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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인 | 2024년 겨울호(제16호)

이중의 디아스포라와 중첩되는 정체성들 ―조선족⋅여성⋅노동자―『야버즈』(호밀밭, 2024)

박다솜 문학평론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네가 틀리는 곳에서 나는 옳다」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연대가 분열할 때―이미상론」으로 2023년 제1회고석규신인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1. 이중의 디아스포라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온 사람들. 그들은 귀환 이후 몰려오는 안도감에 뿌듯해졌을까? 돌아온 곳의 사람들로부터 벅차게 환영받았을까? 전춘화의 소설은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질문들에 날카롭게 답하고 있다. ‘분산’이나 ‘파종’을 뜻하는 그리스어 ‘디아스포라’는 본래 고향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지칭하던 표현이었는데, 이제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기존에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한 모든 사람들을 두루 지칭하는 데 쓰인다. “고조할 아버지가 만주에 건너갔으면 조선족, 러시아에 끌려갔으면 고려인, 일본에 강제 징용당했으면 일본 교포, 남쪽에 남았으면 한국인, 북쪽에 건너갔다 돌아오면 새터민 아닙니까”(「여기는 서울」, 248쪽)라는 일갈은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를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만주로 건너간 고조할아버지를 둔 사람들, 그들은 ‘조선족’이라는 이름의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처음 중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을 조선족 1세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으로 건너와 3D업종에 종사한 사람들을 조선족 2세대, 생계를 위해 한국으로 떠난 부모를 대신해 조부모의 돌봄을 받으며 자랐지만 동시에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을 조선족 3세대로 구분하곤 한다. 조선족 3세대는 고등교육의 수혜를 기반으로 한국에서도 사무직 같은 화이트칼라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전춘화 소설의 초점 화자는 3세대 조선족으로,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성인이 된 후에 한국으로 이주해 현재는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조선족이라는 거시적인 민족 정체성의 층위에서 본다면, 그들은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가(1세대) 다시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는(3세대) 셈이다. 그러나 개개인을 ‘조선족’이라는 단일 주체로 치환할 수는 없기에 이들의 귀환은 ‘애당초 있었던 곳’으로의 마땅하고 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한국을 떠난 것은 고조할아버지였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인데다가, 그 사이에 중국과 한국은 각자 격랑의 역사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귀환한 3세대 조선족들은 이중의 디아스포라가 된 듯하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분투했던 앞선 세대가 일차적 의미의 디아스포라였다면, 3세대 조선족은 완수되지 않은 앞세대의 과제를 안은 채, 이에 더해 한국사회에서 조선족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야 하는 이중적 문제 상황에 놓여 있다. 조선족 1세대의 중국 이주가 후손들로 하여금 ‘나는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를 자문하게 했다면, 3세대의 한국 이주는 앞선 질문에 ‘조선족은 누구인가?’라는 한층 더 복잡한 존재론적 물음을 더한 듯하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행해졌던 민족 이주의 역사는 개인의 정체성에 어떤 질곡을 아로새겼는가. 『야버즈』의 인물들을 따라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동안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더 깊은 미궁에 빠져버리거나.


2. 중국인이 아니면서, 중국인인 사람


    어순이 만들어내는 뉘앙스는 제법 엄중하다. ‘중국인이면서, 중국인이 아닌 사람’이라는 구절은 어떤 사람이 중국인으로 공인받고 있지만, 그에게는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에 포섭되지 않는 개인적인 잔여가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읽힌다. 반면 ‘중국인이 아니면서, 중국인인 사람’으로 어순을 바꾼 표현은 어쩐지 슬프게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저 표현은 어떤 사람을 중국인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시작한 후에, 그럼에도 그가 모종의 이유로 ‘중국인’의 정체성을 부여잡으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온전한 중국인이라고도, 그렇다고 영 중국인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경계적 정체성의 혼란은 아무래도 후자의 문장에 의해 더 애처롭게 표현된다. 그런데 문장 성분의 순서가 전달하는 미묘한 뉘앙스는 법 제도가 놓치기 쉬운 것으로, 앞선 두 문장에 할당된 두 명의 주체가 있다고 할 때 그들 모두는 얼마든지 법적 중국인일 수 있다. 실제로 중국에 거주 중인 조선족들이 법적으로 중국인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전춘화의 소설은 그들이 ‘온전한’ 중국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전춘화의 화자가 중국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중국인이 아님을 체감한다.

