나’는 결코 ‘당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집주인이지만 “흘려놓은 흔적들”로 존재하는 당신을 점점 기다리고 당신의 어둠을 단속하다가 급기야 “어둠 속으로 당신을 찾아들어” 간다. ‘나’는 당신과 어둠 속에서 오는 말들에 매혹당한 자이다. 「이사」의 화자는 볼 수도 없고 들리지 않는 당신의 어둠 속에 살기로 한다. 대상을 알아내고 통제하기보다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바꾼 것이다. 살던 집은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저 밝은 곳에 남겨”(「이사」)진다. 이 시집은 독자 역시 의미의 집을 나와 어둠으로 이행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안다는 것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실체가 드러나도록 대상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그러나 대상을 명료하게 하는 일은 그것을 가두고 제한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둠을 주시”하는 자는 다른 지각과 인식을 만난다. 그것은 언어가 수행하는 명시적 기능에서 벗어나 대상의 모호성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이전과 이후의 아득한 경계에서” “난데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가려진 문장」)이 그렇게 태어난다. 서러우니, 에는 어떤 거리들이 몰아쳐와 들러붙는 것이어서 생으로 떨어져 젖은 이파리 같은 것들 잘은 또 떨어지지는 않기는 않았기로서니 아프니, 쪽에 살아만 있는 꽃향기 자욱만 하고 지독만 하고 몽롱한 봄날 하늘 갑작스럽게 날 흐리고 스산하고 주어도 없이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형들 거기로 서러우니, 하는 목소리도 아프니, 하는 목소리도 죄 빨려들어가더란 이야기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 「서러우니, 아프니,」 중에서 언어는 편리하지만 단순하고 불충분한 기호이다. ‘서러우니’, ‘아프니’는 ‘이파리’와 ‘꽃향기’처럼 가깝고 서로 감각적으로 구분되는 말이지만 이 말들의 목소리는 “여기저기 생겨나는 굴헝들”로 “죄 빨려들어가” 버린다. 의미 기능에 충실한 언어는 쉽게 관성의 늪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단어가 거느리는 느낌과 질감의 미묘한 차이는 소거된다. 통상적인 문법은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는 ‘중얼중얼’하는 목소리를 외면한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문장의 바깥”에 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자는 기존의 문법이나 재현에 의존한 완성이 의미가 없다. 김근의 시는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완성되지 않는 목소리들을 받아쓴다. 김근의 시는 부사어를 좋아한다. 부사는 문장의 완성과 관련 없지만 상태나 분위기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부사는 “확신할 수 없고, 희끗, 그저 희끗, 희끗거리는”(「희끗」), 잠인지 생시인지 깨도 깨도 잠속이고 아슴아슴 뒷모습인지 앞모습인지”(「어슴푸레」) 모르는 상황에 어울린다. 의미론적 기능에서 해방된 말은 유희적이다. 언어는 의미 대신 리듬으로 흘러넘친다. 김근의 시는 “‘너’가 있었다”는 문장을 다시 쓴다. “너는 들리지 않는 말들 사이에 있었다고/추측된다 너를 둘러싼 적막이 얼마나/시끄러웠는지 너는 눈치채지 못했다 너는 다만/있었고 있었다고 추측될 뿐 지금 없다 없었다고는//차마//추측되지 않는다”(「혼자 있는 사람은」)라고. 무엇을 확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실이 아니다. ‘너’는 ‘사이’에 있고 추측에 불과하다. ‘사이’는 사실과 추측, 현재와 과거, 적막과 시끄러움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실체는 없다. 그래서 김근의 시적 화자는 말할수록 이방인이 되어간다.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아볼 수 없고 벗겨내도 벗거내도 다는 벗겨지지 않는 그저 얼룩인” “난 당신이 방금 봤던 내가 확실한 거야?”(「사이사이」). 언어가 실재와 상관 없는 추상적 기호라면 이 세계도, ‘나’, ‘너’, ‘당신’도 이름만 있을 뿐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 「사이사이」는 매트릭스처럼 가상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는 ‘사이’의 존재론을 펼친다. “누가 우리 목소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있는 거지? 아까부터 누가 우릴 자꾸만 기록하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은 주체의 확고함을 의심한다. 화자는 우리를 “시 안에서 꼼짝없이 가둬놓고 거기 바깥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넌, 넌 누구야?”라고 묻는다. ‘사이’는 안과 밖, 말하는 자와 글쓰는 자가 지워지는 역설의 공간이다.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나는 그저 아무 내용도 없었던 게 아니오?”(「정류장」). 주체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불확실한 개념이다. “영원히 지연”되는 기다림 속에서 “내겐 선택권이 없”(「윤슬」)다. 