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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 2024년 가을호

반려를 사랑하는 일 ― 김지연론

김주원 문학평론

2021년 창비신인평론상

반려를 사랑하는 일

-김지연론1)

 

1.

 

  김지연의 단편 반려빚은 빚을 껴안고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경제적 빈곤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정현은 동성 연인 서일을 위해 무리하게 대출을 받지만 서일은 전세 사기를 당하고 연이어 운영하던 가게까지 망하는 불운을 겪는다. 느닺없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며 떠난 서일은 빚을 갚겠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정현은 이별의 충격과 빚의 압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녀의 친구 선주는 정신 차리라 하지만 정현은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 마음으로 서일을 정리하지 못한다. 반려를 원했던 정현에게 남은 것은 반려빚뿐이다. “서로에게 영순위”(p.166)가 되는 인생의 반려자를 위해 진 빚에서 겨우 해방되었을 때 정현은 “0이 된 기분”(p.188)을 느낀다.

   「반려빚은 빚이라는 소재를 사랑 이야기로 풀어간다. 이 소설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철저히 연애 소설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2) 그런데 이 소설에서 정현은 자본주의적 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다. 특히 그녀가 겪는 경제적 빈곤이 정서적 빈곤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은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다. 어느 쪽이 더 절망적인가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청년 세대의 빈곤은 만연해 있다. 그 어떤 시대의 청년들보다 가난하다는 현재 한국 사회의 청년 세대는 취업난과 주거난, 여기에 전세 사기라는 악재를 겪는다. 서일을 향한 감정의 지출에 비례하는 정현의 무리한 대출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비춰보면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서술은 사랑의 대가를 반려빚으로 치르는 정현을 비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녀가 대단한 욕망 때문에 빚을 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맘 편히 레드 콤보 한 마리를 시켜 먹고치킨을 먹으며 볼 왓챠를 정기구독”(p.165)하고 편안한 소파가 들어갈 만큼은 넓은 집, 기왕이면 그 집이 자가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하기를 꿈꿨다. 정현의 물질적·정신적 소망은 평범하고 순수하다. 정현에게 약점이 있다면 그녀를 주눅 들게 하는 부채감이다. “사귀는 동안 정현은 서일에게 자주 부채감을 느꼈왜 빚진 마음이 드는지, 왜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지 알 수 없었다”(p.170). 그녀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잘못하지 않아도 서일에게 미안해했고 빚은 그 부채감을 만회하기 위한 결과였다. 자존감이 낮은 정현은 그냥 호구 잡힌 채로, 목줄 매인 채로 살고 싶”(p.174)다는 생각할 정도로 서일에게 지나치게 의존해왔다. 문제의 원인은 정현의 나약한 심성과 이로 인한 불균형한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현처럼 가진 것 없는 청춘이 연인과 같이 살 원룸을 구하기 위해 경제적 고통을 감수한다는 이 소설의 설정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아낌없이 다 주고 싶었을 뿐”(p.187)인 그녀의 특별할 것 없는 욕망을 무너뜨리고 계산 없이 살고 싶은 꿈을 망한 삶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반려빚은 사랑 때문에 진 빚을 다 갚고도 진짜 반려”(p.184) 같은 전세대출금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삶, ‘반려빚의 압박에 포위된 삶의 실상을 세밀하게 그린다.  

