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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들 | 2024년 가을호(제77호)

비평·제도·대화 - 최근 비평의 존재 방식 논의에 대한 단상

고봉준 문학평론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고석규 비평문학상(2006), 젊은평론가상(2015), 시와시학 평론상(2017) 수상.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 『비인칭적인 것』, 『문학 이후의 문학』이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 재직하고 있음.

1.

 

편집자의 요청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비평에 대해 짚어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10년간 비평이 새로운 의제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에서 출발해 그 원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나에게 부여된 역할인 듯했다. 추측건대 기획자는 기후, 돌봄, 생태, 동물, 식물, 비인간을 둘러싼 논의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문학적 소재로서 다루어진다는 것 이상의 질문을 담고 있는 비평적 담론이 많지 않다.”1)라는 지적과 의견을 같이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 10년간의 비평에 대한 나의 판단은 편집자의 그것과 조금다르다. 나는 “2010년대 중반이라는 전환기를 통과하며 비평이 다양한 혁신과 쇄신을 모색해왔다”2)라는 진단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 모색의 구체적인 내용은 박동억3)과 장은정4)이 잘 요약했다. 물론 그 혁신과 쇄신의 모색이 문단비평이라는 제한된 범위에 집중되어 문학 바깥과의 연관성이 약했다고 지적한다면 얼마쯤 동의한다. 다만 경험칙 이외의 근거는 없지만 제도에 관한 쇄신과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기후, 돌봄, 생태, 비인간 등으로 집약되는 비인간적 전회(nonhuman turn)에 관한 논의는 우리 시대 최대의 화두이며, 그것은 일찍이 우리가 경험한 적이 없는 규모의 담론이다. 어쩌면 그 엄청난 규모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 제대로 포착되지 못하고 한때의 유행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비평에 있어 지난 10년이 뜨거운 시간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오히려 짧은 기간에 비평적 의제가 너무 많았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다양한 비평적 흐름이 각자의 방향을 좇느라 서로의 주제를 상호 간섭하는 일에 소홀하면서 팬데믹 이전과 이후의 담론 사이의 연속성을 억누르는 의식적단절5)이 존재하느냐에 대해 후속 논의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 같다.

세월호 참사 이후 비평의 흐름을 잠시 살펴보자. 세월호 참사 직후에 비평의 주된 관심은 재난애도문제였다.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의 민낯을 통해 우리가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국가(정부)’의 역할에 대한 물음, ‘애도()가능성을 문학이 어떻게 떠안을 것인가에 대한 사유, 그리고 재난을 매개로 한 공동체적 연대의 구축 등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비평적 응답의 주요 내용이었다. <304 낭독회>는 이 모든 응답의 중심이었다. ‘용산참사-4대강 사업-세월호 사건으로 연결되는 신자유주의적 현실은 문학과 그 바깥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촉발시켰다. 줄곧 문학의 자율성을 외치던 문학인들조차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학과 정치(또는 문학의 정치)’라는 논제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담론적 계기가 되었다. 2016페미니즘 리부트이후부터 최근까지 한국 문학, 특히 비평은 엄청난 속도의 질주를 거듭해 왔다. 이 기간은 문학의 뉴 노멀(new normal)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기간에 수행된 비평 작업에 대한 평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던 문단 시스템에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부정할 수 없다. 신경숙 표절 사태로 촉발된 문학 권력 논쟁,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고은 시인의 성추행 문제, 김금희, 최은영 등의 이상문학상 거부와 윤이형의 절필 선언, 김봉곤과 김세희의 소설에서 촉발된 재현의 윤리 논쟁,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싸고 전개된 젠더/페미니즘/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 이 모든 사건을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하나의 그릇에 담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이 변화의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은 사실이다.

이 글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비평에 대한 비평이 아니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단안에서 발생한 구체적 논란에 대한 뒤늦은 의견 표명도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비평/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이른바 비평적 대화 국면의 방향과 내용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텍스트를 염두에 두고 있진 않지만 넓게 보면 최근의 비평 경향에 대한 소영현의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몇몇 평론가들의 응답, 그리고 그 문제의식을 전유하여 비평적 대화라고 명명되는 흐름에 포함되는 비평이 이 글이 시야에 넣고 있는 전부이다.

 

 

2.

 

우리는 문학장에서 부정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것이 항상 비평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매번 비평이 대중 앞에 소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는 비평이 문학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판단, 따라서 비평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물론 주요 문예지와 문학출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특정 비평가의 책임을 따지는 것과 일반명사인 비평에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무수한 비평가가 고루 책임을 나눈 것”6), 즉 비평가 집단 모두의 책임으로 돌리는 무차별적 평등주의는 사태를 왜곡하기 쉽다. 이러한 문제는 비평이라는 단어를 일반명사로 사용하여 발화할 때, 그래서 비평의 문제가 비평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비평가에게 적용될 때 발생한다. 비평에 관한 담론이 어떻게 이 일반화의 문제를 피할 수 있을까? ‘비평에 대한 비판이 종종 제도의 문제를 경유하여 제기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제도자체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실현되기 어렵고, 특히 어떤 문제들은 아예 선험적 조건”7)으로 받아들여져 사실상 난공불락이다. 그래서 비평에 대한, 혹은 제도에 대한 담론은 언제나 제도자체가 아니라 사람, 즉 주체의 문제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별다른 의심 없이 비평/가가 한국 문학을 만드는 제도에 깊이 관련되어 있”8)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비평가는 늘 권력과 힘,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책임의 주체로 표상된다. 그런데 이때 비평이 제도, 권력, 힘이라고 지칭되는 근거가 어떤 작품이 문예지에 실릴지를 결정하는 것, 어떤 작품이 문학상을 받을지를 심사하는 것은 문학 제도 내에서 비평의 아주 주요한 기능 중 하나다. 문예지에 게재되었던 작품들, 혹은 문예지에 자기 작품을 게재한 바 있는 작가의 작품들, 혹은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책으로 묶여 독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비평이 수행하는 추천심사의 기능은 가히 한국 문학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9)라는 것이라면 책임의 주체로서의 비평가는 사실 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비평가 가운데에는 “2023년에 비평가는 유령이다.”10)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작품에 대해 비평을 쓴다는 것이 괜한 권력 행사처럼 보일까 두려운 마음”11)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줄곧 비평장이 세 층위로 분할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비평 활동을 해왔다. 이들 세 층위를 공간적으로 표현하면 중심, 주변, 그리고 그 바깥 정도가 될 듯하다. (어떤 이는 이러한 공간적 구분을 <백화점-마트-전통시장>이라고 냉소하기도 하는데, 그것보다는 <1-2-아마추어>로 분할되어 작동하는 프로야구 시스템이 더 적절한 비유일 듯하다.)

