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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자음과모음 | 2024년 봄호(제60호)

저성장 시대의 우울과 향기와 유머 :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박다솜 문학평론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네가 틀리는 곳에서 나는 옳다」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연대가 분열할 때―이미상론」으로 2023년 제1회고석규신인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5%를 넘은 적이 없다. 경제성장률의 하락과 함께 상상력도 쇠퇴했는지,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는 마크 피셔의 진단은 지나치게 정확해서 뼈아프다. 응모된 “2651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백이 많았다는 사실”임을 지적하는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에서처럼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는 이와 같은 우울한 현실 인식을 착실히 담아내고 있다. 퀴즈를 맞히면 여의도 아파트를 주던1) 넉넉한 시절은 저물고, 지금 우리는 높은 물가와 낮은 실질임금, 초고령화와 초초저출산, 수도권 인구 집중과 지방 소멸 등으로 건설적인 미래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그리면서 한껏 유머러스한 시가 있다면, 그 유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고선경의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읽는 독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다.

    Mnet의 흥행 프로그램이었던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패러디한 시 「스트릿 문학 파이터」는 고선경 시의 정체성이라 할 만한 우울과 유머의 혼합의 정수를 보여준다. “세계 최초 시 서바이벌 오디션”을 자처하는 ‘스트릿 문학 파이터’는 최고의 시인을 뽑는 가상의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오디션은 ‘금지어 미션’이라면서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이라는, 우리 시가 사랑하는 단어들을 한데 모아 금지한다. 그러자 습작생들은 탄식하고 “심하게 좌절한 습작생의 경우 상담 치료를 신청하기도”한다. 프로그램 방영 이후 “디시인사이드 문학 갤러리”에는 “문학 한다는 새끼들이 그저 상금 보고 나옴 ㅁㅌㅊ?” 와 같은 글들이 올라온다. 프로그램 안에서 습작생들은 저마다의 시론을 역설하기도 하고, 프로그램을 비판하고, 제작진과 갈등을 겪으며, 울고 탈락하고 퇴소하고 끝내 우승한다.

    그러나 시는 이 모든 소동에도 불구하고 우승자인 “K의 블로그 방문자 수가 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고 말한다. 우승자 K가 받은 많은 축하와 여러 방송 출연, 각종 문예지에 시 발표, “재치 있는 발상과 첨예한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 따위의 성과들은, 이어지는 구절 “우승 상금 일억 원은 큰 액수였으나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는 아니었고 인생을 뒤바꿔줄 액수도 못 되었다 세금을 제하면 더욱 그랬다”에 의해 평가 절하된다. 결국 끝에 가서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 모든 성과가 재평가되는 배금주의의 한 풍경을 그린다는 점에서 「스트릿 문학 파이터」는 “우리 시대 시의 곤경”2)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자체의 곤경을 형상화한다.

    어쩐지 과거에 비해 돈은 더 중요해진 것만 같고, 돈이 전보다 더 중요해진 꼭 그만큼 갖기도 어려워진 세상이다. 이번 주 로또 1등이 되어도 인생 역전은커녕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을까 말까 한다. 이렇게 보면 지난주 로또 당첨금 18억은 “큰 액수였으나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는 아니었고 인생을 뒤바꿔줄 액수도 못 되었다 세금을 제하면 더욱 그”렇다. 나의 하루하루를 갈아 바치는 성실함은 안정된 일상이 아니라 근근한 연명 정도밖에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직업과 재산의 위계화는 촘촘히 이루어져서, 무한히 계급이 나눠지고 내가 속한 계급이 위로부터 혹은 아래로부터 몇 번째 구간인지가 공공연한 사회. 탄핵으로 대통령은 바꿀 수 있어도 내 월급의 앞자리는 바꾸기 어려운 세상.

