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겨울호(제63호)
접힘 이후의 펼침 : 김선오, 『싱코페이션』
최근 다섯 살 아이와 함께 색종이 접기를 많이 하고 있다. 집 안에 형형색색의 색종이들이 다양한 형태가 되어 돌아다닌다. 물론 여러 번 실패한다. 색종이 접기는 정확한 구김과 접힘의 과정을 경유해야 완성되는 흔적의 예술이다. 정사각형 15cm×15cm로 동일한 규격의 색종이는 구김과 접힘만으로 (때로 가위와 풀의 도움을 빌려야 할 때도 있긴 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원형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모양이 된 건지 알기 위해 원 상태에 가깝게 펼침-해체해보아도 그 과정은 파악할 수 없다. 남은 것은 얽히고섥힌 무수한 주름-흔적뿐이다. 최초의 반듯함-면面으로서의 위상은 상실해버렸다. “갑자기 집이 접힌”(「자막 없음」) 사태와 같이 갑작스러운 현실의 운동을 수동태로서 맞이한 자들의 내면처럼 일그러져 있고 그만큼 입체적이다.
김선오 시인의 『싱코페이션』(아시아, 2024)을 읽으면서 내내 느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복원하고자 하는 태도였다. 복원의 과정에서 자기-부정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기억나요 이 사진/ 아마 네 살?/ 다섯 살? 아닐 수도 있어요/ 제 착각일 수도 있어요/ 그냥 우리 집에 놀러 온 할머니가 저를/ 안고 있는 사진일 수도 있어요/ 사진 속 창밖의 날씨가 좋아 보여서/ 제가 다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눈꺼풀 안쪽의 붉음」)라며 사진을 통해 기억을 재구성해나가다가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기억의 오류를 의심해 방어기제를 드러내거나 “우리는 왼발부터//아니 오른발부터// 아니 왼발 오른발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니까 그냥// 걷고 있었다고 해야겠다”(「물질과 기억」)며 정확성을 기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부정을 통해 오히려 뭉뚱그려진 표현이 더 실재를 담보한다는 걸 보여주는 지점들이 인상적이다. 편린, 꿈, 부정확한 유년의 기억, 사진과 같은 매개들은 이 시집에서 모두 누적된 시간- 맥락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일종의 독립국이다. 이들은 ‘나’라고 하는 존재를 구성하기 위해 일률적인 형태로 종속되어 있었던, 이른바 식민지였다가 시를 통해 해방된 후 자신의 타임라인을 잃은 채 부유浮游하고 있는 상태다. “사진”을 두고 자기-부정을 거듭하는 것은,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면 “사진에는 아무런 미래 지향(미래에 대한 현재의 의식작용)이 없”1)기 때문이다. 시인은 ‘싱코페이션’=패턴에서 이탈해버린 지점-변주된 자리의 음音을 수거해 시로 옮긴다. 여기에서 쉽게 소외되기 마련인 낮은 음을 감지하고자 하는 섬세한 사랑이 드러난다. 시집 전반의 뉘앙스를 파악하는 데 있어 다소 거친 방식이지만 제목들만 옮겨서 열거해보면 「구름은 벽처럼」,「어둠 속에서는 잘 구별되지 않는 것들」, 「어떤 뉘앙스」, 「사일런스」, 「자막 없음」, 「싱코페이션」,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무형 선물 교환 파티」이다. 임의로 모아놓은 이 제목들은 무형-기미에 가까운 것들, 형태 상으로는 분별할 수 없는 것들의 공동체로 보인다.
접혀있던 도그지어를 펼쳤을 때 남은 선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렇게. 오른쪽 페이지를 표시하고 있었다.
투명한 선과 두 개의 모서리로 이루어진 삼각형 안에
숫자 9가 갇혀 있었다. 이렇게.
도그지어는 자꾸 접히며 다시 도그지어가 되려 했다.
펄럭거렸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숨을
느리게 쉬어야 오래 살 수 있어요. 이렇게. 따라해보세요. 폐를 펼쳐보세요.