최근 비평계의 관심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비평의 존재 방식에 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비평 기능의 협소화”12)를 지적하는 소영현과 그 평가에 반론을 제기하는 젊은 평론가(최가은, 이지은, 성현아 등)의 반론이 논의를 견인하고 있다. 소영현은 2000년대 비평을 대상으로 비평의 형질 변경(‘지식인-비평가비평이 작가-비평가비평으로 이동과 그 귀결로서의 기획자-비평가리뷰어의 등장), 비평의 에세이화 경향, ‘비평하는-에 주목하는 비평적 목소리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지은은 소영현은 현재의 비평장을 거대한 몰락의 서사 안에서 이해한다.”13)라고 규정하고 페미니즘적 전회 이후의 비평이 제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비평 정신의 발현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개별 작품에 밀착된 비평은 소영현에게 비평이 권위를 잃고 이론을 물리치고 작품 자체로 내려앉은” ‘비평의 리뷰화에 가깝지만, 성현아에게 이것은 작품으로 흘러넘친 현실로의 거리 좁힘이자 다가섬’”이고, 나아가 새로운 독해의 도구를 길러내려는, 자발적이고도 치열한 비평적 시도이다.”14) 성현아는 최근 비평에 제기된 비판(“다른 이들을 지도하거나 교정하려 들지 않기에 무해하다는 점을 자랑삼는 최근 비평의 경향이 첨예한 비판 정신을 잃고 문학 너머를 성찰하지 못하는 협소한 비평에 머물게 된다는 우려”15))심정적으로 동의를 표시하면서도 비평의 리뷰화 경향 속에 비평가들의 능동적 실천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최가은 역시 자신이 “‘피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으로 비평 활동에 임하는 중임을 강조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비평의 권좌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는 것만이 반드시 좋은 태도’”가 아님을 강조한다.

위에서 언급한 몇 사람을 포함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등단하여 비평 활동을 하는 젊은 평론가들의 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즉 그것을 문학 제도권이 수호해온 문학성을 허물고 문학장을 재구축하려는 시도”16)비평장에 진입한 새로운 주체들이 나름의 지향과 의지를 가지고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활동하는 수행성”17)이라고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 나아가 그들의 글쓰기가 제도와 맺는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구체적인 충돌의 지점이다. “문학장의 재구축이라는 표현처럼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각과 존재하고, 선험적인 제한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능동적 실천”,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활동하는 수행성”, “우리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책임과 실천과 수행같은 긍정적 실천성을 읽어내려는 시각이 존재하는 듯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나는 그것을 지금 판단할 이유가 없고, 아울러 젊은 비평가들의 활동을 제도라는 선험적 조건을 앞세워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주요 문예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비평 지면은 물론이고 문예지 전체의 방향 또한 젊은 평론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 즉 편집위원이 아닌 비평가는 호명에 의해 글을 쓰지만 기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집위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지금은 젊은 평론가들이 주요 문예지를 주도하고 있고, 그들이 선호하는 일군의 젊은 평론가들이 호명의 과정을 거쳐 제도에 안착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행위 일체를 온전히 능동적 실천으로 간주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겠지만, 지금이 비평의 자리가 협소해진 시대라고 해서 비평적 활동 일체를 부정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대학에서의 문학 연구가 그러하듯이, 비평 또한 역사성을 지닌다. 비평 형식은 평론가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비평이 만드는 것주어지는 것사이에서 출현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 즉 현존하는 비평은 이미-항상 복잡한 논리와 욕망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평의 존재 방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최근의 비평적 논의를 읽다 보면 불현듯 자꾸만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사실 소영현이 지적하고 있는 비평의 존재 방식에 대한 문제는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제기된 것들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비평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문제는 곧 제도와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논의에 편집위원’, ‘문학 권력’, ‘위계’, ‘시스템’, ‘문학상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까지 이러한 문제 제기가 대개 콤플렉스의 산물 정도로 치부됨으로써 비평적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반면 소영현이 최근 발표한 비평을 찾아서: ‘K-’ 시대의 비평은 상당한 후속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문학 권력비판에 대한 이전의 반응은 만약 문학 권력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문학 그 자체의 힘이라는 뜻일 것이다. (…중략…) 문학에는 그런 것들을 강제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문학 권력이다.”18) 정도였다. 소영현의 글이 주로 문학과 사회라는 매체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나는 최근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비평가들의 의지와 노력, 예컨대 비평가는 스스로 예속된 주체임을 인식하며 동시에 그 예속화에 저항해야 한다.”라는 진술에 걸려 있는 진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저항은 다짐이나 선언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각종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지목되었던 평론, 특히 주요 문예지를 주도하고 있는 평론가들 또한 비슷한 태도와 다짐을 갖고 비평 활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을 의심하거나 냉소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어떤 이들은 권력으로 지목되거나 비판을 받는다. 결국 문제는 비평장에서, 문단/문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어떻게 저항을 실행할 것인가를 구체화하는 일이며, 이 지점에서 각자의 전략적 선택은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제도의 바깥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일은 쉬워도 제도 안에서, 제도의 부분으로 기능하면서 그것과 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갖는 취약성은 그것이 이미-항상 제도에 포획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즉 제도의 바깥은 그것이 내부화되는 순간 정당성과 힘을 상실한다. 과거 문학 권력비판론자들의 한계도 바로 그것이었다.

비평에 대한 제도의 영향력은 단순하지 않다. 한국에서 비평은 출판저널리즘과 대학, 즉 학계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평론가가 문단학계를 왕래하면서 활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평론가가 영향력 있는 평론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추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이중성은 문단과 학계를 바쁘게 오가면서 활동해야 하는 열정의 문제가 아니다. 주요 문예지에 글을 발표하고 대형출판사에서 평론집을 출간하는 일이 비평가/연구자로서 상징 자본을 쌓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메이저 문예지의 편집위원이라는 상징 자본은 대학에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이것은 과거, 아니 현재에 주요 문예지의 편집위원들이 대학에 자리를 얻은 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90년대 이후 패턴화된 비평가의 생존방식이었고, 이 시스템은 현재에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제도에 저항한다는 것은 곧 상징 자본을 쌓을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의미이다. 대다수 평론가가 주요 문예지의 청탁-원고의 종류와 상관없이-을 거절하지 않는/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제도의 영향력이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읽은 비평에서 발견한 아래의 문장은 비평의 저항과 관련하여 무척 인상적이었다. 제도 안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들이 종종 간과하는,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되어 인용해 둔다.

