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포지션 | 2024년 가을호(제47호)

시(詩)의 틈(間), 시간(時間)의 음(音)

민가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주요 논문으로 『김말봉 소설에 나타난 여성 인물의 ‘광녀-대본’ 양상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가 있고, 주요 평론으로 「지금, 여기, 회색지대, 그리고 “빨강” - 이유리론」 등이 있다. 현재 《내일을여는작가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詩)의 틈(間), 시간(時間)의 음(音)1)



호모 클리마투스의 비유와 진실


  그동안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여기서 방점은 너무, 이 두 글자에 찍히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겨운 동굴 생활을 청산한 인간이 정착하여 부족을 이루고, 전쟁하고, 문명을 세우고, 또 허문다. 르네상스를 거쳐, 달나라 여행을 간다. 이 범박한 정리 너머, 너무나도 착실하게 호모 클리마투스homo-climatus가 되어온 인간은 1.45도 뜨거워진 지구, 20분에 하나꼴로 잃어온 생물종들을 보며 뒤늦게 읊조린다. 파훼되었다. 이제 “파종은 끝났다”(「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기후 위기’라는 진단도 점잖은 바야흐로 ‘기후비상’. 이제 우리 호모 클리마투스에겐 이런 일들이 남았다. 산호초, 극지방, 습지와 운무림의 생태가 사라진다. 킬리만자로 만년설이 녹는다. 해안과 강이 범람하고, 작은 도서 국가들이 가라앉는다. 2050년경 지구 식물종의 15~37%가, 2100년경 현존하는 동물의 4분의 1이 사라진다. 환경 난민이 되어 대규모 이주 행렬을 잇는다. 참신한 전염병과 온열질환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들어 번번이 진로를 방해한다. 식량과 물 안보 등 정치 어젠다가 부상할 때마다, 인간은 지론만 있고 지혜는 없는 자기 한계를 뼈아프게 실감한다. 플루토늄과 플라스틱을 위시한 인류의 희망(이었던 것)이 새 시대를 여는 강력한 지질학적 증거가 되어 돌아왔듯, 인류 문명의 기초 요소가 되어온 모든 도구가 인류를 가장 취약하게 만드는 결정적 한 방이 되어 귀환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비유가 아니다.

  어쩌면 작금의 진짜 문제는 비유로 환원해선안될 각별한 진실에 비유를 들이밀어버린 데에서 비롯한 것일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이 상황을 타개할 것이라는 믿음, 그 견고한 믿음이 오늘도 착실히 쌓고 있는 멸망 크레딧, 그렇게 하나 둘 격파되어가는 티핑 포인트는 차치물론하고, 자기 작동 원리에 신실할 뿐인 ‘복잡계로서의 지구’가 인간에 ‘소외’되었다는 식의 비유가 통용되는 현실은 인류가 이미 자기 진단의 감각마저 상실했을지 모른다는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그저 ‘자연-권’을 행사 중일 뿐인 지구는 어느새 인간을 향해 이글대는 복수심을 주체 못하고 스스로를 불태우기 시작한 신파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있다. 이러한 소묘 방식에는 인간이 진지한 반성에 임하기만 하면 끓는점을 향한 지구의 질주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만용의 혐의가 짙게 깔려있다. 자랑할 역사가 기껏 만년도 안되는 인간이 자기 신분을 망각하지 않고서야 이토록 당당하게 오답을 내놓을 순 없다. 하루아침 모든 개체가 동시에 절멸하는 전격적인 사건으로 ‘멸망’을 이해하려는 손쉬운 믿음 역시 그 오판에 적잖은 몫을 보탠다. CO2와 N, 흙과 물, 빙하와 바다를 자기 악력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덮어두기식 믿음은 아쉽게도 단 하나의 사실만 덮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이렇게 또 다른 대타화 단계에 진입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 모든 진실과 비유, 믿음과 기만의 틈바구니를 면밀히 살펴보는 작업 아닐까? 무려 45억년 동안 쓰인 이 행성의 역사책은 연속 두 줄 이상 속 편한 문장으로 이어진 적 없는 ‘종말론의 필연’이었다.

우뚝 솟은 하나의 진실과 덧칠된 비유만으로 축약되기엔 너무 아득하게 오래인 ‘시간’이 이미 지구의 모든 존재를 선행한다. 이 사실은 다시금 무언가를 믿어보고 싶게 만드는 용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기를 ‘이로써 인류가 희망을 확보했다’거나, ‘인간의 책임 우선성을 회피해도 괜찮다’는 식의 이해로 비약하면 곤란하다. 과거 다섯 번의 대멸종과 지금 도래 중인 여섯 번째 대멸종의 차이 - 인간이라는 내부요인이 그 멸종의 압도적 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 - 까지 사상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번 멸망이 인간이 직접 경험 중인 첫 번째 멸망이라 해서, 혜성 충돌, 대륙판 이동, 화산 폭발로도 완전히 장악되지만은 않은 지구의 시간성까지 절하할 순 없다는 말이다.

  시를 비롯한 예술은 이런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마다 대안적 가치로 호명되어왔다. 그러나 당장 육박해오는 ‘자본 난민’의 위기 앞에서 ‘기후 난민’의 공포는 상대적으로 멀어 보이고, 그 겨를까지 비집고 들어가기에 오늘날 시의 존재감은 이미 너무 희박해진 것 같다. 또 시의 미학성은 실리를 염두하는 방식보단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벌려내며 발생한 간극에서 주로 출몰하기에, 독자의 생태적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선전도구 되기를 자처하지 않거니와, 두려움을 환기하는 ‘공포의 발견술’ 되기는 더더욱 자처하지 않는다. 그러니 더러는 백 줄의 시구보다 단 한 줄의 1.5도 라이프스타일 운동 구호 제창이 더 긴요해 보일 때도 있다. 하물며 문학장이 각종 인류세 담론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시를 읽는 우리가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세상의 일들이 그리 많아진 것 같지도 않다. 당장 러브버그와 모기 포비아로 잠 못 이룬 우리의 여름밤을 떠올려보면 때때로 이 모든 이야기가 너무도 고아한 별나라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조 : 배음의 정치, 포네의 시간


  이 멸종의 시간을 같이 버티어 줄 만큼의 가치가 아직 문학에 남아있다는 게 이 글이 당도하고자 하는 거친 결론이다. 이는 곡진한 사유의 결과보다 차라리 간절한 선언에 가깝다. 그간 다수의 기후문학 논의가 최소한의 윤리적 혹은 당위적 선언을 배제하지 못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채택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주목해봄직한 논의로는 임태훈의 논의2)가 있다. 임태훈은 그간 “모든 비인간 존재들을 압도해 최상층 위계에 올라”서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온 재난 서사와 기후 소설이 엄연히 구분됨을 짚어내면서, “거의 모든 사람이 기후변화의 준원인”이고 “온갖 사물 간의 얽힘과 스며듦도 연루되어 있”기에 클라이-파이Cli-fi의 역사적 과업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재차 생각하”고 “미래의 비/인간/형을 발명하는 일”에 있다고 제시하였다. 또한 “소중한 삶의 터전으로 간주되는 자연을 더 이상 현대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태적 아노미”의 징후를 포착하고, 2020년대 기후-시의 개념을 “자연을 투명하거나 실체가 없는 하나의 기후나 계절로 표현하는 일군의 작품”으로 정립한 박동억3)의 논의 역시 무력한 인간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던져야만 할 근원적 질문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 기후 문제를 범지구적이고도 행성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킨 SF의 성과 역시 같은 맥락 안에서 이해해봄직하다.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경향을 벗어나 시공간을 재구성하고 다양한 비판적 사고실험을 통해 비인간과 인간을 얽어놓은 SF 장르는 이미 인류세를 지나는 문학장 내 강력한 정동의 매개물이 되었다. 물론 저 먼 바깥 우주를 향한 인간의 도피를 촉발하며 “땅으로부터 뿌리는 뽑아내고 또 다른 전좌를 초래”하거나, “파멸을 ‘가정적 미래’로 연기시”키는 작업들이 객체를 향한 인간의 무감함을 심화4)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SF가 인간의 자기-준거성이 세워온 ‘사회적인 것’들의 토대를 허물고, 재구성하며, 물질의 귀환을 촉진해온 것은 주지의 활약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SF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밀착과 긴장”을 내포한 모든 매체를 포괄하는 “서사 예술의 한 형식”5)이라 했을 때, SF시란 무엇이며 타 매체의 SF적 형식으로부터 변별될 수 있는 시적-서사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된다. 장르별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과학 기반의 허구를 통해 ‘지금-여기’에 일어날 법한 것을 구조화하는 것이 SF 서사의 기본 공식이라면, 우리가 시에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SF적 상상력은 결국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연대기적 나열로부터 시간을 구출해내는 것, 요컨대 낯선 시적 대상의 본질 밑에 놓인 새로운 시간성을 발견해내는 일 아닐까? “은유의 강력한 결합적 양식으로서의 시”6)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머나먼 시간성을 지금-여기의 필연으로 땋기에 가장 넉넉한 장르인 까닭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맥락에서 “모든 텍스트의 원천은 결국 시간을 감각의 형식으로 붙잡아보려는 안간힘”7)이라는 말과 함께, 시간이 2차원 아닌 3차원(전후, 좌우, 상하)의 입체적 흐름을 따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자문하고 자답해 온 신해욱의 시를 살펴보자. 신해욱의 시는 늘 예정된 미래대로 흘러가기를 최대한 망설이며 다른 시공에 자신을 옮겨놓기를 기꺼이 택한다. 이 흔적들을 보기 위해 먼저 우리 시간의 스케일을 ‘시분초침’ 단위에서 ‘자연사’ 단위로 확장해보자.

  시인의 근간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에는 동일한 제목의 표제작이 총 네 편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자면 “자연의 가장자리로부터 다시/맨발로 나타”난 인간이 ‘남’의 그늘, 양분과 자유를 누리고 ‘남’이 베푼 망각의 은혜에 과하게 도취되어온 역사 그 자체이다. 이 네 편을 이어 붙여보면 흡사 한 편의 대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자신이 지구의 밭에 심은 무허가 작물을 보며 그것이 ‘불로초’냐는 인간의 우문 그리고, 그 찰나에 깃든 “영생의 기분”은 자연의 생몰에 관여해온 인간의 방식이 얼마나 허위로 가득한지를 되비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 번째 표제작 속 ‘우리’는 불을 “우리의 불”로 인식하며 그것을 “비로소 일렁이는 것, 비로소 따뜻한 것”과 같은 주관적 인식 하에 소유한다. 그들이 자기 바깥으로부터 낚아채온 종자로 번식해온 인간의 ‘의존의 역사’는 두 번째 표제작 속 ‘파종’의 계절에 이르러 다음 선언과 함께 중단된다. “파종은 끝났다.” 뒤이어 시인은 서너번째 표제작 속 ‘첫눈’과 ‘봄비’의 계절을 경유하여 인간이 자기 인식적 경험의 저장고에 축적해온 모든 것에 그 고유의 소유격을 되돌려준다.


“눈이 왔다 첫눈이었다

우리는 유성생식을 했다

무허가의 시설로부터 다시
우리는 맨발로 다시 태어나

맨발은 추위의 것
시간은 미래의 것

(……)

손바닥을 보았다 바닥은 검댕의 것
손금은 생명의 것

창밖을 보았다 소멸은 눈송이의 것
부재는 빈 집의 것

(……)”
ㅡ 세 번째 수록된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부분


“비가 왔다 곡우였다

거름은 나무의 것
모이는 새의 것

우리는 먹이를 먹었다

자연의 가장자리에 들어
먹이는 우리의 것
우리의 먹이를 먹었다

촉촉하구나 촉촉하다
촉촉한 등은 개구리의 것
촉촉한 흙은 지렁이의 것
미끄러지며 목을 넘어가는
먹이는 우리의 것
누가 먹던 우리의 것

(……)

거름은 나무의 것
삶은 자연의 것

못물은 모의 것
촉촉한 혀는 우리의 것

(……)”

-네 번째 수록된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부분


  이 모든 대서사시의 방점은 결국 “미래는 시간의 것”이라는 문장에 찍히며, “죽은 동물의 냄새”를 풍길 뿐인 인간이 논하는 ‘영생’이 얼마나 ‘음담’에 불과한지를 넌지시 드러낸다. 그러니 이 네 편을 연속적인 흐름 안에서 읽는 것은 시간성에 대한 인간의 오해를 바로잡는 시인의 작업으로 보아야한다.