  욕망을 최소화하여 씀씀이를 줄인 뒤 여행으로 소비의 플렉스를 즐기다 다시 허리띠를 조이는 삶으로 돌아”(p.187)가는 정현의 모습은 목적과 돈의 균형 있는 배분이라는 경제 주체의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생존 소비에 치중하는 정현의 소비 패턴은 저성장 시대의 생존법으로, 이때 돈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정현이 매순간 돈을 의식하며 돈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살아온 그녀가 자주 로또를 사는 장면에도 나타난다. 그것은 성실함과 노력만으로 행복할 수 없는 시대의 불안을 드러낸다. 서일에게 빚을 다 정리했다 말하고 자신이 구입한 로또의 마지막 번호를 물어보려 전화까지 하는 정현의 행동은 사랑에 합리적 판단을 신속하게 내릴 수”(p.176) 없었던 그녀의 성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서일의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서일의 전화번호로 받은 낯선 초등학생은 로또 번호를 묻는 정현의 뜬금 없는 질문에 자신이 가르쳐준 번호로 삼촌이 4등에 당첨된 적이 있다며 당첨되면 반을 줄 거냐고 묻는다. 정현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초등학생은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며 당돌하게 전화를 끊는다. 이 처량하고 우스운 에피소드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물신주의와 투기 욕망에서 정현이 얼마나 어수룩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서일 때문에 사람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정현에게 더 큰 문제는 그녀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정현은 또래보다 한참 낮은 자신의 신용 점수가 자신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설명”(p.172)하고 있으며 자신이야말로 사회에서 믿지 못할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정현 스스로 느끼는 모멸의 감정은 반려빚의 가장 큰 해악일 것이다. 정현은 서일을 사랑했을 때보다 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빚을 다 갚고 나자 그제야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회에서 욕망을 최소화한 채 수십 개월을 버텨내는 정현에게 사랑과 행복은 사치이다. 자신을 쑥이나 마늘 같다고 생각하며 먹으면 사람이 되게 해준다고 소문이 나서 다들 잘근잘근 씹어먹으려고 손을 뻗치”(p.184)려 한다는 정현의 암울한 상상은 자신의 존재가 사회에서 보잘 것 없으며 늘 이용만 당한다는 자기 비하가 담겨 있다. 정현은 죽을 때까지 로또를 사더라도 1등이나 2등에 당첨되지 않을 것이고 어디 가서 사기나 안 당하면 다행”(p.187)이라고 말한다.

  인생 역전의 희망은커녕 빚과 사기를 두려워하는 시대, 정현이 느끼는 모멸감은 사회적 감정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죄로 괴로워하며 살고 있으니 장수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고 살아 있는 동안 빚을 다 갚는 수밖에 없”(p.167)다는 체념, 그리고 남을 등쳐먹고 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p.174)에서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는 열심히 셈하고 값을 따져봐야 한다. 「반려빚에 나타난 빈곤은 사회적인 것이다. 정현은 빚을 갚고 “0이 된 기분을 느끼지만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p.188)하다. 가진 것 없고 계산에 서툰 정현에게 “0이 된 기분은 평정심이 아니라 힘겨운 자기 소진의 결과이다. 그녀는 이제 빚도 없지만 반려도 없다. 경제적 빈곤은 삶에 두려움을 만든다. 그러나 반려빚의 진짜 두려움은 진정한 반려 관계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2.

 

  김지연의 소설에서 동성 커플은 반려의 한 형태로 종종 등장한다. 이들의 사랑은 경제적인 이유로 좌절되거나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에 둘러싸여 있다.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크든 작든 사회에서 무시받고 거부당하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낀다. 여러 가지 기준으로 열등한 집단을 범주화하고 멸시하는 통념이나 문화의 위력을 나타내는 모멸의 구조 안에서 인간이 지닌 실존적인 개별성은 인정받기 어렵다.3) 『마음에 없는 소리』(2022)에서 동성 연인은 이유 없이 욕을 듣거나 경멸의 눈초리를 받고(「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아버지는 와 여자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사랑이 뭔지 아느냐며 무시를 한다(「사랑하는 일」). 경제적 궁핍 역시 이들을 모멸감에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 인물들은 뭐든 늦된 편으로 잘하는 일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굴 드라이브」), 모욕을 견디며 늘 죽고 싶다고 생각”(「마음에 없는 소리」)을 한다. 고향에 있든 서울에 있든 이들은 불안과 박탈감 등 부정적 감정을 자주 경험한다. 「굴 드라이브에서 필리핀 이주 여성 미셸이 들려준 굴 유생에 관한 이야기처럼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유생으로 부유하다가 굴 상자에 실려 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사랑하는 일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김지연 소설의 주인공은 사랑이 아니라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다는 듯 상대가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을 때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괴로움을 느끼고(「그런 나약한 말들」) 연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울음을 터뜨린다(「사랑하는 일」). 소설 속 인물들은 결혼에는 관심이 없지만 새로운 반려 만들기에 적극적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일에서 는 사랑하되 섹스는 하지 않으려는 동성 연인 영지와 합의 하에 오픈 릴레이션십을 갖기로 한다. ‘는 섹스가 없다면 영지가 동성 친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영지는 섹스를 중시하는 를 이해한다며 다른 여자와 관계하는 것을 허락한다. 영지는 이 새로운 방식의 사랑에 만족하지만 는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랑하는 일은 섹스를 관계의 증명이자 사랑의 동력으로 삼는,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에 내재한 성애 중심적 사고를 비판한다. 이 작품에서 서술자 는 남동생 영호와 달리 무보수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하던 아버지와 대면함으로써 정상 가족의 신화를 희화화한다.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중매로 만난 그들은 두 번 만나 결혼하고 결국 이혼을 했다. 동생 영호는 임신중절 대신 선택한 결혼으로 가정을 꾸렸다. 집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던 영호는 육아와 집안일은 하지 않는다. 서술자의 눈에 비친 혈연가족은 이해와 사랑이 아니라 관습과 실수로 만들어진 부조리극과 같다.

