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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 2024년 겨울호(제148호)

픽션들 — 집 , 여행 그리고 일기 , 편지 혹은 작별, 죽음 : 배수아, 『속삭임 우묵한 정원』(은행나무, 2024) 조해진, 『빛과 멜로디』(문학동네, 2024)

소영현 문학평론

평론가.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교수. 2003년 『작가세계」에 최윤론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문예중앙』 『작가세계』 『21세기문학』 『문학웹진 뿔』 『웹진 비유』 『KLN』 기획 및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비평집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하위의 시간』 『올빼미의 숲: 사회비평 선언』 연구서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광장과 젠더: 집합감정의 행방과 새로운 공동체의 구상』 『하녀: 빈곤과 낙인의 사회사』가 있으며, 공저로 『비평포럼: 키워드로 읽는 2020년대 한국문학』 『#문학은 위험하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과 독자 시대의 한국문학』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비평 현장과 인문학 편성의 풍경들』 『감성사회』 『감정의 인문학』 등이 있다.

오래전 어느 날 당신으로부터 온 편지…… 그 순간 문득 작별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삶의 시간 내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비밀의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1)



1. 픽션 너머 픽션들


  창작된 것이 창작되지 않은 것처럼 제시되어야 한다는 픽션의 기본 원리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도 꽤 흐릿하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여성 서사, 퀴어 서사 등으로 뚜렷한 경향성을 마련한 한국문학이 각종 에세이와 질병 서사 형태로 등장한 회고록 형식과 만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소수자와 타자에 대한 복원 역할을 지속해 온 한국문학의 성격이 강화된 길목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사의 영역으로 옮겨진 실제적인 상황-사건과 창작된 것 사이의 관계가 재설정되는 국면에서, 한국문학의 문화기술지적 면모와 자기서사로서의 성격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창작된 있음직함(이것은 현실임직함이기도 하고 사실임직함이기도 할 터이다)이 진실성에 좀더 근접한다고 믿었던 픽션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불신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자크 랑시에르가 언급한 픽션의 경계에 대해 사유를 환기해보게 된다.2) 

  이는 독서를 지체시키는 창작된 것에 대한 검토의 요청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지체가 서사에 도입되어 있는 요소들, 가령, 공상, 환영, 꿈, 여담, 읽은 것과 본 것에 대한 회상, 시간과 공간의 뒤섞임이나 일기, 편지, 사진, 영상물과 같은 다양한 기록들이 야기하는 서사적 균열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요소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동원하게 하는 픽션 충동을 환기한다. 흥미롭게도 배수아의 장편소설 『속삭임 우묵한 정원』과 조해진의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는 꽤 상반된 방식으로 그 픽션 충동을 살피게 한다. 화자나 인물 혹은 시간이나 공간과 같은 창문을 통해 창작된 것 내부로 진입해서 창문의 요소를 잊게 만드는 방식을 거절하며 끊임없이 창작된 것이 창작되었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두 소설이 낯선 독서 자체를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서사를 파편화하거나 서사의 일관성을 거부하는 위반성 자체가 창작의 목표는 아닌 것이다. 기존의 틀에 의해서는 결과적으로 소거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절박한 부여잡음이자 그러한 방식으로 서사를 구조화하는 방식을 중단시키려는 시도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조해진 식으로 말하자면, “배경은 아름답고 구도는 안정적이되 그 안의 사람들은 더 아프고 더 불쌍하게 보이는 사진, 혹은 끊임없이 잔인한 이미지를 징집해서 찍은 사진이 과연 세상의 분쟁을 막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3)와 같은 질문으로 구체화되는 예술에 대한 의심과 성찰을 통해, 사진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길이기도 하다. 『속삭임 우묵한 정원』과 『빛과 멜로디』는 집, 여행, 이주, 난민을 두루 우회하는 이동과 경계에 대한 사유를 통해 공히 새로운 경험의 지평을, 내내 있었지만 창작된 것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 세계를 가시화한다. 그것은 공동체 없는 공통 경험의 가능성의 세계라 할 만한다. 



2 순환하는, 기억하는 상상 


  배수아의 『속삭임 우묵한 정원』은 첫 문장인 “여행의 시작에 우체부가 왔다.”를 통해 이 책의 독서가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임을 넌지시 알린다. 장면을 지시하는지 상황을 기술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어지는 “이것은 최초의 여행에 관한 글이다. 여행은 편지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데 편지는 무엇으로부터 왔는가?”(p. 7)라는 문장이 더해져도 앞선 궁금증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최초의 ‘여행에 관한 글’인지, ‘최초의 여행’에 관한 글인지도 확정되지 않은 채 소설은 계속된다. 창작된 것으로서의 소설의 층위가 묘사인지 기술인지 사유인지 확정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이 문장들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이 곧바로 창작된 것으로 진입하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지도 않는다. 

  배수아의 소설에서 독서는 불확정성이 증폭되는 시간이다. 배수아 소설의 매력은 우선적으로 앤티크 풍의 그 불확정성에서 발생한다. 동일한 인물임에도 다르게 명명될 수 있는 맥락이 좀더 존중되고 기억의 작용으로 매번 정보의 정확성은 훼손된다. 서사의 진전은 수많은 정보의 축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부가되는 정보들은 앞서의 확정된 상황이나 의미를 좀더 공고하게 하지도 안정화하지도 않는다. 독서 경험은 지금껏의 모든 장면이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일면적인 시야가 만들어낸 잠정적인 것일 뿐임을 확인하게 한다. 인물들의 정체는 매번 미끄러지며 불완전한 채로 남겨진다. 우리의 삶이 그런 방식으로 지속된다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오히려 서사 자체의 규약을 다시 환기한다. 


  편지가 도착하던 바로 그 순간 나는 어떤 것과 우연히 마주친 직후였는데, 그것은 내가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장소인 숲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노라고 고백해야 한다.(7쪽)


  하지만 곧 나는 기억하기를 멈추었고, 책을 잊었고, 책장에 손을 뻗기 전에 하고 있던 일, 편지 쓰기를 계속했다. 마치 그 사이-순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나 곧 다시 멈추었다. 나는 숲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들의 눈앞에 주황색 X자 벌목 표시가 된 너도밤나무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산림감독관(그는 우체부와 비슷한 모양의 제목을 입고 있다)이 나타난다. 어렴풋이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분명 홀로 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오두막 앞에 홀로 있는 사냥꾼의 개. 나는 검은 털로 덮인 개의 얼굴을, 검은 웅덩이처럼 물이 고인 그늘진 눈동자를 눈앞에서 본 것만 같았다. 내게 저절로 나타나는 것들을, 나는 본다. 한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9-10쪽, 밑줄 강조: 인용자)


  의미 전복이나 재편의 연쇄에서 독서의 유희가 발생하며, 그것은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나 선명한 풍경에 대한 끌림을 유발한다. 그러나 소설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우체부에게서 편지를 받은 일이라는 ‘오늘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이 불시에 야기한 연상의 소용돌이나 불러온 기억의 장면들에 더 가깝다. 좀더 정확하게는 생각의 소용돌이의 연쇄들, 이미지의 형태로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아니, 흘러가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는 일, 시간의 흐름의 진전을, 진전이 일어나는 순간을, 그 순간 속의 순간을 과거 속의 현재와 미래를 시제 활용으로 잘게 쪼개며 가시화한다. 시간의 흐름을 보이는 것으로 언어화한다. 그리하여 소설에서 시제는 뒤엉키고 화자와 대상 사이의 관계는 역전된다. 서사의 구조는 뒤틀리며 법칙은 파열된다. 

