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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지션 | 2024년 봄호(제45호)

비(非)체험과 세계의 탈(脫)-구축 ㅡ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 읽기

고봉준 문학평론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고석규 비평문학상(2006), 젊은평론가상(2015), 시와시학 평론상(2017) 수상.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 『비인칭적인 것』, 『문학 이후의 문학』이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 재직하고 있음.

 

1.



  밀란 쿤데라는 서정성은 자신의 고유한 영혼과 그 영혼을 들려주고 싶은 욕망이라고 설명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에 대해 쓸 때에도 자신의 초상을 만드는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텍스트의 안과 밖, 혹은 시인과 화자 사이에는 특수관계가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시인과 화자는 별개의 존재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고, 역사적으로 이 특수관계를 끊으려는 다양한 문학적 실험도 반복적으로 행해졌다. 하지만 시에는 여전히 이 연속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기형도의 화자가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빈 집」)라고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텍스트 안에서 말하는 ‘나’와 텍스트 바깥의 ‘시인’, 즉 기형도를 동일 인물로 경험하면서 읽는다. 문학 교과서는 시는 허구(‘시적 허구’)의 일종이고, 시인과 화자는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고백’이라는 특유의 시적 장치로 인해 독자는 여전히 화자의 목소리를 시인의 복화술로 인식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시인과 화자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대답은 교과서적이긴 해도 설득력이 크진 않다. 시인과 화자가 같지 않다는 사실이 그들 사이의 특수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여전히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는 화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기형도라는 시인의 형상을 떠올린다. 이러한 동일성은 시적 장치의 효과, 즉 의도된 동일성이고, 그것은 1인칭 화자인 ‘나’와 고백적인 목소리가 결합하여 발생시키는 시적 효과이다. 요컨대 어떤 시가 고백적인 성격을 띨수록 ‘화자=시인’이라는 고안된 동일성의 강도 역시 증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성의 효과가 바로 시인과 화자 사이에 연속성을 한층 강화한다. 이처럼 시에는 시와 삶이라는 사건의 연속성, 작품과 일상이라는 주체의 연속성을 발생시키는 매듭 같은 것이 존재한다. 

  이 매듭을 의도적으로 없애려는 노력도 존재한다. 특정한 시적 주체의 감정이나 태도가 전략적인 고안물인 경우가 그렇다. 남성 시인이 여성 화자를 등장시킬 때, 여성 시인이 남성 화자를 등장시킬 때, 성인 시인이 어린 화자를 등장시킬 때, 나아가 시가 비인칭적인 목소리로 발화될 때, 시인과 화자 사이에 전제된 연속성은 급격하게 약화한다.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기보다 세계 구성의 의지를 전면화할 때, 즉 경험을 재현하지 않고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여 세계나 ‘화자=주체’의 태도를 통해 자신이 표현하려는 바를 드러내려고 할 때도 이러한 경향이 분명해진다. 경험의 재현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일이 선행될 때, 화자는 경험적 주체에서 벗어나 그 세계의 일원으로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이 경우 시를 쓴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그 가상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인물=화자’의 느낌과 감각을 언어화하는 일이 된다. 일반적으로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적인 주제를 탐사하는 것은 소설 특유의 방식이다. 1인칭 고백체 소설이나 예술가 소설의 경우처럼 작가와 특수관계에 있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작가와 인물의 거리가 좁혀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장르적 특징은 아니다.


2.


  왜 시는 이 특수관계의 흔적을 지우기 어려울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가 체험의 직접적인 재현 또는 변용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시와 소설은 모두 체험에 근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두 장르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시를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독자도 시가 체험의 일차적 재현이거나 변용이라는 이해 위에서 그것을 읽는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때 나는 노트 앞에 앉아 있었고 시를 쓰려던 참이었으며 노란 테니스공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첫 문장을 시작하려던 찰나 공이 제멋대로 날아가 창문에 부딪히더니 펑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마침 내 원룸 앞을 지나가던 사람도 함께 쓰러졌다 나는 시를 쓰려던 참이었는데 쓰러진 그를 어찌해야 하는지 몰라 커다란 솥에 넣고 뚜껑을 닫아버렸다 나는 시를 써야 하는데 경은 바깥을 바라보며 계속 짖었다 컹컹 돌아보면 멧돼지가 앞발로 대문을 긁고 있었고 떡 하나 주는 대신 나는 그를 솥에 넣어버렸다 다시 시를 쓰려던 찰나 배달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짜장면 한 그릇을 들이밀었다 시킨 적 없는데요, 그럴 리 없습니다 난 이 한 그릇을 위해 수십 년을 달려왔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와 그의 배달 가방과 짜장면을 몽땅 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노트를 들여다보려는데 또 한 번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옆집에 누수가 있습니다 공무원은 누수를 잡아야 한다며 끝없이 떠들었고 빨리 시를 써야 하는 나는 옆집 배관을 통째로 뜯어내 그와 함께 솥에 밀어넣었다 이제는 잘 닫히지 않는 뚜껑을 온몸으로 내리누르며 써야 하는 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써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써버린 것 같기도 하고 절대 쓸 수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순간 고개를 들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던 올리브나무 아래였고 도자기로 만든 작은 절이었고 텅 빈 운동장이었고 희망목욕탕 옥상이었고 그리고 세상은 깜빡깜빡 자꾸만 찰나의 순간들이 반복되었고 변함없는 마음이 있기는 한 건지 생각하다 눈을 뜨면 다시 빈 노트 앞이었다    - 한여진, 「초기화」 전문(『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문학동네, 2023))