    이런 현재의 상황 속에서, 시집이 묘사하는 과거는 왠지 아름답게 느껴진다. 땀과 흙이 뒤엉킨 체육대회와 열대 과일 맛이 나는 슬러시(「여름 오후의 슬러시」), “우리가 주고받은 핑크색 종이쪽지들”과 교환일기(「유통기한이 지난 약은 약국에 버려주시면 됩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2000년대와 2010년대” 그리고 “MP3에 들어 있던 옛날 노래들”(「숨어 듣는 명곡」). 하지만 고선경에게 과거란 그리 손쉽게 미화될 수는 없는 것이라서, “학생부실로 나를 데려간 음악 선생님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라는 의문은 “음악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맞아 죽었겠지”(「우리의 보사노바」)라는 깨달음과 나란히 놓인다. 시의 화자는 음악 선생님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음악 선생님이 학생부실로 데려가주지 않았더라면 맞아 죽었을지 모르는 상황과, 그런 상황을 음악 선생님이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수치심이 싫었던 것일 테다.


죽을힘을 다해 살아야 하지 죽을힘으로

죽으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거짓말


나는 살아남아

시인이 됐다


처음으로

뭔가가 되어봤다


— 「숨어 듣는 명곡」 중에서


    그러니 「숨어 듣는 명곡」의 화자가 “시인이 됐다”라는 술어의 앞에 ‘나는 커서’나 ‘나는 자라서’가 아니라 “나는 살아남아”라고 적는 것은, 그가 지나온 어떤 시절이 “죽을힘을 다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임을 역설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과거는 현재와 달리 미래에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만(그래서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와 다를 바 없이 내내 폭력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샤워젤과 소다수』에서 유머가 하는 중요한 일 하나는 세상의 기준을 되묻는 것이다. 「알프스산맥에 중국집 차리기」의 도입부에는 시의 화자가 은근슬쩍 눙치는 동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암묵적 원리가 환하게 폭로되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아르바이트를 잘리고 가게를 나서기 전

얼음물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물었다

물을 마시면서

세상에는 야무지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겁니다

쯧, 훈수를 둔 뒤 사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 「알프스산맥에 중국집 차리기」 중에서


    아르바이트를 잘린 주제에 빨리 가게에서 나가지 않고 “얼음물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묻는 것도 어딘지 발칙한데, 시의 화자는 여유롭게 얼음물을 마시면서 “세상에는 야무지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겁니다 / 쯧” 원치 않았던 훈수를 두고 사장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까지 해준다. 어딘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이 장면은 무슨 일이든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으로, 빨리빨리,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는 한국식 강박을 지적한다. ‘사람을 쓰다 보면 야무지지 못한 사람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철없는 사장님아’라고 어른스럽게 말할 줄 아는 위 시의 화자는 “몬스터를 가여워하거나 귀여워하지 않는 것까지가 영웅의 자질인 걸까? 그런 자질까지 갖춰 꼭 영웅이 되어야만 하나?” 묻는 「무대륙」의 화자와 목소리를 공유한다. 자본주의와 결합한 능력주의·효율주의는 야무지지 못한 사람들이나 약자(몬스터), 약자를 가여워하는 사람들을 간단히 배제하곤 한다. 이는 고선경의 시적 화자가 “세상이 똑바로 흘러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옥수수 알갱이처럼 가벼운」)인 이유다. 똑바로 흘러가는 세상이란 결국 “죽을힘을 다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야무지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해고하는 세상일 테니 말이다.

    『샤워젤과 소다수』에서 포착되는 독특한 유머 감각은 이처럼 일상 자체가 하나의 미션이 되어버린 현실과도 연관되어 있다. “제일 잘하는 게 뭐야? 물을 때 / 일상이라고 대답하는 네가 좋았다”라고 말하는 「여름 감기」는 일상이 습관처럼 흘러가는 시간의 연쇄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해내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준다. 마크 피셔가 꿈꿨던, 자본주의 너머를 진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은 외려 보장된 미래 속에서만 마련되는 것은 아닐까. 일상이란 너무나 당연하고 안정적인 것이라서, 일상을 해낸다는 말이 도무지 이상하게만 들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먼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힘을 낸다’라는 보편적인 독해 뒤에서 시집은 ‘오늘치의 웃음만이 허용된 현실’을 다룬다. 우울한 현실에 대한 무거운 토로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슬픔이 많은 사람이 슬픈 이야기를 하면 부담스럽단 말이야”, 「세나 나나 나나세」) 속에서 웃음은 어쩌면 불가피한 생존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시집의 언표를 통해 살펴본 유머의 의미라면, 언표 행위의 주체인 시인에게 유머란 무엇인지도 덧붙여두고 싶다.