  “직계존속에게서 다른 건 아무 것도 물려받고 싶지 않”(p.241)으면서 아버지를 통해 할머니에게 물려받아야 할 집만 받겠다는 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사이가 좋지 않은 남동생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커밍아웃을 한 나 중심의 서사가 있”(p.249)고 그것은 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부정하면서 전개된다”(p.250)고 말한다. 자기 존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가 전통적 가족의 젠더 질서에 분노하면서도 상속을 챙기는 것은 을 가부장적 길들임의 장소가 아니라 레즈비언인 나 중심의 서사로 탈환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아버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를 통제했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 중심의 서사는 그렇게 재편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일이 보여준 정상 가족과 이성애 규범에 대한 비판은 페미니즘소설에서 새로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와 희생자 딸의 서사는 미투 운동과 한국 문학의 페미니즘 리부트이후 여성 서사의 관습이 되었다고 할 만큼 익숙한 주제에 속하기 때문이. 「사랑하는 일은 이성애 정상성에 반대하며 퀴어적 관계를 옹호한다. 캐나다로 도피하지 않고 함께 어디든 가겠다고 속삭이는 와 영지의 모습은 생활동반자법논의가 시작된 2010년대 이후 가족 개념의 변천, 다시 말해 가족이 혈연에서 개인들의 연대와 우정으로 확대되었다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가족이 다양한 형태로 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섹스 없는 동맹의 형식으로 사랑하는 일을 상상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일의 서술자는 가족의 사랑이 계속되기 어려운 반면 와 영지는 우리가 합의한 일종의 공동선”(p.253)이 있어 계속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통 가족과 성애 중심적 사고를 거부하는 이들의 관계가 사랑의 관념에 어떤 탈주선을 만들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을지, 그것이 어떻게 가족 공동체를 넘어선 공동선이 되는지는 불분명하다.

  김지연의 소설은 생활동반자들이 만드는 다른 삶이나 비전보다는 젠더 규범이 강제하는 불합리한 현실에 더 집중한다. 김지연의 소설이 바라보는 한국 사회는 여전히 집단과 사회적 약자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다. 그래서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사회적 관행들에 민감하다. 「공원에서를 보면 여성이지만 남자 같은 외양을 가진 는 공원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묻지마 폭행을 당한다. 폭행 사건 이후 그녀는 자신을 설명하는 단어 하나에도 신경이 쓰인다. ‘여자개 패듯 팼다는 단어와 속담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하는 주인공의 지적 탐구는 성차별이 종()차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만큼 영민하지만 유부남과 만나는 자신의 사랑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문제는 개인으로서 그녀가 자기 마음의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인데 세상이 벌써 상식과 도덕의 잣대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남성 중심적 사회의 폭력을 설명하는 일이 너무 흔하고 상투적인 일이라는 것을 김지연 소설의 서술자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은 계속 반복되는 일이었”(p.275). 이 소설은 누구도 피해자인 여성의 경험을 진심으로 듣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약자에게 모멸감을 주는 사회에서 그녀는 말할 수 없다. 엄마도 유부남 기영도 그녀의 말은 경청하지 않은 채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 언어에 내재한 성()차별적 사고처럼 세계가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의혹은 사실이 된다. 「공원에서의 주인공이 비명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장면은 같은 언어라고 해도 누군가의 말은 공유되지 못하고 묵살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피해자가 되고 나서야 언어의 위계를 실감한다. 기영과 자신은 애초에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p.277)던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사전에는 인간의 온갖 차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애초에 그것은 인간 행위의 다수 항으로 만든 것이”(p.271)어서 다수 항이 아닌 여성이나 동물은 자신을 표현할 언어가 부재하다. 「공원에서가 여성과 개를 혐오하는 언어의 관습을 지적한 것은 남성을 기준으로 표준화된 휴머니즘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5)가 출간되자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테일러가 그것을 비꼬기 위해 짐승의 권리 옹호를 발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성의 권리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책은 여성이 권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면 동물의 권리까지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4) 소설에서 는 공공 장소에서 자신을 폭행한 남성을 찾듯 공용의 언어가 여성과 동물을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찾아낸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감지하기 어려운 폭력이지만 김지연의 소설에서 무형의 폭력은 한 사람의 존엄성을 소리 없이 파괴한다.