    「우물가의 아이들」은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용정시를 배경으로 조선족 어린이 ‘순화’를 화자로 삼는다. 용정시는 조선족에 의해 개척된 도시로, 연변 내의 모든 행정구역 중 조선족의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조선족들은 소설의 소재가 된 ‘용두레 우물’을 기점으로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용정’이라는 도시명 또한 용두레 우물에서 기원한 것이다. 한때는 이주민인 조선족의 목을 축이고 헛헛한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었을 우물은 이제 습기 한 점 없이 바싹 말라버렸다. 조선족 정체성의 근간으로 기능하는 상징적인 우물은 소설 안에서 조선족, 한족, 남쪽 나라 사람들이 이념 투쟁을 벌이는 전쟁터가 되어버린 듯하다. 조선족 할아버지들이 터줏대감처럼 우물가를 지키는 와중에, 남쪽 나라의 아저씨들은 간식까지 챙겨와 우물가의 아이들에게 남쪽 버전의 역사관을 전하고, 한족 노인들은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자신들의 전통 춤인 양걸무를 추며 우물가를 지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족 아이들 몇이 우물 옆에 침을 뱉자 조선족 아이들이 이를 목격하고 싸움이 붙게 된다. 분노하는 조선족 아이들에게 한족 아이들은 이렇게 비아냥거린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나라 주석도, 총리도 못 되는 것들이 자존심만 무지 세다.”(163쪽)

    주지하듯 중국은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과, 10%가 채 안 되는 50여 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가이고, 주석이나 총리 같은 국가 요직은 대부분 한족이 차지한다. 신분증에 민족명을 쓰는 란이 따로 있는 나라에서 소수민족으로 산다는 것은,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사회의 주류가 아니고 될 수도 없음을 절감하는 일일 테다. 사건 이후 화자의 친구들은 평소 사이좋게 지내던 한족 아이 ‘왕두’에게 화풀이를 하는데, 왕두는 자신은 한족이지만 주석이 될 생각이 없다며 뽀즈(중국식 만두)를 만들어 파는 현재의 소박한 삶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자기가 만든 뽀즈를 판다. 아이들은 하나둘 뽀즈를 사 먹고 “서서히 따뜻하고 느슨한 기운이 아이들 사이에서 감”돈다. 하지만 소설의 화자는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 일순간 마음도 따뜻해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잊게 되는 수도 있다”(166쪽)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왕두가 만든 뽀즈를 사 먹지 않는다.

    말하자면 소설의 화자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사는 삶이란 “아무리 노력해도 이 나라 주석도, 총리도 못 되는 것들이 자존심만 무지 세다”라는 말을 감내하는 삶이라는 것, 그러고도 “중국 인구의 대다수가 한족이니 한족이 나라 주석이 되고 총리가 되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하는 조선족 대표가 있지 않습니까? 소수 민족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큰 특혜와 관심을 받고 있는지 다들 알지 않습니까?”(163쪽)와 같은 말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어야 하는 삶이라는 것, 조선족만의 역사는 공식 교육기관에서 배울 수 없고 용두레 우물, 옥시국시(옥수수국수), 김성삼의 노래 <타향의 봄> 같은 “오롯이 우리의 것”(158)쪽은 주변 어른들에게 배우는 아슬아슬한 방식으로만 지켜갈 수 있다는 것. 이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소설의 화자는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길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룡두레 우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우리는 그 우물을 뒤로한 채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국경을 넘거나 대도시로 떠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169쪽)라는 그의 고백은 자연스럽게 읽힌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 그는 용정을 떠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전춘화의 화자가 중국 밖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중국인임을 선명히 감각한다. 「야버즈」의 화자 경희는 역시 조선족으로 현재 서울에서 거주하는 중인데 최근 뜬금없이 중국 음식이 먹고 싶어 못 견디겠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한다. 이 당혹감은 곧 임신 사실의 확인으로 이어지는데, 임신을 하니 중국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는 설정만큼 정체성의 일단을 단숨에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우리의 혓바닥을 알알이 메운 알량한 미뢰들은 때로 우리가 누구인지 제멋대로 확언한다. 나름대로 한국에 잘 적응한 경희는 “그동안 중국 음식을 거의 찾지도 않고 잘 지내 왔”(10쪽)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하자 중국 음식이 먹고 싶어서 잠을 못 이룰 지경에 이른다. 게다가 그녀는 마라탕이나 양꼬치, 탕후루처럼 한국에 무사히 정착한 중국 음식이 아니라, 야버즈오리 목 요리나 쏸라펀식초, 고추기름으로 국물을 낸 중국식 국수 같은 극단적인 중국의 맛을 갈망한다. 어린 시절 학습된 입맛은 경희를 구성하는 복잡한 정체성의 한 축을 이토록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3. 한국인이 아니면서, 한국인인 사람


    전춘화의 인물들이 중국에 있을 때 온전한 중국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한국에 있을 때 그들은 역시나 충분한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주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나 특정 음식에 대한 선호를 통해 묘사되었다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고뇌는 화자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야버즈」의 경희는 임신 사실을 확인하러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질 초음파를 담당하는 여성 의사가 따로 있는 것을 보고 병원의 세심한 배려에 감탄한다. “경희는 한국의 이런 디테일을 좋아했다. 자본의 파워든 아니든 어쨌든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잘 터치하는 서비스는 꽤나 만족스러웠다.”(20쪽) 한국의 디테일을 새삼스럽게 감지하며 시종일관 한국 사람들을 타자화하는 인물의 시선은 그 자신이 한국인이 아님을 방증한다.