상상한 모습과 다를 겁니다

잘 익은 알밤을 쪼개면

알맹이가 상해 있기도 하듯이


열매의 안쪽에서 꿈틀대는 벌레가

사랑의 형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 「별사탕과 연금술사」 중에서


    잘 익은 알밤을 열었더니 상상한 모습과 달리 알맹이는 상해 있고 벌레까지 꿈틀댄다. ‘실망’이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이는 이런 상황을 시는 오히려 “사랑의 형상에 가깝다”고 말한다. 「별사탕과 연금술사」에는 이런 장면의 전환이 가득하다. 금도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가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기로 한”다거나, “선량한 이웃들”이 선량하지 못하게 “가끔 / 집 앞에 노란 침을 뱉고 가”고,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겠다더니 “당신의 마음에서 돌을 꺼내 내게 주”면 “그것을 깨뜨려 별사탕으로 만들 줄” 안다고 말하는 식이다. 시인에게는 하나의 상황이나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그래서 시는 무게 추를 왔다갔다 움직이며 울다가 웃다가 우울하다가 향기로워진다. 기대를 무너뜨리며 밤 안쪽에서 꿈틀대는 벌레가 어쩐지 징그럽게도 귀여워 끝내 사랑스러워지는 것처럼, 고선경의 시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자리바꿈은 어쩐지 사랑스럽다.

    『샤워젤과 소다수』에서 유머는 이처럼 시적 발화의 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까닭에, 상충되는 여러 장면과 감각들을 인과관계를 설정하여 하나의 내러티브로 읽으려는 시도는 잉여 지점을 늘 남겨두게 된다. ‘하루치의 웃음밖에 허용되지 않는 막막한 현실이 슬프다’와 ‘이런 슬픔 속에서도 나는 웃을 수 있다’는 택일될 수 없다. “여러 사람이 사용한 수건들이 하나의 빨래통 안에서 뒤섞이는 광경”처럼 “내가 가진 여러 기분이 한 통속이라는 것을 떠올리”(「사랑의 달인」)며 시인은 한 통 속에 담긴 여러 기분의 뒤얽힘을 언어화한다. 그러니 이 모든 감각과 기분의 향연이 고선경의 시 세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시대의 핍진한 반영이자 하나의 영민한 문학적 전략으로써, 세상은 우울하고 나는 웃고 미래는 막막하고 나는 향기롭다. 그리고 이것이 『샤워젤과 소다수』가 보여주는 “향기로운 헛것”(「시인의 말」)일 테다.

  • 1) 1991년부터 1995년까지 SBS에서 방영한 TV 프로그램 〈알뜰 살림 장만 퀴즈쇼〉는 냉장고, TV, 세탁기 등 고가의 경품을 걸고 퀴즈를 맞히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연말 왕중왕전에서는 여의도의 아파트가 경품이었다.
  • 2) 박상수 해설, 「망할 세상에서 농담하기―스트릿 문학 파이터 분투기」, 『샤워젤과 소다수』, 문학동네, 2023,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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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월간 현대시 박다솜 김혜순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말미잘시하다모든 종류의 슬픔 2025
신은조 밝고 수다스러운 세계에서 살아남기 :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5) /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열림원, 2025)

