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제148호)
대체로 심각한 , 대개는 유쾌한 : 기원석, 『가장낭독회』(아침달, 2024) 임지은,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민음사 , 2024)
50년 오코노미야키 외길을 걸어온 장인에 관한 영상을 본 적 있다. 5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대왕오코노미야키를 어떻게 뒤집는지가 그 영상의 주요 관전 포인트로, 대가가 오랜 세월 축적해온 뒤집기 노하우는 어떤 거대한 형태의 반죽도 완미하게 보존해낼 것이었다. 뒤집기의 시간. 장인이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듯 연장을 꼭 쥔다. 화면 너머 결기가 느껴진다. 패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일본 예능 특유의 효과음과 성우의 내레이션 역시 긴장을 더한다. 덩달아 몸에 힘이 들어간다. 모두의 비장감이 극에 달한 절체절명의 뒤집기 순간, 보고 말았다. 별안간 흩어져 뿌려지는 양배추, 엉망으로 찢겨 나가는 반죽, 동그란 형태는커녕 최초 반죽 당시로의 원점 회귀, 이 모든 아비규환의 현장을. 아아, 잔인해라. 이 실패가 심지어 슬로모션으로 재생된다.
일순간 저항할 틈도 없이 실소가 터져 나온다. 최소한의 오코노미야키 모양 정도는 유지되길 바랐다는 카메라맨의 떨리는 손, 당황한 패널들의 웅성거림,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아랑곳 않고 원래 이런 거라는 듯, 늘상 그래왔다는 듯 뻔뻔하게 양배추 잔해들을 그러모으는 장인. 구멍 난 반죽을 덤덤히 메울 뿐인 그녀의 모습 뒤로 성우의 엄숙한 내레이션이 화룡점정이다. ‘그렇다.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 실패가 아니다……!’
기원석과 임지은의 시를 나란히 읽는다는 것은, 이 장인의 비장과 골계, 긴장과 이완, 엄숙과 폭소, 그 몇 초 상간을 계절 단위로 늘여 슬로모션 형태로 경험하는 일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텐데, 일단 두 시인은 오코노미야키와 무관하고 50년 대가는 더더욱 아닌 젊은 시인들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겠다. 다만 한 시인은 “언어의 와해와 사고의/망상”을 기술하고 “행간을 최대화하”(기원석, 「CONFIDENTIAL」)는 방식으로 쓰고, 다른 한 시인은 “작은 것을 더 작게 말하”(임지은, 「꿈속에서도 시인입니다만 2」)는 방식으로 쓴다. 전자가 함양해야 할 자세는 “비난하기 모든 걸/해석 또는 축소/해석하기 인간을/경멸하기”(기원석, 같은 시)라 한다. 후자는 “행복엔 잘잘못이 없”(임지은, 같은 시)으니, 그냥 “뭐든 사랑해 버”(임지은, 「기본값」)리라 한다. 시 안에서 ‘현실’과 ‘이상’이 응전할 때, 그리하여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 대립할 때 우리는 시인의 포즈를 어렴풋이 발견하게 되는데, 기원석의 그것은 비장이고 임지은의 그것은 골계라는 점은 언뜻 그들의 지향이 정반대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감각이 있다면, ‘독자의 부재’에서 비롯한 위기의식 그리고 그들의 시가 높은 확률로 실패하리라는 직감 같은 것이다. 가령 그 제재의 은유가 명백히 ‘시집’일 기원석의 「바게트」를 보라. 행인들을 향해 바게트 좀 사시라 권해도 별 소득이 없어 “요즘 누가 바게트를 먹겠”냐는 푸념만 하던 제빵사는 결심을 굳힌다. 그냥 “바게트로 그의 독자를/두들겨” 패기로. 자신에게 남은 “몇 톨의 독자들”마저 박박 긁어내던 제빵사는 급기야 “부러진/바게트를 행인들의 입에 쑤셔 넣”기 시작하고, “바게트에 두들겨 맞은 독자들/비명이 언덕을 넘어”서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관찰자 (화자)는 중얼거린다. “사악한 위트를 곁들인 비유/퍽퍽한 의식 덩어리로 /만든 이런 바게트를/누가 먹을 일은 없겠지”.
임지은의 「독자 연구」에서도 다른 듯 비슷한 광경이 포착된다. 지독하게 안 읽(히)는 시대, 그리하여 분실될 위험조차 없는 책의 세계. 만에 하나 분실되더라도 “냄비 받침을 주시하라!”라는 행동 강령만 따르면, 책은 어김없이 그곳에서 ‘받침’의 용도를 다하고 있을 세계. 어쩐지 낯설지 않다. “독자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궁금”해 서점에 가본 화자는 쓰디쓴 낙담만 안고 귀가하고, 그곳에는 유일한 독자, “우리 엄마”만이 있을 뿐이다.
이 공통된 위기의식과 실패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고, 이는 결국 시인의 포즈가 시와 현실을 매개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접맥될 것이지만, 그 여부와 별개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선행하려 한다.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 실패가 아니다……!’라 말할 수 있는 세계가 비단 오코노미야키 장인의 세계뿐이겠는가.
기원석: X 버튼과 R 버튼
어떤 작품은 연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강렬하게 극적일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작품은 철저히 연극적이면서도 ‘극적’이라는 표현만으론 회수되지 않는다. 기원석의 『가장낭독회』는 후자에 속한다. 극 텍스트 형식의 수록작 다수가 스스로 일종의 ‘극시’ 되기를 겨냥하는 듯 보이지만, 연기자들의 사념으로 소용돌이치는 독백의 상당 부분이 대상에게든 관객(독자)에게든 ‘가닿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꾸준한 거절과 반송을 경험 중인 기원석의 화자들이 품고 있는 파토스에 주목해보자. 「스노볼」의 화자는 자신이 상대(‘너’)로부터 받은 달을 돌려주려 하지만,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달이” 되굴러온 바람에 곤란한 처지이다. 계속 두면 달은 부피를 늘려 불면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차마 그에게 달을 재반송하지도 못한 채 “부풀어 오르는 구석으로” 떠내려가기를 선택할 뿐이다. 「미싱」의 화자도 마찬가지이다. 화자는 매일 아침 어딘가로 답장을 보내는데, 그 답장은 읽힌 흔적조차 없이 깨끗한 형태로 반송되어 온다. 동등히 성실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도 “나는 미싱을 돌렸다”는 화자의 진술은 그/그녀의 새벽이 그리움missing이라는 감정의 노동을 땀땀이 반복해야 할 시간임을 확인시킨다. 뿐만 아니라. ‘수수’ ‘주주’ ‘우우’라는 세 명의 천사가 등장하는 「깍두기」 안에서 말 그대로 깍두기인 ‘우우’는 나머지 둘의 싸움에조차 끼지 못한다.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야…… 나도 여기 있는데……”와 같은 울먹임에서 드러나는 ‘우우’의 소외는 “수수와 주주의 분노를 극적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그렇게 화자들이 내면에 서서히 공글려오던 슬픔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형태로 급전회한다. 신세 한탄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외, 반복된 무관심에서 비롯한 무력감, 대상에게 번번이 가닿지 못하는 거절감이 귀결되는 곳은 결국 가차 없는 복수심이라는 감정의 대단원이다. 특히 여기서 이 파토스의 폭발이 ‘시인’–‘독자’의 관계에서 두드러진다는 점은 앞선 화자들이 간절하게 송신하려던 것들의 정체가 ‘시’였을지 모른다는 사유의 단서를 남긴다.
앞뒤로 배치된 「현대시작법」과 「현대시독법」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이 안에서 작가와 독자는 서로를 기만하는 관계에 불과하다. 독자들은 신이 시인에게 준 하나의 주사위를 훔치는 존재이자, “독자를 괴롭히는 장난은 그쯤 하”라며 언제든 돌아서버리는 매정한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때 “총알 한 발이” 독자의 뒤를 관통하고, 작가는 그런 “독자의 고통과/독자의 주검과/독자의 분노를/낱낱이 헤아리”다가 “세계의 틈에 책갈피를 끼”우고 마는 식의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때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작가는 유력한 용의자로 전환된다. 시인이 꿰뚫어 본 창작과 독해의 본질이 이런 풍광에 있다면, 세상의 모든 낭독회는 “낭독할 시가 아닌 가짜 문장들”(「가장낭독회」)과 위선의 파토스로 낭자한 곳이 된다.