펼친 만큼 세계가
들어옵니다. 느리게 숨 쉬는 동물만이 장수합니다. 이렇게
-「나는 자꾸 내가 되려고 해서 번거로웠다」 부분
모든 무형의 산물은 최소한의 좌표를 기점으로 삼지 않으면 흩어져버리고는 한다. 김선오 시인의 시는 바로 그 ‘좌표-되기’를 자처한다. 지향이나 형상화 이전의 상태로서 페이지의 내부가 아니라 페이지의 귀퉁이 도그지어(dog’s ear)가 되어, 맥락 바깥에 머무는 이들이 돌아올 처소가 여기임을 알려주는 신호가 된다. 선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페이지들 사이에서 스스로 균열이 된다. 틈이 된다. 끊어져버린 자리에 멈춰서서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남는다. 시간의 흐름이 바로 여기서 정지되어 있다는 것을, “도그지어”는 듣는 행위를 통해 발화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접힘을 무릅써야 하고 다시 펼쳐져도 이전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없음을 무릅써야 하는 그 순간들이 김선오 시인의 시를 구성한다.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 「내용 없는 아름다움」도 시인의 세계관을 잘 담보하는 텍스트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구절은 김종삼이 쓴 동명의 시와 동일한 구절인 “어린 羊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이 전부다. 이외에는 빈자리에 일곱 개의 각주만이 달려있다. 김종삼 시인의 시는 “-처럼”이라는 직유로만 연결되며 원관념으로부터의 탈주를 도모하고 있는데, 김선오 시인의 이 시는 직유로 인해 묶여있던 구절들마저도 모두 사라져 있다. 다만 이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전환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각주다. 각주의 내용은 시집 전반에 걸쳐 드러나고 있는 “네 살” 혹은 “다섯 살”때의 기억-“할머니”가 “코피를 흘리는” 순간이다. 기억의 시작이라고 믿는 이 지점과 함께 다른 각주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상황, “꿈의 시작을 기억할 수 없”는 상황, “지워진 글자”의 흔적, “우주가 무無를 비약하여 도착한 장소”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 “종이” 등이 등장한다. 없음의 있음을 표상하는 한 방식으로서의 각주들이 다시금 부재를 주장하고 있는데, 시의 내용 자체가 보이지 않으므로 각주의 자리는 꼭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주체-체제의 권위에 억압받는 자들의 낮은음자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런거리는 꿈과 기억은 소수민족처럼 힘이 없고, 이들을 현실로 연결해줄 이들은 ‘아름다움’ 쪽에 무게중심을 둔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본문과 각주의 관계에서 시 또한 어쩌면 각주의 위상만을 부여받은 게 아닐까 새삼 그런 불균형이 도드라져보이는 대목이다.
‘있음’에 비해 ‘없음’은 오히려 더 보편의 감각에 부합하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사이토 마리코의 시 「광합성」에는 “말을 잃어버릴 때야 침묵은 어느 말도 아니며 이기도 하며 어느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단 하나의 눈송이』(봄날의 책, 2018)는 구절이 있다. 의미의 영토가 아닌 자리는 그 누구도 전유할 수 없다. 설령 그 자리를 감지해낸다고 해도 그것이 넓이나 깊이를 갖고 있지 않기에 이해의 척도로 측량하는 일 또한 불가하다. 즉 “장악하거나 환원되지 않는 소리”인 것이다. 또한 “시를 쓰면서는 질문을 잊어야 했다. 잊기 위해 허밍을 상상했다”(「시인 노트」)는 지점에서 시인은 시 장르가 지닌 관성을 거부한다. 사실 나 역시 시는 언제나 질문하는 자리로서, 명확하고 선명한 답을 추구하기보다는 질문 그 자체의 동력으로 전개되는 장르, 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시인은 바로 그 질문을 중심축으로 도는 세계를 파기하려고 한다. “허밍”은 노래에서 멜로디 라인만을 남겨두는 일로서, 악기의 연주나 가사 등을 모두 소거한 가장 단조로운 형태의 소리다. 의미와 규칙으로 점철된 세계의 바깥으로 하나하나 내버리면서, 시는 어디로 닿고자 하는 걸까? 