1. 젊은이가 아니라 모두의  젊은 세대의 풍조를 향한 기성세대의 염려 섞인 목소리는 언제고 존재했다지만 MZ를 향한 그것은 조금 커 보인다. 이와 같은 우려의 밑바탕에는 결혼이나 독립 같은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시기가 이전에 비해 확연히 지연되는 경향이나, 대기업의 취업 경쟁률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데에 비해 중소기업은 인력난을 호소하는 역설, 젠더에 따른 정치적 성향의 양극화가 사회적 현상으로 명명되는 상황 등의 통계·사회적 ‘사실’이 있는데, 이는 다시 초저출생, 역대 최고의 비경제활동인구 비율 등 갖가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결국 MZ의 몫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므로 ‘MZ’는 단순한 세대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멸칭으로 변모한다.  기실 1980년대생부터 2000년대생까지를 전부 한 세대로 묶어 부르는 일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에 출생한 담임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2000년대생의 입장에선 조금 당혹스러운 시도가 아닐 수 없겠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전 세대’와 ‘현세대’ 간 차이에 관한 농담에 공감하고, ‘이전 세대’의 지시에 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이상 ‘MZ스러움’이라고 일컬어지는 속성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워라밸’ 등의 키워드에서 드러나는 개인주의적 관점, 기존 질서 체계에 협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과 선을 긋는 태도, ‘비혼’이나 ‘딩크’의 유행으로부터 미루어볼 수 있는 자기 안위 중심의 가치관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한정된 에너지를 주어진 과제나 언젠가 도래할 장밋빛 미래에 투자하기보다는 자신의 존재 보전에 안배하려는 태도는 일견 매사에 ‘책임감 없이’ ‘대충’ 임하는 것처럼 비치기 쉬운 탓에 MZ 세대에 대한 오해를 한층 더 깊어지게 만들곤 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다. 이러한 속성들이 과연 ‘지금 젊은 세대’만의 특징일까?  물론 세계에의 불만을 토로하고, 내심 ‘변화’를 소망하는 목소리가 젊은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을 단지 ‘젊은 세대의 몫’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젊은 세대’가 사회제도의 정의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범주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단순히 철없는 젊은이의 치기로 격하할 뿐만 아니라 연령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세계와 불화하는 이의 고통을 단지 개인의 정서적인 흠결 탓으로 귀결시키기 쉽다는 점에서 그들에의 적극적인 타자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MZ스러움’은 특정 연령대나 세대의 기질적인 본성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태도 중 하나다. 일찍이 ‘꼰대’라는 단어가 그렇게 되었듯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에 이질감을 느끼는 자라면 누구나 MZ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화제는 ‘MZ스러운’ 태도를 촉발하는 ‘현실’이란 대체 무엇이며 ‘MZ스러움’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발현되는 것이냐는 질문으로까지 확장될 터, 지금이야말로 현실에 발붙인 채 그를 재현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온 문학이라는 장르가 앞에 나설 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누가, 어떤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품에 안고 두 권의 시집을 펼친다. 두 시집은 지금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적지 않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두 시집의 화자들이 취하는 태도가 같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아침부터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서 “창문을 열지 않”(「골목의 증식」)고,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는 남현지의 화자와, “단돈 칠만 원”이라는 호객 행위에 굳이 “없어 인마”(「신년 운세」)라고 엄포를 놓고, 소비자에게 자신—혹은 자신이 만든 상품—이 어떤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지 어필해야 하는 “홈쇼핑” 방송에서 대뜸 “귀엽다”(「도전! 판매왕」)는 말을 꺼내놓는 고선경의 화자는 일견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현지의 시 중 “고통 없는 세계” 같은 건 “상상을 안”(「빛의 생산」) 한다는 말이나, 고선경의 시 중 “진정한 서울 시민은 1호선에 출현하는 빌런들에 익숙해”(「남영」)진 사람들이라는 견해와 같이 시집 곳곳에 산재한 증언들로부터 한 줄기의 비관을 발견해낸 독자라면 이들 사이에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공통된 인식이 있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대들, 어떻게 살고 있는가? 2. 