감정은 판단을 동반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필시 부정적인 판단을 데려온다는 뜻이다. 시어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와 환멸에 기반한 화자들의 분노는 시에 대한 독자들의 의미 부여 자체를 지독히 냉소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시의 의미를 진맥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강경하게 거절하는 방식으로 극대화된다. 당장 「야광꼬리달린하마에 대한 나폴리식 경고문」은 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보시오, 독자 당신. 지금부터 이 책에 대한 어떠한 의미화 작업도 수행하지 마시오. 시를 수용하지도, 재가공하지도 말며 심지어는 어떤 것도 느끼지 마시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시 앞에서 취해야 할 “N급 비밀에 준하는 행동 요령”에 다름 아니외다!
이 모든 분노는 “내가 당신에게 돌려준 그걸 결코 내게 주지 마”(「마지막 시」)라는 비장한 선언으로 요약될 텐데, 이 시집을 관통하는 여섯 편의 「튜토리얼」 연작을 짚어보면 그 내면에의 망명이 종국에 어디를 향하고자 했던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낭독자와 독자들이 같은 공간에서 “각자가 읽는 자신에게 집중할” 뿐인 공회전의 낭독회 현장을 「튜토리얼」(p. 13)이 보여준다면, 「튜토리얼」(p. 16)은 ‘정’이라는 인물의 대사를 빌려 “시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이 곧 “시인의 협소한 상상력을 스스로 까발리는 자충수”라는 자기 검열을 드러낸다. 기실 ‘정’의 발화는 어떠한 작법도 독법도 없는 시의 교시 불가능성과 달성 불가능성을 겨냥하지만, 그의 말이 되돌아가야 할 곳은 그 자신이기에 결국 ‘죽음’으로부터 고발되고 만다.
이 과정 전반에 드리우는 비장감은 「튜토리얼」(p. 75)에 이르러 한 작가를 강렬히 적대하는 ‘너’의 언어—“이런 걸 쓰고도 순진한 척 작가 행세를 하다니 넌 표절자야 배신자야 기만자야 남의 문장에 빌어먹고 살 새끼야 너 따위에게 속을 줄 아냐?”—로 강화된다. 기억할 사실은 비난 대상이 된 작가는 기시감을 유발하는 글을 쓴 죄밖에 없다는 점이다. 연이어 ‘너’가 읽은 “조잡한 누더기” 같은 시는 “나도 이렇게만 썼으면 몇십 편이고 몇백 편이고 쓸 수 있”다는 질투로 심화되고, ‘너’는 급기야 써 내려온 것들을 지우고 잠들어버린다. 이렇듯 인물들의 나르시시즘적 내면묘사와 자문자답의 형태가 텍스트 전체에 우세해질 때, 스스로 파토스의 스펙터클이 되어 비장미를 육화하려는 시의 언어화 과정도 두드러진다.
시에 예정된 고통과 몰락에, 또 그것에 경도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비탄을 내비치는 비장감이 시의 부활과 자신의 존엄 간 융합을 담보하는가. 대관절 무엇이 그의 화자들을 이토록 견딜 수 없게 만들며 이렇게까지 거칠게 불화시킨단 말인가. 이 지독한 비장은 무엇을 위함인가. 시의 자기애를 제어하기 위함인가, 자기애에 조력하기 위함인가. 택일의 기로에 놓인 기원석의 화자들은 앞선 「튜토리얼」(p. 43) 속 ‘너’의 수면 행위와 교묘하게 맞물려 들어가는 「튜토리얼」(p. 75) 속 가상공간을 향한다. 이쯤에서 이러한 ‘튜토리얼’ 형식과 게임으로 주조된 기원석의 세계관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떤 플레이어도 이 세계를 클리어하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며, 실제로도 그 모든 NPC가 플레이어(화자)에게 지령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 세계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은 비현실 안에서 ‘화자’는 이제 자신이 “하나의 NPC가 되”(「튜토리얼」, p. 75)려는 결심을 내린다.
이 진술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1, 2, 3부의 도입이 「튜토리얼」 연작을 경유했던 것과 달리, 유독 마지막 4부만은 「마지막 시」를 우선 경유하고 있음에 주목해보자. 그건 그곳에 비로소 분노도 회한도 다 빠져나간 화자의 고백—사실 “더 치열하게 나와 겨루는, 나의 슬픔과 나의 열망과 나의 생을 걸고 하는 독서, 그리고 반복, 나의 숙명 같은 반복, 그것들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라는 고백. 그리고 그런 내게 시 쓰기란 “불화와 분쟁과 대립”을 감수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뒤이은 「튜토리얼」(p. 108)에는 시인이 자기 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등장해 이 모든 것이 “삶과는 전혀 닮지 않은 괄호 안에 강박적으로 삶을 욱여넣은/기원석의 플레이 기록”이었고, “사실 기원석의 삶은 튜토리얼에 그쳤”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삶이나 튜토리얼 대신 시나 쓰면서” ‘당신’을 기다리겠으며, 그 본편에서는 “자신의 남은 ( )을 너희를 향해 열어두”었노라 한다. 이 괄호 열기란 자기 표백을 위해 쓰던 괄호를 이제는 ‘당신’이 틈입할 공간으로 쓰겠다는 선언이자 더는 숨지 않겠다는 결심 아닌가. 그렇게 마지막 「튜토리얼」(p. 113)에 당도하면, 이제 “체크아웃할 수 있지만 탈출할수는 없”는 그곳, 즉 ‘시’로 돌아가 정면으로 응전하겠다 말하는 다짐이 우뚝 솟아 있다.
시인이 이미 짚어냈듯 “모두가 성공했고 이야기가 거기서 끝났”(「멀티엔딩」)대도, 극이 끝나고 조명이 켜지면 우리 삶은 강박적으로 원래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떤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어도 언젠가 식사가 끝나”(「이야기꾼」)야 하는 세계의 원리가 그러하듯, 어떤 풍성한 발화 형태를 갖고 있대도 세상 모든 이야기는 종결의 필연이다. 그러니 이야기꾼의 근본 감정이 고통일 수밖에.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엔딩’에의 강조는 그만큼 강렬한 ‘재개’에의 욕구이기도 할 터. 이제 그는 “암전은 하나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부록 「제목을 입력해주세요」)함을 알기에, ‘엔딩’과 ‘재개’라는 무한 순환 고리 아래 “믿기/믿지 않기”(「CONFIDENTIAL」)의 간극을 펼쳐내며 시 쓰기의 반복, 그 진자운동을 시작하겠다 말한다.
물론 시 쓰기라는 정황에 대한 지시로 다수 수렴 중인 기원석의 삽화적 세계관과 그 변형 과정이 그리고 그의 내면적 서술 방식이 우울한 투정의 관습에서 탈출해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에 부친다. 또 그가 고안한 통사적이고 수사적인 방식이 관객–독자를 화자의 의식 안으로 끌고 들어오기에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에 부치려 한다. 그러나 시에 조의를 표한 그 자리에서 바로 자기 시를 재개하려는 포즈와, 갈까 말까 묻다가 기어이 부정확성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은 분명 중요하다. 괄호 치고 취소 선 긋고 싶을 감정의 잔여물과 시어에 내포된 모든 어둠마저 ‘되풀이해 읽어달라’는 시인의 당부는 신인의 ‘정면 돌파’이기도 할 것이다. 그 성그나마 치열한 분투는 하나의 ‘엔딩’을 딛고 새로운 시작 (詩作)으로 나아갈 동력이 될 것이다. 많이 비장하라. 이제는 엔딩이 당신을 무서워하도록.