  신해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규칙을 고안해 틈을 벌려내본다. 「카운트」 속 “하나에서 열까지”를 계수 중인 화자는 ‘우리’를 “선험에 갇힌” 채 “못 한 것의 못 함에 붙들리는 영벌에 처해진” 존재요, 그 “영벌에 걸맞은 잘못을 두고두고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소묘한다. 이 때 “우리의 열은 뜨겁고” 그 열은 “생활의 열보다 빠르”다. 숫자를 도통 천천히 셀 줄 모르는 인간에게 세상은 분열, 증식의 오류, 뒤척임, 섣부름과 같은 혼란의 필연이다. 계수의 명령에 따라 “세라는 대로 열까지” 고분고분 수를 세는 동안 인간의 미래는 “차례차례 곪아갈 것”이고, 이 때 자기 세계와 허구를 연결시킬 모종의 틀을 전혀 고안해내지 못한 인간은 “전생을 못마치고 미리 깨어난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반면 더 이상 ‘카운트’ 하지 않고 ‘구구단’을 통해 “하나에서 열을 만드는 놀이(「구구단」)”를 하는 세계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놀이란 “둘은 사라지게 하고/당장에 셋을 낳고/넷을 잃기로” 하거나 “다섯과 여섯 사이에는 일곱과 여덟을 만드는” 등 자신이 직접 “숫자가 되어”가는 놀이이다. 숫자가 만들어지고 또 사라지고, 낳아지고 또 제거되는 과정은 1부터 10까지의 세계가 끊임없는 유동상태에 의해 증식되는, 요컨대 ‘구구단’이 “생물로 가득”한 ‘생물성’으로 빚어지는 과정과 나란히 놓인다. 인간이 실재를 과학적으로 부호화하고자 만든 ‘계수의 법칙’이 그린 결말과 ‘구구단’의 결말은 그 결을 달리한다. 수는 자신이 수량화하는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 정작 ‘카운트’를 추구하는 건 세계의 모든 것을 시간의 선후와 그에 따른 인과로 설명하려는 경험론자들과 그들의 협소한 과학주의이다. 그들이 가진 “맹목의 질료들을 있는 그대로 구원하는 일”(「클론」)에 관심 없는 시인은 「파훼」에 당도해 그 경험들을 찢어내는 방식으로 “경험의 틈”을 벌려낸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자기 허구의 세계, 즉 자신의 시를 깃들게 할 뿐이다.


“(……)삼각자에 찔려 경험론자의 경험이 대신 찢어지고 경험의 틈이 벌어지고

벌어진 틈으로 미지의 액체가 콸콸 흘러 흙이. 숲이. 습함이. 병듦이.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여름은 비참하게 길고 병듦이. 붉음이. 시듦이. 슬픔이.

보잘것없는 상념이. 건조불멸의 시름이. 어지러운 빈혈의 마음이.

깜부깃병에 휩쓸린 보리밭이. 개구리밥에 뒤덮인 연못이. 향토색에 찌든 자연이.
(……)”

-「파훼」 부분


  그동안 근대적 세계관은 삼각자의 정밀한 수치, 치밀한 눈금, 날카로운 계산을 통해 차이를 빚고, 그 차이를 근거로 양자가 대립하는 세계를 구축해왔다. 근대 이성이 “찾지 못한 깊이”에 의해, “부러진 삼각자에 찔려”, “잘못 깊어진 것들에 의해”, 그리고 “잘못 찾은 깊이”에 의해 세계는 줄곧 ‘파훼’되어왔다. 그 때 시신도, 유족도, 곡소리도 없이 장례를 치르던 삼복염천의 상갓집(지구) 속 시인은 이성과 비이성의 ‘틈’을 재차 벌리고 그 안에 “누가 잡초를 움켜쥐고 통곡”하는 소리를 발생시킨다. 그러니 이제는 몸을 활짝 젖히고, 들을 귀를 겸비한 채로 ‘포네phone’들의 시간을 맞이하면 된다.

  시각 중심주의가 우리의 형이상학에 깊이 스며드는 동안, 인간은 시각적·과학적 번역에 의해 세계를 지성의 대상으로 해석해왔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다른 생명존재와 공유하는 ‘비음성’을 잊어버린 우리는 명료한 언어를 취하지 않는 모든 소리를 너무 쉽게 ‘헛소리’로 여겨왔다. 세계라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대한 세심한 청각적 번역을 방기하며 줄곧 굴러온 역사 안에서, 신해욱은 마치 잠수함의 산소 농도가 떨어지는 것을 제일 먼저 감지해내는 토끼처럼 인간의 가청권내에선 감지할 수 없는 신호들을 포착한다8). 마치 바탕음 속 배음처럼 신해욱의 시적 상상은 문장이 되지 못한 묵음들, 유의미하게 발화되지 못한 포네들을 시어와 시어 사이에 삽입해낸다. “말씀에 섞인 광물의 소리. 파문을 일으키는 폐수의 소리”(「비굴착식 승강형 맨홀보수기계장치」)에의 자처가 바로 그것이다.



조율 : 묵음의 크레센도


  신해욱이 절단된 시간의 파편들을 잇대는 성실한 직조공이라면, 윤혜지는 비가시화된 죽음 안에서 잊혀진 시간들을 건져 올리는 예민한 조율사이다. 윤혜지의 그것을 읽노라면 시 한편이 채 전개되기도 전에 엉겁이 흐른 느낌에 당황하게 될 것인데, 독해를 반복하면 행간을 잇는 시인의 사인파가 개인 단위에서 가늠할 수 있는 모든 시공간을 뛰어넘어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제일 먼저 윤혜지가 소묘하고 있는 멸망의 오늘에 주목을 요한다. “피와 빵과 비누 따위를 얻기 위해 수도꼭지든 뭐든 다 팔아먹고 거리로 나온” 아파트의 사람들, 그러나 “더 이상 팔아먹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아파트의 “또 무엇을 떼어 낼까 골몰”하는 얼굴들은 자본의 명령에 과잉-충성해온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학’에 다름 아니다. 작중 ‘굴착기’라는 표상은 자기가 세계를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한 곳으로 빚어냈다 착각하지만, “모든 것을 으스러뜨”리며 “쇠와 쇠가 부딪히는 냄새”로 진동하게 만들어온 경제와 생산, 기술과 개발의 논리를 표상한다. 이 ‘굴착기’에 의해 “파헤쳐지는 침묵”이란 세계가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굴착해온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묵음 형태의 멸망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사로잡힌 세계」).

  아울러 「모든 것을 내려놓은 고양이」 속 “불이 난 광경을 쳐다보며 하나둘 덧문을 닫는 우리의 이웃들” 역시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 파편화된 우리의 생을 보여준다. “조각 케이크 같이 나눠진 세계를 믿는 자들”이 이 모든 대지를 경제 생산의 질료로 여기며 그것들을 자기 맘껏 분화시켜도 되는 대상으로 여겨온 ‘망상의 공동체’를 영사한다. “몰두일까 외면일까”에 대한 시인의 물음 앞에, 이 모든 ‘불구경’이 사실은 가장 차가운 ‘냉담’이었음이 드러난다. 우리가 몹시도 몰두해온 것들의 결과가 이제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부조리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 안에는 이렇게나 무거운 진실이 매립되어있다. 우리의 직관과 직감이 보내고 있는 위기감, 이 묵음의 경고는 이미 크레센도로 너무 많은 것을 말해왔다. 게다가 시인의 이러한 질문에는 인간이 스스로 각성하거나 구원하는 메시아가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땅은 결국 자신의 시간과 아상(我相)대로 그 모든 계획과 무계획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의 가장자리를/걷는 사람들

곧 멸종되는 조개를 줍는다

혹은 죄악 혹은 돌과 나무조각들

모든 것은 제자리에 두고
탐색
작은 것들을 옮겨 담는다

모래를 밟고 서서 물을 바라보는 건 낡고 근사하다 첫눈에 대해 말하는 노인들 같다
계절이 시작되면 그들은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상하지, 오래된 사람들은 늘 처음을 말하고

조개 줍는 사람들 곁에 앉아 조개에 붙은 모래알을 털어냈다 해안가 침식이 심각합니다 너도나도 모래를 퍼가서요 멸종은 조개가 아니라 모래에게 도래한 것 같아요

저기
온갖 것을 묻힌 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갔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한다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 속에 손을 넣는다

모래를 퍼내면 모래는 느리게 밀려간다 더 깊은 곳으로

평범한 것들이 마음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등 뒤에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사건을

잠깐 쥐었다 놓아도 쥔 감각을 놓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집에 가면
목이 긴 유리컵에 조개껍질이 한가득이다
그것을 관상하다, 같은 어려운 말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골라 따뜻한 국물 속에 넣고
죽은 것의
숨구멍끼리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야지 생각했지만 곧 잊혔고, 모두가, 물가에 있었던 기억마저도 쓸려가고, 수심이 깊어져 이제 아무도 조개를 줍지 못할 곳까지 모래는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빈 곳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그런 적이 있었지 하기도 전에 각자가 멸종되고

무너지는 것도 반복이라고

노인들도 죽고 이제 눈 이야기 해줄 사람도 없다 처음을 발음 할 사람도

- 「음악 없는 말」 전문


  “지나간다 지나갔다”거나, “닿았다 떨어진다”거나, “쥐었다 놓는”다거나, “생각했지만 곧 잊혔다”는 공허한 진술의 반복이 이 시에 환기하는 주된 분위기는 잡히지 않을 것처럼 희미하고 허망한 정서이다. “곧 멸종되는 조개를 주으며” “물의 가장자리를 걷는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것은 현재요,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오래된 사람들(노인)”이 살아내고 있는 것은 과거라 가정하고, 이 희뿌연 시공간 배경과 시적 대상들을 교차시켜보자. 그럼 생명의 밀물과 썰물이 모든 것을 영점으로 되돌려놓는 풍광과 포개어질 것이다. 조개와 모래의 멸종, 그리고 이 생몰의 무한한 작용 옆에서 “그런 적이 있었지”라는 진술이 채 종료되기도 전에 “각자가 멸종되고//무너지는” 흐릿한 장면은 “노인들의 죽음”과 함께 까마득한 미래로 순식간에 이동한다. 이제 그 곳에는 “눈 이야기 해줄 사람”과 “처음을 발음할 사람”조차 없다.

  이 급격한 미래로의 전환은 시 안에 등장하는 ‘온갖 것’들을 관찰 중인 화자의 정체를 되묻게 만든다. “관상하다, 같은 어려운 말로 쓰지는 않을 것”이라는 표현만 보아서는 경외심을 갖고 무언가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온갖 것’들의 생몰을 미리 간파하고 있는 절대자로 보이기도 한다. 관찰이나 사유를 제외하고 시 속 화자가 하고있는 동적행위란 무언가를 “잠깐 쥐었다 놓는” 행위, 즉 ‘장악(掌握)’이 유일한데, 무언가를 손안에 잡아 쥐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장악’은 이 화자가 마냥 평범하고 단순한 관찰자로 배치되지만은 않았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그 “쥔 감각을 놓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화자의 진술은 그것들을 손아귀에 잡아 쥐는 화자의 태도가 마냥 성급한 거나 폭력적이지만은 않아 보이고, 나름 슬로우모션의 윤리를 고수 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닳은 돌들을 “함부로 쌓지 않고 바다로 던져버리고” “그것의 고리에 영영 붙어 있을 흰 그림자”가 “헤엄치는 모습”을 끈기 있게 지켜봐주는 「희고 흰 빛」 속 화자의 태도에서도 관찰된다.