하는 애초의 질문은 그러나 ‘어디로 닿고자’라고 하는 지향조차 시인이 무화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사라져버렸다. 함께 대화하는 시가 아니라 함께 침묵하는 시로서, 독자를 침묵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시, 그러나 완전한 침묵이라기보다는 침묵에 가까워지려는 최소한의 운동으로서 제 존재를 드러내는 시. 독자는 그 과정에서 시 장르를 통해 경험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의 의외意外를 경험하게 된다. 『싱코페이션』은 그러므로 의도하고 지향하고 추구하며 인간적인, 다르게 말해 육성肉聲을 획득하는 데 몰두하는 여러 시들 가운데서 오히려 목소리를 낮추는-모험에 가까운 태도로 ‘싱코페이션’이 된 김선오 시인의 허밍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1) 롤랑 바르트, 『밝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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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누구도 깊은 지옥에 빠져 있는 사람들보다 순수하게 노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천사들의 노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들의 노래입니다."1) - 1920년 8월 26일,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 일부 카프카의 이 문장은 고통 한가운데 있는 존재가 그 고통의 진실을 가장 정확히 노래할 수 있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특히 그가 '지옥에 있는 이들의 노래'와 '천사의 노래'를 포개며 강조한 '순수'는, 어떤 도덕적 무결이나 청정한 영혼을 향한 헌사가 아니다. 고통의 심연이 낳는 진실성과 절실함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윤은성 시의 화자들이 겪는 존재론적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뜨려 내는 노래 사이의 간극을 떠올린다. 윤은성의 시는 일관된 내러티브보다, 기억의 파편과 사물 중심의 인상을 모자이크처럼 배치한 구술 대화 형식이 두드러지는데, 이 시 세계를 더듬더듬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유토피아'가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으로 변해가는 과정의 끔찍함을 새삼 목격하게 된다. 본디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뜻하는 유토피아가 언제부터인가 이상적 사회에 대한 열망이 되어버릴 때, 그리하여 모두가 향하려는 푯대가 될 때, 그 길목에 방해가 되는 요소나 돌출된 존재들을 제거하려는 폭력도 정당화되는 아이러니 말이다. 그렇게 유토피아를 위한 폭력이 용인되는 모순의 길목에서, 시는 덜컥 멈춰 선다. 그리고 묻는다. 왜 유토피아와 폭력은 늘 항상 함께 나타나는가? 유토피아 추구 이후의 세계는 왜 유토피아 기획 이전의 세계보다 너덜너덜해졌는가? 이 물음 안에서 다시금 카프카의 문장을 경유해 보면, 이런 우리마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사들의 노래가 단연 유토피아적 합창이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시는 바로 이 유토피아적 합의 바깥에서, 고통받는 자들만이 들려줄 수 있는 노래를 '순수'의 음색으로 형상화한다. 그런 점에서 윤은성의 시 세계는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원형의 공동체가 지녔던 본원적 조화를 되찾아야 한다는 강박, 즉 유토피아를 향한 집착적 도식이 부재하다는 점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윤은성의 세계에서 조화는 2차적인 결과로만 성립하고, 차라리 불화가 더 자연스러운 상태로 제시되는 듯하다. '조화로운 세계'는 결국 불화를 길들이기 위한 인공적인 요소와 문화적 장치가 이미 개입되어 있는 사후적 상태이기 때문일까. 유토피아니즘이 세계의 모든 불협화음을 소거하고 전체주의적 폭력을 낳으려 할 때, 윤은성은 그 지옥 밑바닥에서 퇴적되고 있는 불화의 감정과 부식되고 있는 비언어들을 끌어내 서로의 '남아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즉 완성된 합창이 아닌, 조율 불가능한 음들이 서로를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불안정한 코러스, 그것이 윤은성의 '순수한 노래'이다. * 먼저 기 발표작 「남아 있는 여름」에서 화자가 변주해 내는 '사라짐'의 교차 상태를 먼저 살펴보자. 