 

짧게 덧붙이자면 비평장이 공회전한다거나 침체되었다는 진단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동안, 특정한 비평적 경향에서 소외되는 작품들이 생기지는 않았는지를 물어볼 필요도 있다. 가령 문예지의 기획이 계절을 바꾸어 재생산되는 현상은 메타비평적 진단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형성되는 모종의 분위기로 인해 호명될 기회를 점점 잃어가는 작품들의 행방을 묻는 일 역시 중요할 것이다.19)

 

3.

 

제도에 관한 어떤 이야기는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한정된 지면에서 누군가를 언급하는 것은 이미-항상 선별적인 언급이 될 운명이기에 모두를 언급할 수 없다면, 아무도 언급하지 않을 것”20)이라는 이은지의 주장이 그렇다. “비평이 평론가를 소외시킨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평론가로서 그가 경험한 상처와 감정적 앙금의 깊이를 헤아릴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평론가의 비평 행위는 가장 소극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조차 언제나 선별하고 평가하며 불러들이거나 배제하는 제도적 기능을 수행한다.”21)라는 홍성희의 말처럼 비평적 글쓰기는 호명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그 호명은 무대 위의 조명과 같아서 특정한 대상을 비추는 순간 나머지 전체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는 배제의 효과를 낳는다. 그런데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를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누구도 호명하지 않는, 그리하여 모두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선택-배제의 문제를 논리적으로만 이해하면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선택이 항상, 반드시 배제로 귀착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선택이 비평가의 자발적 판단이 아닌 제도의 효과로 행해질 때, 그리하여 비평가 집단의 선택이 몇몇 이름에 집중될 때, ‘선택은 결국 배제의 효과를 낳을 것이다. 최선교가 호명될 기회를 점점 잃어가는 작품들의 행방을 묻는 일이라고 이야기한 것에도 이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비평, 특히 문학장의 문제를 선택의 다양성이 결여된 것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독자들은 주요 문예지와 대형출판사가 저마다의 문학적 기준, 혹은 미적인 지향에 따라 작동한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주요 문예지와 문학출판의 단행본 리스트를 살펴보면 의외로 동질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비평의 선택이 조금 더 적극적이어도 좋을 듯하다. 비평에 있어 공평무사함이 언제나 좋은 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제도의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몇 년 사이에 두 차례 쇄신을 단행한 자음과모음의 사례는 상당히 징후적으로 느껴진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재현의 윤리에 관한 논의를 거치면서 비평은 윤리적 전회를 감행했으며, 최근 비평계의 화두인 대화소통문제 역시 그 연장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비평적 대화라는 흐름을 견인하고 있는 자음과 모음편집위원들의 실험은 제도에 관한 문제를 사유할 때 흥미로운 참조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공유재로서의 잡지의 존재 방식과 그 창조적 분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잡지의 틀에 관해 고민했다. 그 실천 방안의 하나가 편집권 자체를 분유한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이른바 문단의 여러 제도 가운데 꾸준히 비판되어온 것이 바로 편집위원제도의 운용 방식이다. (…중략…) 안팎에서 비판되었던 문학권력이 탄생되는 데도 이 제도가 모종의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편집위원의 권한과 역할을 일부 개방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문학 잡지 기획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중략…) 주제나 지면의 형식도 일절 정해두지 않기로 했다. 인터뷰를 할 수도, 좌담을 할 수도, 작품만 실을 수도 있다. 의제를 자유롭게 제안할 수 있고, 필진도 편집자의 취향과 영향력을 발휘하여 정할 수 있다.22)

 

2019년 여름 자음과모음은 혁신호를 출간하면서 공유재로서의 잡지의 존재 방식과 그 창조적 분유의 가능성을 실험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다소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문예지의 편집위원제도가 문학권력문제와 연결된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편집위원의 권한을 분유하겠다는 것이 이 실험의 핵심이다. 비평은 애초에 문화산업의 일부로 출발했기에 자본의 개입은 개별 비평가나 독자가 극복하거나 물리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선험적 조건”(인아영)이라는 인식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문예지의 존재 방식을 공유재로 설정한 대목은 다소 놀랍다. 이것은 실제로 문예지가 공유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편집위원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유함으로써 많은 문학인이 참여하여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다짐이라고 이해된다. 왜냐하면 commons, 즉 공유지나 공공재는 문턱이 존재하지 않아 누구든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발행 주체와 권한/책임이 명확한 문예지에 문턱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공성 문제는 오늘날 공공미술 분야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가령 정부나 지자체가 예술가들에게 공동의 작업공간을 제공했을 때 표면적으로 그곳은 공공과 공유의 공간이라는 말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공통재로서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활동을 통해 이 공적 공간을 대안적인 성격을 지닌 공통장으로 전유하는 문제가 중요한 이슈인데, 이것은 공유지, 공공재, 공통재 등이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활동을 통해 전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에 비추어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자. 그러면 출판 자본과 편집위원시스템이 결합되어 작동하는 문예지를 어떻게 공통재(commons)로 바꿀 것인가가 편집위원들의 고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음과모음의 제안은 편집위원의 권한과 역할을 일부 개방하는 것이다.23) 물론 이러한 실험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투고제를 시행한 『21세기 문학의 사례나 몇몇 문예지에서 자유 비평 지면을 할애한 것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방은 그 정도와 영역을 결정하는 권한이 편집위원에게 있다는 것, 특히 게스트 에디터제도를 도입해도 게스트를 선발 권한이 편집위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자음과모음편집위원들의 고민과 실험의 가치를 비난할 생각이 없다. 다만 제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현실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자음과모음의 실험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편집위원의 권한과 역할의 축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편집위원의 권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게다가 편집위원이라는 제도의 문제를 게스트 에디터라는 사람의 문제로 치환하면 동일한 문제의 반복을 피하기 어렵다. “필진도 편집자의 취향과 영향력을 발휘하여 정할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결국 (비정규) 편집위원이 한 사람 추가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취향과 영향력에 따라 필진이 결정되는 것과 같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편집위원이라는 제도가 문학권력으로 비난받지 않기 위해 편집위원의 역할과 권한을 축소하는 것,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역할과 권한을 포기하는 방식이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의 비평은 어쩌면 조금 더 힘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그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이 문학의 권력과 위계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화 그 자체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대화를 통해 읽고 쓰는 이들이 함께하는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과 참여, 그리고 삶의 감각과 문학의 경험에 대한 질문과 인식을 불러오는 것이다.24)

