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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동문학평론 | 2024년 여름호(제191호)

발밤발밤_한 걸음, 발길 닿는 대로 봄날을 거닐다

유이지 문학평론⋅동시⋅동시조

천안의 위례산자락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했습니다. 2017년 《월간문학》에 동시 「학교 앞 소라문구점」, 《아동문학평론》과 《한국동시조》에 동시조 「반지하 집」 등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동시조집 『나, 깍두기야!』, 『날씨는 그날그날 대지의 마음씨야』, 동시집 『나를 키우는 씨씨』, 동시조 그림책 『깍두기』를 펴냈고, 2022년 어린이문화대상 신인상, 2025년 제5회 새싹문학 젊은작가상을 받았습니다. 본격적인 문학 수업으로 동시조를 배웠기에 대학원 논문도 동시조로 썼고, 문예지에 가뭄에 콩 나듯 발표되는 동시조를 발견하여 탐독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동시조집 『나, 깍두기야!』에서 파생한 동시조 그림책 『깍두기』를 펴냈고 또다른 동시조 그림책 한 권도 출간 예정입니다. ‘한자’ 동시조집과 ‘나무’를 소재로 한 동시조집을 출간 준비 중입니다.

봄추위 사나워도 설렘은 감출 수 없어

앙다문 줄기 안에 그 사연 숨겼더니

봄바람 몰래 혼자서 펼쳐 읽고 있구나.

 

당대唐代 시인 전후錢珝 의 칠언절구 「未展芭蕉」(『전당시(全唐詩)』1))를 시조로 써보았다. 이른 봄, 미처 펼쳐지지 않은 파초 잎을 노래한 작품으로 그 발상과 표현이 현대시의 기법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파초가 처음 땅에서 돋아날 때의 돌돌 말린 모양새는 불을 밝히지 않은 밀초에 빗대었고, 곧 피어날 잎은 사랑을 품고 있으나 아직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설렘으로 비유했다. 추위를 피해 줄기 속에서 돌돌 말고 있지만 봉해 놓은 편지 속 사연을 봄바람이 남몰래 펼쳐 보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시인의 기발한 발상과 뛰어난 관찰력이 오래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새로 돋는 싹의 끝이 파초처럼 딴딴하고 뾰족한 것은 언 땅, 혹은 껍질을 뚫고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 탓이 아니었을까. 또한 새로 돋는 싹들과 그들의 계절 봄을 이처럼 오래도록 노래하는 까닭은 그 싹들에게서 발견한 생명력 때문이 아닐까.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문예지에 발표된 동시조 작품 중 ‘봄’을 노래한 동시조에 주목하여 읽었다. ‘동시조 전문’ 문예지인 《한국동시조》(2023년 하반기호)는 필자 대부분이 시조시인이어서인지 동시조의 맛(?)을 느끼기 어려워 아동문학가 세 분의 ‘봄 동시조’를 다루기로 한다. 《동시발전소》 2023년 겨울호에서 봄 동시조 두 편을 반갑게 발견하였고, 《아동문학평론》 2023년 겨울호와 봄호에서 각 1편, 《동시먹는달팽이》 2023년 겨울호에서 발견한 동시조도 한 편 다루기로 한다.

대부분 겨울호에서 발췌한 작품들이 추운 겨울에도 ‘봄’을 노래했음은 위의 한시에서 살핀 것처럼 고금을 막론하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들이 어느 때보다 가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봄이

 

봄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새하얀 봄처럼」은 동시조 특유의 3⋅4조 배열을 따르지 않고 3⋅10(11)으로 변조한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게도 / 그리움이 왔으면 좋겠다 //

긴 겨울 / 눈보라에 남몰래 묻혔다가 //

산기슭 / 꽃눈을 털고 일어서는 / 새하얀 봄처럼

- 조기호, 「새하얀 봄처럼」 전문(≪한국동시조≫ 2023년 하반기호)


내게도 그리움이 / 왔으면 좋겠다’(3⋅4, 3⋅3)로 배열했다면 그리움을 강조한 평이한 표현이 되었겠으나 내게도 / 그리움이 왔으면 좋겠다로 한꺼번에 읽히면서 시조지만 자유시와 같은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반면 초장의 자연스러운 느낌과는 달리 중장의 배열은 다소 낯설다. 음악성의 측면에서는 눈보라에 남몰래 묻혔다가가 한 번에 읽히기 어려워 보인다. ‘긴 겨울 눈보라에 / 남몰래 묻혔다가로 배열한다면 초장과 중장을 변화와 자연스러움이라는 적절한 변주變奏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획득하고, 동시조의 음악성 또한 배가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리움이 온다, 어떤 그리움일까 궁금하면서도 다소 의아하다.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그리움이라고 한다면 나는 누군가가 애타게 보고 싶다고 하는 표현이 일반적일 것이다. 위의 동시조의 경우라면 나는 봄이 그립다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시인은 왜 그리움이 왔으면 좋겠다는 화두를 던진 것일까.