  「공원에서의 적대감과 복수심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개의 활력과 온기를 느끼면서”(p.281) 모욕을 극복할 용기를 얻는다. 이 소설에서 여성과 동물은 열등한 집단에서 반려종으로 거듭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가족이나 연인이 주지 못한 것을 개는 에게 준다. “개 같은 것들은 종차별적 언어 관습을 패러디하고 반격하는 말이 된다. 익숙한 말이 원래 통용되는 의미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다른 의미로 조합”(p.282)함으로써 공원에서는 남성 폭력의 서사를 새로운 반려 관계로 되받아 쓰고 있다. 김지연의 소설은 이성애 정상성만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의 빈틈에서 뜻밖의 연결을 만든다.  

 

 

3.  

 

  『태초의 냄새』(2023)는 코로나가 시작해서 종식될 까지의 시간을 다룬다. 그것은 주인공 K에게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하는 후각 이상이 생기고 그것이 더 심해지기만 하는 시간이다. 이 소설에서 냄새는 광범위하게 연결된 감각이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K는 마시던 와인에서 죽어가는 곤충 냄새를 맡는다. 냄새는 포도나무에서 시작한다. 나무에는 벌레가 붙어 있을 테고 완전히 씻어내지 못한 벌레가 식물을 먹는 벌레라면 와인에서 나는 냄새는 식물의 냄새일 것이라고 K는 추측한다. K는 코로나 부작용 때문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K가 그동안 자신이 죽인 곤충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는 상황은 앞으로 그가 냄새로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이 소설에서 냄새는 각자의 고유한 기록이다. K는 외할머니가 들려준 날 때부터 누구나 냄새를 갖지만 살다 보면 점점 더 자신에게 꼭 맞는 냄새를 갖게 된다”(p.19)는 말을 떠올린다. 그러나 K의 증상은 이 말과 점점 어긋난다. 『태초의 냄새에서 냄새가 개인의 감각을 넘어서 자연과 다른 생명과 연결되는 감각이라는 점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속성과 유사하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은 느슨하면서도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문자 그대로 서로의 숨을 공유하고 있었다”(p.25)는 것이 드러났고 K의 후각 이상은 이 연결과 공유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코로나 초기 K는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욕했지만 그렇다고 남의 불행을 보며 자신이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하”(p.49)고 싶어하지 않는 보통의 선량함을 지닌 시민이다. 그 때 운이 좋아서 바이러스를 피했다고 생각한 K는 외할머니도 과거 연인이었던 S도 운이 좋았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K가 사람들의 생사를 운과 불운에 달렸다고 보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결정하고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과 불운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S의 죽음은 불운이지만 K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P에게는 좋은 운이었다. 운과 불운도 삶의 불가사의함을 일시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노력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문제라는 듯, K는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 P를 끌어안고서 세상에 있는 것 중 무취인 것을 떠올려보았다. 기화되지 않는 고체 상태의 어떤 것들은 냄새가 아예 없지 않나? 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된 지금 K는 모든 사물에 냄새가 있었다고 느꼈다. K는 냄새를 맡으려 좀 더 노력하는 척을 하다가 웃으며 다시 P를 떼어냈다. 이번에는 P도 순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해변에 가득한 모래에도, 무색 무취 무미라고 느꼈던 물에도 냄새는 있었다. K는 다시 텐트로 돌아와 생수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면서 그걸 새삼 깨달았다. 물의 향취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태초의 냄새』, pp.88~89)