문법적 주어만이 아니라 단일하고 견고한 자아 정체성으로서 ‘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김근의 시에는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켜켜이 깃든 누군가”이고 그래서 ‘나’라는 관념 역시 “그만 산산이/깨어져버리”(「거기, 없는」)고 만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무엇이 어떠하다는 진술은 오류가 되기 쉽다. 우리가 지닌 관념과 인식, 생각들이 그러하듯 모든 것은 임시적이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곡우’라는 낱말이 “본뜻과 헤어져버려 본뜻이 무엇인지 떠올려지지도 않게끔. 떠올려봤댔자 이미 모르게만 되어버”(「곡우」)리는 것처럼 언어의 뒤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체가 없으므로 뚜렷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을 특정할 수 없는, ‘에게서 에게로’ 가는 과정과 흐름이 있을 뿐이다. 언어와 시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김근의 시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냥 모른다.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뿐이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뿐이다”(「세 사람이」). 그의 시는 주체의 의도와 의지를 놓아버린 채 낱말들의 중얼거림에 시를 내맡긴다. 이를 두고 언어의 의미론적 기능을 불신하는 해체주의 실험을 떠올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불확실함과 그로 인한 수동성이 “반짝임과 반짝임 사이 어둠 속으로”(「윤슬」)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 틈새가 시의 자리이다. 블랑쇼는 문학은 모호해지는 언어라고 말했다. 『에게서 에게로』는 모호함에 자신을 맡기면서 익숙한 관념을 벗어나 의미의 불안정한 지점으로까지 끌고 가는 시도이다. 시는 애초의 의미를 허물고 “잘 잘못 써진다. 비로소 시는 잘 실패한다”. 김근의 시가 증명하듯 의미는 하나의 완성을 향하지만 “다시 더 잘 실패”하고 “더 더 더 실패”(「세 사람이」)하는 형식으로서 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에게서 에게로’, 낯설고 모르는 곳으로. 잘 실패하는 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문장 안에서 길을 잃은 채 없는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의 최전선이다. 다행히 김근의 시는 잘 실패하고 있다. 시, 자기 구원의 여정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제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줄 때 이루어진다”(「진흙연못」). 이 구절은 김태형의 시의 중심 문장 같다. 그의 시는 세상의 음악에 자기 심장 뛰는 소리를 포개어 놓는다. 살아 있는 감각과 경험이 아니라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불가능한 것처럼 그의 화자들은 기꺼이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자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서정시의 문법은 세계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넓혀가는 것이다. 김태형 시를 서정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자아와 세계의 접점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 성찰에 깨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흑백고원」에서 늙은 나무들이 화석이 되어 비와 햇빛을 견디는 모습을 “자기 자신을 견디는 동안”으로 이해하는 화자는 자신의 고통을 자연에 투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을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계기이다. 고통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심장을 내가 갉아 먹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어리석음과 후회가 “부는 바람”에 지나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는 바람이라고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온통 황막한 벌판”에 서 있는 늙은 나무들에게서 시작된 삶의 지혜이다. 자연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삶을 일깨워우는 감각으로 경험된다. “여전히 넘쳐흐르고도 남은 말이 있었으니/물고기 한 마리가 느닷없이/네 푸른 입속으로 뛰어들었다”(「잉어」)도 그런 경험에 해당된다. “자꾸만 차오르고 넘쳐흘러 튀어”오르는 마음 속의 말은 잉어와 같다. “어느 때인가/나를 치고 올라”오는 말과 잉어의 속성은 은유를 통해 연결된다. 