임지은: Alt 키, Shift 키와 Ctrl 키
시는 또 어떤 포즈를 개발할 수 있을까. 모든 게 바삐 돌아가는 월스트리트에서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로 공백되기를 자처했던 바틀비처럼, 바쁘디바쁜 현대사회 한복판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않는 시는 어떤가? 가령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지면으로 옮겨내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된다는 상상으로 상궤를 벗어나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다가 “똑똑하다는 것은 자신이 별로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아는 것이 시작”(「똑똑」)이라는 뜬금없는 말로 딱딱한 의성법을 똑똑하게 녹여보는 것은? 또 “이층 버스를 타고 싶었다고/콜럼버스처럼 외딴곳에 도착하고 싶었다고/그려 본 적 없는 캔버스에 써 내려간 이야기는 옴니버스라”(「유턴하는 생활」)거나, “본전을 뽑아야 한다지만/풀도 아닌데 왜 뽑아야 하는지/잘못 난 사랑니 같아서 뽑아야 하는지”(「무한리필」, 이상 강조는 인용자)와 같은 얼렁뚱땅 라임으로 느슨해진 포엠 신Poem Scene에 긴장을 제공해보는 것은? “모자 속에 사는 사람”(「모자 (속에 사는 사)람」)의 이름을 적당히 괄호 쳐 ‘모자람’으로 명명해보는 시시껄렁 농담도 좋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지하철 역사에 울리는 안내 방송 「발 빠짐 주의」는 “바빠짐 주의, 바빠짐 주의”로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듯 임지은 시의 장막이 제일 처음 걷히는 지점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난데없는 웃음을 유발하는 몇몇 대목이다. 일상의 몇몇 순간을 교묘한 언어유희로 시침질해 고안한 이 ‘꾸며진 자연스러움’은 과연 ‘기지wit’에 다름 아니다. 이에 더해 “엄마를 그리워하는 서정시”를 쓰다가도 “코끝이 찡해지는 감수성이 나와 어울리지 않”(「파꽃」)아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시인의 고백이 불쑥 튀어나오면, 젠체하지 않는 명랑에 문득 신용을 내주고 싶어진다. 그건 아마 임지은의 시가 “정말 창피한 건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것”(「병원에 갔어요」)임을 아는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건 열어 보지 않아도/이미 알 수 있다는 믿음으로” 껍질을 잔뜩 부풀려 “어떤 의미에서든 물건이 되려”(「과대 포장」)는 존재 양태가 있다면, 임지은의 시는 단지 이렇게 자신을 설명할 뿐이다. “주의: 안에 든 것이 뭔지 알 수 없음”(「밀봉된 캔의 역사」).
그러나 이렇게 ‘척’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아는 것을 얼마나 다르게 보고 또 어떻게까지 다르게 말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일 텐데, 임지은에게는 그러한 시적 감각이 넉넉히 구비돼 있다. 그건 이번 시집 전반을 꿰는 ‘둥글둥글함’1)이라는 한 오라기 실을 따라가 보면 된다. 그녀가 포착한 사물의 세계는 ‘지구는 둥그니까’ 굴러가는 지구설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기보다, “달력이 1월을 사랑해서 새해”(「사물들」)라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리에 입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둥근 것을 좋아해서” 도처에 “학원 병원/식물원 동물원 유치원” 같은 ‘원’들이 널리게 된 서울은 제아무리 “동그란 웃음”이 가득하대도 그리 화기애애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 관찰의 모양이 천진하다 해서 그 사유의 각까지 무딘 것은 아닐 터. “시간이 원을 좋아해서/시계가 둥근 것이 아니듯/세상엔 좀 더 많은 모양이 필요하”(「식물원에 와서 쓰는 동물원 시」)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우리 앞에 굴러온다.
또한 앞선 기원석의 시가 그린 반복적 순환 고리와 비슷하게, 임지은에게서도 “유턴의 유턴의 유턴을 반복하”며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유턴하는 생활」)가는 환원의 이미지가 발견된다. 여기서 ‘네모’와 ‘세모’는 반을 접어도 여전히 ‘네모’ 또는 ‘세모’를 유지하는 정확성의 문법을 따르는 반면, 동그라미는 마치 “보름달을 접으면 반달”인 것처럼 “접으면 접을수록 원으로부터 멀어지고”야 마는 불확정성의 문법을 따른다. 앞 문단에서 우리는 다종, 다기, 다양한 모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화자를 만났다. 때문에 ‘원’을 접는 행위는 “네모를 깨뜨릴 수 있는 용기가” 되고, 이것이 동그랗게 순환하는 ‘시간’을 접는 제의적 행위로 전환되면 “지금 여기, 먼저 와 있는 미래를 찾을 수도 있”(「네모 없는 미래」)는 가능성까지 될 수 있다. “네모 안에 둥근 속을 감추고 있”는 세탁기의 모양을 관찰하다가 알칼리도 산성도 아닌 중성세제를 넣고는, “옳고 그름 사이에서 인생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작동”(「세탁기 연구」)함을 짚어내는 화자의 진술은 사실상 그 깨달음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임지은의 시 안에서 획일성의 불합리를 향한 뾰족한 시선이 어떻게 둥글둥글한 일상 언어와 이중적으로 교직되는지에 주목해보면, 그 시의 융통성을 마냥 허허실실의 모양으로 독해하기 어려워진다. 이는 가장 일상적인 안식의 공간이 어떻게 존재 근본의 위태함과 불안을 동시에 견디는 시간으로 교직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둘 때도 잘 드러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녀의 시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을 만큼 깊게 심취해 있는 ‘잠’의 세계에 참입해봄 직하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임지은식으로 전유해보면, “토끼의 비극이 시작된” 지점은 거북이가 결승선에 통과하는 동안 “누구도 /토끼를 깨워 주지 않았다는”(「토끼잠」) 사실에서 비롯한다. 그 이후 조각 잠을 자기 시작한 토끼의 수면 공간에는 자신과 바깥세상이 불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존재 근본의 불안이 깃들며 미세한 틈이 발생한다. 앨리스의 수면 역시 “깨고 싶으면 절대 깨어나지 못하고/깨어나기 싫어야 깨어날 수 있”(「앨리스 나라의 이상함」)는 양가적인 경험으로, 그 안과 바깥 간의 의도가 균열하는 동안 숙면이 슬금슬금 새어 나갈 것이다. 종합건대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말이 곧 “조금만 살아 있어도”(「가장 좋은 저녁 식사」) 된다는 말로 치환되는 임지은의 수면 공간은 현실의 불안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시간임과 동시에 도저한 불안을 껴안으며 죽음에 한발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게다가 그런 일상의 수면이 기어이 ‘꿈’이라는 몽상 공간으로 한 걸음 더 강행되는 날에는 그 의미가 ‘시–쓰기’에 대한 정황과 맞물리며 보다 심원해진다. 먼저 「꿈속에서도 시인입니다만 2」에서 시인–화자가 ‘시’와 ‘꿈’이라는 사건을 나란히 둔 채 미세한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음에 주목해보자. 마치 우리의 꿈이 매일의 수면과 무관하게 이따금씩만 찾아오듯, 시인에게 시 역시 아주 많은 “쓰지 않는 날” 가운데 “아주 가끔” 찾아오는 사건으로 서술된다. 특히 여기서 화자는 “시가 당신을” 쓰는 사건을 기다릴 뿐이며 “책상에 엎드려 꿈꾸는 것이” 차라리 “시적인 사건”에 가깝다고 짚어내고 있다. 또 “꿈을 꾼다는 건 좋아하는 발자국을 모으는 일이”(「자는 동안」)라는 대목도 눈여겨봄 직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으레 발자국을 ‘남기는’ 일에 집중할 때 임지은의 화자들이 이미 지나가고 뒷모습 형태로만 남은 걸음의 자국들을 ‘모으는’ 사후적인 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시인의 관점에 대입해 그 의미를 확장해보면, 고안해낸 언어를 지면에 발자국처럼 찍어 ‘남기는’ 행위보다 이미 떠나 흔적 정도 남은 존재의 잔해들을 언어로 회수하는 행위에 그 시의 본령이 놓인 셈이다.