 

2023년 여름 자음과모음“4년 만에 다시 작은 혁신을 하면서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라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대화 장치라는 표현에는 한국 문학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평이 대화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이 투영되어 있다. 홍성희는 비평이 중심이 되어 문학에 대한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자음과모음의 제안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전의 혁신호에서 가리고자 했던 비평의 권력적 측면을 오히려 전면화하면서 그 권력을 비평의 효능감으로 직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있는 힘껏 솔직하지만, 권력을 담는 그릇으로 대화라는 단어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재차, 수사적인 방공호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25) 나는 자음과모음이 제시하는 대화가 기만적이라고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대화수사적인 방공호에 불과한 것인지는 당장에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화적 비평, 혹은 비평적 대화의 긍정성이 어느 정도 열려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비평적 대화가 궁극적으로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과 참여를 위한 것이라는 지점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저기에서 이야기되는, 그러니까 비평적 대화를 통해 구성되어야 하는 동시대 문학의 범위가 어디까지일지, 그것이 몇몇 대형 문학 출판사와 거기에서 발행하는 메이저 문예지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일지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동시대라는 개념이야말로 한낱 수사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미 존재하는 것을 굳이 대화를 통해 다시 구성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화가 아니라 불화로 나아가야 한다”26)라는 지적은 설득력이 크다. 오늘날 우리가 비평에 대해 이야기할 때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들, 이른바 선험적 조건처럼 주어진 것들에 대해 질문하지 못할 때, 동일한 문제가 반복적으로 되돌아오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 1) 소영현, 「비평을 찾아서: ‘K-’ 시대의 비평」,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19쪽.
  • 2) 강동호, 「대화적 비평을 모색하며」, 계간 『문학과 사회』 2023년 가을호, 33쪽.
  • 3) “평론가들은 페미니즘과 퀴어 담론뿐만 아니라 정동, 포스트 휴먼, 인공지능, 생태주의와 같은 의제에 예민하게 반응해왔고, 그와 관련된 사례와 작품을 세심하게 접근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박동억, 「누구에게 말 건넬 것인가」,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285쪽.
  • 4) “2020년 팬데믹 이후, 비평장의 논의는 크게 세 가지로 뻗어나가는 듯하다. 팬데믹을 기반으로 한 기후 위기와 비인간에 대한 재인식, 인간 사회 속에서의 돌봄, 그리고 2018년부터 본격화된 에세이 열풍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장은정, 「연대 실패」, 웹진 『비유』 63호, 2023.3.
  • 5) 장은정, 같은 글.
  • 6) 박동억, 「누구에게 말 건넬 것인가」,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289쪽.
  • 7 인아영, 「다가오는 것들」, 계간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287쪽.)
  • 8) 진송, 「한국문학에서 동시대적 화자의 재구성」, 웹진 『비유』 64호, 2023.12.20.
  • 9) 같은 글.
  • 10) 위의 글에서 재인용.
  • 11) 김정빈, 「비평가의 권위와 전문성, 그리고-」, 웹진 『비유』 34호, 2020.09.29.
  • 12) 소영현, 「비평을 찾아서: ‘K-’ 시대의 비평」,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15쪽.
  • 13) 이지은, 「라운드어바웃」,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56쪽.
  • 14) 같은 글, 59쪽.
  • 15) 성현아, 「비평(非平)한 비평(批評)」,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28쪽.
  • 16) 같은 글, 34쪽.
  • 17) 인아영, 「다가오는 것들」, 계간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286쪽.
  • 18) 권희철, 「눈동자 속의 불안-2015년 가을호를 펴내며」, 계간 『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
  • 19) 최선교, 「대화의 조건-『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를 읽고」,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33쪽.
  • 20) 이은지,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77쪽.
  • 21) 홍성희, 「두께만큼 깊은」,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12쪽.
  • 22) 안서현, 「새로운 ‘자음과모음’을 열며」, 계간 『자음과모음』 2019년 가을호, 4쪽.
  • 23) “문학평론가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한 출판사에 모여 기획과 청탁을 통해 문학 담론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뒤엎을 수 없다면, 완전히 열려 있는 일부 지면을 통해 그 폐쇄성을 극복해보고 싶었다.” 노태훈, 「게스트 에디터를 닫으며」,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봄호, 4쪽.
  • 24) 안서현,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4쪽.
  • 25) 홍성희, 「두께만큼 깊은」,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18쪽.
  • 26) 박동억, 「누구에게 말 건넬 것인가」,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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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정원 슬픔에 대한 주석 ― 류근,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 『에게서 에게로』(2024) 그 사이 어디쯤