은유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이 같다는 인식을 통해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작용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주변 동물의 생태는 그에게 삶의 한 단면으로 묘사된다. “기어다니는 것들은 바닥처럼 자기를 움쳐쥐고 있다”(「도마뱀」)거나 “쫓기다 살아남은 고양이 한 마리/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사체를 냄새 맡는 고양이”(「허리가 긴 흰색 고양이」), “제 울음소리를 부러진 발톱으로 할퀴어 놓기만 하다 가는 고양이”(「야윈 고양이의 달」)는 관찰자의 예상을 비켜가는 살아 있는 생명들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속으로 울음을 품은 것이 고양이만은 아닐 것이다. 김태형의 시에서 ‘나’와 동물의 거리는 가깝다. 예측불가능한 삶의 속성과 훼손되는 생명의 실상이 동등한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의 시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신과 동물을 분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행자이다. 그는 “잔물결이 모여들어서 모여들어서/내가 모르는 세상 얘기를 다 들려주고 가는”(「여행자」) 풍경 속에 있다. 김태형의 시적 화자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흑백고원」)을 품고 있지만 그것들을 고백하는 대신 가만히, 오래 바라보고 듣는 사람이 된다. 세상 만물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여정, 이번 시집은 그 여정의 기록이다. 시인은 자신이 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 길에서 만난 ‘죽은 개’는 인간의 희로애락도 한 시절이며 모든 것들이 소멸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가만히 알려주고 있다. “나 역시 나를 지나가고 있”(「죽은 개가 내 이마에 침을 흘리며 지나간다」)다. “나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달의 뒤쪽에 대해서는 말하는 게 아니다」)는 인식 역시 그러한 자기 탐구의 결과일 것이다. 김태형 시의 화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거나 듣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성찰의 힘을 잃지 않는다. 느릿느릿 커다란 트럭이 앞서 가며 모래와 부서진 자갈을 뿌린다 경사진 길을 오르지 못할까 싶어 바짝 따라가다 바람이 얼어붙은 곳까지 다다랐다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린다 절벽 위에서 절벽은 절벽을 다 내던진다 누가 이곳까지 올라와 긴 숨결을 한없이 내려만 놓고 있었는지 내 입술에 묻은 하늘마저 파르르 떨린다 한차례 묵은 눈가루가 흩날리자 한 줌의 그림자가 햇볕 속에서 선명하게 반짝인다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절벽은 절벽 앞에 서 있다 그러자 묵은 눈이 또 내린다 눈은 내리고 나는 허공에다 입을 벌리고 저녁으로 서서 하얀 입김이 되어 있다 ― 「어느 절벽」 전문 절벽은 절정일까, 아니면 절망일까. 이 시의 절벽은 말하는 이의 마음 풍경처럼 읽힌다. 바람이 얼어붙고 소나무가 제 가지를 쳐서 묵은 눈을 흩날리는 곳. 절벽은 끝이면서 시작이고 결빙과 해빙이 동시에 일어난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소나무는 결박된 것을 스스로 풀어내는 해방의 순간을 만든다. 절벽 위에서는 절벽도 절벽을 다 내던진다고 한다. 절벽은 떨어지는 곳이 아니라 내려놓는 곳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나도 몇 해는 사는 게 두려웠다”는 고백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절벽이 어디쯤 있다. “다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은 절벽 앞이다. 다 놓아버리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다 놓아줄 수 없는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은 정직하고 소중하다. 고통 없이는 그런 깨달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몇 해 쌓인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묵은 눈이 또 내린다”) 허공으로 하얀 입김이 되는 ‘나’는 가볍다. 절벽 앞은 두려움이 아니라 허공일 뿐이고, 숨 쉬는 것처럼 그렇게 삶은 계속될 테니까. 시집의 표제작인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에서 마지막 양 한 마리는 자기 자신이다. 고작 열 마리 뿐인데도 사라진 양과 “절벽까지 혼자 외떨어져 오르고 있”는 양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어렵사리 양을 세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시에는 약간의 우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자기가 마지막 한 마리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누가 절벽까지 자기를 찾으러 오겠는가/누가 아직도 열 마리의 양을 세고 있는가”라는 대목은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홉까지 잃지 않고 다 세었는데 자기 자신이 없다니, 하지만 양을 세는 자도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가. 