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계간 현대비평 | 2024년 여름호(제19호)

외밀한 몸의 비평 ― 이재복론

박다솜 문학평론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네가 틀리는 곳에서 나는 옳다」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연대가 분열할 때―이미상론」으로 2023년 제1회고석규신인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1. 등의 존재론


    “인간에게 등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증거다.” 그에 관한 내 기억의 첫 장면에 놓여 있는 말이다. 아마도 내가 석사 과정생이던 시절 대학원 수업 시간에 들었던 말일 텐데, 이 말은 그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일 뿐만 아니라 이재복 비평 세계의 기초를 다지는 문장이기도 하다. 이재복은 첫 평론집 『몸』(하늘연못, 2002)의 서문에서 자신의 몸을 낯설게 느꼈던 경험을 나열한다. 분명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음식들을 반도 못 먹었던 일, 써야 할 글은 산더미인 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잠자리에 들었던 일 등을 통해 나의 주인이 몸임을 깨달았다고 말하던 그는 “그러나 이 모든 체험보다 내게는 소중한 것이 있다.”며 등에 관한 사색을 전개해 나간다.


    정말이지 나는 한 번도 나의 등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고개를 뒤로 돌려도 등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또한 만져볼 수 없다. 하지만 그네들은 내 몸을 다 볼 수 있다. 빙글빙글 돌아보면서 볼 수도 있고 여기 저기를 만질 수도 있다. 이 사실은 나의 몸이 타인에 의해 규정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 몸이 온전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한 것이고, 반대로 타인의 몸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몸과 타인의 몸이 상호 소통할 때 진정한 의미의 반성적인 교감 및 정서적인 유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내 몸 공부의 화두가 바로 이 상호신체성을 통한 정서적인 공동체(감성적인 공동체)의 성립에 있다.1)


    인용문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등은 분명 내 몸의 일부이지만 나는 그것을 제대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오히려 나의 등은 타자에 의해 더 적극적으로 감각된다. 등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것도, 구석구석 다 만질 수 있는 것도 내가 아니라 타인이다. 나의 몸은 지극히 ‘내 것’이면서 너에 의해 보다 온전히 감각되는 ‘네 것’이다. 따라서 등에 관한 위 인용문의 고찰이, 주체와 타자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깨달음(“내 몸이 온전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한 것이고, 반대로 타인의 몸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으로 번져나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실 우리 몸에는 등처럼 내가 온전히 감각할 수 없는 곳이 많다. 있는 힘껏 몸을 비틀고 눈알이 뻐근하도록 모로 봐야 겨우 일부를 볼 수 있는 팔꿈치, 손으로 만질 수는 있지만 거울이 없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항문, 그리고 무엇보다도 얼굴. 인간은 눈으로 세상 만물을 볼 수 있지만 맨눈으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더불어 눈이 얼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타자를 ‘보는’ 만큼 ‘보여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즉 몸으로 존재하는 우리 인간들은 이미 오롯이 타자를 향해 있는 것이다. 몸은 온전한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와 연결되기를 멈추지 않는, 세상과의 접면이기도 하다. 등에 대한 이재복의 통찰은 이 점을 정식화하고 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몸 공부란 우리 몸의 절대적 실체성에 관한 논의에 그칠 수 없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타자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등으로 표상되는 우리 몸의 본질적 특성은 라캉의 조어 ‘외밀함’을 연상시킨다. 프로이트의 섬뜩함(das Unheimliche)에 해당하는 라캉의 표현 외밀함(extimité)은 ‘내밀함’을 뜻하는 프랑스어 intimité의 접두사 in을 ex로 바꿔 붙이면서 만들어졌다. ‘외(부)’와 ‘(내)밀함’을 동시에 의미하는 이 개념은 애초에 그것이 프로이트의 ‘섬뜩함’을 표현하기 위한 조어였다는 점에서 주로 낯설고 “위협적이며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키”2)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듯하다. 그러나 이재복에게 등의 외밀함은 섬뜩함의 차원으로 옮아가지 않는다. 의심의 여지 없이 내 것이라고 믿어 왔던 몸이 완전히 나의 것은 아님을 깨달았을 때 어쩐지 섬뜩해질 법도 한데, 그는 그런 몸이 낯설었다고 말하면서도 흔흔히 공동체를 향해 간다.

    몸의 외밀함에 대한 이런 반응은, 주체와 타자를 완벽히 분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서양 사상사의 흐름을 다소 비껴선 곳에 이재복이 위치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실 서구의 근대적 사고를 상징하는 이분법과 단절, 분리의 감각은 이재복의 비평 세계가 지양하는 것들로, 그의 비평에서 중요한 개념인 ‘기氣’는 연속적 흐름과 비분리의 감각을 표상한다. 이런 식으로 이재복의 몸을 통한 세계 해석은 탈근대 담론과 맥을 같이 한다.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도입부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의 비평은 남근중심주의를 해체하며 등장한 여성주의 담론, 이론과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며 부상한 미학주의(매체와 영상에 대한 탐구)와 감성주의, 주체의 죽음과 함께 부상한 타자의 개념, 뇌와 시각중심주의 대신 회음부과 촉감의 세계,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으로서 자연 혹은 생태주의(생명주의), 서구중심주의 해체 이후 동양 사상의 가치 재조명 등을 향해 넓고도 깊게 나아간다.3) 그리고 이 방대한 공부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에코토피아와 디지털토피아’이다.


2. 에코토피아와 디지털토피아의 길항


    ‘에코토피아와 디지털토피아’라는 개념쌍은 디지털 세계가 현실 세계로 범람하던 1990년대에 대한 그의 진단에서 촉발되었다. 「에코토피아와 디지털토피아-몸의 문제를 중심으로」(『비만한 이성』, 청동거울, 2004)에서 이재복은 “지금 여기에서의 존재성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86쪽)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말하며 가상 현실이 실재로서 기능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한다. 가상 현실을 실재라고 믿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는 일이며, 이는 곧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가 해체되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에콜로지와 디지털’ 쌍이 추출된다. “이 두 대상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징적으로 수렴하면서 다가오는 새 천년의 지형도를 형성할 힘의 실체들”(88쪽)이라고 그는 판단한다.