엄마, 중국 사람들은 감정이 상했을 때 기분 나쁘게 뭘 째려봐, 하면서 공격적인 언어를 날리고 표정을 험하게 일그러뜨리지? 한국 사람들은 아니야. 내가 경험한 바로는 끝까지 차갑게 웃으면서 비수 같은 말만 골라 뱉으면서 사람 마음을 쿡쿡 찔러. 같이 화내지 않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싸울 때도 갑의 위치에 서려고 할 때가 있지. 차라리 같이 화내고 소리 지르고 싸우면 덜 상처받겠는데 말이야.(95-96쪽)


    「블링블링 오 여사」의 화자 ‘나’가 갈등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대처와 중국인들의 대처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위 인용문 또한 그가 한국 사회의 외부인임을 알게 한다. 한국인들은 일상 속에서 타인과 갈등을 겪을 때 ‘똑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라는 말을 조언으로 듣곤 하는데, 이 조언은 상대와 맞붙어 싸우지 말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라는 취지로 오랜 시간 이해되어 왔던 듯하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태도는 기실 갈등 과정에서 내가 입은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도덕적·윤리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비틀린 전략은 아니었을까? 인용문의 예리한 시선은 이를 간파하고 있다.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라는 입장의 저변에는 자신이 상대보다 나은 인간임을 증명하려는 욕망이 위치한다. 상대가 나에게 입힌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맞받아치지 않음으로써, 내가 너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한 인간임을 확인하려는 이 대처법은 따라서 한국식 서열화의 한 사례라고도 볼 수 있겠다. 한국인 주체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갑의 위치에 서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얀테의 법칙이 가르쳐주는 바, 나는 당신보다 아주 조금도 더 낫지 못하다. 우리는 다 똑같이 이기적이고 속 좁은 인간들이다. 그러므로 갈등 과정을 거치며 주체의 마음에는 당연히 찌꺼기가 남는다. 한국인들이 상대와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서 참는다고 스스로 믿을 때, 마음 안에는 해소되지 못한 응어리가 뭉쳐 있기에 “차갑게 웃으면서 비수 같은 말만 골라 뱉으면서 사람 마음을 쿡쿡” 찌르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소설의 ‘나’는 이런 대응 방식이 “차라리 같이 화내고 소리 지르고 싸우”는 것보다 더 큰 상처가 된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이 다투는 방식을 생경하게 감각할 때 그는 한국인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춘화의 인물들은 별수없는 한국인이라고 말해야 할 텐데, 그 근거는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소설집 『야버즈』다. “제 소설은 오토픽션의 형태를 주로 띠고 있”(180쪽)다는 작가의 말에 기대어 작가와 작품 속 인물들을 얼마간 동일시해보자면, 연변지역에서 태어나 중국어보다는 우리말(한국어)를 더 많이 배우고, 첫사랑을 고백할 때 한국어를 사용한, “우리말이 운명적인 내 언어라고 생각”2)하는 사람은 한국인일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겠다. 쏸라펀 한 입에 황홀해지는 입맛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볼록하게 부조해내는 것처럼, 사랑을 고백하거나 소설을 쓸 때 사용하는 언어가 한국어라는 사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또렷하게 밝혀준다.

    한데 해당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런 말도 한다. 한국의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배운 한국어가 북한식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돌멩이를 던진다’라고 하지 않고 ‘뿌린다’라고 해요.” 결국 그가 학습한 한국어는 남한식도, 북한식도, 중국식도 아닌 조선족식, 즉 조선족들의 방식으로 지켜온 한국어라고 말해야 옳겠다. 근작 「여기는 서울」의 화자가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며 한국적 시선을 습득해 가는 동시에 “우리 민족 서로 돕기의 오랜 역사를 가진 시민단체”(235쪽)에 소속되어 조선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찾아 나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나는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라는 양자택일의 질문은 조선족 3세대에 이르러 ‘조선족은 누구인가?’라는 까다로운 질문과 만나는 셈이다.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이 문제를 절대화하지 않는 시선에 의해 논의는 가일층 복잡해진다. 「여기는 서울」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화자가, 정체성으로 인해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계급적인 것임을 깨달으며 마무리되는 작품이다. 소설의 화자가 “지금 괴로워하며 겪어내고 있는 자아와의 싸움을 같은 고향 친구들이 이해 못하는 것에 어리둥절해”(256쪽) 했더니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부러워. 에너지가 남아돌아야 그런 고민이라도 해보지.”(257쪽) 소설에서는 같은 고향 친구의 발화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를 조선족 2세대의 발언으로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가족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한국으로 넘어와 사람들이 기피하는 힘든 일을 하며 돈을 벌었던 그들에게 “자아와의 싸움”이란 일종의 배부른 고민이었을 테니 말이다. 『야버즈』에는 조선족 2세대의 한국 이주를 언급하는 대목이 여럿 등장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돈을 벌러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이다.