  이 절대자는 세계가 “땅속 기름과 가스파이프 같은 것들에 의존하는 미적 구성체”9)라는 사유의 확장을 유도한다. 즉 세계가 바깥에 노출되어있는 구조물보다 매립되고 감춰져있는 메커니즘의 작용에 의해 영위된다는 사고를 촉구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윤혜지의 화자 역시 매끄러운 지구 표면 위로 드러난 벚꽃의 탐스러움을 향해 “진짜 아름다우면 도리어 가짜”라 말하는 반면, “아름다움은 죽은 것들의 몫”이라고 말한다(「작은 종」). 시인이 포착중인 아름다움은 정녕 이런 것이다. 현실의 지평 아래 고여 있는 죽음들 – 가령 “화약과 산딸기와 죽은 짐승이 타는 냄새”, “냄새를 뿜으러 천천히 떠다니는 죽은 별들” - 이 그것이다. 요컨대 시인은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 죽음, 무언가의 내부에 고여 있는 것들 안에서 다만 세계의 진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 가득한 벽을 수집하는 사람이 고고학자만 있는 건 아니”라는 문장(「큰 동물의 작은 뺨」)처럼, 윤혜지는 매립된 진실의 발굴을 시인된 자신의 본령으로 관철시킨다.

  서로 전혀 다른 결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앞선 신해욱의 파동과 윤혜지의 파동은 서로의 위상을 보강하며 그 진폭을 확대한다. 그들이 공명하는 지대는 ‘생명이 소음의 필연’이라는 믿음의 지대이다. 무소음은 우리 청각을 본능적으로 불편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반면, 백색의 소음에 둘러싸인 순간 우리 귀는 비로소 이완된다. 이러한 소음의 세계에 활자 예술을 대입해보면, 시는 우리의 가청권과 시간적 인식 바깥에 존재하는 잊혀진 소리들의 귀환을 촉진하기 위해 스스로 백색 소음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백색소음이 “감각의 대상” 아닌 “감각의 조건”, 즉 “소리에 속박되지 않으면서 소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10)이 되듯, 시 역시 세계의 진실에 의해 죽지 않으면서도 세계에 진실을 던지기 위한 조건이 된다.



순연 : 멸망 속 유머레스크


  앞선 윤혜지를 비롯한 젊은 시인들의 근래 시편들 속 유감없이 발휘되는 묵시록적 상상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SF시, 기후문학, 생태문학의 타이틀을 자처하거나, 시어에 위압적인 기후 현상과 인간의 심적 위기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지 않아도, 그들의 시는 종말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 성찰을 완곡한 방식으로 던진다. 다만, 구원과 종말, 생과 죽음, 천국과 지옥의 교차 아래 등장하는 그들의 절대자 형상은 모두를 멸하러 온 심판자나, 구하러 온 메시아도 아니요, 세계의 멸망에 가슴을 찢고 포효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경유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심장한 의미를 던진다.

  그 중 한여진의 시 「힐튼호텔」(《자음과모음》 2024 봄호)에도 석가모니 이후 세상에 내려와 모든 중생을 구제한 절대자 미륵보살이 등장한다. 영업이 종료된 호텔에서 “결국 미래가 오고 말았다”는 말과 함께 깨어난 미륵보살은 아무도 없는 텅 빈 호텔의 곳곳을 돌아보며 생명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처를 향해 말한다. “당신도 죽고 당신의 약속도 죽고 구제해야 할 중생도 없는” 이곳이 어쩌면 “너무 늦게 도달해버린/천국”.

  이렇듯 모든 게 절멸해버린 공간에서 천국을 발견한 미륵보살은 “처음으로 살아 있는 몸”이자 동시에 “죽어가고 있는” 존재가 되고, “부처가 되지 못한 자신의 얼굴”에서 엉뚱하게도 “애틋한 것, 어여쁜 것, 수줍은 것, 가여운 것, 어지러운” 한낱 마음들을 읽어낸다. 이 ‘마음’의 정체는 대관절 무엇이건대 한여진의 시적 주체들이 그것을 찾아 부질없이 헤매게 할까. 이는 「내일 날씨」 속 ‘화자’와 ‘기린’이 나누는 대화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는데, 과거(“지금과는 달랐”던 날씨)-현재(“이전 같지 않은” 날씨)-미래(“오늘과는 분명 다를” “내일의 날씨”)라는 선형적 시간 매트릭스 안에서 화자는 자신이 “가지고 가야 할 것은 이미 여기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화자가 걸음을 옮긴 곳은 바로 다음 수록작 「검은 절 하얀 꿈」 속 “겨울이 도착하고 있는” ‘절’과 ‘꿈’으로, “죽지 않고 도착”한 그곳에서 화자는 “곧 내가 찾는 것을/찾게 되리라” 예감한다.


“(……)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은 조용하고 둥글다 그것은 초록색과 파란색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색을 띤다
그것은 불타오르며 깨진다 그것은 눈을 감는다 침묵한다 그것은 알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둥그런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자주 형태를 바꾸고 색깔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되었다가 나를 이 절로 보낸 사람이 찾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이 절에 있다 그것은 이 절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절 마당에 있는 연못도 아니고 연못에 기울어진 버드나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울어진 버드나무를 더 기울게 만드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
내가 찾는 것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이 되는 그것은 불빛 그것은 굴러가는 토마토 그것은 이국의 사람들이 마시는 뜨거운 홍차 그것은 향기 그것은 허기 그것은 치통 그것은 늙은 개의 얼굴 그것은 울리지 않는 전화벨
그것에 손을 가져가면 순간 사정없이 깨어져

무수히 많은 파편들은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르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

-「검은 절 하얀 꿈」 부분


  “하얀 눈/정지한 세상/고요하고 무궁하게” 존재하는 꿈결 속에서 그녀가 찾아낸 “무수히 많은 파편들”, 즉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르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 그것, 동시에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그것은 앞서 살핀 시 속 미륵보살에게 도달했던 마음 -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 그것과 - 나란히 놓인다.

  이렇게 마음을 찾아 헤매는 인물들의 여정은 「겨울소설」 속 “살려고 쓰는 나와/쓰기 위해 산다던 너”의 존재에서 구체화된다. 작중 귤 농장에는 “혼나지 않기 위해 귤을 따야만 했던” 추억을 공유중인 ‘나’와 ‘너’가 있다.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오늘도 쓰고 있는” 그들은 “귤 한 알 열릴 때까지/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가늠 중인데, 여기서 그들의 ‘쓰기’는 무언가를 기록하고 집필하는 행위뿐 아니라,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소모하는 차원의 행위까지 포괄하며 중의성을 띠게 된다.


“어제와 엊그제와 모든 삶이
거대한 기록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
침대보엔 마른 귤껍질들이 뒹굴었고
우리가 속삭인 비밀들을 먹고 자란
귤나무는 다음해 무엇을 피워낼까

(……)
마을 너머에 살던 어른들이 찾아와 항의를 했지
귤을 먹었더니 글쎄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게 됐다나

그건 귤껍질의 흰 속살처럼
달걀의 속삭임처럼 병아리의 마음처럼
작은 너와 나의

이야기들이었지
시키면 팔꿈치를 핥고
독뱀을 잡아 멀리 풀어준 일을
어떤 나무는 악취 탓에 뽑히기도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도록 태어난 사람의 운명을
모든 여행자는 끝내 정착하고 만다는 사실을
가여워하던 너와 나의 전부가

속속들이 까발려지고
노래가 되었는데 그래도
끝나지 않던 얘기들

농장 주인에게 흠씬 맞은 날
황금빛 알갱이 같은 눈물이 툭툭 쏟아지고

다 때려치우고 글이나 쓰며 살고 싶다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무를 키워내고 또 귤 한 알 열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쓸 수 있는 것과
써야만 하는 것

그런데 사람들은 쓸모없는 건 돈 주고 사지 않는데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우리가 그럴 수 있니
귤을 까서
서로의 입에 넣어준다

(……)
다 때려치우고 따듯한 귤이나 되고 싶다 생각한다“

-「겨울소설」 부분


  “이런 건 상품 가치가 없다”는 어른들의 말과 “쓸모없는 건 돈 주고 사지 않는” 사람들의 말이 논하는 쓸모의 경제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려의 대상이 전혀 아니다. “속삭인 비밀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틔워낸 귤나무와 “작은 너와 나의/이야기들”로 틔워낸 한 알의 귤은 “서로의 입에 넣어”지는 순간 “끝나지 않던 얘기들”이 된다. 이 식목 작업이 형상화하는 시간-쓰기, 글-쓰기, 이 모든 걸 종합하여 ‘계속 쓰-기’가 틔워낸 상징적 결과물 ‘귤’ 한 알이며, 이 하나의 실과(實果)는 결국 한 편의 시가 된다.

  창작을 향한 작가 자신의 고백처럼 읽히는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를 통해 논의를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작중에는 “자신만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을 만들며” 남을 죽이는 방식으로 오래 살아남아온 남자 형상의 절대자가 등장한다. 또 “쓸모 있어지기 위해” 노래, 시, 그림과 소설을 만드는 ‘원숭이’, 그리고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들”을 만들겠노라 다짐한 화자(‘나’)가 등장한다. 이 몽상 공간 속 ‘원숭이’는 화자의 분신으로 보이며, ‘원숭이’의 결과물은 자기 목적(쓸모)을 달성하지도, 절대자의 그것을 능가하지도 못한 채 소진되어버린다.

  반면 ‘나’는 “낮과 밤/밤과 낮//그 틈 속”을 몸소 경험한다. 그리고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사는 사람은 평생 시차에 시달린다”는 사실과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생체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리고 이는 ‘나’의 창작 동기의 변화로 이어진다. 다음 인용을 확인하라.


“(……)
그리고 생각한다.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고 그리고 오래 살았다는 남자를 찾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지어주게 될 나의 미래를”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 부분


  직접 ‘시간의 틈’을 언급하며 그 안에 놓인 “진짜 이름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즉 잊혀진 것들을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직접 언명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실상 시인 자신의 맹랑한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동시에 “오래 살았다는 남자”, 즉 절대자를 찾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지어주게 될 시간”을 “나의 미래”로 선포하는 대목은 당당함을 넘어 도발적이다. 꿈속에서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던 초월자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화자의 방식은 기존 묵시록 계열의 시편 속 무력한 화자들의 형상과 엄연히 구분된다.

  이 외에도 「Beauty and Terror」 속 “번지는 불길 앞에서 우리는 곧 재가 될 사람들”이라는 진술이나 “아주 먼 훗날//자 여기 이런 것이 있었다”는 진술이 참담한 기후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결말이라도 당신과는 나누지 않겠다”고 신에게 선포하는 화자는 비극적 관념론의 감성적 분신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요컨대 한여진에게 ‘죽음’이란 “당신은 당신의 결말을 향해 우리는, 우리의 결말을 향해” 가는 일이고, ‘삶’ 역시 “너는 너의 일을 하”듯이 “생은 생의 일을 하는 것”(「터널 지나기」, 《자음과모음》 2024 봄호)에 불과하다.

  대신 한여진은 “어딘가에 들러붙어 까만 얼룩을 남기는” 존재들이 드리운 현재성의 그림자 속에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에 하나의 “까만 얼룩”을 새겨주기 위해 먼저 죽음을 향해 앞질러갈 뿐이다. 우리가 이 종말을 모면할 방도는 없지만, “구원을 기도하는 고전적 비극의 장엄한 레퀴엠” 되기를 거부하는 이 ‘가벼움의 감응’은 자신이 무엇을 남기고 죽어야 할지에 대한 통렬한 고민을 토대로 써내려간 “반음계주의적 ‘유머레스크’11)”이다. 「겨울소설」 속 “쓸 수 있는 것과 써야만 하는 것”에 대한 시인의 곱씹음 역시 멸망 안에서 시인이 자기 시적 세계를 어떻게 주파해야 할지에 대한 내면의 고민이고 응답이다. 미리 종말의 시간을 상상함으로써 현재를 연장시키려는 자들이 있다면, 미리 종말의 시간을 삶으로써 종말을 순연해보려는 자들이 있다. 여기서 한여진의 시는 명백히 후자이다.