서랍 속 테라리엄  남현지의 시에서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소망은, 시집의 해설이 언급하고 있듯 화자 자신을 안전한 공간에 ‘안치’하려는 감각이다. 안정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이 소망은 ‘집’ ‘실내’ ‘직업’ ‘소속감’ 등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나며, 화자가 의도적으로 타자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끔 한다. 이처럼 극도로 정돈된 남현지의 세계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음’이다.  “마음에게는 미안하지만 / 그것은 이미 / 언어의 것이 아”(「골목의 증식」)니냐는 물음에서부터 드러나듯, 남현지의 시 세계에서 ‘마음’은 더는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래도 정제되지 않은 마음이 인간을 뒤흔들기 쉽다는 점에서 위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이 곤란에 빠진 자에게 건넬 만한 가장 보편적인 조언으로 손꼽히는 세계에서 마음이 설 자리는 너무도 비좁다. 그래서일까? 남현지의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는 대체로 “고뇌, 열망, 후회”(「피서」) 같은 건 알 게 뭐냐고 되묻거나, “아줌마가 싫”다는 이에게 “아줌마도 싫어하는 것이 많”(「복도식으로」)으니 괜찮다고 되받아치는 식으로 마음의 진동을 애써 묵살하곤 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마음이 소거된 도시에서도 여전히 누군가는 행복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약속이 남아 있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요가 매트를 찾으며 더 건강하게 튀긴 이 감자칩과 저 감자칩 사이 최저가와 할인가 사이에서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에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번에 한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전문  표제작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마트를 거닐며 어떤 “감자칩”을 구매할지 고민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이때 화자는 선택지 사이에서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체험을 하는데, 그것은 화자에게 아주 많은 선택지가 존재하고 그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변화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소비자에게 끊임없이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선택 한 번 한 번의 영향이 막강함은 구태여 나비 날갯짓과 태풍의 비유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자명한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이 / 나의 선택이었다고 /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는 화자와 “투자에 성공”하고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는 화자 사이에는 어떤 선택의 차이가 있었을까? 그것을 알 수 없으므로 화자는 끝도 없이 신중해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안녕을 물어도 되는 상황인가 / 호칭은 적절한가 / 무례한 단어는 없었는가” 지속적으로 자문하면서도 “이토록 신중해도 /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이해”(「거래처에서 배운 것」)하는 화자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선택이라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극한까지 보장하는 것으로 언뜻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과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 사회구조나 시스템의 책임을 축소하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되기 쉽다. 다시,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는 목소리로부터 ‘누칼협’1)이라는 조롱이 힘을 얻는 것이다.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자에게 모두 너의 선택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냐 일갈하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복도’ ‘골목’ ‘마트’…… 인간의 몫로는 오직 비좁은 통행로만을 남겨둔 채 고통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 남현지 시집의 공간들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현실의 은유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집을 두고 세계를 비관한다거나 자신만의 작은 낙원에 숨어든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인데, 그것은 남현지 시집의 화자들이 끝내 버리지 못한 한 줄기 마음의 잔재 때문일 것이다. 남현지의 화자는 세계와의 거리를 두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곁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내심 품고 있다. 