    주지하듯 디지털의 세계와 에코의 세계는 서로 대립적 속성을 갖는다. 디지털토피아와 에코토피아의 토대가 되는 개념, 디지털과 에코는 각각 인공(문명)과 자연을 의미한다. 이 근본적인 토대의 차이는 “디지털토피아와 에코토피아가 화합과 공존보다는 그 안에 불화의 요소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89쪽) 또 디지털토피아는 0과 1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디지털적 인식은 세계를 불연속적·불확정적 방식으로 재현한다. 반면 에코적 인식은 세계를 연속적·확정적 방식으로 드러낸다. 에코적 인식 하에서는 “어떤 변화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급변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89쪽) 즉 디지털토피아에서 그런 것처럼 0이 1이 되는, 없던 것이 있게 되거나 있던 것이 없어지는 일은 에코토피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또 두 세계는 존재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디지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89쪽)으로, 디지털토피아의 없음은 “없음을 전제로 한 없음”(90쪽)이다. 이에 반해 “에코는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어디엔가 흔적을 남”(91쪽)기는 것으로, 에코토피아의 없음은 “있음을 전제로 한 없음”(90쪽)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두 개념을 두고 사람들이 각각 “디지털토피아가 곧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몽상과 에코토피아가 곧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몽상”(88쪽)에 빠져 있다는 이재복의 문제의식이다. 디지털이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일군의 사람들은 에코의 세계를 거부하고 디지털토피아만을 주장하거나, 디지털의 세계를 배척하며 에코토피아만을 추앙했는데 그는 두 입장 모두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행해지고 있는 디지털토피아와 에코토피아의 동상이몽은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디지털토피아가 유토피아라는 발상은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자의 토대가 되는 에코적인 존재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며, 에코토피아가 곧 유토피아라는 발상은 지금 여기에서 모든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될 정도로 지배적인 힘의 실체로 부상하고 있는 디지털 문명 자체를 외면한 채 지나치게 당위적이고 이상적인 측면만을 내세울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또한 위험하다.(93쪽)


    그러면서 그는 “가장 바람직한 유토피아 상은 디지털토피아와 에코토피아 사이의 적절한 긴장과 이완을 통해 성립되는 것”(93쪽)인데, 이 어려운 일을 이미 해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몸이라고 말한다. 우리 몸은 기본적으로 에코적인 것이지만 “후기 산업사회의 디지털적인 논리가 몸의 존재성을 규율하고 통제하”(94쪽)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일정 부분 디지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몸은 디지털과 에코적인 것 사이에 있으면서 그 둘을 통합적으로 수렴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존재 그 자체이다.”(93쪽)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등의 주체’에게로 돌아가게 되는데, 몸이 있기에 ‘나’로 존재하면서 바로 그 몸으로 인해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인간의 본질적 존재 조건은 단순한 택일의 불가능함을 암시하는 까닭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내 몸은 전적으로 나의 것일 수 없으며 그렇다고 완전한 너의 것일 수도 없다. 에코토피아와 디지털토피아 역시 함부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은 에코적 존재인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다시 인간들을 디지털적 방식으로 구성해간다. 인간이 만든 힘은 인간을 만드는 힘으로 변용한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주체와 타자의 외밀한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에코토피아와 디지털토피아가 길항하는 곳이다. 이처럼 몸은 배치되는 힘들이 맞서는 장소이며 그 힘들을 수렴해 표지하는 실체이기에, 우리는 오직 긴장한 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보다 성실한 긴장만이 진솔한 태도일 것이다. 이재복의 비평 세계에서는 이 정성스러운 긴장을 ‘그늘’이라고 부른다.


3. 몸을 통한 신산고초, 그늘의 미학


    그의 비평사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그늘은 사실 상당 부분 예고되었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몸이 어떻게 언어가 되고, 언어가 어떻게 몸을 얻는가 하는 문제는 시인의 영원한 화두이기도 하다. (…) 이것은 ‘거북이 자신의 등을 구워 문자를 만드는(송찬호, 「산경을 비추어 말하다」)’ 것만큼이나 고통스럽고 지난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몸의 언어의 탄생이 가지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4)라고 주장하는 『몸』의 서문이나, 상술한 글 「에코토피아와 디지털토피아」의 마지막 문단(“‘나’의 모든 존재 전체를 뒤흔들 괴로움이 있고서야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이 논리는 요즘 앞다투어 밀레니엄을 전망하고 모색하는 사람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금언인 것이다. 중심의 괴로움을 얼마나 앓고 있고 또 앓아내느냐에 따라 우리가 꿈꾸는 디지털적인 것과 에코적인 것의 통합을 통한 유토피아는 온전히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5)은 그 내용상 그늘의 미학에 부합한다.

    이런 정서는 『몸과 그늘의 미학』(도서출판b, 2016)에서 ‘그늘’로 명명된다. 그늘이란 일차적으로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판소리에서는 맑고 아름다운 소리인 천구성과 “신산고초를 다 겪고 난 이후의 어둡고 탁한 소리인 수리성”(183쪽)의 결합이야말로 진정한 소리로 치는데,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와 추·이승과 저승·지상과 천상·기쁨과 성냄·슬픔과 즐거움…”(183쪽) 등과 같은 상대적인 것들을 삭이고 견디는 삶의 자세가 있어야 하고 이를 그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소리꾼의 소리에 그늘이 있다는 말은 그가 득음을 했다는 뜻이며 “이때의 그늘이란 한을 삭여 그것이 신명의 차원까지 나아간 상태를 가리킨다.”(286쪽) 다시 말해 한과 신명을 아우르는 것, “어느 한쪽이 아닌 다른 쪽까지 포괄하고 서로 어우러져 웅숭깊은 세계를 이”(285쪽)루는 것을 ‘그늘’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나무 그늘에서도 동일한 미학적 원리가 발견된다. 한 알의 작은 씨앗에서 비롯된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기 위해서는 긴 시간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하며 “해와 달, 비, 눈, 서리, 바람, 이슬, 물, (…)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의 관계를 통해”6) 만들어진 것이 그늘이다. 긴 시간의 과정 속에서 나무는 눈, 서리, 비, 바람을 견디고 햇빛, 흙, 공기, 물 등을 양분으로 섭취한 후에야 비로소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늘에 매혹된다면 그것은 “그늘에 깃든 시간의 장구함, 다시 말하면 날것이 삭힘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웅숭깊어지고 견고해지면서 지니게 되는 품격과 숭고함 때문”(103쪽)일 것이다.