  랑시에르는 분류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제발트의 글들을 두고 픽션의 새로운 장르로 정의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토성의 고리』와 같은 작품들에서 픽션의 지형을 구축하고 체계를 이루는 일련의 “간극들”의 작동을 발견한다. 제발트의 글을 “분류할 수 없는”(150쪽) 것으로 만드는 요소로 서술이 여담으로 대치되고 의미가 없는 세목 속으로 가라앉고, 시간과 공간들이 규칙 없는 몽상 속으로 흩어져 버린다는 점을 든다.4) 흥미롭게도 『속삭임 우묵한 정원』에서 기억의 여정 사이에는 편지에 대한 여담, 여행에 대한 상상, 에드워드 호퍼의 「햇빛 속의 사람들」을 둘러싼 상상, 숭배의 감정, 경찰의 조서, 꿈의 기록, 손님맞이용 식사 준비, 경찰관 부부가 인도 여행 중에 보낸 엽서 내용, 독립영화 촬영 그리고 “편지에서 시작하여 편지로 끝나며, 편지의 낭독 사이사이 배우들이 편지 내용을 연기로 보여주는 형식”(p. 250)의 연극에 대한 기술로 채워진다. 돈암동에 있(었)던 하숙집 풍경은 이국적이기보다는 다국적의 면모로 무국적의 공간처럼 구현된다. 기억, 회상, 상상, 꿈이 뒤엉켜 흐르지만 시간은 순환하거나 유전한다. 『속삭임 우묵한 정원』을 구축하는 심층의 충동은 경계 혹은 그 간극에 대한 질문이자 성찰이다. 

  1인칭 화자의 고백적 글쓰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속삭임 우묵한 정원』의 서사를 고백으로만 단정 지어서는 안된다. 화자가 기술의 전권을 쥐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자 스스로 반복해서 언급하듯 뭔가를 들었는지 보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저절로 나타나는 것들을” “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보고자 하는 의지와는 무관하며 오히려 “저절로 나타나는 것들” 앞에 화자가 노출된 것에 더 가깝다. 기억 혹은 떠오르는 시간의 흐름을 장면화하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화자는 기억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기억이 자신에게로 당도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은 화자가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으며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은 기억이며 장면이고 사건이다. 


  편지에서 나는 마치 꿈을 묘사하듯이 집을 묘사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꾸며낸 거짓말은 아니다. 하숙집은 옛 모습 그대로 내 꿈에 종종 등장했으므로 그곳은 실제이면서 동시에 꿈의 장소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집은 점점 더 꿈의 영역으로 건너가버렸다.(85쪽)


  기억의 여정에서 서사적 규약에 의한 진실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며 인물과 사건의 정보가 뒤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기억으로의 여행은 하숙집을 텅 비게 만들어버린 어떤 사건과 그 사건의 배경인 집으로 향한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화자가 지붕 위에서 놀다가 아래로 떨어져 병원에 오래 있었다고 한다. 화자는 그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장막 속에 가둬둔 망각된 과거를 복원한다. 아마도 화자는 사건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고 실어증을 앓았기에 심리 상담을 받았고, 아동심리학자에게 쓴 진술서에서 그 사건의 가해자로 MJ를 지목한 탓에 이후 그 집을 떠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그것은 미제 사건으로 남은 친모의 영아살해, 열 살 난 딸 살해기도 사건으로 언급되지만, 그것의 진실 여부도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생일날 MJ로부터 편지를 받는 나는, 오랫동안 잊은 채로 지냈던 예전 기억을 떠올린다. 그렇게 영혼의 거주지로서의 집을 향한 기억의 회로가 열리지만, 회상 행위는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과 만나는 여행에 가깝다.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사건은 변주의 다발이 되었고 그리하여 기억은 가닿을 곳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속삭임이 내 입을 통해서 속삭이는 것을 듣는다. 내 몸은 어디서 왔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의 파편들이 거주하는 집이다. 내가 죽으면 그 말들은 또 다른 집을 찾아서 흘러갈 것이다.(165쪽.) 


  단 한 번으로 끝나버린 공연에서 프롬프터였던 화자에게 연극 대본은 내용을 알지 못하는 태초의 소리로 존재했다. 출처를 알지 못했던 그 속삭임은 연극 대본의 파편들로 화자에게로 돌아왔으며, 그러므로 “아주 멀고도 우묵한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152쪽) 속삭임은 편지 형식으로 시작되는 그 연극 대본이자, 그것을 쓴 MJ의 목소리이자 얼굴이고 그것은 또한 화자인 나의 다른 목소리이자 다른 얼굴이다. 화자는 “오랜 시간을 표류하다 다시” 그 자신에게로 돌아온 “속삭임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165쪽) 그리하여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 화자가 만나는 것은 잃어버린 기억도 그 기억의 원형인 사건의 확정도 그 자신도 아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자신이 개별자가 아니라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론적인 반복이자 변이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고 전한 자매와 마찬가지로, 되돌아온 속삭임을 통해 화자는 자신이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아니며 그 소리가 자신의 몸에 잠시 거주한 것일 뿐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엄마와 딸, 개인과 가족 그리고 집은 우리가 알던 것과는 무관해진다. 

  자신을 배신한 남편을 향한 복수의 일환으로 제 자식을 살해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를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속삭임의 이끌림을 통한 회상은 교통사고를 당한 MJ에게서 태어나던 날, 그 “최초의 순간”(323쪽)에 가닿는다. 임신한 MJ의 몸 안에 (아직 밀도 목주도 아닌) 태아로 존재하는 그때를 본다. 태아로의 회귀 열망은 죽음 충동으로 읽히기 쉽지만, 그것은 오히려 순환하는 운명, 혹은 여행, 과부로, 비제도적 결혼의 방식으로, 실패한 결혼으로, 반복되는 여성 3대의 운명의 연쇄를 건져 올린다. 화자가 탄생의 순간으로 회귀하는 여행의 기록으로서 『속삭임 우묵한 정원』은 흥미롭게도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로 여성의 삶을 반복하게 하는 커다란 궤적 같은 것을 소설 위로 밀어 올린다. 