예컨대 「가이드」에서 화자는 특정 모임의 맞춤 티셔츠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 티셔츠를 세탁기에 돌리며 “소속이 있다면 기쁠 것이”라고 되뇐다. 하지만 티셔츠가 줄 수 있는 소속감은 그것을 벗는 순간 사라지고 말 정도로 얄팍하다. 세탁기와 같은 기계가 티셔츠를 깨끗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담보하는 반면, 인간은 그럴 수가 없어서 안내문을 동봉한다고 이야기하는 남현지의 화자는 얼핏 인간에 대한 어떠한 낙관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화자는 시의 마무리에서 이미 “없어진 단체의 티셔츠를 입고 잠든다”. 면으로 만든 티셔츠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내면에 미래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음은 자명하다. 동네에서 은행이 철수하고 있다 은행은 이제 우리가 귀찮구나 교회는 더 늘어났으니까 신은 아직 우리가 필요한 거 같지 핸드폰 가게처럼 아직도 우리를 원해 커피도 준다 마시고 가 마셔도 돼 더 달라고 해도 돼 쓸데없는 걸 사라고 하지 않아 우리가 사 모으는 건 마지막 모자 마지막 손가방 마지막으로 짜인 부드럽고 질기며 화사한 것이다 아침마다 침을 흘리면서 꽃을 보게 돼 사진을 찍어서 보내 좋은 말만 하고 싶어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싶어 어떤 마음에도 남지 않도록 달콤한 것으로 다 발라버리고 싶어 티브이를 틀어봐 설악산이 우리를 모집해 단풍이 붉게 들었대 날씨가 아주 좋대 좋은 것을 줄게 오래 간직했던 것을 줄게 말린 나물을 줄게 보험도 줄게 이건 수를 놓은 손수건이고 네 배냇저고리야 옷은 잘 다려 입고 햇볕을 많이 쫴야 돼 그런 걸 자꾸 잊어버리게 돼 — 「철수」 전문  오직 필요와 쓸모만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쓸데없는” 것들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화자는 은행이 “우리”를 두고 철수하고 오직 “교회”라는 믿음의 장소만이 건재한 동네에서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어떤 마음에도 남지 않”을 만큼 미약하지만, 그래서 “달콤한 것” “꽃” “단풍” “햇볕”…… 전부 한순간 우리에게 찾아왔다 사라지는 것뿐이지만, 그래서 이득이나 필요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세상에 쓸모의 유무나 필요의 정도로 재단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런, 간직할 수도 박제할 수도 없게 증발해버리는 한순간의 기쁨 같은 것이 아닐까? 배냇저고리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다고 해서 그때의 상황이 재현되는 것이 아님에도 오래된 배냇저고리를 건네주는—높은 확률로 부모님일—이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그런 “마음”들이야말로 체념과 절망의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는 자가 내일을 꿈꿀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보험”이 아닐지 조심스레 곱씹게 된다. 3.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2)  일찍이 프리드리히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실로 인간은 고통받으며 강해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미 흉터가 된 상처에도 종종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강해졌다는 사실만을 위안 삼아 지난날의 고통을 전부 ‘필요한 것’이었다고 정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선경의 두번째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은 그것이 ‘살아남은’ 청년이 지난 1년을 기록한 수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구태여 ‘살아남은’ 청년이라고 호명하는 이유는 그의 주변에 많은 이별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별은 종종 연인 간의 헤어짐처럼 관계의 단절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죽음의 형태를 띤다. 「신년 운세」로 시작해 「망종」을 지나, 「핑크 뮬리」가 만개하는 10월을 경유하여 다시 “12월 31일”이 오는 동안 화자는 “장례식”에 가기 위해 “기차”(「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를 타고, 이미 “죽은 친구”를 “햄버거 배달”(「가벼운 노크」)원으로 다시 만나기도 하며, 심지어는 “내가 죽”(「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어버리는 식의 기묘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시 속 청년의 1년 중 대부분을 아우르는 감각은 다소 염세적이라고 읽을 수 있을 만큼 통렬한 현실에의 반감이다. 침대에 모로 누워 울다가 씨발! 하고 외쳤다 씨발…… 나직하게 읊조릴 수도 있었지만 누구라도 들어 주었으면 해서 소리를 질렀어 검은 고양이를 제외하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가 울든 말든 검은 고양이는 똥 싸고 물 마시고 제 몸을 할짝거렸다 왜 아무도 없지? 