    그늘의 미학에 관한 이재복의 설명은 “고통스럽고 지난한 시간”이나 “‘나’의 모든 존재 전체를 뒤흔들 괴로움”, ‘중심의 괴로움 앓기’와 그 궤를 같이 한다. 핵심적인 지점은 온몸의 신산고초를 겪는 이유가, 상대적인 것들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섣불리 선택하지 않고 다른 쪽까지 포괄하려 애쓰기 때문이라는 대목이다. 그의 말대로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암암리에 상처나 갈등이 없는 ‘매끄러움’ 혹은 천의무봉함 같은 거짓 화해와 얕고 의례적인 장식(꾸밈)에 익숙해 있”7)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한 세계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한 세계를 못 본 체하는 것은 아닐까. 이재복의 비평이 말끔한 낙관이나 연대, ‘그래도 사랑’ 식의 당위적 마무리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늘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늘은 그것이 외밀한 존재의 딜레마를 충실히 앓아낸 흔적이기에 아름답다.

한쪽으로 손쉽게 치우치는 대신 이것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아프게 받아들인 소리,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동시에 발화하는 소리, 목을 긁으며 목으로 내는 껄껄한 소리는 가차 없이 아름답다.

    그러니까 결국, 몸이다. “몸은 이쪽과 저쪽, 안과 바깥의 흐름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대리보충되는 처절한 실존의 장”8)이고, 그런 몸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재복은 ‘사이와 경계를 사고하자’라고 주장하지 않고, 이미 사이와 경계의 존재인 ‘몸을 깨닫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에 몸으로서 존재한다.


4. 스승 되기의 외밀함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언제 처음 스승이 될까? 차려입은 정장 아래 긴장을 감추고 첫 강의에 들어가던 날도, 학점을 부여하는 일의 책임감과 무게를 실감하던 날도, 자신의 미래를 함께 고민해달라고 찾아오는 누군가를 만나는 날도 잘못된 대답은 아니겠으나, 어쩐지 충분한 대답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은 앞선 순간들이 ‘나’의 또렷한 자각(만)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저런 대답은 외밀하지 않다.

    쓰는 것이 한없이 두려웠던 시절, 나는 엉뚱하게도 ‘모든 비평은 인상 비평에서 시작한다’라는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정확한 표현도 기억나지 않는, 심지어 나를 향한 말도 아니었던) 그의 말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 것을 의도하진 않으셨겠지만 나는 내 멋대로 그 말을 ‘너 자신을 믿고 써도 돼’라는 말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말에 기대어 계속 쓸 수 있었다. 이제는 그의 비평론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하고 뻔뻔해져 버렸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스승이 된다는 것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등을 내어주는 일이다. 누군가는 그 등을 밟고 아득히 높아 보이기만 하는 인생의 담을 넘어갈 수 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싶게 까마득한 어떤 말 한마디, 무심코 했던 칭찬, 의례적인 응원의 말들. 그런 것들이 등이 되어 누군가를 담 너머로 넘긴다. 그리고 정작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 여러 모양의 발자국으로 까맣게 더러워진 등을 하고서, 그런 자신의 등은 영영 볼 수 없는 채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스승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스승이다’라는 자각 없이 우리는 스승이 된다.

    ‘인간에게 등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증거’라는 그의 말을 나는 이렇게도 이해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까만 발자국이 가득한 등을 하고서 그것을 모른 채로 살고 싶다. 나의 한마디 말이 누군가를 담 너머로 넘겨주길,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를 담 너머로 넘겨줄 수 있는 튼튼한 등의 소유자가 되길 희망한다. 그의 등에 발을 디디고서야 겨우 볼 수 있었던 두려움 너머, 이곳 비평의 세계는 내게 더없이 눈부시니까.

  • 1) 이재복, 『몸』, 하늘연못, 2002, 7-8쪽. 이후로 이 글에서 명기하는 서지사항에 저자 표기가 없는 경우, 저자는 이재복이다.
  • 2) 믈라덴 돌라르, 「“나는 네 첫날밤에 너와 함께할 것이다”: 라캉과 섬뜩함」, 복도훈 역, 《자음과모음》 2015년 봄호, 292쪽.
  • 3)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태학사, 2004, 17-24쪽 참고.
  • 4)『몸』, 하늘연못, 2002, 8-9쪽. 밑줄은 인용자.
  • 5)「에코토피아와 디지털토피아」, 『비만한 이성』, 청동거울, 2004, 98쪽. 밑줄은 인용자.
  • 6)「‘그늘’ 혹은 상상의 토포필리아」, 『정체공능과 해체의 詩論』, 도서출판b, 2022, 102쪽.
  • 7)『벌거벗은 생명과 몸의 정치』, 소명출판, 2019, 7쪽.
  • 8) 『비만한 이성』, 청동거울, 2004, 93-94쪽.


추천 콘텐츠

박다솜 말미잘 하는 몸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월간 현대시 박다솜 김혜순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말미잘시하다모든 종류의 슬픔 2025
김정현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들의 도래에 관하여