위 동시조를 일반적인 대화로 표현하면 긴긴 겨울이 어서 가고 새봄이 왔으면 좋겠어. 그 봄은 꽃눈을 털고 일어서는 새하얀 색일 거야가 될 수 있겠다. 초장에 시의 주제를 드러낸 도치倒置가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고, ‘눈보라에 묻혔다가 꽃눈을 털고 일어서는 새하얀 봄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시조가 아닌 동시조인 점을 감안하여 그리움을 애타는 기다림 혹은 보고픔으로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고대하던 봄이 마침내 오려 하니 여기저기 시샘이 한창이다. 올 봄 어느 집 담장에도 어김없이 꽃샘이 당도했다. 꽃을 시샘하는 추위나 바람은 여전히 까칠해서 산수유 정수리에물을 뿜고 갔다고 한다.

 

까칠한 / 꽃샘바람이 / 꽃물을 / 품고 와서 //

산수유 / 정수리에 / 한자락 / 뿜고 갔다. //

번지는 / 노오란 꽃물이 / 아침 담장을 / 밝힌다.

- 진복희, 「꽃물전문(≪아동문학평론≫ 2024년 봄호)

 

이젠 봄인가 했을 텐데 들이닥친 꽃샘추위에 산수유는 얼마나 놀랐을까. 처음엔 매우 신산辛酸한 느낌으로 읽었으나 꽃샘바람이 품은 것이 실은 꽃물이었단다. 겨울나무로 고요히 서있던 산수유가 노란 꽃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샘 많은 꽃샘바람이 품고 와서 뿜어준 꽃물 때문이었단다. 늘 샘만 내던 바람이었지만 잘 견뎌낸 나무에게 선물을 주고 갔고, 덕분에 꽃나무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하여 읽은 것이 한자락이다. 시인은 왜 꽃물의 단위를 자락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봄을 의인화하여 옷자락을 휘날린 것일까, ‘한가락봄노래를 열창하고 간 것일까, 아니면 이라고 했으니 한 바가지뿜고 간 것일까. 동시조의 해학을 위해 한 바가지 뿜고 갔다를 추천드리고 싶다.

초장과 중장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면 종장에서는 분위기가 급격히 안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서히 개화하는 모습을 번지는이라고 표현한 것도 시인의 오랜 시력詩歷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꽃샘을 소재로 한 꽃물으로 표현하자면 아동문학평론봄호를 밝힌 권두시卷頭詩답게 폭 익은 맛이 난다. 단시조로 산수유의 개화를 긴장감 있게 표현했는데 종장의 노오란꽃물을 샛노란꽃물로 표현한다면 동시조답게 더 생생한 아침 담장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마침내 찬란한 봄날 언젠가

 

멀기만 할 것 같던 봄이 드디어 도착했는지 마침내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땅속에서도 그 변화가 감지된다.

 

겨울잠 깬 벌레들 // 꼼실꼼실 길 나선다 //

흙이 간지러워 // 배틀배틀 몸을 틀자, //

풀씨들 캐득거리다 // 앞니 쏙! ! 돋는다.

- 최화수, 「봄벌레전문(≪한국동시조≫ 2023년 하반기호)

 

캐득거리다캐드득거리다의 준말로 참다못해 조금 높고 날카롭게 새어 나오는 소리로 자꾸 웃는다는 뜻이고, ‘배틀배틀힘이 없거나 어지러워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계속 요리조리 쓰러질 듯이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누가 자꾸 웃고, 누가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쓰러지듯 걷는다는 것일까.

겨울 동안 꽁꽁 얼어 미동도 없던 공간에서 작은 벌레의 움직임조차 크게 느껴질 만큼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흙은 몸을 배배 틀고, 풀씨들도 흙의 움직임에 참다 못해 웃게 된다. 벌레 풀씨의 점층적인 이동과 꼼실꼼실’, ‘배틀배틀등 작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의태어도 새봄을 닮아 재미있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작은 벌레들의 움직임을 흙의 간지러움으로 대체한 대목도 흥미롭다. 그 작은 웃음으로 앞니 돋듯 싹이 쏙! ! 올라오는 대지의 위대한 신화가 펼쳐진다. 잠자듯 언 땅이 녹고 바야흐로 만물이 다시 살아나는 봄이 왔음을 울리는 자연의 지령이다.