씀의 씀씀이 : 짜고 맞추고 잇기


  안정된 기후가 영속될 것이라는 믿음, 매끈한 과학 진술과 기술이 예고하던 해피엔딩……. 이 모든 전망이 사실은 인간의 지독한 오해였음이 드러났다. ‘의사 진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진술 심지어는 사이비 진술로 곡해되어왔던 시의 시간도 현실과 허구, 진실과 비유가 뒤섞이는 세계의 극공에서 되찾아진다. 아니, 되찾아진다는 말보다는 줄곧 거기, 내재적이고 시간적인 객체들의 레퓨지아로 존재해왔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다만 지금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은 종말이 확정된 순간에라야 문학의 효용도 극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단발성의 믿음보다, ‘계속 쓰-기’를 통해 진실 아닌 진리를 꾸준히 입증하려는 시간성의 믿음일지 모른다. 들을 귀 없는 곳에서 ‘계속 쓰-기’를 향한 믿음을 붙드는 일이 너무 쉽게 ‘문학의 불가능성’이나 ‘무용론’으로 귀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진정성에의 주창이 ‘소박한 자기 변론’이라는 오해로 직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또 그에 못지않게 공식화할 토대를 잃어버린 ‘진정성’에 대한 근본적 차원의 고민도 요구된다. “더 크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본연의 모습이 되는 과제에 있다”12)는 공식 앞에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이 결국 ‘자기성’, 즉 ‘인간성’에 있다는 식의 오해는 곤란하다. 석탄의 힘을 전면에 걸고 내달려온 식민주의 정치, 편리와 효용을 구호로 걸고 줄곧 작동해 온 경제의 뿌리를 파헤쳐보면 결국엔 세심하지 못한 ‘진정성’의 논의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는가. 또 자연, 비인간에 대한 지나친 개념화, 대상화가 역설적으로 다른 담론을 지배하며 발생해온 또 다른 진정성의 왜곡도 논외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바다거북과 북극곰이 인간과 대립하고 있긴 한 걸까? 자연과 지구는 반드시 조화와 협력으로 채색되어야만 하는 관계인가? 이 기후 격변이 곧 비인간의 정치적 복수이며 연결성의 회복만으로 상당 부분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도 결국엔 기후에 적응할 방법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려는 인간의 욕망 아닌가?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멸망 안에 비멸망이, 종말 안에 구원이 이미 들어가 서로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한다. 동시에 이 모든 물음은 비인간의 행위소가 되려는 우리 열망이 결국 또 다른 주체의 답습 아닌지에 대한 통렬한 자기 점검과 나란히 놓여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의 기후 문학이 지구의 시선으로 인간을 보는 모종의 투시주의를 자처하며 지구를 주어로 삼고, 스스로 그 주어되기를 자처하는 식의 공회전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 행성은 항상 각양각색의 생명체,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 여겨져 온 것들이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뒤섞고 각축해온 과정 그 자체였다. 그 모든 과정과 담론을 선행하는 유일한 명제가 ‘시간’이라면, 시인은 당김음의 작용 안에 존재하는 ‘과거’의 기억, 지나간 선율 속에 지속 중인 ‘지금’의 진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결정의 음을 기대하며 당겨쓴 ‘미래’13)의 틈에서 시작(詩作)을 매일 새로이 시작(始作)한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의 파동과 마찰로 짜인 한 편의 론도. 초저주파와 저주파에 흩어진 자모음을 잇대어 만든 한 편의 교향곡. 나는 그 선율이 시와 다르다면 또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신해욱, 한여진의 시집은 다음과 같다. 신해욱,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년.; 『syzygy』, 문학과지성사, 2014년.; 『무족영원』, 문학과지성사, 2019년.;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봄날의책, 2024년.; 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년.; 윤혜지의 시는 이하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을 참조한다. 『시보다 2022』, 문학과지성사, 2022년.; 『시소 두 번째 : 2023 시소 선정 작품집』, 자음과모음, 2023년. 이하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작품명만 표시한다.
  • 2) 임태훈, 「기후소설cli-fi를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 3) 박동억, 「생태적 아노미와 기후시」, 『현대시』 2023년 7월호.
  • 4) 티모시 모턴, 『하이퍼 객체』, 김지연 옮김, 현실문화, 2024년, 212쪽.
  • 5) 이지선, 「트리니티의 오펜하이머와 코펜하겐의 하이젠베르크」,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175-178쪽.
  • 6) 최진석, 「행성의 시학: 인류세와 기후위기 시대의 시적 조건들」, 『한국시학회 제52차 전국학술대회 논문집』, 한국시학회, 2023년, 60-68쪽.
  • 7) 신해욱, 『창밖을 본다』, 문학과지성사, 2021년, 22쪽.
  • 8) “(...)우유를 먹고 자란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지붕 위에 던진 젖니를 모아/차근차근 탑을 쌓아보면 어떨까//(...)그런 탑의 꼭대기에 까마득히 서서/젖니를 혀 밑에 숨긴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모르는 이야기에 닿으면 좋을 텐데.//내 목에는 묵음들이 가득 고여 있으니까.//묵음들 속에는 생각이 없으니까.//내가 놓친 소리들이 가청권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뮤트」)
  • 9) 티모시 모턴, 앞의 책, 216쪽.
  • 10) 신해욱, 앞의 책, 16-17쪽.
  • 11) 이진경·최유미, 『지구의 철학』, 그린비, 2024년, 408-410쪽.
  • 12) 찰스 귀논, 『진정성에 대하여』, 강혜원 옮김, 동문선, 2005년, 19쪽.
  • 13) 에드문트 후설, 『시간의식』, 이종훈 옮김, 한길사, 1996년, 87-89쪽.