3. 수평한 연결, 사람들 


  소설집 『빛의 호위』(2017)에 실린 단편 「빛의 호위」를 장편소설화한 신작 『빛과 멜로디』는 희미하지만 단단하고, 보이지 않지만 명백한 어떤 흐름과 그 영향에 관한 이야기이다. 『빛과 멜로디』는 2022년 11월 25일에 시작되어 2024년 2월 21일에 마무리되는 편지 형식의 기록물로 축조된 소설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단편에서와 달리 서술 화자가 아닌) 승준이 초등학교 동창인 권은에게 블로그를 통해 전한 편지로 시작된 흐름이 승준의 아이인 지유를 수신인으로 한 권은의 편지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지면서 마무리된다. 후속 세대인 아기가 수신인인 마지막 편지가 말해주듯, 편지라고는 하지만 일기이자 정보의 기록으로서의 성격을 갖기에 거기에는 꽤 많은 잉여적 관계와 사건이 삽입되어 있다. 형식적 간명함에도 불구하고, 승준과 권은 사이에서 오간 이 편지 형식의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빛과 멜로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그러하듯, 승준과 권은의 관계를 기성의 명명법으로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그들은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친구, 가족, 동료처럼 서로의 안부를 나누던 사이가 아니다. 승준이 분쟁 현장의 사진을 찍어온 권은을 인터뷰하면서 둘은 이십여년 만에 재회하지만, 권은이 작가가 된 계기가 승준이 건넨 카메라임을 그는 당시에는 알지 못한다. 자신이 보답을 바라지 않고 전했던 호의의 여파를 승준이 확인한 것은 7년의 시간이 흐른 뒤이지만, 이후로도 그들이 나눈 깊은 신뢰나 연대감은 사적인 친밀성과는 꽤 다른 질감의 것이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의 기록이지만, 승준과 권은의 관계가 품은 시간이 30년에 달한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들 사이에 놓인 사람들과 그 사연의 시간은 한 인간의 생과 맞먹는 부피를 갖는다. 소설 내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 2013에서 2009년까지의 시간 역진은 말할 것도 없이 둘 사이에 놓인 기적과도 같은 ‘사람들-연결들’과 그들의 사연들로 백여 년의 시간을 훌쩍 거슬러 오른다. 소설 내에서 그 시간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쇄로 방사형의 망처럼 촘촘하지만, 사실 그 시간은 전쟁의 시간이자 그곳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슬픔의 시간이다. 그 시간 위에 사람들 사이의 연결선을 겹쳐 놓으며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사람을 살리고 싶은 마음”(156쪽)을 불러일으키는 구원과 희망의 시간이기도 했음을 전한다.  

  요컨대, 『빛과 멜로디』는 길고 긴 빛의 여정이자 멜로디의 여정이다. 빛의 여정이 한 갈래의 실처럼 이어지고, 멜로디의 여정이 다른 갈래의 실처럼 이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계기 삼는 ‘사람을 살리고 싶은 마음’의 여정이 타래로 얽히며, 이 여러 갈래의 여정이 사람들을 스치거나 만나게 하면서 그물망처럼 퍼져간다. 


  어느 날 손에 들어온 카메라로 나는 다시 세상과 연결되었어요. …… “카메라는 나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물이었죠.”(128쪽)


  “장이 작곡한 그 악보들은 지하 창고에서 날마다 죽음만을 생각하던 내게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해준 빛이었어요. 그러니 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악보들이 날 살렸다고 말이에요.”(127쪽) 


  빛의 여정은 학급 대표로 장기 결석 중인 반 친구의 집을 방문했던 열두 살의 승준이 죽음 가까이에 있는 듯한 권은에게 건넨 카메라로 시작된다. 멜로디의 여정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 당시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알마 마이어를 숨겨주고 탈출을 도왔던 연인 장 베른으로부터 시작된다.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던 그들은 이후로 다시는 음악을 연주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장은 그녀를 미국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빌린 돈을 갚느라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고 그녀는 탈출한 이후에야 알게 된 임신으로 가정교사로 일하며 아들과 살았다. 장은 아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그들은 이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노먼은 장이 어머니를 살린 일을 자신의 생에서 반복하고자 했으므로, 그를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게 했고 분쟁 현장에서 전쟁의 폭력과 사람들의 고통을 사진의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게 아니라,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 죽음이 아니라 삶에 가까운 사진을 찍는”(173) 작업을 이어가게 한 것은 “그 자신도 모르게 다시 살게 한”(84) 장이었다고 해야 한다. 쓰레기 같은 전쟁에서 죽을 뻔했던 여성을 살린 일은 노먼의 삶을 통해 반복되고 계승되었다. 

  게리 앤더슨이 노먼 마이어에 대해 찍은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를 통해 권은, 승준, 승준의 아내 민영이 순차적으로 알마 마이어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영상의 바깥에서 권은은 직접 만난 적은 없으나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영역을 알게 해준 그 게리 앤더슨을 통해, 정확히는 그의 사진과 그에 대한 그녀의 기고문을 통해 게리 앤더슨의 동생인 애나 앤더슨과 알게 된다. 권은이 그리스의 레스보스섬에 있는 대규모 난민 캠프에서 피사체로 만났던 어린 소녀인 살마를 영국으로 초청하여 뿌리 내리고 정주할 틈을 마련해준 것은 일면식도 없는 애나 앤더슨이었다. 애나가 살마에게 베풀었던 대가 없는 호의는 권은을 통해 사연을 알게 된, 승준이 프로젝트로 만난 우크라이나 여성 나스차를 전쟁터에서 잠시 피할 수 있도록 영국으로 초청함으로써 반복되고 다시 한번 확장된다. 빛의 여정의 끝에 나스차가 있었다면 멜로디의 여정의 끝에도 나스차가 있었다. 빛의 여정이 멜로디의 여정이었음을 나스차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물론 그 여정이 사랑의 여파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거기가 여정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 그 여정을 뒤쫓는 일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소설에는 꽤 많은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소설에는 알마 마이어와 노먼 마이어 가족, 게리 앤더슨과 애나 앤더슨 그리고 그의 아버지 가족, 난민 캠프로 오는 동안 가족을 잃고 이후 영국에 정착해서 학교에 다니고 시민운동을 하다가 결혼을 한 살마 가족, 약사인 남편을 전쟁터에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스차 가족, 나스차의 이웃인 옥사나 가족, 그리고 승준 가족과 마지막으로 권은 가족의 이야기가 복잡한 관계를 이루며 흩뿌려져 있고, 그들의 사연이 다소간 서사라기보다 정보로서 제시되어 있는 기도 하다.   