  이 시는 체험에서 ‘한 발짝’ 떨어진 작품처럼 보인다. 여기서 ‘한 발짝’은 우리가 시적 변용(變容)이라고 말하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한여진의 시에는 시인이 건축을 전공하고 건설사의 현장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경험한 일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선 언니’처럼 경험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이나 사건이 개입하기도 한다. 한여진의 시는 이처럼 경험을 적극적으로 변용하되, “쓴다”와 “쓰지 못한다”(「솥」)라는 진술의 공존으로 요약되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투사함으로써 낯선 세계를 구축한다. 이 시의 화자는 노트를 펼치고 시를 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여 화자의 시 쓰기를 방해한다. 가령 손에 쥐고 있던 테니스공이 창문에 부딪혀 창문이 깨지고, 원룸 앞을 지나가던 행인이 그 유리 파편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 등이 그렇다. 뒤를 돌아보니 “멧돼지가 앞발로 대문을 긁”고 있고, “배달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시킨 적 없는 짜장면 한 그릇을 들이밀기도 한다. 한여진의 시에서 ‘솥’은 글쓰기의 여성적 기원(“나는 솥에서 태어나 솥을 맴돌며 솥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솥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사람”(「솥」))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솥’은 글쓰기를 방해하는 것들을 처리하는 임시방편으로 기능한다.   이 시의 화자는 카프카의 등장인물처럼 “빨리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쫓기고 있다. 글쓰기에 대한 이 강박의 원인을 찾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글쓰기를 방해하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그런 가운데 화자의 글쓰기가 진행된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이 시는 글쓰기를 방해하는 무수한 요인과의 싸움 과정을 메타적인 언어로 작품화함으로써 모든 글쓰기가 그 싸움의 과정 안에서 행해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누수를 잡아야 한다며 끝없이 떠드는 공무원이 등장하는 비(非)시적인 사건 자체가 시(詩)의 일부임을 상기하자. 즉 ‘글=시’는 그것을 중단시키려는 것과의 싸움 바깥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글쓰기는 이 싸움에 노출되어 있다.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시시각각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견디면서 행해지는 것이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옆집에 누수가 있다고 떠들어대는 공무원이나 시킨 적이 없는 짜장면을 들고 나타난 배달 기사인지 가사(家事)나 출근처럼 생계를 위해 할 수밖에 없는 일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싸움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투여할 경우 “그게 뭐였더라 써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써버린 것 같기도 하고”처럼 그동안 생각해 둔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빈 노트’ 또는 이 시의 제목인 ‘초기화’는 뜻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이 사라지는 그 경험이 아닐까. 이 시는 경험적 내용과 상상적 요소를 혼합하여 시작(詩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상적 질서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비경험적·상상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지리멸렬한 일상적 시간을 고스란히 반복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상투성을 적절하게 회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년이었던 그해 여름, 나는 반쯤 녹아 있었고.       여자애들은 정글짐에 엉켜 논다. 긴 머리 애들이 거꾸로 매달려 서로의 얼굴에 머리카락을 스쳐 댄다. 그늘에 던져 놓은 크고 작은 가방들, 오디오 플레이어의 트랙을 따라 흥얼거리는 소리. 여자애들은 자꾸 나를 불렀는데 가방을 멘 나는 수돗가에 서 있다. 여자애들은 가짜 여자 같았고 가짜 어른 같았고 나는 가짜 소년.

  바람이 불면 소리는 이쪽까지 들려올 것이다. 팔에 들러붙은 모래알이 손끝에 까끌댄다. 여자애들과 나는 멀찍이 떨어져 서로를 빼앗아 본다. 돌이 흙으로 흐트러질 때까지. 소년이었던 것 있니, 나는 가짜였던 적 없다.

  최초의 폭염들 속에서 녹아 버린 소년과 소녀. 나는 기꺼이 나의 증인이 된다. 그것은 내가 식혀야 하는 땀이다.

  - 허주영, 「소녀와 남자애」 전문(『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민음사, 2023)