4. 그리고 여성인 사람


“난 도시락만 딱 봐도 누구네 집 엄마가 또 남쪽으로 떠났는지 알 수 있어.” 그건 나도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정성스럽다 못해 약간은 극성인 도시락이 점차 밑반찬 위주로 바뀌는 동안 아이들은 표정이 어두워지기도 했지만 한두 달 이후엔 점심마다 근처 분식점에서 먹고 싶은 돈가스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다.(145쪽)


    「우물가의 아이들」에서 순화의 학교 친구인 경매는 도시락만 봐도 누구네 집 엄마가 남쪽으로 떠났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순화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면 할머니가 대신 도시락을 싸주기 때문에 지극정성이던 도시락이 다소 허술해진다. 이때 아이들은 잠시 풀이 죽기도 하지만 한두 달만 견디면 그 후로는 한국에 있는 엄마가 보내온 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다. 인용문은 가족을 연변에 남겨두고 한국으로 떠난 조선족 2세대의 상황을 그 자녀들의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오늘날 연변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설명하고 있기도 한데, 「여기는 서울」의 화자가 연변 사회에 대해 “경쟁력있는 브랜드나 기업이나 세계적인 석학이나 예술작품 하나 없”(「여기는 서울」, 241쪽)이 ‘송금경제’만 발달했다고 평할 때 그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꼬집는 중이다.

    순화의 엄마도 이제 막 한국으로 떠나려는 참이다. 엄마가 남쪽 나라의 남자와 가짜 결혼을 해서 한국에 가려는 것을 알게 된 순화가 엄마에게 남쪽 남자는 진짜 결혼으로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묻자, 엄마는 호호호 웃으며 “진짜가 어딨어. 원래 남자 여자는 결혼 전에 서로 숨기는 게 많아. 따지면 다 가짜지”라고 답한다. 그러자 방문 너머로 대화를 들은 할아버지가 읽던 책을 책상에 내리치며 화를 낸다. “애미가 애한테 이리 수준 떨어지는 걸 가르쳐서야! 갈 거면 빨리 가게. 순화는 내가 잘 가르칠 터이니.”(160쪽)

    할아버지의 분노는 타당하다. 엄마 또한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순화에게 금실 좋게 잘 지내는 친구네 부모님 집에 자주 놀러 가라고, 결혼이 진짜인 사람들도 많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고결한 주체로, 엄마를 다소 경박한 주체로 보게 만드는 이 윤리적 구도 너머에는 ‘여성 가장’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남성 가장의 경제활동이 숭고한 희생으로 의미화되었던 것과 달리 가장이 된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소설 속 ‘엄마’의 경우처럼 어딘지 부정하거나 드센 욕망으로 규정되어 왔다. 하지만 정작 노동하지 않는 남성 주체의 윤리를 수호하는 것은 여성 가장의 억척스러움과 천박함이다. 「우물가의 아이들」에 서 할아버지와 아빠는 딱히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듯 보이는데,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이제 한두 달만 지나면 엄마가 한국에서 돈을 보내올 것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내내 방 안에서 책을 읽으며 자신의 고고함을 지킬 수 있을 테다. 엄마가 송금하는 돈으로 먹고 자면서.