꽃봉오리 속에 감춰진 꽃잎이 봄바람 재촉하며 꼬무락거릴 때 지난해 그 자리에서 피어났던 꽃잎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피어날까, 어떤 빛깔의 사연을 담을까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는 겨울을 보냈다. 새싹을 틔우기 위해 겨우내 땅속 깊은 곳에서 생명을 이어온 자연의 강한 생명력은 우리 삶에 던지는 신비다. 벌레들이 굼뜨나마 꼼실꼼실 길을 나서니 잎들도 꽃들도 피어난다. 봄날의 어느 찰나를 놀이로 표현한 동시조다.

 

새봄이 기지개로 / 수줍게 가위 내고 //

꽃들은 올망졸망 / 오뚝오뚝 망울져요 //

살며시 / 주먹 쥐었다가 / 꿈 펼치며 웃네요

- 이동배, 「가위바위보」(≪한국동시조≫ 2023년 하반기호)

 

위와 흡사한 상황, 봉오리를 맺었던 꽃잎이 하나씩 펼쳐지는 개화의 순간을 박두순 시인은 봉오리 맺으면 / 바위 // 꽃잎 두 장 나오면 / 가위 // 활짝 펴면 / (가위바위보부분(『박두순 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라고 표현했다. 위의 동시조 가위바위보에서는 잎이 돋는 순간 두 팔 벌린 봄의 기지개를 가위, 망울진 꽃봉오리를 주먹으로, 만개한 상태를 로 구분하여 표현했다.

그런데 중장의 꽃들이 올망졸망 오뚝오뚝연달아 배치된 의태어가 어색하다. 그렇다고 음악성을 획득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올말졸망(꽃이) 많다는 뜻이니 올망졸망(많은) 꽃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또한 오뚝오뚝군데군데 도드라지게 높이 솟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인데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생긴 상태망울지다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망울진오뚝오뚝을 주먹(바위)이라고 비유하기는 어렵다. 종장의 또한 다소 과해보인다. 활짝 피는 것이 모든 꽃들의 최종 꿈(목표)일까 싶기도 하고, 하나의 놀이처럼 가위바위보를 제목으로 했으니 펼치며(보를 내며) 함께 웃는다는 마무리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웅크렸던 봄이 기지개를 켜고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니 이번엔 식탁의 봄나물마저 용틀임한다.

 

할머니께서 손수 뜯으셨는지 봄나물을 보내오셨다. 그런데 채취한 그대로의 나물도 아니고, 데친 나물도 아닌 무쳐 보낸’, 양념한 나물이란다. 식탁에 바로 올리기에는 무친 나물이 좋지만 배송하는 과정에서 상하지는 않았는지, 기우가 앞선다. 할머니의 손맛을 느끼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물을 펼쳐보았는데 필자의 기우는 이제 문제도 아니다. 식탁이 차려지고 문제의(?) 그 봄나물과 함께 온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려는데, 정작 이 봄나물의 이름을 잘 모르겠다.

 

 

할머니가 무쳐 보낸 / 새뜻한 봄나물 맛 //

엄마에게 물었더니 / 뭐더라? , 드레곤나물 //

동생이 날름 되받아 / 우와, 용나물이야! //

제 귀를 의심해요 / 산골뜨기 봄나물 //

여섯 살 영어 실력에 / 용이 된 곤드레나물 //

별안간 용틀임해요 / 날아오른 봄 식탁.

- 최화수, 「봄식탁 날아오르다전문(≪아동문학평론≫ 2023년 겨울호)

 

그런데 필자의 경험상 더 큰 문제(?)는 이제부터다. 곤드레 나물은 위의 표현처럼 생곤드레를 데쳐서 무쳐서도 먹지만 대부분은 데친 것을 말렸다가 다시 불리고 무쳐서 사시사철 묵나물로 먹거나 쌀 위에 곤드레풀을 얹어서 밥으로 먹는다. 게다가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곤드레는 5~6월이 제철이라 위의 동시조에서 소재로 삼은 봄식탁의 식재료로, 새롭고 산뜻하다는 뜻의 새뜻한봄나물로는 다소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곤드레나물을 드레곤나물로 오용하여 영어를 잘 아는 아이가 다시 으로 바꿔 용나물이 되고, 봄 식탁이 용틀임을 한다는 흥미로운 동시조가 완성된 듯하나 결과적으로 봄식탁을 날아오르게 하려는 의도된 비약은 아닌지, 또한 제철을 거스르는 작품이 된 것은 아닌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동식물을 소재로 할 때 생태적인 것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이제 잎을 키우고 꽃도 피우며 열매를 맺는 데 이슬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이슬로 넘어가보자. 《동시발전소에서 동시조를 두 편이나 발견하여 기쁜 마음으로 읽은 것 중의 첫 작품이다. 연초록 고운 잎에 이슬이 맺히고 바람이 이슬 곁을 스쳐 작은 움직임을 만들면서 이내 초록 잎이 된다. 그 이슬 방울방울방울이 되고 어느새 뿌리에 이르러 양분이 되고 꽃봉오리를 맺는 데까지 관여한다.