반대로 이해하자면 마지막 양 한 마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절벽까지 가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아홉 마리의 양을 찾는 데만 급급한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열 마리의 양을 세는 누군가가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라는 내면의 진실에 이르기 위해 『다 셀 수 없는 열 마리 양』은 자기 구원이라는 길고 어려운 여정을 보여준다. “바깥을 내다보는 일은 중요한 나의 일과”(「저물녘에 돌 하나 던지다」)라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정작 나는 찾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햇빛과 먼지와 황무지와 그리고」)라는 통찰을 얻는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지식이 아니라 절벽 끝에 선 자기 자신을 마주한 경험이라 울림이 있다. 김태형의 시가 좋은 서정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무엇이라도 곁에서 곁에서” 듣기 위해 “내 작은 귀는 햇빛처럼 그 무엇에라도 기대고 있었”(「귀」)고 그 순간들이 그에게는 시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절벽의 거대한 허공에 맞먹는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힘이 거기에 있다. “마냥 길을 따라 흘러가다 길이 되어 버릴” “바람만을 따를 뿐인”(「진흙 연못」) 이 커다란 자유의 여정이 계속되길 바란다.
미래의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공간이 주어질까. 기술의 발전으로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대화하거나 가상현실 속에서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미래는 이제 인간에겐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팬데믹을 거치며 깨달은 것은 인간에겐 자신을 보호해줄 사적 공간 외의 공적 공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느리게 걸으며 자연의 변화를 목격하고, 나와 비슷하고도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발견하며, 친밀한 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 말이다.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자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뜻"1)이라는 에드워드 렐프의 말처럼 인간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장소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들은 인간의 삶을 지탱한다. 우리에겐 여전히 장소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많은 이와 관계 맺는 장소이자, 가장 문제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그곳은 단연 광장일 것이다. 그리스의 아고라(Agora), 로마의 포럼(Forum)을 거쳐 현재의 광장은 사람들을 위한 장터부터 공연과 전시, 종교적 행사나 군중의 집회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광장이 중요한 점은 "오늘날까지도 시민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소"2)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나타나는 광장도 현실의 광장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문학 안에는 시대를 반영하고, 시민을 대변하면서도 시인의 시 세계를 드러내는 다양한 광장들이 존재한다. 최근 출간된 배수연의 시집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과 윤은성의 『유리 광장에서』에서도 타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결의 광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랄한 상상력과 단단한 실천으로 이루어진 광장을 함께 거닐어보자. 이분법을 넘는 걸음들 배수연의 세 번째 시집은 동화적인 상상력이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맥을 함께하면서도 경계가 희미해지는 장소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모두가 혼자 있지만 같은 노래를 듣는 집이나(「모두네 집」), 컬렉션과 컬렉터의 위치가 동등해지는 갤러리(「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청소부와 손님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는 호텔(「마리골드」) 등 사회가 구분해놓은 경계는 배수연의 시에선 무의미한 것이 된다. 청소 노동자와 손님, 컬렉션과 컬렉터와 같이 마주칠 일 없는 이들을 한곳에 배치함으로써 배수연의 시 세계는 만들어진다. 