1. 주석으로 남은 말  끝내 말하지 않아서,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은 완결되지 않는다. 미완성의 일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자이가르니크 효과—물론 심리학적 개념으로서의 정확한 정의는 다르지만 미완이라는 상태가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연민과 응시의 감각. 시는 언제나 그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에 머무르며 우리를 흔든다.  비평이 그 흔들림을 정리하고 서열화하고 요약하는 방식으로 시에 접근할 때 무언가는 반드시 누락된다. 나는 그 누락된 자리,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문장 곁에 남겨진 것들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를 설명하지 않는다. 해설하지 않는다. 다만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자리에 주석처럼 붙는다.  최근 우리 비평은 점점 더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세이적 비평, 1인칭 비평, 자기 서사의 회복. 그것은 오랫동안 구조적 불투명성 속에 머물렀던 비평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시도이며,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들이미는 행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어떤 문장은 오히려 '나'의 감정을 철수시키고 대신 더 오래 응시하고 더 천천히 다가가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바로 그 요구에 응답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거의 모든 비평이 한 편의 시 앞에서, 시가 말한 것과 침묵한 것을 민감하게 감지하려고 문장 옆에 오래 머무르고 부단히 응시한다. 비평은 이미 '시 앞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 비평의 부단한 출발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비평이 도달하기 위해 설정해둔 목적지를 '전달'이 아닌 '증명'으로 다시 지정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통과해 독자에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미에 도달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결정이다.  그 결정은 말을 침묵으로, 해석을 응시로, 감정의 진술을 주의의 태도로 바꾸는 형식적 전환이며, 동시에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작은 목소리의 윤리적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석적 평론은 단지 명명적 발명도, 마케팅 수사도 아니다. 그것은 평론이라는 장르 안에서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던 어떤 잠재적 가능성, 기존의 비평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었던 윤리적 감수성의 방향성을 명시화하고자 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요청하는 한 명의 윤리적 독자로서 실험해본 기록이다. 한 발 늦은 문장으로, 아니 애초에 너무 일러서 말을 멈춘 문장으로.  1인칭 비평이 감정의 진폭을 밀어 올리는 고백이라면 주석적 평론은 거리를 유지한 채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을 문장의 그림자처럼 걸어두는 일이다. 그래서 주석적인 평론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 글쓰기다. 나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문장의 여백에 오래 머물며 침묵의 밀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주석적인 문장은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 깊은 곳을 통과한 언어이며 끝내 도달하지 못한 말의 끝자락이다. 내가 머문 시간만큼 이 문장은 스스로의 침묵을 완성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시처럼 쓰인다. 끝내 말해지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떤 시 앞에 주석처럼 붙을 것인가. 나는 류근의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를 선택했다. 한 시집은 등단 후 18년의 침묵 끝에 도달한 첫 문장이며, 다른 한 시집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언어의 경계를 탐색하는 시도다. 두 시집은 서로 다른 시차와 온도를 지녔지만 공통적으로 '말할 수 없음'과 '도달하지 않음'을 전제한 채 끝내 문장을 선택한다.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도착하지 않을 말을 계속 써 내려간다.  단지 감정의 양태나 표현 방식이 다른 게 아니다. 류근은 고백한다.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상처적 체질』, 「어떤 흐린 가을비」)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가 언어화되는 순간—누군가에게 들리는 순간—속되게 소비될 운명을 자각한 시인의 언어적 체념이자 그 감각의 응축이다. 『상처적 체질』의 슬픔은 그래서 '진짜'이기를 포기한 슬픔이다. 표현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끝내 표현되는, 그래서 감각으로만 읽힐 수 있는, 어떤 내부로 굴절된 상처의 언어다.  그러나 이 언어는 김근의 시 앞에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김근은 말한다.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 「에게서 에게로」) 상처는 폐쇄되지 않고 이동한다. 김근의 시 속 상처는 정적인 고통이 아니라 방향과 운동을 가진 감정이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하나의 문장 속에서 다른 구절로 옮겨가는 관계적 감염이다. 여기서 상처는 타인의 것으로 흘러들고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 흐름은 류근이 거부한 바로 그 순간, "함부로 눈이 마주친" 순간(「어떤 흐린 가을비」)에서 출발한다.  김근의 시는 류근의 시를 주석한다. "왜 당신은 상처를 자기 안에만 가두는가?" "그 상처는 타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는가?" 김근의 언어는 묻지 않으면서도 되묻는다. 류근이 선언한 '삼류화된 감정'은 김근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더는 감정이 중심이 아니라 감각의 궤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화한다. 고백은 더 이상 정서의 진실이 아니라, 감각이 거쳐간 자리의 구조가 된다. 이 전환은 해석이 아닌 잔여이며, 문장이 말한 것보다 문장이 말하지 못한 것에 머무는 응시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김근의 시 또한 류근의 시로부터 되묻는다. 타자에게 흘러간 감정은 끝내 다시 돌아오는가? 관계는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는가? 『상처적 체질』의 음울한 자족성은 『에게서 에게로』의 관계적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에게서 에게로』의 파열된 리듬은 『상처적 체질』의 감정 구조를 되틀어보게 만든다. 김근의 '관계적 감각'은 류근의 '내면적 구조'를 질문하고, 류근의 '리듬화된 감정'은 김근의 '언어 바깥의 감정'을 불러낸다.  서로는 서로를 주석한다. 그러나 그 주석은 해설이 아니다. 불완전한 해석, 조각난 반응, 때로는 비틀린 되비침이다. 그렇게 두 시집은 하나의 장(場)에서 서로를 반사하며, 상처의 정의를 확장하고, 감정의 구조를 해체한다. 『상처적 체질』은 침묵의 주석이 되고, 『에게서 에게로』는 운동의 주석이 된다. 이 두 주석은 평행선을 그리듯 가까스로 닿지 않는다. 독자는 그 사이의 긴장에서야말로 오늘의 시가 상처를 견디는 방법을 다시 배운다. 2. 응시의 독법—감각의 작동 방식  감정은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대부분 재현되지 않는다. 감정은 말해지기보다는 누락되고 언어는 그것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지연된 리듬으로 감각을 구성한다. 시는 종종 말해지지 않은 감정에 가닿기 위해 언어를 미루고, 여백을 건너며, 때로는 되묻는다. 말보다 오래 남을지도 모를 감각. 언어로는 끝내 증명되지 않을 감정의 궤적. 예컨대 김근의 「정류장」은 그러한 감각의 실패와 구성의 시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가 말했다. 나도 한때 들판이었던 적이 있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빈 들판이요. 고독하지도 않은데 이것참 남세스럽군, 정류장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다.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생각해보시오. 곡식들은 저마다 열매를 매달고 눈부신 햇빛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삽 같은 농기구를 어깨에 걸치고 농부 하나가 들판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냇물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을 거요. (……)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빈들판이 되자마자 나는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떠올릴 수 없게 되어버렸소. 들판이었던 때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소. 빈 하나만 내 몸에 달라붙었을 뿐인데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내게 끼얹어질 줄은 차마 몰랐지 뭐요. 그때 등뒤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 두 개가 빛을 내고 있는 게 보였다. 길고양이일 것이 분명했지만 왠지 그 눈빛의 주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으로만 자꾸 생각되었다. 한 쌍의 눈빛은 이따금 동시에 깜박거렸다. 