 

연초록 고운 잎에 / 이슬방울 앉았다 / 바람이 사르르 / 풀잎을 스치면 //

이슬은 떽데구르르 / 초록 끝에 머문다. //

방울방울 이슬이 / 뿌리를 적시면 / 어느새 피워 올린 / 꽃봉오리 맺은 자리 //

이야기 풀어내듯이 / 종알종알 열매들

- 양인숙, 「이슬전문(≪동시발전소≫ 2023년 겨울호)

 

연초록이었다가 초록이 되고 뿌리가 튼튼해지고 마침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그 곁에 함께 했던 그동안의 고된(?) 여정을 함께 풀어내며 종알대는 이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누구도 아닌 우리가 함께 한 일이라고 서로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다만 첫째 수 종장의 떽데구르르가 마음에 걸린다. ‘떽데구르르떽떼구루루의 사전적인 오용이다. ‘떽데구루루크고 단단한 물건단단한바닥에서 구르는 소리, 혹은 그 모양이다. ‘데구루루떽떼굴에서 유추하여 종장의 두 번째 걸음(5음절 이상)으로 사용하였겠지만 이슬은 크지도 않고 단단한 물건도 아니며 풀잎이 단단한 바닥도 아니기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연약한 풀잎에 크고 단단한 것이 구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상상이다. 하물며 구르다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초록 끝에 머문다니 풀잎에겐 재난이다. 이슬 방울을 나타낼 때 흔히 권오순 시인의 구슬비에 나오는 송알송알이나 조롱조롱등을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4음절의 의태어이기에 종장의 두 번째 걸음에 사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동식물을 소재로 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번에는 위의 이슬과 같은 지면에 발표된 작품 중 벚꽃 흐드러진 어느 길로 시선을 옮겨보자.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바람결에 춤추는 벚꽃송이와 함께 나무도 하냥 기쁜 날, 상춘객들의 웃음꽃까지 한꺼번에 터지는 봄날이다.

초장과 종장은 만개한 벚나무 아래 와글와글웃음꽃이 피고, ‘까르르웃는 상춘객들이 모여들어 장날 같은 분위기를 표현했다. 동시였다면 초장과 중장만으로 봄날 벚꽃길의 왁자한 풍경을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꺼번에 터지는 / 와글와글 웃음꽃 //

반짝반짝 새 옷 입고 / 자랑하는 동생 앞에 //

까르르 웃는 사람들 / 장날 같은 벚꽃길

- 정명희, 「벚나무 아래」(≪동시발전소≫ 2023년 겨울호) 전문

 

그런데 반짝반짝 새 옷 입고 / 자랑하는 동생 앞에를 그 가운데에 배치하니 왠지 모호하다. 새 옷을 자랑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왜 까르르 웃는지 알 수 있는 장치가 없다. 연령이 제시되지 않았으니 어린 동생이 때때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귀여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인지, 단순히 꽃구경에 새옷을 자랑하러 나왔다는 것인지, 또는 벚나무가 꽃을 자랑하듯 동생이 새옷으로 함께 자랑을 한다는 것인지 제시되지도 않았고, 동시조의 분량으로도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 다소 아쉽다.

지상에서의 영화를 마무리하고 떨어진 꽃향기와 꽃 빛깔을 가슴 깊이 담고 함께 마을로 내려가보자. ‘이라는 시제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봄날 어느 집 앞마당의 풍경일 것 같은 동시조 한 편을 발견했다. 원래는 동시먹는달팽이》 2020년 여름호에 발표했던 것을 발간 6주년을 기념하여 수록작 중 일부를 특집으로 마련한 지면 가운데 하나였는데 동시조를 탐하는(?)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무심코라고는 했지만 생각 없이 무거운 장독을 옮기지는 않으니 봄이 되어 장독을 비우고 소독하여 새 장을 담그려 옮기는 모습이 아닐까 하며 집 안을 기웃거려본다.

화자의 실수(?)로 집을 날린 동물 가족들에게 보내는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두 번이나) 담긴 제목이 흥미롭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

어느 날 장독 밑에 모여 살던 작은 동물 가족들의 일상이 깨져버렸다. 몰래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들켜버린 것도 모자라 집이 없어져버려 대략난감이다.