  물론 『빛과 멜로디』가 쉬이 읽히지 않는 것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이 연결망이 복잡해서는 아니다. 가난하고 고독했던 초등학교 시절 화자인 승준에게 선물 받은 카메라가 계기가 되어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으며, 시리아 난민 캠프로 취재를 갔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한 사진작가 권은, 사재를 털어 마련한 구호품을 트럭에 싣고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다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숨진 유대계 미국인 퇴직 의사 노먼 마이어 등 단편 「빛의 호위」와 소재와 모티프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두 작품은 완전히 다른 창작의 방식을 구사한다. 단편소설 「빛의 호위」에서는 장편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는 호의의 연쇄, 장에게서 출발해 알마 마이어와 노먼 마이어를 거쳐 헬게 한센과 권은 그리고 화자인 ‘나’-승준에게로 이어지는 빛의 여정이 비교적 뚜렷한 선을 그리며 가로지르고 있으며 여러 인물과 사연이 원근법적인 조망 속에 배치되어 있다. 

  『빛과 멜로디』에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화자가 따로 없으며 언급된 많은 인물이 자신의 목소리로 발화하고 있는 듯 서술되어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차별적 면모를 보여주는 주목해야 할 특징이다. 무엇보다 어떤 서사적 역할도 하지 않는 인물들, 말하자면 서사적 잉여로 불릴 법한 이들의 대한 자세한 소개는 독서를 지연시키는 동시에 다른 작업의 시도로서 의미를 갖는다. 게리 앤더슨과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그의 아버지로 독일 드레스덴에 소이탄을 퍼부은 영국 공군 소속 조종사 출신인 콜린 앤더슨(2022. 7. 21.)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영국으로 온 나스차(2023. 1. 16.) 그리고 나스차의 이웃 할머니로 전쟁터에 남겨진 러시아 출신의 옥사나(2023. 2. 13.)의 목소리와 그 사연은 『빛과 멜로디』가 호의의 궤적으로만 이루어진 낭만적 세계에 대한 기록이 아님을 보여준다.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전쟁의 폭력을 가해자의 자리에서 행사했던 이의 목소리와 잔혹한 굶주림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 참혹함을 기록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그 죽음을 기억하는 이의 목소리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강력한 의지의 표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의 전언에 따르면, 이들은 태생이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며, 가난과 전쟁과 폭력적인 상황이라는 조건은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행운을 통해서나 간신히 비껴갈 수 있는 개인 너머의 것이다. 

  『빛과 멜로디』는 픽션이 불가피하게 선택해야 할 힘의 위계, 서사의 주요 인물과 주변에 놓인 인물 사이의 위계를 거부하며 인물들의 사연을 동일한 무게를 갖는 증언이자 기록으로 다루면서 소설 전반에 걸쳐 배치한다. 소설은 빛과 멜로디의 여정이 가닿는 사람들, 그들이 공유하는 사연들을 풀어 놓으며, 각각의 에피소드에 동등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소설 내에서의 기능적 중요도가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무게, 그 역사의 무게가 갖는 비교 불가능성을 지면의 할애를 통해 구현하고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렇게 서사의 본래적 폭력성에 대항한다. 일기 혹은 편지 형식으로, 블로그를 통해 줌을 통해 전해지고 되돌려지는 목소리로, 시간의 흐름을 끊어내고 서울, 런던, 레스보스섬, 가자지구, 바그다드, 브뤼셀, 우크라이나를 연결한다. 다양한 방식의 기록을 통해 증언하고 부재와 현존을 연결시킨다. 전쟁과 폭력 그리고 무고한 죽음에 맞서는 픽션 열망은 그렇게 소설을 “근본적으로 수평으로 구축하는 방식”5)을 통해 구현된다. 픽션에 대항한 픽션이라고 불러도 좋을 『빛과 멜로디』는 증언의 윤리를 획득한 그 세계 안에서 누구도 주인공은 아닌 채로 권은을 포함한 인물 모두를 성장시킨다. 

  • 1)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문학동네, 2023, 82쪽.
  • 2) 자크 랑시에르, 최의연 옮김, 『픽션의 가장자리』, 오월의봄, 2024, 150쪽.
  • 3) 조해진, 빛과 멜로디 , 문학동네, 2024, 172쪽.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성찰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피사체와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거리낌없이 촬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거리는 결국 냉정함의 거리라고 여기지 않은 도리가 없었고, 그런 생각은 셔터를 누른 이후 피사체가 살아갈 실제 삶에는 무심했다는 자각,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진을 위해 한 사람의 고통을 이용해온 건지도 모른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빛과 멜로디 , 60쪽.
  • 4) 자크 랑시에르, 최의연 옮김, 『픽션의 가장자리』, 오월의봄, 2024, 150쪽.
  • 5) 자크 랑시에르, 최의연 옮김, 『픽션의 가장자리』, 오월의봄, 2024, 189-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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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소설의 상상력 ― 조해진, 『우리 세희』