  허주영의 시는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시집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네 문장이 아름다운 건 비어 있기 때문이라고”, “아름답게 비어 있다”(「돌잡이의 비디오」)라는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허주영의 시에서 비어 있음(空)은 결핍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연결된다. 따라서 그녀의 시에서 ‘나’는 텅 빈 기표, 혹은 다른 정체성이 채워질 가능성의 기호이기도 하다. 정체성의 논리에서 비어 있음은 곧 다른 것(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은 한편으로는 ‘나’라는 대명사를 끊임없이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 “나는 열다섯 개의 소녀”(「B컷의 커버」) 같은 진술이 대표적이다 - 다른 한편으로는 변신(metamorphosis)이라는 실존적 사건의 첨점(尖點)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체험과의 관계에서 허주영의 시가 한여진보다 ‘한 발짝’ 더 멀리 나아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이다. 허주영에게 ‘나’는 서정시 특유의 구심력을 응축하고 있는 대명사가 아니라 원심력을 지닌 부유(浮游)하는 기표/기호에 가깝고, 그런 한에서 그녀의 시는 체험을 재현하거나 변용한다는 익숙한 원칙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소년이었던 그해 여름”이라는 진술처럼 이 시의 화자는 ‘소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러한 시적 설정은 시인과 화자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연속성을 뒤흔드는 효과를 연출한다. 이 시에는 ‘나=소년’과 ‘여자애들’이 등장한다. 장소는 ‘정글짐’과 ‘수돗가’가 있는 학교 운동장. 여자애들이 반복적으로 부르지만 ‘나’는 가방을 멘 채로 수돗가에 서 있다. 이 상황 설정은 ‘나’와 ‘여자애들’ 사이에 심리적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화자는 느닷없이 ‘여자애들’을 가리켜 “가짜 여자 같았고 가짜 어른 같았”다고 말한다. 세다가 자신을 향해서도 “나는 가짜 소년”이라고 진술한다. 여기에서 ‘가짜’라는 기호는 이전의 진술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이전의 진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여자애들’과 ‘나’가 ‘소녀와 남자애’의 관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논리는 어떻게 성립될까? 화자인 ‘나’는 소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소년’이라고 소개한, 그러니까 “가짜 소년”인 것이다. 이때의 ‘가짜’는 생물학적 사실과 경험적·심리적 인식 사이의 차이를 뜻한다. 즉 ‘가짜 여자’란 여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가짜 소년’이란 실제로는 ‘소년’이 아님에도 ‘소년’으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여자애들과 나는 멀찍이 떨어져 서로를 빼앗아 본다”라는 진술처럼 이 장면에서 ‘나’는 ‘여자애들’의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최초의 폭염들 속에서 녹아 버린 소년과 소녀”라는 진술처럼 한여름의 폭염이 그러한 정체성 혼란의 원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소년’이라는 기호로 인해 잠시나마 불안정해진 정체성이 ‘가짜 소년’이라는 기호로 인해 되돌아옴으로써 이 시가 시인의 체험에 대한 진술이라는 위상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허주영의 시는 반복적으로 ‘나’라는 기호로 귀환하는 형태를 띤다.

 

3.



  시인과 화자 간의 거리가 멀어지면 시적 진술을 체험의 재현이나 변용으로 읽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언어가 체험의 산물로 읽히지 않기를 원할 때 시인은 시인과 화자 사이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개입시킨다. 이때 시는 체험이 아니라 구성/구축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체험으로서의 시가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의존한다면, 구성/구축으로서의 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임으로써 지금-이곳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등장시킨다. 시인에게 이 세계에 대한 통제권이 존재하는지, 혹은 무의식이나 말놀이처럼 또 다른 질서가 이 세계를 지배하는지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경우 시가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재현이나 변용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는 인간, 상식, 법 등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와 달리 기호로 축조된 이질적인 세계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성/구축에의 의지는 대개 현실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문학적 허무주의자들의 시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 경우 시인은 가상의 질서, 즉 세계를 먼저 축조한 다음 그 내부에 인물과 사건을 배치하는 순서로 작품을 구성한다. 전통적인 소설 구성의 방식이 그렇듯이 이때 세계는 인물이나 사건에 선행하며, 그것은 시간적인 순서만이 아니라 가치의 층위에서도 그러하다.


  이 동물은 햇살을 담기 위해 길러집니다. 그 속엔 거울이 있고, 고원이 있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다시 바라보면.
  안개 속입니다. 안데스 고원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알파카. 흉곽에 구름을 충전하고 싶습니다. 손금이 달라질 때마다.
  네비게이션을 켜듯 길을 잃고 싶어요. 등 뒤를 더듬거리면 분명 문이 있는데. 열리지 않습니다.
  병원에 갈래요. 엑스레이를 찍을래요. 내 속에 들어온 구름의 자잘한 속살까지 엿듣고 말래요.

  뢴트겐 사진을 전구에 구겨 넣자. 창밖에 산맥이 펼쳐집니다. 뼈를 읽어주는 빛. 환함이 말을 겁니다.
  귓속말을 바라보는 일. 어쩌면 늘 하는 일. 두근거림 속에 더 이상 동참만 하고 싶진 않아요.
  세상의 끝을 관람하고 싶었는데, 그게 알파카인 걸까요? 홍차를 마시면 가슴 안에 불이 들어오고.
  엑스레이 속에 해가 떠오를 겁니다. 온 방이 타오를 겁니다. 물위에 불이 붙을 정도로. 눈이 멀 것 같은.

  모두가 앞을 못 본다면 도리어 세상이 눈 뜬 일. 그때도 가로지른다면.
  고기를 씹으며 눈 감아도 빛이 보이고. 이것은 오래된 중얼거림.
  몽실한 머리를 보세요. 귀여움이고, 그러니 잔인함이고. 블랙홀을 예수라 믿으며 자신을 파고든 사람들처럼.