시에 등장하는 동물 타자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거위나 두더지(「모두네 집」), 광대 역할을 맡은 앵무새(「광대 없는 마을」), 컬렉션이 된 갈치와 악어(「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터진 포대 안을 처리하는 비둘기(「개발팀」)처럼 시 속 동물들은 극에 따라 얼마든지 역할을 바꿀 수 있는 배우처럼 시와 시 사이를 건너다니며 경계를 허무는 데 일조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위들이다. 거위는 어린 시절에 함께 놀던 친구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화자의 심술에 낯선 동물이 되기도 하며(「거위와의 목욕」),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다가도 자유롭게 헤엄치며 동물적 특성을 드러낸다(「반짝이는」). 의인화가 일반적으로 부재한 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3)이라면 배수연 시의 동물들은 의인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의인화에 한정되지 않으려는 듯하다.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거위의 말들(“거위 1 나는 돌이 될 수도 있고 풀이 될 수도 있다 물이 될 수도 곰이 될 수도 / 거위 2 나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목수가 될 수도 있다 배우가 될 수도 학자가 될 수도”)처럼 거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면서도 언제든 동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를 보면 배수연의 세계에서 고정된 것이란 없으며 개념들은 넓게 풀어져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날은 약속한 날이었다 높은 빌딩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는데 거위 하나가 일찍 와 있었다 여기 청소 일 알아봤어 번호가 적힌 쪽지를 가방에 접어 넣었다 [……] 거위들과 나란히 책을 읽을 때 거지의 개와 과부의 고양이 그런 건 우화였다 행복한 손님이 많은 곳에서는 청소하지 마 차라리 종합병원은 어때?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부끄러웠고 나와 거위들의 부끄러움은 다르지만 함께 책을 읽었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어서 계속할 수 있었다 -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 부분 그런데 배수연 시의 떠다니는 이미지들 속에서 건져지는 것이 있다. 시인은 의미가 고착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몫 없는 자들의 곁에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공부하며(「독서 모임」), 광대가 받는 박수를 원하는 왕을 만들어내고(「새 하늬 마 높」), 항상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들을 등장시킨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거위들이 선택한 것이 청소부라는 점은 시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된다. 청소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거위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거위와 모과」), 스스로가 청소부에 적임자임을 강조하는 거위의 모습에서 [“누구나 리더가 될 수는 없어요 / 저는 좋은 팔로워, 현명한 팔로워예요”(「모두네 집」)] 그들은 언제까지나 청소부의 자리에 머무르며 사회가 원하는 노동을 제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하지만 줄을 잘 서는 거위들과 마주칠수록(「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2」) 화자의 부끄러움은 배가된다. 앞서 인용한 시에서 화자가 거위와 마주친 곳은 높은 빌딩의 근사한 식당이다. 식사를 즐기는 화자 앞에서 거위는 장소에 개의치 않고 “청소 일”을 알아보았다며 말을 건넨다. 어디서든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에게 높은 빌딩은 인간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거위와 함께 읽은 책의 주인공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작곡가가” “시인이 아니라 화가가”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며 이루지 못한 꿈을 갈망한다. 하지만 거위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관심 밖의 일이며, 사람들이 부와 행복을 과시하는 곳이라도 거위에겐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거위는 착취 구조에 무지하기에 역설적으로 착취 구조에서 해방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거위를 보고 죄책을 느끼는 것은 화자이다. 화자는 청소부로 살아가는 거위 앞에 항상 손님으로 누군가의 노동의 혜택을 누려왔다는 부끄러움, 행복한 이들 사이에서 일할 거위의 불행을 단정 짓는 편협함에 대한 부끄러움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은 화자를 수직적 공간에서 내려와 거위와 누울 수 있는 수평적 장소로 이끈다. 