1. ‘자명한 것이 없는’ 목소리들은 지금 우리 시문학장에 새로이 등장한 신인들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물론 2025년 올해에 등단한 시인들의 시세계는 이제 막 출발점에 위치한 셈이다. 그러니 각각의 시인들이 최소한 한 권의 시집으로 대변될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어느 정도 드러내기 이전까지 그것을 규정하는 일은 그닥 의미를 갖기 어렵다. 한 명의 시인이 지니는 시세계를 겨우 2편의 시로 설명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주어진 원고를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어떠한 근원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지닌 기묘한 고유함에 대한 증명이자 그 욕망이다. 미래파 시기의 2000년대와 포스트-미래파의 201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이란 카테고리에 종종 부여되는 키워드인 난해성과 추상성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의 문장을 조금 바꿔 말해본다면 ‘시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미학이론』)는 맥락을 분명히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개인적이고 독자적인 사유행위에 속한다는 점 역시도. 그렇기에 이번 글에서 다루어야 하는 시인들의 시를 하나의 통일된 경향으로 정리하는 것은 더더욱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지금의 젊은 시인들이 어떠한 감각과 인식 혹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가란 층위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일에 있다. 왜 이들은 낯설고도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시선으로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가. 그 고유하고도 기묘한 감정과 마음은 그들의 언어가 지닌 깊은 심연이기도 하다. 이 심연은 (앞으로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현재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는 부를 향한 AI의 열풍 그리고 주가 5000선 달성과 강남 아파트값 폭등이란 먹고사니즘의 거센 파도와는 무관할 것이다. 즉 실제하지만 실제하지 않는 거대하고도 치밀한 압력들 속에서도 문학을 하는 우리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낯선 무언가들을 들리지 않더라도 발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에게 도착한 시인들의 기묘하고도 고유한 언어는 이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어이 쓰고자 하는 언어이자 증명이며 욕망인 것. 언제나 알 수 없고도 이상한 우리의 세계 속에서 시를 쓰는 인간들은 여전히 있다. 과거와 지금에도 그리고 예측하기 불가능한 미래에서도. 하면 그들은 도대체 왜 쓰고 왜 말하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명확한 답이란 없겠지만 중요한 맥락은 언어의 표면이 아닌 이면이자 심연이며 각기의 시인들이 지닌 기묘한 나로서의 고유함이란 무엇인가를 섬세하게 살펴보는 것에 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명심해두자. 이 글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에 그칠 뿐이라는 점을. 시라는 굳어진 규정이 아닌 시적인 것은 모든 시인들에게 깊숙이 그리고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명명 불가능한 무엇일 따름이니까. 2. 세계에 대한 깊은 절망의 알레고리란 언제나 중요한 지점은 시인들은 세계에 대해 절망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굳이 보들레르나 이상을 끌어들여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이 측면에서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은 분명 주목되는 흥미로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이 시속에서 줄기차고 집요할 정도로 반복하는 “아주 많은 복숭아”란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실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다음의 구절을 보자. 유일하고 거대하다. 복숭아와 숲 사이 숲속에서 복숭아로 가는 길을 삽으로 찌르는 사람들 복숭아로 가는 사람들 구덩이에 쪼그려 앉아 말한다. 그의 위로 복숭아나무 가 자랄 것이라고 만들 것이라고 아주 많은 복숭아를 (…) 불어나는 숲으로 가려지는 길 불어나는 숲으로 가로막힌 다 막힌 길의 끝에서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복숭아 하나 상 해가며 무너진다 무너지며 쏟아지는 복숭아 아주 많은 복숭아 길의 끝이 비어 있다 그리고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 방성인, 「복숭아로 가는 길」, 부분 방성인 시인의 「복숭아로 가는 길」에서 복숭아란 단어가 주는 느낌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복숭아란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처럼 ‘유일하고 거대한’ 복숭아들로 가득한 우리의 세계. 달고도 맛있는 복숭아는 일견 먹고사니즘과 더 많은 돈에 대한 당연하고도 평범한 욕구의 존재를 우리에게 기묘하게 비틀며 가리킨다. ‘숲을 빠져나오고 다음 숲으로 향하더라도’ 우리는 복숭아가 주는 달콤함과 쾌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렇다면 “복숭아 없는 복숭아나무들이 모여 복숭아 없는 숲”이란 것은 사실상 우리의 세계 전체가 이미 ‘유일하고도 거대한’ 하나의 복숭아가 되어버렸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 되물어보자. 과연 우리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또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복숭아들인지 혹은 아닌지를. 균일하고도 단일한 욕구들이자 이데올로기이며 상징계적 질서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세계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복숭아 그려진 팻말이 흐려지’더라도 끊없이 “불어나는 숲”과 같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이질성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는 진실. 시인은 이를 이렇게 말한다. “막힌 길의 끝에 복숭아 하나 상해간다”. 당연한 욕구로 교환될 수 없는 ‘상한 복숭아’. 내 자신이 사실은 복숭아였다는 점을 손쉽게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한’ 이질적이고도 기묘하며 다른 ‘상한’ 복숭아가 되려는 마음. 이 같은 미묘한 차이를 생산하려는 욕망이 내재된 ‘상한 하나의 복숭아’는 복숭아들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쏟아’버릴 것이다. 시인은 안다. 이 정상적인 복숭아들의 욕구가 끊임없이 도달하고자 하는 길은 결국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자 욕망하는 ‘하나의 상한 복숭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꽃의 대기」에서 이야기되는 “피어오르는/ 꽃의 대기에서/ 흐트러지는 꽃 충돌하는 꽃/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다발 사라지는 꽃의 환희/ 꽃의 멜랑콜리 꽃의 비애 꽃의 회환/ 피고 지는 꽃 옆으로 피고지는 꽃”이란 것은 자연에 대한 단순한 표현일 리는 없다. 세계에 대한 절망이자 고통인 멜랑콜리를 품은 존재. 그리하여 ‘흐트러지고 충돌하여 만들어지며 사라지는 비애’란 것은 사실상 시인의 근본적인 무엇이자 ‘상한 것’으로 존재하려는 욕망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복숭아들만이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손쉽게 확언될 수 없는 기묘하고도 고유한 이질성을 기어이 형성하겠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향해 있다. 요컨대 시인은 절망이란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가 지닌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을 뿐이다. 어릴 적 배웠는데 분명 열심히 꼭꼭 씹어서 삼키면 소화된 것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거름이 되어 밭을 가꾸고 나무를 키우고 집을 짓는다는데 왜 우리 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걸까? 