  소용돌이칩니다. 사라지지 마세요. 모두 다 우연이니까. 알파카의 털 속으로 파도가 치고. 복슬복슬 물살을 들이마시면.
  이 거짓말을 전부 겪은 일입니다. 눈 뜨면 변기 위에서의 주절주절. 커피숍에서 안데스 고원으로. 새로워지라니 참 진부한 얘기였군요. 다시 눈 뜨면 으악으악.
     - 변윤제, 「알파카의 세계」 전문(『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문학동네, 2023)


  변윤제 첫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에는 ‘알파카 공동체’라는 장(章)이 포함되어 있다. ‘알파카 공동체’는 ‘알파카’가 등장하는 아홉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서 ‘알파카 공동체’라는 제목은 특정 작품의 제목이 아니라 ‘알파카’가 등장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홉 편에 등장하는 ‘알파카’라는 언어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은 동일하지 않다. 이것은 ‘알파카’가 단일한 기호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따라서 독자는 ‘알파카’가 낙타과 포유류를 가리키는 지시적 기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작품을 읽어야 한다. 그것은 낙타과 포유류를 가리키는 기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알파카 양’, ‘알파카 부인,’ ‘알파카는 대필 작가’, ‘주식회사 알파카 건설’ 등처럼 사전적인 의미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기능한다. 변윤제의 시에서 ‘알파카’는 일종의 증식하는 기호이고, 그것은 포유류라는 대상에서 출발해 미지의 대상 X를 향해 나아가는 불확정적인 기호이다. 이처럼 언어 기호를 상식, 즉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의 규칙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詩)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알파카’라는 언어 기호를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상식적이고 안정적인 의미체계를 불확정적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며, 언어 기호의 이러한 유동적 성격은 결국 그것이 특정한 의미와 안정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지연시킴으로써 시 세계 자체를 낯설게 만드는 효과로 이어진다. 이처럼 특정한 기호가 이미 존재하는 기능, 즉 경로에서 벗어나거나 새로운 용법으로 무한히 증식하는 방식은 시적 진술, 그러니까 화자의 발화를 시인의 복화술, 즉 경험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경험은 안정적인 의미의 공동체를 전제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데, 끊임없이 다른 의미를 향해 증식하는 기호는 언어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무력화함으로써 그러한 공동체의 발생-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을 읽을 때 독자의 의식은 텍스트에 집중될 뿐 그 바깥과의 관계에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한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의 맥락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 시(詩)의 장르적 숙명이라면 시적 진술이 경험의 층위로 환원되지 않는 것 또한 장르적 특징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공동체(‘알파카 공동체’)는 공통의 가치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모임(共同體), 즉 이질성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알파카 공동체」)이 아니라 텅 빈 중심에 연루된 공동체(空同體)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공동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호가 원심력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시인이 다양한 용법을 지닌 ‘알파카’라는 기호가 등장하는 부(部)에 ‘공동체’라는 명칭을 부여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만일 그것이 단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였다면 애초에 ‘공동체’라는 명칭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시를 보자. 화자는 알파카를 ‘이 동물’이라고 지칭하면서 “안데스 고원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알파카”라고 진술한다. 독자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안데스 산맥을 비롯한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낙타과 포유류의 형상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의 생각을 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오히려 화자는 이 ‘알파카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싶어요”라고 진술한다. ‘네비게이션’이 이미 존재하는 질서, 즉 상식의 표상이라면 길을 잃고 싶은 것은 그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2~3연에서 시인은 이 욕망을 ‘엑스레이’, “내 속에 들어온 구름”, “뼈를 읽어주는 빛”처럼 ‘내면’과 ‘빛’의 관계를 통해 구체화한다. 이것은 ‘알파카의 세계’가 외부 세계가 아니라 내면에 속한다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알파카’라는 단어의 미끄러짐을 통해 화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내면을 비추는 ‘빛’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특히 3연에 등장하는 “이 거짓말은 전부 겪은 일입니다. (…중략…) 새로워지라니 참 진부한 얘기였군요.”라는 진술에 이것이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거짓말은 전부 겪은 일입니다.”라는 진술은 1연에 등장하는 “내비게이션을 켜듯 길을 잃고 싶어요”와 마찬가지로 모순적인 발화이다. 이 진술에 도달하면 독자는 ‘거짓말’과 ‘겪은 일(경험)’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여기에서 ‘거짓’과 ‘사실’이라는 두 가지 판단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이 ‘사실’이라는 진술, 또는 ‘사실’이 ‘거짓’이라는 진술은 양극단의 판단을 뒤섞음으로써 그것에 대한 진위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시인의 시작(詩作) 스타일을 암시하는 듯하다. 시인은 자신의 시세계가 ‘거짓’과 ‘사실’이라는 대척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것은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미학적 정언명령에 대한 자신만의 응답(“새로워지라니 참 진부한 얘기”)이기도 하다.


  lecture:

  마지막 인간을 상상해봅시다.

  자신을 꼭 끌어안고 어둠 속을 걷는, 최후의 인간을 말이죠.

  그 무렵 지구는 정말로 따뜻했습니다. 누구도 쓸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인류의 기원은 어류였습니다. 진화학적으로 인중은 그 단서가 됩니다. 영혼이 헤엄치는 형태로 움직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주는 일종의 거대한 아쿠아리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우리의 거주지를 구성하고 있는 유리는 특수하게 고안된 것으로 두께는 육십 센티입니다. 이쪽으로 와서 모형을 만져보시겠어요?