눈을 감을 때 짐승은 거기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히는 것처럼. (……) 처음부터 내가 기다렸던 게 버스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딘가로 가야 한다. 여긴 정류장이니까. 정류장을 버리고 정류장 혼자서 기다리라고 내버려두고. 나는 짐승의 눈빛 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어쩌면 이 시답잖은 알레고리의 바깥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내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이내 눈빛은 사라졌다. 다시 눈뜨지 않았다. 다시 아무것도. 당신은 너무 일렀거나 너무 늦었소만, 그곳에 눈빛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다시 그곳은. 없어졌다. 다시 바깥은. 빈 들판이 되기에도 빈이 되기에도. 그의 목소리만이 어둠처럼 끈질기게 내 귀를 잡아당겼다. —김근, 「정류장」 부분  빈 들판이 “한때 들판이었던 적”을 회상할 때, 그것은 단지 지나간 풍경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다. 그 회상은 수동적으로 과거의 감각을 재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현재와 미래의 감각의 재생 버튼은 자동적으로 눌린다. 회상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비어 있음’과 과거의 ‘비어 있지 않음’, 들판과 들판이 아닌 무엇, 그리고 그것 아닌 어떤 무엇으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들뜸 없는 기대, 또 그외의 어떤 개연성 없는 감각들이 점철되어 있다. 이 모든 감각을 하나로 이르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이 그리움은 실제로 있지 않았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일’에 대한 미련과 연민의 정서를 일으킨다. 그는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끼얹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그 감각은 실상 여기에서, 있지 않았던 감각을 일으킨다. 있지 않았던 감각에 대한 감각은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내 몸에 각인된다. 경험하지 못한 꿈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에 존재론적 분열을 치유하는 어떤 시에서의 상징처럼 말이다. 그곳에 있었다고 믿는 감각은 어느새 “정말 있었던 것”으로 몸에 각인된다.  그러니까 감각은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그 구성은 언제나 ‘빈’에서 시작된다. 상실의 자리에서, 결여의 틈에서, 감각은 다시 만들어진다.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다. 과거를 새로 쓰는 방식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감각이 실재처럼 작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각이 과거에 근거한 증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시하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기억의 소환이 아니라 발명의 발견이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무언가를—사실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무언가를—끝내 구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이 없던 자리를 통해서만 진실에 닿을 수도 있다.  김근이 감각을 작동 시킬 때, 어떤 시들은 조용히 풀어진다. 감각이 말을 밀어내고, 말이 감정을 넘긴다. 그떄 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진실에 닿는다. 어떤 누명을 벗어낸다. 벗겨진 시는 우리를 더 예민하게 만들고, 예민한 감각은 더 오래 응시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이 글은 감각이 언어보다 앞서 있고, 시는 그 감각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비평적 실천이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류근, 「독작(獨酌)」 전문  재회를 믿었고, 새끼 손가락 꼭 걸었다. 그러나 사랑은 또다시 나를 떠나간다. 그때의 같은 자리에 거듭 새겨진 상처는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헤어짐의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고 고통의 반복은 그 감각을 무디게 만들지만 상처는 항상 새롭게 많아지거나, 깊어지거나, 비대해 질 것이다. 그건 너도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우리 지독하게 사랑한 만큼 지독하게 마음 먹고 단숨에 헤어지자. 라고, 예전의 나였으면 이 시를 이렇게 읽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완벽히 지워내겠다는 감정의 독단처럼 들리도록 해석해버리기. 혼자 술을 퍼마시며(독작) 이별을 조금 멋스러운 쓸쓸함으로 포장하고, 새벽녘 sns에 올렸다가 다음 날 조용히 삭제하는 글처럼, 대학교에 하나쯤 있을 법한 센치한 선배처럼 만들기. 이런 해석은 정말 우리가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모든 이별에 대한 실례일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진폭을 서술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제는 좀 더 감각적으로 읽어보자. 자신의 감각을 믿고 문장 옆에 더 오래 머무르면서 응시하는 몸의 언어로 말해보자. 재회를 믿었을 때, 재회를 기약했을 때, 당신의 감각은 어땠는가. 만남의 끝이 결국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나는 예외일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을 것이다. 모종의 다짐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건, 감각을 잊어서도, 무뎌져서도, 그것이 멸해서도 아니다. 그 감각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감각 버튼을 누르고 그에 따라 자동 재생되는 진실된 감각을 말해보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었던 사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얼굴조차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공간 속 특정한 날씨와 냄새, 그리고 그 배경에 깔렸던 음악 같은 것.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들이 몸 안에서 어딘가 동시에 켜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직접 떠올린다기보다, 그 사람과 얽힌 감각들의 궤적을 따라간다. 이 궤적은 항상 비선형적이다. 마트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팝송의 한 소절, 커피잔을 내려놓을 때 손가락 끝에 전해지던 찻잔의 온기, 아니면 그 사람의 코트에서 나는 먼지 섞인 향수의 마지막 노트. 그때 그 사람을 떠올렸던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감각’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는 선언은 자동 재생된 감각 앞에서 질문으로 변모한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어?’라고. 이 되묻기의 순간에 감각은 문장을 바꾼다. 반문이 아니라, 반향이다. 믿었던 그 미래, 품었던 그 목소리, 붙들었던 그 감각—그것들은 단지 실패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감각의 총체였다. 그리고 그 총체는 말로는 남지 않았지만, 끝내 당신의 몸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다. 감정의 절단처럼 들렸던 류근의 언어는 김근의 감각의 구조를 통과하면서 절단이 아니라 잔류였음을 드러낸다.  시가 말한 것보다, 시가 말하지 않은 여백, 그 여백에서 다시 떠오른 감각, 그 감각으로 인해 드러난 문장.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3. 에게서, 체질로—감각의 회로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은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거듭된 상처의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류근, 「상처적 체질」 전문  “상처적 체질”이라는 말에서 먼저 떠오른 건, 어쩐지 비관적인 단상들이었다. 체질이라,—그 말은 어딘가 책임을 유예하는 언어처럼 들린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변명, 몸에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정서적 면책을 꾀하는 일.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운명론. 언뜻 상처를 내면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몸의 감각에게 모종의 중압감을 짊어지게 하며 고통의 근원을 흐리고 상처의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처의 열망”이니, “거듭된 상처의 폐허”니 하는 미학적 언어는 상처 입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미화된 언어, 즉 자기방어의 수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이 시가, 상처는 체질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감각은 그 체질 속에 갇힌 반복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상처에 대한 일종의 면책 기록일 것이다. 그때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말 거대한 병원이고, 시란 그 병증일 수밖에는.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체질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감각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구조다. 