이에 더해 「미스치프와 시 쓰기」에 등장하는 창작자 ‘가브리엘’ 역시 글의 말미에 한 문장을 덧댈지 말지 한참 고심하는 자신을 보며 “문득 자신이 시인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고 진술하지 않는가.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마지막 터치를 위해 심각해지는 태도가 ‘시인다운 것’으로 언명될 때, ‘시인은 시를 짓는 주체인가?’라는 물음이 ‘시는 그 자신을 짓는 주체인가?’라는 물음으로 다시 씌어진다. 임지은에게 시의 다음 문장이 향하려는 벡터 방향은 오로지 시만이 아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날 남기고 갈 흔적을 기다리며 한 줌 불안과 함께 적당한 달관의 잠을 취해보는 일은 곧 시인의 존재 미학이자 자아 실험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 언어는 필요 없”(「입장들」)다.
물론 위 문장을 언어에 대한 절대적 비신뢰나 언어의 무능에 대한 경계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언어는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말에도 창문이 있고 먼지가 쌓인다는 것을” 잘 아는 시인은 다만 먼지를 떨어내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오해와 다툼과 싸움이/같은 뜻이”(「정리하지 않은 게 정리」) 아님을 짚어내는 작업, 즉 단어 간 차이를 섬세하게 사상하는 작업에 천착한다. 헤집어지고, 얼버무려지고, 툭 튀어나오고, 놓쳐지고, 잘게 부수어져 “낱낱이 된 감정을 조립”하고, “어떤 조각으로도/대체되지 않”는 시어의 형해를 보존하되, 의도로 지나치게 빽빽해진 나머지, 자칫 갇혔다가는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두부 되기를 경계할 뿐이다. 너무 무결한 의미들로 점철되어 “두 눈이 멀어 버릴 것같”이 흰 두부가 되는 것을, 임지은의 시는 원치 않는다. “끝끝내 출구를 몰라서 헤매”면서 “아주 더디게 천천히 상해”온 “상한 두부 요리 같은 것”(「상한 두부 한 모」)이 되기를 다만 바랄 뿐이다.
나는 자꾸 이 ‘상한 두부 요리’가, 그 시적 인식이 소박할지언정 사람 마음을 울리는 시로 읽힌다. 애써 말랑말랑해보려는 시어, 그 안의 적절한 안간힘, 이 모든 것을 후숙시켜 버무려낸 기지의 손맛을 느끼는 동안, 식탁 위에 시 언어가 지닌 밝음이 일순간 찰랑이고 사라진다. 시가 우리에게 주는 좋은 것들 중에 ‘삶의 긍정’도 있다면, 적어도 이 식탁에서만큼은 무르고 상한 삶도 긍정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포만한 시이다.
비장과 골계의 디졸브
시가 언어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래서 자꾸 실패할 것만 같을 때, 자기 안에 각종 사물과 행위와 감정에 눅진한 실체를 우려내어 더 깊어지려는 비장한 시가 있다면, 자기를 희석시킬 골계 한 컵을 들이부어 담백해지려는 시도 있다. 여기에 정답은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 둘이 서로를 간간하게 쳐다보고 있는 완전한 하나로서의 양면임을 안다. 비장과 골계는 어떤 면에서 반대 방향으로 향하려는 움직임이 아니다. 기억하라. 시는 이 어드메에서 흐릿하게 드러나는 것이지, 단 하나의 영역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이렇게 보니 “둘로 시작해서 하나로 끝나는 이야기도 /나쁘지 않”(임지은, 「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은 것 같다. “유한한 지면 앞에서 예정된 패배를 맞이하”(기원석, 「튜토리얼」, p. 16)는 것이 시의 숙명이라 말하면서도, “다음 이야기/그다음 이야기를/쓰고 기다리”(기원석, 「멀티엔딩」)는 사람이기를 택한 시인과 “시에 정신을 팔고 있지 않으면 아픈 것들이 너무 또렷하게 느껴”(임지은, 「기본값」)진다는 한 시인의 고백은 과연 상통한다. 다시금 떠올려보니, 비장감 넘치던 오코노미야키 장인이 화려한 골계와 유머의 귀재가 되고 또 그 반대가 되는 데까지 단 몇 초면 충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실패가 아니었다……! ’
- 1) ‘골계’라는 단어의 어원은 “돌제골계(突梯滑稽)”, 즉 둥글둥글한 성격과 모양으로 융통성 있게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각지지 않고 둥글게 돌아가며 기름같이 가죽같이 부드럽게 살며 문설주나 닦을 것인가?(將突梯滑稽, 如脂如韋, 以潔楹乎?)”(굴원, 「복거(卜居)」, 『초사(楚辭)』, 유성준 옮김, 혜원출판사, 1992, 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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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문체는 단지 어휘의 선택이나 통사의 조합과 같은 수사적 기술이 아니다. 내용 위에 덧붙여진 표면적인 장식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저자의 사유와 언어의 감각이 협상되는 장소에 가깝다. 언어의 전달 기능을 초월하거나 그것에 선행하면서 주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생산·배치·조율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체는 글쓰기에 딸려 오는 부속물이 아니라 글쓰기에 내재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체는 근대성 혹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과 종종 결부되곤 한다. 근대문학은 개인의 사상·내면·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 형식으로 발달했고, 문체란 그러한 개인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현 양식의 증거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체를 문학의 깊이나 개인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곧장 연결하는 틀은, 자칫 문체를 문학의 자율성에 봉사하는 도구로 환원하거나 작가의 의도나 욕망을 재현하는 매개로 한정할 수도 있다.1) 디지털 미디어의 가속화나 알고리즘의 자동화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현재의 언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체란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운동성이 매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낯선 것으로 창안되는 ‘과정’”2)으로서의 형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근 문학에서 어휘·통사·수사·리듬 등 문체에서 창안되고 있는 여러 형식적인 시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표제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문체와 주제가 유기적이고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혼은 슈크림”(p. 311)이라는 첫 문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자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움직이는 물성에 가깝다. 영혼을 은유하는 슈크림, 콧물, 굴, 생리혈, 호두과자와 같은 사물은 모두 끈적이고 불투명하며 통제되지 않는 점액질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윤곽이 뚜렷하거나 실체가 확실한 개체가 아니라 언제든 주입되거나 흘러내릴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로서의 자아. 이것이 조시현 소설에서 자아의 기본적인 세팅이다. 이러한 은유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청각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배열된다. “철걱. 규웃, 철걱. 규웃”(p. 318)과 같은 의성어는 붕어빵에 슈크림이 주입되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인간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영혼’이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듬은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낯설게 만든다.3) 한편 본문 곳곳에서 단어가 짧게 나열되는 구조는 매끄럽게 통일되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영혼의 형상과 조응한다. “디스켓 위로 덮어 씌워지기. 휴대폰에 새로운 앱 깔기. 가벼운 멀미. 구역질”(p. 337)이나 “빵 결 같은 피부. 사소한 다툼. 매니큐어가 떨어진 손톱이나 어질러진 방. 거꾸로 벗겨진 팬티. 땀. 눈물. 머리카락. 베인 살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 나던 찝찌름한 맛.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갓 빤 이불의 냄새”(p. 349)와 같은 구절은 접속어 없이 나열되어 자아가 해체되고 기억이 충돌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술보다 신체의 반응과 인지의 충격이 부각되는 이러한 서술들은 분열된 신체 정동을 반영한다. 몸을 잃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휴먼 슈트’라는 공용 신체에 주입되어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인류의 데이터를 수집·학습·복제하려는 야심을 가진 AI ‘안젤리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덮어씌워 기계의 깊숙한 내부에 침투하여 이를 변형하려는 나진의 시도는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질문하며 그 감염에 기꺼이 몸을 열어두려는 감각적인 개입이다. 나진이 사랑하는 마디를 떠올리며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pp. 318~19)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란 처음부터 고립된 개체 단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상호적으로 침투·조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빚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p. 319)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시현의 소설에서 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접촉과 흔적이 만들어내는 공동 감각의 매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휴먼 슈트는 단순히 몸의 대체물이 아니라,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이 누적되지 않는 몸. 삶이 새겨지지 않는 몸. 역사가 없는 몸”(p. 326)은 기억·감정·경험을 저장하지 않는 저장소로서, 감각의 층위로서의 몸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자아란 흘러들고 주입되며 끈적하게 뒤엉키는 점액질의 덩어리이고, 그 표면은 타자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영혼은 영혼과 기계를 오가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진동한다. 조시현의 소설은 자아의 존재론이 서사 이전에 문장의 리듬, 어휘의 질감, 감각의 배열에서 형성되는 문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 현호정의 소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퍼서 혹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밀도 높은 긴장을 머금은 채로 저마다의 리듬과 운율로 움직이고 있어서다. 첫번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은 문체가 압도하는 소설이다. “가족들 친구들 다 수장된 바다 위에 머리만 동동 뜬 채 살아난 기분 헛되고 어이없고 기가 막혀…… 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pp. 54~55) 눈에 띄는 것은 미완결이거나 비문법적으로 해체된 문장이다. 물에 잠겨 바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울고 괴로워하는 이 장면에는 문법적 빈틈이 보인다. 서로 다른 품사가 병치되어 있거나(“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조사가 생략되어 있거나(“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쉼표 없이 같은 품사의 어휘가 병렬되거나(“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종결어미 없이 끝나는(“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식이다. 이렇게 분열되고 파열된 문장들은 ‘나’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토록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많은 것이 죽고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 여전히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서술로 끝맺어진다. 이 목소리는 문장의 종결을 지연하면서 이어지고 늘어지다가, 매끈하게 완결되거나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어디론가 열려 있는 채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의도적으로 흔들거리는 문장들은 숨 쉬고 아프고 배고프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틈을 사이사이 벌려놓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문장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듯 적혀야 했을까? 