시의 도입에 해당하는 1·2연은 어떤 과거나 몽상에 대한 화자의 회상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어, 시 전반에서 가장 미래적 위치에서 진술되는 듯 보이며, "나는 사라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뒤따르는 연들은 대부분 유년의 파편을 모자이크처럼 배열해 도입부보다 더 먼 과거로 후퇴하며, 화자는 '없다/있다/사라졌다/죽었다'와 같은 실존 서술 대신 타자의 상태 '없음/있음/사라짐/죽임'을 "알았다"고 기록한다. 여기선 인식 서술, 즉 타자의 흔적에 대한 관찰적 입장이 강조된다. 특히 "죽지 않은 개, 잡히지 않은 개, 버린 개, 홀로 살아난 개, 뜬 장 밖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개"를 감지하는 대목은 화자가 가시권 밖 생명의 잔존을 깨닫는 장면이다. '뜬 장'조차 그들의 존재론적 조건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어 화자의 "나는 사라지지 않고 뱀에게 나타났다"는 현상 서술까지, 이 모든 서술을 시간순으로 종합해보면, 화자는 (1) 존재의 사라짐을 '인식'하고("사라짐을 알았다"), (2) 소멸과 출현이라는 '현상'을 목격하며("나는 사라지지 않고 뱀에게 나타났다"), 종국에는 (3) 자기 '실존'의 불안정성을 체감하는("나는 사라진다") 흐름 속에 놓인다. 존재의 사라짐과 나타남을 반복적으로 교차시키는 방식은 시 전반에 걸쳐 유지된다. 가령 "옆 마을 돈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 장면에서 화자는 "시가 돼지의 몸으로 타버린 걸 상상"하고, 소각되는 돼지의 육체에 각인되는 시를 목격한다. 이때 화자에게 '시'는 종이 위 문자 형태가 아닌, 고통으로 불타오르는 육체 위에 선연히 각인되었다가 부서진 무언의 메시지다. 그렇게 "글자들이 살에 눌러 붙었다가 부서지는 시간 내내" "타고 있는 시를" 본 경험은 화자에게 있어 '소멸' 중인 문학이 가장 강렬하게 '현현'했던 경험으로 남게 된다. 게다가 화자는 자신의 탄생이 "문화적인 이유", 즉 국가, 사회, 가부장 질서가 요구한 상징적 자리로 호출되었음을 자각할 때 극심한 혐오에 사로잡힌다. 타오르던 돼지를 떠올리며 "내 얼굴과 팔을 자주 더듬었"던 것처럼, 자기 실존에 새겨진 문화적 기호를 자각하는 일은 자기혐오의 "살점들이 차오르는 기분"과 함께 신체화되고, 이는 "붙어서 함께 썩는 시"로 이어진다. 그러나 시는 완전히 다 썩지도 못한 채 죽음 이후에도 증식하는 생명의 잔향이자, 정동적 유령의 형태로 후반부에서 다시 포착된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 부수어"진 건물, 끝내 "담을 다 고치지 못하고" 죽은 아랫집 노인, "내 아이가 담 위에서 놀 때 마침 무너"지는 장면의 교차는 미완의 담장이 결국 세대를 돌아 끊임없이 회귀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아랫집 노인은 죽음 이후에도 "태몽을 자꾸 내게 일러주러" 오는데, '죽은 자'가 반복해서 전하러 오는 '태어날 자에 대한 메시지' 앞에서, 화자는 대가를 제공할 수도, 또 마냥 대가를 받을 수도 없는 양가적 위치에 놓인다. 이때 "덜덜 떨며 풀포기를 붙잡"을 뿐인 화자는, 여름의 생명력과 뜨거운 햇살 아래 끈질기게 증식하는 풀처럼, 자신의 등에서 거세게 재탄생 중인 '시'를 붙잡아 보려는 듯하다. 이처럼 끈덕진 여름의 귀환과 땡볕 같은 폭력적 생존 조건에도 완전히 포섭되지 않고 악착같이 증식 중인 생명은, 세계의 폭력과 동시에 그 폭력 바깥에 아직 '남아 있는' 존재 양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남아 있음'의 양가성은 윤은성의 두 번째 시집 『유리 광장에서』에서도 예고돼 있었다. 가령 수록작 「남은 웨하스 저녁」 속 '엄마'의 "들리지 않는 한쪽 귀에 / 들리는 소리가 / 남아 있는 세계"가 그러하다. 이 진술은 얼핏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여도, "들리지 않는 귀"에도 잔존하는 소리가 있다는 세계의 원리를 암시한다. 또한 「명의 변경」은 "찢어진 곳들은 / 찢어지고 있었고 / 찢어지다 멈춘 곳은 / 찢어지다 멈춘 대로" 남는 세계를 보여준다. 끊임없이 파열되면서도 그 파열에 모조리 다 파괴되지 않는 감각의 찌꺼기, 삶의 조건이 박탈된 곳에서도 온전히 다 박탈되진 않고 '남아 있는' 삶을 말이다. 