비가 내린다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다 비가 얼마나 올지 모르니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 멀리 하늘을 내다보다가 다시 걷는데 목이나 축이려 들여다본 못에 비친 나, 자세히 보니 민달팽이다. - 안수현, 「굳은 살」, 부분 시인이 근본적으로 절망하는 자라면. 그렇다면 문제는 이 절망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연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안수현 시인의 「굳은 살」은 이 측면에서 우리의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위치한 시인의 태도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손쉬운 절망도 손쉬운 희망도 아닌 무언가를 행하는 자로서 존속하기. 시 전체를 아우르는 “집을 이고 살아가는 족속”인 민달팽이의 이미지는 이와 직결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핵심은 이 집의 구체적인 형상 속에 담겨져 있는 시인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겠다. 시인은 이를 다음처럼 말한다. “내 등 뒤에 있는 것은 흙벽이다/ 집 안에는 심장도 있고/ 그 박동 가까이 붙여둔 꿈도 있고/ 내가 먹은 삶들 사랑한 사람들 아껴둔 말들이 있고/ 구멍 나 비워둔 자리도 있고 일부러 남겨둔 자리도 있”다고. 규정될 수 없으며 언어의 표면으로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는 희미한 마음이라고 칭해야 하는 영역들. 비록 “지붕은 올리지 못해서 비가 오면 그대로 다 맞는” 것처럼 초라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버릴 수 없는 어떤 마음들이 여기에 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나 역시도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속한 존재라는 점 역시도. 하여 시인이 가진 집이자 나의 영역은 돈과 풍요로움만을 강제하는 우리의 정상적인 세계와 무관하게 존속하려 한다. 시인은 그러한 마음들의 계보에 ‘끌려갈’ 테고 그 세계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려 한다. 비록 “우리집은/ 무너지기만 하고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보내고 마는” 것처럼 보일 뿐일지라도. 세계가 강제하고 동시에 보장하는 행복의 의미와 무관한 층위에서 머무르기. 당연하게도 우리의 세계는 이 마음의 이끌림 따위에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화폐의 단위로 명확하게 환산될 수 없는 보이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무엇이니까. 이처럼 비가 내리는 세계 속에서 “흙벽이 씻겨 사라질지 아니면/ 비온 뒤에도 오히려 단단해질지/ 알 수 없”겠지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간절한 중얼거림. 이 처절한 마음을 지속해내겠다는 하나의 다짐으로서. 이것은 시인이 발견해낸 자신의 고유한 마음이자 욕망이기도 하다. 절망적이고 무가치한 세계 속에서 나에게로 이어지는 마음의 계보들을 이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의지일 것. 바로 그러한 마음과 나이며 “너와 내가 함께하는 미래가/ 오래도록 높이 길게 멀리 뻗어가기를.// 비로소/ 나는 홀씨가 되어 날아갈 궁리를” 꿈꾸는 자. 그러니 도처에 퍼져있는 “도저히 씹어삼켜지지 않을 만큼 큰 고민”(「룸메이트」)을 행하는 자는 결국 나의 친구이자 또 다른 내가 아닌가. 자신만의 세계이자 존재로서의 사유를 향한 시인의 마음이 이렇게 명확하다면 이 민달팽이의 걸음은 느리지만 진중하며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 기묘한 걸음이 절망적인 세계를 언젠가는 횡단하리라는 점 역시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여기 또 하나의 절망을 대하는 고집스러운 태도가 있다. 이솔 시인의 「검은 돌, 악보, 가계」이다. 이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들의 납득 가능한 연속성이나 인과관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에 있다. “저는 매혹되었습니다”라는 돌출된 것처럼 보이는 문장은 그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무의미하며 동질적으로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기어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시인의 언어는 그것을 잡아내려 한다. 그 순간의 ‘장면’들은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습니다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하니 나쁘지 않습니다 담을 오른편에 둔채 계속 가다보면 큰 건물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바다에서 표류하던 그물을 걷어 올려 벽에다 걸어놓았다고 하네요 무슨 맛이 나는 해조류들이 매달려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주 큰 거미가 허공에 떠서 여러 개의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아 되돌아가기로 합니다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하거든요 일련번호도 없이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저는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를까 봐 무섭거든요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 이제 저는 정말로 배가 고파진 상태입니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우중충한 목소리가 들리고 똑같이 생긴 문들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축 처진 저것의 아랫부분을 밀고 나가볼가요 그녀가 주름진 입가를 힙겹게 끌어올리듯이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이 이마부터 뒷덜미 그리고 등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녀가 쓰다듬어줄까요 그녀의 치마 안으로 들어가듯이 따듯한 바람 속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위의 시에서 어떤 명확한 서사를 확인해보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부분은 시인이 느끼고 있는 일종의 세계감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제 악보를 용서해주세요”란 갑자기 튀어나온 문장이 의미하는 것. 이는 시인이 우리의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어긋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핵심적이다. 시의 제목이 의미하듯 검은 돌과 악보와 나의 가계도는 모두 ‘거미’로 표상되는 그 따뜻해 보이는 세계와 무관할 따름이니까. 그러니 시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가까이 있는 “담벼락에는 다양한 침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것을 볼 수 없는 곳이자 “멀리서 맡을 때는 향긋”할 뿐이라고. 요컨대 “동네의 담벼락들은 꼭 저의 눈높이만큼 이어져있”듯 그리고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숨기에도 적합”한 세계인 것. “건너편에서 머리가 둥실둥실 떠가면 그걸 바라보기에도 좋”은 나만의 영역과는 다른 “우중충한 목소리”이자 “똑같이 생긴 문들”의 구별하기 어려운 무한하고도 반복적인 세계. 이 무가치한 세계와 직결되어 있는 존재는 아마도 ‘여러 개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주 큰 거미’라 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거미에게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대립하려는 자. 때로는 그 세계에 뒤섞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질성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자. 그것이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여 거미의 ‘부드럽고 촘촘한 거미줄은 나의 온 육체를 꼼꼼히 묶어두듯이’ 나를 통제하며 제어할 것이다. 그 따뜻해 보이는 속삭임의 말들은 말하자며 시인을 유혹하고 이 평면적 세계에 손쉽게 잠겨 들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시에서 말해지지 않는 무엇들. 요컨대 “일련번호도 규칙도 없이 벽에 범벅되어 있는” 내가 진정으로 원해야 하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갑자기 벽에서 하나의 뚜렷한 얼굴이 솟아오”르는 어떤 고유한 순간이 아닐까. 짐짓 시인의 엄살처럼 ‘무섭다’라는 말은 그렇기에 큰 의미가 없다. 