 

  코로나는 우리에게 세계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결되어 있었는가를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K는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자 비로소 모든 사물에 냄새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냄새는 한 사람의 고유한 체취와 기억, 사물의 특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정보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 K에게 냄새는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 때 K는 물에도 냄새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P의 냄새는 좋아했지만 물은 무색, 무취, 무미하다고 느꼈다. K의 감각은 인간 이외의 사물의 고유성을 식별하는 데 둔감했다. K이제 냄새에 관해서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냄새에 무감각한 K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무감각을 알아차린다.

  이 소설에서 K의 신체는 기후 위기 시대의 증상을 앓고 있다. 병원에서 K의 후각 이상을 일종의 시스템 에러에 비유하고 기능을 되찾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한 것은 코로나 사태가 인간이 지구 시스템에 일으킨 에러였다고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코로나 이후 수많은 후유증들이 그러했듯 K의 증상은 의학적으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 소설에는 이처럼 낯설고 불가사의한 이야기들이 삽입되어 있다. KP가 여행지에서 들은 모감지나무의 저주도 그 중 하나다. 그들은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에 재미 삼아 들어갔다가 그 곳에 있던 고등학생에게 아파트의 불운을 전해 듣는다. 수십 년 된 모감지나무를 함부로 베어버린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잇달아 사고가 났고 관계자들도 죽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무가 저주를 내렸다고 말한다. 약속 장소에서 P를 기다리다가 문득 P가 있을 것 같다고 느껴지면 정말 P가 그곳에 있었다는 K의 일화도 합리적인 사실관계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K의 설명대로 뇌에 입력되지는 않았지만 뭔가를 동물적으로 느낀”(p.105) 이런 일들은 인간의 이성 바깥의 경험이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소설에서 코로나는 낯설고 불가사의한 이야기이다. 『태초의 냄새는 환경적 불가사의함으로 규정되는 기후 위기 시대에 어울리는 소설의 접근법이다. 불가사의함은 근대 소설에서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결코 있을 법 하지 않은 것의 중요성과 마주하는 상황에 내몰린 적이 없다. 그러나 기후 변화는 비인간의 힘이 인간 사고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암시하고 실제로 증명해 준다.5) 알려진 대로 코로나는 기후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K가 겪는 감각과 대상 사이의 교란과 침해가 유령의 냄새라는 점은 생태적 위기로서 코로나와 일치한다. 코로나는 바이러스는 K가 사는 시의 경계를 뚫”(p.24)서로의 숨을 공유”(p.25)하는 사람들을 감염시킨다. 코로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난폭한 침해와 관련이 있다. 인간의 환경 파괴, 지구 온난화로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이 인간과 뒤섞이고 접촉한 결과가 코로나이기 때문이다. K는 바이러스의 전파, 죽어가는 곤충, 일상을 뒤덮은 유령의 냄새처럼 보이지 않게 위력을 발휘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모두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K가 맡는 유령의 냄새는 죽음의 잔해이다. K는 그것을 시체도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썩어 문드러진 이가 결국 유령이 되어”(p.230) 머물다 간 자리의 냄새 같다고 묘사한다. 처음에 와인에서 죽어가는 곤충 냄새를 맡았던 K가 나중에 타르트에서 구린내를 맡는 것은 시신과 그 부패 과정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에서 코로나는 죽음의 역습이다. 죽음은 문명 사회가 위생의 이름으로 배제하고 격리시켜온 것이다. 시체를 악취 없이 신속하고 완벽하게 기술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죽음을 사회 생활의 배후로 밀어버린 것이다.6) 그 결과 사람들은 죽음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졌고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
. 공동체적 삶에서 격리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어떤 사람의 생의 의미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달려 있다”7)는 점에서 상호의존적이다. K의 삶 곳곳에 희미하게 배어 있었던 냄새는 타인과 사물,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 K가 좋아하는 P의 냄새를 맡을 수 없자 울고 싶어졌던 것은 냄새가 타인의 의미와 기억을 만드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K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을 악취가 났던 곳이라는 기억으로 뒤덮어버리고 마는”(p.100) 상태에 빠진다.