이에 더해 '남아 있음'을 다시 제목 삼은 신작 「남아 있는 사회」에는 '미친년'으로 불리면서도 춤을 통해 말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동계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가고 있었"던 시절, 화자는 춤을 추지만 가족은 배춧국 속 "숨이 죽지 않"은 배추를 씹으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단지 "입들 속으로 초록"을 삼킨다. 가족의 얼굴은 일상과 생계의 영위를 위해 설익은 국을 바삐 해치우는 침묵의 표정으로 보이고, 여기서 잉여화된 존재(화자)의 춤은 기실 침묵과 억제의 환경이 유도한 감정적 잉여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진술이 이어진다. "내가 춤을 추었기 때문"에 가족들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반대로 화자는 "개의 이마를 만져야 나는 / 춤을 추지 않을 수 /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언뜻 인과적 연결처럼 보여도, 춤의 역전된 주체성을 보여준다. 가족들의 무관심은 화자의 신체적 과잉을 유도하는 반면, 개와의 접촉과 연결은 '나'의 정서적 표출(춤)을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침묵으로 발생한 '나'의 춤은 동시에 그들의 침묵을 강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쇠줄을 목에 달고" 춤의 정동에 유일하게 감염된 개와의 접촉은 가족의 그것과 상반되는 방식으로 화자의 정념을 조율한다. 그러나 화자는 돌연 "짐 없이 홀가분한 / 영혼 하나만 남겨줘야 한다"며 개의 중성화를 결심한다. 앞서 개의 이마를 쓰다듬던 화자가 '돌봄'과 '통제' 중에서 스스로 더 내면화한 '통제'의 언어가 불쑥 튀어나온 순간이다. 이렇듯 생명 정치란 상호 돌봄을 일방적 훈육으로, 애착을 규율로 변질시키는 충격의 순간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신이 너무 많다"는 화자의 탄식처럼 쉽게 판단하고, "두 개의 영육 중 굳이 약한 쪽에 / 생명이 들어선다"는 관찰 아래, 개의 영과 육을 철저히 이분화하며 결과적으론 그 어느 쪽에도 생명이 들어앉을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렇듯 화자에게 '춤'이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최후의 방식이었고 개는 그 증명을 잠시간 보류해 주는 위안이었지만, 그것을 잃은 이후 화자는 "내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게 / 증명이 되지 않아 / 애먹"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 찾아온 여름, 화자는 이제 자신을 어엿하게 "근로를 할 줄" 아는 명랑한 인간이라 규정하지만, "마을의 여자들이 웃다 춤추다 하는 / 또 다른 여름"의 광기와 "개가 뛰다 돌아오다 / 나를 데리고 / 멀리 가기도" 하는 환영 사이에서 다시 한번 '남아 있음'의 의미를 되묻는 듯하다. 이는 통제와 규율의 여전한 자기 보존적 습성을 가시화하면서도, 동시에 '(사라질 뻔했으나) 남아 있고', '(죽임당할 뻔했으나) 남아 있고', '(종결될 뻔했으나) 남아 있는' 존재들, 즉 끝내 제거되지 못한 희망 또한 희미하게 잔존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반면 「저지대」에서 개와 화자의 관계는 다르게 전개된다. 개는 여전히 인간 언어로 응답하지 못하는 동물-타자이지만 "곁에서 / 잠이 들었다가 깨고 꼬리를 흔들고 / 담요를 물어뜯고 / 부르면 놀"라는 몸의 언어로 화자에게 끊임없이 반응한다. 화자는 이 개와 "답 없이 물음만으로도" 대화를 이어간다. 개의 숨소리를 들었지 하루쯤 더 맑은 마음으로 살고 없고 동맹을 맺고 불안해한다 가까스로 구름을 바라보게 되는 들판 우주가 지금도 넘실거리고 있단 것을 매일 새롭게 믿는 어린 과학자처럼 화분에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다시 동맹을 맺는다 눈이 녹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하는 겨울에 개를 데려왔다 그는 무언가 잃어버렸고 - 「저지대」 부분 화자는 "우주가 지금도 넘실거리고 있단 것을 / 매일 새롭게 믿는 어린 과학자"의 낙관을 토대로 "화분에 물을 주고 / 지지대를 세워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는 단지 '돌봄'이라는 정의로 환원되기는 어려운, '동맹'이라는 정치적·계약적 관계로 명명되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 권력관계가 기실 돌봄에 내장되어 있음을 기억해 두도록 하자. 