이 시에서 말하는 상처는 어떤 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반복되는 감각의 축적이고, 그 축적의 양상이다.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는 말은 그래서 사건의 인과를 제거한다. 상처는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닿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시인은 감각의 구조를 발화한다. 그것은 하나의 감각이 끝나지 않고 반복될 때, 다시 말해 상처가 현재진행형의 감정이 될 수 없을 때 그 감각은 고체화된다. 말하자면 감정은 굳어지고, 감각은 구조가 된다. 그 구조는 “체질”이다.  하지만 체질은 감각이 멈춘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되어, 말해지지 않으면서도 끝내 몸에 남아있는 상태다.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는 상처는 모두 감각으로서 켜켜이 쌓여 체질이 된다. 체질 때문에 고통은 받아도, 체질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끝내 생존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그 유명한 말, 너무 유명해서 통속적인 명언이 되어버린 그 말이 체질의 비유가 될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상처적 체질이라는 그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도, 상처를 잘 준다는 것도 아니라, 단지 감각이 만든 문장으로서 상처를 잘 살아내고 있다는 감각 구조의 이름이다.  정리하자면 류근의 언어는 감각을 하나의 구조로 고정한다. 반복되는 상처의 리듬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상처가 감각으로 응고된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 감각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류근의 체질은 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을 내부에서 되씹고 되풀이하는 구조이지, 타자와의 접촉에서 열린 흐름은 아니다. 그는 감각의 ‘패턴’을 만든다. 하지만 그 패턴은 고립된 채 순환하고 있다.  반면 2부에서 김근이 보여준 감각 구조는 그와 다른 흐름을 구성한다. 김근은 감정을 선형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의 감각을 구성한다. 그는 실재하지 않은 과거로부터 감정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감각은 말해지지 않은 말, 망각된 장면, 잊힌 풍경 속에서 돌연 작동한다.  그리하여 류근의 감각은 되풀이되는 내부의 리듬이고, 김근의 감각은 되살아나는 외부의 흔적이다. 체질이 되기까지 감각은 응축되고, 되살아나기 위해 감각은 분산된다. 두 감각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의 회로를 완성한다. 말해지지 않은 말, 기억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응시된 감각이 하나의 회로로 엮이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감각은 더 이상 한 사람의 내부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시로, 다른 몸으로, 다른 말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회로 속에서 감정은 해석되지 않고 다만 응시된다.  이제 우리는 그 응시의 방식, 감각의 회로 속에서 김근의 시 「서러우니, 아프니,」(『에게서 에게로』)를 다시 읽어본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끝내 문장이 되지 못하고 중얼거림으로 남아 있는 시, 그 바깥에서만 감정이 반응하는 시. 감정의 진술이 실패한 자리에 감각이 어떻게 잔류하는지, 그 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자.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가 교접하는 꼴을 지켜볼 참이었는데 서러우니, 는 어느 문장의 교접에서 빠져나와 여기 있나 아프니, 는 (……)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 바깥은 아리고 아리더라는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이게만 서러우니, 아프니, 바깥도 나도 당신도 완성되지는 결코 않고, —김근, 「서러우니, 아프니,」 부분  이 시는 문장이 완성되기 직전, 혹은 완성되지 못한 채 파열되는 리듬 속에서 감정의 부재를 감각의 형태로 전환한다. “서러우니,” “아프니,”라는 말들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정이 언어에 들어서지 못한 채 멈춰 선 쉼표의 흔적이다.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하고, 문장은 감정을 담지 못한다. 그때 남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감각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비문법적인 어형, 중얼거림, 반복과 흔들림 속에 잔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감각들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문장 바깥에서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감정의 발화 실패가 곧 감각의 작동 개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고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다. 감각은 문장 밖에서 흐르고, 그 흐름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패턴이 된다. 이 패턴은 류근의 시가 말한 ‘체질’처럼 하나의 리듬 구조로 굳어지기 직전의 상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떻게 감각의 회로를 만들고 있는가. 류근이 고정된 감각의 구조(체질)를 말한다면, 김근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흘러다니다가 다시 몸 안에서, 말 바깥에서 감각으로 발화되는 장면을 기록한다. 하나는 응고된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지점—말하자면, 감정이 말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 깊이 감각되고, 감각이 언어 바깥에서 반복되며 하나의 회로를 만든다는 이 감각의 순환 구조—가 이 글이 추적하려는 “감각의 회로”다.  김근의 시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는 감각이 단일 주체 안에 고립되지 않고 ‘너에게서 또 다른 너에게로’ 흐르는 관계적 회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어떤 ‘나’의 내면에서 발화된 것이 아니라, 이미 ‘너’를 통과해 온 감각이며, 또다시 ‘다른 너’를 향해 옮아가는 언어적 궤적이다. 이 감각은 멈춰 있지 않고 전이되며, 감정의 기원이 아니라 감각의 운동성으로 시를 구성한다. 너는 언제 눈이 멀까 네 입술의 거스러미들이 일어난다 네 말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고 나는 끝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로 이곳은 범람한다  감정은 여기서도 ‘말해지지 않음’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서러우니, 아프니,」에서의 말해지지 않음이 문장 바깥의 정지라면, 「에게서 에게로」의 말해지지 않음은 감각의 흐름이다. 그것은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이 범람하는 풍경이고, 이 범람은 감정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감각의 홍수다. 고백이 실패했기 때문에 감정은 여전히 감각으로 유예되고, 그 감각은 관계 속에서 옮아간다.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감각의 패턴이자 언어적 관계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류근의 감각이 몸에 각인되어 고체화된 것이었다면, 김근의 감각은 타인의 말에 의해 범람하고 이동하며, ‘자리를 잡지 못한 말’로서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의 회로는 감정의 전유가 아니라 감정의 유실을 전제로 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 감각은 계속 이어진다.  감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를 통과한 감각은 언제나 ‘너’를 향해 열려 있고, 그 감각이 언어를 통해 완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 감각을 감지하고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관계 속에서 돌아오고, 흘러가고, 감염된다. 그것이 감각의 회로이고, 시가 끝내 감정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결국 이 글은 감정을 진술하지 않기 위해 감각을 오래 붙잡았고, 감각을 붙잡기 위해 시에 더 오래 머물렀다. 우리가 읽어온 시들은 감정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이 감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조용히 보여주었다. 상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남긴 리듬을 반복했고, 말하지 않은 감정이 어떻게 감각으로 번역되는지를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그 반복과 전이의 흐름 속에서 감각은 체질이 되었고, 체질은 끝내 관계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감각의 회로는 단일한 자아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늘 ‘너’의 존재를 전제하고, ‘또 다른 너’에게로 건너가는 경로다. 시는 그 경로를 하나의 언어로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말들,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 도달하지 못한 언어의 잔해들 속에서 더 정확하게 살아 있다. 비평이 그 잔해 앞에 머문다면, 그것은 해설이 아니라 응시이고, 설명이 아니라 기다림이며,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각의 지속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을 추적하려 했다.