이 낯설고 이질적인 얼굴을 지닌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나의 영역은 “매혹”적이자 낯설고 두려운 무언가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존재들은 여러 개의 눈을 가진 거미의 ‘쓰다듬’이자 ‘따듯한 바람’과는 무관해야만 한다. 그러한 마음만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나만의 악보’이자 어떤 기묘함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 한다. “빛을 찢으며/ 마지막으로 온 사람을/ 조급할 이유 없이/ 천천히 안아”보는 마음을 가지고 “이 순간 이라고 발음”하게 될 어떤 순간을 기다리면서. 여전히 “식물은 숨을 들이마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차창으로 지나가는 배경이 되고/ 주먹이 책상을 내리”(「훔치고 싶은 것들이 있다」)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가난한 집의 문”의 이면 속에 있는 무언가들. 일종의 깊은 어둠이라고 해야 할 언어의 심연 속에 위치한 시인의 언어가 지닌 본질적 욕망. 그 끈질긴 태도이자 형상들은 ‘거미들’이 제공하는 따뜻하고 편안한 ‘치마폭’의 안락함으로부터 이탈할 한 가지 방법이기에. 3. 언어의 심연을 고통스럽게 사랑함으로 그러니 절망 앞에서 선 인간들의 무기는 어떤 점에서 언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우리의 세계이자 의미들로 가득 찬 언어의 표면이 아닌 오직 내가 구축하고 형성하며 존재시켜야 할 고유하고도 기묘한 언어의 심연. 시인의 무기이자 고통이며 동시에 깊숙하고도 알 수 없으며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존재여야만 하는 것. 그것만이 시인들에게 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시를 한 번 살펴보자.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었다. 안으로 자라나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의 눈빛이 누군가의 손짓이 팔을 들어 올리는 몸짓이 금속으로서. 움트기 시작했다.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 어떤 장면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한 사람을 이룬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어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 무딘 날에 베인다면 낫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알게 되자 안으로 희디흰 날들이 쏟아진다. 길을 걸을때면 앞서가는 사람의 발소리에 맞추어 칼날이 흔들린다. 발돋움하며 머리카락 휘날리며.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 춤을 멈출 수가 없다. 죽지 않도록 파고들었다가 흐를 듯 녹아 고인 흰 날이. 뜨겁게 끓고 있을 때. 변해볼 마음이 있어? 그러자 흰 날은 냄비 안의 죽이 되어 끓어오르다 우묵한 그릇에 담겨 식탁 위에 올라와 있다. 먹어야 나아, 말하는 목소리가 되어 다시 하얗게 끓어오르는 것을 본다. 목소리가 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나를 베지 않는 쪽으로 날을 만들어볼 수 있을까요. 칼등 위로 걸어볼 수 있을까요. 칼이 나를 뚫고 나가, 무뎌진 채 멈춰 있다면.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아주 커다란 압정인가 봐요. 말하며 튀어나온 날에 시래기 같은 것을 걸어 말리고 있다. - 박연, 「최선의 칼집」, 전문 박연 시인의 이 시는 또 어떠한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베여야 가장 날카로운 상처를 가지는지”라는 중얼거림에서 느껴지는 중요한 맥락은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는 점에 있다. 물론 이는 상처가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시인은 절망 속으로 더욱 뛰어들고 그 고통을 섬세하게 느끼며 인식해야 한다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시인은 고통스러움과 두려움을 통해 형성되는 “안으로 자라나는 칼”이란 언어에 어떻게든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칼은 곧 나일 따름이니까. 흔히 생각해보듯 시인을 언어를 편하고 자유롭게만 사용하는 그러한 존재라고 여길 수는 없다.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시적인 것들의 희미한 형상. 그러니 “경연하듯이 자라나는 동작이 이어지고. 끝내 칼의 형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들어보고자 했으나 들 수 없었다.”는 것처럼 통제불가능한 언어들은 내 속에 위치한 내면의 칼로서 나를 상처 입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통과 상처 그리고 환희와 열광을 결코 구분하지 않는 나의 근본적 욕망일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다. 언어가 나에게 부여한 칼은 “몸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이자 ‘멈출 수 없는 춤’과 같다는 것을. 하면 이 시인은 그러한 언어의 존재에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자가 아닐까. “안으로 자라는 칼을 안고서. 맞서고 있었다”는 철저한 고백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아프며 아파야만 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 측면에서 ‘최선의 칼집’이란 시의 제목은 언어라는 칼을 담고 있는 자기 자신이자 되어야만 하는 최대한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냄비 안의 죽’이자 ‘하얗게 끓어 오르는 목소리의 강’으로 무한히 분열되고 파편화되는 그러나 오직 나라는 존재의 고통이자 숙명을 담아낼 언어를 어떻게든 붙잡아내고 형성하기. 손쉽고도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언어가 아닌 언어의 심연이자 고통을 그리고 칼날 위에 선 샤먼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투쟁한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커다란 압정”으로 오독하면서 시래기를 말리겠지만 그와 무관하게 나는 나의 언어를 존재케 하겠다는 것. 이는 한 시인으로서 세계에 대한 절망과 동시에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고유한 욕망인 셈이다. 그것은 「도움받기」에서도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동물에겐 끝없는 온기가 필요한” 이 세계 속에서 “배의 어둠에 관해 상상”하면서 그 어떤 언어도 손쉽고 자유롭게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인은 나의 절망 속에서 생성된 언어라는 날카로운 칼이 사실은 나 이상의 무언가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배의 안쪽에 작은 배들이 살고 있다면. 단 하나의 배를 환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언어의 무한한 분열과 나누어짐을 오롯이 지켜보려는 자. 하여 ‘온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열기를 식히며’ 우리의 세계 속에서 ‘초파리가 몰려드는 무른 배’이자 썩어가는 자로서 기어이 존재하겠다는 욕망. 이 역시도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나의 기묘한 고유성만을 긍정하고 탐구하려는 시인의 존재방식일 것이다. 유키는 미움받아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래도 두렵지 않았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긴 하지만 유키는 파랗다 선생님, 이게 병이 하는 생각이라면서요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건강에 있어선 모든 방면으로 분주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게으르고 증상이란 건 너무 무섭고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고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겁다가도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는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다 보니 걷잡을 수 없이 멀리 와버린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 의지도 없이 여기 머무르고 있다 가깝게 사랑하며 - 백아온, 「사랑을 담아, 유키가」, 부분 백아온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바를 말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말이지 파랗다’라는 것에 대한 간절한 욕망이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적인 이성애적 ‘사랑’으로 이해할 필요는 당연히 없겠다. 