그리고 '동맹'은 서로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모종의 상호 계약이며, 근본적 불안을 안고서 계속 가꾸고 갱신해 나가야 하는 관계이다. 즉 동맹은 어떤 감정적 유대나 윤리적 조건에 앞서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우는 구체적 실천이 선결돼야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와 개가 "다시 동맹을 맺"을 때마다 그들의 관계는 새로 구축되고, 늘상 반복되는 풍경도 그들에겐 "처음 보는 광경"으로 열릴 것이다. "눈이 녹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하는 겨울"은 아직 '개'와 '나'가 함께 발자국을 남겨 본 적 없는 순백의 공간이 되고, 그 위는 "우리가 처음으로 디뎌도 되는 / 눈"으로 가득하다. 시인은 이렇게 완결될 수 없는 윤리를 전면에 내걸고, 동물-타자와의 지속적 질문으로 세계를 조정하려 한다. 신뢰는 매번 점검돼야 하고, 동맹은 갱신의 가능성과 함께 실패의 가능성을 늘 염두해야 할 것이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과 예민함이 연대의 감각을 공들여 구축하게 만드는 윤리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2). 그런 점에서 제목 '저지대'가 지시하는 '낮음'(低)은 곧 동물-인간의 관계 안에서 동물이 인간보다 서열상 아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동물 동맹 자체가 "살고 / 없고"를 반복하는 불안정한 저지대 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조적 폭력의 가능성에 의해 돌봄이라는 지반이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변해갈 때, 윤은성의 노래는 예민한 떨림과 흔들림의 감각이야말로 모든 관계 맺음의 기초 정서임을 순수하게 드러내며 '동맹'을 그 대안적 관계로 제시하는 것이다. 「비 냄새 맡기」 역시 이러한 관계성을 잘 보여준다. 이 시는 도입부터 화자가 "계속 말을 걸"겠노라고 말하고 있기에 언뜻 시 전체가 '말'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처럼 보일 수도 있다. 화자에게 '말 걸기'란 "봄에 태어난 /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정의되는데, 여기서 화자의 '말 걸기'란 단순한 의사소통 기술이라기보다, '외존(外存)'이라는 존재 고유의 습성으로 형상화된다고 보아야 한다. 네가 네 얘기를 해주기 시작하면 또는 말없이 많은 사람 틈을 부딪치지 않고 걷게만 되면. 다져진 땅의 말. 돌 밖으로 가지 뻗는 나무와 새의 말. 다시 먼 육지의 말. 그러다 같이 걷기만 하거나 들어줘서 행복해졌다고 나는 고백할 수도 있고. 가끔은 놀라며 날아가는 작은 새나 꽉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를 보느라 한눈도 팔겠지만. 너무 어려운 일이 많은 날엔 부끄러운 날엔 긴 산책을 조금 더 하면 되지. 그런 것도 듣는 일이 된다는 걸 배우고 또 배워. - 「비 냄새 맡기」 부분 여기서 '말 걸기'와 "네게 온통 귀 기울이는" 청취의 자세는 화자의 몸에 깊이 각인된 존재론적 특질이자 모든 자기 바깥의 존재와 관계 맺기 위한 방법론이다. 그렇기에 때론 인간 언어를 가뿐히 뛰어넘어 "돌의 말, 전기의 말", "다져진 땅의 말 / 돌 밖으로 가지 뻗는 나무와 / 새의 말", 그리고 "다시 / 먼 육지의 말"로 그 채널을 확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화자가 '말'의 가능성에서조차 한 지점 더 나아가 '말'의 대체 가능성을 탐색하는 대목에 주목하라. 말 걸기와 듣기는 "같이 걷기만 하"는 침묵, 다른 사물에 "한눈도 팔"곤 하는 지연, "긴 산책을 조금 더 하"는 유보로도 충분히 대체된다. 단지 여기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제목의 '비 냄새'처럼 자신의 온 감각 체계를 동원해 타자의 존재 양식을 "배우고 또 / 배워"가며 세계 속 '말'의 스펙트럼을 확장해 가는 지속적 훈련이다. * 그러나 이런 훈련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데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지고, 누군가의 숨을 들이마시고, 음식을 나누고, 흥겨운 노래와 함성을 섞고, 어울려 춤추는 행위까지, 모두가 '너'의 감각 체계를 "배우고 또 / 배워"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너'라는 존재에 중첩되어 보기 전까진 몰랐던 '너'의 고통, 생의 끔찍함을 조금씩 분할해 가지게 된다. 