 

지네랑 귀뚜라미랑 / 장독 밑에 모여 사는데, / 무심코 장독을 옮겼다. / 옮긴 순간 허둥지둥 / 온가족 난리가 났다. / 홀랑 집이 날아갔다고.

- 서재환, 「미안, 미안전문(≪동시먹는달팽이≫, 2023년 겨울호)

 

불법 점유(?)이긴 하지만 지네랑 귀뚜라미가 장독 밑에 살고 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 ‘홀랑 집이 날아난리가 났다는 종장의 도치된 표현도 재미있다. ‘홀랑을 앞에 배치하면서 가진 재산 전부가 완전히 다 없어졌다는, 동물 가족에겐 절박함과 독자에겐 해학의 여지를 안기는 효과를 보고 있다.

농가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롭고도 반가웠지만 아무래도 중장의 무심코가 마음에 걸린다. ‘지네랑 귀뚜라미랑 / 장독 밑에 모여 사는데, / 장독을 옮겼다. 옮긴 순간 허둥지둥/”만으로도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무심코가 삽입되면서 걸음수만 많아졌다. 종장 첫 걸음의 3음절을 지켜야 하는 부득이함도 아닌데 무심코가 들어간 이유를 모르겠다. 다시 읊어보니 무심코가 없어도 무난하지는 않아 보인다. ‘옮겼다.’로 종결했는데 옮긴 순간 허둥지둥이 어색하다. ‘옮겼다 / 옮긴 순간의 어휘 반복과 어순 때문에 서술적 문장이 되고 부자연스럽다. ‘무심코옮기지 말고 목적을 가지고옮겨 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테면

 

새 장을 담그려고장독을 옮겼는데 // 장독 밑에 모여 살던 지네랑 귀뚜라미 // 온가족 난리가 났다. 홀랑 집이 날아갔다고.

 

원문처럼 극적인 효과는 없을지 몰라도 봄날 새 장을 담그는 풍속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더 좋은 방법일 듯하다.

 

언젠가 봄이었던

 

지금까지 봄을 기다리며, 봄의 한가운데서 찬란한 시절을 만끽하는 봄 동시조몇 편을 살펴 보았다. 이제 살아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언젠가 봄이었고 또 그 언젠가는 나무였던, 겨울나무를 연상시키는 동시조 한 편을 마지막으로 부록처럼 소개하고 마치려 한다.

지게가 동반자처럼 늘 함께하는 등짐에 대한 마음을 전한 1인칭 시점의 동시조다. 그 지게의 몸체는 주로 소나무로 만들었다. 또한 두 발은 있으나 홀로 설 수 없는 지게이기에 오르막에서는 힘이 되어 주고, 내려올 때는 무게중심으로 큰 힘을 버텨주는 존재가 작대기다. 이 작대기 또한 나무로 만들었다. 다양한 짐을 싣기 위해 지게 위에 얹는 소쿠리 모양의 발채도 있는데, 위의 동시조는 평생의 짝인 작대기나 발채가 아닌 지게가 지고 다녀야 하는 등짐, 말 그대로 에게 하는 고백이다.

 

너를 업으니 / 내 가슴이 따뜻하다 // 헛간 구석에 누울 때보다 / 담벼락에 기대어 쉴 때보다 // 가만히/ 등에 엎드려 / 함께 걸어주니까

- 조기호, 「지게가 등짐에게전문(≪한국동시조≫ 2023년 하반기호)

 

짐이 없다면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원망은커녕 함께 걸어주어 따뜻하다고 한다. 지게를 사용하고 나면 사람들의 발에 채이지 않게 헛간 한쪽에 두는데, 지게는 그때도 등을 지키던 등짐의 온기를 그리워하고(헛간 구석에 누울 때보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잠시 담벼락에 기대어 작대기를 받쳐두고 쉴 때조차(담벼락에 기대어 쉴 때보다) 함께 숨을 고르고 먼길을 동행해준(가만히 등에 엎드려 함께 걸어주는) 등짐이 그렇게 따뜻했나보다.

중장의 다소 많아보이는 걸음은 지게의 외로움이 극대화되는 장치라서 무엇 하나 빼고 싶지 않을 만큼 집중을 하게 한다. 동시조의 정형적 외형인 음수율보다 음보율에 담는 자유로운 의미를 살리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왜 가슴이 따뜻하다고 했는지 알고 싶어 자연스레 종장을 향하게 한다.

지게와 등짐은 희망과 고역苦役의 상징이다. 너와 나라는 관계를 지게와 등짐으로 비유하여 더러는 힘이 들어 버리고 싶은 짐스러운 존재일지라도 끝까지 함께 걸을 때 우리가 되어 서로 행복하다. 물리적으로는 에 있지만 가슴이 따뜻하다며 함께 걸어주는 등짐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지게의 고백이 봄날처럼 따뜻하다.