집을 나설 때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과하면서도 세상이 나를 자객으로 육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숨지 않아도 세상은 나를 숨겨 준다는 것, 아아 안전해 그런데 나는 왜 한겨울에도 맨발에 슬리퍼만 신는 걸까 발끝에서 가볍게 달랑거리는 슬리퍼를 신고 빗길 위로 미끄러진 적이 있는데 누구라도 죽이고 싶은 날에는 세상이 온통 자객 같았다 그런데 그냥 누워서 비 구경 했어 창가의 침대에서도 비 내리는 거리에서도, 아아 시원해 고양이가 물 먹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검은 고양이는 빗물을 좋아하는지 깨끗한 물을 좋아하는지 아니 물을 좋아하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 태어난 지 서른 해가 되어 가는데 여전히 태어난 게 저주스럽다 나에게 어떤 세상을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우선 세상을 좋아하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 「검은 고양이와 자객」 부분  「검은 고양이와 자객」에서 화자는 노골적으로 세상에 대한 불호를 드러낸다. 그것은 세상이 화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존재를 숨겨버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아무리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눈물을 쏟아도 세상이 그것을 묵살하므로 화자는 세상에 뜬소문으로만 존재하는 “자객”에 비견된다. 함께 사는 검은 고양이에게조차 애정 어린 관심을 받지 못하는 화자가 원하는 것은 일정 수준의 유대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심이 주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고선경의 화자들이 “집이나 학교가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생각이 착각인 것을 아는”(「핑크 뮬리」)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살을 취하기 위해 뼈를 내줄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고선경의 화자가 선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유머, 즉 현실을 웃어넘겨버리는 가벼운 태도다.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럭키슈퍼」)이라는 말처럼, 유머를 유머로 만들어주는 것은 껍질처럼 쓰디쓴 현실이다. 이 세계가 분명히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세계를 비꼬는 유머로 웃을 수 있다. 때로는 세계를 깎아내리고, “1호선 빌런”(「남영」) 혹은 자기를 비하하며 함께 웃고, 그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 그리하여 누군가와 함께 웃는 일은 양자 간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느 정도 합치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세계를 비꼬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세계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함에 더불어 적어도 그 기분만은 조금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할 것이다. 남현지의 시집이 세계를 버텨나가는 힘으로 ‘기분’ ‘마음’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건넸던 것처럼, 고선경의 화자에게 있어 유머는 “공이 날아오기 전에 / 나를 먼저 깨뜨려 놓는”(「산성비가 내리는 대관람차 안에서」)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가려는 나름의 생존 전략처럼 느껴진다. 더하여 고선경의 화자가 단지 세계를 증오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불행과 불운 사이를 거닐다 문득 거기에 온기가 있다는 것”(「체리의 서약」)을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얀 머그잔 속 부풀어 오른 우유 거품을 바라본다 왜 이런 것이 나를 끓게 하는지 넘치게 하는지 알 수 없다 기다리라는 문자 메시지 하나에 시간은 무수히 알을 까게 되는데 씁쓸한 시나몬 향을 맡다 보면 담배를 배우고 싶어져 그런 것이 나의 최선은 아니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태어나는 기분 우유 거품 아래에는 커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도 같다 침착하게 식어 가기 최선을 다해 가라앉기 나는 이제 그런 것을 배우고 싶어 끓음과 넘침의 시간을 지나 은색 스푼이 거품을 걷어 내면 날벌레 한 마리 떠올라 있을지라도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남은 거품의 자세 넘치지 못하지만 부푼 채로 멈춰 있다 빈 잔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대로 다른 것을 따라 넣을 수는 없어 내 어깨를 붙잡는 차가운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부드럽게 감싼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 — 「카푸치노 감정」 전문  “끓음과 넘침의 시간을 지나” “침착하게 식어”가는 삶을 배우고 싶다는 화자. 하나의 시기가 끝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임을 스스로 선고하고 있는 화자는 이제 “거품”으로 표현되는 지난날을 청산하고자 한다. 정말이지 그의 말대로, “이대로 다른 것을 따라 넣을 수는 없”다. 