경계를 구분하는 수직적 문법을 탈피하고 무해한 거위와 누운 곳이야말로 화자가 원하는 장소일 것이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는 행동을 함으로써 거위와 화자는 우화가 아닌 현실에서 함께하게 된다. 서로 다른 부끄러움을 견디며 거위들과 책을 읽는 것, 근사한 곳에서 내려와 청소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정기 모임」), 기록되지 않는 이들을 조명하는 것을 [“동대문 미싱사는 이런 말을 하지 않고, / 기록되지도 않는다”(「일요일」)] 몫 없는 자들에 대한 애정4)이 아니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항상 의자에 앉을 수는 없어서 모자가 발명되었어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나는 모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많이 알아 [……] 더 좋은 모자를 줘, 더 좋은 의자를 줘, 더 멋지고 더 가치 있는! 진실을 잘 이용해야 해 진실은 쉽게 녹지 않으니까 진실을 휘젓다 지친 사람들 그들의 비석 앞에 꽃과 모자가 놓여 있네 모자를 맞대고 오래오래 행진했어 실패라는 생각에 괴로울 때면 종종 모자 안의 코끼리를 쓰다듬지 인명 없는 미술사를 읽는 기분으로 흰 연기로 색색의 카펫을 짜는 기분으로 해방되는 기분으로 - 「모자의 기분-광장에서」 부분 거위와의 만남에서 보이듯 배수연은 경계를 구분하고, 계급을 나누는 이분법을 탈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시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모자는 의자를 대신해 사회적 계급을 상징하게 된 물건이다. 기존의 세계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만 의자를 허락하여 수직적인 계급 구분을 뚜렷이 했다면, 모자로 구분되는 세계는 모두를 광장이라는 수평적 공간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기존 체제와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세계가 계급을 나누는 방식이 더욱 교묘해졌을 뿐, 계급은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있다. 되레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모자는 어디에서든지 서로의 계급을 확인할 수 있어 모자를 향한 욕망을 부추기고, 누구나 멋진 모자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더 많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모자가 전부인 세계는 군중을 어리석게 만든다. 사람들은 현재의 모자에 만족하기보다 더 좋은 모자를 쓰기 위해 아우성치고, 이미 멋진 모자를 가진 왕과 판관들도 자신의 모자에 만족하지 않는다. 모자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려 했던 이들은 죽고 묘비만이 남아 세계의 폐쇄성을 확인시켜준다. 화자가 서 있는 광장은 이 모든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혼돈의 장소이다.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등 모자를 바꾸기 위해 모여든 이들과 죽은 자들의 묘비, 모자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헹가래하는 군중이 함께하는 어지러운 곳에서 화자는 거위와 함께 책을 읽었던 것처럼 이들과 모자를 맞대고 행진한다. “실패라는 생각에” 무너질 때마다 모자 안의 코끼리를 만지며, 상상력에 기대어 다시금 몫 없는 자들과 함께 걷는 것이다. 성호를 긋는 마음으로 걷고 또 걷는(「예술가」), 몫 없는 자와 거위들을 하나로 잇는 마음은 이분법에서 해방될 하나의 미래를 바라며 행해진다. 그래서일까. “나비 떼가 번쩍 곰을 들었으면 좋겠다”(「산책」)는 화자의 고백처럼 작은 발걸음들이 모여 이분법을 부수는 미래를 그리게 되는 것은. 우리는 배수연의 시를 통해 이분법을 넘어 화자와 거위, 두더지, 악어, 앵무새 들과 함께 행진하는 광장을 그리게 된다. 아무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아무나와 걸을 수 있는 광장을. 희미한 연대의 광장 윤은성의 두 번째 시집은 투명한 눈물들로 이루어진 슬픔의 기록 같다. “슬픔을 얼굴에 눌러 붙인 물고기들”(「둑과 빛과 물의 시」)처럼 “어디에서도 잠은 슬펐다고”(「멀다」) 고백하며, “슬픔으로 빌린 / 집”(「영원과 하루」)에 초대되는 화자를 보면 우리도 슬픔의 한가운데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감지하는 깊은 슬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이 목격한 죽음과 체험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와야 하는 소년 소녀 들의 이야기부터, 여름날을 채우던 “죽은 교사들”(「우리의 물이 우리를」)의 소식, 비난받는 소수자들과 함께하며 “먼 / 미래를 보여준 사람”(「좁고 긴 옷」)의 부고와 “크레인도 아닌 전신주 위에 올라가”(「창문을 열다가」) 목소리를 내던 여자의 이야기를 화자는 지나치지 못한다. 또한 시인에게 비인간 존재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의 시는 고양이의 얼굴을 사람의 얼굴과 겹쳐 보게 하고(「선반 달기」), 닭이나 소, 돼지와 같은 비인간을 조명하며(“닭과 소와 돼지가 차례로 앓거나 / 물에 잠겨 죽거나 / 한꺼번에 묻히거나”, 「행사장」), “너무 크거나 작아서 / 발견되지 않는 죽음들”(「둑과 빛과 물의 시」)에게 자리를 마련해준다. 