매해 꽃피우고 열매 맺던 한결같던 버릇 때문에 투정도 부릴 수 없고, 평생 한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기막힌 숙명을 의연히 받아들이던 오랜 버릇 때문이었을까. 이제는 나무로서의 본성도 잃고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봄날이지만 지게에게는 등짐과 함께 하는 지금이 아름다운 시절이다.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의 본성도 잃고, 늘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알몸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애꿎은 숙명은 벗어던진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작대기만 있으면 어디든 가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 새로운 숙명인 등짐쯤이야 오히려 가볍다.

가슴 따뜻한 그 지게처럼 발길 닿는대로 기적 같은 봄날을 거닐고 있다. 마치 이 한순간의 거룩함을 위해 세상에 나온 것처럼 이 기적의 봄날 한가운데서 한 걸음씩 천천히 발밤발밤 걸으며 읊어본 봄 동시조 몇 편이, 그 기억이 내년 봄꽃을 기다릴 힘이 되어줄 것을 믿는다.
  • 1) 중국 청대(淸代)에 편찬된 당시(唐詩)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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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주 림보limbo 속으로 ― 최호빈

1. 림보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해가 뜨고 지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예외 없이 반복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 의미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사이, 온전한 구원도 영원한 처벌도 아닌 기이한 경계 위에 놓인 끝모를 유예의 삶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텅 빈 약속에 기대어 자기 몫으로 주어진 무한한 침묵의 무게를 온 힘을 다해 견디며 서서히 소진되어 갈 뿐이다. 림보가 때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원형이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구원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한없이 갈망하는, 의미를 믿을 수 없으면서도 간절히 희구하는 인간의 오래된 마음과 그 기이한 관성을 림보의 심연으로부터 불현듯 마주치게 되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흐르지 않는 시간의 더미 속을 오늘도 무심히 통과해 간다. 림보 안에 갇혀 있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망각하고 부정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금까지의 생과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무한한 반복뿐인 오늘의 심부에 거칠게 쑤셔 넣는다. 어떤 부정도 외면도 더는 되풀이할 수 없을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생의 열기를 창백히 소진시켜 하루치의 안도와 평화를 가까스로 얻어낸다. 그렇게 림보의 일부가 되어 간다. 급류에 휩쓸리듯 림보의 심연에 깊이 좌초된 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허방 속을 무한히 배회하며 림보의 중력에 천천히 소화되어 간다. 이번 최호빈의 시편들은 이 림보의 심연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매혹과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화자들은 공허한 반복뿐인 림보의 시간을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살아냄으로써 정보와 명령의 과잉으로 점철된 현실의 앙상한 구조를 적확하게 짚어내고, 오래도록 잊어온 살아 있다는 일의 경이와 그 선득한 실재를 회복해내고 있었다. 의미의 부재를 좇으면서도 섣불리 상상적 매개에 의지하지 않는 신중한 견고함으로 림보가 뿜어내는 육중한 중력을 존재의 내부로부터 캄캄히 씹어 삼키고 있었다. 림보의 심연 속을 항해하는 그 투명하고도 예리한 시적 섭생의 한 방식을 따라가 본다. 2. 림보의 출입구를 발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그토록 선명했던 목표도 출발점도 림보의 중력과 그 자장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여놓게 되면 모든 것이 한없이 모호하고 흐릿해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림보는 단순히 삶만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온 일체의 가치나 의미까지도, 이에 기대어 뿌리내려온 존재의 모든 시간까지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린다. 림보에 갇힌 삶을 추동하는 유일한 동력은 관성이며, 이는 삶의 고유성과 의미를 모두 말끔하게 지워버린 현재라는 강력한 동일성의 중심을 향해 어떤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나아간다. 최호빈의 시는 그 맹목의 관성을 날카롭게 경계하고 투명하게 응시하되 어떤 확신도 포기도 신중히 경계하는 이중의 절제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성찰적 시가 도달하기 쉬운 환원론적 경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 낸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체온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혈압을 잰다 폐활량도, 골밀도도, 시력도, 심전도도 잰다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맥박을 세고, 혈당을 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기록한다 오늘이 낮이 긴 날인지 밤이 긴 날인지 모르겠지만 매 순간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있다 (중략) 체인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차르르, 차르르 하루가 하루를 굴리고 있다 ―「루틴 버그」 부분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맹목적 “루틴”뿐인 삶의 허망함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사유하고 있는 자신만큼은 이 림보의 중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있다는, 근대적 자각의 형식을 빌린 손쉬운 착각 속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오직 