그 잔여물이 새롭게 따라 넣을 음료의 맛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듯 새로 시작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지난날이 전혀 돌아볼 것이 못 될 만큼 끔찍하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삶을 견디려 안간힘을 쓰는 청년이 1년간 남긴 기록에는 끝없는 자기 비하나 체념의 유머뿐만 아니라, 그가 그 1년을 버티게 만든 아름다운 지점 또한 무수히 존재한다. “무수한 별, 아름다움 / 어둠 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 사람의 것과 사람의 것 아닌 아름다움 /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처럼 읽는 이의 머릿속을 선명하게 채우는 시청각적 감각들은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독자의 가슴속에 심장처럼 남아 온기를 더해준다.  그리하여 시집의 마지막 시, 「팬레터—12월 31일」에 다다라 화자는 “이걸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기대하자 더 많은 걸”이라고 속삭인다.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은 친구를 추억하며 적어 내려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해당 시에는 친구와의 아름다웠던 추억과 더불어 혼자 남겨진 화자의 외로움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 외로움에 천착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해도 충분해지지 않으니 기대해보자며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새해는 기다려지고, ‘나’는 “너의 팬”이라고. 이토록 단단한 심장을 가진 화자에게 응원의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것은 제 삶을 견뎌내는 것조차 힘에 부쳤던 시기가 우리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리라. 4. 내일의 태양  영화 「해피엔드」(네오 소라 감독, 2025)에서 주인공 ‘유타’는 말한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즐겁게 죽자.” 근미래의 일본,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지진과 오보 사이를 방황하며, 사람들은 강력한 통제와 결속을 원하는 쪽과 시민을 옭아매려는 공권력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촉구하는 쪽으로 분열한다. 유타는 그중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만 몰두하는데, 이러한 동태는 앞서 언급한 그의 발언과 얽혀 그를 세간에 대한 ‘유의미한’ 관심은 하나도 갖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회의주의자로 보이게 만든다. 유타의 음악 파트너이자 소꿉친구 ‘코우’ 또한 이러한 판단에 공감하여 ‘조금은 생각을 하라’는 일갈을 하는데, 소위 말하는 ‘MZ 세대’의 일원으로서, 유타의 위와 같은 발언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결과’라는 평가에는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의 결말부에서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기와 불안, 양극화…… 이 영화의 배경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와도 상당히 닮았다는 것을 상기하면 작중 선생님의 대사를 끊임없이 곱씹게 된다. ‘너희 세대에 조금 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젊은 두 혁명가를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 그 대사를 말이다.  ‘희망에 대한 믿음’. 희망이라는 관념에 또 하나의 관념을 덧댄 이 마음은 훼손되기 쉽고, 그래서 세계의 척박함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득세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현지와 고선경의 시집에서 명확하게 빛나는 인간의 마음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렇듯 눈부신 희망의 증표에 대고, “우리의 불행도 우리를 이해시키지 못하”(고선경, 「눈도 내리지 않는데 고백」)는 세상에서 위로랍시고 ‘어쨌거나 다 괜찮아질 거야’ 따위의 근거 없는 전망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세상은 앞으로도 줄곧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시험할 테고 괜찮지 않아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러므로 두 권의 시집을 통과한 독자가 붙일 수 있는 것은 아주 미약한 마음뿐이리라. 그리하여 지금, 인간을 숨기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밝고 수다스러운 세계의 한복판에서,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그대들, 잘 지내시나요? 1) '누가 그거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하기라도 함?'의 줄임말. 주로 부당함이나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자에게 그 모든 일이 전부 피해자의 '선택'에 의해 촉발된 것이므로 그에 딸려 오는 고통도 모두 본인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조롱하는 데에 쓰인다. 2) 2012년 TV 예능 프로그램 에서 하하의 콩트 캐릭터인 '하이브리드 샘이 솟아 리오레이비'가 지은 정형돈의 딸 이름. 해당 장면을 캡처한 사진은 2025년 현재까지도 삶의 팍팍함을 유머로 승화할 때 곧잘 인용되고 있다.

계간 문학과사회 신은조 남현지고선경MZ희망마음 2025
노태훈 픽션의 용기와 멀리 가는 퀴어 ― 김병운론

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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