적어도 고정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음운·음절·어휘·어구가 중첩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이어지던 인류세는 느른히 늘어져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는 살아남아 기쁘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p. 53)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은 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생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이응, 미음, 리을이 굴러가듯 이어지고(“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라는 음절이 반복되면서 강세를 형성하며(“차례차례 차차 잃고”), 발음이 유사한 어휘가 흘러가듯 연결되면서(“느른히 늘어져”) 문장이 특정한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졌다가 흘러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만이 아니라 (특히 스스로가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믿는 부랑자가 전해주는 지구의 목소리에서) ‘-고요’ ‘-답니다’ ‘-봐요’ ‘-습니까’ ‘-니까요’ ‘-게요?’ ‘-데요’와 같은 구어체의 종결어미가 변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변주되면서 종결부의 여운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렇게 중첩·반복·변주되는 문장은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리듬은 구두점이나 쉼표 같은 기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이나 어휘의 단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재해로 온 땅이 바다에 잠기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멸종한 이후,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바다에서 시체가 분해된 유기물 뭉치로부터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생체와 기생체로 이루어진 기생 쌍둥이로 자라났고, 서로를 갉아 먹고 양분으로 삼는 기생체들의 죽은 몸이 서서히 흩어지자 ‘나’가 자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생겨났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바로 이 문체에서 얻어진다. 아주 미세한 사이즈의 미생물과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인 지구가 하나의 존재로 겹쳐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 몸을 불리면서도 서로를 잉태하여 다시 몸을 나누는 관계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면서 다른 생명과 휘감겨 들러붙은 끝에 지금 여기의 ‘나’가 있다는 역사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끝없이 유동하며 이어지는 문장의 율동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율동성 없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사유4)와 더불어, 생명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상상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라는 고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파열된 자리에 수많은 죽음을 지나 순환해온 우리와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유. 그것은 이 소설의 운동 방식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죽음, 더 정확히는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생성·지속·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은 현호정 소설을 하나로 꿰는 가장 근원적인 주제이지만, 「청룡이 나르샤」는 죽음에 얽힌 정동을 기계라는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각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와 ‘죽으러 가는 열차’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요약해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열차에 매료된 삼십대 여성 K와, 곧 폐전기동차가 될 4호선 열차 ‘납작이’의 시점은 각각 좌우 다단으로 병치된다. 마치 기차선로처럼 나뉘어 있는 병렬 궤도에서 K와 납작이의 목소리는 열차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그러나 각기 다른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흔히 기차는 근대적인 시간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철도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지방시를 표준시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기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해, 기차는 미래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시간성의 은유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청룡이 나르샤」의 열차는 무언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판형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선로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윤회의 궤도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납작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오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납작이를 마치 연료처럼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다. 이 모든 질주가 당신에게 가기 위한 꾸준한 운동임을 심박수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상기하면서 납작이는 종착을 향해 움직인다. 왼쪽 선로에서 납작이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른쪽 선로에서 K의 목소리는 비교적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린다. 열차에 탄 승객(“옷”)과 좌석(“므”)을 상형문자처럼 표현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간중간 변칙적인 강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울증적인 시간을 겪고 있는 K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뒤섞인 감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혼자 기획하면서도 희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K는 시무룩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버스나 택시는 무서워했으면서 유독 열차에게서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렬하게 느껴온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정신과 상담 선생님에게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털어놓기도 한다. K는 전류가 더는 공급되지 않는 열차를 상상하면서 자살을 꿈꾼다. “전 멈추고 싶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아뇨. 지금요”(p. 149). 생산된 지 30년이 되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열차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삼십대 여자.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 엉키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납작이는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열차는 납작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 열차도 푸른색일 것이다. 마침내 일어나 몸의 나머지 절반을 객실로 들여놓은 납작이는 곧 자신이 탄 열차의 낮고 고른 덜컹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열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 여정은 끝내주게 평안할 것이다. 평안한 가운데 납작이는 자기가 열차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쁠 것이다. 므므므 옷 (pp. 167~68) 여전히 선로 위에 있지만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납작이는 폐차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멈추지 않고 K를 지나친다. 그러나 서두르는 승객들을 태우면서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달린 자신에게 이제는 느려져도 된다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모두 지켜냈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K의 응원을 듣기라도 한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멈춰 선다. 지면상으로 바로 같은 시점, K는 납득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다가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늘어져 있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다른 푸른 열차를 타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앞서의 불규칙적인 리듬과는 달리, ‘~ 것이다’라는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납작이가 느려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딱 그 속도만큼, 이 소설의 속도도 서서히 늦춰진다. 오른쪽 선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K의 죽음 충동을 왼쪽 선로에서 달리고 있는 납작이가 이어받듯이 영원처럼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평생 정해진 구간의 종착만을 반복하며 어디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납작이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종착이 아닌 도착에 도달한다. ‘파랑 씨Mr. Blue’라는 호칭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를 마주 보며 흐르는 밥 딜런과 캐서린 피니의 노래처럼,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의 다른 속도에 기대어 나란히 순환한다. 어쩌면 납작이는 K의 죽음 충동을 대신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리도 치환도 아니다. 당신에게 가려고, 더 느리고 천천히 가려고 부단히 흘러온 여정.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 속도를 늦추면서 죽음에 도착한 끝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영원한 운행 기록이다. 1) 이은지는 “문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단발적인 자극과 즉물적인 효능감을 요구받는 문학 창작물에서는 묘사가 희박해진다는 한영인의 논의를 경유하여, 오늘날 문학에서 문체가 점차 고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이은지, 「문체의 역사성과 문학성—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소고」, 『쓺』 2025년 상권, pp. 62~63; 한영인,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pp. 177~78 참조) 2) 권희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정화된 밤』, 문학동네, 2022, pp. 462~63 참조. 3) 전청림은 이 소설이 “환유적 이미지와 의성어, 리듬의 풍부한 활용으로 경계적 글쓰기를 돋보이게” 했다고 평하면서 조시현 소설에 나타난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한 바 있다(「달고 끈적한 체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p. 366 참조). 4) 현호정의 소설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비평으로는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2)」,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강지희, 「세 마리의 새」, 웹진 〈비유〉 2024년 7/8월호, 성현아, 「액화된 몸으로 다시 쓰는 창세기」,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참조.