동일한 운동의 “반동”과 그 강도에 기대어 “하루가/하루를 굴리”는 지리멸렬한 삶의 풍경은 명백한 부정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간단히 지워버릴 수 없는 우리 삶의 조건이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며 그 삶이 놓여 있는 지배적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계몽적 맥락에서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림보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그 맹목뿐인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견뎌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호빈의 시는 림보에 갇힌 생의 구체적 세부를 하나하나 주시하고 “기록”해 둠으로써, 그 텅 빈 강박의 형식에 깃들어 있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존재의 깊은 불안과 고독을 읽어낸다. “맥박”, “혈당”, “혈압” 등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수치화한 표백된 추상의 개념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 전부를 내걸고” 살아가는 뒤틀린 허기뿐인 삶의 중심엔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나 없는 곳에서/점멸하는 가로등같이 애써 살아가는 오늘이/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나”나 우리, 혹은 존재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닌데, 다음의 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앞만 보고 달리라고 했다 선생님, 저희는 팔을 흔들며 달릴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궁금한걸요 (중략) 마지막 곡선코스를 돌면서 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한 친구는 쓰러져 있었고, 한 친구는 울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고, 한 친구는 마치 신호를 듣지 못한 듯 출발선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손에 있었던 것은 건네주고 건네받는 릴레이 바통이 아니라 녹초가 될 때까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0의 릴레이」 부분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경주마의 은유는 이미 우리 생의 보편적 형식이 되었고,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이를 내면화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당위적 상식과 표준 내지 윤리적 규율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녹초가 될 때까지” 결코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시대의 “릴레이”란 사실 “릴레이”의 형식을 빌린 단독 경주에 불과하다. 우리가 참고 견뎌온 공동체의 경주가 실은 어떤 것도 서로에게 “건네주”거나 “건네받”지 못하는 “0의 릴레이”였다는 깨달음은 날카롭고 명징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암울하고 비관적이다. 물론 최호빈의 문장은 그와 같은 체념으로 간단히 달아나지 않는다. 비록 영원한 “0의 릴레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릴레이 바통”을 단 한 번도 서로에게 건넨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트랙을 도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이 공통의 운명에 처한 “여전히 달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였음을 아프게 지적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번도 온전히 발설된 적 없는 “우리”가 림보 바깥의 시간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한다면, 다음 절의 시편들은 이를 존재에 대한 질문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전환해내는 시적 사유의 깊이와 그 견고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3. 앞서 다룬 시편들이 림보에 갇힌 삶의 구체적 세부와 그 표면에 비교적 밀착해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다음의 시편들은 성찰적 거리의 매개를 통해 림보의 바깥을 좀더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사유한다. 이에 따라 시의 무대 역시 성격이 조금 달라지는데 이들 시편들에서 림보는 맹목의 관성과 공전(空轉)의 열기로 위태롭게 굴러가는 타성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의미와 비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존재를 향한 열망으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매혹적인 탈경계적 공간으로 변모된다. 그럼에도 이를 림보의 차원에서 일컫는 까닭은, 이 마력의 공간이 언제나 경계와 경계 사이에 놓인 항구적 임시의 공간이며 오직 경계를 넘기 위한 갈망의 깊이만이 그 내부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최호빈의 다음과 같은 시들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림보의 중심에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 림보 너머를 사유하고 매개하려는 존재 탐구의 의지를 드러낸다.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하겠지. 별생각 없는 이마를 쓰다듬고 사라진 건 누굴까.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겹쳐 쥔 채, 조금씩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늘 한 걸음 늦게 도착하는 너의 시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가 거기서 깨어난 적이 있다. 오늘도, 내일도. 네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오랜 꿈을 다시 꾸듯 네게 짖고 싶어. 