    이런 구도는 거의 역사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고착화되어 왔다. 『야버즈』에서 남편 용주와 시어머니 박 씨가 형성하는 관계도 다르지 않다. 용정에 살 때 중학교 역사 선생님이었던 박 씨는 이제 한국의 양꼬치 가게의 사장님으로, “중국이랑 한국이 축구 하면 어느 쪽 응원할랑가~?”(27쪽) 같은 짓궂은 질문을 능글맞게 눙쳐내며 중국 손님도 한국 손님도 불쾌해하지 않게 대답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박 씨의 악착같은 생활력은 명동의 상가 건물 한 채, 중국 항저우의 아파트 한 채가 되었다. 용주와 박 씨는 모두 역사를 공부했지만 용주의 역사는 “선비가 읽어 주는 사서오경” 같다면 박 씨의 “역사는 실제고 돈이고 미래”(26쪽)다. 바꿔 말하자면 용주의 역사가 사서오경 같을 수 있는 것은 박 씨의 역사가 실제고 돈이고 미래였던 덕택이다. 여기서도 박 씨가 그악스럽게 구축한 물질적 안온함 속에서 아들 용주는 고귀한 것들을 추구하며 산다. 이렇게 볼 때 용주의 순수함은 모친 박 씨가 지켜온 것이면서 앞으로 아내인 경희가 지키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다소 섬뜩하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여성들이 서로의 내면을 응시하며 끝내는 상호 구원에 이르는 서사인 「낮과 밤」은 유독 뭉클하게 읽히는 작품이다. ‘나’는 낮과 밤의 간극을 앓는 인물로 낮에는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고 밤이 되면 윤동주나 괴테, 헤르만 헤세를 읽는다. 낮보다 밤을 더 사랑하며 분열된 하루 하루를 살던 ‘나’에게 어느날 우울증에 걸린 친구 ‘영해’가 전화를 걸어온다. 두 사람이 나누는 밤의 통화들을 거쳐 영해는 “사람들은 (중략) 스스로도 사는 이유를 모르면서 왜 죽는 건 꼭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54쪽)라고 묻던 사람에서 “살기로 결심해 보니 그냥 이유 없이도 살 수가 있더라. (중략) 너도 작가가 되는 일에 굳이 무슨 큰 이유나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쓰는 거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65쪽)라고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영해의 현답은 ‘나’가 낮과 밤의 격차를 줄여 가게 만들고 끝내는 낮과 밤 모두를 사랑하게 한다. 소설은 전화 통화라는 비대면의 소통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여성 서사가 그간 고민해 온 느슨한 연대의 한 가능태를 형상화하고 있다.

    「낮과 밤」이 상호 구원의 서사를 통해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블링블링 오 여사」는 노동하는 조선족 여성 ‘오 여사’를 내세워 여성 연대의 불가능성을 매섭게 직시하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오봉선은 노후 준비와 딸의 결혼 자금 마련을 위해 한국에서 간병일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처음 담당한 환자는 교통사고로 다리가 마비된 열여섯 살의 소녀 ‘서영’이다. 서영의 엄마는 “서울시 은평구 모 은행에서 과장으로 일한다는 많이 배우신 분”인데, “오봉선 53년 인생 통틀어 오 여사님이라고 처음 불러 준 사람”(72쪽)이기도 하다. 소설의 전반부는 서영 엄마와 오봉선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할애되는데,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구도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위태롭게 쌓아가던 두 사람이 관계를 정리하는 순간은 인상적이다.

    서영 엄마는 모종의 이유로 오봉선을 해고하면서 “가끔은 정말 친정 어머님 같”았다고 회고하다가도, 오봉선이 페이가 적어져도 계속 일하겠다며 “걱정돼서 그래”라고 말하자 단번에 목소리에 날이 선다. “뭐가 걱정되는데요?”(83쪽) 오봉선을 고용했던 3년의 기간 동안 서영 엄마는 별거와 이혼을 겪으면서 딸의 갑작스런 장애를 받아들여야 했고 이 과정에서 오봉선의 돌봄을 살뜰히 활용하면서 보일 꼴 못 보일 꼴을 죄다 노출했다. 그러나 서영 엄마는 오봉선에게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한다. 우리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바, 이 거부에는 ‘당신이 감히’가 묵음처리되어 있지 않은가? 오봉선과 서영 엄마는 동일한 ‘여성’이지만, 그들의 계급적 차이는 그들이 ‘동일한’ 여성일 수 없게 한다. 친정엄마처럼 여기던 오봉선으로부터 동정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날카롭게 응수하는 서영 엄마의 모습은 계급적 정체성이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님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한편 「블링블링 오 여사」는 돌봄 노동자에게 가중되는 윤리적 책무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도 뜻깊은 작품이다. 조선족 1·2·3세대가 저마다 상황이 다르고, 여성들이 고용인이거나 피고용인으로 그 입장을 달리하는 것처럼 ‘노동자’라는 정체성 또한 단일하게 사유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경제 주체에게 일자리의 장단점을 따져보고 비교하는 일은 합리적 선택으로 여겨져 권고되지만, 돌봄 노동의 현장에서는 그런 식의 비교가 ‘비정함’으로 손쉽게 단정되고 있는 듯 보인다.