마음을 쏟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시인이 겪게 되는 슬픔이 더욱 깊고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전제해야지만 평등이 가능하다고 본 것5)처럼 윤은성은 사회적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뿐 아니라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비인간들을 동일 선상에 놓으며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실천으로 엮인 시는 슬픔을 껴안은 채로 행동하는 화자를 만들고(“지금 아프다고 우리 함께 울고 웃고 // 무슨 이상한 계절을 불러오게 되더라도 // 외쳤어야 맞아”, 「확성 빛 겨울」), 우리는 윤은성의 시를 통해 문학과 정치가 불가분의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기억하니 우리는 음악과 지구과학을 같은 날 배우고 함께 옥상에 올랐잖아 구름 사이로 빛이 보이면 무언가 알아챈** 것만 같은 기분도 들고 소나 강아지의 이마를 만지는 것 같은 부드러운 떠가는 시간을 촘촘히 알 것 같았잖아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면서 엎드려 울기밖에 할 수 없더라도 시간에 맞추어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었잖아 그때도 이걸 알았던 기분이야 내가 사는 도시에선 자주 광장으로 사람이 모이고 흩어져 계속 말하려고 하는데 어쩐지 여기에서 외치는 기도가 멀리까지 가닿지 못하는 기분도 들고 [……] 내 목소리가 지상에서 또 지하에서 잠시 울리고 사라져 우리가 붙들고 모이는 게 미래를 등지고 선 사람들이 몸을 되돌려보려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조용한 기도라고 하자 유리와 안개를 동시에 깨뜨리고 밖에서 안으로 집어넣는 손들을 알아채려 잠시 모였다고 하자 * 교사 보란을 통해 과학 교과목이 따뜻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함. ** 동물해방 운동을 했던 혜린과의 대화에서 “알아채다”라는 말을 전해 받음. - 「유리 광장에서」 부분 하지만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해서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는 위기들에 마음을 쏟고 행동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또 외로운가. 위의 시에서 시인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친구와 함께 보낸 다정한 과거를 떠올린다. “부드러운 / 떠가는 시간” 속에서 무언가 깨달은 것 같으면서도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고, 서로에게 의지하여 보낸 기억들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화자는 광장에 선다. 그러나 화자가 처한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다. 현재의 화자는 엎드려 울기만 했던 과거보다 자주 목소리를 내고, 기도도 해보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미래, 기대할 수 없는 희망에 화자는 “무엇을 더 느끼고” “나이를 더 먹어야” 하느냐며 절망에 빠지는 듯하다. 이때 화자가 선 광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윤은성은 첫 시집 『주소를 쥐고』(문학과지성사, 2021)에서부터 광장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었는데 첫 시집의 광장이 쓸쓸함이 깃든 곳이거나(「비단길앞잡이」) “살갗을 할퀴는”(「장미 광장」) 상처를 내는 곳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의 광장은 희미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광장은 "대중에 의해 정의되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6)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쉽도록 도시의 중요한 장소에 위치한다. 많은 장소가 그러한 것처럼 광장의 성격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며 사람이 모이지 않은 광장은 빈터일 뿐이다. 그런데 몫이 없는 자들을 위해 외치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모으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생태주의에 관심을 보이지만 다른 사회적 갈등과 다르게 생태주의는 대중의 결집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7)는 말처럼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화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유리를 부수고 화자의 곁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광장은 공공장소이지 거주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함께 모인 이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산되고, 화자의 목소리는 유리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진다. 