"누구도 깊은 지옥에 빠져 있는 사람들보다 순수하게 노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천사들의 노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들의 노래입니다."1) - 1920년 8월 26일,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 일부 카프카의 이 문장은 고통 한가운데 있는 존재가 그 고통의 진실을 가장 정확히 노래할 수 있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특히 그가 '지옥에 있는 이들의 노래'와 '천사의 노래'를 포개며 강조한 '순수'는, 어떤 도덕적 무결이나 청정한 영혼을 향한 헌사가 아니다. 고통의 심연이 낳는 진실성과 절실함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윤은성 시의 화자들이 겪는 존재론적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뜨려 내는 노래 사이의 간극을 떠올린다. 윤은성의 시는 일관된 내러티브보다, 기억의 파편과 사물 중심의 인상을 모자이크처럼 배치한 구술 대화 형식이 두드러지는데, 이 시 세계를 더듬더듬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유토피아'가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으로 변해가는 과정의 끔찍함을 새삼 목격하게 된다. 본디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뜻하는 유토피아가 언제부터인가 이상적 사회에 대한 열망이 되어버릴 때, 그리하여 모두가 향하려는 푯대가 될 때, 그 길목에 방해가 되는 요소나 돌출된 존재들을 제거하려는 폭력도 정당화되는 아이러니 말이다. 그렇게 유토피아를 위한 폭력이 용인되는 모순의 길목에서, 시는 덜컥 멈춰 선다. 그리고 묻는다. 왜 유토피아와 폭력은 늘 항상 함께 나타나는가? 유토피아 추구 이후의 세계는 왜 유토피아 기획 이전의 세계보다 너덜너덜해졌는가? 이 물음 안에서 다시금 카프카의 문장을 경유해 보면, 이런 우리마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사들의 노래가 단연 유토피아적 합창이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시는 바로 이 유토피아적 합의 바깥에서, 고통받는 자들만이 들려줄 수 있는 노래를 '순수'의 음색으로 형상화한다. 그런 점에서 윤은성의 시 세계는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원형의 공동체가 지녔던 본원적 조화를 되찾아야 한다는 강박, 즉 유토피아를 향한 집착적 도식이 부재하다는 점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윤은성의 세계에서 조화는 2차적인 결과로만 성립하고, 차라리 불화가 더 자연스러운 상태로 제시되는 듯하다. '조화로운 세계'는 결국 불화를 길들이기 위한 인공적인 요소와 문화적 장치가 이미 개입되어 있는 사후적 상태이기 때문일까. 유토피아니즘이 세계의 모든 불협화음을 소거하고 전체주의적 폭력을 낳으려 할 때, 윤은성은 그 지옥 밑바닥에서 퇴적되고 있는 불화의 감정과 부식되고 있는 비언어들을 끌어내 서로의 '남아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즉 완성된 합창이 아닌, 조율 불가능한 음들이 서로를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불안정한 코러스, 그것이 윤은성의 '순수한 노래'이다. * 먼저 기 발표작 「남아 있는 여름」에서 화자가 변주해 내는 '사라짐'의 교차 상태를 먼저 살펴보자. 시의 도입에 해당하는 1·2연은 어떤 과거나 몽상에 대한 화자의 회상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어, 시 전반에서 가장 미래적 위치에서 진술되는 듯 보이며, "나는 사라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뒤따르는 연들은 대부분 유년의 파편을 모자이크처럼 배열해 도입부보다 더 먼 과거로 후퇴하며, 화자는 '없다/있다/사라졌다/죽었다'와 같은 실존 서술 대신 타자의 상태 '없음/있음/사라짐/죽임'을 "알았다"고 기록한다. 여기선 인식 서술, 즉 타자의 흔적에 대한 관찰적 입장이 강조된다. 특히 "죽지 않은 개, 잡히지 않은 개, 버린 개, 홀로 살아난 개, 뜬 장 밖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개"를 감지하는 대목은 화자가 가시권 밖 생명의 잔존을 깨닫는 장면이다. '뜬 장'조차 그들의 존재론적 조건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어 화자의 "나는 사라지지 않고 뱀에게 나타났다"는 현상 서술까지, 이 모든 서술을 시간순으로 종합해보면, 화자는 (1) 존재의 사라짐을 '인식'하고("사라짐을 알았다"), (2) 소멸과 출현이라는 '현상'을 목격하며("나는 사라지지 않고 뱀에게 나타났다"), 종국에는 (3) 자기 '실존'의 불안정성을 체감하는("나는 사라진다") 흐름 속에 놓인다. 존재의 사라짐과 나타남을 반복적으로 교차시키는 방식은 시 전반에 걸쳐 유지된다. 가령 "옆 마을 돈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 장면에서 화자는 "시가 돼지의 몸으로 타버린 걸 상상"하고, 소각되는 돼지의 육체에 각인되는 시를 목격한다. 이때 화자에게 '시'는 종이 위 문자 형태가 아닌, 고통으로 불타오르는 육체 위에 선연히 각인되었다가 부서진 무언의 메시지다. 그렇게 "글자들이 살에 눌러 붙었다가 부서지는 시간 내내" "타고 있는 시를" 본 경험은 화자에게 있어 '소멸' 중인 문학이 가장 강렬하게 '현현'했던 경험으로 남게 된다. 게다가 화자는 자신의 탄생이 "문화적인 이유", 즉 국가, 사회, 가부장 질서가 요구한 상징적 자리로 호출되었음을 자각할 때 극심한 혐오에 사로잡힌다. 타오르던 돼지를 떠올리며 "내 얼굴과 팔을 자주 더듬었"던 것처럼, 자기 실존에 새겨진 문화적 기호를 자각하는 일은 자기혐오의 "살점들이 차오르는 기분"과 함께 신체화되고, 이는 "붙어서 함께 썩는 시"로 이어진다. 그러나 시는 완전히 다 썩지도 못한 채 죽음 이후에도 증식하는 생명의 잔향이자, 정동적 유령의 형태로 후반부에서 다시 포착된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 부수어"진 건물, 끝내 "담을 다 고치지 못하고" 죽은 아랫집 노인, "내 아이가 담 위에서 놀 때 마침 무너"지는 장면의 교차는 미완의 담장이 결국 세대를 돌아 끊임없이 회귀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아랫집 노인은 죽음 이후에도 "태몽을 자꾸 내게 일러주러" 오는데, '죽은 자'가 반복해서 전하러 오는 '태어날 자에 대한 메시지' 앞에서, 화자는 대가를 제공할 수도, 또 마냥 대가를 받을 수도 없는 양가적 위치에 놓인다. 이때 "덜덜 떨며 풀포기를 붙잡"을 뿐인 화자는, 여름의 생명력과 뜨거운 햇살 아래 끈질기게 증식하는 풀처럼, 자신의 등에서 거세게 재탄생 중인 '시'를 붙잡아 보려는 듯하다. 이처럼 끈덕진 여름의 귀환과 땡볕 같은 폭력적 생존 조건에도 완전히 포섭되지 않고 악착같이 증식 중인 생명은, 세계의 폭력과 동시에 그 폭력 바깥에 아직 '남아 있는' 존재 양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남아 있음'의 양가성은 윤은성의 두 번째 시집 『유리 광장에서』에서도 예고돼 있었다. 가령 수록작 「남은 웨하스 저녁」 속 '엄마'의 "들리지 않는 한쪽 귀에 / 들리는 소리가 / 남아 있는 세계"가 그러하다. 이 진술은 얼핏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여도, "들리지 않는 귀"에도 잔존하는 소리가 있다는 세계의 원리를 암시한다. 또한 「명의 변경」은 "찢어진 곳들은 / 찢어지고 있었고 / 찢어지다 멈춘 곳은 / 찢어지다 멈춘 대로" 남는 세계를 보여준다. 끊임없이 파열되면서도 그 파열에 모조리 다 파괴되지 않는 감각의 찌꺼기, 삶의 조건이 박탈된 곳에서도 온전히 다 박탈되진 않고 '남아 있는' 삶을 말이다. 이에 더해 '남아 있음'을 다시 제목 삼은 신작 「남아 있는 사회」에는 '미친년'으로 불리면서도 춤을 통해 말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동계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가고 있었"던 시절, 화자는 춤을 추지만 가족은 배춧국 속 "숨이 죽지 않"은 배추를 씹으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단지 "입들 속으로 초록"을 삼킨다. 