추천 콘텐츠

민가경 비스듬히 남은 밤의 노래

"누구도 깊은 지옥에 빠져 있는 사람들보다 순수하게 노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천사들의 노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들의 노래입니다."1) - 1920년 8월 26일,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 일부  카프카의 이 문장은 고통 한가운데 있는 존재가 그 고통의 진실을 가장 정확히 노래할 수 있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특히 그가 '지옥에 있는 이들의 노래'와 '천사의 노래'를 포개며 강조한 '순수'는, 어떤 도덕적 무결이나 청정한 영혼을 향한 헌사가 아니다. 고통의 심연이 낳는 진실성과 절실함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윤은성 시의 화자들이 겪는 존재론적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뜨려 내는 노래 사이의 간극을 떠올린다.  윤은성의 시는 일관된 내러티브보다, 기억의 파편과 사물 중심의 인상을 모자이크처럼 배치한 구술 대화 형식이 두드러지는데, 이 시 세계를 더듬더듬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유토피아'가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으로 변해가는 과정의 끔찍함을 새삼 목격하게 된다. 본디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뜻하는 유토피아가 언제부터인가 이상적 사회에 대한 열망이 되어버릴 때, 그리하여 모두가 향하려는 푯대가 될 때, 그 길목에 방해가 되는 요소나 돌출된 존재들을 제거하려는 폭력도 정당화되는 아이러니 말이다.  그렇게 유토피아를 위한 폭력이 용인되는 모순의 길목에서, 시는 덜컥 멈춰 선다. 그리고 묻는다. 왜 유토피아와 폭력은 늘 항상 함께 나타나는가? 유토피아 추구 이후의 세계는 왜 유토피아 기획 이전의 세계보다 너덜너덜해졌는가? 이 물음 안에서 다시금 카프카의 문장을 경유해 보면, 이런 우리마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사들의 노래가 단연 유토피아적 합창이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시는 바로 이 유토피아적 합의 바깥에서, 고통받는 자들만이 들려줄 수 있는 노래를 '순수'의 음색으로 형상화한다.  그런 점에서 윤은성의 시 세계는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원형의 공동체가 지녔던 본원적 조화를 되찾아야 한다는 강박, 즉 유토피아를 향한 집착적 도식이 부재하다는 점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윤은성의 세계에서 조화는 2차적인 결과로만 성립하고, 차라리 불화가 더 자연스러운 상태로 제시되는 듯하다. '조화로운 세계'는 결국 불화를 길들이기 위한 인공적인 요소와 문화적 장치가 이미 개입되어 있는 사후적 상태이기 때문일까. 유토피아니즘이 세계의 모든 불협화음을 소거하고 전체주의적 폭력을 낳으려 할 때, 윤은성은 그 지옥 밑바닥에서 퇴적되고 있는 불화의 감정과 부식되고 있는 비언어들을 끌어내 서로의 '남아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즉 완성된 합창이 아닌, 조율 불가능한 음들이 서로를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불안정한 코러스, 그것이 윤은성의 '순수한 노래'이다. *  먼저 기 발표작 「남아 있는 여름」에서 화자가 변주해 내는 '사라짐'의 교차 상태를 먼저 살펴보자. 시의 도입에 해당하는 1·2연은 어떤 과거나 몽상에 대한 화자의 회상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어, 시 전반에서 가장 미래적 위치에서 진술되는 듯 보이며, "나는 사라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뒤따르는 연들은 대부분 유년의 파편을 모자이크처럼 배열해 도입부보다 더 먼 과거로 후퇴하며, 화자는 '없다/있다/사라졌다/죽었다'와 같은 실존 서술 대신 타자의 상태 '없음/있음/사라짐/죽임'을 "알았다"고 기록한다. 여기선 인식 서술, 즉 타자의 흔적에 대한 관찰적 입장이 강조된다. 특히 "죽지 않은 개, 잡히지 않은 개, 버린 개, 홀로 살아난 개, 뜬 장 밖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개"를 감지하는 대목은 화자가 가시권 밖 생명의 잔존을 깨닫는 장면이다. '뜬 장'조차 그들의 존재론적 조건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어 화자의 "나는 사라지지 않고 뱀에게 나타났다"는 현상 서술까지, 이 모든 서술을 시간순으로 종합해보면, 화자는 (1) 존재의 사라짐을 '인식'하고("사라짐을 알았다"), (2) 소멸과 출현이라는 '현상'을 목격하며("나는 사라지지 않고 뱀에게 나타났다"), 종국에는 (3) 자기 '실존'의 불안정성을 체감하는("나는 사라진다") 흐름 속에 놓인다.  존재의 사라짐과 나타남을 반복적으로 교차시키는 방식은 시 전반에 걸쳐 유지된다. 가령 "옆 마을 돈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 장면에서 화자는 "시가 돼지의 몸으로 타버린 걸 상상"하고, 소각되는 돼지의 육체에 각인되는 시를 목격한다. 이때 화자에게 '시'는 종이 위 문자 형태가 아닌, 고통으로 불타오르는 육체 위에 선연히 각인되었다가 부서진 무언의 메시지다. 그렇게 "글자들이 살에 눌러 붙었다가 부서지는 시간 내내" "타고 있는 시를" 본 경험은 화자에게 있어 '소멸' 중인 문학이 가장 강렬하게 '현현'했던 경험으로 남게 된다. 게다가 화자는 자신의 탄생이 "문화적인 이유", 즉 국가, 사회, 가부장 질서가 요구한 상징적 자리로 호출되었음을 자각할 때 극심한 혐오에 사로잡힌다. 타오르던 돼지를 떠올리며 "내 얼굴과 팔을 자주 더듬었"던 것처럼, 자기 실존에 새겨진 문화적 기호를 자각하는 일은 자기혐오의 "살점들이 차오르는 기분"과 함께 신체화되고, 이는 "붙어서 함께 썩는 시"로 이어진다.  그러나 시는 완전히 다 썩지도 못한 채 죽음 이후에도 증식하는 생명의 잔향이자, 정동적 유령의 형태로 후반부에서 다시 포착된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 부수어"진 건물, 끝내 "담을 다 고치지 못하고" 죽은 아랫집 노인, "내 아이가 담 위에서 놀 때 마침 무너"지는 장면의 교차는 미완의 담장이 결국 세대를 돌아 끊임없이 회귀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아랫집 노인은 죽음 이후에도 "태몽을 자꾸 내게 일러주러" 오는데, '죽은 자'가 반복해서 전하러 오는 '태어날 자에 대한 메시지' 앞에서, 화자는 대가를 제공할 수도, 또 마냥 대가를 받을 수도 없는 양가적 위치에 놓인다. 이때 "덜덜 떨며 풀포기를 붙잡"을 뿐인 화자는, 여름의 생명력과 뜨거운 햇살 아래 끈질기게 증식하는 풀처럼, 자신의 등에서 거세게 재탄생 중인 '시'를 붙잡아 보려는 듯하다. 이처럼 끈덕진 여름의 귀환과 땡볕 같은 폭력적 생존 조건에도 완전히 포섭되지 않고 악착같이 증식 중인 생명은, 세계의 폭력과 동시에 그 폭력 바깥에 아직 '남아 있는' 존재 양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남아 있음'의 양가성은 윤은성의 두 번째 시집 『유리 광장에서』에서도 예고돼 있었다. 가령 수록작 「남은 웨하스 저녁」 속 '엄마'의 "들리지 않는 한쪽 귀에 / 들리는 소리가 / 남아 있는 세계"가 그러하다. 이 진술은 얼핏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여도, "들리지 않는 귀"에도 잔존하는 소리가 있다는 세계의 원리를 암시한다. 또한 「명의 변경」은 "찢어진 곳들은 / 찢어지고 있었고 / 찢어지다 멈춘 곳은 / 찢어지다 멈춘 대로" 남는 세계를 보여준다. 끊임없이 파열되면서도 그 파열에 모조리 다 파괴되지 않는 감각의 찌꺼기, 삶의 조건이 박탈된 곳에서도 온전히 다 박탈되진 않고 '남아 있는' 삶을 말이다.  이에 더해 '남아 있음'을 다시 제목 삼은 신작 「남아 있는 사회」에는 '미친년'으로 불리면서도 춤을 통해 말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동계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가고 있었"던 시절, 화자는 춤을 추지만 가족은 배춧국 속 "숨이 죽지 않"은 배추를 씹으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단지 "입들 속으로 초록"을 삼킨다. 가족의 얼굴은 일상과 생계의 영위를 위해 설익은 국을 바삐 해치우는 침묵의 표정으로 보이고, 여기서 잉여화된 존재(화자)의 춤은 기실 침묵과 억제의 환경이 유도한 감정적 잉여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진술이 이어진다. "내가 춤을 추었기 때문"에 가족들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반대로 화자는 "개의 이마를 만져야 나는 / 춤을 추지 않을 수 /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언뜻 인과적 연결처럼 보여도, 춤의 역전된 주체성을 보여준다. 가족들의 무관심은 화자의 신체적 과잉을 유도하는 반면, 개와의 접촉과 연결은 '나'의 정서적 표출(춤)을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침묵으로 발생한 '나'의 춤은 동시에 그들의 침묵을 강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쇠줄을 목에 달고" 춤의 정동에 유일하게 감염된 개와의 접촉은 가족의 그것과 상반되는 방식으로 화자의 정념을 조율한다.  그러나 화자는 돌연 "짐 없이 홀가분한 / 영혼 하나만 남겨줘야 한다"며 개의 중성화를 결심한다. 앞서 개의 이마를 쓰다듬던 화자가 '돌봄'과 '통제' 중에서 스스로 더 내면화한 '통제'의 언어가 불쑥 튀어나온 순간이다. 이렇듯 생명 정치란 상호 돌봄을 일방적 훈육으로, 애착을 규율로 변질시키는 충격의 순간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신이 너무 많다"는 화자의 탄식처럼 쉽게 판단하고, "두 개의 영육 중 굳이 약한 쪽에 / 생명이 들어선다"는 관찰 아래, 개의 영과 육을 철저히 이분화하며 결과적으론 그 어느 쪽에도 생명이 들어앉을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렇듯 화자에게 '춤'이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최후의 방식이었고 개는 그 증명을 잠시간 보류해 주는 위안이었지만, 그것을 잃은 이후 화자는 "내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게 / 증명이 되지 않아 / 애먹"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 찾아온 여름, 화자는 이제 자신을 어엿하게 "근로를 할 줄" 아는 명랑한 인간이라 규정하지만, "마을의 여자들이 웃다 춤추다 하는 / 또 다른 여름"의 광기와 "개가 뛰다 돌아오다 / 나를 데리고 / 멀리 가기도" 하는 환영 사이에서 다시 한번 '남아 있음'의 의미를 되묻는 듯하다. 이는 통제와 규율의 여전한 자기 보존적 습성을 가시화하면서도, 동시에 '(사라질 뻔했으나) 남아 있고', '(죽임당할 뻔했으나) 남아 있고', '(종결될 뻔했으나) 남아 있는' 존재들, 즉 끝내 제거되지 못한 희망 또한 희미하게 잔존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반면 「저지대」에서 개와 화자의 관계는 다르게 전개된다. 개는 여전히 인간 언어로 응답하지 못하는 동물-타자이지만 "곁에서 / 잠이 들었다가 깨고 꼬리를 흔들고 / 담요를 물어뜯고 / 부르면 놀"라는 몸의 언어로 화자에게 끊임없이 반응한다. 화자는 이 개와 "답 없이 물음만으로도" 대화를 이어간다. 개의 숨소리를 들었지 하루쯤 더 맑은 마음으로 살고 없고 동맹을 맺고 불안해한다 가까스로 구름을 바라보게 되는 들판 우주가 지금도 넘실거리고 있단 것을 매일 새롭게 믿는 어린 과학자처럼 화분에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다시 동맹을 맺는다 눈이 녹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하는 겨울에 개를 데려왔다 그는 무언가 잃어버렸고 - 「저지대」 부분  화자는 "우주가 지금도 넘실거리고 있단 것을 / 매일 새롭게 믿는 어린 과학자"의 낙관을 토대로 "화분에 물을 주고 / 지지대를 세워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는 단지 '돌봄'이라는 정의로 환원되기는 어려운, '동맹'이라는 정치적·계약적 관계로 명명되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 권력관계가 기실 돌봄에 내장되어 있음을 기억해 두도록 하자. 그리고 '동맹'은 서로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모종의 상호 계약이며, 근본적 불안을 안고서 계속 가꾸고 갱신해 나가야 하는 관계이다. 