    요양 병원의 여섯 할머니들을 “돈 봉투 금액이 큰 순서로 챙겨 주라”는 월순이 이모의 말은 물론 몰인정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젊은 시절에 일찍 남편을 여의고 김치 장사를 하며 아들 셋을”(87쪽) 키운 3호 할머니를 ‘두 번이나 바람을 핀 데다가 건물주’인 1호 할머니보다 더 살뜰히 챙기는 오봉선의 태도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마냥 단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간병인은 환자에게 편견을 가지면 안 되는 자리인 것 같아”(88쪽) 말하며 서러워하던 1호 할머니가 제일 먼저 자리를 비우자 오봉선은 넋을 잃고 후회한다. 돈이 많고 바람을 핀 적이 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수절한 과부보다 돌봄 받을 자격이 부족한가? 돌봄 받을 자격은 누가 / 어떻게 정하는가. 소설이 야기하는 이런 질문은 돌봄 노동을 다루는 저간의 논의들이 왜 유독 ‘윤리’ 문제에 천착해야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5. 혼란한 지름길에서


    페미니즘 이론사에서 교차성에 관한 논의는 미국 사회의 흑인 여성을 화두로 삼아 촉발되었는데,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은 ‘여성’이라는 단일한 범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인종적 차이가 야기한 차별의 지점들이 함께 논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교차성 이론의 주장이다. 물론 인종과 젠더 외에도 계급, 장애 등의 여러 요소가 교차하며 형성한 복잡다단한 층위가 주체를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춘화가 그리는 조선족이자 여성이며 노동자인 이들의 존재는 한국 사회의 교차성 논의가 성실히 궁구해야 할 하나의 지점이다.

    중국에서는 중국인이 아님을 깨닫고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아님을 깨닫는 이중고와, 이런 고뇌는 오직 ‘배부른’ 관점으로만 포착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 누군가의 고결함은 다른 누군가의 이악스러움으로 지켜진다는 잔인한 사실에, 서로를 구원하고 또 적대하는 여성들까지. 젠더와 민족, 계급의 문제를 마구 횡단하며 곤란한 질문들을 한국문학 담론장에 사정없이 ‘뿌리는’ 『야버즈』는 결국 이 복잡한 미궁에 깊숙이 빠져 섬세하게 혼란스러워하는 것만이 유일한 지름길일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이 글이 찾아낸 하나의 지름길이다.