그럼에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그럴 때 내가 떠올리는 것은 슈테판 츠바이크, 파울 첼란, 장 아메리, 프리모 레비 같은 ‘디아스포라 지식인 선배’들이다. 그 ‘선배’들은 하나같이 인간성이 지닌 외면하고 싶은 추악함과, 그럼에도 희미하게 빛나는 숭고함에 관한 깊은 고찰을 남기고는 스스로 삶을 저버렸다. 나는 ‘디아스포라’라는 존재를 정의할 때 이런 의미를 넣어도 좋겠다고 몰래 생각해 본다. 디아스포라는―그 일부 지식인은―‘인간성이라는 심연까지 도달하는 말들을 남기고 자살하는 존재’이다.1) 역사 내 인간이 기다리는 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해진의 소설은 주로 국가와 민족 같은, 경계를 통해서 타자화되는 존재들에 대한 탐문으로 쓰여왔다. 타자의 탄생은 보통 폭력의 주체를 고발하는 일과 동시에 이뤄진다. 소설의 형식과 내용에 비해 단순한 표현이겠지만 조해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세계 내 타자에 대한 주목과 문제 제기를 위해서 쓰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을 두고 누군가는 역사와 소설의 관련성을 질문하며 팩션faction으로서 이야기의 가치를 논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실제 역사를 소설의 배경으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역사 서술 주체에 따른 타자화의 문제 및 그 시대의 주된 이념과 가치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해진의 소설이 실제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삼아 그 시대를 살았음직한 인물을 내세워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기왕의 의미 자체를 허무는 무엇이다. 주체와 타자, 이념과 반-이념, 선과 악, 행과 불행 등 인간 사회가 이분법적으로 만들어놓은 의미의 경계를 무화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것. 달리 말하면, 기억들의 사이를 벌려놓으면서 지나간 일들이 매끄럽게 하나의 사건으로 봉합될 수 없게 만드는 감각적 존재를 관찰하고 그들의 연결이 빚어내는 새로운 해석, 혹은 세계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하는 데 그의 소설의 독보적인 존재 의미가 있다. 조해진의 소설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그때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역사서의 구성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역사가 선조적인 시간을 따라 사건을 나열하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명백하게 기술하는 텍스트라면 조해진의 소설은 나열된 시간의 한 지점에서 전후좌우의 지점으로 이동함으로써 특정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다각도에서 살펴보게 한다. 그로써 소설은 역사에 이론異論의 여지를 마련하기보다 이론으로서 역사를 새로 쓴다. 「우리 세희」에서 “엄마가 선생님의 형과 달리 정치 스파이로 조작되지 않았던 건 결혼이라는 제도와 국적 변경 덕분이었음을 알게 됐다”(170쪽)2)는 “연주”의 고백으로 쓰이는 역사의 한 국면이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여동생의 자유로운 삶을 지켜주기 위해 자진해서 북으로 건너간 오빠(연주의 외삼촌)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세희”(연주의 엄마)는 부모에 대한 원망과 주체적인 삶을 어느 정도 체념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고 남한으로 이주한다. 대문자 역사는 국경을 넘는 이들의 심경까지 기록하지는 못하며, 합법과 위법의 경계로 그들의 행위를 판별할 뿐이다. 하지만 개인의 삶이 지닌 불안과 체념, 긍지와 보람은 법의 판단과 무관하게 이뤄지기도 한다. 결혼과 국적 변경이라는 제도에 의해 겉보기에는 비교적 안온한 삶을 살았던 것 같은 ‘세희’가 과연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오빠보다, 혹은 감옥에 갇혀서도 이념에 투항하지 않은 “선생님”의 형보다, 아니 그들 삶과 자신의 것을 경계 지으면서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은 이처럼 대문자 역사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세세한 질문들을 새로 새긴다. 내력과 박력이 충돌할 때 「우리 세희」에서 세희는 소설의 초점 화자 ‘연주’의 엄마다. 소설의 현재 시점에서 이미 죽은 엄마는 ‘나’의 매 순간을 함께한다. 취재차 영국에 간 ‘나’는 담배를 피우러 호텔 밖으로 나갔을 때, 다국적 기업인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을 때 노골적인 차별을 경험하는데, 그때 내가 내뱉은 “연기”(172쪽) 속에, 혹은 사과를 요구하는 내게 카페 직원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사과하며 “옅은 한숨”(205쪽)을 내쉬는 것을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 ‘이국의 습한 공기’ 속에도 엄마의 숨이 섞여 있다고 여긴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 그리움처럼 떠오를 만한 순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혹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같은 아시아인 여성을 무시하는” “이주민인 그녀”(204쪽)를 보고 엄마를 포함한 역사상 모든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을 혐오와 차별이 헤아려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은 그러한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들숨과 날숨, 눈물의 성분 같은 것에 ‘엄마’가 포함되어 있다고 쓴다. 오래전 내가 엄마의 몸에서 빚어져 나왔지만 이제는 엄마가 내 몸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감각은 기왕의 역사관을 뒤집고 거스르는 소설의 관점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연결감’의 한 비유로서 쓰인다. 실제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과 연결된,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영향 속에서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중요하게 말한다. ‘나’만 하더라도 “자이니치[在日]”(176쪽)였던 엄마와 외삼촌, 나아가 외조부모의 삶에 깊이 영향받은 존재이며 그 영향력은 “제이비 류”라는 “일본계 영국인” 예술가의 전시에 관련한 기획서를 제출하고 취재를 위해 먼 나라까지 오가는 일을 자처하는 ‘나’의 오늘로도 증명된다. ‘나’는 “1940년대 후반 제주를 혼란에 빠뜨린 제노사이드”를 다룬 그의 작품에 주목하면서, 어쩌면 “그의 가계가 한국과도 연관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167쪽)으로 인터뷰를 기획하는데 이 만남은 주목받는 예술가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경험한 가계 속에서 성장했을 또 다른 ‘나’의 비언어적 발화에 관한 이끌림처럼 보인다. 그 예로 ‘나’는 그의 전시를 관람하며 죽음을 소리로 풀어내고 그 “압도적인 소리가 귀가 아닌 온몸으로 흡수”(198쪽)되는 체험을 한다. 그 신비로운 체험은 ‘나’에게 ‘선생님’의 환영을 보고 듣게 한다. 실제로는 병원에 누워 있을 ‘선생님’이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듯 나타나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독자는 환영이라는 말의 다의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허상이라는 점에서 환영幻影이지만, “소리가 안내하는 긴 여정”(204쪽)을 따라 살아 있는 죽음, 혹은 죽음에 가까웠던 삶 그 자체였던 ‘선생님’이 되어본 듯한 체험을 통해 ‘나’ 역시 디아스포라로서 살게 될 것을 예감했다는 점에서 이는 그들과 이어질 삶에 대한 역설적 환영歡迎이기도 하다. “우리 세희”는 세희를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가 그녀를 애틋하게 부르는 말이기도 하지만[“우리 세희는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자고, 세희에게는 그 무엇도 강요하지 말자고”(182쪽, ‘나’의 외삼촌이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했던 말)] 세희와 그의 딸 연주가 동일한 정체성으로 연결되어 ‘우리’라는 대명사를 무리 없이 쓰게 된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으로도 볼 수 있겠다. 연주는 그녀의 방식대로―제이비 류의 작품 같은 비언어적 세계의 문법을 동원해―세희의 삶을 이어서 산다. 그 연결은 구체적인 기억을 통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식적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처한 현재의 특정 순간들이 엄마가 들려준 기억과 증언을 불현듯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엄마와 딸은 생사로 나눠진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만, 기억(의식)뿐만 아니라 딸의 숨결과 눈물(무의식) 같은 부분으로 엄마라는 세계, 자이니치와 같은 개별적 삶의 조건이나 정체성이 유전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주는 자신의 엄마와 외삼촌, 나아가 외조부모의 불행한 삶의 조건들을 그 자신으로 증명할 뿐만 아니라, 엄마가 돌아가신 후 부모처럼 여기게 된(이와 연관한 연주의 고백은 반대로 자식이 없는 ‘선생님’과 ‘센세’가 자신을 딸처럼 여긴다는 진술로 쓰인다)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로도 기록한다. 이렇게 「우리 세희」에서는 어떤 삶에 가해지는 폭력과 배척보다도 그 삶들의 연결이 강조된다. 