저 멀리서 부정적인 감정의 파도가 보이면 일단 회피해 보는 게 미덕이라는, 일종의 '세련됨'을 자처하는 믿음이 부적처럼 통용되고 있는 지금-여기다. 훈련의 미덕은 점점 더 생경해져만 가는 이 땅에서, '굳이' 비틀릴 대로 비틀린 '너'와 '나'의 이음새를 다시 교차시켜 보려는 윤은성의 인물들은 그 자체로 '저항의 형상화'가 될 때가 있다. 이 가운데 '노래'는 화자들의 핵심 제스처다. 가령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유리 광장에서』(도서출판 빠마, 2024)의 「먼 곳에 놓이려고」에는 "접시의 사금파리를 모으며 / 질문 없는 답변을 노래처럼 읊조리고" 있는 화자가 등장한다. 여기서 깨진 접시는 한 여자가 "자신이 말하지 못한 게 무엇인지 / 깨닫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또 무엇인지 / 찾느라" 떨군 찻잔으로, 그 사금파리는 감정의 파편이자 차마 언어화되지 못한 고통의 조각들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이것들을 모으며 노래를 읊조리는 동시에 "들렸다 사라지는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 새벽의 노래는 비록 아침이 되어 "더 작게 바뀌"지만, "질문하는 방법을 모르는 채 아프고 / 아픈 것도 모"르며 자기 역사를 건너온 여성들의 '질문 없음'에 화자가 되돌려준 노래는 그 자체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며, 비발화에도 응답하는 대안 언어가 된다. 「노래할 차례」 속 '노래' 역시 언어를 공유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잇는 신호이자 저항의 언어로 등장한다. 작중의 한 마을은 "소들이 자면서 서로에게 나직한 / 노래를 불러주는 것을 / …(중략)… 평범한 축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느 날 "가장 노래도 잘하고 / 돈도 잘 벌어다 주는 소들이 택해지"며, 마을 구성원 "모두 얼어붙거나 울적"해진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소들이 지친 하루 끝 서로의 감정을 서로의 귀에 들려주는 차원의 의미였고, 여기선 음정도, 박자도, 음색의 조화도 현란한 가창력도 요구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협화음도, 어긋남도, 중단도 허용하는 그 합창은 그들에게 "평범한 축복"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범한' 노래 능력을 보이는 '특정' 소가 경제적 가치로 평가되고, 이것이 소를 착취하는 자본 논리와 병치되었으니, 마을에 슬픔이 깃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벌금형을 받"은 '그'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를 관찰 중인 화자도 있다. 화자는 "소가 하는 말을 천천히 옮겨 / 적"을 줄 알고, "법정에 서기 전" "떨고 있는 그에게" "소들이 편안해 보"인다고 대신 일러준다. 이러한 정황은 인간 언어의 공간인 법정에 서 있는 '그'와 화자의 관심이 여전히 '소'의 고통 유무에 있으며, 그들과 '소'의 정서가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들은 "소와 함께 풀과 과일을 먹지 않았다면 / 알아듣기 어려울 // 선언 이후의 노래를" 진즉 듣고 있고, "노래가 아닌 것은 이제 보이콧 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정이 '그'에게 내린 벌금형과 소들의 노래는 대조적인 자리에 놓이고, 소들의 '노래'를 향한 세계의 선택과 배제 메커니즘은 그들에게 오히려 반항의 결심으로 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보이콧 대상("노래가 아닌 것")은 곧 엄선된 소들의 노래, 인공적으로 기획된 천상의 노래일 것이다. 그러나 "노래가 아닌 것"이 아닌 것, 즉 그들의 '노래인 것'은 서로의 고통과 심연을 나직하게 어루만지는 순수의 합창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선언했던 이들이 집 밖으로 나서"며 시작되고, "이른 아침 / 법원으로 향했던 이들이 마을로 돌아오"며 닫힌다. 