  이 악취는 실체가 없지만 관계의 단절과 고립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공원에서에도 주인공이 알 수 없는 악취를 맡는 장면이 나온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녀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과 기영에게서 나는 악취를 피해 공원으로 간다. “유령의 냄새도 단절과 고립을 의미한다. 하지만 K에게는 도피처가 없다. 마스크 해제가 발표된 이후 “K의 코는 완전히 고장나버렸다”(p.113).  

  『태초의 냄새K의 증상을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둠으로써 코로나 이후 세계의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K는 도처에서 유령 냄새를 맡는다. KP에게서 유령의 냄새를 맡지만 자기 자신에게서는 악취를 맡을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타자를 경계하고 혐오하기 쉽다. 유령의 냄새는 떨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문명사회가 만든 독립적 인간이 허상에 불과하며 타자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제한적인가를 알려준다. 『태초의 냄새는 지금 여기에서 뭔가를 해결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코로나라는 이야기의 핵심은 안다고 믿었던 세계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와인과 곤충 냄새처럼 무관해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연결되어 있고 어느 날 유령의 냄새가 안온한 일상을 위협한다. 사랑하는 P가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싫은 냄새를 풍기는 P”가 되었을지라도 그를 끌어안고 진짜 냄새를 확인하려는 K의 모습은 이 불확실한 세계를 자신의 몫”(p.113)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태초의 냄새는 무자비한 변화 속에서도 타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을 긍정하는 이야기이다.  

  김지연의 소설에서 사랑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지연의 소설에서 반려 관계는 혈연가족과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항하여 친족Kin으로서 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인간의 삶은 반려를 떠나서 살 수 없으며 유령과 같은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공유되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소설에는 깔려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마주하는 타자성의 의미가 언제나 매끄럽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일에는 종종 사랑할 수 없는 일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기성의 질서와 규범에 적대적이다. 인물들은 이상적인 삶을 바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들은 미래의 가능성과 실패 사이에서 자신의 몫으로 생존하기에도 어려운 처지에 있다. 사회나 가족, 관습이 한 사람의 존재를 이해하고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희망을 찾는다기보다 고통을 견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럼에도 김지연의 소설에서 가장 새로운 관계들은 모욕과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빈곤과 폭력이 일상이 되고 공멸로 치닫는 기후 위기 시대에 사랑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김지연의 소설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보다 지금 여기에 무감각해지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의 소설은 지금 여기에 응답하는 이야기이다. 고통 뒤에는 뜻밖의 연결이 있다는 응답. 사랑하는 일은 아직 가능하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굴 드라이브」 「그런 나약한 말들」 「마음에 없는 소리」 「사랑하는 일」 「공원에서」(『마음에 없는 소리』, 문학동네, 2022), 「반려빚」(『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태초의 냄새』(현대문학, 2023).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 전청림, 「망한 삶의 천재」, 김멜라 외 지음, 『2024 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p.241.
  • 3) 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p.41.
  • 4) 마고 드멜로,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통찰하는 인간동물학 집대성』, 천명선·조중헌 옮김, 공존, 2018, pp.523~24.
  • 5)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다』,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p.48.
  • 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김수정 옮김, 문학동네, 2012, p.92.
  • 7) 같은 책, pp.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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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월간 현대시 류수연 서윤후나쁘게눈부시기어둠양안다이것은천재의사랑불안 2025
최다영 유독한 유기농 가족 ―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 (『림 : 숲속에는 축복이』, 열림원, 2025)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계간 문학동네 최다영 양수빈소설계간평리뷰가족 2025
차성환 ‘곁’의 사랑, 사랑의 ‘둥지’ : 김지윤 시집, 『피로의 필요』(청색종이, 2025), 강백수 시집, 『가라 인생』(시인동네, 2025)