  여기서는 모든 소리가 반향됩니다. 자신이 던진 질문을 대답으로 듣는 동안, 누군가는 우리를 들여다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을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로 나온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상을 잊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겠습니다. 여전히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자, 다 함께 몸을 창가로 돌려봅시다. 저기, 녹아서 흘러내린 지구를 보세요. 꼭 쉼표 같지요. 바로 옆에 있는 게 물고기자리랍니다. 마치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조상들은 얼음낚시를 즐겼습니다. 빙판에 구멍을 뚫고 기다리면 입 벌린 물고기들이 숨을 쉬러 올라옵니다. 그때를 노려 재빠르게 낚아챕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함부로 열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면 얼어붙어 야광 별이 된 조상들을 기리며 잠시 묵념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런데 브라더, 우주에도 유령이 올 수 있을까?
     - 조시현, 「28880314」 부분(『아이들 타임』(문학과지성사, 2023)⁾


  조시현의 『아이들 타임』은 최근 출간된 시집 가운데 시인의 직접적인 ‘체험’과 가장 거리가 먼 시집이다. 이 시집은 과학소설(SF)과 같은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텍스트의 내부와 외부 사이에 연속성이 개입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시인은 인간이 멸종된 미래의 시점에서 한때 지구 표면에서 생존하다가 멸종한 인간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이 회고가 발화되는 지점이 지구 바깥이라는 점, 요컨대 지구 바깥의 우주-공간에서 멸망한 지구를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텍스트 내에서 ‘인간(적인 것)’이 틈입할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 인용시의 각주 1에는 “공식적으로 지구 인간은 2500년대 멸종되었다. 상기 자료는 A808에 거주하던 시스터(2870~2984)의 일기에서 발췌하였다. 지구로 꾸준히 송신했으나 아직까지도 수신 확인이 되지 않는 걸로 보아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라는 진술이 등장한다. 이것은 19~20세기에 유행한 다양한 서사, 즉 소설, 영화, 연극 등의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시·공간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다시피 현존하는 대부분의 서사 형식, 특히 과학소설(SF)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공간적 세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해리 셸던: 은하 기원 11988년에 태어나 12069년에 죽음.”(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나 “오래전에 밸런타인 마이클 스미스라는 이름의 화성인이 살았다.”(로버트 A. 하인라인의 『낯선 땅 이방인』) 같은 진술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이 시는 인간이 지구에서 멸종한 이후의 미래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는 시적 설정에 동의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설정은 우리에게 곤혹스러움을 안겨준다. 동시대의 다른 공간(대안적 세계)을 상상한 시는 많았으나 미래, 그것도 우주적 시간에 근거하여 창작된 시는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詩) 장르가 상대적으로 공간에 대해서는 개방되어 있으나 시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시는 현재, 혹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이때의 ‘과거’는 한 개인이 기억할 수 있는 생애에 한정되거나, 역사적 시간을 배경으로 할지라도 수 세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에게 시는 현재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관한 이야기인 셈이다. 반면 조시현의 시는 인간종이 지구에서 멸절한 이후인 2888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관례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비(非)시적인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시현의 시에서 주목할 점은 인간이 멸종한 이후의 세계, 즉 포스트 휴먼의 세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웹소설에 등장하는 세계를 원용하여 포스트-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감각을 시화(詩化)한 변혜지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과 상당히 유사하다. “마지막 인간을 상상해봅시다.”, “저기, 녹아서 흘러내린 지구를 보세요.” 등의 진술에서 암시되듯이 시인은 지금 우주에서 멸망한 지구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상상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우주로 나온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지금 ‘우주’에 머물고 있다. 이때의 ‘우주’란 지구를 포함하는 세계가 아니라 지구의 바깥을 뜻한다. 한때 인간은 ‘지구’에서 살았으나 오래전에 지구와 함께 멸종했다. SF소설의 한 장면을 닮은 이러한 설정은 현대시가 소위 인류세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인용시에 한정하여 말하자면 “플라스틱은 아주 고요하고 느리게 인간의 혈관을 차지했다. 2050년대를 기점으로 인간의 혈관에는 피가 아닌 플라스틱이 흐르기 시작했다.”라는 각주 2의 내용처럼 미세먼지와 미세 플라스틱으로 표상되는 기후 위기와 생태재난에 대한 경고일 듯하다.   기후 위기로 인해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는 이러한 포스트-아포칼립스적 상상력은 문학은 물론이고 우리 시대의 문화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징후적 현상이다. 다만 조시현의 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SF소설과 유사한 시적 설정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오랫동안 재생산되어 온 시 장르의 암묵적인 시간 감각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특히 기후 위기에서 기원한 포스트-아포칼립스적 감각은 시가 이미-항상 시인의 체험의 산물이거나 그것의 변용이라는 상식적 믿음을 벗어난다. 이러한 설정은 현실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이라는 이름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환기하는 데 한층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가령 시가 지금-이곳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할 때,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그 현실에 연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웹소설을 원용한 변혜지의 시나 SF소설의 설정을 차용한 조시현의 시에서 ‘세계’는 그 자체로 지금-이곳의 현실과 경쟁하는 대안적인 의미를 지닌다. 어떤 시인의 시가 직접적인 체험을 표현하는 대신 세계 구성의 의지가 드러낼 때, 그것은 언어가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원심력의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4.