이는 법원-마을-법원의 환형 구조가 아침-밤-아침의 시간 구조와 포개어지는 것으로 유추된다. 밤 동안 마을에는 "서로의 먹을 것을 챙기며 노랫말을 생각하는 슬픔들이 / 비밀스럽게 자"라나고, 구성원들은 "전보다 더 가난해"지지만, 동시에 "어떤 친구들은 /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도 한다. 칠흑처럼 어둡고 "끔찍하고 아픈 날들" 속에서 "서로의 눈과 귀를 가려주"는 동안 숱한 슬픔의 정념들은 숙성되고, 이는 "다시 새롭게 불복종할" 힘으로 전환된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다 같이 부르는 노래는 송신자-수신자를 구별하는 '말'과 달리, 송신-수신의 구분이 무화된 '공명'의 형태인 점을 기억해 보자. 그리고 소들의 노래가 '낮'이 아닌 '밤'의 노래라는 점도 기억해 보자. 모두가 서로를 개별적 독립체로 구분할 수 있는 환한 '낮'의 시간보다, 어둠에 둘러싸여 너-나의 구분조차 사라지는 '밤'에 발생하는 소들의 노래는 서로의 목소리를 분유하는 공동의 음성이 된다. 이렇듯 밤의 공명과 정념들의 순환은 윤회하는 리듬 안에서 연대를 끊임없이 길어 올린다. 사실 이 무한한 리듬에 대해서라면, 윤은성은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시집 『주소를 쥐고』의 「정확한 주소」에서 예고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래'가 더는 유효한 어휘가 아닐 때. 손 뻗어 만져지던 것들이 이제는 만져지지 않고. '과거'로부터의 선로는 망가져 앞으로도 믿을 수 없을 때. 저물고 다시 밝아지는 날들의 반복만이 조용히 부식되는 시간을 이해하게 하였고.” - 「정확한 주소」(『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부분 미래가 효력을 잃은 세계에서 윤은성은 미완의 노래로 삶의 조건을 다시 묻는다. 「창문을 열다가」(『유리 광장에서』) 속 "전쟁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와 "외교부를 향해 서서 / 같은 노래를 새롭게 부르다 흩어"지는 사람들, 또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헐뜯는 사람들"의 출현과 산발을 동시에 포착 중인 시인의 렌즈가 이미 그 답을 제출하고 있다. 더 낮은 곳에 유독 더 매서워지는 폭력, 당신들과 따로 또 같이 있어 지옥 같은 삶, "피곤한 잠"처럼 무거운 일상이지만, 어떤 이들은 굳이 힘겹게 "걸어 나와 마음을" "여미고 열"더니, 속수무책 "당신에게로 기울어져" 버린다. 이 기울어짐은 아직 '남아 있는' 불완전한 합창을 우리 삶의 조건으로 가시화한다. 정말 그런 것도 같다. 내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료에게 속절없이 기울어져 입만 뻐끔대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엔 그 소리와 불화하는 나의 곤란한 음색이 한 음 두 음 보태고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가 억압의 궤도를 빠져나가고 있는 클리나멘의 음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 미세한 편위(偏位)의 노래가 폭력의 직선을 비스듬히 기울여 '나'가 "당신에게 안길 틈"을 재차 벌린다. 이 '벌어진' 틈은 어쩌면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벌어진' 가장 순수한 사건일 것이고, 이 사건은 때로 거의 모든 것을 중지시키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지난 겨울과 봄 동안 우리가 무수하게 듣고 불렀던 그 노래, 그리고 아직 남아 매일 밤 우리에게 비스듬히 돌아오고 있는 그 노래처럼. 1)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아포리즘』, 편영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82쪽. 2) 이러한 감각은 윤은성의 시 세계 속 인간-인간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요구되고 있다. 당장 「남아 있는 여름」 속 "종종 나를 안아주거나 나를 버렸"다고 소묘되는 '마을 언니들'과 화자의 관계만 보더라도 그 양상이 확인된다. 그들을 가로지르는 동맹은 숭고하고 매끄럽기만 한 자매애적 연대보다, 서로를 배척하기도 하고 제한적인 조건에 의해 수용하기도 하는 복잡한 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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