  • 1) 이 글은 전춘화의 첫 소설집 『야버즈』(호밀밭, 2024)에 더해 「여기는 서울」(『창작과비평』 2024 봄호)도 함께 다룬다. 이후로 작품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만 적기로 한다.
  • 2) 참여연대에서 진행한 전춘화 작가 인터뷰. 「첫사랑 속삭이던 우리말로 ‘조선족 이야기’ 쓴다 - 전춘화 작가」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193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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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박다솜 말미잘 하는 몸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월간 현대시 박다솜 김혜순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말미잘시하다모든 종류의 슬픔 2025
하혁진 광장의 흔적, 흔적의 광장 ―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광장은 경합의 장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후자의 불화는 전자의 갈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멀리서 보면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가까이서 보면 크고 작은 균열과 차이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샹탈 무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올바르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민이 다양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인민이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하며, "이런 분할은 극복될 수 없다"1)고 덧붙인다.  다시 말해 공동체란 '동일성'을 기반으로 구성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이질성'과 '타자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광장의 목소리는, 설령 그것이 하나의 광장이라 하더라도, '구호'라는 '몫'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 광장은 언제나 저마다의 '기도'라는 '나머지'를 남긴다. '우리'는 각자의 기도를 조금씩 양보하는 한에서만 우리이며, '너'와 '나'는 서로의 '날씨'를 조금씩 양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라는 '기후' 속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보와 양해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서, 광장은 영원할 수 없다. 광장은 필연적으로 이별이 예정된 장소다.2) "나의 국경 안이 당신이 국경 밖"(「영원과 하루」)이라는 깨달음, 그 당연한 깨달음이 영원과 하루 사이에 만들어졌던 광장을 야속하게 흩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윤은성의 '유리 광장'은 고요하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처럼, 관객이 떠난 공연장처럼, 찬란한 빛과 흥겨운 노래가 모두 꺼진 놀이공원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있다. 논쟁도 농담도 노래도 사라진 자리에 시적 주체만이 "웅성거림으로 가득찬 손이 되"(「시인의 말」)어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목이 잠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지 못했어요"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듯이, 광장이 남긴 웅성거림은 좀처럼 시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너무 크게 외친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올까.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 "이전의 내 노래들은 / 부를수록 마음속 미움이 살아나서 / 누구에게도 선물을 할 수가 없었고요"(「화답」)라는 고백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무래도 두 번째 시집 역시 첫 번째 시집의 질문을,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희귀해지지 못했는가"3)라는 질문을 꼭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 혼자 되돌아"(「같은 시」)와야 했을까. 많은 것을 함께 했던 '우리'는 왜 변변찮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급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라진 광장부터 복원해야 한다. "깨진 조개껍데기, 병뚜껑, 진흙에 박힌 깃털"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그 모든 '나머지'를 전부 그러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광장을 똑같은 형태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윤은성의 시는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 결코 잊은 적이 없음에도 잃어버린 존재들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주체는 기울어진 시소에 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을 맞춰볼 대상도 없이, 홀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재어보고 "떠올릴 수 없는" "날씨"(「우재」)를 헤아릴 뿐이다. 막막한 상실의 크기는 뜨거웠던 광장의 온도에 비례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이토록 쓸쓸한 '기억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사적이다. 기억마저 포기하면 혹시라도 "네가 스쳐지나갈 때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잃었지만 기억마저 포기하면 잃은 너를 영영 잃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공적이다. "기록되지 않거나 / 유실에 처한 기억들" 때문에 "화형의 장면과 별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한 기억만큼 광장은 오염될 것이고, 기회를 기다린 "야비한 표정이 거리에 반복"(「같은 시」)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없는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윤은성의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만큼이나 불가피하다. 주체는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어 '너' 없는 기록을 써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 간절한 기억과 기록은 차라리 기도에 가까운데, 시인은 시와 기도 사이의 낙차만큼 괴롭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의 할머니를 봤어. 미싱을 돌리고 계시더라. 손녀의 원피스를 고치고 계시더라. 내가 잃은 게 젊음이나 사랑, 우정 같은 거였나? 이끼와 고양이, 큰 개, 아껴둔 옷, 편지들. 다시 돌아간다면 얼굴을 그저 만지려나. 나는 살아 있고 모르는 게 많은데.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는 길에 그냥 앉아봐. 나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그건 나와 할머니의 비슷한 점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지. 같다고 할 수 없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 너무 멀었냐고 얼마나 어둡냐고 묻지 못하고 말았네. 자두나무 환하고 푸릇하고 누구도 깨우지 못하는 깊고 밝은 잠에서 할머니, 나의 옷을 걷는 일은 잊어도 이제 괜찮은데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너무 길거나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 할머니도 나를 봤어? 할머니는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 다니러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는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다 알아봤어? 언덕 위에서 총성 없이 쉬고 있어? - 「남안」 전문  인용한 시에서 '할머니'는 '나'의 원피스를 깁고 있는데, 옷에 난 구멍을 메우는 할머니의 바느질은 '나'가 기억을 더듬는 행위와 겹쳐진다. 후회 섞인 어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시간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반복되는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은 '할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때 '나'의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나'의 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자는 텅 빈 거리에 홀로 앉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존재들을 떠올리며, 그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즉각적인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도와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들의 유일한 청자는 바로 '나'다. "너무 길거나 / 짧아서 외롭지 않았어?"라는 물음도, "많은 빛 속에서 길을 착각하지 않고 있어?"라는 물음도, "새로운 강아지와 언니들을 모두 알아봤어?"라는 물음도, 전부 '나'가 말하고 '나'가 듣는 독백이다. 따라서 응답의 주체 역시 '나'가 되어야 한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고 옷을 입는 게 무엇 때문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화자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대답이 될 수 있는 시들 중 한 편이 「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이다. "선언문 초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저녁이 왔어"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화자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면의 원인을 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는데, 아마도 그건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여행지"를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공간, 관계를 누적하다 끝나는 것이 삶이라면 선언문과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주어진 상실에 비하면 이 노동은 지나치게 무용하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만 특별할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먹게 될 사람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곡식을 수확"하는, "슬픔에 빠진 적 있는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절반을 흘릴 걸 알면서도"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는, "상심을 아낀 채로 / 남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어린 소녀와 소년들"도 있다. 