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두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동일한 인식이다. 다른 이들은 바쁘게 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삶을 잘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삶은 곧 소멸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죽고 사라지는 것들을 돌아보는 행위가 시를 쓰게 한다. 여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시집은 세계의 사라짐에 대한 감각을 공통분모로 한다. 중요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속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세계의 소멸에 대한 응전으로써 이들은 각기 다른 사랑의 일을 도모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일을 꾸민다. ‘곁’의 사랑 김지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본다. 지구상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사물들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자신의 눈동자에 맺히도록 지긋이 바라본다. 그 목소리가 몸 안에 담기도록 한없이 귀 기울인다. 그것들이 죽고 사라진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꽃이 시들고 노을이 지듯/ 지금 아름다운 것도/ 끝날 것이다”(「오늘의 하늘」)라며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기우는 햇살 아래 꽃 그림자/ 희미하게 남은 노을의 자취/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지”(「피로의 필요」). 시인은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를 쓴다. 시인의 임무는 찰나에 피었던 짧은 생을 죽음에서 건져 올려 끊임없이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서 이름이 없어진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작은 씨앗의 뿌리는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 푸르러질 준비를 하고 바람은 속삭이지, 네 차례야그러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나 우리는 그것들을 신록이라고 부르지 어차피 역사란 그런 것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는 것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을 쓰다듬는 바람, 입술을 적시는 빗방울 젖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깊어지면 찰나의 빛을 품은 침묵이 땅에 묻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한동안 고요해져도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를,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지 -「봄」 전문 시인은 지금 이 땅에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때문에 그 자리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꽃”의 존재가 사라지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자라난다. “작은 씨앗의 뿌리”가 “지난해”에 죽은 “꽃들”의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피는 꽃들은 “지난해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날 것이다. 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한철 마음껏” 피는 “꽃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가겠다는 결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는 “지난해의 꽃들”이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를 위해, 죽음으로 스러진 지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내기 위함이다. 그러하기에 꽃들은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결의를 보여준다. 가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바람”이 꽃을 쓰다듬고 “빗방울”이 꽃의 입술을 적신다. 하지만 꽃들은 곧 스러질 것이다. 결국 “땅에 묻히”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꽃들”이 피었던 눈부신 “찰나의 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로 계속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오면 기적처럼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곧 사랑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신록”은 매번 새로운 초록빛(新綠)인 동시에 새로운 행복(新祿)이고 또 새로운 기록(新錄)이 된다. 이것은 비단 “꽃”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를 길러낸 부모도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나’라는 존재가 꽃피우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무수히 “아름다운 것들”이 피고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은 이름”이 되고 “산 이름”을 기르리라는 것을 예감할 터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들은 곧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이 곧 사랑하는 것들이다. 멀리 있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고요하고 평안한 무감각 속에 너무 멀어 풍경이 되는 것들 가까이, 오직 가까이서만 볼 수 있지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도,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 선 이만 알 수 있는 것 고운 늦가을 단풍이 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걸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그러니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고 낮은 속삭임은 가까운 데서만 들리는 것을 조그만 촛불도 가까운 곳에서는 밝고 보잘것없는 온기도 다가서면 따스하지 초라한 모닥불 하나 피워 나란히 앉자 그 작은 불씨마저 꺼진대도 입김을 불어 넣어 줄게,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가 돌 때까지 한참 후에야 우린 알게 되겠지,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릴 살아남게 했다는 걸 -「가까이에서」 전문 ‘당신’의 삶이 “풍경”이 될 정도로 저 “멀리” 있다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안”할 것이다. ‘나’는 먼 거리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직 가까이”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의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결점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당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이다. “곁”은 “낮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힘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그만 촛불”의 “보잘것없는 온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밝고 따듯한 힘이 된다. 서로의 “곁”을 내어준 자들은 서로의 “작은 불씨”가 꺼져갈 때마다 “입김을 불어 넣어”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고 “낮은 속삭임”을 듣고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다. 이 일들이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우릴 살아남게” 한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지윤 시인의 사랑은 당신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우린 망가진 채로도 하나가 될 수 있어”(「화음」).