  시는 대표적인 체험의 장르라고 인식된다. 이것은 체험의 변용이나 허구적 구성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시가 일상적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독자가 화자의 목소리를 시인의 고백으로, 그리하여 텍스트와 내부와 외부를 연속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가 체험의 산물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작품들은 시인과 화자 사이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배치함으로써 시가 체험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닐 수 있음을, 따라서 시가 전적으로 고백의 장르만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거리감은 시인이 웹소설이나 하위장르 등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텍스트의 배경으로 전유할 때 한층 도드라진다. 이러한 장르적 혼합과 충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표면적으로 그것은 시가 직접적인 체험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통해 환기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시는 재현적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텍스트의 내외부가 연속적인 관계라는 기존의 가정은 깨진다. 하지만 최근 시에서 이러한 장르적 혼합은 세계의 문제, 즉 미학적 장치 이전에 특정한 세계를 활용하여 자신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려는 기획의 일환처럼 보인다. 이때 외삽(外揷)되는 세계 - 가령 조시현의 과학소설(SF) - 는 시인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지금-이곳의 문제성에 대해 말하기 위해 차용하는 대안적 세계로서의 성격을 띤다. 현실, 즉 상징계의 질서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시인들은 상징계 바깥의 질서를 원용하여 지금-이곳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세계와 삶의 진실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상징적 질서로는 도달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할 때, 시인은 미적 가상을 대안적 세계로 호출한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세계’를 통해 지금-이곳을 경험하고 있다. “세계 최초 시 서바이벌 오디션”(「스트릿 문학 파이터」)에 대한 고선경의 시가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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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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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최다영 기계기담(機械奇談)