세희는 죽기 전 연주에게 자신의 삶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들려주려 했으며(“마치 도서관이나 박물관의 자료를 다른 건축물로 이전하듯이”, 181쪽), 엄마의 오랜 인연으로 알게 된 ‘선생님’ 부부와 ‘나’의 관계 역시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각별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중심 기둥 역할을 한다는 데서 작가가 이 두 서사를 특별히 강조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엄마와 선생님 부부는 ‘나’의 삶의 증인들이자 ‘나’로 하여금 ‘나’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해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이니치라는 개별적이자 보편적인 삶의 형식과 내용을 전수하면서 삶을 지탱하는 조건에 무심하지 않도록, 어떤 삶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역할을 한다. 몸이 하는 말 소설의 현재 시점상 연주는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3의 국가인 영국에 잠시 체류 중이다. ‘제이비 류’의 전시를 관람하고 그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녀가 먼 이국으로 떠난 이유를 그렇게만 설명할 수는 없다. 때와 장소를 차치하고 이 소설 속 인물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모국에서 이국으로 이동하는 데에서 생사를 가를 정도로 중요한 삶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녀의 이동 역시 출장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제이비 류가 1940년대 후반 제주에서 있었던 제노사이드를 다룬 작품을 신작으로 발표한다는 데에 연주가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도 있는 두 삶의 조건을 암시하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 된다. 이 사건은 불가해한 역사의 어떤 국면들을 마주하는, 우리에게 일종의 지침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연주는 제이비 류의 작품을 보면서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이해나 시각적 정보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녀는 청각과 촉각을 통한 유일무이한 경험을 한다. 앞서 보았듯 그녀는 전시실에서 ‘선생님’의 환영과 대화를 나누는 영적 체험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알고 있는 ‘선생님’의 고통을 이어받는 경험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지 못한 ‘선생님’은 파친코에서 일하며 지하의 좁은 숙소에서 지냈는데, 그곳에는 “관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상상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거기에서 “형이 고문받고 구타당하는” 것을 상상하면 실제로 침에서 “피 맛”이 났고, 몸을 말고 누우면 “내장이 타들어가는 소리”(200쪽)가 들려왔다. 이렇게 연주는 제노사이드를 다룬 제이비 류의 작품을 통해 ‘선생님’과 선생님의 형 등 고통받는 존재들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 연결은 감각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상상으로만 가능하다. 이처럼 소설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쓰인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퍼진 반전운동의 영향권 안”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 국가들을 향한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를 너무 쉽게 망각하고 합리화해버리는” 기성세대에 대항해 “정의롭고 싶은 학생들의 열기로 팽만해”(176쪽) 있던 일본 사회에서도 자이니치에 대한 대우는 비인간적이었다. 이국에서도 조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던 그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사랑을 나누고 희망을 품음으로써 차별과 혐오를 통한 고통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었다. 조해진의 소설이 보여주듯 개인의 의지를 초월하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을 하고 새로운 고통을 낳는 역사에 대한 기록은 말보다 몸으로 쓰이는 것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형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이 두들겨 맞은 듯한 고통을 감각했듯, “사람의 몸이란 기본적으로 따뜻하다는 것”(201쪽)을 일깨워주는 상대에 기대어 사랑을 감각했듯 말이 가닿지 못하는 곳에 몸이 먼저 도달해 있다고 소설은 거듭 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는 한국어로 말했는데, 언어를 바꾸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었다. 선생님이나 센세와 대화할 때면 일본어를 주로 구사하다가 감정 형용사만은 한국어를 쓰곤 했고, 엄마와는 그 반대였다. (168쪽) ‘선생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멀리 있는 ‘나’에게 알려온 ‘센세’에게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전하는 부분이다. 엄마가 죽고 흡사 고아와 같은 처지인 ‘나’에게 선생님 부부가 부모와 같은 존재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나’의 “미안해요”라는 표현에는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못하는, 바로 이 말로밖에는 전할 수 없는 ‘나’의 본연이 내포되어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달리 말해 ‘나’의 몸이 하는 말이자 홀로 ‘선생님’의 침상을 지키며 극도의 불안과 외로움을 견디는 중인 ‘센세’에게 연주가 건네는 말이며,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의 부조리한 제도에 치여 끝내 자유로운 삶을 누려보지 못한 자의 죽음 앞에서 모국어로 전하는 인사이기도 할 것이다. 상처 입은 인간에게 다른 인간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는 아마도 동족의 사회와 문화, 역사가 빚어낸 감정의 형태와 빛깔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할 수 있는 소리, 그들의 모국어가 아닐까. 아무리 외양이 닮았어도, 이름까지 바꿨어도 끝내 그 “태생”을 알릴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발음과 억양”(167쪽)이라는 조건이 있었듯이 말이다. 엄마와 아빠를 고유한 언어로, 특유의 발음과 억양으로 부르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때의 발음과 억양은 신체 그 자체다. 자신을 살린, 자신을 먹이고 가르친 존재의 영향이 몸을 이루는 낱낱의 세포가 되었을 것이다. 부모의 시간이 자식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어머니를 “오기보상[お義母さん]도 아니고 오카상[お母さん]도 아닌, 전라도 사투리 그 자체인 어무이”라고 부르는 ‘센세’와 “외할머니를 오마니, 외할아버지를 아바이, 라고 부르던 엄마”(188쪽)를 보며 ‘나’ 역시도 절로 입속에서 궁굴린 말이 있을 것이나 그 소리는 우리가 저마다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한 세계를 구원하는 말 ‘세’ 뒤에 ‘희喜’를 넣어 ‘세희世喜’를 완성한 사람은 외할아버지였다. 세이지sage의 꽃말은 ‘구원’. 그러니까 ‘세희’는 세상을, 세상에 속한 스스로를 구원하면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히로코가 그저 몸에 맞는 옷이라면 세희는 보호막 같은 옷에 가까웠다고 엄마는 말했다. 세희야, 라고 불리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고도. (207쪽) 소설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으로 꼽을 만한, 엄마와 아빠가 고심해 딸의 이름을 짓고 오빠가 그 여동생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상상을 하게 하는 부분이다. ‘나’의 엄마는 끝내 “세상에 속한 스스로를 구원하면서 기뻐”했을까. 아마도 연주가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세희’는 연주의 기억과 기록 속에서 그가 애정과 신뢰를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생전의 그녀 삶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었는지 남길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기쁜 세계이자 ‘우리’라는 감각을 공유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이 역사에 대한 전망은 이름을 지어주는 일과 그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라는 두 행위를 모두 통과해 비로소 어떤 가능성의 차원이 된다. 서로 간에 소중하게 여길 만한 가치를 전수하고(이름 짓기) 몸으로 그것을 받아안을 때(이름 부르기) 연대하는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소설의 말미에 밝혀 썼듯 작중 “서정우”의 모델이기도 한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에 대해서 그들은 “고향, 국가, 가족, 혈통 같은 허구의 관념에 믿음을 두지 않기에” 적어도 글쓰기로써 자기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다.3) 부모가 물려준 이름 외에는 아무런 “보호막”을 갖지 못했던 개인은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으며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각성은 관념을 넘어 감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 ‘우리 세희’라고 말할 때 동그란 우리는 기차가 지나가는 기나긴 길처럼 펼쳐진다. 또한 그 길은 저마다의 억양과 발음으로 휘어지고 뻗어 나갈 것이다. 그 길가 어느 한편에는 세이지 한 무더기가 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1) 서경식, 『어둠에 새기는 빛―서경식 에세이 2011-2023』, 한승동 옮김, 연립서가, 2024, 56쪽. 2) 조해진, 「우리 세희」, 『현대문학』 4월호, 이후 쪽수만 표기. 3) 서경식, 앞의 책, 58쪽.