가족의 얼굴은 일상과 생계의 영위를 위해 설익은 국을 바삐 해치우는 침묵의 표정으로 보이고, 여기서 잉여화된 존재(화자)의 춤은 기실 침묵과 억제의 환경이 유도한 감정적 잉여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진술이 이어진다. "내가 춤을 추었기 때문"에 가족들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반대로 화자는 "개의 이마를 만져야 나는 / 춤을 추지 않을 수 /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언뜻 인과적 연결처럼 보여도, 춤의 역전된 주체성을 보여준다. 가족들의 무관심은 화자의 신체적 과잉을 유도하는 반면, 개와의 접촉과 연결은 '나'의 정서적 표출(춤)을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침묵으로 발생한 '나'의 춤은 동시에 그들의 침묵을 강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쇠줄을 목에 달고" 춤의 정동에 유일하게 감염된 개와의 접촉은 가족의 그것과 상반되는 방식으로 화자의 정념을 조율한다. 그러나 화자는 돌연 "짐 없이 홀가분한 / 영혼 하나만 남겨줘야 한다"며 개의 중성화를 결심한다. 앞서 개의 이마를 쓰다듬던 화자가 '돌봄'과 '통제' 중에서 스스로 더 내면화한 '통제'의 언어가 불쑥 튀어나온 순간이다. 이렇듯 생명 정치란 상호 돌봄을 일방적 훈육으로, 애착을 규율로 변질시키는 충격의 순간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신이 너무 많다"는 화자의 탄식처럼 쉽게 판단하고, "두 개의 영육 중 굳이 약한 쪽에 / 생명이 들어선다"는 관찰 아래, 개의 영과 육을 철저히 이분화하며 결과적으론 그 어느 쪽에도 생명이 들어앉을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렇듯 화자에게 '춤'이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최후의 방식이었고 개는 그 증명을 잠시간 보류해 주는 위안이었지만, 그것을 잃은 이후 화자는 "내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게 / 증명이 되지 않아 / 애먹"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 찾아온 여름, 화자는 이제 자신을 어엿하게 "근로를 할 줄" 아는 명랑한 인간이라 규정하지만, "마을의 여자들이 웃다 춤추다 하는 / 또 다른 여름"의 광기와 "개가 뛰다 돌아오다 / 나를 데리고 / 멀리 가기도" 하는 환영 사이에서 다시 한번 '남아 있음'의 의미를 되묻는 듯하다. 이는 통제와 규율의 여전한 자기 보존적 습성을 가시화하면서도, 동시에 '(사라질 뻔했으나) 남아 있고', '(죽임당할 뻔했으나) 남아 있고', '(종결될 뻔했으나) 남아 있는' 존재들, 즉 끝내 제거되지 못한 희망 또한 희미하게 잔존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반면 「저지대」에서 개와 화자의 관계는 다르게 전개된다. 개는 여전히 인간 언어로 응답하지 못하는 동물-타자이지만 "곁에서 / 잠이 들었다가 깨고 꼬리를 흔들고 / 담요를 물어뜯고 / 부르면 놀"라는 몸의 언어로 화자에게 끊임없이 반응한다. 화자는 이 개와 "답 없이 물음만으로도" 대화를 이어간다. 개의 숨소리를 들었지 하루쯤 더 맑은 마음으로 살고 없고 동맹을 맺고 불안해한다 가까스로 구름을 바라보게 되는 들판 우주가 지금도 넘실거리고 있단 것을 매일 새롭게 믿는 어린 과학자처럼 화분에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다시 동맹을 맺는다 눈이 녹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하는 겨울에 개를 데려왔다 그는 무언가 잃어버렸고 - 「저지대」 부분 화자는 "우주가 지금도 넘실거리고 있단 것을 / 매일 새롭게 믿는 어린 과학자"의 낙관을 토대로 "화분에 물을 주고 / 지지대를 세워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는 단지 '돌봄'이라는 정의로 환원되기는 어려운, '동맹'이라는 정치적·계약적 관계로 명명되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 권력관계가 기실 돌봄에 내장되어 있음을 기억해 두도록 하자. 그리고 '동맹'은 서로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모종의 상호 계약이며, 근본적 불안을 안고서 계속 가꾸고 갱신해 나가야 하는 관계이다. 즉 동맹은 어떤 감정적 유대나 윤리적 조건에 앞서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우는 구체적 실천이 선결돼야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와 개가 "다시 동맹을 맺"을 때마다 그들의 관계는 새로 구축되고, 늘상 반복되는 풍경도 그들에겐 "처음 보는 광경"으로 열릴 것이다. "눈이 녹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하는 겨울"은 아직 '개'와 '나'가 함께 발자국을 남겨 본 적 없는 순백의 공간이 되고, 그 위는 "우리가 처음으로 디뎌도 되는 / 눈"으로 가득하다. 시인은 이렇게 완결될 수 없는 윤리를 전면에 내걸고, 동물-타자와의 지속적 질문으로 세계를 조정하려 한다. 신뢰는 매번 점검돼야 하고, 동맹은 갱신의 가능성과 함께 실패의 가능성을 늘 염두해야 할 것이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과 예민함이 연대의 감각을 공들여 구축하게 만드는 윤리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2). 그런 점에서 제목 '저지대'가 지시하는 '낮음'(低)은 곧 동물-인간의 관계 안에서 동물이 인간보다 서열상 아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동물 동맹 자체가 "살고 / 없고"를 반복하는 불안정한 저지대 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조적 폭력의 가능성에 의해 돌봄이라는 지반이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변해갈 때, 윤은성의 노래는 예민한 떨림과 흔들림의 감각이야말로 모든 관계 맺음의 기초 정서임을 순수하게 드러내며 '동맹'을 그 대안적 관계로 제시하는 것이다. 「비 냄새 맡기」 역시 이러한 관계성을 잘 보여준다. 이 시는 도입부터 화자가 "계속 말을 걸"겠노라고 말하고 있기에 언뜻 시 전체가 '말'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처럼 보일 수도 있다. 화자에게 '말 걸기'란 "봄에 태어난 /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정의되는데, 여기서 화자의 '말 걸기'란 단순한 의사소통 기술이라기보다, '외존(外存)'이라는 존재 고유의 습성으로 형상화된다고 보아야 한다. 네가 네 얘기를 해주기 시작하면 또는 말없이 많은 사람 틈을 부딪치지 않고 걷게만 되면. 다져진 땅의 말. 돌 밖으로 가지 뻗는 나무와 새의 말. 다시 먼 육지의 말. 그러다 같이 걷기만 하거나 들어줘서 행복해졌다고 나는 고백할 수도 있고. 가끔은 놀라며 날아가는 작은 새나 꽉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를 보느라 한눈도 팔겠지만. 너무 어려운 일이 많은 날엔 부끄러운 날엔 긴 산책을 조금 더 하면 되지. 그런 것도 듣는 일이 된다는 걸 배우고 또 배워. - 「비 냄새 맡기」 부분 여기서 '말 걸기'와 "네게 온통 귀 기울이는" 청취의 자세는 화자의 몸에 깊이 각인된 존재론적 특질이자 모든 자기 바깥의 존재와 관계 맺기 위한 방법론이다. 그렇기에 때론 인간 언어를 가뿐히 뛰어넘어 "돌의 말, 전기의 말", "다져진 땅의 말 / 돌 밖으로 가지 뻗는 나무와 / 새의 말", 그리고 "다시 / 먼 육지의 말"로 그 채널을 확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화자가 '말'의 가능성에서조차 한 지점 더 나아가 '말'의 대체 가능성을 탐색하는 대목에 주목하라. 말 걸기와 듣기는 "같이 걷기만 하"는 침묵, 다른 사물에 "한눈도 팔"곤 하는 지연, "긴 산책을 조금 더 하"는 유보로도 충분히 대체된다. 단지 여기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제목의 '비 냄새'처럼 자신의 온 감각 체계를 동원해 타자의 존재 양식을 "배우고 또 / 배워"가며 세계 속 '말'의 스펙트럼을 확장해 가는 지속적 훈련이다. * 그러나 이런 훈련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데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지고, 누군가의 숨을 들이마시고, 음식을 나누고, 흥겨운 노래와 함성을 섞고, 어울려 춤추는 행위까지, 모두가 '너'의 감각 체계를 "배우고 또 / 배워"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너'라는 존재에 중첩되어 보기 전까진 몰랐던 '너'의 고통, 생의 끔찍함을 조금씩 분할해 가지게 된다. 저 멀리서 부정적인 감정의 파도가 보이면 일단 회피해 보는 게 미덕이라는, 일종의 '세련됨'을 자처하는 믿음이 부적처럼 통용되고 있는 지금-여기다. 