1. 머리 셋 달린 여우 기이한 짧은 이야기를 기담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여러 설화와 전래동화의 모티프를 차용하거나 기이한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정우신의 이번 신작시들은 언뜻 기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 제주설화 삼두구미 본풀이의 모티프를 활용한 「삼두구미(三頭九尾)」는 이러한 신작시들의 입구가 되어주는 시처럼 보인다. ‘삼두구미’는 머리 셋에 꼬리가 아홉 개 달렸으며 시신을 파먹는 늙은 땅귀신 요괴를 가리킨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두구미는 가난한 나무꾼의 세 딸을 돈을 주고 데려와 사람 다리를 주면서 먹도록 하는데, 먹지 않고 거짓말을 한 첫째와 둘째는 그 사실을 들켜서 죽게 되지만, 막내는 다리를 불에 태운 뒤 그 가루를 보따리로 싸서 자신의 배에 묶어놔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삼두구미의 아내가 된 막내는 달걀과 무쇠, 버드나무로 괴물을 퇴치한 후 그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2) 무엇보다 「삼두구미」에서 주목되는 건 이러한 삼인 분할의 모티프가 시의 형식과도 긴밀히 이어진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삼두구미의 머리가 셋으로 나뉘어 있듯, 발화자 ‘나’ 역시도 셋으로 분할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삼두구미가 삼킨 두 딸이 각각 머리 하나씩을 차지한 형태로 본래의 삼두구미와 합일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화 속에서는 첫째와 둘째가 백골만 남았을지언정, 그 혼이 삼두구미의 육신과 합쳐진 상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온전히 분리되지도 온전히 합일되지도 않은 채 존재 양태의 변모를 거듭하는 삼두구미의 형상은 발화 측면에도 반영되어 있다. 光.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습니다. 滅. 나를 구하다가 죽었습니다. 歸. 나는 편리합니다. (…) 歸.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돕니다. 光. 나만 네모 방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滅. 동그라미가 돌아갑니다. (…) 光. 나는 滅과 歸로 쏙 들어갔습니다. 滅. 나는 나를 말려놓고 공중제비를 돕니다. 歸.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삼두구미(三頭九尾) 중에서 각 행 앞에 붙은 한자들은 光(광), 滅(멸), 歸(귀)로서, 발화의 주인인 삼두구미의 세 머리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산문에 따르면 이 한자들은 각각 ‘발광’, ‘자살’, ‘귀의’를 의미하며, “비극의 삼각형”을 형성하는 꼭짓점이라 한다.3) 그렇다면 이 비극의 삼각형은 미쳐서 죽었다가 원점으로 돌아가 미쳐서 죽기를 다시 반복하는 일련의 순환을 표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련해 이들이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세 사람이 방의 각 꼭짓점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으로 도는 귀신 술래잡기를 연상케 하는데, 셋만으로는 게임을 끝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무한 순환의 굴레를 암시한다. 한편 이처럼 각 행을 서로 다른 머리들의 교차하는 발화로 읽을 때, “빚이 무거워 나는 죽 늘어졌”다는 목소리에서 ‘빚’은 팔려가는 조건으로 받은 돈을 지시하므로, ‘滅’에 해당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두 딸 중 하나일 것임을 알게 한다. 맨 마지막 연은 둔갑의 단계를 보여주는데 ‘光’이 ‘滅’ 속에 숨고 ‘滅’은 ‘歸’ 안에 숨게 되므로,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는 건 세 머리가 마트료시카처럼 합쳐진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은 아침이 되면 하나로 존재하다가 밤이 되면 합일체 속에서 차례로 튀어나와 셋으로 분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연에서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다는 그 장소는 바로 삼두구미 자신의 몸이라 할 수 있다. 또 “오늘도 아침이 왔”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이러한 루틴은 정확하게 설정된 기계처럼 끝을 모르고 계속 반복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복제, 클론, 리플리컨트 모티프와 순환의 질서는 정우신의 시 세계에서 빈번히 다뤄져왔다. 특별히 양순모는 정우신의 시에서 활용되는 반복 장치가 “고통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거듭 그것들로 회귀하기 위한 반복”4)임을 포착한 바 있다. 요컨대 정우신의 화자들은 불행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우신의 시에서 미분 작용을 수행하는 존재들에 주목할 것을 청하는데, 정우신에게 “미분은 ‘입체’에서 다시금 ‘육체’로 재탄생하는 과정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 ‘방법론’”5)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삼두구미로 대표되는 육체 분할의 반복 양상은 정우신의 시 세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상상, 삼각형의 꼭짓점을 형성하고서 자동 반복되는 순환의 되풀이를 설정하는 구도는 다른 신작시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동일한 개체의 복제, 일정한 순환 피드백의 반복, 설정된 입력값에 기반해 출력물을 산출하는 성질은 무엇보다도 기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기계기담이라 명명하고서 다른 시들을 더 따라가보자. 2.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g on by6) 「샐리」에서도 ‘샐리’의 리플리컨트들이라 할 수 있는 샐리2, 3, 4가 등장한다. 심지어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층층이 샐리가 서 있다”는 언급을 통해 더 많은 복제 샐리들, n명의 샐리들이 같은 건물에 존재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클론 모티프는 “손톱을 모은다”는 언급과 만나며 자연히 쥐둔갑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쥐가 손톱을 먹으면 손톱의 주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둔갑한다는 해당 전래동화를 따라, 이 복제 샐리들은 샐리가 자신의 손톱을 통해 증식시킨 인물들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세부 정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약을 타러 지하로 내려간다”는 언급을 통해 극도로 통제된 병동이 배경인 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샐리는 매일 볼펜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데, 샐리2가 그 볼펜을 빌려 교정기를 떼어내고는 떼어낸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다. 뒤꿈치를 찌르는 일만이 목적이었다면 날카로워진 볼펜으로 해도 되었겠지만, 반드시 뜯어낸 교정기여야만 했다는 점에서 교정기를 뒤꿈치에 밀어 넣는 행위가 중요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행을 하는 것일까. 마지막 연에서 샐리가 손톱을 “아물어가는 곳마다/힘껏 밀어 넣는”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보건대, 이 손톱 둔갑에는 기한이 있으며 기한이 다하면 살이 아물어버림과 동시에 둔갑 상태가 끝나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샐리는 리플리컨트들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손톱을 충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경우 샐리2가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 이유는 아물지 않는 상태를 지속하려는 다른 방편으로도, 혹은 뒤꿈치가 아물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여 손톱을 더 보충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리플리컨트는 왜 생을 지속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촘촘한 감시망과 통제를 견디며 갇혀 사는 삶, “I’m free to be whatever I/Whatever I choose”가 불가능한 일상에 일찍이 진절머리가 난 걸까. 그런가 하면 비상구에서 다른 샐리들을 기다리는 샐리의 모습은 탈옥을 계획하는 수감자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어떤 방과 “다음 방”에서 “15분과 30분”간 이루어지는 일정한 루틴을 매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샐리는 그보다 더한 “한 시간과 세 시간도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인내심 강한 샐리는 “샐리3과 샐리4가 계단에서 내려오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말 그대로, “Sally can wait”. 그러나 기다릴 수 있는 것과 너무 늦어버린 것은 다르다. 