즉 동맹은 어떤 감정적 유대나 윤리적 조건에 앞서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우는 구체적 실천이 선결돼야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와 개가 "다시 동맹을 맺"을 때마다 그들의 관계는 새로 구축되고, 늘상 반복되는 풍경도 그들에겐 "처음 보는 광경"으로 열릴 것이다. "눈이 녹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하는 겨울"은 아직 '개'와 '나'가 함께 발자국을 남겨 본 적 없는 순백의 공간이 되고, 그 위는 "우리가 처음으로 디뎌도 되는 / 눈"으로 가득하다. 시인은 이렇게 완결될 수 없는 윤리를 전면에 내걸고, 동물-타자와의 지속적 질문으로 세계를 조정하려 한다. 신뢰는 매번 점검돼야 하고, 동맹은 갱신의 가능성과 함께 실패의 가능성을 늘 염두해야 할 것이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과 예민함이 연대의 감각을 공들여 구축하게 만드는 윤리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2). 그런 점에서 제목 '저지대'가 지시하는 '낮음'(低)은 곧 동물-인간의 관계 안에서 동물이 인간보다 서열상 아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동물 동맹 자체가 "살고 / 없고"를 반복하는 불안정한 저지대 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조적 폭력의 가능성에 의해 돌봄이라는 지반이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변해갈 때, 윤은성의 노래는 예민한 떨림과 흔들림의 감각이야말로 모든 관계 맺음의 기초 정서임을 순수하게 드러내며 '동맹'을 그 대안적 관계로 제시하는 것이다.  「비 냄새 맡기」 역시 이러한 관계성을 잘 보여준다. 이 시는 도입부터 화자가 "계속 말을 걸"겠노라고 말하고 있기에 언뜻 시 전체가 '말'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처럼 보일 수도 있다. 화자에게 '말 걸기'란 "봄에 태어난 /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정의되는데, 여기서 화자의 '말 걸기'란 단순한 의사소통 기술이라기보다, '외존(外存)'이라는 존재 고유의 습성으로 형상화된다고 보아야 한다. 네가 네 얘기를 해주기 시작하면 또는 말없이 많은 사람 틈을 부딪치지 않고 걷게만 되면. 다져진 땅의 말. 돌 밖으로 가지 뻗는 나무와 새의 말. 다시 먼 육지의 말. 그러다 같이 걷기만 하거나 들어줘서 행복해졌다고 나는 고백할 수도 있고. 가끔은 놀라며 날아가는 작은 새나 꽉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를 보느라 한눈도 팔겠지만. 너무 어려운 일이 많은 날엔 부끄러운 날엔 긴 산책을 조금 더 하면 되지. 그런 것도 듣는 일이 된다는 걸 배우고 또 배워. - 「비 냄새 맡기」 부분  여기서 '말 걸기'와 "네게 온통 귀 기울이는" 청취의 자세는 화자의 몸에 깊이 각인된 존재론적 특질이자 모든 자기 바깥의 존재와 관계 맺기 위한 방법론이다. 그렇기에 때론 인간 언어를 가뿐히 뛰어넘어 "돌의 말, 전기의 말", "다져진 땅의 말 / 돌 밖으로 가지 뻗는 나무와 / 새의 말", 그리고 "다시 / 먼 육지의 말"로 그 채널을 확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화자가 '말'의 가능성에서조차 한 지점 더 나아가 '말'의 대체 가능성을 탐색하는 대목에 주목하라. 말 걸기와 듣기는 "같이 걷기만 하"는 침묵, 다른 사물에 "한눈도 팔"곤 하는 지연, "긴 산책을 조금 더 하"는 유보로도 충분히 대체된다. 단지 여기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제목의 '비 냄새'처럼 자신의 온 감각 체계를 동원해 타자의 존재 양식을 "배우고 또 / 배워"가며 세계 속 '말'의 스펙트럼을 확장해 가는 지속적 훈련이다. *  그러나 이런 훈련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데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지고, 누군가의 숨을 들이마시고, 음식을 나누고, 흥겨운 노래와 함성을 섞고, 어울려 춤추는 행위까지, 모두가 '너'의 감각 체계를 "배우고 또 / 배워"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너'라는 존재에 중첩되어 보기 전까진 몰랐던 '너'의 고통, 생의 끔찍함을 조금씩 분할해 가지게 된다. 저 멀리서 부정적인 감정의 파도가 보이면 일단 회피해 보는 게 미덕이라는, 일종의 '세련됨'을 자처하는 믿음이 부적처럼 통용되고 있는 지금-여기다. 훈련의 미덕은 점점 더 생경해져만 가는 이 땅에서, '굳이' 비틀릴 대로 비틀린 '너'와 '나'의 이음새를 다시 교차시켜 보려는 윤은성의 인물들은 그 자체로 '저항의 형상화'가 될 때가 있다.  이 가운데 '노래'는 화자들의 핵심 제스처다. 가령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유리 광장에서』(도서출판 빠마, 2024)의 「먼 곳에 놓이려고」에는 "접시의 사금파리를 모으며 / 질문 없는 답변을 노래처럼 읊조리고" 있는 화자가 등장한다. 여기서 깨진 접시는 한 여자가 "자신이 말하지 못한 게 무엇인지 / 깨닫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또 무엇인지 / 찾느라" 떨군 찻잔으로, 그 사금파리는 감정의 파편이자 차마 언어화되지 못한 고통의 조각들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이것들을 모으며 노래를 읊조리는 동시에 "들렸다 사라지는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 새벽의 노래는 비록 아침이 되어 "더 작게 바뀌"지만, "질문하는 방법을 모르는 채 아프고 / 아픈 것도 모"르며 자기 역사를 건너온 여성들의 '질문 없음'에 화자가 되돌려준 노래는 그 자체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며, 비발화에도 응답하는 대안 언어가 된다.  「노래할 차례」 속 '노래' 역시 언어를 공유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잇는 신호이자 저항의 언어로 등장한다. 작중의 한 마을은 "소들이 자면서 서로에게 나직한 / 노래를 불러주는 것을 / …(중략)… 평범한 축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느 날 "가장 노래도 잘하고 / 돈도 잘 벌어다 주는 소들이 택해지"며, 마을 구성원 "모두 얼어붙거나 울적"해진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소들이 지친 하루 끝 서로의 감정을 서로의 귀에 들려주는 차원의 의미였고, 여기선 음정도, 박자도, 음색의 조화도 현란한 가창력도 요구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협화음도, 어긋남도, 중단도 허용하는 그 합창은 그들에게 "평범한 축복"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범한' 노래 능력을 보이는 '특정' 소가 경제적 가치로 평가되고, 이것이 소를 착취하는 자본 논리와 병치되었으니, 마을에 슬픔이 깃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벌금형을 받"은 '그'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를 관찰 중인 화자도 있다. 화자는 "소가 하는 말을 천천히 옮겨 / 적"을 줄 알고, "법정에 서기 전" "떨고 있는 그에게" "소들이 편안해 보"인다고 대신 일러준다. 이러한 정황은 인간 언어의 공간인 법정에 서 있는 '그'와 화자의 관심이 여전히 '소'의 고통 유무에 있으며, 그들과 '소'의 정서가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들은 "소와 함께 풀과 과일을 먹지 않았다면 / 알아듣기 어려울 // 선언 이후의 노래를" 진즉 듣고 있고, "노래가 아닌 것은 이제 보이콧 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정이 '그'에게 내린 벌금형과 소들의 노래는 대조적인 자리에 놓이고, 소들의 '노래'를 향한 세계의 선택과 배제 메커니즘은 그들에게 오히려 반항의 결심으로 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보이콧 대상("노래가 아닌 것")은 곧 엄선된 소들의 노래, 인공적으로 기획된 천상의 노래일 것이다. 그러나 "노래가 아닌 것"이 아닌 것, 즉 그들의 '노래인 것'은 서로의 고통과 심연을 나직하게 어루만지는 순수의 합창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선언했던 이들이 집 밖으로 나서"며 시작되고, "이른 아침 / 법원으로 향했던 이들이 마을로 돌아오"며 닫힌다. 이는 법원-마을-법원의 환형 구조가 아침-밤-아침의 시간 구조와 포개어지는 것으로 유추된다. 밤 동안 마을에는 "서로의 먹을 것을 챙기며 노랫말을 생각하는 슬픔들이 / 비밀스럽게 자"라나고, 구성원들은 "전보다 더 가난해"지지만, 동시에 "어떤 친구들은 /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도 한다. 칠흑처럼 어둡고 "끔찍하고 아픈 날들" 속에서 "서로의 눈과 귀를 가려주"는 동안 숱한 슬픔의 정념들은 숙성되고, 이는 "다시 새롭게 불복종할" 힘으로 전환된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다 같이 부르는 노래는 송신자-수신자를 구별하는 '말'과 달리, 송신-수신의 구분이 무화된 '공명'의 형태인 점을 기억해 보자. 그리고 소들의 노래가 '낮'이 아닌 '밤'의 노래라는 점도 기억해 보자. 모두가 서로를 개별적 독립체로 구분할 수 있는 환한 '낮'의 시간보다, 어둠에 둘러싸여 너-나의 구분조차 사라지는 '밤'에 발생하는 소들의 노래는 서로의 목소리를 분유하는 공동의 음성이 된다. 이렇듯 밤의 공명과 정념들의 순환은 윤회하는 리듬 안에서 연대를 끊임없이 길어 올린다. 사실 이 무한한 리듬에 대해서라면, 윤은성은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시집 『주소를 쥐고』의 「정확한 주소」에서 예고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래'가 더는 유효한 어휘가 아닐 때. 손 뻗어 만져지던 것들이 이제는 만져지지 않고. '과거'로부터의 선로는 망가져 앞으로도 믿을 수 없을 때. 저물고 다시 밝아지는 날들의 반복만이 조용히 부식되는 시간을 이해하게 하였고.” - 「정확한 주소」(『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부분  미래가 효력을 잃은 세계에서 윤은성은 미완의 노래로 삶의 조건을 다시 묻는다. 「창문을 열다가」(『유리 광장에서』) 속 "전쟁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와 "외교부를 향해 서서 / 같은 노래를 새롭게 부르다 흩어"지는 사람들, 또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헐뜯는 사람들"의 출현과 산발을 동시에 포착 중인 시인의 렌즈가 이미 그 답을 제출하고 있다. 더 낮은 곳에 유독 더 매서워지는 폭력, 당신들과 따로 또 같이 있어 지옥 같은 삶, "피곤한 잠"처럼 무거운 일상이지만, 어떤 이들은 굳이 힘겹게 "걸어 나와 마음을" "여미고 열"더니, 속수무책 "당신에게로 기울어져" 버린다. 이 기울어짐은 아직 '남아 있는' 불완전한 합창을 우리 삶의 조건으로 가시화한다.  정말 그런 것도 같다. 내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료에게 속절없이 기울어져 입만 뻐끔대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엔 그 소리와 불화하는 나의 곤란한 음색이 한 음 두 음 보태고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가 억압의 궤도를 빠져나가고 있는 클리나멘의 음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 미세한 편위(偏位)의 노래가 폭력의 직선을 비스듬히 기울여 '나'가 "당신에게 안길 틈"을 재차 벌린다. 이 '벌어진' 틈은 어쩌면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벌어진' 가장 순수한 사건일 것이고, 이 사건은 때로 거의 모든 것을 중지시키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지난 겨울과 봄 동안 우리가 무수하게 듣고 불렀던 그 노래, 그리고 아직 남아 매일 밤 우리에게 비스듬히 돌아오고 있는 그 노래처럼. 1)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아포리즘』, 편영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82쪽. 2) 이러한 감각은 윤은성의 시 세계 속 인간-인간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요구되고 있다. 당장 「남아 있는 여름」 속 "종종 나를 안아주거나 나를 버렸"다고 소묘되는 '마을 언니들'과 화자의 관계만 보더라도 그 양상이 확인된다. 그들을 가로지르는 동맹은 숭고하고 매끄럽기만 한 자매애적 연대보다, 서로를 배척하기도 하고 제한적인 조건에 의해 수용하기도 하는 복잡한 계약이다.