훈련의 미덕은 점점 더 생경해져만 가는 이 땅에서, '굳이' 비틀릴 대로 비틀린 '너'와 '나'의 이음새를 다시 교차시켜 보려는 윤은성의 인물들은 그 자체로 '저항의 형상화'가 될 때가 있다. 이 가운데 '노래'는 화자들의 핵심 제스처다. 가령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유리 광장에서』(도서출판 빠마, 2024)의 「먼 곳에 놓이려고」에는 "접시의 사금파리를 모으며 / 질문 없는 답변을 노래처럼 읊조리고" 있는 화자가 등장한다. 여기서 깨진 접시는 한 여자가 "자신이 말하지 못한 게 무엇인지 / 깨닫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또 무엇인지 / 찾느라" 떨군 찻잔으로, 그 사금파리는 감정의 파편이자 차마 언어화되지 못한 고통의 조각들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이것들을 모으며 노래를 읊조리는 동시에 "들렸다 사라지는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 새벽의 노래는 비록 아침이 되어 "더 작게 바뀌"지만, "질문하는 방법을 모르는 채 아프고 / 아픈 것도 모"르며 자기 역사를 건너온 여성들의 '질문 없음'에 화자가 되돌려준 노래는 그 자체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며, 비발화에도 응답하는 대안 언어가 된다. 「노래할 차례」 속 '노래' 역시 언어를 공유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잇는 신호이자 저항의 언어로 등장한다. 작중의 한 마을은 "소들이 자면서 서로에게 나직한 / 노래를 불러주는 것을 / …(중략)… 평범한 축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느 날 "가장 노래도 잘하고 / 돈도 잘 벌어다 주는 소들이 택해지"며, 마을 구성원 "모두 얼어붙거나 울적"해진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소들이 지친 하루 끝 서로의 감정을 서로의 귀에 들려주는 차원의 의미였고, 여기선 음정도, 박자도, 음색의 조화도 현란한 가창력도 요구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협화음도, 어긋남도, 중단도 허용하는 그 합창은 그들에게 "평범한 축복"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범한' 노래 능력을 보이는 '특정' 소가 경제적 가치로 평가되고, 이것이 소를 착취하는 자본 논리와 병치되었으니, 마을에 슬픔이 깃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벌금형을 받"은 '그'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를 관찰 중인 화자도 있다. 화자는 "소가 하는 말을 천천히 옮겨 / 적"을 줄 알고, "법정에 서기 전" "떨고 있는 그에게" "소들이 편안해 보"인다고 대신 일러준다. 이러한 정황은 인간 언어의 공간인 법정에 서 있는 '그'와 화자의 관심이 여전히 '소'의 고통 유무에 있으며, 그들과 '소'의 정서가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들은 "소와 함께 풀과 과일을 먹지 않았다면 / 알아듣기 어려울 // 선언 이후의 노래를" 진즉 듣고 있고, "노래가 아닌 것은 이제 보이콧 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정이 '그'에게 내린 벌금형과 소들의 노래는 대조적인 자리에 놓이고, 소들의 '노래'를 향한 세계의 선택과 배제 메커니즘은 그들에게 오히려 반항의 결심으로 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보이콧 대상("노래가 아닌 것")은 곧 엄선된 소들의 노래, 인공적으로 기획된 천상의 노래일 것이다. 그러나 "노래가 아닌 것"이 아닌 것, 즉 그들의 '노래인 것'은 서로의 고통과 심연을 나직하게 어루만지는 순수의 합창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선언했던 이들이 집 밖으로 나서"며 시작되고, "이른 아침 / 법원으로 향했던 이들이 마을로 돌아오"며 닫힌다. 이는 법원-마을-법원의 환형 구조가 아침-밤-아침의 시간 구조와 포개어지는 것으로 유추된다. 밤 동안 마을에는 "서로의 먹을 것을 챙기며 노랫말을 생각하는 슬픔들이 / 비밀스럽게 자"라나고, 구성원들은 "전보다 더 가난해"지지만, 동시에 "어떤 친구들은 /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도 한다. 칠흑처럼 어둡고 "끔찍하고 아픈 날들" 속에서 "서로의 눈과 귀를 가려주"는 동안 숱한 슬픔의 정념들은 숙성되고, 이는 "다시 새롭게 불복종할" 힘으로 전환된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다 같이 부르는 노래는 송신자-수신자를 구별하는 '말'과 달리, 송신-수신의 구분이 무화된 '공명'의 형태인 점을 기억해 보자. 그리고 소들의 노래가 '낮'이 아닌 '밤'의 노래라는 점도 기억해 보자. 모두가 서로를 개별적 독립체로 구분할 수 있는 환한 '낮'의 시간보다, 어둠에 둘러싸여 너-나의 구분조차 사라지는 '밤'에 발생하는 소들의 노래는 서로의 목소리를 분유하는 공동의 음성이 된다. 이렇듯 밤의 공명과 정념들의 순환은 윤회하는 리듬 안에서 연대를 끊임없이 길어 올린다. 사실 이 무한한 리듬에 대해서라면, 윤은성은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시집 『주소를 쥐고』의 「정확한 주소」에서 예고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래'가 더는 유효한 어휘가 아닐 때. 손 뻗어 만져지던 것들이 이제는 만져지지 않고. '과거'로부터의 선로는 망가져 앞으로도 믿을 수 없을 때. 저물고 다시 밝아지는 날들의 반복만이 조용히 부식되는 시간을 이해하게 하였고.” - 「정확한 주소」(『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부분 미래가 효력을 잃은 세계에서 윤은성은 미완의 노래로 삶의 조건을 다시 묻는다. 「창문을 열다가」(『유리 광장에서』) 속 "전쟁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와 "외교부를 향해 서서 / 같은 노래를 새롭게 부르다 흩어"지는 사람들, 또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헐뜯는 사람들"의 출현과 산발을 동시에 포착 중인 시인의 렌즈가 이미 그 답을 제출하고 있다. 더 낮은 곳에 유독 더 매서워지는 폭력, 당신들과 따로 또 같이 있어 지옥 같은 삶, "피곤한 잠"처럼 무거운 일상이지만, 어떤 이들은 굳이 힘겹게 "걸어 나와 마음을" "여미고 열"더니, 속수무책 "당신에게로 기울어져" 버린다. 이 기울어짐은 아직 '남아 있는' 불완전한 합창을 우리 삶의 조건으로 가시화한다. 정말 그런 것도 같다. 내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료에게 속절없이 기울어져 입만 뻐끔대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엔 그 소리와 불화하는 나의 곤란한 음색이 한 음 두 음 보태고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가 억압의 궤도를 빠져나가고 있는 클리나멘의 음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 미세한 편위(偏位)의 노래가 폭력의 직선을 비스듬히 기울여 '나'가 "당신에게 안길 틈"을 재차 벌린다. 이 '벌어진' 틈은 어쩌면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벌어진' 가장 순수한 사건일 것이고, 이 사건은 때로 거의 모든 것을 중지시키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지난 겨울과 봄 동안 우리가 무수하게 듣고 불렀던 그 노래, 그리고 아직 남아 매일 밤 우리에게 비스듬히 돌아오고 있는 그 노래처럼. 1)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아포리즘』, 편영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82쪽. 2) 이러한 감각은 윤은성의 시 세계 속 인간-인간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요구되고 있다. 당장 「남아 있는 여름」 속 "종종 나를 안아주거나 나를 버렸"다고 소묘되는 '마을 언니들'과 화자의 관계만 보더라도 그 양상이 확인된다. 그들을 가로지르는 동맹은 숭고하고 매끄럽기만 한 자매애적 연대보다, 서로를 배척하기도 하고 제한적인 조건에 의해 수용하기도 하는 복잡한 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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