왜냐하면 시인이 “우리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들이라서 자기 파괴적인 유키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기파괴’적인 기묘하고도 이해되기 어려운 유키의 사랑은 어떤 측면에서 시인 자신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해야 한다. 즉 “유키는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나 딱 하나 재능이 있다면/ 그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모두들 사랑해요”라는 문장은 가리키는 바는 유의미하다. ‘사람으로서 지니는 딱 하나의 재능이 아무나 사랑해버리는 일’이라는 유키는 말하자면 일종의 시인됨이란 존재가 아닐까. 나 이외의 다른 모든 타자들이자 언어의 심연에 가닿고자 하는 사랑의 욕망을 지닌 고유한 형상으로서. 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욕망은 정상적인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저 무의미하고 ‘병든’ 존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계는 말하자면 이해될 수 없는 유키를 규정하려고만 한다. ‘평생 가볍고 간단해지길 바라는’ 유키의 존재는 그저 “발직한 여자애”로서만 판단될 뿐. 그 세계의 존재방식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자가 유키에 대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심리치료사일 것이다. 달팽이에 대해 ‘눈이 붉어지고 마음이 아프며 지금 몹시 슬프군요 그랬다고 달팽이를 밟으면 됩니까?’라고 질문하는 자. 그리하여 이 ‘병든’ 유키를 “유키씨 정말 끔찍한 사람이군요”라면서 규정하고 치료하여 정상화시키려는 자. 따라서 유키의 시선이 이러한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세계 바깥을 향해 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이 정상성으로부터 단 하나의 예외조차 없는 ‘여기’가 “지옥”이라면. 우리의 ‘여기’가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할 필요조차 없고 인식하려는 생각조차 없는 플랫한 세계라면. 유키는 ‘정말이지 파랗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이자 욕망을 통해 우리들의 무의미한 세계를 거부할 것이다. “원래 지옥 같은 거 두려워한 적도 없”으며 “그럼 병이 없어진 나는 뭐가 될 수 있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는 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이 플랫한 지옥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두자. 그 지배하에서 “유키는 유키를 긍정할 수 없고/ (…)/ 무서움이 커지면 유키는 축소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적으로 “파란 가슴만이 자기를 키운다고 믿고/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존재일 따름이다. 오직 ‘파란 가슴’만을 믿으며 ‘헛것 같은 사랑’에 빠져 즐거울 수 있는 자. 우리의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반투명한 창을 통해 흐물거리는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자. 그리하여 ‘걷잡을 수 없이 멀리 가버리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자. 이것이 시인이 유키라는 자신의 분신적 존재에게 근본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진정한 욕망일 것이다. 먹고사니즘으로 통칭되는 정상적이고 당연한 ‘의지 없이’ 타자들과 언어들의 심연이란 욕망 속에서만 ‘머무르기’. 그렇다면 유키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인 것이 아닐까. 모든 보이지 않고 명명되지 않는 영역들을 “가깝게 사랑하”는 존재로서 말이다. 그러니 이 욕망하는 자는 ‘엉뚱한 슬픔이 차오르는’ 마음을 끝까지 지니려 할 것이다. ‘길고 게으른 문제’이자 어떻게든 ‘오래 살자’는 대화를 간직한 채. “언젠가 온 세상의 슬픔을 다 껴안으며 죽”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욕망한다는 것. 들리지 않는 “거대한 지구의 울음”을 듣고 “엉뚱한 슬픔”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며 그 “울음의 밑바닥에서는 하나의 지층”을 기어이 만들어내려는 존재. 그런 시적인 인간의 형상이란 “상자를 열면 단숨에 사라질 것 같”은 존재들을 소중히 품으면서 이 타자이자 언어의 심연에게 “한 움쿰 포도 씨 뿌리고/죽지마 /목소리를 보태어 주”(「자처하는 사람」)는 간절한 욕망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는 시인이 지닌 기묘하고도 고유한 사랑의 본질적 형상이기도 하다. 김사라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난폭한 언어의 양상과 그 이면에 느껴지는 멜랑콜리의 감각은 강렬하다. 이 위력적인 언어의 형상은 언어의 표면이자 지시이며 의미와 별다른 상관이 없다는 점 역시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고유한 언어의 형상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시의 언어에 접근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언어의 파괴적이고 분열적으로 보이는 양태 그 자체가 아니다. 즉 “나는 제대로 말하고 싶고,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ainsi soit – ELLE」)라는 찢어진 육체이자 모순적 형상들이 구축하는 미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핵심적이다. 왜 시인은 시적인 것을 위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라는 기묘한 알레고리적 언어를 구축하려 하는 것일까. (…)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 믿을 수 없다. 그는 연필로 칼 깎는 법을 알려주었다. 보랏빛 나사와 재단된 나무들이 가득했던 곳. 손으로 쥐는 것부터 배웠다. 부동산에 연락해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봤던 것 중 가장 더러운 집을 보았고 거기 살던 여자는 반갑게 문을 열어주었네. 그녀는 방 가운데에 달콤한 간식이 든 멋진 상자를 가지고 있었고 내 손이 그쪽을 향할 때마다 자기 머리칼을 두 손으로 쥐어뜯었다. 줄 때까지 기다려. 여자의 뱃속에서 미끼가 쿵쾅대며 숨을 쉬었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 이유 없이 슬픈 밤을 보낸 난쟁이를 위한 철제문. 신고하지 않은 여름이 있었다. 일을 마치면 매일 같은 곳으로 국수를 먹으러 갔지.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았다. 맛이 변해도 몇 번이나 더 믿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알던 맛의 국물이 간절해진 겨울이 왔어도. 징계가 결정되고 술을 몇 병 사고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지. 난 눈을 꼭 감고. 정말이지. 그거면 됐어. 포근했던 교차로의 눈밭.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약속! 미나. 눈앞에서 사라져 줄게.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배웅하러 나가는 내 다리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려 놓았다. 믿을 수 없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하겠지. 난 살살 녹여 먹어도 악다구니를 써. 못쓰게 됐어.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저 애를 위해 얼굴을 뜯어버리고 있어. 이러다가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 - 김사라, 「기분파 미나 제이코」, 부분 이 시에서 우리가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 속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확연하다는 것. 즉 이 시속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이 또한 시인이며 시인의 욕망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폭력적으로 보이는 시인의 언어가 공격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내재된 모순성 그 자체이며 동시에 시인의 ‘나쁜 행실’을 비난하는 남성들이 구축한 우리의 세계이기도 하다. 요컨대 시인의 존재는 ‘나쁜 행실’을 행하며 “나도 모르게 새 생각에 잠”길 수 있어야 하는 기묘하게 슬프며 그렇기에 고독한 자이다. 