월간 현대시 민가경 윤은성여름 연루유리 광장에서주소를 쥐고현대시작품론 2025
민가경 밀폐된 투명, 시간의 연금술 ― 최하연 시집

유리의 원재료는 모래이다. 유리는 모래로 만들어지고, 유리는 깨어질 때 다시 모래로 돌아간다. 어쩌면 시간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시간은 모래알 같은 기억들에 의해 흐릿하게 재구성되고, 시간이 지나갈 때 모든 기억은 미세 입자 형태로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유리와 조금 다른 것은 그것이 늘 깨지고 있는 무엇이라는 점이다. 시간은 지금도 지나가고 있고, 그렇기에 기억도 시간의 파열과 함께 지금도 흩어지고 있다. 기억은 늘 부서지고 있는 시간의 순환을 그나마 덜 부서진 형태로 재구성하여 불완전하게 가시화하고, 지금도 지나가고 있는 시간은 발생 즉시 파편처럼 흩어져버리는 기억의 물성을 진즉 예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독특한 회화적 상상력으로 꾸준히 덧칠되어 온 최하연의 시 세계는 그의 네 번째 시집 『보헤미아 유리』에서도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기억이 깨지고, 모래알처럼 흩어지며 그리는 시간의 순환적 이미지가 두드러지게 나열된다. 시간과 기억은 시의 오랜 화법 그 자체이기에 그리 생경하게 다뤄지는 제재랄 것도 아니나, 근간에 최하연만큼 그것을 효과적인 이미지로 삼아 드러내고 있는 이는 드물어 보인다. 먼저 그의 언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미지 속 사물들을 바라본다. 그 다음엔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체험된 기억과 감각적으로 지각된 현실의 단편들이 맞물린다. 시의 이면이 천천히 드러난다. 그렇게 찬찬히 한 편의 시와 그 이면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존재를 다루는 한 시인의 눈이 얼마나 투명해질 수 있는가에 관해 묻게 되고, 그 ‘투명’이 어떤 시적 언어에 의해 얼마만큼 담길 수 있는가를 가늠해 보게 된다.  표제작 「보헤미아 유리」에는 ‘유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갠지스에도 있고 새만금에도 있지만 / 각자 먼 길을 가고 있”는 “모래 한 알”이 등장한다. 이는 유리의 원재료인 모래가 각각의 경로로 흩어지는 광경을 가장 먼저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산발 이미지는 우리의 시간 순환 속에서 형성되고 흩어지고 있는 입자 단위의 기억을 환기한다. 아울러 “대롱 끝에서 부풀어 오른” “물고기 모양의 신발과 / 신발 모양의 물고기”의 등장은 유리 공예 과정에서 대롱 끝에 매달린 유리가 열에 의해 팽창하며 자유자재로 형체를 잡아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신발과 물고기라는 사물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뒤집으면서 무엇이든 되어가고 있는 유리의 형상은, 무정형의 기억이 형상으로 응고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포착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최하연의 회화적 상상이 독특하게 포착되는 지점은 선형적으로 부풀어가는 시간을 기어이 붙잡아 단면을 내어 평면적 이미지로 구축해 보려는 시도에 있다. 다수의 시편은 너머의 대상이나 풍광에 대한 주관적 인상을 언어화하면서도 어떤 관념으로부터 최대한 거리 둔 채 덤덤한 서술 자체에 집중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상의 사건들을 한 장의 단면으로 잘라, 그것들의 윤곽, 위치와 색채 등을 기억‒이미지 형태로 평면화하고 있다. 이렇게 지면 위에 평면적으로 재배열된 이미지들은 언어적 구성으로 흐릿하게나마 가시화된다. 이 흐릿함은 최하연의 기억‒이미지가 시간의 단일 축 위에 선형적으로 재현되고 있다기보단, 각기 다른 감각과 위치에서 남겨진 순간의 파편들로 구성된 기억의 망에서 발생했기에 불가피한 흐릿함이 된다. 그 기억의 망은 비가역적이고 비재현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동시에 최하연의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은 기억의 실패라는 관념이 은은히 잔류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뜻이다. 시인에게 기억이라는 관념은 흐릿하게 드러나려다가도 시의 마침표가 찍힌 이후 종결 없는 유랑을 하러 막 흩어지려는 참인 움직임 형태에 가까울 것이다. 먼저 「판지에 파스텔」에 주목해 보자. 프랑스 화가 ‘에드가르 드가(Degas)’를 연상케 하는 작중 ‘드가’는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최하연의 시적 평면에서 ‘드가’는 “우체국에 들러 택배를 보내고 다이소로” 가는 등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근데 여기서 뜬금없이 “메모리폼은 아니지만 드가의 그림을 밟고 서서 그림을 그리는 드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드가’의 행위가 소묘된다. 이 소묘 방식은 화폭과 현실을 중첩하고, 작중 ‘드가’의 상상 속 시간은 단 한 장면으로 응축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읽히는 것은 “메모리폼은 아니지만”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문장의 삽입이다. 인위적인 압력을 제거하면 뒤틀렸던 형태가 본래 형태로 되돌아가는 ‘메모리폼’의 물성을 기억해 보자. 그렇다면 ‘기억’이라는 관념 역시 본래의 형체를 기억할 것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드가의 그림’은 드가의 시간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다. 동시에 화자 역시 생전의 ‘드가’를 만난 적 없어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없고 다만 ‘상상’할 뿐이다. 이토록 상상된 ‘드가의 시간’은 기억이라기보다 허상의 재현이자, 회화적 이미지 위에 형성된 ‘없는 기억’의 시뮬라크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실존’ 인물을 토대로 ‘허구’의 기억을 재현해 내는 방식은 시인의 이미지가 전도된 상에 기반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데, 이는 「눈밭」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중 화자는 눈이 내려앉은 네모난 밭을 응시하고 있다. 이내 그 위 “새의 표정을 상상하다 새가 상상했을 나의 표정을 상상”하자 눈밭은 “잘못 내려앉은 백지”로 전환되고, “새는 시를 쓰고 나는 모이를 먹는” 주체로 ‘새’와 ‘나’의 역할까지 전도된다. 「긋」에서 역시 “거울에 한 줄, 가로로 붉게” 그어진 선을 응시하던 화자가 “눈을 감고 돌아서”자 “그 줄은 내 가슴께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거울에 그어진 ‘붉은 줄’은 화자 외부에 존재하는 물리적 선이자 거울에 그어진 붉은 빗금이 아닌, 화자 내면에 새겨진 고통의 시각적 환영으로 전환된다. 즉 이 붉은 도상은 내면화된 감각을 시각화하는 무언가로 치환되는 것이다. 그러자 화자의 공간은 “깨진 유리가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장소가 되고, 선이 그어진 거울은 유리와 같은 기억의 조각을 공간에 산재시킨다. 이 외에도 평면 속에 현실을 중첩하고, 수직적 공간성을 수평적 시간성으로 재배열해 내는 시각적 이미지도 두드러진다. 「쉬」 속 “가장 가까운 바깥에서 가장 먼 바깥으로 선회하며 / 같은 문으로 들어와 다른 세상을 기록”한다는 화자의 진술에 주목해 보자. 화자는 같은 문으로 통과하면서도 “가장 가까운 바깥”과 “가장 먼 바깥”이라는 공간적 거리의 역설을 동시에 겪고 있다고 진술한다. 이는 곧 동일한 일상 구조 안에서도 매 순간 달라지는 기억의 공간적 전이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 하나의 문은 결과적으로 “다른 세상을 기록”하고 “증언”하며 다른 차원의 기억을 생성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세상”이란 고정된 공간이 아닌 의식에 따른 시간의 분화를 가리킨다. 아울러 「외박」 속 기이한 엘리베이터 역시 비슷한데, 작중 엘리베이터는 위아래로 움직이기보다는 옆으로 움직이며 기이한 이동성을 창출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이 속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힌 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같은 공간을 반복 순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실 그 안에 갇힌 상태라 보아야 한다. 거기에서 “유골함을 하나씩 들고 / 한 무리의 군인이 오와 열을 맞춰 내”리는, 이렇듯 공간적 전이와 기억의 이질성을 중첩해 놓는 최하연의 이미지는 현실과 몽상을 오가는 듯 어질어질하다. 그러나, 문제라면, 결국 그 때문일까. 최하연의 화자들은 무엇엔가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 앞선 「외박」의 분석을 계속 이어가 보자. 화자는 “제대를 하려면 / 5층으로 오라는” 지령을 받고 5층을 향하려 시도하지만 “5층을 갈 수가 없”고 다만 엘리베이터에 갇혀버리게 된다. “다섯 번 서고 다섯 번 문이 열렸다 닫히”는 과정에서 엘리베이터의 입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폐쇄적인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자는 “매일 밤 엘리베이터에 태워져 / 밤새 끌려다니”고, “엘리베이터 앞에 다시” 서야만 하는 반복의 고리에 갇힌다. 이 외에도 화자들은 어디에선가 존재와 세계를 기록하려는, 즉 기억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지만, 그 기록들은 항상 어딘가 불완전하고, 왜곡되며, 미완성인 형태로만 남고 있다. 여기서 「티빙」은 시편 자체가 화자들 혹은 시적 제재의 불완전한 기록 장치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화자는 “고객의 현재를 찍어 과거를 현상하고 인화”할 수 있는 “크고 무겁고 복잡한 사진기”를 지닌 사진사인데, 의미심장한 것은 그 사진기가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기라는 점이다. 이때 사진기의 유리판 위에 새겨진 이미지는 정지된 현재의 이미지이지만, 그리하여 이 사진기는 현재의 순간을 포착한다고 여겨지지만, 정작 그 결과물은 과거화된 기억의 이미지로만 인화되고 있다. 때문에,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기는 완전한 현재를 재현하는 데 실패하고, 그 안에 잔류하는 것은 오로지 ‘거기, 시간이 있었다’는 흔적뿐이다. 그런 점에서 최하연의 시 세계가 ‘투명’을 ‘순수’로 논하는 기왕의 방식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투명’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았다. 이 투명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세계 내 존재의 존재론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잔인한 투명’ 같다. 유리가 한 번 깨진 이상 다시 유리 원형으로 돌아가기도 어렵고, 하물며 이전의 모래 형태로도 돌아가기 어렵다는, 시간의 지극히 유리판적인 속성을 가늠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유리’가 대변하는 시간이란 관념이 왜 ‘보헤미아’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의 암묵적 답변이 되기도 할 것이다. ‘보헤미안’을 연상시키는 ‘보헤미아’는 단지 체코 지역명을 지시하는 지리적 표상에 그치지 않고, 정착하지 못하고 흩어지는 존재들의 유랑성을 암시하는 다층적 기호로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치 표제작 속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모래를 / 발바닥으로 자꾸 눌러” 보아도 “각자 먼 길을 가고 있”는 모래의 형상처럼. 어떻게 고정하거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려 해도 다시 서로 다른 길을 향해 흩어져버리는 시간의 유목성처럼. 유랑하는 이미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모래 이미지의 변이 형태로 등장하는 먼지 이미지를 소환해 보아도 좋겠다. 가령 「파」는 세상엔 숱한 먼지가 있지만 “먼지 속 먼지와 먼지 밖 먼지” 간의 사이가 “더블린과 런던만큼 멀”기에 “먼지는 편성에 실패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편성’이 만일 먼지의 뭉침을 일컫는 표현이라면, 이 시편 안에는 조직화에 실패하고 반드시 흩어져 부유할 유랑의 이미지가 발생 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끝도 보이지 않는 들판에 사우나를 짓고 있는 「끝의」의 화자는 아예 “먼지가 되리라”는 선언을 직접적으로 내뱉고,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시간이 그렇게 다 태워버린대도 “숯이 되어 영원히 떠돌 거”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최초로 생성된 날갯소리 역시 “태어나 처음 먼 곳으로 가”려 하는데, 이 날갯소리를 내며 떠나려는 존재는 “자꾸 고개를 돌려 돌아올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화자는 재차 단호하게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한다. “굴뚝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려는 존재에게 예고된 건 “잠시 머무를 곳조차 없는 어둠의 복판”에서 끊임없이 유랑해야 할 떠돌이 운명이다. 심지어 「삽」에서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을 자신의 꿈으로 지목하는 존재 역시 결과적으로 소멸하지 못한 채 “여기라 장담할 수도 없고 여기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곳에 “오도 가도 못한 채” 비스듬한 양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건 아마 “닻도 달지 않고”(「닻」) 배가 떠나가는 모습과 닮았을 것이고, 이 항해는 단지 공간적인 이동을 예고하는 항해가 아닌, 시간 속에서의 정착 불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을 것이다. 그뿐인가. 부유하던 존재와 존재가 만나 서로에게 잠깐 스친 기억마저 “잎사귀 끝으로 겨우 나눈 수담”(「호우」)에 불과해져 또 흩어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공허와 정처 없음의 방랑에 불과한 것은 아닐 터. 최하연은 그렇게 떠나가는 존재들이 시간 안에 닻을 내리지 못하더라도, “닻을 닮은 낮달도 만나고 달 쪼아 먹는 까마귀도 만”(「닻새」)나고 말 것이라는 은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존재들은 닻을 내리기보다 땅에 내려오지 않는 낮달을 만나러 떠나가고, 그 위를 자유롭게 활공 중인 까마귀를 만나기 위해 부유해 볼 것이다. 원형의 형태 안에서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대관람차”, 그 시간의 무한 굴레 안에 놓인 채 “집으로 가자 / 집으로 가자”는 말만 되풀이하는 인물들은 비록 “아주 천천히 둥글게 말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어둠에 익숙해지거나 마음을 삼킬 수는 있었다”(「꾸욱」)고 진술된다. 고대의 연금술사들은 자기 내부를 투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외부 접촉을 차단하는 유리의 역설을 통해 그것을 ‘기적의 물질’이라 하며, 외부와 단절된 채로 내부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자기 정련’에 주목했다 고 한다. 그렇다면 연금술사들이 밀폐된 유리 속 변화의 가능성을 기적처럼 보았던 것처럼, 최하연 역시 유랑의 운명에 갇힌 존재, 닫힌 시적 공간 안에서도 마음의 변형을 경험하고, 감정의 미세한 조율을 경험 중인 화자들을 포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 속의 존재들은 그 변화를 바깥으로 새어 나갈 만큼 요란하게 표출하지 않지만 모두 나름의 시간 흐름의 변화와 감정의 진폭을 미미하게 경험 중이니 말이다. 우리는 단지 한 겹의 유리 너머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밀폐 너머 변화의 가능성, 여운, 잔상에 가까운 형태를 투명하게 감지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최하연의 시편들은 밀폐된 유리관 속 시간의 연금술을 들여다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고, 기억 역시 그 안에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변이를 거듭할 뿐이지만, 이 투명하고 단단한 시적 언어 너머로 왜곡된 기억의 상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유리막 너머로 지금도 그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시간의 흐름을 발견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추천 작품: 「긋」, 「쉬」, 「끝의」

계간 포지션 민가경 최하연보헤미아 유리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팅커벨 꽃집피아노포지션리뷰 2025
민가경 실패하는 ‘도착’에게 ― 김근 시집