그들의 노동은 버려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목수"가 "작고 안전한 가구"를 만들듯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 사소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상실보다 "한 박자 빠르거나 늦게 오는" 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할 만큼은 유용하다. 아주 복잡하진 않을 거야. 어쩌면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내 사랑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해. 딱 그만큼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내가 쬐는 햇볕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두고 떠날 수도 있어. 나는 쉴 수 있고, 또 나는 움직여.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내내 찾지 못했어. 내가 앓는 마음이 PTSD인지 pre-PTSD인지 나는 진단하지도 못하겠어. 들려오는 말이 없을 땐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져. 매일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깨어나지. 매일 밤 나도 모르는 내가 창밖을 바라봐. 멀리 다녀오기도 해. 그럼 또 기다리는 거지. 소식이 계속 있어. 그게 올리브 잎 같은 건 아냐. 내가 듣고 싶은 말도 아냐. 어쩌면 더 두려운 것. 어쩌면 뜻밖에 안전한 것. 어쩌면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 - 「몬순」 전문  불가능하고 불가피했던 '기억하기'는 인용한 시에서 "아주 복잡하진 않을" 일로 그려진다. '나'의 목표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앓는 마음"이 이미 지나간 상실(과거 = PTSD) 때문인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상실(미래 = pre-PTSD) 때문인지조차 진단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역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냥 귀를 열어놓은 채 잠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가 열린 채 잠에서 깨"기도 하는데, 그 결과 주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예컨대 "더 두려운 것", "뜻밖에 안전한 것", 나아가 실제로는 "지키지 못했던 너무 큰 사랑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귀를 열어둔다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은 시의 제목인 '몬순monsoon', 즉 계절풍처럼 '너'와 '나'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불어온다. 매일 아침 쌓이는 새로운 소식들은 그러한 교통의 증거다.  장-뤽 낭시는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4)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윤은성의 시에 나타나는 '열어두기'는 불가해한 마음들이 도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라는 점에서 낭시가 말한 '비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기억과 불가피한 재현이라는 막막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내렸던 결정이, 오히려 주체를 "그 도래와 그 근원과 그 사건의 무한한 차원으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5) 체념의 순간 찾아오는 역설적인 구원, 주체는 다시 한번 '너'를 향해 마음을 연다. 예컨대 「봄 방학」에서 "침대 밑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사라진 광장의 기억에만 골몰하던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에 "전등 빛 명도가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넘어 전해져 오는 타인의 기척이 주체의 일상을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밀실로 흩어졌던 '나들'은 끝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바깥'을 향해 기울어진다.6) 그 기울어짐은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다. 계속해서 물어요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비가 오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이곳에 마스크를 쓰고 모였어요 완전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눈을 보고 있다고 위로도 해보지만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린 다 달라요 각자의 날 선 마음을 휘두를 수도 있고요 한 자리에 모여서 무거운 비구름 앞에서 산이 불타고요 죽이고 잡아먹고요 우리의 이웃이 움직이지 못할 동안 가닿지 못한 채로 값싼 식사를 하고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절에 어둑해 도로를 확인하기조차 어렵기도 합니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거나 어둑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서 어디를 향해 사죄할지 찾아보려는 동안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서로에게 말해주며 안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테니까 여기선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애통이라고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합니다 - 「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전문  그리고 기울어짐의 끝에는 '동료'들이 있다. 윤은성의 시에서 동료는 서로의 '차이'와 '취약함'까지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동지'보다 애틋하다. "이전에는 불러보지 않았던 / 새로운 이름을 자꾸만 붙여주면서" 걸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손을 잡고 또 때론 놓으면서"(「생일 세계 공원」) 걸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놓을 수 있기에 끊어지지 않는 느슨하고 단단한 연대, 그 연대가 '광장의 흔적'을 '흔적의 광장'으로 만든다. 과거의 우리를 헤어지게 만들었던 차이와 취약함이 현재의 광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동료들은 어느새 다시 모여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치게 될지도 모르는 / 구간을 상상하며"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상한 단계들"(「선반 달기」)이라 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가 자신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 서로에게 말해주며" 끊임없는 안부를 묻는다. 물론 이 광장도 언젠가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서로를 구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 애통이라고 / 슬프고 아픈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세계에서, "아프고 힘든 소식으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을 보내는 우리가, 슬프고 아픈 일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거기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구호와 기도 사이에서, 서로와 각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너'와 '나'의 '안'과 '밖'을 헤매고, "혼자라는 걸 믿지 말라"는 말과 "혼자라는 것만이 단 하나의 진실이라"(「겨울과 털 공과 길고 긴 배웅과」)는 말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멀리서만 기도할 수 있는 사람"(「마음 닫기」)이 될지언정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마음을 "여미고 열"며 "당신에게로 기울어"(「창문을 열다가」)진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시금 광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므로, 광장이 남긴 흔적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이 이상한 순환에 구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른 대답 대신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한 시인의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문학적 경험으로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 그것은 거의 가장 온전한 위로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참담한 자리. 구원을 떠올리게 됨에도 구원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경험, 문학적 경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7) 1) 샹탈 무페, 서정연 역, 『경합들』, 난장, 2020, 23쪽. 2) "모든 질서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사태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질서는 다른 가능성의 배제에 근거해 있다." 위의 책, 32쪽. 3) 윤은성,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이와 관련해 오연경은 "시집 전체를 통해 사라진 얼굴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얼굴들, 근황과 안부가 궁금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현실이라는 미지수에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풀이에 집중하는 시인의 언어를 목격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오연경, 「'주소 없는 거주자'의 목소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봄호. 4) 장-뤽 낭시,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2022, 7쪽. 5) 위의 책, 8쪽.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중략...)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6) 이와 관련해 시인은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소식들로부터 모종의 영향을 받아버리게 되곤 할 때, 그 일은 내 존재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이 마음의 지대야말로 외부와 나를 연결하고,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음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폐쇄적인 일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윤은성, 「시대와 마음-촛불혁명과 시와 나」, 『작가들』, 2025년 봄호. 7) 윤은성,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경험과 비(非)구원적 구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가을호.

계간 문학인 하혁진 윤은성유리 광장에서광장공동체동일성타자성연대시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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