이 세계가 보려 하지 않고 알고자 하는 생각조차 없는 “버러지 같은 고통”의 존재를 묻고 기억하며 떠올리며 자신의 육체로 받아들이려는 자. 그 고통 속에서 모순되고도 찢겨져 있으며 웅얼거리는 발화들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선 확인해보자. “미나. 어째서 입 맞출 때 날 보지 않지?”라고 말하는 세계의 시선이 얼마나 당연하고도 폭력적인가를. ‘살아 있는게 너무 징그러운’ 것과 같은 폭력의 정상성과 당연함. 그러한 세계의 영역 속에 놓여있는 나의 존재는 말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고’ 널부러져 있다. “따가워. 따가워. 숨이 차서 괴로워하며.” “깨물지 마!”라는 표현처럼 이 시속에서 등장하는 남성이자 세계의 언어는 단지 명령하려고만 한다. 그러한 억압적인 규정과 판단의 결과란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상하군.”이라는 비웃음과 더불어 자신이 듣지 못하는 “다리 사이로 끊어진 기타줄 소리가 울려”라는 이해할 수 없음이란 반응일 뿐. 그러니 ‘기분파’인 미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은 우울함과 가난함과 싸우지 않음의 이면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알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더욱 문제인 부분은 이 남성이자 세계의 폭력성이 모순적이게도 내 안에 이미 새겨져 있으며 아주 철저하고 당연하게 작동하려는 하나의 질서이자 체계로 자리잡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시의 중간에 등장하는 “가장 더러운 집”의 여자를 고려해보자. 모순되고 찢겨져 있는 “나를 쳐다보려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이 여자는 또 다른 나이지만 동시에 남성과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명령한다. “자두만 한 동공을 벌렁대면서” 그리고 “줄 때까지 기다려”라고 말하는 또 다른 나. 이 분열된 나들의 모습은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이 또 다른 나의 존재의 형상은 남성이자 세계의 규칙이자 법칙이 마치 공기처럼 당연하게 우리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이지만 남성에 의해 지배받으며 동시에 여성일 수밖에 없는 모순성의 기묘하고도 복합적인 중첩. 그러니 시인이 드러내려고 하는 “우울한 미나. 가난한 미나. 싸우지 않았던 미나.”의 입은 ‘찢어져’ 있을 수밖에.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혼자 맨드라니 줄을 서다 안으로 들어가 등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처럼. 이러한 미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지점. 그것은 남성이자 세계에 침윤되어버린 또 다른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검은색 깃털 목도리를 탁자 위에 풀어둔 날 그걸 고양이로 여겨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던 여자를 만났”다고 말이다. 당연하고도 정상적이며 억압됨을 모르는 그러한 현실 속의 내가 아니라 ‘입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는 여자’가 되려는 ‘나쁜 행실’이자 기이한 변신술적 욕망. 또 다른 나이자 진정한 내가 ‘교차’하는 길 위에서 “믿을 수 없다. 그 모든 일을 했던 게 나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진실만이 오직 나를 고유하게 형성해내는 방법일 따름이다. 그 강력한 의지이자 나를 존재케 하는 결정적 욕망인 것. 이것만이 남성이자 세계의 존재를 파괴시킬 수 있다. “아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라는 남성들이자 세계를 가볍게 무시해버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가 끝났으면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고. “지난밤이 낯부끄러워 울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또 다른 나를 위해 무언가를 발화하기.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타자이자 억업된 모든 것을 위해 나의 언어가 존재해야 한다는 마음. 그 굳건한 언어의 욕망으로 인해 “가슴이 다시 뛰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남성들이자 세계인 그 당연한 모든 것들을 “이번엔 정말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바라보는 우리들이자 남성들의 세계는 그저 ‘돼지 같은 바보들’이자 “술맛 떨어지는 계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세계 속에서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기에 모든 것을 “제대로 말하고 싶”다는 일종의 모순적인 분노. “잘린 성기가 든 포르말린 유리병”처럼 박제되어버린 또 다른 나의 목소리를 진정으로 듣고 발화하려는 시적인 것에 대한 고유한 욕망. 그 의지를 알아챌 수 없는 남성이자 세계는 언제나 ‘소문이라는 소문’을 흩뿌리겠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다가가니 수 천개로 갈라지고 있”는 무수한 나들의 발화들을 품어 안으며 ‘이토록 분명한 예감’을 감각하려는 자. 이것이 자신의 육체를 “당신 머리보다 더러운 망치로 내려쳐 다 자란 가지처럼 늘어뜨”리는 시인이 품고 있는 분열증적 언어의 파괴적 원천일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내가 보고 싶은 공동묘지 쓰레기통에 처박혀 딸기처럼 부푸는 죽은 꽃다발’(「ainsi soit – ELLE」)이란 언어의 심연이자 시적인 것은 알아듣지 못할 기묘한 목소리로 발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의 세계와 고유하게 무관하도록. 4. 단지 자유를 향한 욕망과 의지로서 앞서 지적해두었듯 지금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시인들에 대한 말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글은 그저 한 개인의 아주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독해일 뿐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은 왜 쓰고자 하는가에 대한 젊은 시인들의 마음이었다. 고유하고도 기묘하여 그러하여 수수께끼와 같은 언어의 미궁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의 원천. 언어의 표면이자 규정하고 판단하려는 모든 것들에 대한 투쟁. 우리의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세계로부터 이탈하고 도래할 언어의 심연을 어떻게든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의지. 그러니 우리는 시라는 규칙과 시인이란 이름과 정의와는 무관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시적인 것이자 시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시적인 것이란 오직 언어의 표면을 정지시키고 파괴할 때 그 심연 속의 거대한 꿈틀거림과 함께 도래하게 된다는 점만은 ‘자명’해 보인다. 필요한 것은 규정과 판단이란 명령이 아닌 모든 방식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자유로움이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엇일 따름이다. 단순한 허명이 아닌 시인됨이란 실존적 영역 속에서 이는 나이의 문제도 등단 여부와 시기의 문제도 어떤 위치에 내가 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하여 쓸데없는 첨언을 굳이 덧붙여 보고 싶다. 언젠가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던 푸코의 문장을 말이다. “나는 당신들이 노리고 있는 그곳에 있지 않다. (…)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그렇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쓴다는 욕망이자 의지이며 그로부터 가능할 자유일 뿐이다. 시라고 부르는 이 기묘하고도 고유한 실존의 형식은 바로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월간 현대시 김정현 2025년 등단 시인방성인 시인안수현 시인이솔 시인박연 시인백아온 시인김사라 시인 2025
김효숙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배옥주,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 ·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

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월간 현대시 김효숙 문화 보충물문화 텍스트문화 감수성그림기후 위기남성-언어성 착취몸의 식민지다중 감각시의 비판적 기능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