이같이 사람들 사이의 단절과 연대의 불안정성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유리 광장에서 시인은 홀로 허망함과 미움을 삭일지언정 희미한 연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안에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더 많은 참여를 만들어내고, 더 오래 참여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아는 듯하다. 때문에 무자비한 손들을 알아채기 위해 모인 광장에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대오고, 조용한 기도로 사람들과 연결된다. 이것이 윤은성의 시가 몫 없는 자들을 위한 최전선에 서 있으면서도 온화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너무 멀리서 헤맨 날이면 자다 깨어나 안을 것을 찾아서 내가 얻어 온 모든 체온이 도는 몸을 천천히 뻗어봐. [……] 살아 움직이는 우리가 서로를 알아채며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안아주고 있었어. 파도보다 오래 더 오래 다시 모르는 아픈 물결까지 붙잡아주고 있었어. 안다고, 안다고 붙잡아주고 있었어. - 「사슴뿔청각」 부분 시인에게 광장은 그가 지키고자 하는 생태계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는 물의 광장으로서의 바다가 나타난다. 바다는 새로운 물결이 기존의 물결과 더해져 ‘하나의 물결’을 만드는 끊임없는 생성의 장소이다. 그러나 투명한 파도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시인은 바다의 포용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물고기들의 떼죽음과(「둑과 빛과 물의 시」), 조개들의 죽음, 바다에 터를 둔 사람들의 이주는(「행사장」)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일이다. 바닷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과 바다 생물의 사체가 함께 놓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현실에서 화자는 바다가 더 나쁜 쪽으로 변하고 있음을 어린 청각을 통해 목도한다. “자라다 말고 색이 변하”(「사슴뿔청각」)는 어린 청각의 현실이 말간 얼굴로 첨벙거리는 아이들의 미래인 것만 같아 화자는 두려움에 떨고 “시를 잃어버린 것 같”(「창문을 열다가」)은 기분에 휩싸인다. 두렵고 슬픈 마음에 무너져 내리는 시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광장에서 만난 동료들이다. 슬퍼하는 시인에게 전해진 체온과 전달된 언어(「생일 세계 공원」) 그리고 그림자(「모르는 일들로부터」) 등 동료들에게 받은 것들은 시인을 허무의 파도에 쓸려가지 않게 하는 안전망이 된다. “파도보다 오래” 화자를 끌어안는 포옹을 통해 시인이 낙담과 허무에 잠식되지 않고 일어날 것을 예감할 수 있다.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안아주는 연대는 약하지 않다. 서로의 고통까지 보듬어줌으로써 희미할지언정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동하는 궤적들의 묶음으로서 우리의 ‘함께 내던져져 있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8)이라면,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은 우리가 ‘지구에’ 함께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에서 우리는 모두 몫 없는 자들이 된다. 사회가 정한 계급, 성별, 종차를 넘어 우리는 무너져가는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땅에 속한 자들 The Earthbound’9)이 되고 그제야 우리는 몫 없는 자들의 슬픔을, 언어가 없는 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을 견디고 묵묵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시 앞에서 나는 기꺼이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서 있는 자리를 조심스럽게 확인하며(「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곧은 마음으로 걷는 시인과 다양한 생명체들을 잇는 광장에서 만나고 싶기에. 시인이 그리는 안전한 미래에 멸종하지 않은 우리가 있기를 바란다. 1)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김덕현 외 옮김, 논형, 2005, p. 25. 2) 프랑코 만쿠조 외, 『광장』, 장택수 외 옮김, 생각의나무, 2009, p. 5. 3) James J. Paxon, 『The Poetics of Personif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 13. 4) 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08, p. 11. 5)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길, 2015, pp. 48, 64, 68~69. 6) 프랑코 만쿠조 외, 같은 책, pp. 6, 19. 7)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이규현 옮김, 이음, 2022, p. 13. 8) 도린 매시, 『공간을 위하여』, 박경환 외 옮김, 2016, 심산, p. 284. 9)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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