그게 내 운명이라면, 컹컹. ―「데자뷰」 부분 꿈 저편에서 돌 하나가 또 건너왔다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돌 하나 정말 내 꿈에 누가 또 있는 걸까 세 번째 돌을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 건너오다가 가라앉은 걸까 아니면 그냥 가져간 걸까 그냥 돌아간 걸까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 ―「물수제비」 부분 세계는 “미심쩍은 그림자들”로 대표되는 무의미한 일들의 무한한 반복과 단 하나 강렬한 사건적 의미의 출현이라는 선명한 이분법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적대적 요소들의 대립으로 삶과 세계를 거칠게 이분화하여 환원시키려는 폭력적 의지와는 별 관련이 없는데, 의미의 부재와 결여는 상실된 존재의 시원을 회복하기 위한 인식의 토대이자 판단의 근거일 뿐, 무구한 세계에 죄를 물으려는 핏빛 단죄나 원한의 투사가 아닌 까닭이다. 그의 화자들은 “너”가 “날 선택했”다는 명료한 판단과 전제 위에서, “너의 꿈에 머물러도 될까라고 묻는” 타자의 방문과 그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위에서 ‘너머’의 감각과 그 물성을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만, 이 간절한 열망은 언제나 “네가 하필 왜 날 선택했는지 나는 모른다”라는 질문의 형식으로만,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라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기다림의 언어로만 발화되고 매개된다. 최호빈의 시에서 의미는 그렇게 찾아온다. 림보 바깥으로부터 건너온 환대와 초대의 몸짓들은 오로지 그 너머와의 맹약에 사로잡힌 화자의 절대적 갈망과 의지로 인해, 기다림에의 헌신과 그 오랜 견딤의 밀도로 인해 비로소 고유한 얼굴과 목소리를, 체온과 무게를 갖게 된다. “내가 꿈 저편으로 건너간다”라는 시적 전언은 그러므로 또 하나의 절대적 기다림에 대한 선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꿈속에 ‘나’를 투신하여 나를 지우려는 것도, ‘나’의 두터운 중력으로 꿈의 물성을 구부려 억지로 집어삼키려는 것도 아닌 이 투명한 기다림의 자세가 최호빈 시의 고유한 호흡과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 기다림이 있는 한, ‘너머’는 어디에서나 출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곳도 ‘림보’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다음의 시에서 림보는 세계를 집어삼키는 적대적 미로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 바깥을 상상하고 잉태하는 무수한 ‘너머’들의 자궁이자 그 기미들로 흘러넘치는 경계들의 성소로 현현된다. 조문하러 가는 장례식장은 얼마 전에도 갔던 곳 그전에도 몇 번이나 갔던 곳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아, 맥도날드 모든 불행은 멀리 있다는 듯 웃고 있는 맥 도 날 드 불 고 기 버 거 한참 뒤에 나타난 경찰이 정리를 해봐도 한번 막힌 도로는 쉽게 뚫리지 않고 눈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호루라기 소리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아, 글자 하나하나가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인 것처럼 묵묵히 솟아오르는 M c d o n a l d ’ s ―「이방인-맥도날드 불고기버거」 부분 “맥도날드”는 평소엔 아무런 문제도 의문도 일으키지 않는, 편리하고 무감한 숱한 일상의 장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퇴근길 막힌 도로처럼 꼼짝없이 림보에 갇히고 만 삶의 실재를 차분히 응시하려는 화자의 시선에 인해 일순간 “저세상으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처럼 분리되어 “묵묵히 솟아오”른다. 일상의 허기(“시장기에서 오는 쓸쓸함”)와 존재의 허기(“쓸쓸함에서 오는 시장기”)가 엇갈리며 뒤엉키는 이 기이한 경계적 시간 속에서 화자는 “맥도날드”라는 일상의 공간이 불현듯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무수한 “통로”들로 변신하는 시적 도약의 비일상적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맥도날드” 자체는 물론 어떤 숭고한 의미도 약속도 제공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기이하게 뒤틀린 경계적 공간들은 림보 너머의 삶과 그 선연한 물성들을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받아들이고 예감하게 한다. 이 너머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과 존재론적 갈망이 최호빈 시의 화자들이 ‘림보’의 심연을 헤매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면, 그것이 “너”라는 인칭으로 호명되든 “돌”이라는 존재론적 사유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든, 불길하고 불가해한 실재에의 매개나 교차로로 묘사되든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최호빈의 화자들은 이 ‘너머’에 대한 사유와 갈망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실재들을 림보 속 그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림보’는 의미를 상실한 현대적 삶의 조건이자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 혹은 이미지이기에 앞서, ‘너머’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결과이자 그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림보와 맺고 있는 곤경의 특수성을 얼마쯤 정확히 짚어내 주기도 한다. 우리는 림보 안에서 태어나 ‘너머’를 꿈꾸고 갈망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림보는 우리를 가두지만, 동시에 그 가둠을 통해 깨어나게 한다. 깨어남을 갈망하게 한다. 림보는 우리의 적이면서 자궁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이다. 림보의 바깥은 림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는 림보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감으로써만 림보의 바깥으로 향할 수 있다. 최호빈의 시는 이 ‘림보’의 생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림보 안에서가 아닌 림보 속으로 쓰여진 기나긴 울음의 내력들을 그의 문장들로부터 뜨겁게 읽는다.

월간 현대시 이철주 림보반복기다림너머경계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정원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계간 파란 정원 단속정체성시선타자고맥락저맥락윤혜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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