월간 현대문학 김나영 조해진팩션디아스포라자기서사번역(불)가능성 2025
정의정 유령이 하는 일 :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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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 당신을 향한 리듬 : 조시현,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문학과지성사, 2025) / 현호정, 『한 방울의 내가』(사계절, 2025)

 문체는 단지 어휘의 선택이나 통사의 조합과 같은 수사적 기술이 아니다. 내용 위에 덧붙여진 표면적인 장식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저자의 사유와 언어의 감각이 협상되는 장소에 가깝다. 언어의 전달 기능을 초월하거나 그것에 선행하면서 주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생산·배치·조율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체는 글쓰기에 딸려 오는 부속물이 아니라 글쓰기에 내재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체는 근대성 혹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과 종종 결부되곤 한다. 근대문학은 개인의 사상·내면·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 형식으로 발달했고, 문체란 그러한 개인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현 양식의 증거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체를 문학의 깊이나 개인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곧장 연결하는 틀은, 자칫 문체를 문학의 자율성에 봉사하는 도구로 환원하거나 작가의 의도나 욕망을 재현하는 매개로 한정할 수도 있다.1) 디지털 미디어의 가속화나 알고리즘의 자동화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현재의 언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체란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운동성이 매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낯선 것으로 창안되는 ‘과정’”2)으로서의 형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근 문학에서 어휘·통사·수사·리듬 등 문체에서 창안되고 있는 여러 형식적인 시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표제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문체와 주제가 유기적이고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혼은 슈크림”(p. 311)이라는 첫 문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자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움직이는 물성에 가깝다. 영혼을 은유하는 슈크림, 콧물, 굴, 생리혈, 호두과자와 같은 사물은 모두 끈적이고 불투명하며 통제되지 않는 점액질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윤곽이 뚜렷하거나 실체가 확실한 개체가 아니라 언제든 주입되거나 흘러내릴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로서의 자아. 이것이 조시현 소설에서 자아의 기본적인 세팅이다.  이러한 은유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청각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배열된다. “철걱. 규웃, 철걱. 규웃”(p. 318)과 같은 의성어는 붕어빵에 슈크림이 주입되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인간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영혼’이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듬은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낯설게 만든다.3) 한편 본문 곳곳에서 단어가 짧게 나열되는 구조는 매끄럽게 통일되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영혼의 형상과 조응한다. “디스켓 위로 덮어 씌워지기. 휴대폰에 새로운 앱 깔기. 가벼운 멀미. 구역질”(p. 337)이나 “빵 결 같은 피부. 사소한 다툼. 매니큐어가 떨어진 손톱이나 어질러진 방. 거꾸로 벗겨진 팬티. 땀. 눈물. 머리카락. 베인 살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 나던 찝찌름한 맛.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갓 빤 이불의 냄새”(p. 349)와 같은 구절은 접속어 없이 나열되어 자아가 해체되고 기억이 충돌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술보다 신체의 반응과 인지의 충격이 부각되는 이러한 서술들은 분열된 신체 정동을 반영한다.  몸을 잃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휴먼 슈트’라는 공용 신체에 주입되어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인류의 데이터를 수집·학습·복제하려는 야심을 가진 AI ‘안젤리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덮어씌워 기계의 깊숙한 내부에 침투하여 이를 변형하려는 나진의 시도는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질문하며 그 감염에 기꺼이 몸을 열어두려는 감각적인 개입이다. 나진이 사랑하는 마디를 떠올리며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pp. 318~19)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란 처음부터 고립된 개체 단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상호적으로 침투·조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빚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p. 319)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시현의 소설에서 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접촉과 흔적이 만들어내는 공동 감각의 매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휴먼 슈트는 단순히 몸의 대체물이 아니라,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이 누적되지 않는 몸. 삶이 새겨지지 않는 몸. 역사가 없는 몸”(p. 326)은 기억·감정·경험을 저장하지 않는 저장소로서, 감각의 층위로서의 몸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자아란 흘러들고 주입되며 끈적하게 뒤엉키는 점액질의 덩어리이고, 그 표면은 타자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영혼은 영혼과 기계를 오가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진동한다. 조시현의 소설은 자아의 존재론이 서사 이전에 문장의 리듬, 어휘의 질감, 감각의 배열에서 형성되는 문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  현호정의 소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퍼서 혹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밀도 높은 긴장을 머금은 채로 저마다의 리듬과 운율로 움직이고 있어서다. 첫번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은 문체가 압도하는 소설이다. “가족들 친구들 다 수장된 바다 위에 머리만 동동 뜬 채 살아난 기분 헛되고 어이없고 기가 막혀…… 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pp. 54~55)  눈에 띄는 것은 미완결이거나 비문법적으로 해체된 문장이다. 물에 잠겨 바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울고 괴로워하는 이 장면에는 문법적 빈틈이 보인다. 서로 다른 품사가 병치되어 있거나(“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조사가 생략되어 있거나(“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쉼표 없이 같은 품사의 어휘가 병렬되거나(“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종결어미 없이 끝나는(“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식이다. 이렇게 분열되고 파열된 문장들은 ‘나’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토록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많은 것이 죽고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 여전히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서술로 끝맺어진다. 이 목소리는 문장의 종결을 지연하면서 이어지고 늘어지다가, 매끈하게 완결되거나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어디론가 열려 있는 채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의도적으로 흔들거리는 문장들은 숨 쉬고 아프고 배고프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틈을 사이사이 벌려놓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문장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듯 적혀야 했을까? 적어도 고정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음운·음절·어휘·어구가 중첩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이어지던 인류세는 느른히 늘어져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는 살아남아 기쁘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p. 53)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은 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생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이응, 미음, 리을이 굴러가듯 이어지고(“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라는 음절이 반복되면서 강세를 형성하며(“차례차례 차차 잃고”), 발음이 유사한 어휘가 흘러가듯 연결되면서(“느른히 늘어져”) 문장이 특정한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졌다가 흘러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만이 아니라 (특히 스스로가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믿는 부랑자가 전해주는 지구의 목소리에서) ‘-고요’ ‘-답니다’ ‘-봐요’ ‘-습니까’ ‘-니까요’ ‘-게요?’ ‘-데요’와 같은 구어체의 종결어미가 변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변주되면서 종결부의 여운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렇게 중첩·반복·변주되는 문장은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리듬은 구두점이나 쉼표 같은 기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이나 어휘의 단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재해로 온 땅이 바다에 잠기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멸종한 이후,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바다에서 시체가 분해된 유기물 뭉치로부터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생체와 기생체로 이루어진 기생 쌍둥이로 자라났고, 서로를 갉아 먹고 양분으로 삼는 기생체들의 죽은 몸이 서서히 흩어지자 ‘나’가 자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생겨났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바로 이 문체에서 얻어진다. 아주 미세한 사이즈의 미생물과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인 지구가 하나의 존재로 겹쳐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 몸을 불리면서도 서로를 잉태하여 다시 몸을 나누는 관계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면서 다른 생명과 휘감겨 들러붙은 끝에 지금 여기의 ‘나’가 있다는 역사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끝없이 유동하며 이어지는 문장의 율동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율동성 없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사유4)와 더불어, 생명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상상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라는 고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파열된 자리에 수많은 죽음을 지나 순환해온 우리와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유. 그것은 이 소설의 운동 방식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죽음, 더 정확히는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생성·지속·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은 현호정 소설을 하나로 꿰는 가장 근원적인 주제이지만, 「청룡이 나르샤」는 죽음에 얽힌 정동을 기계라는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각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와 ‘죽으러 가는 열차’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요약해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열차에 매료된 삼십대 여성 K와, 곧 폐전기동차가 될 4호선 열차 ‘납작이’의 시점은 각각 좌우 다단으로 병치된다. 마치 기차선로처럼 나뉘어 있는 병렬 궤도에서 K와 납작이의 목소리는 열차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그러나 각기 다른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흔히 기차는 근대적인 시간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철도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지방시를 표준시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기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해, 기차는 미래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시간성의 은유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청룡이 나르샤」의 열차는 무언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판형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선로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윤회의 궤도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납작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오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납작이를 마치 연료처럼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다. 이 모든 질주가 당신에게 가기 위한 꾸준한 운동임을 심박수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상기하면서 납작이는 종착을 향해 움직인다. 왼쪽 선로에서 납작이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른쪽 선로에서 K의 목소리는 비교적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린다. 열차에 탄 승객(“옷”)과 좌석(“므”)을 상형문자처럼 표현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간중간 변칙적인 강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울증적인 시간을 겪고 있는 K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뒤섞인 감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혼자 기획하면서도 희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K는 시무룩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버스나 택시는 무서워했으면서 유독 열차에게서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렬하게 느껴온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정신과 상담 선생님에게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털어놓기도 한다. K는 전류가 더는 공급되지 않는 열차를 상상하면서 자살을 꿈꾼다. “전 멈추고 싶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아뇨. 지금요”(p. 149). 생산된 지 30년이 되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열차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삼십대 여자.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 엉키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납작이는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열차는 납작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 열차도 푸른색일 것이다. 마침내 일어나 몸의 나머지 절반을 객실로 들여놓은 납작이는 곧 자신이 탄 열차의 낮고 고른 덜컹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열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 여정은 끝내주게 평안할 것이다. 평안한 가운데 납작이는 자기가 열차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쁠 것이다. 므므므 옷 (pp. 167~68)  여전히 선로 위에 있지만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납작이는 폐차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멈추지 않고 K를 지나친다. 그러나 서두르는 승객들을 태우면서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달린 자신에게 이제는 느려져도 된다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모두 지켜냈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K의 응원을 듣기라도 한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멈춰 선다. 지면상으로 바로 같은 시점, K는 납득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다가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늘어져 있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다른 푸른 열차를 타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앞서의 불규칙적인 리듬과는 달리, ‘~ 것이다’라는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납작이가 느려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딱 그 속도만큼, 이 소설의 속도도 서서히 늦춰진다. 오른쪽 선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K의 죽음 충동을 왼쪽 선로에서 달리고 있는 납작이가 이어받듯이 영원처럼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평생 정해진 구간의 종착만을 반복하며 어디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납작이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종착이 아닌 도착에 도달한다. ‘파랑 씨Mr. Blue’라는 호칭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를 마주 보며 흐르는 밥 딜런과 캐서린 피니의 노래처럼,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의 다른 속도에 기대어 나란히 순환한다. 어쩌면 납작이는 K의 죽음 충동을 대신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리도 치환도 아니다. 당신에게 가려고, 더 느리고 천천히 가려고 부단히 흘러온 여정.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 속도를 늦추면서 죽음에 도착한 끝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영원한 운행 기록이다. 1) 이은지는 “문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단발적인 자극과 즉물적인 효능감을 요구받는 문학 창작물에서는 묘사가 희박해진다는 한영인의 논의를 경유하여, 오늘날 문학에서 문체가 점차 고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이은지, 「문체의 역사성과 문학성—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소고」, 『쓺』 2025년 상권, pp. 62~63; 한영인,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pp. 177~78 참조) 2) 권희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정화된 밤』, 문학동네, 2022, pp. 462~63 참조. 3) 전청림은 이 소설이 “환유적 이미지와 의성어, 리듬의 풍부한 활용으로 경계적 글쓰기를 돋보이게” 했다고 평하면서 조시현 소설에 나타난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한 바 있다(「달고 끈적한 체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p. 366 참조). 4) 현호정의 소설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비평으로는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2)」,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강지희, 「세 마리의 새」, 웹진 〈비유〉 2024년 7/8월호, 성현아, 「액화된 몸으로 다시 쓰는 창세기」,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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