시 전반에 드리운 디스토피아적 정조에 기대볼 때 샐리에게는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고, 어쩌면 샐리도 그걸 안다. 3. 버들치와 모자 한편 이러한 복제 모티프는 환유의 활용과 더불어 더욱 생동감 있는 시적 효과를 얻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버들치」를 들 수 있다. 이 시에서 ‘버들치’도 크게 세 갈래로 구분할 수 있는데, ①실제 어류로서 버들치를 지시하거나 ②사람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비유하거나 ③그러한 마른 외양과 피로한 행색으로 인해 버들치에 빗대어지는 사람들을 환유적으로 지시한다. 손가락이라는 원관념의 활용도 두드러지는 가운데, 환유적 의미의 버들치와 보조관념으로서의 버들치가 다채롭게 교차되며 삼각형의 각 변을 오가는 것이다. 가령 “버들치는 렌즈를 닦는다”는 문장에서 버들치는 손가락이나 사람으로 읽을 수 있으며, “버들치는 검수원을 만나기 전 버들치를 먹는다”고 할 때 앞의 버들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뒤의 버들치는 조리된 생선을 의미한다. 특별히 사람으로서의 버들치는 “버들치와 대화한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어느 개인의 독자적인 속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을 겪는 여느 서민들을 일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십분마다 뛰쳐나가고 두 시간씩 이동”했다가 “종점에서 졸고” “물비린내 가득한 방으로 돌아”오는 피로한 출퇴근의 루틴은 이를 대표한다. 방에서 방으로 복귀하는 이러한 고단한 루틴을 ‘n번째 버들치’가 차례로 이어받으며 “이십 년”에 걸쳐 수행하는 모습은 각 인간의 고유한 개체성이 소거되고 루틴을 주인 삼아 루틴의 종속물로 전락하는, 마치 기계의 소모품과도 같은 현대 노동자들의 초상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하급 노동자 일반이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서로는 서로의 리플리컨트나 다름없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무형의 루틴이 지키고 영속해야 할 최우선순위로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임시직 버들치로 소모되다 퇴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버들치가 “상점 유리나 거울에 난 손자국을 보면 견디기 힘들”어지는 이유는 다른 버들치들의 존재를 상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이 한여름의 댐처럼 단번에 쏟아질 때 버들치는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동안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왔다 ― 「버들치」 중에서 이와 더불어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모습은 익숙한 재현 문법을 따라 죽음에 대한 지향을 연상하게 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결말은 그간 주어 자리에 놓여 있던 버들치 대신, 사람의 형태를 그려보게 한다. 내내 버들치가 손가락을 가진 것 같은 이미지를 그리도록 하다가 마지막 행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에서 버들치가 흘러나오도록 하여 전도된 이미지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략된 주어의 자리에는 자연히 사람이 놓이게 되면서 익명의 군중이나 노동 부품으로서의 ‘n번째 버들치’가 아니라 한 개인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버들치가 된 인간을 버들치로만 남겨두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버들치」에서처럼 환유의 대상으로 전도가 일어나는 양상은 「진」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는 ‘진’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어떤 얼굴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의 루틴은 휴일마다 “오렌지 스웨터를 입고/에코백을 들고 외출”하는 것이다. 오렌지빛과 강렬한 태양빛의 색채적 유사성으로, 빛이 내리쬐는 모습은 “햇살의 소매가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된다. 특별히 주목되는 건 모자를 쓰고 있던 진이 결말부에서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히며 모자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이 쓰고 있던 모자는 진이 된다. 「삼두구미」에서 자신이 접촉한 사물의 일부가 되는 상상력이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더 나아가 접촉한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1연에서 “얼굴을 기다”리는 이유는 자기가 얹힐 머리를 찾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방 안에 수북한 “주인 없는/머리카락” 다발 또한 모자와 함께 달라붙을 머리카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실종된 빛 앞서 이번 신작시의 주된 특징 중 하나로 삼각형의 꼭짓점을 주축으로 순환의 되풀이가 자동 반복되는 양상을 언급했는데, 「파동 일기」에서도 “나의 꼭짓점으로/모이는 어둠”이 거론된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비극의 삼각형’은 빛과 어둠, 화자를 각각 세 꼭짓점에 두고서 이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간 정우신의 시에서 빛은 “어둠의 긴 머리카락을 뒤집어쓰고 개미를 주워 먹는”7) 것과 같이 포식을 즐기는 유생물, 특별히 “뱀처럼/별처럼 (…) 움직임을 따라 하며 우리를 조롱하”8)는 교활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 신작시에서는 가시성을 중심으로 하여 빛과 어둠의 고유한 속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야가 점점 줄어든다 태양의 샌드백 모래사장에 빛을 줄줄 흘리고 한발 앞에 서 있던 빛이 안면에서 일렁인다 (…) 헛디디고 데이고 나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어둠 (…) 가스불 앞에 서면 이마 앞의 어둠이 부르르 떤다 ― 「파동 일기」 중에서 하강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파동 일기」는 시력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화자에 의해 발화된다.‘일기’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日부터 土까지 이어지는 요일에 따른 분절이다. 각 요일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날의 일기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게도 목요일에 해당하는 일기에는 木 대신 目이 ‘목’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는 시각과 관련된 빛의 속성이 이 시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월요일에 그는 마치 “샌드백”이 찢어져 모래가 쏟아지는 것과 같이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느낀다. 그는 “한발 앞에” 존재하는 빛을 그 온기와 일렁임으로 감각하지만 빛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또 그는 “벽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불을 켜려다 “반찬통”을 넘어뜨리기도 한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모든 활자”는 “재가 되어”간다. “헛디디고/데이”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며, 눈과 눈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한 소실점인 “꼭짓점”에는 빛의 상이 형성되는 대신 “어둠”이 모인다. 토요일에 그는 “가스불”바로 앞에서도 가스불의 외양을 보지 못하고 가스불에 무언가가 끓는 것을 눈앞의 어둠이 떨리는 것을 통해 감지한다. 일요일에 “안면에서 일렁”이던 것이 빛이었다면 이제는 어둠이 그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실명에 가까워지는 일상은 일기라는 제목과 요일 표기에서 암시되듯이 되풀이되며 더욱 심화될 것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1) 근작시인 「전자 늑대」도 빨간 모자와 늑대 동화를 차용하고 있다. 2) 이러한 삼두구미 모티프는 정우신의 이전 시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다. 복제인간 이미지를 주로 활용하는 그에게 자가복제적 키메라와 같은 형상의 삼두구미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에게 남은 다리를 나눠 줬어요. 어떤 끝이 뒤돌아 나를 탄생시켜요. 삭제하고 싶니. 너의 몸. 너의 의식. 이리로 오렴. 바깥으로 오렴. 여기에는 너의 불행들이 있다. 태워 주마.” 정우신, 「주술」, 『비금속 소년』, 파란, 2018. 3) 정우신, 「그것과 그것들」. 4) 양순모 해설, 「달리기, 비극적」 『미분과 달리기』, 파란, 2024, 128쪽. 5) 양순모, 같은 글, 132쪽. 6) Oasis, 중에서 7) 정우신, 「사제의 뜰」, 『비금속 소년』. 8) 정우신, 「네온사인」,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포지션 최다영 정우신시집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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