실패하는 도착 ‘에게’ - 김근, 『에게서 에게로』(문학동네, 2024)  “너에게서 또다른 너에게로”(「에게서 에게로」)라 할 때, ‘너’와 ‘또 다른 너’ 사이엔 아마 딱 ‘‒에게서’와 ‘‒에게로’ 만큼의 거리가 놓일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얼핏 장난처럼 느껴질 만큼 공허한 말 같지만, 이는 곧 ‘에게서와 ‒에게로만큼의 간극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점은 ‘‒에게서’와 ‘‒에게로’ 모두 ‘‒에게’라는 공통의 조사를 포함하면서, ‘‒서’와 ‘‒로’라는 상이한 방향의 조사로 분기된다는 사실이다.  ‘‒에게서’는 어떤 행위의 출발점이나 유래를 나타내며, 단지 사람이나 동물 같은 유정 명사 뒤에만 붙는 문법적 제약이 있다. 예를 들어 ‘너에게서’라 한다면, ‘너’는 명확한 출처이자, 무언가가 ‘너’로부터 떠나온 상태인 것이다. 이때 ‘‒에게’(to)는 ‘‒에게서’(from)의 떠나감을 배경으로, 정반대 방향으로의 ‘향함’을 지시하기 위해 쓰이게 된다.1) 반면 명확한 목적성을 띤 ‘‒에게’가 ‘‒에게로’가 되는 순간, ‘‒에게로’는 단순한 대상 지시를 넘어 ‘‒에게’의 형질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움직임의 지향성을 띤다. 즉 ‘‒에게’는 ‘‒에게서’에서 ‘‒에게로’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지대이자 동시에 출처도 목표도 될 수 있는 무국적 언어가 된다. 출발하려는 ‘에게서’와 도착하려는 ‘‒에게로’ 사이에서 ‘‒에게’는 출처이자 소유이자 목표일 수도 있는 잠재적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 결국 서두에서의 물음처럼 “너에게서 또다른 너에게로” 속 두 ‘너’ 사이에는 오직 ‘에게’만큼의 무지대가 놓인다고 볼 수 있다.  도입이 길었다. 김근의 다섯 번째 시집 『에게서 에게로』는 ‘‒에게서’ 출발하여 ‘‒에게’를 경유해 온 존재가 또 다른 존재‘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을 섬세한 떨림의 언어로 형상화한다. 동시에 ‘당신’을 소유하거나 명확히 이해하지 않은 채, 도달 불가능한 ‘당신’을 무한히 호출하며 당신‘에게로’ 다가가고 있는 언어의 운동 그 자체로 읽히기도 한다. ‘당신’과 ‘나’ 사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간극을, 계속해서 유예되고 있는 도착을, 그 예고된 실패를, 어떻게든 메워보려는 절실한 주술들이 이 시집에 빼곡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대상에 근접해 보려는 무한한 긴장, 그 떨림은 화자들의 끝없는 사유와 방황과 혼란한 언어의 궤적 안에서 가시화된다. 그렇다면 그 떨림의 또 다른 이름은 ‘도착’도 ‘출발’도 무용해진 무중력 공간이자, “아무도 건너가지 않은, 너머, 아무도 넘어오지 않는”(「영상」) 흐릿한 시의 지대일 터, 이제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건 / 무슨뿐일” 것이고, “무슨과 무슨 사이에서 당신은 / 이제 막 깨어난”(「혼자 있는 사람은」)다. 안과 밖, 흐릿한 중첩  이번 김근 시집에서 전체적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안과 밖, 낮과 밤, 나와 너, 표면과 본질과 같은 구분이 경계들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교란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해체는 흔히 말하는 ‘심리스한’ 매끄러움이라 보기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안다고 믿어왔지만 사실 모르고 있던 세계, 그 익숙함이 찢기고 갈라진, 미세한 실금의 감각을 통해 드러난다.  예컨대 「사이사이」의 화자는 익숙한 골목을 마치 몸속, 특히 창자처럼 느끼며, 입구와 출구의 구분이 무효가 된 세계에 놓인다. 이는 “내가 들어온 입구로는 나갈 수 없”고, “누구도 서로에게 출구나 입구가 될 수 없는 규칙”이 통용되는 세계이다. 아울러 무대와 객석을 그 시적 배경으로 두고 있는 「의자는 의자가 없지만」에서는 ‘무대’와 ‘객석’ 모두 어둠 속에 있는 탓에 서로의 구분이 소멸하고, 또렷한 경계에 의해 구분되지 않은 채 오로지 한 뭉텅이의 ‘웅성거림’이 되어 음향적 잔재만 있는 공간성을 빚어낸다. 「문밖」에는 완전히 뒤엉켜버린 벽과 엄마가, 창문과 얼굴들이 이미지 형태로 드러나고, 「두 밤 사이」에서도 제목처럼 이쪽 밤, 저쪽 밤 “양쪽 밤 다에다 끈적끈적한 어둠”에 갇혀버린 채 ‘두 밤 사이’를 벗어나지 못한 화자가 등장한다. 특히 표제작 「에게서 에게로」의 화자는 “낮을 뒤집어 입어도 낮이”고 “밤을 / 뒤집어 입어도 밤이”라는 의미심장한 서술을 하는데, 말인즉슨 이 세계 안에서는 ‘낮’과 ‘밤’이 서로 교환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화자에게 시간이란 개념은 그 층위조차 절대적이지 않고, 안과 밖처럼 뒤섞여 버릴 수 있는 개념이 된다.  김근의 화자들은 앞서 살핀 무경계의 세계를 결코 매끄러운 감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세계의 표면에 난 실금, 가령 “하늘의 긁힌 자국” 같은 것들에 주목하며, 그것을 “그저 비행운일 뿐”이라고 말하는 식의 태도를 견지한다. 요컨대 그 비행운은 매끄럽다고 여겨지는 세계의 표피에 난 틈이고, 화자는 ‘매끄러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채 그 ‘틈’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틈에서 발생하고 있는 잔상들에 가급적 의미를 덧입히지 않으려는 회의적 자세를 보일 뿐이고, 그런 점에서 김근의 화자들은 명백한 하나의 주체라 보기 어려워진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화자 ‘나’는 ‘너’의 “눈꺼풀 / 안쪽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눈꺼풀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너’에게 대수로운 일로 여겨지지 않는 존재로 소묘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눈꺼풀은 안구를 바깥으로부터 차단하는 표피이자 안구와 바깥을 가르는 경계인데, 화자가 위치한 ‘눈꺼풀 안쪽’은 명확한 내부나 외부도 아니고, 표피도 아닌 애매한 경계 그 자체가 된다. “나는 여기 있지만 여기서 / 쫓겨난 것 같”다는 ‘나’의 진술 역시 그 존재론적 모호성을 방증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우리가 이러한 화자들이 ‘주체’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보다, 그들이 단지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점이다. 안과 밖 같은 경계성이 해체되고 중첩되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들은 단일하고 고정된 중심을 상실한 채 또 다른 ‘너’를 향해 이동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즉 공간의 변이 양상은 화자의 경계와 존재 위치마저 유동적으로 변위시키며, 그들은 단지 “네 뺨으로 / 눈물이 흘러내린”대로 유동하는 존재로서 “너에게서 또 다른 너에게로 / 나는 다시 옮아갈 채비를 서두”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양상은 「변명, 이웃」에서 심화한다. 이 시 안에서는 골목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웃 서로서로를 모르는 형태로 얽히면서, 내가 이웃인지 이웃이 나인지 모호해진다. 「의자는 의자가 없지만」 속 ‘의자’ 역시 스스로를 인식하려 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심지어는 ‘의자’가 아닐 가능성으로도 남게 된다. ‘의자’가 ‘의자’라는 호명을 받아들이지도, 타자를 명확히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의자는 도리어 자신을 낯선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이는 자기 소외로 이어진다. 호명이 자기 확인을 위한 호명이 아니게 되고, 왜곡된 타자화의 반복으로 작동하게 되는 모습은, 김근의 화자들이 타자와의 흐릿한 조우 안에서 스스로와 타자에 대한 불투명함을 헤치고 나아가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중심을 갖지 못하고 파편처럼 흩어져버린다는 점을 암시한다.  「변명, 사형수」의 화자 역시 마찬가지다. 화자는 자신이 말하는 순간 “너는 수많은 이름들로 / 늘어나고 모든 거리에서 붐비고 붐비다 / 흐르고 모이다 흩어지고 다시 섞이는 색색의 / 이명들”이 되어버린다고 말한다. 그렇게 “미처 너는 도착하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네가 도착할 것인지 알 수 없는 골목들”에서 화자는 비명과 이명과 허명이 이지러지는 골목에 놓인다. 이렇듯 어떠한 확산과 교접의 이미지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양상은 「문밖」 속 ‘포자’의 확산 이미지 안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도드라진다. 우리가 아는 포자는 생명을 퍼뜨리는 미세한 입자지만, 작중 포자는 부패와 침식을 동반하는 파괴적인 확산이기 때문이다. 작중 ‘엄마’가 퍼뜨리는 포자는 정신을 부패시키고 침식하는 병리적 확산의 은유에 가깝다. 이는 감염의 메타포가 되어 ‘어디로부터’ ‘어디로’라는 개념을 달리 두지 않을뿐더러, ‘무한히 자라나는 골목’과 ‘얼굴의 증식’처럼 모든 공간성을 침식한다. 표류하는 목소리  뿐만 아니라 우리가 김근의 시를 읽으며 자주 발견하는 것은 화자들이 타자들과 흐릿하게 중첩하고 애매하게 교접하는 방식의 독특함이다. 이 독특함에 주목해 봄직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교접’을 존재와 존재가 서로 밀착하여 완전한 합일에 이르는 상태로 이해하는 반면, 김근이 소묘하는 교접은 온전히 합쳐지지도, 완벽히 분리되지도 않은 채, 약간의 틈과 어긋남을 포함한 부대낌이자 접촉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령 「윤슬」(110쪽)의 내용은 ‘당신’과 ‘나’의 대화처럼 보이지만 결국 화자의 문답이 자답 형태 안에서 미끄러지고 있다. 「거짓말 2」의 화자는 “네가 말해진 곳에 너는 없고 // 네가 말해진 말이 전해진 곳에 더더욱 없”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네가 계속 돌아다니도록 멈춰지지 않도록 (…중략…) 계속 네가 말해진 말을 이어 붙이고 붙이고 붙”이는 식의 수고로운 작업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앞선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문장 역시 서로를 지지하지 못한 채 독립된 파편으로 떠도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교접의 풍광에 다소간의 ‘틈’을 드러내는 방식은 결과적으로 모든 만남이 일정한 어긋남과 미끄러짐을 내포한다는 존재론적 조건을 가시화한다.  이 외에도 김근의 화자들은 누군가의 목소리, 하물며 자신의 목소리 안에서마저 끊임없이 타자성을 발견하고 있다. 가령 「자줏빛 심장에 대고」 속 “자줏빛 심장에 대고 자줏빛자줏빛 말하지”와 같은 ‘자줏빛’의 반복은 오로지 무너진 언어적 리듬이 될 뿐이고, 「어슴푸레」 속 “어슴푸레 어슴푸레로 어슴푸레이기만 어슴푸레”와 같은 리듬은 이 ‘어슴푸레’의 중첩적 울림을 통해 오로지 음향적 진동을 만들 뿐이다. 「빛, 재, 빈」은 또 어떠한가. 여기선 하물며 리듬마저 끊겨버린다. ‘아이’와 ‘빈’은 이 안에서 끊임없이 교접하지만, 결과는 ‘흐흐흐흐’ 스러지는 재와 빛의 부유에 불과해진다. “비이인, 재재재 재 재재재재 잿빛, 빛,”과 같은 문장은 완결된 의미나 완성된 서사를 향해 가기보다, 의미를 붕괴시키고 자기 파괴적인 파장을 만들어낼 뿐이다.  특히 「희끗,」에는 끊임없이 부서지고, 끊기고, 달아오르는 식으로 극단화된 언어의 리듬이 두드러진다. 이 시편 안에는 ‘희끗’이라는 가장 기본 단위의 문자가 등장하는데, 본디 ‘희끗’은 어떤 대상이 스리슬쩍 스쳐 가는 감각이나 흔들리는 시야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각적 단어이지만, 이 시각성마저 끊어지고, 튕기고, 반복되며 “버둥버둥버둥, 희희희희희, 끗,”과 같은 음성적 파국 형태로 변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편의 숱한 비문자들은 소리 덩어리들이 서로에 의해 끊임없이 증식된 흔적이 되고, 이미지는 물론 언어, 존재, 더 나아가 세계 자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첩어의 반복과 파열음이 귀결되는 자리는 언어가 완결되는 대신 지연되는 자리가 된다.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포착하거나 개념을 완성해 내려는 시도는 제아무리 끈덕지더라도 실패한다. 이 시 안에서 우리는 ‘희끗’이라는 파열음을 따라가지만, 결국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붙잡지 못할 뿐이다.  다만 이 발화 안에서 우리가 미끄러지는 과정 자체가 시를 이루는 힘이 된다. 이는 시인이 오래 고안해 온 리듬이 이미 그 자체로 세계의 깨진 표면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었음을 가늠케 한다. 의미의 미끄러짐과 시의 달성은 때로 하나의 동전을 이루는 양면이 된다. 그건 아마 애초에 말해지지 않음을, 닿지 않음, 흘러내림을 겨냥한 언어들이 세상에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고, 오로지 울림만으로 존재하는 언어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동시에 앞선 화자들이 항상 어긋나는 교접의 관계에 놓여있던 것처럼, 시인의 운명 역시 언어와 항상 어긋나듯 교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러우니, 아프니,」에는 어떤 언어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꽉 쥐어”보아도,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지고야 만다고 고백하는 화자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곧 시인이 언어와 마주친 적확한 풍광 묘사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나뒹구는 화자는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는 언어들의 향연 안에서 “바깥도 나도 당신도 완성되지는 결코 않”는다는 사실을 감각할 것이다. “좀처럼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이렇듯 김근의 시에서 언어는 발화될지언정 의미로 완성되지 못한다. 또 출발하는 존재는 있을지언정 그 존재가 결코 어디엔가 도착하지는 못한다. 표류 중인 김근의 시적 주체들은 주체에의 원점 회귀도, 대상과 타자에의 도달도 하지 못한 채 거기에 남아있다. 그러나 이 세계의 뒷맛이 마냥 씁쓸하게만 남지 않는 이유는, 아마 도착의 영원한 유예가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오히려 당신께 역으로 되묻고 싶다. ‘‒에게로’ 나아가고 있는 운동이, ‘‒에게로’ 향하고 있는 과정이, ‘‒에게로’ 가고 있어서 출처도 목표도 다 흐릿해지고 있는 여정이 그리 서럽기만 한 일이겠냐고.  아마 아니지 않을까. 파편화된 ‘너’들과 교접하고, ‘너’들에 침투하며 다 함께 어그러지는 세계의 리듬에 몸을 실어본다면, 침몰해버린 하나의 목소리가 된다는 것이 그리 서글프기만 할 일일까. “이런 막다른 슬픔이 어떤 슬픔인지도 오직 모른 채 너에게 가야 한다는 가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만 남아 허우적거리”는 것이, 그러니까……. “좀처럼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가려진 문장」) 지금도 ‘너’에게 여전히 향하고 있을 ‘시’가, 슬플 겨를이 있기나 할까. 추천 작품: 「가려진 문장」, 「에게서 에게로」, 「어슴푸레」, 「윤슬」(110쪽). 1) 물론 뒤에 오는 동사와 문형에 따라 ‘에게서’와 ‘에게’가 유사한 맥락에서 사용될 수도 있지만, 본고는 이러한 경우를 논의 범위에서 제외한다.

계간 포지션 민가경 김근에게서 에게로뱀소년의 외출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구름극장에서 만나요포지션리뷰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