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서로의 결여가 포개져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 꽃이 흔들리는 소리/ 귓가에 속삭였던 아득한 그 말들”(「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에 귀 기울인다. “나뭇잎과 꽃잎들마다, 져 버리고 시들어 버릴 모든 존재들에/ 이슬과 햇살과 바람으로 적혀 있는 희미한 진심을 읽는다”(<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피로의 필요』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밀어가 가득하다. “나는 너를 살리겠어// 땅이 뿌리에게/ 숲이 나무에게/ 빛이 어둠에게 하는 말”(「스미는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스미는 숨」)이다. 그것은 ‘당신’의 소멸 이후에도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곁’의 사랑이다. 사랑의 ‘둥지’ 강백수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어두운 터널과 같은 청춘의 뒤안길을 사랑한다. 이 청춘이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힘이다. 한 손에 시,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엉망진창 온몸으로 살아낸 사랑의 기록이다. 시집 『가라 인생』의 제목은 가짜(fake) 인생이자 고고(go go) 인생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시집의 결론에 도달하면 알겠지만, 이는 선후관계이다. 시인은 “블로그와 유튜브와 여행책이 아니더라도 대충 어떻게 살다가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시부야」)라며 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언뜻 내비친다. 또한 “삶의 의미가 고작 담배냐고/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워크에식(Work ethic)」)라면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가라 인생」)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어쨌거나 삶은 주어졌고/ 어느 시점엔가 당신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게 삶이구나”(「시작점」)라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사랑한다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뒤늦게 사랑한다 그건 이를테면 아직 눈코입도 없는 태아를 벌써 사랑해서 이름을 짓고 이미 재가 되어 흩어진 고인이 아직 그리워서 이름을 쓰는 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정사진을 공유하며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하는 일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지만 지구상에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과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어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고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한다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미래와 현재와 과거 -「뒤섞인 시간」 전문 이 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의 시차時差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미리 뱃속의 태아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을 때는 건네지 못한 말을, 이제는 죽고 없을 때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한다. 우리는 왜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시인의 궁금증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이 있고 또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미래의 사랑’과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과거의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인의 이 독특한 시간관이 곧 그의 독특한 사랑관을 말해준다. ‘나’의 사랑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종결되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사랑하는 것들과 벌써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의연히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대도 닿기 전에 죽어버릴 나의 생 그러나 바로 지금 별자리는 저기에 있다 일 년이건 백 년이건 그대도 나도 결국은 시한부 인생 두고 떠나건 홀로 남겨지건 결국은 예정된 이별 그러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청춘을 건너온 시인은 삶을 뒤돌아본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 그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과거의 그때는 이 사랑이 끝난다면 다른 삶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다. 강백수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렇다.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랑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나’를 지켰고 과거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온 사랑의 대상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별들”이 뿜어내는 그 별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삶의 조건은 죽음이다.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이고 우리는 모두 “예정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예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죽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육탄전으로 “예정된 이별”에 뛰어든다.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은 어쩌면 시인이 삶에 장착한 제1의 신조일 수도 있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지구 최후의 벙커는 진정 사랑이라는 듯이, 온갖 세상의 풍파도 이별도 죽음도 다 막아내겠다는 듯이, 키스한다. “모든 생은 단 한 번”(「사후세계관」)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산다/ 그 힘듦으로부터 어떻게든 몸을 숨긴다”(「버러지」)라고 썼다. 연약한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두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개고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는 사랑의 둥지이다. 이 사랑의 둥지가 시인이 찾은, “거의 무의미한 내 삶 속의 유일한 의미”(「무임금 노가다」)이다. 그는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둥지를 노래한다.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싶다. “사랑의 끝을 알면서도 스로틀을 당기던 그 밤”(「110cc」)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아,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단 하나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후세계관이 하나 있단다 죽고 나면 반드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거라는 거 그걸 생각하면 어떤 이별도 나의 죽음도 최악의 일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곤 한단다”(「명견 강삼돌」). 그의 솔직한 위로 앞에서 마음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꼭 그의 노래 <타임머신>과 같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강백수의 시는 세계가 무너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둥지’이다.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 사랑은 한없이 덧없고 슬프다. 사랑의 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도 함께 껴안는 것이다.

계간 시작 차성환 김지윤강백수사랑인생둥지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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