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설명이 아니라 구성된 흔적을, 하나의 완결이 아니라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반복을. 그리고 그 반복의 한 가운데에서 시는 말해지지 않았던 사랑을 다시 감각하게 한다. 감각은 다시 살아 있는 문장이 된다. 4. 감각 이후의,  시대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마저 예의주시한다. 상처는 쉽게 고백되지만, 그 고백은 종종 감각되기 전에 소비된다. 이미지로, 이모지로, 몇 초 만에 반응하는 감정의 압축된 형식 속에서 슬픔은 감정 이전에 태그가 되고, 상처는 경험 이전에 서사화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간 속에서, 말함은 곧 존재의 증명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슬픔은 말한 뒤에도 남고, 상처는 고백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자주 말하는 일만이 아니라, 더 오래 감각하는 일이다. 말함은 윤리의 출발이지만, 감각은 그 윤리가 지켜지는 방식이다. 말함이 고통의 첫 번째 증명이라면, 감각함은 그 증명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두 번째 언어다. 이 글은 그 두 번째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묻는다.  하여, 묻게 된다. 감각한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해지지 않은 것의 윤리를 오래 응시했다면 이제 그 감각의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로이 감당해야 하는가. 이 글은 끝내 말해지지 않은 어떤 문장 옆에 머물렀고, 그 여백의 떨림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말하라고 한다. SNS에서, 인터뷰에서, 기록에서, 고백의 형식에서—슬픔은 표현되기를 요구받고, 상처는 빠르게 이해되기를 강요받는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대,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자주 망각된다.  우리는 안다. 상처는 말해져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상처는 더 깊은 침묵으로만 남았고, 그 침묵은 누군가가 말하기 전까지 결코 메워지지 않았다. 또한 안다. 말은 때로 너무 빨리 잊힌다.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감각은 증발하고, 감정은 마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무거운 감각이다. 그 감각이 말을 떠받치고, 그 말이 끝내 다시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윤리의 회로. 이 글은 그 회로를 만들기 위한 다만 아주 작고 느린 실험이었다. *부록  시가 감정의 언어라면, 그 감정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동일한 슬픔도 같은 말로는 다시 불릴 수 없고, 같은 고통도 똑같은 문법으로 말해질 수 없다. 시는 종종 세계보다 한 박자 느리게 도착하지만 때때로 세계보다 먼저 아프다. 세계가 아직 체감하지 못한 감정을 시는 미리 감각하고 그 감각의 구조를 가장 먼저 언어화한다. 그래서 시는 지나간 감정을 말하면서도, 다가올 슬픔을 증언하는 언어다. 이 평론이 주석한 류근과 김근은 그 감정의 시간성에서 서로 다른 리듬으로 같은 고통을 구성해낸 시인들이다. 류근은 감정을 반복과 리듬의 구조로 정제했고, 김근은 실패와 결여의 구조 속에서 감각을 잔류하게 만들었다. 이 부록은, 그 두 언어의 병렬을 통해 우리가 어떤 감정을 어떻게 말해왔고, 어떻게 끝내 말하지 못했는지를 복기하려는 시도다.  2010년대 전반의 한국 시는 고백의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발화하기보다는 정제된 이미지와 절제된 문장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는 일상의 슬픔을 산문시와 서정의 경계에서 절제된 말투로 조직했고, 하재연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2012)은 침묵의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며, 감정의 과잉 대신 감각의 압축을 선택했다.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는 원래 1995년 출간되었지만, 2014년 복간되며 재조명된 이후, 감정의 리듬을 신화적 상상력과 병치해 해체한 언어로 다시 독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감정을 고백하거나 날것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응축하고 조율하려는 윤리를 견지했다. 감정은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 속에 미루어지고, 독자는 감정의 진폭이 아니라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감정의 미학이자, 서정의 윤리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시의 문법은 균열을 맞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적 감정은 언어에 대한 회의와 감정의 발화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고, 시는 감정의 고백보다 감정의 불능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안미옥의 『온』(2017)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가장 조용한 언어를 실험하며, 감정을 직접 호명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 자체를 오래 응시한다. 이소호의 『캣콜링』(2018)은 페미니즘적 시선을 통해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각하게 하는 시학을 구축하며, 사회 구조 속 침묵의 감정을 가장 급진적인 형식으로 표출한다. 언어는 더 이상 감정을 담는 그릇이 아니며, 감정은 더 이상 말로 재현되지 않는다. 시는 감정의 실패를 감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가 모두 파열로만 향한 것은 아니다. 김행숙, 이문재, 김복희 같은 시인들은 여전히 정제된 말 속에서 감정을 환기하며, 느린 서정의 리듬으로 시대를 반사했다. 심보선, 장이지, 함기석 등은 형식을 실험하면서도 감정을 비틀거나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서정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결국 이 시기의 시는 파열과 구조화, 고백과 침묵, 직접화와 간접화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다층적 국면이었다.  202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시는 감정의 언어를 더욱 신중히 의심하게 된다. 감정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기보다, 애초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감정은 문장 바깥에서 흔들리고, 잔류하며, 실패한다.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는 그 전환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감정은 이제 고백되지 않고, 시는 감정의 실패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쉼표, 중단된 구절, 어긋난 문법은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 방식을 감각하게 한다. 감정은 주체 내부에서 고립되지 않고,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한다. 감정은 감염되고, 옮겨지고, 끝내 다시 말해지지 않는 자리에서만 증명된다. 이 시집은 감정이 말해지지 않음으로써만 말해질 수 있다는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감각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이 2010년의 류근과 2024년의 김근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어떤 대표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둘은 각자의 시기를 압도한 시인은 아니지만 각자의 시기가 요청한 감정의 구조에 가장 날카롭게 반응한 언어들이었다. 류근은 감정을 리듬과 반복의 구조 속에서 조율하며 상처를 체질화했고, 김근은 감정의 결여와 실패를 끝내 감각으로 환원하며 언어의 파편 속에서 응시했다. 하나는 감정의 정제이고, 하나는 감정의 잔류다. 이 둘이 나란히 놓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병렬 속에서 지금-여기의 감정 구조가 어떤 언어를 필요로 하는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  이 글은 바로 그 물음의 옆에 붙는 문장이다. 시를 해설하지 않고, 감정을 분석하지 않으며,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각의 흔들림에 오래 머문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응시다. 주석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언어가 어떻게 시대의 문장을 바꿔왔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하나의 문장.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도,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에도, 여전히 문장 바깥에 남아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이 결국 언어를 다시 부른다는 것. 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계간 문학들 정원 응시감각상처주석윤리 2025
송현지 대화의 기술 — 이혜원, 『고백의 파동』 (파란, 2024)

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계간 현대비평 송현지 이혜원고백의파동대화경청지형학적비평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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